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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Do You Dream

2013.06.30 23:1506.30

Do You Dream


 

그는 여자를 범하고 있었다.
여자는 그의 몸 아래 있었다. 그는 여자의 몸 속에 있었다. 여자는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은 채 거칠게 움직였다.
헉헉대는 자신의 숨소리뿐, 다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의 왼손이 움켜쥔 여자의 오른쪽 손목은 저항하지 못한 채 힘없이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다만 여자의 왼쪽 팔뚝을 감싼 깁스는 그의 오른손이 감싸 쥐기에 너무 두꺼웠다. 비현실적인 정적 속에 홀로 짐승같이 헐떡이면서 그의 머릿속에 가끔씩 오른손 아래 짓눌린 여자의 깁스가 거추장스럽다는 생각이 희미하게 떠오르려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것은 모양 잡힌 생각이라기보다 그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연약하고 희미한 느낌과는 비할 수도 없이 더 강력한 감각이 그를 휩싸고 있었다. 마침내 온몸이 하얗게 폭발하는 순간이 왔을 때 그는 자기도 모르게 힘껏 여자를 내리눌렀다.
여자가 눈을 떴다. 까만 눈동자가 그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꿈에서 깬 뒤에도 그는 한참이나 숨을 몰아 쉬며,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움직이면 안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일어나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다. 욕망 – 결단코 자신의 것이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인정할 수 없는 욕망은 호흡이 진정된 뒤에도 지나치게 오랫동안 그의 몸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혹스러운 것은 그 욕망이 어째서, 어디에서 생겨났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를 사로잡은 것은 일시적인 충동의 수준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당위였다. ‘당위’라는 표현이 정확하다고 그는 머릿속으로 자기 자신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쾌락을 얻기 위해, 혹은 신체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는 목적이나 과정, 상황에 따른 판단이나 통제 등은 애초에 욕구가 자신의 존재에서 비롯되어 그 조그만 존재 안에 속할 때에나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를 지배하는 것은 거대하고 강력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논리나 반박을 넘어서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었다. 그가 느끼는 당위는 올바르다는 의미에서 당위가 아니라 자신의 통제나 판단과 상관없이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하기 때문에 당위였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여자의 집을 향해 운전해 가면서 그는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생각하고 있었다.
일단은 민원. 모든 것은 항의 민원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조사. 징계위원회. 감봉. 강등. 정직.
파면.
행동의 단계에 따라 결과의 단계도 달라질 것이라고 그는 자신을 안심시켰다. 상황에 따라서는 별다른 일 없이 끝날 수도 있다. ‘별다른 일’이 생기는 단계까지 가지 않으면 될 것이라고 그는 애써 자기 자신을 향해 주장했다. 그저 한 번 가서 보려는 것뿐이다. 모든 것이 괜찮은지, 무사한지 확인하려는 것뿐이다. 사건 담당자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전부 거짓말이라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거짓말, 하찮은 거짓말이다.
그를 휘감은 욕망, 그 거대한 당위 앞에서는 모든 것이 하찮았다.


취조실에서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큰 소리로 떠들어댄 것은 여자의 남동생이었다.
아이는 네 살이었다. 여자는 언제나 하듯이 유아원에서 아이를 데리고 집에 왔다. 간식을 먹여 낮잠을 재우고 다시 일하러 갔다. 여자의 남동생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고 했다. 여자가 일을 끝내고 돌아올 때까지 보통 그렇게 텔레비전을 보거나 인터넷 서핑 같은 걸 하면서 시간을 때운다고 여자의 남동생은 말했다.
그러나 상황은 보통 때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우선 여자의 일이 예정보다 늦게 끝났다. 늦었기 때문에 여자는 서둘렀고, 서둘렀기 때문에 부주의했고, 부주의했기 때문에 사고를 당했다. 그래서 여자가 남동생에게 전화를 한 것은 예상보다 한참이나 늦어진 시간이었다.
여자의 남동생은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
여자의 남동생에 의하면 아이가 잠에서 깨어 엄마를 찾기 시작했다. 여자의 남동생은 여자가 미리 일러준 대로 냉장고에 있는 저녁식사를 데워서 아이에게 주었다. 그리고 같이 텔레비전을 보았다. 혹은 보려고 했다.
그러나 아이는 저녁밥을 거부하고 다시 엄마를 찾기 시작했다. 찾아도 엄마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는 울었다. 달래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여자의 남동생은 말했다. 아무리 달래도 아이는 고집을 부리고 떼를 쓰며 더 크게 더 심하게 울어댔다. 여자의 남동생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이가 숨을 못 쉬고 컥컥거렸다. 여자의 남동생은 아이가 울다가 제 풀에 기침을 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울음만 그치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아이는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래서 여자의 남동생은 구급차를 불렀다.
구급대원들이 도착했을 때 아이는 여자의 남동생이 말한 대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여자의 남동생은 구급차를 부를 때 아이의 색깔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아이는 짙은 자주색이었다. 얼굴과 몸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퉁퉁 부었고 생명을 잃은 코와 입에서는 아직도 토사물과 거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여자의 남동생은 유아살해 혐의로 체포되었다.


여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조의를 표했을 때 여자는 울지 않았다.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서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남동생이 자주 따님을 돌봐주는 편입니까?”
그가 물었다. 여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전에도 남동생이 따님을 학대하거나 방치한 적이 있습니까?”
“… 할 거예요.”
여자가 고개를 들지 않고 속삭였다. 그가 되물었다.
“예?”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할 거예요.”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여자의 눈이 그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그 검은 눈동자가 너무나 또렷하고 절박해서 그는 순간 깜짝 놀랐다.
“… 남동생이 따님을 죽인 걸 알고 있었습니까?”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여자와 남동생을 같은 취조실에 넣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여자는 계속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하지 않았다. 동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남동생이 뭐라고 말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의 남동생은 계속 큰 소리로 말했다. 여자는 남동생을 쳐다보지 않은 채 짧게 대꾸했다. 남동생은 입을 다물었다.
경찰서 관내에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급히 찾아보니 아주 없지도 않았다. 한국계 경관은 녹화된 영상을 보고 간단하게 말했다.
“자기는 아무 것도 안 했다는데요. 아무 것도 안 했는데 아이가 혼자 울다 쓰러졌다고요. 남자가 계속 그 말만 되풀이합니다.”
“여자는 뭐라고 하는데?”
그가 물었다.
한국계 경관은 녹화 영상을 몇 번 다시 돌렸다. 여자가 작은 소리로 말해서 알아듣기 힘들다고 했다. 한참 만에 경관이 말했다.
“조용히 하라는데요.”
“그게 끝이야?”
경관이 통역했다.
“네 얼굴 보고 싶지 않아.”
녹화된 영상 속에서 여자가 그렇게 말하자 큰 소리로 고함치던 남동생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이후로 여자와 여자의 남동생은 서로 등을 돌리고 계속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어째서인지 그는 아이의 죽음에 여자도 관여했을 것이라고 조금 더 강하게 확신했다.


여자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그는 한동안 망설였다. 망설이려고 했다. 그러나 손은 이미 시동을 끄고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밖에 나와서 여자의 집 건너편에 서 있었다.
한밤의 거리는 어두웠고, 주택가는 인적 없이 조용했다. 그는 길을 건너 여자의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 앞에는 조그만 조명등이 켜져 있었다.
흐릿한 주황색 불빛 속에 서서 그는 마지막으로 생각을 가다듬었다. 일 때문이라고 해도, 수사 때문이라고 해도, 새벽 두 시 사십 분에 여자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가도 될 만한 정당하고 상식적인 사유가 그에게는 없었다.
손을 들어 현관문의 문고리를 돌리려다가 그는 눈을 감았다. 저절로 움직이려는 손을 이를 악물고 다시 내렸다. 온 힘을 다해 돌아섰다. 자기 몸을 자신의 생각으로 통제하기가 어째서 이렇게 힘든지 알 수 없었다.
돌아섰을 때, 그의 눈앞에 여자가 서 있었다.
- 그런 생각은 떠올리지 않는 게 좋아요.
여자가 말했다.
그는 입을 열었다. 뭔가 말하려 했다. 뭘 말하려는지 자신도 잘 몰랐다. 변명, 혹은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 때 여자가 다시 말했다.
- 어떤 생각은 떠올리지 않는 쪽이 좋아요.
그리고 여자는 그의 눈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가 꿈에서 깼을 때 시계는 여섯 시 삼십칠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오늘이 무슨 요일이고 며칠인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현실인지 아니면 계속 이어지는 꿈인지 확실히 구분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서둘러 씻고 황급히 옷을 걸쳐 입고 집을 나섰다. 여자의 집 주위에 아직도 접근금지 테이프가 둘러쳐져 있고 집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들어온 김에 그는 집안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욕실의 샴푸나 비누, 치약 등은 모두 어린이용이었고, 그가 찾아낸 가장 독한 약품은 구강청정제 정도였다. 부엌 벽장에서 그는 대량의 베이킹 소다가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굉장한 양의 베이킹 소다 외에 평범한 가정에서 사용할 만한 독극물 – 그러니까 세제, 표백제, 배수구 뚫는 용해제 등은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사용하고 나서 버렸을 수도 있다. 집 주변을 다시 찾아보면 뭔가 나올지도 모른다. 사실은 평범해 보이는 샴푸나 비누도 어린 아이에게 먹인다면 독극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검시관에게서 아직 검사 결과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독극물을 찾아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벽장을 둘러보면서 깨달았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 아침 여덟 시 이십사 분. 보고서를 내놓으라고 검시관에게 전화하기에는 아직 좀 이른 시간이다. 어차피 조금 더 기다리면 검사 결과는 오늘 중에 그에게 전달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집의 나머지 방들도 다시 한 번 둘러보기로 했다.


거실에는 그다지 눈에 띄는 점이 없었다. 그는 여자의 남동생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는 진술을 떠올렸다. 텔레비전을 켜자 DVD의 메뉴 선택 화면이 나타났다. 재생을 누르자 싸구려 공포영화가 시끄러운 효과음을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조금 지켜보다가 텔레비전을 껐다.
여자의 침실에서 책장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전화기가 울렸다. 그는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동료였다.
“현장. 왜, 뭐 나온 거 있어?”
“그 여자 다니는 대학원 말이야. 보안팀에서 출입기록 보내 왔거든.”
“출입기록? CCTV 자료는?”
“그게, 건물 근처에는 카메라가 몇 군데 있는데 입구부터 건물 안쪽에는 없어. 학생들이 학교에서 사생활을 침해한다고 반대를 해서 못 달았대.”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럼 쓸만한 게 없잖아?”
“아니, 있어. 들어봐.”
동료의 목소리가 조금 활기를 띠었다.
“환경학 대학원 건물은 모든 문에 보안장치가 돼 있어서 학생증을 그어야만 문을 열 수가 있어. 들어올 때도 그어야 되고 나갈 때도 그어야 돼. 그러니까 누가 몇 시에 드나들었는지 기록이 전부 남아 있거든.”
“그래? 그럼 여자는?”
말하면서 그는 자신의 목소리도 함께 생기를 띠는 것을 느꼈다. 동료가 설명했다.
“오후 네 시 삼십육 분에 학생증 긋고 나간 기록이 있어. 그 뒤로는 다시 들어온 기록이 없고.”
“확실해?”
“확실해.”
그는 잠시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그 여자 학생증 긋고 나갔을 수도 있잖아? 나중에 그 여자가 다른 사람 학생증으로 긋고 들어갔을 수도 있고.”
“건물 안에는 카메라가 없어도 건물 주변에는 있다고 내가 그랬잖아.”
동료가 느긋하게 말했다.
“네 시 사십 분쯤 캠퍼스를 벗어난 뒤로 대학원 건물 주변은 물론이고 학교 구내 그 어느 CCTV에도 찍힌 사실이 없어. 학교로 돌아왔으면 어딘가에는 찍혔어야 되잖아?”
“그렇겠지…”
그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물었다.
“병원에 있었던 건 확실해?”
“그건 확실해.”
동료가 말했다.
여자는 밤 아홉 시 십육 분에 팔이 부러진 채로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 여자의 집에서 아이가 토사물과 점액과 거품을 쏟으며 퉁퉁 부은 모습으로 바닥에 쓰러져 경련하던 순간에 여자는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둘러싸여 골절 진단을 위해 엑스레이 검사를 받는 중이었다. 아이가 사망선고를 받던 순간에 여자는 부러진 팔에 깁스를 씌우고 있었다. 여자의 알리바이는 확고했다.
그러나 그 직전, 유아원에 들러 아이를 데려간 오후 약 다섯 시 이후부터 밤 아홉 시까지 여자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네 시간이면 집에 들러서 아이에게 독극물을 먹인 후 다시 나가서 독약이 아이 몸에 퍼질 때쯤 일부러 사고를 당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전화를 끊으려다가 그는 물었다.
“독극물 검사는? 결과 나왔어?”
“아직. 나오면 알려줄게.”
전화를 끊으려는 그에게 동료가 물었다.
“그런데 아이 엄마 행적은 왜 조사하려는 거야? 알리바이는 그렇다 쳐도 동기가 없잖아? 그 남동생 쪽이 더 확실하지 않아?”
“그냥, 좀 켕겨서.”
대충 얼버무리고 전화를 끊은 뒤에 그는 다시 여자의 책장을 들여보았다.


텔레비전 소리가 시끄러웠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싸구려 공포영화가 방영되고 있었다. 화면이 온통 자주색이었다. 외계 괴물의 독침을 맞은 등장 인물 하나가 온몸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오른 채 코와 입에서 거품과 토사물을 쏟아내며 땅에 쓰러져 몸부림쳤다.
- 어떤 꿈은 꾸지 않는 쪽이 좋아요.
그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여자가 서 있었다.
여자가 깁스를 한 왼팔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그 팔을 잡았다. 그러자 깁스가 끝나는 곳에서 여자의 왼팔이 뚝 끊어졌다.
깁스 속에서 여자의 끊어진 왼팔이 스르륵 흘러나왔다. 바닥에 소리 없이 떨어졌다. 그리고 여자의 왼팔은 텔레비전 화면 속 싸구려 공포영화의 등장인물처럼 자주색으로 부풀어올랐다.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자주색으로 부풀어오른 여자의 왼팔은 바닥을 구르며 몸부림치면서 토사물 대신 끈끈한 거품을 쏟아냈다.
여자의 검은 눈동자가 그를 쳐다보았다.
- 언제부터 꿈꾸었나요?


그는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분명히 위층 침실에서 여자의 책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자신이 언제 거실로 내려왔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텔레비전은 꺼져 있었다. 주위는 조용했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
여덟 시 이십 사분.
그는 전화기를 꺼냈다. 화면의 숫자는 이제 막 여덟 시 이십오 분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는 도망치듯 여자의 집에서 뛰쳐나왔다.


서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 아홉 시가 채 되지 않았다. 동료도 이제 막 들어서려는 참이었다. 그가 얼굴을 보자마자 사건 당일 여자의 행적에 대한 자료를 요구하자 동료는 황당하다는 표정이 되었지만 어쨌든 팩스를 확인하고 자리에 앉아서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확인했다. 그가 이미 받은 자료와 없어서 받지 못한 자료, 그리고 여자의 행적에서 증명이 되는 부분과 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줄줄 이야기하자 동료는 수신된 자료를 확인하면서 점점 더 경악하는 표정으로 변했다.
“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 한두 번도 아니고….”
그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동료에게 물었다.
“그 여자 지금 어디 있어?”
“같은 과 친구가 와서 데리고 갔어. 왜?”
“도로 데려오라고 해. 확인할 게 있어.”


여자는 취조실 책상에 머리를 대고 엎드려 있었다. 그가 들어서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까만 눈동자가 다시 한 번 정면으로 그를 향했다.
그리고 여자는 곧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는 여자가 엄청나게 피곤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여자의 얼굴은 푸석푸석했고 눈에는 붉게 핏발이 서 있었다.
핏발 서고 피로에 지친 그 눈은 이전에 보았던 까맣고 또렷한 눈동자와는 전혀 달라 보였다. 꿈 속에서 자신의 몸 아래 깔려 있던 여자의 모습을 문득 떠올리고 그는 얼굴을 붉히지 않기 위해 애썼다.
“몇 가지 질문에 더 대답해 주시면 됩니다.”
그는 가능한 한 부드럽게 말했다. 여자는 이전처럼 시선을 내리깔고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협조해 주시면 더 빨리 끝날 겁니다.”
그가 달래듯이 말했다. 여자는 여전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물었다.
“사건 당일 저녁 다섯 시부터 밤 아홉 시 사이에 어디에 있었습니까?”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오후 네 시 삼십육 분에 대학원 건물을 나간 후로 캠퍼스에 다시 출입한 기록이 전혀 없어요. 남동생에게는 일하러 간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지켰다. 그가 물었다.
“연구실이 아니면 어디로 일하러 간 겁니까?”
여자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물었다.
“집으로 가서 아이한테 독약을 먹이고, 남동생한테 아이를 봐 달라고 부탁한 뒤에 집을 나왔죠?”
여자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고개가 살짝 좌우로 흔들렸다.
“그리고 집을 나와서 일부러 사고를 당했죠? 그렇게 하면 아이가 중독 증상을 일으켜서 사망할 때쯤 당신은 병원에서 확실한 알리바이를 만들고 있을 거라고 계산했을 테니까요.”
여자가 다시 시선을 들지 않은 채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환경학을 전공한다고 했죠? 집에 책이 굉장히 많더군요. 그 책을 다 읽었습니까?”
그리고 그는 일부러 말을 끊었다. 여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환경에 해로운 독성물질에 대한 책이 아주 많던데요.”
여자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부드럽게 물었다.
“아이를 왜 죽였습니까?”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핏발선 눈과 창백한 얼굴에서 그는 여자가 지쳤다는 것 외에 다른 감정은 전혀 읽을 수 없었다.
여자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는 기다렸다.
“난 그런 생각을 떠올린 적이 없어요.”
여자가 속삭였다.
“그런 생각은, 한 번도, 떠올리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럼 범행은 남동생의 생각이었냐고 그는 물으려 했다. 그러나 여자가 말을 이었다.
“당신도 봤죠?”
여자의 창백한 뺨에 홍조가 돌았다. 눈동자가 까맣게 불타올랐다.
“텔레비전, 영화, 당신도 봤죠? 그, 바보 같은, 싸구려, 공포영화…. 그런 걸, 계속, 생각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여자는 뭔가 대답을 바라는 것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속삭이는 소리로 덧붙였다.
“머릿속에, 눈앞에, 보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리고 여자는 깁스에 감싸인 왼쪽 팔뚝을 취조실 책상 위에 천천히 올려놓았다. 호소하듯 그를 향해 손바닥을 벌렸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의 팔뚝이 끊어지며 깁스에서 빠져 나온 왼팔이 바닥에 떨어져 자줏빛으로 부풀어오르던 광경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내 그의 등 뒤의 텔레비전에서는 싸구려 공포영화의 요란스러운 효과음이 흘러나왔다. 화면 속에서는 외계 괴물의 독침을 맞은 등장인물이 자주색으로 부풀어오른 채 죽어갔다….
“3가의 마마식당에서 일했어요.”
여자가 갑자기 말했다.
“다섯 시에 아이를 유아원에서 데려왔어요. 그리고 여섯 시부터 아홉 시까지 식당에서 일했어요.”
말하면서 여자의 얼굴에 다시 짙은 피로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갈라졌다.
“일 끝내고 나오다가… 부엌에서 미끄러졌어요. 마마…. 식당 사장님이 병원까지 태워다 줬어요.”
그리고 여자는 눈을 감고 취조실 책상 위에 머리를 대고 엎드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자가 말한 3가의 한국인 음식점에 찾아갔을 때 여주인과 종업원들은 경찰이라는 말을 듣자 몹시 경계했다. 그는 자신이 이민국 직원이 아니며 종업원들의 체류자격이나 노동비자 소지 여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강조해야만 했다.
종업원들이 입을 열기 시작한 것은 그가 ‘유아살해’라는 단어를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식당 여주인과 종업원들 모두 입을 모아 여자가 절대로,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흥분했다. 그리고 여주인과 몇몇 종업원들은 여자가 사건 당일 저녁 여섯 시부터 아홉 시까지 세 시간 내내 그곳에서 일했다고 확실하게 증언했다. 원래 일하는 날이 아닌데 여종업원 한 명이 나오지 못하게 돼서 여자가 임시로 불려왔다. 일을 끝내고 서둘러 집에 가려다가 뒷문으로 통하는 주방 복도에서 미끄러져 팔을 다쳤다. 여자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팔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몹시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식당 여주인이 억지로 병원에 데려다 주었다.
이 모든 증언이 여자의 말과 일치했다. 여자는 어린 딸을 혼자 키우며 변변치 못한 남동생도 자기가 먹여 살리다시피 했다. 그래서 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비자 규정을 어기고 학교 밖에서 허가되지 않은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외에 여자가 법을 어기거나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서에 돌아와보니 검시관의 보고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시관은 그가 기대했던 것은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아이의 체내에는 독극물이 없었다. 독성물질로 인해 생겼을 법한 내장기관 손상 등의 다른 흔적도 없었다. 멍든 곳도, 상처도, 눈에 띄는 흉터도 없었다. 물론 아이의 몸이 전체적으로 부어 오른데다 피부도 심하게 변색돼서 부검이 힘들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독극물이 주입되거나 학대를 당한 사실을 확증할 만한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는 검시관에게 전화해서 항의했다.
“어떻게 아무 흔적도 없이 전부 정상일 수가 있냐고요?”
“나도 답답해 죽겠어.”
검시관이 대답했다.
“그렇지만 아무 것도 없는 걸 어떡해. 없는 걸 만들어낼 수는 없잖아.”
“그럼 피부가 변색되고 온몸이 부어 오른 건 대체 뭡니까? 그건 어떻게 설명할 거예요?”
“보고서에 다 썼잖아. 심한 알레르기 같은데 이런 건 처음 봐.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어.”
“이런 알레르기가 어디 있어요? 딱 보면 독약인데?”
“이봐, 난 ‘딱 보고’ 결론을 내리는 게 아냐. 독극물 검사에서 아무 것도 안 나왔다고.”
“그렇지만….”
검시관이 설명했다.
“실제로 독약이라면, 이 정도로 무시무시한 효과를 나타내면서 이 정도로 빨리 대사가 돼서 독극물 검사에 흔적조차 안 남기는 독약은 아주 드물다고. 내가 알지도 못하는 종류의 새로운 독약이면 몰라도. 그 여자 집에서 그런 독약 발견하면 가져와. 부검결과 다시 써줄 테니까.”
“뭐 좋아요, 그럼 알레르기라고 칩시다.”
그가 양보했다.
“일부러 알레르기를 일으키게 만들었으면요? 그랬을 가능성도 있잖아요?”
“가능성은 항상 있어. 현실성이 없어서 문제지.”
검시관이 투덜거렸다.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이런 반응을 일으키는지 그걸 모르겠단 말이야. 간식으로 먹은 요구르트하고 사과 때문에 이 지경이 된 것 같진 않고. 호흡이나 피부를 통해서 뭔가 접촉했을 수도 있지만.… 이런 사례는 들어본 적도 없어.”
“호흡이나 피부요?”
그는 잠깐 흥분했다.
“그럼 알레르기가 아니고 독극물일 수도 있잖아요?”
“글쎄 아이 몸에서 독극물이 검출이 안 됐다니까. 몇 번을 말해?”
검시관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애 삼촌이 옆에 있었다며. 호흡이나 피부를 통해서 이 정도 강력한 독극물에 노출됐으면 삼촌만 멀쩡할 수가 없잖아?”
그는 실망했다.
“그럼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내가 형사야?”
검시관이 드디어 짜증을 냈다.
“직접 와서 나 대신 부검해. 그럼 내가 사건 수사 해줄 테니까.”
전화를 끊고 그는 아이가 살아 있었을 때의 의료 기록을 살펴보았다. 기록에 따르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아이는 알레르기를 일으킨 적이 없었다. 발육 상태도 정상이고 감기 등속 이외에 별다른 질병을 앓은 적도 없었으며 예방접종도 제때 모두 마쳤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동료가 말했다.
“잘 해야 학대나 방임이겠네. 운 좋으면 그냥 풀려날 수도 있고.”
그리고 동료는 위로하려는 듯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어린애들 관련된 사건은 항상 뒷맛이 나쁘지만…. 어쩌겠어. 어쨌든 끝났잖아?”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아이가 입고 있던 옷가지를 돌려받았을 때도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유품을 손에 쥐고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했다.
“남동생은 방임에 의한 과실치사로 기소될 겁니다.”
그가 설명했으나 여자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이의 옷을 손에 쥔 채 고개를 숙이고 그의 책상 옆 허공의 어느 지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따님의 시신은….”
그가 ‘시신’이라고 말했을 때 여자가 갑자기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메마른 검은 눈동자에 말이 막혀 그는 더 이상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입을 다물고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뒤에 여자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여기하고 여기… 아래쪽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여자는 서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여자에게 괜찮냐고 물어보려다가 뒤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여자를 따라서 시선을 돌렸다. 경관들이 여자의 남동생에게 수갑을 채워서 데리고 나가는 중이었다.
여자는 남동생을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무표정한 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남동생도 여자를 쳐다보았다. 뭔가 말을 할 듯이 입을 벌렸으나 남동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뭔가 말하려 했으나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끌려나가면서, 여자를 쳐다보면서 남동생은 점점 더 창백해지고 점점 더 겁에 질린 표정이 되었다.
남동생이 복도 밖으로 사라지고 나서 여자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눈 앞의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여자의 상태에 대해 불안해지기 시작했을 때 여자가 갑자기 물었다.
“화장실이… 어디죠?”
그래서 그는 여자를 화장실로 안내했다.


여자화장실 앞에 서서 그는 무척 바보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화장실 앞에서 여자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자기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다.
화장실 안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그의 상념은 중단되었다.


여자는 변기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가 들어서자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눈물방울이 눈에서 끊임없이 흘러 떨어졌다.
그는 휴지를 풀어서 끊어서 여자에게 내밀었다. 여자는 휴지뭉치를 기계적으로 받아 들고 아무렇게나 얼굴을 문질렀다. 그 사이에도 눈물이 쉬지 않고 흘러내려 여자의 창백한 얼굴을 적셨다.
“아이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바보 같죠.”
여자가 흐느낌 사이로 속삭였다.
“사건이 끝나면…. 이런 일이 모두 끝나면…. 끝났으니까…. 아이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여자는 이미 흠뻑 젖어버린 휴지 뭉치로 눈을 닦아내며 속삭였다.
“그렇게 믿었어요…. 그걸 보았어요…. 그 애가 돌아오는 걸, 보았는데….”
여자는 품에 안고 있던 아이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눈앞에서 보았어요…. 그 애가, 나한테, 돌아오는 걸….”
눈물방울이 아이의 옷에 뚝뚝 떨어져 점점이 자국을 남겼다.
“그 애는…. 내 아가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 거죠…. 그렇죠….”
그는 고개를 저었다.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무시무시한 비명이었다. 칼날이 심장을 끊는다, 라고 그는 앞뒤 없이 생각했다.
화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비명을 듣고 놀란 경관들이 뛰어들어왔다. 그는 손짓으로 괜찮다, 알아서 할 테니 모두 나가라고 신호했다. 경찰관들은 미심쩍다는 표정이었으나 어쨌든 하나 둘씩 모두 도로 나갔다.
심장을 끊는 통곡이 진정될 때까지, 그는 줄곧 여자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여자를 차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아이가 죽은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여자는 달리 어디로 가야 할지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여자의 집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여자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죽은 아이의 옷을 품에 꽉 껴안고, 젖은 얼굴에 붉게 부은 눈으로 멍하니 앞을 응시할 뿐이었다.
여자의 왼팔은 여전히 깁스에 감싸여 있었다. 깁스가 눈에 들어오자 언젠가 꿈속에서 오른손으로 그 깁스를 내리눌렀던 거추장스러운 느낌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그 느낌은 희미하고 연약했으나 이상할 정도로 끈질겨서, 그가 아무리 생각을 돌리려 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뒤이어 여자의 눈동자, 자신을 정면으로 올려다보던 검은 눈, 자신의 몸 아래 깔려 있던 여자 몸의 느낌이 감각 속에, 실재하지 않았던 기억 속에 하나씩, 분명하게, 확실하게, 현실의 기억보다 더 생생하고 뚜렷하게 되살아났다. 헐떡이던 숨소리, 거친 움직임, 그리고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폭발….
“안 해요.”
여자가 조용히 말했다. 그는 흠칫 놀라서 여자를 쳐다보았다.
“안 해요.”
여자가 다시 말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그는 시선을 피했다. 눈앞의 도로를 응시했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른 끝에 그가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여자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어색한 침묵 속에 차가 여자의 집 앞에 도착했다. 그가 시동을 끄고 안전벨트를 풀려고 했을 때 여자가 갑자기 말했다.
“매혹이라고 생각했던 게 사실은 이해일 때도 있어요.”
그는 안전벨트를 잡은 채로 여자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여자가 속삭이듯 조용히 말을 이었다.
“사람이 다른 사람과 진정으로 소통한다는 건 아주 드문 일이니까요.”
“예외적인 경우만 빼고.”
그가 덧붙였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외적인 경우니까, 이끌리는 거예요.”
그리고 여자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뭔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기다렸다.
여자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전 남편… 아이 아빠는, 아이한테 자주 화를 냈어요.”
여자가 천천히 말했다.
“흥분하지 않았을 때는 그런 대로 잘 조절하는 사람이었지만…. 누구나 화가 나면, 흥분하면…. 강하고 뚜렷한 생각들을 자기도 모르게 떠올리게 돼요.”
‘강하고 뚜렷한 생각’이라는 단어들을 여자가 입 밖으로 내뱉은 어조와 방식 때문에 그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 사람은… 생각을 본다는 게 어떤 건지 잘 몰랐어요…, 잘 자각하지 못했어요.”
여자가 천천히 끊어질 듯 속삭이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이를 돌봐준다는 건 힘든 일이니까, 아주 힘들고…. 때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니까….”
여자는 말을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비명을 지를 듯이 입을 크게 벌렸다. 그는 긴장했다.
여자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곧 이전처럼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잘 모르더라도, 아무리 힘들더라도…. 자기 아이에 대해서 – 아니, 누구 아이든, 자기 아이가 아니더라도.... 어른인데….”
여자는 다시 입을 크게 벌렸다. 숨쉬기 힘든 것처럼 한껏 공기를 빨아들였다.
“어른은… 어린 아이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아야 하잖아요…. 어른인데…. 아이는, 모르는데….”
여자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말이 점점 빨라졌다.
“아이는, 모르잖아요…. 자기가 뭘 보는지, 그걸 왜 보는지…. 어떤 게 자기 생각이고, 어디서부터가 전달된 생각인지… 자기가 사랑하고 의존하는 어른들이 왜 자기를 그렇게 보는지, 왜 자기한테 그런 생각을 전달하는지, 아이는 이해를 못 하잖아요….”
여자의 목소리가 비명처럼 높아졌다. 여자는 말을 멈추고 다시 심호흡을 했다.
그는 사건을 수사하는 내내 아이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서 물었다.
“아이 아버지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 사람이 있게 되리라고 내가 예견한 곳에 있어요.”
여자가 건조하게 진술했다.
그곳이 어디인지 물으려다가 그는 여자의 눈을 보고 그만두었다.
여자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품에 안은 아이의 옷을 내려다보는 것 같기도 했고, 왼쪽 팔뚝을 감싼 깁스 안을 꿰뚫어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안전벨트를 풀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여자의 안전벨트도 풀어주려고 했을 때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내 동생에 대해선 아무런 증거도 찾아내지 못했죠?”
그는 내키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은 얼마 안 가서 풀려나겠죠?”
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풀려나면, 동생은 집으로 돌아오나요?”
“아마 그렇게 될 겁니다.”
그는 세 번째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차 앞유리창 바깥의 허공을 응시하며 꿈꾸듯이 속삭였다.
“동생이 풀려나서 돌아오면, 나는 동생의 죽음을 볼 거예요.”
그는 경찰로서 훈련된 본능에 따라 반사적으로 뭔가 경고를 하려 했다. 그러나 막상 입을 열었을 때 그 경고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흘러나왔다.
“당신이 그걸 보면, 내가 꿈을 꿀 겁니다.”
그러자 여자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고 웃었다.
지치고 서글픈 웃음이었다. 그러나 미소 짓는 여자는 아름다웠다.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여자가 말했다.
여자의 웃음도, 그런 대답도 그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적절한 반응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가 당황하는 사이에 여자는 물이 흘러나가듯이 소리 없이 차에서 내렸다. 여자의 등 뒤로 가볍게 탁, 소리를 내며 차 문이 닫혔다.
여자의 가느다란 뒷모습이 천천히 집으로 걸어가는 이 순간을 나중에라도 원할 때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도록, 그는 오랫동안 마음을 다해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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