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미로냥 시와 용과 선녀의 날

2005.03.25 22:5803.25

# 1.

   그건, 젖은 흙 사이의 도마뱀 같은 것이야?
   라고 소녀가 물었다.
    
   아니.
   소년이 말했다.

   그럼 그것은 어떤 거지? 흐르는 능선 같은 것이야?
   소녀가 다시 묻자, 소년은 고개를 흔들며
   그건 능선보다는 지평선이란다. 지평선보다는 수평선. 하염없이 먼 거리, 떠난 뱃사람을 기다리다 부고를 받아 돌이 된 여인네들이 바라보는 수평선 말이야.

   그러자 풀밭인 양 하늘 가득 이슬이 맺혔다.

   그러면 그런 것은, 역시 없는 것이 낫겠다.
   소녀가 말했다.
   슬픔과 괴로움, 말이야?
   소년이 물었을 때,
   아니.
  라고 말하며 소녀는 힘겨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지금도 충분히 슬프고 괴롭다고, 그녀는 말하려 했다. 소년은 먼 데 하늘을 가로지른 능선을, 새로 지은 구름처럼 우거진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좋은 볕에 내다 건 빨래 냄새가 났다.

# 2.

  용이 사는 고장에 들렀을 때, 시인은 노래하기를 멈춘다고 했다. 단어를 짓는 일에 지치고 찌들었을 때, 시인들은 용이 사는 고장을 발견하게 된다고도 했다. 한평생 밥을 짓고 뒤섞던 주걱을 검은 아궁이 안쪽으로 던져 넣고 마는 여자들처럼 시인들도 그런 것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시인은 누구나 패기가 넘치는 시기쯤 용이 사는 고장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결국엔 찾아 떠나는 것이라고, 어머니들은 이야기했다. 풋내가 나는 곱단한 딸아이들에게. 멋모르고 시인의 뒷그림자를 조곤조곤 따라 걷는 어린 소녀들에게 어머니들은 말했다. 그들은 언젠가 고무나무처럼 늙어 가게 된다고. 팔딱거리며 싱싱하게 뛰던 심장이 죽어가듯 시를 이루던 영원의 단어들도 색이 바래 제각기의 거리로 흐트러지면, 바라보기에 좋은 먼  발치 별들만큼의 힘도 남지 않는 법이라고.

  그래도요 어머니.

  어머니들이 제아무리 일러도, 아주까리 기름내가 나는 머릿단을 헝클며 딸들은 우는소리를 했다. 어머니들은 낡고 고단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바느질하던 손을 멈추고 더는 살아 남지 않을 것처럼 숨을 멈췄다. 딸들은 울고 한숨지었다. 모자를 비뚜름하게 쓴 시인들을 따라 걸어야만 할 것이라고 속살대며, 딸들은 먼데 달을 보는 개처럼 충성스레 시인을 향했다.

  내사, 해바라기 모가질 꺾어 놔야 쓰겄제.

  딸들이 밤을 타 시인을 따라 길을 떠나 버린 날이면 어머니들은 해바라기 줄기를 뚝뚝 꺾으며 건조하게 울었다. 그런 날이면 남은 딸들의 머리카락은 산발을 하게 내버려두고 밭이며 논이며를 떠돌며 호미질에 힘을 주었다. 줄지은 해바라기들의 모가지는 하나같이 땅바닥에 끌리게 두고 화사하게 떠오른 태양을 향해 욕지기를 해댔다.

  왜 해를 향하는겨, 결국은 지고 말 것인디. 아니믄, 그런 거이 아니믄, 느이들두 그려? 잉? 느이들두 가슴팩에다 한끗 꼬리 떼인 여우맹키루 아릉아릉 날구 뛰댕기는 것이 있는 게여? 저어그, 건넛집 어린애, 그리매 밟기 놀이를 하믄서 먼지나게 달구 장 앞을 맴도는 건넛집 어린애말여. 똑 가처럼 느그들두 그른 것이여? 향허구 향허구, 꽁무니래두 한 분 밟지 않으문 밤 지내는 새 홀랑 죽어번질 것만 같어서 홀랑 뒤집어져설랑 울러번지기래두 하는, 그른 것이여? 그른 몬되묵은 심산 오데서 배서온겨?

  만신창이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딸들에게 어머니는 울며 말했다. 딸들은 어머니와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어미의 무릎에 묻혔다. 새근새근 오랜 잠을 자며 딸들은 속삭였다. 그이는 결국 떠났답니다. 고무나무처럼 늙어 가면서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답니다. 용이 사는 고장의 이야기를 하며 가선 안될 곳으로 찾아 들고 옛날의 나와 똑같은 처녀들에게 단맛 나는 단어들을 이야기했지요. 나는 들었답니다. 단맛 나는 단어들이 힘을 잃는 소리를. 파도에 쓸리는 모래무지처럼 힘을 잃고 맨숭맨숭한 말이 되고 마는 것을. 나는 울었지만 시인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답니다. 당신은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결국 그리 말하였을 때 그이는 나를 내치고 휘영휘영 보름달이 제 길을 가는 듯이 가고야 말았던 게지요. 까만 아궁지 속으로 떠다밀리는 말라빠진 장작개비처럼 마르고 또 말라가는 걸 나는 보고 있었는데. 잘못 노래하고 있다는 걸 나는 보고 있었는데. 그는 내일과 모레가 흘러간들 오늘이 다시 오지 않는 다는 걸 모르는 이처럼 굴면서 홍글홍글 상글상글 밤에 피는 꽃만 안으려 했답니다. 그이는 그이를 다치고, 그이는 꽃들을 다치고, 그이는 나를 다치고, 그리하여 꽃들은 그이가 떠난 후에 꽃잎을 떨구며 오늘 밤도 울어…… 아아, 어머니……

  우린,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었어요……
  하고.

  용이 사는 고장을 찾아냈을 때, 시인은 만가를 부를 줄 알게 된다고 했다.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을 알게 되고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을 찾게 된다고도. 용의 고장에서 부르는 만가는 달을 향한 해바라기처럼 슬픈 법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세상 어머니들이 딸들에게 이르듯 많은 시인들은 용의 고장으로 머리를 향하고 죽었다. 시인들은 용의 고장을 자신들의 고향으로 삼았다. 어딘지 방향도 알 수 없는 것을 일생을 떠돌며 찾아 나서, 종래에 깨닫게 되면 죽는 순간 고개를 두는 것이라 했다. 시인은 버려진 아이가 어미를 찾아 떠돌 듯, 오욕과 분노, 이따금은 증오가 섞인 처연함으로 용의 고장을 찾았다. 고향으로 고개 두고 죽는 것이란 여우 말고는 시인뿐일 것이라고, 누군가 말할 때면 하늘 가득 이슬이 맺힌 양 별이 총총했다. 시인이 죽는 날은 언제나 맑아서 시인은 별이 되는 게 아닌가 추측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세상 시인들이 모두 없게 되었을 때 용은 자신의 고향을 떠나 하늘에 또아리를 트는데, 날개도 없이 하늘을 덮는 거대한 용을 본 사람은 누구나 죽는 다고 했다.

# 3.

  소녀는 바구니를 끼고 봄의 언덕을 걸었다. 인간이 사는 마을마다 저녁 연기가 솟아올랐다. 하늘은 불지핀 아궁이처럼 발그레한 빛깔로 가라앉고 있었다. 소녀의 어머니는 팔딱팔딱 나비 쫓는 고양이 새끼처럼 사립 안으로 드는 소녀를 할끔거렸다. 핥아먹을 것처럼 눈치를 보다 어머니는 에헴, 기침을 했다. 소녀가 새벽 나절부터 농 안에 고이 싸 넣어 뒀던 좋은 옷을 어찌어찌 찾아 내 놓고는 그걸 저를 달라고 칭얼대는 통에 몇 대 등짝을 갈긴 탓이었다. 어린 계집애가 토라져선 눈물을 어리며 달려나가는 걸 한숨쉬면서도 내버려뒀던 터라, 혹여 아직까지 입을 내밀고 있나 살피는 것이었다.

  어데를 댕겨 오나.

  소녀의 어머니가 모른 척 물었다. 소녀는 빵긋 웃으며 바구니를 내밀어 보였다.

  시인을 만났는 기라예. 거 앉아가 풀 뜯다 왔니더.

  소녀의 어머니는 낡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지난한 시간들이 그녀의 주름살 사이에 불거져 있었다. 어머니는 천천하고 걍팍한 목소리로 소녀에게 말했다.

  시인이라니, 그 치들 뵈믄 안디야. 그 치들은 말여, 용인가 하는 거이 사는 델 찾는다구 온통 헤미구 나대는 것들이여. 절대로 넬랑 돌아보덜 않을 것이구먼.

  소녀는 배시시 웃었다. 진달래 빛깔로 뺨을 상기시키는 딸을 향해 어머니는 당장 통곡할 것처럼 주걱을 들고 달려왔다.

  절대로, 절대로 안디야. 그랑게 내캉 니캉 약조를 허는 겨, 잉? 시인 겉은 건 따라가덜 않겄다구. 시새 깔린 데에 이삭 패일 때까정, 민둥산 꼭다리 바우에 고사리 돋을 때까정, 이 에미 하구 겉이 한데다 발을 꾹 디디구 살겄다구. 잉?

  소녀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웃어 보였다. 어머니의 남의 세월들도 지난 세월들만큼 너덜거릴까, 라고 그녀는 말했다. 나도 이리 자라나면 봄나물 뜯으며 어머니 같은 표정 짓게나 되는 것이려나, 하고도 말했다. 눈물 많은 시절이란 봄날 같아 지나게 마련이구 말구, 소녀는 혼자 답을 내듯이 중얼대는 데 그 목소리가 벌써 나이 먹은 어미 같았다. 어머니는 새끼를 떼어주는 개처럼 슬픈 듯도 했지만 조금도 울지 않았다.

# 4.

  언제나 생각했지. 시간이 흐르는 일은 슬프다고. 꽃이 지고 해가 떨어져, 좋은 향내는 휩쓸려 지나쳐 버리지. 비는 땅을 향해 항아리를 내던지듯 깨지고 깨져 흘러 넘치기만 할 뿐 한 번도 하늘을 향해 되돌아가지 않았어. 새 바늘처럼 날카롭게, 쏘아버린 살처럼 격렬하게 쏟아지고 또 쏟아져 대지 가득 푸른 피를 쏟아놓으면서도 다시는 하늘을 돌아보지 않지. 다시는 고향을 찾지 않는 시인처럼.

  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소녀를 보았다. 소녀는 바구니를 곁에 놓고 웃었다. 소년은 따라 웃었다. 해가 덩그마니 떴다 떨어졌다. 소년은 천천히, 날개짓에 지친 새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노래하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군가의 슬픔에서 핀 꽃처럼 금새 사그라들 이야기, 누군가의 기쁨에서 솟은 무지개처럼 발 디디는 순간 부서질 이야기, 시인의 입을 타고 그제서야 긴 세월 속에 숨쉬게 된 이야기들을.

  시인이 산등성이 완곡한 음절처럼 퍼져 누운 위로 별빛 타고 고향땅 되돌아 짚으면. 시인의 지팡이가 타고 나 처음 눈에 담은 오랜 벌판 지평선을 흐드르면. 그러면 시인의 눈은 영영 멀어 버리고 그리고 영원히……

  소녀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늙은 여자의 손처럼 낡은 피리를 들고 그의 뼈마디로 피리 구멍을 막았다. 소녀는 그녀의 머리칼로 엮은 바구니를 이로 찢어내어 계곡 아래로 제사지내며 소년에게 소리쳤다.

  영원히 멀어버리고. 그리고 또 영원히.

  소녀는 고개를 들어 눈 안에 별을 담았다. 인간의 약속처럼 별은, 금새 져버린 다는 것을. 결코 그녀의 눈 안에 잠들지 않는 다는 것을 잊은 것처럼 소녀는 별을 담았다. 하나 둘 셋 넷 별들은 처음 핀 매화 빛으로 불타며 봄 배꽃 빛으로 불타며 소녀의 검은 눈동자를 채웠다. 빽빽하게 들어차서 언젠가 소녀의 눈이 멀어지길 비는 것처럼, 간절한 별빛들이 소녀에게 떨어졌다.

  소년은 노래하고 있었다.

# 5.

  선녀를 사랑혔제. 나무꾼은 말여, 무식허게 낭구를 허믄서 선녀를 사랑혔어. 도끼질을 하믄서도 선녈 생각혔구 땀을 닦으믄서두 선녈 그렸던겨. 잘생긴 놈으 달댕이가 몸을 닝그러 나리는 물에 선녀들이 별빛 창포 삼아 머릴 감었다제. 그 놈은 그걸 훔치 보믄서 도끼 자루 부러지듯이 가슴팍이 저려서 부러질 지경이었제. 선녀들은 그런건 꺼멓게 몰랐을 거구먼. 천상 속한 것은 그런겨. 무심한겨. 가뭄 들어 바짝바짝 논이며 밭이며 말라 죽는다구 은제 하늘이 어리게 여기 갖구 옷깃 팔락대믄서 나렸다카는 일 있는겨? 다 그런 것이여. 하여간에 선녀들의 삼단 머리칼은 별빛두 어둠두 무색혔다는구먼.
  나무꾼 가슴 하나 새까만 어둠 대신 타들어 가는 걸 그네들은 몰랐네. 어둠처럼 몰랐네. 새까맣게 몰랐네. 별빛 하나도 선녀들에겐 들어서질 않아, 그미들은 그냥 구름처럼 하얗게 떠다니는 걸. 손 한번 뻗으면 저 하늘에 저 하늘에 가 닿을까 해서 산으로 드는 이가 바보일걸. 아무렴.
  나무꾼은 기어코 일을 냈다지. 바람결에 은초롱꽃이 피리를 불었나, 가쁜 가슴 털어놓던 산기슭 사이에서 시냇물 바람대신 선녀 아가씨 향내가 약초 냄새처럼 쓰게 입안으로 돌았나. 나무꾼은 일을 냈네 나뭇잎에 긁히고 가지에 걸려 찢기우며 선녀의 옷가지를 훔쳤다지. 새에게서 날개를 뺏듯 어린애가 풀꽃 각시 모가지를 꺾는 것처럼 옷가지를 안고 뛰었다네. 가쁘게 숨을 쉬며 나무꾼은 울며불며 뛰었다네. 선녀 아가씨에게 참으로 미안했을 거구만.

# 6.

  소녀는 하늘을 보았다. 멀었다. 아득했다. 소년의 노랫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나무꾼과 선녀의 이야기가. 선녀를 사랑해 옷가지를 숨기고, 선녀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선녀를 사랑해 옷을 돌려주는 바보 같은 인간 남자의 이야기였다. 소녀는 무릎을 안고 나물 바구니에 어둠이 깃들어 파릇한 나물들이 시들 때까지 소년의 곁에 꼼짝 않고 있었다.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소녀는 소년을 보았다.

  닐랑 선녀였드랬제. 먼 옛날, 내가 아직 시인이던 때사 니두 선녀였고 말고. 는개 나리듯 오는 동 마는 동하며 한들한들 흔들대어 저맨치 꽃무지에 젖어드는 것을 내 보았드랬어.
  라고, 소년이 말했다. 소녀는 하늘을 보았다. 멀었다. 아득했다. 손을 뻗지만 닿지 않았다.

  하늘로 돌아가구 싶은 적이 있을 거여. 그렇지. 가슴이 선뜻선뜻허니 뉘 옷깃 젓는 바람만 흔들거려도 늘어진 버들개지 툭툭 딛구 하늘루 겅충 오르구 싶은 적. 부끄런 데를 몽창 내놓구 하늘에 박힌 귤같은 달에다가 배를 대고 싶은 적. 똑바루 눈을 뜨구 숭늉처럼 감주처럼 별을 마셔서 냇물에 쏴 쏟아놓으문 오글오글 바윗뎅이 아래 몽키어 사는 괘기떼가 되련가 싶은, 그런 적 말여.

  소년이 물었다. 소녀는 아직도 하늘을 보고 있었다. 소년은 하늘을 보지 않았다. 봐서는 안될 것처럼 몸서리를 치는 소년 곁에서 소녀는 웃음을 지웠다.

  날개옷을, 줄까.
  라고 소년이 다시 물었다. 소근소근 비밀스런 제의를 하듯 허리를 굽히고 귀하게 핀 약초 꽃대롱처럼 삐뚜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소녀는 웃었다. 울었다. 화를 냈다. 그리고 일어나 달렸다. 다시는 소년을 안 볼 것처럼. 소년은 소녀를 잡지 않았다.

# 7.

  용을 보았다. 수없이 많은 비늘들이 은녹색으로 반짝였다. 오래되어 이끼가 낀 바위처럼 단단하고 언뜻 보았던 비단처럼 고운 빛으로 윤기 흐르는 아름다운 용을 보았다. 머리와 꼬리를 찾을 생각도 없이 감히 볼만한 자격도 없는 양 노랫소리도 언어도 모다 잃는 것이 예의인 것만 같았다. 시인은 귀한 피리들을 버리고 상처 입힌 사람들을 생각하며 울었다. 눈물을 모아 용의 비늘을 하나하나 닦았다. 용이 꼬리를 흔들자 구름이 일었다. 죽음에 관해 마지막 노래를 부르려는 때에 용은 하늘로 날았다. 비늘을 벗고 여의주를 토해내며 움켜쥐고 있던 호수와 구름과 강을, 흙과 숲과 바다를 버렸다. 아끼지 않고 던지며 바람도 하늘도 연연하지 않는 양 한없이 솟았다. 날아갔다. 하늘로, 하늘을 버리고, 하늘로, 용은 날았다. 날개도 없이 길고 구불구불한 용이 날았다. 상처 입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시인은 마지막 노래를 불렀다. 아깝지 않고 들리지 않고 전해지지 않는 노래를 불렀다. 날개 없이 날아간 용에 관해, 세상의 모든 길처럼 세상의 모든 산등성이처럼 구비구비 닳고닳아 의연해진 용을 보았다. 파도처럼 불타며 날던 용을, 불타는 물처럼 날던 용을, 수평선의 먼 끝과 지평선의 먼 아침을 버리고 날던 용을.

  시인은 언어를 잃고 생명을 버리는 법에 관해 알게 되었다. 용을 향해 시인은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하나씩 버려나가며 비늘을 짓는 법과 오랜 시간 앉아 죽어 가는 법을, 시인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 8.

  너는 용이란다.
  소년은 고개를 젓는다.
  너는 선녀란다.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세차게.

  어델 나데믄서 다니네?

  소녀의 어머니는 호통을 쳤다. 소녀는 어깨를 움츠리고 파리하게 말라 갔다. 몸 속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소녀는 하얗게 바래갔다. 가뭄 먼지 뒤집어 쓴 민들레 송이처럼 볼품없이 애절하게 말라 갔다. 소녀는 이대로 말라죽느니 했다. 소녀의 어머니는 호통을 쳤다.

  어데서 맨 눈으루다가 하늘을 보네? 기집애가 그리 허투루 하늘 보믄 못쓰는겨. 괜스리 헛바람이 들라구.

  소녀는 어머니의 말을 귓가로 흘리며 멍청하게 마루에 앉아 있었다. 하늘을 보고 있는지 하늘을 담고 있는지 소녀도 어머니도 몰랐다. 느지막이 비가 잠시 내렸다. 지나는 비려니 하면서도 소녀의 어머니는 마당에 내다 넌 것을 걷었다. 지나는 비치고는 꽤나 길고 드셌다. 강철로 된 것인 양 팔뚝이며 이마로 파고드는 빗줄기 아래에 서서 소녀는 하늘을 보았다. 소녀의 어머니가 소녀의 앙상한 팔뚝을 낚아채 방안으로 끌어다 넣었다. 그리고는 꺾은 민들레처럼 꼬부라지는 젖은 허리와 와들와들 떠는 파란 등짝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괜스레 헛바람이 들라구. 헛바람이 들라구. 사는 게 다 그런 것이여. 그걸 왜 모르는 겨, 그걸 왜 모르냔 말여, 으응? 새 바늘쌈 늬한테 줄랑게 안으루 들어올 텨? 늬언니 시집갈 적에 놓구 간 외할매 노리개 늬한테 줄랑게 안으루 들어올 텨? 으응? 말을 혀봐 이것아, 꿈자리 어지럽힌다구 볼쏙볼쏙 방정맞게 들이치는 느이 언니맹키로 입 딱 닫아 걸구 섰지 말구, 달라고, 놓으라고, 죽어도 싫응게 그라지 말라카구 션스레 말을 혀보란 말여.

  소녀의 어머니는 수이 그치지 않을 기세로 내리는 빗속으로 종종 걸음 쳤다. 소녀는 젖은 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구들에서부터 싸늘한 기운이 스믈스믈 올라왔다. 비를 맞은 피부가 여기저기 따끔거렸다.

# 9.

  나무꾼은 하늘의 사람이 되었다네. 지상의 어미가 궁금도 했을테지. 하 걱정되어, 걱정되어 날았네. 하늘을 지르는 흰 날개를 발굽에 단 천마를 얻었다지. 선녀 아내가 보자기를 감아주고 옥황상제 좋은 재주꾼들이 약을 뿌려 지지고 볶아 만들어낸 다듬어낸 고운 천마를 빌었다지. 나무꾼은 질끈 묶은 머리끈을 만지며 이영차 천마에 올랐지. 흔들흔들 아슬아슬 나무꾼은 지상으로 내렸네. 하강하는 용처럼, 떨어져 내리는 벼락에 묻어 왔을지 누가 알아. 총총 별에 묻어 나렸을 줄을 누가 알아. 비에 묻어 나뭇잎 적시며 물들고 또 물드는 것을 누가 알았을까. 나무꾼은 지상에 물들었지. 천마 발굽, 새하얗고 고귀한 그놈의 것일랑 땅에 닿지 않게 주의를 하라셨다지, 윗전의 높으신 마님이. 나무꾼 더럽던 발이나마 다시 땅에 붙이는 날엔 다시는 하늘하늘 때깔 좋은 마눌이 사는 데엘 들지 못하리라 하셨다지. 나무꾼은 흔들거리며 그리운 오막살이 산중 집으로 나렸지. 간밤 비 땅에 스미듯 나리는 것은 무릇 땅의 소유라 발을 붙이고야 싶었을 테지만 눌러 눌러 참았네 참었어, 장하기도 해라. 나무꾼은 외쳐 불렀지 어무이 어무이요 지가 왔심더, 어무이 자슥이 왔능기라예, 불렀다지. 두 손을 고삐를 쥔 채 흔들거리며 목소리 울렁거리며 메아리 튕기듯 외쳤다네. 서리서리 흰 서리 머리머리 하얗고 또 하얀 어미가 뛰쳐나왔다지. 세월만큼 한 눈물 어리며 피곤하게 피곤하게 지난하게 달려왔다지. 넓지도 않은 마당 천릿길 뛰듯 간절히. 두 손 뻗어 천마의 갈기에 파묻힌 아들놈 손모가지 매만졌다지. 그리고 말했네, 얘야, 호박죽이나마 먹구를 가기라.

# 10.

  하늘로 오르는 선녀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땅으로 젖어드는 선녀에 관해서는 달맞이꽃이 피고 지는 이야기모양 심드렁하게, 누구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모른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는 듯이 보지 않았다는 듯이, 사람들은 비가 내리는 청아한 여름날 개굴개굴 소리가 문득 멎었을 때에 비에 묻어 내리는 선녀 이야기를. 아무 것도 없는 칠흙색 그믐날 인적 드문 곳을 밤새 날아갈 적에나 동무 별빛 길 삼아 종종 걸어 저만치 산으로 지는 별똥별 이야기를. 사람들은 하지 않았다.
  어리고 작고 나약한 선녀는 울며불며 인간 여자의 배 안에서 열 해 스무 해 살기도 했다. 태를 붙이고 태어나 우렁우렁 인간의 말을 울며 손바닥으로 진흙을 짓이기고, 봄나물 핀 산등성이를 헤치며 자라기도 했다.

# 11.

  시인들은 용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는 용이 되지 않을 것처럼 노래하며 용을 외면하며 시인들은 두 다리로 걸었다. 하늘은 그네들에게 언제나 높았다. 손을 뻗는 시인은 있지 않았다. 하늘을 보는 시인도 있지 않았다. 멀찍한 별을 보는 듯 하면서도, 그네들의 눈길을 언제나 다급했다. 여유 안에 고독을 숨기고 그들은 하염없이 쫓기는 사람처럼 세상의 길을 벗어났다.

  그러나 결국은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어.

  소년이 서글프게 말했다. 소녀는 고사리를 꺾었다. 소년이 자신이 꺾인 것처럼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벗어나려 해도, 길이 아닌 곳은 없으니까. 길이 없던 곳에도 길이 생겨 버리니까. 내가 걸어가면 길이 되어 버리니까. 내 언어가 지팡이 되고 내 시가 우악스런 두 발이 되어 흐드러지게 핀 들꽃 사이 지나면 하마 길이 되고 마는걸.

  소년은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두 팔을 넓게 벌렸다. 숨을 들이쉬자 하늘에 박힌 별들이 소년의 숨으로 말려 들어갔다. 소녀는 한 밤에 푸른 달을 등지고 고사리를 꺾었다. 소년이 당장 사라져 버려도 놀라지 않을 것처럼 고사리를 꺾었다. 동그랗게 말려, 막 뛰어오를 것처럼 개구리 물갈퀴 같은 동그란 것을 종종 내보이고 있는 고사리를.

  벗어날 수 없어. 세상의 길로부터. 대지에 속해 발을 붙이고 사는 인간인걸.
  소년은 껑충 뛰었다. 하늘에 닿을 듯이.

# 12.

  소녀는 자신의 방에 놓인 물건들을 만졌다. 낡은 옷가지 정성스레 덧대 지어 놓은 것이랑 아까워 숨겨 두었다 한두 번씩만 조심조심 꺼내 입는 사이 작아져 버린 버선 같은 것을 소녀는 자꾸만 만졌다. 살이 숭숭 빠진 빗을 들고 머리를 빗어 내리면서 소녀는 흐느낄 것처럼 어깨를 떨었다. 쥐 소리가 나는 천장, 낡은 물건들, 오도카니 앉아 허리 한 번 펼 길 없는 작은 방을 돌아보며 소녀는 떨었다. 이가 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닐랑 선녀구먼. 하늘로 가고 싶지 않어?

  소년의 속살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돌았다. 소녀는 바느질감을 움켜쥐고 손을 떨며 한 땀을 떴다. 손끝을 긴장하며 뱀처럼 스삭대는 실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러다 넋을 잃으면 미치는 것이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하늘루, 가고 싶지는 않어? 시인은 날개옷 같은 걸 만들 수 있지라. 하늘루 길을 낼 수가 있단 말이여.

  소녀는 작은 장을 열어 어머니가 고이 개어 둔 때깔 있는 옷을 꺼냈다. 가난한 집에서 가장 귀한 옷이래 봤자 좀 좋은 천으로 지은 빛 바랜 옷일 뿐인데도, 이걸 볼 때마다 소녀는 가슴이 답답했다. 가슴이 자라기 시작할 무렵부터 친친 감아 놓은 천 때문이려니 하면서도 소녀는 숨 죽여 눈물 따위를 흘렸다. 소년을 만난 날 새벽녘에, 이 옷을 꺼내 놓고 입어보게 해 달라고, 나를 달라고 어머니에게 떼를 썼더랬다. 소녀는 그때는 왜 그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 고개를 저었다. 소녀는 잘 개켜진 옷을 붙잡고 조심스레 흔들었다. 그리고는 몸에 둘렀다. 어머니의 커다란 몸을, 자신을 토닥이거나 밭을 일구는 큰 뒷모습만 떠올리며 소녀는 옷을 걸쳤다. 질질 바닥에 끌리며 나를 따라올테지, 옷 끝이 닳아버릴 지도 모르니까 정말로 조금만, 그저 잠시 걸쳐 보는 거야. 나비가 꽃 위에 한 번 앉아나 보고 훌 떠나듯이 그렇게 잠시 잠깐. 간절해서 아쉬울 만큼, 별똥별 꼬리가 난만히 빛나는 순간만큼 아주 잠시.

  아주 어릴 때에도 이 옷을 보곤 입어보게 해 달라고 울며 떼를 부린 적이 있다. 두 발을 바둥대며 구들을 차고 구르고 물구나무를 서서 머리칼을 난만한 꽃다지처럼 흐트르면서. 그때의 젊은 어머니는 어땠더라. 그때의 잘 자란 언니는 어땠더라. 길게 드리운 머리칼을 빗으며 언니는 뭐라고 했더라. 왜 울었더라. 언니에겐 입게 해 주믄서 나는 왜 아니되누. 그렇게 울며불며 구들을 지고 누웠지. 벌렁 치마를 까뒤집으며. 그러자 어머니가 마지못해 옷을 내주는 걸 냉큼 가슴에 둘러보고는 또 울었다. 언니에겐 꼭 맞는데 나는 왜 아니되누. 나는 왜 아니되누.

  소녀는 옷자락을 만지며 주춤주춤 죄를 짓는 사람처럼 소매에 팔을 꿰었다. 잠시, 아주 잠시인데 괜찮아. 꼭 한 번을 입어보는 것인데 괜찮지, 괜찮고 말고. 소녀는 치마 자락을 당겨 매듭을 고이 맸다.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는지 매듭이 자글자글 해 졌다. 치마가 발에 밟히리라, 금새 벗겨질 만큼 발에 밟히리라.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예전처럼 구들을 지며 울게 되리라. 울며불며 왜 나는 아니 크는 것이냐고 울어대리라. 어른 같은 것은 실은 좋을 것 하등 없는데도 왜 그리 까치발 못해 안달이었노. 소녀는 속으로 생각하면서 저고리에 한쪽 팔을 끼웠다. 옷자락 닿는 느낌이 사락사락 맨 발로 눈 밟는 것이나 같다. 소녀는 저고리 앞섶을 여미고 고름을 당겼다. 옷가슴이 빳빳하도록 자락을 당겼다. 고름을 어깨춤에 올리고 매는 법은 어머니한테서 배웠다. 좀 어릴 적에 어머니에게 볼기를 맞아 가면서 계집애가 칠칠맞다고, 매번 고름을 흐트른다고 소리를 들으면서 배웠지. 처음엔 짝이 맞지를 않게 지어서, 다시 흐트러지고 미끄러지고 어머니는 이번엔 알밤을 주며 야단을 치고, 그게 서러워 어린 마음에 울었다. 서럽게 울다가 눈물을 닦으려 했더니 이번에도 눈앞에 불이 나도록 때렸지. 새 옷에 어딜 눈물 자욱을 맹글려고 하는 것이냐고 호통을 치면서 앞으로 때때옷을 지어주지 않으리라고 지청구를 하고. 고름을 짓는 법을 한참만에 배우고는 병아리 모양 언니 품에 달겨들어 엉엉 목놓아 울었던 먼 옛날만 같은 기억.
  소녀는 앞섶을 여몄다. 고름을 지었다. 한 걸음 걸어 봤더니 치맛자락 앞이 살짝 차이면서 미끄러지듯 나아간다. 소녀는 소스라치며 팔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곱게 고름 지은 저고리가 꼭 맞는 것에 놀라 털썩 소리가 나게 주저앉았다. 구들장 꺼진다 이것아, 마침 어머니가 들어서며 야단을 먹였다. 길게 늘어지는 피곤한 목소리로 구들장 꺼진다, 이것아, 라고. 소녀는 저고리 벗을 생각도 잊고 뭔가 잘못된 것처럼 바들바들 떨었다. 어머니는 소녀의 몸에 꼭 맞는 저고리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다 컸구먼. 인즉까정 어린 것으루 알었더만 다 컸어.
  어머니는 슬픈지 기쁜지 모를 표정으로 웃었다.
  그 옷일랑 너 가지거라.
  소녀는 어머니의 무릎에 고개를 묻고 어린애처럼 울었다. 꽃이 지기 전의 폭우처럼 몰아치며 소녀는 울었다.

  닐랑 선녀인 것인데, 하늘로 갈 맴은 진정 없는 거여?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녀는 어머니의 무릎에 묻힌 고개를 들 생각도 없이 목놓아 울었다.

  하늘로 갈 맴은 영영 없는 것이여? 응? 선녀루 살고 싶지가 않은가 말이여.

  소녀는 고개를 들고 울음을 멈추려 노력했다. 손바닥으로 쉼없이 눈물을 닦아내던 소녀는 저고리를 벗어 차근히 개어 놓고는 바늘질감을 들었다.

  시인은 만들 수 있는 것인데. 날개옷 만들 수 있는 것인데.

  소녀는 쥐 소리가 나는 천장을 한 번도 올려다보지 않았다. 밤이 짙도록 방문 한 번 열지 않았다.

# 13.

  소녀는 더이상 나물을 뜯느니 꽃을 따느니 하지 않았다. 어린 소녀들 틈을 두리번거리던 소년은 머쓱한 표정으로 산마루 높다란 절벽 따위에 앉아 있었다. 시내가 졸방졸방 병아리 걸음 소리를 내며 흐르는 사이를 맨발로 어정거리며, 소년은 소녀에게 못다 들려준 이야기들을 노래했다.

  호박죽을 먹고 가라고 했더랬지. 나무꾼은 호박죽을 들었네. 그리고 결국엔 하늘로 돌아가덜 못혔던 거여. 하늘하늘 하늘나라 마눌 계신 곳일랑 가덜 못했제. 땅에 발붙작신 인간이란 다 그런거이구먼. 무슨 좋이 난 재줄랑 있었는가 몰라두 올라가게를 되어도 가지를 않었던 것이여. 못간다 하고선 아니 가는 것이여. 허지만 못가긴 무엘 못가. 안가는 것이여. 안가는 것이랑게. 그렇지만 또 달리 뭘 어찍하겄어, 그런들 어찍하겄어.
  나무꾼은 어미를 보았겄지. 땅에 붙박힌 지네 살아온 집이랑 밭 놓인 것이랑 지게랑 보았겄지. 오래오래 가지고 놀던 흙무지며 송아지를 놓은 소 같은 것, 그것도 아니면 가을 까치밥 얻어먹으러 세 갈래 진 솔잎 모양 발자국 찍으며 가지에 앉은 까치를 보았겄지. 그러니 못갈 밖에. 그러니 못갈 밖에. 떠날 줄 아는 것이랑 시인뿐이구먼. 속한 데 없는 시인뿐이구먼. 날 줄 아는 것도 시인뿐이구먼. 죽어질 줄 아는 것도, 시인뿐이구먼. 붙잡는 어밀랑 없응께 날아갈 밖에 없는 게지. 눈 붙잡을 집이며 지게며 없응께 날아갈 밖에 없는 게지. 어쩌겄어. 어찍하믄 되겄어. 하늘에서 나린 선녀들두 죄 돌아가덜 하지 않는 것을. 낸들 이제 어쩌겄어.

  소년은 천천히 두 팔을 벌렸다. 오래 묵은 피리가 저만치 계곡으로 굴러갔다. 새 소리가 들렸다. 소년은 입으로 쫑쫑 소리를 냈다. 새들이 몰려 날아들었다가 재재재 지저귀며 먼 하늘로 날았다.

  느릿하게, 소년의 손끝이 녹아 사그라졌다. 바람 속으로 하느작 흐트러지는 소년의 손발이 꽃잎 같았다. 세상의 모든 길인 양 능선인 양 냇물 굽이치는 모양인 양 소년에게 굽이굽이 비늘이 돋아났다. 천 년을 거기에 묻혔던 것처럼 긴 기지개를 펴며, 소년은 노래하기를 멈췄다. 연녹색 비늘들이 빛도 없이 반짝거리는 사이 산은 적막하고 하늘은 문득 피 같은 비를 흩날리다 그쳤다.

# 14.

  용이 사라진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아직 푸르게 여물지 못한 나뭇잎들이 뚝뚝 비가 듣는 소리를 냈다. 해가 해사한 처녀 웃음처럼 허허롭게 환한 아래로 빗방울이 흘렀다. 날씨 한 번 참 얄궂기도 해라. 여자들은 재재거리며 빨랫감을 안고 걸음을 재촉했다. 사방놀이 하던 걸음으로 길바닥 웅덩이마다 진흙 저지레질을 해대며 꼬마들이 점벙점벙 뛰어다녔다.
   시인이 용의 고장을 찾았을 때 시인은 노래를 버린다 했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이 본디는 용이었다는 걸 알아버리는 법이라고 했다. 그리 전한 자는 이미 죽고 없어서 누군가 번뜻 생기는 깨달음이라도 있어 입을 열지 않는 한, 전해주지 않는 한 세상 사람들은 시인에게서 용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용을 본 사람은 하나도 없고 용이 된 사람만이 있는 세상이었다. 시인들은 모다 슬픈 용이었다.

# 15.

  용이 사는 고장에 들렀을 때, 시인은 노래하기를 멈춘다고 했다. 단어를 짓는 일에 지치고 찌들었을 때, 시인들은 용이 사는 고장을 발견하게 된다고도 했다. 그러나 아무도 알지 못했다. 시인이 지쳐 만가를 부를 줄 알게 되면 용이 된다는 것을. 용이 지쳐 시인이 된다는 것을.

  어머니들은 본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법이라고, 누군가가 또 말했다.

  또 어느 길 위에서 용이 나는 듯, 시인이 죽는 듯, 선녀가 나리는 듯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날 긴 봄이 끝나고 후덥지근한 바람이 구름결 사이사이 묻어 났다. 하늘이 티없이 맑은 날 비가 나리면 여우 시집가는 날이라고 동네 꼬마들이 왁자했다. 목을 길게 뺀 동네 사람들이 몽켜 서있는 마당을 한 바퀴 휘돌며, 소녀가 탄 가마가 천천히 마을 어귀를 빠져나갔다. 이번 색시는 독하기도 하지. 눈물 한 방울 어리지 않더라. 동네 아낙들이 짖고 까부는 소리가 들렸다.

# 16.

   그러면 그런 것은, 역시 없는 것이 낫겠다.
   소녀가 말했다.
   슬픔과 괴로움…… 말이야?
   소년이 물었을 때,
   아니.
   라고 말하며 소녀는 힘겨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지금도 충분히 슬프고 괴롭다고, 그녀는 말하려 했다. 소년은 먼 데 하늘을 가로지른 능선을, 새로 지은 구름처럼 우거진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좋은 볕에 내다 건 빨래 냄새가 났다.

   하늘.

   소녀는 소년과 눈을 맞추었다. 소년은 소녀의 곁에 나란히 앉았다.

  그런 것, 한사코 없어지려 하지 않을테니, 그러니까 그냥 잊으렴.

  ……이 먼 하늘의 기억이, 언젠가는 잊혀질까.
  하고 묻는 이 있었다. 넓지도 좁지도 않아 매양 잘 울음을 흘리던 하늘 아래 답하는 이는,

  없다.



  - 終 -
  ----------
  꽤 신경이 쓰이는 주제. 몇 년 묵은 글입니다만 아직도 신경이 쓰이는 주제입니다.
  '나무꾼은 왜 지상에 남은 것일까' 하고.
  고등학생 시절에 집에 돌아와 아끼는 물건들을 돌아 보면서 문득 생각한 거였어요. "아아, 물욕은 버리는 게 옳다고 하지만 나는 이 물건들을 무척 사랑하고 있구나" 하고. "이것들을 두고 나는 떠나지 못하겠지. 아마 닭이 되면서도 지상에 남아, 그러나 결국 울어 버릴 거다" 하고.
  물건에 애착을 가지는 게 그렇게나 악한 일일까. 사랑하는 일이 인간의 아름다운 무언가라면 물건을 향해 애틋해 하고 못내 놓지 못하는 것도 조금은 아름답게 여겨도 좋지 않을까.


mirror
댓글 2
  • No Profile
    빈彬 05.04.03 11:32 댓글 수정 삭제
    저도 어렷을때 나무꾼이 남은 이유가 궁금했어요. 그랫을 수도 있겠군요. 나무꾼이 그랬을수도 있었네요. 좋은글을 읽고 갑니다...
  • No Profile
    녹용 05.04.14 16:09 댓글 수정 삭제
    너무 멋집니다! 잘 보고가요^_^
분류 제목 날짜
갈원경 나무각시의 꿈 - 본문 삭제 -1 2005.04.29
미로냥 백야(白夜)2 2005.04.29
초청 단편 아테나의 기원起原 2005.03.25
미로냥 시와 용과 선녀의 날2 2005.03.25
김이환 껍데기1 2005.03.25
갈원경 죽음의 샘 - 본문 삭제 -2 2005.03.25
양원영 천년의 동화 - 본문 삭제 -3 2005.03.25
초청 단편 날개(과욕) - 신화 삐딱하게 보기. 2005.02.26
김수륜 Love affair - 본문 삭제 - 2005.02.26
赤魚 옥션 - 본문 삭제 -3 2005.02.26
赤魚 어떤 밸런타인데이 - 본문 삭제 -1 2005.02.26
갈원경 보름의 밤 - 본문 삭제 -4 2005.02.26
은림 태양을 삼키다1 2005.02.26
은림 낙오자3 2005.02.26
정해복 고양이의 언어5 2005.02.26
미로냥 마왕에게 꽃다발을3 2005.02.26
아밀 키리에 - 본문 삭제 -1 2005.02.26
김이환 천사가 지나갔어3 2005.02.26
정대영 피곤하면, 이리와요, 혜경씨.2 2005.02.26
정대영 판타스틱 동상이몽 2005.02.26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