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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냥 화적(花賊)

2013.09.30 21:1409.30

화적(花賊)




 계절 깊은 산중에도 꽃은 피고 혹 지나는 구름이 비 뿌렸다. 절 마당을 쓸던 불목하니들이 저희끼리 수군거리다 뒤를 휘이 돌아보고 그늘 쪽으로 사라졌다. 이글이글 타는 태양이었다. 내리느니 뙤약볕이었다. 헌오는 깨끗한 민둥머리에 송알송알 땀 맺히는 걸 남 안 보는 새 가사 자락으로 슬쩍 닦아 냈다.

 "봄답지 않게, 원, 날씨 한 번 지랄맞기도 하지."

 그렇게 스님답지 않은 말투로 궁시렁거리며 헌오는 절 바깥으로 슬쩍 발을 옮겼다. 사람 잘 아니 오는 자리에 꼭 이 즈음 기다려 숨겨 놓은 게 있는 탓이다. 사람이 잘 오지 않는 데다 그걸 숨겨 애지중지하느라 아주 하루에도 열 두 번은 애가 끊어졌으나 그래도 헌오는 콧노래가 나왔다. 큰스님이나 윗방 스님들이 보면 저거 미친 놈 아니냐고 혀를 차며 흰 눈을 뜰 지도 모를 일이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이 순간 헌오에게는 다른 건 중요하지가 않았다.

 "뉘시우?"

 아무도 없어야 할 자리에 사람 그림자가 있다. 헌오는 이맛살이 절로 찌푸려져 저 듣기에도 퉁명스런 목소리를 냈다. 사람은 천천히 돌아 보더니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혼자 피울 꽃이 아니다 싶어 의아하게 여기던 참입니다. 과연 스님께서 돌보고 계셨군요."

 "그…… 어, 어험. 뉘냐고 여쭈었습니다."

 사내는 눈처럼 흰 얼굴에 단정한 이목구비를 하고 있었다. 깨끗하게 올려 묶어 관을 쓴 모양이며 여며 입은 옷매무새가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걸 보면 명문가에서 귀히 자란 도련님인 지도 몰랐다. 예사 사람이 아닌 모양이라고 헌오는 생각했다. 저야 기껏 절에서도 막냇뻘인 중놈에 불과하니 괜히 선비를 홀대하여 흉한 일 당할 거야 없다 싶어 점잖은 척 뒷짐을 졌더니 사내는 웃으며 답했다.

 "지나는 걸음에 향에 끌려 멈췄나이다. 괜히 자랑할 만한 이름은 아니옵고 다만 순평에서 밥술이나 뜨는 집안 골칫덩이올습니다."

 "그, 그렇구만요. 그 꽃은…… 그러니까…… 어, 어험. 불자의 도리로 산 걸 죽여서야 도리가 아니기로 짬을 내 돌본 것이니 괴이하게 여기지 마십쇼."

 "그러하시겠지요. 허나 대단한 정성이십니다. 손이 많이 가는 나무일텐데."

 사내의 도포 자락 뒤로 소담하니 서향화가 꽃망울을 피우고 있었다. 헌오는 고대하던 꽃을 보자 울컥 눈물이 다 솟아 저도 모르게 벙싯벙싯 웃었다. 손이 많이 가는 꽃이고 말고. 저 놈의 꽃이 본디 이 땅이 원산지도 아닌 데다 선비님네들만 고상하게 기르시란 건지 태생 자체가 괜히 까다로웠다. 손 많이 가는 건 어디 갓 태어난 어린애에 비길 만 하니 그만하면 말 다 했지. 볕을 너무 받아도 죽고 습기 어린 흙에 오래 앉았어도 죽는다고 했다. 비료를 많이 줘도 탈이 나 죽고 인분 따위 더러운 게 곁에 있어도 폭삭 비틀어져 버린단다. 하여 맑은 물만 때 맞춰 적당히 줘야지 소담하니 꽃망울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야 불자의 도리루다가……."

 "하지만 인연이라면 인연올습니다. 제가 이 고장에 들른 것이 서향 아씨 혼례를 치하하기 위함이온데 당도하자 마자 서향화를 만나 뵈옵게 되니 말입니다."

 "……그, 그러십니까요."

 헌오는 움찔 시선을 피했다. 얄미운 이 사내가 눈치 빠르다면야 헌오가 왜 굳이 서향화를 가려다 심어 길렀는지도 알 지 모를 일이라 그는 꽤 긴장하였다. 사내는 알 듯 모를듯한 미소를 짓더니 몇 걸음 꽃에서 비켜 났다.

 "서향화는 화적(花賊)이라고도 합지요. 한 송이만 피어도 그 향내가 주위를 압도하니 그런 별칭이 붙었다 하더이다. 예서 향을 맡자니 과연 허언 아님을 알겠습니다."

 꽃 도적.

 사람 마음 자리를 두어 꽃이라 한다면 그걸 흔들어 꺾어 버리는 걸 두고 도적이라 하여도 이상할 일 아니겠다. 헌오는 서향 아씨를 처음 봤던 적 기억을 새삼 떠올리며 코 끝을 어루만졌다. 머리 깎고 중이 된 몸으로 여염 여인을 욕정한다는 것부터가 벼락 맞을 소리인 건 물론이려니와 서향 아씨라면 이 근방 수백 리에 이름 높은 집안 따님이시다. 몸이 약해 불공을 드린답시고 그 댁 안방 마님이 몰래 동반해 온 것을 먼 발치서 훔쳐 본 것이 다이지만 헌오 짧은 소견으로도 저만 미모면 하늘 선녀래도 우습겠다 싶을 만큼 대단한 미인이기도 했다.

 언감생심.

 꿈에서라도 감히 눈 마주칠 수 없는 아씨셨다. 허나 불자에, 신분이 어떻고 하는 현실적인 문제를 머리로 짚어 백만 번 생각한들 마음이 그예 따르는 것 아니었다. 하기사 마음 휘둘러 정하는 일이 그리 쉽다면야 불공은 무엇하러 드리겠는가.

 "스님 아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 조신이라는 스님께옵서 아리따운 아가씨를 사모한 적이 있다 합니다."

 "그 이야기라면야 저자에 나다니는 어린 아이들도 아는 이야깁지요. 선비님께서 갑자기 그런 이야기는 왜 꺼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요."

 조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중 하나가 있었는데 어느 귀한 집 아가씨를 연모했단다. 하여 목탁을 한 억만 번은 두드리고 찬 불당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삼일 밤낮 머릴 문질러 봤는데 가슴 한 가운데 턱하고 자리 잡은 아가씨 얼굴 하나가 영 지워지질 않았단다. 세간에서 하는 말로 십 년 불공 나무아미타불이라더니 꼭 그 짝이 난 셈이었다. 하여 조신이 울며 관음보살께 빌었더니 어둔 기둥 쪽에서 새초롬한 그 아씨 자태를 드러내시더란다. 섣달그믐 구름 사이로 난데없이 만월이 고개 내미신들 그보다 아름답고 놀라울까. 조신 놈이 거진 까무러치며 아가씨를 향해 내달았는데 아가씨 하시는 말씀, ‘저도 스님을 몰래 사모하였어요. 저와 함께 멀리 떠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아이 낳고 땅 일구며 살아요.’

 조신이 눈물콧물 흘려 가면서 아가씰 모시고 가진 것 모다 내 버린 건 좋았는데, 맨몸뚱아리 둘 가지고 두 사람이 세상에 내던져지고 보니 그게 다시 못할 짓이더란다. 사는 게 만만한 게 아닌걸 몰랐던 귀한 댁 아가씨에 물정 어두운 중 한 명이 가진 돈 한푼 없이 살아 보려니 그것 쉬웠다면 더 이상했을 일. 하여 마흔 해쯤 지나고 나니 얻느니 빚이요 병이더란다. 돌이켜보니 세월 무상하고 귀여운 자식은 하나 둘 가난 탓에 여린 목숨이 지고 말았는데 언 땅을 파 아이 하날 묻고 나니 많이 늙어 버린 아가씨가 울며 말씀하는 것이었다.

 [홍안도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버들가지요 한 때의 꽃 같은 웃음도 결국 봄 비 같은 것이니 진세의 삶이란 과연 먼지 같소이다. 가약이란 글자 그대로 아름다운 약속인 줄로 믿었으나 그도 혈기 있던 시절의 한 때 감정일 뿐, 지란처럼 고운 향내 풍기며 영구한 것이 과연 인간 사이에 있겠나이까. 연정마저 풀 위의 이슬방울 같아 보기 기꺼운 바 한 때요 해가 뜨면 이지러지는 것에 불과하오니 이제 몸이 늙고 배가 고픈 때에 닥쳐 그대와 나는 서로 짐일 뿐입니다.]

 하여 두 사람 헤어져 걷는데 이때 조신이 그 모든 것 꿈임을 깨우쳐 크게 탄식 하였다. 그로하여 세상 일에 뜻이 없어져, 조신이 관음보살의 큰 뜻에 절하고 꿈에 아이 묻은 곳에서 불상을 얻으니 그로부터 더욱 덕을 쌓게 되었다 한다.

 "스님께서는 어떠십니까?"

 "어떻고 자시고…… 이거, 선비님께서 참 짓궂으시우. 나 같은 땡중이야 그런 이야기 있다 하면 그런 이야기 있는가보다 하지 그걸 두어 글월 읊는 거야 선비님네나 실컷 하십쇼."

 "그러십니까. 허면 실례하겠습니다. 서향화 구경 잘 하고 갑니다."

 "실례하시우."

 사내는 끝까지 예의 바른 웃음을 지우지 않더니 허위허위 기슭을 걸어 길 쪽으로 멀어졌다. 옥색 도포 자락이 오래도록 헌오의 눈에 잔상을 남겼다. 헌오는 주위가 조용해지자 킁킁 코를 벌름거려 서향화 향을 맡고 그 곁에 주저 앉았다. 적당히 등을 풀 위에 대고 눕자 가지 뻗은 나무 사이로 봄 하늘이 보드라운 빛으로 흘러 갔다. 팔베개를 하고 시선을 흘끔 옮기면 서향화가 기다렸다는 듯 소담한 꽃송이를 자랑하며 바람에 가만가만 잎을 흔들었다. 귤처럼 두터운 이파리는 푸르고 꽃은 딸기색에 자색이 섞인 빛깔인데 속은 희어 더욱 고왔다. 향이 짚은 거야 다시 말할 것도 없지만 그게 잎에서 나는지 꽃에서 나는지 헌오는 영 알 수가 없었다.

 "나라면."

 헌오는 꽃에게 말을 걸듯이 입을 열었다.

 "나라면 아니 그럴 것이야."

 그 조신이라는 중 놈은 나약해 빠져설랑 아가씨와 더불어 수십 해를 살고도 옳다구나 정을 떼어 버렸는가 몰라도 나라면, 이 헌오라면 그리하진 않을 것이다. 헌오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너라면 이 마음 알아주지 않겠는가, 너만큼 향기 풍기는 그 아씨 연모하는 마음일랑 위로해 주려는가.

 서향화는 헌오에게 화답하듯 가만가만 꽃송이를 흔들 뿐이었다.

 "스님."

 발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구슬 구르듯 아리따운 목소리가 들려 헌오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뒤를 돌아다보니 이건 꿈인가 생시인가 정신이 다 몽롱할 일이 펼쳐져 있었다. 아까 그 선비와 더불어 바로 그 서향 아씨가 얌전히 서 계시지 않은가.

 "연 도련님께옵서 스님 이야길 아니 해 주셨다면 저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다른 사내에게 출가할 뻔 하지 않았습니까. 매정하십니다, 스님."

 "아, 아, 아…… 아씨께서 여길 어떻게?"

 "저도 오래 전 스님 뵈었을 적부터 연모하고 있었사옵니다. 허나 부처님께 귀의하신 몸이니 저 같은 인간 계집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으실 거라 생각하여 상심이 깊어졌기로…… 흑."

 발그레한 뺨을 구르는 눈물 방울은 모르긴 몰라도 서향화 따위보다 백배 천 배는 향기가 날 것 같았다. 헌오는 오금이 저려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였다. 거기다 그 고마운 선비는 짐까지 한 짐 챙겨 내 주면서 두 사람을 보내 주기까지 한다.

 "이 은혜 아니 잊겠습니다요."

 "귀한 꽃을 애지중지 가꿔 내는 분이신즉 잘 사시리라 믿습니다."

 선비는 손을 흔들어 두 사람을 전송했다.

 헌오가 발길 닿는 대로 걸음을 옮겨 밭 뙈기 좀 얻을만한 고장에 젖어 들고 보니 심신은 고단했으되 가슴 앓고 또 앓게 하던 아씨와 함께이니 마음만은 도원향이었다. 초가 얹은 좁은 방 한 칸 얻을 신세가 안 돼 부잣집 행랑부터 얻어 시작했으나 바지런을 떨며 일을 하자니 손발은 갈라져 몰골이 상할지언정 먹고 살 만큼은 되었다.

 여러 해 지나자 어느 사인가 아이가 줄줄이 달린 가장이 되었고 부치던 밭은 가물거나 여유롭거나를 반복하며 세월을 흘려 보냈다. 고단한 나날이었다. 좋은 일이 있는가 하면 나쁜 일이 있고, 세월 흐르는 새 아이들은 때로 병들고 때로 아름다웠다. 귀여운 목소리로 재재거리다 세상에 다시 없을 악다구니를 써대기도 하고 간난한 방 안이 더위며 벌레 따위로 가득한가 싶으면 한 사발 냉수로도 그저 무릉이곤 하였다. 그렇게 세월이 갔다.

 좋은 일 있으나 나쁜 일 반드시 닥치니 필연코 인생은 허망하다고 조신은 말하려 했던가. 세월 흐르면 반드시 나이 들고 병마 깃들거나 죽음을 근심케 되는 일인즉 어찌 한 평생 내내 백화만발한 봄 정원 같을 수만 있으랴. 누구나 그렇게 산다. 누구나, 더욱 불행한 일 겪어도 그것이 지극한 현실일 뿐 꿈조차 아님을 뼈 저리게 깨달아 가며 살아 간다.

 차라리 꿈이기를.

 차라리 꿈에서나마 장래의 일 보아 속세의 정 버리기를 빌며 사람은 산다.

 헌오는 어느새 환갑을 내다 보는 나이가 되어 제 손을 내려다 보았다. 일생 모시던 부잣집이 갑작스런 화를 맞아, 주인 내외는 죽고 어린 도령 하나는 간 데 없어져 그저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만 거처를 잃은 날이었다. 고래등 같이 기세 당당한 대들보가 적이 놓은 화염에 휩싸인 걸 헌오는 넋 놓고 바라 보았다. 머리는 풀어 헤쳤고 서향 아씨, 일생 같이 한 마누라는 속고쟁이만 간신히 차려 입은 채였다. 늘어진 젖가슴을 덕지덕지 기운 홑이불로 대충 감싸고는 손자 둘을 품에 한껏 안았다. 마누라는 눈꼽이 낀, 아직 잠 덜 깬 얼굴로도 당장 살 길을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일단은 길을 떠나고 보드라고. 자식 새끼들 두루 돌다 보믄 어떻게든 수가 나지 않겠어? 지 새낄 맡긴 눔은 적어두 뭔 수를 내겄제."

 헌오는 괜히 당당한 목소리를 내고는 앞장 서 걸었다. 모든 것이 타 버렸고 몸도 성하지 않았으며 계절은 하필 채 입춘을 지나지 못해 부는 바람이 살을 파고 들었다. 두 다리가 부르트도록 걸어 차례차례 자식을 찾아 보았으나 형편 넉넉한 집은 어디에도 없어 헌오는 서향 아씨와 더불어 길가에 멍하니 앉았다.

 걱정말라고, 헌오는 말할 참이었다. 마른 입술을 떼 내어 지친 낯을 한 서향 아씨에게. 더 이상 아씨가 아닌, 그저 시골 촌부에 불과해 보이는 그 여자의 살내음을 맡으며 반드시 당신을 지켜 보이겠다고 말할 참이었다. 허나 쓸쓸한 웃음을 지으며 서향 아씨가 고개를 드는 순간, 헌오는 다른 말을 꺼냈다.

 "예전 같지가 않구려. 이대로는 여름 오기 전에 죄 죽고 말겠어."

 "그렇군요. 길에 나앉아 죽을 순 없구, 어린 애들은 지 부모헌티 넘겼응께 우리들만 어찌 좀 몸뚱일 건사해 보아야지요."

 주름 많은 뺨은 더 이상 산 철쭉처럼 발그스름하게 빛나지 않았다. 머리카락은 결코 삼단처럼 드리워 눈 부시게 할 수 없고 몸뚱아리는 뼈가 드러나 빈약하였다. 헌오는 지난 세월을 헤아렸다. 문득 부는 바람이 뼈 사이를 아리게 만들었다. 그리 시린 바람도 아니건만 갈비뼈 있는 데가 뻥 뚫린 양 허허로워 주책 맞게 눈물을 어릴 뻔 하였다.

 "사는 게 보통 일이 아니구먼."

 "보통 일 아니지요."

 차라리 꿈이기를 빌며, 혹은 더 이상 나쁜 일 없기를 끝 없이 빌며, 그저 하루 하루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이 세상에. 하늘 이고 땅 디디고 선하디 선하게 살아 보아도 허리는 휘고 가슴 답답한 채 일생 마치는 사람 있다.

 삶이란 괴롭고 아픈 일, 죽음을 바라는 이 없건만 죽음만이 안식 되는 운명 타고 나 고스란히 버티어 내는 이가 얼마든지 있는 법이다. 헌오는 수십 해를 살아 버티며 그걸 배웠다고 생각했다. 괴롭다고 하여, 이름 남을 리 없다고 하여 가치 없는 삶은 아닐 거라고. 조신이란 작자가 깨친 진리가 무엇이든 자신은 다르리라고. 개의치 않으리라고. 허나 삐그덕삐그덕 돌쩌귀 망가진 문처럼 움직이는 자신의 육신이 새삼스러워지는 찰나 헌오는 무상함에 몸을 떨었다.

 "여보."

 서향 아씨가 그런 헌오의 마음 아는지 문득 불렀다. 헌오는 돌아서지 않았다. 눈물을 참느라 입술 악문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여보, 우리 이만 헤어집시다. 산 사람이니 우야든동 입에 풀칠은 해야지 않어요? 둘 보담은 하나가 가벼운 것인즉 당신두 괜히 나 달구 다니느라 애 먹지 마시고 어디 부잣집 행랑이라도 얻어 보아요, 네? 저두 어느 집 켠에서 바늘이나 쥐고 어찌 먹고 살 거릴 찾아 봐야할 테니."

 "하지만 당신 눈도 침침하믄서 바늘 귀에 실이나 꿰겠어? 내가 설마 당신 하나……."

 "여보."

 부드러운, 그러나 지친 목소리로 아씨는 다가왔다. 헌오의 마른 등에 굳은 살 많은 손을 가져다 대고 가만가만 쓸더니 이어 말했다.

 "당신 지금 내가 참 거추장스럽다구 생각 하셨지요? 요 귀찮은 덤만 어찌 떨어지고 홀몸이 되고 보믄 산에 기어 들어가 화전을 해두 한다구."

 "임자."

 "괜찮아요. 저두 그런 걸요. 요 귀찮은 영감쟁이 달구 내가 어딜 가나, 허구. 혼자 몸이믄 어떻게든…… 젖 어민 못하구 아일 돌보든 소 죽을 쑤든 해 볼텐데, 허구. 다 그런 거야요, 여보. 세상 인심이라는 게, 사람 맴이라는 게 꼭 그런 것이야요. 제 몸 하나 감당하질 못하는데 어딜 애틋한 정이고 뭐고 있겠어요? 다아…… 부질 없는 꿈 같은 일인걸."

 등을 쓸던 손이 떨어지고 사박사박 불안한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헌오는 돌아서지 못했다.

 "임자, 나는…… 임자."

 말을 잇지 못한 채 헌오는 볼 주름을 파고 드는 제 눈물에 졌다. 주먹을 꾹 쥐어 봐도 젊은 시절모양 힘은 들어가지 않아, 살 날 길지 않음을 실감했다. 수십 년 정 붙인 것도 결국 배 곯고 몸 힘든 찰나에는 모다 무상하였다. 제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한 철, 제 아무리 밝게 부푼 달도 단 하루인 것을.

 "나중에 혹 보구 싶어 지시거들랑 땅이나 파 보아요. 한참 봄에, 아마 봄에 날 보고 싶어질 테지. 마음 편안하고 날씨 좋고 배도 부를 즈음, 그럴 때면 그제서야 날 보고 싶어질 거야요. 그럼 땅이나 파 보아요. 땅이나 파 보믄……."

 "임자?"

 헌오는 돌아섰다. 목소리는 방금 것처럼 속살대다 꺼졌는데 사람도 같이 꺼졌는지 온데 간데 없다. 그림자 하나 안 남았다. 길은 끝 없을 양 쭉 뻗었는데 놀이 아른아른 깔렸다. 한 때는 있었지, 삼라만상 죄 품에 안은 것만 같던 시절이. 몇 밤을 새워 울어도 가슴 끓는 연정이 부처의 도리보다도 커다랗던 시절이 분명 있었더랬지. 헌데 모습 뵈지 않는 배필모양 그 모든 게 이미 없다. 마음이 꺼져 버리는 속도는 홍윤하던 미모가 시드는 것보다도 도리어 빨랐다.

 그 사람 있어 온 세상 난만하던 감정도 세월 지나고 보면 공루(空淚)로나 떠오르며, 그 사람 위해서라면 죽음조차 두렵지 않던 기억도 금세 바래 버리더라고, 조신이라는 사내가 오래 전에 토로하였던 바와 같이.

 "임자, 나는."

 헌오는 몸을 일으켜, 제 눈에 소복이 내리는 새파란 하늘빛에 소스라쳤다. 등쪽이 땀에 함빡 젖었는데 사위를 둘러보니 낯이 익은 산기슭, 시간은 채 일 각도 가지 않은 듯하였다. 바람은 봄다워 꽃 향기를 실어 나르는데 헌오는 그저 천선지전(天旋地轉), 그야말로 넋이 나가 여덟 방위를 완연히 잊었다.

 [보고 싶어지시거들랑 땅이나 파 보시구려.]

 목소리가 방금 것 같이 생생하다. 헌오는 자기 자신마저 긍측하여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서향화가, 헌오가 몰래 피우느라 그리도 고생을 바쳤던 빛나는 꽃잎이 눈에 들어왔다. 헌오는 숨이 턱 막혀 뒤로 여러 발 물러섰다.

 "나는……."

 헌오는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들어 고함을 내질렀다. 고함은 이내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로 변해 헌오 자신의 귓바퀴만을 스치고 사라져 갔다. 눈물은 나지 않아 시야는 끔찍하리만큼 맑았다. 헌오는 냅다 서향화를 짓밟고 그토록 애지중지 길러 낸 대를 꺾었다.

 "이 까짓 것!"

 땅을 파헤쳐 뿌리를 뽑고 꽃잎을 짓이겼다. 검은 흙 사이에서 여인네 머리카락 닮은 뿌리가 드러나는 순간, 헌오는 흙과 피로 엉망이 된 제 손바닥으로 민둥머리를 힘껏 감싼 채 허영허영 내달렸다. 절 담벼락에 들러붙어 불목하니들이 다른 스님을 끌고 나올 때까지 헌오는 울었다.

 말했어야 했다.

 제 아무리 꿈이어도, 제 아무리 고난이 닥쳐도, 그리하여 종내 모든 것이 부질없어지는 순간 닥친다 해도.

 그래도 말했어야 했다, 그대 연모한 마음 후회하지 않는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만을 위해 만물이 값 잃었던 한 때를 후회하지 않는다고.

 짐승처럼 울부짖는 헌오 곁으로 불공 드리러 온 여인네 몇이 수군수군 호기심 어린 고개를 들이 밀었다. 멀리서 향 내음이 봄 공기를 가로 질렀다. 헌오는 조금만 더 울고 조금만 더 피 흘리고 싶었다.



 +++



 헌오는 근엄하게 가사를 입고 서서 혼례를 마친 서향 아씨가 낭군과 더불어 절 마당에 선 것을 내려다 보았다. 이름 짓기 어려운 감정이 문득 솟아 시선을 먼 하늘에 두었더니 때 마침 낮달이 비스듬히 걸렸다. 연모의 정 시들고 청춘 흘러 사라지듯 한 개 빛나는 것이 낮달 곁으로 쏜살같이 사라져 갔다. 헌오의 거무죽죽한 얼굴 위로 습소(濕笑)가 번졌다.

 ‘잘난 척 하고 열두 폭 치마로 몸을 감쌌지만, 아씨. 잠시 잠깐 꿈에 이 놈도 아씨를 수십 해나 안았답니다.’

 봄 깊어 산중에 구름 그림자마저 따사롭다. 꼭 세상에 다시 겨울 오지 않을 것처럼 햇볕 참 쟁그랍고 천연덕스러운 날이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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