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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영 도넛

2007.05.26 23:0705.26

 멀리 내던져버렸던 의식이 어느 사이엔가 제자리로 돌아와 검은 공간을 인식하고, 가만히 바라본다. 그 어둠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나뒹구는 것만 같은 심장 소리가 조용히 들려온다. 어둠 속으로 간신히 파고 들어오는 심장 소리는 조그맣고, 또 멀다. 짧은 순간 동안 여러 번 뛰다가, 다시 한참이나 멈추어서기를 반복하는 그 울림 소리에는 죽음이 베어있다. 어딘가 아프고 어딘가 잦아드는 그 불길한 울림과 함께 심장이 죽어가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놀라 눈을 치켜 뜨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가슴을 짚어보거나 할 수가 없다. 의식이 머리통만한 어둠 속에 가늘게 떠다니기만 할 뿐, 몸으로 녹아 들지 못하는 탓이다. 아마도 몸은 이미 죽어서 멈춰가는 중이고, 의식이 어딘가로 날아가버리기 위해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죽는구나. 이렇게 죽는구나. 참 흔하게도 배고픔과 목마름에 지쳐서 잠이 들었다가 죽어버리는구나.
  의식은 점점 불규칙한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짧게 여러 번 울리고, 한동안 침묵하는 심장은 한참을 듣고 있어도 좀처럼 멎지 않는다. 심장이 뛰고 또 멈출 때마다 두려움과 기쁨이 이리저리 오간다. 그렇게 심장이 멎는 순간을 가늠하고 있으려니, 심장 소리가 갑작스레 잦아든다. 아니, 멀리 물러난다. 마치 등 돌린 사람의 목소리처럼,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물러나버린다. 그제서야 귀가 트인다. 멀리 내 몸 바깥에서 들려오는 심장 소리는, 불규칙한 그 울림은, 기침 소리다. 당장 죽어버릴 듯이 짧게 울부짖다가 흐느끼듯 잦아드는 기침 소리다. 기침 소리, 나리아의 기침 소리다. 나리아. 나리아. 나리아. 기침 소리에 떠오른 이름을 되새기며 의식을 몸 안으로 밀어 넣는다. 눈을 떠야 한다. 귀를 기울어야 한다. 몸을 움직여야 한다. 일어나. 일어나.
  마치 토하듯이 갑작스레- 막막한 시야, 먹먹한 귀, 그리고 자꾸만 가라앉는 몸뚱이가 의식 아래 무겁게 매달려 흔들린다. 무겁고 둔탁하고 저릿한 몸을 매단 의식은 걷잡을 수 없이 헝클어진다. 그 어지러운 머릿속을 다 잡으려 길게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가슴 속으로 밀려들어온 메마른 공기가 날카롭고 뜨겁게 살을 찢고 태운다. 놀라 뱉어낸 날숨에는 살이 타는 불쾌한 냄새가 섞여 코를 찌른다. 아픔이 온몸을 쥐어 짜지만, 죽다가 만 몸으로는 비명조차 지를 힘이 없다. 잠들기 한참 전부터 아무것도 마시지 못했는데도 용케도 솟아나온 눈물이 막막한 시야를 일깨우고, 볼을 타고 흘러 입술에 닿는다. 입술에 닿은 것은 단지 몇 방울의 눈물이라는 사실을 아는데도, 마치 뭔가를 먹은 것처럼 팔과 다리에 거짓말처럼 기운이 돈다. 기침 소리가, 나리아의 기침 소리가 먹먹한 귀를 비집고 들어온다.

  "시."

기침 소리에 떠밀려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다. 팔과 다리만 깨어난 마냥, 일으켜 세운 몸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앞뒤로 좌우로 쓰러질 듯이 기운다.

  "시."

바싹 마른 목소리는 하려는 말을 송두리째 잃어버린다. 지금 순환기 돌릴게, 나리아. 지금 순환기 돌릴게, 나리아. 지금.

  "시."

습관에 기대어 걷잡을 수 없는 몸을 겨우 조작기 앞에 가져다 세운다. 생활 카드를 항상 조작기 위에 보관하는 습관 덕분에 더 이상은 헤매지 않을 수 있다. 바로 카드를 집어 조작기 안으로 집어넣고, 순환기 버튼을 누른다. 바닥이 울리고, 희미한 바람 소리가 들린다. 메마르고, 먼지투성이인 들숨이 천천히 약 내음으로 젖어 든다. 다시 한 번 눈물이 입술에 닿는다.

  "순환기 켰어."

젖은 들숨으로 겨우 목소리가 말을 찾는다. 대답은 없다. 조작기가 달린 벽에 잠시 기대어 있다가 천천히 몸을 돌린다. 작은 침대 위에 길다랗게 그리고 무게 없이 누워있는 나리아가 보인다. 잠들기 전에 확인했을 때보다 좀 더 어두워진 갈색 얼굴도 나를 본다. 묘하게 빛을 내뿜는 것만 같은 그 푸른 눈동자에 이끌려 침대 옆에 놓아둔 의자로 걸어가 앉는다.

  "늦어서 미안해."

열흘 전, 나리아는 말을 잃었다. 그보다 더 전에는 웃음을 잃었고, 훨씬 전에는 노래를 잃었다. 물품 점검 작업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나리아는 아름다운 갈색 피부와 커다란 웃음 소리, 명랑한 목소리, 그리고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여자였다. 일을 할 때마다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나리아가 좋아서 사귀었고, 사귀는 행복에 이끌려 같이 살기를 약속했다. 생활 카드를 동거자용으로 바꾸고, 동거용 벌집을 얻고, 물건을 바꾸고, 기념 파티를 열었다. 기념 파티를 연 날, 나리아는 하루 종일 노래하며 웃었다. 데 카라아라 빠르디, 세 빠라아라 슈다드. 뜻은 모르지만 아주 오래 전 어머니에게 배웠던 노래라고 했다. 데 카라아라 빠르디, 세 빠라아라 슈다드. 가르쳐 줄 테니 같이 부르자고 했다. 데 카라아라 빠르디, 세 빠라아라 슈다드.
그리고 내가 그 노래를 외우기도 전에 나리아가 쓰러졌다. 외부 중독- 의사는 나리아와 나처럼 바깥에서 들어온 물건들을 분류하고 검사하는 작업을 하다 보면, 그런 병에 걸릴 수 있다고 했다. 그 중 몇몇 중독은 고칠 수 있지만, 나리아가 걸린 중독은 고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까 아마도, 그리고 분명히 죽을 거라고 했다. 아주 천천히 아프게 죽을 테니, 잘 보살펴주라고 했다. 나리아가 웃음을 잃은 후부터는 작업장에 나갈 수가 없었다. 생활 점수를 아끼고 아껴가며 사용했지만, 금새 바닥나 버렸다. 그 후로도 어쩔 수 없이 생활 점수를 빌리러 나갈 때를 제외하고는 늘 나리아 곁에 앉아 있었다. 언젠가 나리아가 다시 노래할 것 같았기 때문에, 그 노래를 듣고 싶어서 떠날 수 없었다. 데 카라아라 빠르디, 세 빠라아라 슈다드.
나리아가 나를 보며 입술을 움직인다. 윗입술을 봉긋하게 내밀고, 다음으로 아랫입술을 내밀면서 살짝 입을 열다가 다문다.

  "응, 물 갖다 줄게."

나리아의 머리맡에 놓아둔 잔을 집어 들어 침대 끝에 세워둔 보급기에 밀어 넣고, 공급 버튼을 누른다. 사실은 나리아의 그 입술이 무얼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단지 나리아가 처음으로 그렇게 입술을 움직였을 때, 내가 물을 주었을 뿐이다. 어쩌면,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데 카라아라 빠르디, 세 빠라아라 슈다드. 보급기가 낮게 울리며 천천히 물을 흘려낸다.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방울 지며 떨어지는 물방울이 점차 한 갈래 줄기로 변하는 순간, 보급기가 멎는다. 순환기의 희미한 바람 소리도 멎는다. 조작기에서 흘러나오는 짧은 경고음이 벌집 안을 날카롭게 가로지른다. 내 숨이 멎는다.

  - 생활 점수가 부족합니다.

다행히도 보급기 속의 잔에는 약을 먹을 수 있을 만큼의 물이 차있다. 떨리는 손으로 먼저 보급기 위에 놓아둔 약병을 집는다. 나리아를 살릴 수는 없지만, 잠을 자게 해줄 수 있다면서 그녀가 준 약이다. 한 번에 두 방울만 넣어야 한다. 너무 많이 넣으면 나리아가 영원한 잠을 잘 수 있다면서 그녀가 준 약이다. 물잔을 꺼내 약을 한 방울, 그리고 다시 한 방울 잔 속에 떨군다.

  "이거 마셔."

기운 없는 몸을 침대에 기대고, 떨리는 팔에 힘을 주어 잔 끝을 나리아의 입술에 대고 조심스럽게 기울인다. 입술을 달싹이며 물을 마시는 나리아의 얼굴은 지쳐 보인다.

  "한숨 자고 나면 좀 나을 거야."

거짓말을 하는 나를 푸른 눈동자가 바라본다. 나리아는 이제 노래할 수 없고, 웃을 수도 없고, 말을 할 수도 없다.

  "자는 동안, 나, 가서 일이라도 하고 올게. 생활 점수 벌어야지."

거짓말을 하는 나를, 푸른 눈동자가 바라본다. 물품 분류 작업장은 더 이상 나를 받아주지 않는다. 너무 오래 쉬었고, 나리아의 자리와 내 자리는 이미 남아있지 않다. 이 곳 최종 분류 지구에서 물품 분류 작업말고 다른 할 일은 없다.

  "사랑해."

물을 다 마신 나리아가 눈을 감는다. 그 이마에 입을 맞추고, 이불을 뒤집어 덮어주고, 금새 잠에 빠진 나리아의 손목을 살짝 쥐어본다. 손목 아래에서 희미한 맥박이 뛰고 있다. 살아있다. 나리아는 아직 살아있다.

  "다녀올게."

당장이라도 멈출 것만 같은 맥박을 쥔 체로 잠든 나리아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춘다. 나리아의 맥박을 조금 더 확인하다 손목을 놓는다. 잠이 든 나리아의 얼굴을, 그리고 숨을 쉬는 가슴을 바라보면서 옷을 갈아입고, 조작기에서 생활 카드를 꺼내어 주머니 속에 넣고, 낡은 부츠를 신고, 문을 나선다. 문을 닫기 직전 고개를 넣어 숨을 들이마셔 본다. 벌집 안의 공기는 아직 약에 많이 젖어있다. 이 정도라면 서너 시간, 아니, 나리아 혼자라면 다섯 시간 동안은 편하게 숨 쉴 수 있겠지. 문을 닫고 벌집 거리로 향한다. 히스패닉- 그녀를 만나야 한다.

*        *        *        *        *        *        *        *

문을 닫고 돌아서는 순간, 벌집 거리의 냄새가 아릿하고 역하게 숨을 틀어막는다. 정신을 앗아가는 그 냄새에 숨을 멈추고, 외투 주머니에서 여과기를 꺼내어 입과 코를 가린다. 사용 기한을 벌써 1년이나 초과한 여과기지만, 그래도 목을 조여오는 벌집 거리의 공기를 어느 정도 걸러준다. 물품 분류 작업 시간의 벌집 거리는 한산하다. 멀리 광장까지 일직선으로 쭉 뻗은 거리에는 나리아처럼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문밖에 나와 주저 않거나 비스듬히 누워 있다. 한 사람이 겨우 몸을 눕힐 수 있는, 그 좁아터진 개인 벌집 속에서 죽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렇게 체념을 하고서도 끝이 찾아오기를 한참이나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광장을 향해 걷는다. 한산한 거리에는 분류 작업이 끝난 물품들이 바닥이나 천정, 그리고 벽 속에 들어있는 수송관을 타고 흐르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나리아가, 내가 사는 최종 분류 지구에서 분류한 물품들은 우리 지구에 필요한 만큼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수송해야 한다. 그녀, 히스패닉은 물품들이 보통 질이 나쁜 것은 아래 지역으로, 질이 좋거나 희귀한 것은 높은 지역으로 흘러간다고 했다.

  - 그래도 최종 분류 지구는 그나마 나은 편이야.

  히스패닉은 이 곳 최종 분류 지구보다 훨씬 위에 있는 지도 통제 지구에서 내려온 사람이었다. 그녀는 어둡고 비좁은 벌집 거리의 벌집이 아닌 특별 구역의 넓은 집에서 살았고, 생활 점수가 없어도 공기와 음식과 물을 마음대로 공급 받았고, 치안 관리 지구에서 내려온 사람들에게 보호 받았다.

  - 가장 아래쪽 지구에는 아무 것도 없어.

작년, 그녀는 나와 나리아가 일하는 제 5 구역 분류 작업소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새로운 감독이 취임했지만, 한동안 그녀의 이름도 얼굴도 목소리도 알 수 없었다. 매일같이 작업소를 순회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항상 외부 중독을 막기 위해 빈틈이 없는 두꺼운 옷과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헬멧을 쓰고 있었고, 작업소 책임자에게만 말을 했다.

  - 감독님이 점심 시간에 잠깐 보자고 말씀하시니까, 점심 시간에 잠시 나와.

어느 날, 갑작스럽게 불려간 자리에서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와 나리아와 다른 하얀 피부, 붉은 눈동자, 금색 머리칼의 그녀는 어쩐지 무서울 정도로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이름은?

그녀의 책상 너머에 가만히 서서 한참 동안, 질문에 대답했다. 이름, 나이, 키, 몸무게, 혈액형, 부모, 살아온 이력, 사는 장소- 추궁을 받는 것만 같은 기분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울어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을 때야, 그녀는 질문을 멈췄다.

  - 가봐.

서둘러 사무실을 나서면서 두 번 다시 불려오는 일이 없기를 바랬다.

  - 동양인.

하지만, 그녀는 그 뒤로도 몇 번이고 나를 불러냈다.

  - 예전에는 너 같은 사람을 동양인이라고 불렀어.

처음 불려간 뒤로는 질문을 받기 보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경우가 많았다.

  - 검은 눈동자, 검은 머리카락, 검은 털, 작은 체격이 특징이지.

불안하고, 무서웠지만, 불려갈수록 익숙해졌고, 난생 처음 듣는 그녀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 최종 분류 지구에서는 단 한 번도 배우거나,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를 그녀는 매번 한참이나 들려주었다.

  - 넌 굉장히 드문 존재야. 배신 이전 시대에도 너처럼 검고 검은 동양인은 드물었어.

나리아 역시 그녀의 이야기를 좋아했고, 나는 나리아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좀 더 많이 듣고 싶어서 조금씩 대담해졌다.

  - 히스패닉, 배신 시대 이전에 나는 히스패닉에 속했어. 그래서 히스패닉이야.

그녀가 말을 멈출 때마다, 나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하곤 했다.

  - 7년하고 반 년을 살았어.

질문을 할 기회는 좀처럼 없었지만, 가끔 좋은 질문을 던지면 그녀에게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었다. 그런 날에는 나리아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밤을 지새우곤 했다. 비록 빈번하게 점심을 먹지 못했지만, 나도 나리아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쁨에 비교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 어째서?

하지만, 그 기쁨은 갑작스럽게 끝나고 말았다. 항상 책상 뒤 편에 앉아있던 그녀가 갑작스레 앞으로 걸어 나와 손을 뻗었다. 내 머리칼을 쓰다듬고, 뺨을 어루만지고, 입술을 누르고, 턱을 오가던 그 손이 목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그녀를 밀쳐냈다.

  - 대답해.

겨우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본 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두 눈은 분노에 흔들리고 있었다.

  - 대답해.

한없이 차갑게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에 쫓기듯 도망쳐 나왔고, 그 날 밤에는 악몽에 시달려 잠을 자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는 나를 불러내지 않았다. 그래도 아쉽지 않았고, 후회 하지도 않았다. 이제 제대로 점심을 먹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나리아와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리아가 쓰러지기 전까지는, 나리아의 간병을 위해서 아무도 신청한 적 없고, 신청할 생각도 없는 휴가를 얻기 위해 작업소 책임자에게 말을 꺼냈을 때, 감독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답변을 받기 전까지는 그랬다.

  -…….

가만히 앉아 나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모니터 만을 바라보는 그녀를 바라보며 후회했다. 그때, 그녀의 손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랬다면, 그랬더라면, 그럴 수 있었다면!

  -다 나을 때까지 나오지 않아도 좋아.

길고 긴 침묵 끝에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정말로 단 한 번도 기대한 적 없었던 대답이었다. 놀라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나에게 그녀는 의사를 보내주겠다는 약속과 다시 나올 때까지 필요한 생활 점수도 보태 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생활 점수가 필요하면 내 집으로 와. 점심 이후에는 항상 집에 있을 테니까.

쓸데없이 울어서 몸을 낭비하지 말라고 배운 뒤로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남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낀 적도 없었다. 고맙다는 말을 한 번에 그렇게나 많이 해본 적도 없었다.

  -특별 구역 A022, 와서 말하면 들여보내줄 거야.

그 뒤로 생활 점수가 떨어질 때마다 그녀를 찾아간다. 벌집 거리를 빠져 나와 광장을 가로질러 특별 구역을 향해 걷는다. 교대 시간을 기다리거나, 부상으로 몇 일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하릴없이 모여들어 잡담을 나누는 광장 중앙을 지나치면, 곧 특별 구역으로 향하는 복도 입구가 나온다.

  "통과."

처음 그녀를 찾아가던 날에는 복도를 경비하는 치안 관리인에게 붙잡혀 질문을 받고, 그녀가 복도로 나와 나를 데려가야 했다.

  "A022, 히스패닉 감독에게 방문객, 주민 번호 51982, 기간 미정."

지금은 치안 관리인들이 나를 막지 않는다. 그저 짤막한 말과 함께 길을 비켜주고, 어딘가를 향해 보고를 남길 뿐이다. 복도 끝에는 광장만큼이나 넓은 거리와 커다란 집들이 있다. 복도 끝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 걷는다. 이제 곧 A022- 그녀의 집이 나온다.

*        *        *        *        *        *        *        *

  문을 열고 나온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인상을 쓴다. 그 표정을 보고서야 아직 여과기를 벗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새 여과기를 사다 쓰라고, 그녀가 보태 준 생활 점수를 다른데 써버렸다는 사실을 바보처럼 들켜버렸다.

  "냄새 나."

떨리는 손으로 여과기를 떼어 주머니 속에 넣자마자, 그녀가 말한다. 분노를 참는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다. 몸이 떨린다. 목욕을 하라고 보태 준 생활 점수도, 세탁을 하라고 보태 준 생활 점수도, 여전히 다른데 쓰고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고스란히 들킨다.

  "들어와. 일단 씻겨놔야겠네."

그녀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들어선다. 집으로 한 발자국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거칠게 내 외투를, 부츠를, 옷을, 바지를, 속옷을 남김없이 벗긴다. 작업소에 있는 기계처럼 재빠르고, 온기 없는 손길에 부끄러워하거나, 저항할 사이도 없다.

  "먼저 가 있어. 세탁기에 넣고 올게."

고개를 숙인 채로 말없이 이제는 익숙한 바닥을 바라보며 걷는다. 목욕 박스에 들어가 가만히 서있으니 곧 옷을 벗는 소리가 들리고, 그녀가 들어온다. 숙인 시선으로 길게 뻗은 그녀의 하얀 다리와 상처 하나 없는 발이 보인다.

  "온수."

짤막한 말을 하자마자 벽에 달린 관 끝에서 따뜻한 물이 흘러나온다. 샤워, 배신 시대가 오기 전까지는 누구나 일어나서 한 번, 자기 전에 한 번 했다는 샤워다. 따뜻한 물이 온몸을 타고 흐른다. 물이 몸에 부딪히는 감촉부터, 쉬지 않고 흘러내리는 감촉까지- 나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나올 만큼 기분 좋다.

  "목 씻게 머리카락 좀 잡고 있어."

내 몸이 충분히 젖을 동안, 그녀는 목욕 튜브에서 소독약을 짜와 내 머리카락에 바르고 곧 이어 내 몸에도 바른다.

  "팔 들어."

옷을 벗길 때처럼 내 몸을 아프게 문지르는 그녀의 손은 소독약 탓에 서늘하다. 그 서늘한 손이 등과 가슴을 오갈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발 올려봐."

더러운 것과 함께 물을 타고 미끄러져 소독약 거품을 바라보다, 그녀의 손이 허리 아래로 내려오면, 고개를 들고 눈을 감는다. 그녀의 서늘한 손이 발가락 사이를 지나고 발바닥을 잠시 주무르고 나면, 샤워는 끝이다.

  "온수 그만."

온수가 멎는다. 따뜻함이 가시는 느낌이 어쩐지 아쉬우면서도, 그런 아쉬움 따위를 느끼는 스스로가 싫다.

  "온풍, 5분."

곧바로 뜨거운 바람이 목욕 박스 바닥에서 솟아 오른다. 몸을 말리기 위해서 바람을 사용한다는 사실이 아직도 신기하다. 최종 분류 지구에서 바람이란, 고작해야 수송관에 물품 박스를 집어넣을 때나 잠깐 느낄 수 있는 현상에 불과했다. 수송관에서 흘러나오는 눅눅한 냄새와 끈적한 물기를 머금은 바람은 기분 나쁘지만, 목욕 박스의 바람은 다르다. 온수만큼은 아니라도 잘 마른 향기로운 바람이 축축하게 젖은 몸을 휘감아 도는 것이 기분 좋다. 젖은 머리칼이 조금씩 마르면서 바람을 따라 위로 흩날리는 기분도 좋다.

  "기분 좋아?"

그녀의 목소리에 그만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따뜻한 물과 따스한 바람에 느슨하게 늘어뜨린 몸도 순식간에 움츠러든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람이 멎는다.

  "나가자."

다시 그녀의 손에 이끌려 목욕 박스를 나선다. 몸에서 나는 냄새가 걷힌 탓일까, 넓고 넓은 방안에 맴도는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살짝 달면서도 끝에 쓴 맛이 나는 향기가 상쾌하다. 그 상쾌한 향기 속에 가만히 서서 옷을 입는 그녀를 바라본다. 나는 아직 옷을 입을 수 없다.

  "먼저 가서 앉아 있어."

들은 대로 언제나 나를 앉히는 의자로 걸어가 앉는다. 푹신한 천이 깔린 의자에 앉아 긴 탁자에 엎드려 눈을 감는다. 뜨거운 물과 바람을 끼얹고 난 뒤에는 어쩐지 기운까지 씻겨 나간 듯이 그저 드러눕고 싶다. 방안의 공기에 상쾌한 향기가 섞여 있지 않았다면, 벌써 잠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자."

탁자가 울린다. 눈을 뜨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고, 왼팔을 내민다. 그녀는 천천히 위생 박스를 열어 이것저것 꺼내어 늘어놓는다. 처음에는 그저 이상하고 무서운 도구였지만, 이제는 이름도 다 알고, 용도도 다 알고 있는 위생 도구들이다. 먼저 채혈 도구로 왼팔을 찔러 피를 뽑는다. 그 피를 혈액 검사기에 넣어 검사를 하는 동안, 주입 도구로 다시 왼팔에 약을 넣는다. 처음에는 영양제를, 그 다음에는 항생제를, 그 다음에는 예방제를 주입하고 나면, 레몬 맛이라는 단 맛이 나는 약을 받아 씹어 삼킨다.

  "피부가 왜 이래? 굶었어? 머리 결도 엉망이고."

그리고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그녀는 나를 살펴본다. 얼굴, 눈, 코, 입술, 머리카락, 귀, 가슴과 배, 등과 허리를 이리저리 쓰다듬고 누르고 두드려본다.

  "생활 점수를 다 어디다 쓰는 거야? 넉넉하게 주잖아."

조금 차가운 목소리로 묻는 그녀에게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다. 어쩔 수 없다고는 대답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미안하다고 대답하고 싶지도 않다. 그냥 고개를 숙인 체, 채혈 도구가 찌른 곳을 헝겊으로 꾹 누를 뿐이다.

  "잘 씻고, 잘 먹으라고 주는 건데, 이러면 곤란해."

그녀가 말하는 대로 생활한다면, 점수는 겨우 이틀이나 사흘이면 다 떨어진다. 일부러 딱 그만큼만 준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서 그렇게 써버릴 수가 없다.

  "아까 여과기도 그렇고 말이야. 자꾸 그러면-"

혈액 검사기가 그녀를 부르고, 차가운 목소리가 멎는다. 말없이 검사기를 들여다본 그녀는 천천히 위생 도구를 도로 집어넣고 위생 박스를 닫는다.

  "입어."

그녀가 탁자 서랍에서 꺼내주는 얇은 옷을 받아 입는다. 배신 이전 시대에서는 치마라고 불렀다는, 상의와 하의가 붙어있는 옷이다. 옷마저도 부드러운 감촉과 향긋한 내음이 스며있다.

  "음식 만드는 동안, 뭐라도 좀 더 바르자."

옷을 입자마자 그녀에게 이끌려 소파라고 부르는 커다랗고 푹신한 의자에 눕듯이 앉는다. 그녀는 소파 근처 탁자 위에서 또 다른 상자를 가져와 이것저것 늘어놓는다. 소파는 푹신하고 또 따뜻하다.

  -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항상 손톱을 먼저 깎으면서, 그녀는 혼잣말처럼 이야기를 했다.

  - 수송관 이야기는 전부 거짓말이니까, 절대로 믿지마.

최종 분류 지구의 환자들 사이에는 치료할 도리가 없는 환자를 수송관에 넣으면 위쪽 지구로 옮겨가게 되고, 운 좋으면 치료를 받고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고, 가끔 정말로 수송관에 뛰어드는 사람도 있었다.

  - 그냥 쓰레기처럼 바깥으로 쓸려나갈 뿐이야.

바깥.

  - 우리는 도넛이라는 커다란 집에 살고 있는 거야.

도넛.

  - 속이 빈 동그라미를 탑처럼 쌓아놓은 모양을 도넛이라고 해.

탑.

  - 아주 높은 집이야. 높고 높은 집.

더 이상 나리아에게 이야기를 해줄 수 없는데도,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묻고, 다시 들었다. 도넛 바깥은 배신자들이 사람이 살 수 없는 세상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이야기도 그녀에게 들었다. 배신 시대 이전 사람들은 집이 아닌 들판이라는 곳에서 살았고, 생활 점수가 없어도 빛이 내리 쬐었고, 물이 넘쳐 흘렀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고 했다. 그리고 지도 통제 지구에 세 마리 밖에 없는 동물이라는 생명체도 많았다고 했다.

  - 몰라, 나도 멀리서 몇 번 봤을 뿐이야. 팔하고 다리를 전부 사용해서 걸어 다녀.

바깥으로 쓸려나가 죽은 환자는 도넛 맨 아래쪽, 수색 수집 지구의 괴물들이 잡아 먹는다고 했다.

  - 괴물이야. 사람처럼 생겼지만, 팔이 몇 개 더 있거나, 눈이 몇 개나 더 붙어 있대.

그 괴물들이 사람은 살 수 없는 바깥을 떠돌면서 닥치는 대로 물품을 주워서 수송관에 넣는다고 했다. 그러면 좀 맛난 음식을 상으로 던져주는데, 괴물들은 그 맛난 음식이 좀 더 먹고 싶어서 쉬지 않고 어딘가에서 물품을 가져온다고 했다.

  - 가끔 위험한 것도 섞여 있어.

괴물들이 쉬지 않고 주워오는 물품 중에는 폭발하는 물품도 있고, 독을 품은 물품도 있어서 최초 물품 분류 지역에서는 매일 사람이 죽고, 많은 사람이 외부 중독에 걸린다고 했다.

  - 그러니까, 여기는 좀 나은 편이야.

손톱을 다 다듬은 그녀는 이번에는 차가운 약을 내 얼굴과 목에 골고루 바른다.

  "창문을 만들 거래."

오늘은 그다지 말이 없던 그녀가 내 윗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한다. 자르지 말라는 말에 한참 동안 기른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진다. 그녀는 빗을 들고 내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쓰다듬는다.

  "창문?"

처음 듣는 말이다. 창문, 그걸 만든다니, 어디다, 왜?

  "여기서 안전하게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거래. 안경 본 적 있어?"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은 죽고 없는 예전 작업소 책임자가 안경이란 이상한 물건을 귀와 코에 걸치고 있었다. 투명한 무언가를 눈 앞에 가져다 대면, 글자가 크게 보이고, 흐릿하게 보이는 것도 또렷하게 보이는 물건이라고 했다. 감독에게 부탁해서 아주 힘들게 구했다고 매일같이 자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쓰러지더니 몇 일 만에 죽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그 안경이라는 건, 누가 어떻게 했을까.

  "거기 달린 투명한 걸 안경알이라고 하거든. 그걸 굉장히 크게 만들면 창문이야."

왜 그런걸 만드는 걸까. 그렇게 커다란 사람은 어디에도 없는데. 괴물을 주려고? 그녀가 빗을 내려놓고,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아래로 쓰다듬는다.

  "벽을 창문 크기만큼 자른 다음에 거기에 창문을 끼워 넣으면 바깥이 보이는 거야."

상상을 해보려 해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바깥, 바깥이 도대체 무얼까. 이제 바깥에는 생활 점수 필요 없는 빛도, 물도, 바람도 없는데, 창문을 만들어서 무얼 본다는 걸까.

  "그러면 괴물도 볼 수 있을 거래."

웃음이 나온다. 겨우 그런 무섭고 기분 나쁜 걸 보려고, 그렇게 커다란 걸 만든단 말인가.

  "재미있어?"

웃음 섞인 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얼어붙는다. 그녀의 손이 뺨에 와 닿는다. 달아오른 뺨 위로 서늘한 그녀의 손바닥이 오간다. 조금씩 내 뺨의 온기가 그녀의 손으로 스며드는 걸 느낄 수 있다.

  "다행이네."

기계처럼 차갑게 나를 벗기고, 씻기고, 검사하는 손길이 아니다. 당장이라도 뺨을 지나 아래로 내려올 것 같은 불안한 손길이다. 찾아올 때마다 각오하고, 또 각오하는 그런 손길이다.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내려오지 않았지만, 어쩌면, 오늘은, 마침내…….

  "밥 먹자."

뺨을 오가던 그녀의 손이 멀어진다. 겨우 숨이 돌아온다. 아주 잠깐 동안 웅크리고 있었을 뿐인데, 몸을 접은 채로 긴 잠이 들었던 것처럼 어깨가 아프다. 멍하니 풀렸던 시야도 조금씩 윤곽을 찾는다. 그렇게 하나씩 평소대로 돌아오지만, 머리는 무겁게 가라앉는다. 웃다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다니. 더럽게, 더럽게시리.

  "와서 앉아."

그녀는 어느 사이 긴 탁자 위에 음식과 음료를 올려 놓고 나를 부른다. 고개를 숙인 채로 긴 탁자에 앉는다. 벌써 여러 번이나 찾아왔는데도 탁자 위에는 처음 보는 음식투성이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만큼 맛있고 따뜻한 냄새가 나는 음식은 딱 두 사람 몫이다.

  "남기지 말고, 다 먹어."

탁자 위에 나리아의 몫은 없다. 처음에는 그 사실에 목이 매여서 먹지를 못했다. 그 다음 번에는 음식을 남겨가려다 뺨을 맞았다.

  - 너 먹으라고 만든 거야, 알겠어?

한숨을 참으면서 천천히 포크를 집는다. 같은 빵이지만, 탁자 위에 놓인 빵은 푹신하고 맛도 매번 다르다. 옆에 놓인 과일이라는 음식도 매번 다르다.

  - 너까지 쓰러지면, 그때는 어떻게 할건데?

어떻게든 맛을 느끼지 않고 먹으려고 해도 푹신한 빵은 고소하고, 과일은 달다. 금새 군침이 흐르고, 어딘가 아릿하게 좋은 기분이 든다. 그래도, 그래도 괜찮다. 식사가 끝나면, 나리아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니까, 변명에 지나지 않더라도, 빨리 돌아가 나리아를 간병하기 위해서 그녀가 내놓는 빵이며, 과일을 남김없이 입 속으로 밀어 넣는다.

  "먹고 있어."

그릇 위에 놓인 빵과 과일을 묵묵히 밀어 넣고 있으니, 그녀가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선다. 돌연한 변화다. 이제까지 그녀가 식사 도중에 말을 하거나, 자리에서 일어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끔 몰래 그녀를 훔쳐 보면, 그녀는 무언가를 꾹 눌러 참는 얼굴로 묵묵히 음식을 먹고 있을 뿐이었다. 음식으로 나에게 짓궂은 말을 하거나, 놀리거나, 위협을 하고 싶은 마음을 참는 표정이었다.

  - 맛있어?

그 한 마디 질문으로 나를 울게 만들 수도 있지만,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랬는데, 지금까지 잘 참던 그녀가 갑작스레 일어서더니 안쪽으로 걸어가 버린다. 그녀의 그릇에 놓인 빵과 과일은 얼마 줄지 않았다. 뭔가, 뭔가 변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을 만큼 무섭다. 배가 아프다. 목이 매여도, 잔으로 손이 가지 않는다.

  "옷 가져왔어. 다 먹고 나서 갈아입어."

평소대로라면, 식사를 하고도 좀 시간이 지나야 옷을 가져다 주었다. 그녀의 목소리도 아주 조금 차갑게 가라 앉아 있다. 두렵다. 남은 빵과 과일을 삼키듯이 먹고, 단 맛이 나는 물을 들이키고 얼른 치마를 벗는다.

  "할 말이 있으니까, 갈아입고 좀 앉아 있어."

그리고는 그녀는 자기 방으로 걸어 들어간다. 차라리 도망가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옷을 입고, 외투를 걸친다. 부츠는 그냥 껴안고, 바지와 옷이 제대로 여미지 않았는데도, 일단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세 발자국.

  "생활 카드."

등 뒤에서 그녀의 차가운 목소리가 날아와 목덜미를 낚아 쥔다. 생활 카드- 걸음이 멎는다. 도망갈 수 없다. 아무데도 갈 수 없다.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이리와."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몸을 간신히 돌려 세운다. 무언가 커다란 봉투를 든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당연히 화가 났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차갑게 가라 앉아 있다.

  "앉아봐."

떨리는 다리, 무너질 것 같은 몸을 간신히 이끌어 탁자 앞에 도로 앉는다. 그녀의 한숨 소리가 작게 들린다. 그녀가 들고 있던 커다란 봉투가 눈 앞에 놓인다.

  "오늘 집에 가면, 나리아하고 나눠 먹어."

생각지도 못한 말이다.

  "스프라고 하는 게 두 통 들었어. 배신 이전 시대 사람들이 환자들한테 주던 음식이야.
   나름대로 맛도 있고, 영양가도 있대. 나리아도 이건 먹을 수 있을 거야."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는 내 얼굴이 아닌 소파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작은 통에 든 건 콜라야. 배신 이전 사람들이 매일 식사할 때 마시던 건데,
   식사 하기 전에 마실 때는 톡 쏘는 게 들어있어서 입안을 헹궈줘. 그리고 식사가
   끝날 때는 톡 쏘는 게 다 빠져 나가서, 단 맛만 즐길 수 있어. 양이 적으니까 잘
   나눠 마셔."

말을 마친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생활 점수 넉넉하게 줄 테니까, 오늘은 나리아 목욕도 시켜줘."
  "왜요?"

나도 모르게 이상한 질문을 해버린다. 믿어지지 않는다. 그녀가 나리아를 위한 음식을 준비해주거나, 목욕할 점수를 준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뭔가 변했다. 무엇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몰라도, 두렵다. 울고 싶을 정도로 무섭다.

  "있잖아."

그녀의 목소리가 가라 앉는다. 숨이 막힌다.

  "지금까지……."

숨소리가 떨린다. 내 숨이 아니라 그녀의 들숨이 떨린다. 무서운 것을 토해내려는 듯이 떨린다.

  "나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어, 그렇지?"

나를 향하는 그녀의 눈길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지만, 입이 열리지 않는다.

  "그리고, 많고 많은 걸 줬어, 그렇지?"

울컥- 눈물이 흘러내린다. 떨리는 손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머리가 어지럽다.

  "나는, 나흘 뒤에 돌아가, 지도 통제 지구로."

돌아간다. 나흘 뒤에. 지도 통제 지구로. 그녀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린다.

  "그 동안 실적이 좋았기 때문에, 내가 실적을 쌓으려고 미친 듯이 노력한 덕분에."

눈물 너머로 일렁이는 그녀의 얼굴에서 몇 가닥의 붉은 빛이 보인다. 그녀의 눈이다.

  "여기서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한 사람 데리고 올라갈 수 있어."

한 사람.

  "더 이상 기다려주고 싶어도, 시간이 없어."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몸이 떨린다. 뭐라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고, 무작정 벌린 입에서는 이상한 신음 소리만 흘러나올 뿐이다.

  "봉투 안에 손수건 하나 들어있을 거야. 약 남았을 테니까, 물에 타서 손수건에
   묻힌 다음에 나리아 얼굴에 덮어줘."

안돼요.

  "아프지도 않고, 고통스럽지도 않을 거야."

안돼요, 안돼요.

  "너도, 나도 할 만큼 했어."

안돼요, 안돼요, 안돼요.

  "문 옆에 있는 박스에서 새 여과기 챙겨가."

그녀는 탁자 위에 생활 카드를 내려놓고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쫓아가서 붙들고 싶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뭐라고 말하고 싶지만, 눈물 때문에 막히는 날숨만이 묘한 소리를 뱉을 뿐이다. 순간, 뱃속에서 무언가가 치솟아 오른다. 눈물, 그리고 함성- 커다랗게 울면서 그녀의 방문으로 달려가 두 손으로 마구 두드린다. 안돼요, 안돼요, 안돼요, 안돼요, 안돼요, 안돼요, 안돼요.

안돼요.

*        *        *        *        *        *        *        *

  그녀는 끝까지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다. 문 앞에서 한참을 울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 사이 벌집의 탁한 공기가 몸 속을 헤집고 있었다. 습관처럼 서둘러 주머니 속에서 생활 카드를 꺼내어 조작기에 집어넣고 순환기 버튼을 누른다. 물 젖은 약 냄새가 금새 코와 입 속을 적신다. 벽에 기대어 숨을 몇 번이고 들이쉬고 나서야 손에 꼭 쥔 봉투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조작기 화면에 찍힌 엄청나게 많은 생활 점수도 눈에 들어온다. 꿈이 아니다- 울컥하고 다시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억누른다.

  "나 왔어."

울렁이는 속을 누르면서 침대 쪽으로 돌아선다. 침대 위에 가볍고도 어둡게 누워 있는 나리아가 보인다. 나리아의 푸른 눈이 나를 본다.

  "있잖아."

손에 든 봉투를 나리아를 향해 내밀며, 웃어본다.

  "맛있는 거, 사왔어."

나리아는 그저 나를 바라만 볼 뿐, 아무런 반응도 없다. 그저 입술을 아주 조금 움직였을 뿐이다.

  "오늘, 오랜만에 목욕하자. 목욕 좋아했잖아."

봉투를 내려놓고, 조작기에서 욕조 버튼을 누른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탓에 조금 거친 소리와 함께 침대 옆 바닥이 열리고 조그마한 욕조가 낮게 솟아오른다. 망설임 없이 자동 청소 버튼을 누르고, 목욕물도 새 물로 바꾼다. 먼저 소독액이 욕조 안으로 들어차고 조용히 회전한다. 그 틈에 침대 위로 올라가 나리아의 윗몸을 일으켜 세운다. 퀴퀴한 냄새가 침대와 나리아에게서 흘러나온다.

  "생활 점수 많으니까 걱정하지마."

나리아의 옷을 벗기면서, 나리아의 뼈만 남은 몸을 더듬으면서, 야윈 뺨에 입을 맞춘다. 거짓말이 아니다. 생활 점수는 정말로 많다. 목욕을 하고 또 할 수 있다. 전등을 가장 밝게 할 수 있다. 순환기를 하루 종일 켜놓을 수도 있다.

  "목욕하자. 내가 씻겨 줄게."

불안하게 자꾸만 떨어지는 나리아의 머리를 붙들고, 야위고 가벼운 몸을 들어 조심스럽게 욕조 속에 내려놓는다. 나리아가 조용히 따스한 물 속으로 가라 앉는다. 들리지 않던 나리아의 날숨이 길고 나지막하게 새어 나온다.

  "좋아?"

나리아의 먼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날숨도 다시 한 번 길고 나지막하게, 내가 들을 수 있게 새어 나온다.

  "다행이네."

손을 뻗어 야윈 나리아의 얼굴을 쥐어본다. 어둔 갈색의 피부에는 힘이 없지만, 그래도 목욕물 덕분에 따뜻하다. 외부 중독으로 쓰러지기 전처럼 포근하다.

  "목욕 실컷 하고, 맛있는 거 먹자. 스프도 있고, 콜라도 있어. 환자 몸에 좋대."

욕조 옆에 앉아 팔을 뻗어 나리아의 몸을 조심스럽게 문지른다. 날 껴안아주고도 넉넉하게 남았던 나리아의 길쭉한 몸은 너무나 앙상하다. 힘을 주면 부러지거나, 깨질 것만 같아서 어느 날 밤에 주고 받았던 손짓처럼 가만히, 그리고 은밀하게 손가락을 움직인다.

  "에."

온 정신을 기울여서 나리아의 몸을 문지르고 있으려니, 문득 목소리가 들린다. 힘없이 떨리는 낮은 목소리- 나리아의 목소리다.

  "뭐라고 했어?"

놀라서 나리아를 마주본다. 나리아의 입술이 움직인다. 언제나처럼 윗입술을 봉긋하게 내밀고, 다음으로 아랫입술을 내밀면서 살짝 입을 열다가 다문다.

  "물 줘?"
  "…으."

목소리가 드물게 입술 사이로 빠져 나온다. 물이 아니다. 물을 달라는 게 아니다. 숨을 멈추고 나리아의 입가에 귀를 대본다.

  "에."

에.

  "아."

아.

  "라."

라.

  "하."

하.

  "으."

으.

  "이."

이.

  "……."

에아라하으이, 에아라하으리, 데 카라아라 빠르디. 데 카라아라 빠르디- 나도 모르게 나리아의 목소리를 따라 중얼거린다.

  "데 카라아라 빠르디."

노래, 나리아의 노래다. 그토록 다시 한 번 듣고 싶었던 나리아의 노래다. 눈물이, 울음이 터져버린다. 나리아의 노래다. 꼭 한 번만이라도 다시 듣고 싶었던 나리아의 노래다. 로렌도 데 카라아라 빠르디, 세 빠라아라 슈다드, 로렌도 이노아무아스 무에로키사스 아곤디스타스. 소얀도, 데 카라아라 빠르디…….

데 카라아라 빠르디.

데 카라아라 빠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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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 Cara A La Pared', Song by Lhasa. 발음 표기가 틀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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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분류 제목 날짜
배명훈 머나먼 퇴근15 2007.11.30
赤魚 반격 - 본문 삭제 -5 2007.10.27
초청 단편 최고의 사냥꾼 2007.09.29
초청 단편 컴패니 2007.08.31
미로냥 유순만담(柔淳漫談) - 본문삭제 -4 2007.08.31
미로냥 지배만담(紙背漫談) - 본문삭제 - 2007.08.31
jxk160 인용2 2007.07.27
jxk160 동거 2007.07.27
jxk160 무덤 2007.07.27
미로냥 화선(花仙) -본문 삭제-2 2007.07.27
초청 단편 바람 부는 날 2007.06.30
배명훈 논문 공장7 2007.06.30
배명훈 매뉴얼 - 본문 삭제 -14 2007.06.30
정대영 도넛3 2007.05.26
곽재식 달팽이와 다슬기6 2007.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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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 단편 아들의 방3 2007.05.26
초청 단편 사막에서 우물을 찾는 방법. 2007.04.28
정소연 옆집의 영희 씨 - 본문삭제 -3 2007.04.28
정소연 처음이 아니기를 - 본문삭제 -1 2007.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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