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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 블루 발라드
Pale blue ballad




왜 젖어 있느냐고 하셨죠? 그야 창 밖으로 어마어마한 폭풍이 불어 닥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망토 한 장에 의지한 채 당신 방까지 달려왔습니다. 창을 세 번 두드리자, 당신은 망설였지만 곧 자비를 베풀어 제게 창을 열어 주셨죠. 진흙발로 바닥을 더럽히는 걸 용서하세요. 비가 휘청대며 내리더군요. 바람에 흔들리듯 연약하게, 술에 흠뻑 취한 시장통 사내들처럼, 그것들은 휘청거리며 내려 저를 때렸습니다. 용서하세요, 쇼너 양. 전 결코 당신 방을 제 몸에서 흐른 이 더러운 물로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달려온 것은 다만…… 아, 상냥하시군요. 아니에요. 지금만 그러시다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언제나 친절한 분이셨죠. 제게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제가 이곳으로 온 첫날 저 교회당 앞에서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를 기억하시나요? 그때도 당신은 제게 자리를 양보해 주겠다며 말을 거셨죠. 상냥한 분. 미안해요. 지금도 제게 자리를 양보해 주시는 군요. 그러나 저는 불 옆에 앉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새로 물을 끓여 차를 타실 필요 또한 없어요. 이 밤은 짧고 이 폭풍은 이내 그칠 테니까. 다만 저를 가엾게 여기신다면 짧은 입맞춤을 허락하세요. 젖은 입술로 당신의 심장에 제 모든 것을 속삭일 수만 있다면, 저는 기꺼이 그리 하였을 거예요. 믿어 주세요, 쇼너 양. 그러나 밤은 참으로 짧고, 이 폭풍은 해가 뜨기도 전에 녹아 영롱한 아침 이슬로만 발자국을 남길 것이기에 저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창을 뛰어넘어, 감히 숙녀의 창을 두드렸던 거예요. 어둠과 비가 함께 저의 부끄러운 모습을 감춰 주리라는 기대로 말입니다.

자, 쇼너 양. 다만 동정심으로, 보잘것없는 행색의 계집애에게 당신이 빵을 나누어 주었을 때와 다르지 않은 연민으로서, 놀라운 친절을 다시 한 번 베풀어 주시겠어요? 오늘이 아니면 내일도 때가 아닐 것이기에. 밤은 짧으니 지금 제 서툰 입맞춤을 받아주신 것처럼 제 이야기에도 귀를 빌려 주세요. 당신의 너그러운 마음을 제게 마지막으로 열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제논에서 왔습니다. 제논 백작령. 여기서는 남서쪽으로 백 마일도 더 떨어진 곳이니, 당신이 잘 모르는 것도 당연합니다. 삼 년쯤 전에 철도가 뚫렸죠. 저희들은 제논을 '남쪽'이라고 부릅니다. 남쪽에 수없이 많은 다른 도시들이 있겠지만, 시골 사람들은 대개 그렇답니다. 살아온 땅이 전부지요. 다른 그 어떤 비옥하고 좋은 땅이 있어도 제논이 남쪽의 전부인 겁니다. 그리고 철도로 이어진 곳은 드벅튼 시인데, '북쪽'이라고 부릅니다. 뭐, 비슷한 이유랍니다.

네, 짐작하시겠지만 저는 제논 백작의 후계자입니다. 여러 가지 조건이 붙어 있지만,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제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면 저는 자연히 제논 백작이 되는 거지요. 어머니는 제가 열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철도가 놓이는 걸 평생의 숙원사업처럼 여겨 오셨기 때문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던 즈음에는 거의 집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제논이 발전하려면 그게 놓여야 한다고 떠드는 걸 몇 번 들었죠. 그게 모든 재화를 싣고 몰려올 거라고 말입니다.
삼 년 전에, 아버지는 숙원을 이루셨습니다.
화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달리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삼 년 사이에 화차는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바꿔 놓았습니다. 실반트라 세임턴의 철도가 등장한 이후로 제논의 양과 염소와 닭은 금세 드벅튼 시로 사라졌고, 사람들도 쉽게 떠나게 됐거든요. 아버지의 말씀대로 재물은 철도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와 주긴 했습니다만, 그건 제논에서 멈추는 대신 더 먼 곳으로 사라져 버렸던 겁니다. 간 것은 오지 않았고 저도 첫 번째 화차와 함께 이곳으로 떠나왔지요. 지난 방학 때 돌아가 보니 제논의 저택은 제가 어린 아이였던 시절보다는 훨씬 우울한 그늘로 뒤덮였더군요. 돌보는 사람이 사라지면 돌벽엔 이끼가 끼고 하다못해 담쟁이 덩굴조차 을씨년스러워 보이게 마련이니까요. 짠 것처럼 벽은 무너져 내리고 식어버린 벽난로에선 벌레들이 알을 깝니다.
저는 잘 압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서쪽 건물이 그런 꼴이 되는 데는 채 일 년도 걸리지 않았으니까 말입니다.

전 담쟁이 저택—그냥, 모두들 그렇게 불렸습니다—에서 특히 연못을 좋아했습니다. 원래는 연못이 아니라 거대한…… 뭐라고 할까요, 만들다가 실패해서 물이 고인 형태로 남아버린 호수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배를 띄우실 요량으로 흙을 퍼내다가 사정이 나빠져서 방치해 버린 거였죠. 비가 내리고 얼음이 얼고 녹고 반복한 탓에 제가 걸어 다닐 쯤엔 훌륭한 연못이 되어 있었습니다. 제 기억 속에선, 그저 연못이었죠. 전 글을 깨칠 무렵부터 그곳에서 혼자 놀았습니다. 여러 새와 동물들이 기웃거렸고, 물은 잔잔했으며, 돌보는 사람이 없어서 숨기에도 좋았죠.
다치기에도 좋고, 그리고…… 죽기에도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도합 일곱 명이 거기서 죽었습니다. 엄연히 백작가의 저택에 속한 연못인데도 성 밖에 사는 재봉사의 딸이 기어이 찾아와 빠져 죽은 적도 있습니다.
제 어머니가 거기에서 죽은 것도, 그러니까 자연스러운 게 아니었을까요.
서쪽 건물에서 목을 매달아 봤자 아버진 발견하지 못하셨을 테니까요. 시녀들이 보고도 '아, 마님께선 원래 조용한 분이시니 그저 잠이 드신 걸거야' 하고 외면할 지도 모르고요. 제가 아는 한, 제 어머니는 그런 종류의 염려에서도 자유로운 분이 못 됐습니다.
그래서 어머닌 연못으로 걸어가, 동이 트기 시작해서 아직 공기가 차갑던 삼월에, 조용히 고개를 물 속에 파묻고 다신 일어나지 않으셨던 겁니다. 그리 깊지도 않은 기슭에서 어머닌 엎어진 채 발견 되었습니다. 반드시 죽겠다는 어떤 고요한 의지마저 느껴지는, 그런 죽음이었습니다.
저는 연못에서 어머니의 사체를 발견했고, 그 이후에도 계속 연못을 찾았습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치러지던 날도 그랬습니다. 절로 눈이 뜨여 바깥을 내다보니 아직 캄캄했습니다. 겨울이라고 하기엔 숨은 잔설이 보잘것없어서 부끄럽고 그렇다고 봄이라 이름 짓기엔 아직 해가 뜨는 게 더딘, 그런 날이었죠. 저는 조용히 외투를 찾아 껴입고는 연못으로 달려갔습니다. 어둠에 싸인 고요한 그 수면 위로 이윽고 가느다란 붉은 빛이 퍼지더니 해가 불쑥 솟아올랐습니다.
그리고 물 속에서, 그녀가 걸어 나왔습니다.
네, 물 속에서.
그렇습니다. 걸어 나왔습니다. 여자가, 저를 향해, 천천히. 그녀의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져서 한 순간 인어처럼 보였죠. 그래요, 인어가 어울렸습니다. 옷을 입지 않은 채였거든요. 둥글고 커다란 젖가슴 위로 그 젖은 머리카락이 비늘처럼 달라붙어 있었고 허리가 몹시 가늘어서 저는 그녀가 틀림없이 인어일 거라고 짐작하곤, 느긋하게 그 이형의 인간을 기다렸습니다.
한데 아랫도리에 두 다리가 달려 있지 뭡니까.
그러므로 그 여자는 인어가 아니었습니다.
인간, 여자였습니다. 그냥 여자. 쇼너 양과 다르지 않은…… 화 내지 말아요. 미안해요. 저는 그저 그녀가 몹시 아름답고, 결코 인어나 다른 생물이 아닌, 숨을 쉬는 여자였다고 말하려는 겁니다.
그녀의 그 날씬한 허리.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쭉 뻗은 한 쌍의 다리. 여자의 가슴에서, 배로,배꼽에서, 허벅지로, 종아리와 흙이 묻은 복숭아뼈 아래까지, 연못의 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저런, 당신은 듣는 것만으로 얼굴을 붉히시는군요. 아니요, 사랑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전 인간이 아니라고 믿었기에...... 화 내지 말아 주세요, 쇼너 양. 제발, 쇼너 양. 저는 어렸습니다. 여자의 알몸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법을 배우지 못했던 열 살짜리 아이였습니다. 정원의 조각상 같은 거라고 여겼을 뿐이에요.

……여자는 저와 같은 붉은 머리였습니다. 티끌 하나 없는 아름다운 뺨은 창백했고 입술은 더 그럴 수 없을 만큼 붉었습니다. 저는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뭇 풀들이 술렁거리는 소리에 감싸여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누구세요?”

묻자, 여자는 그제야 저를 발견한 것처럼—그러나 결코 그럴 리는 없습니다. 저는 그녀가 물 바깥으로 나오기 전부터 눈이 마주쳤다는 걸 알고 있었든요—멈추어 서선 살짝 고개를 숙였습니다.

“안녕. 넌 베르의 아이니?”

베르는 제 아버지, 제논 백작의 애칭입니다. 어머니조차 한 번도 그렇게 부르지 못했건만 그녀는 자연스럽게 입에 올렸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저는 아버지를 ‘베르’라고 부르는 사람을 그때 처음 보았습니다. 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는 생긋 웃었습니다. 물이 뚝뚝 듣는 젖가슴을 출렁거리며 제 앞으로 상반신을 숙이곤 손을 내밀었죠.

“그러면 네가 제논가의 새 도련님이구나. 반가워, 작은 도련님. 나는 진저. 바나 플럼버의 딸이야.”
“전 바나 플럼버가 누군지 몰라요. 그러니 아줌마가 누군지도 몰라요.”
“저런.”

여자는 기이한 초록색 눈동자로 저를 빤히 바라보다가 뺨을 살짝 어루만졌습니다.

“아름다운 제논 도련님. 난 네 아버지의 벗이란다. 그 전에는 네 할아버지의 벗이었지. 알겠니? 난 언제나 제논의 비밀스러운 벗이었지.”
“벗이란 친구라는 거죠? 그리고 비밀스럽다는 건…….”
“그건 도련님이 나에 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는 의미란다. 사랑스러운 제논 도련님, 내 미래의 비밀스러운 벗. 이름이 뭐지?”

여자, 진저는 제 뺨에 가볍게 입맞추었습니다. 붉은 입술은 차디찼고 저는 그녀가 키스한 자리가 그대로 얼어붙어 죽어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친애하는 쇼너 양, 당신이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알아요. 네, 뭔가가 잘못됐지요. 저도 압니다. 지금은 비로소 압니다. 그러나 그땐 잘 알지 못했어요.
저보다 그녀가 빨리 알아차렸을 겁니다.
그러니, 제가 그녀의 말에 이렇게 답했을 때,

“제 이름은 마리안나예요.”

그 순간 진저의 초록색 눈동자는 놀라움으로 빛났습니다.

“어머, 세상에. 당신은 제논의 아들이 아니었어! 넌 계집애구나. 아, 세상에. 베르의 딸이었다니.”

저는 쭉 사내아이 옷을 입고 사내처럼 짧은 머리모양을 하고 자랐습니다. 진청색 해군 장교 옷을 제 몸에 맞추어 재단한 옷으로, 어머니의 큰 오라버님이 젊었을 적 입던 것이었지요. 짐작하실 지 모르겠지만, 제 어머니께선 사내애를 낳고 싶어 하셨습니다. 영지를 가진 많은 귀족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적법한, 피가 섞인, 모든 부와 명예를 지켜나갈 아이를 바라셨지요. 그러나 제논의 아이는 저 혼자로, 결코 다른 애가 태어나는 일은 없었습니다.

제논의 피가 그렇지 뭐.

오래된 시녀들이 그렇게 수군거렸죠. 제논의 아이는 언제나 하나.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그 그 전대의 후계자들도 모두 그랬습니다. 제논 백작은 언제나 단 한 명의 아이만을 낳고 그 아이가 적당히 자란 후에는 약속한 것처럼 죽어버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전 계집애였죠. 상속법은 묘한 것이라 저는 틀림없이 제논의 딸이었으며 그 유일한 후계자였지만 제 아이는 상속자가 아닙니다. 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저는 제논 백작이 되고 그 영지를 소유하게 되겠지만, 제가 죽어버린 후에 제논은 누구의 것도 아니게 되는 겁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그 선대도 모두 독자였으니 사내의 혈통은 더 찾을 수 없고, 제 아이는 더 이상 제논이 아닐 테니까요.
어머니는 그 현실을 괴롭게 여기셨습니다. 어떻게든 사내애를 얻고 싶어 말년엔 여러 기행을 저지르기도 하셨지요. 제가 사내애 옷을 입고 자란 건 말하자면 그 기행의 일종, 아니, 기행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만큼 소박한 기도였습니다.

“제논의 따님. 네가 자라면 나는 이제 누구와 벗해야 하지? 나는 제논을 떠날 수 없어. 언제나 제논 곁에서 살아왔단다.”

저는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습니다.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쓰다듬어 보았죠. 다 마르지 않은 그 붉은 머리카락이 제 손등을 스쳤습니다.

“제가 벗이 되어 드릴게요. 비밀스러운 벗이요.”
“네가? 하지만 너는…… 내 말의 의미를 모를 거야.”

진저는 묘한 미소와 함께 그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연못 근처 수풀에 던져 놓았던 검은 의복을 재빨리 갖춰 입자, 그녀는 더 이상 인어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름다운, 하지만 도발적인, 상복을 걸친 미인이 거기 서 있었죠. 진저는 제 이마에 다시 입맞추고는 사라졌습니다.
물론, 저는 그녀에 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쇼너 양, 당신이 제 비밀의 첫 번째 공유자인 겁니다.

저는 그녀를 장례식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손님들 사이에 선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죠. 아버지는 그녀와 결코 대화하지 않았지만, 저는 아버지의 시선이 몇 번 그녀를 찾아 돌아가는 것을 눈치 챘습니다. 같은 것을 보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그녀는…….
그녀는 제논의 비밀스러운 친구였죠. 저는 결코 그녀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한동안은요. 그녀는 밤 늦은 시간 아버지의 침실에서, 이른 아침 서재에서, 그리고 창 너머 아무도 살지 않는 동쪽 건물의 다락에서 쥐들과 함께 기어 다녔을 지도 모릅니다만 결코 다시 연못으로는 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녀의 꿈을 꾸었습니다. 그녀는 축축한 지하실 입구에서 저를 향해 손짓했고, 저는 횃불을 든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습니다. 꿈은 언제나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끝났습니다. 어둠은 눈에 익지 않았고 밤은 어린 제 깜냥이 익숙하지 않은 무언가를 들여다보기엔 너무나 짧았거든요. 저는, 언제나, 이른 아침 눈을 떴고 땀에 젖은 손바닥을 펼쳐 아물거리는 천장과 제 눈 사이를 가렸습니다.

삼 년 전, 첫 번째 화차가 달리기로 약속된 날 저는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개통식 때문에 수많은 손님들이 제논으로 찾아와 저택이 오랜만에 흥청거린 날이었죠. 재정 형편은 그때 이미 좋다고 하기 어려운 수준이었기 때문에, 고용인들은 바삐 움직이면서도 불안한 표정을 완전히 감추지 못했습니다. 집사장은 이따금 제게 와서 아버지의 낭만적인 성격에 관해 불만을 털어놓곤 했답니다. 겨우 열 다섯 살짜리 계집애에게 말이지요.

이른 새벽, 저는 지하실로 내려갔습니다. 그 무렵 연못에 고인 물은 썩기 시작했고 모두들 그 연못을 없애 버리거나 관개 시설을 새로 해야만 한다고 아버지께 고해 올렸습니다. 물론, 돈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철도가 놓이면 모든 게 해결될 것처럼 몰두해 계셨고 제게는 그 모습이 성가신 현실로부터, 혹은 너덜거리는 잔고로부터 도망치는 한 방편처럼 보이곤 했습니다.
연못 썩은 냄새 때문에 잠에서 깬 저는 진저를 만난 후로 몇 번이나 꾸던 꿈을 문득 떠올렸습니다. 연못의 그 물 냄새 때문이겠지요. 저는 어떤 충동에 끌려 방을 나섰고, 역시 부활절 전의 서늘한 아침 공기에 어깨를 움츠린 채 지하실로 달려갔습니다. 아래로 아래로 걸음을 옮기다 지하실 문 앞에서 망설였죠. 안쪽에는 아무도 없을 터였습니다. 재어 놓은 식료품들과 쓰지 않는 가구들, 망가진 농기구 따위가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을 뿐, 비밀스러운 방 같은 건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그건 그저 꿈에 불과해.

저는 중얼거렸습니다.
그리고 문을 열었습니다. 누군가 있기를 바랐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아무 것도 없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상관 없겠지요. 문은 열렸고, 날을 밝았고, 눅눅한 어둠과 습기 사이에서 진저의 붉은 머리는 저 심장을 태울 듯이 화려했습니다.
그뿐입니다.
진저, 그녀는 거기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는 곤히 잠들어 계셨죠. 흐트러진 옷과 젖은 콧수염이 아니었더라도 저는 지하실 가득한 술 냄새 덕분에 그가 취했다는 걸 알아챘습니다. 진저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똑바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탁자 위에 놓인 술병과 여러 개의 잔들, 그리고 그 아래 떨어져 내리는 붉은…… 아주 새빨간, 피.
무언가가 거기 있었습니다.
붉고 뜨거운 것.
보는 것만으로도 그게 따뜻하다는 걸 알 수 있는 어떤 것이.
심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생물의 심장. 다음 순간,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입에 올릴 수 없었습니다. 탁자 위의 물질. 피. 진저의 붉은 입가. 저는 등불을 든 채로 뒷걸음질 쳤습니다.

“마리안나.”

진저가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달콤한 음색에 저는 멈추어 섰습니다. 그녀의 부름에 언제나 멈출 수밖에 없었을 제 모든 선조들처럼. 그녀는 다가왔고 피에 젖은 손을 뻗어 제 뺨을 어루만졌습니다.

“마리안나.”

푸른 눈동자에 사로잡힌 듯 올려다 보자, 진저는 천천히 자신의 입술을 핥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아이를 낳고 싶어.”

바로 다음 순간 진저는 낭패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아, 그녀는 언제나 제논의 욕망을 읽었습니다. 비추어선 안될 것을 꺼내 비추는 거울처럼. 그녀가 어떻게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벗이었는지 저는 비로소 이해했습니다. 그들이 왜 찬란한 젊은 생을 그녀에게 기꺼이 바쳐 왔는지도요. 그녀는 언제나 지독한 사랑의 행위를 필요로 했습니다. 불길처럼 욕망하고 상대의 피가 그녀의 뱃속을 데워, 화차같이 그녀를 달리게 해야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 티없이 아름다운 뺨과 상하지 않는 젖가슴, 늘 젖어 붉은 혀와 입술까지 모두 그 욕망을 위해 거기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논의 욕망.
아니, 어쩌면 그마저도 진저의 목숨을 위해 있는 것이었을까요. 그녀를 위해 제논은 욕망하고 그녀를 위해 제논은 피 흘리는 생물들 틈에서 위태로이 대를 이어 왔던 것일까요.

네 아이를 가지고 싶어, 베르.

진저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습니다. 제가 마리안나 제논이기 전에, 아직 홀로였을 제 아버지가 들었을 그 달콤한 목소리를 저는 틀림없이 들었습니다. 피가 뜨거워질 때 심장은 절로 뛸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녀는 피를 욕망하고 제논은 그녀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바랐습니다.
쇼너 양, 저는 제논입니다.
저도 제논이었던 겁니다.

“마리안나, 나는…….”

진저는 당혹스러운 듯 제게서 한 걸음 물러났습니다. 언제나 제논의 아이는 사내애였고 그들은 모두 아름다운 진저를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충실하게 진저를 위해 모든 것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게 무엇이었건. 들여우의 심장이건 아니면 그들 자신의 심장을 흉내 낸 다른 누구의 피 묻은 죽음이건.
그러나 저는 여자아이였지요.
다른 제논은 이제 없었습니다. 진저는 잠든 아버지를 한 번 돌아 보았고, 저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쇼너 양, 저는 그 날로 제논을 떠나 이 학교에 들어왔습니다. 제논으로 들어왔던 첫 번째 화차를 타고 드벅튼 시까지 도착한 후, 마차를 몇 번이나 갈아타야 했지요. 겨우 이름만 아는 계집애가 가방 하나를 안고 찾아 들어 ‘소개장’을 부탁한 덕분에, 블레이튼 공작께서는 몹시 놀라셨을 겁니다. 쇼너 양, 당신의 대부이시기도 한 그 분 말입니다.
네, 알아요. 처음 당신이 제게 말을 건넸던 건 당신의 대부께서 굳이 저를 잘 부탁한다며 서신을 보내신 덕분이었지요. 그분은 당신처럼 친절한 분이세요.

날이 밝는군요.
비가 그치기 시작했습니다.
보세요, 제 말대로 밤은 짧고 폭풍은 아침이 오기 전에 그치잖아요? 곧 아침 종이 울리고 당신은 저 아름다운 제복을 걸친 후 아침 기도를 드리러 나가실 테지요. 저는 그 전에 떠나겠습니다. 다시 창을 넘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도록.
아뇨, 쇼너 양. 유감스럽게도 아닙니다.
저는 아침 기도 시간에 당신 곁에 앉지 못합니다. 식사 시간에도, 마담 코이젯의 교양 시간에도, 저는 다시 당신과 몰래 손을 잡을 수 없습니다.
저는 떠납니다.
이곳을.
포레 여학교를.
편백나무 숲이 펼쳐진 저 북쪽 산을. 아니, 이 ‘북쪽’을 떠나려고 합니다.

지난 밤, 저는 그녀를 다시 만났습니다.
진저를.
붉은 머리의 그 아름다운 여자를. 늙지 않고 죽지 않고 제논의 피와 함께 살아온 지하실의 악몽을. 그녀는 모든 다른 악몽들이 그렇듯 제 창으로 스며들었습니다. 폭풍은 그녀와 함께 저 남쪽에서부터 불어온 거였을 지도 모르죠. 다 익어 불어버린 포도주 냄새와 함께 그녀는 들이닥쳤고, 잠자는 제 귀에 들큼한 바람을 불어 넣었습니다.
저는 눈을 떴습니다.
반복되는 지하실의 그 피와 약동하는 심장의 온기 속에서.

“안녕, 마리안나.”

목까지 채운 잠옷의 가장 위쪽 단추로, 그녀는 손을 뻗어 두 손으로 제 목을 감쌌습니다.

“마리. 어린 제논, 너는 무엇을 원하니?”
“당신의 비밀스러운 벗이 되어 드리겠어요. 진저. 당신이 그것을 원한다면.”
“나는 제논 없이 살아갈 수 없어. 그러나 나는 네게 무엇도 줄 수 없지.”
“당신은 제 아버지에게도 무엇도 주지 못했어요.”

당신의 아이를 낳고 싶어, 베르.
제 피 속을 떠도는 그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는 제 목을 감싼 그녀의 손을 감싸고, 천천히 말했습니다. 꿈 꿔 왔던 말을. 제논에게 정해져 있을 그 말을.

“저는 아버지와 같은 것을 원해요.”

진저의 차가운 손가락이 다섯 개의 단추를 풀었고, 그녀의 흰 손바닥이 꽃잎처럼 제 가슴을 쓸어 올렸습니다. 장미꽃의 가시 같은 이가 내 목덜미를 물었습니다. 목덜미에서 꽃이 자라 피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빙글빙글 도는 피의 흐름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피로 이루어진 짐승이었지요. 실크와 레이스로 뒤덮인, 이와 손톱을 가진 짐승. 갈기를 쓰다듬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아귀에 쥐고, 저는 희열을 느꼈습니다.
뱃속 가득 그녀의 것이 되고 싶었어요. 그녀의 몸 속에서 겨우 무언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닌.
제논이 아닌.
피와,
펄떡거리는 심장.
불꽃이 되어,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되어, 그녀의 뱃속을 모조리 태울 수만 있다면…….

쇼너 양.
당신이 틀렸습니다. 저는 결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그녀가 아이를 가지기를 바랐어요. 새 아이. 피가 도는 새 목숨. 그녀가 낳아 뜯어 먹을 수 있을 약동하는 생명 말입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새 피를 바랐고 저는 피로써 그녀의 뱃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신이 틀렸습니다.
당신이 가장행렬의 그 밤에 제 고백을 거절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너그러운 작별의 입맞춤이 당신 자신이 말씀하시듯 다만 친애하는 벗을 위한 동정에 불과할 리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당신의 깨끗한 마음을 사랑하듯 당신 자신이 알지 못할 악몽의 맨 얼굴을 저는 바랐습니다. 제가, 혹은 당신이, 아이를 가지기를 은밀히 욕망했습니다.
낳지 못할 아이를.
비밀스러운 벗의 제단에 올려 바닥으로 피를 뚝뚝 떨어뜨리게 하여, 그 심장에 친히 진저의 입맞춤을 받았을 어린 생명을 꿈꿨습니다.
밤은 이토록이나 짧고 폭풍은 죽어 그 재도 남기지 않는군요. 작별의 입맞춤을, 다시 한 번, 사랑하는 쇼너 양. 당신이 틀렸습니다. 당신이 성처녀처럼 웃으며 제게 걸어준 목걸이도, 속삭여준 수 많은 이야기도, 저를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삼 년 전 당신이 제게 말을 걸어준 순간부터 가장행렬의 밤 가면 아래 찬 입술을 훔쳤을 때까지, 그리고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똑 같은 저 자신입니다.
그러니 안녕히, 쇼너 양.
저는 제논으로 돌아갑니다. 진저는 저를 새 제논으로 받아 들였고, 저는 그녀에게 피를 흘릴 것입니다. 저는 죽지 않습니다. 푸른 입술로, 쇼너 양, 저는 살아 남습니다.
안녕히, 안녕히, 안녕히. 사랑하는 쇼너 양. 밤은 이토록 짧습니다.


+++


마리안나 제논이 건강을 이유로 귀향한 지 두 달 후에, 포레 여학교로 그녀 자신의 부고가 날아들었다.
사인은 폐렴.
추도예배 동안 말 없이 앉아 있던 엘리제 쇼너는 바깥으로 걸어 나오다 문득 울음을 터뜨렸고, 학우들이 달래기 위해 곁으로 다가가자 조용히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당신 역시 틀렸던 걸지도 몰라.”

삼 년 전, 엘리제 쇼너는 마리안나 제논에게 손을 내밀었다.
늘씬한 키에 소년처럼 짧은 머리카락을 한 그녀는 엘리제 쇼너의 눈에 매우 아름다운 여성으로 보였다. 심장에 처음 피가 돌기 시작한 것처럼 맥박이 빨라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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