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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미행

2011.11.25 23:5911.25


 


 1


 


 5월 마지막 날. 아파트 관리비를 내야 한다. 가상계좌가 적혀 있지 않은 관리비 고지서. 아파트 거주자가 직접 은행까지 가서 관리비를 입금시켜야 한다. 거주자 편의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아파트 관리사무소. 그래서 아파트 관리비만큼은 늘 매월 마지막 날에 낸다. 이게 일종의 시위라는 걸 관리사무소 측이 알아주면 좋을 텐데.


 혹시 가상계좌 만드는 게 굉장히 번거로운 작업일까. 그렇더라도 마음 약해질 필요는 없다. 수많은 고지서들 중에 가상계좌가 없는 건 아파트 관리비가 유일하니까. 심지어 몇 천 원 되지 않는 도시가스 요금 고지서에도 가상계좌가 적혀 있다. 설사 그게 번거로운 작업이라 하더라도, 거주자 편의를 우선한다면 진즉에 만들었어야 한다. 애초에 거주자 편의에는 관심도 없는 관리사무소.


 역시 월말이라 은행 안은 붐볐다.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허리에 가스총을 찬 남자가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은행 경비인가. 청원경찰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은행 경비의 인사는 받을 때마다 불편했다. 간혹 출입문까지 열고 닫아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냥어서 오세요정도만 말하면 될 텐데. 굳이고객님이라는 말까지 붙여야 하나. 뭐든 지나치면 오히려 역효과를 준다.


 경비의 인사에 나 역시 넙죽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 인사를 하고 나니 내가 괜한 행동을 했구나 싶었다. 경비는 내 인사를 받지도 않았다. 나 역시 그냥 넘어갔어야 했다.


 덕분에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이럴수록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내가 은행에 들어온 이유를 떠올리고, 그에 맞는 행동을 떠올리고, 그대로 움직여야 한다.


 일단 번호표를 뽑고 나서 소파에 앉았다. 마침 소파 옆에 여러 권의 잡지가 있었다. 대부분 비즈니스나 재테크 관련 잡지. 표지만 봐도 명치가 뻐근했다. 잡지들 때문에 은행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이럴 땐 명상에 잠기자.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


 나는 지금 진짜로 명치가 뻐근한 게 아니다. 아니지, 명치가 뻐근한 건 진짜다. 다만 소화불량 따위로 명치가 뻐근한 건 아니다. 잡지 때문이다. 내가 잡지를 집어들었기 때문에 명치가 뻐근한 거다. 저 잡지는 내가 굉장히 싫어하는 거구나. 명치는 그걸 알려주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명치가 뻐근하다고 해서 약국이나 병원에 갈 필요는 없다. 그냥 마음을 다스리면 된다. 사람들이 계속 들어오고, 경비는 그때마다 인사를 하고, 주위에서는 대기자들끼리 잡담을 나눈다. 창구 직원들의 목소리도 크다. 하지만 개의치 말고 마음을 다스리면 된다. 눈을 감고 아무 생각 없이 어둠 속 어딘가를 응시하면 된다.


 음, 안 되는구나. 은행에서 명상에 잠기기란 참 힘들다. 사람들이 너무 많다. 애초에 발상 자체가 잘못 됐다. 은행에서 명상에 잠기겠다니, 사람들이 웃을 일이다.


 덕분에 또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은행에서 나 혼자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97번 고객님! 97번 고객님! 2번 창구로 오십시오!”


 은행 직원 목소리에 나는 서둘러 번호표를 확인했다. 97. 뭔가 번호 뽑기에라도 당첨된 기분이었다.


 나는 번호표를 흔들며 소리쳤다.


 “네! 제가 97번입니다!”


 순간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경비도 마찬가지. 은행 직원들도 마찬가지. 모두들 나를 쳐다봤다.


 난 98번인데. 아우, 아깝다.


 이런 생각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 정도 분위기 파악은 나도 가능하다. 그런데 왜 나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했을까.


 제가 97번입니다! 그것도 번호표까지 흔들어대면서.


 지금 이곳 체감 온도는 섭씨 150. 자글자글 타들어갈 정도였다.


 이건 다 잡지 때문이야. 아니, 경비 때문인가.


 어쨌든 나는 그렇게 위안을 삼으며 힘겹게 창구로 걸어갔다.


 “와, 97번 고객님, 안녕하세요! 어떤 업무를 도와드릴까요?”


 창구 직원의 밝은 인사가 왠지 기분 좋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 하는 감탄사는 왜 넣었을까.


 “아파트 관리비 내러 왔는데요. , 여기 번호표 먼저 드릴게요.”


 그 순간 깨달았다. 번호표를 창구 직원에게 건네면서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때 깨달았다.


 창구 직원이 미소를 지었다. 웃음을 참는 미소 같기도 했다. 아마 내 표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 내 표정이 어땠을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창구 직원을 쳐다보던 내 표정. 문장으로는 디테일하게 옮길 수 없다. 멍한 표정.


 또다시 누군가에게 화살을 돌려야 한다.


 이건 전부 경비 때문이다. 경비가 인사만 하지 않았어도 나는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경비의 인사에 내가 속으로 투덜투덜, 그러다 나까지 경비에게 인사를 했다. 그 때문에 나는 당황해서 엉겁결에 번호표를 뽑았다. 그러고는 소파에 앉아 잡지를 뒤적이다 명치에 뻐근함을 느꼈다. 곧바로 명상에 돌입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그러니까 엉겁결에 번호표를 뽑은 것이다.


 “혹시 번호표 뽑고 한참 기다리셨어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에 걸맞은 답변도 알고 있다.


 “아니오, , 조금…….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습니다. 소파에 앉아서 뭐 생각 좀 하느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지루하지는 않았습니다. 시간이 오히려 아주 빨리 지나간 느낌입니다. , 그러니까 별로 오래 기다린 건 아닙니다. 10분이 1분 같았으니까요. 그런 경험 해보신 적 있으시죠?”


 아니오, , 조금. 여기서 말을 끊었어야 했다. 알면서도 말이 계속 이어졌다.


 “네. 있어요. 잠 잘 때요. 어제도 밤에 잠을 자는데요, 저는 분명히 1시간 정도밖에 안 잔 거 같았거든요. 그런데 벌써 알람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눈 뜨니까 아침이었어요. 뭔가 굉장히 억울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런 경험 말씀하시는 거죠? 아무튼 은행에서 그런 경험을 다 하시다니, 왠지 기쁘기도 하고 그러네요. 다른 분들은 대부분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다고 하시는데.”


 뭐냐, 이 아가씨는.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그런 거 같지는 않은데. 표정도 갑자기 진지해졌고.


 “하지만 고객님,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으셔도 있잖아요, 다음부터는 이런 고지서 납부는 기계에서 바로 하셔도 됩니다. 그게 생각보다 참 편하거든요. 시간 절약도 되고요. 번호표 같은 거 안 뽑고 바로 기계에서 납부 가능하니까요.”


 글쎄, 그건 저도 안다니까요. 그러니까 제가 번호표를 뽑은 건 순전히 경비 때문이라니까요. 경비가 인사를 하는 바람에…….


 커흑!


 누군가 숨넘어갈 듯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경비. 경비의 비명 소리였다. 저 경비는 왜 자꾸 나를 방해하는 거지.


 나는 눈에 힘을 주고 경비를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노려보려고 경비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 눈빛을 보자 경비가 스르륵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곧이어 쿵 하고 머리가 은행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저 정도 충격이면 적어도 반나절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리라. 


 물론 경비는 내 눈빛을 보고 겁에 질려 바닥에 쓰러진 게 아니었다. 그 정도로 강렬한 눈빛을 가진 사람은 없다.


 쓰러진 경비의 머리 위에 한 남자가 자신의 오른발을 올려놓는다. 자동차 정비공들이 입을 법한 파란색 작업복 차림. 얼굴에는 흰색 가면을 뒤집어썼다. 손에 든 건 뭐지. 모양은 야구 방망이인데, 그것보다 세 배는 커 보인다. 게다가 표면이 울퉁불퉁하다. 스치기만 해도 대여섯 시간은 바로 기절. 제대로 맞으면 혼수상태다.


 “자, 주목! 너희들 지금부터 떠들면 나한테 혼난다!”


 방망이를 든 사내가 우렁차게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상황 판단이 됐는지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부웅부웅부웅부웅.


 방망이 날아가는 소리다.


 그리고 30대로 보이는 여자의 머리가 퍽 소리를 내며 박살이 났다.


 계속 부웅부웅부웅부웅. 방망이가 크게 원을 돌더니 다시 사내의 손으로 돌아왔다. 


 당연히 비명 소리는 사라졌다. 은행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 튀어나오려는 신음을 손으로 틀어막고 있었다.


 “하여튼 이 새끼 성격하고는. 야 인마, 사람을 그렇게 막 죽이면 어떡해! 새끼가 감정이 없어, 감정이.”


 쉬이이이이익.


 뭐가 날아가나 했더니, 창구 뒤쪽 책상에 앉아 있던 남자의 오른쪽 어깨에 단검이 꽂혔다.


 “손 함부로 놀리지 마. 이번에는 어깨였지만, 다음에 또 버튼 누르려고 했다가는 바로 이마에 박아넣을 테니까. 이마 한가운데에 슈욱.”


 자신의 이마 한가운데를 손가락으로 누른다. 역시 파란색 작업복 차림에 흰색 가면을 쓴 남자. 이 사람은 칼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다. 작업복 여기저기에 수십 개의 단검이 달려 있다.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자자, 인간들 겁주는 건 그만들 두고,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일을 해야지. 다들 어서 움직이자고.”


 아마 일당들의 리더인가 보다. 역시 차림새는 똑같았다. 하지만 다른 점이 하나 있다. 무기가 없다. 손에 든 건 천으로 만든 자루뿐이다.


 한 사람은 방망이를 들었고, 한 사람은 수많은 단검으로 무장했다. 그런데 리더는 맨손이었다. 어딘가 리더다웠다. 맨손으로도 방망이와 단검을 제압할 수 있는 실력파.


 “이제 우리들 실력 대충 알았겠지. 그러니까 허튼 수작 부리지 마. 그럼 바로 죽인다. 팔을 부러뜨리거나 다리를 부러뜨리거나 기절을 시키거나, 뭐 그런 거 없어. 그냥 바로 죽일 거야.”


 리더는 창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자루를 은행 직원에게 던졌다. 자루는 모두 세 개였다.


 “금고에 들어가서 그 자루에다 돈을 꽉꽉 눌러서 담아갔고 와. 10분 줄게. 시간 지나면 너부터 죽인다. 그리고 다시 다른 직원 시킬 거고. , 얼른 뛰어. 시간 잰다. 시작!”


 리더는 진짜로 손목시계를 보았다.


 자루를 건네받은 직원은 주위 눈치 볼 겨를도 없이 후다닥 금고로 향했다.


 “빠르네. 잘하면 살겠어. , 그럼 저 놈이 올 때까지 우린 뭐하고 있을까. 10분이 생각보다 좀 길거든. 그러니까 가만히 있으면 심심할 수가 있어.”


 지금 리더의 시선은 은행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향해 있었다.


 “다들 내 시선 피하지 말고 좀 쳐다보라고. 그렇게 고개 푹 숙이고 있으면 내가 뭘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잖아.”


 하지만 리더의 말에 고개를 드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의자에 앉거나 서 있거나 바닥에 주저앉거나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고개를 숙여 리더와 눈을 맞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은행 강도와 만났다. 삼인조 은행 강도.


 그런데 경비는 은행 강도들이 들어왔을 때도 인사를 했을까. 한 것 같기도 하고, 안 한 것 같기도 하고. 그 상황을 목격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했을까 안 했을까, 했을까 안 했을까, 했을까 안 했을까.


 했을 거 같기도 하고. 그런데 분명 크헉 하고 비명을 질렀단 말이야. 그러면 인사를 하려고 입을 막 벌리려던 순간 비명이 터져나온 건가. 그럼 안 했다는 건데.


 그건 그렇고,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창구 직원이 아파트 관리비를 처리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기는 했지만, 입이 반쯤 벌어졌다. 시선은 책상 위에 있는 자신의 손.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어깨도 약간씩 들썩였다. 상당히 겁에 질려 있는 상태였다. 내가 바로 앞에 있다는 사실도 잊었으리라.


 하는 수 없었다. 내가 직접 아파트 관리비를 내는 수밖에.


 나는 관리비 고지서를 들고 은행 구석에 있는 세금수납기계로 향했다. 은행 안이 조용해서 그런가, 유독 발소리가 크게 들렸다.


 “어이, 이봐! 너 지금 뭐하는 거지? 허튼 수작 부리면 바로 죽인다고 했을 텐데!”


 리더가 나를 불러세웠다.


 “허튼 수작 부리는 거 아닌데요. 아파트 관리비 내려는 겁니다. 원래 이거 내려고 은행에 들어왔거든요.”


 그러면서 나는 리더에게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를 들어보였다.


 “뭐냐, . 저거 혹시 바보 아니야. 아니면 우리를 바보로 아는 건가.”


 리더가 다른 두 명을 쳐다보며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원망하지 마라. 나는 아까 분명히 경고했어. 허튼 수작 부리면 바로 죽일 거라고 말이지. 난 내 말에 책임을 지는 인간이거든.”


 자기 말에 책임을 지는 인간은 무섭다.


 말을 마치자마자 리더가 땅을 박차며 공중으로 3미터 정도 떠올랐다. 그러고는 공중에서 빠른 속도로 내게 날아왔다. 날아왔다는 표현이 어울릴 법한 행동이었다. 도약 능력이 평범한 인간과는 차원이 달랐다.


 와, 진짜 무서운 인간.


 나는 그렇게 감탄하며 다시 세금수납기계로 향했다.


 그때 은행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 뜨니까 아침이어서 굉장히 억울했다던 그 직원.


 “악! 97번 고객님! 고객님, 위험해요!”


 분명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었는데, 입이 반쯤 벌어진 걸로 봐서는 정신적으로 꽤 큰 충격을 받았을 텐데, 그런데도 용기를 쥐어짜서 내게 위험을 알려준 직원이 고마웠다. 그것도 대기번호까지 기억해 주고 말이지.


 나도 모르게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은행 안 사람들의 외침.


 “악, 이봐요, 피해요! 얼른 피해요, 97!”


 난 어느새 이곳에서 97번으로 통했다.


 와장창창창!


 요란하게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무언가 슈육 하고 은행 안으로 들어오는가 싶더니, 나를 덮치려던 리더의 몸을 휙 낚아챘다. 그러더니 공중에서 그대로 리더를 은행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바닥에서 5미터 정도 쭉 미끄러진 리더는 고통스런 신음을 토해냈다. 얼마나 아플까.


 다른 일당 두 명이 얼른 리더 곁으로 달려갔다.


 “이봐, 괜찮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도대체 저건 뭐냐고!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냐고, 저건!”


 일당들의 말에 리더는 여전히 신음만을 토해내고 있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이어졌다.


 “저 사람은 누구지.”


 “어떻게 우리가 위기에 처한 걸 알고 딱 맞게 나타나준 거지.”


 “여자야, 남자야.”


 “가슴 보니까 여자네.”


 “그런데 저 옷 혹시 전신 수영복 아닐까.”


 “색이 조금 촌스럽네. 분홍색은 좀 아닌 거 같아.”


 “왜 얼굴까지 수영복을 뒤집어썼을까. 답답하겠다. 그냥 눈 부위만 가려도 충분할 텐데.”


 “미인이 아닌가 보지.”


 “아무리 영웅이라도, 여자이다 보니 감추고 싶은 게 있을 거야.”


 “몸매도 그닥 훌륭하진 않군.”


 “쉿, 조용히들 하세요. 그래도 우릴 구해주러 왔는데.”


 “그렇지. 갑자기 얘기가 이상한 쪽으로 흘렀어.”


 “그래, 우리가 실수를 했네.”


 분홍색 전신 수영복을 입은 여자가 사람들 쪽을 잠깐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한숨.


 여자는 다시 삼인조 강도들에게 다가갔다.


 여자의 모습을 본 강도들 중 단검으로 무장한 자가 한꺼번에 대여섯 개의 단검을 던졌다. 대여섯 개의 단검 모두 정확히 여자의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세금수납기계 앞에서 침착하게고지서납부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기계의 지시대로 역시 침착하게 아파트 관리비 납부를 끝마쳤다. 간단했다. 역시 기계로 납부하니까 편하구나. 다음부터는 경비가 인사를 해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자. 당황하면 안 돼.


 


 


 2


 


 담배를 보충 진열하고 있는데 딸랑 하고 출입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어서오세요.”


 나는 담배를 보충 진열하면서 습관적으로 인사를 했다. 들어오는 손님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안 좋은 습관인데, 나중에 점장이 알면 한소리 들을 게 뻔하다. 손님이 들어오면 가급적 눈을 맞추고 인사해라. 나도 그렇게 하고는 싶은데, 그게 잘 안 된다.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아예 손님과 눈을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카운터에 있을 때 손님이 들어온다고 해서 눈을 맞추며 인사를 하느냐, 그렇지도 않다. 사람들과 눈 맞추는 게 불편하다. 그래서 그냥 손님이 들어와도 목 부분을 쳐다보면서 인사를 한다.


 뭐라 그러라지 뭐. 안 되는 걸 어떡해. 천성은 못 고치는 법이거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인사를 안 하느냐, 그건 또 아니거든. 인사는 잘 하잖아. 그러면 된 거야.


 벌컥벌컥벌컥벌컥.


 실제로 이와 똑같은 소리가 난 건 아니지만, 아무튼 매장 구석에서 누가 음료수를 마시는 소리가 났다.


 조금 전에 손님이 들어왔었지. 들어올 때 음료수를 갖고 들어온 건가.


 나는 카운터에 서서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벌컥벌컥.


 아직 날은 환했다. 덕분에 등이 오싹하지는 않았다. 대낮에 귀신이 편의점에 들어와 음료수를 소리나게 마시지는 않을 것이다. 틀림없다. 나는 그러리라 확신하고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악, 깜짝이야.


 이곳이 한적한 시골 편의점이라면 들개라고 해도 착각할 만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서울 한복판. 그것도 대로변에 있는 편의점. 이런 곳에 들개가 있을 리도 없고, 들어올 리도 없다. 그러니 들개는 아니다.


 머리는 봉두난발에 시커먼 외투를 걸쳤다. 손도 시커멓다. 노숙자였다.


 노숙자가 냉장고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이미 거의 다 마셨다. 소주를 말 그대로 물마시듯이 마시는구나. 순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소주 한 병을 그 자리에서 다 마실 수가 있지. 그것도 벌컥벌컥, 안주 하나 없이.


 아,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 저 노숙자는 계산도 안 하고 소주를 마셨다. 게다가 매장 안에서 저렇게 술을 마시면 다른 손님들이 불쾌해한다. 그리고 서서히 노숙자 특유의 암모니아 비슷한 냄새도 매장 안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니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한다. 당장 끌어낼까, 아니면 소주 값을 받고 끌어낼까. 소주 값 못 받으면 내가 돈을 채워야 하는데. 차라리 경찰을 부를까. 그런데 경찰을 부른다고 해서 소주 값을 받을 수나 있을까. 경찰이 대신 내주지는 않을 거잖아. 보아 하니 저 노숙자는 돈도 없을 것 같고. 그러면 일단 노숙자 끌어내고 나중에 점장한테 얘기할까. 아니지, 그럼 분명 잔소리 들을 텐데. 넌 노숙자가 들어와서 소주 꺼내 마시는 동안 뭐했냐고 하면 할 말이 없잖아. 그러니까 손님 눈을 보면서 인사를 하라는 거 아니냐. 바로 이런 말부터 나올 텐데. 인사만 잘한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구나. 그래도 눈을 마주치면서 인사하는 건 좀 무린데.


 힐끔.


 여전히 쪼그려 앉은 채로 노숙자가 나를 쳐다보았다. 빈 소주병을 들고서.


 당연하게도 이제 보니 노숙자는 얼굴도 완전히 시커멨다.


 헤헤헤헤헤.


 뭐지, 저 웃음의 의미는.


 노숙자는 그렇게 헤헤 웃고는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러더니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그적 어그적, 어그적 어그적.


 이 부사는 정말 적절한 표현이다. 노숙자의 걸음걸이를 이보다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다.


 당연히 나도 어그적 어그적, 어그적 어그적. 그렇게 뒷걸음질을 쳤다.


 왜 자꾸 나한테 다가오는 거지. 다 마셨으면 그냥 나가면 되지 않나. 아니면 매장 안을 돌아다니면서 다른 먹을거리들을 찾아보던가. 그 틈에 나는 다시 어떻게 행동할 건가 고민해 보고. 그러면 되는데 왜 자꾸 나한테로 오는 거냐고.


 여전히 둘 다 어그적 어그적.


 어느 틈에 나는 카운터로 돌아왔고, 노숙자는 카운터 앞에 섰다.


 헤헤헤헤헤.


 노숙자가 또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계산도 안 하고 그냥 마셔서 미안해. 하도 목이 말라서 말이지.”


 말할 때마다 입에서 술 냄새가 확 풍겼다.


 지독하네. 그 생각뿐이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해서 의외다, 생각보다 목소리가 탁하지 않고 맑아서 더 의외다, 뭐 그런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지독한 술 냄새만 느끼고 있었다.


 술은 냄새만 맡아도 취해. 그런 친구가 있다. 당연히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어떻게 냄새만 맡아도 술에 취하냐.


 미안하다, 친구야. 냄새만 맡아도 술에 취할 수가 있구나. 그런 경우가 있구나. 나 지금 소주 한 대여섯 병 마신 기분이다. 우리 오늘 그냥 코가 삐뚤어지게 마시자. 그래 그래, 오늘 그냥 확 죽자. 그런 기분이다. 술 냄새 10초 만에 나 지금 술 확 올라온다.


 그동안 술을 얼마나 마셔댔으면 입안에서 저렇게 술 냄새가 진동을 할까.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아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목말라서 술을 마시는 사람. 기분이 착잡했다.


 “자, 가진 게 이것밖에 없어. 미안해. 나머지는 우리 착한 아저씨가 좀 내줘.”


 노숙자는 시커먼 외투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냈다. 손때가 묻어서일까, 돈마저 시커멨다.


 저걸 받아야 돼 말아야 돼.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우스웠다.


 “돈은 그냥 넣어두시고요, 다음부터는 목마르면 오셔서 물을 달라고 하세요. 아니면 시원한 이온음료라도 제가…….”


 딸랑딸랑.


 “어서오세요.”


 이번에도 역시 손님 눈을 보지 않고 인사를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와악, 냄새. 이 아저씨한테서 나는 냄새다.”


 냄새가 난다고 투덜대면서도 손님은 노숙자 곁으로 다가왔다.


 “아저씨 술 마셨구나. 술 냄새까지 난다. , 근데 이 더러운 돈은 뭐지. 혹시 아저씨 돈이야? 또 술 사려고? 안 돼. 아저씨 또 술 마시면 안 돼. 그럼 길바닥에 쓰러진다. 그냥 이 돈 가지고 가. 가서 나중에 빵 사먹어라. 지금 배고프면, 지금 빵 사먹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얜 또 왜 하필 이 타이밍에 와서 사람을 더 정신없게 만드나 몰라.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오는 손님, 손님이라고까지 부르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그냥 매일 오는 무전취식자다. 나이는 나랑 얼추 비슷할 거 같은데, 정신연령은 나보다 조금 아래다. 보기에 그렇다. , 무전취식뿐만이 아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그것도 그냥 집어간다. 그럴 때마다 내가 돈을 채운다. 왜 우리 관계가 이렇게 된 걸까.


 이렇게 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더니 무작정 돈도 안 내고 음식을 집어먹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냥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음식을 다 먹고는 어슬렁어슬렁 매장 안을 돌아다녔다. 돌아다니면서 눈에 띄는 상품들을 집더니 한마디씩 중얼거렸다.


 이거 모양이 안 좋다. 음식이 모양이 예뻐야 되는데.


 이건 금방 고장난다. 아이들한테 이런 거 팔면 안 돼.   


 이거 너무 비싸다. 절반 가격만 받아도 돼.


 잠깐, 그러고 보니 노숙자는 소주 마시고 천 원짜리 지폐라도 꺼냈지, 얘는 지 마음대로 음식 집어먹고 그냥 가는 애잖아. 더 나쁜 애네.


 “아저씨, 내가 빵 골라줄까. 이리 와봐, 여기 이 빵이 제일 맛있다. 치즈 들어간 빵이거든. 이거 먹어라. 돈은 안 내도 돼. 그냥 가지고 가. 가지고 가서 나중에 다른 가게 가서 이 빵 돈 주고 또 사 먹어. 이거 진짜 맛있다.”


 “소주도 그냥 마셨는데, 빵까지 그냥 먹을 수야 있나. 그러면 내가 뭐가 되겠어. 아주 양심 없는 놈이 되지. 그러니까 이 천 원이라도 주고 먹어야지.”


 “괜찮다니까. 돈 걱정은 하지 마. 그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아주 쇼를 하세요. 지가 해결은 무슨. 나중에 자기도 하나 그냥 먹을 거면서.


 가만 있자. 그러면 다 합해서 얼마냐. 삼천 원이 넘네. 삼분의 이를 훌쩍 넘는 내 시급이 그냥 날아가네.


 “어때, 맛있지. 목마르면 우유라도 줄까. 아니면 주스.”


 시급을 채우는구나. 아주 꽉꽉 채워.


 시식대에 사이좋게 서 있는 두 사람. 한 사람은 맛있게 빵과 주스를 먹고, 한 사람은 흐뭇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고.


 편의점이 언제부터 무료급식소가 된 거냐. 아니지, 무료급식소가 아니지, 내 피 같은 시급.


 그래, 많이 드세요. 이왕 드시는 거 맛있게 드시고요.


 피 같은 시급이 날아갔지만, 노숙자가 빵과 주스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피가 부글부글 끓지는 않았다. 왠지 착한 일 하나 해서, 지금 당장 죽으면 천국에 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 저 여자애 덕이다. 이 기분을 살려서 여자애한테도 빵과 주스를 쏠까. 그럼 천국은 확실한 건데.


 이런 생각을 잠깐 했지만, 얼른 머리를 저었다. 내가 일부러 집어주지 않아도, 저 여자애는 지가 알아서 집어먹는다.


 끄어어어억.


 이건 뭐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잘 차려진 밥상에서나 들릴 법한 트림소리다. 고작 빵과 주스를 먹고 나서 저런 트림이라니, 저 노숙자, 제법 과장이 심하다.


 “우리 착한 아저씨 덕분에 아주 잘 먹었네. 빵이 아주 참 맛있어. 내가 이 가게 소문 많이 내줄게. 내가 요 위에 있는 그 큰 공원에 살거든. 거기 사람 많아. 내가 그 사람들한테 다 얘기해 줄게. 이 가게 자주 가라고 말이지. 그럼 오늘 먹은 건 홍보비라 생각하고 내 그냥 갈게. 잘 먹었네. 거기 착한 아가씨도 나중에 공원에 한번 놀러오고.”


 홍보비라. 이 편의점 홍보비를 왜 내 시급으로 내야 하는 거지.


 “어, 뭐지. 이거 새로 나왔나 보네. 어제까지 없었는데. 아저씨, 이거 오늘 새로 들어온 거야?”


 그러면서 여자가 집어든 건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빨간색 음료. 노숙자가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또 매장을 한바퀴 둘러본 모양이었다.


 “몰라. 그거 다시 넣어 놔.”


 아마 오늘 새로 들어온 제품이 맞을 거다. 따끈따끈한 신제품. 저 여자애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다. 새로 들어온 제품은 귀신같이 찾아낸다. 내가 일일이 매장 둘러보며, ‘, 이거 못 보던 건데하고 제품을 집어 살펴볼 필요도 없다. 그런 건 저 여자애 몫이다. 그리고 신제품이 맛있는지 맛없는지 먹어보는 것도 저 여자애 몫이고. 물론 그 돈은 또 내 호주머니에서 나가고.


 아, 이런 걸 좀 점주님이 알아주셔야 하는데. 부디 조속한 시급 인상과 더불어 잦은 시급 인상을 바랍니다.


 “아저씨, 이거 비타민 음료라고 써 있는데. 왠지 이거 마시면 몸이 막 건강해질 거 같다. 맛도 괜찮아. 나 이거 매일 하나씩 마셔야 할까 봐. 아저씨도 하나 줄까?”


 “난 됐다. 너나 마셔. 매일 하나씩 마시든 이틀에 하나씩 마시든 너 알아서 하고. 삼일에 하나씩 마시면 더 좋고.”


 신제품은 비타민 음료구나. 요즘 비타민 음료가 유행이지.


 아 씨, 그나저나 저건 또 하나에 얼마나 하려나. 요즘은 신제품들이 다 비싸. 싼 게 없어.


 그런데 쟤 음료수만 마셔도 되나. 점심때가 한참 지났는데, 밥은 먹었는지 모르겠네. 괜히 비싼 거 고르기 전에 내가 적당한 거 하나 골라서 주는 게 더 낫지. 그게 더 싸게 먹혀.


 “어이, 비타민 음료 마시는 아가씨, 이리 와봐.”


 오라면 또 곧장 달려온다. 그것도 아주 해맑은 웃음을 지으면서. 그럴 때 보면 참 사랑스러워보인다. 그러니까 내 말은 여자애가 해맑게 웃으며 달려오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참 따뜻해지는 느낌이 든다는 거다. 그냥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느낌, 뭐 그런 기분이 든다. 


 “왜 불렀어. 노숙자 아저씨한테 친절하게 대해줘서 고맙다는 말 하려고? 그거라면 됐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 히힛.”


 그런 기분이 들다가도 이렇게 엉뚱한 소리를 하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아, 그래 고맙다. 아주 고마워.”


 “그런 인사는 안 해도 된다니까, 히힛.”


 “그건 그렇고, 너 밥 먹었어? 안 먹었으면 음료수 그만 마시고 뭐 다른 거 먹어. 너 좋아하는 조각 피자 하나 남았다. 아니면 떡볶이랑 만두 먹든가.”


 “어, 안 그래도 먹으려고 했다. 그런데 나 아까 되게 신기한 사람 봤다. 키가 정말 커. 머리가 아마 여기 천장에 닿을 거야. 그러면 키가 얼마나 되는 거지?”


 “글쎄, 3미터 정도. 넘을 수도 있고.”


 “그렇구나. 키가 그만큼 큰 사람이 왔다갔다 하는 거야. 손에는 기다란 풍선도 들었어. 그걸로 강아지 모양을 만들어서 아이들한테 줬다. 받는 아이들도 있었고, 키가 너무 커서 무서웠나 봐. 받지도 않고 막 우는 애들도 있었다. 히힛, 정말 신기하지. 그렇게 키 큰 사람 처음 봤다. 아마 이 세상에서 그 사람이 키가 제일 클 거야. 그리고 마음씨도 제일 좋을 거야. 그러니까 돌아다니면서 아이들한테 풍선으로 강아지도 만들어주고 그러지. 발도 진짜 크다. 내 발보다 세 배는 컸다. 검정색 신발을 신었는데…….”


 그건 키 큰 사람이 아니야. 그냥 나무 막대 같은 장비 위에 올라가 있는 거야. 근처에 새로 문 연 가게라도 있었나 보지. 그 가게 홍보하려고 그렇게 키 큰 사람으로 분장해서 사람들 시선을 끄는 거지. 그러니까 이벤트 회사 직원이거나 아니면 아르바이트 학생인 거지.


 여자는 내 앞에서 계속 떠들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끔씩, 정말하고 추임새도 넣었다.


 피부가 보라색인 사람을 보았다고도 했다. 집 근처에 한복집이 있는데, 그 한복집 쇼윈도 안에 피부가 보라색인 남자가 앉아 있었다고 했다. 낮에는 안 보이다가 밤에만 그곳에 앉아서 사람들 구경거리가 된다고 했다. 대신 구경한 대가로 먹을 걸 달라는 말을 써놨기에, 여기 편의점에서 가져간 음식을 준 적도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돈도 안 내고 가져간 음식을 다른 사람한테 준 거다. 내 돈으로 산 음식을 이 아이는 다른 사람에게 준 거다. 그러니까 내가 그 사람한테 음식을 사준 거다. 나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그것도 피부가 보라색인 사람한테.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는지 모르겠다, 가 아니지.


 이 아이는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피부가 보라색이라니. 설마 그 사람 피부가 진짜로 보라색이라고 믿는 건 아니겠지. 보라색 페인트를 몸에 바른 건가. 그렇게 해서 마네킹 흉내를 내며 생계를 해결하는 건가.


 “와, 정말! 그 사람 나도 한번 보고 싶네.”


 “보고 싶지! 그 사람 진짜로 피부가 보라색이다. 딱 보면 알 수 있어. 그런데 요즘엔 안 보인다. 거기에 없어. 나중에 다시 거기 앉아 있으면 얘기해 줄게.”


 나도 대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키다리 인간으로 변장을 할까. 아니면 파란색 페인트를 몸에 바르고 근무를 해볼까. 점주님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인사나 잘하라고 핀잔을 주겠지.


 아무튼 이 아이가 매장에 오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악하게 살지 말자. 욕심 내지 말자. 뭐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된다.


 참 묘한 재주를 갖고 있는 아이. 그래서 지 멋대로 음식을 먹어도, 그 음식값을 내 돈으로 채워넣어도 그리 아깝지 않다. 대신 가고 나서 몇 분 지나면 내 본성을 되찾게 돼서 문제지만.


 


 


 3


 


 영화를 고르는 기준은 딱 하나. 주인공이 초능력자여야 한다. 하늘을 날거나 힘이 엄청 세거나 움직임이 빛보다 빠르거나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거나 몸이 다이아몬드보다 단단하거나, 기타 등등. 일단 이런 주인공이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중에서 얼마나 액션이 화려한지를 따진다. 한마디로 제작비가 많이 들어간 영화를 고른다. 아참, 뱀파이어나 늑대인간이 나오는 영화도 목록에 포함된다.


 오늘 볼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주인공의 평소 모습은 평범하다 못해 측은해 보인다. 단칸방 생활, 직장을 구하지 못해 아르바이트로 생계 해결. 그나마 다행인 건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 하지만 걸핏하면 여자 친구한테 구박을 받는다. 도대체 언제 정신 차려서 제대로 된 직장 구할 거냐고. 도대체 밤마다 어디를 그렇게 쏘다니냐고.


 주인공은 오늘도 주머니에 알약 한 알 넣고 악당의 본거지로 쳐들어간다.


 악당과 맞닥뜨리기 전 주인공은 주머니에서 알약을 꺼내 입으로 가져간다. 꿀꺽. 물 같은 건 필요 없다. 그냥 삼킨다. 그리고 잠시 뒤 주인공은 아주 보기 흉한 모습으로 변한다. 마치 살아 있는 미라 같다. 좀비 같기도 하고. 대신 그 몸은 강철보다 단단하다. 당연히 힘도 세다. 그 흉한 모습으로 주인공은 악당을 물리친다. 그래서 주인공은 여자 친구에게 자신의 정체를 숨긴다. 흉한 모습을 차마 보여줄 수 없다. 은근히 가슴 아픈 이야기다. 원래 영웅은 외롭고 고독한 법이다.


 


 극장 안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아직 영화 볼 분위기는 아니었다. 조금 소란스러웠다. 화재 시 대피 요령, 영화 관람 시 지켜야 할 매너 등을 알려주는 동안에도 꾸준히 사람들이 들어왔다. 개봉 예정인 영화를 소개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곧 영화가 상영할 텐데도 그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양손에는 음식을 든 채 일행과 잡담을 나누면서 느긋하게 좌석을 찾아 앉았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까지 극장 안은 어수선할 것이다. 사람들은 계속 들어올 것이고, 들어와서도 계속 수군거릴 것이다. 경험 상 늘 그랬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영화가 시작할 때까지 눈을 감기로 했다. 그러고 있는 게 차라리 속 편했다. 시간이 되면 영화는 시작할 것이고, 그러면 사람들도 조용해질 것이다. 참고 기다리는 게 상책이다.


 참고 기다리는 게 상책인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수군거림이 잦아들 즈음,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또 다른 영화 예고편인가 싶어서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요즘 영화관은 사운드가 참 입체적이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입체적인 사운드가 시간이 지날수록 귀에 거슬렸다. 마치 극장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진짜로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그래, 그렇게 다들 비명을 질러. 더 크게 질러. 겁에 질려서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 옆 사람 부둥켜안고 아주 발악을 하라고. 그래야 재밌지. 그래야 이게 영화보다 더 재밌지, 안 그래?”


 왠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눈을 떠보니 스크린 앞에서 웬 비쩍 마른 사내가 여자를 인질로 붙잡고 있었다. 당연히 사내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비명을 질러. 대신 의자에 앉은 채로 움직이지 마라. 만약 누구 하나 이곳을 나가려고 했다가는 이 여잔 죽는다. 그리고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도 닥치는 대로 죽일 거고. 그러니까 다들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어. 얌전히 앉아서 비명이나 꽥꽥 질러대라고. 비명 소리가 제일 약한 것들은 내가 가만히 안 둔다. 살고 싶으면 아주 크게 비명을 질러.”


 비명 소리에 쾌감을 느끼는 인간인가. 별 희한한 놈도 다 있다.


 덕분에 영화 보는 건 다 틀렸다. 이미 극장 안은 다시 환해졌다. 아마 극장 관계자가 경찰 쪽에 연락을 취했겠지. 그럼 곧이어 경찰이 출동할 테고, 저 별난 취미를 갖고 있는 놈은 잡히겠지. 상황 종료. 그럼 그때 가서 다시 영화를 보여줄 건가. 아니면 단체 환불.


 어쨌든 더 이상 영화 볼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환불해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지루하다.


 “야, 거기 자주색 티셔츠 입고 있는 놈! 너 왜 비명 안 지르는 거야! 죽고 싶어! 셋 샌다. 그때까지 비명 안 지르면 넌 죽어. 거짓말 아니야. 너 진짜로 죽일 거야. 그러니까 시키는 대로 꽥꽥대는 게 좋을 거야.”


 사내의 말에 사람들이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사람들 시선이 내게서 멈췄다.


 나였구나. 그렇지, 내가 자주색 티셔츠를 입었지. 누군가 했네.


 “비명을 지르세요. 안 그러면 저 자가 진짜로 어떻게 나올지 몰라요.”


 옆에 앉은 사람이 불안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그래요, 우선은 비명을 지르세요. 영화관 쪽에서 무슨 조치를 취했겠지요. 그때까지는 저 자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중간 중간 비명을 질렀다.


 “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사람들을 안심시킨 뒤 의자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오늘 영화 보기는 틀렸다. 관람료 환불 받는 것도 귀찮았다. 그래서 별 미련 없이 스크린을 등지고 위로 올라갔다.


 “너 이 새끼, 거기 가만히 있지 못해! 한 사람이라도 이곳을 빠져나가면 이 여자는 죽는다고 내가 분명히, 커흑.”


 역시나 귀에 익은 비명 소리. 왜 다들 쓰러질 때커흑하고 쓰러질까.


 극장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 뭐였지.”


 “뭔가 휙 지나갔는데, 그러고는 저 칼 든 남자가 픽 쓰러지고.”


 “네 발 달린 짐승이었나. 그런데 몸 색깔이 좀 밝았어. 분홍색 같았는데. 혹시 그런 색을 가진 짐승이 있었나.”


 “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되게 빠르다.”


 방금 전까지 칼을 들고 있던 사내는 혀를 쭉 내민 채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사내의 인질이었던 여자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mirror
댓글 1
  • No Profile
    가연 11.12.09 23:22 댓글 수정 삭제
    아이님 글만의 독특하고 기괴한 분위기 좋아요. 오랜만에 감사히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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