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정도경 가면

2012.02.24 23:1002.24

 



 0.
 사거리의 교차로에 택시가 서 있다. 교차로 한복판은 약간 벗어났지만 마치 직진을 하다 만 것처럼 횡단보도 앞에 엉거주춤 서 있어서 우회전 차량에도 직진 차량에도 방해가 되었다. 지나가는 차들은 이 택시 한 대 때문에 길이 막히니까 당연히 모두들 경적을 울리며 신경질을 낸다.
 사방에서 경적을 울려도 택시는 움직이지 않는다. 안에는 아무도 없다. 시동이 걸려 있고 비상등이 깜빡인다. 그러나 운전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도 운전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1.
 시작은 소리였다. 그것은 밤중에 천장에서 들려왔다. 마치 누군가 위층에서 빗자루질을 하는 것 같았다. 슥슥슥. 가끔은 긁기도 했다. 끽끽끽. 드물게는 발걸음 비슷한 소리도 들렸다. 삐걱삐걱. 쿵쿵쿵.
 위층은 옥상이다. 한밤중에 사람이 올라가서 빗자루질 같은 걸 하면서 돌아다닐 리가 없다.
 부부는 그래서 웬만하면 무시하려 했다. 빌라에서 살아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파트에 비하면 원래 방음이 잘 안 된다고 했다. 옆집에서 나는 소리인데 천장으로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옆집이라 해도 한밤중에 빗자루질을 하는 것은 이상하다. 그러나 그건 그 집 사정이고. 이쪽 입장에서는 빗자루질 슥슥슥 하는 건 뭐 참아줄 수 있다. 진공청소기 윙윙윙 정도는 아니니까. 생활 소음은 언제나 있는 거고. 이웃끼리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소리는 점점 커졌다. 쿵쿵쿵. 쾅쾅쾅. 끄이이이이이이이이익 슥삭슥삭 삐거덕 빠각.
 옆집에 물어보았다. 이웃 사람은 소리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다. 밤에 혹시 청소 하시냐는 말에 펄쩍 뛰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일 나가야 하니까 밤에는 다들 잠 자기 바쁘지 누가 빗자루를 들고 시끄럽게 굴면서 돌아다니겠냐는 것이다. 그런 소리를 들었다면 일단 자기가 못 견뎠을 것이라고 했다. 거짓말이나 변명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밤을 기다렸다.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부부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옆집이 아니다. 벽이 아니다. 천장이다. 분명히 위쪽에서 나는 소리다.
 아침에 옥상 쪽으로 올라가 보았다. 그러나 옥상으로 가는 길은 막혀 있었다. 철문을 닫아 걸고 쇠사슬까지 감아 놓았다.
 건물주에게 전화했다. 옥상은 쓰지 않는다고 했다. 항상 잠가놓는다. 한밤중에 사람이 올라가서 빗자루질 같은 걸 할 리가 없다. 근처에 사는 애들이 밤에 몰래 올라가서 노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에도 집주인은 회의적이었다. 도대체 잠을 잘 수가 없다고 아내가 화를 내자 마지못해 한 번 올라가 보겠다고 했다.
 올라가 본 것 같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소리는 여전히 밤마다 지속되었다.
 집주인에게 다시 전화했다. 이번에는 남편이 전화해서 당장 같이 옥상에 올라가자고 요구했다. 같이 올라가서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내 눈으로 보고 저 소리를 못 내게 해야겠다고 언성을 높였다. 그제야 집주인은 좀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지금 당장은 곤란하고 나중에라도 사람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관리직원이 온 것은 저녁이 아니라 거의 밤중이 다 되었을 때였다. 건물 관리인이라면 나이 지긋한 아저씨일 거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데, 초인종을 누른 사람은 어린 남자애였다. 얼굴이 지나치게 하얗다. 낡아빠진 야구모자 밑으로 보이는 머리카락은 검은색이 아니라 어쩐지 투명해 보이는 옅은 갈색이었다. 문을 열고 남편이 나오자 소년의 표정 없는 하얀 얼굴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소년은 말을 더듬었다.
 “지, 지, 지붕에서, 그, 저, 소, 소, 소리가, 드, 들리신다구요?”
 남편은 소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고등학교나 졸업했나? 이런 어린애가 왜 빌라 관리사무실에서 일하지? 집주인 손자인가?
 “갑시다.”
 남편이 내뱉었다. 그다지 친절한 말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존댓말을 해준 것이 고마웠는지 소년은 두말없이 돌아서서 앞장섰다.
 계단을 반 층 올라가서 철문으로 다가갔다. 커다란 맹꽁이 자물쇠에 열쇠를 꽂아서 돌렸다. 녹이 슬었는지 잘 돌아가지 않아서 손으로 열쇠와 자물쇠를 이리저리 비틀며 애를 써야 했다. 자물쇠를 열고 쇠사슬을 풀고 다시 철문에 열쇠를 꽂아 돌렸다.
 소년이 오랫동안 각종 자물쇠와 열쇠와 씨름하는 동안 남편은 뒤에 서서 보고 있었다.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소년이 안간힘을 쓰며 밀었다. 문고리를 잡고 씨름하는 소년의 오른손 손등, 엄지와 검지 사이에 조그만 별 모양 문신이 언뜻 눈에 띄었다.
 그 순간 철문이 간신히 조금씩 물러나면서 정말로 내키지 않는다는 듯 길게 녹슬고 오래된 소리를 냈다.
 녹슨 철문 밖은 밤의 어둠이었다. 남편이 앞으로 나서려 하자 소년이 주의를 주었다.
 “바, 발밑에, 조, 조, 조심하세요.”
 남편은 대답하지 않았다. 철문을 밀어 열고 문밖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힘껏 밀린 철문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아, 저기, 그….”
 소년이 뒤에서 뭐라고 말하려다가 일단은 손전등을 비추어 주었다.
 건물주가 옥상에 대해 어째서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는지 남편은 등 뒤에서 빛을 비춘 순간 이해할 수 있었다. 소년의 말대로 그곳은 옥상이 아니라 지붕이었다. 반대편 끝에 있는 환기탑까지 사람이 한 명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길이 나 있을 뿐 양 옆은 경사진 기와지붕이었다. 한밤중에 이런 곳에서 정말로 빗자루질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미친 것이 틀림없다. 지붕에는 조명이 전혀 없었다. 어둠 속에서 자칫 발을 헛디디면 그대로 5층 건물 아래로 곤두박질치기 딱 알맞았다.
 남편은 맥이 탁 풀렸다.
 “내, 내일, 해, 해, 해 뜨고 나면, 다, 다시 와서, 좀 더 저, 점검을 해 볼게요.”
 등 뒤에서 소년이 중얼거렸다.
 “호, 혹시 지, 지붕 밑으로, 고, 고, 고양이 같은 게, 드, 들어갔을 지도 모, 모르니까요….”
 내려가자는 뜻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붕 위에는 더 이상 볼 것이 없었다.
 소년이 먼저 몸을 돌렸다. 따라서 돌아서려다가 남편은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내려가려는 소년을 불렀다.
 “손전등.”
 “에?”
 소년이 계단을 이미 반쯤 내려다가다 고개를 돌려 올려다 보았다.
 “손전등 좀 줘 봐요.”
 남편이 손을 내밀었다. 소년은 머뭇거렸다.
 “아, 저기….”
 “잠깐이면 돼요.”
 남편은 성큼성큼 걸어내려가서 빼앗다시피 손전등을 받아들었다.
 “아…. 안 되는데….”
 소년이 뒤에서 중얼거렸다. 남편은 무시하고 빨리빨리 걸어 올라갔다. 철문을 열어젖혔다. 지붕을 비추었다.
 반대편 환기탑 앞에 사람이 서 있었다. 손전등 불빛 속에서 윤곽이 더 뚜렷하게 보였다. 밤 바람에 치마와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남편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말을 걸려다가 멈추었다. 어둡고, 밤이고, 지붕에는 난간 같은 것도 없다. 잘못해서 놀라게 했다가는 떨어질 지도 모른다.
 한밤중에 건물 지붕 위에 여자가 서 있는데 어째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말을 거는 대신 남편은 손전등을 조금 치켜들었다. 여자의 모습은 윤곽이 검은 색으로 뚜렷하게 보였지만 이목구비라든가 다른 세부적인 형체는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이쪽에서 손전등을 비추는데 어째서 마치 역광을 받은 것처럼 까맣게 보이는지, 그 역시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지만 남편에게는 그런 점이 이상하다는 생각 또한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 여자가 그런 여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손전등 불빛을 받고 여자는 이쪽을 돌아보았다. 혹은 그런 식으로 움직인 것 같았다. 남편은 여자를 불러보아야 할지 아니면 말을 걸지 않는 편이 안전할지 다시 한 번 고민했다. 그 때 여자가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걸음걸이는 느리고 조심스러웠다. 처음에 휘날리는 치마와 머리카락을 보았을 때는 머리가 길어서 당연히 젊은 여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걸어오는 모습이나 가까워지는 형체의 윤곽을 보니 사실은 아주 나이가 많은 것 같다고 남편은 짐작했다.
 여자는 천천히 힘겹게 걸어왔다. 어쨌든 조심해서 안전한 곳으로 오고 있으니 잘 달래서 데리고 내려가야겠다고 남편은 생각했다. 여자가 바로 앞까지 다가왔을 때 남편은 손을 뻗었다.
 여자는 사라져 버렸다.
 남편은 당연히 어리둥절했다. 손전등으로 사방을 비추었다. 여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아래로 떨어졌다고 생각하고 남편은 공포에 질렸다. 머뭇거리며 뭔가 말하려고 더듬거리는 소년을 끌고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그러나 빌라 주위를 몇 번이나 빙빙 돌았지만 여자의 흔적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기다리다 못한 아내가 찾으러 나왔다. 빌라 뒤편에 멍하니 서 있는 남편을 발견했다. 남편이 자초지종을 말하자 아내는 몹시 못 미덥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편은 소년이 자신의 말을 뒷받침해줄 것을 기대했다. 아내는 아내대로 소년에게서 뭔가 좀 더 합리적인 이야기를 듣기를 원했다.
 그러나 소년은 대단히 곤란한 표정으로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을 몇 개 우물거릴 뿐이었다. 남편과 아내가 각자 뭔가 더 말하려고 하자 소년은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매우 빠르게 중얼거리고는 남편의 손에서 손전등을 빼앗다시피 받아들고 가 버렸다.
 
 2.
 여자는 집안으로 들어왔다.
 지붕을 살펴보고 돌아온 뒤부터 천장 위에서 나던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부부는 만족했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난 뒤에 아내는 안방 벽 한쪽 모서리에 거무스름한 얼룩이 생긴 것을 눈치 채었다. 모서리 아래쪽이라 각도나 위치상 언제나 그림자가 져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잘 들여다보지 않으면 얼룩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얼룩이 언제부터 생겨 있었는지는 불분명했다. 아내는 쪼그리고 앉아서 들여다보았다. 액체가 스며들어 생긴 얼룩이 아니라 벽지에 올올이 조그만 검은 가루 같은 게 묻어 있다. 걸레로 문질러 보았다. 얼룩은 조금 퍼지면서 희미해졌다. 아내는 조금 더 세게 문질러 보았다. 얼룩이 더 희미해져서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으므로 아내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얼룩은 다시 돌아왔다. 아내는 며칠 뒤에 같은 자리에 조금 더 진한 얼룩이 조금 더 크게 퍼져 있는 것을 알았다. 걸레로 문지르자 다시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모서리가 만나는 곳이라서 걸레질을 하기가 쉽지 않았고, 벽 앞에 선 아내 자신의 그림자와 걸레를 든 손의 그림자 때문에 얼룩이 정확히 보이지 않기도 했다. 그래서 아내는 걸레로 문지르는 부위만큼 얼룩이 퍼지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다음날 얼룩은 퍼진 만큼 커졌고 원래대로 진해졌다. 닦아내면 조금 희미해지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 때뿐이었다. 닦은 만큼 퍼졌고, 조금씩 더 진해졌다.
 그리고 밤마다 들리던 천장 위의 소리가 다시 돌아왔다.
 소리를 들은 것도 아내였다. 남편은 밤에 일하러 나가야 했다. 밤에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으면 이전에 들었던 스스슥, 스스슥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소리가 아주 작았다. 방에 혼자 있지 않았다면 아내는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방안은 조용했고, 밤에 한 순간 조용해지면 조그만 소리도 크게 들릴 때가 있었다. 그래서 아내는 그 소리를 들었다.
 아주 작은 빗자루로 바닥을 살살 쓰는 듯한 소리였다. 아내는 방안에 벌레가 있다고 생각했다. 불을 켜고 방안을 살펴보았으나 물론 아무 것도 없었다. 다음날 아내는 살충제를 사다가 방안 구석구석에 뿌렸다.
 소리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작아지지도 커지지도 않았다. 잠을 자는 데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으므로 아내는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므로 벽에 생겨난 얼룩과 밤에 나는 소리와 방안에 떠도는 뭔가 타서 그을린 듯한 냄새를 연결지어 생각하지도 못했다.
 남편은 교대 시간이 바뀌어 저녁에 일을 나갔다. 밤새 운전을 하고 아침에 돌아와서 낮 동안에는 잠을 잤다. 대낮의 주택가는 때로 밤 시간보다 조용했다. 어른들은 직장에,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근방에는 노인과 주부들만 남는다. 물건을 파는 트럭이 와서 가격을 외쳐대거나 자식들을 모두 학교나 일터로 내보낸 어르신들이 모여서 한담을 나누는 시간이 되기 전의 한 순간 골목에는 정적이 감돈다. 그럴 때 해가 비쳐 너무 밝으면 잘 수가 없었으므로 남편은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그러면 방 안은 즉시 모든 색과 빛이 한 옥타브 낮아지면서 조용하고 평온한 그늘 속에 잠겼다.
 그 절반쯤 가려진 방안의 어스름 속에서 벽 모퉁이의 얼룩이 일어나 남편에게 다가왔다.
 지붕 위에서 처음 보았을 때 남편은 젊은 여자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나이든 여자라고 생각했다. 침대 위로 올라왔을 때 남편은 어린 소녀라고 생각했다. 가볍고, 작고, 빨랐다. 스스슥.
 언제나 첫 한 번이 가장 강렬하다. 마약을 해본 사람들은 그 첫 한 방의 기억을 잊지 못해 되풀이해서 약을 찾다가 재산과 가족과 직장과 모든 것을 잃은 후에도 점점 더 많은 약으로 첫 한 방의 느낌을 재현하려 노력하다가 결국 약물과용으로 죽는다. 도박을 해본 사람도 마찬가지로 첫 대박을 터뜨렸을 때의 기분을 잊지 못하고 그 한 방을 찾아서 가진 모든 것을 털어넣는다. 첫사랑의 추억이 평생을 가는 것도 정도가 약할 뿐 비슷한 이치다. 자극의 내용이 무엇이 됐든, 도파민이 처음으로 뇌 속에 흘러넘쳤을 때의 쾌감은 보통의 인간이 일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가능한 모든 감각을 넘어선다. 그 첫 한 번의 쾌감을 겪어본 뒤에도 알면서 의식적으로 거부할 수 있을만큼 금욕적인 사람은 통계적으로 얼마 되지 않는다. 그 쾌감을 좇아 가진 모든 것을 바치고 평생을 바치고 목숨을 바치는 것이 어찌 보면 평범한 사람의 당연한 반응인 것이다.
 남편은 그렇게 걸려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어린 소녀인지 나이든 할머니인지, 사람인지 귀신인지, 무엇을 하려는지 생각도 하기 전에 여자는 이미 스스슥 침대로 다가와서 남편 위에 올라타 있었다. 집안에 그들을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내는 일하러 갔고 아이들은 학교와 유치원에 갔다. 커튼에 가려진 햇빛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다 사라질 때까지 검은 얼룩의 여자가 남편을 지배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마찬가지로, 감당할 수 없는 쾌락과 평생 마주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 또한 행운아다.
 저녁에 일을 마친 아내가 집에 돌아왔을 때 남편은 눈을 뜬 채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불러도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내는 남편을 건드려 보았다. 그제야 남편은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꿈에서 깬 것처럼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내가 식사를 차려주려 했으나 남편은 먹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이 비틀거리며 옷을 주워 입고는 일하러 갔다.
 일하는 내내 계속해서 남편은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날 밤에 심각한 사고가 나지 않고 아무도 죽지 않은 것은 그저 운이었겠지만 남편을 위해서 그것이 행운이었는지 불운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남편은 평소보다 일찍 일을 마치고 새벽녘에 집에 돌아왔다. 자다 깨어난 아내가 반겨도 본 척도 하지 않고 씻지도 않고 겉옷과 양말만 대충 서둘러 벗어던지고 창백하고 초점없는 눈으로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어디 아프냐고 아내가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남편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을 좀 자면 나아질 것이라 생각한 아내는 굳이 방해하지 않았다.
 남편은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각자의 일과를 위하여 집을 나갈 때까지 한두 시간 정도 단잠을 잤다. 가족이 모두 나가고 햇빛 속에 집안이 조용해지는 시간이 돌아오자 벽 모서리의 검은 얼룩 속에서 여자가 되살아났다.
 
 3.
 여자가 누구인지, 어째서 자신에게 왔는지, 남편은 알지 못했다. 궁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좀체로 물어볼 만한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고, 물어보아도 여자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남편은 다른 것을 전혀 하지 않게 되었다.
 중독자가 무엇이 됐든 일을 하고 경제생활을 유지하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중독의 대상을 계속 공급할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약중독자는 약을 사야 하고 알콜중독자는 술을 사야 하며 도박중독자는 판돈이 필요하다.
 남편에게는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으면 그의 중독은 알아서 스스로 다가왔다.
 중독이란 그 중독의 대상이 주는 쾌감 이외에 삶의 다른 요소들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상태이다. 중독자에게 있어 존재의 모든 것은 그 중독의 대상에게만 집중된다.
 그래서 남편은 언제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부분적으로는 남편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꿈속을 헤매는 상태로 운전을 하면서 사고도 내지 않고 아무도 다치지 않는 날들이 언제까지나 지속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남편은 사고를 냈다. 다행히 사람은 다치지 않았다. 그러나 몹시 멍청한 사고였다. 회사 차고에서 차를 빼려다가 옆에 세워둔 택시를 들이받았다. 그러나 남편은 개의치 않고 오로지 자신이 모는 차를 빼서 거리로 나가려 했다. 그러기 위해 남편은 기이한 방향으로 전진과 후진을 되풀이했으며 그 과정에서 다른 차를 연달아 긁거나 들이받았다. 동료 기사들이 화를 내고 회사의 사무직원들이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뛰어나왔다. 여러 가지 아름답지 못한 과정을 거쳐 차에서 끌려 내려왔을 때 남편은 누가 보아도 운전대를 잡아서는 안 되는 상태였다. 눈동자는 초점없이 풀어졌고 양쪽 눈밑에 짙은 그림자가 져 있었으며 입술이 약간 벌어져서 침이 흐르고 있었다. 이름을 부르면 돌아보기는 했으나 동작은 비정상적으로 느렸고 누가 뭐라고 물어도 아무런 대답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회사 동료가 아내에게 전화했다. 아내는 깜짝 놀라 회사로 달려왔다. 남편의 상태를 보고 병원으로 데려갔다. 물론 병원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응급실에 앉아서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다가 남편은 집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의사를 보지도 못하고 응급실 침대 위에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었기 때문에 아내는 조금 더 기다려서 진찰을 받고 가자고 제안했다. 남편은 집에 가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을 데리고 집으로 왔다.
 집에 돌아와서 남편은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아내에게는 나가라고 화를 냈다. 아내는 남편이 걱정되어 뭔가 먹을 것을 만들어 주거나 따뜻한 것을 마시게 하려고 했다. 무얼 해주려 해도 남편은 점점 더 언성을 높이며 점점 더 격렬하게 화만 냈다. 그래서 마침내 아내는 그 날 일을 쉬고 남편을 보살펴 주려던 예정을 포기하고 다시 일하러 갔다. 그리고 남편이 집에 혼자 남은 뒤에 벽 속에서 검은 얼룩의 여자가 나타났다.
 이렇게 해서 남편은 언제나 침대에 누워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남편이 언제나 침대에 누워 있게 되었으므로, 그러나 두 아이가 학교를 다니고 옷을 입고 밥을 먹어야 했으므로, 아내가 계속 일을 해야 했다. 아내가 더욱 긴 시간 동안 일을 해야 했다.
 아이들이 학교와 유치원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남편은 집 밖으로 아이들을 쫓아냈다. 처음에는 푼돈을 쥐어주고 달래서 밖으로 내보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에게 쥐어줄 돈이 더 이상 없었기 때문에 남편은 아이들을 맨손으로 내쫓게 되었다. 어느 날 남편은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바꿔버리고 아이들이 집에 돌아왔으나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갈 곳이 없어진 아이들은 골목을 헤매며 놀다가 배가 고프고 지치자 엄마가 일하는 곳으로 갔다.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초인종을 누르고 소리를 지르고 집 전화와 남편의 휴대전화로 전화했으나 남편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처음에는 화가 났으나 곧 남편이 집안에서 심하게 아프거나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공포에 질렸다. 아내는 집주인에게 연락했다. 집주인이 아무리 전화해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급한 대로 열쇠 수리공을 불렀다. 배불뚝이에 대머리가 벗겨진 열쇠 기술자는 빨리 오지 않았고 와서는 여러 가지로 불평이 많았다. 어쨌든 현관문을 뜯고 아내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남편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정상적인 생활을 그만두고 검은 얼룩의 여자와 함께 지내는 동안 남편은 꼬챙이처럼 말랐다. 팔다리는 뼈와 힘줄의 윤곽이 피부 위로 가닥가닥 도드라져 보였고 얼굴은 뺨이 홀쭉하게 들어갔고 그에 비해 눈만 세 배쯤 커져 보였다. 남편은 그 커다란 눈으로 초점 없이 방 한 구석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내는 남편을 데리고 병원에 가려 했다. 그러나 침대 밖으로 끌어내려 하자 남편은 몸부림을 치고 욕을 하면서 격렬하게 저항했다. 아내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당장 주변에 딱히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포기하고 남편을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침대에 누워 있도록 내버려두는 한 남편은 얌전했다. 그러나 음식을 먹으려 하지도 않았고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침대에 누운 채로 눈을 굴려 방 한 구석을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아내도 남편이 그토록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 무엇인지 같은 곳을 들여다보면서 알아내려 했으나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아이들에게 저녁을 먹여 재운 뒤에 아내는 다시 한 번 남편과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물론 벽돌 벽을 마주하고 앉아서 대화를 시도하는 것과 비슷한 결과를 얻을 뿐이었다. 절망한 아내는 움직이지 않는 남편 옆에 앉아서 말라 비틀어져 차갑게 뼈만 남은 남편의 손을 잡고 울었다. 남편은 슬그머니 잡힌 손을 빼냈다. 그것이 그 날 하루종일 남편이 보인 유일한 움직임이었다.
 
 아내는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그리고 한밤중에 남편의 헐떡이는 소리와 신음소리를 듣고 잠이 깨었다. 잠이 아직 덜 깬 채로 어둠 속에서 고개를 돌렸을 때 아내는 불그스름한 형체가 남편을 감싸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남편은 옷을 입지 않은 알몸이었고, 헐떡이는 소리나 신음소리는 아내가 걱정했던 종류와는 전혀 달랐다.
 상황을 깨닫고 아내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침대에서 튕겨 일어나 문 옆으로 달려갔다. 조명등 스위치를 올렸다. 손가락이 스위치를 누르기 전에 침대 쪽을 돌아보았다. 1초가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다.
 아내가 돌아보았을 때 불그스름한 형체는 침대 발치에 서 있었다. 어두운 방안에서 형체는 기묘하게 반투명한 핏빛으로 보였다. 형체는 한쪽 손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리고 말했다.
 - 꺼내 주세요.
 귓가에 속삭이는 나지막하고 약간 목쉰 말소리를 아내는 분명하게 들었다.
 불을 켰을 때 물론 형체는 사라지고 없었다.
 아내는 알지 못했으나 벽 모서리의 검은 얼룩도 사라졌다. 그리고 정체불명의 여자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4.
 여자가 사라진 후에도 얼마 동안 남편은 침대에 누워서 여자를 기다렸다.
 인간이 어째서 자기 파괴적인 행동에 집착하는 것인지 확실하게 설명할 방법은 없다. 어느 심리학자가 이런 실험을 했다. 생쥐를 넣는 우리 안에 조그만 레버를 설치했다. 그 레버를 건드리면 쥐가 전기 충격을 받게 되는 장치였다.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한 고통을 느낄 수 있을 만한 전기 충격이다. 그러나 물론 우리가 꽤 넓기 때문에 쥐가 마음만 먹으면 그 레버를 전혀 건드리지 않고 피해 다닐 수도 있다.
 그런 장치를 한 뒤에 우리 안에 쥐를 한 마리만 넣었다. 그리고 물과 먹을 것을 충분히 주었다. 쥐는 필요에 따라 먹고 마신 뒤에 우리 안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실수로 레버를 건드렸다. 전기 충격과 함께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 쥐는 찍찍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 레버를 피해 다닌다.
 우리 안에는 물과 먹을 것이 충분하다. 어느 모로 보나 편안한 환경이다. 그러나 그뿐이다. 동료도 없고 번식할 짝도 없고 갖고 놀 장난감도, 달리 할 일도 없다. 쥐는 물과 먹을 것과 텅 빈 공간 속에 혼자다.
 그렇게 일정 시간이 지나자 쥐는 스스로 전기충격 레버에 다가가서 한 번씩 건드리게 되었다.
 평온무사하지만 지루한 것보다는, 아프더라도 가끔 가다 뭔가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편이 쥐로서는 더 흥미로웠던 것이다.
 사람도 어떤 측면에서는 생쥐와 본질적으로 그다지 다르지 않다.
 전혀 다른 상황과 전혀 다른 문맥에서 진행된 비슷한 실험이 또 있다. 생쥐를 넣은 우리 안에 똑같이 물과 먹을 것을 충분하게 주었다. 이번에는 번식할 짝과 함께 지낼 동료와 가지고 놀 장난감도 넣어주었다. 그리고 레버를 장치했다. 누르면 희석된 헤로인이 흘러나오는 레버다.
 마약의 맛을 본 쥐들은 곧 모든 것을 중지했다. 번식도, 놀이도, 심지어는 기본적인 생존을 위해 먹이를 먹고 물을 마시는 것까지, 살아 있는 생물이 하는 정상적인 활동은 전부 그만두었다. 오로지 레버를 누르고 또 누르며 헤로인, 헤로인, 헤로인에만 탐닉했다. 그리고 영양실조와 약물과용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두 죽었다.
 남편이 처한 상황은 후자의 경우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실험실의 생쥐 쪽이 인간보다 더 팔자가 좋아 보이기도 한다.
 택시 운전으로는 최소한의 생활비만 벌기도 힘들다. 요즘처럼 경기가 안 좋을 때는 아무도 택시를 타지 않는다. 연료비는 치솟는데 운임은 그대로다. 개인 택시라면 경우가 좀 다를 수도 있지만 회사 소속의 법인 택시는 사납금 넣기조차 빠듯하다. 돈을 벌기는커녕 일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 돈을 털어 사납금을 채워넣어야 할 때도 있다. 벌써 언제부터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집주인이 전세금을 올렸다. 살던 아파트를 나와서 더 후미진 곳에 있는 더 작은 빌라로 이사오게 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빌라라고 해서 꼭 더 싼 것은 아니었다. 집을 빼줘야 하는 날짜는 점점 다가오는데, 부부가 가진 돈으로는 대체로 수도권 근방 어디에도 살 곳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부는 다급한 김에 상당히 불리한 방식으로 계약을 했다. 전세 보증금을 낮추는 대신 일부를 월세로 주기로 한 것이다.
 남편의 수입은 여전한데 매달 월세까지 내야 하니 더 작은 집으로 옮겼는데도 매달 나가는 돈은 오히려 더 늘었다. 그래서 아내는 가까운 커피숍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근 십 년간 아이 둘을 낳아 기르고 집안 살림에 힘쓰며 열심히 살아왔으나 일자리를 구하려니 주부로서의 이력은 아무런 자격도 기술도 증명도 되지 않았다. 다행히도 커피숍 사장은 비슷한 연배의 기혼 여성이고 비슷한 나이의 아이도 있어서 첫눈에 마음이 맞았다. 일자리도 비교적 쉽게 구했고 사장이 근무시간도 최대한 편의에 맞게 조절해 주었지만 아내가 느끼기에 시급이 터무니없이 적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경력이 좀 쌓이면 시급은 차차 올려주겠다고 사장이 위로했지만 아내는 그 말을 그다지 믿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자란다. 필요한 돈은 점점 더 많아질 것이었다. 아내는 커피숍을 그만두고 식당 일을 알아볼까 궁리했다. 시급은 약간 더 많았지만 식당은 어디든지 일하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아이들이 아직 어린 지금으로서는 무리였다.
 그들은 아마도 더 작은 집으로 옮기고, 더 긴 시간 더 힘들게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아무리 몸부림쳐도 더 나아질 것이 없는 미래를 정면으로 마주대하고 시시각각 싸워야 할 것이었다. 남편도 아내도, 더 작은데 더 돈이 많이 드는 변두리의 빌라로 이사오면서 이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이사한 부부의 새 집은 보금자리가 아닌 함정이었다. 누군가 그들을 우리 속에 집어넣었다. 쾌락이 흘러나오는 레버가 의도적으로 그곳에 장치되어 있었다. 남편은 모르고 우연히 그 레버를 눌렀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의도한 대로 그 함정에 걸려든 것이다. 평범하고 안락한 보통의 생활이라는 것이 얼마나 깨지기 쉽고 연약한 것인지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물론 아내의 입장에서는 상황을 이렇게 거시적으로 논평할 여유가 없었다.
 
 남편의 몸을 짓누른 핏빛 형체를 목격하고 자신의 귓가에 속삭이는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은 뒤에 아내는 당연히 공포에 질렸다. 이런 종류의 일에 대하여 관심도 없고 아는 바도 별로 없었던 아내는 동네 어귀에서 언뜻 보았던, 사찰 표시를 내걸었지만 엄밀히 말해 불교 사찰과는 별 상관이 없는 곳을 찾아갔다. 사찰이 아니면서 사찰 표시를 내걸고 영업하는, 승려가 아니면서 승복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은 아내가 들어오자마자 눈을 부라리며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아내가 사정을 설명하려 했으나 승복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내를 억지로 바깥으로 밀어내었다. 아내를 골목으로 내던지다시피한 뒤에 철문을 쾅 닫기 직전에 승복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이 해준 유일한 조언은 지독한 것이 옮겨 붙었으니 얼른 이사를 가라는 한 마디였다.
 아내는 이와 비슷한 영업장에 한 군데쯤 더 찾아가보고 이후 두세 군데 더 전화를 해 보았으나 맨 처음 갔던 곳이 그나마 가장 진짜에 가깝다는 결론에 도달해야 했다. 다른 곳에서 유사한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아내의 설명을 진지하게 들어준 뒤에 (전화한 경우 정보이용료가 부과되었다) 적게는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비용을 들일 것을 권하였다. 부적, 굿, 제사, 기도, 정성 – 사용하는 용어는 여러 가지로 달랐으나 핵심은 모두 돈이었다.
 아내에게는 물론 그런 돈이 없었다. 아내는 한층 더 깊은 절망에 빠져 처음에 찾아갔던 사찰 표시를 내건 영업장에 다시 찾아갔다. 승복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은 이번에는 철문을 열어주지도 않았다. 철문 안쪽에서 소리지르는 목소리를 가만히 귀 기울여 듣고 해석한 바,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빨리 그 집을 떠나라’ 혹은 그 비슷한 내용이라고 아내는 추측했다.
 그리고 아내는 집으로 돌아왔다. 안방으로 가서 침대에 드러누운 남편을 쳐다보았다. 남편은 빼빼 말라서 뼈와 가죽만 남은 채로 밥도 먹지 않고 일도 하지 않고 병원에도 가지 않았다. 자신이 방에 들어와도 눈도 마주치지 않고 쳐다보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아이들이 방에 들어오거나 나가도 마찬가지로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남편이 삶의 모든 것을 걸고 기다리는 것은 오직 하나, 벽의 얼룩 속에서 나타났던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그스름한 형체뿐이었다. 남편이 차라리 다른 여자 – 살아 있는 현실의 여자와 현실적으로 바람이 났다면 훨씬 덜 무섭고 더 속이 편했을 것이라고 아내는 누워있는 남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승복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이 철문 안쪽에서 외쳤던 말이 점점 더 슬기로운 조언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내는 짐을 챙겨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갔다.
 가족이 떠나고 검은 얼룩의 여자도 사라진 뒤에 집은 진실로 텅 비었다.
 남편은 그 빈 집의 침대 위에 혼자 남았다.
 
 5.
 남편은 텅 빈 집안에서 며칠간 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남편과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이런 시점에서 선택지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 그 상황이 중독 때문이든, 쾌락 때문이든, 지루함 때문이든, 고통 때문이든, 절망에 빠졌든 함정에 빠졌든, 스스로 무덤을 파고 걸어들어가는 것을 알았든 몰랐든 – 뭐가 어찌 됐든지간에 세부 사항을 전부 정리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할 때 가능한 행동 노선은 오로지 두 가지다. 중독 이전의 자유로운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거나, 아니면 중독의 상태를 지속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한 개인의 근본적인 힘과 인간성이 시험에 처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남편은 주저 없이 중독의 상태를 선택했다.
 ‘주저 없이’다.
 시작은 함정이었지만, 그에게는 한 번 선택의 여지가 주어졌다. 그리고 그는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후의 전개는 많은 부분 자업자득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어찌 보면 사람은 본래 그 정도로 약한 동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특별히 못날 것도 없지만 딱히 뛰어나게 훌륭할 것도 없는 보통의 사람이 이 남편과 같은 여러 곡절을 겪은 후 남편이 처한 것과 같은 특이한 상황에 처한다면 일반적으로 할 만한 보통의 행동을 남편은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겠는가.
 
 검은 얼룩의 여자가 사라진 후에 남편은 참으로 오랜만에 절체절명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체감했다. 그리하여 생존의 필요를 어느 정도 달래고 난 뒤에 남편은 곧바로 검은 얼룩의 여자를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여자는 이미 집안에 없었다. 여자가 언제나 나타나던 벽 모서리에 다가가 문질러도 보고 불러도 보고 소리쳐도 보았지만 여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은 여자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지붕에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물론 옥상으로 가는 철문은 잠겨 있었다. 그래서 남편은 집주인에게 전화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집주인은 몹시 짜증난 목소리로 옥상은 사용하지 않으며 올라가봤자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고 무엇보다도 위험하기 때문에 입주자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해줄 수는 없다고 어린아이에게 말하는 것처럼 누누이 설명했다. 남편은 지난 번에 통했던 핑계를 다시 끄집어내서 천장에서 소리가 난다고 주장했다. 남편이 언성을 높이자 집주인은 지난 번처럼 몹시 귀찮아하면서 나중에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다. 남편은 전화를 끊기 전에 지난 번에 보냈던 남자애를 다시 보내달라고 말했다.
 “남자애? 무슨 애요?”
 집주인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남편이 설명했다.
 “그 왜, 고등학교 갓 졸업한 것 같이 생긴 어린 남자애 있잖아요. 얼굴 하얗고, 말 더듬고….”
 “그런 애 보낸 적 없어요.”
 집주인이 잘라 말했다.
 “아니, 분명히 왔었는데, 모자 쓰고, 갈색 머리에 말을 심하게 더듬는….”
 집주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남편이 다시 뭔가 말하려 하는데 집주인이 가로막았다.
 “얼굴이 하얗고, 머리가 갈색이고,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구요?”
 “예. 아주 어린 남자애였는데….”
 남편의 말을 집주인이 또 다시 가로막았다.
 “그래서 그 남자애가 뭐라고 하던가요? 자기가 누구라고 그래요?”
 “관리소 직원이라던데요.”
 남편이 대답했다. 집주인이 빠르게 말했다.
 “관리소가 어디 있어요. 빌라에는 원래 관리사무실이 없어요.”
 남편은 순간적으로 목이 탁 막혔다.
 집주인이 물었다.
 “그래서, 그 관리소 직원이라는 남자애가 또 뭐라고 그래요? 혹시 집안에 들어왔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집주인의 목소리가 너무 심각했기 때문에 남편은 조금 겁을 먹었다.
 “옥상 문을 열어주길래, 지붕으로 나갔었는데….”
 “문을 열어줘요?”
 집주인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 남자애가? 문을 열어줬다고? 어떻게? 무슨 수로?”
 “열쇠를 갖고 있던데요.”
 “열쇠?”
 집주인이 말했다. 질문이라기보다는 비명에 더 가까웠다.
 “무슨 열쇠? 옥상 철문 열쇠?”
 “예, 그거하고 철문 체인에 걸어둔 자물쇠 여는 열쇠하고….”
 “체인까지 열었다고?”
 이제 집주인의 목소리는 비명이었다.
 “가만 있어봐요. 이거 신고해야겠는데. 옥상 열쇠까지 훔쳐서 버젓하게 드나들고…. 나 이거 지금 신고할 거니까, 경찰에서 조사하러 오면 잘 좀 얘기 좀 해 줘요. 인상착의하고, 아까 거기, 말 더듬는다고, 그런 특징하고…. 도대체 어떤 새끼야….”
 그리고 집주인은 마구 흥분하며 전화를 끊었다.
 남편은 밖으로 나갔다. 계단을 반층 올라갔다. 옥상으로 가는 철문 앞에 섰다.
 철문에는 이전처럼 육중한 쇠사슬이 감겨 있었다. 남편은 쇠사슬을 살짝 당겨 보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사슬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쇠사슬에 매달린 자물쇠는 웬만한 남자 주먹만큼 커 보였다.
 남편은 철문 앞에 선 채로 전화기를 들여다보았다. 관리소 직원을 사칭한 어린 남자아이는 명함도 연락처도 남기지 않았다. 당연히 이름도 모른다. 이제 와서는 정체를 전혀 알 수 없었다.
 전화기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남편은 망연히 철문의 잠긴 문고리를 만지며 문앞에 한없이 서 있었다.
 
 6.
 남편은 여자를 기다렸다.
 아내를 기다린 것이 아니다. 아이들도 기다리지 않았다. 남편은 검은 얼룩의 여자를 기다렸다.
 이웃들에게 물어보았지만 뾰족한 답은 얻지 못했다. 답을 얻기보다는 미친 사람 취급을 더 많이 당했다. 집주인에게는 연락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었다. 관리소 직원을 사칭하고 옥상 열쇠까지 가지고 있었던 신원불명의 남자애 때문에 집주인은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었다.
 경찰이 오기는 왔다. 그러나 맥빠진 대화를 몇 마디 나누는 것으로 남편이 관련된 조사는 끝나 버렸다. 관리인을 사칭한 소년에 대해 더 자세한 정보는 아무 데서도 얻을 수 없었다. 남편 자신이 아는 것이 최대한의 정보였다.
 그러나 남편은 중독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쉽게 물러설 수 없었다. 이웃들과 집주인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남편은 동리 주변을 탐문하고 다녔다. 역시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근처 수퍼마켓에서 몇 가지 물건을 사면서 남편은 나이 지긋한 수퍼 여주인에게 빌라의 옥상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 때 소주 한 병과 새우깡 한 봉지를 들고 남편의 뒤에 서 있던 할아버지가 끼어들었다.
 “거기 옥상에서 사람 죽었어.”
 “예?”
 남편은 몸을 돌렸다. 할아버지는 남편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마치 그저 지나가는 말인 듯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려고 노력하는 티를 너무 내면서 말했다.
 “거기 건물 옥상에서 사람 죽었다고. 원래 옛날에 다 쓰러져가는 연립주택이었는데 빌라 만들겠다고 뜯어고치다가 시체가 나왔어.”
 ‘시체’라는 말에 남편은 귀가 번쩍 띄였다.
 “누구였는데요? 누가 죽었어요?”
 할아버지는 자신이 보유한 과거의 정보 한토막에 누군가 이 정도로 관심을 가져주어서 몹시 신이 난 모양이었다.
 “몰라, 여자였대. 근데 다 타서 알아볼 수가 없었어. 경찰이 오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고.”
 여자.
 여자다.
 “그게 언젭니까?”
 “글쎄. 한 오륙년 됐나?”
 수퍼 아주머니가 거들었다.
 “오륙년이 뭐예요, 벌써 한 십 년 다 돼가는데.”
 “그런가?”
 말하면서 할아버지는 남편이 사려고 계산대에 놓았던 물건들 옆에 소주와 새우깡을 슬쩍 밀어놓았다. 남편은 별 말 없이 함께 계산했다. 수퍼 앞 파라솔 그늘에 가린 테이블 밑에 자리를 잡고 앉은 할아버지 옆에서 좀 더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얻으려 했으나 할아버지는 대체로 비슷한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원래 연립주택이던 건물을 뜯어고쳐서, 한 층을 더 올려 빌라를 만들었는데, 그러다가 옥상에서 시체가 나왔고, 불에 타 있었고, 여자였고, 난리가 났고, 난리가 났다.
 남편은 식사를 대신할 주전부리를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과자를 씹으며 가장 손쉽게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동네 이름과 ‘살인사건’ ‘불탄 시체’ 등으로 검색했으나 마땅히 눈에 띄는 기사는 없었다. 빌라 이름에 ‘빌라’ 대신 ‘연립주택’을 넣고 똑같이 ‘살인사건’이나 ‘시체’ 등을 검색했으나 여전히 관련 있어 보이는 기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래된 사건이다. 정확한 날짜나 내용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검색어를 잘못 집어넣었을 수도 있다. 혹은 할아버지나 수퍼 아줌마가 잘못 알았을 수도 있다. 여러가지 불명확한 가능성이 너무 많았다. 남편을 버티게 해 주는 것은 오직 중독된 자의 집착뿐이었다.
 그래서 남편은 터무니없이 긴 시간 동안 어처구니 없이 많은 검색어를 입력하며 강박적으로 컴퓨터 앞에서 시간을 보낸 끝에 드디어 찾아냈다.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일간 신문에 조그맣게 실린 기사였다. xx동의 무슨무슨 연립주택 (현재 빌라의 이름과는 전혀 달랐다) 공사중에 옥상에서 여성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시신은 얼굴을 포함하여 곳곳이 불에 타서 심하게 훼손되었고 흰색 비닐로 두텁게 감싸여 테이프로 밀봉된 상태였는데 공사중이던 인부가 건축 자재인 줄 알고 뜯어보았다가 신고했다. 경찰은 지문감식 결과 시신이 연립주택에 거주하던 누구씨의 딸이며 얼마 전에 실종된 모 양임을 확인하고 유력한 용의자인 남자친구 모 군을 수배했다.
 그것이 끝이었다. 모 군을 찾아냈는지, 정말로 모 군이 죽였는지, 왜 죽였는지, 아니라면 진범은 누구인지 – 그런 뒷이야기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이미 오래 된 사건이었고, 비슷한 시기의 신문 기사에는 온통 축구 이야기뿐이었다.
 
 7.
 남편은 여자의 검은 얼룩이 있었던 벽 모서리로 갔다. 얼룩이 있던 자리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나한테 와.”
 남편이 벽을 향해 말했다.
 “나한테 와. 내가 원한을 풀어줄게. 내가 해결해 줄게. 내가 옆에 있어줄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검은 얼룩은 돌아오지 않았다. 벽은 그대로였다.
 여자도 돌아오지 않았다.
 
 8.
 남편은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생활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여자를 기다리려면 남편에게는 그 집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 집에서 계속 지내려면 월세를 내야 했다. 그러므로 돈이 필요했다.
 남편이 아는 종류의 일은 운전이었다. 그러나 지난 번의 회사에서는 좋지 않은 꼴을 보이고 쫓겨났다.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다른 곳은 이미 평판이 안 좋게 전해져 있거나, 불경기라 사람을 뽑지 않거나, 뽑더라도 근무 조건이 아주 좋지 않았다.
 남편으로서는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월세를 낼 돈을 벌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남편은 말 그대로 아무 일자리나 손에 잡히는 대로 무조건 수락했다.
 근무시간은 길고 손님은 적었다. 남편은 하루의 대부분을 자동차의 운전석에서 보냈다. 집에 돌아가면 벽 모서리 앞에 웅크리고 있다가 잠이 들었다. 잠깐 그렇게 눈을 붙이고 일어나면 다시 월세를 벌러 나가기 전까지 대답 없는 벽에 대고 여자에게 돌아와 달라고 간청했다.
 아내가 몇 번 전화했다. 남편은 피했다. 전화를 받지 않거나 대충 얼버무리고 끊었다.
 어렵게 쌓아올려 이룩한 소중한 것들을 남편은 자기 발로 짓밟아 부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무엇이 소중한지, 무엇을 망가뜨리는지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남편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여자였다. 집과, 벽 모서리와, 여자의 정체와 사건의 결말과, 그리고 지금 여자가 있는 곳, 여자를 찾을 수 있는 곳을 알아내는 것,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여자가 주었던 쾌감에 다시 한 번 빠져드는 것 – 그것이 남편이 원하는 전부였다.
 연말이 다가오자 술 취한 손님이 늘었다. 차 안에 토하는 손님이 가장 골치아팠다. 술에 취해서 횡설수설하거나, 횡설수설하면서 계속해서 전화를 하거나, 차에 탄 순간부터 내릴 때까지 고래고래 욕하며 소리를 지르거나, 소리지르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노래를 하고 있거나, 그런 손님들이 많았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색다른 손님도 있었다.
 남자 손님이 혼자 탔다. 술 냄새는 풍기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은 일단 안도했다.
 4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 손님은 목적지를 말한 뒤에 한동안 조용했다. 남편도 굳이 모르는 사람과 수다를 즐길 기분은 아니었다. 묵묵히 차를 몰았다.
 뒷자리의 남자 손님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아는 친구가 말입니다.”
 “… 예?”
 남편이 되물었다. 남자가 차분하게 다시 말했다.
 “아는 친구가 곤란한 사정이 생겼어요. 안 좋은 일에 엮인 모양이에요.”
 “예….”
 모호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남편도 모호하게 대꾸했다. 남자가 말을 이었다.
 “그 친구가 그러더라구요. 얼굴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구요. 사람의 특징 중에서 제일 알아보기 쉬운 게 얼굴이니까, 필요할 때마다 얼굴을 싹 바꿀 수 있으면 아무 문제 없이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면서 남들처럼 살 수 있을 거라고….”
 “그래요?”
 엉뚱한 이야기라고 남편은 생각했다. 오래 전에 보았던 서양 영화를 떠올렸다. 범죄 조직을 소탕하기 위해서 경찰이 조직의 두목으로 위장하여 얼굴을 완전히 바꾸고 잠입한다는 줄거리였다.
 “그 왜, 영화도 있지 않습니까? 좀 오래 된 영화인데….”
 마치 남편의 생각을 읽은 듯이 뒷자리의 남자 손님이 말했다.
 “남의 얼굴하고 맞바꾼다는 내용이었는데, 제 친구가 그러더라구요. 있는 얼굴을 그냥 뜯어고치는 것보다는 그렇게 남의 얼굴하고 바꿔서 싹 갈아끼우는 게 훨씬 쉬울 거라구요.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정말 편할 것 같다고 하더군요.”
 “아, 예….”
 얼굴을 내놓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할 수 없을 정도라면 사태가 심각한 모양인데, 그런 사람이 저 따위 공상과학 영화같은 상상이나 하고 앉았다니 아직 혼이 덜 난 모양이라고 남편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뒷자리의 남자 손님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갈아끼울 얼굴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물어봤죠, 바꿀 얼굴은 어디서 구하느냐구요.”
 “그러게요. 어디서 구하죠?”
 남편은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장단을 맞춰 주었다. 차는 신호에 걸려 멈추어 있었다. 좌회전 신호를 받아 꺾어서 들어가면 바로 손님이 말한 목적지다.
 뒷자리의 남자 손님이 부드럽게 말했다.
 “친구가 그러더라구요. 사귀는 여자가, 수완이 좋고 사람을 워낙 잘 다루니까, 마음만 먹으면 얼굴 바꿀 사람쯤은 필요한 대로 구해다 줄 수 있을 거라구요.”
 신호가 바뀌었다. 손님의 말에 대답할 겨를이 없이 남편은 차를 몰아 좌회전을 해서 골목으로 들어갔다.
 “저 앞에 표지판 있는 데까지 가 주세요.”
 뒷자리의 남자 손님이 말했다. 그리고 지갑을 꺼내면서 덧붙였다.
 “친구가 그런 말 하는 걸 들으니까 참, 마음이 이상하더라구요. 그 친구가 그 지경이 된 게, 사실은 그 사귀는 여자 때문이거든요….”
 “아, 예….”
 남편은 표지판 앞에서 차를 세웠다. 뒷자리의 남자 손님은 현금으로 계산했다. 남편은 지폐를내미는 손님의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 손등에 조그만 별 모양의 문신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문신에 대해서 뭔가 말하기 전에, 남편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손님은 지폐만 넘겨준 채로 거스름돈도 받지 않고 그대로 내려서 차 문을 탁 닫고 가 버렸다.
 손님이 내려서 가 버린 후에도 남편은 그 엄지와 검지 사이 손등의 별 문신이 어째서인지 몹시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정확히 뭐가 어째서 마음에 걸리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9.
 일주일이 흐르고, 일주일이 더 흐르고, 또 일주일, 그렇게 또 몇 주…가 흘러갔다.
 남편의 생활은 여전히 비슷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내와 사이가 거의 파탄에 이르렀다는 것뿐이었다. 아내는 또 다시 전화해서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려준 뒤에 남편도 빌라를 떠나 가족과 합류할 것을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남편은 불시에 고함을 지르며 화를 냈다. 아내는 이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직도 ‘그것’과 함께 지내는 거냐고, 그러다 죽을 거라고 아내도 마주 언성을 높였다. 남편은 죽어도 내가 죽으니까 너는 신경쓰지 마라, 절대로 이 집에서는 한 발짝도 안 나갈 테니까 그런 줄 알라고 고래고래 소리친 뒤에 전화를 끊었다. 그것이 마지막 대화였다.
 그러나 남편은 ‘그것’과 함께 지내고 있지 않았다. 검은 얼룩의 여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남편은 점점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남편은 여자를 보았다.
 
 제법 큰 사거리였다. 밤이었다. 남편은 손님을 내려준 후에 다시 시내 쪽으로 향하려고 가고 있었다. 직진 신호를 받고 차를 몰아 가다가 남편은 문득 고개를 돌려 오른쪽을 보았다.
 어째서 갑자기 그곳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불빛이 너무 환했기 때문일 것이다. 은행과 빵집 사이의 편의점이었다. 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은행은 오래 전에 닫았다. 빵집도 문을 닫았다. 불이 꺼진 두 장소 사이에 껴서 편의점은 혼자 이상할 정도로 밝은 빛을 마치 보란 듯이 거리를 향해서 내뿜고 있었다.
 남편은 그 밝은 편의점의 통유리 창문 안에 검은 얼룩의 여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여자는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한쪽 손을 들어 계산대의 직원 뒤에 있는 어느 장소를 가리켰다.
 남편은 여자의 손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홀린 듯이 쳐다보았다. 시선이 손끝을 따라 계산대의 직원에게 향했다. 편의점 안에서 여자를 마주보고 서 있는 직원은 흰 얼굴에 갈색 머리의 소년이었다.
 남편은 차를 세웠다. 제대로 자리를 보고 주위를 살펴 주차나 정차를 할 겨를이 없었다. 시동조차 끄지 않았다. 그대로 차가 멈추어 서자마자 달려나가기 전에 비상등 버튼을 누른 것이 그나마 최선의 상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남편은 몰던 택시를 버려두고 뛰쳐나가서 검은 얼룩의 여자와 흰 얼굴의 갈색머리 소년이 있었던 편의점으로 달려 들어갔다.
 
 10.
 교차로에 세워진 택시는 주인 없이 꽤 오랫동안 그렇게 버려져 있었다. 당장 신고가 들어가지 않은 것은 아마도 교통의 흐름을 막고 있었지만 완전히 가로막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늦은 밤이고 서울 변두리라서 차량 통행이 점점 적어질 무렵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마침내 새벽녘에야 지나가던 운전자가 길거리에 방치된 택시를 수상하게 여기고 신고했다. 견인차가 왔다. 택시 앞부분을 들어올려 끌고 가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았을 때 견인차 기사는 뒤에서 오는 차들이 모두 상향등을 번쩍이며 경적을 울려대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견인차 기사는 차를 세우고 내려서 뭐가 문제인지 살펴보았다. 견인당하는 택시의 트렁크에서 짙은 색의 끈끈한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견인차 기사는 겁에 질려서 경찰에 신고했다.
 
 11.
 남편은 트렁크 속에 구겨박힌 시체로 발견되었다.
 트렁크를 처음 열었을 때 대량의 피가 흘러나왔다. 시신은 등을 돌린 채 웅크린 자세였다. 절반쯤 피에 푹 잠기기는 했지만 일단은 옷도 제대로 입고 있었고 몸의 다른 부위에는 특별한 외상도 눈에 띄지 않았다.
 트렁크에서 꺼내고 보니 시신은 얼굴이 사라지고 없었다. 뼈만 남기고 피부가 통째로, 마치 가면을 벗기듯이 깨끗하게 뜯겨나갔다.
 
 범인은 쉽사리 잡히지 않았다.
 아내는 빌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남편이 죽은 뒤에 계속 친정에서 지냈다. 결국은 다른 곳에 집을 구해서 아이들과 함께 떠났다. 빌라와는 완전히 인연을 끊었다.
 검은 얼룩의 여자와 얼굴이 흰 소년에 대해서는 이후로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알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mirror
댓글 4
  • No Profile
    jamm 12.03.10 23:53 댓글 수정 삭제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음, 옛날에 봤던 형사물 시리이즈 중 지하실의 벽에 세멘공굴 쳐서 숨겨놓았던 시체의 얼룩이 그대로 사람의 형상을 드러내어 살인자는 우리의 영웅 형사분들에게 잡히게 되는데, 정수리에 대못이 박혀 죽은 시체가 지하실벽체안에서 발견된 실화였음. 우울증에 걸릴것 같음. 우울증 해소 하는 정신과 약 만드는 제약회사에서 특별공로상을 줘야 할것 같음, 내취향 아님. 괴기 공포 귀신이야기 좋아하는 마니아들에게는 환영받을 흡입력 있음. 난 이런류 안좋아하는데 독자가 바라는대로 이야기를 잘끌어갔음.열린 결말 완성도 , 실수하기 쉬운 끝까지 신경쓰기, 요즘 많은 무책임한 소설의 경지는 벗어났음
  • No Profile
    정도경 12.03.13 00:39 댓글 수정 삭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실화는 저도 어디서 본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쓸 때는 가정주부가 사라졌다가 빌라 옥상 물탱크 옆에서 시체로 발견된 사건과 어떤 여성이 이사 가려고 짐 싸다가 비닐에 두껍게 싸여 미라 상태로 변한 자기 어머니 시신을 발견한 사건, 그리고 제가 사는 동네에서 실제로 봤던 사거리 한가운데 방치된 택시 등등을 참조했습니다.
  • No Profile
    가연 12.03.19 19:41 댓글 수정 삭제
    우와- 시작부터 끝까지 말 그대로 정신없이 읽었어요. 역시 도경님! 감탄했습니다.
  • No Profile
    정도경 12.03.20 09:22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그것이 알고싶다를 너무 많이 너무 진지하게 봤더니 이런 결과가 나오는군요;;; SBS에 감사패라도 보내야 할까 싶네요.
분류 제목 날짜
pilza2 부모를 위한 나라는 없다1 2012.05.25
갈원경 스물 세 번째의 부족 - 본문 삭제 - 2012.05.25
정도경 반복 휴가 2: 아이2 2012.05.25
이서영 너의 낡은 캐주얼화8 2012.05.25
곽재식 공중부양4 2012.04.28
미로냥 미련(未練) - 본문삭제 - 2012.04.27
정도경 반복 휴가 1: 선배 2012.04.27
정도경 휘파람3 2012.03.30
이서영 히스테리아 선언8 2012.03.30
세이지 부러진 칼 2012.03.30
세이지 어떤 하루(One Day) 2012.03.30
아이 미행2 2012.03.30
곽재식 탄생4 2012.03.30
곽재식 열어 보면 안됨9 2012.03.30
배명훈 세번째 계단13 2012.02.24
정도경 가면4 2012.02.24
아이 네 사람3 2012.02.24
곽재식 죽음을 부탁하는 상냥한 방법13 2012.01.28
정도경 인간 성격의 상호작용에 대한 연구 2012.01.27
이서영 왕자와 거지4 2012.01.27
Prev 1 ...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 52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