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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노다, 정말 안 가?”


 리지엘라가 쌍둥이 여동생의 방문 앞에서 모처럼 목청을 높였다.


 “아프다니까. 리 언니 혼자서 가!”


 힘없는, 정말로 아픈 듯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플로리타. 룬트슈테트 님에게는 연락을 하지 않았니?”


 리지엘라가 문 앞을 지키던 하녀에게 물었다. 하녀가 채 대답하기 전에 층계참을 울리며 두 아가씨의 오빠이자 아우스트리아 백작가의 장남인 르네가 여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리. 살디바르 씨의 식물원에 초청 받았다고 하지 않았니? 어제 부탁한 대로 마차를 불러 두었는데.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늦을 거다.”
 “알고 있어요, 오라버님.”
 “그런데 왜 그러고 있어? 시노다는?”
 “아프대요.”


 리지엘라가 꼭 닫힌 방문 쪽을 가리켰다. 르네는 밤색 고수머리 아래 한쪽 눈을 의아한 듯이 찡그리고는, 귀여운 여동생 곁으로 얼른 다가섰다. 문을 두드리며,


 “시노다. 정말 안 갈거니?”


 묻자,


 “열이 있어요. 르네 오빠. 펄펄 끓는다구요.”


 다시 한 번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르네는 리지엘라와 눈을 마주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플로리타. 제…… 룬트슈테트 군은 불렀나?”


 르네가 리지엘라와 똑 같은 것을 물었다. 플로리타라는 이름의 하녀는 이번에야말로 대답을 하려고 했다. 그녀는 더없이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데다 상당히 부드러운 가풍을 지닌 이 아우스트리아 백작가의 주인들을 아주 좋아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녀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시노다! 아침을 물렸다면서? 너 그럼 못쓴다. ……어머나, 너희들은 왜 다 모여 있니?”


 아우스트리아 백작부인인 미라벨이 데이드레스 차림으로 한들한들 올라와, 다짜고짜 그렇게 외쳤기 때문이다.


 “르네, 시노다가 또 네 검을 탐내던? 아니면 리의 용돈을 몰래 써 버렸거나…… 아무튼 시노다는? 문 잠그고 또 시위하는 중이니?”
 “아프대요.”


 리지엘라가 답했다.


 “열이 펄펄 끓는다는 군요. 어머니.”


 르네가 여동생의 뒤를 따랐고,


 “시…… 아니, 저, 리트리시아 아가씨는 열이 높아 움직이기 힘드시다며 아침을 물리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녀 플로리타가 저택의 안주인을 위해 조심스럽게 첨언했다. 백작부인은 동글동글한 뺨에 딸을 염려하는 기색 대신 순수한 의문을 담아 방긋 웃고는 플로리타를 돌아보았다.


 “어머, 왜? ……룬트슈테트 군은 불렀겠지? 아직 오지 않았니?”
 “아침을 물리셨을 때 주인님께서 사람을 보내 부르신다고 하셨습니다만…….”
 “별 일이네. 왜 아직 안 왔을까?”


 곧 오겠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요?
 운운.
 모여선 사람들의 걱정이 전혀 다른 곳을 향하는 순간, 왈칵 닫혔던 방문이 열리고 시노다—아우스트리아 백작가의 막내딸인 리트리시아가 잠옷 차림으로 달려 나왔다.


 “정말! 정말로 아프다고! 진짜 열이 난다니까, 이 인간들아!”


 빗질 안 된 붉은 머리카락이 그야말로 불길처럼 등 뒤로 한껏 일어섰다. 잠시 동안의 정적 후에 먼저 평정을 되찾은 리지엘라가 고운 레이스로 짠 제 장갑을 벗고 쌍둥이 여동생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아. 뜨겁네요!”


 이제 믿겠냐는 듯 의기양양에 원망과 분노를 꾹꾹 눌어 담아 쏘아보는 리트리시아에게 누구 한 사람 사과하지 않았다. 그녀가 기대했던 걱정도 염려도 물론 없었다.


 “정말 열이 난다는 걸 알았으면 나한테 뭐 할 말이 있으시지 않나요? 세 분 모두!”
 “어…….”


 르네가 확인하듯 리트리시아의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는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양 손가락을 딱 퉁기고 선언했다.


 “아하! 알았다. 사랑의 열병이로군.”
 “그렇군요! 르네 오라버님 대단하세요.”
 “그렇구나. 르네, 이 엄마는 너무나 기뻐요. 우리 막내가 어엿한 숙녀로 자라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되었다는 사실이 말이에요.”


 리트리시아는 어이가 없어 한숨을 푹 내쉬며 하녀 플로리타를 향했다. 모시는 아가씨의 시선에 플로리타는 반사적으로, 저도 모르게, 그러나 이 집에서 석 달만 살면 누구나 익숙해지고 마는 대답을 하고 말았다.


 “아, 저…… 룬트슈테트 님은 아직이십니다.”


 리트리시아는 폭발했다.


 “그게! 아니잖아! 난! 정말! 아프단! 말이얏! 아프다고!”


 리트리시아는 세상 천지에 이런 억울한 일이 또 없다는 양 엉엉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르네가 곤란한 얼굴로 서툴게 여동생을 달래며, 모두가 곤란한 지경에 빠졌을 때 실로 다행스럽게도 ‘그’ 룬트슈테트 군이 백작저에 당도했다.


 “룬트슈테트 군이 왔다고? 잘 됐네. 그럼 그 애에게 맡기고 우린 이만 물러가자꾸나.”
 “리, 살디바르 댁까지 바래다 주마.”
 “플로리타. 룬트슈테트 님에게 다과를 내 드려.”


 남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고 유유히 돌아서서 가 버리는 가족들이 원망스러워 리트리시아는 더욱 큰 목소리로 울었다.


 “너무해! 별로 열이 많이 나는 게 아닌 건 사실이지만! 엄살인 것도 맞지만! 그치만 열이 나긴 나는데! 너무해! 너무해애…… 다 미워! 와아아아앙!”


 이미 이런 광경엔 익숙한 듯, 리트리시아의 가족들과 엇갈려 층계를 올라온 청년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곧장 그녀에게 다가왔다.


 “시노다.”


 리트리시아는 우는 얼굴을 감추며 고개를 팩 돌렸다.


 “시노다, 울어?”
 “안 울어!”


 청년은 리트리시아의 방문을 한쪽 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리트리시아와 눈을 맞췄다.


 “……우는 것 같은데.”
 “안 운다니까! 바보, 젠!”
 “그렇지만 얼굴이 빨간데.”


 젠, 이라고 불린 청년—룬트슈테트 군—은 안경 너머 제비꽃 빛깔 눈동자로 부드럽게 웃었다.


 “열이 나서 그런 거야.”
 “그런가. ……그렇구나.”


 젠이 리트리시아의 이마를 짚자, 리트리시아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기세로 빽 비명을 질렀다.


 “뭐, 뭐하는 거야! 바보야!”
 “정말 열이 있네. 시노다, 괜찮아?”
 “말 돌리지 마, 뭐 하는 거냐고 묻잖아! 젠 지금…….”
 “열이 더 오르면 안 되지. 시노다, 약은 먹었니? 만들어 줄까?”
 “젠!”
 “자, 어디 앉는 게 좋겠다. 시노다, 어서.”
 “젠!”
 “응, 시노다.”
 “……아, 정말이지.”


 리트리시아는 빙글빙글 웃으며 같은 눈높이에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소꿉친구를 향해 한숨을 푹 쉬고, 어쩔 수 없이 한 수 접어주고 말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젠, 일단 들어와.”


 곧 플로리타가 다과를 가져와 리트리시아의 방문을 노크했다. 그녀가 주인의 허락을 얻어 안으로 들어섰을 때, 리트리시아는 얌전히 침대에 기대 앉았고 아우스트리아 일가와는 친분이 깊은 관계인 제네시오 룬트슈테트가 화병에 꽃을 장식하고 있었다.


 나중에,
 ‘역시 룬트슈테트 님이 오시니 리트리시아 아가씨가 조용해지셨다’
 플로리타는 안주인에게 그렇게 고했다.
 리트리시아는 그 표현에는 오해가 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가족들은 그 누구도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


 


 아우스트리아 현 백작인 콜린, 그러니까 리트리시아의 아버지가 처음부터 백작이었던 건 아니다.
 물론, 모든 백작은 처음에는 백작의 자제이지 백작은 아니다. 그러나 콜린은 아우스트리아 백작가의 차남이었으며, 많은 귀족가가 그러하듯 차남에게 돌아올 만한 여분의 영지 같은 건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는 백작이 아니었다.
 콜린은 형이자 가문의 후계자인 베네딕트를 좋아했고, 자신의 처지를 그다지 아쉽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착실하게 능력을 닦아서는 이른 나이에 플리타 남작가의 딸 미라벨과 혼인한 후, 왕성의 관리로 일했다. 그러다 딸인 리지엘라와 리트리시아가 네 살 되던 해, 텔바인 공작가의 영지 중 하나인 실버웨지의 사무관 자리를 얻어 이사했다.


 [오늘부터 여기에서 사는 거야.]
 [평생? 엄마, 다시는 서울에 안 가? 여기 계속 살아?]
 [그래, 여기 계속 살아.]


 리트리시아는 소박하고 깨끗한 타운하우스 앞에서 어머니 미라벨이 그렇게 말하던 것을 분명히 기억했다. 거짓이 아니라 그때엔 그게 부모의 진심이었다. 콜린 일가는 별 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일생을 실버웨지에서 지낼 예정이었다. 그럴 마음으로 이사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 일이란 본디 뜻대로 만은 되지 않는 법이다.
 십여 년 후, 그러니까 삼 년 전 아우스트리아 백작 베네딕트가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백작위는 자연스럽게 동생의 몫이 되었고 콜린 일가는 아우스트리아 백작저가 있는 왕도로 돌아왔다.


 


 +++


 


 “……리지엘라 양은?”


 제네시오는 우유 머랭을 한 바구니 가져왔다.
 병문안 선물, 이라며 웃는 그에게 리트리시아는 ‘아픈 줄 몰랐잖아?’ 하고 트집을 잡으려다 그만 두었다. 그녀는 우유 머랭을 좋아했다.


 “리 언니? 언닌 살디바르 씨 댁에 꽃을 보러 갔어. 초대 받았대.”
 “시노다는 초대 받지 않았어?”
 “받았어.”
 “열이 나서 못 간 거로군. 아쉽겠네.”
 “응? 별로. 애초에 살디바르 씨가 관심 있는 건 리 언니지 내가 아니야.”
 “야아, 그런 것도 알아? 시노다, 대단하네.”
 “왜 몰라?”


 리트리시아는 누굴 바보로 아는 거야? 하고 덧붙이지 않아도 될 말을 얹으며 머랭을 집어 먹었다.


 “난 몰랐는데.”
 “그건 젠이 바보인 거야.”
 “그런가.”
 “그럼. 누가 봐도, 살디바르 씨는 리 언니한테 마음이 있다고. 리 언니만 보면 목소리가 갈라져선 말까지 더듬지, 일전엔 무도회까지 거창하게 열어 놓곤 언니 발만 스무 번이나 밟을 뻔 했지, 거기다 식물원을 사들여서 리 언니가 좋아하는 꽃을 죄다 가져다 심었잖아? 그런데도 모르면 그게 바보가 아니고 뭐겠어?”
 “말을 더듬고, 발을 밟을 뻔 하고, 꽃을 심으면 그게 마음이 있는 거라고? 난 그 편이 더 이상한데.”
 “매번 부르잖아. 거의 매일 언니에게 초대장이 오는데?”
 “매일 부르면 마음이 있는 건가?”
 “그럼. 보통은 그렇지.”
 “그런가.”


 제네시오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리트리시아의 침대 곁에 의자를 옮겨 놓고 거기에 앉았다. 리트리시아는 머랭을 집어 먹던 손을 멈췄다. 그녀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소꿉친구의 단정하게 묶어 늘어뜨린 플라티나 블론드에 잠시 눈을 빼앗긴 사이, 그는 장난스레 웃으며 리트리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면 시노다, 너도 내게 마음이 있어서 매일 부르는 거야?”
 “…….”


 잠깐 말문이 막혀, 리트리시아는 멍하니 제네시오를 바라보았다.


 “어, 정말로 그래?”


 그가 다시 물었을 때야 비로소 리트리시아는 한 입 베어 문 머랭을 집어 던질 만큼 정신을 차렸다.


 “바, 바보냐! 절대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 아닌 게 당연하잖아 이 바보! 젠 바보!”
 “그래그래. 역시 그렇지. 응, 알았으니까 진정해.”
 “난 젠을 부른 적이 없다고! 집안 식구들이 멋대로 구는 거잖아, 멋대로!”


 도대체가, 소꿉친구라는 이유로 무슨 일만 있으면 제네시오를 불러 리트리시아를 떠넘긴다. 그야 뭐 어릴 적엔 사이가 몹시 좋았던 게 사실이지만 그건 그야말로 ‘어릴 때’ 일이지 않는가. 알고 지낸 지도 십 년이 훌쩍 넘는데 언제까지 일곱 살짜리 아이들 대하듯 놀려댈 작정인 걸까.


 “그러면 시노다. 시노다는 마음이 있는 상대에게는 어떻게 할 건데? 시노다도 말을 더듬거나 발을 밟을 거야?”
 “내가? 내가 왜!”
 “매일 부른다거나.”
 “젠은?”
 “……내가 먼저 물었는데.”
 “젠은 말을 더듬거나 발을 밟을 거야? 그거 참 볼만하겠네.”
 “으음, 나는…….”


 그가 짐짓 고민하는 척 시선을 멀리 돌렸다가 싱긋 웃으며 눈을 마주할 때, 리트리시아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역시 머리를 쓰다듬거나 병문안을 오거나 하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아직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리트리시아는 ‘놀리지 마’ 하는 무언의 외침과 함께 고개를 푸르르 흔들어 소꿉친구의 손을 뿌리쳐 냈다. 제네시오는 키득키득 소리 죽여 웃었다.


 ‘언제까지 애 취급 할 거야? 젠, 바보!’


 세상 일은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행운이 있는 만큼 예상치 못한 불운도, 좌절도 있다.
 갑작스럽게 기뻐지고 또 갑작스럽게 슬퍼진다.


 [……이름이 뭐야?]
 [제네시오.]
 [흐음. 그렇구나.]
 […….]
 [……젠이라고 불러도 되지?]
 [좋을 대로.]
 [……흐음. 그렇구나.]
 […….]
 [……내 이름은 안 궁금해?]
 [알아. 아우스트리아 양이잖아.]
 [어휴, 이렇다니까! 아니지, 그게 아니지.]


 실버웨지에 간 것은 우연.
 타운하우스 근처에 있던 실버웨지 영지 관리인 부부의 집에 살던 제네시오를 만난 것도, 그러니까 우연. 세상 일이 예상한 그대로만 흐른다면 슬프지도 않겠지만 즐겁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말야, 시노다. 왜 열이 나는데?”
 “그건.”
 “아까 듣기로는, 사랑의…….”
 “우, 와아아악! 그만! 그만해!”


 들었구나!
 리트리시아는 머랭 바구니를 뒤집어 엎으며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젠, 더 말하면 죽일 거야!”
 “사랑의 열병이라던가?”
 “꺄아악! 젠!”
 “어…… 말해 버렸네. 죽일 거야?”


 제네시오가 놀리듯이 빙긋 웃었다.


 “죽어!”
 “너무해. 병문안도 와 줬는데…….”
 “엄마랑 리 언니는 그냥 나를 놀리는 거야! 젠도 다 알잖아! 아아…… 도대체가 말이지! 우리 집 식구들은……!!”
 “흐음. 그럼 사랑의 열병, 아니야?”
 “말하지 마! 당연히 아니지! 누가 그런 걸로 앓아 눕기까지 한대? 바보!”


 쏟아진 머랭을 줍기 시작한 제네시오 곁에서 손을 거들며 리트리시아가 열심히 소리쳤다.


 “그런가.”
 “그래!”
 “흐—음. 그렇구나. 응, 아쉽네.”
 “……뭐?”
 “아쉽다고. 정말이었으면 좋을 텐데.”


 리트리시아의 얼굴이 일순 붉어졌다. 어차피 열이 나니까, 좀 더 붉어져 봤자 눈에 띄지는 않을 테지. 리트리시아는 그렇게 판단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얼른 주운 머랭을 베어 물었다.


 “떨어진 거 먹지 마, 시노다. 탈 나면 안 되잖아.”


 제네시오가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듯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의 손에서 머랭을 뺏아 들었다.
 이 소꿉친구는 원래 이렇다. 매번 부드럽고, 달콤하고, 상대를 떠보고, 그러나 별 뜻이 없다.


 “……다음 주에 기사단 승급 시험이잖아. 어제 무리해서 그래.”


 세상 일은 정말이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실버웨지에서 먼저 마법 공부를 시작한 건 리트리시아였다. 작위는 잇지 못한 몸이라 해도 귀족 신분이고, 영지에선 형편이 가장 좋은 편이었던 만큼 콜린은 세 아이들에게 넉넉한 교육 환경을 베풀었다. 마법도 그 중 하나였다. 리트리시아는 소꿉친구가 된 제네시오에게 배운 것을 자랑하러 갔고, 의외로 제네시오는 마법에 흥미를 보였다.
 그에게 재능이 있음을 가장 먼저 눈치챈 것도, 그러므로 리트리시아였다.


 나중에야 비로소 제네시오 정도의 재능은 왕도에서도 보기 드물다는 걸 알았다. 그때 미리 알았다면 리트리시아도 마법을 포기하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우연히 제네시오 근처에 살았고 그가 마법에 재능이 있었으므로 리트리시아는 마법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택했다.


 [젠이 마법사가 되면 내가 기사가 돼서 지켜줄게!]


 몸을 쓰는 건 제네시오보다는 리트리시아가 나았다.


 “시노다 실력이면 너끈히 합격할걸 뭐.”
 “나도 알아. 그런데 어제 이론시간에 갑자기 고대어 강독을 시키잖아? 도대체…… 검하고 삼백 오십 년 전의 문법이 무슨 상관인데? 여름의 첫 폭풍을 부르는 스무 가지 이름을 알면 뭐 적의 검이 내 심장을 비껴가기나 한대? 도대체가 말야…….”
 “……졸았구나.”
 “아, 안 졸았어! 암기 구술 시험 성적이 나빴을 뿐이야! 으…… 악마 같은 루도비코 선생 같으니라고! 글쎄 연병장을 쉰 바퀴나 돌았다니까! 쉰 바퀴! 말이나 돼? 내리치기랑 찌르기 삼천 번씩 한 다음에 지옥 같은 암기를 시켜 놓곤 쉰 바퀴를 토끼뜀으로 돌게 만들다니, 세상에! 정말 무식하기 짝이 없다니까!”


 열변을 토하는 리트리시아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으며 제네시오가 물었다.


 “그건 좀 심했다. 설마 시노다 혼자 돌았어?”
 “당연히 아니지! 훗, 나를 뭘로 보는 거야? 난 꼴찌가 아니야! 내 뒤에 한 명 있었다고! ……1점 차이긴 했지만 아무튼……. 그래서 둘이 돌았어.”
 “둘?”
 “응. 에레트 그 멍청한 게 토끼뜀이라도 나한테 이기겠다고 얼마나 기를 쓰던지…… 젠장, 나까지 라이벌 의식이 불타올라서 결국엔 둘 다 기절할 뻔 했다니까?”
 “……에레티예프 군 말이구나.”


 제네시오가 애매하게 웃었다.


 “많이 친해진 모양이네.”


 에레티예프 레온티.
 텔바인 공작가의 장남으로, 리트리시아와는 검을 겨루는 사이다. 세 번을 싸우면 두 번 비길 정도의 호적수인지라 만날 때마다 으르렁대며 악연을 이어온 끝에, 상당히 친해졌다. 굳이 말하자면 ‘서로를 인정하는 아름다운 사이’라고 해야 할까.


 “검으로는 첫째 둘째를 다투는 사이고 학문으로는 제일 뒷자리를 다투는 사인데 그게 뭐가 친해진 거야? 우린 적으로 만났으면 서로 죽이고 드러누웠을걸.”
 “말은 그래도 매일 만나잖아.”
 “그야 기사단 동기니까 그렇지. 매일 만나는 건 사실이지만 결국 싸우려고 만나는 거라고.”


 하긴, 사선을 넘나든 것도 정이라면 정이다.
 리트리시아는 제네시오가 머랭 바구니를 멀리 있는 다른 탁자 위에 올려 놓고 돌아오는 동안 그의 표정을 읽어 보려고 신경을 집중했지만, 아무래도 쉽지가 않았다. 옛날에는 좀 더 솔직하고 아이 다운 녀석이었던 것 같다. 언제 저렇게 말끔하고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싱글싱글 웃게 됐을까.


 [가지마, 젠. 가지마…….]
 [리트리시아. 울지마.]
 [안 울거야. 안 울어, 우는 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가지마! 젠…….]


 ……아, 뭐 그런 귀여운 시절도 있었구나!
 하고 리트리시아는 불현듯 떠오르는 옛 추억을 냉큼 고개 저어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누구 생각해? 그, 매일 겨루는 악우?”


 겨우 상념을 깨치자 상념 속의 본인이, 이제는 결코 어린아이가 아닌 얼굴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리트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슬쩍 피했다.


 “정말인가 보네. 역시 사이 좋잖아. 시노다.”
 “무, 슨 말인지 모르겠네. 에레트하고는 상관 없다니까. 지금 이건…….”
 “얼굴이 빨간데?”
 “……그, 건, 그러니까 열 때문이라고……. 젠, 그만해. 화 낼 거야.”
 “에레티예프 군과 사이가 좋은 건 기쁜 일인데, 왜. 일단은.”


 단어를 고르듯 말을 멈춘 제네시오의 얼굴에 잘 꾸며낸 미소가 걸렸다. 리트리시아는 소꿉친구의 그 더할 나위 없이 단정한 표정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입을 다물었다.


 “일단은, 나한테도 동생…… 같은 거고.”


 동생 같은 게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사촌 지간이 맞다.
 에레티예프 레온티는 텔바인 공작의 장남이고, 제네시오 룬트슈테트는 텔바인 공작의 이복 동생의 아들이니까. 장남인지 외아들인지 아니면 실은 위로 하나 둘쯤 어머니가 다른 형제가 있는지도 알 수 없지만.


 딴은 이렇다.
 텔바인 공작에게는 이복 동생이 하나 있었다. 동생의 이름은 풀치넬로. 성실한 형과는 달리 풀치넬로는 워낙에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어린 시절부터 온갖 종류의 사고를 쳤다. 그러다 혼례를 앞두고 멋대로 종적을 감추어 온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더니 몇 년이 지난 후 불쑥 나타나 갓난애를 ‘낳았는데 기를 수가 없다’며 떠넘기곤 집안 돈을 얼마간 훔쳐 도로 사라져 버렸다.
 어머니가 누군지 어디에서 태어난 건지 무슨 사정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아이였지만 어쨌거나 어린애를 내다 버릴 만큼 냉혹하지 않았던 텔바인 공작은, 그 아이를 실버웨지 영지로 보내 관리인에게 맡겼다.


 물론 그게 바로 제네시오다.
 룬트슈테트라는 성은 풀치넬로의 어머니의 것으로, 애초에 가문이랄 만한 것이 없어 이름을 잇든 말든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하간 이런 사정상, 제네시오는 에레티예프를 비롯한 텔바인 공작가 사람들을 친척으로 스스럼없이 대하기에는 민구스럽고 데면데면하게 남인 양 굴기에는 송구스러운 미묘한 입장이었다.


 “……너무 오래 있었나 보다. 이만 돌아갈게, 시노다.”


 이야기를 끌기 어색했던지 제네시오가 적당히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평소라면 가족들이 가는 걸 굳이 붙잡아 저녁을 먹여 보냈겠지만 오늘은 다들 밖에서 식사를 하고 올 테니 별 다른 핑계거리가 없다. 리트리시아는 살디바르 씨가 왜 하필 오늘 리지엘라를 초청했는가를 괜히 원망했다.


 “가려고? 어…… 그래, 잘 가. 오늘 와 줘서 고마웠어, 젠.”
 “응. 몸 조심하고 혹시 열이 내리지 않으면 연락 줘. 약을 지어줄게.”
 “풋내기면서 그래도 왕성 마법사라고 잘난 척 하는 거야?”
 “오빠로서 귀여운 여동생을 위해 그 정도는 하겠다는 거 뿐이야.”


 문간까지 굳이 배웅을 나서자 기어이 돌려보내면서,


 “시노다.”


 마지막으로 이름을 불렀다.


 “시노다, 잘자.”


 아직 잘 시간이 아니잖아. 아직, 해가 다 지지도 않았는데!
 속으로는 그렇게 아우성을 치면서도 어째서인지 평소처럼 심술궂게 받아 치지 못하고 그가 손을 흔들며 돌아서는 뒷모습을 그냥 멍하니 지켜보고 말았다. 리트리시아는 문이 닫힌 후에야 ‘열 때문에’라고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며 한 달음에 침대로 달려와 아무렇게나 이불에 고개를 파묻었다.


 “뭐가 ‘오빠니까’ 야? 바보, 젠!”


 


 +++


 


 [싫어! 젠 같은 거 싫어!]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싫어’는 ‘정말 좋아’가 아니었을까?
 리트리시아가 열 두 살 때 제네시오는 정말로 그녀의 ‘오빠’가 될 뻔 했다. 그것은 공작가의 자제인 제네시오가 방치된 채 얼마간 학대 받으며 자라는 것에 콜린 부부가 충격을 받은 탓도 있고, 또한 그들이 제네시오를 진정 귀여워했던 덕분이기도 했다.


 근처에 살면서 돌봐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어차피 마법에 재능을 보여서 교사를 붙여주거나 여러 가지로 돌봐줘 왔기도 하고, 아이들하고도 친하니까 이 기회에 양자로 들이면 어떨까?


 콜린의 그 의견에 부인인 미라벨이 이의 없이 찬성해, 이야기는 거의 성사 단계였다. 리지엘라는 ‘오빠가 하나 더 생기는 거군요’ 하고 어른스럽게 반응했고 르네는 ‘남동생이 생긴다니 기쁘다’ 고 답해, 부모를 기쁘게 해 주었다. 미라벨도 콜린도 설마 리트리시아가 반대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실버웨지로 이사 와 제네시오와 만난 후 누구보다도 그와 친했던 것은 단연 리트리시아였기 때문이다.


 젠, 젠, 젠, 하고 아기 오리처럼 졸졸 따라다닐 만큼 제네시오를 좋아하니까.
 물론 기쁘겠지? 시노다, 좋아하는 젠이 오빠가 되는 거예요.


 그 말에 리트리시아는 경악으로 멍하니 떴던 눈을 감고는 팩 토라져 ‘싫어’ 하고 찡얼거리기 시작했다.


 [젠 같은 거 오빠 아니야! 오빠는 르네 오빠잖아! 젠은 젠이야, 젠이 오빠가 되는 거 싫어!]


 콜린 부부는 당황했다.
 사실 육 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리트리시아 본인도 그때 자신이 무슨 생각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제네시오는 좋았다. 같이 있고 싶었다. 가족이면 더할 나위가 없다고 매일 바랐다. 그런데 정작 ‘오빠가 되는 거야’ 하는 말을 듣자 당황스러워서 저도 모르게 심술궂은 소리만 튀어 나왔다.


 물끄러미 리트리시아를 바라보던 제네시오가 양자 제의를 거절하고, 마법사의 도제가 되어 왕도로 떠난 것은 그 며칠 후였다.


 리트리시아는 울었다.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제네시오가 단출하기 짝이 없는 행장을 꾸려 십여 년 살아온 실버웨지를 떠나는 날까지, 리트리시아는 끝없이 울었다. 만사에 태평한 콜린 부부가 ‘저러다 정말로 탈진하는 게 아닐까?’ 하고 염려할 만큼.


 [가지마, 젠. 가지마…….]
 [리트리시아. 울지마.]
 [안 울거야. 안 울어, 우는 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가지마! 젠…….]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도, 꼭 안아주지도 않고 제네시오는 갔다.
 가버렸다.
 리트리시아는 버둥거리며, ‘내가 젠이 오빠가 되는 걸 싫다고 해서 이렇게 된 거야? 이제 젠을 못 보는 거야?’ 하고 물으며 다시 며칠이고 울었다.


 리트리시아는 매일 편지를 썼다가 부치지 않고 그냥 찢어 제네시오와 매일 나가 뛰어 놀던 강가에 가서 버렸다. 그에게서는 보름쯤 지나 잘 도착했다는 편지가 한 장씩 콜린 부부와 영지 관리인 부부 앞으로 도착했다.


 [내 오빠가 되는 게 싫다고 말해서 내가 싫어진 거야? 그래서 가 버린 거야?]


 그렇게 쓰는 대신,


 [열심히 공부해서 왕실 마법사가 되길.]


 하고 써서 르네와 리지엘라의 이름 아래 자신의 이름을 넣은 편지를 보낸 후 리트리시아는 대단히 쓸쓸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석 달 하고도 스무 날쯤 지나 초경을 했다.


 


 +++


 


 세상 일은 정말 생각대로 되지를 않는다.
 리트리시아 시노다 아우스트리아는 기사단 연무장에 딸린 방에서 검을 닦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승급시험과 아직 다 내리지 않은 열과, 상냥한 소꿉친구를 떠올렸다. 잔에 갓 따른 우유 표면에 피는 거품 같은, 그런 간질간질하고 한숨이 나오도록 달콤한 웃는 얼굴. 아니면 그가 가져왔던 머랭 과자가 입 속에서 부서질 때 혀를 감싸던 맛과 향과 촉감 따위가 무엇이라고 할 수 없는 어떤 덩어리가 되어 온 머리를 헤집었다.


 ‘……이러니까 에레트한테도 지지. 시노다, 정신 차리자!’


 힘주어 검을 닦고 다른 검을 집어 또 닦고, 그리고 또 또 다른 검을 닦는다. 예비용으로 놓아둔 십여 자루의 검을 이 기회에 다 닦아 놓을 기세로 리트리시아는 열심히 움직였다. 사실 열이 덜 내린 탓이겠지만 어쨌거나 오늘 아침에는 에레티예프와의 대련에서 보기 좋게 패했다. 평소처럼 불꽃 튀는 접전을 각오하고 온 힘을 실어 찌르기를 넣었던 에레티예프가,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리트리시아가 무너져버리자 ‘어라?’ 하는 의아한 얼굴로 얼른 물러난 것이 리트리시아의 자존심을 보기 좋게 상처 냈다.


 ‘평소 같으면 절대로! 절대로 그런 찌르기에 당하지 않지! 절대! 아아아…… 짜증나! 에레트 따위에게!’


 문이 열리고 ‘그’ 에레티예프가 들어섰다. 나름대로는 학우이자 기사단 동기인 리트리시아의 상태가 걱정이었던 모양이지만 불이라도 낼 것마냥 검날을 닦는 걸 보곤 옆으로 와서 이름을 불렀다.


 “리트리시아.”


 리트리시아는 듣지 못했다. 들었다 해도, 자신의 분한 마음이 빚어낸 환청이려니 여겼을 터였다.


 “어이, 리트리시아.”


 에레티예프가 주의를 끌기 위해 제 검을 검집 채로 휘둘러 리트리시아 곁의 탁자를 딱딱 내리쳐 소리를 냈다. 비로소 리트리시아는 퉁명스럽게,


 “에레트.”


 친우를 맞아 주었다. 에레티예프는 그 정도의 반응에도 만족한 듯 싱글싱글 사람 좋은 얼굴로 탁자를 훌쩍 뛰어 넘었다.


 “그냥 돌아서 오면 될 거 아냐 멍청아.”
 “멋있지 않냐?”
 “얼씨구. 걸려 넘어져서 허리라도 삐어 봐야 정신을 차리지. 쓸데없는 데 힘 빼고 잘 하는 짓이다.”
 “쓸데없는 데 힘 빼도 오늘 같으면 리트리시아한테 안 질 것 같은데?”
 “……내일은 두고 봐.”


 에레티예프는 팔짱을 낀 채 탁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섰다. 느긋한 푸른 눈이 형형하게 빛나며 빤히 쳐다보는 데도 리트리시아는 이내 흥미를 잃고 남은 검들을 닦기 시작했다. 에레티예프는 당연히 지루했다. 그는 붉은 머리에 털털한 성품인 이 소녀 검사와 대화하고 싶었지 검 닦는 걸 구경하고 싶었던 게 아니다.


 “열이 났다며?”


 시시해져서, 에레티예프는 굳이 다시 말을 붙였다.


 “누가 그래?”


 쏘아붙이듯 툭, 말이 돌아왔다.
 그래그래. 이래야 리트리시아 답지. 기가 죽어 있으면 재미 없잖아.
 에레티예프는 벌쭉 웃었다. 빨리 기운을 차려서 또 막상막하의 대결을 해 주면 좋겠다. 다른 대련 동료도 물론 많이 있지만, 재빠른데다 승부욕이 강한 리트리시아와 겨루는 것이 에레티예프에게는 가장 즐거웠다.


 “누구긴.”
 “누구냐니까. 대답 여하에 따라 이 검으로…….”
 “룩빌 남작이지.”
 “……어휴, 아무튼 그 바보 오빠!”


 아우스트리아 백작가의 장남이자 리트리시아와 리지엘라 자매의 오빠인 르네 테오 아우스트리아는 에레티예프와는 왕성 사교계에서 꽤나 친한 사이였다. 그가 막내 여동생과 에레티예프가 어지간한 악우인 걸 뻔히 알면서도 또 묻는 대로 미주알고주알 대답해 주었을 게 뻔했다.


 “왜 화를 내는 거야? 리트리시아. 난 너한테도 제법 여자다운 데가 있다 싶어서 감동 받았는데 말야.”
 “웃기고 있네. 아프면 여자다운 거냐?”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럼 무슨 뜻인데?”
 “그러니까…… 야, 관두자. 알잖아? 나 이런 거 잘 못하는 거.”
 “이런 거는 또 어떤 건데? 시작도 안 했는데 뭘 관두자 말자람? 에레트, 나 바쁘니까 방해하지 말고 꺼져 주라.”
 “말로 뭐 표현하는 게 어렵다고. 아, 이게 아닌데……?”
 “아, 좀 꺼지라고!”


 닦던 검을 들고 벌떡 일어나서 다짜고짜 허공을 가르자, 에레티예프가 재빨리 자세를 바꿔 쥐고 있던 제 검으로 그것을 막아 냈다. 리트리시아의 검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에레티예프의 값비싼 검집에 날아가 박혔다.


 “어! 야 임마! 이거 비싼 거야! 우리 아버지 아시면 나 죽는다고!”
 “빠져가지고! 전장에서 비싼 게 어딨고 안 비싼 게 어딨냐? 죽어라 죽어!”
 “좁은 데서 진검 휘두르다 웰러 경한테 들키면 우리 또 오리걸음…… 야! 야, 좀! 리트리시아!”
 “받아라, 에레트! 필살…… 어머!”


 죽일 듯이, 그러나 사실은 반쯤 장난 삼아 달려들던 리트리시아의 동작이 멈췄다.
 ‘어머’ 라니 웬 답지 않게 소녀 같은 감탄사란 말인가?
 하고 의아하게 여긴 에레티예프의 시선이 리트리시아의 눈을 쫓았다. 열린 문을 잡고 선 것은 에레티예프도 물론 잘 아는 인물이었다.


 “시노다. 어…… 미안. 방해한 것 같네.”


 틀림없이 놀랐을 터인데도 능숙하게 감정을 감추며 제네시오 룬트슈테트가 부드럽게 고개를 숙였다.


 “제네시오 선생 아냐? 그러고 보니까 선생하고 리트리시아하고 아는 사이였구나. 잊고 있었네.”
 “안녕하세요. 에레티예프 군. ……전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뭐야 재미없게. 같이 좀 어울려주면 안 됩니까? 거 왕실 마법사라고 그렇게 비싸게 굴 건 없잖아?”


 돌아서던 제네시오가 그 말에 표정 없이 다시 돌아섰다.


 “젠, 무슨 용건인데?”


 리트리시아가 사이에 끼어들 듯 와락 달려나갔다. 제네시오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작은 약재 주머니를 내밀었다.


 “해열제를 주러 온 것뿐이야.”
 “열은 다 내렸는데. 그래도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어제는…….”
 “먼저 갈게.”


 젠, 하고 불러서 붙잡으려던 것을 생각지 못한 사람이 대신 해 주었다.


 “선생.”


 에레티예프가 천진한, 활력이 넘치지만 공격적이지 않은 푸른 눈을 끔벅거리며 물었다.


 “선생. 전부터 궁금했는데 그 ‘시노다’라는 호칭은 뭡니까?”
 “……아우스트리아 가문 분들이 리트리시아 양을 그렇게 부릅니다. 멋모르던 아이 시절 어울리다 보니 그만 입에 붙어서.”
 “왜 리가 아니고 시노다요?”


 그 말에는 리트리시아가 답했다.


 “리는 우리 언니야. 리지엘라잖아. 시노다는 내 미들네임. 어릴 때부터 가족끼리 그렇게 불러서…… 아! 진짜, 왜 남의 집 일에 참견이야? 신경 꺼.”
 “가족끼리 부르는 애칭? 헤에, 그거 좋네. 그럼 나도 시노…… 야! 어따 대고 검을 휘두르는 거야? 진짜 죽을 뻔 했네!”
 “죽어라 죽어! 넌 그냥 죽어!”


 리트리시아의 검을 받아 내며 에레티예프가 흘끔, 제네시오를 흘겨 보았다.


 “제네시오 선생은 되고 나는 안 되는 이유가 뭔데?”
 “그거야 당연히 안 되지!”
 “그러니까, 왜!”
 “그건!”


 그건…….
 리트리시아의 검이 일순 흔들렸다. 아침 나절, 열이 올라 찌르기를 걷어내지 못하고 삐끗 틈새를 보였던 그녀를 향해 그러했듯 에레티예프의 눈에 놀라운 기색이 스쳤다.


 “그건…….”


 [……내 이름은 안 궁금해?]
 [알아. 아우스트리아 양이잖아.]
 [어휴, 이렇다니까! 아니지, 그게 아니지.]
 [아니야?]
 [아니야! 나는 리트리시아야!]
 [리트리시아.]
 [응! 그런데 엄마랑 아빠랑 할머니랑 할아버지랑 큰아버지랑 할아버지 동생이랑 엄마 동생이랑 엄마 동생이 결혼할 아줌마랑…… 어…… 그리고? 어? 아, 맞다! 르네 오빠하고 리 언니랑 아무튼 가족들은 시노다라고 불러.]
 [가족……?]
 [응. 가족.]


 그러니까 언젠가 젠도 ‘시노다’ 라고 부르게 해 줄게.


 “그건…… 젠은, 그러니까, 오빠…… 같은 거니까.”


 에레티예프는 오빠가 아니잖아.
 리트리시아는 적당히 대답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에레티예프의 얼굴 가득 마치 대련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머쥐었을 때마냥 즐거운 웃음이 번졌다. 리트리시아는 당혹감을 느꼈다. 그 당혹감은 제네시오가 인사도 없이 무심히 방을 나가버린 것을 깨달은 순간 최대치로 부풀어 올라 그녀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하긴. 원래 너희 집에서 양자로 들이려고 했다지?”


 [젠 같은 거 오빠 아니야! 오빠는 르네 오빠잖아! 젠은 젠이야, 젠이 오빠가 되는 거 싫어!]


 기시감이 들었다.
 괴상한 악몽을 꾸고 난 아침처럼 이유 없이 불길한 예감이 리트리시아를 감쌌다.


 제네시오를 청하러 보낸 시종들이 모두 정중한 거절의 의사를 가지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자신의 예감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르네와는 왕성의 사교계에서 이따금 얼굴을 마주하는 모양이었지만 무엇에 마음 상한 건지도 모르는 채 그는 열흘이 가도록 리트리시아를 만나러 와 주지 않았다.


 


 +++


 


 “……열흘 째네.”


 리지엘라가 정원에 알량한 테이블을 내다 놓고는 턱을 괴고 앉아 들으란 듯이 중얼거렸다. 리트리시아는 얼마 남지 않은 승급 시험을 대비해 반듯한 자세로 검을 쥔 채 끝내 못들은 척 건너편 장미덩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시노다, 열흘 째야. 그렇지?”
 “무슨 상관이람! 그런 녀석.”


 결국 리트리시아가 졌다. 툭,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내뱉는 쌍둥이 여동생에게 리지엘라는 웃음기 하나도 없이 시선만 돌렸다.


 “리 언니, 난 정말 상관 안 해. 젠 녀석이 열흘쯤 안 온다고 그게 뭐 어떻다는 거야? 안 그래? 난 진짜로 요만큼도…….”
 “어머.”


 리지엘라가 턱을 괸 손을 다른 쪽으로 바꾸고는 살짝, 겸연쩍은 듯도 하고 즐기는 듯도 싶은 묘한 미소와 함께 말을 가로챘다.


 “시노다. 난 그냥 네가 열흘 째 같은 자세를 연습하고 있다는 이야길 한 거였는데.”


 그 순간 리트리시아의 흰 얼굴이 그녀 자신의 머리카락만큼이나 붉게 달아올랐다.


 “리…… 리 언닛!”
 “어머나,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니?”
 “몰라!”
 “네가 모르면 누가 안담. ……승급시험은 통과할 거 같아?”
 “모른다고!”


 괜히 목청을 높이며 검을 갈무리하고 리트리시아는 냅다 저택 안으로 도망쳤다. ‘나 화났음’이라고 써 붙인 얼굴로 침대에 고개를 묻어 봤지만, 결국 바쁜 와중에 집에 들렀던 아버지나 오빠까지 한 번씩 방문을 두드리면서 ‘룬트슈테트 군이랑은 화해 못 했나 보구나’ 같은 소릴 들은 뿐이었다.


 “안 싸웠다고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연어 스테이크를 난도질하던 나이프를 번쩍 들어올리자, 르네가 눈에 보일 정도로 움찔 놀랐다.


 “시노다. 룬트슈테트 군이 와 주지 않는다고 화풀이하면 안 되지.”
 “안 했어요.”
 “그럼 나이프 휘두르지 마렴.”
 “휘두른 게 아니라…….”
 “지금도 휘두르고 있는걸.”


 아우스트리아 백작부인, 미라벨의 말에 리트리시아는 반도 먹지 않은 연어 위로 나이프를 푹 내리꽂았다.


 “밥도 먹지 말라는 건가요? 이 집안 사람들은 나보다 젠이 더 좋은 모양이네!”
 “시노다의 짜증을 다 받아 주는 건 제…… 룬트슈테트 군 뿐이잖니. 당연하지.”
 “그러니까 전 짜증 부린 적 없다구요. 싸우지도 않았구요.”
 “그럼 왜 안 온단 말이니? 벌써 열흘 째야.”


 그건 제가 알고 싶군요.
 리트리시아는 그 말을 감추며 뚱한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연홍색 살코기 위를 내리그은 나이프에 묻은 번질거리는 기름기를 가문의 원수나 되는 양 노려보고 있는 사이 가족들은 멋대로 화제를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르네. 다이아몬드 하우스에서 무슨 이야기 못 들었니?”
 “룬트슈테트 군은 모임에 자주 참석하는 편이 아니니까요. 지난 달 레빗 씨의 무도회에도 얼굴만 비치곤 가 버렸고, 얼마 전 루슈벡 공작 부인의 회갑연에서도…….”
 “살디바르 씨가 승마대회를 열었을 땐, 시노다가 공부를 봐 달라고 하는 바람에 못 갔잖아요. 쟤는 룬트슈테트 군을 얼마나 괴롭히려는 건지.”
 “이번에도 보나마나.”
 “왜 아니래요. 룬트슈테트 군이 착하니까 저 애를.”
 “그러고 보면 옛날 실버웨지에 살 때 그런 일이…….”
 “아, 기억나요. 어머니의 루비우드 산 도자기를 깨뜨렸을 때.”


 [……내가 깨드린 걸로 하지 뭐.]


 그런 일도 있었다.
 두 동강 난 연어 스테이크를 다시 한 입 크기로 무수히 잘라내는 사이 회상은 절로 부풀어 올랐다. 의식하지 못하는 새 감정이 저 혼자 흘러 넘치듯 무릇 모든 형태 없는 것은 다 그러하다. 잴 수도 없고 제가 뭐 어떻게 통제할 수도 없다.
 형태 없고 이름 없는 것이 리트리시아는 싫었다.
 싫었던 것 같다.


 [정말? 정말 그래 줄래, 젠?]
 [그래. 정말. 아우스트리아 양, 이거 깨뜨린 걸 들키면 혼날 거 아냐? 그렇지? 백작 부인도 백작님도 어른이니까.]
 [맞아. 엄청 혼날 거야! 이거 할머니가 주신 거거든. 그러니까 들키면 아빠가 막 화 내실 거라구. 어휴.]
 [내가 깨뜨렸다고 할게. 그럼 됐지?]
 [젠, 고마워! 진짜지? 진짜 그렇게 해 줄 거지? 내가 깬 거 아니고, 젠이 깬 거라고.]
 [응. 내가 깨뜨린 거야. 시노다가 아니고 내가.]


 어렸다.
 그때 리트리시아는 겨우 여섯 살.
 상대의 상황을 짐작해 볼 만큼 속이 깊지 못했다. 그저 눈 앞의 고통을 적당히 회피하고 싶었을 뿐. 여섯 살짜리 꼬마 소녀는 활짝 웃으며 일곱 살짜리 소년과 악수했다. 비밀스런 약속과 함께 깃털처럼 가벼워진 마음으로 소녀는 돌아서고, 날듯이 춤추듯이 열 걸음이나 달려갔다.
 문득 돌아서서,


 [젠은…… 괜찮은 거지?]


 물었을 때 그림자가 유난히도 짧던 날 타는 듯한 뙤약볕 아래 일곱 살짜리 소년은 얼마나 아름답게 웃었던가. 세상의 그 어떤 불안도 고뇌도 감히 다가오지 못할 만큼 고운 얼굴로 그는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


 “……참, 다이아몬드 하우스에서 레온티 군을 만났어요.”


 르네가 한참 만에 생각난 듯 말했다. 반도 손을 대지 않은 식사를 물리고 리트리시아는 테이블 바스켓 안의 과일을 덥석 집어 한 입 깨물었다. 집안 식구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모였다.


 “레온티 군이 왜? 또 시노다가 검으로 밀리니까 발로 걷어찼다니?”
 “어머니, 저에 대해 큰 오해를 하고 계신 거 같은데 전 에레트에게 거의 항상 이기는 편이에요.”
 “발로 걷어차서 이긴 것도 이긴 거지, 아무렴.”
 “걷어차지 않았다니까요. ……아니, 딱 두 번이에요. 아니, 세 번인가? 어쨌든. 옛날 일이라구요, 옛날!”
 “그래, 그런 걸로 해 두고 르네 이야기를 좀 듣자.”


 아, 분하다.
 리트리시아는 원망스러운 마음을 가득 담아 맨손으로 청사과를 반으로 쪼갰다.



 [젠, 고마워. 젠은 꼭 오빠 같아.]


 그걸 말이랍시고 한 걸까.
 여섯 살짜리 계집애가 나름대로는 칭찬한 거였겠지만 대체 일곱 살짜리 제네시오는 그 말을 듣고 뭘 생각했을까. 사실 지금에 와서는 알 수 없다.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아마 잘 알지 못할 터다. 어쩌면 제네시오 본인조차 그렇게 오래 전의 자기 자신이 보고 있던 세계를 온전히 기억할 수는 없겠지.
 기억하지 않기를 빈다.


 [우리 집 루비우드 도자기를 룬트슈테트 군이 깨뜨려서 영지 관리인 멜빈 씨에게 말해 두었어요. 어린애니까 보상을 요구할 생각은 없지만, 교육은 필요하겠다 싶어서요.]


 그날 저녁 어머니가 아버지와 대화하는 걸 듣다가 마냥 즐겁던 리트리시아는 비로소 작은 불안에 사로잡혔다. 그러고 보니 멜빈 씨 부부는 제네시오의 친 부모님이 아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제네시오가 말해 주었다. ‘진짜 부모는 없다’ 고. ‘엄마 얼굴은 본 적 없다’ 고.


 ‘아빠는 나만 없었어도 편했을 거라고 하셨다’ 고 말하면서도 제네시오는 웃었다.
 ‘괜찮아’ 라며 손을 흔들었을 때처럼.
 그렇지만.


 [멜빈 씨가 심하게 야단치지 않으면 좋겠는데. 아직 어린애잖소.]
 [설마하니 일단은 영주 댁 도련님인데 심한 말이야 않겠지요. 저도 아이들 실수니까 그냥 주의만 주라고 말해 두었어요. 그러니…… 어머, 시노다?]
 [시노다. 왜 울지? 어디 아프냐?]


 그렇지만 괜찮을 리가 없다.
 야단 맞으면 싫겠지. 무서운 얼굴을 한 어른이 앞에 있으면 울고 싶겠지.
 제네시오는 혼잔데. 울고 나서 등을 두들겨 줄 오빠도 없고 놀려대다가도 잘 때 손을 잡아 줄 언니도 없는데. 야단친 후에 안아줄 엄마도, 업어줄 아빠도 없이 제네시오는 혼자 혼나고 혼자 울고 혼자 잠들어야만 한다.


 [……깨뜨린 건 저예요. 젠이 아니고, 제가 그랬어요.]


 괜찮을 수가 없다.
 괜찮다고 말해선 안 된다. 속 편하게 떠넘기고 제멋대로 마음 놓아선 안 됐다.
 리트리시아는 곤혹스러운 표정의 어머니 치맛자락에 매달려 ‘잘못했어요’ 하고 울었다. 그러자 미라벨은 콜린과 마주보며 어깨를 으쓱거리곤,


 [시노다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겠니?]


 물었다.


 [지금 젠에게 사과하러 가야 해요.]


 그래서 그렇게 했다.
 지금도 그렇게 해서 정말로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레온티 군 말이, 시노다는 룬트슈테트 군과 친남매 같다더군요. 정말 친오빠 대하듯 해서 귀엽다나요. 대체 왜 레온티 군이 그런 말을 하면서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르네의 말에 리지엘라가 기다렸다는 듯 끼어들었다.


 “시노다가 르네 오라버님에게 어떻게 대하는 지 알면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못할 텐데 말이죠.”
 “누가 아니라니?”


 재미 하나도 없는데 가족들은 신나게 웃음을 터뜨렸다. 리트리시아가 입을 다물고 꽁한 채 딴청을 부리자 르네는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시노다, 막내야. 좀 얘기해 봐. 왜 레온티 군이 갑자기 룬트슈테트 군 이야기를 꺼내니?”
 “따지고 보면 사촌이잖아요. 이야기를 못할 것도 없죠.”
 “……룬트슈테트 군의 입장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거니? 난 내 동생이 그렇게나 무신경한 아가씨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아, 내가 어떻게 아냐고! 정말……. 이 집 딸은 나야. 젠이 아니라구요. 정말, 알고는 계신 건가요? 다들? 승급시험을 앞둔 딸에게 하루 종일 젠, 젠, 젠! 신경증이라도 생기겠네.”
 “룬트슈테트 군이 오지 않아서 안절부절 못하는 건 너 아니었어? 우린 누구보다도 너를 걱정하는 거란다.”
 “아니면.”


 리트리시아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아니면 그 에레트 녀석에게 묻지 그러세요? 어쨌거나 텔바인 공작가와는 왕래가 있는 모양이니까, 젠의 근황은 잘 알겠지요. 에레트 녀석, 르네 오빠와는 다이아몬드 하우스든 페리도트 홀이든 자주 마주치는 모양이고.”
 “레온티 군에게 묻는 건 조금.”
 “왜요?”


 전혀 모르겠다는 양 눈을 동그랗게 뜨는 리트리시아에게 가족들은 자기들끼리 시선을 교환하곤, 아버지 콜린이 헛기침을 하며 더없이 상식적인 어투로 말했다.


 “아가, 이런 말 조금 그렇지만……. 다 큰 딸이 다른 남성과 잦은 교류를 가진다고 공공연히 드러내기는 조금…….”
 “다른 남성? ……그렇지만 어차피 젠은 오빠 같은 거잖아요. 젠하고 만나는 게 뭐 어때서요?”


 식탁 위로 싸늘한 정적이 내려 앉았다.


 “시노다. 레온티 군에게도 그런 말을 했니?”
 “무슨 말? 리 언니.”
 “방금 우리에게 했던 것 같은 말.”
 “했나? ……한 거 같기도 하고. 몰라, 그런 거. 에레트한테 무슨 소리 했는지 일일이 어떻게 기억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잡담인걸.”
 “했구나?”
 “그게 중요해?”
 “저런.”


 리지엘라를 시작으로 미라벨과 콜린, 그리고 마지막으로 르네까지 차례차례 한숨을 쉬었다.


 “난 뭐가 문젠지 알 거 같구나.”
 “저도요, 어머님.”
 “우리 막내는 아직 애라니까.”


 운운. 화제에서 완전히 따돌림 당한 기분으로 리트리시아는 버럭 외쳤다.


 “알면 말을 해 주세요!”



 [어, 어머! 아우스트리아 댁 마님 아니세요? 이런 시간에 어쩐 일로 누추한 집엘 찾아오셨대요?]
 [갑자기 미안해요. 낮에 말씀 드린 도자기 말인데요.]


 영지 관리인 멜빈의 처, 마리아가 등불을 고쳐 쥐고 빈 손으로 사래질을 쳤던 것을 기억한다. 미라벨의 치마가 청색 줄무늬가 들어간 백색이었던 것도, 그 치마폭에 폭 감싸일 만큼 제가 작았던 것도 리트리시아는 전부 잊지 않았다.
 그녀는 여섯 살이었다.
 제네시오는 일곱 살. 둘은 나란히 서면 동갑내기 계집애 한 쌍 같았다. 미라벨의 치맛자락에 몸이 전부 가려질 만큼 작은 몸으로 리트리시아는 제 죄의 무게 때문에 벌벌 떨었다. 거짓말을 했다. 거짓말로 제네시오에게 제 죄를 떠넘겼다.


 [그 일 말씀이시군요! 어휴, 마님 걱정 마세요. 그렇지 않아도 좀 전에 우리 바깥 양반이 혼쭐을 내 줬으니 앞으론 그런 일 없을 겁니다.]
 [……네? 아뇨, 저 그런 뜻으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
 [고 말썽쟁이가 또 무슨 폐를 끼쳤나요? 괜히 귀한 댁 자제분들이 고운 맘으로 어울려 주시니 그것이 요즘 버릇이 나빠져서 큰일입니다. 앞으로는 그 댁 쪽으로 가지 않도록 쇤네가 잘 일러 두지요.]
 [아뇨! 마리아, 그게 아니에요. 제가 잘못 알았어요. 도자기를 깬 건 그 애가 아니었답니다. 저는 사과를 드리려고 왔어요.]


 그 말에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마리아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아유! 그러셨군요. 참 마음도 고우셔라. 괜찮아요, 마님. 아무튼 뭐 필요한 게 있거나 저 녀석이 못되게 굴거든 바로바로 야단을 쳐 주세요. 영주님 댁에 어쩌다가 저런 것이 섞여 들었는지.]
 [그렇게 말씀하실 건 없잖아요. 제네시오는 착한 애예요. 우리 집 아이들도 모두 그 애를 좋아하는걸요. ……폐라면 오히려 우리 집 아이들이.]
 [무슨 그런 말씀을! 당치 않아요. 그럼 살펴 가세요, 마님.]


 마리아는 웃는 낯으로 문을 닫으려 했다. 그때까지 겁에 질려 눈만 내 놓고 있던 리트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사, 과를 해야 돼요! 사과하러 왔어요.]
 [막내 아가씨, 그 녀석은 지금 잠이 들었으니 다음 번에 만나 노세요.]
 [지금 사과 해야 돼요. 아줌마, 젠을 만나게 해 주세요.]
 [……그것은.]


 곤란하다고 입 안으로 웅얼거리는 소리가 멀게 들렸다. 미라벨이 ‘예의에 어긋나니 내일 다시 오렴’ 하며 어깨를 잡아 당기는 손길도. 리트리시아는 반쯤 닫힌 문 틈으로 달려들었다. 자그마한 몸뚱이는 제대로 열리지도 않은 문을 통과해 새카만 어스름에 잠긴 돌 층계를 구르듯 밟아 내렸다. 축축한 습기가 사철 가시지 않을 토방 같은 지하에 발을 들이자, 햇볕 아래 아름답게 웃던 일곱 살짜리 소년이.


 [젠……?]


 시커멓게 부어 오른 뺨을 감싸지도 않고 멍하니 돌 바닥에 앉아 있었다.
 잠든 것은 제네시오가 아니라 관리인 멜빈이었다. 제네시오는 갑자기 나타난 리트리시아를 보고 조금 놀란 듯 눈을 깜박이다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우스트리아 양, 자백했니?]
 [사, 과를 하려고…… 내가 깬 거니까 젠이 아니라고 말하려고…… 왔는데……. 그런데…….]
 [저런. 왜 그랬어?]
 [그, 그치만, 내가 깼잖아! 내가 잘못 했잖아. 젠이 아니라, 내가……! 젠, 괜찮니? 젠, 피 나잖아, 피! 젠…….]


 달려가 뺨에 손을 가져다 대자 고통스러운 듯 그가 움찔 물러 앉았다. 웅크린 다리에도 동그스름한 어깨에도 온통 멍 투성이였다. 리트리시아는 여섯 살. 한 눈에 상황을 알아볼 만한 지식이 없었다. 실수를 저질렀다고 해서 아이를 그렇게 때릴 수 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다만 소중한 친구가 다쳤다는 사실 자체에 충격을 받아 울음을 터뜨렸다.


 [울지마, 시노다.]


 그가 오히려 리트리시아를 위로했다.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는 조심스레 리트리시아의 얼굴을 살폈다. 상처가 없다는 것에 그는 안도하여 웃었다.


 [자백했어도 아직 안 맞았지?]
 [젠, 괜찮아? 젠.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왜 이렇게 다쳤어? 젠, 피 나잖아…….]
 [울지마. 아우스트리아 양이 우는 거 싫은데.]
 [피 나잖아, 젠. 어떡해? 왜 다쳤는데?]


 모든 아이가 학대 당하며 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많은 아이들이 보호자의 애정 속에서 안온하게 잠든다는 것을, 일곱 살의 제네시오는 알지 못했다. 미라벨은 소년의 양육 환경을 한 눈에 알아 보았지만 어린 소년의 뺨이 부어있다는 것만을 근거로 멜빈 부부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마리아. 제네시오를 오늘 밤 우리 집에서 재워도 괜찮을까요? ……그러니까, 저, 우리 막내 딸이 저렇게 울고 있으니까요.]


 마리아는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아이를 기른다’는 성가신 역할을 하룻밤이라도 벗어버린다는 점에 만족했다. 어차피 그녀에게 제네시오는 급작스레 할당 받은 추가 업무 같은 것이었으므로. 미라벨은 마리아와 멜빈의 양육태도를 비난하는 대신 우회적인 염려의 말을 남겼다.


 [젠, 죽지마. 젠. 죽으면 안 돼.]
 [……안 죽을 테니까 놔 줘. 시노다.]


 당장 치료가 시급한 제네시오의 목을 필사적으로 끌어안은 채 리트리시아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실버웨지가 떠나가라 울어댔다. 미라벨은 철없는 리트리시아에 비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매양 담담한 제네시오의 태도를 칭찬하며, 한편으로는 우려했다.


 


 +++


 


 “웬일로 리트리시아가 다이아몬드 하우스엘 다 왔네?”
 “승급시험 때문에 인사하러 온 거야. 안 그러면 이딴 데 왜 와? 재미도 없고.”


 모처럼 치렁치렁한 드레스 차림에 숄까지 챙겨 두르고 다이아몬드 하우스에 나타난 리트리시아를 향해 몇 명인가 낯익은 얼굴이 인사를 건넸다. 본디 왕성의 이궁(離宮)이었다는 정도뿐 리트리시아는 그게 어느 왕족의 뭐하는 성인가 하는 것까지는 잘 알지 못했다.


 “살롱 비슷한 거라는 점만 알면 되지 뭘.”


 에레티예프 레온티가 겉보기만은 멀쩡한 몰골로 그렇게 말해 주었다.


 “그치?”
 “그럼.”


 르네나 리지엘라가 들으면 한숨을 쉴 발언이지만 다행히 그 두 사람은 근처에 없었다. 리트리시아는 리지엘라가 샀다가 통 어울리지 않는다며 넘겨준 옅은 보랏빛 숄을 두르고 비슷한 색의 실로 수를 놓은 실크 드레스를 맞춰 입었다. 검을 휘두르고 다닌 덕분인지 쉴새 없이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뛰어다닌 덕분인지 늘씬한 몸의 곡선을 감싸고, 값비싼 옷자락이 사락사락 기분 좋게 감겼다 떨어졌다.


 “그러니까 세 사람한테만 더 눈도장 찍으면 돼. 일단 이번 승급시험 위원장인 버튼 경하고 안젤레타 자작하고 제…… 어이, 리트리시아. 너 괜찮냐? 아까부터 계속 휘청거리는데.”
 “많이 이상해?”
 “이상하지. 잡아 줄까?”
 “그럴래? 아, 짜증나! 죽겠네, 진짜.”
 “왜? 낮술 한 건 아닐테고.”
 “구두를 신었더니…… 아, 장난 아니야. 이거 새로 맞췄거든. 신던 구두를 이층에서 떨어뜨렸더니 처참한 꼴이 됐더라고.”
 “답다, 다워. 아, 리트리시아! 저기 저거 돌로뮤 부인 아냐?”
 “몰라. 누군데?”
 “승급 심사위원 거스트 경의 누님. 인사하러 가자.”
 “가자!”


 리트리시아는 기세 좋게 숄을 고쳐 두르며,


 “망했다! 목걸이 안 하고 왔어!”


 따위의 전혀 귀엽지도 그럴싸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에레티예프는 소리를 죽일 생각도 없는지 들으란 듯 호탕하게 웃어댔다. 승급을 앞둔 두 명의 젊은—보다는 상당히 어린—기사를 만난 돌로뮤 부인은 다행히도 꽤나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에레티예프도 리트리시아도 평판이 나쁘지 않았으니 그야 당연한 일이었을 터다. 그런대로 봐줄만한 외모에 그런대로 괜찮은 집안의 자제, 거기다 성실한 기사쯤 되면 별 원한이 없는 한 대개는 웃으며 손을 내밀게 마련이니까.


 “룩빌 남작도 리지엘라 양도 자주 뵙는데 리트리시아 양은 왜 자주 아니 오세요? 기사단 훈련이 그리 힘든가요? 참, 지난 번에 리지엘라 양이 살디바르 씨 댁의 티파티에 초청해 주셨답니다. 그때에 글쎄…….”


 물론 그 평판의 일부는 리트리시아와는 달리 두루 사람들과 잘 지내는 편인 두 형제자매의 덕분일 터였다.


 “……아셨죠? 에레티예프 군, 리트리시아 양을 데리고 자주 얼굴을 보여 주세요. 요즘은 기사단 시험이다, 마법학회 외유다 뭐다 해선지 젊은 분들이 죄 바빠요. 영 재미난 일이 없답니다.”
 “어, 외유 가나요?”


 반쯤 흘려 듣던 리트리시아가 불쑥 끼어 들었다. 묘하게 표정이 밝아지는 것에 에레티예프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매사에 둔한데다 무신경한 주제에 이상한 부분에서 예민하다고 리트리시아는 생각했다.
 하긴 남의 말을 할 처지는 아니다.


 “외유 때가 됐죠. 멀리 발령을 받으면 상당히 번거롭겠지만 대신 좋은 논문을 만들 수 있고, 그래서 승진하는 데 도움이 된다더군요. 엊그제 거스트한테 들었는데, 마법사들은…… 어머! 드래곤도 이름을 부르면 비를 뿌린다더니 마침 저기 오네요. 호호.”


 돌로뮤가 군살 없이 매끄러운 손을 뻗어 반대편을 가리켰다. 창을 등지고 회랑을 가로질러 중키의 사내가 걸어왔다. 잿빛이 섞인 머리며 햇볕에 잘 그을린 피부만 봐서는 금발의 돌로뮤와 남매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테지만, 사실 돌로뮤 부인은 염색을 즐긴다.


 ‘아니 뭐 어차피 우리 집도 나만 빨간 머리고.’


 아우스트리아 백작가에서 빨간 머리를 찾으려면 삼대쯤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두 분, 거스트를 보러 온 거죠? 괜히 저까지 상대하느라 성가셨겠어요. 오호호호.”


 에레티예프와 리트리시아가 거스트 쪽을 보고 반색하는 걸 눈치챘는지—못 챌 리가 없다—돌로뮤가 살짝 샐쭉해져선 부러 소리를 내 웃었다. 리트리시아는 에레티예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재주 좀 부려 봐.
 무슨 재주?
 무슨 재주겠어? 이럴 때야 말로 갈고 닦은 사교술로 비위를 맞춰 보라고. 공작가 도련님.


 ……정도의 대화를 소리 없이 주고 받을 수 있어야 기사단의 일등 페어라고 할만 하다.
 기실 에레티예프는 텔바인 공작가의 후계자인 만큼, 단순한 편이라곤 해도 나름대로 사교계 정보에 밝았다. 적어도 틀어박혀서 집과 기사단만 오가며 자유분방하게 살아온 리트리시아 만큼은 무신경하지 않았다. 그는 토라진 돌로뮤 부인의 기분을 맞춰주는 일에 잠깐 신경을 기울였고, 그 바람에 거스트 경에 대해 리트리시아에게 약간의 사전 정보를 공유하는 것을 잊었다.


 거스트 드랑모르트 남작이 마법사들의 ‘외유’에 대해 새삼 누님과 대화했던 것은 그가 근래 심혈을 기울여 ‘작업’을 건 여성이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좀 더 상세히 상대에 대해 말하자면 그녀는 갓 열 일곱 살의 사랑스럽고 풋풋한 미인으로 괜찮은 집안의 딸이며 올 봄에 갓 왕성 마법사의 지위를 획득하여 한껏 꿈과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스물 네 살의 거스트 드랑모르트는 그녀가 왕성 마법사로서 다이아몬드 하우스에 들러 사교계 데뷔를 한 그날 그녀를 점 찍고 지금껏 정성을 들여 교제해 왔다.
 기사단의 상급 기사인 그가 마법학회 소식을 자주 입에 올린 건 그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중요한 정보는.


 “……니까. 그런 녀석이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다이아몬드 하우스를 드나드는 걸 참을 수가 없다네.”


 거스트의 ‘그녀’가 최근 제네시오 룬트슈테트에게 반해 거스트의 구애를 정식으로 거절했다고 한다…… 는 것이다. 정말로 그가 제네시오에게 반한 건지, 아니면 단순히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그녀’가 제네시오와 몇 번인가 같은 임무를 수행한 것만은 사실이고, 거스트가 두 사람이 자주 어울리는 걸 불쾌해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했다.
 말하자면 리트리시아 정도로 사교계에 관심이 없지 않은 한 모두가 알았다.


 “그런 녀석…… 이라니 말씀이 심하시군요.”


 리트리시아가 아니라면.


 “심하다고? 리트리시아 양, 그 말은 내가 없는 말을 지어낸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얼마 남지 않은 승급시험을 위해서라도 나는 이 모든 것이 내 오해이기를 바라네.”
 “제…… 룬트슈테트 군의 돌아가신 조모님이 어떤 분이셨건,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까지 꺼내 입에 올리시는 건 온당하지 못해요.”
 “뭐라고? 지금 나를 비난하는 건가?”
 “비판하는 겁니다! 귀족으로서 친우의 명예가 더럽혀지는 것을 보아 넘길 수야 없죠.”
 “허! 꼬마 아가씨가 말의 가치를 몰라 함부로 내뱉는군.”
 “그건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그만한 소란이 일어났는데 이목이 쏠리지 않은 리 없다. 거스트는 안 그래도 험상궂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는 분노인지 무안인지 모를 감정으로 낯을 붉혔다. 리트리시아는 분노 외에 다른 감정 따윈 한 점도 섞이지 않은 얼굴로 매섭게 거스트의 시선을 받아냈다. 제네시오는 그녀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벗이다. 그의 출생이 조금 복잡하다는 것쯤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지만, 의무를 방기해 버린 부친이며 이방인인 데다 신분이 비천했다던 조모 때문에 제네시오의 성취가 폄하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리트리시아는 그런 류의 수사를 이해하거나 용납할 만큼 요령이 좋지 못했다.
 적어도 제네시오를 두고 남이 떠드는 험담을 못 들은 척 할 수가 없었다.


 ‘짜증나! 뭘 안다고 멋대로 젠을 욕하는 거야? 뭐? 근본도 모를 남쪽 이방인의 피가 어쩌고 어째? 어미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왕성 마법사라니, 그게 무슨 상관인데!’


 “리트리시아!”


 상황이 심상치 않자, 돌로뮤 부인과 대화를 마친 에레티예프가 얼른 달려와 리트리시아를 다급히 잡아당겼다. 두 사람 사이에 적당히 끼어들어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얼렁뚱땅 화제를 돌리는 게 최선이다. 거스트는 제네시오에 대해 되는 대로 떠들어 대며 화풀이를 하고 싶을 뿐이고, 상대해 봐야 서로 좋을 게 없다.


 “리트리시아, 지금은…….”
 “비켜, 에레트. 나 저런 말 들어 넘길 수 없어.”
 “리트리시아! 잠깐만! 나하고 얘기 좀 하자. 리…….”
 “저는 이 자리에서.”


 리트리시아는 에레티예프의 손을 단숨에 밀어내고는 그가 다시 말릴 새도 없이 자신의 장갑 한 짝을 벗어 거스트의 발치에 팽개쳤다. 섬세한 레이스로 짜낸 긴 장갑은 기사들이 성장할 때 쓰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 뜻만은 훌륭히 전해질 터였다.


 “이 자리에서, 결투를 신청합니다!”


 너무나 뜻밖의 상황에, 거스트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리트리시아를 내려다 보았다. 잠시의 정적 후에 조금 전까진 공작가 도련님다운 얼굴로 사태를 수습하려 애썼던 에레티예프가, 언제 그랬냐는 듯 혈기 넘치는 기사로 돌아와 리트리시아의 어깨를 철썩 내리쳤다.


 “과연! 내 친구다!”


 


 +++


 


 드레스를 무릎까지 걷어붙이고 드로워즈 끝자락이며 뽀얀 종아리를 다 드러내고도 주위 시선 같은 것엔 흥미조차 없는 양 씩씩하게 걸어, 리트리시아는 집으로 돌아왔다. 저택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구두를 벗어 던지고 남은 장갑 한 짝과 숄은 팔걸이 의자에 아무렇게나 뉘듯 걸쳤다. 당장 전쟁이라도 나갈 사람처럼 리트리시아가 수선을 피우며 검이며 가죽 장갑, 발에 익은 부츠 따 따위 찾아 온 집안을 뒤집어 엎는 동안 시녀 플로리타가 재빨리 안주인을 불러왔다.


 미라벨은 딸의 갑작스런 귀가와 기행에 놀랐지만 아우스트리아 가의 안주인답게 평온한 목소리로 다른 시종을 불러 큰아들의 위치를 물었다. 어머니가 여동생에 관해 묻기 위해 호출하기 전에, 르네가 먼저 돌아왔다. 페리도트 홀에 있었거나 아니면 여우사냥을 핑계삼아 과일주를 나눠 마시는 모임에 나갔을 터인 그가 헐레벌떡 돌아와,


 “시노다!”


 여동생의 이름을 목놓아 외치는 순간 미라벨은 딸이 뭔가 사고를 쳤겠구나 짐작했다.


 “시노다, 이게 무슨 소리니? 지금 소문이…… 시노다!”


 온순한 르네가 목소리가 뒤집히도록 고함을 치며 층계를 전속력으로 밟아 올랐다. 리트리시아는 새카만 벨벳으로 된 허리띠를 조여 두르고 머리카락을 꼼꼼하게 올려 묶다가 오빠를 맞았다. 르네는 목청을 가다듬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몹시 주의 깊은 어휘로 리트리시아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리트리시아는 시원하다 못해 그야말로 장쾌한 태도로 르네의 마지막 희망을 저버렸다.


 “……정말로 거스트 경과 결투하겠다고? 당장 승급 시험이 열흘 남짓밖에 안 남았다는 거 모르니?”
 “올해 승급을 못하더라도 젠의 명예를 지켜줘야지! 르네 오빠는 지금 그깟 승급 시험 때문에 뛰어온 건가요?”
 “이 철 없는 것이!”
 “결투 날짜를 잡아 연락하기로 했으니까 저리 비키세요. 당장 오늘 저녁에 검을 겨뤄 당당하게 승리할 작정이니까요.”
 “시노다!”


 르네는 리트리시아의 방문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러나 여동생이 고개를 들어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자 어차피 그녀를 말릴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저으며 물러섰다.


 “플로리타, 가서 룬트슈테트 군에게 연락을 해 줘.”
 “젠은 왜 부르세요? 젠이 와도 달라질 건 없어요.”
 “널 힘으로 막는 건 무리고 본인을 불러 한 번 물어보렴. 네가 나서서 명예를 지켜주기를 룬트슈테트 군이 바라겠니?”
 “다이아몬드 하우스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젠을 모욕했어요. 오빠는 젠이 얼마나 더러운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셔서 그래요.”
 “내가 왜 모르겠니.”
 “……그럼.”


 긴 검과 짧은 검, 각반을 여분으로 챙기고 멋이라곤 하나도 없는 가방에 각종 물약까지 챙겨 쑤셔 넣던 리트리시아의 동작이 잠시 멈췄다.


 “그럼 오빠는 지금껏 그런 소문을 웃으면서 들어 넘기셨나요?”
 “오해는 마라. 사교를 위한 수사 같은 거다. 기분풀이를 위해서든 뭐든 괜한 소릴 떠드는 자들은 어디에나 언제나 있어.”
 “사교를 위해 벗을 매도하나요? 그깟 사교가 뭔데요!”
 “시노다.”
 “헬브린 양도 오빠가 이런 사람인 걸 아나요? 아, 맙소사. 먼저 오빠와 검을 겨루어야 할까요? 자, 거스트 경에게 던진 장갑은 아직 한 짝이 남아 있어요, 저기에. ……아니 여긴가? 저기 의자나 아니면 침대 밑 어딘가 있을 거예요.”
 “의자겠지.”
 “그렇군요, 고마워요. 그래서.”
 “진정해라, 시노다. 이렇게 흥분해서 일을 키우는 거야말로 룬트슈테트 군에게 좋지 않다.”
 “젠은 훌륭해요.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알아, 나도 안다고. 이런, 시노다!”


 리트리시아는 다 싸 놓은 가방을 뒤엎었다. 그녀의 의도가 아니라, 흥분을 감출 수 없어 손이 미끄러졌기 때문이다. 리트리시아는 분한 듯 허공에 주먹질을 하곤 백작가의 막내따님과는 어울리지 않는 욕지기를 뱉으며 벌떡 일어섰다. 머리를 싸매고 한숨을 쉬는 여동생의 이름을 두 번 더 부른 후 르네는 플로리타를 외쳐 불렀다.


 “플로리타! 사람은 보냈나? 룬트슈테트 군에게 말야. 미안하지만 빨리 좀 부탁해.”


 그러나 아우스트리아 가문의 노련한 시종과 엇갈리듯 제네시오가 저택에 당도했다. 내심 불안해 홀을 서성이던 미라벨이 제네시오가 인사를 하기 위해 모자를 벗기도 전에 손짓해 위층을 가리켰다. 제네시오는 참으로 송구스럽다는 듯 목례하며 곧장 이층으로 뛰어 올랐다. 얼마 전 르네가 그러했듯,


 “시노다!”


 리트리시아를 부르며.


 “젠.”


 르네는 한 시름 놓았다는 얼굴로 제네시오에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리트리시아는 제 자리를 맴돌며 투덜거리다 제네시오를 보고 잠깐 반색했다. 열흘 만의 만남이다. 그것이 그녀를 기쁘게 만들었다가 바로 다음 순간 부아가 치밀어 샐쭉한 표정을 짓게 만들었다.


 “젠, 요 며칠간 말인데.”
 “가자.”
 “……어딜?”


 제네시오는 리트리시아의 손목을 낚아챘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리트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팔을 뿌리쳤다.


 뿌리칠 것까진 없었는데.
 하고 리트리시아의 눈가에 떠오른 아쉬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네시오는 초조한, 언제나 리트리시아가 홧김에 심한 말을 내뱉을 적마다 지었던 ‘오빠다운’ 난감한 시선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 보았다.


 “거스트 경에게. 달리 어딜 가겠어?”
 “안 그래도 지금 갈 거였어.”
 “싸우러 가자는 게 아냐. 이 바보.”
 “뭐? 바보라고 했어! 젠! 바보가!”
 “바보가 아니면 뭐야! 시노다, 결투라니 제 정신이야? 그런 무모한 짓 하면 승급 시험은 어떻게 할 거야?”
 “르네 오빠랑 똑 같은 소리를 하네.”
 “……누구의 오빠 비슷한 거니까.”


 그 말을 할 때 제네시오의 보랏빛 눈동자가 묘하게 자조적으로 보였지만 리트리시아는 그것을 지적할 타이밍을 완전히 놓쳤다. 제네시오가 다시 손목을 잡아챘기 때문이다.


 “말씨름 할 시간 없어. 빨리 가서 사과하고 결투 취소해.”
 “왜!”


 말투는 심통스러워도 리트리시아는 제네시오를 뿌리치지 않고 투정부리듯 잡힌 손목을 흔들었을 뿐이다. 제네시오는 아아, 하고 신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다른 쪽 손에 제 이마를 파묻었다.


 “텔바인 공작가에 들렀다가 레온티 군을 만났어. 그 멍청이가 신이 나선 ‘과연 리트리시아’ 라잖아. 나는 눈 앞이 하얀데, 정신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공작가 도련님 생각은 따라갈 수가 없다니까. ……시노다, 나를 위해 화를 내 주는 건 고마워. 고마운데, 결투는 아냐.”
 “그러니까 왜! 에레트는 잘 했댔어. 젠을 모욕하는 말을 내가 듣고 어떻게 가만 있어? 피를 봐서라도 명예를 회복시켜 줄게.”
 “아니…… 저기, 시노다. 됐다니까. 내 명예 같은 거. 어차피 거스트 경도 오해가 있어서 좀 과한 말씀을 하신 거고, 감정에 취해서 떠든 거야. 눈 감아 주면 그걸로 내 나름 카드가 되는 거니까. 아…… 너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아아, 정말이지.”
 “카드? 젠도 그 사교니 정치니 그런 소리 하려고 그래? 그딴 거 알게 뭐야! 난 젠이 모욕 당하는 거 못 참아! 깨끗하게 결투 할거야!”
 “시노다, 제발.”


 제네시오가 깊이 한숨을 쉬며 손목을 놓았다. 리트리시아의 양 어깨를 힘주어 잡고 그는 고개를 숙였다. 리트리시아는 그의 표정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의 기분을 이해하지도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젠, 내가 젠을 위해서 싸우는 게 싫어? 성가셔서 그래?”
 “그런 게 아니야.”
 “르네 오빠처럼 사교니 뭐니 그런 소리 하려는 거지? 난 어차피 애야. 그런 거 몰라.”
 “시노다가 나를 위해 화를 내 주는 건 기뻐. 다시 말하지만 정말 기뻐. 하지만.”
 “하지만, 뭔데.”


 그가 고개를 들어 리트리시아와 눈을 마주했다.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들여다 본 제비꽃 빛깔 눈동자 한 쌍은 그녀가 언제나 보아 오던 것보다 어째서인지 더욱 어두운 양 느껴졌다.


 “내가 잘못했어?”


 리트리시아가 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노다는 잘못한 것 없어. 하지만 시노다, 곧 승급 시험이잖아. 거스트 경의 체면을 생각해 봐. 네가 이기든 너를 이기든 그는 창피를 당하게 돼. 시험은 정당해야 하지만 심사위원은 사람이고, 본래 평판에도 점수가 매겨지게 마련이니까…….”
 “올해 승급 안 해도 돼.”
 “내 기분은?”
 “……젠의 기분?”
 “나 때문에 시노다의 앞길이 어지러워지는 거야. 내 기분은 어떨 것 같아? 고개를 들고 너희 가족을 볼 염치도 없어. 네 앞에 뻔뻔스럽게 나타날 자격도 없을 거고.”
 “그, 런 거. 젠이 어째서…….”


 제네시오가 그렇게 말한다면 아마 진심일 터다. 리트리시아 자신이 뭐라고 말하든 제네시오는 ‘염치가 없다’면서 다시는 만나러 와 주지 않을 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시노다가 레온티에게 뒤쳐지는 건 싫어. 지금껏 얼마나 열심히 해 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얼른 승급해서 작위를 받은 모습을 보고 싶어. 시노다, 부탁해. 결투 그만 둬.”
 “……젠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알았어.”


 리트리시아가 겨우 한 발 물러서자 제네시오는 비구름이 벗개듯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톡, 가볍게 부딪혔다.


 “고마워, 시노다.”


 머리를 쓰다듬으려나 했는데 그는 곧바로 등을 돌려 문 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리트리시아는 어쩐지 흥이 식이 버려, 어지럽게 널린 각종 물약과 붕대 따위를 멍하니 내려다 보았다. 제네시오는 르네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르네 오빠, 젠한테 뭐라고 하지 말아요.”
 “자나깨나 룬트슈테트 군만 걱정하시느라 공사가 다망한 여동생님, 부탁이니까 말썽 좀 부리지 마.”
 “내가 뭘. 난 잘 하고 있다구요.”
 “제발 그러기를 빈단다. ……룬트슈테트 군, 아무튼 시노다를 데리고 가서 결투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와 주겠어?”


 제네시오는 꽤나 정중한 어투로 르네에게 답했다. 리트리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빠와 소꿉친구를 번갈아 쳐다 보았다. 어린 시절에는 천둥벌거숭이처럼 어우러져 강둑을 뛰어다니던 사인데 그러고 보니 왕도(王都)에서 재회한 후로는 꽤나 어중간한 거리를 둔 것 같다. ‘제네시오’ 라고 부르는 사람도 없다. 어디까지나 왕성 마법사 ‘룬트슈테트 군’과 ‘아우스트리아 백작가의 일원’으로서 대화를 나누는 정도.


 ‘젠은 그냥 젠인데. 아, 모르겠다.’


 소꿉친구의 손에 이끌려 마차를 타고 거스트 경을 만나러 가는 내내 리트리시아는 그 점에 정신을 파느라, 들끓던 피가 얼마간 식어 버렸다. 제네시오를 두고 멋대로 떠들던 거스트의 얼굴을 떠올리면 당장이라도 주먹다짐을 하고 싶었지만 본인이 옆에서 웃고 있는데 남이 나서서 따지고 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뭐, 이렇게 사과를 하러 왔으니 선배로서 너그럽게 용서해 줘야지. 나도 말이 과했던 듯 싶네.”


 거스트 드랑모르트도 적당히 발을 뺐다. 제네시오의 말대로 작위까지 달린 기사인 그가 햇병아리 신입 기사와 결투를 벌여 봤자 체면이 구겨질 뿐이니 그만하길 다행일 터다.


 “후배의 무례를 눈감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지도편달을 부탁 드립니다.”


 앵무새처럼 딱딱하게 외며 인사하자 거스트도 기계적인 목례를 건넸다. 김이 빠진 얼굴로, 그러나 여전히 입이 한 자나 나와 마지못해 물러서는 리트리시아의 곁에서 제네시오 룬트슈테트가 평온하게 웃었다. 그리고 왕성 마법사가 예복에 갖춰 끼는 얇은 천 장갑 한 짝을 벗어, 방심하고 있는 거스트의 옷가슴에 던졌다.


 “……이게 무슨 짓인가, 룬트슈테트 군.”
 “모욕을 받은 건 저니까 정당한 예에 따라 제가 결투를 신청한 것뿐입니다.”
 “끝내기로 한 것 아니었나?
 “보시다시피 제 친구가 언제 또 화를 낼지 모르니 명예를 회복해 둘까 해서.”


 뒤늦게 정신을 차린 리트리시아가 불쑥 끼어들어 제네시오의 옷어깨를 잡아당겼다.


 “잠깐! 젠, 싸울 줄 모르잖아!”
 “어…… 아니, 나 일단은 왕성 마법사인데. 물론 일반인 상대로 전투 마법을 쓰면 안 되지만.”


 거스트가 노골적으로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그래. 나도 일반인 상대로 검을 뽑을 순 없네. 어떻게 싸우겠다는 건가? 룬트슈테트 군.”


 물었다. 제네시오는 한 점 위기감도 찾아볼 수 없는 말간 얼굴 가득 미소를 떠올렸다.


 “다이아몬드 하우스에서 정정당당하고 엄숙한 카드게임…… 이라든가.”


 


 +++


 


 “조플린 양이 카드게임 좋아하거든.”


 다음 날 아침 일찍 나간 연무장에서 준비운동 삼아 몇 합을 겨룬 후 에레티예프가 불쑥 말을 꺼냈다.


 “조플린 양?”
 “조플린 루이즈벨. 거스트 경이 마음에 둔 마법사 아가씨 말이야. 몰라?”
 “알아야 돼?”
 “그럴 필요야 없다만. 선생하고는 자주 같은 임무를 맡는 사이라 너도 알 줄 알았지.”
 “젠하고?”


 리트리시아가 에레티예프의 검을 쳐내고 그만 싸우자는 표시로 제 검을 늘어뜨렸다.


 “리트리시아, 설마하니 너 말야. 거스트 경이 왜 선생을 모욕한 건지 모르냐?”
 “모욕하는 데도 이유 씩이나 있어?”
 “그러니까 조플린 양이…….”
 “조플린 양이 뭐? 에레트 너 얘기 되게 못한다. 지금 수수께끼 풀이 하니?”
 “리트리시아…….”


 에레티예프는 한숨을 푹 쉬며 검을 허리춤으로 되돌리고는 그늘 쪽으로 걸어가 개어 놓은 수건을 집어 리트리시아에게 던져 주었다. 누르스름한 풀밭 위에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아, 그는 거스트 드랑모르트와 조플린 루이즈벨의 관계를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리트리시아는 조플린 루이즈벨이 제네시오 룬트슈테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화제에 이르자 에레티예프가 흠칫 놀랄 만큼 큰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리트리시아?”
 “……어, 아냐. 계속해.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끝이야.”
 “해결된 게 하나도 없잖아! 에레트 너 진짜 얘기 못하는 구나. 교사 같은 건 꿈에도 못 하겠다, 너.”
 “그런 너는 학생 같은 건 꿈에도…… 너 기사 시험은 어떻게 통과했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거든!”
 “조플린 양은 카드 게임을 좋아해. 선생이 카드 게임을 제안한 건, 그러면 ‘정당한 입회자’가 필요하다는 핑계로 조플린 양을 불러낼 수 있다는 의미지. 만나서 오해를 풀자, 뭐 그런.”
 “무슨 오해?”
 “와.”


 손에 쥐고 있던 검집을 갑갑한 듯이 맨바닥이 쿡쿡 내리꽂다가 에레티예프는 까딱까딱 리트리시아 쪽으로 손짓했다. 새카만 색을 입힌 거북 껍질로 된 검집이 성기게 난 풀 사이를 기며 무늬를 만들었다.


 “조플린 루이즈벨과 선생은 아무 사이도 아니다, 두 사람의 교제가 원만하지 못한 데는 다른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런 걸 한 마디로 하면 ‘오해다’가 되는 거지.”
 “신기하네.”
 “난 리트리시아 네가 더 신기하다. 너도 백작가 따님쯤 되면 대충은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아?”
 “음…… 꼭 알아야 할까? 그런 거.”
 “뭐 그런 것에 흥미가 없는 게 리트리시아 답지만. 아, 그래서 말인데.”
 “그래서?”
 “리트리시아.”


 에레티예프의 검집이 바닥의 흙을 패어내며 만든 별 의미도 없는 문양에서 눈을 떼어내, 리트리시아는 마음이 잘 맞는 동료를 향했다. 시원시원한 검술만큼이나 청량한 벽안에 새빨간 불꽃이 비쳤다.
 아니, 불꽃처럼 강렬한 머리타래를 틀어 올린, 진홍색 글러디올러스 같은 리트리시아 자신이.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푸른 눈이 문득 미소를 머금었다.


 “리트리시아, 나한테 시집 와라.”


 


 +++


 


 “시노다. 이거랑 저거 중에 뭐가 좋니?”


 리지엘라는 살디바르 씨와 본격적인 데이트를 시작한 듯, 거의 매일같이 외출이었다. 때로는 르네가 바래다 주곤 했지만 규모가 큰 무도회에는 단 둘이 나가기도 했다. 벨벳으로 만든 초커 두 개를 눈 앞에 들이민 리지엘라에게 리트리시아는 건성으로 답했다.


 “다이아몬드 달린 거.”


 사실 시험 준비가 아니더라도 그런 걸 볼 기분이 아니기도 했다. 에레티예프가 ‘나하고 대련하자’도 아니고 ‘이번 승급 시험의 수석은 나다’도 아니고 ‘나한테 시집 와라’ 라니. 상상을 해보긴 커녕 에레티예프가 이성이라는 것조차 여전히 인식이 되질 않는 판이다.


 ‘왜 하필 이 시기에 그런 신경 쓰이는 소리를! 이거 혹시 작전인가?’
 를 생각하며, 리트리시아는 이틀 가량 혼란에 빠져 있었다. 오늘로 꼭 사흘 째. 그 동안 제네시오는 물론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
 엉망이다.


 “제대로 본 거 맞아? 정말 이게 낫니, 시노다?”
 “응. 그게 낫네. 다이아몬드 달린 거…….”
 “어휴, 참. 이건 그냥 수정이야. 시노다, 제대로 좀 봐 봐.”
 “매일 보면서 아무려면 어떤데?”
 “언니를 위해 초커 하나 못 골라주니?”
 “알았어, 그래. 골라 줄게…… 왼쪽 게 낫네. 방금 그거.”


 승급 시험 준비를 위해 벼락치기로 외우던 이론서 사이에 손가락을 끼운 채 리트리시아는 의자에서 사내애들마냥 분방한 자세로 돌아앉았다. 플로리타가 봤다면 ‘아가씨 제발 단정하게’ 운운 걱정 가득한 조언을 했겠지만 리지엘라는 쌍둥이 여동생의 그런 발랄한 성격에 별로 흥미가 없었다.


 “이거?”
 “응. 리 언니는 피부가 하야니까 그 검은 벨벳 쪽이 더 돋보이고.”
 “그런가? 음…… 그럼 귀걸이는? 이 레이스 달린 거 하면 보석 색깔 맞춰서 초록색 귀걸이 하려고 했는데 검은 벨벳에 은 장식이면 귀걸인 뭐 해? 여기에 초록색은 이상하지?”
 “그렇지. 초록색은…… 리 언니, 또 이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물어보려는 건 아니지? 나 지금 승급 시험 때문에 바빠. 이거 다 외워야 돼서 머리가 터질 거 같다고.”
 “그래, 그래. 바쁜 거 알지, 그럼. ……르네 오라버님이 네 생일에 사준 시트린 달린 귀걸이는 어때? 아니면 그냥 은으로 할까? 물방울 모양으로 이렇게 떨어지는 거.”
 “리 언니, 나 말이지…….”
 “룬트슈테트 군, 외유 갈 모양이더라.”
 “……어?”


 귀걸이를 하나하나 귀에 가져다 대고 거울을 노려보면서, 리지엘라는 ‘이건 어때?’ 묻는 그 음색 그대로 여동생에게 툭 던졌다.


 “살디바르 씨가 어제 드랑모르트 경하고 만났는데, 조플링 양이랑 같이 왔대.”
 “조플린 루이즈벨인가 하는 그 사람?”
 “다시 잘 되어 가는 모양이라더라. 덕분에 드랑모르트 경의 입이 귀에 걸려서……. 아, 이거 어때?”
 “그래서? 젠 얘기랑 그거랑 무슨 관곈데?”
 “이거 어쩌냐구. 아까 초록색하고 이거하고.”
 “둘 다 이상해. 초록색 이상해. 초록색 빼고, 다른 거!”
 “처음에 그 레이스하고 초록색하고 맞추면? 오늘 초록색 구두 신을 건데. 전에 너랑 같이 브로치 사러 갔을 때 신은 거.”
 “초록색 이상하다고! 언니하고 초록색 안 어울려! ……됐니? 그래서 젠은!”
 “그럼 호박으로 할까? 이거 너무 크지 않니?”
 “……리 언니.”


 매사에 새침해서 표정이 별로 없는 리지엘라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번졌다.


 “드랑모르트 남작이 룬트슈테트 군에게 빚을 진 셈이니까, 편의를 봐 주는 모양이야. 이번 외유, 룬트슈테트 군이 희망하던 지역으로 갈 것 같더라. 어디라더라…….”
 “래빗더브!”
 “어머, 잘 아네. 과연 소꿉친구야.”
 “거기 왕복으로 보름은 걸릴 텐데.”
 “괜찮은 논문을 써 오려면 최소한 한 달 이상 걸리겠지. 음…… 외유가 언제라더라. 한 열흘 남았던가?”
 “내 승급 시험 다음 다음 날.”
 “정말 잘 아네. 대단도 하셔라.”
 “놀리지 마.”
 “놀리는 거 아냐. ……시노다, 이건 어때?”
 “처음 게 낫다니까. 초록색 말고, 흰 거.”
 “르네 오라버님께 부탁해서 다이아몬드 하우스나 페리도트 홀에 얼굴을 내밀지 그러니? 룬트슈테트 군도 ‘사교’라는 게 뭔지 잘 아니까 외유 준비로 바빠도 그런 곳엔 가끔 올 거야.”


 그런 곳에서 만난다고 해도 인사 정도나 겨우 나눌 뿐이다. 스치듯이 만나면 기분만 더 울적해지니까 차라리 안 보는 게 낫다.
 리트리시아는 눈을 피했다. 리지엘라는 그녀의 그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양 사뿐 걸어와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워 주었다. 손가락 사이에 읽던 페이지를 끼고 있었는데 어느 틈에 떨어뜨린 건지 리트리시아는 눈치도 채지 못했다.


 “그렇게 정신 빼놓고. 룬트슈테트 군이 안 와 주어서 그러는 거지?”
 “벼, 별로 젠이 오든 안 오든…….”
 “열 두 살 때랑 하나도 안 달라졌구나. 시노다. 룬트슈테트 군이 가 버린 후에 네가 얼마나 울었는지 기억이나 하니? 평생 다신 안 볼 것처럼 굴더니 삼 년 만에 만나자 마자 그저 헤벌쭉해서는.”
 “내…… 내가 언제!”
 “좀 솔직해 지는 게 어때? 시노다 너라는 애는 정말이지…… 아, 역시 이게 낫다. 어때? 머리를 이렇게 올리고 숄을 늘어뜨리면 괜찮겠지?”
 “리 언니. 저기 나 말야.”
 “어떠냐니까? 이거.”
 “언니 나, 시집 오라는 말을 들었는데.”


 리지엘라가 거울에서 눈을 떼어내 리트리시아 쪽을 돌아 보았다.


 “룬트슈테트 군에게?”


 거기서 젠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건데!
 리트리시아는 괜히 발끈해서 책상 위의 책을 탕, 힘껏 내리쳤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흐음…… 그럴 리가 없다? 응, 어떤 의미려나? 후후후. 뭐어, 아무려면 어때? 천하의 시노다에게 청혼하는 남자가 있다니. 후후.”
 “웃지만 말고 뭔가 언니로서 할 말 없어?”
 “내가? 음…… 초커 말고 목걸이로 할까? 에메랄드 달린 거.”
 “리 언니!”


 리트리시아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등받이 의자에 치맛자락을 허벅지까지 올리고는 기승하듯 거꾸로 앉아 턱을 괴어 놓고는 불퉁해서 리지엘라를 노려보자, 리지엘라는 제법 언니다운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또 다른 보석 세트를 꺼내 놓았다.


 “연한 풀색인데, 이건 어때?”
 “리 언니. 정말 진심으로 간절히 하는 말인데, 아무튼 초록색은 안 어울린다고. 진짜!”


 


 +++


 


 [제…… 룬트슈테트 씨. 안녕하세요.]


 열 다섯 살.
 갑자기 백작 영애가 되어 아우스트리아 저택으로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왕성에 갔을 때 제네시오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갓 왕성 마법사가 된 열 여섯 살의 제네시오는 실버웨지의 강둑을 더불어 뛰어 놀던 소년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소년도 청년도 아닌 앳된 얼굴에 잘 훈련된 미소를 건 채로 그는 능숙한 사교계 인사로 처신하고 있었다. 치렁치렁해서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성장차림에 ‘실버웨지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 뿐이던 리트리시아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아아, 멀구나.
 그런 생각을 했던 듯도 싶다.
 오빠가 될 수도 있었는데 이제는 멀리 가 버렸다.
 그런 생각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리트리시아 양.]


 처음 만나는 귀족들처럼 격식에 맞는 인사를 나눈 후, 리트리시아는 두 사람이 다시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가 마법사가 되기 위해 떠나버린 후 긴 세월이 지나 겨우겨우 아물었다 여겼던 상처가 단 한 순간에 벌어져 피를 뚝뚝 쏟는 것만 같았다.


 [……이제는 젠이라고 불러주지 않네. 시노다.]


 그녀에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말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만약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불러도…… 돼?]
 [보고 싶었어. 시노다, 건강하게 잘 지냈지?]
 [어. 뭐…… 응, 그렇지…… 응.]


 상냥한 얼굴로 웃지 않았다면.
 그러면 떠올리지 않았으리라. 리트리시아 자신이 얼마나, 어린 시절부터 그 얼마나, 그를 좋아했는지를. ‘여전히’ 그를 좋아한다는 것을.


 [나한테 화 났니? 시노다, 그때는 말야……. 그땐 그 길밖에 없었어. 아주 오래 못 만날 지도 모른다고 각오하고 떠났는데 이번에 돌아온다는 연락을 받고 난 정말 기뻤어. 음…… 저기, 나만 기뻤던 걸지도 모르지만.]


 ‘나도 보고 싶었어’
 ‘나도 기뻤어’
 그런 말이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만나지 않았다면 몰랐을 텐데. 좋아했다는 것도. 여전히 좋아한다는 사실도. 그냥 오래된 풋사랑이려니 여기며 좋은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었을 텐데.


 [……난 젠 같은 거 만나고 싶지 않았어.]


 되는 대로 내뱉고 돌아섰다.
 등 뒤에서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기에 한껏 등을 꼿꼿이 세우고는 온 힘을 다해 똑바로 걸었다.


 여전히 젠을 좋아해.
 그렇지만 젠은 가 버렸잖아. 오빠가 되어 주지 않고, 오빠가 되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가 버렸던 거잖아.
 한 번도 만나러 와 주지 않았어. 젠은 혼자 어른이 됐어. 혼자서. 혼자서만.


 


 +++


 


 “리 언니 바보야? 나 내일이 승급 시험이라고!”
 “어머, 누가 모른대? 이제 와서 공부한들 뭐가 달라지니? 평소에 차근히 했어야지.”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그래도야. 얼른 옷이나 갈아 입어.”


 승급 시험 전날, 리지엘라는 초저녁부터 잠자리에 들려는 리트리시아에게 달려와 ‘무도회에 갈 거야. 너도’ 하고 선언했다. 리트리시아는 어이가 없어 넋을 놓고 있다가 플로리타와 다른 충실한 시녀 세 명이 들러붙어 옷을 갈아 입히겠다며 데이드레스의 리본을 잡아당기기 시작하자 비로소 언니에게 열렬히 항의했다.


 “승급 시험 전날 그런 데 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내일 넌 시험을 치지. 모레 룬트슈테트 군은 래빗더브로 떠나.”
 “……외유 결정 됐어?”
 “그 사이 몇 번인가 인사 정도는 나누지 않았니? 난 소꿉친구끼리 정겹게 지내는 줄만 알았더니 뭐 그렇지도 않구나.”
 “마…… 마주치긴 했지만 매번 사람도 많고 나도 젠도 바빠서. 그러니까…….”
 “오늘 밖에 시간이 없잖아.”
 “시간은.”


 많다, 고 말하려는 리트리시아 앞에서 리지엘라가 보란 듯이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움찔 어깨를 웅크리자, 리지엘라는 뛰어난 기사인 여동생의 기세를 제압한 것이 못내 유쾌한지 드물게도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너 같은 말괄량이에게 청혼한 게 누군진 묻지 않을게. 하지만 대답도 안 하고 시간을 질질 끌 생각은 아닐 거 아냐? 시노다, 정말로 시간이 그렇게나 많이 있니? 잘 생각해 봐.”
 “난, 그러니까…… 나는. 그 청…… 청혼하고 젠하고는 별로 상관도 없…… 잖아. 별, 별개의 문제라구. 그러니까…….”
 “모든 문제는 단순한 거야. 수락이냐 거절이냐. 뭐 굳이 가지 않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어. 하지만 오늘 무도회는 어빙 부인이 주최한 건데 그분은 알다시피 텔바인 공작님의 사촌이거든. 아마 그쪽 분들도 다 올걸.”
 “소문이 난다는 거야?”
 “그렇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잖아.”


 에레티예프의 말이 단순한 장난은 아닐 터다. 그가 리트리시아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는 잘 모르지만, 그 감정에 어떤 이름이 붙어있든 간에 공작가 후계자로서 그 청원에 리트리시아가 응했을 때는 많은 것이 바뀔 수밖에 없다. 에레티예프는 매사에 맺힌 데 없이 담백한 성격이고 때로는 단순한 리트리시아마저 놀랄 만큼 사소한 건 무시해 버리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제 위치를 잊고 흰소리를 아무렇게나 내뱉지는 않는다.


 그는 진심이고, 리트리시아도 진지하게 대답해야 한다.
 물론 리트리시아 시노다 아우스트리아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알지만, 승급 시험이 코앞이라는 핑계로 잠깐 모르는 척 하고 싶었을 뿐이다.


 “어떻게 할래, 시노다?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늦어.”
 “리 언니.”


 리트리시아는 문 앞에 서 있는 언니를 향해 똑바로 섰다. 곁에 붙어 있던 시녀들을 물리자 리지엘라는 동생의 뜻을 대충 짐작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 갈거니?”
 “리 언니. 나, 열 나는 것 같지 않아?”
 “……어머.”


 리지엘라는 연극적인 태도로 놀라는 척 해 주었다.


 “가엾은 시노다, 또 사랑의 열병일까? 아니면 유행성 독감?”
 “지옥의 불길이든 뭐든 좋을 대로 해. 하지만 내일 승급 시험인데 열이 내리지 않아서 혼자 끙끙 앓으며 다 죽어 간다고 전해줘.”
 “……리트리시아. 너, 잔인하다는 생각 안 하니?”


 씁쓸하게 웃으며 리지엘라는 혼자 무도회장으로 갔다. 리트리시아는 다시 옷을 갈아 입었다. 장식이 하나도 붙지 않은 미색 데이드레스에 맨발. 풀어 늘어뜨린 붉은 머리카락이 뺨을 간질였다. 색에 온기가 있다면 아마 리트리시아의 몸은 머리카락부터 천천히 타올라 금세 한 줌 재로 스러질 지도 몰랐다.


 ‘이 밑도 끝도 없는 고민이 한꺼번에 싹 타버린다면.’


 해가 저물고 동강난 달이 동쪽 정원의 담장 위로 반 뼘 남짓 떠올랐을 때 손님이 왔다.


 “시노다.”


 이번에는 머랭 과자 같은 걸 마련할 시간이 없었다. 리트리시아는 플로리타가 정중하게 열어준 문으로 들어선 소꿉친구의,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상냥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을 가만히 돌아 보았다. 열린 창으로 들이닥치는 바람은 찼다.


 아니면 리트리시아 자신이 참으로 붉은, 타오르는 불꽃 같은 열기에 얼마간 휩싸여 있었던 걸까.


 “늦었네, 젠. 창문을 타 넘을까 생각하는 중이었어.”


 천연스레 농을 던지자 제네시오는 어른스럽게 웃으며 받아 넘겼다.


 “창문을 타넘고 어디로 가려고? 시노다.”
 “날아서 실버웨지까지. ……젠을 만나러.”
 “정말 열이 있나 보다, 시노다. 넌 어릴 때부터 열이 오르면 횡설수설 떠들어대곤 했거든.”


 그는 창틀에 손을 짚고 기대어 선 리트리시아에게 다가와 오른손의 장갑을 벗고, 이마를 짚었다. 빳빳한 감람색 옷깃에 은사로 수를 놓은 소매. 허리를 감싸고 뒤로 뚝 떨어진 덧옷자락이 흔들거리며 그의 그림자에 한 겹 짙은 색을 더했다. 그만큼 성장(盛裝)한 제네시오를 보는 건 꽤나 오랜만이었으므로 리트리시아는 열 다섯 살에 그와 왕성에서 재회했던 순간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생각 나네.”


 제네시오가 문득 웃으며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시노다는 야단을 맞거나 사고를 치면 냅다 창문을 타넘고 도망부터 쳤잖아.”
 “별…… 별로 그렇게 자주 도망치진 않았어. 결국 붙들려서 혼나기만 더 혼났지.”
 “어쩔 줄 몰라서 달려오곤 했잖아. 젠, 어떡하지? 큰일났어. 이번엔 정말 엄마가 날 거꾸로 매달 지도 몰라! 그렇게 엉엉 울면서.”
 “내, 내가 언제!”
 “엄청 귀여웠어.”
 “……놀리지 마.”


 고개를 흔들어 그의 손을 밀어낼 때면, 제네시오는 약속한 것처럼 한 발 물러섰다.


 “정말이야. 시노다가 우는 건 싫지만, 그래도 밤마다 오늘은 와 주지 않으려나 하고 생각했어.”
 “여동생 같아서?”
 “여동생이 가지고 싶었지. 그때 르네…… 룩빌 남작이 시노다와 리지엘라 양을 데리고 노는 걸 보면 부러웠거든.”
 “우리 부모님은 나보다 젠을 훨씬 더 예뻐했으니까.”
 “친절한 분들이셨지.”
 “지금도 그럴걸.”
 “친자식 같지는 않아. 차별을 한다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조금 다른 거라고 할까…….”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는 제네시오의 얼굴에 달빛이 비스듬히 비췄다. 푸르스름하게 떠오른 뺨이 여윈 듯도 싶어, 리트리시아는 저도 모르는 새 눈을 찡그렸다. 고집 센 이목구비가 누그러지고 서글픈 것도 같고 언짢은 것도 같은 뽀얀 뺨에 어스름조차 삼키지 못한 붉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그녀는 온 얼굴이 발그스름했다. 제네시오는 장갑을 벗은 손을 다시 뻗었다. 뺨에 닿을 듯 가까워졌을 때, 리트리시아가 드물게도 백작 영애다운 자세로 턱을 들어 올렸다.


 “그래서 도망쳤어?”


 제네시오는 뻗었던 손을 황망히 거두어 들였다. 커튼이 부풀어올라 그녀의 등을 훑고 이내 동그스름한 어깨를, 미색 옷자락에 감싸인 가슴을 삼켰다. 제네시오는 그녀의 표정을 읽지 못했다.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잠시 당황한 음색으로,


 “아니.”


 라고 답했다. 그러나 곧 말을 고쳐,


 “도망친 건 사실일 지도 모르지만.”


 하고 몸을 돌렸다. 커튼 뒤에서 훌쩍 튀어나온 리트리시아가 제네시오의 소맷자락을 잡아채자, 그는 놀라우리만큼 잘 훈련된 미소를 걸고 소꿉친구를—왕성에서 마주친 낯선 귀족 아가씨를 보듯 일별하였다.


 “또 도망치는 거야?”


 리트리시아가 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무슨 의미로 말하고 있는지 그 순간에는 잘 알지 못했다. 마치 그녀 자신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언니이거나 의외로 매사에 유능한 오빠이거나 어쨌든 그녀 자신만을 제외한 세상의 그 어떤 서툴지 않은 인간이—그녀를 대신해 그녀의 깊은 속마음을 폭로하는 것 같았다.


 “내일 오후에 래빗더브로 간다는 거 아니? 시노다. 이번에 조사하려는 건 미나리아재비로 만든 새 물약의 효능인데, 가서 언제 올 거냐면…….”
 “오빠가 되어 줄 수도 있었잖아.”
 “……시노다.”


 그의 꾸며낸 표정이 흔들렸다. 보랏빛의 눈동자가 밤보다도 어두워서 리트리시아는 자신이 이쯤에서 물러나야만 하지 않나 고민했다. 손을 놓고 웃으며 다른 이야기를 꺼내면 그가 안도하며 얼마나 눈부시게 웃어줄 지를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오빠가 되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도망쳤던 거잖아! 젠은 비겁해. 가서는 한 번도 만나러 와 주지 않았어. 삼 년 동안이나 연락 한 장 하지 않고 그리고…….”
 “시노다, 몸이 안 좋으면 침대에 좀 누울래? 시녀를 불러 줄까? 시노다, 진정해.”
 “나 하나도 안 아파! 젠, 좀 들어 봐! 젠은 혼자 어른이 됐어! 내 오빠가 되기 싫어서 도망치곤 혼자서 어른이 되어 버렸다구, 아니야? 젠, 나 좀 똑바로 봐.”
 “보고 있어. 보고 있으니까, 시노다. 우선 이걸 놔.”


 정신을 차려 보니 제네시오의 한쪽 팔에 거의 매달렸다. 리트리시아는 놀라고, 또 꼭 그 만큼 부끄러웠다.


 “젠이 나를 보고 있다는 건 거짓말이야.”


 부끄럽고 슬펐다.
 이제 시간이 없지 않은가. 이제는 어린애가 아니지 않은가. 제네시오는 홀로 어른이 되어 버렸는데 리트리시아 시노다 아우스트리아는 언제까지나 어린애인 채, 실버웨지의 타운하우스에서 창문을 뛰어넘고 울며 소꿉친구의 잠자리에 숨어들던 마음 그대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왜냐하면.


 “젠, 나 청혼 받았어.”


 왜냐하면 어린아이인 제네시오 룬트슈테트가 더는 거기에 없으니까.


 “…….”
 “누구에게 받은 거냐고 안 묻네.”
 “……열은 없는 것 같네.”


 안기듯 어깨를 당겨 그는 리트리시아의 이마에 제 이마를 기댔다.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가늘게 떨렸던 것은 어느 쪽일까. 리트리시아는 젠, 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손을 뻗으면 등을 감싸 안을 수 있는 거리에 그는 서 있었다. 생각해 보면 언제나 대단히 가까운 곳에,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잡거나 어깨를 기대거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는 그녀의 곁을 지켜 주었다.
 삼 년이나 비웠던 자리가 거짓말이기나 한 것처럼.
 금세라도 실버웨지의 그 집으로 돌아가 함께 뛰어 놀며 가족 흉내를 낼 수 있을 것처럼.


 “아프지 않은 것 같으니 나는 이만 돌아갈게.”


 앗, 하는 사이에 그가 물러났다. 리트리시아는 반사적으로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제네시오는 웃으며 정중하게 그것을 거절하려고 한 듯 보였다. 조용히 몸을 비키고 부드럽게 소꿉친구를 향해 목례하고 싶었던 것처럼.
 그러나 잘 되지 않았다.
 모든 자연스러우리라 생각했던 것이 때로 완전히 비틀려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그 순간의 그 역시 흔들리고, 놓치고, 미끄러졌다. 시선조차 불안정했다. 불꽃 바로 곁에서 날갯짓하는 어린 나비처럼.


 “……젠.”


 리트리시아 시노다 아우스트리아는 제네시오 룬트슈테트가 자신의 어깨를 힘껏 밀어 버렸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눈을 커다랗게 떴다. 텔바인 공작가의 장남이 불현듯 청혼했을 때보다도 당황해, 그녀는 겨우 ‘젠’ 하고 이름을 부른 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미안……. 그러나 시노다, 나는…… 나는 네 오빠가 아니야.”


 한 번도 진짜 오빠였던 적은 없어.
 제네시오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아 주지도 위로하며 웃어 주지도 않고 체스판 위에서 퇴장하는 흰 나이트처럼 떠나 버렸다.


 다시 열 두 살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리트리시아는 쏟아지는 눈물을 닦아내지도 않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진짜 가족이 아니다.
 진짜 가족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녀와 그 사이에는 대체 무엇이 있을까?


 


 +++


 


 [가지마, 젠. 가지마…….]
 [리트리시아. 울지마.]
 [안 울거야. 안 울어, 우는 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가지마! 젠…….]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어떻게 잠들긴 했구나, 하는 경탄과 함께 퉁퉁 부은 눈으로 일어나 유령처럼 저택을 활보했다. 제각기 공사 다망하셔서 새벽에야 귀가한 듯한 리지엘라는 아직 이불 속이었고 콜린은 일찌감치 왕성으로 떠나, 아침 식사 자리에서 리트리시아의 어마어마한 얼굴을 본 건 르네와 미라벨뿐이었다. 르네는 좀 더 자고 싶다고 투덜대며 까치집을 지은 채 식탁에 앉았다가 여동생을 보고는 나이프를 뚝 떨어뜨렸다.


 “승급 시험이 그렇게 걱정됐니?”


 르네가 삶은 당근을 리트리시아의 접시에 손수 덜어주며 한참을 망설이다 그렇게 물었다. 리트리시아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개를 젓다가, 르네와 눈이 마주치자 갸웃거리듯이 살짝 턱을 아래로 끌어당겼다.


 “아…… 뭐 그렇다고 해 둘게요.”
 “그러면 그런 거지 그렇다고 해 두는 건 뭐냐.”
 “떨어질 것 같거든. 이런 상태로는.”
 “시노다.”
 “잘 먹었어요. 다녀오겠습니다.”


 오빠와 어머니가 뭐라 말을 보태기 전에 리트리시아는 잽싸게 짐을 챙겨 연무장으로 향했다. 세수할 때 눈이 쓰라릴 정도로 울었고, 머릿속은 썩은 밤톨들이 떼를 지어 굴러다니면 이럴까 싶을 만큼 엉망진창. 등을 곧게 펴고 불꽃 같은 머리타래를 목 뒤로 흩날리며 양양하게 걷고 싶었지만 금세라도 무릎이 툭 꺾일 것 같았다.


 [시노다가 레온티에게 뒤쳐지는 건 싫어. 지금껏 얼마나 열심히 해 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얼른 승급해서 작위를 받은 모습을 보고 싶어.]


 그렇게 말해 놓고.
 젠은 바보야.


 리트리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꺼풀 안쪽으로 흐릿한 빛무리가 지났다. 제네시오의 얼굴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떠올릴 수 없었다.


 [젠 같은 거 오빠 아니야! 오빠는 르네 오빠잖아! 젠은 젠이야, 젠이 오빠가 되는 거 싫어!]


 그렇게 말하며 울었던 건 열 두 살의 리트리시아 자신이다.


 [오빠가 되어도 좋으니까, 젠이 오빠가 된다고 해서 사실은 기뻤으니까…… 그러니까 가지마! 가지마, 젠! 제발, 가지마…….]


 울며 매달려도 웃는 얼굴로 리트리시아의 팔을 떼어내고 ‘가야해’ 하고 말했던 제네시오라면 리트리시아 따위 없어도 아마 즐겁게 잘 살아가겠지. 실버웨지에 남아 며칠이고 그런 생각에 잠겨 분하고 속상해 어쩔 줄을 몰랐다. 잘 지내고 있다는 형식적인 편지가 콜린 앞으로 오곤 했지만 그 외에 리트리시아를 위한 안부인사 같은 건 없었다.
 그는 금세 리트리시아를 잊고 그럴싸한 마법사가 되어가는 듯싶었다.
 리트리시아만 홀로 남아 흐르는 실버웨지의 강물과, 물들어가는 산들과, 깊어졌다 어느 틈엔가 훌쩍 낮아져 우르르 눈을 쏟아놓는 하늘과 함께 그냥 먼 자연으로 잊혀질 것만 같았다.


 [시노다, 나는…… 나는 네 오빠가 아니야.]


 울고 싶다.
 엉엉 소리를 내어 울고 싶다. 검을 팽개치고 강단 있는 척 가장한 자세를 무너뜨리고, 장갑을 낀 양손에 얼굴을 묻은 채 그저 슬픔에 잠기고만 싶다. 마치 오빠 같은 젠. 가족처럼 친근한, 어쩌면 가족일 수도 있었던 나의 젠. 그 외에 무엇이 있을까. 삼 년의 공백을 뛰어넘어 왕도에서 재회해 다시 옛날로 돌아간 듯 자연스러이 교류하게 되었을 땐 그냥 제네시오를 만나는 것 외에 더 바랄 게 없다고 믿었다.
 아프면 약을 가져다 주고 궁금한 것을 물으면 성의껏 알려주기도 하고 이따금 가족끼리의 만찬에 초대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눈다. 아주 가끔 그의 소식을 듣는다. 아주, 아주 가끔 그가 만나러 오겠다며 먼저 연락을 주기도 한다. 그것보다는 좀 자주, 리트리시아가 좋아하는 간식이며 사소한 장난감 같은 걸 보내준다.


 울고 싶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도.


 “너, 괜찮아?”


 그런데도 몸이 움직였다. 리트리시아는 몸을 풀며 친우를 향해 태연스레 웃었다. 이른바 ‘청혼 사건’ 후로 리트리시아의 기분을 배려한 건지 말을 아끼던 에레티예프가 모처럼 예전 같은 얼굴로 돌아가 말을 붙여오자 리트리시아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질 수 없지.
 그런 마음을 먹고 의욕적으로 연습해 왔던 것이 떠올랐다.


 “열이 있는 거 같은데, 리트리시아.”
 “괜, 괜찮아.”


 에레티예프가 이마를 짚으려고 손을 뻗자 리트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밀어내고 말았다. 에레티예프의 얼굴에 당혹한 표정이 번졌다. 과민 반응했다는 걸 리트리시아도 잘 알았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에레트.”


 시험 성적은 물론 좋지 않았다.
 그러나 예상 외로 별로 나쁘지도 않았다.
 리트리시아는 자신의 짐승에 가까운 반사신경과 오랫동안 충실히 해 온 훈련의 결과물로 축적된 체력에 놀랐다. 진심으로. 무사히 안정권에 속하는 평가를 받고 승급이 확정된 후, 그녀는 ‘나도 내 자신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라고 중얼거렸다.


 누가 봐도 새벽까지 울고 반쯤 넋이 나간 채 기사단 승급 시험을 치른 여자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건강했으므로.


 “리트리시아.”


 시험이 끝났으니 거하게 뒤풀이를 해야겠다며 법석을 부리는 동기들을 거절하고 돌아서는 그녀에게 에레티예프가 다가왔다. 리트리시아는 그림자조차 황금빛으로 빛나는 듯한 그의 금발을 돌아보지도 않고 답했다.


 “합격 축하해, 에레트. 네가 최고 점수더라.”
 “천하의 리트리시아 아우스트리아 양이 컨디션 난조로 겨우 평균점을 넘기신 덕분이지.”
 “잠이 좀 부족한 건데.”


 시간을 끄는 건 실례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막연한 시간과 애매한 관계가 괴롭다는 건 누구보다도 리트리시아 자신이 잘 알았다.


 “리트리시아, 너 정말 괜찮은 거 맞냐? 돌아가면 돌봐줄 사람은 있고?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내가…….”
 “이따가 갈게.”
 “……어?”


 비로소, 리트리시아는 에레티예프를 마주 보았다. 발돋움을 해도 반 뼘쯤은 차이가 날 만큼 커다란 키의 사내가 말 한 마디로 멍하니 입을 다무는 것은 의외로 귀여웠다. 그와 검을 겨누는 것이 즐겁다. 호흡이 착착 맞아 들어가고 검날이 불꽃을 튀길 만큼 팽팽하게 스쳐 지나가는,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도망칠 수 없을 만큼 맹렬하게 달려들어오는, 그 순간이 좋다.


 “이따가 너희 집으로 갈게. 집에 있을 거지?”
 “어, 그…… 건. 리트리시아, 그건.”
 “저녁 시간 전엔 도착하려고. 나 지금 돌아가서 바로 전령을 보내줄게.”
 “그, 건 리트리시아. 저, 오늘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안 계신데, 중요한 이야기는 부모님이 계실 때 다시 자리를 마련해서, 그러니까 내 말은…….”


 가장 강한 상대를 막아내고 속도를 높여 검을 찔러 들어가는 순간이,
 좋은 것이다.


 “부모님은 상관 없어. 에레트 너한테 할 이야기가 있는 거니까.”


 곧장 집으로 돌아와 리트리시아는 제 방까지 한 달음에 뛰어 올라갔다. 르네는 일 때문에 외출했고 느지막이 일어난 리지엘라가 초콜릿을 씌운 휘낭시에를 접시에 산처럼 쌓아 놓고 앉아 있었다.


 “차 마실래? 시노다.”


 시험 결과를 묻지 않는 건 배려인지 아니면 당연히 합격했으리라 믿는 배짱인지 알 수가 없다.


 “아니, 곧바로 다시 나갈 거야.”
 “시노다! 옷 갈아 입을 거면 문 닫아.”
 “닫을 거다!”


 잔소리를 하질 말 일이지, 문 닫았더니 금세 쪼르르 따라 올라와 빼꼼 들여다 볼 건 뭔가. 리트리시아는 찻잔과 접시를 양 손에 들고 아가씨답지 않은 자세로 제 방에 쳐들어온 리지엘라를 몇 번 힐끔거렸다.


 “어디 가게?”
 “어디 좀 가게.”
 “룬트슈테트 군에게 사과하러 가니? 아님 마중?”
 “여기서 젠이 왜 나오는데?”
 “오늘 간다니까. 외유.”
 “래빗더브가 얼마나 먼데. 벌써 출발했겠지.”


 커다란 깃털장식이 달린 모자까지 꺼내 침대 위에 툭 던져 놓자 리지엘라가 잔을 내려 놓고 본격적으로 궁금한 얼굴을 했다. 리트리시아가 불편하다며 왕성 갈 때 아니면 별로 입지도 않던 짙은 보랏빛 드레스를 갖춰 입은 걸 보면 예삿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어디 가냐니까?”
 “아까 들어올 때 전령 보내는 거 봤잖아.”
 “룬트슈테트 군에게 갈 줄 알고 자세히 안 봤지.”
 “와르시온 거리까지 마차로 얼마나 걸릴까?”
 “와르시온?”
 “말이 나을까? 마차보다.”
 “마차?”
 “언니 오늘 마차 안 쓸 거지? 어머니는?”
 “시노다!”


 리지엘라가 리트리시아의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몸을 기대고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너 텔바인 공작가로 가니?”
 “응. 에레트한테.”
 “……설마.”
 “그 설마는 무슨 설마인데?”
 “내가 묻고 싶은 게 그거야! 무슨 설마니?”
 “말을 한 건 리 언니잖아.”
 “난 네가……. 설마, 시노다.”
 “다녀올게.”


 작은 알이 달린 진주 목걸이를 둘렀다. 같은 진주를 쓴 귀걸이도 했다. 분을 바르고 입술연지도 칠했다. 어디를 봐도 훌륭한 백작 영애. 검을 쥐고 몇 시간 전까지 검을 휘둘렀다고는 아무도 믿지 못할 터였다. 리트리시아는 그녀가 ‘이따가 갈게’ 라고 했을 때의 에레티예프와 거의 흡사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리지엘라를 향해 가볍게 소리 내어 웃었다.


 “왜 리 언니가 긴장하는 거야? 청혼을 받았으니 예의를 갖춰야지.”
 “물론 그렇지. 시노다, 네가 선택한 거라면…….”


 아래층에서 어마어마한 소리가 울렸다.


 “플로리타, 무슨 일이지?”


 리지엘라가 방문 밖을 내다 보며 소리쳐 물었다. 플로리타의 대답이 조금 늦게 되돌아왔다. 기실 그녀가 갑작스러운 소음의 원인을 설명하기 전에, 원인 그 자체가 이층에 나타났다.


 “룬트슈테트 님이 오셨습니다.”
 “응…… 오셨구나. 우리도 이미 봤단다.”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킨 리지엘라에게 인사할 새도 없이, 제네시오는 곧장 리트리시아의 방 안으로 달려갔다. 그가 밀어젖힌 문이 반대편 벽에 가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시노다!”


 하루 만에 만난 소꿉친구의 얼굴을, 리트리시아는 세상 그 무엇보다도 낯선 것인 양 생경하게 바라보았다.


 “젠. 왜 여기에 있어?”


 칼을 들이대도 아무렇지도 않게 튕겨낼 것처럼 깔끔하게 차려 입어, 언제나 어디 하나 손댈 데 없었던 로브 앞자락이 풀려 있었다. 리트리시아는 밖으로 새 나온 소맷자락과, 색을 전혀 맞추지 않은 것이 분명한 재킷에 시선을 주었다가 걱정스러운 듯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너 괜찮니? 젠.”


 플라티나 블론드의 머리카락이, 그 주인의 호흡을 따라 어깨에서 들썩였다. 묶지 않았다. 제네시오는 숨을 고르며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거추장스러운지 표정이 짜증스럽다, 고 리트리시아는 생각했다.


 “래빗더브로 출발한 줄 알았는데.”
 “시노다. 에레티예프에게 가는 거지?”


 말이 전혀 이어지지 않잖아?
 리트리시아는 그렇게 따지는 대신 미미한 웃음을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대답은 예의 바르게 해야 하잖아. 젠, 아무튼 왜 출발을 안…….”
 “가지마.”


 웃음이, 절로 걷혔다.


 “젠?”
 “……아, 정말이지. 그러니까, 시노다, 내 말은…….”
 “젠, 정말 괜찮니?”


 제 이마를 짚고 깊은 한숨을 쉬는 제네시오가 평소 같지 않은 것이 염려스러워, 리트리시아는 손을 뻗었다.


 “안 돼, 시노다. ……안 되겠어.”


 그가, 갑자기 리트리시아의 내민 팔목을 잡았다. 그녀는 놀랐지만 그보다 더 소꿉친구에게 무슨 곤란이 닥친 건지 걱정 돼 어쩔 줄 몰랐다. 그러나 리트리시아가 다가서서 그의 낭패한 듯한 얼굴을 올려다 보기 전에, 그가 그녀의 다른 팔목을 잡는 쪽이 더 빨랐다. 리트리시아는 이번에야말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기, 젠…… 무슨 일이 생겼니? 혹 래빗더브에 가지 못한 거랑 뭔가 관계가 있어?”
 “시노다, 나는 그러니까…… 내가 외유에서 돌아올 때까지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어. 그게, 나는, 네가…….”
 “다녀와서 얘기를 들어줄게. 그렇게 초조할 것 없잖아.”
 “그게 아냐!”


 소리쳤다! 젠이!
 리트리시아는 그에게 떠밀렸을 때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네시오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 보며, 작은 소리로, 그러나 몹시 서두르는 목소리로, 초조하게,


 “미안.”


 하고 말했다. 열 여덟 살 난 아우스트리아 백작 영애의 양 손목을 잡은 제네시오의 손이 그 자신의 복잡한 심경만큼이나 혼란스럽게 움직였다. 그는 손을 놓을 듯 힘을 뺐다가 다시 그 자신을 달래듯 재촉해 손목을 쥐고, 이것만은 놓을 수 없다는 양 힘을 주었다가 금세 또 그녀의 안위를 살피며 ‘미안한 듯’ 힘을 빼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가지마, 시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제네시오는 리트리시아에게 약한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리트리시아는 제네시오의 기세에 밀려 등을 벽에 기대고 다시 눈을 맞췄다.


 “……들어줄게, 얘기해 봐. 젠. 무슨 일이야?”
 “시노다.”
 “응.”
 “시노다.”
 “응.”
 “발.”
 “응?”


 발을 다치기라도 했나?
 생각할 때, 제네시오는 절박한 빛을 띄고 의외의 말을 꺼냈다.


 “시노다, 발 밟아도 돼?”
 “……미쳤니?”
 “그, 렇지만. 뭐라고 할까, 역시…… 말을 더듬거나 발을 밟거나 해야 알아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아아, 무슨 말을 하는 거람. 나는.”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젠! 너 누구 죽이고 왔니? 진정 좀 해 봐, 젠 답지 않게 왜 그래? 일단 이 손 놓고 천천히…….”
 “싫어. 놓아주면 갈 거잖아.”
 “가는 건 내가 아니라, 젠이야. 래빗더브, 정말 안 가?”
 “갈 거야. 갈 건데, 시노다가 가버리니까.”
 “…….”


 알듯 말 듯 하다.
 리트리시아는 매사가 단순한 편이었으므로 이 섬세한 데다 불필요하게 명석해진 소꿉친구의 말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시노다는 착하니까 좀 더 기다려 줄 거라고 생각했어. 기다려 주지 않을까 하고…… 그런데 아니잖아. 갈 거잖아? 그래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가다니, 내가 어딜 가는데?”
 “레온티 군에게.”
 “도대체 그거랑 젠의 외유가 무슨 상관인데?”
 “그, 러니까…….”
 “그러니까!”
 “발 밟을까? 아니면…… 아니면 내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시노다.”
 “말로 해! 말로! 난 다 알아 들어.”
 “거짓말. 그간 열심히 이야기 했지만 시노다는 전혀 알아 주지 않았는데.”


 비로소 그가 조금 웃은 것 같았다. 비스듬한 자세로 벽에 반쯤 기대 서 있자니 금세 피곤해졌다. 애초에 남에게 양쪽 손목을 붙들린 채로 매달린 것도 아니고 춤을 추는 것도 아닌데 어중간하게 서는 것부터가 몸에게는 때 아닌 혹사일 터다. 리트리시아가 한 번 휘청거리자, 제네시오는 손을 놓았다. 놓자, 이번에는 벽을 타고 몸이 천천히 미끄러졌다.


 “아아…… 정말이지.”


 에라, 모르겠다.
 소꿉친구를 얄미운 눈으로 흘겨보며 리트리시아는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제네시오는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며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 앞에 앉아, 어깨를 잡았다.


 “젠, 서두를 거 없어. 외유 다녀와서 다시 이야기 하자, 응? 나는 에레트한테 가고 젠은 얼른 짐 챙겨서 래빗더브로 가야지.”
 “결혼하지 마.”
 “……응?”
 “하지 말라고, 결혼! 하지마, 시노다. 가지마.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말할 생각이 아니었어. 뭔가 제대로 말할 방법을 찾고 싶었는데, 그런데……. 비겁하다는 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저기, 젠?”


 어깨를 잡은 손이 천천히 미끄러지고, 제네시오의 고개가 리트리시아의 한쪽 어깨에 닿았다.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전혀 상상을 할 수가 없었다. 리트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려, 그의 팔을 잡았다.


 “젠…….”


 진정해, 라고 말하기 전에 그가 그녀를 끌어당겼다.


 “시노다는 상냥하니까, 오빠인 척 곁에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어. 어디까지나 ‘오빠’인 내가 ‘같이 있자’고 하면 머물러 줄 것 같아서. 나를 가엾게 생각해 줄 것 같아서. 그렇지만 난 역시 네 오빠가 될 수 없어. 육 년 전에도, 지금도…… 마찬가지야, 시노다.”
 “나는 젠이 오빠가 되지 않은 건 내가 ‘싫다’고 해서인 줄 알았는데.”
 “시노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 없어. 시노다가 좋아.”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맥락이 이상하잖아, 지금 그건 꼭…….”
 “좋아해.”
 “그, 그런 농담 하지 마. 젠, 왜 그래? 물론 젠이 나를 여동생처럼 예뻐하는 건…….”
 “여동생이 아니야.”
 “…….”
 “오빠가 될 수 없다고 말 했잖아. 시노다, 왜 모르는 거야? 몰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아니야, 달라. 역시, 안 돼. 보내줄 수 없어. 기다려 줘, 시노다. 내가 좀 더, 좀 더 시노다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될 때까지.”
 “……그거 꼭 고백, 같은데.”


 그 말에 제네시오는 리트리시아의 어깨에 묻었던 얼굴을 들어올리고 그녀의 당황한 눈동자에 비치는 자기 자신의 얼굴이, 대단히 볼품 없다고 생각하며, 힘없이 웃었다.


 “그러면 그 동안은 뭐라고 생각하며 듣고 있었어?”


 말문이 막혔다.
 생각지 못한 반응에, 리트리시아의 뺨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평소처럼 웃으며 장난으로 넘겨 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무어라고 해야 할까.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모르겠다. 머릿속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말들로 가득 찼다가 또 다음 순간에는 갓 태어난 아이마냥 텅 빈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젠은…… 오빠가 되어 주지 않았으니까. 나를 두고…… 가 버렸으니까…… 연락 한 장 없고, 그리고, 나는, 슬퍼서…… 젠이…….”
 “오빠로 밖에는 봐 주지 않으니까.”
 “젠이 너무나 멀어서…… 낯설어서.”
 “좋아하는 시노다가 반할 만큼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 실버웨지에 쭉 남아 있으면 언제까지나 오빠일 뿐이잖아. 내게는 지위도 없고 내세울 무엇도, 미래도, 없었으니까 불안해 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지금은, 불안하지 않아? 젠. 왕성 마법사가 되어 백은 문장을 새긴 펜던트를 목에 건 룬트슈테트 군은.”
 “불안해.”
 “나도 불안해. 계속 불안했어. 젠이 돌아와 주지 않았으니까. 젠이 나빠.”
 “그래도 놓아줄 수 없어. 결혼하지 마, 시노다. 가지마.”
 “그렇지만.”


 겨우 머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트리시아는 소꿉친구의 절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기뻐 심장이 터질 것 같으면서도 한켠으로는 자기 자신의 얼굴이 어떤 모습일까 생각하니 부끄러워서 한 시라도 빨리 그 품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놓아줄 수 없어. 놓지 않아. 시노다, 결혼하지 마. 레온티에게 가지마.”
 “그, 렇지만…… 저기, 젠.”
 “텔바인 공작가에는 어떻게 해도 비교가 안 되겠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면…… 그러니까…… 대단한 것은 약속할 수 없지만, 내가, 시노다…… 나는.”
 “젠, 내 말 좀 들어 봐. 나는…….”


 이대로 뒀다간 품 속에서 질식해 버릴 지도 몰라.
 어깨에서 미끄러진 팔이 허리를 두르고, 등을 얼싸안았다. 리트리시아는 소꿉친구의 어깨 너머로 낯익은, 그러나 한 번도 그런 각도에서 뚫어져라 쳐다본 일이 없어 더없이 낯설기까지 한, 제 방의 열린 문을 눈에 담았다.


 “……나는 거절하러 가려는 거였는데.”


 제네시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검게 보일 만큼 가라앉았던 눈동자에 옅은 보랏빛이 되돌아왔다. 곤혹스러운 듯 그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가 이내 허를 찔린 기사들이 검을 쥐고 휘청거릴 때처럼 어쩔 줄 몰라 하며 물러났다. 애매한 시선이 얼마간의 기쁨과 안도와 그러나 그 이상의 부끄러움 탓에 사방으로 떠돌았다. 리트리시아는 비로소 웃음을 터뜨렸다.


 “젠, 정말 사람 말을 안 듣는 구나? 매번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하고 혼자서 어른이 되고…… 젠이 나빠. 내가 그랬잖아?”
 “그, 렇지만 시노다가…….”
 “또 내 탓을 할 생각이야? 이렇게 모처럼 차려 입은 드레스가 다 구겨진 건 누구 때문인데?”
 “시노다가 가 버릴 줄 알았어. 아…… 정말 난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그러니까.”
 “시노다 말이 맞아. 혼자 쓸데없이 고민하고 혼자서 도망쳐. 결국은 멀리 갈 수도 없으면서. 시노다를.”
 “젠, 나를 좀 봐.”
 “시노다를 완전히 놓아버릴 수 있을 리도 없는데.”
 “젠.”


 무릎 걸음으로 다가가 제네시오의 붉어진 얼굴을 올려다 보자, 그는 겨우 눈을 마주치며 겸연쩍은 듯 웃어 주었다.


 [오빠가 되어도 좋으니까, 젠이 오빠가 된다고 해서 사실은 기뻤으니까…… 그러니까 가지마! 가지마, 젠! 제발, 가지마…….]
 [……시노다. 나는 네 오빠가 아니야.]


 너무나 너무나 좋아하는 젠.
 처음부터 좋아서 좋아서 견딜 수 없었던 소꿉친구. 실버웨지의 따뜻한 바람도 사철 푸른 향나무 숲의 내음보다도 사랑해 마지 않았던 보랏빛 눈동자. 마주 잡은 손의 온기. 떠나 버린 자리의 메워지지 않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던 감정.


 “그래서, 젠. ‘에레트에게 가지 마’ 하고 ‘결혼하지 마’, 그게 다야? 그걸 말하려고 래빗더브에도 가지 않고 달려온 거야?”
 “……정말 발이라도 밟게 해 줄래?”
 “바보!”
 “어떻게 하면 알아주는 거야? 항상, 언제나, 말했잖아.”
 “말한 적 없어.”
 “그럼 역시 조금 더 지위가 올라가고 시노다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면 그때…….”
 “나중에 언제? 붙잡을 수 없게 됐을 때?”
 “……그, 러면.”


 왜 이렇게 멀리 돌아와야 했던 걸까?
 붙잡아야 할 때 놓치고, 삼 년 동안이나 후회한 후에 다시 만나 그리고 또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기만 하고, 언제나, 맞부딪힌 시선은 미끄러지고. 흩어지고. 감정은 제 안에서만 소용돌이치며 부서져서.
 잠을 설치거나 스스로를 어리석게 여기거나 있을 수 없는 일들을 하나씩 가정해 보거나.
 머랭 과자의 달콤함이 혀끝에 머무는 시간만큼도 버티지 못하는 맹세를, ‘다시는 만나지 않아’ 라든가, 아무튼 여러 가지 우습지도 않은 실랑이를, 괜히 해 보기도 하면서.
 대체 왜 이렇게나 멀리,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일까.


 “그러면?”
 “……시노다. 키스해도 돼?


 그러니까.
 역시,
 이렇게나 못 견디게 사랑스러우니까.


 검을 휘두를 때보다 열렬히, 리트리시아는 제네시오의 품에 제 새빨개진 얼굴을 숨겼다.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면 말야. 젠.”


 역시,
 키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거야. 모든 잘 되지 않았던 것이나 모든 아귀가 맞지 않았던 것들 전부, 키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거야.
 그러니 앞으로는 틀림없이 ‘영원히 행복하게’.


 누가 뭐라고 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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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 No Profile
    민아 12.10.21 23:06 댓글 수정 삭제
    작가님의 소설들 중에서는 두 번째로 보는 작품입니다. "심각하게 찬란한"이 첫 번째고 말이죠. 오늘부터 미로냥 님 팬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No Profile
    미로냥 12.10.23 21:45 댓글 수정 삭제
    민아 님/ 재미있게 읽어 주셨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
  • No Profile
    세이지 12.10.27 22:55 댓글 수정 삭제
    어우 달달해라 >.<
    잘 읽었습니다! 만화로 그려도 이쁠 것 같은 생각이 >.<
  • No Profile
    미로냥 12.10.29 20:46 댓글 수정 삭제
    세이지 님/ 순정만화풍 소녀소설...을 기치로 삼고 이것저것 쓰고 있습니다 ㅋㅋㅋㅋ 감사합니다 '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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