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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영 너의 낡은 캐주얼화

2012.05.25 22:4005.25


   


   
   장 여사는 종업원을 향해 손을 높이 들었다.
   “아가씨, 여기 뜨거운 걸로 커피 한 잔.”
   환하게 웃으면서 다가온 종업원은 가게 안쪽을 가리켰다.
   “안쪽에 있는 계산대에서 주문해주셔야 하는데요.”
   장 여사는 한숨을 쉬었다. 장 여사는 이런 커피숍이 싫었다. 몇 번 와 봤지만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주문도 안 받을 종업원을 대체 왜 두고 있는 걸까. 하지만 아들놈을 만나려면 어쩔 수 없다. 아들놈은 자꾸 무슨 대학교 근처로 오라고 했다. 그리고 대학교 근처에 있는 커피숍이라는 건 다 이 모양이다. 장 여사는 몸을 일으켰다.
   “뜨거운 커피 한 잔.”
   “커피, 어떤 종류로 하시겠어요?”
   “그냥 커피.”
   계산대에 서 있는 종업원은 장 여사를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린다.
   “그럼, 그냥 오늘의 커피로 드릴까요?”
   “그래요. 그렇게 해 주세요.”
   한참 컴퓨터를 두드리더니 종업원은 오늘의 커피 한 잔에 3500원입니다, 카드로 계산하시겠어요, 현금으로 계산하시겠어요, 를 묻는다. 장 여사는 지갑에서 오천 원 한 장을 꺼냈다. 종업원은 거스름돈 1500원 되시겠습니다, 라며 장 여사에게 천 원 한 장과 오백 원 한 개와 동그랗고 묵직한 플라스틱 덩어리 하나를 내밀었다.
   “진동이 울리면 가지러 내려오시면 돼요.”
   주문도 와서 시킬 뿐 아니라, 나올 때도 와서 받아가야 된다. 고개를 돌려 메뉴판을 봤다. 어떤 메뉴는 6500원까지도 한다. 이래놓고 6500원이나 받아먹다니. 장 여사는 혀를 찼다.
   문이 열리고 아들놈이 들어왔다. 투박한 발소리가 들렸다. 역시, 또.
   갈색 가죽으로 된 낡은 랜드로바.
   장 여사는 아들이 자리에 와서 앉을 때까지 랜드로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많이 낡아서 끝이 허옇게 드러난 랜드로바. 뒷축은 얼마나 닳았을까. 아들은 반갑게 웃었다. 장 여사는 아들의 얼굴을 보고, 랜드로바를 보고, 다시 아들의 얼굴을 봤다. 저번에도 이거 좀 그만 신으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했는데.
   “엄마, 오랜만이네.”
   장 여사가 입을 떼려는 순간 플라스틱이 윙 울렸다. 내가 갔다올게, 라며 아들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아들은 올해 마흔다섯이다. 적어도 랜드로바를 신고 다닐 나이는 오래 전에 지났다. 아들이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아들에게 선물했던 게 바로 랜드로바가 아니던가. 엠티나 가거든 신고 다니라고. 그걸 마흔다섯까지 신고 앉았다.
   아들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커피를 가져왔다. 장 여사는 김이 나는 커피를 아들의 발에 쏟고 싶은 걸 간신히 억눌렀다. 
   “내가 저번에 한 말은 완전히 잊어버렸냐? 돈 주면 신발 좀 사 신으랬지?”
   아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내젓는다.
   “아니, 그게, 엄마, 진짜, 이게 너무 편해서, 엄마,”
   “너 진짜, 이러면 돈 못 줘.”
   아들은 머리를 긁적인다. 아들의 티셔츠에 수염투성이 할아버지가 그려져 있다. 예순일곱 먹은데다가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장 여사가 알 만한 사람은 아니지만, 장 여사는 그 할아버지가 누군지 알고 있다. 칼 마르크스, 1800년대의 독일 혁명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말을 남긴 세기의 유명인. 아들이 이십오 년 동안 쫓아다니고 있는 그 남자. 생각해보면 마흔다섯에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아들이다. 무엇보다도, 지금 이 상황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아들이다.
   “엄마, 아무래도 내가 이번 달엔 돈이 좀 없을 거 같아서.”
   마흔다섯에 당당하게 용돈을 달라고 요구하면서도 얼굴 한 번 붉히질 않는다. 장 여사는 지갑을 꺼냈다. 뻔히 알면서도 장 여사는 봉투에 빼곡히 50만원을 넣어서 왔다. 아들이 어릴 때야 이다음에 크면 엄마 호강시켜달라고 허공에 떠도는 소리라도 해 봤지. 장 여사는 이제 별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신발 새로 사 신어.”
   “알겠다니까.”
   “그렇게 말하고 새로 안 사잖아.”
   “이번엔 진짜 꼭 새 신발 살게.”
   “네 나이에 맞는 신발이 따로 있는 거야.”
   “알겠어, 알겠어. 근데 내가 내 나이에 맞게 살고 있지도 않잖아?”
   아들은 하얗게 웃으면서 손을 내민다. 아들이 내민 손도 하얗다. 돈 봉투를 내밀다가 참고 있던 한숨이 밀려나왔다. 한숨과는 상관없이 돈 봉투는 아들의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지냈어. 잠은 잘 자?”
   “애인이랑 살아, 그냥.”
   아들의 애인은 아들보다 스무 살 가까이 어리다. 아들보다 돈도 잘 벌고 잘 나가는 여자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무슨 사진을 찍는 대학원 연구원으로 있다는데, 그걸 뭐 월급이라고 받겠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아들한테 종종 용돈도 주는 모양이다. 스무 살 어린 여자애한테 돈 받고서 그걸 또 신나라 쓰고 있는 걸 보자 하면, 장 여사는 참아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장 여사는 고개를 숙여서 흘끗 다시 아들의 신발을 봤다.
   코끝이 저렇게 바래면, 뭘 대거나 발라도 소용이 없다. 저건 새 신발을 사지 않으면 안 된다. 아들놈은 저걸 또 밑창이 떨어져나갈 때까지 신고서는 그 다음에 새 ‘랜드로바’를 사고야 말 것이다. 장 여사는 아들이 가져온 커피를 그제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썼다. 설탕도 프림도 안 넣은 커피를 3500원이나 받아먹다니. 장 여사는 다시 분개했다.
   
   장 여사가 제일 처음 아들에게 랜드로바를 사 줬던 건 이십오 년 전이었다. 장 여사는 아들한테 뭐 하나 잘 해 준 것도 없었다. 공부하라고 닦달할 시간조차 없었다. 아들 대학 등록금을 대라고 돈을 가져온 건 큰딸이었다. 아들은 이 나라에서 제일 좋다는, 서울에서 제일 크다는 그 대학 합격통지서를 쑥 내밀었다. 그때 장 여사는 울었다. 이제 고생할 것도 없었다. 좋은 대학교에 입학한 아들을 모두가 부러워했다. 장 여사는 집안을 이끌어갈 대학생 아들에게 뭘 사 줘야 할까 한참 고민했다. 장 여사는 숨겨둔 쌈짓돈을 꺼내서 백화점에 갔다. 백화점에서 고기 한 번 제대로 사 본 적이 없는 장 여사는 금강제화 코너 앞에서 발을 멈췄다.
   요즘 텔레비전에서 자주 나오던 그 신발이었다.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젊은 애들이 남녀가 섞여서 산을 오르는 광고였다. 태양이 좋다, 땅이 좋다, 발끝의 자유가 좋다, 랜드로바. 신발 속에서 아들이 배낭을 메고 산을 올라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했다. 아들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내내 운동화 한 켤레 뿐이었다. 아들한테 필요한 건 바로 이 신발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장 여사는 랜드로바를 샀다. 장 여사의 많지 않은 돈으로도 살 수 있었다. 역시 대학생들의 신발이었다. 장 여사는 품에 신발을 꼭 안고 집에 돌아왔다. 신발에서 책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집에 와서 랜드로바를 건네주면서, 장 여사는 다정하게 말했다.
   “공부 많이 해야지. 예수님이 말했듯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장 여사가 다시 그 랜드로바를 품에 안은 건, 아들이 2학년이 되던 해 여름이었다. 최루탄 연기는 삽시간에 매캐하게 온 거리를 뒤덮었다. 아들은 아버지와 싸우고 전날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들은 사회주의자로 살겠다고 소리를 질렀고, 남편은 빨갱이 호로새끼라고 아들에게 재떨이를 집어던졌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아들을 찾으러 나왔다가, 장 여사는 그 귀한 아들이 곤봉으로 얻어맞는 걸 보았다. 아들은 머리를 얻어맞고는 일어나지 못했다. 양쪽에서 경찰들이 아들의 팔을 꿰고서는 아들을 끌었다. 장 여사는 내 아들을 어디로 데려가는 거냐고 외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끌려가다가 아들의 신발 한 짝이 벗겨졌다. 장 여사는 닭장차들이 한참을 멀어지고 나서야 거리로 나섰다. 아들의 신발은 하얀 거리에 덩그러니 버려져 있었다. 장 여사는 아들의 신발을 끌어안고 울었다. 책 냄새 대신 최루탄 냄새가 났다.
   장 여사는 랜드로바 한 짝을 안은 채 성당으로 달려갔다. 의자에 앉을 겨를도 없이 주저앉아 울면서 기도를 했다. 제발 아들이 살아 돌아오게 해 달라고, 돌아와서 다시 이 신을 신게 해 달라고 했다. 지금껏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면서 살아왔는데, 딱히 좋은 꼴 본 것도 없는데, 제발 이번 한 번만 살려주시면 뭐든 하겠다고 기도했다. 아들은 돌아왔고, 다시 신을 신었다. 장 여사는 신께 감사하며 아들을 끌어안았다. 그 때는 설마 지금까지 저 신발을 신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아들은 전화를 받더니만,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나가봐야 할 거 같은데, 엄마.”
   3500원짜리 커피가 아까워서 장 여사는 아들과 함께 일어나지 못했다. 아들이 나가자 다시 왁자지껄한 대학생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장 여사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낡은 소파가 부서질 듯한 소리를 냈다. 리모컨을 찾아서 텔레비전을 켰다. 요즘 한창 주목받고 있는 자동차 공장의 파업 소식이 또 나오고 있었다. 아들이 만든 정치단체의 깃발이 화면 한 구석에 잡혔다. 경찰이 곧 진압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아나운서가 말했다. 열심히 화면을 보다가 장 여사는 깨달은 듯이 채널을 빠르게 돌렸다. 대체 왜 장 여사가 저 공장 파업 소식을 알아야 한단 말인가. 저녁시간대에 하는 드라마가 나왔다. 아주 커다란 집과, 결혼을 반대하는 ‘사모님’ 엄마가 나왔다. 그녀는 아들에게 호통치고 있었다.
   엄마 말이 말 같지 않니?
   
   라고, 장 여사는 말을 내뱉을 뻔했다. 파업 중인 공장 앞에는 여러 천막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인 앞에 단상이 서 있었다. 소개를 받은 아들이 쑥 사람들 앞에 섰다.
   “사측이 제시한 협상안은 아시다시피 저들의 최종안에서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저들의 경영실패, 저들의 방만함, 저들의 부패를 어째서 노동자들이 책임져야 합니까. 고통분담을 얘기하지만, 우리들은 이미 충분히 고통전가를 당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장 여사는 아들의 신발을 보고 있었다. 여전히 하얗게 바래진 그 놈의 랜드로바. 안 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안 산 걸 보니 분통이 터졌다. 대체 어제 준 50만원은 어느 구멍으로 먹은 건지.
   장 여사한테 문자가 온 건 어제 잠들기 직전이었다. 장 여사는 아들이 만든 정치단체의 회원이다. 그 정치단체가 국가에서 지정한 이적단체에서 벗어났을 때 장 여사는 슬쩍 회원가입을 했다. 그 단체에서 오는 전화에는 매우 무뚝뚝하게 대답했고, 그 단체에서 주최하는 모임에는 단 한 번도 간 적이 없지만 가끔 집회를 홍보하는 문자가 오면 슬그머니 찾아가보곤 했다. 10년 전에도 아들은 랜드로바를 신고 사람들 앞에 있었다. 사람들은 아들의 목소리에 환호했고, 시꺼먼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경찰들 앞에서 피를 흘리면서 부딪혔다. 달라진 건 없었다. 단지 아들의 얼굴에 주름살이 늘고, 그만큼 장 여사의 얼굴에도 주름살이 늘었을 뿐이었다.
   장 여사는 몸을 홱 돌렸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대체 여길 왜 왔나 싶었다. 빠른 걸음으로 그 장소를 빠져나오려다가 들어오는 입구에서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는 젊은 여자를 발견했다. 하얀 얼굴에 까만 머리를 아무렇게나 대충 묶은 여자. 키가 크지도 않고 딱히 예쁠 것도 없었다. 아들의 연인이었다.
   아들이 결혼했던 여자도 저런 여자였다. 까만 머리를 아무렇게나 대충 묶고 청바지를 입은 여자였다. 아들과 함께 혁명에 몸을 바치겠다고 말했고, 장 여사는 그녀가 미친년이라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미친년은 아니었다. 아들이 5년 형을 받고 감옥에 들어가고, 3년쯤 지났을 때, 그녀는 이혼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들의 대학 선배와 다시 결혼했다. 제대로 된 여자였다. 제대로 된 여자가 저 등신 옆에 붙어있을 리가 없지. 장 여사는 아들의 연인을 다시 보았다. 하얀 운동화를 신고 있다. 저 여자도 정신 차리고 나면 아들을 떠날 것이다. 아들 역시 그건 잘 알고 있을 텐데. 여자는 장 여사에게 유인물을 내밀었다.
   장 여사는 유인물을 받았다.
   “운동화만 신어요?”
   여자는 잠깐 멍한 표정으로 장 여사를 보다가 미소지었다.
   “가끔 힐도 신어요.”
   “젊은 아가씨가 왜 이런 걸 해요, 힘들게. 파업이야 저 사람들 일이지.”
   “아니에요. 제가 사는 세상일이에요. 그건 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죠.”
   장 여사는 갑자기 왜 이 여자한테 말을 걸었나 싶었다. 아들이 하는 말이랑 딱히 다를 게 없는 말이다. 장 여사는 고개를 숙이고 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넌 내 아들을 버리면 그 운동화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만, 난 그럴 수가 없지. 장 여사가 그 어머니란 사실을 알게 되면 여자는 뭐라고 대답할까. 장 여사가 아들에게 준 50만원은 어디로 갔을까. 아들의 허옇게 까진 랜드로바가 눈에 밟혔다.
   토요일, 장 여사는 성당반 모임에 갔다. 이번엔 세라피나의 집이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고소한 국물 냄새가 풍겼다. 장 여사는 뭐 이렇게 고생해서 했어, 라며 부엌에 들어갔다. 양파에 대파에 사과까지 들어간 국수 국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정갈하게 담아놓은 고명도 보였다. 다음 주가 장 여사 차례였다. 대체 이번엔 뭘 해야 하지. 장 여사는 속으로 좀 짜증이 났지만, 너무 맛있겠다며 손뼉을 쳤다. 벨이 울렸다. 신부님이었다. 반갑게 문을 열고 장 여사는 환하게 웃으려……다가 놀랐다. 약간 늦게 오신 신부님은 웃으면서 랜드로바를 벗었다. 장 여사는 신발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끝내 한 소리 하고 말았다.
   “신부님, 그 신발 보기 안 좋아요.”
   “왜요? 참 편하지 않습니까?”
   “신부님께서 무슨 랜드로바에요. 제대로 된 구두 신고 다니셔야죠.”
   신부님은 가라앉은 호수처럼 그윽한 표정으로 장 여사를 건너다보았다.
   “힐데가르데, 하느님께선 신발을 보지 않으신답니다.”
   멋쩍게 고개를 돌리니, 세라피나와 가타리나가 다소곳하게 서 있었다. 장 여사는 정말 재수가 없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이게 다 아들놈 때문이었다.
   자유기도가 끝나고 나서 가타리나가 먼저 운을 뗐다.
   “요즘엔 정말 시끄럽네요, 그렇죠?”
   곧 도지사 선거였다. 바깥에선 계속 선거운동차들이 음악을 틀어대고 있었다. 그리고 도지사 후보 한 사람이 주목받고 있었다. 전 도지사를 밀어낼 대항마로, 사람들은 개혁을 주도할 사람이라면서 그 남자를 응원했다. 아들놈의 대학 선배였다. 아들놈과 함께 골방에 틀어박혀서 마르크스니 레닌이니 호치민이니 하는 책들을 읽던 후줄근한 놈들 중 하나였다. 신부님이 반갑게 고개를 들었다.
   “이 땅의 생명들을 다 죽이면서 강바닥 들어내는 공사는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꼭 투표해야죠.”
   막달레나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상관없나 봐요. 이건 무슨 공산주의도 아니고.”
   장 여사는 흠칫 놀랐다. 공산주의. 신부님은 전부터 정부의 강 공사 계획에 완강하게 반대한다고 말해 왔다. 아마 아들의 대학 선배에게 투표할 생각인가보다, 장 여사는 생각했다. 하지만 아들은 잘 나가는 선배를 지지하지 않을 터였다. 아들이 몇 년 전에 쓴 글을 떠올렸다. 도지사 후보에 대해 아들은 신랄하게 썼다. 그는 우리를 배신했고 다시 또 배신할 거라고. 그리고 아들이 그 선배처럼 국회 의사당에 들어가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일은 영영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장 여사는 삼 년 동안 며느리였던 여자를 생각했다. 그가 도지사가 되면 텔레비전에서 그 여자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그 선배도 그와 함께 도지사로 붙는 남자도 아들과 같은 대학 출신이었다. 오래전에 아들이 있는 그 바닥을 떠나 온 사람이기도 했다. 장 여사는 텔레비전에서 그들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김치국물, 열무, 고추장, 호박나물에 비벼 밥을 먹었다. 아까 세라피나의 집에서 국수를 먹기는 했지만 계속 속이 허했다. 고추장을 더 많이 넣었다. 비빔밥은 달큰했다. 그러나 눈물이 펑펑 쏟아지게 매웠다. 아들의 대학 선배는 화면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함께 길에서 돌 던지던 사람들 아닙니까, 다시 같이 합시다, 같이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목에는 파랗게 반짝이는 넥타이가 걸려 있었다. 저 넥타이 아래에 있는 게 설마하니 랜드로바는 아니겠지. 그만큼 반짝이는 검은 구두일 것이다. 언젠가 저 남자는 국회에 청바지를 입고 출근했었다. 아들이 돌을 집어던졌던 사람들이 그를 비난했다. 그는 청바지가 뭐가 어떻냐는 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청바지를 입는 아들은 그가 ‘우리’를 배신할 거라고 했다. 그리고 파란 넥타이를 한 저 남자는 이제 ‘이건 무슨 공산주의도 아니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장 여사는 텔레비전을 끄고 밥솥에서 밥을 더 퍼왔다.
   
   장 여사는 살그머니 카운터에 들어섰다. 노래방은 낮이면 뻔하게 한산한데도 남편은 굳이 10시에 문을 열고 카운터 옆방에서 잠이 들었다. 장 여사는 카운터를 지키는 대신 카운터에서 어제 번 돈을 슬쩍했다. 그 돈으로 백화점에서는 까만 구두가 든 빨간 상자를 살 수 있었다. 장 여사는 상자를 들고 아들을 찾아갔다. 여전히 그 곳에는 무대가 있었고, 사람들이 앉아서 무어라 소리를 질렀다. 무대 위에선 어떤 사람들이 시꺼먼 옷을 입고 춤을 췄다. 춤이라기보다는 몸부림에 더 가까울까. 사람들은 하늘을 향해 손톱을 치켜세웠다.
   아들은 천막 속에서 누군가에게 귀엣말을 하고 있었다. 아들의 랜드로바는 천막 밖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들은 여전히 후줄근한 티셔츠 차림이었다. 장 여사는 차마 천막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들에게 전화를 해서 잠깐 나오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장 여사는 휴대폰을 꺼냈다. 그때 하얀 얼굴의 여자가 잰 걸음으로 천막을 향해 달려왔다. 장 여사는 그 여자보다 잰 걸음으로 날쌔게 나무 뒤에 숨었다. 여자는 아들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장 여사는 차마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빨간 상자를 그대로 들고 장 여사는 몸을 돌렸다. 그 와중에도 무대 위에선 누군가가 아들 같이 후줄근한 차림으로 노래를 하고 있었다.
   나의 낡은 캐주얼화 뒤축이 많이 닳았지
   나의 낡은 캐주얼화 색도 많이 바랬어
   나와 함께 많이 다녔지
   오랫동안 많이 다녔어
   그냥 너를 노래하고 싶었을 뿐이야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장 여사는 아들에게 전화를 걸까말까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닫았다. 
   
   아들이 천막을 치고 있던 그 자리에는 푸른 옷을 입은 경찰이 떼로 들어섰다. 경찰이 들어섰을 때부터 장 여사는 노래방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계속 봤다. 24시간 동안 뉴스만 해 주는 케이블 채널은 꼼꼼하게 상황을 보여줬다. 화면은 경찰이 들어섰다는 이야기, 옥상에서 남은 노동자들이 저항하고 있다는 이야기, 사지가 들려서 떠메어져 나오는 사람들을 간간히 보여주었다. 아나운서의 차분하고 맑은 목소리가 깔렸다. 노조는 여전히 사측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있으며, 서로의 입장을 조율하지 못하고…… 장 여사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언젠가 경찰에게 질질 끌려가던 대학생 아들처럼 보이는 한 사내애가 몸부림을 치면서 끌려 나갔다.
   넥타이를 허리춤에 매거나 머리에 맨 남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개중에 어떤 남자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어쩌질 못하고 넥타이를 머리에 맨 남자를 부축하고 있기도 했다. 방금 전에 소피를 보고 왔는지 바지춤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남자도 있다. 장 여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제일 귀찮은 종류다. 역시 술에 취해 보이는 한 남자가 냉장고에서 맥주를 쓸어 모았다.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남자가, 장 여사에게 물었다.
   “얼마에요?”
   “맥주까지 합하면 3만원이요.”
   “아가씨들 부르면요?”
   그럼 그렇지. 장 여사는 수화기를 들었다.
   “몇 명이요?”
   “어…….”
   남자가 망설이던 차에 옆에서 넥타이를 머리에 맨 남자가 소리쳤다.
   “다섯 명, 다섯 명!”
   장 여사는 번호를 눌렀다. 아가씨들은 10분이면 온다고 했다. 오면 들여보내 줄테니 먼저 들어가라고 하자, 텔레비전을 보던, 남자가 여전히 지퍼를 열어둔 채 말했다.
   “저, 민주노총 개새끼들 때문에 다 안 되는 거야. 그럼 어쩌라는 거야, 씨발놈들이…….”
   장 여사는 대답했다.
   “6번 방 들어가세요.”
   다시 텔레비전을 보았다. 헬리콥터가 공중에서 물을 뿌려대고 있었다. 옥상에 있는 사람들이 무너졌다. 아들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 장 여사는 화면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2번 방 문이 열렸다. 짧은 치마를 입은 여학생이 뽀르르 화장실로 올라갔다. 6번 방문이 열렸다. 까맣게 빛나는 구두가 비틀거리면서 장 여사에게로 다가왔다.
   “아줌마, 아가씨들 언제 와?”
   “10분 안에 온다고 했어요.”
   올라갔던 여학생이 도로 내려왔다. 몸을 비껴서 남자를 지나치려는 순간, 남자가 여학생의 손을 잡았다.
   “아, 이제 오면 어떻게 해, 계속 기다렸잖아. 저 쪽 방이야.”
   “네?”
   여학생은 손을 빼려고 했다. 남자는 여학생을 계속 붙든 채 6번 방을 향해 걸어갔다.
   “아가씨 귀엽네. 아가씬 나랑 놀자. 응? 다른 언니들은 어디 갔어?”
   “저……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
   장 여사는 남자의 손에서 여학생을 떼어내려고 했다.
   “이 분은 손님이세요. 손님, 오해하셨어요. 아가씨들 아직 안 왔어요.”
   남자는 여학생의 허리를 끌어안으면서 장 여사를 떠밀었다.
   “뭐야! 아까 돈 다 냈잖아! 여기는 내 마음에 드는 아가씨 고르지도 못하나!”
   장 여사가 넘어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여학생이 비명을 질렀다. 2번 방 문이 열렸다. 장 여사가 도로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하얀 티셔츠를 입은 남학생의 주먹이 술에 취한 남자의 뺨에 꽂혔다. 여학생은 계속해서 비명을 질렀다. 얻어맞은 남자는 입가가 터진 채 뭐야 이 새끼는, 이라고 주절대며 다시 주먹을 돌려주려고 엉거주춤 섰다. 이번엔 남학생의 발길질이 남자의 복부에 꽂혔다. 남자는 크헉, 비명을 질렀고, 6번 방 문도 열렸다. 이번에도 여학생이 비명을 질렀고, 6번 방 남자들이 술에 취한 남자에게 달려들어 끌어냈고, 2번 방에 있던 또 한 명의 남학생이 뭐야, 뭐야를 주절대며 나왔다. 여학생은 이제 울기 시작했다. 6번 방 남자들이 뭐야, 뭐야를 날카롭게 외쳤다. 그 때 아가씨들이 들어왔다. 착 달라붙은 원피스에 빛나는 하이힐을 신은 아가씨들이 뭐야, 뭐야라고 말했다. 술에 취한 남자가 말했다.
   “이빨 부러졌어!”
   차분한 목소리로 아나운서가 말했다.
   “공장 안에 노조원이 이제 한 명도 남지 않았습니다. 경찰의 진압은 종료되었습니다.”
   장 여사는 경찰서에서 그들이 합의하는 걸 보고 돌아왔다. 다행히 아가씨들을 부른 건 경고로 넘어갔다. 장 여사는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아들은 전화를 받았다.
   “넌 괜찮니?”
   “응, 괜찮아.”
   “도지사선거 말인데…… 누구를 뽑아야 될까. 네 선배는 싫다고 했지?”
   “그 사람보다는, 같이 나온 그 여성을 찍는 게 낫다고 생각해.”
   그 여자는 장 여사도 잘 알고 있었다. 집회현장에 종종 나와서 발언도 하고, 가끔은 경찰들 앞에서 드러눕기도 하던 여자였다.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할까 생각하다, 장 여사는 입을 다물었다.
   “그치만 그 여자가 도지사가 되어도 넌 또 그 여자 욕할 거지?”
   아들이 웃었다.
   “아마 그렇겠지.”
   “그럼 넌 누가 대통령이 되면 좋을 거 같니, 대체. 투표는 왜 해?”
   “난 엄마가 대통령이 되면 좋을 거 같은데.”
   장 여사는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처음 아들이 교도소에서 나왔을 때, 장 여사는 두부를 사들고 교도소 앞에 갔다. 아들은 영치되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여전히 낡은 랜드로바를 신고서. 두부를 먹으라고 내밀자, 아들은 웃었다.
   “두부를 먹는 건 좋은데, 아마 또 들어갈지도 몰라.”
   장 여사는 날카롭게 말했다.
   “그러면 두부 먹을 필요 없지. 내놔.”
   아들은 순순히 두부를 내놓았다. 장 여사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왜 그러는데!”
   아들은 오 년 전에 입고 들어갔던 지저분한 셔츠 깃을 쭉 폈다. 아들의 좁고 구부정한 어깨는 펴봤자 여전히 없어 보였다. 아들은 꾹 쥔 주먹을 가슴에 가져다 댔다. 교도소 앞은 서늘했다. 장 여사는 사막 냄새를 맡았다. 차가운 모래바람이 불었다. 아들은 주먹을 가슴에서 떼지 않은 채 덜덜 떨었다. 장 여사는 코트를 가져올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아무도 없는 데에서 갑자기 아들이 냅다 소리를 쳤다.
   “엄마, 세상이 이상하지 않아? 엄마는 이대로 괜찮다고 생각해?”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얼른 가자, 코트 사줄게.”
   “난 코트를 살 수 있지만, 서울역 계단에선 누군가 또 코트도 없이 얼어죽을 수도 있어!”
   “그래서 코트 안 입을 거야?”
   아들은 갑자기 말을 뚝 멈추더니 장 여사를 내려다봤다.
   “누구는 집에서 코트가 놀고 있잖아. 누구는 한 벌도 없고.”
   장 여사는 아들이 감옥에서 미친 것만 같았다.
   “네 코트 대신 주겠다고?”
   “그럼 한 사람만 따뜻하잖아. 난 다들 자기 코트는 자기가 가졌으면 좋겠다고.”
   아들은 이제 이를 딱딱 부딪히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 주제에 어깨는 어떻게든 펴 보겠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지금 얼어죽을 판에 무슨 서울역 계단을 떠올리나 싶어서, 장 여사는 어이없어 하다가, 눈물이 터졌다.
   “이 미친 놈아, 어? 네가 감옥가면 누가 코트 생기냐? 어?”
   장 여사가 콧물을 흘렸다. 아들은 장 여사를 확 끌어안았다. 아들은 여전히 떨고 있었다. 차가운 아들의 품에서 오래된 옷 냄새가 났다.
   “안 생길지도 모르는데, 난 안 생긴다고 생각할 수 없어. 엄마 말대로, 예수님도 그랬을 거야.”
   아들이 장 여사의 어깨를 잡았지만, 장 여사는 고개를 들어 아들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아들의 랜드로바는 푸석해보였다. 장 여사는 성당 달력에서 보았던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생각했다. 예수님의 맨발은 빛이 났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가지 못하고 물에 빠져 있었다. 예수님의 얼굴도 빛이 났다. 아들의 랜드로바에서 빛이 날 리가 없었다.
   시내로 나오자마자 코트를 샀다. 제일 싼 코트로 몸을 두른 아들을 데리고 집에 돌아오던 길, 버스 안 라디오에서 광고가 나왔다.
   
   나를 봐 내 작은 모습을 너는 언제든지 웃을 수 있니
   하지만 때론 세상이 뒤집어진다고 나 같은 아이 한 둘이 어지럽힌다고
   변화, 난 두렵지 않아
   모두가 똑같은 손을 들어야 한다고 그런 눈으로 욕하지 마
   난 아무 것도 망치지 않아, 난 왼손잡이야
   감각 쿠데타, 예, 랜드로바
   
   아들은 장 여사의 어깨에 기댄 채 곤히 잠이 들어 있었다.
   
   파업은 끝났다. 뉴스에서는 노조가 사측과 겨우 타협점을 찾았다고 했지만, 몇몇 사람들이 교도소로 갔다. 아마, 랜드로바를 남겨뒀으리라. 아들은 파업에 대해서 평가하는 길고 긴 글을 썼다. 장 여사는 그 글을 읽기가 귀찮아서 관뒀다. 아들이 쓰는 글을 읽으려고 시도해 본 건 아주 오래 전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장 여사한테는 너무 어려웠다. 아들이 찍으라고 말하던 여자 후보는 파업이 시작된 초기에는 그 파업 현장에서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파업이 끝나던 날 그 후보는 후보명단에서 빠졌다. 아들의 대학 선배와 손을 맞잡고 카메라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선거 날 사흘 전이었다. 장 여사는 계속 뉴스를 보았다. 사실 그거 말고 별달리 할 일도 없었다. 아들은 후보명단에서 빠진 여자 후보에 대해서도 뭐라고 글을 썼다. 장 여사는 그 글도 읽지 않았다. 집에 날아 온 선거 공보물에는 여전히 그 여자의 사진이 있었다. 장 여사는 꼼꼼히 그 여자의 프로필을 읽어보았다.
   국가보안법으로 잡혀갔던 경력을 읽으면서, 장 여사는 그 여자의 어머니를 생각했다. 두부를 사 갔을까. 아들의 대학선배와 손을 맞잡고 찍은 사진에서 그 여자는 하얀색 구두를 신고 있었다. 
   장 여사는 투표를 하러 갔다. 아침 일찍 온 사람들은 장 여사 나이 또래의 사람들이 꽤 있었다. 장 여사 앞의 노인이 주민등록증을 내놓았다. 장 여사를 보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장 여사는 멋쩍게 눈인사를 했다. 노래방에 왔던 사람인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투표용지에는 사퇴한 여자의 이름과 아들의 대학선배 이름이 둘 다 있었다. 장 여사는 도장을 들고 가만히 고개를 갸웃거리다 아들의 대학선배 이름 옆에 도장을 찍었다. 
   투표장에서 나오자, 투표장 앞 벤치에 아까 그 노인이 앉아있었다. 노인이 장 여사를 불러세웠다. 장 여사는 다시 노인을 돌아보았다.
   “우리 같은 나이 대에는 투표하러 나오기 쉽지 않은데 수고하셨수다.”
   “아…… 선생님도 수고하셨습니다.”
   “요즘엔 빨갱이들이 자꾸 설쳐서 집에서 쉬려도 도무지 쉴 수가 없단 말이우.”
   노인은 껄껄 웃었다. 장 여사는 3초 정도 망설이다가 같이 웃었다.
   밤 여덟 시부터 장 여사는 텔레비전 앞에 바싹 붙어 앉았다. 감질나게 숫자가 올라갔다. 아나운서들은 끊임없이 전국 각지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당사에 앉아있는 아들의 대학선배가 나왔다. 5%가 개표되었을 때, 아들의 대학선배는 압도적인 표차로 상대를 앞지르고 있었다. 아들의 대학선배는 유쾌하게 말했다.
   “그만큼 개혁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이 큰 거겠죠. 하지만 승부는 더 지켜봐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10%, 20%, 30%가 개표될 때까지도 그는 계속 우위를 지켰다. 장 여사는 텔레비전 앞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새벽 두 시에 다시 눈을 떴을 때, 여전히 텔레비전에선 개표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아들의 대학선배는 2만표 차로 뒤지고 있었다. 개표는 83%가 진행되었다. 상대 후보의 이름 앞에 ‘당선예상’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장 여사는 다시 눈을 떴다. 95%까지 개표되고, 상대 후보의 이름 앞에 ‘확정’이라는 글자가 떴다. 새벽 다섯 시였다. 첫차가 다니기 시작할 시간이었다.
   장 여사는 옷을 갈아입었다. 옷장 안에 넣어두었던 빨간 상자를 꺼냈다. 다시 상자를 열어보았다. 까만 구두는 여전히 반짝였다. 장 여사는 빨간 상자를 품에 안고 신발을 신었다. 버스가 다니고 있었다. 아들이 자취하는 그 애인의 집까지는 버스를 타고 20분. 장 여사는 이십여 년만에 처음으로 아들의 자취방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아들의 자취방은 생각보다 찾기 쉬웠다. 반지하 방에는 철창 하나 달려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아들은 창문을 훤히 열어놓고 잠들어 있었다. 장 여사는 방충망을 열었다. 삐그덕 소리가 살짝 났다. 아들은 깨지 않았다. 장 여사는 창문으로 발을 내딛었다. 떨어지면서 빨래바구니를 밟았다. 장 여사는 휘청거리며 넘어졌다. 빨래 바구니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아들이 신음하며 몸을 뒤챘다. 장 여사는 숨을 멈췄다. 아들은 여전히 깨지 않았다. 아들은 팬티만 입고 몸을 모로 둔 채 잠들어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아들의 애인은 보이지 않았다. 장 여사는 신발을 벗고 발끝으로 걸었다. 침대 옆으로 떨어진 이불을 끌어다가 아들의 배를 가려주었다. 신발장이랄 것도 없는 작은 현관에, 아들의 랜드로바가 있었다. 장 여사는 빨간 상자를 열어서 구두를 꺼냈다. 빛이 거의 없는 방에서도 구두는 반질반질 빛났다. 장 여사는 아들의 랜드로바를 집어 들었다.
   조심스럽게 아들의 현관문을 열었다. 문이 열렸다. 장 여사는 현관문 밖에 서서 다시 구두를 내려다봤다. 후줄근한 운동화 두 켤레 속에서 구두는 아름답게 빛났다. 푸르스름하게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장 여사는 가만히 현관문을 닫았다. 삑,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완벽한 성공이었다. 장 여사는 소리를 지를 뻔한 걸 꾹 참았다. 하지만 날 것만 같은 발걸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날듯이 계단을 뛰어올랐다. 그리고 계단 위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하얀 얼굴의 여자를 맞닥뜨렸다.
   여자는 담배를 물었다가, 입에서 떨어뜨리고는, 멍하니 장 여사를 응시했다. 그리고는,
   “어…….”
   라고 운을 떼었다. 장 여사는 랜드로바를 떨어뜨렸다. 랜드로바 한 짝이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하얀 얼굴의 여자는 랜드로바를 보더니 다시 한 번
   “어…….”
   라고 말했다. 장 여사는 남은 랜드로바 한 짝을 품에 안고 달렸다. 버스정류장이 너무 멀었다. 어디선가 새벽닭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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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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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윈 12.05.26 02:48 댓글 수정 삭제
    이 소설을 쓴 건 2010년이에요. 09년 쌍용차 투쟁의 기억으로 쓴 소설입니다. 대한문 앞의 분향소가 쓰레기처럼 쓸려간 걸 보고,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그렇게 일어난 어떤 전쟁들에 대해 생각하면서 다시 꺼내서 여러분 앞에 펼쳐놓았습니다.
  • No Profile
    bluesigne 12.05.26 15:32 댓글 수정 삭제
    언젠가 이전에, 작가님의 소설들에 대해 촌평하면서 한 마디로 "거칠다"라고, "당신의 다른 수필이나 르포가 더 나은 것 같다"라고 말했던 것들을 모두 완전히 철회합니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안에서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으로 들여다 보았는데도 코 끝이 찡한, 눈물이 은근하게 맺히는 느낌을 받으면서 스스로도 적잖이 놀랐습니다. 아마도 조금 더 빠져들어 읽을 수 있었던 곳에서였다면, 울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이 소설, <너의 낡은 캐주얼화>를 조금 더 일찍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면, 저는 더 일찍 작가님의 팬이 되었을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몇 년 만에 무언가를 읽고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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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망니 12.05.28 10:09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 No Profile
    12.06.06 12:32 댓글 수정 삭제
    이번에도 정말 잘 읽고 갑니다.
    이념을 쫒는것에 대한 대가와 이념과 현실의 괴리, 주위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
    한번살다 가는인생 한번쯤 목숨걸고 싸워도 보고싶지만 현실의 장벽은 생각보다 높은것 같습니다.
  • No Profile
    곰냥이 12.07.07 18:52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현실도 잘 읽혀지고...그 안에서의 사람들의 예민하면서도 짠한 감정들이 참 좋네요. ㅠㅠ
  • No Profile
    앤윈 12.07.24 22:32 댓글 수정 삭제
    bluesigne/ 격찬 감사드립니다 ㅜ_ㅜ

    도망니/ 헉, 누군가가 죄책감을 느끼길 바라진 않았는데!;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꽁/ 현실의 장벽이 높으니까 '현실'이겠죠. 아마 그래서 소설도 있는 걸테고요.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곰냥이/ 고맙습니다!
  • No Profile
    rock 12.11.07 22:54 댓글 수정 삭제
    멋진 작품입니다. 가슴에 남네요.
  • No Profile
    앤윈 12.11.28 04:25 댓글 수정 삭제
    rock /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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