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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백(百)의 그림자

2011.09.30 22:4609.30






 그림자는 짙고 어둡다. 불이 붙었지만 잘 타지 않는다. 약을 더 부어보지만 냄새만 지독할 뿐이다. 약 냄새 때문에 눈물과 콧물이 쏟아진다. 한 손으로 눈과 코를 닦아 가면서 동시에 불씨를 쑤석거리는 건 쉽지 않다.
 어차피 누구에게 예쁘게 보여야 하는 건 아니다. 나는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그대로 두고 훌쩍거려가면서 나뭇가지로 불 속을 뒤적인다. 등 뒤에는 불구자가 앉아서 나를 보고 있다.
 불구자는 언제나 거기에 있다. 내가 그림자를 태울 때면 항상 앉아서 지켜본다. 그림자를 다 태운 후에도, 내가 가 버린 후에도 불구자는 그곳에 앉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그림자를 태울 때 불구자가 와서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불구자가 항상 앉아있는 자리를 내가 때때로 침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도 불구자의 턱과 손이 하얗게 빛나 보인다. 벙거지 같은 모자를 깊숙이 뒤집어쓰고 긴 소매로 팔도 한껏 가리려 한 것 같지만 소용이 없다. 특히 어둠 속에 드러난 손은 유난히 희고 뚜렷하다.
 그러니까 불구자가 흉악한 냄새와 연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림자 태우는 광경을 그토록 열심히 지켜보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저 불구자도 언젠가 그림자를 빼앗긴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자 또한 내 손을 거쳐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고….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다고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불구자가 내 뒤에 앉아서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독한 연기가 거슬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혹은 거슬린다는 게 뭔지 이미 알지 못하게 되어버렸겠지.
 눈물 콧물로 얼굴이 엉망이 된 데다가 스물스물 귓가에 달라붙는 듯한 콧노래 소리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마치 쫓아내도 쫓아내도 귀찮게 귓가에 달라붙어 앵앵거리는 벌레 소리 같다. 어쩔 수 없이 짜증이 치솟는다.
 그림자는 좀처럼 잘 타지 않는다.


 그는 책에 나온 자세를 따라하고 있다.
 “이렇게 서서, 팔은 이렇게 움직이고….”
 한 손에 책을 든 채로 그는 시험적으로 팔을 움직여 본다.
 “…그리고 이렇게 때리는 거예요.”
 그가 스텝을 밟으며 팔을 움직인다. 주먹을 뻗는 모양새가 제법 그럴 듯해 보인다.
 그가 동의를 구하듯이 나를 쳐다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뒷걸음질쳐서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 책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닥의 책을 훔쳐보면서 자세를 다시 잡는다.
 “하나, 둘, 셋….”
 다시 한 번 스텝을 밟는다.
 “여기서, 뻗고….”
 그러나 팔을 뻗기 전에 고개를 슬쩍 돌려 책 속의 사진을 확인한다. 사진을 잘 보기 위해 고개를 모로 돌린 채로 발을 앞으로 움직이며 주먹을 힘껏 휘두른다.
 “어어…”
 주먹을 내지르면서 앞으로 나가려다 그가 발이 꼬여 휘청거린다. 넘어지지 않도록 내가 몸으로 받아준다.
 “연습 상대 해 줄까?”
 “안 돼요. 다쳐요.”
 그가 고개를 젓는다. 비키라고 손짓한다. 나는 잠자코 비켜선다.
 대신 나는 책을 집어든다. 그의 시선 높이로 책을 들어준다. 그가 다시 자세를 잡는다. 이번에는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되니 조금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이번에는 책이 내 손 안에서 흔들거린다. 나는 손가락에 힘을 준다.
 책은 얇지만 꽤 크다. 왼손의 세 손가락만으로 지탱하기란 쉽지 않다.


 “한 방이에요. 딱 한 방에 보내는 거예요.”
 그가 말한다.
 “그게 진짜예요. 우리 가문의 비전은 사람을 한 방에 불구로 만들거나 죽일 수도 있거든요.”
 “왜 그렇게 한 방을 좋아해?”
 내가 묻는다.
 “한 방 때렸는데 제대로 싸우기도 전에 죽어버리면 재미 없잖아?”
 그가 몸을 일으킨다.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싸움은 재미로 하는 게 아니에요.”
 그가 진지하게 말한다.
 “목숨을 걸고 하는 거예요. 내가 죽이지 않으면 상대가 날 먼저 죽인다구요. 한 방에 보내지 않으면 다음은 없는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미안해.”
 그는 그제야 표정을 풀고 다시 옆에 눕는다.
 “계속 열심히 연마하면 나도 상대를 한 방에 보내는 실력을 기를 수 있을 거예요.”
 그가 내 젖꼭지를 만지작거리면서 중얼거린다.
 “아직 발동작이 좀 불안하긴 하지만….”
 “선생님을 구해서 배워보면 어때? 책으로 독학하는 건 한계가 있잖아?”
 내가 제안하자 그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저건 우리 가문만의 비전이기 때문에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어요. 저런 거 가르친다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은 전부 가짜예요.”
 “그런가.”
 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가 몸을 일으킨다. 내 위로 올라온다.
 “내가 완성시킬 거예요. 내가 직접, 혼자서.”
 그가 내 목에 입술을 대고 비비며 속삭인다.
 “꼭 내가 되살려서, 단 하나뿐인 고수가 될 거예요.”
 “응….”
 내가 불분명하게 대답한다.


 나는 잠든 그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베개에 파묻혀 찌그러진 것처럼 보이는 그의 얼굴은 일견 코믹하면서도 한편으로 측은하다.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그는 내 쪽으로 돌아누워 눈을 반쯤 떴다가 다시 감는다. 조금 웃어 보인다. 그리고 다시 쌕쌕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잘 잔다.
 그는 나의 유일한 손님이다. 여러 가지 사정상 유일한 손님이 되어버렸지만 어차피 원래도 손님은 많지 않았다. 여자들은 보통 내 나이쯤 되면 이런 일을 그만두는 듯하다.
 그러나 하긴, 이런 일을 하는 여자들을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것은 아니다.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므로 보통 언제쯤 그만두거나 혹은 어느 나이 때쯤 시작하는지 나는 사실 전혀 알지 못한다.
 내가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은 그가 나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붙여준 장난감이다. 혹은, 그와 함께 있을 때 나누는 말과 행동들을 생각한다면 그를 돌봐주는 보모라고도 할 수 있다.
 어느 쪽이 됐든, 계속 전화가 오는 것을 보면 나는 아직까지는 제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모양이다.
 남자들의 경우가 어떤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어느 정도 나이가 너무 늦은 것이고, 어느 정도가 적당하거나 빠른 것일까? 남자들은 체력적으로 유리하니까, 서른이 넘어서 시작했더라도 언젠가는 그가 바라는 대로 고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고수가 된다 한들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결코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걸었다면 이 날 이 때까지 나 같은 여자나 그가 좋아하는 책 등속의 놀잇감이나 쥐어주고 아무런 일도 맡기지 않은 채 내버려 두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나는 잠든 그의 머리카락을 매만져 준다. 그리고 몸을 숙인다. 나를 향해 무방비하게 드러난 그의 남성을 빨기 시작한다.
 일은 일이니까, 고객을 유지하려면 제 값은 해야 하는 법이다.
 그가 잠결에 신음한다. 손을 뻗어 허공을 더듬는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아준다.


 사람은 한 방에 죽지 않는다.
 최소한 내 경험으로는 그랬다. 내가 고수가 아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고수까지는 아니었더라도 내 일에 서툴렀던 적은 없었다. 나는 언제나 빨리 배웠고 금방 익숙해졌다. 직업으로 삼아서 먹고 살 수 있었던 걸 생각하면 아주 나쁜 실력은 아니었던 것도 같다.
 그러나 남자는 한 방에 죽지 않았다. 아무도 한 방에 죽지는 않았다. 그런데 남자는, 그러니까 뭐랄까, 아무래도 죽지 않았다. 몇 번이나 찔러도, 상처 입고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도로 살아났다. 그리고 내게 덤벼들었다. 그러면 나도 덤벼서 다시 찔러야만 했다. 한없이 되풀이해 찔러야만 했다.
 찔리는 남자 쪽이 물론 더 괴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끝없이 찌르는 나도 괴로웠다. 괴롭다고 느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무섭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가끔 잠을 잘 때나 혹은 무방비하게 멍한 상태로 있을 때면 남자의 그림자가 내게 다가온다. 비명을 질러서는 안 되지만,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남자의 그림자가 아니다. 남자의 그림자는 남자에게서 뜯겨나간 뒤에 남자와 마찬가지로 전문적으로 처리되었을 것이다.
 다만 남자의 그림자를 처리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그렇게 따지면 남자를 최종적으로 처리한 것도 내가 아니었다.
 나는 남자도 남자의 그림자도 최종적으로 처리하지 못했다.
 바로 그 때문에 지금 이런 처지가 된 것이다.
 그가 몸을 일으켜 내 어깨를 움켜잡는다. 그래서 ‘한 방’에서 시작된 남자에 대한 상념은 이쯤에서 중단된다.
 “제가 해 드릴게요.”
 그가 숨을 헐떡이며 속삭인다.
 “허락해 주세요….”
 내 유일한 손님이 다른 사람이 아닌 그라는 걸 생각하면, 이런 처지도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내가 옷을 입는 것을 도와준다. 브라의 후크를 채워주고, 셔츠를 입히고, 치마의 지퍼를 올려준다. 머리를 빗겨준다.
 이 모든 과정에서 그는 마치 깨지는 물건을 다루듯이 지극히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나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성격상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자신은 사람을 한 방에 죽이는 기술을 단련하는 고수이고, 나는 연약한 여자인데다 팔을 자유롭게 쓸 수 없는 불구자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필요 이상으로 나를 조심스럽게 대한다.
 “가방 안에, …넣어뒀어요.”
 현관으로 향하는 나의 등에 대고 그가 자신 없게 말한다. 이런 주제에 대해서 말할 때 그는 늘 자신이 없다.
 나는 가방을 열어본다. 너무 많다. 대충 세어서 절반만 도로 가방에 넣고 절반은 그에게 건네준다.
 “다 받으면 안 돼요?”
 그가 언제나 하듯이 망설이면서 묻는다.
 “안 돼.”
 내가 대답한다.
 직업적 양심이나 상도덕 따위는 없다. 그의 아버지가 지정해준 액수가 있을 뿐이다.
 그는 내가 내미는 것을 받지 않은 채 다시 묻는다.
 “돈 필요하지 않아요? 손, 수술하려면….”
 “수술 안 할 거니까 필요 없어.”
 나는 재촉하듯 그에게 다시 한 번 건넨다. 그는 한숨을 쉬면서 받는다.
 “왜 수술 안 해요?”
 나가려는 순간에 그가 묻는다.
 “내가 알아봐 줄까요? 보험이 없어도….”
 “필요 없어.”
 내가 다시 잘라 말한다. 수술해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극히 적다.
 몸을 돌려 이번에야말로 나가려는데 그가 또 묻는다.
 “전화해 줄 거죠?”
 나는 그를 돌아본다.
 “나도 몰라.”
 튕기거나 밀고 당기기 따위를 즐길 만큼 한가하지는 않다. 그의 아버지 ――― 정확히 말하면 그의 아버지가 붙여준 ‘담당자’ ――― 가 내게 전화해야만 내가 그에게 전화한다. 그러므로 이곳을 나간 뒤에 다시 전화가 걸려 올 지 안 올 지는 나도 알지 못한다.
 그가 뭔가 더 말하려 한 것 같지만, 나는 등 뒤로 문을 닫아버린다.


 건물을 나왔을 때 골목을 막고 서 있는 자동차와 키 큰 사람의 형체가 보인다. 나는 한 순간 긴장한다. 그러나 키 큰 형체가 손을 들어보이는 것을 보고 곧 경계를 푼다. 키 큰 형체는 내 ‘담당자’다.
 ‘담당자’가 내게 손짓한다. 나는 다가간다.
 ‘담당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를 향해 고갯짓을 한다. 나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차에 올라탄다.


 차는 어둠 속을 달린다. 어디로 가는지 나는 굳이 묻지 않는다.
 전화 통화는 가끔 하지만 ‘담당자’를 직접 보는 것은 무척 오랜만이다. 게다가 같이 차까지 타고 어딘가를 가는 것은 더 오랜만이다.
 나는 차창을 내린다. 밤 바람이 시원하다.
 어쩐 일인지는 묻지 않는다. ‘담당자’도 말해주지 않는다.
 ‘담당자’는 내 손을 풀어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내가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거나,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일 수도 있다.
 혹은, 다른 손님을 받게 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됐든 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차에 탄 이상 도망칠 수도 없고, 손이 풀리지 않았으니 저항할 방법도 없다.
 그래서 나는 밤 공기와 창 밖으로 지나가는 스산한 어둠 속의 풍경을 가능한 한 즐기려고 노력한다.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고급 호텔이다. 주차 요원이 서둘러 뛰어나왔다가 운전석에 앉은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벽 한 쪽에 붙은 버튼을 누른다.
 벽이 천천히 통째로 열린다. 비현실적인 광경이다.
 나와 ‘담당자’를 태운 커다란 세단은 벽 안쪽으로 스며들어가 좁은 경사로를 미끄러지듯이 내려간다. 차 뒤로 다시 벽이 통째로 움직여 천천히 닫힌다.
 경사로를 내려가서 도착한 곳은 호텔의 공용 주차장이 아니다. 주차장은 맞는 것 같지만 드넓은 공간에는 차가 단 한 대만 주차되어 있다.
‘담당자’를 따라 차에서 내리면서 나는 속으로 조금 안도한다. 이곳은 어둠침침하다. 이런 곳이라면 처리되기보다는 다른 손님을 받게 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
 ‘담당자’가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 엘리베이터 앞으로 간다. 나도 뒤따라 간다. 그러나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기 전에 ‘담당자’는 갑자기 말한다.
 “뒤로 돌아.”
 그리고 ‘담당자’는 턱짓으로 한 곳을 가리킨다. 엘리베이터 문 앞, 조명 바로 아래다.
 나는 시키는 대로 조명 아래로 간다. ‘담당자’에게 등을 보이고 선다.
 ‘담당자’가 내 양 팔을 등 뒤로 모아서 묶는다. 곧 팔꿈치 아래로 살갗과 힘줄이 함께 찢어지는 듯한 느낌이 전해져 온다. 처음도 아니고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가장 싫은 부분이다.
 그러나 불쾌한 느낌은 오래 가지 않는다.
 “됐다.”
 ‘담당자’가 말한다.
 나는 다시 쓸 수 있게 된 오른팔과 왼손의 나머지 손가락을 움직여 본다. 감촉이 낯설고 움직임은 서투르지만, 그래도 무척 기분 좋다.
 “가자.”
 ‘담당자’가 말한다. 엘리베이터를 탄다. 엘리베이터가 이미 도착해서 문이 열려 있었다는 것을 나는 바로 앞에 서 있으면서도 눈치 채지 못했다.
 나도 ‘담당자’를 따라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선다.
 소리 없이 문이 닫힌다.


 엘리베이터가 멈추어 선 곳은 호텔의 가장 꼭대기 층이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눈앞에 나타난 것은 복도가 아니고 곧바로 객실 입구다. 아마도 최고급 스위트 룸일 것이다. 나는 ‘담당자’의 뒤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간다.
 안은 넓다. 거실이 운동장 같다. 침실이 세 개다. 넓이만이라면 4인 가족 기준으로 침실 하나에 한 가족씩 세 가족 정도는 무리 없이 들어와 살 수 있을 것 같다.
 ‘담당자’가 그 중 한 침실로 들어간다. 나도 따라간다. 침실 안쪽에 역시나 4인까지는 아니지만 젊은 부부와 아기 정도는 들어와 살아도 될 법한 넓이의 욕실이 있다.
 그 욕실 안에 물론 젊은 부부나 아기는 없다. 대신 몸집이 크고 어깨가 넓은 남자들이 서너 명 둘러서 있다. 바닥에는 한 남자가 엎드려 있다. 양 손은 등 뒤로 묶였고, 발도 발목에서 케이블 타이로 묶여 있다.
 ‘담당자’가 내게 눈짓한다. 나는 다가간다.
 손을 대려 하자 남자가 꿈틀거린다. 입이 테이프로 막혀 있어서 콧구멍으로 끙끙거리는 신음 소리만 새어 나온다.
 나는 ‘담당자’를 쳐다본다. 의식이 없는 쪽이 훨씬 처리하기 쉽다.
 ‘담당자’는 살짝 고개를 젓는다.
 “시간 없어. 빨리 해.”
 그리고 밖으로 나가 버린다. 욕실 안에 둘러서 있던 남자들도 따라 나간다.
 나는 한숨을 쉰다. 욕실 안을 둘러본다. 천장의 백열등만 켜져 있다. 나는 벽으로 다가가서 샤워 부스 안과 욕조 위의 전등과 거울을 둘러싼 장식 램프까지 켤 수 있는 불을 전부 켠다. 욕실 안은 마치 조명을 밝힌 무대처럼 부자연스럽게, 눈이 아프도록 환해진다.
 바닥에 엎드린 남자가 목을 한껏 늘여 불안한 시선으로 내 움직임을 좇는다. 나는 남자의 곁으로 다가가서 쪼그리고 앉는다. 남자를 향해 손을 뻗는다. 남자는 흠칫 놀란다.
 “괜찮아요.”
 내가 속삭인다.
 “힘 빼세요. 긴장 풀고….”
 말하면서 나는 양 손으로 엎드린 남자의 뒤통수와 목덜미를 살살 만진다.
 손이 닿자 남자는 다시 흠칫 놀란다. 그러나 내가 몇 번 부드럽게 쓰다듬자 차츰 긴장을 푼다.
 “얼굴은 바닥에 대고…, 그렇죠.”
 나는 속삭이면서 계속 남자의 머리를 만진다.
 “바닥이 차가워도 조금만 참으세요…. 오래 걸리지 않으니까.”
 머리를 살그머니 만져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긴장을 푼다. 이발하는 도중에 잠들어버리는 사람이 많은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남자도 계속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조금씩 내가 시키는 대로 얼굴을 욕실 바닥에 대고 목의 힘을 뺀다.
 목덜미가 드러난다.
 남자는 머리가 짧다. 나는 왼손으로 남자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면서 오른손으로 남자의 머리카락을 치운다. 짧고 고집스러운 머리카락은 옆으로 치우는 즉시 제 자리로 되돌아간다.
 머리가 긴 쪽이 쓸어 넘기기는 더 편하다. 그러나 지금 나는 불평할 처지가 못 된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 하는 수밖에 없다.
 왼손으로 대충 머리카락을 계속 치우면서 오른손으로 위치를 가늠해 본다. 몇 번 손을 댔다가 머리카락이 제 자리로 돌아오는 바람에 다시 손을 뗀다.
 그러다 경추가 완전히 드러난 순간, 나는 왼손으로 남자의 목덜미를 누르고 오른손을 아래로 넣어 그림자를 잡아 뽑는다.
 남자의 비명 소리가 욕실을 울린다.
 그러나 그 비명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일단 머리 부분을 벗기고 나면 나머지는 그리 어렵지 않다. ‘담당자’가 욕실에 다시 들어왔을 때는 남자도 남자의 그림자도 펄떡이던 것을 완전히 멈추고 바닥에 축 늘어져 있었다. 처음 도착했을 때 욕실을 점령하고 서 있던 남자들도 함께 들어와서 ‘담당자’의 눈짓에 따라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들고 나갔다. 그 중 마지막 사람이 쓰러진 남자가 이미 나갔는데도 바닥에 그림자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눈치 채고 흠칫 놀랐다. 그러나 ‘담당자’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나가 버렸다.
 남자들이 모두 나간 후에 ‘담당자’가 내게 칼을 건네준다. 날이 없는 무딘 칼이다. 보통의 쇠와는 달리 빛을 완전히 흡수하는 재질로 되어 있어서, 눈이 멀어버릴 듯한 욕실의 조명 속에서도 전혀 반짝이지 않는다.  그 둔중한 표면을 보면 언제나 깊은 바닷속의 눈먼 물고기가 생각났다.
 칼을 받아들고 나는 쓰러진 남자의 그림자를 조심스럽게 토막내기 시작한다.
 사람을 토막낼 때와 마찬가지로 관절 부분에서 자르면 된다. 다만 실제 사람을 토막내는 것보다 훨씬 쉽다. 뒷처리도 훨씬 더 깔끔하다. 피도 튀지 않고, 흔적도 남지 않고, 시체 일부 혹은 전부가 발견되는 사태 따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애초에 그런 이점이 있기 때문에 상대를 죽이는 대신 그림자를 떼어내는 것이다.
 ‘담당자’는 느긋하게 서서 내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빛이 밝게 보이는 것은 어둠이 있기 때문이다. 사물의 윤곽이 가장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음영이 그 테두리를 두르고 있을 때이다. 인간의 몸 속에는 빛이 들지 않으므로 내장 기관은 태어날 때부터 죽는 순간까지, 혹은 그 이후에도 언제나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인간의 두뇌는 매끈하지 않으며, 오히려 주름이 많이 지고 그 골이 깊이 파여 있을수록 기능이 뛰어나다. 인간의 마음 속 골짜기와 그림자의 깊이는 아무도 알지 못하며 알 수도 없다. 인간은 겉과 속에 여러 가지 어둠과 그림자를 수없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인 것이다.
 그림자를 뺏긴 남자는 하루 정도 정신없이 잠을 잘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깨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는 이미 남자는 인간으로서의 모든 정신 기능을 잃었을 것이다.
 사고를 당하거나 질병에 걸린 사람은 치료할 수 있다. 독약을 마신 사람은 해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림자를 빼앗긴 사람은 치료할 수도 해독할 수도 없다. 그런 사람에게서는 애초에 아무런 세균도, 바이러스도, 폭행이나 독극물의 자취도 발견할 수 없다. 그저 깊은 잠을 자고, 깨어났을 때에는 백치가 되어 있을 뿐이다.
 유명 인사가 돌연히 사고를 당하거나 실종되거나 죽음을 당하면 경찰이 수사에 나선다. 시신이 발견되면 일은 더욱 커진다. 그러나 신병에 아무런 이상이 없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반편이 되어버리면 그 누구도 어찌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쓰러져 있던 남자는 그 어떤 약으로도, 그 어떤 신기술로도 영원히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나이 들어 육신에 자연적인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그저 어린 아기처럼 침을 흘리며 멍한 눈으로 천장을 쳐다보면서 오랜 세월을 소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밤이 되면 그림자를 잃은 남자의 몸은 어둠에 덮이지 못하고 빛이 없는 곳에서도 유독 희끄무레하게 빛날 것이다. 쓰러진 남자에게서 찾아낼 수 있는 흔적이라면 그것이 유일하다.
 피해자가 어둠 속에서 밝게 보인다는 사실이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나는 토막낸 남자의 그림자를 조심스럽게 접는다. 머리와 팔 조각들을 몸통 위에 놓고 깨끗하게 포갠 뒤에 허벅지와 정강이를 겹쳐서 그 위에 얹는다. 잘만 맞추면 길쭉한 일자 모양으로 정리된다. 그럼 끝에서부터 단단히 말면 된다. 작고 검은 덩어리가 된 그림자를 가방 속에 집어넣는다. 늘상 태우던 장소로 가져가서 약품을 붓고 처리해 버리면 나의 작업은 종료된다.
 ‘담당자’가 내게 뭉텅이를 내민다. 나는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않고 그림자 덩어리와 함께 가방 속에 쑤셔 넣는다. 손에 닿는 감촉으로 보아 뭉텅이는 별로 두껍지는 않지만 빳빳하고 단단하다.
 내가 가방을 닫는 모습을 지켜본 후에 ‘담당자’가 말한다.
 “뒤로 돌아.”
 “소각이 끝날 때까지만 그냥 두면 안 돼요?”
 내가 묻는다. 한 손으로도 태울 수는 있지만, 불편하다. 부젓가락을 그 한 손에 쥐고 있으면 연기를 쏘였을 때 눈물 콧물을 닦아낼 수가 없어서 더 불편하다.
 “뒤로 돌아.”
 ‘담당자’는 인정 사정이 없다.
 나는 한숨을 쉰다. 시키는 대로 조명 아래로 가서 등을 보이고 선다.
 ‘담당자’가 내 오른팔을 등 뒤로 돌린다. 그러나 언제나 하던 작업을 하는 대신 ‘담당자’는 내 팔 안쪽을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슬쩍 쓰다듬는다.
 “그냥 두고 싶어?”
 ‘담당자’가 말한다.
 “양 팔을 다 쓸 수 있게 해 줄까?”
 “아침까지?”
 내가 재빨리 묻는다. ‘담당자’가 딱 잘라 대답한다.
 “자정까지.”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자정까지라면 몇 시간 남지 않았다. 그리고 ‘담당자’라면 무료봉사다. 더구나 혹시라도 그의 아버지가 알게 되는 날에는 ‘담당자’도 나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몇 시간만이라도 양 팔을 다 쓸 수 있다. 기회는 나타났을 때 어떻게든 잡아야 한다.
 ‘담당자’가 내 오른팔을 뒤로 돌려 잡은 채 다른 한 손으로 내 허벅다리를 쓰다듬는다. 손이 치마 밑으로 들어간다.
 “침대로 가요.”
 내가 속삭인다.


 그의 취향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담당자’의 방식은 좀 거칠게 느껴졌다. 그러나 은근히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특별하게 상식을 벗어나는 행위는 요구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해 주는 여자를 데리고 일류 호텔의 최고급 스위트룸에서 몇 시간이나마 즐길 수 있다는 사실 자체로 만족하는 것 같았다.
 나로서도 그다지 나쁠 것은 없었다. 침대는 깨끗하고 부드러웠다. 나는 어느 샌가 깜빡 잠들었던 것 같다.
 자정 무렵에 ‘담당자’는 나를 흔들어 깨웠다. 씻을 틈도 주지 않고 서둘러 옷을 입도록 재촉했다. 그리고 나를 돌려 세우고 오른팔을 등 뒤로 당겼다.
 그렇게 붙잡고 ‘담당자’는 내 오른쪽 손목에서 그림자를 끄집어냈다. 곧이어 손가락부터 팔꿈치까지 그림자를 뜯어낸다. 그 느낌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담당자’는 그렇게 뜯어낸 그림자를 팔 위로 접어올려 어깨에서 묶는다.
 그래서 나는 다시 오른팔을 팔꿈치 아래부터 쓸 수 없게 되었다. 감각은 살아 있지만, 근육도 힘줄도 신경도 내 명령에는 따르지 않는다. 있는 힘을 다 해서 무시무시하게 노력하면 약 5mm 정도 움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굉장히 힘을 써야 하는데다 그만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다. 그림자를 뺏긴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림자를 뜯긴 사지도 살아 있되 살아 있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어서 ‘담당자’는 왼손의 그림자를 묶는다. 이쪽은 약지와 새끼손가락만 손바닥 안으로 접어 넣는다. 꼭 필요한 일상 생활만은 간신히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최소한의 배려다.
 작업을 끝내고 ‘담당자’는 내 어깨를 툭 친다.
 나는 말없이 돌아서서 ‘담당자’를 따라 나간다.


 ‘담당자’는 내 숙소 앞에서 잠깐 차를 세워 나를 내려준다. 나는 서둘러 올라가서 약품 병을 가지고 다시 내려온다. ‘담당자’는 차를 타고 내가 언제나 그림자를 처리하는 곳까지 간다. 자기도 차에서 내려서 내가 그림자에 약을 붓고 불을 붙이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자리를 뜬다. 전에는 완전히 태우는 것까지 확인했지만, 몇 번인가 연기를 쏘이고 나서부터 그렇게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또 다시 같은 자리에서 불구자가 언제나 흥얼거리는 똑같은 노랫소리를 들으며 잘 타지 않는 그림자를 나무 막대기로 쑤석이고 있었다.
 다행히 바람이 불어서 연기가 내 쪽으로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천천히 타다 말다 하는 그림자를 멍하니 막대기로 뒤적거리면서 여러 가지 상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쓸모 없게 된 오른손이 어깨에 걸어둔 가방에 닿았다. 가방 속의 지폐 뭉치가 느껴졌다.
 그의 아버지는 오늘 내게 이례적으로 많은 돈을 썼다. ‘담당자’도 괜한 이득을 보았으니, 이렇게 된 마당에 그에게도 무료 서비스를 한 번쯤 해 줘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혼자서 피식 웃는다.
 물론 그저 생각일 뿐이다. 그랬다가는 곧장 그의 아버지가 알게 될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시키지 않은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의 아버지가 시킨 일을 하지 않아도 안 된다.


 남자는 찔러도 찔러도 죽지 않았다. 몇 번인가 남자의 칼에 내가 찔렸다. 나는 화가 나고 지쳐 있었다. 마지막으로 덤벼들었을 때 남자는 나를 뿌리치고 도망쳤다. 나는 남자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내가 붙잡은 것은 남자의 오른손 그림자였다. 그림자가 뜯겨 나갈 때 남자는 비명을 질렀다. 그 때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비명이었다. 내가 알던 남자는 비명 따위를 지르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의 아버지를 위해 일하게 되기 전에 나는 남자를 위해서 일했다. 다만 남자는 나이가 들어가고 있었고, 후손도 후계자도 없었으며, 물질적인 부분, 특히 돈에 관한 한 그의 아버지만큼 부하들에게 너그럽지 못했다. 그러니까 나는 단순히 벌이가 더 좋은 쪽으로 직장을 바꾸려 했을 뿐이다. 그러나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말하자면 입사 시험 격으로 나는 새 고용주를 위해서 이전 고용주를 살해해야 했다.
 남자의 시체 대신 나는 그의 아버지 앞에 남자의 오른팔 그림자를 내놓았다. 그 때까지도 나는 내가 뜯어낸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는 틀림없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전 고용주는 이미 배신했고, 새 고용주가 시킨 일을 해내지도 못했다. 달리 빠져나갈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림자에 관해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적은 숫자이지만 거기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이미 수하에 고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자의보다는 타의로 직업을 바꾸게 되었다.
 오른팔의 절반과 왼손 두 손가락을 대부분의 경우 쓸 수 없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팔이 잘리거나 영구적인 상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목숨을 부지하는 대가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사실 이전에 하던 일보다는 쉬웠으므로 불평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일종의 부가적인 고용 조건으로, 나는 그의 아버지가 지정하지 않는 개인적인 손님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지정받는 손님만으로도 일거리는 충분했다. 그림자와 상관이 없는 손님은 그 하나뿐이었다. 그가 내 유일한 단골이 되었다는 것도 불평할 일은 아니었다.


 언젠가 나는 그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강해지는 데 집착해?”
 그는 인간의 몸을 무기로 사용하여 다른 인간을 공격하는 기술과 그러한 기술 혹은 예술의 역사에 대해서 도서관을 세 개쯤 차릴 수 있을 정도의 자료를 구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스승이나 동료를 구해서 제대로 연마해보려 했으나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으려 했다고 그가 말했다. 그를 거부한 선생들은 나중에 알고보니 대부분 입으로만 떠벌리는 가짜이거나 사기꾼들이었다는 것이 그의 평가였다. 그나마 실력을 확인하고 찾아간 어느 고수는 그의 눈에 “살기가 보인다”는 이유로 제자로 받아주기를 거부했다고 그는 다분히 슬퍼하며 토로했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나는 이 이야기가 가장 어이 없었다. 그의 눈에 살기는 고사하고 그 어떤 종류의 공격성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전에 하던 일의 특성상 공격성에 대해서 상당히 잘 안다고 자부하는 편이므로 내 말을 믿어도 좋을 것이다. 내가 그를 조금은 측은하게 생각하는 것도, 동시에 그와 있으면 안전하다고 느끼는 이유도, 그가 그 연령대의 남자로서는 특이할 정도로 공격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성격 특성은 공격성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나와 처음 밤을 보내게 되었을 때 그는 나를 침대로 데려가 조심스럽게 앉힌 후에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구두를 한 쪽씩 벗겼다. 그리고 내 발등에, 역시 한 쪽씩, 조심스럽게 입 맞추었다.
 나는 당황했다. 그는 꿇어앉은 채로 나를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이렇게 해 드리고 싶어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말했다.
 “역겹다고 생각하시면 가셔도 돼요.”
 물론 나는 가지 않았다. 멋대로 역겨워하거나 갈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지만 그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해석한 것 같았다. 나로서도 그 편이 이익이었으므로 별다른 설명은 하지 않았다.


 “강해지고 싶어요.”
 몇 번인가 더 만난 후에야 그가 털어놓았다.
 “정말로 강해져서, 지금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게 가능할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게?”
 내가 중얼거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달라질 거예요. 내가 정말로 강하다는 걸 알고 있으면, 최소한 지금 내가 약하기 때문에 하는 여러 가지 행동들을 안 해도 될 거고, 약하기 때문에 못 하는 일들도 모두 할 수 있을 테니까.”
 “예를 들면 그게 어떤 일인데?”
 그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나는 기다렸다.
 “강해지면, …내가 부끄럽지 않게 될 거예요.”
 그가 한참만에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가 부끄러운데?”
 내가 다시 물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숙였다.
 나는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바닥에 꿇어 앉아 고개를 숙인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깨가 가느다랗게 들썩였다.
 나는 그를 달래주지 않았다. 그를 보고 있다가 내가 명령했다.
 “이리 올라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다시 말했다.
 “올라오라니까.”
 그가 고개를 들고 나를 보았다. 내가 세 번째로 말했다.
 “올라와.”
 그는 다시 침대로 올라왔다.
 “내 위에 올라타.”
 내가 말했다.
 그는 당황했다. 내가 설명했다.
 “그런 뜻이 아니고, 그냥 배 위에 걸터앉아.”
 그는 시키는 대로 내 배 위에 걸터앉았다. 내가 다시 말했다.
 “손으로 내 목을 잡아 봐.”
 그는 더 당황했다. 내가 다시 말했다.
 “양 손으로 내 목을 감아 봐. 목 조르는 것처럼.”
 “하지만, 그런…. 왜….”
 그가 더듬거렸다. 나는 차분하게 명령했다.
 “진짜로 목을 조르라는 게 아냐. 시늉만 해 봐.”
 그는 망설였다. 한참만에, 잔뜩 겁먹은 것처럼 양 손을 아주 살짝 내 목에 가져다 댔다.
 “자기는 남자고 나는 여자야. 나는 자기보다 키도 작고 몸도 가벼워. 그리고 오른손은 전혀 못 쓰고 왼손도 절반밖에 못 써.”
 내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마음만 먹으면 자기는 지금 당장이라도 말 그대로 한 방에 날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렇지만 그렇게 안 하잖아.”
 그는 가만히 내 목에 손을 댄 채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자기가 나보다 약해서 그런 건 아니잖아?”
 그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내 목을 감은 손에 조금씩 힘을 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항하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는 잠시 목을 조르면서 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손을 풀었다. 내 양 어깨 위, 머리 옆의 베개를 손으로 짚고 얼굴을 내 얼굴에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고마워요.”
 그가 속삭였다. 그리고 내게 키스했다.


 불구자가 나를 찔렀을 때,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야 다가오는 기척을 눈치챘다. 돌아섰을 때는 이미 늦었다. 칼은 배 아래쪽, 오른쪽 골반 바로 위에 박혔다.
 그리고 불구자는 칼을 뺐다. 나는 불구자가 한 번 더 찌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구자는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한 왼손을 허공에 치켜들고 나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그림자를 태우는 불빛에 반사되어 칼날이 반짝 빛났다.
 그래서 나는 불구자를 찼다. 처음에는 칼을 든 왼손을, 이어서 배를 찼다. 양 손을 제대로 쓸 수 없으니 불구자가 반격한다면 그걸로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찌 됐건 시도도 안 해 보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얌전히 죽을 수는 없다.
 불구자는 반격하지 않았다. 내가 차는 대로 그대로 얻어맞고 쓰러졌다.
 불구자가 쓰러지면서 늘상 쓰고 있던 벙거지 모자가 벗겨졌다. 그림자를 태우던 불빛에 얼굴이 드러났다. 나는 오래 전 내가 죽이려 했던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나무 막대를 내던지고 뛰어가서 불구자가 놓쳐버린 칼을 집어들었다. 나는 오른손잡이인데 지금 쓸 수 있는 것은 왼손, 그나마 손가락 세 개 뿐이다. 그래도 죽지 않으려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나는 칼을 집어들고 불구자 위에 타고 앉았다. 가슴보다는 목이 빠르고 쉽겠지만, 만약에 움직인다면….
 …불구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 떠오른 남자의 하얀 얼굴, 그림자가 타는 불빛에 비쳐 더욱 뚜렷하게 보이는 눈동자에 생기라고는 없었다. 남자는 초점 없이 개개 풀린 눈에 입까지 조금 벌린 채 나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왼팔을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희끄무레한 왼손이 내 오른팔을 힘없이 툭툭 쳤다.
 어쨌든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 나는 왼손에 힘을 주었다. 칼을 남자의 목에 가져다 댔다.
 칼날은 얇고 날카로웠다. 잘 벼려진 쇠가 살갗을 뚫고 경동맥을 베는 순간 남자는 돌연히 격렬하게 몸부림을 쳤다. 목에서 솟구친 피가 내 얼굴과 눈을 향해 튀었다. 나는 진저리를 치다가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남자는 왼손으로 오른쪽 목을 감싼 채 천천히 비틀거리며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를 잃은 남자의 오른손이 유독 하얗게 눈에 띄었다.
 나도 일어섰다. 그리고 왼손으로 오른쪽 배를 감싼 채로 그곳을 떠났다.
 누군가 뒤에서 지켜보았다면, 나도 남자와 똑같이 비틀거리고, 남자의 오른손과 마찬가지로 내 오른손도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었을 것이다. 남자의 뒷모습을 돌아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숙소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현관에 들어서서 문을 잠그자마자 나는 바닥으로 무너졌다. 웃옷을 들추고 배의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피….
 가망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어째서 그에게 전화하고 싶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불구자에게 찔리기 직전에 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물론 나는 그에게 전화하지 않는다. 불구자가 나에게 개인적으로 복수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의 아버지가 나를 처리하기 위해서 보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능성이 희박하기는 하지만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래서 나는 숙소의 현관에 웅크리고 앉아서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왼손에 전화기를 움켜쥔 채 그를 생각한다.
 사람은 한 방에 죽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하필 내가 한 방에 죽이지 못한 남자의 칼에 찔려서 한 방에 죽어버린다면 그야말로 아이러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 그의 아버지 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그에게 전화하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해진다.
 그러나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나는 점점 더 졸음을 참을 수 없다.
 안개가 낀 것처럼 흐려지는 머리로, 잠깐만 자고, 지금 아주 잠깐만 눈을 붙이고, 깨어나면 꼭 그에게 전화해야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화기가 왼손에서 서서히 빠져나간다. 완전히 놓치기 전에 힘주어 잡아보려 했지만 손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림자를 뺏겼을 때처럼….
 괜찮다. 자고 일어나도 전화기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이다….
 …괜찮지 않다는 것은 나도 안다.
 나는 그에게 전화할 수 없을 것이다.
 차츰 희미해지는 전화기를 멍하니 쳐다보면서, 사방을 감싸는 그림자에 무기력하게 몸을 맡기면서, 어째서인지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언젠가 내 목을 졸랐던 그의 손, 따뜻하고 조심스럽던 그 감촉이었다.

mirror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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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na 11.10.03 11:59 댓글 수정 삭제
    오랜만에 읽고 나서 마음이 어두워졌..... (...)
  • No Profile
    정도경 11.10.03 12:03 댓글 수정 삭제
    죄송합니다 (감사한 건가..;;; 감사죄송합...;;;;)
  • No Profile
    연심 11.10.07 00:26 댓글 수정 삭제
    전 정도경님 글치고는 의외로 좋은 결말.. 이라고 생각하며 읽었어요. 마지막에 그의 감촉을 떠올렸어, 슬프지만 상냥해... 하고요. 아하하;; 잘 읽었습니다.
  • No Profile
    정도경 11.10.07 22:49 댓글 수정 삭제
    아 그런가요 (그럼 여태까지 결말들은 다 어땠던 것일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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