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정도경 NCESP-I

2011.10.29 00:0910.29

“휘경관 빨갱이 아저씨” 이야기를 아시는지.
그러니까 우리 학교에 부정기적으로 출몰하여 이런저런 강의실에 난입해서는 ‘빨갱이’니 ‘사기꾼’ 등속의 욕설을 퍼부으며 교수를 (강사일 수도 있지만) 폭행한다는 전설의 아저씨다. 주로 교문에서 가까운 건물을 중심으로 출몰하기 때문에 공과대학 쪽에서 특히 자주 물의를 일으켰던 모양인데 한 번은 캠퍼스 꽤나 안쪽에 있는 휘경관 1층 강당까지 들어와서 대형강의를 수강하던 120명의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빨갱이”를 외쳐대며 강의 중이던 노교수님에게 덤벼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교수님께서 피해를 입기 전에 조교 둘이 얼른 달라붙어 말렸지만 역부족이라 결국 수위 아저씨까지 동원해서야 간신히 끌고 나갔다고 한다. 끌고 나간 뒤에 어떻게 됐는지 자세한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는데 그 이후에도 부정기적으로 계속 출몰한다는 걸 보면 아마 수위 아저씨가 그냥 내보냈거나 혹은 경찰서까지 갔더라도 머리가 좀 이상한 사람 정도로 가볍게 취급되어 훈방된 모양이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이 다름 아닌 바로 그 휘경관에서 강의를 하게 된 첫 날이었다. 이야기를 해준 학생은 무척이나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사실 나도 강의를 하는 입장만 아니었으면 재미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문제의 아저씨가 나타나면 공격의 초점이 될 처지이고 보니 넋놓고 즐거워할 수만은 없었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은 우리 강의실이 17층이라는 사실이었다. 문제의 “빨갱이 아저씨”는 교문에서 가까운 건물이나 1층 강의실에만 출몰하는 것으로 보아 은근히 귀차니즘에 빠진 것으로 추정되었으므로 무려 17층까지 일부러 찾아 올라올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학기가 진행되고 수업 때문에 정신이 없고 강의실에서 언제나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고들(판서를 해야 되는데 분필이 하나도 없다든가 동영상을 봐야 하는데 그 날따라 컴퓨터가 먹통이라든가 등등등)을 제외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단 한 번 창문으로 말벌이 날아 들어와서 학생들을 경악과 공포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사건을 제외하면 아무도 강의 도중에 난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빨갱이 아저씨” 이야기를 차츰 잊어버렸다.
그리고 바로 옆 강의실이 공격을 당했던 것이다.


모두들 집중하느라 아주 조용한 순간이었다. 학교에서 수업을 하거나 들어본 사람이라면 다들 알겠지만 교실 전체가 완벽하게 조용한 순간은 평생을 통틀어 몇 번 되지 않는다. 그런 희귀한 순간이었던데다 학생들 모두 아주 효율적으로 잘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돌연히 복도에서 시끌벅적한 소음이 들려와서 정적이 깨지고 그와 함께 집중도 깨져 버리자 나는 무진장 짜증이 났다. 몸에 익은 시간 강사의 비굴함으로 다른 수업의 잘 모르는 교수님(강사일 수도 있지만)한테 감히 화를 내는 일은 거의 없는데 이번만은 분기탱천하여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조용히 좀 하세요! 수업 중에 뭐 하는 짓들이야!”라고 소리를 꽥 지를 참이었다. 그런데 문을 벌컥 열어젖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정복을 입은 경찰관 두 명,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두 명의 가슴에 달린 배지였으므로 나는 울분과 고함을 꿀꺽 삼키고 즉각 조용해졌다.
복도가 시끄러운 이유는 경찰관 두 명과 수위 아저씨와 남학생 세 명이 웬 남자를 떠메다시피 끌고 나가는 와중이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끌려 나가면서도 ‘사기꾼’이니 ‘빨갱이’니 ‘전부 다 삼청교육대로 보내버려야 한다’느니 등등 뭔가 20세기 중후반에나 통용되었을 법한 공격적이지만 고루한 표현들을 상당한 저주와 분노를 섞어 외쳐대고 있었기 때문에 아 저 사람이 바로 그 “빨갱이 아저씨”구나, 하고 나는 즉시 알아보았다. “빨갱이 아저씨”를 떠메고 나가는 행렬 뒤로는 아마도 옆 강의실에서 수업하던 교수님(강사일 수도 있지만)으로 보이는 여자분이 머리가 몹시 헝클어지고 화장이 엉망이 된 얼굴에 반쯤은 걱정스럽고 반쯤은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복도에 나와서 서 있었다. 수위 아저씨가 여자분을 돌아보면서 이제 괜찮으니 들어가시라고,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말했고, 그래서 교수님은 (강사일 수도 있지만) 복도에 우르르 몰려나와 웅성웅성 신나게 떠들어대는 학생들을 어르고 달래서 다시 교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모르긴 몰라도 그 날의 나머지 수업은 엉망진창이 되었을 것이다.
옆 강의실에서 진행중이던 수업은 문학 개론이었다. 사기꾼이라면 몰라도 ‘빨갱이’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과목이다. “빨갱이 아저씨”가 강의실을 잘못 찾았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원래 노렸던 것은 내 수업이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냐 하면 학회에서 그 “빨갱이 아저씨”를 다시 마주쳤기 때문이다.


ESP (Extrasensory Perception) – 즉 초감각적 지각, 혹은 초능력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실재하지 않는 허구의 이야기로 여겨졌다. 소련이 건재하고 냉전이 지속중이던 20세기 중후반에 한때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에서 각자 서로를 견제하기 위한 전투기술의 일종으로 초능력을 계발(啓發)하거나 (“개발”이 아니다) 훈련하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가 확인된 적은 없지만 언제나 전설처럼 전해져 왔다.
여기서 ‘냉전의 유산’이라고 하면 또 냉전 최대의 유산이며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인 한국의 경우도 빠질 수 없다. 이미 한국전쟁 직후부터 주로 미국 정보부의 주도 하에 초감각적 지각 능력자를 선별하여 양성하는 기관이 설립되어 극비리에 운영되고 있었다. 이 기관은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적인 대학 과정과 다를 바가 없는 4년제 교육 기관으로서, 보건이나 의료 계통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학교인 것 같기는 한데 외국어니 심리학이니 기타 여러 가지 전공 과정도 개설되어 아무리 봐도 성격이 불분명한 곳이었다. 그리고 정부 정책상 대학교 순위 같은 데 집계되지도 않았고 모집 정원도 아주 적은데다 뭘 가르치는 학교이며 졸업해서 대체 어느 분야에 진출하여 어떤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인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도록 조심하거나 일부러 대중을 호도했기 때문에 20세기가 끝날 무렵까지도 보통 사람들은 그런 학교가 존재하는지조차 잘 알지 못했다. 이 학교의 졸업생들은 99% 정부의 보안 계통이나 국방 계통으로 흡수되었고, 나머지 1%는 모교에 안착하여 후대를 양성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대단히 폐쇄적인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이 폐쇄적인 체계가 조금씩 허물어지고 일반에 그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일차적으로는 소련과 공산권의 몰락 때문이었다. 공산권이 무너지고 냉전이 종식되고 보니 가장 주요한 적이 사라진 마당에 굳이 애써서 능력자들의 존재나 학교의 정체성을 극비로 유지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알 수 없지만 1990년대 중후반 이후에 컴퓨터 기술과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국방이 아닌 일반 산업 계통에서도 보안 문제가 심각한 주제로 대두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계통의 특수한 지식이나 기술을 가진 인재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어났다.
그리고 이로부터 몇 년이 더 지나 21세기에 접어든 첫 해에 미국에서 9/11 테러가 일어났다. 미 국방부에서는 이번에는 소련이 아니라 아랍 문화권 일대를 향하여 전쟁을 선언하였다. 그러자 국방과 보안 계통의 전문적인 특수 지식이나 기술을 보유한 인재에 대한 수요가 다시 한 번 폭발했다.
그러나 인터넷과 개인 정보통신과 SNS의 시대에 접어들고 보니 냉전 시기와는 상황이 또 달라졌다. 그 때는 기밀로 유지할 수 있었던 사안들을 이제는 기밀로 숨길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반대로, 이 쪽의 기밀만 숨길 수 없게 된 것이 아니라 적들의 비밀도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되었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각종 정보통신 매체에는 소위 말하는 ‘카더라 통신’, 소문인지 사실인지 알 수 없는 ‘예언’과 ‘괴담’들이 뒤엉켜 떠돌아 다녔다. 우리 편의 기밀이 새어나가지 못하게 하면서, 혹은 이미 새어나갔다면 아무 쓸모없는 루머처럼 보이게 가장하면서, 동시에 수많은 루머와 예언과 괴담 중에서 어느 쪽이 진실인지 파악하는 것이 현대 정보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으로 자리잡았다. 그리하여 국방과 보안 계통에서 투시나 텔레파시 능력자들이 가장 좋은 대우를 받으며 정부 기관에 뽑혀 들어갔다. 염사(念寫) 쪽도 상당히 수요가 있었다. 물리적이고 실제적인 성격이 강한 염동력이나 텔레포트 능력자들은 보안이나 정보 쪽보다는 실전에 투입되는 경우가 더 많아서 수요는 있었지만 지원자는 좀 적은 편이었다.
이런 능력자들을 공개적으로 채용하는 것은 유례가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은 공개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다 새어나가서 어쩔 수 없이 공개하게 되었다는 쪽이 옳을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공개 채용을 하게 되었으면 뭔가 채용 기준이라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미 정보국에서 특수인력 양성용으로 냉전 시절에 만들어둔 초감각적 지각 시험이 뒤늦게 일종의 ‘자격증’ 성격을 띠게 되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이런저런 상황들이 맞물린 결과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 무렵에 위에 말한 ESP 관련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대학교에서는 학교 역사상 일대 호기를 맞이하였다. 단순한 ‘미국 변호사’를 어째서인지 ‘국제 변호사’라는 어마어마하게 과장되었으면서 동시에 틀린 용어로 지칭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미국 내에서만 비공식적으로 통용되는 미 정보부의 초감각적 지각 능력시험에 대한 소문이 한국으로 건너오자 일반의 인식 속에서 어쩐지 “초능력 국제 자격증”으로 둔갑하였다. 그리하여 위에 말한 ESP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대학교를 졸업하면 “초능력 국제 자격증”을 자동으로 취득하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 국방부에 취직하여 종횡무진 세계를 누비며 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굉장히 멋진 일을 하면서 평생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헛된 기대가 수험생과 일부 학부모들 사이에 팽배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시대적 조류의 망상을 타고 다른 여러 학교들에서도 초감각적 지각에 관련된 학과 혹은 수업들이 속속 개설되었다. 그리고 심지어 대학 입시에서 엄청난 경쟁률까지 보였다. 그러자 위에 언급한 한국의 ESP 특수교육 대학교에서는 부동의 1위 자리를 빼앗기게 된 사실에 당황하여 미 정보부의 자격 기준을 한국식으로 번안한 초감각적 지각 자격 시험을 개발하였다.
초감각적 지각 관련 학과 혹은 수업을 신규로 개설한 다른 학교들에서는 이러한 자격 기준에 대하여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절반 정도는 이 시험을 흉내낸 자체적인 자격 시험을 만들었고 (국가 공인 혹은 민간 공인 여부는 불분명한 채로 남아 있다), 나머지 절반 정도는 이런 자격 기준을 무시했다. (주로 대학 입학 시험 성적 집계에서 순위가 높은 학교들이 후자의 반응을 보였다.) 그러므로 위에 언급한 한국의 ESP 특수교육 대학교에서는 “오리지널”로서의 자부심을 지키며 자신들의 자격 시험을 따라하는 학교들은 경멸하고, 그 자격 기준을 무시하는 학교들은 배척하게 되었다.
그러나 9/11 이후로 십 년이 더 흘렀고, 중동에서의 전쟁은 끝도 없이 질질 끌고,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전쟁에 돈을 퍼부으면서 미국 경제는 파탄이 났다. 여기서 경제가 파탄났다는 사실이 무척 중요한데, 쉽게 말해 실제로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는 군인이 아니라면 정체성이 불분명한 ‘컨설턴트’나 ‘전문가’ 나부랭이까지 전부 먹여살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신규 고용이 모두 말라붙은 것은 물론이고 현직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 둘씩 잘리게 되었다.
종주국인 미국이 이 꼴이 되자 한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졌다. 한국은 애초에 아랍 문화권을 대상으로 한 쓸데없는 기름 전쟁 따위에 직접 참여하지도 않았으므로 미국에서와 같은 실질적인 수요가 처음부터 없었다. 이런저런 대학들에 신규 개설되었던 초감각적 지각 관련 학과들이 속속 폐쇄되었고, 그 결과 채 십 년이 지나기도 전에 정규 ESP 학과를 운영하는 대학교의 숫자는 2년제와 4년제를 전부 포함해도 절반 이하로 줄었다. 학과 없이 관련 수업만 운영하는 대학들은 아직도 숫자가 꽤 되었지만, 그나마 일관성 있게 독립적인 강의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학과에서 두 학기에 한 번 정도 텔레파시 수업을 개설하거나 미술 관련 학과에서 전혀 상관없는 수업 과정 중에 염사라는 것도 있다고 곁다리로 가르치는 식이었다.
이렇게 되자 90년대 초중반에서 2000년대 초까지 약 5-10년간 이런저런 학교들에서 갑작스럽게 폭발적으로 배출했던 초능력 관련 학과 졸업생들은 갈 곳이 없게 되었다. 갈 곳은 물론이고 학과 자체가 폐쇄되어 학적이나 이력조차 공중에 떠 버린 비참한 경우도 상당수 생겨났다. 이처럼 상황은 시간이 가면서 변해 버렸지만 한국 최초이자 유일의 “오리지널” ESP 대학교와, 그 뒤를 따라 뒤늦게 관련 학과나 수업을 개설한 다른 학교들 사이의 경멸 혹은 배척 관계는 그대로 남았다. 넓지도 않은 나라의 크지도 않은 분야 안에서 또다시 분파와 파벌이 갈래갈래 나뉘어 버린 것이다 – 모든 분야에서 언제나 그렇듯이.


그리하여 냉전 종식 20주년, 혹은 9/11 10주년을 맞이하여 개최된 제 1회 초감각적 지각 관련분야 국내 대회 (The 1st National Conference of ExtraSensory Perception, 줄여서 NCESP-I)는 무척이나 의미 있는 행사로 여겨졌다. 일단 이제까지 학교별로 분파별로 나누어서 한 학기에 대략 열두 번씩 따로따로 진행하던 학회를 다 합쳐서 한 번만 하게 되었기 때문에, 시간 강사 입장에서 밥벌이를 유지하기 위해 귀찮기 짝이 없더라도 그 학회에 열두 번 전부 참석해서 얼굴 도장을 찍어야 하는 나로서는 한 번에 끝난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이나 의미 깊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워낙 좁은 바닥이다 보니 학회를 운영하는 사람도 참석하는 사람도 다 맨날 그 얼굴이 그 얼굴인데 한 학기에 열두 번이면 중간고사 기말고사 기간 빼고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 항상 보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항상 하던 얘기를 되풀이하는 것도 꽤나 민망한 짓이라고 다들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국내 대회”라는 이름으로 한 방에 끝내게 된 것을 모두 다행으로 생각했고, 앞서 말한 대로 워낙 바닥이 좁다 보니까 기왕 클 대(大)자 써서 “국내 대회”라고 이름도 붙였으니 학계 종사자만이 아니고 관련분야 실무자까지 모두 초청해서 크게 판을 벌여보자는 결정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사상 최초로 판이 이 정도 커지다 보니까 학회는 주말 오후에 몇 시간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 역시 유례없는 3박 4일의 대규모 일정으로 진행되었는데, 개회식과 폐회식 행사를 제외하면 이 중에서 중간 이틀이 진짜 본행사였다. 첫날은 실무자 대회였고, 둘째 날은 학술 발표가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일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정해져 있는 법이기 때문에 나는 양쪽 다 참여하게 되었다.


말이 좋아서 ‘실무자 대회’이지 초능력의 실무라고 하면 결국 해야 하는 건 차력 시범이다. 나는 원래 전공은 따로 있지만 복수 전공한 분야가 염동(念動) 쪽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같은 ‘실무’인데도 내 앞 순서였던 공과대학 교수님은 뭔가 엄청난 과학기술을 이용한 전자기적 공중부양 시범 같은 걸 보였기 때문에 우아하게 태블릿 피씨 화면을 손가락으로 두들기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철제 책상 같은 걸 막 불쑥불쑥 들어올려서 만인의 찬탄을 얻었건만 나는 마을 장터에서 약장수가 하는 것처럼 무대에 나가서 양손을 인상적으로 뻗고 “이야아압!” 뭐 이런 비슷한 걸 해야만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양손 뻗고 “이야아압” 같은 건 원래 안 하는데 (사람마다 자기 나름대로 방식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나는 평소엔 괜찮다가도 나서서 해 보라고 멍석 깔아주면 초 긴장해버리는 몹쓸 소심증이 있는 관계로 역시나 무대에 나서자마자 분자 역학이 말을 잘 안 들어서 실험체가 예쁘게 떠오르질 않고 방정맞게 왔다갔다 하더니 도중에 훌떡 뒤집힌다거나 텔레포트 시범하면서 실험체를 엉뚱한 곳으로 날려버리는 바람에 못 찾아와서 진땀을 뺀다거나 뭐 그랬다. 덕분에 ‘장소를 제대로 지정하지 못하고 무조건 텔레포트를 해 버리는 건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태도이며 본질적으로 능력의 수준이 의심된다’라고 관중석에서 한 소리 들어야 했다. 그 자체로 무척이나 옳은 말씀이기는 했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경악한 점은 그 발언을 한 사람이 바로 문제의 “빨갱이 아저씨”라는 사실이었다. 목에 건 명찰을 보아하니 “빨갱이 아저씨”는 문제의 한국 ESP 대학교 소속으로 무려 염동학과 교수님이셨던 것이다.
긴장해서 버벅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기보호 본능만은 언제나 충실히 살아 있었으므로, 나는 명찰의 ‘교수’라는 단어를 본 순간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빨갱이 아저씨!”를 꿀꺽 삼키고 “예 교수님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라고 자연스럽게 때맞춰 대답할 수 있었다. 사회 생활 제대로 하려면 초능력 따위 아무 쓸모 없고 사실 이런 능력이 훨씬 더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나는 그 날 저녁 이 “빨갱이 아저씨” 교수님을 저녁 만찬 석상에서 다시 마주 대해야만 했다. 앞서 말한대로 원래 전공은 따로 있지만 복수전공한 게 염동이고, 시범 주제도 그러므로 염동이고, “빨갱이 아저씨”는 나로서는 매우 불운하게도 염동학 교수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학회 간사 선생님이 자리라도 좀 떨어져서 앉혀줬으면 좋았을텐데 “빨갱이 아저씨”가 앉은 곳은 하필이면 내 바로 맞은편이었다.
공중부양 시범을 보였던 공과대학 교수님은 테이블 맨 끝에 멀리 떨어져서 앉았고, 만찬석의 나머지 사람들은 학계 종사자가 아니라 국방이나 보안 혹은 일반 산업체에서 일하는 진짜 ‘실무자’들이었다. 그러므로 대화의 주를 이루는 것은 현재 미국 혹은 한국의 국방이나 보안 상황 혹은 일반 산업계에서 중요하게 떠오르는 최신 기술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로서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사람들은 내가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신나게 대화를 이어갔다. 사실 그 사람들 탓을 할 수는 없는 것이, 그 자리에 있으면 어쨌든 실무자일 거라고 가정하는 것이 당연했고, 그러므로 실무자가 하는 이야기도 당연히 다 알아들을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쪽 관련분야 종사자들은 워낙 언제나 기밀에 묶여 살기 때문에, 똑같이 기밀에 묶인 사람들끼리 모아놓은 이런 자리가 아니면 평소에 자기 일에 대해서 자유롭게 이야기할 기회가 좀처럼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자기들끼리만 알아듣는 암호 같은 대화를, 바로 자기들끼리만 알아듣기 때문에 더욱 더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점점 더 심하게 암호화된 문장들을 떠들고 있는 모습을 옆에 앉아서 지켜보자니 내가 한심하기도 하고 저쪽이 불쌍하기도 하고 하여간 뭐라고 말하기 힘든 기분이 점점 더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욱 더 곤란하게도 “빨갱이 아저씨” 교수님이 바로 이 순간 내게 말을 걸었던 것이다.
“내가 김선생 이름은 여러 번 들었어. 논문도 심사를 몇 번 했고, 여기저기서 김선생이 작업했던 프로젝트 실효성을 검증해 달라는 전화도 몇 번 받았고 그래서….”
“아, 예….”
나는 씹던 고깃덩어리를 서둘러 힘겹게 꿀꺽 삼키고 예의바르게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식도에 걸려 좀처럼 넘어가지 않으려는 고깃덩어리를 애써 위장으로 내려보내면서 아무래도 이 아저씨, 아니 교수님 앞에서는 여러 가지를 서둘러 꿀꺽 삼키게 되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교수님이 말을 이었다.
“아주 재능 있는 사람이라고 얘기는 들었는데, 오늘 시범 보니까 좀 많이 떨었던 것 같구만.”
“아, 예…. 큰 학회다 보니까 좀 긴장해서….”
“그래? 그리고 김선생 원래 전공이 염동이 아니었지?”
“아, 예…. 제가 학부 전공은 그 쪽이 아니었는데, 대학원에서 석사 하면서….”
전공이 두 개면 항상 이런 식으로 어딜 가든 설명을 해야 한다. “빨갱이 교수님”은 내가 읊는 이력을 그다지 관심 없는 표정으로 듣고 있다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래? 아무래도 학부 전공자 출신이 아니면 좀 곤란한 부분이 있지…. 오늘 보니까 상당히 불안해 보이던데? 그만두든지, 아니면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시 배워보는 건 어때?”
“예?”
아니 그치만 나 제대로 학위도 받았고 지금 강의도 하고 있는데, 학회 발표 한 번 망쳤다고 (그나마 학술 발표도 아니고 근본적으로는 차력 시범이었으며 누누이 말하지만 차력 시범은 내 본업이 아니다) 그만두거나 처음부터 다시 배우라니?
… 라고 교수한테 항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 학교 교수도 아니고 내 교수도 아니지만.) 그래서 나는 애매모호한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고기 대신 두부 조각을 입으로 가져갔다 (또 서둘러 꿀꺽 삼켜야 할 경우를 대비해서.)
“빨갱이 교수”는 암호화된 대화를 흥겹게 진행중인 좌석의 나머지 실무자들 쪽을 흘끗 돌아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어쩐지 비밀스럽게 말을 이었다.
“김선생, 테스프 (TESP)가 뭔지는 알지?”
“예? 예….”
안다고 대답했는데도 “빨갱이 교수”는 학교 선생님들이 흔히 하듯이 자기가 물어보고 자기가 설명했다.
“Test of ExtraSensory Perception 의 준말인데, 미 국방부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에 개발해서 이미 70년 역사를 자랑하는 초감각적 능력 기준 시험이지. 우리 한국 ESP 대학교에서도 이걸 도입해서 케이테스프(K-TESP)를 만들어 쓰고 있었는데 말이야.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국가 공인 능력 시험이지.”
“빨갱이 교수”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실무자들을 흘끗 돌아보더니 목소리를 더 낮추었다.
“이번에 이게 국제공인을 얻었어. 이제는 케스프-씨(KESP-C)라고 해서 ‘테스트’, 즉 단순한 능력 시험이 아니고 ‘자격증’이란 말이야, 써티피켓(certificate)이라고.”
“빨갱이 교수”는 ‘써티피켓’을 몹시 굴려서 ‘써rrr티Fㅣ킷’처럼 발음했다.
“월말에 한국 최초로 공인 자격증 시험이 치러질 예정인데, 미국 CIA에서 그쪽 담당 부장을 포함해서 심사위원단으로 고위급 인사를 다섯 명이나 보내오기로 했거든, 미국 정부 예산으로. 비행기표부터 숙박에다 식사까지 전부 미국 정부에서 해 주는 거야.”
“빨갱이 교수”는 ‘미국 정부’에 무척이나 힘을 주어 두 번이나 되풀이해 말하고는 ‘고위급 인사’들의 이름을 읊기 시작했다.
“로널드 펠드스틴 박사, 조지 파울러 박사, 니나 페를리나 부장, 스티븐 프랭크스 박사도 오고, 그리고….”
“빨갱이 교수”는 말을 끊고 의미심장하게 주위를 둘러본 뒤에 목을 내 쪽으로 한껏 빼고 아주 비밀스럽게 말했다.
“애런 비버 국장도 오기로 돼 있어. 원래 스튜어트 맥켄지 부국장이 오기로 했었는데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못 오게 돼서 오히려 국장이 직접 오게 된 거지. 어때, 내가 인맥이 꽤 좋지 않나?”
“아, 예….”
나의 애매모호한 답변에도 개의치 않고 “빨갱이 교수”는 의기양양하게 덧붙였다.
“애런 비버 국장이 사실 나하고는 대학원 동기거든. 수업도 같이 들었지.”
문제의 애런 비버 국장은 연수 받을 때 나도 만난 적이 있었지만 그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그 때 “빨갱이 교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아 참, 김선생도 미국에서 공부했으니까 알지? 애런 비버 국장은 그 때도 국장 아니었나? 서로 아는 사이일 텐데?”
이렇게 되면 또 다시 설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저기, 사실 저는 미국에서는 그냥 연수만 일 년 정도 했구요, 학위는 러시아에서….”
“그래? 미국이 종주국인데 어쩌다가 학위를 러시아에서 하게 됐나?”
“빨갱이 교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끊으며 물었다. 나는 얼버무렸다.
“그 쪽이 학비가 싸서요…. 지도교수님 인맥도 그 쪽이고….”
“아, 그래?”
“빨갱이 교수”는 점점 더 흥미가 없어진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러시아 어디에서 공부했는데?”
그런 건 말할 수 없다.
“저기, 모스크바에서 좀 떨어진 시골이었는데요, 아주 작은 학교라서….”
“그런가?”
“빨갱이 교수”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사실은 모스크바가 아니다. 그러나 러시아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도 모스크바 정도는 다들 알기 때문에, 듣는 사람이 아는 이야기를 하면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 것이 나의 경험이었다. 더구나 소련이 사라지고도 이십 년이나 지난 마당에 “빨갱이”를 외치는 저 교수 같은 인물이라면 러시아에서 모스크바 말고 다른 곳은 설명해봤자 알 것 같지도 않다.
… 알면 안 되기도 하지만.
“내가 공부하던 시절에는 러시아에 갈 수가 없었는데, 세월이 바뀌기는 바뀐 모양이지.”
“빨갱이 교수”가 조금은 감개무량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대화의 방향이 약간은 호의적인 쪽으로 바뀌려나보다 생각했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그래도 공부를 하려면 역시 본국에서 해야지. 그리고 요즘에는 우리 한국 ESP 대학에서 학부부터 제대로 가르쳐서 미국에 연수를 보내고 있으니까. 다들 졸업하기 전에 공인 자격시험 쳐서 일정 성적 이상 올린 애들이지. 김선생네 학교에는 그런 자격 시험이 없지?”
나의 모교는 ‘그런 자격 시험’을 무시하고 상대하지 않는 학교들 중 하나였으며, 그 때문에 한국 ESP 대학과는 상당한 배척 관계에 있었다. 그런 불편한 사실을 괜히 상기시키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나는 가능한 한 공손하게 미소를 지으며 가능한 한 불분명하게 대답했다.
“아, 예….”
그러자 “빨갱이 교수”는 내게 물었다.
“그럼 김선생도 와서 시험 한 번 쳐 보겠나?”


“아, 미치겠다.”
나의 지도교수님은 만찬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반응하였다. NCESP 3일차, 그러니까 폐회식 전에 대회 본행사 마지막 날이었으며, 학술 발표 중심으로 진행되는 날이었다. 나는 공교롭게도 “빨갱이 교수”의 학술 발표에서 토론을, 나의 지도교수님은 해당 패널의 사회를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일 아침에 일찍 만나 커피를 마시면서 전날 실패로 끝난 나의 차력 시범에 대하여 논의하던 중이었다.
“그 사람 왜 그렇게 무례하니? 어엿하게 학위 받고 대학에서 강의하면 교수든 강사든 엄연히 선생님인데, 남의 학교 선생님한테 자기네 학교 시험을 보라고 하면 안 되지.”
라고 지도교수님은 분개하였다. 
나의 지도교수님은 생기발랄한 미모의 여자 교수님이신데 내가 유학에서 돌아와서 강의를 맡게 된 첫 학기에 중간고사 끝난 직후 여자 강사들만 모아서 저녁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 나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우리 애들 공부 잘 하지?”
수업 잘 되냐, 라든가 애들 어떠냐, 가 아니고 자부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공부 잘 하지?’라고 물으셨는데 실제로 “우리 애들”이 공부를 잘 했기 때문에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당당하게 ‘예’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도 한때 지도교수님의 학생이었으므로 그런 의미에서 간접적으로 그 공부 잘 하는 “우리 애들”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었다. 이건 그냥 내 생각이나 바램이 아니고 이후 여러 가지 행사를 겪어보니 지도교수님은 나를 포함하여 졸업생부터 재학생까지 학생 전체를 매우 강력하게 “우리 애들”이라는 분류로 묶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이 “우리 애들”에 관하여 엄마 독수리가 둥지 속의 병아리들을 보호하려는 것과 유사한 행동양식 및 사고방식을 보였다. 또한 엄마새가 둥지 속의 병아리들을 잘 먹이려는 것과 유사한 맥락에서 배고픈 시간 강사들을 어떻게든 거둬 먹이려고 하셨는데 나는 이 부분을 특히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지도교수님이 사 주시는 커피를 마시면서 나는 내친 김에 “휘경관 빨갱이 아저씨”의 정체를 폭로해 버렸다. 지도교수님은 정신없이 웃다가 하마터면 노트북에 커피를 왕창 쏟을 뻔했다.
“그건 너무 심했다. 교수를 때려? 아하하하하…..”
여기서 지도교수님은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진지하게 나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그런데 쫓아내도 계속 온단 말이지? 그 뒤로 또 온 적 있어? 김선생 수업에는 들어온 적 없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뒤로는 안 왔어요.”
“다행이네.”
지도교수님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찬찬히 설명했다.
“그 사람이 그냥 미친 사람이면 폭행 같은 걸로 경찰에 고소를 하든지 뭔가 조치를 해 버릴 텐데, 다른 학교 교수님이니까 학교에서도 어떻게 못 하는 거야. 고소했다가는 학교끼리 싸우자는 꼴이 될 테니까.”
그리고 지도교수님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에 덧붙였다.
“안 그래도 학교끼리 사이가 나쁘기도 하고. 그 사람 그러고 돌아다니는 것도 결국은 밥그릇 싸움일 걸.”
나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지도교수님이 나를 쳐다보았다.
“옆 강의실 문학 입문 수업이 아니라, 김선생이 하는 텔레포트 I 강의를 찾아왔을 거야. 김선생한테는 다행이지만 아마 강의실을 잘못 찾은 거겠지.”
나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신이 멀쩡하고 (성격에는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지만) 엄연히 대학에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사람이 남의 학교에 별다른 이유도 없이 찾아와서 아무 강의실이나 무작위로 난입해서 반복적으로 소란을 일으킬 리는 없는 것이다. “빨갱이 아저씨”는 초능력 관련 강의들을 노리고 공격했던 것이다. 교문에서 가까운 건물들이 주로 피해를 입은 것은 교문에서 가까웠기 때문이 아니라 주로 그 쪽에 실험실이 몰려 있어서 공과대학의 공중부양 수업이나 지리학과의 축지법 강의, 심리학과의 투시나 텔레파시 등 실험실습을 포함하는 강의들이 그 쪽 건물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지도교수님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엄격하게 말했다.
“그래도 혹시나 무슨 일 있으면 과사무실에 바로 연락해. 우리 애들 공부하는데 교수가 폭행 같은 걸 당하면 안 되지. 그랬다간 앞으로 우리 학교에 아주 발도 못 들여놓게 해 줄 거야.”
저게 바로 ‘엄마 독수리 모드’다. 네, 하고 대답하면서 나는 속으로 조금 웃었다.


그리고 NCESP-I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학술 발표가 시작되었다.
내가 토론을 맡고 지도교수님이 사회를 맡은 “빨갱이 아저씨”의 발표 제목은 <ESP Education: 초감각적 지각 교육의 오늘과 내일>이었다. 아마 그 제목 때문에 학회 운영진에서 나와 나의 지도교수님을 같은 패널에 지정한 모양인데, 사실 그 발표는 문제가 몹시 많았기 때문에 토론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단 초감각적 지각 교육과정의 역사를 요약해줄 것만 같은 제목과는 달리 발표문의 내용 대부분이 “빨갱이 교수”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K-TESP와 KESP-C 자격 인증 시험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다. 뭐 거기까지는 교육 계발 과정의 일환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빨갱이 교수”는 기존의 초능력 능력 시험인 K-TESP와 새로 개발되어 국제 공인을 받은 KESP-C의 차이점을 굉장히 세세하게 설명하면서 (주어진 발표 시간을 십 분 넘겼다) 조금씩 엉뚱한 길로 빠지더니 내가 보기엔 상당히 지엽적으로 여겨지는 한 가지 사안에 몹시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염동력을 쓸 때에는 손의 움직임이 아주 중요합니다.”
“빨갱이 교수”는 만찬 석상에서 내게 말할 때와 비슷하게 비밀스럽고 나지막한, 듣는 사람에게 몹시나 강력한 졸음을 유발하는 목소리로 느릿느릿 점잔을 빼며 말했다.
“염동력의 발휘에 있어 손의 위치와 동작은 사실상 중심적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여러분 모두 아시다시피 손동작이 없이는 염동력의 발휘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효율적인 염동력의 발휘를 위해서는 양손을 얼굴 앞에서 삼각형으로 모으는 것이 최상의 손모양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바흐찐의 행위철학에 따르면 삼각형이 만트라의 기운을 상징하는 가장 완벽한 도형이기 때문으로서….”
바흐찐을 읽어본지 좀 오래되긴 했지만 그래도 러시아에서 학위 받은 사람으로서 말하겠는데 행위 철학의 내용 중에 삼각형에 관한 저런 언급은 없다.
“단순하게 나와 대상, 즉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으로 이루어진 ‘스트rr럭춰’가 아니라 ‘아rrr키텍토니카’를 이루는 완벽한 구성상의….”
저 교수는 바흐찐의 개념을 곡해하고 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빨갱이 교수”가 영어식으로 굴려서 발음하는 것처럼 ‘아rrr키텍토니카’가 아니고 러시아어 원래 발음은 “아르히쩩또니까”다.
어느 쪽이 됐든 “빨갱이 교수”가 바흐찐을 왜곡하며 아까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는 동안에 주어진 발표 시간은 이미 이십 분이나 초과되어 있었다. 사회를 맡은 지도교수님이 어떻게든 중단시키려 했지만 “빨갱이 교수”는 비밀스럽게 목소리를 낮추어 중얼중얼 문장을 이으면서 좀처럼 문단을 끊어주질 않았기 때문에 끼어들기도 쉽지 않았다.
“예, 발표 잘 들었습니다.”
마침내 “빨갱이 교수”가 결론 없는 발표를 흐지부지 마치자마자 입을 다물 새도 없이 지도교수님이 얼른 선언했다. 그리고 나로서는 무척이나 곤란한 순간이 도래하였다.
“시간이 좀 많이 지났지만, 토론 맡으신 선생님의 말씀을 얼른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발표 내용이 심각하게 옆길로 빠졌기 때문에 뭐라고 토론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여기서 궁극의 실존적인 질문, 즉 ‘당신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인가?’를 시전했다가는 학회가 엉망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고작 시간강사인 내 입장에서 교수에게 공개적으로 이런 발언을 했다가는 즉각 매장될 것이 뻔하다.
그러나 나도 학회 참석 한두 번 해 본 짬밥이 아니다. 내가 학회 발표할 때 토론을 맡았던 많은 불운한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나도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발표에 관하여 그럴 듯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이다. 대학원이라는 곳에서 종합시험과 논문심사와 학회발표 및 토론을 겪으면서 청춘의 좋은 세월을 한없이 낭비하여 길러준다는 것이 대체로 이 따위 능력이다.
“교수님 발표에 따르면 케이에스피 자격시험은 인정 기준이 좀 더 엄격해진 것 같은데, 염동력 이외의 분야에서도 자격 기준이 강화되었나요?”
이미 주어진 시간을 초과했기 때문에 일부러 예, 아니오로 간단히 대답할 수 있게끔 질문을 던졌지만 물론 “빨갱이 교수”는 이런 무언의 압박 따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물론 “빨갱이 교수”는 염동력 이외의 분야가 아니라 바로 염동력 분야에 대해서 아까 했던 말을 다시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염동력의 자격 기준에 있어서 손동작은 중심적인 구성요소를 이루는데….”
청중들은 답변의 첫 문장을 듣자마자 조금씩 짜증스러운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말이 더 길어지기 전에 사회자인 나의 지도교수님이 얼른 입을 열었다.
“원래 사회자가 질문을 하면 안 되지만, 저도 관심이 있으니 한 가지만 여쭤볼게요. 그러니까 교수님 의견에 따르면 손동작 없이 염동력을 쓰는 건 절대로 안 된다는 말씀인가요?”
질문을 듣고 “빨갱이 교수”의 얼굴에 아주 잠깐이지만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입술을 비뚜르게 치켜 올리는, 경멸에 가득한 미소였다.
그리고 “빨갱이 교수”는 엉뚱한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예 그러니까, 저는 한국 ESP 대학교 염동학과에서 학부와 석사를 마치고, 미국 버지니아에 있는 --- 대학교에서 염동력학으로 박사를 받았고, 미국 CIA 훈련기관에서 염동력 실무분야 연수를 마치고….”
청중도 나도, 그리고 질문했던 지도교수님도 다분히 어리둥절한 채로 “빨갱이 교수”가 난데없이 자신의 이력을 읊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한국 ESP 대학교 염동학과에 교수로 재직중이며, 현재 주요 관심사는….”
지도교수님의 얼굴에 조금씩 초조한 표정이 떠올랐다. “빨갱이 교수”가 문장을 대략 끝마칠 무렵에, 이번에도 입을 제대로 다물 틈조차 주지 않고 지도교수님이 말했다.
“예, 교수님 이력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 질문에는 아직 답변을 안 주셨는데요, 손동작과 염동력의 관계는….”
“교수님은 역사학 전공이시죠? 학부 전공부터 역사학을 하셨구요?”
“빨갱이 교수”가 갑자기 지도교수님의 말을 끊고 질문했다. 지도교수님은 한편으로는 불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그런데요?”
“학부에서부터 제대로 전공을 하지 않고 대학원 다니면서 이중 전공이니 부전공이니 발만 살짝 담근 비전문가들이 늘어나니까 학술 발표대회에서 이런 기초적인 질문이 나오는 겁니다.”
“빨갱이 교수”는 말하면서 손가락을 신경질적으로 움직여 책상을 탁탁 두드렸다.
“저희 한국 ESP 대학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ESP 학사 과정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그저 수업 몇 개 듣고 부전공을 했네 하는 비전문가들하고는 차원이 달라요.”
‘비전문가’라는 말이 두 번이나 되풀이되자 지도교수님은 책상 위에 가만히 양손을 놓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전혀 움직이지 않고 “빨갱이 교수”를 진지하게 쳐다보았다. “빨갱이 교수”가 말을 이었다.
“사회자 선생님은 어디서 연수 받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희 학교에서는 학부 1학년생들도 다 아는 이야기를 이렇게 국내 연합 학술 발표대회장에서 질문까지 하시는 건….”
여기까지 말했을 때 “빨갱이 교수”는 사라져 버렸다.
지도교수님이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예, 패널 여기서 마치고, 앞으로 삼십 분동안 다과회와 함께 친교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301호에 다과가 준비되어 있으니 학회 회원님들께서는 301호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커피를 마시며 나는 지도교수님께 살짝 물었다.
“그 분, 어디로 가신 거예요?”
지도교수님은 짧게 대답했다.
“루뱐까.”
루뱐까(Лубянка) 광장은 소련 시절에 KGB 본부 건물이 있던 곳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돌려보내신 거예요?”
지도교수님은 입술에 살짝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더 놀랐다. 목소리를 낮추어서 물었다.
“무슨 일 생기면 어떻게 하시려구요?”
“괜찮아. 1963년 정도로 보냈으니까 아주 위험한 시기는 아닐 거야. 한 이십 분만 뒀다가 다과회 끝날 때쯤 김선생이 가서 좀 데려오면 되겠네.”
지도교수님은 시계를 보면서 말했다. 그리고 내 속도 모르고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할 수 있지?”
“예, 그렇지만….”
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뒷일이 걱정되는 것이다. 물론 1963년 정도면 스탈린 죽은 지도 10년이나 지났고 해빙기니까, 아무리 KGB 본부 건물 안에 난데없이 외국인이 나타났다고 해도 이십 분 사이에 총살되거나 하지는 않을 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렇지만 저쪽은 남의 학교 교수인데 그렇게 함부로 엉뚱한 나라의 엉뚱한 시기에 갖다 버리면….
“그 사람, 너무하잖아? 아무리 밥그릇 싸움이라지만 그래도 같은 분야에서 같이 교수면 다 같은 배를 탄 처지인데, 공개적인 자리에서 비전문가 운운하면서….”
지도교수님은 초콜렛 과자를 맛있게 베어먹으면서 투덜거렸다. 그리고 태평하게 나를 향해 말했다.
“어머, 이거 맛있네. 김선생도 얼른 가서 좀 먹어봐, 다른 사람들이 다 먹어버리기 전에.”
그래서 나는 지도교수님이 권하는 대로 초콜렛 과자를 가지러 갔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교수란 뭐든지 다 해도 되는 직업이고, 반대로 별 걸 다 해야 하는 직업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1963년도 소련으로 돌아가서 “빨갱이 교수”를 찾아 오랜만에 그리운 KGB 건물 안을 돌아다니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빨갱이 교수”가 또 뭔가 이상한 말을 하거나 분노에 차서 나를 공격하면 어떡해야 하나 고민했으나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빨갱이 교수”도 자신을 도로 버려두고 오거나 다른 엉뚱한 과거 시대로 보내버릴까봐 걱정이 되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내 얼굴을 보았을 때 딱 한 가지 물어봤을 뿐이다.
“자네도 시간여행 전공이었나?”
“에….”
나는 가능한 한 불분명한 소리를 내고는 얼른 “빨갱이 교수”를 데리고 학회장으로 돌아왔다.
시간여행은 그 가능성이 내포하는 여러 가지 위험 때문에 실무를 취급하는 관련업계는 물론 학계에서도 극비로 여겨져 상당히 제한된 분야이다. 이쪽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왜냐하면 교육하거나 ‘계발’한다고 해서 없던 능력을 생기게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이다.
초능력쪽 전반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종종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냉전은 미국 혼자서 한 게 아니고 소련을 상대로 같이 했었고, 그러므로 냉전 시기에 미국이 했던 건 소련도 다 했다. 초감각 교육계발도 여기에 포함되며, 시기나 분야에 따라서는 소련이 미국을 훨씬 앞서기도 했다. 지도교수님이나 나 같은 경우에는 전공의 특성상 그 시기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분야의 전공자에 비해 좀 더 유리하므로,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돌아보았을 때 최적의 시기를 찾아가서 최적의 교육을 받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빨갱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게 됐지만 말이다.
다만 이 역시 전공의 특성상 내놓고 당당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게 좀 아쉬운 점이기는 하다. 같은 맥락에서 “빨갱이 교수”같은 사람한테 우리가 이 쪽 전공이라는 걸 이런 식으로 알려버리는 게 괜찮은 일인지 자못 걱정이 되긴 했지만 지도교수님 말씀대로 같은 배를 탄 입장이라면 최소한 소문내지 않는 게 좋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 근원지인 “빨갱이 교수”를 포함해서 관련된 사람들을 전원 색출하여 19세기 시베리아 어디쯤 (가능하면 겨울에) 갖다 버리는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일이 커질 것이고… 생각만 해도 골치아프다.
지도교수님이 원래 경솔하신 분이 아닌데 “빨갱이 교수”가 괜히 자존심을 건드리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된 것이다. 학회장으로 돌아와서 얼마 남지 않은 초콜렛 과자를 재빨리 가져다 먹으면서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학회의 나머지 발표를 들으면서, 그리고 다음날 폐회식장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나는 ‘밥그릇 싸움’이라는 말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폐회식장 인파는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초감각적 지각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공상과학 소설같은 관념이 이미 여기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살리고 있다는 뜻도 된다. 그러나 소련이 이미 망했고 미국은 천천히 망해가고 있는 마당에, 이 좁은 분야는 앞으로도 이 많은 사람들을, 게다가 미래에 배출될 각 학교들의 졸업생과, 그 졸업생의 후배들과, 그 후배들의 후배들…까지 모두, 먹여살릴 수 있을까?
사람이 많아지면 분야가 커진다는 뜻이고, 분야가 커지면 파이도 커지게 된다고 일반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분야는 국문학이나 영문학처럼 어느 학교에나 다 학과가 정식으로 개설되어 운영될 정도로 수요가 많거나 규모가 크지도 않고, 이제는 그렇게 커질 희망도 없다. 현상 유지나 하면 다행이지만 그나마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같은 분야에 종사한다고 해서 무조건 동지 의식을 가지고 반길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거시적으로는 같은 배를 탄 공동운명체이기도 하지만, 미시적으로는 내 밥그릇을 빼앗을 잠재적인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우리 분야만이 아니라, 모르긴 몰라도 세계적인 불황이라는 이 시대에, 어느 분야나 다, 누구나 다 어슷비슷한 처지일 것이다.
가벼운 물건 몇 개쯤 공중으로 띄워올리는 얄팍한 재주로, 혹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남에게 대놓고 말할 수조차 없는 기술로, 이 수많은 사람들의 밥그릇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그 누구의 발도 밟지 않고 그 누구의 심기도 건드리지 않으면서, 과연 내 한 몸 무사히 벌어먹고 살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서 나는 앞날이야 어떻게 됐든, 일단 다과회장으로 돌아가서 남은 초콜렛 과자를 모두 챙겼다. 그리고 아무리 반갑지 않은 얼굴과 마주친다 해도, 폐회식 후의 공짜 저녁식사에 반드시 참석해서 양껏 먹어둬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

mirror
댓글 4
  • No Profile
    연심 11.10.29 00:56 댓글 수정 삭제
    꺅- 재미있어요!! 생활력이 뚝뚝 묻어나는 상상력이 아주 감칠맛 나네요. 맞아요, 자고로 공짜 저녁은 배터지게 먹어줘야되는 거에요.으하하하. 잘 읽었습니다!! ^^
  • No Profile
    정도경 11.10.29 14:02 댓글 수정 삭제
    연심님 감사합니다. 근데 사실 이것은 약 67% 실화로서 학회를 2주 연속 다녀온 뒤로 심란함을 참을 수가 없어서 쓴 이야기이며 저 개인적으로는 눈물을 참을 수 없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ㅠㅠ 저 진짜 이바닥에서 먹고 살 수 있을지 참 앞날이 깜깜합니다 (그래서 공짜 저녁은 배터지게 먹고 왔습니다 흑ㅠ)
  • No Profile
    앤윈 12.04.02 13:40 댓글 수정 삭제
    내용과는 별개로 학회와 과자 부분에서 엄청난 공감이 휘몰아치네요 ;ㅅ; 감동적이에요 ;ㅅ;
  • No Profile
    정도경 12.04.02 23:23 댓글 수정 삭제
    흐억 제 마음을 알아주시는군요 앤윈님 최고 ㅠㅠ)b
분류 제목 날짜
이서영 종의 기원 (본문 삭제)5 2012.01.27
이서영 성문 너머 코끼리 (본문 삭제)5 2012.01.27
아이 허기 2012.01.27
아이 쭈글 할머니의 칼1 2012.01.27
아이 칼로 푹1 2011.12.31
정도경 정령이 노래하는 곳3 2011.12.31
정세랑 즐거운 수컷의 즐거운 미술관 (본문 삭제)10 2011.12.30
곽재식 8월과 도로의 끝6 2011.12.30
pilza2 네거티브 퀄리아(Negative Qualia) - 본문 삭제 -1 2011.11.26
아이 미행1 2011.11.25
이서영 악어의 맛6 2011.11.25
곽재식 읽다가 그만 두면 큰일 나는 글 (확장판)6 2011.11.25
곽재식 천사의 옆얼굴 (확장판)6 2011.10.29
정도경 6 2011.10.29
정도경 NCESP-I4 2011.10.29
정세랑 지렁이력 100년 인류 해방사23 2011.10.01
양원영 백일의 회고록1 2011.09.30
정도경 백(百)의 그림자4 2011.09.30
정도경 4 2011.09.30
pena 백련 (본문 삭제)7 2011.09.30
Prev 1 ...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 52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