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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찾아드립니다



선은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믿었다. 서울에 사는 사람과 서울로 가는 중인 사람.
선의 가족은 후자에 속했다. 두 딸을 어떻게든 서울 언저리에서라도 교육시키려 열심이었던 어머니의 진두지휘 하에 온 식구가 대전에서 수원으로, 수원에서 부천으로 일사분란하게 옮겨가기는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선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서울행은 영영 교착 상태에 빠졌고, 부천은 그대로 선의 본가가 되었다.
선은 부천 집을 ‘집구석’이라고 불렀다. 이를테면, 장사가 망해서 진 빚을 갚고 있고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갚아야 할 것 같은 집구석. 홈쇼핑으로 산 스팀청소기니 음식찌꺼기 건조기니 하는 얄궂은 물건들이 손도 안 탄 채 거실에 굴러다니는 집구석. 심한 아토피를 앓는 동생이 밤이면 밤마다 간지럼증으로 잠을 못 이루고 침대에서 살을 북북 긁어대는 소리가 들리고, 아침이면 동생의 몸에서 떨어진 각질들이 바닥에 흩어진 채 햇빛에 허옇게 반짝이는 집구석. 택시 운전사인 아버지, 뒤늦게 교회에 다니기 시작해 권사가 된 어머니가 툭하면 동생의 진로 문제로 싸우고, 동생은 언니를 따라다니며 끊임없이 시비를 거는 집구석.
누가 선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재깍 대답할 수 있었다. 하나는 이 집구석을 벗어나 서울로 가는 것이고, 하나는 털이 있는 동물을 키우는 것이었다. 아토피를 앓는 식구가 있는 집에서 털 있는 애완동물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선은 어릴 때부터 집에 강아지나 고양이를 기르는 친구들이 가장 부러웠다. 결국은 같은 이야기였다. 털 있는 동물을 키우려거든 일단 집구석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래서 선은 깜찍한 시츄를 껴안고 잠들고 우아한 터키시 앙고라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는 삶을 상상하는 것으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며 수능 공부에 매진했고, 끝끝내 서울의 대학으로 진학해 기숙사에 들어가는 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모든 게 좋았다. 기숙사라서 동물은 여전히 키울 수 없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독립해서 처음으로 맛보는 자유와 대도시의 공기만으로도 짜릿했으니까. 하지만 이윽고 선은 방황하기 시작했다. 언어와 외국어 점수가 좀 잘 나오니까, 책을 읽는 걸 좋아하니까, 막연히 중학교 영어 교사쯤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진학한 인서울 대학의 영문과였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을 하기에는 인내심도 소명도 없다는 사실을 얼마 못 가서 깨달았다. 전공 수업 강의실에 들어가면 매끈하게 탄 살갗과 유창한 발음을 자랑하며 쾌활하게 웃는, 외국물을 먹었다는 아이들이 꼭 대여섯 명씩 있었다. 선은 죽어도 그들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영어 실력 때문이 아니라, 그 쾌활한 웃음 때문에.
선은 아무리 해도 그렇게 웃을 수 없었다. 거울을 보고 웃노라면 처음 찍는 사진관 카메라 앞에서 뻣뻣하게 경직된 사람처럼 보였다. 술자리에 섞여서 깔깔 웃고 있노라면 자신의 웃음소리는 꼭 너무 크거나, 너무 작거나, 너무 억지스러웠으므로 별안간 입을 다물곤 했고, 그렇게 중간에 끊겨버린 웃음이 더 어색해서 그 다음에는 말을 잃어버리곤 했다. 하지만 그런 선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선은 아이들이 자신에게 무관심하기 때문이라고 여겼지만 생각해보면 자신도 다른 아이들에게 무관심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렇게 서로 무관심한 채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기에는 선은 너무 외로웠기 때문에, 자신과 비슷하게 최대한 부자연스러운 표정을 한 친구를 찾았다.
선이 잘 웃지 못한다면 희연은 매우 자주, 시끄럽게 웃는 애였다. 아직 타인에게 예의와 품위를 내보이는 법을 체득하지 못한, 주위의 모든 것이 사건으로 보이고 마주치는 모든 것을 과장하려 드는 여중생과도 같은 웃음이었다. 선은 희연과 함께 있으면 중학교 때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직은 좀 어설퍼도 유치해도 괜찮다는 느낌이 들었다.
말버릇마저도 순 여중생 같았다. “진짜 좋아.” “진짜 싫어.” “진짜 재수 없어.” 희연은 말 앞에 ‘진짜’를 붙이기를 좋아했다. “진짜 지겨워.” 희연은 이대 앞 옷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손거스러미를 뜯으며 말했다. 옷먼지 때문에 기침을 해대고, 개시를 망친 날 가게 구석에서 멍하니 마네킹을 바라보고, 환불하러 찾아온 손님과 싸우고 나서 캔 맥주를 마시면서 말했다. “지겨워.” 종로의 커다란 영어 학원에서 선과 함께 토익 수업을 들으면서 문제집 구석에 끼적끼적 적었다.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씨발. 지겨워.” 선은 수업에, 리포트에, 시험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희연에게 화가 났고, 그 말버릇이 무엇보다도 지겨웠다. 하지만 선에게 딱 붙어 있으려고 하는 희연을 차마 매몰차게 대할 수가 없었다. 선은 친구를 잘라내기에는 너무 우유부단했고 그렇다고 친구를 위해 헌신하기에는 너무 이기적이었으며 그렇다고 친구의 고통에 잘 대처할 수 있을 만큼 현명하지도 못했다. 기껏해야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라고 끌고 간 정도였다. 하지만 희연은 상담도 약도 불쾌하고 치료비도 없다며 병원을 멀리했다. 툭하면 울었고 욕설이 많아졌다. 학교 화장실에서 화장을 고치다가, 비좁은 창고 안에 틀어박혀서 나프탈렌 냄새에 파묻힌 채 주먹밥을 먹는 청소부 아줌마를 보고는 변기에 주저앉아 펑펑 울음을 터뜨렸다. “씨발 존나 거지 같아.”
선은 희연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에는 선을 끌고 백화점을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아르바이트비를 몽땅 털어 넣어 핸드백이니 구두니 파운데이션이니 아이섀도 팔레트니 하는 걸 잔뜩 사들이더니만 3일 뒤에 죄다 쓰레기종량제 봉투에 넣어서 집 밖에 내놓기도 했다. 물건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물에게도 그런 식이었다. 희연은 고양이를 키웠다. 흔하디 흔한 노랑 줄무늬 코리안 숏헤어. 암컷. 이제 두어 살쯤 되었고 눈 옆에 흉터가 있는 길고양이 출신이었다. 희연은 봉고차 밑에서 자고 있던 녀석을 발견하고는 그렇게도 애처롭게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데려오더니만 막상 데려온 다음에는 완전히 무관심했다. 이제껏 사들였던 온갖 사치품과 마찬가지로. 그 꼴을 보고 선이 무책임하다며 화를 내자 희연은 또 울음을 터뜨리면서 자기는 고양이가 무섭다고 했다. 선은 말문이 다 막혔다. 어쩌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동물을 키우는 친구가 하나도 부럽지 않은 적은 희연이 처음이었다.
희연은 이내 고양이뿐만 아니라 온갖 것들을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지겹다던 입버릇은 어느 날부턴가 ‘무섭다’로 바뀌었다. “나 무서워, 선아. 어떡하지? 어떡해야 되지?” 희연은 광화문과 종로 대로변에서 거대한 건물들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 건물들이 무너져서 자신을 덮칠 것만 같다고, 그래서 졸도할 것처럼 무섭다고, 그런데 너무 무서워서 한 발도 꼼짝할 수가 없다고. 도망쳐야 하는데, 자신은 이 도시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은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어떡하면 좋냐고.
선은 지쳐서 “나도 몰라.”라고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그 해 늦여름, 희연은 용케도 종로에 있는 한 마천루의 잠긴 옥상 문을 뜯고 올라가서 자살에 성공했다. 첫 시도만에 성공하기는 어렵다던데 어지간히 마음을 독하게 먹었나보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렇게 독하면 좀 살지.” 선은 사람들이 정말로 자살자에게 그런 무례한 말을 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장마가 물러간 무더운 여름이었다. 매미 울음소리가 온 도시에 요란했고 아스팔트에 눌어붙은 시체는 깨끗하게 떨어지지도 않았다. 장례식에 다녀온 날 밤, 선의 꿈에는 어릴 때 보았던 <미세스 다웃파이어> 영화의 한 장면이 나왔다. 여장을 한 남자의 인피면구가 도로변에 떨어져서 달려가는 자동차 바퀴에 짓눌린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던 그 장면에, 희연의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희연의 얼굴 가죽이 삼성증권 앞 사거리 한복판에 눌어붙어서 타이어에 짓이겨지고 있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한 해에도 만오천 명이 목숨을 끊었다. 그 수많은 얼굴 가죽 중에서 무엇이 희연의 얼굴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고 시위대와 전투경찰의 발 아래 그예 사라져버렸다. 선은 퍼뜩 깨어났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한 일은 학교 인트라넷에 접속해 휴학 신청을 한 것이었다.
계획은 전혀 없었다. 분명한 건 학과 공부도 취업 준비도 더 이상 할 수 없으며, 학교나 종로 쪽에는 발도 붙이고 싶지 않다는 것뿐이었다. 지금껏 모든 게 불확실하기만 했는데 그 사실만큼은 하늘의 계시처럼 절대적으로 확실했다. 그래서 선은 기이한 안도감을 느꼈고, 그 안도감은 슬픔으로 변했다. 가장 슬프고도 우스꽝스러운 건 친구의 자살 덕분에 선이 유년 시절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월셋방을 얻어서 고양이를 키우며 살게 된 것이다.

희연이 선에게 고양이를 물려주겠다는 유언이라도 남긴 건 아니었다. 희연의 고양이는 그냥 자연스럽게 선의 몫이 되었다. 희연의 부모님은 녀석을 키울 의사가 전혀 없었고, 희연에게 친구라고는 선밖에 없었으므로, 싫다 좋다 할 여지가 없었다.
부모님께는 고양이를 키우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어디서 난 거냐, 어떤 친구가 준 거냐, 겨우 고양이 키우겠다고 기숙사를 나온 거냐 하는 질문들에 대답하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그냥 모든 휴학생들이 쓰는 핑계만 댔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할 거라고. 수험생인 동생 미경의 히스테리를 견디고 있던 부모님은 첫째 딸이 ‘건설적’으로 살고 있다며 기뻐했다. 순박한 부모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보증금으로 쓰라고 준 돈을 받으며, 선은 희연이 죽었을 때보다 더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선이 월셋방을 얻은 곳은 연남동을 인접한 북부 동교동이었다. 다세대 주택들과 오피스텔, 작은 사무실과 상가 건물들, 아파트, 구멍가게, 회사 직원들이 점심 식사를 하는 식당들이 있는 생활권에, 소규모 자영업이 홍대 앞 중심가에서 밀려나 변방으로 확장되면서 막 생기기 시작한 드립커피 카페와 이탈리안 비스트로 따위가 드문드문 빛을 밝힌 곳. 선이 얻은 집은 동교동 삼거리와 가까웠다. 신촌역 철길을 걷어내고 공항철도와 경의선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라서 현장 주위로 기다란 철벽을 쳐놓고 양옆의 보행로만 남겨둔 상태였다. 선의 자취방은 바로 그 보행로의 서쪽 방면, 골목으로 약간 들어간 자리의 낡은 건물 2층이었다.
살기 좋은 집은 아니었다. 집 자체는 채광도 좋고 깨끗한 편이었고 교통이나 주변 환경도 편리했지만, 문제는 철도 공사였다. 언제나 먼지가 뿌옇게 날려서 창문을 열어도 환기가 되기는커녕 더 텁텁해졌다. 낮에는 한결같이 공사 소음이 울렸다. 집주인에게 미리 경고를 듣지 않은 건 아니었다. 집을 보러 왔을 때도 계약할 때도 저 소음은 들렸다. 선은 저 정도라면 못 견딜 것도 아닌데다가 애들 떠드는 소리가 온종일 들리는 기숙사보다야 훨씬 조용하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지내다보니 그렇지가 않았다. 북부 동교동 일대는 기본적으로 적요했다. 같은 홍대 앞이라도 그곳은 유동인구가 적어서 특히 밤이 되면 여자가 혼자 길을 다니기에 무서울 만큼 호젓하고 어두운 동네였다. 그런 곳이다 보니 오히려 정적과 대비되어서 공사 소음은 더욱 또렷하고 크게 들려왔다. 온 세상에 그 소리밖에 안 들리는 것만 같았다.
선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쾅쾅거리고 득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흙먼지가 풀풀 날릴 때 할 수 있는 일은 자는 것밖에 없었다. 워낙 잠을 깊게 자는 체질이었다. 밤낮이 바뀌었다. 동교동 집에서 산 지 일주일 만에 아침 10시쯤 잠들어서 저녁 5시쯤 일어나는 게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선은 자신의 무기력이 환경 탓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었다. 먹고 자고 집안일을 하고 마포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거나 드라마를 보는 것을 제외하면 고양이 밥 주는 게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선은 한 번도 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는 강아지나 고양이가 키우고 싶어서 부모님을 그토록 졸랐었는데 막상 생기니 부담스러웠다. 일단 주변에 물어봐서 중성화 수술은 시켰고 사료와 모래를 마련했지만 그 다음에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수능 시절에 막연히 상상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동물과의 관계에도 친화력이라는 게 필요했고, 그 방면에서라면 선은 인간뿐만이 아니라 동물에게도 수완이 형편없었다.
다행히도 고양이는 얌전하고 순했다. 애교를 부리는 일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말썽을 부리는 일도 없었으며, 내버려둬도 혼자 잘 놀았고 선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잠을 잤다. 선은 오후에 일어나면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고양이의 눈과 마주치곤 했고 그때마다 깜짝 깜짝 놀랐다. 정신을 차릴 때쯤이면 포클레인이며 드릴 소리가 끼어들었다. 창문으로 비쳐드는 저녁 햇살은 누런 모래 빛깔이었다.
“시끄럽지?” 쾅, 쾅, 드르륵, 탕, 탕.
“난 언젠가 여기를 떠날 거야.” 쾅, 쾅, 드르륵, 탕, 탕.
“너도 떠나고 싶지?” 쾅, 쾅, 드르륵, 탕, 탕.
“어디로 갈까?” 쾅, 쾅, 드르륵, 탕, 탕.
“어디로 가고 싶니?” 쾅, 쾅, 드르륵, 탕, 탕.
고양이는 고개를 돌리곤 하품을 했다. “지겨워.”라고 말하는 것 같다고 선은 생각했다.

가을비가 내린 9월의 어느 날 밤이었다. 오랜만에 내린 비로 공사도 중지되었고 먼지가 씻긴 공기는 깨끗했다. 선은 창문과 현관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모처럼 청소를 했다. 축축하고도 차가운 바람이 밀려들어왔다. 고양이는 책상 위에 올라앉은 채 걸레질을 하는 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르륵 목을 울려 우는 소리가 들렸다. 쟤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선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 그 일은 일어났다.
고양이가 책상에서 훌쩍 뛰어내려 현관문 밖으로 나가버린 것이다. 선은 순간적으로 상황 판단이 안 됐다. 미끄러지듯 우아하게 걸어 나가는 고양이의 뒷모습과 그 너머의 어두운 계단을 멍하니 구경하듯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뒤늦게 걸레를 내려놓고 따라 나갔다.
“야!”
고양이는 돌아보지 않았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총총 계단을 내려가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선은 자신도 희연도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잠깐만!” 선은 녀석을 붙잡으려고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고양이도 달렸다. 그제야 선은 지금까지 한 번도 고양이를 안아본 적이 없으며 안는 법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야!”
고양이는 우뚝 멈춰서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녹색 눈과 마주쳤을 때 선은 숨을 몰아쉬면서 팔을 내뻗었다. 그러자 고양이는 선을 놀리듯이 작게 한 번 울더니 공사장 철벽에 기대어 서 있는 음식물 쓰레기통 위로 사뿐히 뛰어올라갔다. 그리고 또 한 번, 이번에는 철벽 너머로 뛰었다.
“야!”
고양이의 몸은 가로등 불빛 아래서 불타는 듯한 주홍색으로 한 번 빛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선은 그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지하철 선로에 뭔갈 빠뜨렸는데 전차가 들어와버린 것처럼.
선은 벽 앞을 하릴없이 서성거렸다. 슬레이트 판은 선의 키 두 배쯤 될 정도로 높았고, 양옆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었다. 선의 눈에는 베를린 장벽처럼 거대하고 삼엄해 보였다. 누가 읽기나 할까 싶은 벽보와 전단지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고 바닥에는 쓰레기가 뒹굴고 있었다. 주위는 고요했다. 작은 동물의 발소리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해서 귀를 기울여보았지만 선 자신의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차가 한 대 지나갔다. 선은 차가 길 끝까지 가서 삼거리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 다음 고양이가 올라갔던 음식물 쓰레기통 위로 주춤주춤 기어올라갔다. 플라스틱 뚜껑이 부서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웠지만 다행히도 쓰레기통은 선의 무게를 버텨주었다. 선은 조심스럽게 서서 벽 위를 짚고 그 너머의 공사장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슴푸레한 빛 속에 언뜻 보이는 불그스름한 철골 구조물 너머로 새까만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고양이는 지하로 꺼져버린 것만 같았다. 흔적도 없었다.
현실감이 흐려졌다. 지금이 언제고 여기가 어디인지가 모호했다. 선은 공사장 철벽에 매달린 채 목을 길게 빼고 캄캄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 이랬을까? 서울 도심의 밑바닥은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와 가로등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으리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희연이 뛰어내렸던 새벽 4시 종로 2가에 차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사람도. 어두웠을까? 아무도 없었을까? 왜 아무도 막지 않았을까? 자신은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그때 만약 대답을 했더라면, 희연의 질문에 대답을 제대로 했더라면 뛰어내리지 않았을까?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에 “나도 몰라.”라고 대꾸하지 않았더라면? 하지만 뭐라고 말했어야 했나? 정말로 모르는데 뭐라고 했어야 했나?
“야! 김희연! 야!”
선은 빽빽 소리를 질렀다. 자신의 목소리가 괴괴한 거리에 메아리쳐 울렸다. 어떻게든 도로 찾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래서 자신이 서 있는 곳도 잊어버리고 발을 동동 구르다가, 쓰레기통이 기울어지면서 쓰러져버렸다.
쿵 소리와 함께 선은 아스팔트에 나뒹굴었다. 다행히도 쓰레기통 안에 내용물이 별로 없어서 음식물 찌꺼기를 뒤집어쓰는 사태만은 면할 수 있었다. 선은 바닥에 웅크린 채 신음을 내뱉었다. 온 몸이 아팠다. 그러다가 통증이 사그라들었을 즈음에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선은 낄낄거리면서 소리 내어 웃었다.
“가지가지 한다, 가지가지 해.”
1초 정도 선은 그게 자신이 내뱉은 혼잣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남자 목소리였다.
선은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섰다. 2미터쯤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아직 초가을인데 두꺼운 모직 코트를 입었고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묶은,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남자. 아니, 30대 초반? 중반?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방금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던 길에 별안간 튀어나온 그 남자가 비현실적이어서 선은 잠시 관조적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지금 구경거리는 그 남자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걸 깨닫고 얼굴이 붉어졌다. 남자는 노골적으로 비웃는 표정을 띠고 있었다.
“무슨 상관이에요?”
선은 옷을 툭툭 털면서 쏘아붙였다.
“그거 그쪽 고양이 아니죠?”
“댁이 상관할 일 아니라고요.”
무안하고 화가 나서 울컥 내뱉긴 했는데 그러고 나니 무서워졌다. 여기는 둘밖에 없었다. 사방이 어두웠다. 낯선 사람, 그것도 남자에게 대거리를 할 처지가 아니었다. 선은 주위를 둘러보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선은 남자가 노숙자이거나 아니면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하철에서 사람을 때리고 도망가거나 공원 벤치에 혼자 앉아 있는 여자에게 왁 고함을 질러 놀라게 하는 그런 사람들. 남자의 행색 때문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마주친 낯선 타인에게 뜬금없는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무조건 노숙자이거나 미친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선의 무서워하는 태도가 뻔한데도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남자는 선을 어떻게 해보려는 기색이 없었다. 아니 실은 선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호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 단조로운 어조로 말했다.
“포기해요. 이름도 제대로 안 지어준 것 같더만. 돌아올 리가 없지.”
남자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선을 지나쳐 걸어가서 차단벽의 문을 열어젖히고 홀연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 문이 있는 줄도 몰랐던 선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다시 조용해졌다.

남자의 말이 맞았다. 그건 선의 고양이가 아니었다. 선은 그 고양이를 자신의 가족이나 반려동물이나 그 무엇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보다는 희연이 잠시 맡겨둔 물건처럼 생각되었다. 나중에 반드시 돌려줘야만 할 물건. 그러니까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남자의 말이 맞았다. 고양이가 선에게 돌아올 리가 없었다.
공사가 재개되었다. 먼지가 날리고 소음이 울렸다. 선의 일과에는 동교동 일대를 어슬렁거리며 고양이를 찾는 일이 추가되었다. 저녁 어스름부터 밤이 깊을 때까지. 꼭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런 일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오래지 않아 선은 홍대 앞에 길고양이가 꽤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건물 사이의 비좁은 곳에, 음식물 쓰레기 옆에, 화단 안쪽에, 자동차 트렁크 밑에, 천막을 내린 포장마차 밑에, 셔터문 옆 구석에 고양이들은 있었다. 하나같이 선을 경계하거나 금세 도망치곤 했지만. 그중에 희연의 고양이와 비슷하게 생긴 녀석들은 많았어도 희연의 고양이는 없었다. 선은 고양이들의 얼굴을 세심히 눈여겨보았다. 고정된 장소에 자주 나타나는 몇몇은 알아볼 수 있게 되기도 했다. 저 많은 녀석들이 다 어디서 온 건지, 겨울에는 뭘 먹고 어디서 잘지 궁금해지기 시작했을 즈음, 이대로 살면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몰려왔다. 정상인들의 세계와 단절되고 길고양이들 밥이나 주고 다니는 청년 백수가 되는 건 아닐까.
돈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선은 홍대 앞 상점들을 돌아다니며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기로 했다. 남자를 다시 만난 건 그때였다.
집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카페에서 면접을 보고, 이제는 습관이 된 고양이 찾기 겸 산책을 하고, 반찬거리를 사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10월이 되면서 해가 짧아지고 어둠이 빨리 몰려왔다. 열기가 식은 차가운 밤거리를 걸어가는데, 라틴댄스 학원이 있는 건물 1층의 유리문 안에 뭔가 커다랗고 검은 것이 보였다. 여느 때 같았으면 못 보았거나 보았더라도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나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선은 주변을 구석구석 관찰하는 버릇이 붙었으므로 그 검고 커다란 것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건 사람이었다. 널브러져 있는 사람. 언뜻 보았을 때는 커다란 비닐 봉투에서 쏟아져 나온 쓰레기 같았는데 자세히 보니 구겨진 코트와 흩어진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선은 취객이겠거니 생각하고 지나가려고 했지만 무언가 마음에 걸렸다. 묘하게 낯이 익었다. 선은 유리문을 살짝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코트 깃 위로 빠끔히 나온 얼굴이 형광 페인트를 칠한 횡단보도처럼 번뜩거렸다. 누구인지 알았다. 고양이를 잃어버렸을 때 마주쳤던 그 남자였다.
선은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남자는 눈에 띌 만큼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잠들어 있는지, 눈만 감고 있는지, 의식 불명인지 판별하기 어려웠다. 오래 씻지 않은 사람 살에서 나는 악취와 흙먼지 냄새가 풍겼다. 남자는 작은 들짐승 같았다. 언젠가 EBS 다큐멘터리에서 본, 툰드라에서 무리를 잃고 인가 근처까지 내려와 쓰러져 있던 이리가 연상되었다. 짐승의 노린내. 거칠고 가쁜 숨. 입술 사이로 드러난 이빨이 잘못 건드렸다가는 물 것 같았다. 그래도 선은 남자의 뺨에 손을 가져가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당연히 불덩이처럼 뜨거울 줄 알았는데 막상 만져보니 차가웠다. 너무 차가운 계곡물에 손을 집어넣었을 때 신경이 온도 변화에 미처 적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뜨겁다고 느끼는 것과 같은 선득한 감각이었다.
선은 갈팡질팡했다. 남자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보았다. “저기요, 정신 차려요.” 남자는 반응이 없었다. “집이 어디예요? 연락할 데 있어요?” 계속 흔들면서 몇 번 더 말을 걸자 들릴락말락한 신음소리만 겨우 흘러나왔다. 선은 남자가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휴대폰을 꺼내서 119에 전화를 걸었다.
증상과 상황과 위치를 설명하자 119에서는 최대한 따뜻하게 해주되 몸은 함부로 건드리지 말고 가만히 놔둔 채 기다리라고 했다. 선은 집에서 덮을 걸 가져올까 싶었지만 어쩐지 자신이 간 사이에 남자가 어떤 방식으로든 사라질 것 같아서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외투를 벗어서 남자에게 덮어주었다. 남자가 조금 움찔거리더니 선의 손을 잡았다. 잡았다기보다는 마치 갓난아이처럼 선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검지와 중지를 살짝 건 정도였다. 선은 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남자의 손가락이 도로 떨어질까봐 숨을 죽이고 가만히 쪼그려 앉아 있었다. 외투가 없으니 너무 춥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쩐지 울 것 같아졌다.
구급차는 금방 도착했다. 구급대원들이 남자를 들것에 싣고 차에 태웠을 때에야 선은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남자가 이제 무사하다고 확신해서라기보다는, 이제는 남자의 안위가 자신의 손에서 떠났고 전문가들이 다 알아서 해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게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는 나중에야 알았다.
응급실은 꽉 차 있었다. 간호사들은 일단 남자를 대기실 장의자에 눕히고 체온을 재더니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리고 선에게 진료신청서를 작성하게 했다. 선은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므로 쓸 수 있는 칸이 없었다. “길에 쓰러져 있길래 신고한 건데요.” 하지만 병원 측에서는 선의 사정을 이해해줄 이유가 없었다. 어쨌든 남자는 말을 제대로 못하는 상태였고 병원 측이 환자에 대해 상의할 사람은 선뿐이었다.
“퇴원 뒤에 환자 본인이나 가족 통해서 후불로 처리할 수도 있어요.” 간호사는 마뜩찮은 표정으로 설명했다. 남자가 진료비를 낼 능력이 될 리가 없다고 확신하는 티가 빤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보통 서울의료원이나 보라매병원으로 이송하게 됩니다. 행려환자는 공공병원에 후송하고 있거든요.” 선이 보호자가 되어 진료비를 내주지 않겠다면 남자를 다른 병원에 맡기겠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선은 당혹스러웠다. 선은 누군가가 나타나서 “이제 집으로 돌아가세요, 이분은 저희가 맡겠습니다.”라고 척척 지시해줄 줄로만 알았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옆의 의자에 누운 남자를 곁눈질했다. 담요 바깥으로 비어져 나온 손가락 끝이 귤을 잔뜩 까먹은 사람처럼 노랗게 떠 있었다. 실내에 히터가 빵빵하게 돌아가는데도 여전히 덜덜 떨었다. 아스팔트에 엎어진 선을 비웃던 그 사람이 맞는지 믿을 수 없을 만큼 조그마하고 무방비한 얼굴이었다.
선은 일단 남자가 회복할 때까지는 자리를 지키겠다고 했다. 선은 자신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었다. 남자의 이름은 ‘미상남’으로 적혔다. “아무래도 날이 추워지면 이런 분들이 많아져요.” 태도가 어딘지 누그러진 간호사가 쓴웃음을 지으며 눈짓을 했다. 간호사의 시선을 따라가니 대기실과 로비에는 취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난동을 부리고 있었고 남자 직원이 막는 중이었다. “우리도 힘들고 저분들도 힘들고 그렇죠.” 간호사는 ‘우리’라는 말에 선을 포함시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선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간호사는 남자의 혈압과 맥박을 잰 다음, 따뜻한 물을 가져다주고 천천히 마시게 하라고 하더니 어디론가 바쁘게 사라졌다.
응급센터라는 곳에는 위급한 환자들을 위한 침대가 무한정 있으리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빈자리가 나지 않았다. 20분이 지났다. 30분이 지났다. 대기실은 불이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오락가락했다. 피를 흘리는 사람도 있고 로비에서 퍼져 자는 사람도 있고 닌텐도를 가지고 놀거나 칭얼거리는 애들도 있었다. 전체적으로 소란스러웠지만 그저 일상적인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선은 물을 남자의 입에 조금씩 흘려 넣어줬지만 3분의 1은 바닥에 떨어져버렸고, 컵이 빈 다음에는 멀거니 앉아서 남자를 지켜보았다. 이대로 놔둬도 되는 건가 걱정스러웠는데 다행히도 남자는 차차 회복하고 있는 듯했다. 혈색이 아까보단 나아졌고 몸도 덜 떨었다. 선은 하릴없이 발장난을 쳤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촌동생을 돌봐줘야 하는 열한 살짜리 누나가 된 기분이었다. 수많은 어른들이 어른들의 말로 떠들면서 주위를 스쳐 지나가고 자신은 남자와 단 둘만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선과 남자를 아예 잊어버린 게 아닐까, 언제 봐줄 거냐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봐야 하는 게 아닐까 선이 고민하기 시작했을 즈음, 옆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남자가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좀 괜찮아요?”
남자는 잠시 말없이 선을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와 있었다. 선은 남자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각질이 일어난 낡은 종이 같은 피부 너머로 미약하지만 분명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선은 한숨을 내쉬었다.
“달고 따뜻한 것 좀 줄래요? 코코아나 율무차 같은 거.”
남자의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고 발음도 불분명했지만, 적어도 간호사들이 말하는 ‘진상 환자’에 속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선은 자판기에서 율무차를 한 잔 뽑아다 주었다. 남자는 일어나 앉아 담요 안에 몸을 웅크리고는 차를 홀짝거렸다. 손이 곱아서 컵을 몇 번이나 떨어트릴 뻔했기 때문에 선이 밑을 슬쩍 받쳐줘야만 했다.
“저기, 그럼 원무과에서 이름이랑 주민등록번호…….”
“이제 돌아가요.”
“네?”
“이제 괜찮으니까 돌아가요.”
“진료부터 받아봐야죠.”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공복에 저체온증. 몸살기도 있는 것 같군요. 따뜻한 물에 목욕하고 뭘 좀 먹고…… 며칠 푹 쉬고 나면 나을 거예요. 병원에서 해주는 거래봤자 링겔 데워서 꽂아주는 정도니까.”
남자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 초연했다. 병원 진료를 거부하는 땡깡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것 같았다. 어차피 선은 이 방면에서 아는 것이 전혀 없었으므로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첫 만남과 달리 풀기 없고 예의 바른 남자의 태도에 도리어 기가 질렸다.
“그래도 링겔 맞는 게 낫잖아요. 안 맞는 것보단. 혹시 모르니까 진찰도 이것저것 받아보고 필요하면 입원도…….”
“돈은 누가 내고요.”
선은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미소를 지었다. 선의 순진한 말을 비웃는 뜻이 아니었다. 힘없고 자조 어린 웃음이었다.
선은 남자를 다시 데리고 나왔다. 괜찮아졌다고는 해도 남자는 여전히 떨고 있었고 밤공기는 싸늘했다. 선은 택시를 잡아타고 행선지를 말해야 할 때가 되어서야 남자를 어디로 데려가야 하는지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어디로 가시는데요?”
남자는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곤 눈을 감았다.
“당신 집이요.”
그리고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길고양이를 주워왔던 희연에게 뭐라고 할 입장이 못 됐다. 선은 무려 인간을 주워와버린 것이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자문해봐도 답은 안 나왔다. 그냥 상황에 휘말려서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었다고밖에는 해석할 수 없었다. 선은 자신이 저지른 짓에 겁이 났다. 침대에 이름도 모르는 외간 남자가 드러누워 있었다.
택시를 타고 가는 내내 남자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남자를 두들겨 패서라도 깨워서 행선지를 말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나올 답은 뻔했다. 이 남자는 잘 곳이 없었다. 기껏해야 찜질방이나 모텔로 데려가야 했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데서 묵을 돈이 없었다. 선이 돈을 내줘야 했다. 하지만 생판 남을 위해서 왜 돈을 내줘야 한단 말인가? 사우나비 단돈 몇 천 원이라도. 지금 택시비만도 어딘데? 그렇다고 아픈 사람을 길거리에 던지고 갈 수도 없었다. 선은 휴대폰의 전화번호부를 뒤져서 남자를 잠시 맡길 친구나 선배나 좌우지간 아무라도 있나 살폈지만 가뜩이나 좁은 인간관계에 이런 엉뚱하고 부담스러운 부탁을 할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었다. 역시 찜질방에 내려놔야겠다. 근처에 찜질방이 어디 있더라? 그렇게 고민을 하는 사이에 택시는 선의 집 앞에 도착했고 엉겁결에 남자를 자기 집에 데려와버린 것이다. 택시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가는 내내 남자는 똑바로 걷지 못했고 선에게 의지했다. 선은 자기보다 머리 둘 정도는 더 큰 남자의 몸을 부축해야만 했다. 자신에게 기대오는 뼈와 살과 피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선은 인간의 의지가 전혀 작용되지 않는 육신 자체가 얼마나 무거운지 상상했고, 시체의 무게에 대해 생각했고, 만약 영혼에 질량과 무게라는 게 있다면 그 수치는 마이너스이리라고 생각했다.
“미쳤나봐 진짜. 미친 거야.”
이런 와중에도 남자의 스포츠백과 자신이 몇 시간 전에 샀던 반찬거리가 담긴 비닐 봉투는 어디다 빠뜨리지 않고 다 챙겨 왔으니 미친 것만은 아닌가 싶었다. 남자가 샤워기로 오래도록 몸을 녹이는 동안 선은 낙낙한 옷을 헤어 드라이기로 따뜻하게 데워서 욕실 앞에 개어놓았다. 밥을 안치고 얼마 전에 만들어두었던 카레를 데우고 인스턴트 북어국을 끓이고 달걀 프라이를 만들고 아까 산 무말랭이와 깻잎을 덜어서 상에 냈다. 씻고 나온 남자는 10년쯤 늙은 것처럼 지쳐 보였고 뼈마디가 다 불거져 있었으나 적어도 근육을 제대로 움직이고는 있었다. 남자는 음식을 아주 천천히 먹었다. 오래 비어 있던 위장이 음식을 빨리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리고 에너지를 최소화하는 동작이 몸에 배어서였겠지만, 며칠 굶은 행려병자의 식사라기보다는 귀족 출신의 장교가 야영장에서 배식을 받는 것처럼 정적인 태도였다. 그러나 남자가 밥을 맛있게 먹는다는 걸 선은 알 수 있었다. 선이 평생 본 그 누구보다도 맛있게 먹고 있었다.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밥을 다 먹은 다음 남자는 선이 전기장판을 미리 켜둔 침대에 틀어박혀서 다시 곯아떨어졌다.
“미쳤나봐.”
선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울증 걸린 친구. 그 친구가 키우던 고양이. 그리고 이제는 부랑자. 선은 동생이 자기 더러 늘 ‘대책 없다’, ‘우유부단하다’고 힐난하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미경은 아토피 때문에 무엇에도 집중하지 못해서 공부도 못했고 성격도 심술궂었지만, 적어도 영악한 아이였다. 자신과 남, 가족과 타인을 얄미울 정도로 칼같이 구분하는 아이였다. 선은 도무지 그러질 못했다.

하룻밤만 재우고 내보내려고 했다. 어차피 선은 밤에 자지 않으니까 침대를 빼앗긴 것도 아니었고, 그냥 평소처럼 시간을 보내다가 아침에 남자가 깨면 내보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탠드만 켜둔 채 드라마를 보고 책을 읽고 웹서핑을 하고 아르바이트 구직 사이트를 뒤졌다. 그런데 평소처럼 시간이 보내지질 않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드러누워만 있어도 금방 흘러가버리던 밤이 지금은 하염없이 길게만 느껴졌다. <스킨스>도 재미가 없었고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만 느껴졌고 아르바이트 자리들은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었고 자취 요리 블로그들은 오늘따라 업데이트가 없었다. 뒤에서 간간히 기침과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등이 뻣뻣하게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남자가 눈을 뜨고 선에게 무슨 짓을 할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침대로 다가간 선은 자신의 두려움이 얼토당토않은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남자는 선에게 무슨 짓을 하기는커녕 당장 자기 몸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몸이 타들어갈 것처럼 뜨거웠다. 선은 이제 비명도 아니라 울음을 터뜨리고 싶어졌다.
“진짜 가지가지 한다.”
선은 수건에 찬물을 적신 뒤 남자의 이마에 얹어주고 근처의 편의점에 가서 전복죽을 사왔다. 미뤘던 빨랫감을 전부 세탁기에 넣고 돌린 다음 방 여기저기에 널어서 습도를 조절했다. 중간중간 물수건을 갈아주었다. 새벽 5시쯤 남자는 깨서 화장실에 다녀왔다. 선이 냉장고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유자차를 꺼내서 끓여주자 남자는 유자 껍질까지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아침에 약국 문 열면 해열제랑 사다줄 테니까 그거랑 밥 먹고 나가요. 알았죠?”
“그럴게요.”
남자가 나서서 느릿느릿 설거지를 했다. 선은 말리지 않았다. 왠지 모를 울분이 치밀어 오르는데 풀 방법을 찾지 못하고 울상만 짓고 있었다. 남자는 그런 선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더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이름이 뭐죠?”
“저요?”
선이 되묻자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만 보았다.
“……문이선.”
“문이선 씨.” 남자는 예스러울 만큼 정중하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정말 고맙습니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나는 죽었을 거예요.”
선은 지나치게 감상적인 공치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단순하고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남자는 죽었을 수도 있었다. 선은 자신이 오늘 벌인 짓이 멍청하고 대책 없고 우유부단한 실수만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울분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알면 됐어요. 얼른 자고, 낫고, 나가줘요.”
남자는 설핏 웃었다. 왜 이런 말에 웃는 건지 이상한 노릇이었다. 남자는 행주로 싱크대의 물을 훔친 뒤 빨고 단정하게 널어놓은 다음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선은 남자를 새삼 다시 훑어보았다. 사람을 보는 안목 같은 건 없는 선이라도, 지금껏 남자의 말씨나 행동거지를 보면 기본적인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어쩌다가 저런 신세가 됐을까? 사지 멀쩡하고 나이도 젊은데.
“안 자요?”
다시 잠든 줄로만 알았던 남자가 문득 말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선은 몸을 돌려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침대에 모로 누워서 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탠드 불빛만 어슴푸레 비치는 어둠속에서 동공이 확대되어 보였다.
“원래 자는 시간 아니에요.”
“저는 환이라고 해요. 최환.”
선이 아무 대꾸도 않는데도 남자, 환은 혼잣말을 하듯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직 가을이긴 하지만 야외에서 며칠 지내다 보면 많이 추워지지요. 지붕과 벽이 없으면 인간의 면역력은 쉽게 약해져요.”
선은 지난 8월 우이동에 MT를 갔을 때 새벽의 추위를 떠올리고 있었고, 곧 그런 자신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저는 젊고, 남자니까 이렇게 금세 회복을 하지요. 노인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리 죽어요. 저체온증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기이한 일이 일어납니다. 체온을 조절하는 신경계에 이상이 일어나서 오히려 덥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나마 입고 있던 옷마저도 다 벗게 되는 거예요. 나는 체온이 28도까지 떨어졌는데 알몸으로 웅크리고 있던 할머니를 본 적이 있죠.”
환은 목을 울려 웃고는 “이상하죠?”라고 말했다. 선은 환의 유머 감각이야말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상하네요.”
“저체온증은 고산지대에서 조난됐을 때에나 걸리는 거라고들 생각할 거예요. 나도 그런 줄 알았으니까. 혹독하고, 적대적이고, 타협하지 않는 자연 속에서. 하지만 도시에도 자연은 있죠. 사람들이 자연을 가장 효과적으로 몰아냈다고 생각하는 곳에도 자연이 있어요. 나는 시시각각 일어나는 자연의 변화와 징조들을 민감하게 인지해요. 계절의 기척은 냄새로 먼저 다가오고. 먹을 건 양념보다도 기름 냄새가 더 강해요. 번화가는 네온사인보다도 소음으로 먼저 알 수 있죠. 인구가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을 공기에 퍼진 체온으로 느낍니다. 추위는 새벽 네다섯 시가 가장 심해져요. 이 시간대는 한여름에도 춥습니다. 잠이 오지 않을 때면 황야의 길과 하늘의 별자리를 읽었던 옛 사람들을 생각하곤 했어요. 가우초나 이누이트나 레인저 같은 사람들의 지혜를요.”
선은 대체적으로 “저 인간이 뭔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엉거주춤 앉아서 듣기만 하기는 어색해서 선은 침대로 다가가 물수건을 갈아주었다. 열은 좀 떨어진 것 같았다. 이불 끝을 잡은 환의 손에 눈길이 갔다. 손톱이 깨지고 피부가 다 텄지만 손가락의 형태 자체는 매끈했다. 굳은살이나 비틀린 데가 없었다.
“12월에 외국에서 돌아오는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의 집에서 머물기로 했으니까 당분간은 괜찮을 거예요.”
환은 2, 30분 정도 이야기를 더 했다. 서울에서 몇 달간 노숙을 한 경험에 대하여. 보았던 것, 들었던 것, 느꼈던 것에 대해. 선은 대체로 듣고만 있었다. 환의 말투는 지나치게 문어체에 가까웠고, 이야기는 디테일하긴 했지만 정작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정보들은 결여되어 있었다. 나이는 몇인지, 가족은 어디에 있는지, 원래 뭘 하던 사람이었는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선은 그의 내력이 내심 궁금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낯선 남자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 지나치게 깊이 알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구태여 묻지 않았고, 환의 이야기를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듯이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선은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환이라는 인간에 대한 실체는 아무것도 모르는데도 어쩐지 위험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여행지에서 만나 잠시 이야기를 주고받은 사람에게 쉬이 경계심이 풀어지는 것처럼. 그래서 선은 방바닥에 이불을 깔고 곤히 잠들었다.
포클레인과 드릴 소리에 눈을 떴을 때는 오후 한 시였다. 일어나보니 환은 이미 없었다. 침대는 정리되어 있었고, 모든 게 환이 들어오기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책상 위의 메모지에 “전복죽 끓여먹었어요.”라는 글만 한 장 적혀 있었을 뿐이었다.

선은 사람이 가난하고 아프면 뻔뻔해진다고 생각했다. 심한 당뇨와 합병증으로 고생하는 고모할머니가 식구들에게 패악을 부리고 온갖 걸 받아먹는 걸 보면서, 선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꼬투리를 잡고 참견하기를 낙으로 삼는가 하면 선의 옷이나 물건을 허락도 없이 쓰는 동생을 보면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건사하는 것만도 힘겨워서 친구를 배려하지 못하고 선의 공부와 생활에 온갖 폐를 끼쳤던 희연을 보면서, 선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환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웬만한 사람들보다도 유순했고 예의가 발랐다. 쓴 약과 주사를 착하게 참아내는 어린 아이처럼,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고아처럼. 그런 점이 강하게 인상에 남아서였을까? 아니, 물론 어떤 면에서 환이라는 그 남자도 뻔뻔하긴 마찬가지였다. 생판 남의 집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신세를 지면서 아무것도 사양하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환도 염치가 없었다. 하지만 죽음의 경계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염치가 무슨 소용일까? 염치라는 건 쇼윈도 안에 디스플레이된 값비싼 펠트 모자나 토트백 같은 사치품이 아닐까? 희연은 그런 사치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해준다고 말했다. 희연은 ‘존엄성’이라는 단어에 엄청난 강세를 주면서, 유럽에서 건너온 근사한 외래어를 말하듯 발음했다. “인간에게 존엄성을 주는 건 도덕이나 명예나 품성 같은 게 아니야. 그건 돌체앤가바나야. 에르메스야. 하야트 조식과 피트니스 센터 회원권이야. 청담동 미용실이야. 주말의 프렌치 코스 요리야. 타워팰리스야. 아니, 아니야. 그런 것들이 곧 도덕이고 명예고 품성이야.” 희연은 자신이 팔아야 할 이만오천 원짜리 원피스를 마네킹에 입히고 코르셋을 졸라매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이딴 걸 입으니까 네가 쓰레기가 되는 거야.”
선은 카페 아르바이트 면접에 붙었다. 드립 커피와 원두를 팔고 약간의 음료와 조각 케이크를 갖춘 작은 카페였다. 바로 출근해서 일주일 정도 일을 배우기로 했다. 선은 원두를 볶고, 갈고, 주둥이가 좁고 긴 주전자로 커피를 내리는 법을 익혔다. 손님들은 주로 근처의 출판사 직장인들, 학생들, 그리고 낮 시간대에 혼자 찾아와 서너 시간을 죽치고 있는, 정확한 직업을 알기 어려운 젊은 사람들이었다. 그 손님들 중에 희연이 말하는 존엄성을 갖춘 사람들은 없었다. 아무도 돌체앤가바나나 에르메스를 걸치고 있지 않았다. 하기야 선은 그런 걸 알아볼 능력도 없었지만.
일주일에 다섯 번, 일곱 시부터 열한 시까지 일했다. 퇴근한 뒤에는 한 시간 정도 희연의 고양이를 찾아다니는 겸 주변을 산책했다. 집에 돌아와서 밥을 먹고 집안일을 하고 책을 읽거나 드라마를 보거나 웹서핑을 했다. 그리고 잤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 이따금씩 그 남자 생각이 났다.
아침에 감기약을 사서 먹이려고 했는데 그냥 나가버렸던 환이 생각났다. 지금쯤 다 나았을까, 계속 바깥 생활을 하고 있다면 당연히 낫지 않았으리라. 선은 인터넷으로 저체온증과 감기와 폐렴을 검색했다. 그리고 자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되새기며 창을 꺼버렸다. 그러나 밤거리를 걸어다닐 때면 동교동의 풍경이 이전과는 약간 다르게 보였다. 환이 보고 들었다던 방식들을 떠올리면서 사물과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도시의 자연에 대해, 냄새와 소리에 대해 생각했다. 별자리와 황야에 대해 생각했다. 새벽에 빨래를 널고 있을 때면 환이 말한 추위가 생각났다. 이 시간에 어디서 어떻게 자고 있을지를 생각했다. 새벽의 가랑비에 발목과 뒷덜미가 젖어드는 감각을,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 위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발소리가 들리는 것을, 늦은 밤 종이 박스와 신문을 주우러 다니는 시간의 외로움을, 안개 속에 흐릿하게 빛나는 가로등의 불빛들을 생각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죽었을 거예요.”라던 말이 생각났다. 영화나 드라마에 숱하게 나오는 그 한 마디를 평생에 한 번이라도 듣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생각했다. 그리고 퇴근길에 고양이를 찾아다니면서, 선은 고양이뿐만 아니라 환을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일주일째가 되던 날이었다. 일기예보에서 다음날 아침부터 종일 비가 온다고 했다. 퇴근길에 선은 희연의 고양이를 잃어버렸던 경의선 공사 현장 차단벽 앞까지 걸어왔다. 가방에는 감기약과 비타민제와 김밥 한 줄, 그리고 맥스봉 소시지 하나를 넣은 채였다. 선은 자신이 정확히 뭘 기대하는지도 모른 채 밤이 조용히 흐르는 차단벽 앞길을 끝에서 끝까지 몇 번을 걸었다. 그러던 중 셔터를 내린 오토바이 가게 앞의 판지 상자 더미 안에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가 눈에 띄었다. 노란색 코숏은 아니었다. 검은색 고양이어서 자칫 못 보고 지나칠 뻔했다. 못 보고 지나치면 안 되나? 선이 소시지를 꺼내자 고양이는 선을 보고 귀를 세운 채 가만히 있었지만 도망치지는 않았다. 새까맣고 지저분한 털, 호박색 눈, 오른쪽 앞발과 배 부분을 군데군데 덮는 얼룩. 선은 소시지 포장을 벗겨내서 손으로 세 토막을 내다가 고양이에게서 1미터 정도 거리에 슬쩍 내려놓고 가만히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차단벽에는 문이 있었다. 처음 만났던 날 환이 열고 들어갔던 그 문이었다. 맹꽁이자물쇠가 걸려 있었지만 잠겨 있지는 않았다. 선은 망설이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곳은 그날 선이 두려워했던, 지하로 푹 꺼진 심연이 아니었다. 흙이 메워지고 평평한 땅이 되어 있었다. 혹은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한쪽에 모래흙이 가득 쌓여 있고 콘크리트와 각종 공사 자재들이 뒹굴었고 고요히 잠든 짐승 같은 굴착기와 트럭과 이름을 모르는 기계들이 어둠속에 묻혀 있었으며 트레일러들이 몇 대 보였다. 그리고 그중 한 대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안에서 나지막이 기침 소리가 들렸다. 선은 거기에 환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고민하지 않고 그리로 걸어가서 노크를 했다. 문이 열리고 환이 나왔다.
무엇보다도 살아 있었다는 데에 안도했다. 하지만 일주일 사이에 환은 더 수척해진 듯 보였다. 예의 그 코트 어깨에는 흰 비듬이 떨어져 트레일러 안에서 새어나오는 전구빛을 받아 반짝였다. 여전히 긴 머리를 묶고 있었다. 자세가 구부정했다. 갈라져 터진 입술이 눈에 띄었고 옅은 술 냄새가 났다.
“웬 일이에요, 이런 곳까지?”
환은 먼 곳에서 찾아온 친구를 맞는 집 주인처럼 말했다. 그게 비꼬는 말인지 아닌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선은 가방에서 약과 김밥을 꺼내서 내밀었다. 환은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우리 집에 올래요?”
선은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일은 비가 온대요.”
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기, 12월에 친구가 귀국한다고 했죠. 그때까지 우리 집에 있을래요?”
선은 자신의 어디에서 그런 무모함이 나오는지 의아했다. 환은 망설이는 것 같았다. 튼 아랫입술을 혀로 잠깐 적셨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선은 환의 눈동자에 스친 두려움을 분명히 보았다. 그제야 선은 깨달았다. 선은 환이 위험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위험에 노출된 건 환이었다. 선은 환을 집에 들이면 자신이 안전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었지만, 안전하지 못한 쪽은 환이었다. 낯선 사람이 자기 집에서 지내라고 했을 때 사양하거나 거절할 수 있는 선택지조차 갖지 못한 환이었다.
선은 한 걸음 물러섰다.
“따라와요.”
선은 먼저 차단벽 문 밖으로 나와서 기다렸다. 3분쯤 지났을까, 환이 문을 열고 따라 나왔다. 스포츠백 하나에 이삿짐을 꾸리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3분이었다.

“내가 침대에서 잘 거예요. 그쪽은 여기다가 이불 펴줄 테니까 여기서 자요. 허튼 짓하면 죽여버릴 거예요. 진심이에요.”
“나도 여자 보는 눈이라는 게 있는데요.”
선은 허리에 손을 얹고 말없이 환을 노려보았다. 환은 딴청을 부리며 선의 책장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 서랍장은 손대지 말아요. 아니, 그냥 내 물건은 손대지 말아요. 냉장고랑 싱크대, 욕실에 있는 것들은 써도 괜찮아요. 컴퓨터는 나 있을 때, 내가 써도 된다고 할 때만 쓰고요. 저는 보통 아침 10시에 자서 오후 5시쯤 일어나요. 7시부터 아르바이트를 나가고…….”
선은 생활 지침을 설명했다. 샤워를 하고 밥과 약을 먹은 환은 선의 수면바지와 원피스형 셔츠를 입고 선의 책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작은 여자 옷을 입고 등을 수그린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환이 입고 있던 옷과 가방 안에 구겨져 있던 옷가지들은 모두 싹 빨아서 건조대에 널어놓은 채였다.
“듣고 있어요?”
“그럼요. 영문과예요?”
선은 1년 동안 자신의 팔뚝 근육 발달에 기여한 두꺼운 노튼 영문학 앤솔러지에 시선을 던지고 한숨을 쉬었다.
“그렇죠. 휴학 중이지만.”
“책도 손대면 안 돼요?”
“읽는 것까진 괜찮아요. 다른 용도로는 쓰지 마세요.” 선은 책의 다른 용도가 뭐가 있을까 잠시 생각했다. “돈은 얼마나 있어요?”
“17,200원?”
“겨우 그걸로 친구 올 때까지 버티려고 했단 말예요?”
환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책장에서 몸을 떼고 요 위에 앉았다. 휴지를 풀어서 요란하게 코를 풀었다.
“친구 온다는 건 진짜 맞죠? 정확히 언제 오는데요?”
“날짜까진 모르고요. 12월 말쯤에 와서 집 구한다더군요. 연락처 있어요.”
환은 쓰레기통에 휴지를 집어넣고 훌쩍거리면서도 성실히 대답했다. 그래도 선은 환이 반드시 그때가 되면 나가줄 거라는 뭔가 확실한 보장이 있었으면 했다. 선이 못내 불안을 거두지 못하고 미적거리자, 환은 눈치 빠르게 덧붙였다.
“걱정 말아요. 메신저도 있으니까. 주소 알려줘요? 아니면 싸이월드? 블로그?”
선은 환을 흘겨보다가 손을 내저었다.
“됐고요. 아무튼 그때까지 저는 식사랑 씻고 잘 곳만 드리는 거예요.”
선은 “돈은 1원도 안 드려요.”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모욕적인 말이 아닐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환은 생략된 말이 무엇인지도 잘 알아들었는지 스스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겨우 이런 걸로 상처 받지는 않는다는 듯. 환은 대체로 눈치가 빠른 것 같았다. 상대방의 표정이나 말투, 몸짓을 보고 많은 걸 알아채는 듯했다. 하기야 젊은 나이에 이런 상태까지 왔다면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경험을 했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났을까.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을 많이 보았을 테고, 그래서 지금도 굳이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 많이 눈에 들어올 테지. 선은 환의 눈을 마주보기가 불편해서 시선을 피했다.
“음, 제가 선 씨 신세를 많이 지는데 드릴 게 마땅히 없잖아요. 나중에 갚겠다고 해봤자 솔직히 기약이 없고. 그러니까…….”
환은 이불을 끌어당겨서 무릎 위에 올려 덮었다.
“고양이를 찾아드릴게요. 그 이름 없는 고양이.”
선은 저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서 눈을 굴렸다. 하지만 환은 선의 어처구니없다는 태도에도 아랑곳없이 지극히 진지한 표정으로 농담을 했다.
“찾을 수 있어요. 약속하죠. 나는 고양이 나라에서 왔으니까요.”
“뭐라고요?”
선은 아무래도 같이 지내는 동안 환의 유머 감각이 가장 큰 장애물이리라고 직감했다.

두 사람의 한 달 한정 동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형제는 여동생만 있고, 고등학교는 여고를 나왔고, 연애라고는 1학년 때 미팅으로 만난 남자애와 다섯 달 사귀다가 헤어진 게 전부인 선은, 남자와 이렇게 가까이에서 오랜 시간을 붙어 있는 게 처음이었다. 환은 마치 희연의 고양이처럼 얌전한 편이었다. 냉장고를 함부로 뒤지거나 선의 물건을 만지거나 화장실을 지저분하게 쓰거나 방 안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누구를 불러들이거나 전화 통화를 길게 하거나 하지 않았다. 룸메이트의 레벨을 매기자면 A플러스라고 할 만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사람은, 더군다나 남자는 고양이와 달랐다. 가뜩이나 작은 방에서 운신의 폭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화장실을 쓰거나 옷을 갈아입거나 속옷이며 생리대를 꺼내거나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걸 마음 편히 할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시선이나 몸의 일부가 스쳤으며 어색한 대화를 나누거나 어색한 침묵을 견뎌야 했다. 기숙사보다도 더 지내기 불편해졌다. 선은 자신이 너무 섣부른 결정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였다. 불편하기는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처음에 환은 거의 항상 집에 있었다. 선이 퇴근하고 돌아오면 인터넷을 하고 있거나 라면을 먹고 있거나 책을 읽고 있던 환이 문을 열어주었다. 1주일쯤 지나니 환은 감기가 완전히 나았다. 그새 살이 찌지는 않았지만 전반적으로 자세나 몸놀림이 매끄러워졌고 얼굴빛도 한결 나아졌다. 그러자 비로소 환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가 제대로 보였다. 흔히 대공황 시대의 미국이나 중국 황실을 다룬 소설 따위에서, 꼬질꼬질한 뒷골목의 소년 소녀를 주워다가 때를 벗기고 머리 소재를 하면, 진흙을 씻어낸 옥처럼 ‘감춰져 있던 원래의 빛깔’이 드러난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환은 그보다는 탈색되고 벗겨졌던 사물에 페인트를 새로 입혔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랜 노숙 생활로 망가졌던 균형을 다시 세우고, 무너져내리던 눈과 코와 입술과 귀가 제 자리를 찾고, 생존을 위해 꽁꽁 뭉쳤던 살과 근육이 형태를 만들어냈다. 그걸 지켜보면서 선은 소설 속의 묘사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알았다. 죽어가는 과정은 단순히 원래의 색깔에 때가 끼는 게 아니라 색깔 자체가 날아가는 것이다. 소생이라는 건 고난의 더께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폐허에서 생명이 새로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한 번 무너지면 다시는 재건될 수 없다.
몸이 회복되고 나자 환은 인터넷으로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시작했다. 하루 일하고 5, 6만 원 정도의 삯을 받는 일용직들, 주로 공연이나 행사 보조 아르바이트들이었다. 주민등록이 말소되었고 통장도 없기 때문에 일단은 이런 종류의 일만 한다고 했다. 선의 일은 규칙적이었지만 환은 규칙적으로 생활하지 못했다. 어느 날은 하루 종일 집을 비웠고 어느 날은 하루 종일 잠을 잤다. 밥 먹는 시간도 안 겹칠 때가 많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식탁에 마주 앉아 식사는 안 하더라도 거의 매일 함께하는 일과가 생겼다.

환이 처음 아르바이트를 하고 일당을 받은 날이었다. 선이 일하는 카페에 마감 시간쯤 찾아와서는 카페라떼를 시켰다. 선은 카운터에 두 손을 짚고 서서 환을 흘겨보았다.
“나라면 돈 그런 식으로 안 쓰겠어요.”
“아, 이 가게는 손님 가려 받는 게 컨셉이에요?”
“5,000원입니다 손님.”
선은 환에게서 만 원권 한 장을 낚아채듯 받아다가 현금출납기에 집어넣고 거스름돈을 줬다. 자기 돈으로 커피를 사주지는 않았다. 선은 자기 것과 환의 것을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철저하게 구분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이미 환을 집에 들인 시점부터 그런 구분은 무너졌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최소한의 경계는 지키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생길 것 같아 무서웠다. 그게 정확히 어떤 사태인지는 몰라도.
“고양이 찾으러 가자고요. 퇴근길에 고양이 찾아다니죠? 제가 도와줄게요.”
환이 바 자리에 앉아서 카페라떼를 물처럼 들이키고는 말했다. 손님들이 다 빠지고 마지막 설거지를 하던 시점이었다. 선은 환에게서 빈 머그컵을 건네받았다.
“안 그래도 돼요. 저 그쪽한테 대가 받을 생각으로 이러는 거 아니니까.”
“제 선의예요.”
선은 애초에 희연의 고양이를 다시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없었다. 처음에는 의무감 때문이었고 이제는 습관이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환은 선이 잃어버린 고양이를 꼭 되찾고 싶어서 후회에 젖어 밤거리를 헤매는 사람쯤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선은 환의 오해를 수정해주고 싶었지만, 그건 그냥 하루 일이 끝난 다음 주변을 산책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는 사적인 시간이니 방해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선의라고 말하는 상대방에게 그렇게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환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 그거라면 무시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마지못해 허락했다.

선이 퇴근한 후, 두 사람은 대체로 청기와 주유소와 연남동과 동교동 삼거리의 세 꼭지점 안에서 거미줄처럼 이어진 골목들을 거쳐 마지막 코스로 경의선 공사 현장 길을 따라 걸었다.
처음에는 선이 늘 다니는 코스에 따라 환을 데리고 다니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역할이 바뀌어서 환이 선을 데리고 다니는 꼴이 되었다. 환은 거리 구석구석을 더 잘 알고 있었고, 희연의 고양이를 다시 찾아주겠다는 호언장담이 허세만은 아니었던 게, 과연 길고양이에 대해 꽤 빠삭한 듯했다. 환은 선이 희연의 고양이를 키울 때 사두었다가 남은 사료를 가지고 다니면서 마치 이 구역 순찰을 담당하는 경찰이나 먼 옛날의 가로등지기처럼 동교동 이곳저곳을 누비며 먹이를 주었다. 고양이들은 그런 환을 알아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주치는 고양이들은 환을 보고 작게 울거나 때로는 가까이 다가와서 다리 주위를 맴돌기까지 했다. 선은 어안이 벙벙했다.
“나니까 이래도 되는 거지, 선 씨 혼자 다닐 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안 됩니다. 길고양이들과 친해져버리면 서로 안 좋거든요.”
“밥 주는 것도요. 슬쩍 놓고만 가세요. 밥 주는 사람이라고 각인시키지 말고요.”
“얘 봐요, 귀를 세우고 꼬리를 이렇게 들고 있으면 좋아한다는 뜻이에요.”
환은 고양이들의 언어에 대해 설명했다. 머리를 비비는 건 인사하는 거다. 귀를 젖힌다면 싫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길고양이들은 경계심이 많기 때문에 사람을 보면 멀리서 가만히 쳐다보고, 갑자기 다가가면 도망친다. 그르렁거리며 꼬리를 좌우로 거칠게 흔든다면 공격할 수도 있다.
“잠시라도 키우기는 했다는 게 더 신기하네요. 뭐야, 실은 내쫓은 거 아녜요?”
선이 고양이에 대해 까막눈이라 할 만큼 아무것도 모르자 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환의 농담에는 악의가 없었지만 선은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표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친구 고양이를 맡게 된 거라서요. 서로 친해질 시간이 없었어요.”
“시간이야 언제나 없죠. 만들어야 되는 거지. 쟤는 아니죠?”
“아니에요. 왼쪽 눈 옆에 흉터가 있어요.”
환은 고양이들을 눈여겨보며, 선이 말한 인상착의에 들어맞는 듯한 녀석이 있으면 맞냐고 확인했다. 환은 고양이들에게 아주 가까이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선은 그 뒤로 1미터쯤 물러난 채 환이 하는 양을 지켜봐야만 했다. 환은 수컷과 암컷을, 타고난 길고양이와 집고양이 출신과 중성화수술을 받은 녀석과 받지 않은 녀석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환이 식별하는 방법을 설명해주었지만 선은 아무리 해도 그렇게까지 잘 알아볼 순 없었다. 그런 식으로 고양이 탐색을 며칠 하고 나니 선은 지금까지 자신이 아무런 체계도 지식도 방법론도 없이 장님이 바늘 찾듯 더듬고만 다녔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쩌면 정말로 고양이를 다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더 추워지기 전에 찾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겨울을 나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환은 길고양이의 평균 수명이 2년 남짓이라고 했다. 서너 마리의 새끼들 중에서 한 마리 꼴로 살아남고, 그 새끼가 성묘가 된 다음에도 이런저런 사고나 병에 휘말려 쉽게 죽는다고. 상가 건물 뒤편 마당에서 발견한 암갈색의 고양이는 구내염에 걸린 탓에 침을 질질 흘리면서 사료를 먹었다. 놀이터 벤치 밑에서는 새끼 고양이들이 찬 새벽이슬을 피하고 있었다. 길고양이들은 음식물 쓰레기나 조미료가 든 음식들을 마구잡이로 먹은 탓에 대개 몸집이 비대하고 머리가 퉁퉁했다.
“너무 혹독하네요.”
“아, 서울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혹독하지요.”
환은 짐짓 비통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밤 11시부터 자정 무렵까지 고양이 찾기 산책을 했다. 그러는 동안 환은 조금씩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는 무명 극작가였다. 원래는 무작정 연극이 좋아서 연기를 먼저 시작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극작에 더 적성이 있음을 깨닫고 방향을 바꾸었다. 여기저기 작품을 팔다가 나중에는 존경하는 선배와 합심해서 극단을 차렸다고. 그런데 그 선배가 돈을 들고 해외로 도주했고, 극단은 무너졌고, 무리해서 올린 공연은 실패했고, 자신은 배우들의 출연료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어서 빚더미에 올라앉았다고. 정신을 차려보니 길바닥에 나앉았고 알던 사람들은 다 떠났고 자신은 산 속에 들어가 목을 매달았다느니 하는 소문이 돌고 있더라고.
하지만 환은 그런 이야기를 무겁게 말하지 않았다. 무모한 야망으로 무리하게 극단을 차린 자신은 돈키호테처럼 희극적으로 묘사했고, 몰락하게 된 사연은 판소리처럼 구성지게 말했다. 대성통곡을 하면서 말해도 될 법한 이야기를 하면서 환은 얼굴 한 번 찌푸리기는커녕 심각하지도 않았고 남 얘기를 하는 것처럼 명랑했다. 선은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애초에 환은 자기 사연을 길게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길고양이들의 생태와 영역 다툼에 대해, 자신이 이름을 붙여준 녀석들에 대해, 홍대 앞 거리의 이모저모에 대해 더 많이 말했다. 그러다가는 자기가 실은 고양이 나라에서 왔다느니 어쩌니 하는 실없는 농담을 하고, 고양이에 대한 걸작을 5년째 집필 중인데 무대에 올리게 되면 꼭 보러 오라고 말해서 선을 억지로라도 웃어야 할지 어처구니없다고 힐난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었다. 환은 자신이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라고 떠벌였다. 자신의 희곡을 들어보라며 낭독을 하는 통에 선을 괴롭게 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너무 난해하고 상징적이어서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환은 자기 USB에 저장된 파일을 읽어주었다. “오페라 <라 보엠>의 로돌포는 겨울에 난방을 하려고 자기 희곡을 찢어서 불쏘시개로 삼죠. 그러면서 ‘종이는 재로 돌아가고 시는 하늘로 돌아가네. 아, 이 세상의 막대한 손실이다! 로마의 멸망이다!’라고 말해요. 근데 요즘 시대에는 작품이 다 0과 1의 코드로 저장되어 있으니, 그런 처절함이 없어서 다들 안일해진다니까요.”라고 진심으로 애석하다는 듯 말했다. 인쇄할 수만 있다면 진짜로 찢으면서 아리아라도 부르려는 기세였지만, 다행히도 선의 집에 프린터까지는 없었다.)
되도 않는 연기로 체홉의 <갈매기>에 나오는 무명 극작가 뜨레플레프의 대사를 읊으며 과장스러운 고뇌를 펼치기도 했다. 라신느의 <페드라>에서 냉담하고 아름다운 의붓아들에게 사랑에 빠진 비운의 왕비가 되어서 비참한 여자의 몸짓을 흉내 내기도 했다. 그리고 환은 셰익스피어가 아름답다고 말했다. 정작 선은 영문학과에서 교수에게서든 학생에게서든 셰익스피어가 ‘아름답다’는 표현을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위대하다’나 ‘어렵다’면 몰라도. 새삼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저 유명한 구절(“아름다운 태양이여, 어서 떠올라 질투하는 달을 죽여주오. 달은 이미 슬픔으로 병들고 창백한데 그 시중을 드는 시녀가 달보다 훨씬 아름답구나. 나의 숙녀, 오, 나의 사랑!”)이 얼마나 매혹적인지, <햄릿>의 저 유명한 독백(“사느냐 죽느냐, 이게 문제로군. 어느 쪽이 더 사나이다울까?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받아도 참고 견딜 것인가? 아니면 밀려드는 재앙을 힘으로 막아서 싸워 없앨 것인가?”)이 얼마나 삶의 진리를 담고 있는지 말했다.
그런 환에게 선이 느낀 감상은 여전히 “저 인간이 대체 뭔 소리를 지껄이는 건가“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솔직히 즐거웠다. 환의 이야기는 재미있었고, 듣고 있다 보면 정신이 없긴 해도 시간이 금세 흘러가버리곤 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선은 원래 말이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귀를 잘 기울이지도 못하는 성격이었다. 희연의 하소연이 부담스러워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곤 했고, 과실에서나 동기들의 술자리나 가족들 사이에서나 선은 언제나 딴생각에 쉬이 빠져들었다. 자기 자신의 문제에 신경 쓰는 것만도 여력이 없어서 남들의 생각에 관심을 가질 틈이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생산적인 사유에 몰입하는 것도 아니었다. 늘 의식 어딘가가 붕 떠 있는 것처럼 막연하고 흐릿한 세계를 부유하고만 있을 뿐. 그런데 환과 같이 있을 때면 그렇지 않았다. 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선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렸다. 그건 청량한 감각이었다.

“고양이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어느 날 산책 때 선이 감탄하면서 물었다. 그러자 환은 대수롭잖다는 듯 말했다.
“말했잖아요? 고양이 나라에서…….” 환은 선의 눈치를 보더니 말을 바꿨다. “알았어요, 알았어. 일단 한 마리 키워보다시피 한 적이 있고요. 노숙하면서 이 주변 애들이랑 친해지기도 했죠. 아무래도 처지가 비슷하잖아요.”
‘키워보다시피’? 애매한 말이었지만 환은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는 눈치였다. 환은 공사장 차단벽 문을 확인했다.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오늘은 잠겨 있네요.”
“가끔 잠겨 있을 때가 있어요. 그래도 여기서 자는 고양이들은 벽 타고 넘어 들락날락하겠죠. 나야 문이 잠겨 있으면 못 들어가서 다른 데를 찾아봐야 했지만.”
선은 환을 처음 ‘주웠던’ 라틴댄스 학원 1층의 로비를 떠올렸다. 찬 바닥에서 자면 입 돌아간다, 어머니가 해주던 말이 생각났다. 지하에서 올라오는 냉기. 더 깊은 지하에 끓어오르는 마그마, 지구의 핵. 그리고 공사장 트레일러에서 비밀스럽게 새어나오던 빛.
“저기…… 노숙인 시설 같은 덴 없나요? 나라에서 뭔가 해주지 않아요?”
선은 물어볼까 말까 망설였지만 결국은 호기심에 못 이겨 물었다.
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 환이 이런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혹은 벗어나지 않는지. 재활의 방법이 마련되어 있지 않나. 자선 단체도 많고 교회 같은 데나 정부에서도 지원을 해주지 않던가. 더군다나 아직 젊은데. 뉴스에서는 아침에 줄을 지어 따뜻한 국밥을 배식을 받는 노숙자들이 나오곤 했다. 그 정도까지가 이제껏 선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노숙자들의 전형적인 풍경이었으며 상상력의 한계였다. 선이 궁금한 건 어쨌거나 왜 환이 그 안에 끼어 있지 않은지였다. 을지로입구역이나 서울역 역사에 모여들어 술과 애환을 나누는 사람들 틈이 아니라 완전히 혼자 몸으로 거리를 배회하는지였다.
“쉼터가 있기야 있죠.” 환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들어가 본 적도 있죠. 하지만 나랑은 안 맞았어요.”
“안 맞는다고요?”
“워낙 고귀한 출신이라 그런지 그런 공동시설은 영…….”
선은 환의 농담을 받아줄 기분이 아니었다. “저체온증으로 실려가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그러자 환은 눈을 잠깐 찡그리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대부분 그렇게 말하죠. 당신은 이해 못해요.”
선은 할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공사장 근처를 걸었다. 밤이 깊었고 겨울이 성큼 다가온 게 느껴졌다. 선은 약간 뒤에서 환을 따라가고 있었다. 환의 등과 코트 자락이 바람에 가만히 흔들렸다. 차단벽에는 여전히 중국집과 주말의 클럽 공연과 요가 학원과 피부 관리실과 철거 인력과 동양 익스프레스와 ‘잠만 잘 분’과 과외 광고지들이 붙어 있었다. 그 끝자락에는 아직 개방되지 않은 공항철도 지하철 입구가 사람을 거부하는 용이 사는 석굴처럼 우뚝 섰다.
“선 씨, 저 차단벽 안에서 무슨 공사를 하는지 알아요?”
환이 갑자기 물었다.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온화하면서도 진지했다. 선은 발을 조금 더 빨리 해서 그를 따라잡아 나란히 걸었다.
“철도 공사 아니에요?”
“철도 공사는 거의 끝났죠. 지금 저기서는 지상 공원 공사를 하는 거예요. 철길을 뜯어내고 그 자리에 흙을 깐 뒤 조경수들을 심어서 길쭉한 모양의 공원을 조성한다는 거죠. 원래는 청계천 같은 시내를 만들려고 했는데, 예산 부족으로 그냥 공원으로 가기로 했대요.”
환이 코트 깃을 여몄다.
“공사 때문에 원래 여기서 먹고 살던 사람들이 밀려났죠. 저쪽 큰길 건너편에는 두리반이라는 식당이 있어요. 작은 칼국수 집이었는데 이것 때문에 강제 철거되게 됐답니다. 그래서 농성 중이라더군요.”
환은 걸음을 멈추고 길 한편에 옥수수 알갱이들처럼 듬성듬성 박힌 프랜차이즈 커피숍, 편의점, 분식집 들을 돌아보았다.
“이런 미끈한 가게들은 최근에 새로 생긴 거예요. 지하철 뚫리는 곳에는 저런 것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니까. 공항철도 열리고 공원 생기면 유동 인구가 많아질 테니, 그거 기대하고 들어섰겠죠. 세도 많이 올랐을걸요.”
하지만 선은 이 일대가 산책하기 좋은 공원과 편의 시설과 세련된 상점들이 어우러지고 홍익대학교 정문 근처처럼 시끌벅적해질 날을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선에게 이곳은 낮이면 드릴과 포클레인 소리가 지천을 울리고 늘 먼지가 풀풀 날리고 밤이면 지친 개들처럼 조용히 잠들고 남루한 기침 소리가 들리는 그런 곳으로만 보였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만 같았다.
공사가 언제 끝날까? 끝나기나 할까? 그때까지 선이 이곳에서 살고 있을까? 선에게 여기는 임시 거주지에 불과했다. 언젠가는 학교 근처로, 혹은 부천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동교동은 삶이 이어져왔고 이어질 장소일 터였다. 1년 뒤에나 시공이 끝날 걸 기대하고 성급하게 들어선 프랜차이즈 커피숍은 마치 철 이르게 피어나버린 꽃 같았다. 세입자들은 1년 뒤를 내다보고 가게를 열었지만, 행인들은 1년 뒤의 이곳을 미리 상상하고 찾아들지는 않았으므로 당연히 손님도 별로 없었다. 선은 종종 이른 아침에 이쪽 길목을 오고가다가,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은 개시를 기다리며 지루한 표정으로 비질을 하거나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점주들의 표정을 보곤 했다.
“어떤 사람들은 공사가 시작되기 전의 땅을 지키려고 해요. 또 어떤 사람들은 공사 이후의 땅을 터전 삼으려고 찾아왔겠죠. 두 쪽 다 이 공사가 어떤 식으로든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하지만 나 같은 사람들은 그 어느 쪽도 아닙니다. 그 틈바구니 어딘가에서 떠돌고 있는 거예요.”
환은 몸을 돌려 선을 마주보았다.
“저는 주로 공사장에서 머물렀어요. 일단 지붕이 있으니 비를 막을 수 있죠. 그리고 인부들이 놓고 간 생필품이나 이런저런 도구들이 있고요. 특히 여기처럼 트레일러가 있는 공사장은 벽이 바람을 막아주니까 꽤 쓸 만합니다. 하지만 공사가 끝나고 나면 나는 더 이상 여기 머무를 수 없겠죠. 산책과 햇살과 나무 그늘을 즐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공간이 될 거예요.”
“그러니까 왜…….”
“그런데도.”
환이 선의 말을 가로막았다. 나지막하지만 힘이 실린 그 목소리에 선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렇게 지내는 편이 더 좋았던 겁니다. 쉼터 입소 조건에 맞추기 위해 내 과거를 포장하고, 내 개인적인 삶에 대해 당연히 알 권리가 있다는 듯이 묻는 사람들에게 내가 얼마나 비루하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인지 끊임없이 설명하고, 좁고 낡은 실내에서 낯모르는 사람들과 살을 부대끼고, 그 사람들과 ‘노숙자’라는 똑같은 카테고리로 묶이면서 나라는 인간의 고유성을 지운 채 지내는 것보다는, 그런 수치심보다는, 이런 곳에서 추위를 견디며 내일 아침이면 깨어날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밤들을 보내는 편이, 그편이 더 나았다는 거예요. 이렇게라도 존엄성을 지키고 싶었던 거예요.”
선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무안해져서가 아니었다. 충격을 받아서였다.
“물론 정말로 어쩔 수 없어지면 시설로 가야겠지만요.”
환은 웃는지 찡그리는지 모를 표정을 짓고는 다시 몸을 돌려 발을 내딛었다. 환의 뒷모습이 밤공기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고 있었다.

선은 환의 이야기에 감동 받지 않았다. 설득되지도 않았다. 굳이 분류하자면 불쾌감을 느꼈다.
선은 존엄성이라는 걸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고, 그 이야기에 자신이 알던 무언가가 침해당하는 느낌이 들어서 불쾌했다. 선이 환이었다면 죽었으리라. 자살을 해도 진작에 했으리라. 희연 같은 사람들도 그렇게 쉽게 죽었는데, 모욕을 견디면서 구차한 고유성을 운운하고 존엄을 찾아 헤매며 어린 여자애에게 몸을 의탁하느니 입술을 깨물고 광화문 사거리에서 결연히 뛰어내렸으리라. 그것만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었으리라. 아니, 아니다. 애초에 선은 환처럼 살지 않을 터였다. 저런 사회의 밑바닥 중에서도 밑바닥까지 치닫지 않을 터였다. “왜 그렇게 살아요?” 선은 묻고 싶었다. 아니, “왜 살아요? 그렇게 자존심이 강하면 죽으시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선은 그런 생각을 한 마디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어쨌든 환은 남이었다. 12월 말이면 헤어져서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사람이었다. 괜히 감정 상하는 말을 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정말로 그래서였을까? 알 수 없었다. 솔직히 선은 환의 얼굴을 마주보면 어쩐지 주눅이 들었다. 그 근거 없는 초연함에, 태평하도록 관조적인 태도에, 모든 걸 달관했다는 듯한 눈빛에, 실없는 농담에 주눅이 들었다.
그래서 선은 가면 갈수록 말이 없어졌다. 그냥 환이 하는 말에 수긍하는 시늉을 하고 적당히 맞장구를 치고 적당히 되물으면서, 속으로는 그저 이 기묘한 동거가 빨리 끝났으면 하고 초조하게 바랄 뿐이었다. 고양이 찾기 산책도 점점 재미가 없어졌다. 선은 고양이 사료를 담은 봉투를 들고 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가 지겨워졌다. ‘길고양이들 밥이나 주고 다니는 청년 백수’. 딱 그짝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서 불안했다. 환의 삶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에게 침투하고 있는 것 같아서 불안했다. 이건 아니었다. 애초에 환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희연의 고양이를 찾아 나서는 게 아니었고, 그보다 더 전에 희연의 고양이를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었고, 아니 그보다 더 전에 희연과 친구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겨울이 다가왔다. 11월 중순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추위가 몰아쳤다. 환은 아르바이트를 한 돈으로 두툼한 옷 몇 벌, 속옷, 핸드크림, 운동화, 머플러 따위를 사들였고 선의 방 한구석에 환의 살림이 조금씩 늘어갔다. 선은 그걸 볼 때마다 심란해졌다. 일단 집 밖으로 나가면 기분이 좀 나아졌다. 카페에서 커피를 갈다가 손님이 들어올 때 유리문 사이로 찬바람이 확 쏟아져 들어오는 걸 느끼면, 거리를 종종걸음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맞은편 분식집 안에서 김이 오르는 오므라이스와 장국을 먹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선은 만약 환이 노숙을 했더라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도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덕꾸러기로만 보이는 환의 물건들도 환의 존재도 지금 이 순간 이 세상에 없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 그러면 선은 감상적인 기분에 젖었고, 거리 곳곳에 스민 연말 분위기도 더해서 조금은 너그러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마감 시간쯤 해서 환이 문을 열고 들어와 언제나처럼 카페라떼를 시키면 금세 다시 심란해져버리는 것이었다.
어느 날 산책 끝에서 환은 동네 마트에 들러 맥주 네 캔과 감자칩을 샀다. 선은 마실 생각이 없어서 사양했지만 환은 구태여 권했다.
“요즘 기분이 안 좋아 보여요.”
환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과자를 뜯고 캔을 따면서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생리 중?”
“아니에요!”
선이 벌컥 화를 내자 환은 진정하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왜 그래요? 연애사업? 그거라면 맘 편하게 털어놔봐요. 코치해줄 테니까. 아, 아니면 혹시 고양이 못 찾아서 실망했어요? 우리 내일부터는 서교동까지 진출해볼까요?”
선은 침대에 올라앉아서 말없이 환을 노려보다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잘 거예요.”
“지금 시간에 퍽도 잠이 오겠습니다.”
“말 시키지 마요. 하지 말라면 하지 말라고요.”
환은 무안한 듯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혼자 술을 마셨다. 선은 누운 채 가만히 있었다. 맥주를 들이키는 소리, 과자를 씹는 소리 외에는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가 환이 다시 입을 열었다.
환은 또 연극에 대해, 자기 작품에 대해, 혹은 남의 작품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선은 아예 보란 듯이 이어폰을 꽂고 돌아누워 버렸지만 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선이 듣든 말든 계속 떠들었다. 아니 실은 환이 하는 말은 이불과 이어폰 사이로 다 새어 들어왔고, 환은 자기 말이 들리리라는 걸 알고 저러는 거였다.
“수많은 희곡 작가들이 등단작으로 당선 공연 하나만 올리고 연극계에서 영영 퇴장하죠. 많은 재능 있는 극작가들이 방송 작가로 돌아서고요. 대학 시절에, 나는 그렇게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고답적이고 예술 운운하는 작품을 하다가 세상과 소통하지 못한 채 묻히지도 않을 테고, 시류에 굴복하고 연극이 아닌 다른 길로 가지도 않으리라고. 아, 위대한 포부예요. 그렇지 않아요?”
“극단을 총괄하는 일은 예술가보다는 정치인의 소양을 요구하죠.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런 소양도 있었죠. 연극이 팔리지 않는 시대라면 팔리게 만들면 되고,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보게 만들면 된다. 그래, 근데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그리고 돈을 마련하려면 때로는 아주 소중한 것까지도 주저 없이 팔아넘겨야 했어요.”
“연극은 말이죠, 돈으로 굴러갑니다. 돈이 없으면 할 수 없어요. 간단한 이치예요. 근데 그 순진한 사람들은 재능만 있으면, 작품만 좋으면 관객이 저절로 올 거라고 생각하더라고. 그리고 불굴의 예술혼으로 뭘 이룩하려고 하죠.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니까.”
환은 취한 사람처럼 주절주절 떠들었지만 취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선은 일부러 들리라고 커다랗게 한숨을 쉬었다.
“연극이라는 예술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뭔가가 아니라, 조명과 소품 하나하나에, 주연과 조연 배우들 하나하나에 비용을 지불하고, 언론과 홍보업체와 정부와 투자자들을 모두 동시에 신경을 써야 하는 거고, 그걸 못하면 망하는 거예요. 그걸 못하게 되면 극본은 무대에서 생명을 얻지 못하는 죽은 작품이 되죠. 쓰레기가 된다고…….”
선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불을 확 걷고 일어나 앉았다.
“그러는 그쪽도 돈 없잖아요.”
내내 침묵하던 선이 별안간 내뱉은 말에 환은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눈만 끔뻑거렸다.
“뭐 하나 히트 친 적도 없잖아요. 등단도 안 했고. 뭐예요, 만년 신인? 마지막으로 작품 쓴 진 얼마나 됐어요? 1년? 2년? 작가라고 할 수는 있는 거예요? 그중에 무대에 못 오른 건 몇이죠? 그건 다 쓰레기겠네요, 그럼.”
선의 날카로운 악담에도 환은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뭐라고 대꾸하지도 않았다. 쳐다만 보고 있었다. 선은 자신이 어떻게 이런 말들을 할 수 있는지 불가사의했다.
“늘 무명이었고, 앞으로도 무명일 테고. 당장 먹고 살 길도 없으면서 예술 운운이나 하고. 실패가 뭐 자랑이라고 포장이나 하고 앉았고. 어떻게 재기해볼 방법을 찾을 생각은 안하고 이리저리 자기 정당화 하는 수법만 늘고. 한심해서, 진짜…….”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환이 천천히 말했다.
“확실히, 네. 내 글은 결국 쓰레기 신세죠. 100년 전이라면 불쏘시개로라도 써먹었겠지만 그것마저도 못하는. 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 이건 내가 선택한 거고, 내 작품이 옳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선은 실소를 터뜨리곤 숨을 한 번 몰아쉬었다.
“누가 뭐래나. 그냥 평생 그러고 사세요 그럼. 나라면 그렇겐 안 살아요.”
그러자 환은 빙긋 웃었다. 선은 환이 웃는 타이밍을 종잡을 수 없었다. 잔뜩 몰아붙인 상대방이 도리어 웃자 선은 맥이 빠졌다.
“왜 웃어요?”
“그냥요. 재밌잖아요.”
“뭐가요?”
“선 씨가 나처럼 살 리가 없는데, 뻔한 건데 구태여 선언을 하니까 그렇죠.”
선은 어쩐지 더 화가 났다.
“뭐가 그렇게 뻔한데요? 어떻게 그렇게 단언하죠? 나에 대해 대체 뭘 안다고? 세상 다 살았나?”
“그래요. 좋아요. 나는 당신에 대해 몰라요. 그럼 이제 당신 이야기를 해봐요.”
환이 맥주 캔을 들고 다가왔다. 선은 순간 그가 침대에 나란히 앉으려는 줄 알고 움찔했지만 환은 침대 앞의 방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선을 올려다보았다.
“선 씨는 자기 얘긴 거의 안 하잖아요. 항상 나만 떠들죠. 알려주세요. 당신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선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선은 멍하니 환을 쳐다보았다. “알려주세요. 당신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우스운 말이었다. 누가 타인에게 이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거나 또는 듣는단 말인가? 환의 저런 연극적인 언사들이 이젠 지겨웠다. ‘존나 지겨워.’ 머릿속에서는 자기 삶의 이런저런 파편들이 먼 바다의 유목처럼 까딱까딱 떠올랐다. 집, 학교, 수업, 아르바이트, 취업. 사이사이의 식사. 커피. 텔레비전. 매니큐어. 동창과의 전화 통화. 토익. 학원. 계절학기. 동생의 생일. 갈비집. 분홍색 칫솔. 두루마리 휴지. 선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그쪽한테 그런 얘길 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요.”
“당신이 내 얘길 들어줬으니까…….”
“내가 들어줬다고요? 아뇨, 환 씨가 일방적으로 말한 거죠. 말하고 싶으니까 말한 것뿐이겠죠. 그런데 나는 말하고 싶지 않다 이거예요. 이해 안 돼요?”
환은 입을 다물었다.
“고양이 찾는 거만 해도 그래요. 그쪽이 하고 싶으니까 하는 것뿐이잖아요. 멋대로. 나는 거기에 맞춰주고 있는 거고. 지금 누가 누굴 배려하고 있는 건지를…… 아, 정말이지, 있잖아요, 뭘 착각하고 있나본데…….”
“찾아야 하잖아요?”
환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친구 고양이라면서요. 맡긴 거라면서요. 돌려줘야 할 것 아닌가요. 찾고 싶어 하잖아요?”
선은 버럭 짜증을 냈다. “아 씨, 희연이는…….” 그러고는 목이 탁 막혔다. 선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느껴졌다. 환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선은 이불 끝을 그러쥐고 눈을 감았다. 자신이 너무 얄팍하고 피상적인 인간으로 느껴졌다. 종잇장처럼 바스락 구겨질 것 같았다.
“희연이는 죽었어요.”
눈물이 터져 나왔다. 선은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걘 죽었어요. 자살했다고요.”
선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못 돌려줘요. 찾아봤자 못 돌려줘요.”
선은 이러는 게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행동이야말로 연극적이라고 생각했다. 선은 마음 한편으로 자신의 행동거지를 인식하고 있었다. 죽었어요, 자살했어요. 진부한 대사. 예정된 눈물. 한심한 비극. 하지만 이건 연극이 아니다. 싸구려 아침연속극조차도 못 됐다. 선의 삶은, 희연의 삶은 모두 조잡한 가짜 같았다. 그게 견딜 수가 없었다.
“아 되게 웃기네. 솔직히 별로 친한 친구도 아니었고. 꼴랑 몇 달 어울렸나? 근데 내가 왜 이렇게 유난 떠는지 모르겠는데. 웃겨가지고 진짜. 다 어이가 없어요. 아직도 실감이 안 나요. 하지만 실은, 네, 알아요. 솔직히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걔가 저러다가 자살할 거란 거. 하지만 믿고 싶지 않았던 거겠죠. 그런데 지금도 믿어지지 않아. 어떻게 이렇죠?”
희연만이 아니었다. 선은 그 어떤 사람의 장례식에서도 환자에게서도 사고 현장이나 자살 현장에서도 시체에서도 죽음을 실감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공간이나 사물들은 텅 비어 있었고, 중요한 것이 이미 오래 전에 빠져나가고 남은 무가치한 흔적들 같았고, 선은 정확히 무엇을 보아야 하고 어떻게 유감을 표해야 하고 뭘 슬퍼해야 하고 얼마나 어떻게 울어야 하는 건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선이 매끈하게 웃는 방법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도시에서 자연스럽게 사는 방법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이 이렇게 생뚱맞고 거짓말 같고 바보 같을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환이 죽어가던 모습은 전혀 생뚱맞지도, 거짓말 같지도, 바보 같지도 않았었다. 선은 환에게서 생생한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새끼손가락에 힘없이 걸리던 환의 손가락. 가을 공기 속에 부서지던 숨결. 그 마법 같은 순간. 시간이 멈추던 순간. 온 세상이 그의 죽음을 위한 무대가 되는 것 같던 순간. 아니, 온 세상이 그를 죽이려고 모의하는 것 같던 순간. 그 선명한 공포. 어둠속에서도 노골적이도록 강렬한 컬러, 귀를 찢는 듯한 정적, 코를 찌르고 들어와 온 몸을 더럽히는 듯하던 악취.
언제였는지도 모르게 손에 캔 맥주가 쥐어져 있었다. 차가운 한기가 손바닥에 스몄다. 그리고 손등으로는 따뜻한 체온이 배었다. 환의 손. 마르고 강인한 손. 선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맥주를 든 손으로 환의 가슴팍을 때렸다. 흰 거품이 흩날렸다.
믿어지든 믿어지지 않든 희연의 삶은 끝났다. 선의 시간은 뭐가 어찌 되었든 이어져가고 이어져갈 텐데 희연 혼자만 영원히 멈췄다. 비겁한 년이라고 선은 생각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자신의 삶이 그 애에게 빚을 진 것만 같았다. 아니, 그런 부채감을 느끼는 것도 우스웠다. 선의 삶 자체가 막막하다는 게 문제일 뿐이다. 무의미하고 지루하고 천편일률적인 삶. 간절하게 원하는 것도, 뭔가를 잃어본 적도, 소중한 걸 팔아넘겨본 적도, 전부를 내걸어본 적도 없는 삶. 학점. 토익. 취업. 학자금 대출. 아토피와 탈모와 저가 화장품과 음식물찌꺼기 건조기와 회전 초밥집 같은 예식장에서의 결혼과 이혼과 우울증과 불면증. 떠밀리는 대로 움직이고 이유도 모른 채 경쟁하고 또 경쟁하다가 늙어죽을 삶. 누군가는 바로 이런 게 삶이라며 그 안에 어떤 소박하고도 숭고한 의미가 있다는 듯 말하지만, 그런 소리는 아무래도 기만 같았다. 이런 게 삶이라면 아무래도 억울했다. 희연은 수많은 자살자들 속에 묻혀버렸다. 그 애의 얼굴 가죽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고 자동차와 전투화와 먼지와 이 끝없는 공사 소리에 묻힐 것이다. 그리고 이 어둠에서 그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만약 이런 게 삶의 전부라면, 그런 거라면, 선은 무서워서 까무러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무서움도 엄살 같았고, 기아와 추위로 죽어가던 환에게 닥쳤던 공포에 비하자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조악한 가짜 같았고, 그래서 선은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환의 말이 미웠다. 선은 환처럼 살지 않겠다고 했지만 막상 어떻게 살고 싶은지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선은 환의 옷자락을 붙들고 있었다. 정확히는 멱살을 붙잡고 있었다. 방바닥에 맥주가 엎질러져서 침대에서 흘러내려온 이불 귀퉁이가 젖어 있었다. 환의 티셔츠도 젖어 있었다. 티셔츠에 프린트된 “Sweet Home”이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집도 없는 사람이 저런 문구가 쓰인 티셔츠를 입고 싶을까? 선은 고개를 푹 숙이고 환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녹녹한 보리 냄새가 풍겼다.
“미안해요.”
환이 한참의 침묵 끝에 말했다. 그리고 또 다시 침묵했다.
“나는…….”
“위로하지 마요. 쪽팔리니까.”
겨우 울음을 삼키고 내뱉은 선의 말에 환은 또 다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선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나는 당신이 말한 대로, 무명 극작가예요.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희곡들만 쓰고 있죠.”
“아뇨. 됐어요. 미안해요. 그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선이 눈을 비비면서 부리나케 사과했다. 애꿎은 환에게 화를 낸 자신이 창피했다.
“사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들어봐요. 나 같은 무명작가는 언제고 어느 시대고 있었어요. 어떤 작품이 흥행하느냐, 어떤 작품이 대중의 사랑을 받느냐 하는 건, 거의 대부분 운이죠. 타이밍이요. 그런 행운의 선택을 받지 못한 작가들은 끝내 잊히는 거예요.”
또 그놈의 연극 얘기인가 싶어서 선은 그만두라고 하고 싶었지만 기진맥진해서 그럴 여력도 없었다. 환에게 잡힌 어깨가 뜨거웠다. 선은 비틀거리며 물러나서 침대 위로 다시 올라앉았다. 그러자 환은 미묘한 표정으로 선을 바라보았다. 선은 그 표정이 무슨 뜻인지 읽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운과 타이밍을 거머쥐는 것도 재능의 일부랍니다. 문제는…… 지금은 운이라는 것 자체가 없어진 시대라는 거예요.”
환은 고민하면서 주의 깊게 말을 이어나갔다.
“옛날에는 달랐어요. 옛날엔, 예술가들은,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예술을 지키는 것과, 성공하기 위해 비굴한 장사치가 되는 것 사이에서 치열한 고민을 해야 했죠. 폐쇄적인 제도권에 들어가기 위해 자신의 작품관을 포기하는 것과, 권위도 명예도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자기 세계를 완성해나가는 선택 사이에서 갈등해야만 했고요. 물론 옛날에도 세상은 지금보다 나을 게 없었어요. 온갖 지저분하고 천박하고 위험한 것들로 가득했겠죠. 하지만 적어도 그때의 세상은 예술가에게 영혼을 팔라고 유혹하고 또 협박하는 세상이었다면, 지금은…….”
환은 엷게 미소를 지었다.
“나의 영혼 따위는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지요.”
선은 잠자코 들었다. 환은 무대에서 독백을 하듯 말을 이었다.
“이전에도 죽을 뻔했던 적이 있어요. 그때는 집이 있었는데. 월세는 밀리고. 쌀통은 비었고. 치약도 떨어져서 이빨을 닦지 못했죠. 보일러가 옛날식 기름보일러라서 난방을 할 엄두도 못 냈어요. 그래서 점퍼를 입고 장갑을 끼고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데 1월이었고 실내 온도가 바깥과 똑같았습니다. 배가 고팠고. 배가 아팠고, 추웠고, 창밖 하늘로 싸락눈이 내리는 게 보이는데 깜빡 잠들었다 깨어나 보니 집 안에도 눈발이 펄펄 날리는 게 보이는 겁니다. 환각이구나, 아, 이러다 죽겠구나 싶더군요.”
선은 환의 눈에 비친 풍경을, 올려다본 방 안에 흩날리는 눈송이들을 상상했다.
“죽겠구나. 춥구나. 배가 고프구나. 춥구나. 죽겠구나. 나는 죽고 싶지 않았어요. 아직은 죽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연락할 데가 없었고, 연락을 할 방법도 없었죠. 그때는, 그러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감각이 들어요. 멀리. 아주아주 멀리. 대륙 하나, 바다 하나 너머에나 사람 사는 곳이 있고, 지금 이곳엔 철저히 아무도 없다는 느낌. 하지만 사실은 바로 옆집에서 부부싸움을 하고 집 바로 앞 골목에서 애들이 고함지르며 뛰어가는 소리가 다 들려요. 그런데 내가 있는 거기만, 그 집만 산산이 무너지고 있는 겁니다.”
환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숨을 가다듬었다. 선은 어느새 넋을 잃고 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끝이라는 확신이 들었을 때부터는 정신이 또렷해졌어요. 환각도 그치고, 사리판단도 되고, 고통도 덜하고, 몸을 좀 움직일 수도 있게 됐죠.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공포는 더해갔습니다.”
이제 환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환이 이렇게 평정을 잃는 걸 선은 처음 보았다. 환은 그때 겪었던 두려움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듯 보였다.
“뭐가 무서웠나요?” 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죽음이요.”
환은 간단히 대답했다가 선의 표정을 보고는 덧붙였다.
“나와 내 작품들이 이대로 모두에게 잊힐 거라는 게. 이름 없이 영원히 사라지리라는 게.”
환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선의 손을 잡았다. 거짓말처럼 따뜻했다.
“당신은 나를 그런 죽음의 공포에서 구해줬어요.”
선은 말문이 막혔다.
“나는 희연 씨를 이해해요. 세상은 견고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생매장하고 있죠. 여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비극들, 아무도 모르는 죽음들로 이루어진 폐허예요. 나는 그 폐허 속에 파묻히고 싶지 않았어요. 공항철도 재개발 이전과 이후 사이의 저 공사장처럼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면 무서워서 미칠 것 같았어요. 그런데…….”
환이 선의 눈을 마주보았다. 바둑알처럼 새까만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환의 눈이 다시 웃었다. 선은 그 웃음이 외롭다고 생각했다. 꺼지기 직전의 등걸불 같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당신이 나타났죠.”
환이 다시 말했다.
“당신은 아무것도 묻지도 요구하지도 않고 나를 믿어주었고, 내게 목숨을 주었고,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었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준 유일한 사람이었어요. 우리를 죽게 하거나 죽어 있는 채로 살게 하는 저 세상에서 나를 지켜준 유일한 존재였어요. 당신은 희연 씨를 죽게 방조한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라고 자책하고 있지만, 아니오, 당신은 오히려 희연 씨가 마지막 순간까지 매달릴 수 있었던 유일한 끈이었을 겁니다.”
선은 어느새 다시 울고 있었다. 환은 옷소매로 선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선이 쓰는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시야가 흐릿했고 체온이 얼크러졌고 어디까지가 자신이고 어디부터가 환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나는…….”
선은 입을 열었다가 다시 깨물었다. 환이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설사 자신이 정말로 마지막 순간까지 매달릴 수 있었던 끈이라면, 그런 거라면, 썩은 동앗줄이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선은 희연도 희연의 고양이도 환도 스스럼없이 잡아줄 수 없었고 항상 도망치려 했던 자신의 비겁함을 차마 고백할 수 없었다. 이 온기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얼마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이 지났다.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정신이 몽롱했고 너무 울어서 온 몸이 늘어졌다. 선은 환에게 키스하고 싶어졌다. 당연히 키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환은 선이 좀 진정된 것 같자 부드럽게 물러났다. 선은 가슴에서 무언가가 툭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환은 걸레로 엎질러진 맥주를 닦고 반쯤 남은 과자와 빈 캔들을 정리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환이 아까 컴퓨터로 틀어놓았던 플레이리스트는 한참 전에 끝나 있었고, 파도가 몰아치는 듯하던 방 안은 수영장 물 속처럼 고요하게 일렁거렸다.
새벽이 깊었다. 환은 자야 할 시간이었다. 그리고 선은 냉수처럼 말짱하게 깨어 있는 시간이었다. 두 사람의 시간은 겹치지 않았다. 불을 끄고 스탠드를 켜고 선이 침대에 앉고 환이 이부자리에 누웠을 때 그는 말했다.
“고양이는 더 찾지 않아도 돼요. 그건 당신이 짊어져야 할 몫이 아니에요.”
“사실 딱히 찾으려고 한 것도 아니었어요.”
선은 퉁명스럽게 대꾸하지 않았다. 솔직히 털어놓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자 환은 고개를 끄덕이고 졸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내가 찾고 싶었던 거겠죠.”
그리고 환은 잠들었다. 선은 침대에서 조용히 나와 환의 머리맡에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환의 가슴이 평온하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선은 그 가슴 속에 깃든 심장을 뜯어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환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환을 살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 고양이 찾기 산책은 끝났다.
두 사람 사이는 삽시간에 서먹해졌다. 이전처럼 대화를 많이 하지 않았고, 무언가를 함께하는 일도 드물어졌다. 환은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가거나 그러지 않으면 집에 있었다. 언제나처럼 선의 책들을 읽거나 인터넷을 하거나 자기 원고를 들여다보거나 하곤 했다. 가끔은 혼자서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을 하는 동안 선에게 같이 하자고 권하지 않았다. 이제 둘 사이의 침묵은 처음처럼 어색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괴로워졌다. 선은 둘이 있되 혼자 있는 방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걸레질한 데를 또 걸레질하고 끓인 물을 또 끓이고 닦은 이빨을 또 닦곤 했다. 그러면 환은 눈을 끔뻑거리며 선을 쳐다보다가 “건망증 걸렸어요? 30분전에 양치질 했잖아요.”라며 농담 섞인 힐난을 하고는 좀 시시덕거리다가 다시 책이나 모니터로 눈을 돌리곤 했다.
‘죽음의 공포에서 구해준 유일한 사람’. 선은 역시 자신이 썩은 동앗줄이었다고 생각했다. 혼자 싱크대 앞에 서서 유자차를 끓이는 환의 등을 볼 때마다 미안하고 안쓰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등을 손으로 문지르며, 그날 했던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고, 다시 예전처럼 새벽 산책을 나가자고,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환에게 퍼부었던 폭언을 주워 담을 수만 있다면 주워 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날 나누었던 이야기는 모두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선의 구원은 3개월 한정이다. 선이 해야 할 몫은 다했다. 더 이상 짊어질 필요도 없고, 짊어져서도 안 된다.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였다. 그리고 환은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선에게 더 이상의 부담을 주지 않으려 배려하는 것이다. 머지않아 떠나야 한다는 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듯 행동하면서. 아니, 혹은 어쩌면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알 수 없었다. 환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능했다. 환은 명랑했다. 농담이 많았다. 절망을 웃어넘길 수 있을 만큼 절망해보았다. 환이 지금까지 잃어버렸던 것들에 비하면, 세 달 한정의 동거인을 잃어버리는 것쯤은 또 다시 웃어넘길 수 있는 정도의 상실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작품이지 인간관계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선은 달랐다.

어김없는 포클레인과 드릴 소리가 들렸다. 먼지가 날렸다. 손님이 뜸한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 커피와 치즈 프레첼 냄새가 흘러나와 텁텁하고 알싸한 겨울의 공기에 섞였고 콩나물국밥 집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사람들은 지긋지긋한 눈으로 공사장을 흘겨보곤 옷깃을 세우고 종종걸음으로 거리를 지나다녔다. 모두가 공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선은 공사가 언제까지나 이어지기를 바랐다.
환은 더 이상 선이 일하는 카페로 찾아오지 않았다. 오늘은 어느 길로 갈까, 무슨 먹이를 줄까, 은행 옆 골목의 그 절름발이 줄무늬는 잘 있을까, 출판사 사무실 앞 화단에서 자던 한 쌍은 왜 사라졌을까, 바 자리에 앉아서 카페라떼를 마시며 귀찮도록 떠들던 환은 이제 없었다. 선은 마지막 손님을 내보낸 뒤 설거지를 하고 에스프레소 머신을 끄고 청소를 하고 입간판을 들여놓으면서 자꾸만 창밖을 기웃거리곤 했다. 혹시나 환이 걸어와서 밖에서 손을 흔들지 않을까 기대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선은 자신의 감정이 혼란스러웠다.
선이 혼란스럽거나 말거나 12월은 꾸준히 깊어가고 있었다. 미경은 수능을 망쳤고 재수를 하기로 했다. “왜 집에 코빼기도 안 비치니? 부천이 얼마나 멀다고. 언제 와?” 엄마의 말에 선은 “바빠서요. 공부할 게 너무 많아요.”라고 핑계를 댔다. 한심한 핑계였지만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핑계이기도 했다. 다음 학기에 복학을 할지 말지는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과 송년회를 한다는 연락이 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대학교의 사교계란 1, 2학년들을 위한 써클이다. 3학년 이상의 복학생이나 휴학생들은 모두 어디론가 제각각 흩어지고, 신입생 때 어떻게든 친구와 애인을 찾기 위해 탐색전을 벌이고 열심히 모여들던 아이들은 새로운 신입생들에게 자리를 내준다. 선은 신입생 시절, 학기 초에 과실에 뻔질나게 얼굴을 내밀면서 후배들 점심을 사주더니 어느 날 갑자기 고시 공부다 교환 학생이다 편입이다 하면서 사라진 선배들이, 대체 누구를 만나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지 궁금해하곤 했었다. 그런 걸 구체적으로 알 수만 있다면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도 어떻게든 형상을 갖출 수 있을 것처럼. 하지만 선은 그 선배들도 여전히 뚜렷한 목표 없이 이런 식으로 불확실하게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누구에게 설명할 수도 없는 이런 이상한 동거를 하고 있는 사람은 그중 아무도 없었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이 경험은 선과 환 둘만의 기억으로 끝날 테고, 12월 말이면 환은 선의 인생에서 원래부터 없었다는 듯이 사라질 것이다. 선은 그게 싫었다. 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팠다. 환이 떠나고 난 뒤 혼자 남을 나날을 생각하면 막막해졌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선은 환을 좋아했다.
환의 긴 머리카락이 좋았다. 잔머리가 흘러내리는 목의 주름이 좋았다. 책장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는 옆얼굴의 아슬아슬한 선이 좋았다. 불거져나온 광대뼈. 갑자기 웃자란 중학생처럼 어색하게 긴 몸. 발톱을 깎으려고 몸을 수그릴 때 둥그렇게 휘어지는 등. 쇼맨십으로 승부하는 피아니스트처럼 키보드를 쾅쾅거리며 두들기는 손. 품위 없는 폭소, 못마땅할 때면 찌푸리는 미간의 골. 밥을 먹을 때의 정적인 태도. 설거지를 하면서 흥얼거리는 콧노래. 문 리버, 개여울, Why Don't You Do Right 같은 고전적인 여성 보컬의 노래들. 불가사의할 만큼 따뜻한 체온. 불가사의할 만큼 건강한 웃음. 누군가에게 인정받기를 간구하지 않는 사람 특유의 눈. 혼자만 볼 수 있는 무언가를 보는 눈. 완전히 외로운 눈. 그 눈을 볼 때마다 선은 말하고 싶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해요.”
선은 자신의 마음이 속삭이는 그 소리에 겁이 났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선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등줄기를, 그 목울대를 볼 때마다 손을 뻗어 만져보고 싶어지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환의 온갖 한심하고 사소하고 구질구질한 부분들까지 반짝반짝 빛나는 듯 보이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선이 이해하거나 말거나, 합리적으로 설명을 할 수 있거나 말거나, 마음속의 갈망은 나날이 제어할 수 없어져만 가는 야생의 동물처럼 멋대로 살아 움직였으며 뜨겁고 음산하고 예측불허였다.
“미쳤나봐.” 이번에야말로 정말 미쳤나보다 싶었다. 선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공포에 질렸다. 동시에 아무 짓도 저지를 수 없을 것이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며 이대로 모든 것이 끝나버리리라는 공포에 질렸다. 환이 없는 집은 텅 빈 것 같아서 싫었고, 환이 있는 집은 고통스러워서 싫었다. 그래서 곧잘 집을 비우고 도망쳐 나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선은 어느새 혼자 동교동을 걸으며 월동중인 고양이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주말의 밤이 흐르는 길이었다. 찬바람이 우우 비명을 지르며 길을 쓸고 다녔다. 동교동은 처음 이사 왔을 때와 거의 똑같았는데 한편으로는 완전히 다른 장소로 보였다. 주택가의 어두운 골목들에서 열 평 남짓 되는 24시간 편의점들이 드문드문 살풍경한 빛을 밝혔고, 카운터에서는 중년의 남자 혹은 여자가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선은 한 편의점에서 소시지를 샀다. “고양이 밥 주는 거야?” 아줌마가 물었다. “요즘은 혼자 다니네.” 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찡그렸다. 선은 저 아줌마가 이전에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생각했다. 예전에 부천의 본가에서 70년대에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가 완전히 몰락해버린 여배우를 취재한 방송을 본 적이 있었다. 우울증에 빠져서 아무것도 못 하다가 제작진의 강권을 못 이겨서 정신과 상담을 받고 편의점에 취직했다. 불안이 그늘처럼 깔린 얼굴. 표정이 풍부하고 이목구비가 선명한 배우 특유의 얼굴, 하지만 분장을 하지 않고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백지 같은 공허한 얼굴. “우리 같은 연기자들이 그래요. 연기밖에 할 줄 모르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 않고는 살아갈 방법을 모르고.” 그녀는 편의점 에이프런을 걸치면서 카메라를 보았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이런 일이라도 해야죠. 죽지 않으려면.” 선은 살아갈 방법을 안다는 것과 죽지 않는 방법을 안다는 것 사이의 격차에 대해 생각했다.
환이라니. 환을 사랑한다니. 대체 환의 어디가 어떻게 좋단 말인가? 미경이 이 사실을 안다면 뭐라고 할까? 비웃겠지. “미친 거 아니야? 가난뱅이 예술가랑 사랑에 빠졌어? 뭐야, 지금 <타이타닉> 찍니?” 선은 그런 비아냥에 떳떳하게 대답할 말이 없었다. 선은 환의 희곡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환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무명 극작가.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한 노숙자. 빚에 쫓겨 다니는 실패자. 그러면서도 자기 작품만 바라보는 시대착오적인 보헤미안. 정기적인 수입과 전셋집과 노후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다고 믿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도 그렇게 믿는 예술가 나부랭이. 일단 살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선은 되묻고 싶었다. 일단 살 만해야만 뭐든 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그딴 식으로 사는 게 사는 거냐고. 하지만 살 만하다는 상태가 정확히 뭔지는 선도 몰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몰랐다.
선은 걸음을 멈췄다. 길 저편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걸어오고 있었다. 노란 가로등 불빛 때문에 순간 희연의 고양이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검은색 고양이었다. 새까만 털, 호박색 눈, 오른쪽 앞발과 배 부분을 군데군데 덮는 누런 얼룩. 어쩐지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든 것과 동시에, 어디서 보았는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선이 처음으로 먹이를 줬던, 그리고 환을 공사장 트레일러에서 데려왔던 날 보았던 그 길고양이였다. 이렇게 금세 알아보다니 선도 고양이를 보는 눈이 많이 섬세해진 모양이었다.
고양이는 몇 미터 앞에서 멈춰 서곤 선을 빤히 쳐다보았다. “길고양이들은 경계심이 많기 때문에 사람을 보면 멀리서 가만히 쳐다보고, 갑자기 다가가면 도망갑니다.” 환이 가르쳐주었던 게 생각났다. 선은 녀석이 반가워서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지만 달려들고 싶은 걸 참았다. 그리고 봉투에서 소시지를 꺼내 포장을 까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움직인 건 그때였다. 처음에는 도망치려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반대였다. 녀석은 선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더니 선의 다리에 머리를 비비고 가르릉 울었다. “머리를 비비는 건 인사하는 거예요.” 제대로 기억하는 줄도 몰랐던 환의 가르침이 하나하나 기억났다. 마치 환이 곁에서 지켜보며 코치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꼬리를 위로 곧게 뻗고 끝부분만 뒤로 살짝 말았다. 그러고는 가볍게 흔들었다. “당신을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고양이는 다리 주위를 빙글빙글 돌다가 몸을 비볐다. 선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애교 부리는 거예요. 쓰다듬어줘야죠.” 선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어보았다. 골골골 나지막이 울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신비로웠다. 눈물마저 날 것 같았다.
선이 소시지를 건네자 고양이는 냄새를 맡고는 오물오물 먹었다.
“너도 나를 알아보는구나. 그치?”
고양이는 선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작게 울었다. 선은 활짝 웃었다.
“신기하네. 그러고 보면 꼭 네가 나를 환에게 데려다준 것 같아.”
고양이는 귀 한쪽을 아주 잠깐 파드득거렸다.
“안아봐도 되니?”
선은 두 팔을 뻗었다. 고양이는 선을 빤히 올려다보며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대부분의 고양이는 안기는 걸 싫어하죠.” 선은 한 번도 고양이를 안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머뭇머뭇 어설프게 감싸 안았다. 검은 고양이는 꼬리를 천천히 살랑살랑 흔들었다. “편안하다는 뜻이에요.”
고양이는 따뜻했다. 털은 거칠었지만 길고양이 치고는 깨끗했다. 그리 예쁘지는 않았지만 건강해 보였다. 원래는 집고양이였던 걸까? 어두워서 암컷인지 수컷인지까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환은 얼굴만 보고도 재깍 알아보던데. 선은 품 안의 온기에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추운데 어디서 어떻게 자니.”
고양이의 심장 박동과 호흡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가냘프고도 강인한 생명력. 마치 괜찮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난 그래도 환이 계속 우리 집에서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
선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 사람 이야기를 듣고, 삶을 지켜보고, 지켜주고 싶어. 언제나 언제나.”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선은 환과 달랐다. 선은 비로소 자신의 처지가 무엇인지 명확히 깨달았다. 선에게는 정기적인 수입과 전셋집과 노후가 중요했다. 그런 걸 위해서 들어온 대학이었고, 그런 걸 가지고 살길 원하는 부모님의 기대를 절대로 저버릴 수 없을 소시민이었다. 환 같은 사람을 뒷바라지하며 살 수 있는 이타적인 사람도 아니었고, 그래도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라고 믿을 만큼 바보도 아니었고, 마음 편히 환을 지원해줄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부자도 아니었다. 선은 환의 연인이나 무언가가 될 수 없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선 씨가 나처럼 살 리가 없는데 구태여 선언을 하니까 우습잖아요.” 선은 그 말에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알았다. 선이 환을 두려워했던 건 자신도 저런 사회의 낙오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은 절대로 저렇게 낙오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런 실패를 감수하면서라도 지키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환을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선은 울고 있었다. 아무도 울고 있는 자신을 보는 이가 없어서 편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품 안의 고양이가 길게 울더니 선의 손등을 핥았다.
“미안해.”
선은 다시 말했다.
“미안해.”
선은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참을성 있게도 얌전히 안겨 있던 고양이가 작게 울었을 때야 선은 녀석을 내려주었다. 고양이는 귀를 양옆으로 누이고 선을 올려다보았다. 선은 남은 소시지를 주었다.
고양이는 소시지를 먹고 잠시 그 자리를 어슬렁거렸다. 멈춰 서서 꼬리 끝만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선을 한 번 보고는 뒤를 돈 다음, 발걸음도 가볍게 길 너머로 총총 걸어갔다. 꼬리를 꼿꼿이 세운 녀석의 그림자가 그 뒤로 길게 늘어지다가 이내 사라졌다.
선은 옷깃을 여미면서 한동안 바람을 버티고 있었다.
많은 길고양이들은 길들여지지 않는다. 길들여지면 길고양이가 아니다. 희연의 고양이는 잃어버린 게 아니라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 것이다. 비록 서울이라는 대도시가 삼켜버린 것 같을지라도. 비록 겨울이 까마득히 길고 어둡다 해도. 비록 2년 남짓밖에 살 수 없을지라도. 건물 사이의 비좁은 곳, 음식물 쓰레기 옆, 화단 안쪽, 자동차 트렁크 밑, 천막을 내린 포장마차 밑, 셔터문 옆 구석으로 돌아간 것이다. 환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죽지 마.”
선은 고양이가 떠난 빈 길목을 향해 말했다.

선은 환과 함께 걸었던 길이 아닌 새로운 구역을 탐색했다. 지하철 입구가 있는 큰길을 건너서 번화가 쪽으로까지 나갔다. 늦은 시간이라도 KFC 앞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담배 연기와 웃음소리와 휴대폰 통화하는 소리가 공기를 가득 메웠다. 떡볶이와 핫바와 모자와 머플러를 파는 노점상들이 늘어선 길 맞은편에는 파리바게트가 있었다. 파리바게트 전에 뭐가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저 건물 1층의 점포는 수없이 바뀌었다. 그 옆에는 던킨도너츠와 에스쁘아 매장이 있었다. 저기도 원래는 저 매장이 아니었는데, 그 전에는 원래 뭐가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문을 활짝 열어둔 화장품 매장에서 후끈한 히터 바람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선은 저런 가게들을 볼 때마다 깜빡하고 문을 안 닫은 냉장고를 보는 것처럼 불안해졌다. 안으로 들어가니 반짝거리는 퍼플벨벳과 에메랄드그린과 매지컬코럴과 슬레이트그레이 빛의 아이섀도들이 프랑스 제과점 안의 과자들처럼 줄지어 놓여 있었다. 선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진열대 위에 가로놓인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선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자신이 예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이섀도를 하나 살까 하고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폐점 직전의 무과수마트에서 바나나를 한 송이 사들고 돌아갔을 때 환은 집에 있었다. 아직은 떠나지 않았다. 선은 안심했다. 방바닥에 깐 요 위에 이불을 무릎까지 끌어올리고 앉아서, 벽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환. 졸고 있는 걸까. 선은 신발을 벗지 않고 현관에 서서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누워서 자지 왜 그러고 있어요.”
선이 마트 봉투를 내려놓고 환의 어깨를 잡았다. 그런데 잠든 줄 알았던 환이 눈을 반짝 떴다. 환의 눈동자가 바로 앞에 보였다. 초등학교 서예 시간에 화선지 위에 엎질렀던 먹물이 생각났다.
“어디 갔다 왔습니까?”
“그냥. 잠깐 산책.” 선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 “바나나 사 왔어요.”
환은 봉투에 한 번 눈길을 주고는 고개를 돌렸다. 요즘 들어서 늘 저런 식이었다. 대화를 길게 이으려 하지 않았다. “좀 먹을래요?” 선은 짐짓 쾌활하게 물으며 바나나를 꺼냈다. 환은 고개를 저었다.
“실은 먹으려고 산 거 아니에요. 팩 좀 하려고.” 선은 바나나를 한 개 뜯어서 껍질을 벗겼다. “당신도 해줄게요. 피부가 다 상했잖아요.”
“됐어요.”
환은 왜인지 어린 애처럼 부루퉁해 보였다. 선은 왜인지 용감해졌다.
“해준다고 해줄 때 해요.”
“…….”
“세수 하고 와서 여기 가만 누워 있어요. 금방 준비할 테니까.”
환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고분고분 화장실에 들어갔다.
‘바나나는 비타민 A가 풍부하고 당분이 많아서 건조한 피부를 촉촉하게 해준다.’ 선은 밥그릇에 바나나를 넣고 숟가락으로 으깬 다음 달걀을 깨서 노른자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황토 가루, 밀가루, 우유를 넣어서 휘저었다. 걸쭉한 황갈색의 물질이 만들어져갔다. 선은 숟가락을 놀리면서 그릇 안을 골똘히 들여다보았다. 등 뒤에서 환의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와 이불 위에 드러눕는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숟가락이 부딪히는 달그락 소리. 컴퓨터 스피커에서는 환이 틀어놓은 줄리 드와롱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선은 처음으로 동교동의 이 집이 아늑하다고 생각했다.
그릇을 가지고 환의 머리맡에 다가가서 앉았다. 선은 팩제를 숟가락으로 듬뿍 퍼서 환의 얼굴 위에 덜었다. 차가운 감촉에 환이 살짝 움찔했다.
“조금만 참아요.”
선은 손가락으로 팩을 얼굴 전체에 펴 발랐다. 무언가에 집중할 때 으레 그렇듯 입술이 자기도 모르게 벌어졌다. 환은 눈을 감았다. 선의 손가락이 환의 얼굴 위를 구석구석 돌며 움직였다. 낯선 땅의 길을 그리는 것 같았다. 넓은 이마. 높은 콧마루. 미끄러져내리는 코 옆선과 콧방울 옆의 골짜기. 눈머리. 얇은 눈꺼풀 너머로 만져지는 안구의 감촉. 깎다가 만 조각처럼 날카로운 광대뼈. 점이 두 개 있는 오른뺨. 좁은 턱선과 입술 밑으로 움푹 꺼진 우물. 부드럽고 여린 인중. 고집스러운 입매.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하고 축축한 숨결.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찐득한 팩제가 손가락에 휘감기면서 환의 피부와 달라붙었다. 선은 시간이 이대로 멈추었으면 했다.
“……라고 봐요.” 환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뭐라고요?”
“먹는 걸 얼굴에 바르는 거야말로 사치라고 봐요. 그렇지 않아요?”
선은 손을 멈추었다. 누리끼리한 걸 잔뜩 얹은 환의 얼굴이 토인 같아서 우스꽝스러웠다. 긴 머리카락을 넘긴 선의 오렌지색 플라스틱 머리띠도. 그의 눈과 입술이 미소를 지어서 팩에 주름이 지고 있었다. 환은 선을 힐난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모르긴 몰라도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사치 중 하나였을걸요. 마리 앙투아네트가 밀가루를 가발에 퍼붓지만 않았더라면 목이 안 잘렸을지도 모르죠.”
선은 환의 얼굴도 웃기고 이 대화도 웃겨서 자꾸만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자꾸 말하지 마요. 팩 떨어지잖아.”
“싫어요.”
선은 급기야 깔깔 웃었다. “입 다물라고요.”
“싫어요.”
환이 갑자기 몸을 돌렸다. 선이 뭐라고 반응할 새도 없이 환의 머리가 책상다리를 한 선의 다리에 닿았다. 환이 선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팩이 다 뭉개지면서 선의 운동복 바지에 범벅이 되었다.
“아, 뭐예요! 어제 빤 건데…….”
선은 말끝을 흐렸다. 환이 선의 종아리를 잡고 무릎에 얼굴을 부비고 있었다. 환의 머리카락이 헝클어지면서 황토와 바나나와 함께 온통 엉겨 붙었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꼭 감은 눈은 보였다. 선의 다리를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선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좀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걸.”
환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살아 있었을 때. 정말로 살아 있었을 때. 만났으면 좋았을걸.”
선은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흘렀다. 줄리 드와롱의 앨범이 끝났다. 들큰하고 비릿한 냄새가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선은 손을 뻗어 환의 옆얼굴을 매만졌다. 덜 으깨진 바나나 조각 하나가 묻어나 바닥에 떨어졌다. 환은 무언가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꾹 참는 사람처럼 미동도 않고 있었다.
“연락처랑, 메신저랑, 알려줄 테니까.” 선은 입을 열었다. “연락해요. 가끔 놀러 와서 밥도 먹고.”
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은 잠시 기다렸지만 그는 숨을 길게 내쉬며 뺨 위에 닿은 선의 손을 잡을 뿐이었다.
“그러면 되잖아요.”
선이 재촉하듯 말했지만 환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환이 짐을 빼기로 한 날짜는 23일이었다. 크리스마스에서 이틀 전.
환을 받아주기로 한 친구는 이미 귀국을 했다. 말이 친구지 40대 후반의 중년 남자였다. 환은 그를 ‘차 선배’라고 불렀다. 남아공에서 오랫동안 사업을 하다가 이번에 정리하고 돌아온 참이라고. 젊을 적에 연극 일을 좀 한 적이 있어서 환과는 그 인연으로 알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환과 같이 일해본 적은 없었고, 연극에 관심을 끊은 지도 오래 되어 보였다. 선은 세 사람이 같이 만난 자리에서 껄끄러운 공기를 감지했다. 환과 차 선배는 별로 친하지 않은 듯했다. 남자들 특유의 과장스럽게 서로를 반가워하는 인사치레 사이사이에 불편한 침묵이 맴돌곤 했다. 선은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레몬차를 홀짝이고만 있었다. 차 선배는 담배를 피우면서 허허 웃었다.
“아가씨가 천사네, 천사. 이런 놈을 구해주고.”
차 선배는 선과 환을 당연히 연인이라고 여기는 눈치였다. 그가 두 사람의 동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환은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새로 개통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만 있었다.
“최환 네가 아직 반반해서 그래. 참 안 늙었다. 험하게 산 것치곤.”
“선배도 아직 한창입니다. 얼른 재혼하셔야죠.”
“맘대로 되나 그게.”
그러고 보면 선은 환의 정확한 나이도 모르고 있었다.
환은 늘 자신의 신상 정보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이 굴었다. 마치 <어린 왕자>에 나오는 것처럼, 수치화된 정보들은 진짜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듯이. 그리고 선은 그 페이스에 휘말렸다. 하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면 환이 그런 것들을 의도적으로 숨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은 초조해졌다. 무언가 손에 잡히는 확실한 끈이 필요했다. 휴대폰 번호도 교환했고 차 선배의 명함도 받아두었고 일산에 집을 얻었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어쩐지 환은 다시는 못 만날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선이 미래를 기약하는 이야기를 꺼내면 환은 침묵하거나 말을 돌리거나 했다. 아주아주 먼 데로 떠나는 사람처럼.
환이 이사를 가기 며칠 전, 환이 아르바이트를 나간 틈을 타서 선은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최환이라는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흔한 이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특이한 이름도 아니었기에 검색 결과가 많았다. 모델. 기업인. 법조인. 포토그래퍼. 전 대학총장. 조선 중기(명종 10년)의 문신. 환이 쓰는 메신저 아이디인 chhfoxtrot은 다른 사이트에서는 쓰지 않는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선은 ‘극작가 최환’을 검색창에 넣었다. 이번에는 언뜻 봐도 관련이 있어 보이는 결과들이 나왔다. 선은 모니터 앞으로 몸을 구부렸다.
당연히 포털 사이트의 인물 정보에 등록되어 있지는 않았다. 가장 먼저 나오는 웹페이지들은 환이 극본을 맡은 연극의 정보였다. 환이 그토록 무명이라며 겸손을 부린 것과는 달리, 알려지지 않은 창작 극단들의 저예산 소극장 공연이라고는 해도 벌써 서너 개는 나왔다. 포스터, 공연 일시, 장소, 관람료와 함께 극본에 환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다. ‘극본 최환’, ‘희곡 최환’이라고 치자 정보가 더 많이 나왔다. 환에게 접해 들었거나 선이 직접 읽어본 작품들의 낯익은 제목들도 눈에 띄었다.
작품들은 2000년대 초반에 집중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연극이라는 장르는 90년대 후반에 이미 저물기 시작했고, 특히 창작극의 전성기는 90년대가 끝물이었다. 환은 이미 클라이맥스를 찍고 내리막길로 들어선 분야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선은 스크롤을 내리면서 공연 정보들을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인터넷에 흩어진 기록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환의 일부분을 보는 듯했다. 좀 더 치기 어리고 열정적이고 투박했던 과거의 또 다른 환을 만나는 듯했다.
블로거들이 쓴 공연 후기 몇 건. 신문 기사 몇 건. ‘진실된 인간성에 대한 신랄한 고발’ ‘젊은 극단의 도발적인 실험극-파멸과 죽음의 변주’ ‘청소년의 성을 과감히 파고든다’ 거창하고도 어설픈 카피들. 정장을 입고 한껏 근엄한 포즈로 찍은 환의 프로필 사진. 선은 웃음을 터뜨렸다. 머리가 짧아서 언뜻 딴 사람인 줄 알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얼굴이 전혀 변하질 않았다. 10년 전에 유행했던 촌스러운 염색과 가르마, 살이 올라붙은 부드러운 얼굴 선을 제외하면 똑같았다. 선은 오래도록 그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대부분의 공연 제작진 명단에는 환의 이름만 적혀 있었지만, 환의 그 사진과 함께 간단한 약력이 기재된 페이지가 딱 하나 있었다. P대학 95학번 국문학과. 희곡 <귀의 독백>으로 데뷔. 극단 <유수> 대표. 95학번이면 선보다 12학번이나 위였다. 대충 띠동갑이라는 뜻이다. 그럼 서른다섯 살.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환의 이름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 그 정도가 다였다. 선은 이런저런 키워드를 더 넣어서 검색해보았다. 환의 희곡 제목들, 작중 인물들의 이름, 대학과 학번과 학과, 기타 등등. 그러다보니 환의 개인 블로그로 보이는 검색 결과가 걸려서 선은 기뻐했지만, 클릭해보니 이미 폐쇄되어 있었다. 블로그 주소로 그가 자주 쓰는 아이디 혹은 닉네임을 유추해서 그걸로도 검색해보았다. 그러자 대학교, 극단, 연극 커뮤니티, 이런저런 인터넷 카페들의 활동 기록들이 나왔다. 그런데 그것도 대부분 삭제되어 있었다.
슬슬 께름칙해졌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환의 흔적들을 지우고 다닌 것 같았다.
선은 포털 검색 엔진에 저장된, 삭제 전의 옛 페이지들을 뒤졌다. 그러다가 충격적인 정보를 발견했다.
선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최환(국문학과 95학번) 동문님이 어제(1월 12일) 아침에 별세하셨습니다. 이에 삼가 알려드립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발인: 2007년 1월 16일 06시. 빈소: 인천시 P대학병원 장례식장 빈소 2호실.

선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선은 동명이인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P대학, 학과, 동문회 페이지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명부까지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 대학 그 학번 그 이름의 다른 사람에 대한 자료는 전혀 없었다. 2007년 1월 12일에 죽은 최환은 선이 아는 그 환이 맞았다. 극작가, 극단 <유수> 전 대표, <귀의 독백>의 작가, 보헤미안 최환이었다.
선은 뭔가 착오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했다. 부고가 잘못되었으리라.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걸 마음 한편으로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환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이 머릿속에서 스크랩북을 넘기듯 하나하나 지나갔다. 병원 응급실에서 주민등록번호를 말하지 않았고, 돈이 없다는 이유로 치료를 거절했던 일. 처음 이 집에서 재웠을 때 개인적인 정보를 전혀 알려주지 않고 에세이 같은 이야기만 늘어놓았던 일. 이후에 선이 신상과 관련된 걸 물어볼 때마다 교묘하게 말을 돌렸던 수법들. ‘고양이 나라에서 왔다’던 농담과 그 외에 숱한 농담들. 주민등록이 말소되어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가 몇 없다던 이야기. 1월의 어느 날 방 안에서 죽을 뻔했다던 이야기. 그리고 “살아 있었을 때 만났더라면 좋았을걸.”이라던 말. “정말로 살아 있었을 때.”
심장이 기괴할 만큼 느리게 뛰었다. 뒤에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었다.
“다녀왔습니다.”
환이 언제나처럼 인사하며 신발을 벗고 걸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선은 움직이지 못했다. 고개를 돌리고 싶지 않은 두려움, 그리고 무방비 상태로 등을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충돌해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환의 발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뭐 해요?”
선은 재빨리 알트 탭을 눌러 브라우저 창을 화면에서 지웠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환의 발소리가 뚝 멎었다.
“…….”
선은 알아서는 안 될 것을 알아버린―그러나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알게 된 건지는 여전히 몰랐다―자신에게 환이 화를 내거나 해코지를 하리라고 반사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선의 이름을 부르는 환의 목소리는 가늘고 힘이 없었다. 새끼 고양이 울음소리 같았다. 선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환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밥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각자의 앞에 놓인 유자차가 식어갔다. 환은 찻잔을 두 손으로 쥐고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선은 환이 입을 열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환을 못 믿지는 않았다. 무언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으리라. 지극히 합리적이고 정당한 곡절이 있었으리라. 선은 애써 그렇게 자신을 다잡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선은 불안하게 밥상 가장자리를 손톱 끝으로 긁었다.
몇 시간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환이 말문을 열었다.
“보셨다시피, 최환은 죽었습니다. 나는 최환이 아닙니다.”
선은 손톱 끝이 하얗게 변하도록 밥상 표면을 눌렀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최환이고, 살아 있기도 합니다.”
“그게 무슨 헛소리예요?!”
다그치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어쩔 수 없이 비명 같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환은 어깨를 흠칫 움츠렸다. 그리고 더듬더듬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1인칭과 3인칭이 뒤죽박죽 섞인 이야기였다.

최환. 1976년생. 오이도에서 작은 조개구이집을 하는 편부 아래 자라났다. 어머니는 행방을 몰랐고 아버지는 외아들에게 대체로 무관심했다. 근처 여관에서 넉 달간 장기 투숙을 했던 여자와 잠깐 만나다가 사고처럼 얻게 된 아들이었다. 환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유롭게 컸다. 서해 바다가 기른 아이였으며 책이 키운 소년이었다.
환은 어려서부터 똑똑했고 수완도 있었다. 당연히 유명한 극작가가 되리라고 믿었다. 대학에서, 연극계에서 환은 짧게나마 사람들의 신망과 애정과 동경을 샀다. 따라주지 않았던 건 운이었다. 극단 연출을 맡았던 선배가 사기를 치지 않았다면 모든 게 잘 풀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직 젊은 나이에 조급하게 일을 크게 벌인 것부터가 문제였을까. 하지만 그런 가정은 부질없었다. 몰락은 순식간이었다. 환에게 벌떼처럼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신기루처럼 금세 흩어졌다. 반면 빚은 숨을 쉴 때마다 불어났다. 환을 거추장스러운 짐으로 여겼고 등록금도 보태준 적 없던 아버지는 화를 내다가 이내 연을 끊었다.
자전거를 타다가 미끄러질 때의 아찔한 감각. 멈출 새도 없이 비탈로 추락하다 이대로 모든 게 박살나겠구나 하는 직감. 그런 상태가 내내 지속되었다. 그리고 환이 나락에 빠지는 가속도와 정확히 비례하여 세상은 그를 잊었고 환의 세계는 방 한 칸으로 축소되었다. 막바지에 환의 곁에 남은 이는 빚쟁이들, 집주인, 그리고 동네의 길고양이뿐이었다.
처음에 환은 자기가 먹던 참치 캔을 조금씩 덜어서 주곤 했다. 이내 고양이는 하루에 두어 번씩 환의 집 앞으로 찾아와서 먹이를 받아먹게 되었다. 고양이와 매일 10분 정도 마주보는 것, 표정과 몸짓을 교환하고 먹이를 주는 것. 그게 환의 유일한 사교 활동이었으며 유대 관계였다. 하지만 나중에는 그나마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이 먹을 것도 떨어져갔기 때문이다.
환이 더 이상 나오지 않자 고양이는 밥을 달라고 현관문 밖에서 서럽게 울며 보챘다. 환은 안에서 웅크리고만 있었다. 이웃 사람들은 짜증을 부렸다. 저놈의 고양이. 시끄러워 죽겠네. 저 집은 온통 쓰레기장에, 여기저기 걸식이나 하고, 길고양이 밥 주다 이런 식으로 민폐까지 끼치고 정말 가지가지 한다. 세도 잔뜩 밀렸다며. 무서워.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아. 나가줬으면 좋겠어.
여기도 얼마 못 살겠구나, 환은 생각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여기뿐만 아니라 그 어디서라도 얼마 못 살겠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환은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았다. 무대에 올리지 못한 작품들도 많았다.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최환이 저체온증과 기아로 사망하기 전날 밤, 그는 현관문을 열고 마지막 남은 참치캔 3분의 1을 다 꺼냈다. 그리고 고양이가 먹기 좋도록 기름을 뺀 뒤 계단참에 놓아두었다. 잠시 기다리자 고양이가 찾아와서 참치를 게걸스럽게 주워먹었다. 바싹 마른 고양이의 잔등에 희끗한 눈송이가 점점이 묻어 있었다. 혹독한 계절이었다. 환에게는 반나절 정도를 버티게 해줄 저 음식이 고양이에게는 이틀치의 열량을 줄 수 있을 테고, 겨울을 나는 길고양이의 이틀은 환의 이틀보다 훨씬 긴 시간일 터였다. 환은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고양이는 피하지 않고 환을 바라보았다.
[내가 죽고 나면, 올바른 사람을 찾아서 내 작품들을 맡겨주겠니?]
환은 원고가 담긴 USB를 실에 엮어서 고양이의 목에 걸어주었다.
[부탁한다.]
고양이는 작게 울었다.
길고 어두운 밤이 지나갔다. 백야처럼 광활하게 눈부신 아침이 지나갔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환은 고양이가 되어 있었다.
“글쎄요. 환인 내가 고양이가 되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고양이인 내가 환이 되었던 건지.”
불신과 혼란으로 가득한 선의 표정을 보며 환은 덧붙였다.
“아무튼 눈을 떠보니 내 앞에는 최환의 시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고양이의 몸이었고, 길고양이로 살아왔던 나 자신을 잘 알고 있었죠. 그런데 환의 일생과 기억들이 마치 내 것인 듯이 하나하나 떠오르는 거예요.”
한동안 고양이는 자신에게 일어난 불가사의한 현상에 적응하지 못했다. 고양이는 소중한 식량을 쪼개주며 힘겨운 시기를 함께 버텼던 인간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결심이 이렇게까지 엄청난 변화를 불러올 줄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고양이는 최환의 임무를 더 수월히 이루기 위해, 즉 어떤 사람이 ‘올바른 사람’인지 알아볼 수 있는 배경 지식을 주기 위해서 환의 넋이 이런 기적을 일으켰나보다고 해석했다.
“그러니까 그때만 해도 나는 고양이였던 셈이겠죠. 일단은.”
환은 잠시 침묵했다.
“고양이들이 다 그렇듯, 나 역시 고양이로서 긍지가 높았습니다. 인간의 삶에 그렇게 깊이 연루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요. 하지만 그 기묘한 상태에서 벗어날 방법은 오로지 최환이 맡긴 임무를 완수하는 것뿐이었습니다. 환의 유언을 이뤄주고 나면 나는 이 마법에서 풀려나 원래의 나 자신으로, 평범한 고양이로 돌아오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고양이는 환의 원고를 맡길 만한 사람을 찾아서 USB를 목에 걸고 서울을 헤맸다.
처음에는 생전의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찾아다녔다. 장례식장, 극단, 학교, 고향, 옛 연인, 친구들. 하지만 그중에 ‘올바른 사람’은 없었다. 환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사람. 무가치한 글로 잊어버리지도 않고, 자신의 사리사욕으로 환의 글들을 악용하거나 잘못된 방식으로 팔아넘기지도 않을 사람. 환의 이름과 작품을 역사에 합당하게 남겨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도무지 없었다. 저 사람인가 싶어서 다가갈 때마다 머릿속에서 “저 인간은 아니야“라는 경보가 울렸다. 애초에 USB를 목에 건 고양이가 다가와서 울어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을 만큼 마음이 열린 사람 자체가 드물었고, 많은 사람들이 고양이라는 동물을 싫어해서 가까이 하지도 않으려 했다. 특히 검고 더럽고 추한 길고양이는 더더욱.
고양이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한미하고 덧없는 것인지 생각했다. 환이 왜 유서가 아니라 이런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소망을 처리하려 했는지 이해했다. 환이 말년에 겪었을 고독을 이해했다. 그렇게 고양이는 환에게 연민을 품었다. 올바른 사람을 찾기는커녕 하루하루 끼니를 연명하기도 힘든 겨울이었다. 혹여 환의 부탁을 들어주기도 전에 죽는다면 어쩌나 다급해졌다.
“그게 문제였을 겁니다. 내가 환의 마음에 지나치게 가까워지면서부터. 그때부터 나는 인간의 몸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양이는 환을 아예 모르는 사람들을 찾아보기로 하고 연극계와 관련이 있는 이런저런 사람들을 무작정 기웃거렸다. 유명한 희곡 작가, 극단 대표, 교수, 연출가, 엔터테인먼트 기획사 사장, 배우, 출판사 편집자, 기타 등등. 하지만 그러자니 고양이의 몸으로는 아무래도 제약이 심했다. 인간으로서 마주서서 인간의 언어로 대화를 하고 상대방의 됨됨이를 확인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고양이는 환으로 변신했다.
처음에는 필요할 때만 잠깐이었다. 하루에 10분 정도 고양이는 환으로 변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점차 그 시간이 늘어갔다. 옷과 가방과 생필품이 필요했고, 전화번호와 키보드와 마우스를 누를 수 있는 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돈이 필요했고 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점차 늘어가는 짐을 가지고 다닐 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양이는 환이 되어갔다.
하지만 그래도 작품을 맡길 사람은 찾아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환의 작품을 알아보지 못했다. 반드시 무대에 올려줘야 한다거나 열렬한 찬사를 바쳐줘야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믿을 만한 사람이면 되었는데, 믿어도 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애초에 정확히 어떤 면을 보고 믿어야 할지 기준도 모호했다. 어느새 고양이는, 즉 환은, 그저 집도 절도 없이 작품을 팔러 다니는 한 명의 무명 극작가가 되어 있었다. 하루에 10분 정도 고양이로 변하는 쓸모없는 초능력을 가진 노숙자가 되어 있었다.
“나는 환입니다.”
환은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나는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한계가 있지요. 신상을 밝힐 수가 없었고, 생전의 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았어요.”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 자. 중간 지대를 떠도는 자. 만약 작품을 맡길 사람을 찾지 못한다면 영원히 이런 상태로 떠돌다가 끝내 죽게 될 것이다. 환은 지쳤다. 어서 고양이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고양이로서의 자아는 이미 잃어버린 지 오래였지만, 막연히 이 모든 게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렇게 2년이 흘렀고 또 다시 겨울은 돌아오고 있었다. 최환이 죽었는 줄도 모를 만큼 오래 연락이 끊겼던 생전의 지인과 연결이 되어서 그가 해외에서 사업을 정리하고 귀국하면 지낼 곳을 얻게 되었지만 그것도 12월이나 되어서의 이야기였다. 그 전까지 버틸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그러던 가을의 어느 날 환은 두 번째 죽음이 다가오는 기척을 들었다. 이번에야말로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단단하고도 고요한 절망이 찾아왔다.
“그런데 당신을 만난 겁니다.”
환이 긴 이야기를 마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선은 멍하니 환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한참을 침묵했다. 환은 다 식은 유자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선이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환은 잔을 내려놓고 머뭇머뭇 물었다.
“……믿어지나요?”
선은 대답하기 어려웠다.
믿어지나? 선은 자신에게 물었다. 믿고 싶어 하는 마음의 목소리, 믿을 수 없다는 이성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려퍼졌다. 지금까지 알던 세계가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위태로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무언가를 알아버린 충격이 부딪혔다.
환의 이야기가 진짜라고 쳐도, 만약 그렇다 해도,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하나? 그래서 환은 죽었나, 살았나? 환은 환이 맞나, 아닌가? 같이 지낸 시간들이 환상이었나, 아닌가? 사랑하는가, 아닌가? 단순히 선은 미쳐가고 있는 게 아닐까? 이 모든 게 꿈은 아닐까? 환을 만난 것부터가 하나의 긴 꿈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동시에 선은 알고 있었다. 꿈일 리가 없다는 것. 지금껏 미심쩍었던 퍼즐 조각들이 비로소 모두 맞춰졌다는 것.
공사장 차단벽. 검은 고양이. 새까만 털, 호박색 눈, 오른쪽 앞발과 배 부분을 군데군데 덮는 누런 얼룩.
선은 고개를 들었다. 환은 고해를 마치고 심판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머리를 떨구고 있었다. 잔뜩 움츠린 어깨가 어느 때보다도 왜소해 보였다.
“속여서 미안합니다.”
환은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나는 당신이 내내 모르기를 바랐습니다.”
환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조금이라도 더, 평범한 인간으로 당신과 함께 살고 싶었습니다.”
선은 참을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끌어안았다.

바람이 많이 부는 새벽이었다. 매서운 한파에 창문이 부서질 듯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유리창 안쪽은 뿌옇게 김이 서렸고 공기 전체가 따스하게 녹아 있었다.
처음에 환은 조심스러웠다. 적극적인 쪽은 선이었다. 선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고 욕망에 자연스럽게 이끌렸다. 혼자가 되는 데에 익숙해진 표정을 짓고 있는 저 사람을 꼭 안아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아름다운 눈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지금까지 늘 닿고 싶다고 생각했던 몸에 손을 얹었다. 환의 몸은 뜨거웠다. 처음 집에 데려왔을 때 고열로 앓았던 그날처럼. 하지만 이번에는 열감기 때문이 아니었다. 선은 지도 위의 등고선과 산맥들을 훑으며 행선지를 점검하듯 환의 얼굴을, 목을, 어깨를, 팔을 만졌다. 잔근육과 힘줄과 뼈대와 잔털이 손끝에 와 닿았다. 그 감촉에 선은 아찔해졌다. 환은 진짜였다. 선이 아는 그 누구보다도 진짜였다.
환은 선이 하는 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진찰실에서 의사에게 몸을 맡긴 환자처럼. 하지만 환의 눈동자는 온갖 감정들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선은 침착하게 옷을 벗었다. 자신이 첫 경험이라는 걸 깨달은 건 그때였다. 선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멀뚱하게 앉아 있자 환은 짧게 웃더니 선을 침대로 데려갔다. 그리고 키스했다. 환의 입에서는 새콤하고 달짝지근한 유자 맛이 났다. 선은 눈을 감았다.
환은 부드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조급했다. 선은 어쭙잖았다. 환이 밀고 들어왔을 땐 잠깐 따끔했을 뿐 예상보다 아프지 않았고 그냥 조금 우스웠다. 선이 웃음을 터뜨리자 환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가 웃겨요?”
“그냥요. 재밌잖아요.”
“뭐가요?”
선은 말없이 환의 목을 안았다. 밖에서 휭휭거리는 바람 소리가 꼭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같았다. 집이 범선처럼 삐걱거리며 서서히 기울어졌다.

그날 선은 꿈을 꿨다. 꿈속에서는 여러 시대가 나왔다. 콘스탄티누스 5세의 성상파괴. 숱한 전쟁들. 주체가 바뀌어 계속되는 검열. 발자크의 파리, 기싱의 런던. 학교 교재에서 보았던 문학사의 부분들이 눈앞에 슬라이드 필름처럼 생생하고도 짤막하게 펼쳐졌다. 그 모든 시대에서 선은 어떤 사람들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책에 적히지 않은, 그래서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다가 배경이 현대로 바뀌었다. 어느 방 안이었다. 어두컴컴해서 벽과 바닥의 굵직한 윤곽들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위가 밝아졌다. 빛이 흘러넘치는 실내, 창문은 닫혔는데 커튼이 나부끼고, 새하얀 눈발이 천장에서 한 점 한 점 흩날려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방바닥에는 어떤 남자가 누워 있었다. 선은 그게 환이라는 걸 알았다.
환은 반듯이 누워 고개를 모로 돌린 채였다. 살짝 뜬 눈에 희푸른 백태가 앉았다. 벌어진 입술에는 핏기가 없었다. 닳아 해진 소맷부리 밖으로 구부러진 손가락이 고왔다. 검은 머리카락과 등 위로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눈은 녹지 않고 그의 위에 쌓였다.
선은 환의 죽음을 보고 있었다. 선을 만나기 전에 이미 죽었던 환. 선이 모르는 환. 먼먼 옛날이야기 속의 환. 그런데 무던히도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깨끗하고 청명한 눈. 하얀색에 반사되는 빛. 모든 것이 정지된 고요함.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감각. 온갖 소음과 냄새들이 대륙 하나, 바다 하나 너머로 물러난 듯한 먹먹함.
그리고 마치 소리 없이 쓰러지는 생크림 케이크처럼 집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벽지가 찢어지고 콘크리트가 부서지고 지붕이 주저앉았다. 시멘트 가루가 눈발과 뒤섞여 휘날렸다. 선은 환의 시체 곁으로 다가가서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눈꺼풀을 감겨주었다.

깨어났을 때는 창밖의 아침 하늘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선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생각했고, 문득 혼자라고 생각했지만, 고개를 돌려보니 옆에 누워서 턱을 괴고 선을 바라보는 환의 검은 눈이 보였다.
“깼어요?”
선은 환의 품 안에 푹 파고들었다. 그러자 달의 인력과도 같이 환이 선의 등을 당겨 안아주었다.
환이 지금 이 순간 곁에 있다는 게 기적 같았다. 환이 먼 길을 걷고 걸어서 선을 만나러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우리 집에 더 있을래요?”
선은 환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발음이 뭉개졌지만 자신의 목소리가 환의 몸속으로 곧바로 전해지는 것 같은 공명이 느껴졌다. 환의 심장 박동이 살갗으로 와 닿았다.
“당신이 찾는 사람을 찾을 때까지 머물러도 좋아요. 도와줄 테니까. 제가 도와주면 좀 더 수월할 거예요. 여기서 겨울을 나고, 같이 봄을 맞아요. 네?”
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선이 고개를 들어보니 환은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무언가를 외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저도 그러고 싶어요.”
환이 선의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말로.”
환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원래는…… 지금껏 나는 생의 진실이 무대 위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했어요. 현실이 아니라. 사람들이 시장 좌판의 생선처럼 텅 빈 눈으로 무의미하게 거리를 오고가는, 누군가의 것을 폭력적으로 빼앗고 빼앗기면서 쌓아올린, 지리멸렬한 군더더기 같은 환상에 불과한 이 현실이 아니라. 바로 저 무대 위에 말입니다. 대사와 연기와 조명과 박수갈채 속에. 진짜 사랑도, 분노도, 희열도, 희망도 모두, 연극이 펼쳐지는 그 90분 안에만 있다고요.”
선은 어두운 관객석에 앉아 자신의 희곡이 상연되는 무대를 바라보는 환이 보이는 듯했다. 배우들에게 쏟아지는 요란한 박수 속에서 환은 미소 지으며 서 있었다. 그리고 막이 내리고 불이 꺼지고 모두가 떠난 극장에 환은 혼자 남았다.
“그 진실을 찾을 수만 있다면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무대 위에서 영원히 살 테니까. 거꾸로 말하면, 그 진실을 찾기 전에는 죽을 수 없었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이런 몸이 되었고요. 하지만…….”
환의 눈동자에 선의 얼굴이 비쳤다.
“당신을 만나고 나는 처음으로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여기서 함께 겨울을 나고, 봄을 맞고, 여름을 보내고, 다시 겨울이 돌아오기를. 몇 번이고 그렇게 되기를. 무대 위의 배우가 아닌 스물세 살 여자애를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
“처음에는 내가 너무 지치고 나약해져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죠. 당신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환은 선의 손을 깍지 끼고 꽉 맞잡았다.
“하지만 이제야 깨달았어요. 작품을 맡길 사람을 이미 찾았다는 걸.”
선은 울지 않으려 애쓰며 환을 마주보았다.
“문이선 씨. 내 원고를 맡아주시겠습니까.”
“저는 당신의 글을 이해하지 못해요.”
선은 불쑥 내뱉었다. 자꾸만 눈물이 나오려 했다.
“전혀 이해 못해요. 당신 글은 너무 어려워요. 나는 연극하곤, 예술하곤 아무 상관도 없는 애예요. 당신 작품을 무대에 올릴 사람이 아니라고요.”
“괜찮습니다. 그런 건 상관없어요.”
환은 선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환은 차 선배에게 연락해서 이사는 없던 일로 하자고 했다. 차 선배는 예의상 자기 집에 들어오라고 한 번 더 권하긴 했지만 안심한 티가 역력했다는 모양이었다. 환은 그 연락을 끝으로 기껏 만들었던 휴대폰을 없애버렸다. 나중에 차 선배가 최환이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고, 환과 선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환은 선의 집에서 12월을 채우고 2010년을 맞았다. 둘은 여느 연인들처럼 명동성당에 갔고, 보신각 종소리를 들었고, 부대찌개를 해 먹었고, 나란히 누워서 바나나팩을 했고, 섹스를 했다. 환은 선이 일하는 카페에 매일같이 찾아왔고 선은 가장 비싼 오레오 초코칩 라떼를 만들어주었다. 춥다고 불평하면서도 새벽의 동교동과 서교동을 산책했고 가장 일찍 연 노점에서 따끈한 어묵을 사 먹었다. KFC 자리에 예전에는 파파이스가 있었다고, 놀랍지 않냐고, KFC는 마치 태초부터 저 자리에 있었던 것 같지 않냐고 환은 말했다. 가끔 환이 노란 얼룩이 있는 검은 고양이가 되어서 애교를 부리면 선은 징그럽다고 떼어냈다.
그리고 2월의 어느 날 환은 떠났다.
방 안에는 환의 옷가지와 물건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환이 컴퓨터에 저장해놓은 이미지와 음악 파일들. 환의 칫솔과 면도기와 스킨. 환의 머리카락. 환의 체취. 마치 잠깐 외출한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걸 선은 알고 있었다. 선은 넓은 침대에 혼자 누워서 환의 웃음소리를 생각했다. 시선이 닿는 곳에는 환의 원고가 든 USB가 밥상 위에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설날에 선은 부천의 본가에 내려가서 2주 정도를 머물렀다.
집은 여전했다. 선은 공무원 시험 준비를 그만두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번 학기에 복학하겠다고, 동교동의 그 집에서 계속 자취하면서 학교를 다니겠다고. 부모님은 실망스러운 눈치였다.
“그럼 뭘 할 건데?” 동생이 따지듯이 묻는 말에 선은 대답할 수 없었다. 선은 여전히 졸업하고 뭘 할지 마땅한 계획이 없었다. “글쎄, 생각해봐야지.” “생각을 아직도 해? 그 나이 먹고?” 선은 말할 수 없는, 아니, 말할 필요가 없는 비밀들을 되새기며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자신이 매끄럽지는 않아도 자연스럽게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3월이 되자 경의선 지상공원 공사는 거의 다 끝나고 차단벽이 치워졌다. 아직 잔디를 깔기 전이라서 황량하게 드러난 맨 흙바닥에 목련이며 벚나무며 어린 관목들만 무성하게 심겨 있었다. 아직 공기가 찬데 흰 목련꽃들이 철겹게 피어나서 칼바람에 애처롭게 흔들렸다. 지나다니는 사람은 여전히 없고 참새와 비둘기와 개와 고양이들만 어슬렁거리며 산책을 했다. 하지만 곧 이곳은 푸릇하게 물들고, 꽃이 지고, 인파가 몰려들 것이다. 카페와 편의점과 식당들이 활기차게 음악 소리며 그릇 소리들을 낼 것이다. 환이 머물렀던 트레일러는 흔적도 없었다. 수업이 다 끝나고 과외 아르바이트도 마치고 집에 오는 길, 가끔 환이 못 견디게 그리울 때면 선은 환이 자주 마시던 캔맥주를 사들고 공원 흙바닥에 앉아 마시면서 조금 울었다. 노란 얼룩이 박힌 검은색 털에 호박색 눈을 한 고양이가 혹시 눈에 띄지 않을까 해서 공원과 골목들을 둘러보곤 했지만 그런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목련이 시들시들해질 때쯤, 선은 희연의 고양이를 보았다.
일요일 오후, 집에서 현관문과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걸레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야옹 하고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게도 선은 그 울음소리만 듣고도 희연의 고양이임을 알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왼쪽 눈가에 흉터가 있는 노란색 코리안 숏헤어가 현관 타일 바닥에 서 있었다. 털이 지저분했지만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덩치가 더 커졌고 건강해 보였다. 고양이는 꼬리를 곧게 세우고 머리를 든 채 또렷한 눈으로 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는 거예요.”
선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걸레를 내려놓았다. 고양이는 머리를 잠깐 갸웃하더니 꼬리를 바르르 떨었다. 선이 한 손을 내밀자 고양이는 가까이 다가와서 선의 손끝을 핥았다.
선은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날 저녁 선은 환의 물건들을 정리해서 스포츠백에 갈무리하고 침대 밑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환의 USB를 컴퓨터에 꽂고, 앞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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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8
  • No Profile
    모나위 13.07.01 02:51 댓글

    아. 정말 좋습니다. 

  • 모나위님께
    No Profile
    아밀 13.07.02 01:51 댓글

    좋게 읽어주셔서 기쁩니다 (__)

  • No Profile
    luba 13.07.29 14:18 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 luba님께
    No Profile
    아밀 13.07.31 21:39 댓글

    이 이상 감사한 인삿말이 또 있을까요. 고맙습니다. :)

  • No Profile
    사각머리 13.09.28 21:30 댓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사각머리님께
    No Profile
    아밀 13.11.09 15:02 댓글

    저 또한 감사합니다!

  • No Profile
    깨진유리잔 13.11.07 03:45 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시간가는 줄모르고 읽었습니다. 동시에 제가 얼마나 글을 못쓰는지 알게 된 것같네요.... 더욱 더 노력할 힘 을 주셔서 감사하고

    또 이런 멋진 글을 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게 완벽합니다. 저한테는요.

  • 깨진유리잔님께
    No Profile
    아밀 13.11.09 15:03 댓글

    완벽이라는 상찬을 받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깨진유리잔 님도 멋진 글 많이 쓰실 수 있기를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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