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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콘도르 날개 - 완결편

2008.07.25 22:1707.25

1

결혼 생활이 파탄에 이르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 경우에는 아침에 우유에 말아먹는 옥수수 과자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은숙의 이 말을 그대로 옮길 수 있다.
“내가 시리얼을 우유에 미리부터 말아 놓으면 눅눅해져서 맛없어진다고 했잖아. 어떻게 그걸 또 그러냐. 내 말은 아예 듣질 않지. 듣지를.”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갑자기 온몸이 분노에 휘감겨 불타올라, 마치 「수왕기」의 한 장면처럼, 용으로 변신해서 입으로 불덩이를 토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은숙이 식탁에 앉는 순간까지만 해도, 나는 잠이 덜 깬 상태였다. 어제 귀가가 늦는 은숙을 기다리며 심야 케이블 TV에서 해주는 「콘도르 눈동자와 예언대소동」을 보다가 소파에서 잠들었다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였다.
나는 잠이 덜 깬 눈으로, 출근하려고 옷까지 다 차려 입고 있는 은숙을 보고, 지금이 몇 시냐, 내가 소파에서 왜 잠이 든 건가, 어제 「콘도르 눈동자와 예언대소동」 영화를 보던 것 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는 매일 연락도 없이 귀가가 늦는 은숙이 불만스럽지만, 그러면서도 내색 않고 “은숙이 언제 들어왔어? 벌써 출근 하려고?” 같은 안부의 대사를 하려고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 나에게 아침에 일어나서 보자마자 팍 짜증을 내는 은숙의 그 말이 들려오니, 잠이 확 깨고 정신이 번쩍 들 정도였던 것이다.
아니, 빌어먹을 대체 우유 좀 미리 부어 놓은 것 갖고, 그걸 갖고 또 왜 시비야. 그게 그렇게 중요해서, 어제 밤새도록 자기 기다리다가, 얼굴도 못보고 잠들어서는, 이제야 오늘 아침에 겨우 다시 보는 나한테 할 소리냐고. 뭐, 옥수수 과자 눅눅해지면 누가 죽기를 하나, 아니면 무슨 갑자기 우유 짠 젖소에서 광우병 프리온이 튀어 나와서 인류를 멸망시키기를 하나. 왜 그따위 사소하디 사소하여 사소하다고 말할 가치조차 사소할 정도로 사소한 일을 가지고, 아침에 눈뜨자마자 나한테 욕이냐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대체 그 놈의 옥수수 과자가 그렇게 바삭바삭한 게 좋다면, 대체 우유에 말아 먹는 이유는 뭔데? 그냥 생으로 바삭, 바삭, 씹어 먹고, 우유는 컵에 따라서 따로 마시면 되는 거 아냐? 그러면 그야말로 백퍼센트 순수 바삭바삭이지. 우유에 말아 먹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 우유와 과자가 섞여서 뭔가 제3의 효과를 내기를 기대하고 하는 거 아니냔 말이지. 그러면, 그러면 옥수수 과자가 우유에 젖어서 살짝 좀 축축하고 눅눅한 게 진정으로 목표로 하는 바 아니겠냐고.
신기하다면 신기한 것은, 오늘 아침에, 나는 이런 생각들을 입 밖에 내어 말로 떠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사설들을 마치 선거철 일간신문 사설처럼 열 올리며 읊어 댈 수 있었겠으나, 의외로 나는 전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상한 것이, 갑자기 짜증과 울분이 극도로 솟구치다보니까, 그냥 어이가 없을 뿐 이어서, 심지어 맞춤법마저 틀릴 정도로 어의가 없어서 허준도 장금이도 찾을 수 없을 지경으로, 허탈해질 뿐이었다. 나는 그저 대화 자체를 하고 싶지 않았고, 그리하여 그냥 “헛.”하고 픽 웃으며 한 번 은숙의 눈을 쳐다볼 뿐이었다.
내가 은숙의 얼굴을 보고, 딱 남편과 이혼하고 싶게 만들 만한 표정으로 한참 말없이 있자니, 그 짜증부리며 화내는 은숙의 얼굴에서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옛날 비디오 게임 중에 「아웃런」 이라고, 자동차 운전하는 게임이 있었다. 가게에 가면 조이스틱 대신에 핸들과 페달을 달아 놓아서 진짜 자동차 운전하는 기분도 좀 나게 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아웃런」 게임에서 운전을 잘못해서, 거리에 있는 가로수를 들이받아 자동차가 뒤집어지면, 자동차 조수석에 타고 있던 주인공 애인으로 추정되는 아가씨가 주인공에게 손가락질하며 화를 내는 장면이 나온다. 80년대 비디오 게임이라 이 아가씨의 얼굴 표정이나 모습이 정교하게 표현 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목구비도 잘 눈에 들어오지 않고 다만 금발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표현된 것으로, 한 1∼2초 잠깐 화면 구석에 나왔다가 그냥 휙 지나가는 투박한 전자영상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나를 지구에서 두 번째로 짜증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은숙의 얼굴은, (은숙이는 모 정당의 열렬한 지지자이므로, 다른 어떤 정당 정치인 한 명의 모습을 지구상에서 가장 짜증스러워 한다.) 그 얼굴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아웃런」 게임에서 차 뒤집어졌을 때 화내는 아가씨 표정 그대로 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갑자기 그 따위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는데, 정말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대로였다. 심지어, 언젠가 저녁에 나를 유혹할 때, 그녀가 자신의 머리칼을 괜히 내 뺨에 늘어뜨린 뒤에 자신의 숨소리를 내 귀에 들려주면서 머리칼로 내 뺨을 간질일 때, 그때 그녀의 절묘한 갈색 머리카락조차도, 바로 그 「아웃런」에서 조수석에 타고 있는 아가씨의 금발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렇게 말을 하지 않고, 표정만 서로 개같이 하고 있는 시간이 잠시 흘렀다. 물론 여기서, 표정을 개같이 했다는 뜻이, 얼굴 표정을 스누피나 구피처럼 했다거나, 심형래가 「여로」를 패러디 한 코미디에서 땡칠이 흉내를 내는 듯이 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고 나서 은숙은 내가 구제불능이고,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좀 더 덧붙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은숙의 그 일장연설을 마지막으로, 나의 결혼 생활은 장대하게 작살 난 것이다.
결혼 생활이 쪼개지는 것을 거울이 깨진다는 뜻의 ‘파경’이라고 한다고 하면, 오늘 아침의 형국은 이런 것이었다. 금으로 장식되고 루비와 사파이어가 박힌 아름다운 거대한 전신 거울이 웅장한 저택의 복도 끝에 걸려 있다. 나는 그 아름답고 멋진 거울 앞에 가서 거울을 이리저리 보다가, 거울 한 편에 붙은 작은 먼지 하나를 본다. 그리고 그 먼지를 떼어내려고, 손수건을 꺼내서 한쪽 끝으로 살짝 문지른다. 그런데 먼지를 떼려는 손이 닿자마자, 갑자기 우지지직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그 아름답고 커다란 거울이 와장창 깨어져서, 온통 산산조각이 난 뒤에 파편이 눈처럼 사방에 쏟아지는 것이다.
아침에 아내가 보따리 싸서 나가버리자, 나는 망연자실하게 한참 동안이나, 빌어먹을 저주받은 눅눅해진 옥수수 과자가 넘실거리고 있는 우유 그릇 앞에 앉아 있었다. 우유 그릇에는 아내가 먹다가 내던진 숟가락이 손잡이 부분부터 우유 속에 빠져있었다. 잠시 후 정신을 추스른 나는 일단 회사에 출근은 해야 했기에, 나는 아침밥으로 이 빌어먹을 저주받은 눅눅해진 옥수수 과자를 먹기로 했다.
나는 숟가락을 꺼내 손에 잡았다. 우유가 손에 묻어서 좀 끈적한 듯도 싶었다. 숟가락으로 빌어먹을 저주받은 눅눅해진 옥수수 과자를 퍼먹었더니, 내가 먹기에는 맛있기만 했다. 그때 나는, 내 입에 들어온 이 숟가락, 바로 은숙이 먹던 숟가락이라는 생각을 했다. 은숙의 입술과 혀가 닿던 숟가락. 그게 지금 내 입안에 들어와 있구나. 그렇게 은숙의 입안에서 숟가락이 움직이는 모양을 생각하면서 나는 숟가락을 핥았다. 또 잠시간 멍하니 숟가락을 입에 물고 있었는데, 변태가 따로 없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나는 그제야 진정한 제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갑자기 나는 우유 속에 빠져 있는 숟가락을 건져서 우유를 퍼먹는 내 모습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일이 예전에 한 번 또 있었던 것 같았던 것이다. 아주 전형적인 기시감이었다. 전생에 내가 이런 일을 또 겪은 적이 있었던 것일까? 유체이탈한 나의 영혼이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가련한 나의 영혼은 전생에도 빌어먹을 저주 받은 옥수수 과자가 눅눅해졌다는 이유로 결혼생활이 파탄 나는 일을 겪었단 말인가?
시계를 보니 쓸 데 없는 고민이다 싶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기에 나는 일단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회사에 고이 출근을 하든, 아니면 보따리 싸서 집 나간 마누라의 다리를 붙잡고 싹싹 빌러 가든, 하여간 일단 나서야할 시간이었던 것이다. 가방을 챙기고 옷을 갈아입다 보니, 숟가락 기시감이 뭐였는지 기억이 났다. 어제 심야 케이블 TV에서 본 얼토당토않은 졸작 영화였던 「콘도르 눈동자와 예언대소동」 영화 한 장면 중에, 주인공이 사냥해 온 음식으로 수프를 끓여 먹을 때, 숟가락을 빠뜨렸다가 건지는 장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 장면이 기억 속에 남아 있어서, 내가 오늘 아침에 우유에서 숟가락 건질 때 문득 생각났나보다 싶었다. 그럼 그렇지, 전생의 결혼마저도 이따위로 고달프지는 않았겠지.
나는 집을 나서기 전에, 금간 곳 하나 없이 말짱하기만 한 거울 앞에서 넥타이 매무새를 한 번 보았다. 거울 속 모습을 보고, 축 처진 어깨라는 것이 바로 이런 어깨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일터인 세종로 MSX 빌딩으로 가는 길에, 온갖 잡다한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해 지는데, 그 와중에 나는 계속 문득문득 어제 밤에 본 「콘도르 눈동자와 예언대소동」 영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그 영화에 공주로 나왔던 여자 주인공이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미영과 비슷해 보였다는 생각도 했다. 미영에 대한 생각을 이래저래 하다보니까, 다시 집나간 은숙 생각이 났고, 앞으로 수습할 대책 고민에 마음만 막막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 정도 고민으로 골치아파하고 있었다. 내가 빠져든 상황이, 사실은 얼마나 훨씬 더 괴상한 것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2

내가 문제를 조금씩이나마 눈치 채기 시작한 것은, 점심때쯤 고객사인 컴파일 사에 들른 후였다.
명목상으로 내 담당 업무라는 것은 유통망 관리에 쓰이는 프로그램 ROM칩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밤새 고생해가면서 만든 프로그램 ROM칩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증명하기란 어려운 노릇이었다. 기업 담당자들에게 PSG방식이 좋은지, FM방식이 좋은지 디지털 회로 동작이론과 선형계획법의 전산표현 방법에 대해서 일장 강의를 하면서 이해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우리 회사의 프로그램 ROM 칩이 SPC―1500 설계로 완성되어서 좋다든지, 옆 동네 회사의 ROM 칩은 CPC―400 설계로 되어 있어서 한국 사정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든지 하는 문제는, A4 용지와 볼펜 사는데 더 많은 돈을 쓰는 거래업체 당자들에게는 결코 판단하기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따라서 회사들이 프로그램 ROM칩을 살 때는, 좀 똘똘해 보이는 영업사원이 깔끔한 옷을 입고 설명하는 제품을 사거나, 혹은 평소에 술이라도 몇 잔 같이 해 본 안면 있는 사람이 설명하는 제품을사는 것이 당연해 지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작년 연말쯤부터, 프로그램 ROM 칩을 개량하고 개선하는 문제는 두 번째로 접어두고, 직접 구매 담당자들에게 인사하고 웃는 얼굴로 악수하면서 명함 돌리는 일을 주로 하게 되었다. 보통 영업사원들이 하는 역할과 아무 다를 바 없는 역할이었는데, 내가 돌리는 명함에는 기술 3팀에서 나온 사람이라고 인쇄되어 있는 것이 좀 신선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가끔 그 사람들 앞에서 그 사람도 못 알아듣고 나 스스로도 못 알아듣는 영어로 된 단어를 많이 버무려서 주절주절 읊조려 주면, 그런 상황을 의외로 멋있는 ‘전문적인 업무’라고 받아들이며 즐거워하는 담당자들도 몇 있었다. 이따위가 결코 내가 기대하고 내 자신을 점점 발전시켜나가는 방향의 업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당장 회사를 위해서, 내 실적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오늘 고객사들을 돌기 위해 나서면서, 처음 낌새가 이상했던 것은, 회사 총무부에서 업무용 차량을 배차해 줄 때 다갈색 밴을 내어 준 것이었다. 보통 출장 간다고 업무용 차량을 달라고 하면, 그냥 평범한 검정색 세단을 타고 가라고 하는 것이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밴 이었다. 그 차는 ‘라이온’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다가 연비가 너무 나빠서 단종된 것이었는데, 하필이면 오늘 내가 타게 된 차가 그것이었다.
차를 타고 출발하기 전에, 나는 은숙에게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어 보았다. 전화가 가는 와중에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아서 멍하게 있을 때, 문득 생각이 났다. 어제 밤 TV에서 봤던 「콘도르 눈동자와 예언대소동」에서 주인공이 타고 다니던 말이 갈색이었고, 공교롭게도 그 이름이 라이온이었다는 것이 기억났던 것이다.
아직 그때까지도 그냥 이름이 같구나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텔레네트, 아스키, 그리고 컴파일까지 세 군데를 돌면서, 조금씩 조금씩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고객사들을 돌면서, 나는 프로그램 ROM칩을 살 수 있는 담당자들에게 이탈리아 출장 갔을 때 부인에게 선물해줄 좋은 가방을 살 수 있는 곳이라든가, 최근에 개업해서 할인을 많이 해주는 회식 장소로 적합한 음식점 따위에 대해 떠들어 댔다. 그러면서 우리 회사 프로그램 ROM칩이 더 잘 팔릴 확률을 높이기 위해 싱글싱글 웃음을 곁들였다. 그런데 그 때마다, 그 담당자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 꼭 어제 본 영화 「콘도르 눈동자와 예언대소동」의 출연자들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텔레네트 사의 담당자는 영화에 나온 도끼 든 전사와 비슷해 보였고, 아스키 사의 담당자는 영화에 나왔던 고주망태 음유시인이랑 비슷해 보였다. 특히 컴파일사의 담당자는 영화 속에 나왔던 화염산의 마녀와 아주 똑같이 생겼기에, 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나는 그 사람에게 “혹시 80년대 말에 싸구려 영화에서 마녀 역으로 출연한 적 있으십니까?” 라고 물어볼 뻔 했다.
뭔가 정신이 뒤죽박죽이 되는 느낌이 들어서, 나는 우선 다시 한 번 은숙에게 전화를 했다.
나는 고객사 한 군데를 돌아 볼 때 마다, 은숙에게 전화를 걸었고, 전화소리가 여덟 번 울리는 동안 전화를 받지 않으면 전화를 끊었다. 나름대로 마음속으로 규칙을 정한 뒤에, 규칙적으로 그렇게 전화를 거는 것인데, 막상 전화가 걸리고 신호가 가기 시작하면, 은근히 마음속 한편에서 은숙이 전화를 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묘하게 생기기도 했다. 그래서 아홉 번 소리가 울리는 것이 끝나자마자, “안 받으니까 끊는 거다”라고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듯하면서 재빠르게 전화를 끊었다. 옛날 짝사랑하던 여학생 집에 큰마음 먹고 전화걸 때, 가끔 겁먹은 마음에, 전화를 안 받으면 오히려 안심하고는 “오늘은 전화를 안 받으니까 내일 고백하자.” 하던 심정하고 비슷하다면 비슷한 면이 있었다.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일들이 많았기에, 대강 그 정도에 그쳤어도, 나는 별 생각 없이 그냥 일하고 은숙에게 전화 걸고 하는 일에만 집중했을 것이다. 좀 공교로운 우연의 일치이기는 해도, 그냥 헛생각이려니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분명히 맞는 일이었다.
어제 심야 케이블 TV로 본 그 영화는 잠결에 어렴풋 내용과 장면들만 보았을 뿐, 사실 명확하게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고, 영화 자체도 어느 채널에서 방송해주는 것인지,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나는 것인지도 별관심이 안 생길 만큼 조잡한 것이었다.
극히 적은 저예산으로 영화 제목만 호기심 생기게 대강 꾸며서,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서 놓고는 대강 스크린 쿼터 때우는데 사용하는 무성의한 졸작 한국영화일 뿐이었다. 홍콩 무술 영화를 대강 베낀 「흑룡통첩장」이나, 인상주의 공포영화를 베낀 대졸작 「제4의 공포」 따위와 비슷하게 견줄 만한 영화가 바로 어제 본 「콘도르 눈동자와 예언대소동」이었다.
영화 내용은 당시 유행한 「코난」 영화를 어색하게 따라하는 것이었고, 제목은 아마 「레이디호크」에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영화 장면에서 한국 배우들이 아놀드 슈왈제네거나 미셸 파이퍼를 흉내 내면서 유치원생 재롱잔치 할 때 쓸 성싶은 마분지로 만든 갑옷 따위를 소도구랍시고 걸치고 다니는 것이었기에 결코 진지한 마음가짐으로는 볼 엄두가 나지 않는 영화였다. 미영을 닮은 공주 역의 여자 주인공이 미모가 출중하고 연기를 꽤 할 뿐, 뭐하나 정상적인 수준에 도달한 것이 없는 졸작 중의 졸작이었다. 게다가 방영해주는 케이블 TV 방송국조차도 아무런 애정이 없어서, 영화를 3분의 1쯤 보여주다 말고 갑자기 방송을 끊어 먹고는 간장 게장이나 체형 보정용 속옷 3종 세트 광고를 한 20분씩 기나길게 틀어 대기까지 했다.
그러니 나 역시 잠결에 내가 꿈꾸는 내용과 반쯤은 섞여서 영화를 보았음에 틀림없었다. 따라서 그 영화에 나온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내가 정확하게 기억할 리도 없었다. 아마, 오늘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이, 어제 영화 속 등장인물과 같게 느껴지는 것도, 조금 비슷한 면이 있는 것이 잠결에 착각되어 기억한 때문이라 생각했다. 은숙에 관한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했기에, 거기까지만 고민하기로 했다.
하지만 사무실에 돌아오자 일은 좀 더 이상하게 꼬여들기 시작했다.
점심을 먹으러 사무실로 다시 돌아왔을 때, 회사의 상무가 나를 불러냈다.
“잠깐 차나 한 잔 할까요?”
의문문으로 물어보지만 “아니오. 차 마시가 싫습니다.” 라고 할 수 있는 물음도 아니었고, 저런 식으로 나를 불러냈을 때 정말로 ‘차’나 한 잔 하는 게 목표인 일도 없었다. 공식적인 회의나,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상무가 ‘차’를 같이 마시자는 핑계로 나를 아무도 안보는 곳에 데려다가 앉혀 놓고 한 말은, 한 마디로 “회사 그만 둘 생각 없느냐?” 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상무는 그렇게 말을 하지 않고, 말을 빙빙 돌려서 암시만 주는 식이었다. 뭔 서울 외곽 순환 고속도로 완전 개통 기념식도 아니고 왜 그렇게 말을 빙빙 돌리는지, 빙빙 도는 그 말을 따라 어지럽게 돌면서 “대체 뭔 소리를 하려고 이야기를 저렇게 중얼거리나.” 하고 혼자 마음속으로 추리하고, 추측하는 데 한참 시간이 지나갔다. 그런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마침내 빙빙 돌던 것이 멈추어 “회사에서 나가라.” 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 받는 충격은 커지기 마련이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일이기는 했다. 작년에 회장이 땅 잘못 샀다가 돈 날렸을 때, 그 손해 메운다고 몇 사람 해고 시킨 일이 있었고, 나도 그때 이미 한 번 회사에서 나가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를 받았던 것이다. 이 회사가 프로그램 ROM 칩을 파는 회사이기는 했지만, 당장 프로그램 ROM 칩 개발하는 사람이 없다고 물건을 못 파는 것은 아니니까, 급할 때는 기술자부터 잘라내는 게 통례였다. 특히, 기술자들에게 돈을 많이 들이는 우리 회사 같은 ‘기술 중심 벤처’ 업체일수록, 기술에 들어가는 돈이 많았기에, 기술자를 쳐내는 것이 돈을 빼낼 수 있는 덩치로 보였던 것이다.
아침에는 가정이 파탄 나고, 점심에는 직장이 파탄 나는 그 놀라운 좌청룡 우백호스러운 구도에 나는 잠시 아찔했다. 하지만 그 아찔한 상황에서 갑자기 전혀 엉뚱한 생각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알 자로.”
터무니없게도, 그 상황에서 갑자기 알 자로가 불렀던 옛날 노래 하나가 생각났던 것이다. 별로 자주 듣는 노래도 아니었는데, 하필이면 그 때 갑자기 그 노래가 생각나서, 문득 상무 앞에서 그 노래를 흥얼흥얼할 뻔 했다.
곧 그 노래가 왜 떠올랐는지 깨달았다. 어제 밤에 본 「콘도르 눈동자와 예언대소동」에서 주인공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기사단에서 떠나가게 되는 장면이 있었다. 그때 영화 배경음악으로 (아마도 불법으로 무단도용해서 넣었음이 분명한 알 자로의 노래가 나왔던 것이다.) 별로 어울리지도 않는데 왜 배경음악으로 그 노래를 썼는지 모르겠는데, 기사단에서 주인공이 추방당할 때 나왔던 노래가 바로 알 자로의 노래였다.그때 상무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울리는 음악 소리인즉 바로 내가 흥얼거릴 뻔 했던, 그 영화에 나왔던 알 자로의 노래였다.
“머리 나쁜 사람 아니니까, 내가 무슨 말 하려고 했는지는 충분히 알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상무는 그렇게 말하고는 전화를 받으면서 자리를 떠났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지금부터 나는 허겁지겁 점심을 때우고는 오후에는 또 다른 고객사들을 찾아다니면서, “어휴, 요즘 따님은 학교 잘 다니시고요?” “인덕원 쪽에 집값이 요즘에 하나 사놓기 좋다던데요.” 따위의 말들을 듣는 사람 취향에 맞게 주절거려야 했다. 하지만, 머리를 핑핑 돌게 하는 일들이 자꾸만 겹치는 통에 나는 좀 망연자실한 기분이 되었다.
나는 회사 빌딩 바깥으로 나와서 그냥 멍하니 서 있었다. 이럴 때는 담배 한 대 피우면서 한숨 푹푹 쉬는 게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전개를 위해서 적당한 장면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은숙이랑 결혼하면서 담배를 끊은 통에 갖고 있는 담배도 없었다. 기왕 사랑이고 일이고 다 파탄 난 마당에 그깟 담배 하나가 뭔 대수냐 싶어 나는 담배를 사려고 가게로 가려 했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또 이러면서 괜히 담배 까지 달고 살게 되면 그거야 말로 자포자기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그래서 어정쩡하게 가게 앞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나는 「콘도르 눈동자와 예언대소동」에서 보았던 공주를 보았다. 미영이었다. 같은 빌딩에 있는 법률 회사에서 회계사로 일하고 있는 그녀가 내 앞을 걸어갔던 것이다.
“어? 오랜만!”
미영이 먼저 웃으면서 나에게 인사했다. 행복한 사람의 웃음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사람이 키가 훤칠하고 인물이 좋아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그게 아니라도 고등학교 때부터 미영은 왠지 앞에 있는 사람을 압도하는 그런 면이 있었다. 그녀의 걸음걸이만 해도 꼭 텔레비전에 나오는 아파트 광고에서 거대한 집에서 드넓은 창문으로 고고하게 도시를 내려다보는 광고 모델의 모습과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 느낌이 워낙 멋져서 마릴린 먼로의 걸음걸이를 ‘먼로 워크’라고 하고, 마이클 잭슨의 걸음걸이 춤을 ‘문 워크’라고 하듯, 나는 그런 미영의 걸음걸이를 ‘미영 워크’라고 부르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학교 다닐 때부터 언젠가 그 ‘미영 워크’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근사한 모습으로 그녀 앞에 나타나서, 여유롭게 같이 웃고 즐길 수 있는 느긋한 처지가 되어 보고 싶었다. 고등학교 1∼2학년 때만 해도 나는 미영이와 꽤 가까웠는데, 그렇게 가까워질수록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서,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나는 그녀와 갑자기 멀어졌다. 나는 언젠가 내가 미영을 압도할 수 있을 만한 모습이 되어서, 나도 한껏 미영이 앞에서 멋을 부려보고 싶었고, 그때 다시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날은 영영 찾아오지 않았다. 그 후로 오히려 나는 내 처지가 부끄러워지기만 할 때가 더 많았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녀와 만날 기회가 있을 때 마다 피해 다니고 싶을 때가 많았다. 그녀의 결혼식 때에도, 나는 말할 수 없이 씁쓸한 기분으로 웃는 낯으로 축하해 주어야 했으면서, 그런 씁쓸한 기분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도 못마땅해서, 그날 저녁에 쓴 소주 한 잔 기울여 보지 못 했다.
그런데도 공교롭게도 내가 일하는 회사가 있는 빌딩에 한 법률 회사가 있었고, 그 법률 회사가 그녀를 스카웃 해 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십 몇 년 만에, 나와 그녀는 오며가며 심심찮게 마주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딸이 하나 있고, 결혼한 지 5년 만에 이혼했다는 소식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여전히 그녀만 보면, 뭔가 “아직은 그녀와 마주할 때가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자꾸만 내 모습을 숨기고 싶은 생각만 들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이야 말로, 더욱 더 그녀를 보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그녀는 예의 차분한 목소리로 뭐라고 내 안부를 물었는데, 나는 눈도 제대로 맞춰 쳐다보지 못하고, “응, 그럭저럭.” “어, 대강대강.” “뭐, 하다 보니.” 운운하면서, 엉성하게 말끝 흐리기로 둘러댈 뿐이었다.
“제수씨는 잘 지내?”
“아침에 집 나갔어.”
“일은 잘 되고?”
“내일 때려치우려고.”
하기야 이렇게 대답한다는 것도 좀 거지같은 상황이기도 했다. 오늘 상황은 거지같은 것으로 따지자면 가히 거지왕 김춘삼 급이라 할 만했으니 말이다.
그녀와 짧은 대화를 나누고 다시 헤어질 때, 그때 내 머릿속에는 다시 어제 밤에 본 「콘도르 눈동자와 예언대소동」의 장면이 떠올랐다.
공주가 초록색 용이 덮쳐 와 용의 아가리에 잡혀 먹힐 찰나, 저쪽에서 바람처럼 주인공이 달려와서 공주를 구해내는 것이다. 공주는 손끝이 살짝 다치기는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주인공의 목에 매달리고, 주인공은 공주의 허리를 안고 초록색 용의 발톱 앞을 빠져 나오면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물론 그 장면에서 성우가 더빙한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주인공의 ‘멋있는’ 대사는 온몸을 비비꼬게 할 정도로 낯간지럽게 유치찬란하다.
빌딩 로비로 들어가려다, 정말로 그녀와 어제 밤 영화 속 공주의 모습이 비슷한가 싶어서 나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계단 아래 도로 앞에서, 그녀는 길을 건너가려고 서 있었다. 길모퉁이 옆쪽에는 더블 드래건 모터스의 초록색 4륜구동 SUV 차량이 한 대 있었는데, 속도를 줄이지 않고 신호를 어기면서 난폭하게 길을 돌고 있었다. 그녀 쪽으로 초록색 더블 드래건 차가 달려들고 있었다.
내가 구해야 한다. 그 생각만 번쩍 들었다. 나는 영문을 따지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를 향해 뛰어갔다. 나는 그녀의 팔을 잡아 당겼다. 그녀는 놀라 쓰러지면서 내 목에 매달렸고, 나는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간발의 차이로 초록색 차는 그녀의 한쪽 손목만을 가볍게 치고 지나갔다.
공주를 구하고 나면, 공주가 기사에게 말한다.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기사님께서는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나와 같이 넘어져 있다가, 부딪힌 손목을 만지며 찡그린 표정으로 일어서는 그녀가 나에게 말한다.
“너 안 다쳤어? 진짜 큰일 날 뻔 했다. 네가 진짜 내 생명의 은인이다, 야.”


3

그녀와 나는 사고 때문에 출동한 보험 회사 직원과 함께 병원도 가고, 서류에 서명도 몇 개나 했다. 자동차 보험 회사 광고에서는 보험 회사가 다 알아서 해 준다고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다 챙겨주면서 하나하나 설명해도 답답하게도 알아먹는 것은 없는 것이 자동차 보험 회사의 기본 자세였다. 우리는 피해자와 목격자였는데도, 한참 동안이나 귀찮게 이리저리 다녀야 했다. 뭘 엉성하게 이상하게 처리했는지, 그녀는 똑같은 엑스레이 사진을 병원 세 군데에서 세 번이나 찍어야 했다.
“방사선 오염으로 돌연변이 초능력자로 변신하는 거 아니냐?”
그녀는 그렇게 농담했는데, 나는 그 대사조차도 어제 본 80년대 졸작 한국영화 「콘도르 눈동자와 예언대소동」의 한 장면이었던 것만 같았다. 공주가 기사에게 세상의 위기에 대해 설명하는 대사 중에 이런 것이 있었던 것이다.
“방사선 오염으로 돌연변이 초능력자들이 자꾸 생겨나고 있어요.”
그녀와 한참 동안 같이 다니면서 나는 무척 어색했는데, 자꾸만 그렇게 영화와 겹치는 일이 생기니까 머릿속으로 생각만 더 복잡해져 갔다.
나는 어색함을 벗어나 본답시고 아무 말이나, 아무 농담이나 꺼내 놓기 시작했다. 내 머릿속에는 온통 「콘도르 눈동자와 예언대소동」 생각 밖에 없었기에, 결국 나는 이런 이야기를 그녀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제 잠결에 본 심야 케이블 TV 영화가 하나 있는데. 제목이 뭐냐면, 「콘도르 눈동자와 예언대소동」이거든. 그런데 이상하게 그 영화 장면이랑, 오늘부터 내가 겪는 일이랑 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진짜 신기해. 막 무섭다니까.”
그녀와 관심을 갖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자 어째 나는 더 정신이 없어져서 내 사생활을 지켜야 한다든가, 얼토당토않은 비현실적인 소리를 하면 한심해 보인다든가 하는 생각은 다 잊어버리고, 그저 그녀가 관심을 갖는 이 이야기만 더 열성적으로 떠들게 되었다. 뭔가 기분이 들뜨거나 긴장되어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랬던 까닭에 나는 아내가 집을 나간 이야기와 회사에서 그만둘 위기에 처했다는 이야기까지 다 털어놓고 말았다.
그녀는 내 표정이 상당히 심각해지는 것을 보면서도, 붕대를 감은 한쪽 팔목을 쓰다듬으면서 가볍게 웃었다.
“에…… 그런 게 어디 있어. 무슨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서를 읽는 것도 아니고, 꿈에 산신령을 본 것도 아니고. 세상에 졸다가 심야 케이블 TV 보고 운명을 예언하고 그런 게 어디 있어?”
“말하는 나도 좀 황당한데, 진짜라니까.”
“사고는 내가 당했는데, 어째 네가 뇌에 충격을 받은 것 같으냐?”
그녀는 재밌는 듯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와 함께 보험 회사 직원을 따라다니는 동안, 앞으로 만날 사람들의 모습을 두 번 맞혔고, 병원에서 기다리는 동안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세 번 맞혔고, 그녀가 막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네 번 맞혔다.
“만약에 정말로 어제 본 그 영화 내용이 네 운명을 예언하는 거라고 치자고. 그런데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럴 수가 있는 건가 그거지. 그런 예언의 영화를 찍은 이유가 뭘까? 수십 년 전에 코난 아류작 영화 찍던 각본가가 갑자기 신 내림을 받기라도 했다는 거냐고. 그러고 나서, 하필이면 수천만의 시청자들 중에서 그것도 당장 영화 개봉할 때도 아니고 수십 년 후에 네 운명을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이유는 뭐냐고.
그리고 예언이 이 영화라는 것도 정말 이상해. 하다못해 좀 그럴듯하게, 무슨 예언의 책이나, 운명의 시 같은 것을 쓸 수도 있는 거잖아. 반짝이 의상 입은 마법사들이 공사판 모래 야적장이 사막이라고 하면서, 거기서 장풍 쓰는 흉내나 내는 영화가 하필이면 운명을 비춰주는 거울이 된 거냐고. 너무 이상하잖아.”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나는 갑자기 좀 심각한 분위기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이상한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여 줘야 할 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그냥 새 고객사 담당자 만나고 술자리에서 별 이야기 거리 없을 때 ‘내가 겪은 굉장히 신기하고 웃긴 일’로 말 트는 소재로 삼을까나. 뭐, 회사에서 잘리면 그런 데 써먹을 이야기 굳이 발굴해서 기억해 놓는 구구한 짓거리 할 필요도 없겠다만. 아니면 내 인생의 방향과 다른 사람의 생명이 걸린 중대한 일생일대의 철학적인 물음으로 삼고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까나. 무겁게 보기에는 영화가 너무 한심했고, 가볍게 보기에는 예측이 지나치게 정확했다.
“그 영화 줄거리가 대충 어떻게 되는 건데?”
“나도 잠결에 봐서 정확하게 앞뒤가 기억은 안 나는데…….”
“그냥 대강 흐릿하게 기억한 걸 갖고, 일 생길 때마다 ‘영화에서 이거랑 똑같은 거 봤다.’ 그렇게 갖다 붙이는 거 아냐?”
“그럴 수도 있기는 한데. 하여간 줄거리가 어땠냐면, 기사가 주인공인데, 기사가 기사단에서 쫓겨나. 그런 다음에 우연히 공주를 구출해 주게 되거든, 그래서 그때부터 기사랑 공주랑 같이 다니게 돼. 이 영화가 진지하게 코난 시리즈나 레이디호크 흉내를 내면 경쟁이 안되니까, 코미디 형식을 좀 많이 넣어서 괜히 잡스러운 농담 따먹기 많이 하면서 흘러가고…… 그렇게 흘러가다가 어떻게 되냐면…….”
영화 줄거리의 그 다음을 설명하면서, 나는 그제야 뭔가 엄청난데 잘못 걸려들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영화가 신파극으로 돌변하면서 비극적으로 확 끝나 버려. 공주를 구하느라 주인공이 대신 악마의 칼을 목에 맞고 죽어.”
주인공이 죽는다. 그 이야기를 내 스스로 말할 때, 나는 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그제야 갑자기 막판에 비참하게주인공이 죽어버리는 그 처절한 영화 속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영화 전체 분위기와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늘어지고 눈물 흘리고 비명 지르는 장면만 한참 이어지는 어둡고 우울한 결말 장면 이었다. 한심한 코미디로 계속 이어지다가 어림없게 비극으로 결말을 맺는 망한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떨고 있었다.
주인공이 죽는다. 곧 내가 죽는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잠시 멍하게 있자, 그녀가 말했다.
“넌 뭐, 쓸데없이 그런 마법 같은 걸 다 믿냐?”
영화 속 장면이 생각이 났다. 공주가 기사에게 말한다.
“기사님은 마법을 믿으시나요?”
기사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물끄러미 공주를 바라본다. 그러면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
“소나기 올 거 같은데.”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설마 비오는 것까지 맞히겠나 싶어, 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맑디맑은 여름 날씨에 갑자기 언제 어디서 소나기가 몰려올까. 그러나 건물 밖으로 걸어 나오자 벌써 어디선가 삽시간에 몰려온 먹구름 때문에 후두두둑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좀 멍청하게, 그리고 상당히 겁을 많이 먹은 눈빛으로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나를 보고 말없이 한참 있었다. 그녀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비 딱 오기 시작할 때 되면, 그 아스팔트 물에 젖는 냄새 같은 느낌으로 냄새 나는 거 있잖아. 그거 알아? 시멘트나 돌 같은 거 물에 젖는 냄새 같은 거. 비 한창 올 때는 모르고, 비 한 방울 두 방울 딱 내리기 시작할 때 그런 냄새 나는 거 있는데. 그거 알아? 나 그 냄새 되게 좋아하는데.”
전혀 엉뚱한 다른 이야기였다.
갑자기 나는 내가 어디에 서서 뭘 하고 있는지도 잠시 모르게 되었다. 아침부터 일어난 많은 일들과, 갑자기 내가 죽을 거라는 엉뚱한 운명 덕분에, 계속 멍멍하기만 했다. 아마도 지구에서 가장 바보스러운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제 밤에 본 C급 영화 한 편이 내 운명을 지시하고 있었고, 그 결말은 오늘 저녁 죽는다는 것이었다.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많은 일들과 무더운 날 갑자기 시원하게 쏟아지고 있는 이 소나기가 그 증거였다.
그녀가 내게 다시 말을 걸었다.
“너…… 괜찮아?”
4

별로 괜찮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가정파탄에 실직으로 주저앉은 한심한 사람으로 그녀 앞에 비치고 있는 마당에, 정신까지 이상한 놈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몇 번 흔들어 정신을 바짝 차려보려고 했다. 우선 나는 그 이상한 영화가 정확하게 언제 누가 만든 영화인지 부터 알아내고, 영화 제작진이나 관계자를 찾아가서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지 한번 알아보려고 했다.
그런 것을 믿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혹시나 영화 제작진 중에 내 할아버지나 어머니와 무슨 원한이 있는 사람이 있어서, 나에게 무슨 주술이라도 걸어 놓았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아니면 영화 촬영 할 때 조명 보조 맡던 사람이 묵시록에 나오는 말 탄 사람이라든가, 영화 필름이 미국으로 수출되었다가 로스웰에서 외계인에게 도난당했던 적이 있다든가, 하여간 뭔 황당한 사연이던 간에 걸리는 것이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예, 거기 케이블 TV 송신소죠? 어제 TV방영 목록 중에 「콘도르 눈동자와 예언대소동」이라는 영화 혹시 없었나요?”
“예, 거기 고전 영화 방송이죠? 어제 TV방영한 영화 중에 「콘도르 눈동자와 예언대소동」이라는 영화 혹시 없었어요?”
“예, 거기 한국 영상 자료원이죠? 혹시 「콘도르 눈동자와 예언대소동」이라는 영화에 관한 자료 없으신가요?”
나는 어지간한 데는 모두 전화를 해 보았지만, 심야에 아무도 안보는 방송국에서 해주는 조잡한 영화 따위 세심하게 관리하고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더군다나 나 스스로도 어느 방송국에서 몇 시에 방송한 것인지를 알고 있지 못해서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영화 자체가 워낙 찾는 사람이 없는 영화라서, 한국영상자료원에도 별 자료가 없었다. 영화 필름이나 비디오테이프는 고사하고, 영화에 관련된 기록조차, ‘갑일 흥업’이라는 회사에서 제작한 영화라는 것 외에는 감독이나 출연자 정보도 변변하게 갖춰져 있지 않았다.
그러다 오늘 이 일 저 일 생기다 보니까 나 혼자 예민해져서 정말로 스트레스가 심해서 혼자 이상한 상상에 빠져있는 것인가 잠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반대로 또 갑자기, 이러다 덜컥 정말로 죽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도 했다.
그녀를 보니 그녀는 자기 전화기를 붙들고 나름대로 뭔가 진지하게 조사를 하고 있었다. 그 표정은 아직까지도 장난스럽고 재밌어하는 표정이었다. 학교 다닐 때의 귀신 나오는 미술실 이야기를 하던 표정이랑 똑 같았다. 미영 워크로 도도하고 도도하게 걸으면서 좀 차갑고, 좀 다가가기 어렵게 보이는 게 그녀였는데, 또 이런 호기심 많은 어린애 같은 표정이 참 잘 어울리기도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 나 진짜 좋은 거 찾았어. 이거 A급 정보야. A급.”
“뭔데?”
“디스크스테이션이라고, 옛날 영화 DVD랑 비디오 팔고 사는 사이트가 있거든. 거기서 검색해 보니까. 「콘도르 눈동자와 예언대소동」이라는 영화 속편이 있다는데?”
“속편이면, 그 다음 이야기 말하는 거야?”
“그런 거겠지. 속편이 「콘도르 발톱과 바캉스대작전」 이라는데. 비디오테이프가 매물로 나와 있는 게 하나 있네.”
“어디?”
살펴보니 사실이었다. 「콘도르 눈동자와 예언대소동」이 개봉된 지 채 7개월이 지나지 않아 그 날림 급조 속편이 하나 나왔는데, 제목인즉 「콘도르 발톱과 바캉스대작전」이었다. 그 영화도 누가 찍었는지, 출연진이 누구인지 정보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조악한 영화를 담고 있는 낡은 비디오테이프가 강원도 속초 근처의 한 어촌 비디오 가게에 하나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이거 잘 되었네. 속편을 보면, 어제 본 게 무슨 내용인지 확실히 알 수 있겠지. 어제 졸면서 봤다면서. 그러면 주인공이 비극적으로 죽는 게 아니라, 사실은 죽었는 줄 알았는데 살아 있다…… 이런 것일 수도 있잖아. 속편 보면 알 수 있을 거라고. 혹시, 혹시 말이야, 본편에서 정말로 죽었더라도 속편에서 ‘지옥에서 돌아온 기사’ 이러면서 다시 살아날 수도 있잖아. 아마 속편이 있는 걸 보면, 정말 그런 걸 거야.”
그녀는 따분한 날 잘 되었다는 듯이 즐거워하는 투였다.
“어차피 오늘 오후는 교통 사고 때문에 종쳤으니까, 동해안으로 콘도르 눈동자의 신비와 콘도르 발톱의 비밀을 찾아 떠나가 봐야지?”
“지금 비디오테이프 구하러 속초까지 가자고?”
“그럼 어떻게 할래? 기사 양반. 기사면 양반 맞지? 기사 양반, 그대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아, 곧 죽음을 맞이할 운명이거늘, 어찌 지체할 수 있겠소?”
그녀는 아직까지도 이 모든 일을 그저 신기한 재미거리로만 생각하는 듯 했다. 하기야 나도 지금 이 판국에 고객사 돌면서 프로그램 ROM칩 사달라고 헛소리 아부나 하고 돌아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지금 내 신세란 이상해질 만큼 이상해서, 충치와 이 시림이 극도로 심할 만큼 이가 상한 상태 아닌가 말이다. (딱 이런 정도가 「콘도르 눈동자와 예언대소동」 영화에 섞여 있는 수준의 80년대 농담이었다.)
나는 회사 사무실로 돌아가서, 자동차를 빌리기로 했다. 어차피, 더 다닐 회사도 아닌 곳이지 않는가? 나는 총무부에 출장을 가려고 하니 업무용 차량으로, ‘아프로만’을 빌려 달라고 했다. 아프로만은 회장 아들이 놀러 다니려고 회사 업무용이란 명목하에 회사 돈으로 사들였던 2인승 컨버터블 쿠페였다. 요란하지 않지만 기본이 탄탄한 그럴싸한 스포츠카였고, 붉은색으로 반짝이는 색깔이 끝내주는 자동차였다.
“아프로만이요?”
“예, 아프로만.”
“아프로만 말씀하시는 거 맞죠?”
“예. 아프로만.”
총무부 배차 담당자는 좀 이상하게 생각하는 듯 했지만, 가끔 있는 일처럼 회장님 아들이 자동차를 가져다 달라고 해서 회사 직원이자동차 배달해주는 것으로 여기는 듯 했다. 이번에도 어제 영화 주인공이 영화 중간에 말을 붉은색 적토마로 바꾸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나는 그녀를 자동차에 태우고 시동을 걸었다. 차에 앉은 그녀는 정말로 편안해 보였다. 자리에 몸을 기댄 자세에서 살짝 눈을 감은 표정까지, 솔직히 말하면, 아주 잘 어울려 보였다.출발하기 전에 나는 하나 물어 보았다.
“너, 이런 옛날 영화 비디오 검색하는 거 도대체 어디서 배웠냐?”
“전에 같이 살던 인간.”
그녀는 전 남편을 그렇게 불렀다.
자동차는 상쾌하게 쭉 뻗은 도로를 미끄러져 나아갔다.
아직 오후 시간이라서, 길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눈앞에는 저 파란 여름 하늘과, 소나기가 지나가고 갠 날씨 특유의 청량한 뭉게구름만 기분 좋게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자동차의 라디오를 켰고, 라디오에서는 「Passing Breeze」 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기분 좋게 차가 달리는 바람 소리와 음악소리는 부드럽게 섞여 들었다.
“무슨 휴가 가는 것 같다.”
그녀가 가만히 말했다. 정말,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이혼이니, 실직이니, 심야 케이블 TV에서 틀어주는 시시한 영화니, 운명의 끝이니 하는 생각 따위는 조금도 하고 싶지 않았다. 편안하게 내 옆자리에 기대고 앉아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가 있고, 온 세상 밝게 쏟아지는 햇빛이 가득한 여름 하늘 아래시원하게 고속도로를 나아간다. 나는 이렇게 달리는 길이 지나가버리는 것이 아까울 정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을 빠져나올 때 벌써 이만큼이나 와 버렸나 싶었고, 대관령을 지나가면서 이제는 반 정도 밖에 남지 않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마음 졸이며 고민하고, 굽실거리며 빌빌거릴 게 다 뭐란 말인가. 지금처럼 여유롭게 유쾌하게 달려 보는 게 진짜 한 번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객사 돌아다니고, 저녁 마다 아내 기다리며 시간 보내던 몇 달, 몇 년. 그렇게 지나간 수없이 많은 시간들은 어땠는지 도무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 잠깐 이렇게 라디오에서 「Pass-ing Breeze」 노래가 나오는 5분 40초의 시간은 평생토록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과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망해먹을 죽음을 선사할 악마의 칼이라 할지언정 얼마든지 맞서 싸워 주마 그런 기분이었다.
바닷가 마을에 도착한 후에도, 「콘도르 눈동자와 예언대소동」의 속편이 있다는 비디오 대여점을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도에 분명하게 나온 곳도 아니었고, 자동차에 내장되어 있는 지도 프로그램의 지도와 이 마을의 현재 모습이 일치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비디오 대여점에 몇 번씩 전화를 하고, 마을 동네 사람들에게 묻고, 또 잠시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면서 쉬어갔던 가게 집에 물어 물어서, 겨우 그 비디오 대여점을 찾아갈 수 있었다.
기나긴 여름해도 다 저물어갈 무렵이 되어서야 우리는 비디오 대여점에 도착했다. 더운 길을 헤매고 돌아다니다 보니 나는 양복 상의를 벗어서 내던져 두고 넥타이를 풀어헤친 모양새였고, 그녀도 좀 길게 내려오는 블라우스의 소매를 걷어 붙인 모습이었다. 우리는 완전히 지쳐 있어서 그녀의 호기심도 가셨고, 나의 공포심도 가신 상태였다.
수정 비디오. 비디오 대여점의 간판부터 족히 몇 년은 아무런 손길이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비디오 대여점 실내는 그보다 더 오래되고 낡은 것처럼 보였고,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지 대부분의 비디오테이프들이 먼지가 보얗게 쌓여서 아무런 분류도 없이 몇 겹씩 쌓여있었다. 구석에는 나이가 120세는 되지 않을까 싶은 영감님 한 분이 소리 없이 앉아서 수백 년 묵은 듯 보이는 14인치 텔레비전으로 성룡 영화를 보고 있었다. 그 분위기는 흡사 「그렘린」에 나오는 모과이 팔던 중국인 상점 같았고, 구석을 좀 파헤치면 어딘가에 「구니스」에 나오는 해적들의 보물이 숨겨진 비밀 통로가 나올 것만 같았다.
비디오테이프 더미에는 종이가 하나 붙어 있었는데, 종이에는 매직펜으로 쓴 글씨로, ‘대여 500원, 구입 1000원’ 이라고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엘레베이터 올라타기」, 「몸 전체로 사랑을」, 「영웅연가」, 「서울 손자병법」, 「말괄량이 대행진」, 「신의 아들」, 「실연클럽」 등등 어렴풋하게 제목 정도만 기억나는 옛날 한국 영화들이 가득가득했다. 게 중에는 「슈퍼 가이와 특전5인조」라든가 「여의주의 마검」, 「소림대전 파천황」 같은 한 눈에 보기에도 조잡하기 그지없는 아류작 영화들도 자주 눈에 뜨였다.
그녀와 나는 그 사이에서 「콘도르 발톱과 바캉스대작전」을 찾고 있었다. 비디오테이프를 들출 때마다 손에 묻는 먼지 때문에 손을 부딪쳐 자꾸만 털어내야 했고, 그녀는 흩날리는 먼지 때문에 연신 콜록콜록 기침을 해댔다. 한참 만에 그녀가 먼저 비디오테이프를 발견했고, 나도 그 쪽으로 눈이 갔다.
“찾았다.”
가히 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처럼 보이는 「콘도르 발톱과 바캉스대작전」 비디오테이프이었다. 비디오 재킷 앞면에는 ‘콘도르 눈동자와 예언대소동의 최신 속편!!’ 이라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재킷 앞면 포스터는 아무 상관없이 외국 영화인 「시공의 신부」 포스터를 베껴 와서 실어 놓은 것이었다.
“진짜 있구나.”
그녀의 표정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나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여기서만 구할 수 있는 비디오테이프이니, 적어도 만원은 하지 않을까 싶어 주인 영감님께 물었다.
“이거 얼마입니까?”
그러나 영감님은 제대로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거기 적혀 있잖어? 구입 1000원이라고.”
나는 멋쩍어하며 1000원짜리를 꺼내서 영감님께 건넸다.
우리는 성룡 영화 보는 것을 중단하기 싫어하시는 영감님을 설득해서, 잠시 비디오 대여점의 텔레비전을 빌렸다. 과연 「콘도르 발톱과 바캉스대작전」의 내용은 무엇일까. 나는 살 수 있을까. 공주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공주와 주인공의 관계는 또 어떻게 되는 것일까.
“두근두근. 기대하시라, 개봉 박두.”
그녀가 비디오테이프를 집어넣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눈앞에 펼쳐질 조악한 영화의 우스꽝스러운 화면과 어림없을 성우 더빙 목소리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것도 나오질 않았다.
빨리 감고, 되감아서 봐도 마찬가지였다. 비디오테이프가 너무 낡고 오래되어서, 도무지 재생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금새 풀이 죽은 모습이 되었다. 학교 졸업한지 십 몇 년이 지났는데도, 이런 모습을 보면 옛날 어릴 때 그 모습 그대로인 것 같았다.
“비디오 재킷 뒷면에 보면, 줄거리 요약 같은 거 적혀 있지 않아? 그거 봐봐.”
그녀가 말했다. 나는 별생각 없이 비디오 재킷 뒷면을 보았다. 나는 거기에 적혀 있는 줄거리 설명을 읽기 시작했다.
“뜨거운 젊음의 열기에 사로잡힌 남녀가 한 바닷가로 휴가를 떠난다.
열정에 모든 것을 벗어버린 남녀는 신비의 ‘수정동굴’로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고대의 비밀서를 발견하고, 뜨거운 욕망에 몸부림친다.”
그 정도까지 읽고 나는 억지로 최대한 끈적거리는 표현을 쓰려고 한 그 말투가 우스워서 좀 키득거렸다.
“수정 동굴 그거 딱 들어맞네. 여기가 수정 비디오잖아. 휴가 여행처럼 바닷가에 오는 것도 비슷하고. 고대의 비밀서라는 게 바로 이 비디오테이프인 거지. 우리 둘이 수정 비디오에 오는 것도 이 영화에 예언으로 들어가 있었던 것 아냐?”
나는 비디오 재킷에 쓰여 있는 나머지 줄거리를 읽었다.
“두 사람은 꿈과 마법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고,
운명의 소용돌이는 거대한 파국을 이끌어
마침내 50억 지구 인구 중
49억 9999만 명이 죽는 대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남녀의 운명과 지구의 미래는……?”
이게 뭐야? 아연실색했다.


5

우리는 붉은 노을이 온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동안 해안도로를 달리면서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무슨 기대를 했던 것인지는 나도 알 수 없었지만, 하여간 이런 것은 아니었다. 1편 「콘도르 눈동자와 예언대소동」에서는 내가 죽는 것이 결말이고, 2편 「콘도르 발톱과 바캉스대작전」에서는 인류가 멸망해 버리는 게 결말이라고?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영화가 다 있는 건지.
하기야 이미 오늘 아침부터 내 인생 자체가 별로 말이 되지 않게 꼬여가고 있다는 것도 무척 와 닿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신경쇠약 때문인지, 백일몽에 취한 건지 뭔지 몰라도, 해안도로를 돌며 보이는 경치 하나하나가 어제 봤던 영화 장면에서 본 듯하다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물론 20분마다 간장 게장 선전에 뚝뚝 끊기며 나오던 어젯밤 영화 장면보다는 지금 여름 저녁 지나치고 있는 이 도로가 백만 배는 더 아름다운 풍경일 것이다. 노을빛은 창가에 앉은 그녀의 뺨과 머리칼이 붉게 보일만큼 깊게 새어나오고 있었고, 그런 그녀는 좀 울적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언뜻 자동차 거울로 보기에는 눈물을 글썽거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이내 그녀가 다시 명랑한 목소리를 만들어 말했다.
“악마의 칼이 목에 들어온다는 게, 꼭 진짜로 죽는다는 이야기는 아니지 않을까? 그러니까 초록색 용이라는 것도, 초록색 자동차였고, 수정 동굴도 수정 비디오였잖아. 그러니까 목이 잘린다는 것도, 회사에서 잘린다, 뭐 이런 이야기가 아닐까? 그러니까 꼭 진짜로 죽는 게 아니라, 내가 실직하려는 위기에 처하는데, 대신에 네가 실직 당한다 이런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거지.”
“그러면 2편에서 인류 중에 49억이 죽는다는 건?”
“인류가 전부 다 같이 포커 게임을 하다가, 49억이 패를 던지고 끝까지 안 죽고 베팅하는 사람이 1만 명뿐이다…… 뭐 그런 거라든가…….”
“…….”
“일단 나부터가 진짜 공주는 아니잖아.”
그렇게 그녀가 말하면서 고개를 다시 창밖으로 돌리는데, 그 순간 명랑한 목소리로 말하다가 다시 잠깐 우울한 표정이 교차하는 그 모습이 영화 속 공주 모습 따위는 영영 기억에서 잊히게 했다.우리는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저녁의 고속도로 휴게소는 인적이 별로 없는 듯 한 분위기가 있으면서도, 어딘지 생동감 있게 분주한 느낌도 있었다. 나는 잠시 그 모습의 한 부분이 되어 좀 오래 쉬어 가고 싶었다. 그녀도 비슷한 생각인 것 같았다.
“꼭 운명을 아는 게 나쁠 것은 없잖아. 교통사고 날 걸 미리 알고 있으면, 교통사고 피하고 좋잖아?”
“싫다고 피할 수 있다면, 그게 운명이냐? 교통사고 날 걸 미리 알고 있던 말건, 교통사고가 날 운명이면 아무리 기를 쓰고, 악을 써도 그냥 당할 수밖에 없는 게 운명 아냐?”
“네가 오늘 아침에 나 구해 줬잖아.”
“그건 내가 널 교통사고에서 구해 줄 운명이어서 그렇게 된 거지. 네가 교통사고를 당할 운명이었더라도 내가 널 구해줄 수 있었을까? 그렇지는 않았겠지.”
“그래도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잖아. 목에 칼이 들어온다고 했으니까, 목에 깁스라고 두르고 다니면 어때? 그럼?”
“그런 짓 하면 그런 짓이 운명을 자초한다니까. 운명이니 예언이니 하는 영화에 그런 거 많이 나오잖아. 아마 목에 깁스를 두르면 그 깁스 풀려고 하는 날 깁스 자르는 톱날에 다쳐 죽을걸.”
“그러면 깁스가 아니라, 경호원이라도 고용하면?”
“그러면 그 고용한 경호원이 배반하는 바람에 죽을 거야. 콘도르 눈동자랑 콘도르 발톱 영화에 나와 있는 그 일들은 무조건 그대로 일어난다니까. 나는 거기서 아무리 수를 써도 수쓴 거 때문에 도리어 걸려들면 걸려들지, 거기에 나와 있는 일을 피할 수는 없는 거라니까.”
“에라, 이럴 거면 아예 공주가 기사보다 먼저 나서서 죽어버리면 어때? 그러면 운명의 예언을 깨뜨리는 게 되잖아. 내가 여기서 소주를 한두 항아리 깨먹고 나면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알아?”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 뭔가 과격하게 농담을 한답시고 하다가 오히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서라. 여기서 네가 술 먹고 죽네 사네 하면서 설치기 시작하면, 그거 말리다가 정말 나 무슨 사고 나서 너 대신 나 죽는 수순으로 갈 거다.”
“…….”
“바꿀 수 있는 건 그냥 예측이지 운명은 아니지. 운명은 절대 바꿀 수 없는 거야. 악마의 일기장에, 하느님의 낙서장에 한 자 한 자 기록된 그 일 대로 우리는 꼭 그대로 할 수 밖에 없는 거야.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이 대사 자체도,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도 다 운명에 정해져 있던 거지. 이렇게 운명이 마음에 안 든다고 불만 품는 생각까지도 다 정해진 운명이라는 거고. 이렇게 운명이라고 투덜거리는 내 모습조차도 아마 이 비디오테이프 어딘가에 영화 화면으로 담겨 있겠지.”
나는 「콘도르 발톱과 바캉스대작전」 비디오테이프를 툭툭 건드렸다. 나는 술도 안 먹었는데 꼭 술 취한 인간처럼 길게 푸념하고 있었다.
“뭐, 팔자가 그런가 보지 뭐. 이딴 거 아니겠어. 야, 너도 알겠지만 나 진짜 잘 살아 보려고 했어. 뭐야, 그런데 이게 뭐냐고. 마누라 도망가지. 뼈 빠지게 일하던 직장에서는 때려치우라고 그러지.나도 참 같잖은 인간이지. 지금 이 마당에 쓰레기 같은 영화 하나 보고 갑자기 겁먹었다가 놀랐다가 하면서, 강원도로 바닷가로 사방 뛰어다니기나 하고. 바보 같이. 이게 무슨 짓이냐고. 참 꼴 같잖다. 뭐 이렇게 살다가 오늘 밤에 죽는 게 팔자라면, 그러지 뭐. 내가 뭔 수 있겠어. 바꿀 수 있으면 그게 무슨 운명이냐고. 나온 대로 그냥 그따위로 사는 거지.”
좀 더 궁시렁거리려고 하는데, 나는 거기서 갑자기 숨이 확 멎으며 말을 멈추었다. 그때 갑자기 그녀가 내 머리를 감싸고 끌어안았던 것이다.
귀에 그녀의 가슴이 뛰는 소리가 가만히 들렸는데, 그 소리가 꼭 내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 같았다. 그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난 갑자기 정신이 하얗게 되어 무슨 말도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제대로 눈을 뜨고 있을 수도 없었다. 실제로 따지면 한 2~3초 정도 밖에 안 될 시간이었을 텐데, 그날 하루 어떤 말을 하던 시간보다도 아무 말도 없던 그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나에게 말했다.
“너만 죽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잖아.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문제 아냐?”
“……?”
아직도 귓가에는 심장 쿵쿵거리는 소리만 들려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나에게 그녀는 다시 원래의 그 재미있어 하는 웃는 표정이 되어 말하고 있었다.
“인류를 구하기 위해 활약해야 할 사람들은 이 엄청난 운명의 비밀을 아는 우리뿐이지 않겠냐고. 기사가 공주를 구해 줬으니까, 이번에는 공주님께서 기사를 구해주도록 하지.”
그녀는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고 나를 이끌었다. 어떤 악마의 술수로 얽힌 운명일지라도 그대로 박살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6

3시간 후. 우리는 제주도에 와 있었다. 그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다시 정통으로 ‘미영 워크’에 압도당하고 있어서, 그녀가 걷는 대로, 그녀가 가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다짜고짜 공항으로 나를 데리고 갔고, 우리는 야간 항공편으로 제주도로 향했다. 그녀는 비행기 안에서도 불빛이 반짝거리는 밤 풍경을 창밖으로 내려다보기만 할 뿐 아무 설명도 안하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물으면 “도착하면 알려줄 테니까.” 라면서 그냥 웃어넘길 뿐이었다.
제주도에서 그녀가 간 곳은 남쪽 바다에 접하고 있는 호텔이었다. 유럽 궁전을 흉내 낸 방식으로 구조를 꾸미고 장식은 캘리포니아 저택 방식으로 해 놓은 곳이었다. 그래서 꽤 호화스러워 보이면서도 요란하지는 않아 보이는 곳이었다. 크기도 지나치게 크지 않아서 층으로는 4층이었고, 내부에도 번잡스럽게 오가는 사람들이 많기 보다는 조용한 공기 속에서 피아노 주자가 치는 음악소리만 들려오고 있었다. 이 음악도 영화에서 들어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Portugal」 인가 그런 제목이었다.
그녀는 호텔 로비를 그대로 통과해서 호텔 뒤편으로 나아갔다. 호텔 뒤뜰은 호텔에 딸려 있는 아담한 백사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밤바다의 파도 소리가 조용하게 들려오는 그 바닷가에는 물놀이를 하며 놀다가 가끔 호텔에서 내어주는 칵테일을 마시며 노는 사람들이 있었고, 세워 놓은 파라솔마다 달빛 같은 불빛이 밝혀져 있어서,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얼굴을 밝히고 있었다.
거기에는 좀 과하다 싶게 현란한 알로하 셔츠를 입은 남자가 하나 있었다. 원래 또래보다 살짝 늙수레해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그 남자 곁에는 아마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두세 명이 이제 막 바다에서 나온 듯 아직까지 물에 흠뻑 젖은 채로 서 있었다. 남자는 한손에 술잔을 들고 싱글벙글하는 표정으로 여자들과 이야기 하며 그야말로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기네스 맥주에는 안에 구슬 같은 게 하나 들어 있어요.”
남자는 맥주병을 흔들어 구슬이 딸랑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어머, 신기하다.”
“이거 왜 그런 거예요, 오빠?”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세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 번째는 맥주를 따를 때 자연스럽게 맥주 안의 입자와 거품을 섞이게 하기 위해서.”
“두 번째는요?”
“두 번째는 맥주의 향으로 후각을 느끼고, 맥주의 빛깔을 보면서 시각을 느끼고, 맥주의 맛을 보면서 미각을 느끼고, 맥주의 차가운 시원함에 촉각을 느낄 때, 청각만 빠지면 섭섭하니까 맑은 구슬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서.”
“그럼 세 번째는요?”
“세 번째는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와 마주 앉았을 때, 왜 구슬이 들어가 있는지 물어보면서 같이 앉아 이야기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어머.”
곧 깔깔거리며 웃고 즐거워하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그때.
“이원이 아빠!”
그 나이보다 늙수레해 보이는 남자를 부르는 소리였다. 모두가 일제히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그녀였다.
“어, 미영아? 너, 너, 너 여기에 왜 왔냐?”
남자는 당황했다. 그녀가 성큼성큼 남자 앞으로 다가가자, 남자 옆에 있던 여자들은 ‘이원이 아빠’라는 호칭이 꽤 불길하게 들려왔는지 썰물처럼 사라져 버렸다. 남자는 더욱 당황한 모습이었다.
“곽재식, 너 나 좀 도와 줘야겠다.”
“야,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갑자기 내 삶에 나타나서 막 이상한 걸 자꾸 개입시키면서 날 혼란시키고 그러지 마. 좀.”
그 남자는 미영의 전남편인 재식이라는 자였다. 재식은 미영의 등장만으로도 뭔가 두려움을 느꼈는지, 화를 내면서도 자꾸만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미영은 빙그레 웃으면서 재식에게 괜히 머리를 들이 밀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 다 이야기 했잖아. 돈도 달라는 대로 다 줬지. 이원이도 자기가 키우겠대서 그대로 넘겨줬잖아. 또 뭐. 자꾸 날 괴롭히지 마. 문득 문득 내 삶에 갑자기 튀어나와서 나를 혼돈의 구렁텅이로 내몰고 그러지 마. 나도 내 살 길을 찾자. 응?”
재식은 짜증내는 듯 했지만, 사실은 좀 떨면서 슬금슬금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재식의 그런 말이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웃는 얼굴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둘이서 잠깐 이야기 좀 하자고.”
그녀는 다시 한 번 그렇게 말하면서, 재식의 팔을 붙잡고, 재식을 끌고 호텔 안쪽으로 들어갔다.잠시 후, 호텔 로비의 바에서 우리 세 사람은 다시 모이게 되었다. 이번에는 재식이 아까보다 훨씬 침착한 모습이었다. 나는 아직도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재식이 차근차근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무슨 내용인지 대충 미영이한테 이야기는 들었어요. ‘콘도르 눈동자’라는 영화가 있고 속편으로 ‘콘도르 발톱’ 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그 영화 내용이 미영이 운명이랑, 뭐 인류의 미래? 하여간 심각한 걸 담고 있다면서요. 그래서 그 영화 내용그대로 운명이 펼쳐지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악마의 칼에 죽는 거랑 인류가 멸망하는 영화 내용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사실 뭔 말인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뭐, 언제는 미영이 말을 이해하고 살았던 것도 아니고, 대강 그러려니 하고 있어요.
하여간 이런 경우에 기대해 볼 수 있는 건 한가지 밖에 없어요. 영화 막판에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서, 사실은 그런 일이다 없던 일이 되어버리는 결말로 되어 버리는 거지요. 막말로 내용을 몰라서 그렇지, ‘콘도르 발톱’ 영화 맨 마지막에 멸망했던 인류가 다 되살아나고, 다시 모든 상황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되는 걸로 갑자기 잘 풀려버리면 걱정할 것 없는 거잖아요?”
솔깃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내 내가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정말로 내용이 그런지 모르잖아요. 이 자식들 영화 막판을 이상하게 신파극 비극으로 끝내는 걸로 보면, 반전이 일어나서 행복하게 끝나기보다는 괜히 엉뚱하게 다 죽으면서 끝나는 이야기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요. 그런 영화 내용대로 되면 그냥 인류 멸망이라고요.”
내 말을 듣고 재식이 미영을 한 번 힐끗 보았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그래서 미영이가 나한테 시킨 거예요.”
“뭘 시켜요?”
“직접 두 영화의 판권을 계승하는 정식 후속편을 하나 더 만들어내라고요.”
“예?”
“영화 내용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영화의 상황을 다 뒤집어 버리는 속편이 하나 더 있으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하다못해 지금까지 일어난 일은 다 꿈이었다…… 하는 황당한 반전만 하나 집어넣어도, 미영이가 죽을 뻔 하는 일이나, 인류가 멸망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겠죠. 그냥 그런 악몽을 한 번 꿀 뿐이지. 그래서 미영이는 1편, 2편에 있는 일을 모두 뒤집을 수 있는 시리즈 공식 3편을 만들어 내라고 부탁했…… 아니 시켰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미영을 쳐다보았다. 미영은 내 기억 속에 있던 표정 그대로 함부로 다가가기 어렵지만, 결코 얼굴을 돌리고 싶지는 않은 그런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재식이 말을 계속했다.
“이렇게 하겠습니다. 3편의 제목은 「콘도르 날개」 정도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콘도르 날개」의 앞부분에서 반전을 넣어서 1편과 2편의 내용을 뒤집어 버리겠습니다.1편 「콘도르 눈동자와 예언대소동」의 내용과 2편 「콘도르 발톱과 바캉스대작전」의 내용은 그냥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처리하겠습니다. 1편과 2편의 사건들은 실제로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 그냥 주인공들이 잠시 듣고 보는 가짜 이야기로 처리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이게 다 꿈이었다.’랑 거의 같은 방법입니다. 주인공이 실제로 겪은 일이 아니라, 그냥 극중 인물들이 그런 이야기를 어디서 봤거나 들었다는 식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나마 암울한 내용들이 불확실해 지도록 잠결에 대강 보고 들은 것으로 처리하고 정확하게 내용을 파악할 수도 없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안심하기 위해서, 3편 줄거리의 뒷부분에는 인류가 멸망하지도 않고, 주인공이 죽지도 않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만들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책에다 실어서 출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잠깐만.”
거기까지 재식이 이야기 했을 때, 미영이 막아섰다.
“뒷이야기는 내가 시키는 대로 그대로 써야 돼. 우리끼리 해결하자고.”
미영은 다시 재식을 끌고 일어나, 컴퓨터가 있는 호텔 비즈니스 룸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야, 넌 전부 다 네 멋대로냐. 그럴 거면 네가 쓰지, 왜 날보고 쓰라고 그러는데? 왜 내가 네 고등학교 때 애인까지 신경 써야 하는데? 하여간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시는 이런 일 없기다.”
“글쎄 알았다니까 재식아. 알았어, 알았어. 착하지? 우리 아기?”
“아기는 뭔 아기?”
투덜거리면서 재식은 미영에게 끌려들어 갔다.
재식이 그날 밤 컴퓨터 앞에서 ‘콘도르 시리즈’ 완결편인 「콘도르 날개」를 쓰고 있을 때, 나는 잠깐 졸면서 기다리다가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었다.정말로 콘도르 시리즈의 뒷이야기대로 운명이 펼쳐진다면 그 이야기에 내가 로또에 당첨되어 백만장자가 된다거나, 문근영과 달콤한 밀회를 갖는 내용을 넣을 수도 있을 것 아닌가? 콘도르 시리즈 3편 「콘도르 날개」의 줄거리에 내가 비틀즈를 능가하는 인기 가수가 된다고 쓰면, 나는 정말로 위대한 가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에 내가 대통령이 되고 황제가 된다는 내용을 넣으면, KOEI 사에서 나의 일대기를 소재로 한 컴퓨터 게임을 만들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이야기에 쓰는 대로 내 미래는 마음대로 신나게 꾸며낼 수 있는 것 아닌가 말이다.
나는 이야기 내용 속에 내가 바라는 내용을 몇 가지라도 집어넣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녀와 곽재식이 이야기를 쓰고 있는 곳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그녀는 가벼운 손짓으로 나를 쫓을 뿐이었다.그렇게 그날 밤은 깊어 갔다.


7

이튿날 서울로 돌아왔을 때, 은숙은 이미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한 번 털어놓고 모든 이야기를 해 보자고 했다. 우리는 사실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어느 부분이 문제였고, 어디서 꼬였는지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상당히 어색한 시간을 좀 더 가져야 했지만, 최종적으로 완전히 화해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나는 내 아내가 잠시 내 곁을 떠나는 것 만으로도, 온갖 엉뚱한 생각에 휘둘리게 되어서, 인류의 미래와 운명론의 철학적 비관까지 걸고넘어지게 되는 그런 극히 은숙 의존적인 인간이었던 것이다.
한편 나를 보고 회사를 그만두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던 상무는 카자흐스탄 지사로 발령이 나서 서울을 떠나고 말았다. 기술팀은 영업팀과 통합이 되고 조정되면서 일하는 방식이 좀 바뀌었다. 나는 여전히 지긋지긋하게 재미없는 방식으로 프로그램 ROM칩을 만들고 있지만, 회사에서 잘리기 전에 내가 먼저 살길을 찾아 나갈 수 있을 정도의 판은 만들어 놓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미영과는 지금도 가끔 회사 빌딩에서 마주칠 때가 있다. 처음에는 그 여름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 뭔가 웃고 떠들면서 길게 이야기라도 하든지, 아니면 무슨 정리하는 대화라도 한 번 날을 잡아 나누어야 하지 않겠는가 싶었다. 하지만 도무지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나는 여전히 그녀와 마주칠 때마다 무엇인가에 압도되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며 피하고 싶기만 했다. 그녀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그녀다운 웃는 얼굴로 가볍게 안부를 물을 뿐이었다.
하나 덧붙이자면 아침에 우유에 말아먹는 옥수수 과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우리 부부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나 하는 것은 일단 제쳐 두고, 좀 더 중요한 문제를 부각해서 말하고 싶다. 지면이 허락하지 않아 짧게 요약하자면, 옥수수 과자가 우유에 녹아 젖은 정도를 두고 고민하는 것 따위에는 예민하게 굴 필요는 결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사소한 일을 하찮은 일로 무시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조절에 잠시 실패했을 때, 얼마나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길지에 관해서는 ‘콘도르 시리즈’ 완결편인 「콘도르 날개」에서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끝으로 여러분 모두 물론 잘 아시다시피, 인류는 멸망 같은 거 당하지 않고, 여전히 대체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 2008년 제주도에서

* 이 글은 황금가지에서 발행한 "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에 실려 정식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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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 No Profile
    날개 08.08.03 23:33 댓글 수정 삭제
    책으로 잘 읽었습니다. 역시나 멋진 이야기였습니다.
  • No Profile
    ida 08.08.04 03:45 댓글 수정 삭제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책 봤을 때 읽은 글일 줄 알고 봤다가 깜짝 놀랐어요. 저번 편도 재미있었지만 이번 편이 더 즐거웠습니다.
  • No Profile
    곽재식 08.08.04 18:11 댓글 수정 삭제
    이 이야기의 소개글은 이 링크 http://gerecter.egloos.com/3839072 를 참조하셔도 좋겠습니다.

    날개/ 감사합니다. 책으로 나간 것이라서 출판되는 "책"이라는 특징을 좀 많이 살려 보려고 노력한 면이 있었습니다. 과분한 평도 즐거이 읽었습니다.

    ida/ 오히려 42호에 실린판을 더 재밌게 보셨다는 분도 계시는데, 그러고보면 42호에 실린판에 있는 화려한 결말 파국 장면 묘사 같은 맛이 조금 더 있었으면 싶겠다 하는 생각도 듭니다.
  • No Profile
    피러휀 09.07.29 20:42 댓글 수정 삭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판타지한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네요.^^ 요즘 U, ROBOT를 보고있는데요. 박시은 특급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마지막 외계인과의 교신.. 압권이었어요. ㅎㅎㅎ 지하철에서 크게 웃을 뻔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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