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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반역자

2013.07.31 22:1507.31

반역자

겨울에 러시아에 갔을 때 나는 열흘 동안 게스트 하우스에서 묵었다. 게스트 하우스는 이름대로 그냥 보통 집이나 아파트를 약간 개조해서 방을 하나씩 숙박 손님들에게 세를 주는 것이다. 물론 욕실과 화장실을 공동으로 써야 하고 호텔에서 해주는 세탁 서비스나 룸 서비스 등은 전혀 기대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러시아는 호텔 숙박비가 원체 미친 듯이 비싼데 비해서 시설도 항상 그만큼 좋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에 가격대 성능비를 생각하면 게스트 하우스가 꽤 안전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아주 커다란 변수는 같이 묵는 사람들이다. 게스트 하우스라는 게 아무래도 원래 가정집이기 때문에, 숙박 기간 내내 일부러 자기 방에만 처박혀 있지 않는 이상 아침 저녁으로 화장실이나 부엌에서, 혹은 드나들다가 현관에서 다른 방 사람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점이 매번 좀 어색하고 불편하기는 하지만 이제까지 경험상 대체로 나는 운이 좋은 편이라서 아주 이상한 사람들을 맞닥뜨린 적은 없었다. 그러나 꼭 얼굴을 마주치지 않더라도, 집주인이 상주하지 않는 상태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 여럿이 남의 집을 함께 빌려 쓰는 형태이다 보니까 언제나 집안 어딘가에는 하루 종일 음악이나 텔레비전을 틀어놓는 사람 혹은 피곤한 옆방 이웃을 밤새 붙잡아두고 인생을 논하고자 하는 사람이 꼭 하나쯤 있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운 나쁘게도 – 혹은 운 좋게도 – 이번에 바로 내가 그런 사람하고 같은 집에 묵게 되어 버린 것이다. 

남자의 이름은 스벤(Sven)이었다. 러시아 사람은 아니고 노르웨이인지 스웨덴인지 하여간 그쪽 사람이었다. (덴마크였을 수도 있다.) 키가 굉장히 크고 좀 색이 바랜 듯한 옅은 금발에 역시나 약간 바랜 듯한 옅은 푸른색 눈에 백인 치고도 신기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가 아주 전형적인 북유럽 사람이었다. 그런 외모에다 무뚝뚝한 표정이나 태도도 딱 북유럽 사람이라서 첫날 도착했을 때 집주인이 인사시켜준 이후로 눈이 마주쳐도 웃지도 않고 말도 안 하고 손만 한 번 슬쩍 들어 보이는 게 좀 무서워서 나는 일부러 피해 다녔다. 그런데 일주일째 되던 날에, 그 날도 낮에는 도서관에 갔다가 서점에 갔다가 복사한 자료와 새로 산 책을 잔뜩 짊어지고 살을 에는 추위와 싸우며 무릎까지 쌓인 눈더미를 헤치고 녹초가 되어 숙소로 돌아왔는데, 부엌에 서 있는 스벤과 딱 마주치고 만 것이다. 내 방으로 가려면 부엌 옆을 지나서 좁은 복도 끝까지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피해갈 방법이 없었다. 
  - Ты говоришь по-русски? (너 러시아어 하냐?) 
나를 보자마자 스벤이 다짜고짜 물었다. 이제까지 인사 한 마디 제대로 안 하다가 첫 마디부터 대뜸 '너'라고 반말을 하는 게 몹시 거슬려서 처음에 나는 쌩까고 방으로 들어가버리려고 했지만 혹시 이 자식이 알고 보니 자기 나라에서 지명수배중인 연쇄살인범이라서 지금 나를 일곱 토막 낼지 열두 토막 낼지 간 보는 중이면 어쩌나 싶은 생각도 들었기 때문에 (피해망상이 아니라 여자 혼자 외국에 나가면 이런 생각을 항상 달고 다닐 수밖에 없다. 게다가 상대는 키도 덩치도 줄잡아 나의 2.7배 정도 됐다) 나는 우물쭈물 대답했다. 
- Да... (응...) 
그러자 스벤이 다시 물었다. 
- Ты знаешь, что это такое глаголица? (글라골 문자가 뭔지 알아?) 
글라골 문자는 러시아에서 현재 사용하는 키릴 문자를 쓰기 전에 사용했던 고대 문자인데 굉장히 복잡하고 괴상망칙하게 생겼다. 대학원 시절 교수님의 표현에 따르면 '세 살짜리가 그린 사마귀 대가리, 구식 전화기, 장난감 돛단배, 고장 난 가로등'처럼 생겼는데 게다가 그런 알파벳이 40개나 돼서 고문서 전공이 아니면 배우지도 않는다. 나도 뭐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은 있지만, 그뿐이다. 
  - Знаю, что это, но ... (뭔지는 아는데...) 
뭔지는 알지만 읽을 줄은 모른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스벤은 갑자기 성큼성큼 자기 방으로 가 버렸다. 그 틈을 타서 나도 내 방으로 도망치려고 했는데 스벤이 그 순간 다시 성큼성큼 걸어 나왔기 때문에 실패했다. 스벤이 어정쩡하게 몸을 돌린 내 앞을 턱 가로막더니 뭔가를 불쑥 내밀었다. 나는 반쯤 겁에 질리고 반쯤 호기심에 차서 눈앞에 펼쳐진 물건을 들여다보았다. 
- Умеешь читать? (읽을 줄 알아?) 
그러니까 문제의 '사마귀 대가리, 옛날식 전화기, 장난감 돛단배, 고장 난 가로등'이 하나 가득 그려진 양피지였다. 꽤 낡은 것 같기는 했지만 비전문가의 눈으로 언뜻 봐도 천 년 전의 고문서보다는 기념품점에서 파는 모조품일 가능성이 훨씬 높아 보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 Нет. (아니.) 
- То я тебе расскажу. (그럼 내가 얘기해주지.) 
못 읽는다고 하면 놔줄지도 모른다는 나의 실낱 같은 희망을 짓밟고 스벤은 마치 내가 얘기해달라고 조르기라도 한 듯이 아주 자연스럽게 이렇게 말하더니 냉장고로 가서 냉동실 문을 열고 보드카를 꺼냈다. 한 병, 그리고 또 한 병. 
- Выпьешь обе, а это твоё. (두 병 다 마시면 이거 네 거다.) 
그러니까 그 사마귀 대가리 그림이 대체 뭔데 내가 목숨 걸고 보드카를 두 병이나 마셔야 하냐고? 라고 묻기 전에 스벤은 조그만 잔을 두 개 꺼내놓고 얼어서 걸쭉해진 투명한 액체를 가득 따르더니 자기가 먼저 한 잔 마셨다. 
- Пей. За любовную историю. (마셔. 사랑 이야기를 위하여.) 
그리고 스벤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 
궁에 저주가 내렸다. 소문은 대공비(大公妃)가 왕위를 이을 태자를 유산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대공비의 시녀장이 목을 매 자살했다. 그 뒤에 대공비를 돌보았던 산파가 마부와 함께 실종되었다. 둘이 같이 야반도주를 했네, 어머니와 아들 뻘인데 그럴 리가 없네, 온갖 뒷이야기로 성안이 시끌벅적했으나 한 달 뒤에 마부가 궁궐 성벽 아래 냇가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시신은 손톱과 발톱이 모두 뽑히고 팔다리의 살점이 군데군데 떨어져나가는 등 참혹하게 훼손된 데다 목이 귀에서 귀까지 잘려 있었다. 산파가 범인으로 지목되어 수배령이 떨어졌으나 나이든 아낙이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을 것이라고는 궁내에서 아무도 믿지 않았을 뿐더러 시간이 지나도 나라 안 그 어디에서도 목격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대공비의 경호대장이 낙마 사고로 죽었다. 언제나 말을 타고 다니던 군인이, 전투 중도 아닌 평상시에 항상 타던 말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궁내의 모든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다. 바로 곁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 사건을 목격한 부관은 경호대장의 입술이 '그런 색으로 변할 줄은 몰랐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남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부관도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궁이 술렁거렸다. 대공비는 침전에서 아예 문을 걸어 잠갔다. 밖으로 한 걸음도 나오지 않았고, 시집올 때 고향에서 데려온 시녀들 외에는 출입을 허락하지도 않았다. 
그가 비밀리에 대공에게 불려가게 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그 때 막 궁궐의 구석자리를 지키는 조그만 경호부대의 대장 자리를 맡은 참이었다. 아버지가 권세 있는 귀족인 덕에 어린 시절부터 궁에 드나들었고, 그래서 조금 자란 뒤에 곧바로 뭔가 형식적인 지위를 얻어 궁에 정식으로 들어가게 된 것을 그는 당연하게 여겼다. 대공도 어렸을 때부터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새삼 비밀리에 부름을 받고 더 놀랐는지도 모른다. 그는 어쩐지 바짝 긴장해서 대공 앞에 섰다. 
어른이 되어 정식으로 입궁한 뒤로는 워낙 말단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눈앞에서 대공과 마주 설 기회가 없었다. 첫눈에 보기에 대공은 그가 기억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평범한 서민들의 거친 옷을 입고 어깨에 털가죽을 아무렇게나 둘렀다. 키도 몸집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러나 대공이 몸을 돌려 그를 쳐다보았을 때, 차가운 회색 눈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는 자기도 모르게 흠칫 떨며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그 때 그는 자신이 그 회색 눈동자에서 보았던 것이 주군 앞에 선 신하로서 당연히 느껴야 할 위압감이나 충성심일 것이라고 애써 생각했다. 
대공은 그를 한참이나 말없이 쳐다보다가 갑자기 물었다. 
“나는 너를 기억한다.”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혹은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눈을 내리깐 채 잠자코 서 있었다. 
대공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아비가 이 공국의 북쪽에서 가장 큰 영지를 가지고 있지.” 
“예, 전하.” 
그가 머뭇거리다가 동의했다. 대공의 앞에 오래 서 있을수록, 그 목소리를 들을수록, 그가 기억하는 대공과는 어딘가 크게 달라 보였다. 그러나 대체 어디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딱 집어서 말할 수 없었다. 
대공이 다시 물었다. 
“그 영지를 누가 하사했는지 아느냐?” 
“이 공국을 건설하신 초대 대공께서 하사하셨습니다.” 
대공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고조 할아버지가 공국을 건설할 때 너의 고조 할아버지가 큰 공을 세워 영지를 받게 되었지.” 
“예, 전하.” 
“이 나라가 처음 세워졌을 때부터 너의 집안은 우리 집안에 충성했다.” 
“예, 전하.” 
대공이 조용히 물었다. 
“너도 나에게 충성하겠느냐?” 
그는 고개를 들어 대공의 얼음 같은 회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예, 전하.” 
그렇게 해서 그는 대공비를 둘러싸고 일어난 이상한 사건들의 전말을 알아내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대공에게 직접 부여 받은 비밀 임무라는 데 흥분해서 그는 곧장 조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신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혹은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일단 그는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운 적도 없었다. 정식으로 입궁하여 2년이 지나도록 그가 해온 일이라고는 전혀 중요할 것 없는 구석자리의 경비대 대장 감투를 앞세워 동료들과 낮이면 궁궐 안을 하는 일 없이 배회하고 저녁이면 저잣거리에 나가서 술 마시고 노는 것이 전부였다. 
게다가 사건의 당사자들은 죽거나 사라졌고, 주변 인물들은 모두들 쉬쉬하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다. 그가 맡은 임무가 ‘비밀’이었기 때문에 조사는 더욱 어려워졌다. 대공이 직접 내린 명령이니 아는 대로 전부 털어놓으라는 한 마디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겠지만 바로 그 한 마디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일단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주변 사람들부터 동원하기로 했다. 경비대의 동료들과 병사들 사이에서 경호대장과 부관에 대해 아는 사람을 수소문했다. 그러나 물론 선뜻 나서서 이야기해주려는 사람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는 그저 풋내기였다. 왕비의 경호대장과 그 부관에 비하면 지위도 형편없이 낮고 나이도 너무 어렸고 인맥도 없었다. 같은 귀족 출신인 경비대 장교들은 그래서 그를 상대하지 않으려 했고 평민 출신인 병사들은 반대로 그를 두려워하며 꺼렸다. 
시체로 발견된 대공비의 마부에 대해서만은 의외로 쉽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별 내용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마부는 그와 비슷한 나이의 젊은이로, 역시나 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출내기였다. 산파가 대공비를 위해 이런 저런 약재나 음식을 구할 때 말에 태워 데리고 다니는 일을 했다는 것이 사라진 산파와의 연결지점이었다. 이 마부는 어려서 부모를 모두 잃은 고아인데 삼촌이 대공의 마구간에서 오래 일했기 때문에 좋은 자리를 알아봐주려고 연줄을 써서 조카를 데려온 것이었다. 결국 젊은 마부가 끔찍한 모습으로 발견된 뒤에 그 삼촌도 궁을 떠나 통곡하면서 고향으로 내려갔다고 했다. 그는 자신보다 고작 두세 살 어린 사람이, 그것도 그렇게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데 대해서 깊은 동정심을 느꼈지만, 그뿐이었다. 쓸만한 정보는 하나도 없었고, 죽은 마부의 삼촌도 이미 떠나고 없었다. 
어찌 됐든 처음으로 얻어낸 현실적인 정보였기 때문에 그는 대공에게 보고했다. 실망스러운 보고에 질책을 들을 것이라는 우려와는 달리 대공은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젊은 마부의 고향으로 내려가서 그 삼촌을 불러오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에 대공은 고개를 저었다. 
  “궁 밖으로 소문이 새어나가면 안 된다는 걸 모르나?” 
어조는 차분했지만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그는 몸을 움츠렸다. 
“죄송합니다, 전하.” 
대공은 잠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잘 하고 있다. 계속 알아봐라.” 
그리고 대공은 손짓으로 그를 내보냈다. 

그 말대로 ‘계속 알아’봤지만 그는 실질적으로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경호대장과 부관에 대해서도 사라진 산파에 대해서도 한 마디 물어볼 때마다 벽에 부딪쳤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방편으로 대공비의 시녀들에게 접근했다. 
  대공비를 바로 곁에서 보필하는 시녀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모두 귀족 집안의 아가씨들이었다. 그런 아가씨들과 경비대 장교들과의 연애 사건은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일이었으며, 그러다가 누군가 임신이라도 하면 큰 소동이 벌어졌지만 결국은 결혼으로 끝을 맺곤 했다. 그러므로 시녀들은 잘 생긴 젊은 귀족 청년이 주변을 맴도는 데 대해서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하기도 하고 자기들끼리 깔깔거리기도 하고 뻔히 손 내밀면 잡힐 만한 거리로 도망치기도 했지만 딱히 경계하지도 거부하지도 않았다. 그런 시녀들 중 하나와 좀 친해져서 그는 시녀장의 죽음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천장에 매달려서 몸부림치고 있었대요.” 
그가 내미는 술잔을 거리낌없이 받아서 쭉 들이켠 뒤에 시녀가 말했다. 그가 놀라서 물었다. 
“몸부림을 쳐요? 아직 살아 있었단 말예요?” 
“네에.” 
시녀가 빈 술잔을 내밀었다. 그는 얼른 잔을 가득 채웠다. 시녀는 잔을 받아 들고 마시기 전에 덧붙였다. 
“아가씨들이 다 달려들어서 발을 붙잡았는데, 밧줄이 천장에 너무 높이 걸려 있어서.” 
시녀는 여기서 이야기를 끊고 술잔을 비운 뒤에 말을 이었다. 
“간신히 밧줄을 끊고 바닥에 눕혔을 때는 숨이 끊어져 있었다는 거예요.” 
시녀가 열성적으로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전부 3인칭인 것으로 보아 직접 목격하지는 않은 것 같다고 그는 짐작했다. 한 잔 더 술을 권하며 그는 물었다. 
“동료 중에서 그 때 거기 있었던 사람은 없어요? 직접 이야기를 들으면 더 흥미로울 텐데….” 
“왜요, 내 얘기는 재미 없어요?” 
시녀가 그에게 눈웃음을 쳤다. 유혹적인 몸짓으로 그를 향해 몸을 기댔다. 희고 통통한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이어서 팔뚝을 의미심장하게 어루만졌다. 
그는 그 손을 잡아 손등에 입맞추었다. 
“다음 번에는 그 일을 직접 보았던 아가씨도 우리의 조그만 파티에 초대합시다. 무서운 이야기는 여럿이 함께 들어야 더 재미있는 법이니까요.” 
부드럽게 말한 뒤에 그는 재빨리 눈을 찡긋해 보이고 서둘러 시녀의 침소에서 빠져 나왔다. 
  
다음날 아침에 숙취와 함께 깨어나서 그는 자신이 새로운 종류의 문제에 부닥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공의 명으로 궁내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조사하는 것이 그의 일차적인 임무였다. 그 와중에 원치 않게 대공비의 시녀와 엮여서 얼떨결에 결혼이라도 하게 되는 건 결코 그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원하는 정보를 얻고 이 상황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 그의 방 문을 두드렸다. 
“누구냐?” 
“대장, 웬 병사가 찾아왔습니다.” 
부하가 문을 반쯤 열고 보고했다. 
“대공비 전하의 경호대 소속이라고 합니다.” 
그는 귀가 번쩍 띄었다. 
“들여보내라.” 
병사는 어렸다. 겁에 질려 있었다. 넙적하고 붉은 얼굴에 부스스한 붉은 머리카락이 제대로 모양 잡힌 군인이라기보다 아직도 농군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무슨 일이지?” 
그는 가능한 한 부드럽게 물었다. 그러나 병사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더욱 겁에 질린 것 같았다. 쭈뼛거리며 양손을 쥐었다 놨다 했다. 
“할 말 있으면 해 봐라, 괜찮아.” 
그가 다시 달랬다. 병사는 입을 열었지만 더듬거렸다. 
“대, 대, 대장님하고, 부, 부, 부관, 부관님하고….” 
“그래.” 
그가 격려했다. 
“대장님하고, 부관님하고, 무슨 일이 있었지?” 
병사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듯 빠른 어조로 내뱉었다. 
“대, 대장님이 마, 마, 말에서 떨어졌을 때 수, 술에 취해 있었다고 하라고, 술에 취해 있었던 거라고, 부관님이 그랬어요. 그러고 나서 없어졌어요. 술에 취해 있었다고, 누, 누가 무, 무, 물어보면 그렇게 말하라고….” 
“그래?” 
그도 따라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사실은 술에 취하지 않았단 말인가?” 
병사는 발작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장님이 말에 올라타더니 갑자기 모, 모, 목을 움켜잡았어요. 양손으로 모, 목을 붙잡고, 이, 입을 이렇게 크게 벌리고….” 
병사는 말하면서 양손으로 자기 목을 움켜잡고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듯 입을 한껏 크게 벌리는 시늉을 했다. 
“그, 그러면서, 이, 이렇게….” 
병사는 목을 움켜잡고 입을 크게 벌린 채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경련을 했단 말인가?” 
그의 말에 병사는 잠깐 멍한 표정이 되었다. ‘경련’이라는 단어를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가 재촉했다. 
“그래서, 그 다음엔 어떻게 됐는데?” 
“막, 이렇게, 막….” 
병사는 잠시 더 몸을 뒤트는 시늉을 했다. 그가 한 번 더 재촉하려 했을 때 병사가 말했다. 
“그러다가 대, 대장님이 아마 말고삐를, 이렇게, 낚아챘나 봐요. 말이 놀라서, 앞발을 들고 히히힝, 이러니까, 대장님이 이, 이렇게, 쿵….” 
병사는 몸을 뒤틀면서 옆으로 쓰러지는 연기를 해 보였다. 
“땅에, 대장님이, 땅에, 누웠는데….” 
  병사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땅에 누운 모습을 재연했다. 
“머, 머, 머리에서, 머리에서, 피가….” 
말하면서 병사는 울기 시작했다. 
“피가….” 
“그래, 괜찮아, 괜찮아.” 
그는 어린 아이를 달래듯이 병사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병사가 울음을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침대 옆에 놓여 있던, 어젯밤에 시녀와 마시다 남은 술을 가져다 한 잔 따라주었다. 병사의 붉은 얼굴이 조금 더 붉어졌지만 울음은 진정되었다. 그는 탁자 위에 굴러다니던 은전을 아무렇게나 집어서 건네주었다. 
“잘 했어. 괜찮아.” 
병사는 완전히 울음을 그치고 조금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기 와서 이런 얘기 했다는 사실은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병사가 절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가 새나갈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조금 안심했다. 
돌아서서 나가려다가 병사가 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왜 그러나?” 
은전을 더 달라는 뜻일 거라고 생각하며 그는 일어섰다. 병사가 돌아서서 그에게 말했다. 
“대장님 얼굴이 초, 초, 초록색이었어요.” 
“뭐?” 
병사는 그에게 야단이라도 맞은 듯이 어깨를 움츠렸다. 
“쓰러졌을 때, 대장님 얼굴이, 초, 초, 초록색이었어요. 입술이 푸, 푸르스름하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이 그런 색이 될 줄은 몰랐다’고, 곁에서 목격한 부관이 말했다던 소문을 떠올렸다. 
병사가 중얼거렸다.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것 같아요….” 
그리고 병사는 꾸벅 인사하고 나가 버렸다. 

도로 자리에 앉아서 그는 방금 들은 정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궁리했다. 경호대장이 목을 움켜쥐고 괴로워했으며 얼굴빛과 입술 색이 이상했다는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대장은 죽기 전에 독을 먹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이런 쪽으로 아는 바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병사 한 명의 말만 믿고 함부로 결론을 내리기가 꺼림칙했다. 
대공에게 보고해야 할까? 대공이라면 주변에 의원도 있고 사제도 있으니 상황을 더 자세히 이해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일단 뭔가 알아냈으니 보고하고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편이 옳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그 때 방문이 살그머니 열렸다. 
“누구냐?” 
그가 놀라서 물었다. 문밖에서 보초를 서던 부하가 얼굴을 반만 들이밀고 히죽 웃었다. 
“무슨 일이야?” 
그가 다시 물었다. 부하는 말없이 문밖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어젯밤에 만났던 시녀가 위풍도 당당하게 걸어 들어왔다. 
“어, 여기는, 어, 어떻게….” 
그가 더듬거렸다. 시녀는 무척 즐겁다는 듯이 짓궂은 웃음을 띠었다. 그리고 여전히 열려 있는 문을 향해서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대공비 전하의 명령을 받들어서 왔어요. 심부름을 시키셔서….” 
그리고 시녀는 그에게 다가와서 어깨를 눌러 자리에 도로 앉혔다. 그의 바로 앞에 서서 의미심장하게 몸을 기울였다. 시녀가 몸을 숙이자 깊이 파인 앞섶 사이로 새하얀 가슴골이 눈에 들어왔다. 우유가 쏟아지는 것 같다고 그는 언뜻 생각했다. 
“어제 얘기했던 그 일을 직접 본 아가씨가 있어요. 오늘 저녁에 내 침실로 와요.” 
재빨리 그의 귓가에 속삭이고 나서 시녀는 여전히 몸을 숙여 보란 듯이 가슴골을 드러낸 채로 문을 향해 외쳤다. 
“알았죠? 그걸 가져오세요. 대공비 전하의 명령이에요.” 
그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시녀는 몸을 숙인 그대로 그의 뺨에 얼른 입맞추었다. 방에서 나가기 전에 시녀는 눈을 찡긋거리며 그의 탁자 위에 놓인, 방금 병사에게 나눠 주었던 술병을 가리켰다. 그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가 나가고 난 뒤에도 그는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던 새하얀 젖가슴의 잔상에서 한동안 벗어나지 못했다. 간신히 제정신을 차린 뒤에 그는 대공에게 보고하는 것은 시녀장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까지 듣고 사건을 자기 나름대로 정리한 뒤에 해도 늦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시녀의 하얀 젖가슴은 그런 결론과 관련이 없다고 애써 부정하고 싶었지만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물론 대공에게 보고할 필요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시녀가 데려온 아가씨는 커다란 녹색 눈에 풍성한 갈색 머리를 등 뒤로 늘어뜨린 미녀였다. 사실 대공비의 시녀들은 모두 미인이었지만 이 아가씨는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에 몸집이 작고 날씬해서 어쩐지 현실의 사람이라기보다 요정 같았다. 건드리면 그대로 공중으로 날아갈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요정 같은 갈색머리 아가씨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말도 하지 않았다. 불안한 표정으로 그저 앉아있을 뿐이었다. 젖가슴이 풍만한 시녀와 그가 번갈아 술잔을 권하자 마지못해 한 잔을 들이켰다. 그의 예상과는 달리 한 달음에 끝까지 다 들이켜고 조그만 아가씨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지러워.” 
요정 같은 아가씨가 희고 풍만한 젖가슴의 시녀에게 조그만 목소리로 토로했다. 
“부엌에 내려가서 뭐든 먹을 것 좀 갖다 줄래요? 빵이나, 치즈나….” 
젖가슴이 풍만한 시녀는 잠시 입을 삐죽거렸다. 그러나 투덜거리면서도 어쨌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녀가 나간 뒤에 갈색머리의 아가씨가 그에게 말했다. 
“시녀장님의 죽음에 대해서 왜 알고 싶은 거예요?” 
커다란 녹색 눈동자가 정면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는 순간 말이 막혔다. 그러나 갈색머리의 아가씨는 진지했다. 술이 올라 발그스름해진 작고 사랑스러운 얼굴이 심각하게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대공의 명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성의껏 대답해줘야겠다고 결심했다. 
“궁내에서 갑자기 이상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으니까요.” 
그가 천천히 조심스럽게 단어를 고르며 말했다. 
“대공 전하나 대공비 전하께 안 좋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경비대 장교로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그만 아가씨가 요정 같은 갈색 머리를 끄덕였다. 조그만 분홍빛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러더니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자살은 커다란 죄악이에요.” 
갈색 머리의 아가씨가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녀장님은 신심이 깊은 분이었어요. 그런 죄악을 저지를 분이 아니에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갈색 머리의 아가씨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시녀장님은 글을 읽고 쓸 줄 몰랐어요.” 
“예?” 
커다란 녹색 눈이 다시 그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그 눈은 이제 두려움과 불안으로 떨고 있었다. 
“방에서 싸우는 것 같은 소리가 나서 들어가 보니 시녀장님이 천장에 목이 매달린 채로 몸부림치고 있었어요. 방 안은 엉망이었고요. 탁자와 의자가 전부 쓰러지고 성화(聖畵)하고 촛대까지 바닥에 뒹굴고 있었어요.” 
녹색 눈의 아가씨는 '성화와 촛대'라고 말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양손을 꼭 움켜쥐고 마른 침을 삼켰다. 
“밧줄을 끊고 시녀장님을 내렸을 때는, 이미 늦어서…. 침대에 눕히고, 방안을 정리했어요. 그러다가 바닥에서 종이 조각을 주웠어요.” 
“무슨 종이 조각인데요?” 
그가 물었다. 녹색 눈의 아가씨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몰라요. 뭔가 글자가 적혀 있었지만, 읽을 줄 몰라서…. 그 때 신부님이 달려오셔서, 때늦은 종부성사를 하고…. 자살자는 죄인이라고 몹시 내키지 않아 하셨지만, 그래도 안 할 수는 없잖아요…. 어떻게 종부성사도 없이…. 어떻게….” 
갈색 머리 아가씨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러나 자살이나 종부성사에 대한 의견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는 부드럽게 말을 돌렸다. 
“종이 조각이요. 그건 어떻게 했나요?” 
갈색 머리 아가씨가 킁, 소리를 내며 눈에서 눈물을 닦아내고 대답했다. 
“신부님께 드렸어요. 신부님은 읽을 줄 아시니까….” 
“뭐라고 하시던가요?” 
그가 다급하게 물었다. 요정 같은 아가씨는 다시 눈물이 가득 고인 녹색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옥체를 보좌하지 못한 죄’라고 쓰여 있었대요. 하지만….” 
커다란 녹색 눈에서 천천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시녀장님의 죄가 아니었어요…. 시녀장님도… 산파도… 정말 정성을 다했는데…. 어쩔 수 없었어요…. 대공비 전하는… 그렇게 된 건….” 
그 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시녀가 희고 풍만한 가슴 아래 커다란 바구니를 껴안고 들어왔다. 
“빵, 소금, 치즈, 절인 오이하고 술도 좀 더 가져왔어요. 나만 빼놓고 재미있는 일 하고 있었던 건 아니죠?”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갈색 머리 아가씨가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닦았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면서 다시 기회를 노렸지만 풍만한 흰 젖가슴의 시녀는 결국 끝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먼저 패배를 선언하고 일어선 것은 갈색 머리의 아가씨였다. 그는 계속 붙잡혀서 성과도 없이 술잔을 받아주다가 희고 커다란 가슴을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며 시녀가 가늘게 코를 골기 시작했을 때에야 간신히 탈출했다. 
다음날 늦게야 잠자리에서 일어나 또 다시 숙취에 찌든 머리를 부여잡고 그는 이 일을 어떻게 정리해서 대공에게 보고해야 할지 고민했다. 
우선 경호대장의 죽음은 부관의 짓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모든 정황을 고려할 때 부관이 경호대장을 독살하려 했는데 우연히 상황이 맞아떨어져서 낙마 사고가 된 것 같았다. 그리고 부관은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몸을 감추었다. 
그러나 도대체 부관이 어째서 경호대장을 독살하려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부관도 경호대장도 군인이었다. 그가 아는 한, 군인끼리 사이가 나쁘면 싸움을 하지 독을 먹이지는 않았다. 차라리 결투를 해서 죽였다면 이해가 되지만 독살에 낙마 사고로 위장하는 것은 지나치게 복잡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시녀장의 죽음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대공비가 유산하여 태자를 잃은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껴 자살했다면 '싸우는 소리'는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죄책감 때문에 죽으려는 사람이 성화와 촛대를 바닥에 내던질 이유가 없다. 게다가 글을 모르는 시녀장이 썼을 리가 없는 종이 쪽지는 또 어떻게 된 일인가? 애초에 궁 안에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얼른 떠오르는 사람이라면 사제와 부제 정도다. 그러나 성직자가 살인에 관여했을 리도 없다.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리고 머리가 복잡해져서 두통도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일어섰다. 탁자 위에서 물주전자를 집어 잔에 따르지도 않고 그대로 꿀꺽꿀꺽 들이켰다. 찬물이 들어가자 정신이 좀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는 남은 물을 얼굴에 부었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매만진 뒤에 그는 대공에게 보고하기 위해서 침소를 나섰다. 
자신의 세계가, 자신이 알던 삶이 전부 뒤집히려 한다는 사실을 그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대공은 그의 보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말없이 경청했다. 
“… 부관의 행적을 조사하고, 시녀장의 방에서 발견되었다는 종이 쪽지에 대해서도 사제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가 보고를 마친 뒤에도 대공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그를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그는 조금씩 불안해졌다. 
대공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부관을 의심한단 말이지?” 
“예, 전하.” 
그가 대답했다. 대공은 다시 입을 다물고 그를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견디기 힘든 침묵을 깨기 위해서 그가 뭔가 더 덧붙일 말을 찾고 있을 때 대공이 물었다. 
“시녀장의 방에서 발견된 쪽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았지?” 
“예?” 
그는 놀랐다. 대공이 무감정하고 차가운 회색 눈으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별궁에 자주 드나들었지?” 
“예? 저, 그건, 조, 조사하기 위해서….” 
그가 변명했다. 대공은 그가 말을 마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경호대장과 부관에 대해서 대공비가 뭐라고 말했지?” 
“예?” 
그는 점점 더 당황했다. 
“저, 대공비 전하는, 그, 한 번도, 뵌 적도 없습니다….” 
대공이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가는 불길한 미소였다. 
“그래서 경호대장인가? 아니면 부관인가?” 
“전하, 저, 무, 무슨 말씀이신지….” 
대공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소리쳤다. 
“여봐라! 거기 누구 없느냐!” 
그는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고통의 정도에 한계가 없다는 사실을 이전에는 알지 못했다. 
죽을 것 같이 아픈데 죽지 않고 고통만 계속된다는 사실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기절할 듯이 무서운데 마음대로 기절할 수 없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채찍이 몸의 살갗을 갈갈이 찢은 자리를 불타는 석탄이 몇 번이나 지질 때까지, 몇 번이고 정신을 잃었다가 찬물을 맞고 몸부림치며 깨어날 때까지도 그는 자신이 어째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대공은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고, 경호대장이냐 부관이냐 아니면 너냐, 라는 물음을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그는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수십 번, 수백 번, 그가 느끼기에는 수천 번이나 되풀이된 듯한 고통의 의례가 지나간 뒤에, 내내 평온하고 차분한 어조를 유지하던 대공은 마침내 분개하며 고함쳤다. 
“충성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대대로 너의 선조가 나의 선조를 섬겼듯이 너도 나를 섬기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네가 이렇게 나를 배신하고 끝까지 사실을 숨기려 한다면 너는 물론 네 아비도, 네 집안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대공은 그가 자백할 때까지 고문을 계속하라고 형리에게 명한 뒤에 나가 버렸다. 

뭔가 차가운 것이 입술에 닿았을 때 그는 비명을 지르려 했다. 부드러운 손이 그의 입을 막았다. 
“쉿.” 
그는 눈의 초점을 맞추려 애썼다. 앞에 서 있는 사람이 희고 풍만한 젖가슴을 자랑하는 술 잘 마시는 시녀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억겁의 시간이 걸리는 듯했다. 
“여기는…. 어떻게….” 
대답 대신 시녀는 그의 입에 다시 차가운 것을 가져다 댔다. 그는 주는 대로 들이켰다. 
시원한 불덩이가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내려갔다. 그는 순간적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에 다시 피가 돌고 기운이 솟는 것을 느꼈다. 
“시간이 없어요.” 
우윳빛 풍만한 젖가슴의 시녀가 다급하게 속삭이며 그의 손에서 수갑을 벗겼다. 
“형리들이 곧 깰 거예요.” 
발에 채워진 족쇄를 풀면서 시녀는 살짝 웃었다. 
“술을 먹여서 모두 재워 놨거든요.” 
그는 온몸이 아픈 와중에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시녀가 벽에 걸린 횃불을 뽑아서 한 손에 들었다. 다른 손으로 그를 끌어당겨 자기 어깨에 그의 팔을 걸쳐 부축했다. 
“가요.” 
그래서 그는 영문을 모르는 채로 무작정 따라 나섰다. 

그는 알지 못했지만 그가 갇혀 있었던 곳은 지하 감옥에서도 가장 지하의 가장 안쪽이었다. 감방 문 앞에서 술에 취해 널브러진 형리들을 조용히 피해가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이후 완전히 땅 위로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지루하고도 고통스러웠다. 그를 질질 끌다시피 부축해 가면서 시녀가 서둘러 짤막하게 설명했다. 
“대공비 전하께서 탈출하셨어요.” 
“뭐…?” 
그러나 시녀는 그가 놀랄 틈을 주지 않았다. 
“빨리 따라가세요. 대공비 전하를 지켜야 해요.” 
“대체 왜….” 
그러나 시녀가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누군가 바로 옆에서 고함을 질렀다. 
“대공이 미쳤다!” 
그도 시녀도 깜짝 놀라서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시녀가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횃불을 비추었다. 
그와 시녀가 걷고 있는 곳은 수많은 지하 감방들이 양쪽으로 줄줄이 이어진 일종의 복도였다. 그 감방 중 한 곳에서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누더기를 걸치고 얼굴에 피와 고름, 딱지가 말라붙어 알아볼 수 없게 된 어떤 사람이 목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대공은 미쳤어!” 
“빨리 가요.” 
시녀가 그를 잡아 끌었다. 그는 고분고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쉿.” 
시녀가 말을 막았다. 일렁이며 조금씩 사그라드는 횃불 빛으로 그는 시녀의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을 보았다. 
“경호대장님의 부관이에요.” 
시녀가 속삭였다. 횃불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그는 옆에서 부축해 끌고 가는 시녀와 자기 자신이 고통스럽게 몰아쉬는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땅 위로 나왔을 때 밖에는 달 없는 하늘에 별의 조그만 알갱이들만이 창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시녀는 그를 끌고 가다가 갑자기 헉, 하는 소리를 내며 멈추어 섰다. 
“왜 그래요?” 
그가 속삭였다. 시녀는 대답하지 않고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시녀의 시선을 따라 어두운 땅 위를 바라보았다. 
작고 하얀 얼굴 주위에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었다. 가슴에 칼이 꽂힌 조그만 아가씨의 그 요정처럼 커다란 녹색 눈은 텅 빈 밤하늘을 무의미하게 올려다 보았다. 시신 옆에는 말 한 마리가 조용히 서서 죽은 아가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녀가 그를 끌고 갔다. 떠밀다시피 말에 태우려 했지만 그는 요정 같은 녹색 눈과 가슴에 꽂힌 칼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대로 무너질 것만 같았다. 
손에 뭉클, 하고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그는 흠칫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시녀에게 잡힌 그의 손이 그 희고 풍만한 젖가슴에 파묻혀 있었다. 시녀의 푸른 눈이 눈물에 젖어 별빛 아래 반짝였다. 
“정신 차리세요.” 
시녀가 말했다. 눈물이 하얀 뺨으로 흘러내렸지만 목소리만은 조용하고도 또렷했다. 
“북쪽으로 가세요. 바다 건너 대공비 전하의 고향으로 모시고 가세요. 전하를 살려야 해요.” 
그래서 그는 말에 올랐다. 
말에 탄 뒤에야 그는 고삐가 중간에 잘려나간 것을 알았다. 잘린 고삐를 어떻게든 모아 쥐고 그는 말을 몰아 달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돌아보았을 때, 희고 아름다운 여인은 땅에 주저앉아 갈색머리 아가씨의 시신을 품에 안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말을 몰아 북쪽으로, 북쪽으로 달렸다. 정확히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 자신도 알지 못했지만 ‘대공비 전하의 고향’이라는 말에서 실마리를 얻었다. 
북쪽은 그의 집안 영지가 있는 곳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다녀서 그쪽의 지리는 손바닥처럼 훤히 알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 대공비의 고향으로 건너가는 해협까지, 어두운 숲과 위험한 늪지를 제외하고 밤에 여자 혼자서도 지나갈 수 있을 만한 초원으로 방향을 잡는다면 대충 따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짐작했다. 
그는 동이 틀 때까지 밤새 말을 달렸다. 고문당해 망가진 몸이 달리는 말 등 위에서 리드미컬하게 흔들릴 때마다 온몸의 근육과 신경이 비명을 질렀다. 그런 와중에 머리만이 달 없는 하늘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 구름 속을 떠 가는 듯 했다. 헝클어진 머리에 누더기를 걸치고 ‘대공은 미쳤어!’를 외치던 부관과, 가슴에 칼이 꽂힌 채 텅 빈 눈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요정같이 조그만 아가씨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과, 우유처럼 풍성하고 대지처럼 강인한 여인의 눈물 젖은 푸른 눈동자가 고통과 두려움으로 뒤범벅이 된 그의 머릿속에서 두서없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대강의 방향만 짐작하여 말을 달리면서 그는 자신이 진정 어디로 가고 있는지, 왜 가고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이 다 함정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함정이라고 해도 그는 말을 달려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다시 돌아가면 그를 기다리는 것은 고통과 죽음뿐이었다. 
그렇게 말을 달려 그가 고통과 피로와 갈증으로 거의 기절할 지경이 되었을 때, 초원의 지평선에 조그만 오두막이 떠올랐다. 

그가 오두막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에 있던 사람이 비명을 질렀다.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그는 여자 혼자 비명을 지르고 있으니 자신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조금 안심했다. 
그는 물을 청했다. 노파는 비명을 그쳤지만 두려움과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볼 뿐 전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두리번거리다가 탁자 위에 물병이 있는 것을 보고 먹이를 공격하는 맹수처럼 덤벼들어 입에 대고 부었다. 병에 든 것은 물이 아니라 우유였지만 그에게 있어 달고 시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유를 전부 마시고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노파가 빵을 자를 때 쓰는 커다란 칼을 손에 들고 있는 것을 알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놀랄 기운이 없었다. 
노파가 물었다. 
“대공이 보내서 왔소?” 
그는 조금 웃었다. 
“대공의 감옥에서 도망쳐 왔습니다.” 
그는 양팔을 벌려 무기가 없음을 보여주었다. 노파가 칼을 내려놓았다. 그가 물었다. 
“대공비 전하는 어디 계십니까?” 
노파는 잠시 망설였다. 피투성이에 누더기 옷을 걸친 그의 몰골을 다시 한 번 훑어본 뒤에 집 뒤를 가리켰다. 그래서 그는 오두막을 나와 뒤쪽으로 돌아갔다. 

대공비는 마구간 구석에 숨어 있었다. 그가 들어서자 놀란 말들이 먼저 경계의 울음소리를 냈다. 그가 안쪽으로 들어서자 대공비가 일어섰다. 
“너는 대공의 자객인가?” 
대공비의 상반신은 어둠침침한 마구간의 그늘에 묻혀서 보이지 않았다. 그는 조그만 들창으로 비쳐 드는 아침의 햇빛 속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여주인이 볼 수 있도록 자신을 무방비하게 드러내었다. 
“아닙니다, 전하.” 
대공비는 잠시 말이 없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의 모습을 살피며 상황을 판단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는 짐작했다. 그래서 그는 기다렸다. 
마침내 대공비가 물었다. 
“그럼 너는 누구냐?” 
그는 잠시 생각한 뒤에 가능한 한 짧게,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전에는 대공 전하의 밀가루 창고를 지키는 경비대의 대장이었습니다. 지금은 대공의 감옥에서 탈옥한 죄수입니다.” 
대공비는 다시 한 번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밀가루 창고나 경비대 얘기는 하지 말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대공비가 그늘에서 벗어나 밝은 곳으로 나왔다. 
시골 아낙처럼 수수한 차림에 치마와 머리카락에 지푸라기가 묻어 있었다. 그러나 대공비는 그가 이제까지 보았던 그 어떤 귀족 여인보다도 아름다웠다. 그 모습에는 아름답다는 말만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광휘가 있었다. 이른 아침에 들창으로 비쳐 드는 가느다란 햇살을 후광처럼 받으며 그의 앞에 선 그 섬세하고 정교한 형상은 시골 아낙의 옷에 감싸인 여신과도 같았다. 
“대공의 자객이라면 지금 나를 죽여라.” 
대공비의 모습에 넋을 잃은 와중에도 그는 아주 잠깐, 대체 이 부어 오르고 찢어진 피투성이 몰골의 어디가 대공의 자객처럼 보이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대공비가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나를 죽이면 대공의 혈통을 이어받은 뱃속의 태자 또한 함께 죽이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그는 깜짝 놀랐다. 태자? 
대공비가 다시 말했다. 
“네 말대로 네가 대공의 자객이 아니라면….” 
대공비는 잠시 말을 끊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너는 무슨 목적으로 여기까지 온 거냐?” 
“저도 모릅니다, 전하.” 
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대공 전하의 명을 받아 경호대장과 시녀장의 죽음을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대공께서 저를 투옥하라 명하셨고, 고문을 당해 이런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그는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탈출해서 북쪽으로 달려온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대공비는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그가 이야기를 마치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랫동안 생각한 뒤에 입을 열었다. 
“네가 대공의 자객이 아니라 진정 내 목숨을 살려 고국으로 데려다 주기 위해 온 사람이라면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대공비는 여기까지 말한 뒤에도 잠시 망설였다. 그러더니 윗옷의 앞섶을 여민 끈을 풀기 시작했다. 그가 너무 놀라서 뭐라고 말도 꺼내지 못하고 지켜보는 앞에서 대공비는 윗옷을 벗고 반라가 되었다.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완전히 시선을 피하기 전에 그 휘황한 여체에 가득 새겨진 흉폭한 상처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상처는 오래 되어 아물어가고 있었고 어떤 상처는 아직도 벌겋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미 흉터로만 남은 자국도 있었다. 그러나 공국의 여주인, 이 나라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신분 높은 여인의 몸이 이런 끔찍한 폭력의 흔적으로 뒤덮여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대공은 미쳤다.” 
고통의 흔적을 드러낸 무방비한 모습으로 대공비가 조용히 말했다. 
“존재하지 않는 내 부정한 행실을 증명하겠다고…. 죄 없는 경호대장을 죽이고, 무고한 부관을 감옥에 가두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을 고문하면서 대공이 되풀이했던 질문을 이해했다. 
“태자가 자신의 적통임을 믿지 않아서…. 대공이 죽였다…. 뱃속의 태자를… 죽였다….” 
대공비의 목소리가 떨렸다. 대공비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말을 이었다. 
“대공이 태자를 죽이고, 나를 고문하고, 상처 입은 내 몸을 범하였다…. 그러나 신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다시 한 번 내게 생명을 안겨주셨다.” 
대공비가 천천히, 그러나 깊고 강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태자를 보호해야 한다. 미치광이가 또 다시 태자를 죽이고 공국의 대를 끊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예, 전하.” 
그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로 한참 만에 대답했다. 
“여기서 머지 않은 곳에 제 아버지의 영지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좀 더 가면 바다입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대공비의 눈을 보았다. 
“바다 건너 전하의 고향이 멀지 않습니다.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대공비가 처음으로 조금 미소 지었다. 

그는 자신이 밤새 타고 온 지친 말 대신 노파의 마구간에서 말을 빌렸다. 대공비를 가장 가까이에서 돌보았던 산파는 대공비가 말에 오른 뒤에도 손을 놓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괜찮을 거예요, 할멈.” 
대공비가 다정하게 말했다. 
“곧 또 봐요.” 
노파는 대공비의 손을 놓고 눈물을 닦았다. 
그는 대공비와 함께 아버지의 영지를 향해 출발했다. 

대공비와 나란히 초원을 가로질러 말을 달리면서 그는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물론 이전에도 그는 여인의 벗은 몸을 본 적이 있었다. 궁에 들어온 뒤에 그는 동료들과 짜고 별궁의 담을 넘어 시녀들이 목욕하는 광경을 훔쳐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저잣거리의 주막에 가면 은전 몇 푼에 기꺼이 옷을 벗거나 술 한 잔에 맨살을 드러내는 여인들이 가득했다. 신분이 높거나 낮거나, 귀족이거나 평민이거나, 세상에는 젊은 여자, 예쁘장한 여자가 수없이 많았고, 가끔은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운 여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토록 섬세하고 매끄러운 몸이 이토록 잔혹한 상처로 뒤덮인 모습을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욕정을 가장 깊이 일깨운 것은 이 부드럽고 고귀한 여체의 아름다움과 그 몸에 사정없이 새겨진 상처 사이의 부조화였다. 
그는 그 욕정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그는 여주인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아버지의 영지에 도착한 뒤로는 모든 일이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서둘러 배를 준비시켰다. 대공비는 그의 아버지에게 호위 받으며 고향인 이웃 나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의 아버지는 대공비의 아버지인 이웃 나라의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미쳐버린 대공이 군사를 일으킬 것에 대비해 함께 준비하기로 했다. 
그는 약간의 병사들을 데리고 도로 대공의 궁으로 향했다. 
“너도 함께 내 아버지의 나라로 가는 쪽이 낫지 않겠느냐?” 
배에 오르기 전에 대공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대공이 이미 저를 반역자로 낙인 찍었으니 반드시 제 아버지의 영지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가 설명했다. 
“전하께서 안전하게 고향으로 가시려면 제가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대공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아버지의 땅을 뒤로 하고 다시 초원을 가로질러 병사들과 함께 남쪽으로 달리면서 그는 반역에 대해 생각했다. 
주군을 공격하는 것은 물론 반역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군사를 이끌고 그가 대공의 궁으로 향하는 것이 반역이었다. 돌려 말하거나 피해갈 방법이 없이 반역의 정의에 정확히 들어맞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지로 대공을 배신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대공에게 충성했다. 지하 감옥에 갇혀 살이 찢기고 온몸이 불에 타는 고통을 당할 때조차,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는 채로 무조건 대공에게 충성했다. 
대공이 그를 배신자라고 낙인 찍었기 때문에 그는 결국 반역하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그 기분이 슬픔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렸다. 신의를 배신한 것은 그가 아니라 대공이었다. 

지평선에 대공의 군사가 나타났다. 

그가 데려온 병사의 수는 많지 않았다. 나팔수도 기수도 없었다. 그는 창을 들고 선두에 섰다. 
일렬로 마주서고 보니 상대방은 아군보다 규모가 더 작았다. 곁에 선 병사들이 일단 안심했다. 
그러나 그는 이 뒤에 더 큰 부대가 몰려올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대공비를 보호하고, 아버지를 보호해야 한다. 그의 목표는 전투에 이기거나 살아남는 것이 아니었다.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것만이 목적이었다. 
한 줄기 바람이 초원을 휩쓸고 지나갔다. 적의 군사 중 선두에 나선 기사가 소리쳤다. 
“대공비는 어디에 계시는가!” 
대답 대신 그는 궁수들에게 신호했다. 화살이 날아가서 적들의 갑옷과 방패에 맞고 떨어졌다. 
상대편은 움직이지 않았다. 
먼저 움직이는 쪽이 불리하다. 상황을 잘 판단해야 한다. 그는 무작정 앞으로 달려나가려는 병사들을 막았다. 
선두의 기사가 다시 소리쳤다. 
“대공비는 무사하신가!” 
다시 궁수들에게 신호하려다가 그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멈추었다. 무사하시냐고? 그가 예상한 발언은 투항하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 혹은 대공비의 행방을 말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정도였다. 
그는 적군의 선두에 나선 기사의 투구에 가려지지 않은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기사는 한쪽 눈이 부어올라 거의 감긴 상태였다. 그 외에도 얼굴 여기저기에 아직 아물지 않은 고문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상대편의 기사가 세 번째로 외쳤다. 
“대공이 미쳤다. 우리는 대공비를 구하러 왔다.” 
그는 창을 내렸다. 좌우로 움직이지 말라고 신호한 뒤에 혼자 천천히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섰다. 상대편의 선두에 있던 기사도 똑같이 말을 몰아서 앞으로 나왔다. 
상대편의 기사가 말했다. 
“나는 대공비를 호위하는 경비대의 부관이었다. 대장이 죽었으니 이제 내가 지휘한다. 대공비는 무사하신가?” 
“무사하십니다.” 
그가 대답했다. 
“알아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말하면서 그는 오랜만에 처음으로 웃었다. 

이제는 경호대장이 된 부관과 세력을 합쳐 그는 다시 남쪽을 향해 말을 몰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평선에 다시 군사들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정말로 대공이 보낸 군대였다. 

경호대장이 된 부관은 대공이 보낸 군사들을 향하여 우리는 같은 편이다, 대공비와 태자를 위하여 무기를 내리고 합류하라고 외쳤다. 일단은 화살이 먼저 날아왔지만 개중에는 눈에 띄게 망설이는 병사들도 있었다. 부관의 명령에 따라 그는 병사들을 이끌고 돌격했다. 
이제는 목표가 바뀌었다. 부관이 데려온 병사들과 세력을 합쳤고 뒤에는 그의 아버지가 지휘하는 군사들이 따라올 것이었다. 무엇보다 대공의 궁에 이 정도로 가까이 왔으니 더 이상 괜히 시간을 끌면서 기운을 뺄 필요가 없었다. 
궁을 장악하고 대공을 체포한다. 
“공격!” 
그는 창을 세워 들고 말을 달려 한때 동료였던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바로 그 순간 그는 진실로 반역자가 되었다. 

전투는 길고 고통스러웠다. 
그와 부관의 군사들은 기세는 우월했으나 숫자에서 월등히 열세였다. 반대로 상대편은 어찌된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해서 당황하는 기색은 있었으나 어쨌든 반역자를 물리친다는 정당성에 입각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시간이 갈수록 아군 병사들이 눈에 띄게 지쳐가는 것을 감지하며 그는 점점 더 걱정이 되었다. 
그도 이미 창이 부러졌고, 칼은 적군을 찔렀을 때 그 몸통에 박힌 채 상대방의 말이 도망치는 바람에 잃어버렸다. 손도끼로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다가 그는 상대편 기사의 긴 창에 얻어맞고 말에서 떨어졌다. 주위에 넘어진 병사들 중에서 아무나 가장 가까운 사람을 골라서 칼을 뺏었다. 칼이 지나치게 무겁고 칼자루도 굵어서 손에 잘 맞지 않았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창을 겨누며 덤벼드는 적의 기사가 탄 말의 다리를 있는 힘을 다해 칼로 쳤다. 전속력으로 달리던 말이 공중에서 한 바퀴 돌며 등에 탔던 기사를 내동댕이쳤다. 간신히 숨을 돌리며 몸을 일으켰다가 그는 단검을 치켜들고 달려오는 병사를 발견하고 몸을 숙여 배를 베었다. 그랬다가 칼을 내리치는 기사 앞에 정면으로 나아가서 스스로 목을 내밀 뻔했다. 그는 관성을 이용해 아슬아슬하게 옆으로 피하며 기사의 옆구리에 칼을 찔렀다. 
적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 그는 잠시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 보았다. 이렇게까지 가까이 접근한 줄은 몰랐는데, 그는 자신이 궁성의 쪽문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쪽문은 주로 쓰레기를 버리고 가끔 사망자가 생기면 시신을 내가는 통로였다. 그러므로 문을 잠그지 않았고 경비도 따로 서지 않았다. 그는 성벽 옆을 돌아서 쪽문으로 다가가 손으로 밀어 보았다.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그는 안으로 들어섰다. 

쪽문에서 본궁으로 진입하는 것은 의외로 쉬웠다. 궁내의 지리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간혹 대공의 병사들과 마주치더라도 그는 방패를 들지 않았고 갑옷과 무장의 나머지 부분에는 어느 편인지 구분할 수 있는 문양이나 문장이 없었다. 길을 막으려는 병사가 있으면 “적들이 성문 앞까지 다가왔다!” 혹은 “대공은 무사하신가!” 등속을 외쳤고, 그러면 병사들은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고 보내주었다. 아는 얼굴과 마주치지만 않으면 무사히 대공의 처소까지 잠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본궁 안에 들어서서 그는 건물이 거의 빈 것을 보고 놀랐다. 평소에 궁을 지키던 대공의 측근들까지 모두 다 전투에 나선 모양이었다. 아니면 대공의 광기가 더 심해져서 측근들
까지 감옥에 갇혔거나 달아났을 수도 있었다. 
그는 계단을 올라 대공의 처소로 향했다. 
의외의 저항을 만난 것은 대공의 침실 앞이었다. 
“누구냐!” 
집무실로 향하려다가 그 소리를 듣고 그는 돌아섰다. 창을 든 병사 한 명이 혼자서 대공의 침실 앞에 서 있었다. 
“대공은 안에 계신가?” 
그가 침착하게 물었다. 병사는 일단 그에게 창을 겨누었으나 그의 평온한 모습을 보고 좀 혼란스러워진 것 같았다. 
“예…. 그렇습니다…만….” 
“반란군에 대해 중요한 소식을 가지고 왔다.” 
그는 일부러 자신 있게 성큼성큼 걸어서 병사 곁을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병사가 창으로 그의 앞을 막았다. 
“안 됩니다.” 
병사가 말했다. 창을 든 병사의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그는 눈치챘다. 
“안 됩니다.” 
병사가 되풀이했다. 
그는 팔을 뻗어 창을 든 병사의 손을 잡았다. 
“나는 너를 죽이고 싶지 않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대공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다. 비켜라.” 
병사가 창을 떨어뜨렸다. 
그는 병사의 손을 놓았다. 병사는 허둥지둥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서 아래층의 텅 빈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는 문을 열었다. 

대공은 창 밖을 바라보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그를 돌아보았다. 회색 눈동자는 이전과 다름없이 차갑고 무감정했으나 이제 그 눈에 핏발이 선 것을 그는 보았다. 
“반역자가 돌아왔군.” 
대공이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내 아내는 어디 있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공이 허리에 칼을 차고 있는 것을 눈여겨 보았다. 대공도 그의 시선을 눈치채고 천천히 손을 허리로 가져갔다. 
스르릉. 
쇠 우는 소리를 내며 칼이 뽑혀 나왔다. 그도 칼을 들어 대공을 향해 겨누었다. 칼자루가 지나치게 굵은 것이 새삼 손에 거슬렸다. 
대공이 달려들어 칼을 내리쳤다. 그는 막았다. 
공중에서 쇠와 쇠가 부딪쳐 불꽃을 튀겼다. 

“어째서 배신했지?” 
대공이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나는 너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영지도, 재산도, 귀족의 신분도…. 그런데 어째서 반역했나?”  
외치면서 대공이 그를 향해 다시 칼을 내리쳤다. 그는 옆으로 피하면서 막았다.
칼이 다시 쩡,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대공이 그의 얼굴을 향해 칼날을 내리 눌렀다. 막으려 했으나 그는 뒤로 밀리는 것을 느꼈다. 최대한 버티다가 그는 재빨리 뒤쪽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나면서 순간적으로 손에 힘을 뺐다. 대공은 자기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곤두박질쳤다. 
넘어지면서 대공은 칼을 놓쳤다. 그는 대공의 뒷덜미에 칼끝을 댔다. 
“죽여라, 반역자.” 
대공이 내뱉었다. 
“내 백성들이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제가 원해서 반역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대공의 뒷목에 칼날을 내리 누른 채로 말했다. 
“저의 반역을 대공께서 원하신 것입니다.” 
“뭐?” 
대공이 고개를 돌리며 일어서려 했다. 
그는 대공의 목을 베었다. 

대공의 잘린 머리를 손에 들고 계단을 내려왔을 때 본궁의 현관에서 그를 맞이한 것은 가득 모여든 무장한 군사였다. 그는 한 순간 긴장했다. 그러나 군인들 사이에서 말에 올라탄 아버지의 모습과 대공비의 얼굴을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반란은 그렇게 끝났다. 
공국은 이웃 나라에 넘어갔다. 대부분의 영토는 둘로 분할되었다. 궁성과 그에 부속된 영토는 대공비가 직접 다스리게 되었다. 공국의 북쪽에 있는 상당한 영지가 그에게 하사되었다. 그와 함께 대공비는 그를 궁성 전체의 경호대장으로 임명했다. 그의 아버지는 궁궐에서 금은보화와 여러 마리의 말을 얻어 매우 만족하며 아들 몫까지 두 배로 넓어진 영지를 다스리기 위해 신나게 고향으로 돌아갔다. 

경호대장으로 임명된 후에 그는 가장 먼저 궁성의 지하 감옥에 찾아갔다.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고 지하 감옥을 폐쇄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갇혀 있던 가장 밑바닥, 가장 안쪽의 어둡고 좁은 감방에서 그는 희고 풍만한 젖가슴이 아름다웠던 시녀를 발견했다. 시녀는 피투성이의 처참한 모습으로 푸른 눈을 부릅뜬 채 숨이 멎어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여인의 부릅뜬 눈을 감겼다. 그리고 언젠가 시녀가 갈색 머리의 아가씨에게 했듯이, 차가운 땅에 주저앉아서 오랫동안 죽은 동료를 품에 안고 있었다. 

논공행상(論功行賞)이 모두 끝나고 공국이 다시 평온을 되찾은 어느 날 그는 대공비를 찾아갔다. 대공비는 반가워했다. 
“어서 오세요. 무슨 일인가요?” 
그는 대공비에게 조용히 드릴 말씀이 있노라고 말했다. 대공비는 시녀들에게 잠시 나가 주기를 부탁했다. 
방 안에 단둘이 남았을 때 그는 여주인 앞에 무릎을 꿇었다. 허리에서 칼을 칼집째 끌러 바닥에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죠?” 
대공비가 걱정스럽게 다시 물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말했다. 
“제가 감히 전하께 음욕을 품었습니다.” 
대공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명 받들어 처분대로 행하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떠나라 하시면 떠나겠습니다. 벌을 내리시면 달게 받겠습니다.” 
대공비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기다렸다.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대공비가 화를 낼까 봐 불안한 것은 아니었다. 벌이 무서운 것도 아니었다. 그 지겨운 지하 감옥을 다시 열고 그를 가둔다 해도 감내할 수 있었다. 그가 정말로 두려운 것은 대공비가 왜, 언제, 어떻게 – 이유나 정황을 물어보는 것이었다. 
대공비의 상처 입은 몸, 그 아름다운 여체에 새겨져 있던 잔인한 폭력의 흔적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사실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고백할 수 없었다. 그 비뚤어진 욕정을 고백하느니 차라리 대공을 죽인 칼로 자기 목을 찌르는 편이 백 배 나았다. 
그러나 상흔으로 뒤덮인 여신의 몸에 대한 갈망을 말없이 간직한 채 평생을 참고 살아갈 용기도 그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여주인 앞에 엎드려 고개를 깊이 숙이고 눈을 감았다. 
“너는 내 편이지?” 
그는 흠칫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대공비가 다시 물었다. 
“너는 내 편이지?” 
그는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 무릎을 꿇은 채 대공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대공비의 표정은 부드럽고 어쩐지 슬퍼 보였다. 그 연약하고 섬세하고 어딘지 애처로운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하.” 
마침내 그가 대답했다. 
“저는 전하의 편입니다.” 
대공비가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살그머니 쓰다듬었다. 그는 머리를 기울여 그 손바닥에 가볍게 기댔다. 
그것이 그가 영원토록 기억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손길이었다. 

*** 
스벤이 여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부엌 창문 밖에는 부옇게 동이 트고 있었다. 
겨울의 뻬쩨르부르그는 해가 몹시 늦게 뜨고 빨리 진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오전 9시 45분. 
열 네 시간 가까이 이 북유럽 거인과 보드카를 마시며 옛날 얘기를 듣고 있었던 셈이다. 
내가 시계를 보는 동안 스벤도 창 밖을 바라보며 해가 뜨는 모습을 감상했다. 
- Ну и что дальше? (그래서 그 뒤는 어떻게 됐어?) 
내가 물었다. 
- Что дальше? Ну, как дальше, так дальше…. (뒤가 어떻게 됐냐고? 그 뒤야 뭐 어떻게든 됐지….) 
스벤이 중얼거렸다. 목소리로 보나 말투로 보나 완전히 취했다. 아쉽지만 왕비와 기사의 중세 러시아 로망스는 이쯤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정도로 나 혼자 마무리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북유럽의 근성 사나이 스벤이 완연히 취한 목소리로 이야기의 진짜 결말을 들려주었다. 

*** 
그는 대공비의 경호대장으로 충성스럽게 복무했다. 태자가 탄생한 뒤에는 대공비와 태자의 뒤에서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태자에게 말 타는 법, 사냥하는 법, 칼 쓰고 활 쏘는 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는 태자와 함께 글을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태자는 건강했고, 공국은 대체로 평온했다. 
태자가 열 다섯 살 되던 해에 대공비가 세상을 떠났다. 겨울에 폐렴에 걸려 기침을 하다가 피를 토하더니 봄이 오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 
대공비를 땅에 묻고 그 해 봄에 그는 태자의 만류도 듣지 않고 궁을 떠났다. 북쪽으로 북쪽으로 말을 달려 오래 전 대공을 죽이고 대공비를 살린 공으로 하사 받은 영지를 가로질러 바닷가로 갔다. 그곳에서 배를 띄우고 해협을 지나 그는 대공비의 고향으로 건너가서 그곳에 정착했다. 젊은 날의 대공비가 그러했듯이 여신의 몸에 푸른 눈과 빛나는 금발을 지닌 아름다운 아가씨를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 
- 그리고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내가 물었다. 
- 오래 살기는 사실 오래 살았지, 별로 그렇게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스벤은 여전히 취한 목소리로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 대공비를 평생 잊지 못하고, 아내 모르게 그 이야기를 글로 써서 남겼어. 
그리고 스벤은 방향이 잘 맞지 않는 술 취한 손가락으로 글라골 문자가 빽빽이 적힌 양피지 조각을 집어 흔들었다. 나는 그가 휘두르는 양피지 귀퉁이에 머리를 맞지 않기 위해서 한쪽으로 피해야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스벤이 말했다. 
- 말이야. 대공비가 아직 살아 있었을 때, 그는 태자하고 대공비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갔거든. 그래서 대공비하고 어린 태자가 말을 타고 앞서서 달리고, 그가 그 뒤에서 말을 타고 호위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대. 그런 그림 알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실망할 줄 알았는데, 스벤은 반대로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 그럴 줄 알았어! 찾기 힘든 그림이야. 그런데 내가 찾아냈어. 아주 오랫동안 찾고 또 찾아서 돌아다녔는데, 드디어 발견했단 말이야. 
그리고 스벤은 글라골 문자가 적힌 양피지를 다시 한 번 휘둘렀다. 
- 그림이 있으면 이건 필요 없으니까, 네가 가져도 돼. 난 그림만 있으면 충분하니까. 
- 그럼 러시아에는 그 그림을 찾으러 온 거야? 
내가 물었다. 
스벤은 대답 대신 보드카 병을 집어 들었다. 한 병은 완전히 비었고, 다른 한 병도 밑바닥에 한 모금 정도 분량밖에 남지 않았다. 스벤은 그 병을 집어서 입에 대고 남은 보드카를 들이마셨다. 다 마신 뒤에 빈 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워낙 취해서 내려놓다가 집어 던지거나 깨뜨릴 줄 알았는데, 놀랄 만큼 조심스럽게 무사히 놓았다. 
- Я хотел увидеть её хоть раз ещё... (그녀를 한 번이라도 다시 보고 싶었거든….) 
스벤이 다른 빈 병도 바닥에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 Ты тоже думаешь, что я предатель? (너도 내가 반역자라고 생각해?)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다음 순간 스벤은 식탁 위에 엎드린 채 코를 골고 있었다. 

*** 
스벤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다. 
그가 식탁 위에 엎드려 코를 골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도 내 방으로 자러 들어갔다. 저녁에 잠이 깨어 부엌에 나와 보니 스벤은 사라지고 양피지와 보드카 빈병만 남아 있었다. 방이 비고 신발도 사라진 걸 보니 스벤은 내가 자는 사이에 떠나버린 것 같았다. 

*** 
문제의 양피지는 어떻게 됐냐 하면, 한국에 가지고 오려다가 공항에서 뺏겼다. 러시아 공항에서는 (다른 데도 마찬가지지만) 보안검색을 하면서 "수상해 보이는 사람"을 무작위로 불러서 가방을 열어보는데, 나는 어쩐지 그럴 때마다 걸리는 팔자라서 이번에도 걸려 버렸다. 이상한 문자가 적힌 양피지가 눈에 띄자마자 보안요원들은 우르르 몰려와서 짐을 몽땅 뺏고 나를 모든 항공 승객들의 악몽인 조그만 하얀 방에 가두었다. 그곳에서 무서운 제복을 입고 의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노려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나는 절대로 러시아 문화재를 해외에 밀반출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으며 양피지는 여행 중에 만난 사람한테 얻었는데 싸구려 가짜인 줄 알았다고 입이 닳도록 수십 번 되풀이해 설명해야만 했다. 결국 제복 입은 모르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속옷 등속이 든 가방을 홀랑 털리는 수모를 당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하마터면 비행기까지 놓칠 뻔했다. 
그런 소동을 겪었으니 솔직히 러시아에 다시 입국이 허락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뜻이 있는 자에게 길이 있는 법이니 공항에서 미운털이 박혔다면 블라디보스톡에 배를 타고 가거나 폴란드를 통해서 기차 타고 들어가도 어떻게든 되긴 될 거라고, 일단 지금으로서는 태평하게 생각하고 있다. 
스벤은 떠났고 양피지도 뺏겼으니, 다음 번에 어떻게든 러시아에 가게 되면 스벤이 말한 그림이라도 꼭 찾아서 내 눈으로 봐야겠다고 나는 결심한 것이다. 나 자신의 호기심을 위해서, 혹은 이 이야기의 확실한 결말을 위해서라기 보다도, 사랑하는 여인을 잊지 못해 여전히 세상 어딘가를 떠도는 천 년 전의 슬픈 반역자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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