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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완전한 행복

2010.08.28 01:1808.28

혼돈의 시기가 끝나가던 어느 겨울에 그의 집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덮인 벌판을 가로질러 찾아온 손님은 온몸이 꽁꽁 얼어붙은 채로 생존을 위한 하룻밤의 온기를 청했다. 그는 문을 열어 손님을 맞아들였다. 식탁에 앉히고 빵과 소금을 대접했으며 날이 저물자 난로의 불빛이 미치는 따뜻한 자리를 양보했다. 남자가 잠든 후에 그는 오랫동안 앞에 서서 잠든 남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남자를 알아보았으나 남자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


십오 전에 남자는 지금처럼 그렇게 초대받지 않고 그의 집에 찾아왔다. 때는 창과 칼과 방패와 도끼를 사내들의 무리 불청객의 뒤를 따랐다. 남자는 그와 그의 누이와 어머니와 아버지를 무릎 꿇린 자신을 황제라 칭하며 그의 가족들에게 자신의 손에 입맞추고 충성을 맹세할 것을 명했다.


나라에 황제는 뿐이다. 나는 분께 충성한다.”


그의 아버지가 남자에게 말했다.


아버지도, 아버지의 아버지도, 아버지의 아버지도 분뿐인 황제에게 충성했다. 반역자의 손에 입을 맞출 수는 없다.”


말을 듣고 남자는 눈짓했다. 그러자 남자의 부하가 그의 아버지에게 다가가 머리에 도끼를 꽂았다. 아버지의 피가 그의 얼굴에 튀었다. 그는 살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떨면서 남자의 손에 입을 맞추고 그와 그의 누이를 위해 목숨을 구걸했다. 참칭자는 소리로 웃었다. 부하들을 시켜 그의 아버지의 시체를 마당에 내다 버렸다. 그리고 대문과 곳간을 열었다.


도적의 무리는 하인들에게 집안의 보물을, 영지의 농노들에게 곳간과 창고의 음식과 술을 나누어 주었다. 어머니는 그와 누이를 끌어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그의 아버지가 결혼 선물로 주었던 목걸이를 가져가려 했을 어머니는 소리를 지르려 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에게 다가가 머리에 도끼를 꽂았던 사내가 칼끝으로 그의 목을 겨누자 어머니는 조용해졌다.


동안 참칭자의 무리는 그들의 집과 재산과 하인들을 지배하면서 그의 가족이 소유했던 모든 것을 나누어주거나 부수거나 먹고 마셔 없앴다. 그는 먹을 것이 떨어지면 그의 어머니와 누이, 그리고 자기 자신도 죽임을 당할 것이라 생각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먹을 것은 떨어지지 않았다. 술이 바닥날 때쯤 영지의 농노들이 보리술을 가지고 왔다. 고기가 없어질 무렵이 되면 누군가 마당으로 거위나 돼지를 끌고 들어왔다. 그런 음식은 참칭자와 부하들의 식탁에 올랐다.


너도 먹어볼 테냐?”


참칭자가 칼끝에 고기 점을 꽂아 그의 앞에 내밀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속으로는 꿀꺽, 하고 군침 삼키는 소리를 참칭자가 듣지 못했기를 빌었다. 참칭자가 그의 집을 지배한 뒤로 그와 그의 가족들은 음식다운 음식을 먹지 못했다.


참칭자는 웃었다.


고집 아이로구나.”


그리고 칼에 꽂았던 고기를 자기 입에 넣었다.


고기를 씹으면서 참칭자가 물었다.


저들이 우리에게 술과 고기를 가져다 주는지 아느냐?”


저들은 모두 반역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대답했다.


황제께 일이 알려지면 너와 너의 도당은 물론 너에게 술과 고기를 가져다준 무지렁이들까지 모두 목을 베실 것이다.”


참칭자는 한참이나 소리내어 웃었다.


어린 놈이 당돌하구나.”


그리고 그의 농노들이 가져다준 보리술을 마신 후에 말했다.


저들이 우리에게 술과 고기를 가져다주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는 저들의 황제다.”


참칭자는 손으로 그의 목을 잡아 얼굴 바로 앞으로 끌어당겼다. 귓가에 속삭였다.


할아버지는 농노였다. 아버지는 부역에 끌려가 성채를 쌓다가 돌이 무너져서 깔려 죽었다. 나이쯤 되었을 나는 남쪽으로 도망쳤다.”


그는 도적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나 몸부림칠수록 목이 조여들 뿐이었다.


참칭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남쪽에는 태양을 향해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자유가 있다. 그곳에서 나는 자신의 주인이 되었다.”


그는 숨이 막혀 팔을 휘둘렀다. 참칭자의 가슴을 두드렸다. 참칭자는 그의 목을 놓지 않고 말을 이었다.


머지 않아 나는 나라의 주인이 것이다. 때가 되면 돼지처럼 진흙 바닥에서 잠을 자고, 채찍을 맞고, 가축처럼 팔려 다니던 사람들이 나와 함께 나라의 주인이 것이다.”


참칭자는 그의 목을 조이며 귓가에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때가 되면 같은 귀족의 핏줄은 모두 씨를 말려 버릴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와 누이는 나와 같은 자들의 아이를 낳게 것이다.”


참칭자는 빙긋이 웃었다.


그러니 아직 숨이 붙어 있을 , 있는 먹어두는 좋을 거다.”


참칭자는 그의 입에 고기 점을 쑤셔 넣었다. 그리고 비로소 그의 목을 놓아 주었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 안의 고기를 뱉어냈다. 기침을 하며 결사적으로 공기를 들이마셨다. 한참 그렇게 숨을 고른 후에야 눈물로 범벅이 얼굴을 들어 참칭자에게 침을 뱉었다. 도적의 부하들이 붙잡아 때리기 전에 응접실에서 도망쳐 나왔다. 뒤로 참칭자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황제의 군대는 뒤늦게 도착했다. 대문을 부수고 들어와서 닥치는 대로 죽였다. 황제의 군대가 화살이 어머니의 팔에 박혔다. 그리고 황제의 군대는 참칭자와 살아남은 그의 부하들을 밧줄에 묶은 나무 우리에 넣어 황제가 보는 앞에서 목을 베기 위해 수도로 실어 보냈다.


팔에 화살이 박힌 그의 어머니도, 아직 어렸던 그와 그의 누이도, 참칭자에게 술과 고기를 가져다 주었던 농노들과 함께 밧줄에 묶여 나무 우리에 갇혔다. 어머니는 그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믿었던 황제의 법정에서 진실이 가려지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달간 참칭자를 먹이고 재웠으니 뜻을 함께 했음이 분명하다는 이유로 황제는 이미 그의 가족을 반역 죄인이라 판결하고 유형을 선고했다.


선고문을 읽은 장교는 아버지의 친구였다. 어머니가 눈물로 호소했으나 무거운 얼굴로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래서 그와 그의 누이는 팔에 화살이 박힌 어머니와 함께 얼어붙은 너머 끝없는 눈과 늑대들의 땅으로 보내졌다.


 


***


유형지로 가는 길은 좁고 멀었다.


동북쪽의 요새에 도착하자 때까지 호송하던 군인들이 교대했다. 그는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나무 우리에서 풀려나 걸어가게 되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팔다리를 뻗을 있게 것이 기뻤고, 새로 교대된 군인들은 뜻밖에 친절했다. 그는 누이의 뒤를 따라 어머니 앞에 서서 천천히 걸었다. 바람은 매서웠고 얼어붙은 양쪽에 늘어선 나무들은 회색으로 죽어 있었지만 희끄무레한 하늘에서는 가늘고 날선 햇살이 비추었다. 어머니와 누이 사이에서 걸으면서, 미약하지만 안간힘을 다해 있는 해를 쳐다보면서 그는 아버지와 함께 말을 타고 영지를 산책하던 생활을 떠올렸다.


그렇게 걷다가 때때로 얼어붙은 풀숲 사이로 산토끼가 얼굴을 내밀었다. 토끼를 보면 모든 것을 잊고 즐거워 고함을 지를 만큼 그는 어렸다. 고함 소리에 놀란 군인들은 반사적으로 허리에 칼에 손을 대었다가 도망치는 토끼를 보고 웃곤 했다. 토끼는 군인들이 잡아서 저녁에 구워 먹었다. 그와 그의 누이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그의 어머니는 사양했지만 그와 그의 누이가 먹는 모습을 웃으면서 지켜보았다.


 


동쪽 끝에 있는 요새에 이르러 군인들이 마지막으로 교대했다. 그리고 같은 유형지로 가는 이단자들의 무리가 합류했다.


중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세상을 땅에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우유를 마셔댔던 자들도 있었고, 채찍을 휘둘러 자기 몸에 스스로 고통을 가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손가락으로 성호를 긋고 알렐루야를 외치며 진정한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자들이었다.


수염을 깎지 않은 남자들과 머리를 두건으로 가린 여자들은 부드럽고 조용했다. 성호를 긋는 손가락에 엄지손가락을 맞대고 알렐루야를 외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멀고 험한 길을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어린 그는 이해할 없었다. 그가 궁금해하자 수염을 길게 기르고 십자가를 목에 노인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하느님은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을 비추는 ()이며 사랑이고 자비이시다. 스스로 용서하면 언젠가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쉽게 용서할 없었다. 화살촉이 박힌 채로 어머니의 팔은 썩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요새를 떠나면서 그와 그의 가족들은 참칭자가 수도로 가는 길에 나무 우리를 부수고 탈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썩어가는 팔을 붙잡고 멀고 추운 길을 걷다가 그의 어머니는 드디어 이상 걷지 못하게 되었다. 그와 그의 누이는 말라붙은 갈대와 나뭇가지를 엮어 들것을 만들었다. 어머니를 태웠으나 엉성한 들것은 발짝 가기도 전에 부서졌다. 수염을 기른 남자들 하나가 나무를 짜맞추어 썰매를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군인들은 멈추어 서서 그런 일을 시간을 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신음하면서 걸었고, 그와 그의 누이가 부축해도 종종 쓰러졌다. 그러면 군인들은 때렸다. 그의 어머니는 얼른 일어나지 못했고, 그래서 군인들은 사납게 때렸다.


어느 밤에 누이가 사라졌다. 날이 무렵에야 누이는 아랫도리가 피투성이가 채로 군인들에게 질질 끌리다시피 돌아왔다. 그리고 군인들은 썰매를 만들 나무와 시간을 주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썰매를 만들어 움직이지 못하게 어머니를 태우고 이제 살이 그와 여섯 누이는 썰매를 끌며 걸었다. 뒤에서 수염을 기른 남자들과 두건을 두른 여자들이 천천히 걸어서 따라오며 알렐루야, 알렐루야를 중얼거리고 손가락으로 신의 가호를 빌었다.


 


얼어붙은 앞에서 행렬은 멈추었다. 건너로 이어지는 덮인 황야가 그들의 목적지인 유형의 땅이었다.


눈과 얼음 속에서 너무 오랜 시간 걸어온 사람들은 지쳐 있었다. 눈은 허벅지까지 쌓여 있었고, 속에서 마른 풀과 얼어붙은 갈대가 걸음 떼어놓을 때마다 발에 엉켰다. 다리는 붓고 발가락은 동상에 걸려 감각이 없었다. 모두들 어디든 여장을 풀고 쉬고 싶었다. 그래서 건너에 끝없이 펼쳐진, 눈과 얼음과 황폐한 정적뿐인 땅을 보면서 사람들은 기뻐했다. 이제 이상 걷지 않아도 된다. 눈과 얼음 위라도 좋으니 어딘가 머무르며 생활을 시작할 있다.


그런 기대를 안고 행렬은 순차적으로 조심조심 강을 건넜다. 강의 이쪽에서 수면은 영원히 얼어붙어 심판의 날까지 녹지 않을 듯이 두껍고 단단해 보였다. 그러나 얼음은 백오십 명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그의 뒤에서 얼음이 갈라졌다. 어머니는 썰매에 실린 채로 차가운 속에 가라앉았다. 시신조차 찾을 없었다.


얼음물 속으로 뛰어들려는 그를 누이가 잡았다. 그는 누이를 때렸다. 함께 뒹굴었다. 통곡하는 남매를 감싸 안아주고 군인들의 매질을 막아준 것은 수염을 길게 기른 남자들과 두건을 머리에 여자들이었다.


 


누이는 어머니가 강물 속에 가라앉은 뒤에도 점점 자주 밤에 사라졌다가 동이 때쯤 돌아왔다. 이상 군인들에게 끌려오지는 않았다. 비틀거리면서도 자기 발로 서서 돌아오게 되었다.


누이가 머리를 두건으로 가리고 손가락으로 신의 가호를 빌게 것은 무렵이었다. 누이는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땅을 보며 걸었다. 그가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두건으로 머리를 가린 여자들 사이에서 천천히 걸으며, 끊임없이 손가락으로 성호를 그으며 되뇌일 뿐이었다.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에 하느님만이 선이며 자비이시다. 용서하면 용서받으리라. 알렐루야, 알렐루야.


 


***


유형지에 도착하자 호송대의 군인 대부분은 행렬을 그곳에 버려두고 돌아갔다. 대신 인근 요새에서 나온 되는 군인들이 작업을 감독했다.


그들은 덮인 숲의 나무를 쓰러뜨려 통나무집을 만들었다. 봄이 오기를 기다려서 아직도 얼어붙은 땅을 깨뜨리고 씨앗 심을 곳을 찾았다. 돌멩이를 수없이 부딪쳐 불꽃을 만들고 강철처럼 단단한 얼음 덩어리로 변한 땅을 파헤치느라 모두 손끝이 너덜너덜하게 피투성이가 되고 손톱이 닳아 빠졌다. 먹을 것이 없어서 배가 고팠고, 추워서 배가 고팠다. 쥐어짜는 듯한 배고픔은 속에서 추위와 함께 얼어붙어 무감각해졌고, 무감각은 무기력으로 이어졌다. 그런 무감각에 속지 않고 풀뿌리라도 파내서 입에 넣을 의지가 남아 있는 자만 살아남았다. 그렇지 않은 자들은 그대로 죽어서 얼음 속에 묻히거나 때로 숨이 붙은 채로 늑대에게 뜯어 먹혔다. 그곳은 세상의 끝이었고, 그들에게는 이상 곳이 없었다.


짐승들의 땅에서 소년은 온몸으로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부딪치며 청년이 되었다. 철학과 외국어를 배우고 아버지처럼 황제의 군대에서 장교가 되는 미래를 꿈꾸던 시절은 아득한 망각의 심연으로 사라졌다.


이제는 돌이킬 없는 멀고 부드러웠던 시절부터 소년에게 변하지 않은 하나의 감정은 누이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은 떠나버린 호송대의 군인들에게 끌려가 마지막 밤을 견디고 나서 절룩거리며 돌아온 후로 누이는 두건을 머리에 덮고 손가락으로 성호를 그으며 알렐루야를 중얼거리는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소년은 언제든 휘몰아쳐 사람을 으깨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주위의 자연과 무기력한 성호만 긋는 누이 사이를 가로막고 힘을 다해 싸웠다. 소년은 이상 어리지만은 않았고, 그런 싸움에 놀랍도록 빨리 익숙해졌다.


 


유형지에 정착한 뒤로 년이 그렇게 흘렀다. 이제 제법 집다운 집도 생겼고, 철이 바뀔 때마다 농사도 짓고 물고기도 잡을 있게 되었다.


이단자들 중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찾아 우유만 마셔댔던 사람들은 소를 키우는 것이 사치인 그곳에서 우유를 구할 방법이 없어 뿔뿔이 흩어졌다. 스스로 채찍질을 하며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찾던 사람들은 상처가 덧나거나 살아남을 기운을 잃고 일찌감치 죽어갔다. 수염을 기른 남자들과 머리에 두건을 여자들만이 작지만 튼튼한 통나무집을 짓고 안에 모두 모여서 손가락으로 성호를 긋고 줄지어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진정한 하느님을 향해 알렐루야를 번씩 외쳤다.


소년의 누이는 이제 그들의 손에 맡겨졌다. 육백 처음 하느님을 받아들였을 숭배하던 방식을 그대로 고수한 죄로 얼음과 눈의 땅으로 쫓겨온 그들은 비록 물고기를 잡거나 짐승을 죽이는 데는 능숙하지 못했지만 사람의 상처 입은 영혼을 돌보는 방법만은 알고 있었다.


소년은 그들의 방식대로 신을 믿지 않았다. 이제 따위는 소년에게 아무래도 좋았다. 단지 그들이 누이를 보살펴주었기 때문에, 누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만 평온해 보였기 때문에, 그도 때때로 찾아가서 누이의 곁에 앉아 손가락으로 성호를 그었다.


누이는 언제나 바닥을 내려다보거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옆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같았다. 때로는 그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는 같았다. 그가 누이의 손을 잡거나 어깨를 쓰다듬으려 하면 누이는 겁을 내며 피했다.


그래서 그는 누이 곁에 말없이 서서 손가락으로 성호를 그었다. 자신이 믿지 않는 하느님을 위해 알렐루야를 부를 의지는 그의 안에 없었다. 그러나 연민도 악의도 없이, 의도도 계획도 없이 무심한 사나움만이 몰아치는 잔인한 세상에 완전한 무방비 상태로 혼자 내동댕이쳐진 누이를 위해, 길을 잃은 누이의 영혼을 위해 그는 성호를 그었다. 그가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년이 지났을 유형지에 영혼의 전사들이 찾아왔다.


농노의 자손인 그들은 주인 대신 군역과 세금의 의무를 짊어지고 일생을 요새에 묶여야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질서를 거부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성채에서 도망쳤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한데 모여 황제의 군대와 싸우다가 더러는 죽고 더러는 체포되었다. 그렇게 체포된 자들이 유형지로 보내졌다.


눈빛이 험하고, 거친 손에 익숙하게 피를 묻혀본 자들이었다. 손가락으로 성호를 긋는 자들이 내놓은 얼마 되는 곡물죽과 보리술을 먹고 마시며 영혼의 전사들은 알렐루야 듣지 않고 핏발선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 사람의 시선이 그의 누이에게 향했다.
그날 알렐루야를 부르던 구교도 사람이 그의 숙소로 찾아왔다. 머리에 두건을 젖히고 주름진 얼굴을 드러낸 여인은 근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에게 누이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누이를 찾아 나섰다.


황무지의 밤은 야만적인 아름다움을 한껏 뿜어내고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하얀 자작나무 위로 쏟아질 듯한 별들이 총총히 빛났다. 그는 눈에 묻혀 반쯤 지워진 발자국을 따라가며 무기가 만한 것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작나무 사잇길은 좁고 길고 멀었다. 희끄무레하게 빛나는 어둠 속에서 밑에 사각사각 밟히는 눈을 헤치고 나아가면서 그는 문득 누이의 뒤를 따라 어머니 앞에 서서 유형지를 향해 걸어가던 때를 생각했다. 눈에 덮여 얼어붙은 풀밭의 마른 사이로 나쁜 산토끼가 얼굴을 내밀면 그는 소리를 질렀고 호송대의 군인들이 그것을 잡아 저녁에 구워 주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팔에 화살촉이 박혀 있었지만 살아 있었고, 누이는 아직 고통과 수치를 알지 못하여 무구했다. 군인들이 구워주는 토끼 고기를 어머니는 먹지 않았으나 그와 그의 누이가 먹는 모습을 보며 웃었다….


순간 그는 나무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눈을 밟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그는 천천히 나무 뒤로 돌아갔다.


누이는 땅에 누워 움직이지 않았다. 위에 남자가 엎드려 헐떡이고 있었다.


나무 밑동을 디딘 그의 옆에 돌멩이가 닿았다. 그는 그것을 집어들었다.


엎드려 있던 남자가 돌아보았다. 그는 내리찍었다. 돌이 사람의 살을 찢고 뼈를 때리는 둔탁한 느낌이 손을 통해 전해져 왔다. 남자는 쓰러졌다.


그러나 남자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다시 얼굴을 때마다 그는 되풀이해서 내리찍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멱살을 잡혔다. 뒹굴었다.


얼굴과 배에 충격을 느꼈지만 아프지 않았다. 단지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누이의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들렸다. 그는 자신을 타고 앉은 남자를 잡고 휘둘렀다. 남자는 자작나무 등걸에 뒷머리를 부딪쳐 조용해졌다.


그는 일어섰다. 누이에게 다가갔다. 가슴이 꽂힌 칼자루가 보였다.


누이는 얼굴을 반듯하게 옆으로 돌리고 누워 있었다. 초점 없는 눈을 보고 그는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다. 조심스럽게 누이의 가슴 위로 몸을 굽히고 칼자루를 잡고 뽑아냈다.


누이가 쿨럭, 기침을 했다.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누이가 고개를 돌렸다. 또렷한 눈이 그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하느님은 선이시며 자비이시다.”


누이가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작지만 분명하게 속삭였다.


내가 용서했듯이너도 용서하고, 용서 받아라.”


그리고 누이는 죽었다.


누이의 죽음과 함께 세상이 잠시 멈추었다. 그는 누이의 가슴 위로 몸을 굽힌 그대로 굳어졌다. 뒤에서 남자가 신음하며 꿈틀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그는 그렇게 몸을 굽힌 피로 물든 누이의 연약한 입술과 영원히 생기를 잃은 다정한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뒤에서 남자가 부스럭거렸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누이를 죽인 칼을 손에 채로 일어섰다.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아랫도리를 벗은 모습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그는 남자의 얼굴을 찼다. 꿈틀거리던 남자는 다시 조용해졌다. 그는 남자의 얼굴을 향해 등을 돌리고 배를 타고 앉았다. 누이를 더럽힌 성기를 잘라냈다. 이제까지 누이를 더럽힌 모든 남자들의 성기를 잘라냈다.


남자는 괴성을 지르며 버둥거렸다. 남자의 주먹이 그의 등과 목덜미를 때렸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전부 잘라냈을 때쯤 남자는 얌전해졌다. 그는 남자의 얼굴을 향해 돌아 앉았다. 누이와 남자의 피로 범벅이 칼날로 남자의 뺨을 톡톡 쳤다.


남자는 아직 살아 있었다. 잠깐 눈을 떴다. 그는 잘라낸 남자의 성기를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손에 칼로 남자의 목을 찢고 안에 쑤셔 넣었다.


 


남자는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그도 오랫동안 남자를 타고 앉은 움직이지 않았다.


얼굴과 손에 뒤집어쓴 피가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주변의 눈을 움켜잡고 손과 얼굴을 씻어냈다. 그리고 누이의 시체를 돌아보았다.


내가 용서했듯이 너도 용서하고, 용서받아라.’


누이의 시체와 남자의 시체 사이에 서서 그는 자신이 방금 무슨 짓을 것인지 이해하려 애썼다.


누이는 어머니를 싣고 썰매를 만들기 위해 군인들과 함께 밤을 보냈다. 누이가 피투성이가 되어 비틀거리며 돌아왔을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누이는 죽었고, 그래서 그는 없었다. 얼어붙은 땅덩어리처럼 그의 마음을 짓누른 죄책감의 무게는 번의 울음으로, 방울의 눈물로 녹일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누이에게 다시는 용서를 없게 되었으니 무게는 영원히 그의 심장 위에 얹힌 채로 얼어붙었다.


내가 용서했듯이 너도 용서하고 용서받아라.’


누이는 죽기 전에 자신을 용서했을까. 그는 없었다.


내가 용서했듯이 너도 용서하고 용서받아라.’


누이의 눈을 감기고 이마에 입을 맞춘 그는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그러자 누이의 영혼도 죽은 몸에서 일어나 그와 함께 떠났다.


 


***


청년이 소년은 자루를 손에 눈과 얼음을 헤치고 동쪽으로 동쪽으로 나아갔다. 돌을 부딪쳐 불을 일으키고, 작은 들짐승을 잡아 먹고, 눈구덩이 속의 꺼져 가는 모닥불 앞에 웅크려 새우잠을 잤다. 이미 어렸을 때부터 계속 일이라서 새삼스럽게 힘들지는 않았다.


저녁마다 누이를 끌고 가는 군인도 없었고, 우유를 찾거나 자기 몸에 채찍질을 하거나 시계 방향으로 돌며 알렐루야를 외치는 사람도 없었다. 하늘과 사이에 펼쳐진 인간과 짐승의 세상에서 죄책감과 분노와 증오를 짊어지고 그는 오로지 혼자였다.


그렇게 홀로 숲속을 걸을 때면 자작나무 아래 누이의 영혼이 모습을 나타냈다. 언제나 피에 젖은 입술을 움직여 누이는 기도했다.


-        하느님은 선이며 자비이시다. 내가 용서했듯이, 너도 용서하고 용서 받아라.


그러나 그가 다가가서 이마에 입맞추려 하면 누이의 모습은 어느 샌가 사라져 버렸다.


 


계속 동쪽으로 걷다가 그는 외딴 마을을 발견했다. 통나무집의 생김새로 보아 그곳도 유형 사람들이 일군 정착지인 같았다. 밤이 되기를 기다려 그는 통나무집에 가까이 갔다. 마당의 나무 둥치에 도끼가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다가가서 도끼를 뽑아냈다. 그리고 조용히 돌아서서 뛰었다.


그는 계속해서 동쪽으로 향했다. 이제 칼과 도끼가 있으니 무엇이든지 있었다. 나무를 베어 껍질을 벗길 수도 있었고, 땔나무를 잘게 쪼갤 수도 있었고, 집을 지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도끼로 나무를 베어 집을 지었다. 불을 피우고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베어다가 불을 쪼여 가지를 휘어서 덫을 만들었다. 그것으로 들짐승을 잡아 누이를 죽인 칼로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썰었다.


그렇게 그는 혼자만의 유형지에서 누이의 영혼과 함께 살았다.


-        하느님은 선이며 자비이시다. 내가 용서했듯이 너도 용서하고 용서 받아라.


누이의 영혼이 이렇게 말할 때면 그는 창백한 누이의 얼굴이 그립고 반가워 조금 웃었다. 그러나 언제나 가슴을 짓누르는 죄책감과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가득 채운 증오와 분노 때문에 눈물을 흘릴 수도 누이에게 다가갈 수도 없었다. 그러다 그가 간신히 손을 뻗으면 누이는 언제나 나타날 때처럼 소리 없이 사라져 버렸다.


 


***


참칭자는 난로 곁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었다. 잠든 도적의 얼굴을 보며 그는 누이의 마지막 말을 생각했다.


-        하느님은 선이며 자비이시다. 내가 용서했듯이 너도 용서해라.


그는 누이의 죽음과 지난 세월의 무게를 저울질했다. 심장 위에 얼어붙은 차가운 죄책감을, 마음을 밑바닥부터 가득 채운 증오와 분노를 생각했다. 누이를 죽인 칼을 손에 쥐고 망설였다.


참칭자가 눈을 떴다.


 


한동안 참칭자와 그는 서로를 마주보며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참칭자는 누운 채로, 그는 침상 앞에 채로.


마침내 참칭자가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칭자가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나를 죽이기보다는 가까운 요새로 데려가 군인들에게 넘기고 현상금을 타는 편이 너에게 훨씬 이익일 것이다.”


이익이라는 말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현상금 따위는 필요 없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자기 자신도 의식하지 못했으나 그는 사실 아주 오랫동안 날을 기다려 왔다. 목소리가 떨려서 헛기침을 해야만 했다.


너는 가족을 죽였다.”


참칭자는 누운 채로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얼굴을 보면서 눈앞에 칼을 들고 사람의 정체에 대한 어떤 단서라도 찾아내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참칭자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아버지는 너를 황제라 부르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너는 아버지의 머리에 도끼를 꽂았다. 너와 너의 무리가 가족의 집을 떠나지 않고 아버지의 농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 때문에 죄없는 어머니와 누이는 반역자로 몰려 유형지에서 죽었다.”


그는 다시 자기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입술이 옆으로 말려 올라가면서 이가 드러났다.


현상금 따위는 필요 없다. 나는 너를 죽이고 싶다.”


참칭자는 일그러진 웃는 얼굴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 장교의 아들이로구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참칭자가 다시 그의 얼굴을 관찰했다.


세월이…, 많이 흘렀구나.”


그리고 참칭자가 웃었기 때문에 그는 놀랐다.


참칭자는 그가 보는 앞에서 침상 위에 누웠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 그렇다고 침대 위에서 죽게 하려는 아니겠지.”


다리를 침상 아래로 내리며 참칭자가 물었다.


일어서도 되겠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칭자는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의 앞에 똑바로 섰다.


과거에는 아직 젊어서 야비한 격정을 뿜어내던 남자의 얼굴은 이제 관자놀이에 서리가 내리고 이마에도 주름이 졌다. 그러나 눈만은 변하지 않았다. 참칭자가 나는 저들의 황제다라고 말했을 때의 눈빛을 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은 기억한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얼굴을 마주 대하니 마치 조금 전에 일어났던 일처럼 전부 되살아났다.


참칭자가 평온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네가 보기에 나는 무뢰배의 괴수이고 살인자일 뿐이겠지.”


그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문제는 가지, 참칭자의 목에 칼을 지금 꽂느냐 아니면 조금 뒤에 꽂느냐 하는 것이었다.


참칭자가 천천히 말했다.


그러나 때의 나는 내가 창조하려던 세상을 믿었다. 돼지처럼 진흙탕에서 구르고 가축처럼 팔려다니는 자들, 나와 같은 자들이 세상의 주인이 되게 하리라던 말만은 거짓이 아니었다.”


참칭자는 그가 손에 칼을 내려다보았다.


피로 세운 왕국은 하늘의 왕국이 없다는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피는 오로지 많은 피를 불렀고,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참칭자는 조금 웃었다.


그러니 나도 결국은 너와 같다. 원한다면 칼로 나를 죽여도 좋다.”


그리고 참칭자는 입을 다물고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그는 칼자루를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나도 결국은 너와 같다 참칭자의 말이 그의 마음 속에 작지만 깊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래서 그는 칼을 손을 움직일 없었다.


참칭자의 뒤에서 누이가 모습을 나타냈다. 누이는 그에게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       하느님은 선이고 자비이시다. 너도 내가 했듯이 용서하고 용서 받아라.


너는 용서했는가?”


그가 문득 참칭자에게 물었다.


참칭자는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용서? 무엇을?”


그는 잠시 생각한 후에 대답했다.


세상을…. 자신을.”


그의 말에 참칭자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용서는 잘못이 있을 하는 것이다. 나는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 내가 일에 후회도 없다.”


그것은 그가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었다.


칼을 손에서 어쩐지 힘이 빠졌다. 그는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며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참칭자는 아무 말도 없이 그의 앞에 그대로 있었다.


“… 가라.”


그가 힘없이 말했다.


참칭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는 눈을 들어 참칭자를 쳐다보았다.


이제 와서 너를 죽여 내가 무엇을 얻겠으며 무엇을 되찾겠는가.”


그는 말을 끊고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참칭자의 어깨 너머로 창백한 누이의 얼굴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이를 악물고 다시 한숨을 후에 천천히 말했다.


“… 너를 살려 보냄으로써 나는 용서와 평안을 구하겠다.”


참칭자는 믿을 없다는 표정이 되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마디 말도 없이 돌연히 그의 옆을 지나 오두막의 문을 열고 추위와 속으로 나아갔다.


 


참칭자를 보내고 나서도 그는 움직이지 못하고 그대로 있었다.


나는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 내가 일에 후회도 없다.’


참칭자를 죽이지 않고 보내준 그의 결정이 올바른 것이었는지 말해줄 있는 사람은 누이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참칭자의 뒤에 나타났던 누이의 모습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오두막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혼자였다. 기다렸지만 누이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누이가 사라졌다. 그렇다면 용서했다는 뜻일까? 두리번거리다가 그는 칼을 식탁 위에 놓았다.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는 없었다.


과연 용서하고 용서받았는가?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어째서 이렇게 괴로운가?


옳건 그르건 내가 일에 후회도 없다.’


그는 식탁 위에 놓인 칼을 들여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칼을 쥐고 있었던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칼로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악귀와도 같은 방법으로 죽였다. 그가 죽인 사람이 그의 누이를 죽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오래 지속된 끔찍한 고통 뒤에 따라온 허무한 죽음이었다. 그래서 누이는 죽음 뒤에도 안식을 얻지 못하고 오랫동안 그를 따라다녔다.


이어서 그는 생각했다. 누이가 그렇게 고통받은 것은 어머니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결국 팔에 화살이 박힌 얼어붙은 강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팔에 화살이 박힌 것은 참칭자가 그의 집에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마음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참칭자에게서 시작되었다. 도적이 새로운 세상을 헛되이 꿈꾸며 무리를 모아 쳐들어오지 않았던들 그의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처럼 소중한 사람을 모두 참혹하게 잃고 눈과 늑대들의 땅에 홀로 남지도 않았을 것이다.


용서는 잘못이 있을 하는 것이다.’


잘못이 있음에도 자각하지 못하여 용서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용서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므로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선이나 자비가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정의였다.


눈에는 ,


피에는 .


그는 일어서서 도끼를 집어들고 오두막을 나왔다.


 


참칭자의 발자국은 눈밭 위에 두줄로 이어져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발걸음을 빨리하여 따라갔다.


참칭자는 뒤에서 사람이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 돌아 보았다. 그의 얼굴을 보고 순간적으로 안도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러다가 문득 참칭자는 그가 손에 도끼 쪽으로 눈길을 옮겼다. 순간 돌아서서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눈밭에 갇혀 오랫동안 참고 견뎌온 사람의 악에 받친 추격을 쉽게 따돌릴 수는 없었다. 그는 참칭자를 따라잡았다. 팔을 뻗어 뒤에서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언젠가 참칭자의 부하가 그의 아버지에게 했듯이 도끼로 머리를 내리쳤다.


사위가 하얗게 눈으로 덮인 벌판에서 그는 천천히 오랫동안 음미하며 참칭자를 번이고 번이고 내리찍었다.


참칭자가 완전히 숨이 끊어진 후에도 그는 도끼를 휘둘렀다. 참칭자의 목과 , 다리를 몸통에서 분리했다. 그런 뒤에 이미 붉게 물든 눈으로 도끼날과 , 얼굴에 뒤집어쓴 피를 씻어냈다. 일어서서 걸었다. 참칭자의 시체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서서 그는 여전히 손에 도끼를 움켜쥔 기다렸다.


어스름이 찾아오고 지평선에 늑대들이 나타났다. 그는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다. 늑대들은 차갑게 식어버린 시체에 다가갔다. 냄새를 맡아보더니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서서 늑대들이 참칭자의 시체를 전부 뜯어먹고 뼈까지 씹기 시작하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마리가 고개를 들었다. 푸른 인광이 서린 짐승의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얼굴을 찡그리고 이를 드러내며 늑대처럼 웃었다.


이제 그의 세상에는 선도 자비도 용서도 없었다. 그의 존재는 비로소 의미를 찾았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아름답고 무자비한 세상에 홀로 서서 그는 완전한 행복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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