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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탄생

2012.03.30 23:3403.30

 
 
 탄생
 
 
 다음은 내가 우리 연구소에서 처음 연구 사업 보고서를 책임지게 되었을 때, 조사했던 내용 중에 기억나는 것을 이야기로 꾸며서 써 본 것이다. 선거철 앞두고 터뜨려야 한다면서 빨리 보고서를 끝내라는 말에 워낙 시달리면서 허겁지겁 해 치우다 보니 보고서 내용은 쓰레기 같았는데, 그 쓰레기 같은 내용 중에서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이 바로 이 이야기였다.
 
 연구 사업 자체는 간결한 것이었다. 한 지방 자치 단체에서 공동 묘지를 조성하면서 좋은 묘지를 조성한답시고 풍수지리 전문가들에게 돈을 주고 검토를 맡긴 것이 발단이었다. 그 지방자치단체의 정치인들은 풍수지리 전문가에게 돈을 준 것은 황당한 일에 돈을 쓴 일이라며 이곳 저곳에서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걸 두고 서로 다투다 보니, 전통문화가 어쩌니, 종교가 어쩌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고, 그것이 기독교계 국회의원들이나 교회의 영향력에 대한 다툼으로도 번져서 일이 커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점술, 부적, 굿, 풍수지리, 초능력에 대한 지침을 만들기 위한 연구 사업이 시작 되었고, 그러면서 무슨 인사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세상에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존재한다"라는 말을 꼭꼭 쓰면서 결론을 시작하는 보고서들도 여럿 나왔다. 우리 연구소에서는 그런 보고서들에서 쓰인 자료와 분석에 오류가 없는지 재검토를 하는 용역 사업을 맡았고, 내가 그 일의 책임을 맡게 된 것이다.
 
 지금부터 나오는 이야기는 그렇게 검토한 보고서들 중에 나타난 한 사례를 소개하는 것인데, 그 내용은 풍수지리라든가, 종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혹은 그때 연구 용역을 진행하면서 한 마디 똑바로 들으려고 하지 않으면서 대뜸 성질부터 부리던 정치인 부하들에게, 수없이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여 설명해야 했던 짜증스러운 내 기억과도 상관이 없다.
 
 
 1.
 왼쪽 다리에 간지러움을 느낀 것이 시작이었다. 그때 그녀는 지하철 안에서 서서 맞은 편 자리에 막 앉은 한 임산부를 보고 있었다. 아침 출근길 치고는 그렇게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 앉을 자리를 주지 않을 정도로만 딱 사람이 많았다. 그녀는 전날 점심 회식 때 쇠고기를 너무 많이 먹었고, 그날 저녁에는 스스로 살을 빼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는 그 죄책감에 대한 처벌이 될 정도만큼, 무리하게 동네 공원을 걷고 뛰어다니며 운동을 했다. 그 결과로 그녀는 아침 지하철에서 자리를 딱 채우고 앉아 있는 승객의 인원수에 불운과 불만과 불행을 느낄 만큼, 서 있는 다리가 아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앉아 있는 승객들 중에 곧 일어설 것 같은 사람이 누가 있을 지 열심히 둘러 보았다. 그러던 중, 한 사람이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왼쪽 다리가 유난히 간지럽기 시작했던 것이다.
 
 처음에 그녀는 그냥 간지러운 가보다 했다. 그런데 간지러움이 계속 되었다. 벌레라도 기어 다니는 느낌이었으면 놀라서 톡 털어버리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느낌도 아니었다. 손에 달콤한 과즙이나 음료가 흠뻑 묻었다가 씻지 못하고 말랐을 때, 살갗 위에 남은 설탕 때문에 불쾌한 느낌이 드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그녀는 입고 있는 옷의 올이 나갔다거나 잘못 접힌 부분이 있어서 거기가 간지러운 것인가 생각하고 손으로 한 번 더듬고 당겨 보기도 했다. 옷이 문제는 아니었다. 그녀는 이상하다 싶어서 고개를 숙여 다리를 보았다.
 
 그런데 그때 간지러운 느낌이 사라졌다. 그녀는 주름진 옷이 펴지면서 이제 간지럽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 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역시 지하철 자리에 앉아서 가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녀는 앉는 것을 포기하고 전화를 꺼내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연예인들이 나와서 서로 실없는 농담을 하는 TV쇼를 보내면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거나, 스스로 직접 실없는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된다. 빠져 들어 보는 사이에 지하철이 도착할 거라고 그녀는 생각 했다. 그녀는 전화를 꺼냈고, 전화기에 잠시 기다려 달라는 뱅글뱅글 도는 모양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 뱅글뱅글 도는 모양을 가만히 쳐다 보는 것이 싫어서 그녀는 고개를 들어서 다시 주변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 맞은 편에 앉은 임산부가 다시 들어 왔다. 그녀의 다리가 다시 간지럽기 시작했다.
 
 계속 간지러웠다. 그녀는 다리에 신경을 쓰고, 몇 번 긁고, 고개를 숙였다가 들고를 그녀는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에 그녀는 다리의 간지러움이 잠시 나타났다가, 또 갑자기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옷이 접혀 있거나, 다리에 뭐가 묻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알 지 못할 어떤 것이 그녀와 함께 있어서 그게 스스로 잠시 다리를 간질이다가, 또 가만히 두다가 하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옷자락 안에 벌레가 들어 갔나, 싶어 흠칫 놀라면서 움직인다. 그녀는 소리를 크게 지르며 팔다리를 휘저으려던 찰나, 멈춘다. 정말로 뭔가가 붙어 있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자세히 쳐다 보니 다시 간지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인가에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을 가진 것이 그녀를 간지럽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다시 반대편 자리의 임산부를 본다. 한 눈에 보기에 임산부처럼 보였다. 부른 배에 임산부들이 좋아할 법한 조용한 색깔의 옷에, 최근에 붙은 듯한 말랑말랑한 살결도 임산부 같았다. 그녀는 임산부가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녀는 양쪽 다리가 모두 간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때 바로 저 임산부가 간지러운 이유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잠시 후, 그녀는 얼토당토 않은 생각을 한다고 스스로 느끼고 멈춘다. 그런데 한 번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온몸 이곳 저곳이 근질근질한 느낌이 들었다. 온몸에 푹 땀에 절도록 운동을 할 때 땀에 달라 붙은 옷감 중 한 곳에서 유난히 콕 찌르듯 간지럽게 느껴지는 것이 몸 이곳 저곳에 생기는 것이었다. 그녀는 온몸에서 땀이 나는 것 같은 느낌을 느낀다. 몸 이곳 저곳 굽혀진 관절의 주름과 옷이 조이고 몸무게가 실리는 구석구석마다 간지럽다는 느낌이 지나간다.
 
 그녀는 임산부를 똑바로 보았다. 임산부는 그녀가 자신을 보는 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임산부는 두꺼운 검은 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 안경 때문에 안경을 걸치고 있는 코가 정중앙을 표시라도 하는 것처럼 뾰족해 보였다.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지만 무슨 음악을 듣는 지 음악에 맞춰서 잠깐씩 웃는 얼굴이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 임산부가 내뿜고 있는 어떤 이상한 것이 그녀를 간지럽게 한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의 피부에 닿으면 피부를 간지럽게 하는 보라색 독가스 같은 것이 있는데, 그런 것이 그 임산부의 배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뿜어져 나와서 그녀를 온통 휘감고 있는 듯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마침내 그녀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 지하철 옆 칸으로 갔다. 그때 그녀는 이상하게도 지하철 안에서 듣기 싫은 이야기를 전화로 떠드는 옆 사람을 피해서 자리를 옮기는 기분이 들었다. 전혀 그럴 상황은 아니었는데도, 그녀는 전화로 몰래 성적을 속인 아이를 하나하나 몰아가며 거짓말 하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밝히면서 화를 내는 어머니가 곁에 있을 때, 꼭 내가 그 거짓말을 한 난처한 아이가 된 기분이 드는 것과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마지막 순간 그녀는 어떤 괴물의 손 같은 것이 갑자기 불쑥 튀어 나와 잠시 그녀의 다리를 붙잡는 것 같은 느낌 마저 들었다. 심지어 발목에 축축하고 끈적끈적하며 한편으로는 울퉁불퉁한 부분이 딱딱하게 옥죄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옆자리로 자리를 옮기고 나니, 더 이상 간지럽지가 않았다.
 
 
 2.
 직장이 있는 빌딩에 도착한 그녀는 이후에도 잠깐씩 간지러움을 느꼈다. 그 임산부 앞에 있을 때처럼 계속 이어지면서 심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득문득 몸 이쪽저쪽이 간질거린다든가, 목덜미나 종아리에 미끈한 손길 같은 것이 아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이 있었다. 그녀는 왜 이러나 싶어 걱정을 하면서, 가끔씩은 흠칫 흠칫 놀라기도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 갈 때, 그녀는 이 빌딩을 처음 방문한 다른 회사의 남녀가 그녀를 아래 위로 빠르게 훑어 보는 것을 보았다. 그녀를 쳐다보는 두 남녀의 눈빛은,
 
 '이 회사는 이 정도 용모를 가진 여자가 직원으로 있을만한 곳이구나.'
 
 라고 어림하고는 스스로의 태도를 정비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는 중에 갑자기 이상한 감촉이 몸을 잠깐 지치고 지나가자, 그녀는 그 두 사람이 갑자기 자기에게 달려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몸을 움찔 하였다.
 
 그나마 본격적으로 일을 하고 있을 때에는 감촉이 이상한 것을 자주 느끼지는 않았다. 그녀에게는 22개의 도표로 되어 있는 영업 전망 예상 보고 자료를 2분 내에 설명할 수 있는 한 장의 슬라이드로 정리해 보라는 일이 주어져 있었다. 벌써 사흘째 붙잡고 있던 일이었기 때문에 일을 하려 들고 나니, 이곳 저곳 조금 간지러운 것 정도는 느낄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곧 다시 이상한 감촉을 선명하게 느끼는 때가 있었다. 슬라이드에 들어갈 두 번째 표를 편집하라고 시킨 김희정 대리를 불렀을 때였다.
 
 "어제 하라고 한 것 다 됐어요?"
 "아직 다는 안 됐는데요... 어..."
 
 김희정 대리는 쓰고 있는 컴퓨터 화면에서 만들고 있던 표를 꺼내서 보여 준다. 표는 10행 4열. 그녀의 눈에 그 표는 심하게 투박하면서 한편으로 너무 요란해 보인다.
 
 "이거 글자체부터 좀 바꿔야겠네. 글자체를 일단 원래 자료에 있는 것처럼 바꿔 보세요."
 
 김희정 대리는 시킨 대로 글자체를 바꾼다. 그랬더니 폭이 달라져서 줄 바꿈이 바뀌고 전체 표의 크기도 바뀌게 된다.
 
 "표 크기는 아까 크기대로 조정하고."
 
 그러나 그렇게 해 놓고 봐도 볼품 없기는 매한가지다.
 
 "진하게."
 
 김희정 대리는 그녀의 말을 듣고 글자에 "진하게" 속성을 집어 넣는다. "진하게"로 속성을 바꾸자 글자의 폭이 조금 커지면서 다시 줄이 바뀐 부분이 생기고, 표의 전체 크기가 또 바뀐다. 김희정 대리는 다시 표의 크기를 조정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녀의 눈에는 표가 조금도 마음에 들지 않게 보인다. 그녀는 김희정 대리에게 표의 모양을 알아서 좀 보기 좋게 바꿔 보라고 한다. 그녀는 참고하고 고쳐 보라고 지금까지 경영진 보고용으로 만들었던 슬라이드의 여러 표들을 보여 준다. 30분 정도가 지나서 김희정 대리는 예산 기획 보고 자료의 표 하나와 똑같은 글자체와 색깔로 꾸민 모양으로 표를 만들어 보여 주었다.
 
 그녀는 말한다.
 
 "이건, 그때 그 슬라이드에는 어울리는데, 이번 슬라이드에는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 눈에 안들어올 것 같잖아요."
 
 김희정 대리는 다시 글자체와 색깔을 바꿔 보고, 그녀는 다시 아무런 개선이 없는 모습에 바꿔 보라고 한다. 그녀는 조금 답답하다는 듯이 딱딱하게 따지면서 김희정 대리에게 다시 고쳐 보라고 하기도 하고, 조금 어이가 없어서 웃지만 또한 타이르듯이 웃으면서 다시 해오라고 하기도 한다. 김희정 대리는 몇 번을 다시 해 오지만, 싫어서 억지로 한 듯이 보인다. 이미 있는 자료를 10행 4열로 고치고 글자체와 크기를 바꾼 것뿐인데도, 그녀는 그 속에서 마치 김희정 대리가,
 
 "네가 시키는 대로 그대로 다 했어. 이게 이상하게 보이면 그건 네 책임이야."
 
 라고 따지는 말이 쓰여 있는 것처럼 읽혔다.
 
 그녀는 마음 속으로 김희정 대리가,
 
 "어떻게 이런 거 같은 정말 작은 쓸데 없는 일로 이렇게 사람을 이렇게 괴롭혀요?"
 
 하고 싫어하며 따지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녀는 그런 말을 들으면,
 
 "희정 대리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나는 나대로 이렇게 간단한 일도 쉽게 안돼서 이렇게 내가 계속 신경쓰는게 또 얼마나 피곤하고 힘들겠냐고."
 
 하고 말하면서 따져 보겠다는 상상도 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한다. 어차피 김희정 대리가 지금은 마음에 들 수 있게 하는 일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일에 신경쓰는 덕택에 아침부터 이상하게 여겨지던 감촉을 잘 모르게 되는 것이 좋기도 하니, 아예 일을 더 맡아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희정 대리가 기분이 나쁘지 않을 정도로 길이를 조정하여 짧게 한숨을 쉬고는,
 
 "야, 아니다. 그냥 이거 내가 할께. 희정 대리는 그냥 다른 거 해."
 
 하고는 직접 표까지 편집하기로 한다.
 
 "예..."
 
 김희정 대리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 "예-"하는 발음은 필요 이상으로 길게 이어지는 것처럼 들린다.
 
 그녀는 다시 자신의 화면을 보고 이제는 보고 슬라이드와 거기에 들어갈 표를 함께 편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옆자리의 김희정 대리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희정 대리는 복도, 휴게실 쪽으로 갔다. 그녀는 김희정 대리의 모습을 흘깃 넘겨다 본다. 유리문 뒤에 김희정 대리가 평소 자주 어울리는 다른 대리, 사원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모습을 본다.
 
 "걔 진짜 이상해. 진짜 아무것도 아닌 표 하나 가지고. 그걸 키웠다가 줄였다가 글자체를 뭐로 해라 그랬다가 원래대로 돌려라 그랬다가. 그걸 몇 시간을 그러고 있는다니까."
 
 그녀는 김희정 대리가 자신에 대해 비난하며 그 부당함에 대해서 다른 직원들과 통탄하는 모습이라고 생각 한다. 입 모양을 보면 예상할 수 있는 몇몇 단어는 과연 그게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잠깐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런 생각을 할 때, 그녀는 다시 살갗 여기 저기에 나타나는 이상한 느낌을 알게 된다. 그냥 간지럽고 말 때도 있고, 어떨 때는 기분 나쁜 것이 붙잡는 것 같을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부드럽고 기분 좋게 쓰다듬는 느낌이 갑자기 있을 때도 있었다.
 
 김희정 대리와 함께 떠들던 농담을 잘하는 한 여직원은 웃으며 말했다.
 
 "걔는 자기 스트레스를 너한테 푸는 거야. 딴 거 없어. 걔가 남자를 만나야 돼. 너 걔한테 남자 소개 시켜 줘라. 걔가 남자를 만나야 니가 편해져."
 
 그녀는 자기를 두고 그렇게 농담을 하면서 웃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다시 이상한 감촉을 잊으려고 일만 열심히 해 보려고 했다. 그녀는 표의 첫 번째 글자체를 여든 세 가지로 바꿔가면서 두 시간을 보냈다. 그 두 시간 동안 그녀는 한 단어의 글자체만 계속 온갖 것으로 바꿔 보았을 뿐, 자료의 다른 아무것도 진행하지 못했다.
 
 이상하게 가려운 것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그녀는 점심시간에 병원에 가 보기로 했다. 피부과 의사는 몇 가지 질문을 하고 그녀의 팔과 손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의사는 다시 계속 질문을 하다가,
 
 "혹시 무슨 약 드시는 거나 특별히 피부 때문에 바르시는 것 있으세요?"
 
 하고 물었다.
 
 "제가 간이 좀 안좋은편이라서 간 약을 처방 받아서 먹는 게 있기는 한데.... 가려움증이나 뭐 그런 부작용을 들어 본 적은 없는데요."
 
 그녀가 답했다. 의사는 잠시 컴퓨터로 이것저것 조회를 해보더니, 잠시 생각을 했다.
 
 "간이 원래 안좋으셨어요?"
 "간이 원래 조금 안좋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회사 다니다 보니까, 술자리 같은 데가 많아서 몇 년 있다 보니까 간이 확 나빠졌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올해부터는 술도 좀 조심하고 약도 먹고 있고 그렇거든요."
 "음... 그러시면. 이게 확실하지는 않은데 일단 제가 보기에 피부 자체가 무슨 이상이 있거나 다른 알레르기가 있거나 하신 건 아닌 거 같아요. 술 때문에 간이 나빠지신 것 같으면... 그게 약하게 알코올 중독으로 상했다고도 생각할 수도 있는 거니까. 알코올 중독으로 신경 이상이 오면 이유 없이 어디가 간지럽거나 뜨겁거나 차갑거나 냄새가 이상하게 느껴진다거나 이럴 수가 있거든요."
 "예..."
 "큰 병원 한 번 가보셔서 정확하게 한 번 확인해 보셔야 될 것 같은데요. 뭐 지금 증세로 봐서는 특별히 피부가 갑자기 안좋아질 기미가 있다거나 하신 건 아닙니다. 지금 환자분께서 피부가 원래부터 좋으시고 나이에 비해서 관리도 참 잘하신 편이기도 하고요."
 
 그녀는 잠깐 오후에 휴가 낼 수 있는 한가할 때가 찾아오면 그 때 종합병원에 한 번 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그날 오후 동안 잠깐씩 찾아 오는 이상한 감촉은 계속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한 손길이 닿는 듯한 느낌은 점점 더 선명해지는 듯 하기도 했다. 알 수 없는 느낌에 끈적거리는 감촉이 무척 기분 나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몸을 긁거나 그 감촉이 지나가는 것을 느끼고 있으면, 간지러운 곳을 긁는 것이 시원해서 기분 좋게 긁다가 피가 흐르는 듯한 즐거운 느낌도 남는 듯 했다. 아무래도 정도가 심하다고 생각한 그녀는 퇴근할 때가 되어서는 이번 주말에 당장 시간을 내어 병원에 가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먹는 약의 처방을 바꾸거나, 다른 약을 하나 정도 더 먹으면 되는 별 대단한 일은 아닐 거라고 짐작하며 안심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퇴근길 지하철에서 그녀는 그 안심을 위협하는 다른 일을 겪게 된다. 그녀는 지하철에서 아침에 보았던 바로 그 임산부를 다시 마주쳤던 것이다.
 
 그녀가 임산부 앞에 서자, 이번에는 입안 가득히 핏물을 꿀꺽꿀꺽 삼키는 듯한 비릿한 맛과 달콤한 음식이 지나가는 느낌이 차 올랐다.
 
 
 3.
 그녀는 놀랐지만, 아침에 이상한 감촉을 느끼고 하루 종일 시달리기도 했기에 이번에는 도망치지는 않았다. 일단 가만히 있어 보기로 했다. 그녀는 혀 위로 와 닿아 내리는 맛을 느꼈다. 분명히 그녀는 아무것도 먹고 있지 않았지만 그 맛은 달콤하고 바삭바삭 씹혀서 담백하게 와 닿는다는 먹는 감각도 같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 느낌은 그런 거 먹으면 살찐다고 애써 피하던 달고 기름진 과자나 빵 같은 맛이었다. 그런데 그런 맛을 느끼다가 침과 함께 목으로 삼키려고 할 때는 그 좋은 맛과 함께 기분 나쁘게 비리고 눅눅한 역겨운 맛이 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바로 그 역겨운 맛에 놀랄 때에, 그녀는 그녀의 몸에 물을 끼얹듯이 빠르게 간지러운 느낌이 지나가고, 또한 그녀를 휘감아 안듯이 그 손길 같은 느낌이 스쳐 지나가는 것도 느껴졌다. 입안을 지나가는 그 맛과 살을 스치는 그 감촉은 아침때 처럼 어떤 연기나 빛, 열기 같은 것이 피어 올라 몸을 싸고 돌면서 퍼져 오는 듯 했다. 그리고 그녀는 눈을 돌려, 바로 그 싸고 돌면서 퍼져 나오는 근원이 임산부 쪽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그 임산부를 쳐다 보았다. 얼굴 피부 빛은 짙은 화장을 해서 아주 하얗게 보였지만, 눈과 입술에는 거의 화장이 없어 보였다. 그러면서 머리카락의 모양은 대충 핀으로 고정한 모양이 그녀 자신과는 다르게 보였다. 그녀는, 그 임산부가 쓰고 있는 커다란 굵은 테의 지나치게 큰 안경이 어떤 표지판 같다는 생각도 잠깐 느낀다.
 
 "나는 예쁘게 하는 건 포기했지만, 그래도 신기한 모양을 대담하게 따라 하는 아이디어가 있어서, 어떻게든 확실히 꾸미고는 있으니까 함부로 무시하면 안돼."
 
 그러나 곧 그녀는 그 안경이 그런 뜻의 표지판이라고 여긴다. 그러다가 곧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 것이 오만하다고 반성한다. 그녀는 비슷한 지하철의 비슷한 위치에서 벌써 십몇년 전에 대학시절 한 친구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기억 한다.
 
 "너는 사람이 키가 크고 또 옆에서 보면 고개를 딱 바로 들고 있어. 그리고 서 있으면 이 옷 선이 딱딱 맞춰 내려 오는 게 정말 무슨 자로 그린 것처럼 딱 맞는단 말이야. 그래서 보면 그냥 보통 사람 같지가 않고 꼭 뭐 같아 보여. 그러니까. 멀리서 힐끗힐끗 쳐다는 봐도 함부로 가까이 못 갈 것 같은 그런 어... '품위' 같은 게 있어."
 
 몇 년 며칠이었는 지 기억도 나지 않는 한 번 들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말을 한 번 들은 후에, 그녀는 졸업을 하고 직장을 다니고 삶을 사는 동안 그 동안 이 말을 몇 번, 몇 십 번이나 되새기면서 돌이켜 왔다. 다른 사람 앞에 설 때, 낯선 곳을 갈 때, 처음 누군가를 만날 때. 그때 그때 마다 그랬던 듯 하다. 하지만 그녀는 요즘 세월이 갈 수록 점점 그런 느낌을 주는 대상이 줄어 들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째 그 말은 잠시 그녀의 한 친구가 그녀를 추켜 올려 세워 주기 위해서 기분 좋으라고 해준 소리가 아니었나 두렵게 의심하기도 하고 있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임산부는 그녀와는 달리 그녀 쪽을 제대로 한 번 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저 그냥 조금 피곤하고 조금 세상 일에 치여 걱정하는 기색이 있는 약간 힘든 표정을 짓고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임산부의 그 힘든 표정에 남아 있는 다른 기색을 그녀는 느낀다. 힘든 표정이라고 했지만, 그 힘들다는 것이, 대통령이나 거대기업의 회장 같은 사람이,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강제노역을 하는 죄수가 물집이 잡힌 손을 보며 흙먼지 바닥에 주저 앉아 "힘들다"라고 한숨을 쉬는 것과 같은 힘들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렇게 느꼈다.
 
 그녀는 다시 목구멍으로 맛 좋은 음식과 더러운 불결한 맛이 함께 넘어 가는 것을 느낀다. 그녀는 분명히 무슨 상관이라도 상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임산부를 쳐다보고, 산달을 맞은 듯한 임산부의 배가 숨을 쉬는데 따라서 움직이는 모양을 본다. 그 움직임을 그녀가 알아 볼 때 마다, 온몸을 만지는 감촉과 입안을 달게 채우는 맛이 점점 더 커진다고 느낀다.
 
 혼란스러워하는 사이에 지하철은 도착하고 뒤섞여 내리는 복잡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는 임산부와 멀어진다. 그녀는 그날 저녁 내내 간지러움도, 알 수 없는 맛도 계속 느끼게 된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그녀는 침대에 누운 그녀에게 아기와 같은 조그마한 악마들이 달라 붙어 있는 꿈을 꾼다. 그녀에게 달라 붙은 여러 악마들은 저마다 미끈한 비늘과 끈적거리는 손으로 그녀의 팔다리에 달라 붙어 점점 배와 가슴으로 기어 올랐다. 악마들은 뱀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그녀의 얼굴로 손을 뻗었고, 마침내 그녀의 입을 열어 그녀의 혀와 입 속에 손을 넣으려고 했다.
 
 
 4.
 잠에서 깬 그녀는 새벽에 다시 잠을 이루려고 하지만 쉽지가 않았다. 그녀는 벌써부터 잠을 자지 못하면 내일 아침에 너무 피곤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떻게든 빨리 자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아침의 피곤을 걱정하면 걱정할 수록 그녀는 두려움이 생긴다. 생각이 거침 없이 멀리 뻗어 나갔다. 그저 휴일이 되어 이 그늘진 좁은 잠자리에서 조금 더 잠을 자게 되는 것만 유난한 쾌락으로 기대하면서, 하루하루 이렇게 혼자 살다가 곧 이 철근 콘크리트 속의 삶대로 그대로 끝을 맺게 되는 것 아닐까. 그녀는 다시 몸에 닿는 감촉과 혀에 오는 맛을 느낀다. 그녀는 갑자기 꿈 속의 무서운 장면이 그대로 나타난 것은 아닌가 두려워한다. 잠에 다시 드는 것은 더 멀어 졌다.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그녀는 그 임산부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다행히 지하철을 탔을 때 그녀는 이번에는 임산부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여전히 가끔 느껴지는 이상한 촉감과 맛에 놀라면서도 안심하고 가만히 서서 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 앞에 앉아 있던 두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 서더니,
 
 "여기는 임산부 자리 잖아. 우리가 비켜 줘야지."
 "야, 내가 영감인데 뭘 또 누구한테 비켜줘."
 "야, 너 왜 이렇게 무식하냐. 여기 임산부 자리라고 표시 있잖아. 이거 너 모르냐? 저기 노약자석 비었으니까, 저기로 가면 되잖아."
 "그런게 있어?"
 
 하고는 누군가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면서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그녀의 앞에 다시 앉는 것은 바로 그 임산부였다.
 
 오늘은 사람이 많아서 사람들이 지하철 객차 안에 꽉 차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리를 피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녀는 그 임산부 앞에 서 있어야만 했다. 그녀는 다른 곳을 보려고 고개를 돌리다가, 그녀를 이끌듯이 다시 쏟아지는 촉감과 맛에 임산부를 돌아 본다. 그녀는 임산부의 배가 무척 크게 불러 있다는 생각을 했다. 보통보다 훨씬 큰 아기이거나, 어쩌면 쌍둥이 일지도 모른다. 뭔가 잘못 되었을 지도 모른다. 잘못 되었을 거다.
 
 그리고 그녀는 분명히 그 임산부가 갖고 있는 무엇인가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느꼈다. 이제는 냄새가 났던 것이다. 정말 무슨 연기가 피어 오르듯이 그 임산부의 배 쪽으로부터 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지긋이 눈을 감게 만드는 향수 같기도 했고, 숨을 크게 들이 쉬며 느껴질 때는 독한 술에 취했을 때 풍기는 술 냄새 같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 냄새를 가진 이상한 것이 퍼져 나와서 그녀의 몸에 닿아 살갗을 건드리고, 입안으로 들어와 혀에 녹는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뭐가 어떻게 되어서 이런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그 임산부가 뭔가 잘못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하루 종일 그 냄새는 코 끝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머리가 아프고 정신이 몽롱하고, 과연 새벽에 괴로워했던 것만큼 피곤하다는 생각에 오전 내내 일을 하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 커피를 사러 건물 밖으로 잠깐 나갔다.
 
 커피 가게의 점원은 다른 커피를 챙겨 주고, 급히 그릇들을 정리하느라 계산대 앞에 있는 그녀를 한참 서 있게 했다. 그녀는 커피 가게 점원에게 화를 냈다.
 
 "제가 전에도 한 번 뭐라 그랬던 적 있죠? 사람이 오면 일단 한 번 봐야 되는 거고. 보고 나면 그렇게 그냥 계속 쳐다 보고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뭐 주문을 하라든가, 뭘 시키라든가 말을 해야 될 거 아녜요?"
 
 그녀는 점원이 자신을 계속 무시한다는 생각을 했고, 또한 요즘 계속 이곳 저곳에서 억울한 일을 지나치게 많이 당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그렇게 산 커피를 한참 만에 입으로 가져 갔을 때, 문득 커피에서 바로 아침에 느꼈던 그 향수 냄새 같은 것이 확 피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팔목을 붙잡는 손아귀의 느낌과 입안으로 쏟아지는 역한 맛도 느꼈다. 그녀는 놀라서 잠깐 떨었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커피를 마시지 못하겠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린다. 커피 가게의 점원은 쓰레기통에 커피를 버리는 그녀를 계속 쳐다 보았다.
 
 오후에 그녀는 오늘 저녁 회식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부하 직원을 불러다가 충고를 해주려고 했다. 그녀는,
 
 "잠깐 차나 한 잔 하고 일 계속 할까?"
 
 하고 말하고, 이인영 사원을 불러다가 몇 가지 해줘야겠다 싶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인영 사원은 대체로 "예" "예, 알겠습니다" 말고는 다른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한 마디 한 마디 마다 그때 그때 갑자기 풍겨오는 냄새가 있거나 입안에 문득 이상한 맛이 느껴지거나 해서 그녀는 도무지 생각했던 대로 편안하고도 분명히 생각을 심어 줄 만큼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고 생각 했다.
 
 일이 끝나고 저녁 때는 팀 사람들끼리 회식이 있었다. 신입사원으로 여직원이 둘 들어오면서 여자 직원들이 좀 생겼는데, 그게 이유인지, 그녀가 보기에 이날의 회식은 한 가지 형식으로 되어 있는 정형시 같은 대화로 가득차 있는 시간이었다. 남자 직원이나 상사들이 여직원에게 농담을 던지거나 재치 있다고 생각한 말로 놀리는 이야기를 하면, 여직원들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것으로 그때 그때 버텨 주면서,
 
 "아- 부장님, 아니에요."
 "에이. 과장님, 아닙니다."
 
 라고 계속 말을 하는 것이 상대를 바꿔 가며 끊임 없이 반복되는 것이었다.
 
 그녀 역시 한 편으로는 그 중에 한 사람이 되어 웃으면서, 이게 무슨 피곤한 짓인가 하고 생각 했고, 착하고 성실하고 인정 많기로 유명한 정부장이,
 
 "경숙씨, 경숙씨는 술을 하나도 못하나? 경숙씨는 치사량이 얼마야?"
 
 라고 물었을 때, 술을 많이 먹어서 쓰러질 정도가 되는 양을 "치사량"이라고 불렀다는 점을 웃긴 것으로 인정하여 다같이 웃어야 하는 것을 볼 때는, 이게 무슨 불쌍한 짓인가 하고 생각하면서도 같이 웃었다.
 
 조차장은,
 
 "경숙씨, 술도 자꾸 이렇게 마시다 보면, 술도 점점 갈고 닦아 지면서 술이 느는 거야."
 
 라고 했다. 그리고 조차장은 그녀를 가리키며, 그녀 또한 처음에 입사 했을 때는 술을 한 방울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는데, 지금 그녀는 "여기서 계속 트레이닝 받은 끝에 우리 중에서 제일 세다"면서 과장해서 말했다. 그리고 조차장은 그녀에게 한 잔 술을 가득 따라 주었다.
 
 그녀는 그 술잔을 물리치기 위해,
 
 "부장님, 부장님은 과장에서 부장 되신 지가 언젠데 뭘 그렇게 과장해서 말하세요. 과장은 과장일 때 하셨어야지."
 
 따위의 농담을 지어내어 답해야 했는데, 그리고 나니 잠깐 시끄러운 소리에 몰랐던 온갖 더러운 손길과 맛과 냄새가 취한 기색처럼 빙빙 돌고 지나 가는 듯 하였다. 그때 그녀는 꿈속에서 보았던 조그마한 악마들이 정말로 나타나서 온통 몸을 기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날 자리는 경리사원이 먼저 일어 나겠다고 하면서 점차 마무리 되기 시작했다.
 
 "이게, 옛날에 70년대 80년대 풍습이야. 옛날에야 고기 이런 거 한 점 먹기가 어려우니까, 회사에서 공짜로 고기 사주고 술 사준다고 하면 일단 맛있는 거 먹으러 간다고 기분 좋아서 다같이 웃으면서 따라가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재미 없어도 먹는 재미에 있고 그랬지. 요즘 뭐 누가 고기 못 먹어서 그렇게 안달 난 사람이 누가 있어.
 
 이게 사람들 소득수준은 빨리 확 올라갔는데, 회사 문화 이런 게 바뀌는 속도는 느리니까. 그래서 회식자리가 이렇게 재미 없는 것 같애. 옛날부터 그랬다... 전에는 이랬는데... 하는 생각에 문화라는 건 빨리 안바뀌는 거 같거든. 요즘 이거 고기 몇 점 구워 주고 소주 따라 주면서 이렇게 몇 시간씩 붙잡고 있으면 젊은 사람들이 누가 좋아해."
 "야, 그러지 말고 조금만 있다 가라. 금희씨가 있어야 우리 팀은 다같이 이렇게 치어럽 된다고."
 
 고졸 경리직으로 시작한 까닭에 "금희씨"는 그녀 보다 회사에는 몇 년 더 먼저 들어 왔지만 직급은 그녀 보다도 한참 더 아래였다. 금희씨는 말리는 사람 몇몇을 뿌리치고 일어 섰다. 4년 전에 결혼한 금희씨는 작년에 둘째를 낳았고, 그래서 지금 빨리 안들어 가면 아무도 애 봐줄 사람이 없다고 했다. 금희씨가 가게 되자, 아닌 게 아니라 "치어럽"도 되지 않는 것인지 뭔지, 점차 술자리도 시들해지면서 얼마지 않아 다들 흩어져 돌아가는 길이 되었다.
 
 발갛게 된 얼굴을 거울에서 몇 번 쳐다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녀는 다시 그 임산부를 만날 것 같아 겁을 내게 되었다. 그녀는 임산부를 만나면 피해갈 것이라고 생각 했다. 그녀는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고 모퉁이를 돌 때마다 그 임산부와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했으며, 그 임산부와 비슷한 옷차림이나 뒷모습의 다른 사람들을 겁내며 천천히 움직이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지하철에 타자 그 임산부는 어김 없이 그녀의 맞은 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 임산부를 피하기로 하고, 지하철이 출발하기도 전에 바로 임산부를 지나서 지하철 옆 칸으로 옮겨 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녀가 그 임산부 쪽에 가장 가까이 갔을 때 그녀는 문득 이런 소리를 듣게 된다. 그 목소리는 어린 아이가 귀아프게 우는 소리 같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병들고 쉰 목소리이기도 했다.
 
 "악마가 나온다."
 
 그녀는 겁을 먹고 더 발걸음을 빨리 해서 움직인다. 하지만 귓가에 그 말을 쟁쟁하게 울린다.
 
 "이제 곧 악마가 내려 온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눈을 질끈 감는다. 잠시 그러고 있으니 귀가 멍멍하게 울리는 것을 빼고는 지하철의 잡다한 소음만 들릴 뿐이었다. 열차가 움직이는 소리, 누군가 누구에게 병원 갔다 왔냐고 전화로 묻는 소리, 문 옆에 선 두 사람이 이름을 짓는 것에 대해 대화하는 소리, 자리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 영어조기교육에 대해 논쟁하는 소리. 그런 것들 외에 별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다시 들어 멀리 그 임산부를 바라 본다. 그 임산부의 커다란 배에서 분명히 그 이상한 냄새와 이상한 손길과 맛이 피어 오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다시 그 소리가 훨씬 더 크게 귀가 아프도록 들렸다.
 
 "악마가 내려 온다. 악마가 내려 온다. 악마가 내려 온다."
 
 그녀는 지하철에서 도착하려면 몇 정거장 남았지만 지하철에서 내려 버리려고 한다. 소리는 쉬지 않고 들린다.
 
 그 소리를 지하철 문이 열리는 소리가 잠시 가르고, 그녀는 마침내 지하철에서 나서려고 한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용기를 낸다. 그녀는 그 임산부에게 무슨 말 한 마디라도 물어 보고 도대체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것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돌아서 다시 그 임산부 쪽으로 다가 간다. 이제 소리는 점점 작아지면서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 임산부 앞에 다시 선다. 귓가에는 작은 속삭이는 목소리로만 "악마가 내려온다"라는 말이 들린다. 그녀는 어떻게 말을 걸 지 고민한다.
 
 "저 죄송한데요, 여기 아파트 사세요?"
 "산부인과는 저기 거기 다니시나요?"
 "시설이나 뭐 그런 건 괜찮아요?"
 "예정일은 언제신데요?"
 
 그녀는 이런 식으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아는 내용을 나누는 것처럼 하면서 물어 보면 자연스럽게 물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렇게 말을 하면서, 혹시 이상한 점이 있는지 살펴 보고, 아니면 이상한 일은 없었는 지 물어 보려고 해 본다.
 
 하지만, 그녀는 막상 그 평범한 임산부의 얼굴 앞에 서자 그 말을 꺼내 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말을 하다 보면, 갑자기 어떻게든 임산부로부터 악마가 그녀 앞에 불쑥 튀어 나와서 징그러운 얼굴로 그녀를 노려볼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망설이기만 하다가 그녀는 내려야 할 역에 도착했고, 그녀와 임산부는 같이 내렸다. 그녀는 멀리서 임산부를 따라갔고, 임산부가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뒷모습만 보면서 한참 임산부를 따라가고 나니, 막상 엘리베이터 앞에서 임산부가 돌아 서려고 할 때, 그 얼굴과 마주치면 아주 무서운 무엇인가를 볼 것만 같아서, 그녀는 임산부가 돌아 서서 그녀를 보기 직전에 그대로 뒤돌아서서 도망쳐 버렸다.
 
 
 5.
 그날 밤에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을 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스물거리는 피부의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고, 희미한 향기와 알 수 없는 단 맛은 입에 계속 남아 있었다. 귀에서는 가끔씩,
 
 "악마가, 이제, 내려온다."
 
 같은 말이 툭툭 짧은 희미한 신음처럼 들렸다.
 
 그녀는 두려움을 잊기 위해 불을 켜두고 코미디 텔레비전 쇼를 틀어 두고 침대에 누워 있다. 그렇지만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깔깔거리는 웃음 소리들 사이에서 소음처럼 악마가 내려온다는 말이 끼어 들어 자꾸 들리는 것 같았다. 어떨 때는 울고 싶어질 것 같이 팔다리를 붙잡아 당기다가 입으로 어떤 것을 꾸역꾸역 집어 넣는 느낌이 나는 듯도 했다.
 
 그녀는 밤새 그러고 있었다. 어렴풋이 잠이 들었는 지, 두통 속에서 깨어 있었는지, 그녀는 눈앞에 그녀 주변의 많은 사람이 모여 들어 광희로 가득한 축제를 벌이는 모습이 보이는 듯도 했다. 춤을 추며 같이 소리치는 그 사람들은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기도 하고, 매캐한 연기 냄새와 요란한 음악으로 그녀를 취하게 하기도 하더니 그녀의 입술에 따뜻하고 부드럽게 긴 입맞춤을 하기도 한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모두 드디어 기다린 끝에 악마가 세상에 나오기를 염원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사람들의 기원과 함께 그녀 주변에는 악마의 여러 형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제 보았던 것과 닮은 작은 아기 같은 악마가 기어오는 가 하면, 어깨를 속박하며 뒤에서 나타나는 붉은 색의 악마도 보인다. 이가 뾰족하고 길게 올라간 입 꼬리가 사나운 웃는 악마가 나타나는가 하면, 불꽃 속에서 타오르면서 고통 속에서 외쳐대는 시끄러운 악마도 나타난다. 수십 가지, 수백 가지의 악마들이 희미한 안개처럼 계속해서 그녀의 앞에서 어른거리다가 사라졌고, 그녀는 계속해서 자리에서 뒤척이며 밤을 보낸다.
 
 그녀는 새벽녘이 밝아 올 때가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이른 시각이었지만 바깥에서 소란한 기색이 들려 왔다. 그녀는 커튼을 모두 열어 햇살이 최대한 집안으로 들어 오게 하려고 했다. 활기찬 기색을 안간힘을 내어 흉내 내는 아침 방송의 아나운서들이 나오는 방송으로 TV 채널을 돌리고 소리도 좀 더 키워 보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창 밖에서 그 임산부가 검은 뒷모습을 갖고 있는 가족들과 함께 힘겨운 발걸음으로 바삐 나서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가슴이 텅 비어버리는 것 같이 되어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이번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녀 스스로 되뇌게 된다.
 
 '악마가 이제 내려온다."
 
 그녀는 어디로 도망치던지, 어떻게 누구에게 알리든지 해야겠다고 생각 했다. 그녀는 전화기를 들고 전화번호 목록을 이리저리 뒤지면서 고민 한다. 그녀는 오랫동안 연락해 보지 않던 전화번호 하나 위에서 한 동안 멈춰 본다. 그러다가 그녀는 경찰에라도 말해 보겠다고 한다. 그녀는 전화번호를 누른다. 짧은 번호였지만 손이 떨려서 오래 걸린다. 그녀는 전화기에 대고 그녀가 어디에 있으며 그녀가 누구인지 이야기하고, 말할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렇지만 말을 시작하려고 몇 번 시도할 때마다 그녀는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 지 모르게 된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본다. 임산부를 태운 검은 차가 떠나가는 것을 본다. 그녀는 눈이 붉어지며 어째 눈물이 가득해진 눈으로 소리를 질러 본다. 그녀는 차에 타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은 알 수 없이 그 검은 뒷모습만 보지만, 차에 타기 직전 그 임산부가 그녀 쪽을 돌아보고 웃은 것 같았다.
 
 그녀는 밖으로 나간다. 그녀는 재빠른 손으로 단장을 한다. 그녀는 그 어떤 무서운 것이라도 가까이 오지 못할 만큼 그녀에게 잘 어울리던 선이 면도날과 같이 날카로운 정장으로 차려 입는다. 그녀는 어디로 갈 지 몰라서 두리번거리는 때가 있었지만 또한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계속해서 걷는다. 그녀는 어느 외진 병원으로 오고, 병원의 출입문과, 소란스러운 사람들과, 복도들과 불빛들을 지나친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어떤 것이 그녀의 어깻죽지를 붙잡고, 입안에 독한 술을 부어 넣고, 또한 아찔한 향기를 가득 피워 올리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녀의 귀에서는 노래처럼 악마가 내려온다는 말이 들려 온다.
 
 그녀는 병원의 한 문 앞에 서서, 그것들을 다같이 참으며 닫힌 문앞에서 한동안 기다린다. 그 닫힌 문 앞에 있던 시간이 얼마나 오래인지는 모른다. 얼마 후, 갑자기 그 모든 것들이 말끔하게 사라진 것을 안다. 그녀는 이제 지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는 얼굴을 볼 수가 없는 한 간호사 한 명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본다. 그녀는 문이 활짝 열리고 복도의 조금 어두운 불빛이 다시 환해 지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녀는 문 안으로 들어 가다가, 열린 문의 정면에 달려 있는 맑은 거울을 본다.
 
 그녀는 그 거울에서, 행복한 무표정으로 복도의 배경을 오가고 있는 많은 어른들과 아이들과, 전경의 그녀 자신의 모습을 본다. 아름다웠던 검은 빛깔의 긴 머리카락이 귀신의 꼴로 길게 늘어져 있는 그 얼굴은 추한 비늘로 뒤 덮여 있는 악마의 형상이었다. 두 손으로 그 얼굴을 감싸고 만지며 눈을 가려 보려고 하지만, 아무리 소리를 질러 봐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 2012년, 여의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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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 No Profile
    밤조심 12.05.08 23:47 댓글 수정 삭제
    이거 재미있는데요? 곽재식 작가님은 이야기에 몰입하게 하는 재주가 있으시네요. 마지막에는 여주인공이 처녀귀신으로 변하는 건가요? 불쌍해ㅠㅠ
  • No Profile
    곽재식 12.05.09 11:59 댓글 수정 삭제
    밤조심/ 관심 감사합니다.

    신비로운 분위기로 가려고 지나치게 생략이 많아서 내용이 좀 덜드러난 면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는 알콜 중독 때문에, 환각, 환청을 느끼는 주인공이 점점 악마가 내려올 거라는 불길한 느낌에 시달리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정말로 주인공이 악마로 변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주인공의 환각, 환청이 극히 심해져서 이제 자기가 가장 혐오하는 사람이 - 그러니까 여기서는 자기 자신 - 악마/처녀귀신의 모습으로 보이게 된 것일 수 있다... 는게 제가 표현하려고 해 본 줄거리였습니다.

    이 역시 부족한 서술 속에서 너무 메마른 분위기로 가다보니까 전달이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더 노력해서 좋은 이야기 더 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No Profile
    밤조심 12.05.09 14:54 댓글 수정 삭제
    저는 임산부에 대한 경계와 전통적 여성인 금희씨가 빠지자 시들해진 술자리 등에서, 여주인공의 여성성 혐오? 모성성 혐오? 를 느껴서인지, 처녀귀신이 떠오르더군요. 현대판 처녀귀신의 탄생이랄까요.^^
  • No Profile
    곽재식 12.05.27 10:29 댓글 수정 삭제
    비슷한 종류의 열등감 아닌 열등감도 약간은 암시적으로 상상해 볼 수 있는 여지도 주려고 해보긴 했습니다. 마지막에 거울에서 보는 모양자체는 확실히 전형적으로 "귀신"하면 딱 떠오르는 처녀귀신 스러운 모습을 보는 것일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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