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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빈 고양이비

2007.11.30 23:1511.30

                               공기가 모든 것이야. 공간이 잘려나간 채 붕 떠 있지. 독립한다는 것은 고개를 돌린다는 일이야. 그렇지. 나를 당신에게서 떼어내어 우리가 밖이고 안이며 이쪽이고 저쪽인 양 굴기 시작하겠다, 는 약속이야.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지. 날개가 둥글게 세상을 감싸. 날아오르는 법은 간혹 둥글고 가끔 사납고 때로 신경질적이야. 그래서 나는 이상해지기로 했지. 다른 것들을 밀쳐내는 음악을 들으며 안쪽으로 한없이 모여들기만 하는 고양이들과 함께 홀로, 여기 뭉쳐 흘러나오기로 했어. 탄생은 자발적인 일이야. 그러나 자발적인 거라는 거, 대체 뭘까. 그거, 이거, 저거, 당신들이 생각하는 "스스로 행동해!" 라는 거, "현실을 바라봐!" 라는 거……. 하지만 그 "당신들" 역시 현실의 결과만을 붙잡고 집착할 뿐 그 이유에는 고개를 돌리지. 이거에서 저거로 간편하게 옮겨 가. 세상의 현실이 끔찍한 걸 인정해야 어른이라고 떠들면서 정작 그 끔찍함의 이유는 무시하지. 당신의 세상이 다른 세상들을 흡혈하여 피어났다는 거 말이야. 그래서 정상적인 세포라고 스스로 믿는 세포 중에 나처럼 이상한 것들이 태어나는 거야. 이상하다고, 이상하다고 하지, 어째서, 어디서 이런 게 나왔을까 하지. 들판 한가운데 다 낡아 쓰러져 가는 집을 방문한 적이 있어. 깨진 유리창이 거미줄처럼 흰 선을 내뿜었어. 그 찢긴 상처를 토해내듯. 푸르고 희고 질린, 병색 완연한 빛이 투명한 유리의 상흔 위로 피처럼 흘렀고…….
  영혼이 깨지는 거, 쉬워. 수요일이었어. 학교에서 막 돌아온 참이었지. 깨진 술병이 나를 끌어안았어. 할머니의 유품인 푸르고 부드러운 꽃병의 입술 밖으로 붓꽃 늘어지던 곡선처럼 예쁘게.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가족이던 사람이 악마가 됐어. 손가락 끝으로 유리 조각 같은 피가 뭉쳐서 아래로, 아래로, 더 깊이, 종소리 같은 울림을 퍼뜨리며. 크리스탈 메스, 코카인, 엑스터시, 술, 코카인, 엑스터시, 술, 병, 판도라. 남은 건 불확실함뿐. 유리가 뱃살 위에서 제멋대로 흘렀지. 피가 솟고, 식고, 쏟아지고 삭아 부서지고 쓰고 어떻게 보면 달기도 하고. 세상이 한 꺼풀 벗겨져 나가. 마룻바닥에 쓰러진 내 몸, 그러나 내 몸이 아닌, 내 몸 아래서부터 랩이 벗겨져 나가듯, 피스타치오 껍질 나누어지듯, 토끼를 죽여 그 가죽을 벗기듯, 살며시. 그 사람이 더는 기억나지 않아. 어쨌든 그렇게 모두가 죽었지. 유리 조각 끝을 타고 토네이도가 쏟아지고 마녀가 갑자기 죽고 세상이 갑자기 움직이고, 어지럽도록 빠르게 눈부시게.
  이상한, 살인자가 흘리는 눈물에 젖는 이상한 시체. 때는 여름이고 날씨는 비구름이라 후덥지근하고 살갗 끈적해. 조금 전만 해도 샛노랗게 생생하던 목소리가 그저 포기하고 입술 곁으로 몸을 누이지. 회색 테이블보 위로 붉은 유리 납작하게 깔리고, 눌리고, 다시 한 번 밟혀 납작해지고…… 좀 더 깊이, 끝없이, 이 손가락 끝이 내 죽은 몸에 닿지 않을 때까지, 그 시간이 마침내 환히 열리며 나를 심장 끝까지 부수어줄 때까지. 이것이 최선이었어. 이상도 하지. 알고 있었어. 죽으면서도 알 것 같았어. 그 사람에게는 나를 죽이는 일이 최선이었어. 가장 고귀한 선함. 살해가 선하다니, 그런데 이것이 온몸으로 나를 뒤덮는 선이라니, 거꾸로 내게서 흘러나가는 이것은 그럼 무얼까. 다른 신이 여기 있어. 교회가 건축되는 중이야. 죽음의 골격 사이로 제단이 올라서고 열두 가지 보석이 깔리고 성소가 세상으로부터 격리돼. 가위 닫기고 열리는 소리. 실 끊기는 소리. 죽음의 삶이 시작되는 소리. 미스터리. 마일즈. 사바스. 니치. 환한 어둠. 눈부신 끝. 붉은 천사. 검은 고양이. 안개. 들판에 드러누운 풀잎 사이로 일일이 지나가는 바람과 물기와 맺히는 습기와 광채와 이상한 신의 목소리. 책가방이 식탁에서 거실 바닥으로 낙하하며 토해내는 공책, 필통, 에디가 오늘 수업 중에 몰래 던져 온 쪽지, 사탕 껍질. 애니가 엄마 화장대에서 몰래 집어 온 립스틱, 붉던. 혀끝에 자글자글하던 이상한 맛. 거울 너머로 철창처럼 견고히 쿵, 쿵, 날아와 쌓이던 벽. 세상. 거울의 네모난 틀 바깥으로 하얗게 멀어지던 소리. 지워지던 얼굴. 붉게 남은 입술. 그때에도 어떠한 이상한 신이 있었어. 내 손가락과 애니의 손가락, 립스틱 끝과 뚜껑과 립스틱 뚜껑을 열고 닫을 때 나던 똑, 똑, 멋진 소리. 성찬식. 찬송가. 주기도문. 비명. 이상한, 도망치던 화장실벽, 우리는 웃었고    배를 붙잡고        그때는 꼭 세상이 온전한 것만 같았고 마치             금색으로, 온통 사글사글거리며 떨어지던

  흙. 둔한 시체 위로 떨어지던 검고 노랗고 붉고 다급한 먼지. 담배 연기는 위로 올라가고 술병은 아래로 떨어지고 유리 조각 또 태어나고 태어나고, 숨가쁜 삶 속으로 태어나고 부서지고, 바람 속으로 흘러내리는 웃음, 아니 울음소리, 아니 흐느낌, 아니 오래전 너머로 길게 이어지는 기억, 그래 누군가 저 사람을 떠났었지. 실수로 떨어뜨리는 식칼처럼 사람을 잘라 먹는 이별. 저녁 식사로 식탁에 올라오는 상처. 덩어리. 응고되는 호흡. 흐름의 석화.

  비. 살갗 위로 녹아 흐르는 버터처럼 온화한 액체. 벌판을 가로질러 달릴 적에, 여전히 햇살 눈부시고 구름이라고는 한 점 찾아볼 수 없는데도 그저 쏟아지던 비, 그날 난 옷을 다 적셨어. 하늘 어디선가 텅 빈 허공이 몸을 굽혀 땅을 향해 안부 인사라도 중얼거리는 건가 싶었어. 인자한 할아버지, 수염 치렁치렁 늘어뜨리며 땅을 꾹꾹 찌르며. 비닐 봉지 안에 벌 한 마리, 잡았던 적이 있지. 웅웅거리며 비닐을 이마로 들이박던 작은 벌레. 잠자리 날개를 손끝으로 눌러 본 적이 있어. 메뚜기를 양손으로 감쌌던 적도. 들쥐에 놀라 넘어지기도 했어.

  요정들.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던 빛, 별, 눈부신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맞물리며 자아내는 경계, 노래, 불꽃, 소리, 무늬. 빛이 아닌 것. 빛인 것. 더불어 다른 것. 다르므로 눈부신 것. 많은 것이 그 속에 숨어 있었어. 그렇다고 생각했어. 이파리 줄기마다 숨은 신들, 휘파람 소리 내며 바람에 뒤섞이는 신의 알갱이들. 맨발로 맨흙을 지그시 누를 때 발치의 공기를 어지럽히며 피어오르던, 잠든 신의 숨 내음. 칠판 위 분필 냄새. 시멘트벽 위에 자갈을 긁어 그려내던 해바라기, 바다, 해변, 샘과 나와 신디와 강아지 세 마리와 굿윌 선생님. 부삽과 화분 위 뾰족하던 토마토 새싹, 날 통째로 짓눌러 흙 속에 심어버릴 것만 같던 햇살. 파인 흙구덩이 속으로 입술을 내밀어 비밀스레 심으려 했던 이름 몇 개.

  당신, 무거워지던 흙 속으로 손을 뻗어 내 피를 몸째 구출한 천사. 나를 죽인 술병과 내 마약 중독자 보호자를 함께 비틀어 편안케 한 은인. 내 피가 아직 존재할 만하다고 했던 이. 아직 어린데 벌써 죽게 되었다니, 안타깝구나. 드문 일이랄 것은 없다만. 미소. 내가 언젠가 당신에게 그리 말했어, 내게는 나와 다름없는 고양이가 네 마리 있다고. 미스터리, 마일즈, 사바스, 니치. 들판에서부터 언제나 나와 함께였던 그들, 죽음에서도 나와 한몸이었던 그들, 내가 삶과 죽음을 겪으며 땅의 안팎을 넘나들 때에도 언제나 나를 버리지 않았던 네 분신. 내 분신. 너는 죽어서도 어리구나. 당신은 자주 그리 말했어. 너는 죽어서도 인간 같구나. 집을 잊을 수 없니, 널 죽인 그 살인자를 아직도 불쌍하게 생각하니, 아직도 죽음이 낯선 거니, 하지만 너 역시 이미 영원히 죽은 존재인걸. 피는 노출되는 순간 죽지. 우리는 죽음을 마시고 죽음을 붙잡아 살아가는 유령들이야. 언제쯤에야 그걸 받아들일 작정이니. 에밀리, 그러므로 너는 네가 아니란다. 우리는 다들 그렇지, 우리지만 우리가 아니야. 빛과 어둠을 가르는 질서는 더는 우리를 감싸지 못해. 피, 유리처럼 당신의 몸을 감싸고 흐르던. 죽음, 녹아 흐르는 버터처럼 영영 물의 표면에서만 떠도는. 뒤섞이지 않는. 언제까지 투정이나 부리고 있을 거니. 그런 일은 그저 그런 일이란다. 하지만 난 아직도 나를 기억하는걸, 그 집도, 흙도 비도 요정도 당신도   광채의 상흔이 내게 지나치게 깊이 남았어                그래서 이상하다고 자주 말했지, 당신은      어째서 내가 인간의 순간을 잃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이상한

  에밀리라고, 웃었어. 붉었지만 그때도 금빛이었을까. 그래도 난 괜찮았을까. 투덜거리는 내게 당신은 또 어리다고 말하지. 하지만 난 열세 살이야, 이상한 때 유리를 뒤집어쓰고 죽음을 깨뜨린 이상한 에밀리에 불과해, 안전 헬멧을 눌러쓴 내 고양이, 네 고양이와 함께 당신의 피를 나누어 마시는. 냉장고 위 당근 모양 자석 아래 고정된 성적표. 장볼 것 목록. 커피. 크랜베리 농축액. 두유. 달걀. 바나나 말린 과자 한 팩. 물 한 통. 수건 서너 장. 빗. 기왕이면 정전기 안 일어나는 것으로. 티슈 두 통. 이 세상은 또 왜 이리 멀쑥한 걸까. 시치미를 뚝 떼고 어제 우리가 마셨던 피가 과연 꿈이 아니었는가, 묻고 있잖아.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말해. 당신은 또다시, 다시, 반복해서. 하지만 내 현실은 이렇게 지금 내가 선 냉장고 앞에서부터 원형을 그리며 잘려나가 있어. 냉장고에서 오래 꺼내 놓아 부드럽게 잘리는 버터처럼. 당신의 피도 유리처럼 잘려 나가잖아, 이것 봐. 아니, 내 피일까. 아니, 사실 처음부터 당신이나 내게 피는 없었지. 죽은 지 오래인 몸에서 그런 걸 만들어낼 리 만무하니까. 하지만 들어 봐, 당신, 과거에 내게 천사로 내려왔던 당신, 그 후로 오래도록 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당신, 내가 아닌 다른 존재, 이제 내가 막 그 이름을 집어삼킨 당신 말이야. 현관문 밖에 당신의 악마들이 바글거려. 이상한 에밀리, 이상한
  금색 결말이 입을 벌리고 있어. 이건 슬픈 일이 아니야. 최고의 선함이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나를 봤지. 아니, 맞아. 당신의 몸속에서 부글거리던 그 은 알갱이들은 최고의 선함이야. 내게 깨진 술병을 내리꽂거나 긋거나 찢던 그 사람이 그 눈이 그 목소리가 심장이, 현실의 공간 속에서 말도 안 되는 요정처럼 그때의 공기를 지배하던 시간이 마침내 돌아온 거야. 내게, 내 죽은 심장에게, 내 몸을 흐르던 타인의 피 속으로, 당신의 두 번째 죽음을 빌려, 이상한 에밀리를 되찾았어.
  당신의 상처 속으로 이제 돌아오려 하는 당신의 요정들이 보여. 흙 알갱이, 햇빛, 별의 흔적, 한낮에 내리는 비, 당신이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둔 가장 소중한 당신. 희미하게 금 간 기억들. 장면, 시간, 공기, 발아래 지그시 땅 눌리던 감촉, 목소리, 안개, 당신이 처음 보았던 나. 내가 죽음 너머로 가장 처음 보았던 당신. 떨어지는 별처럼 가슴 아프던 천사. 손끝이 만났으므로
  그래서야. 이제 당신을 되찾아줄게.
  그래서야. 돌아오면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여 줄게, 내가 오래전 흙 구덩이 속 어둠을 향해 그랬던 것처럼, 내게 술병을 휘두르던 그 사람이 울며 그랬던 것처럼, 후에, 아주 오래, 모든 것이 끝난 후에야 그랬듯이 사랑해. 그래서야.
  이제 우리가 돌아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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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에밀리(클릭)에 착안했어요. 토리 아모스의 노래 Beauty Queen/Horses에도요.
mirror
댓글 2
  • No Profile
    잘 봤습니다. 음... 저는 두 편 중 붓꽃 우산이 더 좋았지만, 이 글도 좋아요. ^^
  • No Profile
    amrita 08.04.30 07:37 댓글 수정 삭제
    역시 그렇지용? 저도 붓꽃 우산이 좀 더 좋아요. 글이라는 건 읽는 거니까... 아직도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땅을 판답니다. 레몬에이드님이 댓글 많이 달아주셔서 기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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