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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칼로 푹

2011.12.31 00:2312.31

 


 


 1


 


 사람을 죽여보고 싶다.


 행인들의 발길이 뜸한 외진 골목에서 야채를 파는 노파. 붐비는 전철 안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책을 읽고 있는 여자. 길을 걷는데 나에게 길을 묻는 여자 혹은 남자. 파지 줍는 노인 혹은 젊은 남자. 착한 백수 선배. 3개월 전에 내 돈 50만 원 빌려갔다가 연락 끊긴 다리 저는 친구. , 이 친구에 대해서는 뭔가 오해가 있을 것 같아서 덧붙인다. 돈을 안 갚아서 죽이고 싶다는 게 아니다. 그냥 친해서 죽이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친구야, 언제든 네 마음이 편해지거든 그때 연락해라. 어차피 돈은 안 받을 거다. 그건 너도 알잖냐. 다만 지금은 네 마음이 불편할 거다. 힘내라. 네 덕분에 글자 수가 좀 늘었어. 고맙다. 하지만 죽여보고 싶다. 강아지가 길에 눈 똥을 휴지로 깨끗하게 치우는 여자. 날도 추운데 반팔 티셔츠 입고 다니는 근육질 남자. “배가 고파서 그래요. 천 원만 주세요.” “사지 멀쩡한 젊은 놈이 일할 생각을 해야지, 왜 구걸을 해!” “씨팔, 남이야 일을 하든 말든. 이 짓이 얼마나 돈 잘 버는 줄 알아! 나 아는 형은 이걸로 하루 30만 원씩 벌어, 씨팔.” 붐비는 백화점 앞에서 구걸하는 남자와 훈계하는 여자. 그런데 진짜로 그렇게 많이 버나. 일 하기 싫어지네, 씨팔. 공사 중인 건물 앞에서주변 상인 다 죽이는 쇼핑몰 공사 당장 중단하라!’ 피켓 들고 1인 시위하는 남자. 신호등이 파란불에서 빨간불로 막 바뀌려는 순간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여자.


 죽여보고 싶다.


 


 “안녕하세요.”


 편의점을 들어서면서 오전 근무자에게 인사를 했다.


 오후 4시 교대. 그러니까 나는 적어도 10분 전에 편의점에 와야 한다. 오전 근무자와 교대하기 전에 카운터에 있는 두 개의 금고에 돈이 맞나 안 맞나 확인해야 하는데, 그게 5분 정도 걸린다. 그리고 전달 사항 체크하면서 서로 몇 마디 주고받는 데 5. 그러니까 10분 전에 편의점에 도착해야 서로 불편함이 없다. 하지만 나는 매번 아슬아슬하게 4시에 맞춰서 편의점에 도착한다. 오전 근무자가 나를 싫어하는 게 당연하다.


 ‘아예 이럴 거면 확 늦던가. 그래야 내가 한바탕 화라도 내지. 꼭 화내기 어중간한 시간에 온단 말이야. 진짜 얄미워.’


 오전 근무자의 생각이 내 귀에까지 다 들릴 정도다.


 내가 일부러 얄미운 짓을 하려는 건 아니다. 이상하게 편의점 도착 시간이 항상 이 모양이다. 집에서 1시간 5분 일찍 나와도, 혹은 1시간 10분 일찍 나와도 항상 4시를 막 넘어서는 순간 편의점에 도착한다. 참 희한하다. 그렇다고 집에서 1시간 20분 일찍 나온 적은 없다. 그렇게까지는 또 하기가 싫다. 어쨌든 그래서 나는 매번 오전 근무자에게 눈총을 받는다. 죽여보고 싶다.


 “돈 다 맞네요. , 그럼, 체인지!”


 오전 근무자는 웃지도 않는다. 제법 용기를 내서 회심의 일격을 날렸건만, 전혀 반응이 없다. 이럴 땐 참 얼굴이 화끈거린다. 다시는 시도하지 말아야지. 오전 근무자 기분 풀어주는 일 따위는 두 번 다시 하지 말자.


 “이따 밤에 점주님 오시면 이거 핫팩 세 개 불량이라고 얘기하시면 됩니다. 아까 점주님하고 통화했습니다. 그렇게만 얘기하시고 점주님 드리면 됩니다. 다른 전달사항은 없습니다.”


 말투에 찬바람이 쌩 분다. 오전 근무자는 분명 초능력자다. 말투로 상대방을 얼려버린다. 정말 부러운 능력이다. 그래서 나도 몇 번 흉내를 내본 적이 있다.


 “교통카드 충전 돼요?”


 “네, 됩니다.”


 손님이 교통카드를 내민다.


 “이건 안 됩니다. 저희는 티머니만 됩니다.”


 “이건 왜 안 되는데요?”


 “저희 단말기에서는 그게 안 읽힙니다.”


 “그럼 이건 어디에서 충전해요?”


 “전철역에서는 모든 카드가 충전됩니다. 전철역으로 가시면 됩니다.”


 “어떤 편의점에서는 되던데요.”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손님이 한참동안 나를 쏘아보더니 나갔다.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덕분에 얼음처럼 굳어버린 건 나였다. 그 손님은 표정으로 상대방을 얼려버리는 능력자였다.


 능력자 천지인 세상, 나 같은 평범 이하인 사람은 걸핏하면 얼어붙기 십상이다. 그러니 얼지 않는 능력을 개발해야 할 텐데. 과연 그게 가능할지.


 


 “아차차, 또 컵을 안 갖고 왔네.”


 능력 개발에 대한 고민을 사정없이 깨뜨리는 목소리. 아주 귀에 익은 목소리. 목소리의 당사자는 아차차만 하루에도 서너 번 내뱉는다.


 “에잇, 이번에만 마시고 이제 안 마셔야지. 앞으로 술 안 마실 거야. 미안한데 거기 종이컵 하나만 줘.”


 앞으로 술 안 마시겠다는 소리도 하루에 서너 번. 종이컵 달라는 게 미안해서 하는 소리라는 걸 알기에, 한동안은 미소를 머금으며 종이컵을 건넸다. 하지만 이제는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휙 건넨다. 당연히 한 손으로.


 종이컵을 받아든 아저씨는 소주를 꺼내와 계산한 뒤 시식대에서 한잔 홀짝인다.


 백화점 측에서 고용한 용역 사원. 나이는 얼추 50대 후반. 하는 일은 백화점 주변 일대 청소. 하지만 실제로 청소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근무 시간 대부분을 백화점 주변 일대에서 몰래 술을 마시거나 잠을 자거나 잡담 상대와 노닥거리는 데 보낸다. 한 마디로 농땡이 부리는 데는 아주 도가 튼 사람이다. , 그리고 이 근방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이 아저씨가 모르는 건 없다. 동네 소식통이다. 여기 저기 기웃거리니 당연히 주워듣는 것도 많을 테고, 그런 게 많아야 또 여기저기에서 사람들과 노닥거릴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재미난 캐릭터다.


 “저기 길 건너 편의점 있잖아! 거기 이제 망했네.”


 “거기가 왜 망해요?”


 “아직 모르고 있었나 보네. 저 편의점 바로 밑에 대형 마트 새로 생기잖아. 지금 한창 공사 중이야. 아주 크게 할 모양이더라고. 그리고 24시간 영업에 배달까지 한다니까. 그럼 당연히 저 편의점 망하지.”


 “저 편의점 바로 밑이면 어디지, 족발집이요?”


 “그래, 거기 족발집. 원래 거기 족발집이 장사가 잘 안 됐거든. 거기 주인이 예전부터 마트나 한번 해볼까 어쩔까 그랬어요. 그러다 마침 옆에 책 대여점이 가게를 내놓는다기에, 거기까지 빌려서 가게를 확 넓혀가지고 대형 마트를 차린 거지. 그러면 봐봐, 마트니까 편의점보다 가격 싸지, 거기다 24시간이니까 새벽에도 편의점하고 경쟁하지, 그것뿐인가, 배달까지 한다잖아. 그러니 저 편의점은 이제 망한 거야. 저 편의점 주인이 아주 벌써부터 울상이더라고. 그냥 상황 봐서 안 되겠다 싶으면 가게 접겠다고 그래. 그래도 벌써 저기서 한 사오 년 했지, 저 편의점이. 뒤쪽이 순 원룸들이라 돈 꽤 벌었을 거야. 저기가 좋은 자리였는데 참 아깝게 됐어.”


 “돈 좀 벌었으면 다른 데서 또 편의점 하면 되겠네요.”


 “그런데 그게 쉽지 않은가 보더라고. 안 그래도 요 며칠 본사 통해서 알아봤다는데, 이제는 괜찮은 자리가 없대. 웬만한 자리에는 죄다 편의점이 들어서가지고, 말 그대로 좋은 자리 찾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네. 편의점도 포화 상태야.”


 동네 소식통 아저씨는 뭔가 한 건 해냈다는 듯 당당한 표정을 지었다. 종이컵 달라던 때와는 상당히 다른 표정이었다.


 “거기 커피 하나만 줘봐. 그걸 마셔야 술 냄새가 안 나거든.”


 역시나 당당한 말투. 어차피 내 돈으로 산 컵이나 커피는 아니지만, 줄 때마다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소주는 돈 내고 마시는 게 어디냐. 그렇게 위안을 삼을 때도 있지만, 역시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점주님이 근무자들 마시라고 사놓은 커피인데, 어떻게 된 게 근무자들보다 이 아저씨가 더 많이 마신다.


 커피를 홀짝이면서 편의점을 나가는 아저씨. 밖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이번에도 백화점과는 반대 방향으로 간다. 아마 닭꼬치집으로 가겠지. 거기에 가서는 또 무슨 얘기를 하려나. 아무튼 얘기하면서 자연스럽게 닭꼬치 하나 집어먹을 테고.


 저렇게 사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일 수 있다. 역시 재미난 캐릭터다. 죽여보고 싶다.


 


 한 시간 동안 손님이 수십 명은 왔다 갔다. 대부분 담배를 사거나 아니면 로또를 사거나. 로또 비율이 조금 높으려나.


 매주 오는 할아버지가 있다. 항상 내 앞에서 지갑을 뒤진다.


 “허, 참 이상하네. 분명히 여기에 넣어뒀는데. 내가 분명히 여기에 넣어뒀는데 어디로 갔을까. 거 참 이상하네.”


 그러면서 지갑을 뒤지고 또 뒤진다.


 미리 번호를 표시해온 로또 용지를 찾는 것이다.


 매번 똑같다. 올 때 마다 저렇게 지갑을 뒤진다. 정말로 로또 용지를 지갑에 넣었는지 안 넣었는지 궁금하다. 내가 다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다. 할아버지 지갑을 뺏어서 직접 뒤져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결국 할아버지는 로또 용지를 못 찾고 자동으로 5천 원어치를 구입한다.


 역시 매주 오는 할아버지가 있다. 근처 대형 병원 환자다. 휠체어를 타고 오는데, 링거도 매달고 온다. 휠체어는 할머니가 끌고.


 일단 할아버지가 편의점 앞에 도착하면, 할머니에게 뭐라고 얘기를 한다. 그러면 할머니만 혼자 편의점으로 들어와서 할아버지가 말한 걸 그대로 전달한다.


 “로또 자동으로 2만 원어치 주시고요, 지난 주 정답 나온 것도 주세요.”


 그러면 나는 군말 없이 할머니에게 로또 2만 원어치하고 지난 주 정답이 적힌 종이를 건넨다.


 “할아버지가 꼭 이렇게 로또를 사셔야 한다고 해서…….”


 그럼 할머니만 오면 될 텐데. 처음부터 그냥 병실에서 할아버지가 할머니한테 로또 2만 원어치하고 지난 주 정답 나온 거 갖고 오라고 하면 될 텐데. 왜 굳이 휠체어에 링거까지 매달고 할아버지가 여기까지 직접 오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아무리 고민을 해도 알 수가 없다. 죽여보고 싶다.


 


 ‘딸랑!’


 출입문 열리는 소리다. 그리고 이어지는 인사말.


 “오늘도 출근 도장 찍어야지.”


 로또 손님은 아니다. 이 사람은 로또는 안 산다. 대신 매일 같은 시간에 와서 6백 원짜리 컵커피를 마신다. 그게 출근 도장이다.


 대리운전기사. 경력 6년의 베테랑이다.


 오른쪽 검지 손톱만 유난히 뾰족하게 길다. 길이가 1센티미터는 된다. 캐주얼한 복장에 긴 생머리를 뒤로 묶었다.


 처음 봤을 때는 음악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노래를 부르거나 아니면 기타를 치거나.


 “이 손톱! 단말기 빨리 누르려고 기르는 거야. 남들보다 먼저 콜을 받아야 하거든. 머리는 그냥 자르는 돈 아까워서 기르는 거고.”


 단말기 빨리 누르려고 손톱을 기른다는 얘기를 듣고 조금은 놀랐다.


 이런 게 프로 정신이라는 건가. 결국 사소한 것에서 승부가 갈린다. , 이런 생각이 들어서 조금은 놀랐다.


 “아, 난 꼭 이 커피를 한 잔 마셔야 하루가 시작되는 느낌이 든단 말이야. 안 마시면 그런 느낌이 안 들어. 참 이상해. 계속 어제 같아. , 계속 어제 같은 기분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닌데, 그래도 이왕 일하러 나온 거,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이런 기분이 좋지 않겠어? 그래서 이렇게 매일 커피를 마셔요.”


 “손님이 그렇게 주문을 거시는 거겠죠. 커피 한 잔 마시면서, , 오늘도 하루가 시작됐구나. 열심히 일하자. , 이런 주문.”


 “그렇지. 내가 그렇게 스스로 말하는 거지. 오늘도 열심히 일하자. 열심히 일해서 우리 예쁜 딸내미 맛있는 거 사줄 돈 많이 벌자. 그런 주문을 걸지. 애초에 나한테는 그런 주문이 필요했던 거야. 이 일 참 끔찍하거든. 하기가 싫어요. 그래도 어떡해. 해야지. 그래서 처음에는 이 커피를 마시면서 마음을 다잡았어요. 오늘도 열심히 뛰자. 그런데 이제는 그게 완전히 자리를 잡았어. 이렇게 커피를 마셔야 힘이 나. 대신 안 마시면 안 나지.”


 이것도 프로 정신인가. 사소한 생각의 차이. 이거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저도 하루가 썩 즐겁지는 않은데, 그렇다면 제게도 커피 같은 게 필요할까요?”


 “필요하지. 이왕이면 운동이 좋아. 조깅, 자전거 타기, 아니면 가벼운 산책이라도.”


 아, 운동은 하기 싫은데.


 “나도 운동은 싫어. 몇 번 시도해 봤는데, 계속 실패했어. 오래 가지를 못해. 길어야 3일이야. 완전 작심삼일이지.”


 대사가 아니라 생각이었어요. 큰따옴표를 안 붙였잖아요.


 역시 프로다.


 “출근 도장도 찍었으니까 이제 가봐야지. 수고하시고.”


 “네, 수고하세요.”


 대리운전기사치고 참 일찍 출근한다. 다른 기사들은 보통 오후 7시 이후에나 일을 시작하는데. 대신 남들보다 빨리 일을 끝마친다. 오전 5시 전에.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는 내일 오전 5시 즈음에 다시 편의점에 올 것이다. 예쁜 딸내미가 좋아하는 것들을 사기 위해. 딸이 좋아하는 것들, 비싼 사탕, 비싼 초콜릿, 비싼 과자. 그런 것들 고를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그것 때문에 자기는 일을 하는 거라고. 애가 참 비싼 것만 좋아하기도 하지.


 아무튼 멋있는 아빠다. 죽여보고 싶다.


 


 매일 오후 8시 정도면 출입문의딸랑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이 있다. 여자다. 그리 예쁘지 않은 여자. 하지만 키가 꽤 크다. 170은 넘는다.


 매일 오는 손님이지만 전혀 친하지 않다. 농담은커녕 서로 인사말조차 건넨 적이 없다. 그냥 손님이 상품을 들고 오면, 얼맙니다. 안녕히 가세요. 이게 끝이다. 다만 근처 백화점에 근무한다는 것만 알고 있다.


 하루는 손님이 출입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왼쪽 가슴에 뭔가 번쩍거리는 게 눈에 띄었다. 명찰이었다. 백화점 직원들이 다는 명찰. 내 시선을 느꼈는지 손님이 자신의 왼쪽 가슴을 보았다. 그제야 명찰을 떼지 않았다는 걸 알았는지, 슬그머니 자신의 명찰을 떼서 주머니에 넣었다. 아하, 백화점 직원이었구나. 그때 알았다.


 손님은 들어오자마자 곧장 도시락이 진열된 곳으로 간다. 과자나 음료수 진열대는 쳐다도 안 본다.


 일단 도시락들을 쭉 훑어본다. 마음에 드는 도시락이 있으면 고른다. 그리고 도시락과 함께 사면 할인이 되는 음료수를 고른다. 할인이 되는 음료수 역시 도시락이 진열된 곳 바로 아래 아래 칸에 있다. 마음에 드는 도시락이 없으면 샌드위치. 샌드위치 역시 마음에 드는 게 없으면 삼각김밥. 그 다음에는 빵.


 그렇게 손님이 도시락을 고르는 모습을 나는 몰래 훔쳐본다.


 도시락 진열대는 카운터 맞은편 약간 오른쪽. 그러니까 손님은 항상 편의점에 들어오면 나를 등지고 서 있다. 손님은 나를 볼 수 없지만, 나는 당연히 손님을 볼 수 있다. 나도 모르게 훔쳐보게 된다.


 그리 예쁘지는 않지만 늘씬하다. 긴 생머리에 팔다리도 가늘고 길다. 항상 무릎까지 오는 치마를 입는다. 위는 블라우스.


 특히 시선이 가는 부분은 골반이다. 늘씬하지만 골반만큼은 꽤 넓다. 그래서 허리가 더 잘록해 보인다. 아무튼 넓은 골반 때문인지 항상 치마 옆이 터질 것만 같다. 서 있는데도 저렇게 치마가 팽팽한데, 앉기라도 하면 어떨까. 정말로 치마 옆이 우두둑 하고 터지지는 않을까. 손님이 가면 당장 도시락을 맨 아래 칸에 진열할까. 그럼 도시락을 집으려고 손님은 쪼그려 앉겠지. 그 순간 치마가 우두둑. 다음 날 또 우두둑. 그 다음 날도 또 우두둑. 정말 환상적인데.


 손님은 도시락을 고르다 머리를 한 번 쓸어올린다. 그 모습이 참 청순해 보인다. 긴 생머리가 찰랑 하고 흔들릴 때마다 나는 저절로 와우! 하고 감탄한다. 하지만 그런 감탄은 딱 한 번이다. 손님은 두세 번 머리를 쓸어올리지 않는다. 딱 한 번 쓸어올린다.


 그 모습이 청순해 보인다는 걸 손님도 아는 걸까. 내가 뒤에서 와우! 하고 감탄한다는 것도 아는 걸까. 그렇다면 이 손님도 완전 프로라는 얘긴데. 감탄은 하루에 한 번. 그래야 매번 감탄하고, 효과도 크다. 무슨 효과가 크다는 거지. 일단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그리고 속으로 빈다.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더 머리를.


 하지만 지금까지는 기껏해야 감탄일 뿐이다. 클라이맥스는 손님이 도시락을 고르고 나서다.


 이제 할인이 되는 음료수를 골라야 한다. 음료수는 도시락 아래 아래 칸. 쪼그려 앉을 필요까지는 없지만, 어쨌든 음료수를 고르고 집으려면 허리를 숙여야 한다. 갑자기 엉덩이가 확대된 느낌. 이것은 편의점 안이 손님의 엉덩이로 꽉 찬 것과 같다. 그런 느낌이다.


 오우, 오우, 오우……. 오우의 연발. 와우보다는 좀더 센 오우의 연발. 나한테는 와우보다 오우가 더 세다.


 허리 편 자세로 서 있을 때보다 더욱 팽팽해진 치마, 한층 더 넓어보이는 골반. 덕분에 손님의 엉덩이가 어떤 모양이고 어느 정도 크기인지 상상이 가능하다. 마구 상상하게 된다. 손으로 툭 건드리면 정말로 톡 터질 것 같다. 오우, 오우, 오우…….


 “3천 원입니다.”


 손에 든 지갑에서 돈을 꺼낸다.


 당연히 손님의 시선은 자신의 지갑.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흡사 매의 눈. 상공에 가만히 떠서 땅 위를 돌아다니는 먹잇감을 노려보는 그 눈.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렇게 노려보다가는 당장 따귀 맞지.


 손님이 돈을 꺼내는 동안 나는 잠깐 손님의 가슴을 훔쳐본다.


 블라우스를 밀어내는 가슴. 블라우스를 밀어내면서 만들어내는 봉긋한 봉우리. 골반을 볼 때와는 또 느낌이 다르다. 이건 참 진짜 탐스러운 모양새다. 눈 딱 감고 손으로 한번 감싸쥐고 싶을 정도로 탐스럽다. 손님은 저렇게 탐스러운 게 몸의 일부분이라서 얼마나 행복할까. 매일 주물러볼 수 있겠지. 실로 축복이 아닐 수가 없다.


 “안녕히 계세요.”


 손님은 항상 긴 생머리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인사를 한다. 목소리도 상냥하다. 죽여보고 싶다.


 


 갑자기 한 손님이 떠올랐다. 역시 백화점에서 근무하는 여직원. 덧붙이자면 정말 엄청나게 예쁜 여직원. 뭐 저렇게 예뻐! 이런 생각이 들었던 여직원.


 언제였지. 이삼 개월 됐나. 백화점 유니폼을 입은 채 들어왔다. 검은색 치마 정장. 치마 길이는 무릎 약간 위. 전체적으로 몸에 아주 잘 맞는 옷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왼쪽 가슴에 단 금빛 명찰이 번쩍거렸다. 아니지, 금빛 명찰이 번쩍거린 게 아니었다. 들어오는 순간 편의점 안이 갑자기 환해졌다. 천장에 매달린 30개 형광등이 순간 3천 개에 버금가는 빛을 내는 것과 같았다. 3만 갠가. 아무튼 그만큼 환해졌고, 그 때문에 명찰까지 번쩍거렸다. , 명찰이 번쩍거린 건 맞네.


 한밤중에 돌아다녀도 사방 백 미터는 대낮처럼 환할 것이다. 어둠이 짙게 깔리고, 이런 건 아예 경험해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사방 백 미터가 환하니, 주위에 어둠이 깔릴 리가 없다. 불행일까 행복일까.


 그렇게 주위가 환해질 정도의 아름다움. 젠장, 뭐 저렇게 예뻐! 당연히 이런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다. 남들도 읽는 글이라 표현을 좀 순화시켰는데, 역시 좀 약하다. 그러니까 당시의 느낌이 제대로 전달이 안 된다.


 아 씨팔, 존나 예쁘네.


 이것도 당시의 생각 그대로는 아니다. 더 심했다. 그러니까 뒤에 뭐가 더 붙는다. 하지만 이 정도로 끝내자. 더 이상은 안 된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손님을 보면서 하마터면 이런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반사적으로 눈에 힘을 주고 어금니도 꽉 깨물었다.


 손님은 곧장 내가 있는 카운터로 왔다.


 “여기 편의점에서 근무하신 지 꽤 되셨죠? 가끔 편의점 앞 지나다가 봤어요. 제가 힐끔 힐끔 쳐다봤는데, 눈치 못 채셨어요?”


 “아, 그러셨어요? 몰랐습니다. 전 오늘 처음 뵙는데요, 하하. 그런데 왜 저를 힐끔 힐끔 쳐다보셨어요?”


 “마음에 들어서요. 손님 없을 때는 책 읽고 계시더라고요. 아니면 그냥 멍하게 천장 쳐다보고 계시거나. 그 모습이 참 좋았어요. , 뭐랄까, 저 사람은 지금 무슨 책을 읽을까, 저 사람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런 궁금증이 들더라고요. 혹시 그런 경험 해보신 적 있으세요? 우연히 누구를 쳐다봤는데, 저 사람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런 궁금증이 드는 거예요.”


 “네, 있어요. 예전에 기차 타고 어디를 가는데요, 옆 의자에 앉은 사람이 창밖을 보고 있었어요. 손으로 턱을 괸 채로요. 그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사람은 지금 창밖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여자였나요?”


 “네.”


 “음, 괜히 물어봤네요. 이제 그 기억은 지우세요.”


 “네, 지울게요.”


 “당연히 그때 그 여자를 보면서 마음이 포근해지지 않던가요? 왠지 쓸쓸하다. 다가가서 말을 걸어보고 싶다. 계속 그렇게 창밖을 바라봐 주었으면 좋겠다. 뭐 그런 생각이 들지 않던가요?”


 “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 여자를 쳐다보고 있는데, 괜히 제 마음이 쓸쓸해지더라고요. 하지만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 여자가 계속 창밖을 바라봐 주기를 바랐습니다.”


 “제가 그런 기분이었어요. 이해하시겠네요. 책 읽고 있는 모습,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 그 모습이 참 좋더라고요.”


 “아, 그러셨군요.”


 “네, 그러니까 그 여자에 대한 기억은 지워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꼭 지우겠습니다.”


 “아무튼 그 모습이 좋아서 일부러 편의점 앞을 지나다닌 적도 있었어요. 몰래 훔쳐보려고요. 전혀 눈치 못 채셨나요?”


 “네, 전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미안해하실 일은 아니죠. 제가 눈치 못 채게 행동을 했으니까요. 계속 훔쳐보고 싶었거든요. 혹시 한동안 계속 누군가를 훔쳐본 적이 있었나요?”


 “네, 있었습니다.”


 “아, 제가 또 괜한 걸 물어봤네요. 그 기억도 지우세요. 이제는 아무도 훔쳐본 적이 없었던 겁니다. 아시겠지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언제 누구를 왜 훔쳐봤었나요?”


 “고등학생 때였습니다.”


 “생각보다 이르군요. 전 당연히 대학생 때였을 거라고 짐작했는데요.”


 “실은 대학생 때도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대학생 때 얘기를 해드릴까요?”


 “아니오. 그냥 고등학생 때 얘기를 해주세요. 하지만 대학생 때 기억도 지워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아참, 혹시 훔쳐본 적이 그 두 번 말고 또 있었나요?”


 “아니오. 두 번이 전붑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들려주세요.”


 실은 훔쳐본 적 무지하게 많다.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키도 저보다 크고 얼굴도 아주 잘 생긴 친구였습니다. 성격도 화끈했습니다. 제가 담배가 없어서 하나만 달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마침 친구도 담배가 다 떨어졌다면서, 자기가 피우고 있던 담배를 반으로 뚝 부러뜨렸습니다. 그러더니 필터 있는 부분은 저를 주고 친구는 나머지 반쪽 담배를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피웠습니다. 필터도 없는 부분을 말입니다.”


 “고등학생 때부터 담배를 피우셨나요?”


 “네, 중학생 때는 호기심에 몇 번 피웠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피운 건 고등학생 때였습니다.”


 “생각보다 이르군요. 보통은 대학생 때부터 피우던데요.”


 “보통은 그렇지요. 하지만 저는 술도 고등학생 때부터 마셨습니다. 본격적으로 말이지요. 심지어 수업 중에 마신 적도 있었습니다. 교실에서 말입니다.”


 “술 얘기는 됐습니다. 하던 얘기를 계속 들려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반은 서로 달랐지만, 학교 끝나면 항상 같이 어울렸습니다. 물론 쉬는 시간에도 항상 화장실에서 만났고요. 같이 담배를 피웠거든요. 그 친구한테는 여자 친구가 있었습니다. 오래 된 사이였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서로 만났으니까요. 여자 친구 성이 서 씨였습니다. 편의상 서 양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서 양 그러니까 왠지 좀 촌스럽군요. 김 양, 이 양, 박 양. 오우, 성에다 양을 붙이니까 좀 이상하네요. , 상관없습니다.”


 “네, 친구는 저와 친해진 뒤로 서 양을 만날 때 항상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함께 술을 마시고, 함께 술을 마시고, 함께 술을 마시고. , 만나면 그냥 술집에서 술 마신 기억밖에 없군요. 놀이공원엘 간다든지, 영화를 본다든지, 뭐 그런 것도 있겠습니다만, 저희는 오로지 술만 마셨습니다. 다른 것에는 흥미가 없었습니다. 술에 취해서 희희덕거리는 게 즐거웠습니다. 매일 술에 절어 살았습니다.”


 “확실히 고등학생 때가 맞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어릴 때라서 그런지, 매일 그렇게 술을 왕창 마셔도 체력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다음 날 일어나면 멀쩡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당시만 해도 제가 술의 신인 줄 알았습니다. 일명 술신. 하지만 세월이 지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제가 술신이 아니라는 것을요. 지금은 소주 몇 잔만 마셔도 다음 날 속이 부대낍니다. 머리도 아프고요. 어려서 하도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술을 배우면 안 됩니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고생합니다.”


 “네, 당연한 얘기입니다. 계속 얘기해 주세요.”


 “참, 그러고 보니까 술 마시고 나서 여관에 간 적도 많았습니다. 술집만 간 건 아니었습니다. 우린 여관에도 갔습니다. 물론 여관에 갈 때도 술을 사들고 갔습니다. 대신 조금만 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관방에서 또 술을 마셨습니다. 하지만 술을 조금만 샀기 때문에 금방 동이 났습니다. 그럴 때면 항상 제가 술을 사러 나갔습니다. 여관을 나와서 일부러 동네를 몇 바퀴 돌았습니다. 담배도 한 대여섯 개비 피웠습니다. 얼추 여관을 나온 지 30분 정도 됐다 싶으면, 그때 술을 사들고 다시 여관으로 갔습니다. 방 앞에서 노크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친구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서 양은 얼굴과 목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요. 머리카락도 약간 흐트러진 상태였습니다. 친구는 저한테 씨익 미소를 지었습니다. 서 양은 저를 쳐다보지 않았고요. 뭔가를 찾는 척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말입니다.”


 “아, 흠흠, 그 얘기는 그만 하셔도 됩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서 양을 훔쳐봤습니다. 저는 서 양을 좋아했습니다. 서 양 집도 알고 있었고요. 일요일이면 가끔 서 양 집앞까지 갔습니다. 멀리서 서 양의 집을 보고 있었습니다. 혹시 서 양이 나오지 않을까 해서요. 물론 몇 번 서 양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면 흡사 빛과 같은 속도로 숨었습니다. 제 숨겨진 능력이기도 합니다. 서 양이 나오면 빛과 같은 속도로 숨는 거. 서 양의 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숨어서 지켜봤습니다. 달려가고 싶었습니다. 부둥켜안고 싶었습니다. , , 다짐을 받아내고 싶었습니다. 두 번 다시, 두 번 다시 여관에는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 친구가 가장 친했던 친구 맞습니까?”


 “네, 가장 친했던 친구 맞습니다. 고등학생 때는 그 친구와 가장 많이 어울렸습니다.”


 “서 양 때문이었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그 친구와 어울려야 서 양을 볼 수 있었으니까요.”


 “가장 친했던 친구 맞습니까?”


 “아닙니다. 친하다고 생각한 적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 친구도 마찬가지 생각이었겠군요.”


 “네, 그랬을 겁니다. 그 친구도 저를 친한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다만 제가 있어서 더 즐거웠을 겁니다. 줄곧 둘이서만 지내다가 제가 나타난 겁니다. 둘이 재미없게 지내다가, 제가 나타나서 둘을 즐겁게 해준 겁니다. 술집에 가면 항상 둘은 붙어앉았습니다. 서로 부둥켜안은 채 말입니다. 저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서 서 양을 즐겁게 해주려고 별짓을 다했습니다. 심지어 처음 자위행위 한 얘기까지 했습니다. 서 양이 깔깔대고 웃더군요. 친구는 거만한 자세로 저에게 술을 따라주었고요. 그러면서 아마 친구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바보 병신 같은 새끼. 너 얘 좋아하지? 그래서 나 따라다니는 거지? 다 안다. 그래서 나도 너랑 놀아주는 거거든. 네가 바보 병신 같은 짓을 해줘야 우리가 즐겁거든. 고맙다, 이 병신 새끼야하고 말입니다.”


 “서 양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네, 서 양도 그랬을 겁니다. 서 양도 저를 바보 병신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일부러 친한 척 해주는 건데, 그런 것도 모르고 만날 나와서 자기네 장난감 노릇이나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도 저는 서 양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매번 둘의 장난감이 되어주었고, 가끔씩 서 양 집 앞에서 그녀를 훔쳐봤습니다.”


 “정말 바보 병신 같은 분이십니다.”


 “네,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때 내가 왜 그런 바보 병신 같은 짓을 했는지 말입니다. 깊이 깊이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아직도 가끔 서 양 집앞에서 그녀를 훔쳐보고 있지 않나요?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말입니다. 여전히 바보 병신 같은 분이십니다.”


 “틀렸습니다. 맞지만 틀렸습니다. 여전히 가끔 서 양 집앞에서 그녀를 훔쳐봅니다. 하지만 부둥켜안고 싶어서 훔쳐보는 건 아닙니다.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뭔가요, 그 이유가.”


 그 존나 예쁜 여자는 이유도 듣지 않고 사라졌다. 한 번 더 물었으면 이유를 말해 주려고 했는데, 그냥 질문만 던지고는 도망치듯 사라졌다. 말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삼 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님은 편의점에 오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온 적이 없다.


 


 


 2


 


 사람을 죽여보고 싶다.


 항상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는 뚱뚱한 은행 경비원. 매일 편의점에 와서 돈도 안 내고 이것저것 집어먹는 여자. 정말로 공원 노숙자들을 데리고 편의점에 온 단골 노숙자. 야광 조끼 입고 길 한가운데서 교통경찰 흉내를 내는 남자. 휴학하고 등록금 버는 술집 아가씨. 희망은 로또뿐이라며 매주 5만 원 이상씩 로또 사는 마트 배달원. 그런데 이 마트 배달원이 얼마 전부터 안 보인다. 그렇다면 혹시, 된 건가. 인생은 한 방! 장사가 안 돼서 직원들보다 수입이 더 적다고 투덜대는 카페 주인. 아 씨, 12월인데 웬 모기가. 너도 확 죽여버린다. 횡단보도 건널 때 손 번쩍 들고 건너는 귀여운 꼬마. 택시 운전한 지 3일 됐다며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귀찮도록 길 물어보던 택시기사. 연구소에서 아르바이트 하다 귀신 봤다며 넋이 나간 친구. 근무 시간 중에도 늘 몽상에만 빠져 사는 어느 건물 경비원. 대놓고 사람들 왼발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아마추어 왼발 전문 조각가. “전 언젠가 꼭 바닷속 인어 집에 갈 거예요하고 말하던 옆집 꼬마. “형님, 얼굴 몸매 완전 죽여주는 여대생 있습니다. 화끈하게 놀다 가세요. 175!” 어제도 오늘도 매번 똑같은 멘트만 날리는 남자. , 이놈부터 확 죽여주고 싶다. 그럼 나보다 더 크잖아 인마. 집게로 전철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고다니는 장애인.


 칼로 푹, 전부 죽여보고 싶다.


 


 화요일 밤 11. 그녀 집앞. 정확히는 그녀 집앞 맞은편 전봇대. 오늘은 좀 사정거리를 좁혔다. 그녀 집앞과의 거리는 불과 칠팔 미터 내외. 상당한 모험을 감행한 셈이다. 평소에는 두세 배 떨어진 거리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하지만 뭐 오늘은 화요일. 오늘도 어김없이 그녀는 술에 취해 있을 것이다. 평소보다 모든 감각이 둔한 상태. 들킬 염려는 없다.


 그녀는 항상 화요일에만 술을 마신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가. 별로 궁금하지는 않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고. 어쨌든 화요일에는 항상 술을 마신다. 그리고 밤 11시가 조금 넘으면 골목 초입에서 또각 또각 하고 구두소리가 들린다. 술에 취해 약간 비틀거리면서도 구두소리만큼은 희한하게 또각 또각 하고 들린다. 좋은 구둔가 보다.


 이제 구두소리가 들릴 때가 됐다.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또각…….”


 그녀가 나타났다. 역시 비틀거리는 발걸음. 오늘도 술에 취해 있다. 하지만 여전히 구두소리만큼은 또각 또각 또각.


 나는 전봇대에 몸을 바짝 붙였다. 하지만 아무리 전봇대에 몸을 바짝 붙여도 감쪽같이 숨을 수는 없다. 그녀가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들키고 만다. 그래도 역시 거리상으로 따지자면 여기 전봇대가 가장 적합하다. 게다가 오늘은 화요일. 그녀는 전봇대 따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발이 이끄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또각.


 소리가 점점 커진다.


 타이밍을 잘 맞춰야 한다.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더라도 어쨌든 목적은 달성하겠지. 하지만 분명 개운하지는 않을 것이다. 저절로 얼굴을 찡그리고 말 것이다.


 대학생 때 마음에 드는 여학생이 있었다. 물론 한 명만 있었던 건 아니다. 마음에 드는 여학생이 여러 명 있었다. 그중 누가 가장 마음에 드는지 정하기도 애매했다. 어느 날은 A, 어느 날은 B, 어느 날은 C, 어느 날은 D……. 수시로 순위가 바뀌었다. 그리고 그날은 B였다. 알파벳 A, B, C, D 중에서 이상하게 B가 제일 섹시해 보이네. 그래서 어쨌든 그날은 B였다. 할 일 없이 강의동 계단에 앉아 있는데, 멀리서 B가 걸어가는 게 보였다. 알파벳 B만큼이나 섹시해 보였다. 스키니진에 헐렁한 반팔 티셔츠. 헐렁한 티셔츠임에도 불구하고 걸을 때마다 가슴 쪽이 출렁였다. 혹시 브래지어를 안 했나. 혹시 저 티셔츠 하나만 입은 걸까. 완전 섹시해. B 완전 섹시해.


 B는 도서관에 가는 중이었다. B의 요일별 동선은 이미 파악이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대충 방향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B의 최종 목적지는 도서관 2층 예술 관련 책들이 진열된 곳. 요즘 B의 관심사는 미술이다. 그렇다면 나도 도서관 2층으로 가자. 가서 우연히 만나는 것처럼 상황을 만들자. “, B, 여긴 웬일이야. 책 빌리려고?” “, 너도 책 빌리려고 온 거야?” 이렇게 상황을 만들고 나서 자연스럽게 미술 쪽 이야기를 주고받자. 그러다 보면 B는 어느새 내 옆에 바짝 붙어서 자신의 관심사를 이야기할 것이고, 열심히 듣는 척하다 기회를 봐서 B의 입술에 기습적으로 키스를 하자. 그러고 나서 한 마디 날리는 거다. “미안, 입술이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그만.”


 실제로 이런 적이 있었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던 I. 얼굴은 물론이고 몸매까지 별로였다. 그냥 일자 몸매. 어쩌다 보니 I와 함께 술을 마시게 됐고, 별 생각 없이 키스를 했다. 그리고 대충 내뱉은 말이미안, 입술이 너무 예뻐서 그만.” I는 상당히 수줍어했다. 원래 선머슴 같은 애였는데, 얘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을 정도였다. 얼굴까지 빨개졌다. 그리고 그 키스 때문에 그 날 결국 모텔까지 갔다. 하지만 모텔을 나오면서 느꼈던 그 후회 막심함이란.


 어쨌든 I에게는 통했다. 아주 관통을 한 거지. B에게도 통할지 모른다. 그런 기대감이 컸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타이밍. I에게 키스를 했던 상황을 잘 떠올렸어야 했다. 그때 I는 말하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그때 I에게 키스를 날렸던 것이다. 그걸 왜 나중에야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상당히 중요한 건데 말이다.


 그리하여 어쨌든 섹시한 B에게 기습 키스를 날렸다. 타이밍을 계산하지 않고 무작정 날렸다. 그게 패착이었다. 그때 섹시한 B는 한창 자신이 좋아하는 화가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때 기습 키스를 날린 것이었다. 그러니까 한창 입이 움직이고 있을 때. 결국 내 입술은 섹시한 B의 입술이 아닌 이에 부딪혔다. 그렇게 세게 부딪히지도 않았는데, 내 입술에서 피가 났다. 그리고 그렇게 세게 부딪히지도 않았는데, 입술이 상당히 아팠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화가 치밀 정도로 아팠다. 입안에 피가 고이고, 고인 피가 도서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섹시한 B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그리고 섹시한 B의 이 사이로 보이는 빨간 피. 분명 내 피였으리라.


 섹시한 B는 도서관 바닥에 피가 섞인 침을 퉤 뱉고는 밖으로 나갔다. 내 얼굴에 뱉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섹시한 B는 한 학기를 쉬었다.


 이 모든 건 타이밍 때문이었다. 그만큼 타이밍은 중요하다. 제대로 전달이 됐는지 안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타이밍.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발소리는 점점 커졌다. 그녀가 집 앞까지 거의 다 왔다.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


 그녀는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핸드백에서 대문 열쇠를 꺼낼 것이다. 다른 날 같으면 초인종을 누르겠지만, 화요일에는 그녀가 직접 대문을 연다. 시간이 늦었으니 당연한 행동이리라.


 자, 타이밍에 신경을 쓰자.


 이제 또각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대문 앞까지 온 것이다.


 그녀는 대문 앞에서 핸드백을 뒤적였다. 열쇠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이다. 뛰쳐나가야 한다. 이미 내 손에는 날 선 칼이 들려 있었다.


 막 전봇대를 벗어나 살금살금 그녀에게 다가가는 순간, 비틀 하고 몸의 중심을 잃었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칼을 쥐고 있는 상태에서 잘못 넘어졌다가는 내가 칼에 찔리는 수가 있다. 그런 슬랩스틱 코미디 같은 상황은 만들지 말자. 뒤돌아 본 그녀가 내 모습을 보고 웃을지 모른다. 생각만 해도 어처구니가 없다.


 그런데 왜 내가 갑자기 비틀 한 거지. 허허, 이런. 그녀의 뒷모습을 너무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걸었기 때문이다. 술에 취한 그녀가 핸드백에서 열쇠를 찾으며 비틀. 그걸 보면서 나 역시 비틀.


 그녀는 지금 또 한 번 비틀거렸다. 아마도 오늘은 평소보다 술을 조금 더 많이 마신 모양이다. 아니면 빈속에 마셨거나. 빈속에 술 마시면 안 좋은데. 다음 날 속도 더 부대낄 테고. 후후, 하지만 이제 그런 걱정 같은 건 안 해도 되겠어. 넌 이제 죽을 테니까.


 그녀가 또 비틀. 이번에는 움직임이 좀 컸다. 몸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졌다. 쓰러진다. 쓰러진다. 쓰러진다. , 씨팔, 술을 적당히 마셔야지. 그렇게 몸도 제대로 못 가눌 정도로 술을 퍼마시면 어떡하냐. 집까진 대체 어떻게 온 거야. 


 자칫하면 그녀가 쓰러지면서 뒤에 있는 나를 볼 수도 있다. , 봐도 크게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그녀가 나를 안 봤으면 싶다.


 그녀가 내 얼굴을 보고, 그리고 내 손에 들린 칼을 보고 겁에 질려 소리를 질러도 나는 그녀를 죽인다. 죽이러 왔으니까 반드시 죽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건 좀 잔인하다. 내 손에 들린 칼을 보는 순간 그녀는 얼마나 무서울까. 본래 상상이 더 무섭다고 하지 않나. 저 칼이 나를 찌를 거야. 나는 이제 죽을 거야. 죽을지도 몰라. 정말로 나는 죽을지도 몰라. 살려줘. 엄마, 살려줘. 속으로 그렇게 외치겠지. 너무 겁에 질려 입 밖으로는 나오지 않는 공포. 뒤이어 칼이 자신의 뱃속으로 푹 들어오는 걸 본다.


 아, 생각만 해도 잔인하다. 내가 너무 잔인한 놈이 되어버린다. 비록 죽이더라도, 그녀가 미리 죽음을 상상해버리는 상황은 만들지 말자. 그게 덜 잔인하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몸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그녀가 결국 바닥으로 쓰러졌다. 술에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반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왼팔로 땅을 짚으면서 겨우 몸의 균형을 잡았다. 하마터면 바닥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그녀는 손으로 땅을 짚은 채 엉거주춤 앉아 있었다. 일어나려고 바동거렸다. 하지만 다시 주저앉고, 바동거리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그러는 사이에 나와 그녀의 거리는 상당히 좁혀졌다. 더 이상 다가가면 위험하다. 내 기척을 느낄 수도 있다. 이 거리에서 바로 달려들어야 한다. 그래서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기 전에 칼이 먼저 그녀의 등을 파고들어야 한다.


 그렇게 막 달려드는 순간, 그녀가 내 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자칫하면 속으로 엄마 살려줘를 외칠지도 모르는 상황. 나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곧장 달려들어 막 고개를 돌리려는 그녀의 머리를 왼손으로 잡았다. 힘 있게 잡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그러고는 순식간에 그녀의 머리를 땅바닥을 향해 내리꽂았다. 힘 있게 내리꽂았다. 그녀의 얼굴이 땅바닥에 짓이겨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연거푸 그녀의 머리를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녀는 두 팔을 휘두르며 나를 저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녀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렇게 얼굴이 땅바닥에 짓이겨진 상태에서도 그녀는 죽지 않았다. 질기다. 그러면서 머리에 힘을 줘 내 얼굴을 보려고 했다. 이것이 본능이라는 건가. 죽어가면서까지 자신을 죽이려는 자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하는 것.


 하지만 미안, 나는 그렇게까지 잔인하지 않아. 너한테 내 얼굴을 보여주지 않을 거야. 확인시켜 주지 않을 거야. 그러니 그냥 죽어.


 나는 다시 한 번 그녀의 머리를 땅바닥에 짓이긴 다음, 곧장 칼로 그녀의 등을 푹 찔렀다. 뼈에 닿아서 칼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계속 찔렀다. , , ……. 그녀의 등 여기저기를 계속 푹푹 찔렀다. 찌르고 또 찔렀다.   


 


 아, 나는 마침내 사람을 죽였다. 함께 모텔에 갔던 일자 몸매 I. 역시 I와는 타이밍이 잘 맞았다. 내 얼굴을 보기 전에 죽일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다음에는 누구를 죽일까. 서 양을 죽일까.


 이런 제길. 사람을 또 죽여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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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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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연 12.01.12 23:57 댓글 수정 삭제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에 대한 책/드라마 등에서는 원치 않는데도 사람의 마음을 읽게 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놓고, 그 능력을 저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글을 읽을 때마다 한 편으로는 부럽기도 했고, 저주일 수 있겠다는 것에 막연하게 공감도 하고 그랬는데...
    이 글은 읽는 이가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자가 된 기분으로 읽게 되는 것 같아요.
    ...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게 이렇게 무서울 수 있다는 걸 이 정도로 그려낸 작품은 흔치 않은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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