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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열 번째 만찬

2013.06.01 10:4606.01

 

 

열 번째 만찬

 

 

1.

상준은 하루에 세 끼씩 밥을 먹으니까 1365일이면 1095그릇의 밥을 먹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인생 한 평생이 평균 77세라면 일생 동안 먹는 밥은 843백 열 다섯 그릇이었다. 지금 유진과 먹는 저녁도 결국 그 팔만사천 번이 좀 넘는 밥 중에 한 끼였다. 그렇지만 저녁 한 끼가 이렇게 온갖 생각이 다 드는 수도 있나 싶었다. 복도를 따라 같이 밥 먹으러 가는 동안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식당 문은 열었겠죠?”

 

유진이 말했다. 유진이 앞에서 걷고 그 뒤를 따라 걷듯이 상준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유진이 돌아 서서 말을 했을 때 상준은 부딛힐까봐 움찔하면서 걸음을 물려야 했다. 그냥 앞뒤로 줄 서서 가는 것처럼 걸어 가다가 한 마디 말을 하는 것 뿐이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가슴을 콩닥거리게 하는지. 상준은 좀 더 대범해지자고 스스로 다그치고 싶었다.

 

, , . .”

 

상준은 대답을 마치자마자 왜 아무 의미도 없는 라는 말을 이렇게 썼는지, 참 멍청하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유진은 멍청하게 생각하는지 어떤지 알려 주지도 않고 다시 고개를 돌려 앞으로 걸었다. 상준은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 괜히 친절하다는 걸 과시한다고 유진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까지 열림 버튼을 누르고 서 있어 준 것이 실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은 엘리베이터니, 두 사람 내릴 동안에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리는 없었다. 그런데 괜히 상준이 유진이 내릴때까지 열림버튼을 계속 누르고 있어 주었던 것이다. 유진이 먼저 앞서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다가 뒤따라 내리니까 상준은 유진의 뒤에서 걸어 갈 수 밖에 없었다. 같이 나란히 걸어 가면 훨씬 덜 어색할 텐데. 왜 말도 안하고 앞뒤로 줄서서 걷고 있는 건지. 그렇다고 상준이 갑자기 빠른 걸음으로 쪼르르 달려가 유진의 한쪽 옆에 서서 걷는다면, 상준은 그것은 너무 그 옆에 서서 나란히 가고 싶다는 마음을 들키는 행동 같다고 생각했다. 유진은 보폭이 넓은 편이었고 걸음걸이에 거침이 없는 편이어서, 상준이 자연스러운 속도로는 그 옆으로 가기 어려웠다.

 

상준은 구내식당의 자동문 앞에서 유진의 옆 자리로 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동문 앞에 서서 잠깐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유진의 옆으로 움직이면 된다고 생각 했다. 상준은 오른쪽에 설 지, 왼쪽에 설 지 고민을 해 보았다. 무슨 영화인지 텔레비전인지에서 심장이 왼쪽에 있기 때문에 왼쪽에 서는 게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을 봤다는 기억이 났다. 상준은 유진의 왼쪽에 서야 겠다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잠깐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러면 유진은 상준의 오른쪽에 서게 된다. 그러면 유진은 상준에게 친밀감을 못느끼는 방향에 서게 되는 것 아닌가. 그러면 유진이 왼쪽에 오도록 나는 오른쪽에 서야 하나?

 

그러는 사이에 구내식당 문 앞에 오니 오늘은 자동문이 아예 항상 열려 있는 상태로 되어 있었다. 세상에 구내식당 자동문이 열려 있느냐 닫혔다가 열리느냐 하는 문제 때문에 인간이 실망을 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그런데 유진은 열려 있는 문 앞에서도 멈춰 섰다. 상준의 표정이 약한 정도이지만 분명히 표시가 날 정도로 좋아졌다. 상준은 얼른 유지의 옆에 나란히 섰다.

 

오늘 메뉴가 다 이런 거네?”

 

유진은 구내식당의 저녁 메뉴판을 보기 위해서 서 있는 거였다. 생선찜, 생선탕, 생선구이, 생선조림, 생선튀김. 상준은 유진이 생선을 싫어하는 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되게 맛없어 보이네요.”

 

상준이 말했다. 그러자 유진은 상준을 돌아다 보았다.

 

어차피 저녁 식사 값은 팀 단위로 나오는 거잖아요. 그러면 오늘은 우리 밖에 없으니까 팀원들이 먹을 걸 우리가 다 먹어도 되는 거죠? 맞죠?”

 

유진은 눈을 살짝 가늘게 뜨더니 장난을 치는 목소리가 되었다. 상준은 유진이 자신을 보고 이렇게 밝은 목소리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신이 났다. 한 번 더 그렇게 물어 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였다.

 

구내식당밥 말고 맛있고 좋은 거 사먹자고요?”

.”

 

유진은 고개도 힘차게 끄덕였다.

 

어디 가면 좋을지 알아요?”

글쎄요. 토요일 저녁이라...”

 

상준이 인상을 남길만한 대답을 찾아 머뭇머뭇할 동안 유진은 걸음을 옮겨서 창가로 갔다. 유진은 8층 창 바깥으로 멀리 보이는 검은 밤 바다 쪽을 보고 있었다. 상준은 유리창에 비쳐서 유진의 얼굴선이 푸르게 보이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너무 오래 대답을 안했나 싶었다. 상준이 말했다.

 

여기가 근처에 아무것도 없고 우리 빌딩만 그냥 덩그러니 있는 바닷가잖아요. 더군다나 주말 되면 이 빌딩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다 서울이나 인천 집으로 들어가니까, 그나마 몇 있는 식당들도 문 닫을텐데.”

이럴 때는 진짜 너무한 거 같애.”

뭐가요?”

개발공사에서 나랏돈으로 빌딩만 엄청 크게 지어 놓고 분양 안된다고 국회의원들이 뭐라고 그러니까, 분양 잘된 것처럼 보이려고 무조건 공공 연구소든 뭐든 닥치는대로 갑자기 다 밀어 넣었잖아요. 이게 뭔지. 무슨 진짜 귀양살이 가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바닷가 개펄 메워 놓은 빈땅에 덩그러니 있는 빌딩만 엄청 높고. 저녁 되면 밥 한 그릇 먹을 데도 잘 없잖아.”

과천 외곽 쪽만해도 그래도 시내처럼 이렇게 되어 있었는데. 여긴 정말 심하기는 하죠.”

 

상준의 말을 듣고 유진이 고개를 돌려 상준을 보았다.

 

여기 오기 전에 내가 과천 외곽 쪽에서 일한 거 어떻게 알았어요?”

 

상준은 깜짝 놀랐다. 상준은 목이 뻐근한척 목을 돌리면서 어어 음음 하는 소리를 냈다.

 

, 그때 말해 준 적 있지 않아요?”

내가 언제요?”

전에 이야기 해 준 거 같은데. 유진 차장님 예전에 응용통계국 있을 때 이야기.”

이야기 한 적 없는데.”

 

상준은 대답을 하지 않고 다시 아까하던 가벼운 목운동을 했다. 유진이 물었다.

 

그냥 찍은 거예요?”

 

상준은 유진의 눈을 피해 고개를 창 바깥으로 돌렸다. 상준은 작은 목소리가 되었다.

 

지난 달 쯤에 왜 다같이 구내식당에서 저녁 먹을 때, 팀장님이 얼마 안 있으면 무슨 국회의원 온다면서 그거 잘 준비해야 된다고 이것저것 이야기한 날 있었잖아요. 그때 그런 사람들 대접하는 거 해 본 적 있냐고 물어봐서 다들 대답할 때, 그때 응용통계국에서 일했던 이야기 했는데.”

그때 옆에 앉았었어요?”

 

그 날 유진과 상준 사이에는 두 명의 얼빠진 연구원들과 두 명의 얼빠지지 않은 연구원들과 원래는 멀쩡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날 따라 얼빠진 사람처럼 행동하는 연구원 두 명이 있었다. 유진과 상준의 거리는 7미터 정도. 상준은 한 얼빠진 연구원이 요즘 새로 나온 어떤 가수가 춤을 얼마나 잘 추는 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앞자리에서 미역국을 떠 먹고 있었다. 대신에 미역국을 느끼는 미각과 후각 보다는, 7미터 바깥, 여섯명의 사람들을 지나서 들려오는 유진의 목소리에 청각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태연히 앞자리에 앉은 사람의 춤동작 설명에 대해 ” “-” “이야하면서 무의미한 소리를 계속해서 내 주었다.

 

옆에 앉았었나? 하여튼 그때 이야기 하던 거 기억나는 거 같은데요.”

. 기억력 좋네요.”

 

상준과 유진은 마주 보고 있었다. 한 몇 초 말이 없으니 상준은 무슨 말을 할까, 어쩔까 생각을 하다가 얼굴이 점점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 ...”

 

말을 한 마디 하려는데, 유진이 고개를 돌려서 다시 창 바깥을 보았다. 고개를 돌리면 하려던 말을 하면 안된다는 규정이 내려와 있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상준은 말을 하지 못하고 멈추었다. 유진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어디 뭐 정말 저녁 괜찮게 먹을 데 없나.”

 

상준은 고개를 돌렸다. 평소보다도 더 어둡게 조명을 해 놓은 조용한 구내 식당에서 피곤한 직원 세 넷이 멀리 떨어져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짤그랑 짤그랑 계속 숟가락이나 식기가 부딪히는 쇳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들으면 울적하고 어떻게 들으면 평화로운 소리였다.

 

우리, 저 위에 가죠. 거기.”

 

유진이 손가락으로 밤하늘 쪽을 가리켰다. 상준이 보니 유진의 손가락이 오늘 일찍 뜬 금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금성에 가자고 할 리는 없었다.

 

스카이 라운지.”

 

유진은 말을 하면서 먼저 엘리베이터 쪽으로 나섰다. 상준은 따라 갔다. 이번에는 유진의 옆에 서고 싶어서 달린다 싶을 만큼 빠르게 움직였다.

 

스카이 라운지요? 거기 맛있어요?”

별로 맛은 없죠. 애초에 높은 사람들 오셨을 때는 구내식당 밥 주기 민망하다고 그럴듯하게 구색만 갖춰 놓은데니까.”

그러면 굳이 갈 필요 있어요? 높은 사람들 중에서도 기자랑 같이 오면 일부러 또 밖에 식당 예약 다 잡아 놨어도 꼭 연구원들과 같이 식당에서 밥을 먹어야 한다면서 예약 다 취소시키고 굳이굳이 구내식당에 가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래도 밥값이 9명치나 있는데 구내식당 밥 먹기는 너무 아깝잖아. 우리 둘 밖에 없는데.”

 

상준은 유진이 우리 둘이라는 말을 사용하자 멈칫해서 다음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었다.

 

 

2.

엘리베이터 속에서 상준은 정말로 우리 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두 사람은 할 말이 없어졌고, 엘리베이터의 출발과 도착을 알리는 전자음과 어느 쯤의 엘리베이터 케이블과 어느 쯤의 톱니바퀴가 내는 소리만 철문 바깥에서 들렸다.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하나하나 바뀌어 가는 것이 그나마 꼭 말소리가 한 마디 한 마디씩 들리는 것 같았다. 상준은 이유 없이 왼쪽 다리에 무게를 싣고 있다가 오른쪽 다리에 무게를 싣는 것으로 바꾸어 보았다. 숨 쉬는 소리도 귀에 서서히 들려 오는 거 같았다.

 

42층에 도착해서야 문은 다시 열렸다. 상준은 이번에는 열림버튼을 누르고 있을까 말까 고민했다. 열림버튼 눌러 준다고 나서는 것도 괜히 배려해주고 있다고 티만 내려는 수작처럼 보이지는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상준은 무심코 엘리베이터 열림버튼 앞쪽으로 한 발 내딛었다가, 멈칫멈칫거렸다.

 

그런데 유진이 먼저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눌렀다.

 

먼저 내리세요.”

 

상준은 ?” 하고 한 번 놀랬다가, “제가 누르고 있을게요 먼저 내리세요라고 말하려고 제가...”라고 말하려고 했다가, 그런 걸로 다투는 게 이상하는 생각에 말을 멈추고 엘리베이터 문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상준은 이제 유진이 걸어 나와서 자기 옆 자리에 서서 같이 걸을 것인가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고마워요라고 가볍게 엘리베이터를 붙잡아 준 것이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겠다고 생각 했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인사를 하려는데, 딱 그때 유진이 걸어 나왔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유진과의 거리가 50 센티미터 정도 갑자기 가까워지자, 상준은 놀라는 바람에 잠깐 어딘가 헷갈려서 허리를 푹 숙이면서 감사합니다하고 인사를 해 버렸다. 상준은 어정쩡하게 인사하는 도중에 스스로 이게 무슨짓인가 싶었다. 고개를 들면서 보니, 유진의 표정이 잠깐 이 자식 왜 이래?” 하는 것처럼 찡그렸다 펴지는 듯 하였다.

 

아무도 없네.”

 

유진은 스카이 라운지를 둘러 보았다. 유진은 누가 와서 자리를 안내 해 줄 거라고 생각을 하고 앞으로 나아 갔다. 상준은 고개를 숙여서 시선을 약간 피한 채로 유진의 등뒤에 서서 유진의 뒤를 졸졸 따르듯이 걸어 갔다.

 

손님 두 분이세요? 아무 데나 편한데 앉으시면 돼요.”

 

구석에 앉아 자기 전화기 화면을 긴긴시간 바라보고 있던 종업원이 달려와 말했다.

 

저기 창가 쪽으로 앉을까요?”

 

유진이 말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통유리로 트인 넓은 면으로 밤하늘과 해변이 보이고 있었다. 가끔 컨테이너를 실은 거대한 상선이 수평선 가까이에서 멀리 지나가곤 하는 바다였는데, 밤이라서 그런지 멀리 까만 바탕에 불빛들만 몇 보였다. 상준은 그 풍경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냥 흰 식탁보가 깔린 탁자와 검은 유리가 있다는 정도만 볼 뿐이었다.

 

그러죠. 저기 앉죠.”

 

상준은 유진을 따라 갔다. 상준은 유진이 앉기 전에 앉을 의자를 빼 줄까 하다가, 아서라 또 무슨 바보짓을 할까 싶어 천천히 따라 갔다. 유진은 상준이 따라 오도록 유난히 걸음을 늦추어 주는 듯 하였다. 상준 대신에 종업원이 유진의 의자를 움직여 주었고, 유진은 힘이 풀리기라도 한 것처럼 소리를 내며 주저 앉았다.

 

밥 먹으러 한 번 오기 엄청 머네요.”

입주기관들은 여기저기서 끌어 모아서 닥치는 대로 집어 넣었는데, 식당은 중앙에 한군데 밖에 없으니까요.”

그래도 평소에 밥먹을 때는 이렇게 멀리 와야 하는지 몰랐는데.”

 

상준은 둘이만 다니니까 어색해서 그렇지라고 대답하는 자기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유진은 상준이 상상만 한 그 말을 어떤 방법으로 이미 들은 것처럼 보였다. 종업원이 메뉴를 갖다 주자, 상준은 메뉴에 적힌 재료와 향신료의 이름을 열심히 읽는 것으로 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겠다 싶어 맹렬히 메뉴판에 몰입하였다. 유진 역시 메뉴판을 보고 있지만, 심드렁하니 앞장을 읽고 한 장 넘겼다가, “애개 이게 끝이야하는 얼굴이 되었다.

 

먹을 것도 별로 없네. 역시, 스카이 라운지 음식이 참... 술만 비싼 거 엄청 많네.”

아까 차장님 말씀처럼, 구내식당에서 밥 먹으면 너무 소홀히 하는 거 같다고 생각하는 공무원들 데려오는 데 인거 같네요.”

 

유진은 창 바깥을 보았다. 아까 8층에서도 바깥 풍경을 보더니 이번에도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여 가며 찬찬히 경치를 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밤하늘이나 금성이나 바다나 먼 곳으로 떠나는 배의 불빛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저녁 식사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하였다.

 

이럴거면 도대체 왜 저녁까지 남아 있으라고 한 거야. 그 국회의원이랑 밥먹으러 간다는데 상준 주임님도 안가신거죠?”

초빙 연구원들은 가는 거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초빙 연구원이 왜요?”

초빙 연구원은 원래 할 일 있어서 데려다 놓는 건 아니니까요.”

상준 주임님이 왜 할 일이 없어. 일 엄청 많지 않아요? 맨날 야근하잖아.”

그래도 진짜 주임무 맡은 거는 아니잖아요. 수리분석원 팀들에는 수학 전공자를 한두 명씩 쓰라고 규정에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사실 임시로 우리 팀에도 수학 전공자 있습니다.’ 하고 데려다 놓은거죠.”

하기야, 우리 팀만 해도 다들 뭐 국회의원 보좌관이나 보좌관 비서 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니까.”

 

다시 종업원이 들어 오자, 유진이 상준에게 말했다.

 

메뉴, 다 골랐어요?”

 

상준은 그렇다고 하고는, 더듬더듬 메뉴 이름을 읽으면서 메뉴판을 짚어 보였다. 상준이 메뉴 하나를 말할 때 마다 종업원은 그 메뉴 이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만을 골라 만든 종업원들이 쓰는 약칭으로 메뉴 제목을 한 번 더 반복해서 말하며 확인해 주었다. 상준이 메뉴를 다 고르자, 유진은 상준이 고른 메뉴에 대응되는 음식을 산출해 내는 기법이라도 있는 것처럼, 상준이 짚어 두었던 메뉴를 봐 가면서 자기 메뉴를 골랐다. 겹치는 음식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러면 더 할 일 없어야 되는 거 아녜요? 어차피 초빙 연구원은 전공자 있다고 이름 명패만 빌리려고 뽑는 거라면서요. 그러면 그냥 할 일 없이 놀아야 되는 거 아닌가. 여론조사하고 설문조사한 걸로 선거전략 만들고 그러는 거는 다 대리, 과장들이 하잖아요. 걔네들이 무슨 잔심부름 같은 거 많이 시켜요?”

 

상준은 자기가 할 일을 두고 잔심부름 시키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자 잠깐 기분이 나빠질까 하였다. 유진 역시 아차, 잘못말했나싶은 기색이 말한 끄트머리에 지나갔다. 그러나 그러자 상준은 사실 잔심부름 하는 사람 맞잖아싶었다. 상준이 다시 대답했다.

 

컴퓨터로 이거저거 돌리는 거요.”

그럼 할 거 많겠네.”

아주 많지는 않기는 한데...”

여기 수리분석원이 생긴 게 지난 번에 선거가 완전히 뒤집어 지는 바람에 한 번 난리 나고 나서, 선진국들은 통계 수치를 정밀히 분석해서 합리적으로 전략을 짠다더라 어쩐다더라 한 번 텔레비전에서 왕창 떠들고 나니까 여기저기서 무슨 연구소, 분석원, 기관 만든다고 만든 거 거든요. 그러다보니까 대충 이 일 저 일 비슷한 일 하는 사람들 모아 놓고 어디 번듯한 외국 보고서 하나 주면서 비슷하게 꾸며 보라... 이런 식인 거예요. 예를 들면 이번 설문조사 결과를 무슨 기법으로 분석했더니 무슨무슨 정책을 홍보하는 게 제일 표를 많이 땡겨올 수 있는 효과가 좋다더라. 이런 걸 내놓으라는 거거든요.”

그 비슷하게 하고 있지 않나요?”

 

유진은 고개를 흔들면서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물을 마시면서 유진은 가만히 , 레몬 들어간 물이네라고 말했다. 상준은 유진의 그 모습이 기절할 것 처럼 귀여워서 사진 찍게 한 번만 더 하면 안되냐고 말하고 싶었다. 상준은 그러는 대신에 자기도 레몬 들어간 물을 한 모금 마시면서 좀 진정을 해 보려고 했다. 유진은 말을 계속 했다.

 

비슷하긴. 그런 건 높으신 분들이 다 나름대로 판단하셔서 이미 결정이 나 있다고. 이번에는 공실 공공 건물 정상화 사업을 홍보 해야겠다. 뭐 이런건 정해서 내려 오는 거죠. 그러면 우리는 이 걸로 한 번 분석해보고, 저 걸로 한 번 분석해보고, 조건 바꿔서 또 분석해 보고 그러면서 하여간 공실 공공 건물 정상화 사업을 홍보하는 게 맞습니다라는 분석결과가 나올 때까지 해 보는 거예요. 그래서 그 결과가 보고서에 나오면 그걸 갖다 주는 게 우리 일이거든요.”

무조건 만들어 달라는 대로 한다고요?”

 

유진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상준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지난 번에 왜 예산증액으로 시끄러웠을 때, 대통령이 증액하자고 했는데 여당에서 오히려 통계 분석 해보니까 아니라고 해서 결국 대통령 마음대로 못했던 적 있었잖아요. 그런거 보면 위에서 내려오는 결정하고 상관 없이, 나름대로 꿋꿋이 안 흔들리고 분석하는 것도 있는 거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우리 원장님이 그때 대통령 라인이 아니라 당대표 라인이라서 그랬던거죠. 그때 당대표 그 양반이 여기 딱 저기네. 저기 와서 원장님한테 뭐라고 뭐라고 했었거든.”

 

유진은 건너편에 있는 스카이 라운지의 한 비어 있는 탁자를 가리켰다. 유진은 빈 탁자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상준은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 오도록 한 마디 걸어 보려고 했다.

 

그래서 나 한테 그런거 자꾸 시키는구나.”

 

혼잣말 말투였다.

 

? 어떤거 시켰는데요?”

 

유진은 상준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 왔다. 유진은 다시 상준을 보았다. 상준을 유진을 보았다. 오른쪽 눈동자에서 왼쪽 눈동자로 밝은 빛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북극을 향해 날아가던 창 바깥의 비행기 불빛이 비친 것인지, 아니면 유성의 빛이 반사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상준은 그냥 잠깐 잘못 본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연구원 선생님들이 40가지, 50가지 분석 프로그램들을 계속 바꿔 가면서 실행시키고, 결과 보고, 실행시키고 결과 보고 이걸 밤새도록 반복해서 해야 된다 그러더라고요. 그러다가 하루는 저보고 여론 조사 전략 연구를 도와 달라 그러시더라고요. ‘이거 여론 조사나 전략 이런 거 하나도 몰라도 돼. 그냥 아이콘 눌러서 프로그램 실행시키고 결과 종이로 프린트만 할 줄 알면돼. 그거 딱 하다 밖에 없어. 진짜 그것만 할 줄 알면 개 한테 훈련시켜서도 할 수 있는 거거든.’ 그래서 저 보고 같은 자료로 한 프로그램 스무개 정도 차례대로 계속 실행시켜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거 이 수석님이 말씀하신거죠?”

어떻게 아셨어요?”

말투가 딱 그러네.”

 

유진은 입술을 살짝 내밀면서 비웃는 웃음을 지었다. 상준은 한 번 그 표정을 따라해 보았다가 급히 다시 원래 표정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자료 같다 주면 그 자료로 계속 이 프로그램, 저 프로그램 돌려 보는 일 하다가. 그게 사람이 일일히 차례대로 계속 프로그램 실행할 필요 없이, 그냥 자동으로 계속 연달아서 실행되도록 매크로 프로그램을 짤 수가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프로그램을 하나 만들어서 한 72개인가, 73개인가 프로그램이 계속 연달아서 실행되면서 결과가 나오게 해 놨어요.”

이번에 이 수석이 오늘 국회의원한테 보여 준 그것도 그렇게 해서 나온 거예요? 그 의료보험 껀?”

그렇죠. 그 의원님이 필요한 게 뭐였냐면 암이나 심장병 같이 위험하고 큰 병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것 보다, 사소한 병에 대한 지원을 더 먼저 늘려 주는 게 시민들한테 더 만족이 크다는 거였거든요. 그래서 여론 조사한 거 자료 넣고, 제 프로그램에 넣은 거죠. 어제 밤새 돌려서 보고서 프린트 된 거 훑어 봤더니, 마흔 두 번째 프로그램으로 분석해 봤을 때 사소한 병에 대한 지원을 더 먼저 늘려 줄 때 시민들이 더 좋아한다는 결론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그거 갖다 줬죠. 뭐였더라. 엔트로피 어쩌고 였던데.”

이산 분석 결과의 엔트로피 가중법에 따른 클러스터링 분석. 그걸로 정밀하게 분석해 봤더니 시민들이 사소한 병에 대해서 지원 늘려 주는 걸 좋아한다는 거지. 국회의원이 그 말 외우게 해 주겠다고 오늘 엄청 떠들던데요.”

그런데 왜 암이나 심장병 보다 사소한 병을 지원하는 쪽으로 몰아 보려고 하는 거에요? 대통령이 그러라고 한데요?”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요. 모르지. 또 무슨 스포츠 맛사지나 물리치료 업체 협회장이랑 무슨 사돈이라도 맺어서 근육통, 신경통 치료에 돈을 확확 부어 주기로 했는지.”

정말 그런 수도 있어요?”

 

상준이 묻자 유진은 대답은 하지 않고 그냥 웃는 표정만 더 크게 지어 주었다. 유진은 그 대답 대신 다른 말을 했다.

 

그런데 대단하다. 그런거 언제 다 배웠어요?”

 

유진이 감탄하자 상준은 기뻤다. 상준은 전 직장에서는 뭘 했고,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이어 가 보려고 했다. 며칠 전에 팀장이,

 

좀 중요한 거 급하게 의논해야 할 게 있으니까, 다 모여 봐,”

 

하고 연구원들을 다 모았을 때, 황급히 상준도 회의실로 뛰어 가려고 하자, 팀장이 초빙 연구원은 괜찮고.” 라면서 돌아 가라고 한 적이 있었다.

 

상준은 그때 항공 안전 검사 절차를 강화하는 게 효율적이라는 결과를 급히 뽑아 달라고 해서 그 일에 쫓기다가 팀장의 말에 허겁지겁 하던 일을 정리하고 회의실로 간 것이었다. 그렇게 부산을 떨며 갔다가 갑자기 제지 당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머쓱해져서 다시 돌아 가는 상준을 쳐다 보았다. 그 사람들 중에는 유진도 있었다. 그때 상준은 유진에게 저도 예전에는 밥값 하는 보람찬 직원이었던 적도 있었거든요하고 붙잡고 설명이라도 해 주고 싶었다.

 

상준은 유진에게 말했다.

 

사실 좀 무서울 때도 있어요. 이것 때문에 의료 보험 하는데 쓰는 돈이 진짜 바뀌면, 어떻게 되었든 암이나 심장병 치료 받는 사람이 좀 줄어들 거잖아요. 그러면 제 때 치료 못 받아서 죽는 사람도 생길거고요. 몇 사람이나 될 지 모르는 사람들이 목숨이 달려 있고, 운명이 달려 있는 건데. 이렇게 크게 영향을 미치는 나라를 바꾸는 일을 하는데, 그거 분석 자료를 그냥 프로그램 70개 돌려가면서 내가 그냥 대충 이렇게 만들면 되는 건지.”

 

그리고 상준이 정말로 이전에는 뭐하고 살았는지 이야기를 하려는데, 종업원이 음식을 들고 나타났다. 종업원이 잠깐 나타난 사이에 대화가 멈추게 되었다. 종업원은 두 사람에게 음식을 내어 주었다.

 

유진의 음식은 송이버섯과 브로콜리를 올리브 기름에 볶으면서 굴소스와 몇 가지 다른 양념을 섞어 둔 것이었다. 고소한 냄새가 났고, 식물성 재료의 상쾌한 맛으로 되어 있으면서도 고기로 만든 음식에서 맛볼 수 있는 기름진 느낌도 같이 느낄 수 있어 보였다. 소스나 브로콜리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버섯은 재료도 무척 좋아 보였다.

 

그에 비해서 상준의 음식은 초록색 채소를 대충 잘라서 던져 놓은 데다가 요구르트 종류의 드레싱을 두른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요구르트로 만든 것이 잘 버무려 놓게 해 놓았다기 보다는 준비하다 만 채썰어 놓은 채소에 실수로 요구르트병을 깨어 엎질러 놓은 것 같은 모양이었다. 맛도 쉰 우유 맛이 슬슬 나는데, 그걸 덮어 버리기 위해서, 그야말로 덮어 놓고 달콤한 맛만 났다. 그 단맛은 낡은 벽지의 곰팡이 핀 자리를 숨기기 위해 그 자리에 싸구려 그림을 걸어서 가려 놓는 것 같은 맛이었다.

 

말이 한 번 끊기고, 일단 음식을 한 번 집어 먹기 시작하니, 말을 하기가 나빴다. 음식을 먹다가 잠시 멈추고 말을 해야 하나, 아니면 음식을 먹다가 삼키고 다음 음식을 먹는 사이의 짧은 순간 순간 사이에 말을 해야 하나, 알 수가 없었다. 입에 음식을 넣은 채 말을 하기는 이상하니까, 먹으면서 대화를 할 적당한 시점을 찾아야 하는데, 찾기가 쉽지가 않았다.

 

상준은 보통 다른 사람들과 밥을 먹을 때는 도대체 어떤 식으로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기까지 했다. 밥 먹는 것과 말 하는 것을 섞어 치는 게 분명히 자연스러운 일인데, 도대체 어떻게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3.

한참 말은 없었고, 상준이 입에 집어 넣고 있던 발효 유제품에 죽은 식물들이 혼합되어 있는 자칭 샐러드는 꾸역꾸역 줄어 들어 갔다. 처음에 상준은 유진이 하는 말과 표정을 듣느라, 또 바닥에 채소를 흘리지 않고 옷에 한 방울도 드레싱을 튀기지 않으려고 집중 하느라, 얼마나 맛 없는 것을 먹는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다른 하는 일은 없이, 그냥 계속 그 망할 것을 먹어 치우는 일만 계속 하다 보니 이것 참 정말 못 먹을 정도로 맛 없는 거라는 생각을 했다.

 

상준은 이 샐러드의 맛 없는 정도란, 너무 맛 없어서 먹고 토했는데, 먹기 전의 것과 토한 후의 것이 맛으로는 별 다를 바 없을 만한 수준이라는 생각을 했다. 스스로 생각하고도 구역질 나는 비유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상준은 그만큼 쓰레기 같은 기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상준의 위장을 쓰레기 매립지 삼아 들어 간 그 음식이 거진 다 없어지게 되었을 때, 유진은,

 

, 맞다.”

 

하고 말을 했다. 정말 모르는 것이 마침 생각 났다기 보다는, 워낙 아무 말도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혼자서 말을 꺼내자니 이상해서 붙여 본 장식 같은 말이었다.

 

오늘 우리 돈 많으니까 포도주 같은 거 먹죠. 우리 시킨 거 다 먹어도 충분한데.”

그래도 돼요?”

우리 팀원이 몇 명인데요. 우리 둘로는 비용 다 채우려면 어림도 없어.”

 

유진이 말하자 상준은 종업원에게 포도주들이 실려 있는 메뉴를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종업원이 물러난 후, 상준이 유진에게 말했다.

 

, 유진 차장님은 오늘 왜 안 가셨어요? 초빙 연구원들은 안 가는 자리지만, 차장님께서는 안 가실 이유가 없지 않아요?”

국회의원들이 여기저기 사람들 모아 놓고 저녁 먹는 자리라서, 이렇게 저렇게 구색을 맞춘데요. 그러니까 젊은 연구원 한 둘, 늙은 수장급 한 둘, 정치쪽 사람 한 둘, 연구소나 학계 쪽 사람 한 둘, 언론쪽 사람 몇 명, 남자 몇 명, 여자 몇 명, 이런 식으로. 다 같이 모여 있을 때 분위기 잘 나고, 기자들이 취재 하거나 사진 찍었을 때 모양 좋고 기자들 걔네들한체 재밌어 보이게. 그렇게 숫자 맞추다 보니까 나는 안맞아서 오지 말라고 한 거고.”

그런 걸 다 따지고 맞춰요?”

어떻게 보면 요즘에는 그게 일이 훨씬 커요. 이 수석님도 그러고 보면, 어떻게 생각하면 불쌍한거라고. 이 수석님은 원래 하던 일은 지금 다 자기한테 그 프로그램 돌리는 거로 넘긴 거잖아요. 그리고 맨날 나와서 뭐 하느라 치이냐면 누구 온다고 했을 때 밥 어디서 먹고 누구랑 앉아서 자리 배치 어떻게 하느냐 그런 거 궁리하는 거 허구헌 날 하는 게 일 전부라니까.”

그래도 자료 조사 쪽 총괄하시는 게 유진 차장님이신데, 차장님 안가시는 건 너무 이상한데요.”

뭐 괜찮아요. 나이 든 여자를 누가 좋아하겠어요.”

? 누가 좋아하겠어요?”

 

상준은 뭘 말하지 말아야 할 순간인지, 뭘 말 해야 할 순간인지 알 수가 없었다. 유진은 계속 말 해 나갔다.

 

괜찮아요. 어차피 거기 가서 뭐 얼마나 더 좋겠어요. 영감님들이 국회의원 눈에 들려고 서로 재롱 부리는 거 보면 애처롭기나 하지.”

유 대리님은 진짜 웃기다고 하던데요.”

유 대리는 비위가 좋잖아요. 어차피 음식도 요즘에 그 무슨 방사능 누출 사고 난 지방 도와야 된다고 거기 농산물로 밥 차려서 먹고 그럴껄요.”

정말 그래요?”

그러니까 기자들도 그렇게 많이 불렀겠지. 사진 찍는 사람도 꼭 데려오라고 이 수석님이 사방에 전화 하시는 거 들었죠?”

 

상준은 자기가 먹은 버린 걸레 같은 샐러드를 먹으면서,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나눌 것인지 궁금하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그 샐러드를 다 먹었을 때, 포도주 이름들이 실린 메뉴를 종업원이 들고 왔다.

 

골라 보세요.”

 

유진이 말했다. 상준은 포도주 목록을 읽었다. 점점 목과 턱이 더워지는 느낌이 있어서 차갑게 먹는다는 백포도주를 마시고 싶었다. 4년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와 같이 미국에 갔다 온 후에, 그녀가 그때 같이 마셨던 거 생각 난다.” 면서 매번 포도주를 고를 때면 미국산 포도주를 택했던 것이 생각 났다.

 

유진은 요즘에 벌써 몇 번 연속으로 자기에게 포도주를 골라 보라고 한 뒤에, “와인 좀 알아?” 하고 물어 보고는 잘 모른다는 대답을 기다렸다가 겸손한 척 나도 잘 모르는데라고 말을 꺼내 놓고든 가증스럽게도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별별 가당찮은 잡지식을 길게 버리기도 귀찮은 쓰레기처럼 늘어 놓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겪은 바 있었다.

 

만약에 상준이,

 

저는 이런 거 잘 모르는데 혹시 좀 아세요?”

 

하고 자신에게 묻는다면, 유진은 이번에는 오랫동안 대답하지 못하고 눌러 놓았던 대로,

 

저희 외할아버지께서 원래 경북 상주 팔음산에서 포도 농사를 크게 지으셨었는데요. 말년에 한국에서도 최고급 포도주를 만들어 보겠다면서 설치다가 15년 전에 아주 거덜을 내시고는, 돌아가실 때까지 허구헌날 그거 망해 먹은 거 한탄하시다가 돌아가셨거든요. 그래서 제가 포도주에 대해서는 아주 기가 막히게 알지요.”

 

라고 사실을 고백해 보려는 생각도 했다.

 

상준은 메뉴에 둘 나와 있던 캘리포니아산 백포도주 중에 하나를 골랐다. 하나는 너무 비싼 것이었다.

 

이거 샤도네이, 이거요.”

 

상준은 무슨 사연으로 왜 그걸 골랐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유진도 포도주에 대해서는 아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종업원이 포도주 병을 들고 나와서 상준이 시음을 하도록 따라 주려고 했다. 상준은,

 

아니요. 이쪽으로.”

 

라면서 유진에게 따라 주라고 부탁했다. 유진은 먼저 맛을 보더니 괜찮다고 했다. 상준은 별것도 아니지만 무진장 믿음직스러워 보인다고 생각 했다. 종업원이 상준에게도 포도주를 따랐다. 다시 두 사람이 아무 말도 없었기 때문에, 노랑빛이 전등불에 반짝거리는 포도주가 물결에 튀기면서 따라지는 소리만 들렸다.

 

상준은 포도주 맛을 보았다. 약간 시큼했지만 상쾌하고 차가운 것이 좋았다. 상준은 유진도 똑같은 맛을 느끼며 똑같은 것을 목으로 넘기고 있다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니 지금 같은 포도주를 나눠 마시고 있다는 생각이 새삼 한 번 더 떠올라서 한 모금 더 마셔 보았다. 잔을 내려 놓고 상준은 한 번 웃어 보였다. 유진은 상준의 그 얼굴이 너무 멍청해 보여서 그렇지 참 사람 좋아 보이는 표정이라고 생각했다. 상준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우리 근무 때문에 남아 있는 건데, 술 마셔도 되는건가요.”

뭐 어때요. 다른 사람들도 다 지금 밥 먹는 게 일인데.”

그런가요?”

 

상준이 다시 이어서 할 말을 못 찾았을 때, 유진은 다시 창 바깥을 보았다. 얼마 안되는 사이에 밤은 더 깜깜해져서 밤하늘과 바다의 경계도 잘 찾기 어려운 모양으로 변해 있었다. 어디선가 파도가 밀려 오는 소리가 계속 나는 것 같았다. 42층 아래의 파도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 오는 것일 리는 없었다. 그러면 가게에서 일부러 녹음한 파도 소리를 틀어 주는 것인가 생각해 보았다. 그럴 리야 있을까. 상준은 파도 치는 소리가 나오면서 시작하는 노래가 있어서 그 노래를 지금 틀어 주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상준은 파도 소리에 대해서 말하려다가 자기가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유진도 파도 이야기를 하려다가 상준과 같이 더 오래 주고 받을 수 있는 주제로 말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유진이 말했다.

 

허구헌날 맨날 주말마다 이게 뭐하는 건 지 모르겠어요. 요즘에는 거의 토요일 마다 출근해서 이 일 저 일 하고 늦게까지 있다가 저녁도 먹고 이러는 거 같애.”

맞아요. 원래 우리가 야근은 별로 없었던 거 같은데, 이상하게 요즘에는 토요일 출근해서 일하다가 토요일마다 저녁 먹고 야근 하네요.”

이러다가 뭐 토요일날 출근하는 것도 당연하지이런 분위기로 가는 게 진짜 나쁜건데. 이게 벌써 몇 번 째인지 모르겠어.”

 

상준은 ‘10번째요하고 속으로만 대답했다. 구내식당에서 다같이 몰려 가서 밥을 먹었던 것이 지난 아홉 번이었고, 오늘은 열번째였다.

 

주말에는 좀 쉬고 그래야 되는데. 자꾸 이렇게 계약을 해서 다니는 게 회사인데, 직원 삶의 다른 영역을 슬금슬금 먹고 들어오는게... 참 싫고 그렇지 않아요?”

진짜 맞는 말씀입니다.”

 

상준은 포도주를 한 모금 더 들이키려고 했다. 그런데, 이미 포도주 잔은 비어 있었다. 상준은 남아 있는 몇 방울이나마 마시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마른 침이라도 삼켰다. 상준이 유진에게 물었다.

 

차장님은 주말에 보통 뭐하세요?”

 

유진의 답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종업원은 두 사람이 먹을 주요리를 갖고 나왔다.

 

 

4.

유진의 주말 계획을 묻는 것은 상준이 오랫동안 상상해 보았던 것이었다. 이십년이 가까워 가는 예전 일이지만 상준은 대학시절에 그런 식으로 말을 걸어 보는 것이 꽤 괜찮았다는 기억도 있었다. 물론 믿을만한 튼튼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이제는 쓸쓸하게도 더 새로운 것을 알고 들을 것 없는 마음에서 나온 묵고 묵은 옛날 이야기일 뿐일 수도 있었다. 그러고보면, 이제 그런 이야기는 앞으로 영영 안하게 되겠지 싶은 생각이 든 지도 벌써 몇 해쯤 된다.

 

그렇지만 상준은 그 동안 한 번씩은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차장님은 주말에 뭐하세요?”

 

라고 물으면 유진이 뭐라고 대답할까. 유진은 그냥,

 

쉬어야죠. TV도 보고. 어머니, 아버지 계신 집에도 좀 가고.”

 

라고 말하고 말 수도 있었다. 혹은,

 

주말에는 남자친구 만나야죠.”

 

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는 것도 계산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 약간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주말에도 나름대로 바쁘게 휙휙 지나가더라고요.”

 

정도로 이야기하고 넘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상준은 조용히 , 그러시구나. .” 하고 한 번 아까처럼 웃은 다음에, 집에가서 내가 무슨 멍청한 소리를 한건지라면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만일 이런 식으로 말이 넘어 간다면 또 어떻겠는가.

 

사실... 주말이라도 딱히 하는 일은 없는데. 그냥 늦잠 좀 자고. 빈둥빈둥 하다 보면 오후고. 그러고 TV 보고 인터넷 좀 보면 또 저녁이고. 그리고나서 일요일 되면, 으아- 내 주말 왜 이렇게 날아갔지. 이렇게 되더라고요. 혹시 뭐 좋은 아이디어 없어요?”

 

그렇게만 된다면 일단은 한 번,

 

그래요? 이번 주에 영화 하나 개봉했던데.”

 

라는 정도로 말 하고 그때 유진이,

 

무슨 영화인데요?”

 

라고 하면, 거기에 대해서 상세 설명을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한푼 가치도 없는 시시한 헛소리 밖에 안되는 영화인데요, 그래도 한 번은 볼만한게. 그 영화 특징이 뭐냐면, 별로 안친한 남녀가 만나서 별로 할 일 없을 때 데이트 하는 분위기를 살짝 깔아 주고 돈 받아 먹는 영화라는 거거든요.”

 

라고 대답하고, 그렇게 해서 토요일에 같이 뭘 하러 가자는 약속이 이루어질 수도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상준은 이 세 가지 경우 모두에 대해 유진이 어떤 목소리로, 어떤 표정을 지으며 말할 지에 대해서도 똑똑히 머릿속으로 그려 낼 수가 있었다.

 

상준이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유진은 식탁 위에 올라온 요리에 포크를 갖다 대고 한 점 떼어 먹었다.

 

유진의 음식은 쇠고기 스테이크였는데, 약간 질긴 듯 해서 기름지고 고소한 것을 씹는 맛이 있으면서도 숙성한 것과 구운 기술이 좋아서 결코 질기지 않게 잘 씹히는 것이었다. 특히 불그스름한 색깔이 잘 살아 있는데도 겉면은 이상하게도 바삭하게 보인다는 상상을 할 수 있을 듯이 불에 잘 익어, 보이는 것이 무척 좋아 보였다. 칼로 잘랐을 때 단면이 미끄러지면서 고기결이 갈라질때, 자연스럽게 위에 뿌려둔 후추 가루가 조금 묻어 나게 되어 있었는데, 이것도 맛을 좋게 했다. 소금은 아주 조금만 들어간 대신에, 매우 균일하게 뿌려 놓은 바질 가루와 후추가 처음 입에 넣을 때의 향기와 뒤에 남는 맛을 꾸며 주었다. 그래서 양념이나 간을 한 것은 많지 않은 데도, 고기맛이 다양하게 변화되면서 상당히 복잡한 맛이 나는 느낌이었다.

 

상준도 자기 음식을 보았다. 상준의 음식은 왕새우를 구운 것이었다. 샐러드가 먹은 것에 대해 음식값을 내는 것이 아니라 배상금을 받아야 할 지경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왕새우 구이는, 아까의 샐러드에 대해

 

정말 죄송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빌면서, 가진 모든 것을 바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훌륭했다.

 

왕새우를 구우면서 버터를 아주 살짝만 사용해서 그 향기는 조금 밖에 나지 않았지만, 그 버터 구이의 고소한 맛이 왕새우 자체의 맛에 섞여 들면서 왕새우의 고소한 맛을 살리는데 모두 공헌하고 있었다. 특히 빨간 왕새우 껍질을 어떻게 구웠는지, 얇게 되어 있는 그 껍질이 아주 바싹 잘 익혀져 있어서 껍질을 그대로 같이 먹기에도 아무 불편이 없었다. 오히려 마치 바삭거리는 과자 같은 느낌이었다. 새우의 살은 짭짤한 맛은 있었지만, 짜다기 보다는 그 말캉한 하얀 살덩이가 씹히는 것이 오히려 담백한 느낌이 있었는데, 그게 담백하고 싱그러운 요리를 먹고 있는데 그게 버터 구이를 한 바삭거리고 고소한 음식이라는 맛처럼도 느껴지는 절묘한 것이었다.

 

유진은 두 점, 세 점 째 스테이크를 먹었고, 상준은 그 모습을 보지 않는 척 하면서 살펴 보았다. 유진은 말은 하지 않고 있었다. 상준의 표정은 아까의 실패한 샐러드로 마스크팩을 하는 느낌으로 변해 갔다. 상준은 마침내 아까의 질문은 거기서 끊겨서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여기 본 요리는 꽤 괜찮아 보이네요.”

 

상준은 대신에 음식 칭찬을 했다. 유진은 고기를 씹고 있어서 말로 답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고개만 끄덕여서 동의했다.

 

유진이 방금 잘라 먹은 고기는 특히 가장 도톰한 부분으로 제일 맛이 좋은 부분이기도 했다. 유진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상준은 유진이 고기를 다 씹어 삼킬 동안 무슨 말을 할 지 기다렸다. 그러자 유진이 빨리 말을 하려고 맛있는 고기를 급하게 씹어 먹어 넘기려는 것처럼 보였다. 상준은 독촉하는 거 같아서 시선을 왕새우의 무심한 수염쪽으로 돌리고, 스스로도 음식을 먹으려고 했다.

 

고기를 삼킨 유진이 말했다.

 

상준 주임님은 주말에 뭐하시는데요?”

 

한때 서해 대륙붕을 헤엄치던 왕새우의 다섯째 다리 근육이었던 살을 향해 들어 가던 상준의 칼이 그대로 굳어 버리듯이 멈추었다. 상준은,

 

?”

 

하고 말하면서 유진 쪽을 보았다. 유진은 상준에게서 잠시 고개를 돌리고 고기 옆에 있던 베이비 아티초크와 아스파라거스를 보고 있었다. 유진은 아티초크는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포크를 그 앞에 대고 어떻게 잘라 먹을까 이리저리 살펴 보다가 멈추고 아스파라거스로 옮겨 갔다. 그때 다시 유진은 상준을 다시 보았다. 유진의 눈이 상준에게 대답해 달라고 하고 있었다. 상준은 거기에는 꼭 복종해야 될 것 같았다.

 

그게 그렇더라고요.”

 

상준은 일단 그렇게 대답했다. 아무 의미 없는 말이었다. 그게 말 그대로 그거니까, 그래서 그걸 그거라고 하는 거니까, 그걸 두고 어떻냐고 누가 물으면 그렇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유진은 눈을 조금 더 동그랗게 만들고 상준을 보았다. 아직까지는 대답이 부족하다고 비판하고 있었다. 상준은 계속 말했다.

 

이렇게 혼자 살면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어떻게 알려 주는 거, 보여 주는 게 잘 없어 보여요. 이것저것 집안일하고 좀 쉬느라고 기대고 앉아 있고, 뭐 구한다고 뽈뽈거리고 돌아 다니고 그러면 시간이야 가긴 가는데. 그런거 말고 정말로 뭘 해야 하나 이런 건 참 없어요. 그건 결혼해서 애 키우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수도 있기는 한데...”

그러면 더 심하겠지. 얼마나 정신이 없겠어. 뭐 하고 사는 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살려면 꼭 해야 하는 일만 하면서 있어도 휭휭 시간이 막막 지나간다 그러잖아요.”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그런 사람들은 하다 못해 무슨 영화나, 텔레비전이나, 무슨 광고를 봐도 이런 사람은 이렇게 사는 게 좋은 겁니다이런 식으로 보여 주고 제안해 주는 게 있잖아요. 나름대로 어떻게 살아야 된다, 어떻게 산다는 길이 있다고요.”

시간 시간 지날 때 마다 뭐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걸 보여 주는 게 없다는 거?”

 

유진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아티초크를 먹어 보려고 칼을 가까이 가져 갔다. 그러면서 혼잣말처럼, “친한 사람들은 맨날 하는 소리가 왜 여태 결혼 안했어?’ 이런 거 밖에 없고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상준 쪽을 보고 말했다.

 

말도 안되는 지어낸 이야기다 싶어도 확실히 영화나 소설 같은 것 보다가도, ‘저게 맞는데하는 느낌 받을 수는 있는 건데. 그렇죠?”

.”

 

상준이 하고 대답하는 소리가 막혀 있던 증기가 솟구치는 기차의 기적 같이 길게 들렸다. 유진은 상준의 길고 깊은 대답 소리에 약간 표정을 바꿔 주었다. 유진의 눈썹이 왜그래?”하고 묻는 것 같았다. 유진은 과감하게 아티초크의 가운데를 칼로 잘라 보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상준에게도 물었다.

 

그런 느낌 받았던 거 뭐 생각나는 거 있어요?”

 

상준은 하고 소리를 내면서 생각을 했다. 상준은 생각을 하면서 접시 위를 보았다. 상준의 접시 위에도 베이비 아티초크가 똑같이 놓여 있었다. 상준도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는 음식이었다. 상준은 어떻게 먹어야 할 까 고민하면서 이리저리 아티초크를 포크로 건드려 보았다. 상준도 칼로 잘라 볼까 어쩔까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그냥 포기하고 다시 왕새우나 먹을까 하고 포크가 옮겨 갔다가도, 다시 아티초크로 돌아 왔다.

 

마침내 상준이 말했다.

 

그렇게 저게 맞는데까지는 아니지만, 그냥 와닿는 이야기가 있기는한데요.”

 

유진이 상준을 바라 보았다.

 

뭔데요?”

 

상준은 다시 유진의 눈동자에 아까처럼 어떤 빛이 지나가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고 생각했다. 상준이 말했다.

 

어떤 사람이 있는데, 자기 딴에는 처음에는 되게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거든요. 부지런하게 일도 많이 하고, 바쁘게 항상 빡빡하게 다니고.”

직업이 뭔데요?”

처음에 직업은 그러니까 무슨 무역회사에 기술자 같은 건데요. 어떤 기술자냐면, 여러 나라랑 거래를 하다 보면 같은 물건인데 이 나라에서 사오는 물건하고, 저 나라에서 사오는 물건하고, 시세가 서로 다르니까 어디 거를 더 많이 사야 더 이익이다 이런 걸 계산하는 기술자가 있거든요.”

딱 듣기에도 바빠 보이네.”

일 자체는 그렇게 엄청나게 바쁜 건 아니에요. 이 사람이 원래 하던 거는 밀가루 시세 따지는 거였는데, 샹하이에서 배로 실어오는 중국산 밀가루랑, LA에서 실어오는 미국산 밀가루랑 값을 비교하는 거죠. 밀 작황, 밀가루 회사 상태, 배로 싣는 항구 상태, 뱃삯, 배에 들어 가는 기름값, 이런 걸 쭉 전부다 빨리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집계해서 둘이 시세가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언제 얼마나 바뀔건지 이런 거 자료를 만드는거죠.”

그런데 그런거 하면 재밌는 일일까요?”

재미는 조금 있을 수도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없다고 할 수도 있는데. 일 자체는 그냥 그렇더라도, 일단 그렇게 바쁘게 계속 하는 일이 있고, 그걸로 계속 앞으로 간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막 그걸 열심히 파고 가는 거죠. 그렇게 하면서 나름대로 오래 계속 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여자친구도 사귀어서 자주 만나면서 지내고 있고.”

 

유진은 거기까지만 있는 이야기라면 이야기가 되는 이야기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유진이 물었다.

 

그런데, 그러다가?”

 

상준이 대답했다.

 

그런데, 그러다가. 갑자기 직장에서 일이 터지는 거죠. 이 사람은 전혀 모르고 살았는데, 사실 네 군데 이상 나라하고 그 정도 규모로 거래할 때에는 금융감독원에 신고를 꼭 하게 되어 있는 규정이 있었거든요. 옛날부터 있었던 규정인데, 그런 게 있는지, 그걸 지켜야 되는지, 아무도 모르고 그 회사에서는 그냥 계속 그렇게 일 한 거죠. 같은 일 하는 업계에 다른 회사들도 마찬가지고. 그 사람은 자기가 그 시세 계산하는 일 하면서도, 그런 규정이 있는지 아무한테도 배운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사람들이 수사한다면서 와서, 규정 위반이라고 하고, 과태료 물게 하겠다고, 재판 세워서 처벌 받게 하겠다고 하는 거죠.”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요?”

어느 날 갑자기 일 좀 철저히 똑바로 해 보겠다고 결심해서 그랬을 수도 있고. 그 때 돌던 소문에는 그때 그 회사 회장이 경제부총리 한테 미움 받아서 뭐라도 껀 수 잡아서 괴롭히라는 지시 받고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래요. 하여간 그러다 보니까 이 사람은 자기 딴에는 회사에서 하라는 일 엄청 열심히 일한다고 하면서 살았는데, 그런 규정이 있는 줄은 모르고 일하다가 졸지에 범법자가 된거죠.”

억울하네요.”

 

상준은 한숨을 쉬는 것과 웃는 것을 동시에 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상준이 대답했다.

 

억울하다고 생각하면 약간 문제가 있을 수도 있는 거죠. 지가 그때 그렇게 일 잘하고 똑똑하고 그 바닥에서 제일 열심히 한다는 식으로 생각했으면, 자기 일에 엮여 있는 진짜 법이나 제도에서 규정이 뭐가 있는지, 자기가 하는 일이 법에 맞는 건지 아닌건지 그걸 항상 따지면서 조심했어야죠. 그런 게 진짜 제대로 일하는 사람다운 책임감이라면 책임감이고.”

책임이라면, 그러면 그러다가 확 감옥 갔다는 거예요?”

감옥은 아니고. 특별히 악의를 갖고 죄를 저지른 거는 아니니까, 그렇게 큰 처벌은 안 받았죠. 일 터졌을 때 회사에서도, 최대한 일 안 커지게 변호사들한테 돈 많이 써서 도와 주겠다고도 했고. 집행유예 정도 받았죠. 그런데, 그래도 문제 터지자마자 그 회사 회장이 물의를 일으켜서 대단히 죄송하다고 하면서 당장 시정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그 일 책임자인 이 사람은 그날로 해고를 당했어요. 그건 어떻게 물릴 수 없는 거니까. 그래서 이 사람이 실업자가 됐죠.”

 

유진은 남아 있던 잔의 포도주를 입에 갖다 댔다. 유진은 입에 술을 갖다 대고 한 모금 마시면서도 그대로 눈은 상준을 보고 있었다. 상준은 유리잔과 술이 흔들리는 모양이 유진의 얼굴 아래를 가려서 그 눈의 표정만 나타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나서 이 사람이 새 직장을 구하려고 하는데, 그게 잘 안됐어요. 밀 시세 계산하는 딱 그런 사람이 필요한 자리가 우리 나라에 몇 군데나 더 있겠어요. 놀면서 여기저기 원서 넣고, 면접 보고 하느라 생활비 까먹고 시간만 점점 지나간거죠. 그러다가 같이 비슷하게 단속 들어 왔을 때 잘린 업계에 다른 회사에 아는 선배가 무슨 사업한다고 해서 거기에 들어갔다가, 또 실패하고.”

사업은, 무슨 사업인데요?”

배달 음식을 보내 주는데, 가장 효율적인 배달망을 정밀하게 컴퓨터로 계산해 준다는 그런 게 사업 핵심이었는데요. 우리가 무역 하면서 물류 따지는 걸 그래도 이것저것 많이 해봤으니까요. 그런데, 이 선배가 그냥 아이디어 하나로 성공하는 벤처시대, 혁신적이고 자유로운 기업 문화, 이런 거만 너무 좋아하고. 사람이 좀 현실성이 없는 거에요. 뭐든지 다 책에서 성공한 창업자들에 대해서 글로 읽었을 때처럼 그저 그냥 잘 될 것 같이만 생각하고. 그렇다고 실업자였다가 겨우 이 선배 사업에 동참한 이 사람이 그걸 메워 줄만한 무슨 능력이 있는것도 아니고.”

그래서 막 돈날리고 그런거에요? 이 사람도?”

그것 까지는 아닌데, 한 몇 년 보내면서, 시간 보내고, 돈 못 벌고 그런 거죠. 그러면서 사람도 점점 피폐해지고. 그 선배랑도 크게 싸우고 의절한다 어쩐다 하는 분위기로 갈 데도 있었는데, 그래도 워낙에 그 선배가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 결국에 그러지는 않았는데... 하여간 그러다 보니까, 이제 이 사람이 남은 돈도 다 떨어지고 생계를 걱정하게 된거죠. 이제 점점 취직자리 구할 엄두도 나지 않는데, 그러다 보니 이제 이 사람이 정말 생활비가 똑 떨어져서 아예 살 수가 없게 된 거예요.”

 

유진은 그 말을 듣고 -”하는 소리를 냈다. 상준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서 이제 이 사람이 고향에 부모님 댁에 돌아가서 얹혀 사는 수 밖에 안남 게 된거죠. 그런데 그렇게 하면 부모님한테 나 이제 실패했습니다그러는 거 같잖아요. 부끄럽기도 하고, 부끄러운 것도 부끄러운거지만, 옛날에 일한다고 엄청 바쁜 척 할 테는 참 대단한 일을 하 는냥 했는데, 부모님은 얼마나 실망하시고 또 반대로 이 사람을 또 불쌍하다고 생각하시겠어요. 그 생각하면 이 사람이 고향으로는 못 가겠는거에요. 그래서 빚도 지고 하면서 버티고 있다가, 정말 막 닥치는대로 일을 한거죠.”

이 사람이 지금은 뭐하고 있는데요?”

그렇게 저렇게 하다가 그래도 대충 버틸만한 자리를 몇 년만에 이 사람이 하나 찾은 거에요. 그렇게 좋은 곳은 아니고, 옛날 경력이니 뭐니 다 없이 그냥 신입직원 비슷하게, 그것도 좀 불안하게 일해야 하기는 하는데, 그래도 이제 생활은 버텨 나갈 수 있을 정도는 자리를 찾은 거죠.

그래도 가끔 이제 앞날 생각하면 답답한거죠. 비슷한 또래 친구들이나, 예전 직장 동료들보며 다들 결혼해서 가정 꾸리고 애 키우고, 일은 일대로 자기 판 만들어가면서 계속 가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은 이제 그런 데서는 완전히 때를 놓치고 밀린 느낌이 드는 거죠.

그러니까 이게 어떤 느낌이냐면, 사람들이 전부다 큰 길에서 다 떼를 지어서 마라톤 하듯이 가는 큰 무리가 있는 거에요. 앞에 선 사람도 있고, 뒤에 선 사람도 있지만은 전부다 인생을 살면서 기본적으로 그 무리에 들어가서 그 방향으로 가기는 가는 거에요. 그런데, 이 사람은 이제 그 무리에서 빠져서 길 바깥으로 떨어져 나간거죠. , 이제는 저 무리로 들어가서 저렇게 가는 거는 내가 못 가는구나. 이렇게만 생각하게 되는 거죠.”

 

유진은 상준이 들려준 이야기가 거기서 그렇게 끝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그런 것처럼 이야기는 잠시 멈추었다. 그러고보니 아까 들리던 파도 소리 같은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상준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렇게 살던 직장에서 어떤 사람을 본 거예요. 직장에서 보면 직속상사는 아니지만 윗 직급 사람인데, 일을 잘하고 사람이 또 참 재밌어요. 나이는 비슷하거나 한 두 살 더 많아 보이고요. 그리고 엄청엄청 예뻐요. 꿈에서 잘못 보면 꿈이라서 자고 있는 건데도 또 기절할 것처럼 엄청 예뻐요. 그래서 가끔 그 사람 보는 낙으로 이제 일을 하고 사는 거예요.

 

사실 이 사람이랑 그 사람이랑 별로 친하지도 않아요. 밥도 한 번 제대로 같이 먹어 본 사이도 아니에요. 다 같이 우르르 몰려가서 구내식당 밥은 몇 번 먹어봤지만. 그게 전부에요. 일 이야기는 가끔 하기는 하지만 다른 대화는 별로 해 본적도 없죠. 그러니까 사실 이 사람은 제대로 아는 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궁금한 건 엄청 많아요.

 

이 사람이 그 사람이랑 조금 더 친해지고 가까워지는 정도라도 어떻게 가능하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두 사람은 너무 차이가 많이 나고 서로 취향이 다른 성격이라서 전혀 친해질 수도 없는 건지, 그 사람이 정말 정말 싫어하는 이야기인 줄 알지만, 왜 아직까지 결혼을 안 한 건지 그런 것도 너무 궁금하고요. 너무 보는 눈이 높은 건지, 옛날에 너무 좋아했던 사람이 있어서 못 잊는 건지, 아니면 다른 무슨 사연이 있는 건지. 한 번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런 거 혼자 궁리하고 고민하고 추리하다가 두 시간 세 시간 우습게 갈 정도로 생각도 많이 해요.

 

어떨 때는 그런 생각도 하기는 해요. 이 사람이 어떻게 보면 인생 꼬인 거 잖아요. 그러니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 지도 모르겠고, 뭐에 노력을 기울이고 살아야 될 지도 모르는 건데, 그런데, 저렇게 아름답고 좋은 게 눈 앞에 있으니까, 그냥 도망치듯이 매달리듯이 그렇게 많이 생각하는 걸 수도 있어요. 만약 그렇다면 그건 또 좀 아니잖아요. 서로 우울하기만 한 이야기 같고.

 

그런데 그런 게 있더라고요. 이 사람이 일하던 회사가 갑자기 아무 연고도 없는 외따로 떨어진 먼 동네로 이사 간다고 했어요. 이 사람은 그러면 회사 다니고 살기도 더 어려워지고, 앞으로 그나마 더 직장 다운 직장 구할 수 있는 가능성도 확 떨어질 거거든요. 그래서 이참에 회사 이사 갈 때 회사에서 퇴직하고 나와서 다른 길 찾아 보는 게 좋을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생각해 본 거죠. 회사 옮겨서 잘 사는 거랑, 그냥 거기 회사 따라 가서 그 사람을 매일매일 보면서 같이 회사 다니는 거랑, 뭐가 더 좋은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같이 회사 다니는 거더라고요. 그걸 어떻게 할 수는 없는 거더라고요.”

 

이야기를 들으며 유진이 주 요리를 거의 다 먹을 때 까지, 상준은 반도 채 먹지 않고 음식을 남겨 놓은 상태였다. 상준은 이제 음식은 어떻게 손을 대어야 할 지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말을 마친 상준은 유진을 보았다. 다시 한 번 유진의 눈을 보았다. 상준은 이번에는 자신의 흐리멍텅하고 얼빠진 눈에서 유진이 뭐라도 좀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돌리지 않고 유진을 계속 쳐다 보았다.

 

그 때, 식당 종업원이 후식을 가져 왔다. 검은 하트 모양의 초콜릿 케익이었다. 유진은 고개를 숙여서 아티초크를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드디어 잘라 먹었다.

 

유진이 말했다.

 

이게 일부러 그런 걸 넣은 거 같지 않은데, 가운데 쪽은 크림이나 치즈이런 비슷한 맛이 나네요. 신기하네.”

 

두 사람의 그날 식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다만 이 이야기에서 그날 두 사람의 식사를 담당했던 바로 그 종업원인 내가 꼭 덧붙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상준이 먹은 요구르트 드레싱을 이용한 특선 그린 샐러드는 결코 상준이 느꼈던 것처럼 그렇게 나쁜 음식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풍미를 좋아하는 취향을 가진 사람을 나는 복수로 알고 있다. 두번째는, 두 사람은 그러나 그 날의 식사 이후에도 482회의 식사를 같이 했다는 것이다. 노경에 이른 부부는 건강하게 장수하고 있으므로 나는 그 숫자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증가하리라 예상한다.

 

- 2013, 등촌동에서

댓글 3
  • No Profile
    쑤우 13.06.01 23:28 댓글

    트위터에서 "마지막 한 문단은 막판에 올리기 전에 써서 덧붙였는데, 지금보니 뺄걸 그랬다싶기도 합니다." 라고 하셨는데

    처음에 식사 수를 계산하는 도입부와 호응되기도 하고 해피엔딩이라 저는 좋아요~ ㅎㅎ

    "첫번째는~ 알고 있다." 부분은 듀나 님에 대한 오마주 같은 문체로 느껴지네요 :)


  • No Profile
    곽재식 13.06.03 07:54 댓글

    제가 듀나 작가님 영향 받아 따라하는 것이 어디 한 두가지겠습니까. 여러 군데 또 보일 거라고 생각 합니다.


    해피엔딩이 좀 무리수 같아 보인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에게 빠질만한 이유나 복선, 분위기 깔기가 별로 많이 안 살아난 거 같습니다. 약간 더 쓸쓸하게 꾸미고, 지금 결말 없이 남자 주인공이 이렇게 넌지시 말은 했지만 여자 주인공은 별 대답은 없고, "이날 식사는 그냥 식사 한 번으로 끝난 것인지... 뒤에 또 어떤 이야기가 연결될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 분위기로 끝내는 게 원래 생각이었는데, 막판에 "그냥 한 문단 더 달자" 하면서 확 갖다 붙여 버렸습니다.

  • No Profile
    사각머리 13.09.29 00:31 댓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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