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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고통의 대가

2012.07.28 00:1407.28

1.
미영이 옛 친구로부터 비굴한 모습을 보여 가며 겨우 일감을 얻어 오자, 양식은 처음 한다는 말이 우리가 원래 이런 일 하려고 사업 시작한 건 아니니까 이런 일은 하지 말자고 투덜거리는 소리였다. 미영은 이 너무나 예측하기 쉬웠던 양식의 태도에 대해 한 바탕 푸념을 늘어 놓으며 양식과 다투었다.

그러다 그 다툼의 결말 즈음에 이르자 미영은,

"뭘. 뭘 그렇게 잘 아는데? 김양식 이사는 이름이 김양식이니까 지금 어디 양식장에 김 말리러 가야 하는 거 아냐?"

하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양식이 대답했다.

"이름으로 놀리는 거 제일 유치한 건데. 그나마 이렇게 뻔하게 누가봐도 놀릴만한 당연한 말로 놀리는 건 유치하다고 말해줄 필요도 없을 정도로, 말한 사람도 스스로 부끄러워할 정도네요. 이미 부끄러워 하고 있죠, 사장님?"
"뭐가 유치하긴 유치해?"
"사장님은 이름이 이미영이니까, 이미 영점으로 내려온 거죠. 유치함을 느끼는 감각이."
"그거는 안 유치해요?"
"멋있잖아요. 쉽게 하나로 붙여서 생각하기 힘든 두 개의 떨어진 단어를 연결해서 언어유희를 만들었으니까."
"그렇게 설명하면 정말 울고 싶을 정도로 구구한 거 알죠?"

이러한 구구함은 결국 어쩔 수 없이 경영이 어려운 회사를 구하기 위하여, 두 사람이 미영이 맡아 온 일을 하는 것으로 넘어 갔다.


2.
미영이 가져온 일은 빚지고 야반도주할 것을 걱정하여 빚쟁이가 빚진 사람을 따라다니며 감시해 달라는 것이었다.

미영과 양식은 그리하여 빚을 진 한 여자를 따라 다니게 되었다. 여자는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 사이로 보였다. 눈가에 어린 지친 기색은 40대 초반쪽에 가깝지만 웃는 표정이나 자신감 있게 편 허리는 30대 중반쪽에 가까워 보였다. 미영과 양식은 자연스럽게 여자가 다니는 곳을 따라 다니며 여자에게 의심없이 접근하기 위해 잠깐 부부인냥 행세를 했다. 단, 이런 상황을 다루는 이야기에서 자주 벌어지곤 하는 부부행세를 하는 두 사람의 감정이 서로 가까워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서로서로보다, 지켜 봐야 하는 여자의 행동이 훨씬 감탄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즐겁고 유쾌한 농담을 좋아했고, 그런 만큼 정말 밝아 보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춤과 노래를 좋아하기도 했고, 미영은 그 여자가 다니는 곳에서 구색을 맞추기 위해 오랫만에 예전 실력을 발휘해서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한 곡 불러야 하는 일도 생겼다.

그러다, 미영은 그 여자가 원수처럼 여기고 있는 한 남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남자는 여자의 전남편이었다. 여자가 남자를 싫어하고 있는 까닭은 남자가 매력이 없고 무능하며 지루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잠시간의 친절로 남편을 가까이했던 것 뿐이었는데, 어느날 술 취한 날, 여자의 표현에 따르면, "예술적인 자유를 따라가는 성격" 덕분에 여자는 남자와 덜컥 결혼을 해 버렸던 것이다.

여자가 남자와 결혼한 곳은 베텔규스별 지역이었고, 그 지역에서는 결혼을 취소하는 것이나 이혼을 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여자는 어쩔 수 없이 그 모든 절차가 완료 될 때까지는 남자와 엮여 지내야 했다. 여자의 설명에 따르면, 그때 그 남자의 조잡하고 어두운 기질에 여자는 너무 구질구질하게 영향을 받았기에, 그때부터 여자는 인생이 잘못 뒤집히기 시작했다고 한다. 모든 일이 뜻대로 즐겁게만 풀려가던 여자의 화려한 삶은 그때부터, 빡빡한 예산과 시간에 쫓겨서 해야하는 책임질 일이 있는 것으로 내려 앉았다는 것이다.

여자는 남자와 같이 지낸 시간은 거의 없었고, 안드로메다 은하 방향으로 한참 여행을 갔다 올 때마다 남자에게 자식을 낳아 왔다며 아기를 맡겼다. 남자는 아기가 일단 여자를 닮아서 귀여웠던 데다가 남자가 아니면 돌봐줄 사람이 없기에 여자가 맡긴 두 명의 아기를 돌보았다. 두 아기가 유창하게 말을 할 수 있을 무렵이 되자, 여자는 드디어 이혼 절차를 완료하는 것에 성공해서 완전히 남자를 떠났다. 그러나, 여자는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이미 느끼고 있었다. 더이상 예전처럼 제대로 즐겁지는 못했던 여자의 인생은 남자를 떠났다고 해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는 점점 더 그 남자와 잠깐 결혼했던 것 때문에 삶이 잘못되어 버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자가 지내면서 빚이 늘어나는 만큼, 남자를 싫어하는 마음도 커져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 싫어하는 마음은 남자에게 자신에게 예정되었던 행복을 받아 내야만 한다는 일종의 복수심으로 변하였다. 여자는 남자가 돌보고 있는 자식의 어머니가 자신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좋은 계획을 꾸몄다. 여자는 남자에게 생명보험을 들게 했고, 여자는 남자가 죽게 되면 그 생명보험금을 자기가 받게 되도록 남자를 움직였다. 남자는 여자가 다시 자기와 가족관계, 친한 관계를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고 기뻐하며 여자의 제안에 응했고, 보험 계약에 서명을 하기 위해 여자와 잠깐 우주선 창문 아래에서 만나 몇 마디 대화를 하는 것도 기뻐 했다.

여자가 처음부터 범죄를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여자는 그저 남자가 언젠가 죽으면 그때라도 배상을 받으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도 였다.

그런데 남자가 곧 큰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다. 여자는 매우 기뻐했다. 드디어 남자가 자신에게 저질렀던 죄의 대가를 받고, 여자 자신에게 그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좌절과 실망의 시간을 지난 것을 보답해주는 수확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이것이야 말로, 빚과 지루함과 잃어버린 젊음과 실패와 같은 많은 고통을 견뎌낸 결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자가 죽었다는 소식은 좀체로 들려오지 않았다. 몇 달만 기다리면 될 줄 알았는데, 그 몇 달이 지나도 남자가 죽었고 여자에게 보험금이 도착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지는 않았다. 그제서야 미영과 양식은 여자가 이상한 낌새를 보이고, 먼 길을 떠날 준비를 했던 것의 까닭을 알게 되었다. 여자는 바로 그 남자의 소식을 듣고, 여차하면 남자를 찾아가 보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여자는 남자를 찾아 다시 베텔규스별로 갔다. 미영과 양식은 여자를 뒤쫓아 갔다. 그렇지만 여자는 이미 두 사람이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안드로메다 은하계로 가는 것처럼 속임수를 써서 두 사람을 따돌렸다. 뒤늦게 미영과 양식은 베텔규스별에 도착했지만 여자를 찾아내기는 어려웠다. 미영과 양식은 여자의 계획을 짐작했다. 여자는 병에 걸렸지만 죽지 않고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남자를 죽여서, 보험금을 타 내려고 할 것이다. 여자가 남자를 찾아 갔다고 생각한 미영과 양식은 여자를 찾기 위해서 우선 남자를 찾으려고 한다.

남자의 병원 기록을 뒤져서 남자의 행방을 알아낸 두 사람은 남자를 찾아 간다. 아무도 모르던 곳에서 남자는 참으로 오랫만에 여자를 만나고 기뻐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를 살해한다. 미영과 양식이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은 죽은 남자의 시체를 없애려고 쩔쩔매고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여자는 미영과 양식에게 들켰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경찰에 체포되겠구나 생각했다. 여자는 마지막까지 남자가 자신의 인생을 망하게 했다고 말했다. 여자는 한 번 웃었다. 그리고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도대체, 이 남자가 언제 죽는다는 건지는 알아요? 엄청 심한 병이라고 들었는데, 왜 아직도 살아 있는 지 몰라요. 무슨 병이 그래."

여자에게 양식이 대답했다.

"남자가 걸린 병은 바이러스성 통각 자극증입니다. 바이러스가 신경으로 파고 들어서 순수하게 엄청나게 아픈 느낌만 계속 주는 병입니다. 그 아픈 것을 결국 사람이 견딜 수가 없어서 뇌쇼크로 죽게 되는 병인데,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아픈 것을 참지 못하고 날뛰다가 스스로 벽에 몸을 부딛히거나 높은 곳에서 떨어지게 되어 죽게 됩니다. 그게 아니라면 가장 기쁜 마음으로 죽게 해주는 시설이 있다는 플레아데스 성단의 서천궁전으로 달려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렇지만 이 남자는 그렇게 하지 않고 계속 참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상도 하기 쉽지 않게 몰아 닥치는 큰 고통을, 그것보다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의지로 참고 버틴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남자는 그렇게 스스로 죽어버리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남자는 보험 규정상 자살을 하게 되면 보험금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걱정했습니다. 남자는 빚에 쪼들리는 당신이 다시 부유해지는 길은 보험금을 받는 방법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남자는 당신이 보험금을 받을 수 있도록, 스스로 죽지 않고 계속 그 신경의 모든 마디마디에 가득한 통증을 견디면서 참으며 버텼던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여자가 죽은 남자의 시체를 쳐다보고 있는 동안, 미영과 양식은 논쟁하기 시작했다. 양식은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죽은 남자를 위해서라도 이 사실을 경찰에 알리지 않고 여자가 보험금을 받게 해 주자고 했다. 하지만 미영은 그래도 여자는 살인범이고 보험금을 못 받고 감옥에 가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양식은 미영에게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경찰들이 그곳에 같이 있는 미영을 범인으로 의심해서 체포하려 하자, 어쩔 수 없이 미영은 범인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양식은 여자를 체포하도록 신고했다.

여자는 경찰에 끌려 가면서, 죽은 남자의 시체를 다시 쳐다 보면서 소리 질렀다.

"다 거짓말 아니야? 무슨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몰아치는 병이야? 이 남자 나 만날 때는 웃고 있었다니까."

미영이 오랫동안 세상의 별빛을 맨눈으로 보기 어려울 여자에게 마지막으로 대답해 주었다.

"그때 이 남자는 당신을 만나려고 왔으니까."

- 2012년, 등촌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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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No Profile
    쑤우 12.08.12 00:58 댓글 수정 삭제
    이런 식의 아련한 결말이 곽재식 (님) 문학의 묘미가 아닌가 싶어요
  • No Profile
    곽재식 12.08.20 13:36 댓글 수정 삭제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요즘 이야기들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어서 이번에는 간결하고 짧고 빠르게 죽 이야기 한 뒤에 끝머리만 여운스럽게 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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