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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비명

2012.06.29 22:1206.29

비명


 



 
 세상살이는 본래 고해(苦海)이며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있어 가장 좋은 일은 깨달음을 얻든 열반에 들든 천국이나 지옥에 가서 눌러앉든 무슨 수를 써서든지간에 다시는 이 세상에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겪어보았기 때문에 온몸으로 이해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이러한 두 종류의 인간은 같은 시대, 같은 나라, 심지어 같은 집의 같은 방 안에 존재하더라도 서로 전혀 다른 두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물며 ‘인생이 괴로움의 바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나이 열 살이 되기도 전에 뼛속 깊이 깨달아 버린 사람이라면 삶의 시작부터 소위 말하는 ‘보통’의 인간과는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보통’이 애초에 실재한다고 가정한다면 말이다.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자신이 ‘보통’의 아이이며 자신이 태어나 자란 가정도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자동적으로 상정하였다. 그녀의 어머니가 다른 집 부모들이 어떤 도구를 사용하여 자식을 얼마나 자주, 얼마나 심하게 때리는지에 관하여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세부사항까지 곁들여 자세히 묘사해주곤 했기 때문에 그녀는 부모가 자식을 그 정도로 때리는 것도 ‘보통’의 가정에서 흔히 일어나는 ‘정상’적인 가족관계의 일부라고 믿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바쁜 사람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녀의 기억에는 어머니와 단둘이 있을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리고 그런 희귀하고 소중한 기회가 생길 때면 어머니는 매번 뭔가 흥미진진한 비밀이라도 털어놓는 것처럼 다른 부모가 아이를 구타하는 이유와 과정에 대해 길고 세세하게 이야기했다. 그 어떤 주제로 대화를 시작하더라도 어느 시점에서인가 어머니는 언제나 그녀도 아는 다른 집 아이들, 즉 그녀의 친구들 혹은 친척집의 비슷한 또래가 당하는 일상적인 구타에 대한 묘사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 아이들은 부모에게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이런저런 도구로, 매일같이, 하루에 두 번씩, 혹은 세 번씩, 온몸에 멍이 들 정도로 혹은 피가 날 정도로 얻어맞는다는 이야기를 어머니는 무척이나 재미있는 소식을 전하는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늘어놓았다. 이 때문에 그녀는 1) 아이가 구타당할 만한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부모에게 구타를 당하는 것이며, 2) 자신은 친구나 친척들에 비하면 부모와의 관계가 무척 좋은 편이라는 두 가지 잘못된 믿음이 머릿속에 굳게 주입된 채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의 아버지는 군인이었다. 언제나 불규칙하게 전국을 돌아다녀야 하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 곳에서 오래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없는 직업이었기 때문에 결국 그녀와 남동생은 어머니와 함께 남았고 아버지는 기회가 될 때에만 가끔씩 집에 오는 형식으로 가족 관계가 굳어졌다. 그러나 어머니는 바쁜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을 그녀는 대부분 남동생과 함께 지냈고, 어린 두 남매를 돌보아준 것은 집안일을 거들어주던 아주머니들이었다.
 아주머니들은 자주 바뀌었다. 그녀와는 자질구레한 일에서 마음이 맞기도 하고 안 맞기도 했지만 대체로 그녀는 자신을 돌보아주는 아주머니들을 좋아했고 별 탈 없이 잘 지냈다. 그러나 그녀의 동생은 그렇지 못했다. 어린 시절 남동생은 뭔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곧장 울음을 터뜨렸고 한 번 그렇게 울기 시작하면 몇 시간이나 그치지 않았다. 아주 어릴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유치원에 다닐 때도, 학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주머니들이 야단을 치기도 하고 달래 보기도 했지만 애초에 아무런 권위가 없다는 것을 아는 남동생은 그럴 수록 더욱 더 악을 쓰며 울어댔다. 몇 시간이나 그렇게 악을 쓰며 울다가 지쳐서 제 풀에 그쳤다가도, 저녁에 어머니가 돌아오면 현관에 들어서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자마자 다시 서럽게 서럽게 통곡을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화를 내며 도우미 아주머니를 내쫓거나 아니면 도우미 아주머니가 화를 내며 어머니와 싸우고 일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집에 돌아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도우미 아주머니가 이미 일을 마치고 가 버리고도 한참이나 지난 뒤였으므로, 도우미 아주머니를 내쫓거나 도우미 아주머니가 싸우고 그만두는 것은 그 다음날 아침의 일이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기 전, 도우미 아주머니가 오기 전에 우는 남동생과 함께 집에 남아 있는 사람은 그녀였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늦은 저녁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현관에서부터 서럽게 통곡하는 어린 아들을 맞닥뜨리면 일단은 우는 아이를 달래 보려 시도했지만 보통은 십 분도 지나지 않아 포기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쉴 수 없는 일하는 엄마의 모든 짜증과 피로와 분노를 그녀에게 풀었다.
 이러한 정황에서 매일 저녁 그녀에게 초미의 관심사는 당연히 동생이 우는가 울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울지 않을 때 동생은 그녀에게 매달려 뭔가를 조르거나 보챘다. 조르는 것이 평범한 장난감일 때는 그냥 주어버리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었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어린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그녀의 동생 또한 상대의 모든 관심과 애정이 자신에게만 쏠리기를 원했으므로 지금 이 순간에 누나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그 때문에 동생이 그녀에게 조르는 물건은 대체로 그녀가 몹시 아끼는 물건이거나, 더 곤란하게는 다음날 학교에 가져가야 하는 준비물이나 지금 숙제하는 데 필요한 교과서나 문제집이나 공책 등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종종 다음과 같은 상황에 놓였다. 준비물을 동생에게 주면 열에 아홉은 망가뜨려 버렸다. 그리고 동생은 누나의 물건을 망가뜨렸으므로 제 풀에 겁에 질려 울기 시작했다. 반대로 원하는 물건을 동생에게 주지 않으면 지금은 동생이 울겠지만 다음날 학교에 제대로 준비물을 가져갈 수 있다. 그러면 선생님에게 혼나지 않아도 된다. 교과서나 공책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교과서를 보여주면서 같이 놀면 동생은 울지 않겠지만, 한없이 같이 놀아주다 숙제를 하지 못하면 다음날 선생님에게 혼이 난다. 그리고 선생님은 그녀가 숙제를 해오지 않았다고 어머니에게 말할 것이다. 숙제를 해오지 않거나 준비물을 가져오지 않거나 친구들과 사소하게 다투거나 – 이 모든 자질구레한 일탈 행동에 대하여 어머니는 늘 그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선생님과 연락을 취하여 그녀가 거의 잊고 있을 때쯤 기습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곤 했다. 반대로 그녀가 숙제를 하는 쪽을 택하여 동생과 놀아주지 않으면, 동생은 울고 어머니는 화를 내겠지만 다음날 학교와 학원에서는 문제없이 하루를 지낼 수 있었다. 요점은 선생님과 어머니 양쪽에게 혼이 나느냐 아니면 어머니에게만 혼이 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관점을 이해한다면 그녀의 선택은 대체로 논리적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 어머니가 귀가한 이후부터 그녀와 동생이 잠들 때까지의 저녁 시간은 대체로 아수라장이었다. 동생은 어머니에게 악을 쓰며 통곡을 했고, 어머니는 악을 쓰며 그녀를 때렸고, 그 모습을 보며 동생은 겁에 질리다 못해 거의 공황 상태에 빠져 더욱 더 악을 쓰며 울어댔다. 그녀는 처음에는 잘못을 빌고 어머니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그녀의 입에서 뭔가 소리가 나오면 어머니는 그만큼 더 흥분해서 더 악을 썼다. 반대로 그녀가 무서워서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면 어머니는 “고집센 년이 어디서 눈을 똥그랗게 치뜨고 잘못했어요 한 마디를 안 한다”고 폭발적으로 화를 내며 때렸다. 그렇게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뒤에 울다 지쳐 겁에 질리고 얼이 빠진 동생을 먼저 재우고 나서 어머니는 여전히 공포에 질린 그녀를 붙들고 남동생이 태어났을 때부터 얼마나 다루기 힘들고 ‘사람 진을 다 빼놓는’ 아이인지, 그리고 아버지가 멀리 있어 기댈 곳이 없는 어머니에게 그녀가 맏딸로서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하소연했다.
 동생이 우는가 울지 않는가에 대하여 그녀가 조금 덜 걱정해도 되는 시기는 오로지 부정기적으로 아버지가 집에 왔을 때였다. 아버지는 낯설고 조금 어려웠기 때문에 동생은 아버지 앞에서 함부로 울지 않았고, 울먹거리더라도 아버지가 화를 내면 금방 울음을 그쳤다. 그리고 아버지가 집에 오면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외출하여 밤 늦게 돌아오곤 했다. 그녀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냉장고에 넣어두고 간 음식을 꺼내 동생과 함께 먹고 숙제를 하거나 텔레비전을 보았다. 동생은 아무리 울어도 들어줄 사람이 없으며 어머니가 집에 돌아올 때는 아버지도 함께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 때만은 울거나 보채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녀는 드물게 동생과 평화롭게 놀고 평화롭게 숙제를 마치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평화롭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동생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아버지가 낯설었고 조금은 무서웠다. 그러나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가 반갑고 좋았기 때문에,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집에 있을 때면 옆에 다가 앉아서 어린 여자아이들이 흔히 하듯이 재잘재잘 수다를 떨었다. 학교와 자신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그 때 그 때 생각나는 일들에 대해서 아버지에게 질문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녀에게 자꾸 뭔가를 시켰다. 질문을 하면 그 질문에 관련된 책을 가져오라고 시켰고, 책을 가져오면 스스로 관련된 부분을 찾아보라고 시킨 뒤에, 그녀가 신이 나서 찾아낸 부분을 읽으면 건성으로 듣고는 가서 그 책을 도로 제 자리에 꽂아놓으라고 시켰다. 다른 이야기를 하면 또 거기에 관련된 주제에 대하여 다른 책을 가져오도록 시켰다. 아버지가 자신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지 않고 질문에 대답해주지도 않고 끊임없이 이 책 저 책 가져오라고 시키기만 하는 것에 그녀가 불만을 표시하면 아버지는 이번에는 물을 가져오거나 과일을 깎아 오라고 시켰다.
 아버지가 떠난 뒤에 어머니는 그녀를 조용히 불렀다. 아버지가 그녀에 대하여 버릇이 없고 어리광이 심하다고 논평했으니 앞으로 다시는 그렇게 행동하지 말라고 어머니는 진지한 얼굴로 타일렀다. 악을 쓰며 때리는 것보다도 그녀는 어머니가 이렇게 진지한 얼굴로 심각하게 말할 때 훨씬 더 무서웠다. 어머니는 할 말이 아주 많지만 너한테는 말로 해봤자 아무 소용 없으니 이쯤에서 그만하고 앞으로 두고 보겠다는 어조로 천천히 짧게 요점만 말하고는 의미심장하게 입을 꼭 다물고 환자를 보는 눈빛으로 그녀를 꼼꼼히 관찰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아버지는 멀리 계시고 어머니도 언제나 바쁘니 그녀가 맏딸로서 책임있게 행동하고 누나답게 동생을 잘 돌보아야 한다고 누누이 타일렀다.
 이러한 생활이 태어나서부터 이어졌으므로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녀가 자신이 하는 행동은 전부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고작 한 살 아래인 남동생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그 때는 그저 어린 아이였음을 그녀가 깨달은 것은 한참이나 뒤의 일이었다. ‘그저 어린 아이’일 때부터 아이다운 취급을 받지 못하고 아이로서 감당할 수 없는 상황 속에 너무 자주 고립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근본적으로 무능하고 멍청하며 주위에 해가 되는 존재라고 여겼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있을 때 두 사람은 몹시 행복해 보였고 남동생도 울거나 보채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가족 모두가 진실로 행복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식적으로 뚜렷하게 그런 믿음을 머릿속에 형성한 것은 그녀가 아홉 살 무렵의 일이었다.
 다른 집 아이들도 모두 부모에게 일상적으로 얻어맞는다는 세세하고 구체적인 묘사를 정기적으로 어머니에게 들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상황이 일반적이라고 생각하여 친구들은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지 알아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부모가 때리고 동생과 싸우는 문제에 대하여 친구들은 모두 진지하게 이야기할 가치가 없는 사소한 문제라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그녀가 원했던 만큼 충분한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언젠가 그녀는 어머니가 일상의 구타에 대해서 특히 집요하게 묘사했던 친척의 집에 갔을 때 사촌에게 넌지시 물어본 적이 있었다. 부모가 때리느냐는 질문에 사촌이 너무나 경멸에 찬 표정으로 “그런 건 왜 물어보는데?”라고 대답했기 때문에 그녀는 이 주제에 대한 탐색을 그만두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결과 그녀는 다른 아이들은 모두 아무렇지 않게 잊어버리고 명랑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같은 일에 대하여 자신만 괴로워하고 힘들어하고 무서워하기 때문에 자신은 겁쟁이이고 비정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자라면서 동생은 조금 덜 울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크게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동생은 그녀와 같은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수업 시간을 제외하면 언제나 그녀와 붙어 있으려고 했다. 쉬는 시간과 점심 시간에 그녀의 교실로 찾아왔고 그녀가 친구들과 놀면 따라다니며 자기도 끼워 달라고 보챘다. 집에 돌아오면 그녀의 물건을 졸라서 빼앗아 망가뜨리고 그녀에게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자기하고만 놀아 달라고 떼를 썼다. 그녀가 동생에게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진 것은 중학교에 들어간 뒤였다. 그녀가 들어간 곳은 여자 중학교였고 같은 재단에 여자 고등학교도 붙어 있었기 때문에 이제 당분간, 어쩌면 영원히, 남동생과 같은 학교에 다닐 일은 없었다. 중학교는 초등학교보다 수업도 늦게 끝났고, 방과 후에 어머니는 열성적으로 그녀를 학원에 보냈다. 그녀가 친구들과 함께 마음껏 학원과 독서실을 전전하다가 저녁 늦게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흐뭇해했다.
 이 무렵부터 남동생은 그녀가 없는 동안 그녀의 방에 들어가서 물건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집에 돌아와서 발견하고 화를 내면 이제 제법 머리가 커진 동생은 발악을 하며 대들었고 그러면 어머니는 동생에게 양보하지 않는다고 악을 쓰며 그녀를 때렸다. 사춘기 초입에 들어선 그녀로서는 이제 마냥 어린 꼬마가 아니라 제법 소년이 된 남동생이 자신의 속옷과 개인적인 물건을 마음대로 헤집는 것이 싫었다. 그냥 싫은 정도가 아니라 자신은 여자이고 동생은 남자인데 동생이 자신의 방에 매일같이 들어와서 물건을 끊임없이 뒤질 정도로 집착한다는 사실이 끔찍하고 소름끼쳤다. 그래서 어느 주말에 그녀는 마음먹고 안방 장롱 안에 깊숙이 처박혀 있던 집안 각 방의 열쇠를 찾아내어 학교에 갈 때 방문을 잠그고 갔다. 그 날 그녀가 학원과 독서실을 거쳐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는 현관에서부터 다짜고짜 그녀에게 고함을 지르며 때렸다. 감히 집안에서 부모가 드나들지 못하게 방문을 잠근다는 것이 이유였다. 어머니가 소리를 지르고 때리는 것은 일상적인 사건이었지만 그 날처럼 눈빛이 달라질 정도로 광란을 하며 날뛴 적은 이전에 없었다.
 그녀에게 허락된 유일한 자물쇠는 책상 서랍 가장 윗칸이었다. 그녀는 속옷을 모두 책상 서랍에 넣고 잠근 뒤에 다른 중요한 물건들은 학교에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녀가 졸업을 해서 초등학교를 떠난 뒤에 혼자 남겨진 동생이 새로 진급한 반에서 따돌림을 당했다는 것은 훨씬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주로 나서서 동생을 괴롭힌 것은 처음 동생의 짝이 된 아이였는데 몸집이 크고 성격이 사나운 남자아이였다. 매일같이 책가방과 학용품을 빼앗기고 수업 시간에도 선생님이 보지 않을 때마다 여기저기 얻어맞았다는 동생에게 어머니는 “그럴 때는 이렇게 말해줬어야지” “그럴 때는 저렇게 말해줬어야지” 하고 잔소리만 할 뿐 아무런 직접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몇 년이나 지난 뒤에 동생이 자신이 없는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가 가장 처음 느낀 감정은 불같은 분노였지만 그와 함께 느낀 것은 일종의 안도감이었다. 동생은 친구가 없었다. 언제나 그녀를 쫓아다녔고, 그 결과 대체로 언제나 훼방을 놓았다. 언제나 모든 사람이 자기만을 위해주고 자기만 쳐다보며 자기만을 즐겁게 해 주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울고 떼를 쓰고 보챘다. 그녀는 동생과 함께 초등학교에 다닌 5년간 그런 동생을 어르고 달래고 싫어하는 친구들을 설득해서 함께 놀아주고 동생이 울거나 떼를 써서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즉시 하던 일을 모두 중지하고 뛰쳐나가 상황을 무마시켜주었다. 그녀는 스스로 생각했듯이 무능하고 멍청한 겁쟁이가 아니라 최소한 동생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효율적인 방패막이였다. 그 방패막이가 사라지자 다른 ‘정상적’인 아이들은 제멋대로 행동하고 떼쓸 줄만 아는 동생의 어리광을 더 이상 받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편애를 등에 업고 동생은 그녀를 집요하게 괴롭혔지만, 다른 아이가 자신을 괴롭히기 시작하자 동생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무능한 겁쟁이는 그녀가 아니라 동생이었다.
 자기 자신의 고유한 감정, 특히 부정적인 감정이 정당화된다는 것은 그녀에게 매우 희귀한 경험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어린 시절과 가정 상황을 어머니에게 주입받은 관점이 아니라 자신의 관점으로 스스로 다시 돌아보게 만든 작지만 중요한 첫걸음이 되었다. 자신의 관점이 뒤틀려 있다는 사실을 그녀 자신도 어렴풋이 인식은 했지만 확실히 인정하거나 교정할 의향은 별로 없었다. 자책은 넌더리가 났고, 분노와 정당화가 훨씬 더 한없이 기분 좋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어린이 시절은 끝나고 청소년 시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그녀도 동생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동생에게 있어 그것은 원하면 언제나 누나를 찾아서 따라다니며 자신을 돌보아주고 자신과 놀아주고 무한한 애정을 퍼부어주기를 요구할 수 있었던 시기가 끝나감을 뜻했다. 그래서 동생은 그녀가 집에 없으면 방을 뒤졌고 그녀가 집에 있을 때, 방 안에서 문을 닫고 자기의 할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면 옆방에서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엿들었다. 그녀와 남동생의 방은 본래 하나의 큰 방이었는데 중간에 칸막이를 대고 나눈 형태였기 때문에 거의 모든 소리가 그대로 전해졌다. 그녀는 조용한 활동을 좋아했기 때문에 방 안에 있어도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이어폰을 쓰지 않고 음악을 듣거나 전화를 하거나 다른 특정한 소리를 내면 남동생은 식사할 때나 가족이 모인 다른 자리에서 반드시 그녀에게 논평을 했다. 그 음악은 별로 좋지 않다거나, 전화한 그 친구는 얼굴도 못생긴 주제에 말하는 게 꼭 바보 같다거나, 동생과는 관련도 없고 직접 언급하지도 않은 일에 대하여 동생이 당연하다는 듯이 논평하고 자신의 반응을 살피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다시 한 번 소름이 끼치기 시작했다. 그녀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자 다시 한 번 어머니가 화를 냈지만 이번만은 그녀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동생은 남자애인데 여자인 자신의 방에 들어와서 여자 속옷을 뒤지고 여자아이들끼리 여자다운 수다를 떠는 데 일일이 엿듣고 참견하는 건 확실히 이상하다는 그녀의 비판에 어머니는 이례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 때부터 어머니는 전처럼 그녀를 자주 때리지 않게 되었다. 그 때부터 어머니는 아들을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또한 그 때부터 어머니는 그녀에게 약을 먹이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공식적으로 내린 진단은 조울증이었다. 사춘기에 접어들어 호르몬의 변화 때문에 기분이 급격히 좋아졌다가 급격히 나빠지는 증상이 생길 수 있고, 이 때문에 평상시에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던, 예를 들어 남동생이 방에 드나드는 일(을 그녀가 이전부터 몹시 싫어했다는 사실은 무시되었다) 등에 대해 갑작스럽게 피해망상에 가까운 과격하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도 있는데, 약을 먹으면 기분도 안정되고 정서적으로도 편안해진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어머니는 여러 가지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며 대단히 길게 설명했는데 요약하자면 약을 먹으면 괜찮지만 먹지 않으면 지금부터 앞으로 평생 정신병자가 될 것이며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해져서 대학도 못 가고 결혼도 못 하고 아이도 못 낳고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리라는 예측이었다. 그녀가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어머니는 다른 집 아이들의 매맞는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대신 그녀의 가장 작은 약점이나 결점을 물고 늘어져 그 때문에 결국 인생이 전부 망가지는 무시무시한 예측을 내놓는 방식의 독백을 즐기게 되었다. 어머니가 그런 예측을 “즐긴다”는 것을 그녀는 의식적으로 알지는 못했지만 무의식적으로는 감지하고 있었다. 다른 집 아이들의 구타에 대해 이야기할 때와 마찬가지로 어머니는 생기를 띠고 눈을 빛내면서 자신의 예리한 판단력이 무척 자랑스럽다는 듯 일어나지도 않은 연쇄적인 불행에 대해 길고 세세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 끝은 언제나 그녀가 “대학도 못 가고 시집도 못 가고 아이도 못 낳고 정신병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약을 먹을 때까지 똑같은 레퍼토리를 질리지도 않고 되풀이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그녀는 약을 먹었다.
 약을 먹기 시작한 뒤로 그녀는 머릿속에서 조그만 비명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주 멀리서 조그맣게 외치는 소리처럼 희미했다. 시간이 가면서 소리는 커지지는 않았지만 점점 뚜렷하게 들려왔다. 그것은 확실히 비명소리였다. 끊어지지도 않고 쉬지도 않고 절박하고 간절하게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는 이명이 들리는 모양이라고 중얼거리고는 추가로 다른 약을 더 주었다. 그 약을 먹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를 보았다.
 
 그녀는 그가 환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환각 치고 그는 놀랄만큼 구체적이었다. 나이는 이십대 초반 정도였고 반듯한 얼굴의 미남이었으며 특히 그녀에게는 나직하고 굵은 목소리가 매력적이었다. 단 하나 키가 좀 작아 보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녀 자신도 딱히 큰 편은 아니었으므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갓 중학생인 그녀에게 그는 갑작스럽게 생활 반경 안에 나타난 잘 생긴 낯선 어른 남자, 꿈속의 왕자님이었다 - 그녀는 실제로 그를 그렇게 불렀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해 6년, 청소년기의 풍파를 그녀는 왕자님과 함께 넘겼다.
 남동생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갑자기 애티를 벗고 1-2년 사이에 소년에서 청년이 되었다. 키가 훌쩍 커지고 어깨가 벌어지고 얼굴 윤곽도 달라졌다. 태도에 자신감이 생기고 친구도 사귀기 시작했으며 학교와 동네에서 여자아이들에게 인기도 꽤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동생은 여전히 그녀의 방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습관적으로 엿들었다. 이 엿듣는 버릇은 그녀가 꿈속의 왕자님과 대화를 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대화의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아내려 했으나 그녀는 꿈속의 왕자님에 대해서만은 동생은 물론 어느 누구에게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남자친구라고 짐작한 동생은 그녀와 마주칠 때마다 모욕적인 말투로 빈정거렸다. 그녀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방에 들어와서 여기저기 뒤지다가 그녀에게 들키기도 했다. 그녀가 화를 내자 동생은 어머니에게 일러바쳤다.
 휴대전화는 대학생들이나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었고, 그보다는 삐삐가 일반적이었지만 어머니가 사주지 않았고, 전화선을 연결한 모뎀으로 컴퓨터 통신을 하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컴퓨터 통신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일단 전화선부터 뽑고 통화내역을 조회했다.
 물론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여자 중학교에 다녔고, 그러므로 친구들은 모두 여자였으며, 친한 친구들의 전화번호는 그녀의 어머니도 전부 알고 있었다. 통화내역은 학교나 학원의 친구들 아니면 선후배였고, 가끔 나오는 모르는 번호는 동네 만화가게와 비디오 가게였다. 영문을 알 수 없게 된 어머니는 남동생이 그녀의 생활을 엿듣는 것을 은근히 지지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남동생이 그녀에게 집착하는 것과 비례하여 점점 더 그녀에게 히스테리를 부렸다.
 그러나 어머니와 남동생의 협공도 그녀에게는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꿈속의 왕자님이었고, 어머니가 계속 약을 주는 한 그녀는 언제든 왕자님을 만날 수 있었다. 다른 일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괴로웠을 남동생과 어머니의 언행에도 그녀는 느긋하고 무심했다. 이것은 중학생인 그녀가 소녀다운 첫사랑에 빠졌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많은 부분 약기운 때문이기도 했다.
 이유야 어찌됐든,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녀는 자유롭고 행복했다.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동생은 완전히 엇나갔다고는 할 수 없지만 끊임없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키가 큰 데다 선한 인상에 어딘지 애처로운 느낌을 주었기 때문에 또래의 여자 아이들에게 꽤 인기가 좋았다. 사실 동생은 그러한 여자아이들에 대해서 마음 속으로 극단적인 경멸과 혐오감을 품고 있었으며 그렇게 경멸해주고 혐오하기 위해서 매번 다른 여자아이를 만나고 다녔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때 자신을 괴롭혔던 아이가 옆 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학교로 찾아가 교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기습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동생은 싸움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따돌림의 주범이었던 아이에게 동생은 굉장한 증오와 분노를 품고 있었고, 기습을 했기 때문에 동생이 일방적으로 유리했다. 그러나 그렇게 당한 그쪽 아이의 친구들이 찾아오기 시작하자 사정은 달라졌다. 동생은 본래 몸집이 작고 겁이 많았기 때문에 갑자기 키만 커졌을 뿐 아직 자기 몸을 잘 쓸 줄 몰랐다.
 얻어맞고 돌아와서 동생은 그녀에게 분풀이를 했다. 그녀가 학원을 마치고 돌아와 가방을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을까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고는 누구를 몰래 만나고 돌아다니는 거냐, 넌 창녀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발악하는 동생을 창문 너머로 남의 집을 들여다보듯이 그렇게 구경했다. 약을 먹기 시작한 이후로 그녀는 실제로 정서가 심하게 안정되어 강렬한 감정을 별로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동생의 목소리를 듣고 어머니가 달려왔는데, 상처투성이가 되어 발악하는 동생을 보고 어머니는 동생이 그녀가 사귀는 남자를 마침내 찾아내어 따지러 갔다가 얻어맞고 온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동생과 합세하여 그녀를 비난하며 악을 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고함을 지르고 비난하면 할수록 그녀에게는 상황이 점점 더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 남자를 보게 된 것은 어머니가 준 약 때문이었다. 그녀가 약을 먹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는 동생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약 때문에 그녀는 평온하고 행복해졌고, 환각일지언정 마음에 커다란 위안이 되는 꿈속의 왕자님을 얻었다. 그러나 그런 남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아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족 중에서 정신과 약을 먹는 환자인 그녀 뿐이었다. 웃으면 안 되는데, 생각할수록 우스워져서 그녀는 마침내 킥킥 웃고 말았다.
 그녀가 웃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그녀의 뺨을 때리고 머리끄덩이를 움켜쥐었다. 발악을 하던 동생은 어린 시절부터 훈련된 대로 어머니가 그녀에게 덤벼들자 즉시 조용해졌고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서서 지켜보았다. 그녀도 평온하게 둘로 나누어져 동생 옆에 서서 어머니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로 손찌검을 당하면서 방바닥에 끌려다니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문득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자신을 야단치거나 때릴 때는 항상 동생이 보는 앞에서 악을 쓰고 매질을 했지만 반대로 동생을 야단칠 때는 언제나 자신이 볼 수 없게 다른 방으로 데려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동생은 늘상 악을 쓰고 울고 보챈 뒤에 어머니가 그 소리를 듣고 달려와 그녀를 때리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자랐다.
 그녀는 열 다섯 살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사춘기의 자존심이 피를 흘리며 찢어졌다.
 
 어머니가 나가고 동생이 뒤따라 나간 뒤에 그녀는 어머니가 준 약을 전부 꺼내 책상 위에 늘어놓았다. 무슨 약인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지만 식사 후에 먹어도 속이 쓰렸고 가끔 머리가 멍해지며 몸이 축 늘어져 기절할 듯한 느낌이 드는 걸 보면 독한 약임은 분명했다. 한꺼번에 먹으면 죽을 수 있을까? 어쩌면 꿈속의 왕자님이 있는 곳으로 가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도 될 거라고 그녀는 사춘기 소녀다운 생각을 했다.
 알약을 모두 모아 손바닥 위에 쌓고 입 안에 털어넣으려 했을 때 꿈속의 왕자님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 안 돼.
 그녀는 고개를 돌려 왕자님을 쳐다보았다. 아무런 비판의 기색이 없는 따뜻한 눈빛에 그녀는 비로소 눈물이 북받치기 시작했다. 목이 메어 꺽꺽거리면서 그녀는 더듬거렸다.
 “하지만, 하지만… 나 너무 힘든데… 나, 너무…. 너무….”
 왕자님은 고개는 끄덕였다.
 - 나도 알아. 그렇지만 살아서 여길 나가야지.
 “언제… 그게 언젠데요… 어떻게….”
 흐느끼는 그녀에게 왕자님이 말했다.
 - 내가 데리고 나가줄게.
 왕자님은 알약을 잔뜩 움켜쥔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눌러 책상 위로 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 네 잘못이 아냐. 넌 잘못한 거 없어. 내가 널 여기서 데리고 나갈게. 내가 행복하게 해 줄게.
 그 나지막하고 상냥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언제나 머릿속에서 쉼없이 울리던 비명이 한 순간 멈추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말을 믿었다. 그는 실재하지 않는 환각이었고 그러므로 그의 입에서 나온 말도 모두 그녀의 머릿속에 이미 있었던 상상의 한 조각에 불과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는 왕자님이 한 말을 단어 하나하나 모두 믿었다. 믿었기 때문에 그녀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를 만났다.
 
 그를 만난 곳은 집 근처의 공원이었다. 그녀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집에는 모처럼 아버지가 돌아왔고, 드물게 어머니와 싸우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동생을 빨리 군대에 보내려 했고 어머니는 어떻게든 아들의 군복무를 면제받게 해 주려 했다. 이에 대하여 아버지는 군인의 아들이 군대를 안 가면 자신의 체면이 뭐가 되냐고 불같이 역정을 내었다. 동생은 물론 군대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 앞이라 찍 소리도 하지 못했다.
 가족이 싸우기 시작하면 언제나 모두의 마지막 불똥은 그녀에게 튀었기 때문에 그녀는 지갑과 휴대전화를 챙겨들고 일찌감치 피난을 나왔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일단 공원으로 나와 벤치에 주저앉은 것이었다.
 벤치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쌓여 있었고, 늦겨울의 밤 바람은 싸늘했다. 그녀는 패딩 점퍼 아래 제대로 옷을 더 껴입지 않고 집에서 입던 츄리닝 그대로 나온 자신에게 짜증을 내며 후드를 깊이 덮어썼다.
 “야! 너 밤중에 여기서 뭐 하냐?”
 누군가 어깨를 세게 쳤기 때문에 그녀는 깜짝 놀라서 뒤돌아보았다. 그 서슬에 후드가 눈을 가려서 그녀는 얼떨결에 후드를 젖혔다.
 “엇…”
 어깨를 친 남자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즉각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열심히 사과하기 시작했다.
 “저기, 죄송합니다. 아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녀는 말없이 일어섰다.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남자는 그녀가 화를 내는 줄 알고 더욱 곤란해하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 후배가 이 동네에 사는데, 지금 입으신 그거랑 똑같은 잠바를 입고 다니거든요. 뒤에서 보니까 완전히 똑같아서….”
 몇 년 동안이나 매일같이 보았던 얼굴이었다. 매일같이 이야기했던 그 목소리였다.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환각인가? 어깨를 때리는 환각도 있나? 손목을 만진 적도 있으니 어깨 정도는 때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손을 뻗어 남자의 얼굴을 만졌다. 남자는 흠칫 놀랐다.
 “왜 그러세요?”
 “저 모르세요?”
 그녀가 물었다. 자신의 이름을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남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말했다. 남자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녀의 이름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남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속삭였다.
 “나 데리러 오겠다고 했잖아요.”
 “예?”
 남자가 더욱 더 어리둥절한 채로 되물었다.
 그녀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남자의 손을 잡았다. 장갑에 감싸인 손은 크고 탄탄했다. 그녀는 벤치 위에 무릎을 꿇고 몸을 일으켜 남자를 안았다.
 “꼭 올 줄 알았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남자는 놀란 것 같았지만 뿌리치지는 않았다.
 “꼭 와줄 줄 알았어요….”
 
 남자는 그녀보다 세 살 위인 스물 네 살이었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다가 군에 입대해서 전역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다음 학기부터는 학교에 복학할 생각이었다. 알고보니 근처의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었고, 알고보니 그녀의 동생이 졸업한 단지 부근의 남녀공학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두 사람은 급속도로 사랑에 빠졌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녀는 이미 오래 전에 사랑에 빠져 있었고 그러므로 남자도 별 거부감 없이 따라왔다.
 처음 마주쳤을 때의 극적인 반응에 대해서 그녀는 여러 가지로 논리적인 설명을 찾아냈다. 알고보니 오랫동안 근처에서 살던 사람이었으므로 오며가며 어디선가 보았을 것이다. 은연중에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머릿속에 인상이 남았을 것이다. 남자에게는 정신과 약을 먹고 환각을 보았다는 말을 할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꿈에서 보았다고 둘러댔다. 남자는 그다지 믿는 것 같지 않았지만 어쨌든 상당히 재미있어했다.
 그러나 ‘오며가며 마주친 설’을 정석이라 가정했을 때 해명이 되지 않는 한 가지는 그녀가 남자의 환각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남자는 지금과 정확히 똑같은 이십대 초반의 모습이었다는 점이었다. 남자는 그녀보다 세 살 위였으므로 중학생 때 그녀가 남자를 처음 보았다면 고등학생 정도의 청소년이었어야 맞았다. 그러나 그녀는 어린 중학생의 눈에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나 다 자신보다 무척 어른으로 보였을 것이라고 스스로 설명하고 더 이상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이후로 그녀와 그녀의 가족에게는 많은 일이 일어났다. 모든 상황의 발단이 된 것은 남동생의 군복무 문제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렇게 싸웠는데 남동생은 결국 시력 때문에 4급 판정을 받았다. 남동생은 신이 났고 어머니는 안도했지만 아버지는 잔뜩 화가 난 채 부대로 돌아가 집에는 점점 더 뜸하게 연락하게 되었다.
 이후 2년 2개월동안 남동생은 어머니에게 용돈을 받아 저녁에 퇴근하면 매일같이 친구들과 놀았다. 어머니는 그런 남동생에게 지극 정성으로 아침저녁 따뜻한 밥을 해 먹이고 용돈도 풍족하게 주며 네 아버지 고집 때문에 완전히 면제받게 해줄 걸 이렇게 고생을 시킨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녀로서는 동생이 집에 붙어 있지 않고 어머니의 모든 관심도 동생에게만 쏠려 있으니 좋은 기회였다. 그녀는 어머니 모르게 약을 끊었다. 몇 년이나 고분고분 약을 먹은 단 한 가지 이유는 환각 속의 남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는데, 이제 남자를 실제로 만났으니 더 이상 약은 필요치 않았다. 그녀는 학교를 열심히 다니면서 남자와 연애도 열심히 했다. 동생의 공익근무가 끝나기 석 달 전에 그녀는 졸업을 했고, 힘겨운 경쟁을 뚫고 어렵사리 원하던 회사에 취직도 했다. 남자는 이후로 대학을 한 학기 더 다녔고, 졸업한 뒤에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남자는 자신이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상태가 당분간 이어질 예정이었으므로 구체적인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으나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 우회적으로 결혼을 언급했다.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남자는 그녀가 딱 잘라 거절을 하지 않았고 둘이 여전히 사이 좋으며 근미래에 헤어질 예정이 없었기 때문에 긍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에 남자가 좀 더 분명하게 다시 결혼을 언급했을 때 그녀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우려를 밝혔다.
 그녀는 근본적으로 결혼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백번 양보해서 사랑하는 남녀 두 사람의 결합은 서로에게 좋은 일이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자녀를 갖는 것은 그녀의 생각에 모든 고통의 근원이었다. 세상의 부모가 모두 자녀를 구타한다는 어머니의 오래된 주장은 부분적으로 사실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정은 근본적으로 행복하지 않은 곳이며 가족 관계, 특히 부모자식 관계의 기본적인 태도는 고함과 발악과 분노와 폭력이라는 것이 태어나서부터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인해 그녀의 마음 속 깊이, 무의식의 저변에 깔린 인상이었다. 자신이 경험한 가정의 불행만 해도 지긋지긋한데, 여기에 덧붙여 자신이 그나마 운이 좋아서 경험해본 적이 없는 더 지독한 종류의 불행도 존재한다는 것을 그녀는 자라나면서 알게 되었고, 그러한 지식은 결혼과 가정과 자녀라는 앞날에 대한 그녀의 두려움을 더욱 부추겼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결혼을 하시게 돼서, 수업 시간에 어른이 돼서 결혼하고 뭐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거든. 그 때 내 짝이 자기는 결혼 안 할 거래. 선생님이 왜 안 하냐고 물어보니까 걔가 이러는 거야. ‘결혼하면 남편이 때리잖아요.’ 그 때 걔 표정이 잊혀지지가 않아.”
 “그거야 극소수지. 남자도 사람이야. 모든 남자가 다 그렇게 짐승같이 구는 건 아냐.”
 남자가 위로 겸 반박했다.
 “그건 그렇다고 쳐도…. 난 애한테 잘해 줄 자신이 없어. 우리 엄마가 했던 것하고 똑같이 나도 내 자식한테 그렇게 굴면 어떡하지?”
 “아닐 거야. 그런 걱정 하는 걸 보면 넌 이미 엄마로서 자세가 된 거야.”
 남자가 말했다. 그리고 덧붙이지 않는 편이 나았을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너나 네 동생이나 이렇게 멀쩡하게 잘 키워주셨잖아. 이제 다 컸으니까 옛날 일은 잊어버려야지. 아버지도 집에 안 계셨으니까 어머니 혼자 많이 힘드셨을 거 아냐.”
 남자의 발언은 그녀가 자기 존재의 가치와 가족 관계의 본질에 대해서 평생 간직하고 있었던 의문의 근본을 건드렸다.
 멀쩡? 나는 멀쩡한가… 그녀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대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7년간 정신과 약을 먹었다. 머릿속에서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도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환각 속의 남자와 대화하며 7년을 지냈다. 그 7년 동안 동생은 수시로 그녀의 생활을 엿듣고 그녀의 방을 뒤졌고, 어머니는 그녀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뺨을 때렸다가는 또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인생의 괴로움을 하소연하기를 반복했으며, 아버지는 몇 달에 한 번씩 손님처럼 다녀가면서 한 번 따뜻한 말도 없이 고압적으로 이것저것 명령을 내리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가족들을 노려볼 뿐이었다. 죽지 않고 살았으니 멀쩡한 건가. 얻어맞아서 어디 뼈라도 부러지고 손이나 발이 잘라졌어야 안 멀쩡한 걸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게 피투성이 상처를 내놓고 거리를 활보해야 안 멀쩡한 걸까.
 마음을 터놓을 만한 친구, 혹은 자신의 말을 들어줄 만한 어른이라고 생각해서 가장 견디기 힘든, 가장 무거운 짐을 조금이라도 내려놓으려 할 때마다 그녀는 지금과 똑같은 반응을 얻었다. 부모님은 너희를 위해 희생하며 힘들게 사신다. 동생은 남자아이니까 가끔 누나를 괴롭힐 수도 있다. 가족은 소중한 사람들이니 작은 일에 연연해서 미움을 쌓지 마라. 좋은 집에 살고 학교도 다니며 마음 편하게 지내는데 대체 어째서 그렇게 부모님을 욕하는 거냐. 사춘기의 반항은 다 한 때다.
 그녀는 부모님 욕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미친 것이 아니라 가족의 상황이 비정상이라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확인받고 싶을 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모든 화목한 가정에서 다들 저녁마다 머리끄덩이를 잡고 뺨을 때리고 고함과 악다구니가 오가고 서로를 미친 사람 취급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모두 다 그렇게 산다고, 나도 그렇게 살고 있다고 누군가가 아무렇지 않게 말해 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아무도 그녀에게 확실한 답변을 해주려 하지 않았다. 화목한 가정, 아니 화목까지는 안 해도 좋으니 그저 정상적인 보통의 가정이 어떤 모습인지, 정상적인 사람이란 집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녀는 전혀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었다.
 아무도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지 않는 가정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존재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녀는 도망쳐야 했다. 가족이 비정상이고 자신이 정상이라면 도망치는 것만이 정당한 살 길이었다. 반대로 가족이 모두 정상이고 가정이란 본래 언어적 물리적 폭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녀는 그러한 생활을 견뎌낼 수 없는 모자란 사람이므로 가정을 이루지 않는 쪽이 옳았다.
 어느 쪽이 됐든, 도망쳐야 했다.
 - 내가 널 여기서 데리고 나갈게. 내가 행복하게 해줄게.
 그녀를 붙잡는 것은 그 나지막한 목소리뿐이었다. 미래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그러므로 알 수 없었다. 그 불확실성의 어느 한 구석에 숨은 희망이 그녀의 발목을 잡은 함정이었다.
 
 남동생은 공익근무를 마친 뒤에 고시 공부를 하겠다며 학교 앞에 오피스텔을 얻어 달라고 졸랐다. 그녀는 학교에서 전철로 삼십 분 거리에 살면서 따로 돈을 버는 것도 아닌 주제에 오피스텔을 얻어 달라는 동생의 요구가 어처구니 없다고 생각했지만 어머니는 동생과 하루 저녁 진지한 대화를 나눈 끝에 수락했다.
 실제로 오피스텔을 구해서 계약을 하고 이사를 하고 도시가스를 연결해주는 일까지 모두 그녀에게 떨어졌다. 그녀는 회사 때문에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어머니와 남동생에게도 그렇게 말했으나 물론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거절이나 부정의 말은 모두 핑계로 받아들여졌다. 어머니가 회사 사무실에까지 전화를 해대며 들볶는 통에 그녀는 월차를 써 가며 동생과 방을 보러 다녀야 했다. 동생이 까다롭게 굴어서 하루종일 발품을 판 끝에 간신히 마음에 드는 방을 찾아냈는데 보증금도 월세도 생각보다 비쌌다. 그래도 동생은 그곳이 마음에 든다며 막무가내로 계약하자고 우겼고, 어머니는 보증금을 자신이 내주니까 부동산 중개비용과 첫 달 월세 정도는 네가 내라고 당연하다는 듯 그녀에게 말했다.
 이사하는 날은 일요일이었다. 이삿짐은 동생이 관여할 수밖에 없었으나 용달차를 부르고 이사 비용을 대고 짐을 풀어 정리해주고 저녁밥을 해결해주는 일까지 모두 그녀의 몫이 되었다. 동생과 어머니는 신이 나서 짐을 풀며 앞으로 장만할 살림살이의 목록을 만들었고, 그녀는 두 사람을 오피스텔에 남겨두고 집으로 도망쳤다. 이후로도 어머니는 수시로 회사에 있는 그녀에게 전화하여 동생의 관리비나 가스요금을 대신 내 주거나 장 봐온 식료품이나 집에서 만든 밑반찬을 전달해 주라고 시켰다. 대체로 어머니는 동생이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인생을 걸고 희생하고 있으며 (집안이 굳이 그런 방법으로 일으켜야 할 만큼 쓰러진 적이 있었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녀가 회사를 다니는 유일한 이유와 목적은 동생의 고시 수험 생활을 뒷바라지하기 위한 것이라 상정했다. 동생은 어린 날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얼굴만 보면 빨래를 해라, 설거지를 해라, 밥을 차리고 과일을 깎아 내라고 끊임없이 명령했다.
 그녀는 어머니의 남편도, 남동생의 부모도 아니었다. 동생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어머니의 자식이었고, 그녀와 마찬가지로 동생도 자기 앞가림을 해야 할 나이의 다 자란 성인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나 동생에게나 이제 와서 그 사실을 이해시킬 방법은 없었다.
 “고시 붙으면 동생이 집안 다 일으킬 거 아냐. 아버지도 자랑스러워하실 거고. 몇 년만 참아주면 되잖아, 동생인데.”
 통장에 돈이 있는데도 가스요금도 관리비도 제때 내지 않아 매번 그녀가 달려가서 연체료를 내 주고 끊어진 가스와 전기를 연결해주고 돌아와 불평을 하면 남자는 웃으면서 달래 주었다. 그녀는 남자의 발언이 기묘하게 어머니의 주장과 일치하는 것을 깨닫고 몹시 불편한 기분이 되었다.
 “투덜거리면서도 동생한테 잘 하는 거 보면 귀여워.”
 남자가 말했다.
 “나중에 결혼하면 내 동생들한테도 그렇게 잘 해 줄 거지?”
 남자에게는 남동생이 두 명 있었다. 실제 가족 관계와 그에 따르는 현실적인 의무나 책임은 차치하고 그녀가 이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바닥 없는 공포였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조르고, 보채고, 들볶고,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하나 하나 빼앗아가서 망가뜨리고, 원하는 것을 내놓지 않으면 협박과 악다구니와 폭력으로 이어지는 헤어나올 길 없는 감옥이 그녀의 눈앞에서 자신의 가족 뿐만 아니라 남자의 가족, 그리고 그녀가 남자와 함께 이룰 미래의 가족까지 세 배로 불어나려 하고 있었다. 남자의 말에서 느낀 위협과 무의식적인 두려움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근원을 합리적으로 차분히 분석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가 느낀 것은 오로지 본능적인 두려움과, 자각할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하지만 확실하게 피어오르는 배신감이었다.
 - 내가 널 여기서 데리고 나갈게. 내가 행복하게 해줄게.
 남자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조그만 함정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따뜻하게 웃으며 더 큰 함정에 집어넣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도망쳤어야 했다.
 혹은 남자야말로 아직 기회가 많을 때 도망쳤어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 인식의 차이는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라는 것을, 사실 인생을 살면서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는 사안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그녀도 남자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가족에게 남자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언급할 기회가 없었고, 그럴 필요가 없기도 했다. 동생은 고시공부를 선언하고 문제의 오피스텔에 입주하여 이후 3년 동안 일 년에 두 번씩 종목을 바꿔가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낙방을 거듭하다가 4년째에는 급수를 낮추어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가 그나마 몇 달 지나지 않아 실질적으로 손을 놓았다. 어머니의 인내심은 첫 해에 이미 바닥이 났고, 그리하여 어머니는 실망스러운 아들보다 만만한 큰딸에게 관심을 돌려 기분전환거리를 찾고자 했다. 이 때문에 그녀는 말을 피하고 피하다가 결국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말았다.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남자를 만났던 몇 년 동안 그녀는 남자의 집에 가본 적이 있었고 남자의 어머니가 차려주는 점심을 남자와 남자의 가족들과 함께 먹은 적도 있었다. 남자의 가족에 대하여 그녀가 받은 인상은 과연 일상적인 악다구니나 폭행과는 거리가 먼, 그야말로 “화목”해보이는 집안이라는 것이었다. 남자의 어머니는 조금 지쳐 보였지만 유순하고 부드러운 인상이었으며 남자의 아버지는 그녀를 조금 어색해 했지만 친절하게 대해 주었고 남자는 부모와 형제와 함께 있을 때 편안해 보였다. 자신의 가족과 비교하여 분위기가 전혀 다른 이유가 남자의 집에는 아들만 셋이고 자녀 중에 딸이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버지가 회사원이라 집에서 가족들과 같이 살기 때문인지, 혹은 자신이 알지 못하고 상상할 수 없는 다른 요인이 있는 것인지 그녀는 몇 번이고 생각해 보았지만 뚜렷이 수긍할 만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어쨌든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남자의 집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다는 사실을 캐내고는 언제나 그렇듯이 돌연히 흥분하며 “계집애가 함부로” 혹은 “행실” 등의 썩 유쾌하지 못한 표현이 섞인 비판의 의견을 늘어놓은 후에 남자를 집으로 초대하라고 강권했다. 그녀는 무슨 핑계를 대서든 막으려 했으나 어머니는 그럴수록 더 고집스럽게 주장하며 나중에는 그녀의 전화기를 빼앗아 남자에게 직접 전화하려 했기 때문에 그녀는 결국 반대의견을 굽혔다.
 초청을 전해들은 남자는 웃으며 수락했다. 그녀는 웃을 수 없었다.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었다. 아주 나쁜 일이.
 
 식사에는 드물게 온 가족이 다 모였다. 아버지도 남동생도 집에 왔다. 그녀의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가족이 다 모인 것은 아마도 평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분위기는 그녀의 예상대로 그다지 부드럽지 못했다. 아버지는 언제나 그렇듯이 그녀에게 자꾸 뭔가를 시켰다. 숟가락이 깨끗치 못하니 바꿔 가져와라. 물을 가져와라. 밥을 더 가져와라. 너무 많이 가져왔으니 밥을 덜어와라. 국이 식었으니 다시 퍼와라. 이 반찬을 더 가져와라. 저 반찬을 더 가져와라.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부엌을 오갔고 그 사이에 아버지는 남자에게 흔히 아버지들이 딸의 남자친구에게 하는 질문을 했다. 부모님은 뭐 하시냐. 형제는 몇이냐. 어느 학교를 나왔냐. 어느 직장을 다니냐. 연봉은 얼마냐. 집은 해올 수 있냐. 남자의 아버지는 평범한 회사원이고 어머니는 전업 주부이며 남자가 장남인데 석사를 마치고 직장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모아둔 돈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듣고 나서 아버지는 평소와 똑같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부대로 복귀해야 한다고 일어나서 가 버렸다.
 어머니와 동생의 명령에 따라 그녀가 그릇을 치우고 후식을 내왔다. 그녀가 과일과 커피를 얹은 쟁반을 들고 거실로 들어섰을 때 어머니와 남동생은 남자를 앞에 놓고 그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남동생이 물었다.
 “우리 누나 중학교 때부터 사귀던 남자 있는 거 알아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남자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남동생이 설명했다.
 “매일매일 전화하고 엄마 집에 없을 때 자기 방에도 데려오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나 그런 적 없어!”
 그녀가 당황하여 거실 탁자 위에 쟁반을 탕, 소리가 나게 내려놓으며 외쳤다. 어머니와 남동생과 남자가 일제히 고개를 들어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더욱 당황했다. 쏟아진 커피를 치우기 위해 행주를 가지러 부엌으로 갔다. 뒤에서 남동생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남자 누군지 몰라도 누나가 진짜 꼬리치고 쫓아다녔나봐요. 엄마가 무진장 싫어하는데도 둘이 맨날 방에 들어가서 문 딱 잠그고 그러더라구요.
 “아니라니까!”
 그녀는 서둘러 행주를 가지고 돌아와서 신경질적으로 쟁반을 닦으며 반박했다.
 “그런 사람 자체가 없어! 중학교 때 내가 그냥 심심해서 상상으로 만들어낸 거란 말이야. 그 나이때 여자애들 혼자서 연애소설 쓰고 그러잖아!”
 “그럼 방 안에서 맨날 누구랑 얘기하고 그러던 건 뭔데? 그것도 상상으로 만들어냈어? 누나 미쳤냐?”
 동생이 그녀가 깎아온 사과를 씹으며 무척 즐거운 어린 시절의 추억이라도 이야기하듯 싱글싱글 웃었다. 여기에 대하여 그녀 혹은 남자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어머니가 끼어들었다.
 “얘가 중학교 때부터 약을 먹었는데, 그래서 그랬나봐요.”
 “약이요?”
 남자가 되물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설명했다.
 “사춘기 무렵에 바이폴라가 좀 있었거든요. 내가 의사라서 일찍 발견해서 다행인데, 그냥 두면 싸이코시스로 발전했을 수도 있고 그래서….”
 어머니는 우아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에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양가 집안에 그런 내력이 없는데, 얘는 누굴 닮았나 몰라… 너 아직도 약 제때 챙겨 먹지?”
 그녀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머니가 다시 물었다.
 “안 먹니? 어머 얘가, 큰일 나려고… 얼마나 됐는데?”
 그녀는 온몸의 피가 머리로 몰리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는 마시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걱정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너 직장 생활은 여태까지 어떻게 했니?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안 해? 하긴, 그런 얘기 해 줘도 들을 리도 없지만….”
 남자가 조심스럽게 마시던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주춤주춤 어색하게 일어섰다.
 “저기, 어머니가 급한 일이 있다고 집에 빨리 오라고 하시네요. 죄송합니다. 잘 얻어먹었습니다.”
 “아니, 벌써 가시게요? 좀 더 얘기도 하고 우리 신영이하고도 천천히 놀다 가시지….”
 어머니가 일어섰다. 그녀와 남동생도 반사적으로 따라 일어섰다.
 “아뇨, 좀 급한 일이라서요…. 죄송합니다.”
 남자는 황급히 대답하며 탁자를 피해 거실을 나와서 현관으로 갔다. 동생과 어머니는 거실에 그대로 선 채 보고 있었다. 그녀가 따라 나갔다.
 “그냥 이렇게 가면 어떡해….”
 신발을 신는 남자에게 그녀가 애원했다. 남자는 그녀를 한 번 흘끗 올려다본 뒤에 신발을 마저 신었다.
 “나 진짜 집에 가야 돼. 나중에 전화할게.”
 신발을 신으며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일어서서 현관문을 열었다.
 그녀는 황급히 따라 나갔다. 남자는 그녀 쪽을 돌아보지 않고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가지 마…. 오빠 이런 식으로 가 버리면 난 어떡해…. 엄마한테는 뭐라고 하고….”
 그녀가 다시 한 번 속삭이는 소리로 애원했다. 남자는 엘리베이터 전광판의 숫자를 열심히 들여다보다가 아까처럼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
 “너네 가족이니까 네가 감당해야지. 나중에 얘기하자.”
 그 ‘너네 가족’이라는 말에 그녀는 목소리를 계속 낮출 수 없게 되었다.
 “데리고 나가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녀가 항의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데리고 가서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오빠가 그 때 그랬잖아….”
 “내가 언제 그랬냐?”
 엘리베이터에 타려다가 남자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너 예전부터 그런 얘기 할 때마다 무슨 소린가 했는데 이제야 이해가 간다. 진짜 다시 약 먹어야 되는 거 아니냐? 꼭 큰 병원 가 봐라, 너.”
 그리고 남자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지 않도록 누르고 있던 버튼을 놓으려 했다.
 그녀의 시선이 남자의 얼굴에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지나 바닥에 놓여 있던 소화기로 향했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녀는 소화기를 집어들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는 남자의 뒤통수를 찍었다. 남자가 쓰러졌고, 그래서 그녀는 다시 내리치고, 다시 내리쳤다.
 엘리베이터 문이 남자의 시체에 걸려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피 묻은 소화기를 여전히 들고 그녀는 자기 자신 옆에 서 있었다. 십 년이 넘도록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한 번도 끊이지 않고 언제나 머릿속에 울리던 비명이 누가 언제 어디서 어째서 지르는 비명인지 그녀는 이제 확실하게 알았다. 자신이 멀쩡하지 않다는 것을, 아무도 멀쩡하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온 세상이 다 보고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길고 커다랗게 있는 힘을 다해 영원히 끊이지 않을 비명을 지르는 자기 자신 옆에 서서 피 묻은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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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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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딴생각 12.07.07 13:34 댓글 수정 삭제
    마음을 괴롭게 하는 글이네요. 두 번은 읽지 못할 것 같아요. 먹먹합니다.
    신영이 동생과 어머니에게도 소화기를 던졌다면 마음이 좀 나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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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경 12.07.07 22:33 댓글 수정 삭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저런 식으로 훈련이 되면 자기를 진짜 괴롭히는 사람한테는 대부분 꼼짝도 못 하더라구요. 엉뚱한 사람이 화풀이를 당하죠.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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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보영 12.07.10 03:15 댓글 수정 삭제
    마음이 어두워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스크롤을 내리는데 프로필에 '읽고 나면 마음이 어두워지는 이야기를 주로 쓴다'... ^^;; 구원받을 줄 알았는데.... 그런 낙관을 쉽게 하는 게 서두에 나오는 그 '간극'인가 봅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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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경 12.07.10 17:39 댓글 수정 삭제
    아 그 프로필이 예전에 합평회에선가 pena님이 하신 논평을 듣고 고친 거라서요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당 꺄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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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아 12.07.19 23:08 댓글 수정 삭제
    작품을 휩싸는 불안감이 폭력, 남동생의 도청, 환상으로 서서히 증폭되다가 마지막에 펑 터지네요.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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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경 12.07.21 22:10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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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뽁이 12.09.03 09:31 댓글 수정 삭제
    지난 번에 부천판타스틱 영화제에서 거울 작가분들을 만나는 이벤트에 참석했던 독자입니다. 그때도 말씀드렸고 지금 다시 읽어도, "비명"이 정말 저에게는 정말 와닿았어요. 작가님이 덧글로 달아주신 말씀 중, 엉뚱한 사람이 화풀이를 당하게 된다는 통찰력에도 감탄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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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경 12.09.03 18:52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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