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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달빛 아래 기사와

2010.01.29 22:3901.29

    I.
    한편 붉은 용의 탑에서 공주에게 쫓겨나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로 계단을 걸어서 내려가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기사는 그리하여 온 몸을 감싼 쇳덩어리를 덜걱거리면서 한도 끝도 없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나선형 계단을 처음에는 뛰어서, 그러다가 조금씩 속도를 늦추어 나중에는 걸어서 내려가면서, 땀투성이가 되어 갑옷을 하나씩 벗어서 버리면서, 발이 걸려 굴러 떨어질 뻔하면서, 간신히 균형을 잡고 몸을 일으켜 투덜거리면서 층계를 하나씩 조심스럽게 터덜터덜 내려가면서 생각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거지?
    그러니까 기사가 기억하기로는 분명히 공주가 마녀라서 나라를 들어먹을 음모를 짜고 있다고 그랬었다. 공주가 시집온 뒤로 국왕이 갑자기 병세가 나빠져서 얼마 못 가 죽어버린 것도 마녀의 저주 때문이고, 왜냐하면 그 전까지는 사실 좀 늙어서 쇠약해지긴 했어도 아들 결혼식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정도는 기운이 있었단 말이지. 그런데 공주가 시집오자마자, 정확히 말하자면 공주 몸값으로 거금을 내주자마자 왕이 그 때부터는 자기 힘으로 돌아눕지도 못 할 정도로 약해지더니 그대로 영영 세상을 떠나 버렸거든. 그래 법대로 왕자가 왕위를 물려받게 되기는 했는데 굳이 형식을 따지자면 아직 즉위식도 못 치른 데다가 걔는 기본적으로 어린애라서, 지 마누라 치마폭에 푹 감싸여 있는 꼴을 봐서는 이제 실권은 갈 데 없이 왕비가 되어버린 마녀의 손에 들어간 거고, 그걸 그냥 뒀다가는 나라 망하는 것도 시간 문제라는 얘기를 열심히 듣고 기사는 또 열심히 고개를 끄덕끄덕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얘기를 해 준 사람이 누구였더라?
    어쨌든 그래서 왕비가 되어버린 마녀 공주를 죽이러 갔다가, 역시나 마녀를 잡기는 쉽지 않은 법이라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마른 하늘에 천둥 번개가 치더니 비가 막 내리게 만드는 바람에 놓쳐 버렸고, 그래봤자 지가 도망을 가면 어디로 가겠어, 딱 예상대로 친정집에 가 있는 걸 한 발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다가 도로 빼내 와서 데려다가 새 국왕이 보는 앞에서 처단하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진짜로 무시무시한 어둠의 비술을 썼는지 붉은 용이 찾아와서 채 가 버렸다는 이야기다. 어느 순간 하늘이 새까맣게 어두워져서, 올려다 보니까 엄청나게 커다란 그림자가 하늘 전체를 막 전부 다 뒤덮었어. 그래서 뭔지 몰라서 어, 어, 하면서 보고 있는 사이에 활활 타는 새빨간 게 쏜살같이 내려와서는 사방에 지옥의 불꽃을 흩뿌리고 유황 냄새를 풍겨 가면서 마차 주위에 수행하던 시종이니 무사니 하는 사람들을 다 때려눕히고는 공주만 홀랑 데려가 버린 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까까지 공주가 타고 있던 마차는 싹 다 태워먹었고,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기절했거나 무서워서 넋이 나가버렸고. 그 꼴을 보고 나니까 기사는 이 공주가 진짜로 마녀라는 사실에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게 되어버렸고, 그러므로 기사 된 자의 명예를 걸고 정의의 이름으로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붙잡아다가 그녀가 보는 앞에서 처단을 하고야 말겠다고 맹세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는 기사를 사랑과 존경으로 가득한 그 반짝반짝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황홀하고 달콤하게 입을 맞추고는 기사의 귓가에 붉은 용의 탑을 찾으려거든 달의 북쪽으로 가라고 속삭였던 것이고. 그런데 그녀가 누구였지?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옛날 옛적에 기사는 사랑하는 연인과 달빛 아래에서 굳은 언약을 맺었다. 연인은 붉은 실로 기사의 손가락을 묶고 달의 힘을 빌어 이제 그녀와 기사는 평생 이어져 있을 것이라 속삭였고, 기사는 여기에 화답하여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평생을 함께 하겠다고 맹세했다. 그 때 마침 파수병이 지나가는 소리에 기사는 연인과 함께 몸을 숨겼다가 엉겁결에 처음으로 입맞춤을 나누었다. 달빛은 은 물결처럼 환하게 궁정을 가득 채웠고, 연인과의 첫 키스는 꿈결처럼 달콤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 사람이던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기사는 헐떡헐떡거리며 마침내 그 지긋지긋한 계단을 전부 다 내려왔다. 탑의 뒤쪽에 있는 조그만 나무 쪽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밤이 되어 있었다. 칠흑 같은 하늘에 달은 보이지 않았고, 단지 점점이 흩어진 별빛만이 눈물 방울처럼 연약하고 투명하게 반짝일 뿐이었다. 자 이제 집에 돌아가야지. 기사는 생각했다. 뭐가 어찌 된 일인지는 가는 길에 천천히 생각하도록 하고. 그런데 내가 말을 어디다가 매 뒀더라?
    말을 찾아서 기사는 탑의 앞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뒤쪽으로 돌아왔다. 탑 주위를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시계 반대방향으로 다시 한 바퀴 돌았다. 말은 흔적도 없었다. 다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밤 하늘이 너무 어둡고 별빛이 너무 약해서 근처에서는 아무 것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단지 멀리 위쪽에 공주가 있는 탑 꼭대기에서만 약한 불빛이 아스라이 비쳐 보일 뿐이었다.
    할 수 없이 기사는 그 불빛을 기준으로 삼아 처음에 왔던 곳이라 짐작되는 방향을 향해서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II.
    얼마나 걸었을까, 앞쪽에 거무스름하게 듬성듬성한 숲 같은 것이 보였다. 그다지 크거나 울창한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달도 없는 한밤중에 숲으로 들어갔다가 길이라도 잃으면 큰일이다. 숲 가장자리로 돌아서 벌판을 질러 가는 쪽이 안전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기사는 방향을 다시 확인하려고 뒤를 돌아보았다. 유일하게 불빛을 비추어 주는 탑 꼭대기 공주의 방 창문은 이제 완전히 멀어져서, 밤 하늘에서 미약하게 깜빡이는 별빛만큼이나 아련하고 흐릿하게 보였다.
    기사는 다시 돌아섰다. 공주의 방 창문 불빛을 뒤로 하고, 숲의 오른쪽 가장자리를 따라 그대로 똑바로 앞쪽으로 나아가야겠다. 그렇게 결정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기사가 다가가자 검은 숲은 조금씩 오른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사는 믿을 수가 없었다. 멈추어 서서 눈을 크게 뜨고, 낮고 듬성듬성한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기사가 걸음을 멈추자 숲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한동안 그대로 서서 보고 있다가 기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설마, 내가 잘못 본 거겠지.
    그러나 숲은 다시 기사를 따라 오른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기사는 다시 멈추어 섰다. 숲도 따라서 멈추었다. 잠시 자신을 따라다니는 검은 숲을 노려보며 서 있다가 기사는 이번에는 숲을 향해 다가갔다. 숲은 움직이지 않았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이제는 팔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가 되었다. 기사는 멈추어 섰다. 듬성듬성한 나무라고 생각했던 것은 가까이서 보니 어둠 속에서도 나무 같지 않았다. 나무 치고는 키가 작았고, 가지도 잎사귀도 없었다.
    기사는 바로 앞에 있는, 나무라고 생각했던 어떤 것을 만져보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때, 기사의 머리 위로 달이 떠올랐다. 망망대해에 비친 등대의 불빛처럼 달빛은 갑자기 나타나서 사방에 하얗고 부드럽고 진한 은빛 물결을 뿌렸다. 그리고 그 차갑고 투명한 달빛 속에서 기사는 앞에 서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았다.
    그것은 나무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죽은 사람이었다. 말라 비틀어진 머리카락이 아직도 여기저기 붙어 있는 머릿가죽은 절반쯤 떨어져서 달빛 아래 색 바랜 해골이 하얗게 드러나고, 볼의 피부가 썩어서 입술 위로 늘어졌으며, 목에는 이미 흐르지 못하게 된 지 오래된 죽은 피가 거멓게 뭉쳐 달라붙어 있었다. 달빛을 둔탁하게 반사하는 갑옷은 밤의 어둠 속에서도 낡고 녹 슬어 여기저기 부서진 것이 보였다. 사지 중 한 쪽이 떨어져나가고 없는 시체도 있었고, 몸통에 구멍이 난 시체도 있었으며, 살점이 모두 썩어 흩어지고 백골만 남은 시체도 있었고, 목이 잘려 자기 해골을 옆구리에 낀 시체도 있었다. 그런 죽은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기사들의 시체가 달빛이 은은하게 깔린 벌판을 가득 메우고, 기사를 향해 살가죽이 썩어 벗겨지고 근육이 떨어져나간 사지를 어기적거리고 흐느적거리며, 혹은 땅바닥을 꿈틀꿈틀 기어서,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기사는 뒷걸음질쳤다.
    죽은 기사들은 갑옷과 뼈를 덜그럭거리며 서두르지 않고 쉬지 않고 천천히 다가왔다.
    기사도 계속 조금씩 뒷걸음질쳤다. 그러다 발이 꼬여 주저앉아서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죽은 기사들은 계속해서 조금씩 다가왔다. 기사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어서자마자 바로 앞까지 다가온 시체의 안구가 떨어져나간 퀭한 눈구멍과 맞닥뜨리고 말았다.
    - 너는 누구인가?
    죽은 기사의 되살아난 시체가 물었다.
    기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움직일 수 없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 너도 우리와 같은가?
    되살아난 시체가 다시 물었다.
    - 우리는 한 때 살아 있었다.
    죽은 기사의 왼쪽에서, 팔 한 쪽이 불타 사라져버린 다른 기사의 시체가 말했다.
    - 우리는 한 때 기사였다.
    또 다른 기사의 시체가 그 뒤에서 말했다.
    - 우리는 지금도 기사다.
    죽은 기사의 오른쪽에서, 시체의 옆구리에 낀 해골이 턱뼈를 덜걱이며 반박했다.
    - 기사는 임무를 수행한다.
    그 뒤에서, 사지가 절반씩 타서 떨어져나가 갑옷을 끌고 땅을 기는 시체가 말했다.
    - 우리의 임무는 용을 죽이는 것이었다.
    기사의 바로 앞에 선, 안구가 모두 사라진 퀭한 시체가 다시 말했다.
    - 우리는 모두 용을 죽이기 위해 왔다.
    왼쪽 옆구리에 구멍이 뚫려 그 사이로 그을린 갈비뼈가 거무스름하게 보이는 시체가 말했다.
    - 그러나 우리는 모두 용에게 죽임을 당했다.
    한 쪽 다리의 살점이 모두 타 버리고 노르스름한 다리뼈만 남은 시체가 그 곁에서 말했다.
    - 용을 죽여야만 한다.
    눈구멍이 퀭한 시체가 속삭였다.
    - 그 때까지, 우리는 아무도 이 곳을 떠나지 못한다.
    땅바닥을 기는 시체가 고개를 한껏 쳐들고 말했다.
    - 아무도 이 곳을 떠나지 못한다.
    목이 잘려 해골을 옆구리에 낀 시체가 다시 턱뼈를 덜걱거렸다.
    - 아무도 이 곳을 떠나지 못한다.
    팔 한 쪽이 불타 버린 시체가 되풀이했다.
    - 아무도 죽어 저승으로 가지 못한다.
    머리뼈 반쪽이 부서져 사라진 시체도 덧붙였다.
    - 그 때까지, 우리는 아무도 죽지 못한다.
    시체들이 입을 모아 되풀이했다.
    - 낮에 죽더라도, 밤이 되면 달빛 아래 되살아난다.
    시체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 칼을 다오. 우리는 기사다.
    되살아난 죽은 기사들의 고함 소리가 황무지를 쩌렁쩌렁 울렸다.
    - 칼을 다오. 임무를 완수하고, 우리도 안식을 찾고 싶다.
    기사는 양 손을 귀를 막았다. 양 팔로 머리를 감쌌다.
    “이것은 저주인가?”
    기사가 겁에 질려서 외쳤다.
    “너희는 마녀의 저주에 걸려 이렇게 된 것인가?”
    ‘저주’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는 순간, 시체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투명하고 무심한 달빛 아래 황량한 정적이 퍼져 나갔다.
    “마녀가 아니라면, 용의 저주인가?”
    달빛처럼 희고 단단한 정적을 깨고 기사가 다시 외쳤다.
    “어떻게 하면 저주를 풀 수 있지?”
    그러나 시체들은 다시 죽어버린 듯, 우뚝 선 채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때, 검은 숲처럼 보이는 되살아난 시체들의 무리 뒤에서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저들은 스스로 저주에 걸렸다.
    그리고 목소리는 천천히 덧붙였다.
    - 마녀의 저주에 걸린 것은 나 뿐이다.
    “너는 누구인가? 모습을 나타내라!”
    기사가 외쳤다.
    되살아난 시체들의 무리 속에서 한 창백한 형체가 서서히 앞으로 나섰다. 키가 크고 흰 턱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온 그 낯익은 얼굴을 보고 기사는 잠시 어리둥절하여 그대로 서서 쳐다보다가 문득 무릎을 꿇었다.
    “폐하….”
    죽은 국왕의 유령은 무릎을 꿇은 기사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내 한 때 어리석어 간악한 여자의 아름다운 겉모습에 홀려서 마녀를 내 왕비로 삼았다.
    땅에 닿은 기사의 무릎을 통해 차가운 대지의 냉기가 전해져 왔다. 기사는 몸을 떨었다.
    - 마녀는 오랜 세월에 걸쳐 내 육신의 기운을 빼앗았다. 그 몸이 죽자 내 혼은 죽지도 살지도 않은 자들의 땅인 이 곳에 유폐되었다.
    유령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으나, 한 번 입을 열 때마다 땅을 울리며 퍼져 나갔다.
    - 이제 마녀는 내 아들의 정신을 흐리고 그의 태어나지 못한 아들을 죽였다.
    기사는 몸이 떨리는 것이 땅의 냉기 때문인지 아니면 유령의 목소리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 그러니 가라. 가서 마녀를 처단하고 아직 어려 아무 것도 모르는 내 아들을 보필하라.
    유령이 말을 할 때마다, 그 목소리에 땅이 우릉우릉 울릴 때마다, 달빛도 함께 출렁이듯 흔들렸다.
    - 그리고 내 칼을 찾아다오. 칼을 돌려다오. 칼이 있어야 이 곳을 나가서 영원한 평안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칼’이라는 말과 함께, 이제까지 침묵을 지키며 서 있던 되살아난 기사들의 시체도 모두 함께 외치기 시작했다.
    - 칼을 다오. 우리도 안식을 찾고 싶다. 칼을 돌려다오.
    - 가라. 내 아들을 보필하라. 그리고 칼을 찾아다오.
    국왕의 유령이 속삭였다. 그리고 무릎을 꿇은 기사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잡고 굉장한 힘으로 들어올려 일으켜 세웠다.
    - 가라.
    유령의 목소리가 다시 속삭였다. 다시 한 번 땅이 우르릉 울리고, 달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사납게 출렁거렸다.
    기사는 유령이 일으키는 대로 일어섰다. 그리고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III.
    한참 정신없이 달리다가 기사는 멈추어 서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달은 어느 새 다시 구름 속으로 숨었고, 거무스름하게 흐린 밤 하늘에는 별빛도 보이지 않았다. 검은 숲 같던 되살아난 죽은 기사들의 시체도 어둠 속에 잠겨서 보이지 않았다. 탑 꼭대기 공주의 창문에 비쳐 나오는 불빛만이 변함없이 멀리서 아련하게 빛났다. 다만 아까는 기사의 등 뒤에 있던 불빛이 지금은 비스듬하게 앞쪽에서 보였다.
    기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탑 쪽을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날이 너무 어두웠고, 주위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표로 삼을만한 것은 탑의 불빛 뿐이었다. 동이 틀 때까지만 이렇게 걷다가, 해가 뜨고 나면 주변을 살펴보고 다시 방향을 정해야겠다고 기사는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기사는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멈추어 섰다. 다가닥, 다각, 하는 그 소리는 꼭 말이 종종걸음으로 걷는 발굽 소리 같았다. 기사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과연 저 쪽에서 뭔가 다가오고 있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것은 새파란 불빛 두 개였다. 그와 함께 다가닥, 다가닥, 하면서 발굽 소리도 점점 가까워졌다. 죽지도 살지도 않은 것들의 땅에서 자신의 말조차 유령이 되어버린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자 기사는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마침내 새파란 불빛과 발굽 소리가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말은 기사 앞에 멈추어 서서 입술을 투르러거리며 언제나 그렇듯 다정하게 얼굴을 비볐다.
    “그래, 그래….”
    그 눈에는 광기 어린 푸른 인광이 서렸고 목에 닿는 말의 입김은 차가웠지만, 이전과 똑같은 그 친근한 몸짓에 기사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말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래, 그래….”
    … 그리고 죽은 말은 입을 벌려 기사의 어깨를 물었다. 죽은 이빨이 갑옷에 부딪치며 까각, 하고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들은 순간, 기사는 무섭다기보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이게 주인을 물었어…!”
    기사는 말의 고삐를 홱 잡아챘다. 말이 앞발을 쳐들어 공중에 구르며 히힝, 하고 울부짖었으나 기사는 놓지 않았다. 여기까지 같이 왔으면 서로 믿을 건 저하고 나밖에 없는데, 바깥에 매 놓은 사이에 제 멋대로 죽은 자들의 편에 서더니 이젠 감히 주인을 먹으려고 들어? 배신감에 치를 떨며, 기사는 몸부림치며 울부짖는 말과 한참이나 씨름한 끝에 간신히 그 등에 올라탔다. 말의 옆구리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죽은 기사들의 되살아난 시체에게 뜯어먹혀 가죽이 떨어져나간 옆구리에서, 기사의 박차가 말의 갈비뼈에 부딪쳐 따닥, 하고 거친 소리를 냈다. 사방을 둘러싼 어둠 속으로 금속성 불꽃이 튀었다.
    “가자!”
    그리고 기사는 죽은 말을 몰아 끝없는 밤을 달려가기 시작했다.
   
    IV.
    다시 공주의 탑을 뒤로 하고 한참을 달렸을 때, 아까처럼 돌연히 달이 구름 뒤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사방에 하얗게 일렁이는 투명하고 차가운 달빛 속에서 기사는 전에 보았던 검은 숲 같은 형체를 다시 보았다. 죽은 기사들의 되살아난 시체가 말발굽 소리를 듣고 전처럼 천천히 무리지어 다가오고 있었다.
    기사가 말 고삐를 당겼다. 말이 또 다시 히힝, 하고 울부짖으며 달빛 속에서 급히 멈추었다.
    기사는 말 등에 앉아서 서서히 끊임없이 조금씩 다가오는 죽은 자들의 무리를 살펴보았다. 말 고삐를 당기고 그 귀에 속삭였다.
    “가자.”
    그리고 기사는 다시 갈비뼈가 드러난 죽은 말의 옆구리에 박차를 가했다.
   
    기사는 죽은 자들의 무리를 피해서 옆으로 지나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되살아난 기사들의 시체는 마치 물결이 일렁이며 퍼져 나가듯 서서히 옆으로 퍼져서 기사의 앞을 막아섰다. 기사는 말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달렸다. 죽은 자들의 무리 사이를 뚫고 달려가는 죽은 말에게, 그 죽은 말을 탄 유일한 산 자인 기사에게 되살아난 시체들이 덤벼들었다.
    기사는 매달리는 시체들을 발로 차고 손으로 쳐 내며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죽은 자들의 뼈만 남은 손이 죽은 말의 남은 가죽을 할퀴어 뜯어냈다. 달려가는 말 뒤로 땅에 내장과 피가 길게 흩어졌다. 되살아난 시체들은 굶주림에 눈을 빛내며 덤벼들어 땅에서 죽은 말의 내장을 주워 씹고 피를 핥았다.
    죽은 자들의 무리에서 벗어난 뒤에서 기사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뼈만 남은 죽은 말은 살아 있는 기사를 태우고 눈의 푸른 인광을 번득이며 하얀 달빛 아래 미친 듯이 질주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죽은 말은 앞으로 고꾸라지며 그 뼈가 와르르 무너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되었다.
   
    말이 쓰러지면서 기사도 땅에 처박혔다. 머리를 부딪치며 정신을 잃었다.
    머리가 깨질 듯 욱신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을 때, 기사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람의 얼굴을 발견하고 헉, 소리를 질렀다. 서둘러 몸을 일으키며 뒤로 물러났다. 들여다보던 사람도 같이 헉, 소리를 내며 물러섰다.
    “대, 댁은 도대체 뉘, 뉘슈?”
    기사를 내려다보던 사람이 겁에 질려서 외쳤다.
    그 목소리를 듣고, 그리고 사방이 이미 밝은 것을 깨닫고, 기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있는 곳이 고국의 국경 근처, 숲을 막 벗어난 지점임을 알았다.
   
    V.
    이전에 공주가 거쳤던 것과 똑같은 경로를 거쳐 기사는 숲지기의 집에서 영주의 성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왕궁으로 인계되었다. 왕궁에서 기사는, 기사에게 굳이 신경을 써주려는 사람이 달리 없었기 때문에, 공주의 유모에게 맡겨졌다.
    유모의 보살핌 속에서, 기사는 공주에게 얻어맞은 팔의 상처가 덧나서 예전에 쓰던 자기 침대에 누워 사흘 낮 사흘 밤 동안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해 가며 죽을 듯이 앓았다. 그 사흘이 지나고 나서 기사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물을 찾는 것을 보고 공주의 유모는 청하는 대로 처음에는 물을, 그리고 그 다음에는 따뜻한 죽을 가져다 주었다. 기사가 죽을 다 먹고 나서 한숨을 쉬며 다시 자리에 눕자 유모가 그릇을 치우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용이 맘처럼 잘 안 죽지유? 사람만 죽어 나가고….”
    기사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릇을 모아 쟁반 위에 얹어서 가지고 나가면서 유모가 다시 중얼거렸다.
    “허기사 그런 건 죽어도 죽은 게 아니지유….”
    기사가 침대에서 퍼뜩 몸을 일으켰다.
    “유모가 그걸 어떻게 아시오?”
    유모는 대답하지 않고 그냥 웃었다. 그리고 다시 쟁반을 달가닥거리며 방에서 나가려 했다. 기사가 다시 물었다.
    “그 사람들한테 무슨 저주가 걸렸는지 혹시 아시오? 어떻게 하면 풀 수 있는지?”
    유모는 방을 나가려다 말고 돌아서서 기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자업자득에는 약도 없지유.”
    유모가 조용히 말했다. 기사가 다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유모는 쟁반을 그대로 든 채 다시 기사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기사란 본시 무고한 자를 해치지 않는 거라면서유?”
    “그렇소.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오?”
    기사가 되물었다. 유모가 한숨을 폭 쉬었다.
    “그 용이 무슨 짓을 했다고 그렇게들 떼로 몰려가서 못 죽여서 야단이라유?”
    “그거야 용은 불을 일으키고, 사람을 잡아먹고, 나라에 혼란을 일으키고 세상을 멸망시킬 수도….”
    “그래유? 그거 참 무시무시한 동물이네유.”
    유모가 조금 웃으면서 기사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물었다.
    “그런데 그걸 기사님이 다 봤에유?”
    “에?”
    기사가 되물었다. 유모가 다시 말했다.
    “그, 불을 일으키고 사람을 잡아먹고, 나라에 혼란을 일으키는 그 꼴을, 기사님이 직접 봤냐 말이유.”
    “그, 그거야….”
    대답을 하다 말고 기사는 말이 막혔다.
    “아, 저, 그렇지만, 공주님을 잡아갔으니까….”
    기사가 더듬거리는 모습을 보고 유모는 웃었다. 가느다란 눈이 더 가늘어지는 모습을 보며 기사는 문득 생각했다. 저런 눈을 어디서 봤더라.
    “그건 잡아간 게 아니지유. 불렀으니께 와서 데려간 거지.”
    유모가 조근조근 반박했다. 기사는 할 말을 잃었다.
    유모가 다시 찬찬히 타이르듯이 말했다.
    “자기한테 아무런 해도 안 끼쳤는데, 괜히 공명심에 들떠서 죽이겠다고 쳐들어갔으니 발목 잡혀도 싸지유.”
    “그, 그렇지만….”
    기사는 뭐라고 반박하려 했다. 그러나 유모가 다시 말을 막았다.
    “기사라는 양반들이 그렇게들 할 일이 없다유?”
    기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유모가 다시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저렇게 웃는 눈을 어딘가에서 봤는데. 기사는 생각했다. 물론 유모야 예전부터 궁에서 오며가며 봤으니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모가 아니고, 저렇게 웃으면 가늘어지는 눈을 아주 최근에 어딘가에서….
    “정 그렇게 구해주고 싶으면, 칼을 찾아다 주게유.”
    유모가 갑자기 말했기 때문에 기사는 생각이 끊어졌다.
    “칼?”
    기사가 멍하니 되물었다. 그러고보니 죽은 기사들의 시체도 똑같은 소리를 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한두 개가 아닌데 그 칼을 어디서 어떻게….”
    “잘 찾아보면 다 나와유.”
    유모가 어린애를 타이르듯이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돌아서서 방을 나가면서 덧붙였다.
    “기사님은 손수건도 좀 찾게유.”
    “손수건이라니?”
    기사가 되물었다. 유모가 말했다.
    “찾아다 태워버리게유.”
    “무슨 손수건을, 왜…?”
    기사가 물었다. 그러나 유모는 대답은 커녕 끝까지 듣지도 않고 이미 탁,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아버리고 나간 뒤였다.
   
    VI.
    몸을 일으킬 수 있게 되자 기사는 이전에 공주가 했듯이 왕궁에서 내준 마차를 타고 이웃 나라로 향했다. 이번에는 붉은 용이 나타나지 않았고, 마차도 불타지 않았다. 그래서 기사는 무사히 국경을 건너 이웃 나라의 왕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왕궁에서 기사는, 그러니까 마법이 풀리고 나서 처음으로, 문제의 왕비를 다시 만났다.
   
    VII.
    “그래서, 공주는 아직도 그곳에 잡혀 있나요?”
    별궁의 자기 침소 앞 벽난로 곁에 서서 왕비가 조용히 물었다.
    “용은…, 무척이나 힘든 적수였던 모양이죠?”
    그리고 왕비는 돌아서서 기사 곁으로 살며시 다가왔다.
    “당신이 무사히 돌아와서 기뻐요.”
    그리고 왕비는 기사의 품에 안겼다. 왕비의 입술이 기사의 입술을 찾았다. 기사도 화답했다.
    입맞추고 나서 기사는 품에 안긴 왕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마법이 풀렸는데도 기사의 눈에 왕비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마법이 풀렸는데도, 왕비는 여전히 매혹적이었다.
    왕비는 버터로 빚은 것 같은 외모라서 온통 금빛이었다. 머리카락은 달빛으로 물든 듯이 거의 은색으로 보이는 아주 옅은 금빛이었고, 매끄러운 피부는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계절의 수줍은 햇살을 받은 듯한 황금빛이었으며, 커다란 눈은 어두운 곳에서 때로 투명한 갈색으로도 보이는 짙은 꿀 빛깔을 띠어서 고개를 돌릴 때마다 깊은 금빛으로 반짝였다.
    그리고 그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답고 매혹적인 황금빛 눈동자에 왕비는 역시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행과 고독을 담고 있었다. 더할 수 없는 미모에, 마음속에는 불행과 고독을 안고 깊은 우수에 찬 연약한 여성은, 남자도 마찬가지지만, 말하자면 이성의 보호본능에 호소하는 매력이 있는 법이다. 기사도 마찬가지라서, 직업도 기사인데다 성격도 워낙이 그렇다보니, 게다가 마법에도 좀 걸리고 해서, 그냥 홀라당 넘어가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그 손수건까지 왕비의 손에 넘어온 뒤로는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이 돼서, 드디어 왕비는 기사가 품은 첫 여자,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사를 안은 첫 여자라는 명예로운 자리에 영원토록 등극하고 말았다. 이런 게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사람에 따라서는 의외로 중요한 법이다.
    그리하여 기사는 내가 분명히 마법이 풀렸었는데 이제 다시 걸린 건가 만 건가 하면서 왕비의 그 짙은 벌꿀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았고, 이러지 말고 정신 차려야지 하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때마침 왕비가 벽난로 위에 고이 모셔놓은 문제의 손수건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기사는 품에 안았던 왕비를 놓고 벽난로로 다가가서 손수건을 집어들고 왕비를 향해 물었다.
    “제가 이걸 드린 날을 기억하십니까?”
    물론 손수건은 왕비의 하녀가 훔쳐온 거지 기사가 왕비한테 드린 적이 없으니까 기억할 리가 없지만, 기사는 그냥 떠오르는 대로 적당히 꾸며댔다.
    “달빛 아래에서, 평생 왕비님을 지켜드릴 것을 맹세하고 왕비님의 손등에 입맞추었던 것, 기억하십니까?”
    “그걸 어떻게 잊겠어요.”
    왕비가 그 더할 나위 없이 매혹적인, 우수에 찬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그 때, 밤 하늘에 반달이 떠 있었죠?”
    기사가 손수건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구름에 달이 반쯤 가려서, 마치 수줍어하는 소녀의 얼굴처럼 보였죠…. 기억하십니까?”
    왕비가 살그머니 기사에게 다가왔다. 손을 잡았다.
    “예, 기억해요….”
    그리고 왕비가 다시 기사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맞추려는 순간 기사는 손수건을 벽난로 안으로 던져 버렸다. 벽난로의 불길 속에서 손수건은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파싯, 하는 소리를 내며 푸른 불꽃으로 변하여 순식간에 타오르더니 사라져 버렸다.
    “무슨 짓이에요?”
    왕비가 놀라서 물었다.
    “그 귀중한 걸, 왜….”
    “저는 왕비님께 저 손수건을 드린 적이 없습니다.”
    기사가 여전히 왕비의 손을 잡은 채로 물었다. 왕비는 손을 뿌리치려 했다.
    “그런데 어떻게 기억하십니까?”
    기사는 왕비의 손을 더 꽉 잡고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달빛 아래서 제게 저 손수건을 주신 건 다른 분입니다.”
    “이거 놔.”
    왕비도 기사의 귓가에 대고 마주 속삭였다.
    “안 놓으면 소리 지르겠다.”
    기사는 놓지 않았다. 왕비는 화난 눈빛으로 손을 뿌리치려 애쓰며 기사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기사는 분노로 색이 더 짙어진 그 깊은 황금빛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부드럽게 하늘을 가로질러 가던 오래 전 어느 밤의 둥글고 환한 보름달 아래에서 자신의 약지에 붉은 실을 묶고 영원히 함께 할 것을 맹세했던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기사는 보름달 아래에서의 그 맹세가 지금 눈 앞에 서 있는 황금빛 여자에게 느끼는 감정에 비하면 어린 아이들의 소꿉장난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 때 기사는 어렸고, 그의 세상은 무척 좁았으며, 그 좁은 세상 안에 바라볼 사람이라고는 오로지 단 한 명 공주 뿐이었고, 그런 공주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데 대한 자만심이 공주에 대한 사랑 자체보다 훨씬 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 공주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그 뒤로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거쳐서 이제는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이 되어 버렸다.
    그에 비하면 자신이 눈 앞에 붙잡고 있는 이 황금빛 왕비는 진짜였다. 기사는 그녀와 수많은 밤을 함께 보냈고, 그녀의 이야기를 전부 들었다. 몰락한 귀족의 딸에서 일약 왕비로 등극했으나, 나이 많은 바람둥이 왕에게 싸구려 장난감 취급을 당하며 달리 의지할 곳도 도움을 청할 곳도 없이, 지난 십 수 년의 세월 동안 인생의 유일한 낙이자 희망이라고는 오로지 아들 뿐이었던 사연을 왕비는 조용히 담담하게 중얼거리듯이 털어놓았다. 마녀라고는 해도 왕비는 진실로 외롭고 슬픈 사람이었고, 그녀의 악의에는 낭떠러지 끝에 몰려 오랫동안 살기 위해 몸부림을 쳐온 인간의 절박함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던 그녀의 몸, 버터로 빚어 벌꿀을 뿌린 듯한 그 몸은 더할 나위 없이 매끄럽고 달콤하고 끈적하고 황홀했다….
    “왜 저를 속이셨습니까?”
    기사가 여전히 왕비의 손을 꽉 쥔 채로 속삭였다.
    “굳이 그렇게 하시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왕비가 다시 안간힘을 쓰며 기사에게 잡힌 손을 뿌리쳤다. 기사는 이번에는 순순히 그 손을 놓아 주었다.
    왕비의 손이 기사의 뺨으로 날아왔다. 짝, 하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무례한 것.”
    왕비가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그리고 소리쳤다.
    “여봐라! 밖에 누구 없느냐!”
    그리하여 기사는 옥에 갇혔다.
   
    VIII.
    그러니까 이쯤에서 정리를 한 번 하자면 공주는 여전히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는 붉은 용의 탑 꼭대기에 숨어 있고, 그런 공주를 구출해 주려고 - 는 엄밀히 따지자면 아니고 왕비의 명령에 따라 공주를 도로 데려와서 왕비가 보는 앞에서 죽일 목적으로 찾아갔던 기사는 쫓겨 나와서 혼자 돌아와서 감옥에 갇혔고, 용의 탑 주위에는 좀비 기사들이 드글드글하고, 국왕의 유령도 그 사이에 끼어서 여전히 어디다 쓸 지 알 수 없는 칼을 찾고 앉았고, 그런 한편 공주와 기사는 각각 다른 짝을 찾았는데 그 문제의 붉은 실은 지긋지긋하게 이어져서 끊을 방법도 없고, 뭐 이러하므로 상황을 해결할 방법은 없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언제 어떤 사정이든지 희망은 있는 법이라서, 여기서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바로 공주의 남편이며 왕비의 아들인 왕자였다. 지금은 선왕이 죽었으니까 나이는 어려도 왕이 되어야겠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아직 대관식을 제대로 못 치른데다가 무엇보다 처음부터 왕자라고 했으니까 읽는 이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편의상 그냥 계속 왕자라고 하자.
    하여간 왕자 입장에서는 홀랑 반해서 졸졸 쫓아다니던 마누라가 어느 날 갑자기 저녁 먹고 나가서는 그대로 안 돌아와 버리니까 미칠 지경이었는데, 친정으로 도망간 걸 간신히 찾아내서 도로 데려온다더니만 중간에 또 사라졌고, 거기다가 그게 그냥 사라진 것도 아니고 용한테 막 잡혀갔다니까 이건 죽었는지 살았는지부터 알 수가 없고, 그래서 마누라 찾아준다고 기사가 나섰을 때는 진짜 고마웠지만 그 기사라는 인간이 어디서 뭘 한 건지 나는 여기서 기다리느라 일각이 여삼추 같아서 애간장이 다 녹아버릴 지경이건만 혼자서 느릿장을 부리면서 소식 한 줄 없다가 또 갑자기 돌아와서는 그래서 어쨌다는 건지 말 한 마디 듣기도 전에 어머니가 덜렁 옥에 가둬 버렸으니 저간의 사정이 어찌된 노릇인지 답답해서 돌아버릴 지경이 된 것이다.
    하여 왕자는 기사가 갇혀 있는 감옥으로 어머니 몰래 찾아갔다. 그리고 기사에게 꼬치꼬치 캐물어서 어떻게 된 일인지를 전부 알아내고야 말았다. 물론 기사가 설명한 버전에 따르면 공주하고 칼싸움에 져서 쫓겨난 게 아니고 붉은 용이 무시무시하게 불을 뿜고 발톱으로 공격을 해서 범접할 수가 없었던 거고, 밖에 매 뒀던 말을 잃어버리고 혼자 헤맨 게 아니라 그 말을 멀쩡하게 타고 가다가 좀비 기사떼한테 공격을 당해서 불쌍한 말이 주인을 위해 장엄하게 그 한 몸 희생한 거라고 했지만, 어쨌든 그런 별로 중요하지 않은, 그러니까 사실은 좀 중요할 수도 있지만 기사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위해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세부사항을 빼놓고 상황의 요점은 제대로 정리를 해서 보고를 한 셈이라고 보아야겠다.
    그리고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왕자는 말했다.
    “아버지 칼, 내가 가지고 있는데?”
    “예?”
    왕자와 기사의 눈길이 동시에 왕자의 허리춤으로 향했다. 왕자는 과연 그 나이 또래 어린애가 차고 다니기에는 좀 무리한 칼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그 나이 또래의 보통 소년이었다면 칼이 왕자를 끌고 다니는 모양새가 되었겠지만 다행히 왕자는 또래보다 몸집이 훨씬 컸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이 칼을 찾으신단 말이죠?”
    왕자가 다시 물었다.
    “예….”
    왕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불안해져서 주저주저하면서 기사가 대답했다.
    그리고 왕자는 기사가 두려워하던 바로 그 말을 하고야 말았다.
    “그럼 내가 가서 아버지한테 칼을 돌려드리고 공주를 구출해서 같이 집에 오면 되겠네?”
    왕자는 마치 저자거리에 마실 좀 나갔다 오겠다는 투로 이런 무시무시한 선언을 한 뒤에 말릴 틈도 주지 않고 그대로 휙 나가 버렸다. 기사는 다른 때 같으면 따라 나가서 가면 안 된다고 붙잡고 매달렸겠지만 감옥에 갇힌 몸이라 맘대로 나갈 수가 없으니 창살 안에서 멍하니 보고만 있었고.
    그리고 바로 다음날 왕비가 감옥으로 찾아왔다. 창살 안으로 들어와서 왕비는 아무런 설명도하지 않고 다짜고짜 기사의 뺨을 갈겼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왕비가 실제로 팔을 휘둘러서 때린 게 아니고 그 휘황한 황금빛 손을 조금 특정한 방식으로 움직였을 뿐이지만 기사는 그 충격을 얼굴 전체에 느꼈다. 이건 처음에 옥에 갇히기 전에 침소의 벽난로 앞에서 찰싹 때렸던 것과는 기세부터 완전히 달라서, 기사는 왼쪽 입 안에서 송곳니 뒤에 있는 대구치 여섯 대와 소구치 네 대가 한꺼번에 부러지는 것만 같은 충격과 함께 혓바닥에 비릿한 피 냄새를 느끼며 뒤로 날아가서 벽에 부딪쳤다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내 아들을 어디로 보낸 거냐?”
    왕비가 낮게 속삭였다. 그리고 기사가 대답도 하기 전에 바닥에 뒹구는 기사의 명치를 냅다 걷어찼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역시나 왕비는 가만히 서서 빛나는 손을 살짝 움직였을 뿐이지만 기사는 배에서 퍽, 소리가 나면서 몸을 반으로 접더라는 것이다. 그와 함께 기사는 비명을 질렀으나 목구멍 밖으로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무슨 앙심을 먹었기에 내 아들을 죽을 곳으로 보낸 거냐?”
    왕비가 다시 속삭였지만 이번에는 그 목소리에 울음이 섞였다. 기사는 명치에서 불꽃이 터지는 것 같아서 숨을 쉴 수도 몸을 똑바로 펼 수도 없이 바닥에서 웅크리고 끙끙거리다가 그 목소리를 듣고 안간힘을 써서 고개를 들었다. 왕비의 황금빛 눈에서 옅은 금빛 뺨으로 눈물이 흘렀다. 그 눈물이 바닥에 누운 기사의 뺨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눈물 때문에 기사는 내가 보낸 게 아니라든가 말릴 새도 없이 나가버렸다든가 그러게 왜 나를 감옥 같은 데 가둬서 쫓아나가지도 못하게 만들었냐, 뭐 이런 변명거리가 머릿속에서 전부 사라져 버렸다.
    “진정하십시오. 소신, 그런 의도가 아니오라….”
    그러나 말을 마치기도 전에 왕비는 기사를 걷어찼고, 그러니까 자꾸 쓸데없이 설명하자면 손만 움직였으니까 걷어찼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하여간 기사가 느끼기에는 그랬고, 하여 이번에는 그 충격이 바로 공주한테 칼을 맞아서 다친 왼팔에 정통으로 박히고 말았다. 기사는 오른팔로 다친 곳을 부여잡고 뒹굴었다. 너무 아파서 하얗게 비어버린 머릿속에 아무래도 상관 없으니까 더 이상 때리지만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떠돌았다.
    왕비가 다시 손을 조금 움직였다. 기사는 바닥에 뒹굴다 말고 목을 졸린 채 공중에 둥실 떠올랐다. 왕비가 다시 손을 살짝 움직였다. 기사는 왕비의 얼굴 바로 앞으로 떠 갔다.
    “당장 떠나라.”
    왕비가 목을 졸려 점점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가는 기사의 귀에 입술을 바짝 대고 속삭였다.
    “가서 내 아들을 데려와라. 산 채로, 상처 없이 말짱하게.”
    그리고 왕비는 이제 빨갛다가 파랗게 질려가는 기사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더 바짝 들이대고 덧붙였다.
    “공주도 데려와라. … 죽은 채로.”
    그리고 왕비는 기사를 팽개쳤다. 기사는 불시에 땅에 떨어져서 목 마른 사람이 물을 들이켜듯 공기를 들이마시며 한동안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렇게 땅바닥에 누워서 헐떡거리는 기사를 보면서 왕비가 말했다.
    “둘 중 하나라도, 못 하겠으면 돌아오지 마라.”
    그리고 왕비는 나가 버렸다.
   
    왕비가 나간 후에도 기사는 한참이나 더 바닥에 뒹굴면서 헐떡거리고 아픔을 달래느라 끙끙거려야 했다. 마침내 고통이 조금 수그러든 후에 기사는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입 안에 고인 피를 뱉어내고 똑바로 앉았다.
    어떤 사람들은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무작정 괴롭히기만 하면 다 좋다는 건 아닌데, 좋아하는 사람에게 특정한 방식으로 지배당하거나 괴롭힘을 당하는 데 은근히 매혹당하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기사도 아마 그런 취향이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속임수에 걸리고 감옥에 갇히고 좀 이상한 방식으로 두들겨 맞기까지 했는데 화도 나지 않고 왕비가 미워지지도 않는 것이 기사는 사실 자기가 생각해도 좀 이상했다. 다만 어찌 됐든 상황이 매우 곤란한 것은 사실이었다. 마법이 풀려서 제정신으로, 그러니까 아직도 왕비가 좋은 걸 보면 완전히 제정신은 아닌 것도 같지만 어쨌든 그것만 빼면 대체로 제정신으로 돌아왔으니 기사는 공주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왕비가 못 하겠으면 돌아오지 말라고 했는데, 떠나서 안 돌아오고 싶은 마음도 기사에게는 전혀 없었다.
    그래도 어쨌든 명령을 받았으니까 기사는 감옥에서 풀려나 왕자의 뒤를 쫓아서 붉은 용의 탑으로 다시 향하는 여정에 올랐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게 공주를 되풀이해서 찾아가는 걸 보면 그 붉은 실이 정말로 평생 이어진 것 같긴 하지만, 그게 사랑이나 무슨 좋은 인연 때문이 아니라 매번 왕비의 명으로 죽이러 찾아간다는 형식이고 보면 이건 참 꼬여도 엉망진창으로 꼬인 관계인 것이다.
    그래도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이 모두 그렇듯이 이 이야기도 결국은 해피 엔딩이다. 다만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떤 종류의 해피 엔딩이 되는지는 끝까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본시 이야기라는 건 결과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과정이 재미있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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