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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a 용의 비늘

2004.01.30 21:2301.30

1


  레첸은 우투 족의 왕녀였다.

  정확히 말하면, 여인의 부족인 우투의 여왕이 근본을 알 수 없는 어떤 남자를 말년에 만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낳은 14번째 왕녀였다. 레첸이 태어났을 때의 그 지옥과 같은 출산을 기억하는 이들은 레첸을 가리켜 불길한 아이라고 했다. 우투의 수호신이자 여왕의 조상인 네이베의 돌보심이 없었으면 여왕의 생명과 맞바꿔 태어났을 아이라고 했다. 그것도 근본을 알 수 없는 남자의 자식인 주제에 신이나 마찬가지인 여왕의 생명을 들었다 놓은, 건방지기 그지없는 아이였고, 레첸이 태어난 후로 여왕은 한시도 몸이 건강한 적이 없었기에 부족의 쇠락까지 가져온 악마 같은 아이였다. 여왕의 건강이 안 좋아진 것과 발맞춰 우투에는 눔 사이칼의 마귀들이 심심치 않게 출현했다.

  레첸은 여왕의 호의와 예외적인 취급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없어졌을 인간이었다. 정상적으로 태어났다 해도 14번째 왕녀였으므로 나중에 여왕이 된 언니중 하나에게 죽지 않기 위해 따로 나가 살 길을 모색해야 할 판에, 불길한 아이인 레첸은 더욱 암담한 처지였다. 우투 족의 14번째 왕녀란 있으니만 못한 자리였다. 사람들은 1번째 왕녀는 몰라도 14번째 왕녀는 알았다. 모든 사람이 알았고 모든 사람이 동정했으며 모든 사람이 두려워했고 모든 사람이 뒤에서 수군댔다. 마치 없는 사람을 놓고 하듯이. 마치 죽은 사람을 놓고 하듯이. 그러나 레첸은 살아 있었다.

  레첸은 우투족의 왕녀였다. 그러나 빌어먹는 거지보다 천하고 웃음과 몸을 파는 창녀보다 더 험하게 살아야 했다. 레첸은 우투족의 14번째 왕녀였다.
  14는 레첸으로 인해 저주받은 숫자였다.



  레첸이 열다섯 살 먹던 해, 우투족 주위를 맴돌면서 불안감만 조성하던 눔 사이칼의 마귀들이 우투족 마을에 본격적으로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언뜻 보기에 그들이 요구하는 내용은 별것 아니었다. 그들은 용의 비늘을 찾아오라고 했다. 그것만 가져오면 우투족은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소문이 온 마을에 퍼졌다. 마을 사람들은 술렁거렸지만 누구도 그 이상 알지 못했고, 레첸 또한 그랬다.

  어느 날 여왕이 레첸을 불렀다. 레첸은 평소의 개인적인 부름을 상상하고 갔다가 죽 늘어선 왕녀들과 신하들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그들의 한가운데에는 인간에 가까운 형상을 취하고 있으나, 그 눈이 흰자위가 없이 까맣고 쭉 째진 존재가 서 있었다. 눔 사이칼의 수하 중에서 높은 자일수록 인간에 가까운 형상을 띠었단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레첸은 왜 저들이 다 물러서 있고, 자신만이 여왕 정면에 무릎 꿇는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자연스럽지 않은 현상을 대할 때면 누구나 그렇듯 무릎에 힘을 주고 어깨를 굳혔다.

  '어떤 결정을 내린 것인가. 이제사 나를 내몰기로 한 건가?'

  여왕의 목소리가 들려 그 목소리에 따라 고개를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레첸에게 꽂혔다. 그들의 눈빛은 제각각 다양했으나 레첸은 그들 모두에게서 공통적으로 동정을 느낀 것 같았다. 어리둥절한 일이었다. 내쫓을 때가 되니까 씨앗조차 싹트지 않을 듯하던 동정심이 갑자기 만개하는 걸까?
  레첸의 눈빛에 화답하듯 여왕이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이미 짐작했겠지만, 이분은 북쪽에서 온 손님이시다. 우리에게 용의 비늘을 찾아달라는 청탁을 하러 오셨다."

  통상적으로 '북쪽에서 온 손님'은, 눔 사이칼에게서 온 전령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레첸은 이미 그 형상을 보고 짐작했던 바였고, 용의 비늘에 대한 얘기도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오히려 여왕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미 짐작했겠지만...'이라는 단서를 달아 믿음을 표시한 것이, 레첸에게는 가벼운 충격이었다. 레첸은 호기심과 의문을 담아 여왕을 올려다보았다.

  "하오나 어째서 부족한 저를 청하시는지요."
  "북쪽에 거한 분이 조건을 말했고, 우리는 그대가 그 조건에 가장 알맞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습니까. 그래서 저에게 명령을 내리시면 전 가기 싫어도 가야 하는 것이겠지요?"

  사람들이 분노로 술렁댔다. 레첸은 이상한 쾌감을 느꼈다. 레첸은 이제까지 무엇을 하더라도 거기 늘어선 이들을 건드릴 수 없었다. 그들은 레첸과는 다른 하늘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비록 레첸의 자매일지라도. 레첸이 그들에 대해 욕을 한다고 해서 그들이 레첸을 욕보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안 보이는 곳에서 누군가가 다리를 부러뜨려놓고 가거나, 레첸이 받은 저주에 대한 소문이 불길처럼 솟거나 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몰려 앉아서 레첸의 반응 한 마디 한 마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위신을 세우려고 입들은 꾹 다물었지만, 분노로 위장했지만 그들이 느끼는 감정의 본질은 두려움이었다. 자신들이 선택받는 것이, 선택받아 용의 비늘을 찾으러 나서게 되는 것이 너무나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저렇듯 분노하면서도 레첸의 반응에 마음을 졸이는 터이다.
  레첸은 미소를 지었다. 목소리는 높고도 낭랑했다.

  "만일 제가 명을 받아 용의 비늘을 찾아온다면 저에게 어떤 약속을 해 주실 수 있습니까?"
  "무엇을 원하는가, 그대는."

  여왕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점점 더 악의에 차서 높아져 가는 목소리 중에서 여왕의 목소리만이 한결같이 부드러웠다. 레첸은 자신의 어머니이지만, 자신을 가장 사랑해준 사람이지만 자신을 낳았기에 미워했던 이를 바라보았다. 그 옆에 늘어선 이들은 레첸을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 레첸은 그들의 그런 무시가, 증오가 모두 질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서 여왕을 미워하기도 했다.

  "저의 자리를 원합니다."
  "무슨 뜻인가?"
  "저의 이름, 저의 삶, 제가 이룰 가족. 모두가 이 부족 안에서 온전히 자리잡기를 바랍니다. 제가 용의 비늘을 찾아서 돌아왔을 때, 그때부터 저는 이 부족의 온전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생각하고 싶습니다. 지금처럼 금기의 존재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전 인간이고 싶습니다. 이 부족의 일원이고 싶습니다. 당당한 부족의 사람으로서 여기에서 살고 가정을 꾸리고 싶습니다. 전...!"

  레첸은 느릿느릿, 협상을 하듯 말을 시작했다가 감정이 북받쳐 올라서 점점 더 말을 빨리 쏟아내었다. 울컥울컥 배꼽 아래에서부터 멍울 같은 것이 식도와 기도를 타고 올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레첸은 그것이 입과 코를 지나 뇌에 미치기 전에 말을 끊었다. 무자비한 자들. 레첸의 앞에 늘어선 이들은 레첸이 이제껏 어떤 심정으로 살아왔는지, 지금 어떤 감정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에는 관심이 없었고, 애써 레첸의 입장이 되어 알아 주기는커녕 그렇게 할 마음조차 먹을 이들이 아니었다. 레첸은 이제 그들과 같은 눈으로 그들을 마주보며 말했다.

  "그 약속을 해주지 않으시면, 그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을 철저히 해 주지 않으시면 떠나지 않겠습니다. 이제껏 했던 것처럼 겁을 주셔도 소용없습니다. 저를 버러지로 여기는 인간들을 위해 떠나느니 그냥 여기서 죽는 게 거리낄 게 없겠습니다."

  여왕은 동의를 구하듯이 레첸의 자매와 신하들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누구도 나서서 이의를 제기하지는 못했다. 레첸이 예상했던 대로 여왕은 자비로운 표정으로 레첸의 간원을 허하였다.

  레첸은 그들이 왜 이 일을 한사코 레첸에게 맡기려 드는지 알고 있었다. 그만큼 다시 돌아오기 힘든 위험한 일이라는 것은 비굴한 그들의 표정에서 이미 눈치 챈 터였다. 그러므로 레첸은 이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었다. 이 기회를 결코 실패로 몰고 가지 않을 것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레첸은 위험한 임무를 받아들였고, 눔 사이칼의 전령은 그것을 확인하고 떠나갔으며, 며칠간은 마을이 축제 분위기였다. 골치 아픈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였으므로 모두가 마음이 넉넉해졌다. 정말로 레첸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능히 레첸을 그들 틈에 끼워줄 것 같았다.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러나 축제의 끝에 레첸이 가는 날, 그들은 암묵적으로 성대한 환송식을 거행해주었다. 앞으로 있을 인생의 기념식과 장례식까지 모두 합한 것인 만큼 무척이나 성대한 환송식이었다.


2


  우투 족의 문헌에서 레첸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난다. 그나마도 레첸이 받았다는 저주와, 용의 비늘이라는 짐을 떠맡고 떠난 이야기만이 잠시 언급될 뿐이다. 레첸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용의 비늘을 요구했던 눔 사이칼 측으로부터도 그 뒤에 별 압력이 들어오지 않아, 우투 족은 겨우 멸망을 면하고 살아남았다. 우투 족의 사람들은 레첸이 아닌 누군가가 용의 비늘을 찾아다가 바쳤기에 잠잠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눔 사이칼이 이 작은 부족에게만 일을 맡기지는 않았을 거라는 가정 하에서였다. 그러나 눔 사이칼을 증오하는 이들은 의문을 표했다. 눔 사이칼이라면 바라던 바를 손에 넣고도,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능히 우투족을 학살할 위인이라고들 했다.

  우투 족의 레첸이라는 이야기를 아는 엘 라흐망 역시 눔 사이칼은 충분히 그럴 만한 위인이라는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작은 울타리 안에 갖혀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우투의 사람들과는 달리, 이리저리 떠돌면서 여러 이야기를 듣고, 믿을 만한 정보통을 가진 엘 라흐망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이 그저 그렇게 고요히 둥지 안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대륙에는 전쟁이 일어났다. 구르드를 본거지로 눔 사이칼이 시작한 그 전쟁 때문에 우투는 눔 사이칼의 고려 대상에 아예 들어있지도 않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레첸은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

  엘 라흐망은 노래를 부르는 듯한 운율로 그렇게 물었다. 같이 있던 모든 이들이 라흐망을 돌아보았다. 무심한 눈 속 깊은 곳에서 빛을 내뿜은 엘 제느리안부터 조숙한 눈망울의 아이라까지, 그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일행은 엘 라흐망을 보았고, 엘 라흐망의 시선을 따라갔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 표식과도 같은 말뚝 옆에서 일행을 기다리던 낯선 여자. 푸르고 긴 머리카락과 붉은 옷이 묘한 대비를 보이는 여자. 일행이, 약속한 자 대신 왜 당신이 서 있는 거냐고 물어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던 여자. 엘 라흐망의 시선 끝에는 그 여자가 있었다.

  여자는 웃었다. 엘 라흐망은 그 웃음의 흐름을 타는 것처럼 계속해서 운율을 띄우며 말했다.

  "당신의 이름은 레첸이 아니오. 하지만 난, 결국 레첸은 내 친구를 만났어야 했으리라는 걸 알아. 레첸이 구하는 용의 비늘을 줄 수 있는 이는 그밖에 없었으니까 말이오."
  "레첸은 죽었습니다."

  여자는 가벼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일행은 놀랐다. 그것은 그들이 처음으로 듣는 그 여자의 목소리였다. 외모로는 나이를 짐작하기가 몹시 어려웠는데, 목소리 또한 그러했다. 충분히 성숙한 여성의 목소리이되, 소년과 같은 거친음이 섞여나왔다. 일행의 놀란 듯한 눈에도 아랑곳않고 여자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엘 라흐망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 라흐망도 마찬가지였다.

  "부디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기 바라오. 그러면 자연히 내 친구의 행방도 알 수 있을 테지요."

  여자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곧 결심한 듯, 일행을 어딘가로 인도했다. 여자는 일행을 기다리기 위해 그 황무지에서 많은 시간을 소비했던 듯, 바람을 피할 작은 거처까지 마련해두고 있었다. 땅을 아래로 파서 반지하처럼 만든 굴이었는데, 비좁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엘 라흐망과 엘 제느리안, 아시자르, 에리사, 아이라, 글라시오르 경까지 모두 6명이 구겨앉을 수 있었다. 어린 안타비야와 아이라는 엘 라흐망과 엘 제느리안의 무릎에 앉히는 식으로. 모두 불편하게나마 자리를 잡자, 여자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레첸과, 용의 비늘과, 라흐망의 친구의 이야기를.


3


  처음에 레첸은 별 목표도 없이 마음껏, 아무 데나 쏘다녔다. 우투가 있던 곳이 세계의 동쪽 대륙 타르나-그라드, 그 중에서도 가장 동쪽에 치우쳐 있어, 아무 데나라고는 해도 서쪽으로밖에는 갈 길이 없었다. 레첸은 사람들이 모이는 주점에 갔고, 남장을 하고 있어 영락없는 소년으로 보였기에 술을 얻어마시진 못했지만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마법의 섬 리온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 섬의 마법학교에 가보고 싶다는 소망도 품어보았고, 어딘가 다른 대륙으로 가려다가 폭풍이 밀어닥치는 계절이 되어 포기하기도 했다. 노자돈은 충분했다. 레첸은 자랑삼아 그것을 흔들고 다니지 않으려고 어린 마음에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러나 레첸은 어차피 사람의 손을 많이 타고 자란 티가 나서, 별 위협을 받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람에게 신물이 났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사람들이 어떤 존재인지 치사하고 조잡한 면을 잘 알아서, 험한 세상에도 금세 영악하게 적응을 해갔다.

  그 영악한 적응 속에 깨달은 것은, 이상하게도 방랑 생활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정착할 곳이 없이 떠돌아다니는 자들의 생활이 어떤 것인지, 그들과 자신이 같은 부류라고 생각할 때 얼마나 가슴이 뻥 뚫리는지. 레첸은 그런 것부터 알아채버렸다. 그리고 자유로운 방랑을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정당한 정착을 위해 용의 비늘을 찾아나서는 일에 착수했다.

  우선 레첸은 용에 관한 정보를 가진 사람을 찾았다. 이렇게 저렇게 정보를 찾는 신출내기 모험자들 틈에 끼어서, 그들에게 돈을 약간 보태주면서 정보를 샀다. 레첸이 원하는 사람과 직접 만남을 주선받기까지 꽤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한 지방 정보 길드에서 중앙 길드와 접촉을 하고, 그 중앙 길드에서 추천자 리스트를 받고, 그 리스트 중 연락이 되는 사람들을 찾은 후, 그 중 가장 나은 사람을 물어물어 골랐다. 그리고도 그 사람은 낯선 사람과 처음부터 만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친구라는 사람, 그의 상관이라는 사람, 그의 애인이라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또 다시 진을 빼야 했다. 그리고 드디어 약속을 했다.


  약속장소는 야외 개방형 여인숙인 '이슈나'였다.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표지로 그 쪽에서는, 이슈나의 야외식당에서 이슈나의 특산독주인 '이슈나'를 시켜놓고 옆에 큰 잔 두 개를 엎어놓으라고 했다. 시간이 되면 그것을 알아보고 레첸이 있는 식탁에 앉은 후, 암호를 교환하는 절차까지 마치고서야 레첸이 알아보고자 하는 정보에 대해서 들어보는 것이다. 정보 여하에 따라 가격을 결정하거나 거절한다. 가장 유명한 정보 전문가라고는 하나, 너무 엄중한 경계가 아닌가 하는 의문과 함께 불쾌감이 들었다.

  '이슈나'를 달라는 말에, 여인숙 여주인의 얼굴에 사근사근한 굴종이 내려앉았다. 매일매일의 때묻은 일상과 분주한 손길 속에 유일하게 여주인의 귀에 향내나게 들리는 이름이 그 귀한 술인 듯했다. 여주인은 이슈나는 조금 더 있다가 가져올 것이라고 하며, 재빨리 귀빈에게 거한 상을 내왔다. 그 상차림과 이슈나를 주문했다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잠시 레첸에게 몰렸다가 떠났다. 레첸은 잠시 불편한 마음에 자세를 바꾸었다. 시선이 한꺼번에 몰렸다가 떠난다는 것은 이미 모두의 주의가 레첸에게 쏠려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면서도 무관심을 가장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레첸은 그것을 우투에서 지긋지긋하도록 겪었다. 레첸은 몸을 사리듯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다 보는 데에서 보자는 건가. 그렇게 비밀주의였던 주제에."

  레첸은 우투에 다시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본시 사람이란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하는 존재가 아니므로 같은 곳을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기도 하는 법이다. 그러나 우투에서는 레첸과 눈을 마주치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레첸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레첸이 눈을 둘 곳을 알아 아예 거기로부터 눈을 돌리고 관심을 거두었다. 레첸은 그 모멸감을 생각하며 잠시 막연한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이슈나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있소?"

  낮고 쉬어빠진 목소리로 그렇게 말을 걸며 레첸의 맞은편에 앉는 이가 있었다. 레첸은 그제서야 축축한 수렁에서 빠져나와 거칠게 이슈나의 병을 잡았다. 레첸이 수렁에 반신을 담그고 있을 때 여주인이 놓고 간 듯했다. 레첸의 기억에는 병이 놓이는 소리도, 그 순간의 미세한 떨림도, 병과 잔끼리 가볍게 부딪치는 맑은 소리도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의문 따위는 들지 않았다. 본능처럼 몸은 연습해왔던 동작을 따랐다. 이슈나를 잔에 따라 오른손으로 돌리면서 혀를 움직여 약속된 말을 뱉었다.

  "알지 못해도 가치있는 것이 있는 법이오. 이 향기와 같은 것."

  "향기는 그냥 만들어지는 법이 아니요."

  "동쪽 멀리에서부터, 구름이 닿지 않는 곳에서부터 왔으니 지금은 그저 향기를 즐기고 싶을 뿐. 그러나 이야기는 들으리다. 이야기가 곁들여진 술처럼 향기로운 것은 없느니."

  기계적으로 말을 끝맺고 나서 레첸은 새끼손가락으로 이슈나를 찍어 식탁 위에 둥그런 모양을 그렸다. 거기까지가 약속된 절차였다. 이제 레첸의 손에는 의무를 끝낸 나른함이 내려앉았고, 맞은 편에 앉은 이의 입가에도 슬며시 미소가 어렸다. 이제 서로를 확인했으므로 정말로 원하는 것을 말해야 할 차례다. 레첸은 의뢰하려는 정보를, 맞은 편에 앉은 이는 가격을.

  입을 열려는 찰라였다. 이슈나 구석 자리에 앉아있던 한 사람이 우아한 선을 그리며 일어나 레첸의 자리 쪽으로 걸어왔다. 그 일어나는 동작이 시끄럽지도 않았고, 다가오는 발걸음이 의식적이지도 않았건만 레첸과 정보 전문가는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레첸은 정보 전문가의 얼굴에 땀이 맺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땀방울이 떨어져 미처 식탁에 닿기도 전에 그 사람은 레첸을 스쳐지나 정보 전문가에게 접근했다.

  그 순간, 시공간이 멈췄다.

  부유하던 흙먼지들이 점점이 고정되었고 식탁으로 떨어지던 땀방울이 공중에서 영글었다. 사람들의 손길이 부자연스러운 곳에서 멈추었고, 모든 것이 퇴색한 듯한 느낌을 주는 가운데 한 사람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푸르고 긴 머리카락을 가진 이였다. 레첸은 생전 처음 보는 그런 장신구들을 온 몸에 주렁주렁 달고 있었는데 모두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어두운 푸른 색의 망토와 신발까지 모든 것이 푸른 한 줄기 빛과 같았다.
  그 희고 냉정하도록 푸른 빛은 소리없는 동작으로 정보 전문가를 내리쳤다. 종이가 찢어지는 듯한 메마른 소리가 났다. 멈춰있는 시공간이기에 붉은 피가 확 뿜어져나오지 않고 더디게 옷을 물들일 뿐이었다. 천천히. 천천히.

  "아...아..."

  눈이 따끔거리도록 크게 뜨고 있는데, 눈 앞에 보이는 광경은 더디게도 변한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다. 레첸은 목에서 무언가 막힌 듯 마음대로 성대가 움직여주지 않음을 깨달았다. 벙어리 마냥 자신이 듣지도 못할 소리를 꺽꺽대면서 더욱 현실이 눈 앞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푸른 빛과 같은 이가 흐릿하게 눈에 들어왔으나 점점 더 형태없이 뭉그러들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돌아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이미 시야가 푸른 빛과 회색으로 소용돌이치며 섞여버려, 정말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레첸은 필사적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보이나?"

  "후욱, 후욱."

  "시공간을 멈췄는데도 나를 보다니."

  툭툭한 손길이 레첸의 어깨에 얹혔다. 그러자 눈이 뚫리고 폐에서 돌이 빠져나간 듯한 기분이 되었다. 레첸은 아까와는 반대의 이유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손길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희고 단정한 얼굴이 너무나도 태연한 표정으로 레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시 눈을 돌려 정보 전문가를 보았다. 어깨에서부터 길게 꼬리를 펼친 뱀처럼 상처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는 죽었다.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 저 상처는 화산이 될 것이다. 레첸은 비틀거렸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도대체 무슨 인연이 있어 바로 이 순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어째서 그토록 수고하고 수고한 끝에 이렇게도 어이없이 모든 일이 무위로 돌아가는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하는가? 다시 또 이런 일이 벌어지지 말란 보장이 어디에 있겠는가? 처음이 이랬던 것처럼 계속해서 이렇게 실패하다가 돌아가지 못할 것인가?

  "왜!"

  갑자기 분노가 일어났다. 레첸은 자신에게서 등을 돌려 떠나가는 푸른 빛에 몸을 던졌다. 푸른 빛을 가진 그 사람은 레첸의 몸무게와 날아가는 힘을 그대로 떠안고 땅바닥에 처박혔다. 레첸은 흥분하여 그에게 마구 주먹을 퍼부었다.

  "왜! 왜 방해하는 거야! 갑자기 나타나서! 왜! 왜 하필 지금!!"

  레첸의 밑에 깔려서 주먹으로 맞으면서도 그는 좀처럼 입을 열 줄 몰랐다. 변명을 한다거나, 레첸의 주먹을 막는다거나 하는 몸짓도 없었다. 그래서 악이 북받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레첸도 그 고요함에 손을 멈추게 되었다. 그는 여전히 태연하고도 정적인 눈빛으로 레첸을 보고 있어, 그 눈길로 레첸의 열기를 식혀버릴 것 같았다. 그의 눈은 선명하고 밝고 차가운 푸른 빛이었다. 레첸의 주먹 세례가 멎자 오히려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이럴 때가 아닐 텐데."

  "무슨 소리요?!"

  레첸은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러나 이미 분노로 얼룩진 흥분은 가라앉은 상태였다. 레첸은 그에게 답하면서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음을 눈치챘다. 흙먼지는 다시 자유로이 춤추기 시작했고, 정보 전문가의 몸을 관통하는 뱀무늬에서 피가 높이 치솟았다. 사람들의 주의가 몰려 있었던 만큼 발견도 빨랐다. 사람들은 살해당한 이 옆에서 한덩어리로 얽혀 있는 레첸과 파란 사내를 보았다!

  "살인이다!"

  "저들! 저들을 잡아!"

  잠시 멈춰있었던 만큼 사람들의 움직임이 더더욱 어지러웠다. 레첸은 정보 전문가의 몸이 천천히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그의 몸에서는 새로운 뱀이 튀어나온 것처럼 아직도 피가 솟고 있었다. 너무 급작스런 움직임에 의자가 뒤로 넘어가는 것도 모르고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벌떡벌떡 일어났다. 한 사람이 누군가를 부르러인지 밖으로 달려갔다. 음식을 내오고 있던 여주인이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검을 빼든 거대한 남자가 뛰어왔다. 그의 발걸음이 땅을 울렸다. 두두두두. 그 박자에 맞추어 땅이 흔들렸고 시야가 흔들렸다. 두꺼운 탁자가 하늘로 솟았다. 레첸의 밑에 깔려 있던 푸른 빛의 사내가 탁자를 굴려 거대한 남자의 접근을 막은 것이었다. 그의 손이 주욱 늘어난 듯 레첸에게로 뻗어왔다.

  다음 순간, 밖으로 뛰어갔던 사람이 자경대를 끌고 오고, 거대한 남자가 탁자를 양단하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딛고, 여주인이 엎지른 쟁반을 수습하며 용감히 그릇을 들고 살인자들에게 돌진한 그 순간, 레첸과 파란 사내가 그들의 한가운데에서 사라졌다.


4


  이슈나에 있던 모든 이가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만큼은 놀라지 않았다. 레첸은 허우적대며 달려드는 이들의 팔다리가 갑자기 멈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의 초점을 다시 온전히 모으자 그렇게 착각했던 것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레첸은 바람이 부는 숲 한가운데에 있었다. 푸른 나뭇잎이 날리는 속에 그 푸른 빛을 가진 이가 앉아, 레첸을 마주보고 있었다.

  처음엔 그의 목을 졸라 다시 한 번 누른 후에 자초지종을 들을까 생각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가 끼어듦으로써 레첸의 첫 발걸음이 비틀려버렸기에. 그러나 섣불리 덤빌 수 없었다. 레첸은 우투에서 경험했던 남자의 우악스러운 근력을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아까 그가 레첸의 육탄공격에 넘어간 것은 갑작스런 습격 덕일 수도 있었고, 알면서 그대로 받아준 탓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레첸은 그대로 거리를 유지한 채 오직 눈과 꼭 쥔 주먹으로만 그에 대한 증오를 표시했다. 그의 푸른 눈에 희미하게 미소가 스쳤다.

  "그는 내 원수였다."

  그가 싱긋 웃었다. 온 몸을 치장하고 있는 푸른빛이 무색할 정도로 새파란 눈을 빛내며 잔인하게 웃었다. 그 한 마디면 모든 게 다 설명이 될 거라는 듯이.

  "그래서 그렇게 경계를 하고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던 거다, 용의 아이여. 내가 겁나서, 나에게서 벗어나보려고. 하지만 어림도 없는 짓거리였지."

  레첸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의 목소리는 싸늘하면서도 매끄러웠다. 달콤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내용은 무엇에 놀라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종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필 레첸이 골랐던 사람이 이 사람의 원수였던 것부터가 놀랄 일이었는데, 그가 어떻게 그 모든 것을 알고 쫓아와 그런 이상한 방식으로 정보 전문가를 살해할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레첸의 존재에 커다란 그늘을 던져주는 호칭, 용의 아이. 레첸은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뱀의 혓바닥을 느꼈다. 둘로 갈라져 한 쪽은 차갑고 한 쪽은 뜨거운 혓바닥을.

  결국, 레첸은 울부짖었다.

  "왜 날 이상하게 부르는 것이냐!! 넌 내 일을 망쳤어! 지금부터 나중까지 모든 일을 망친 거나 같아!! 어째서, 어째서 내!"

  감정은 어지러이 말려 불같은 분노의 혓바닥이 지나가면 머리 속이 들끓었다가도 얼음같은 자괴의 혓바닥이 지나가면 온 몸이 가라앉았다. 레첸은 자신이 하는 말이 억지라는 것을 알았다. 그 정보 전문가의 죽음이 슬프거나 충격적인 것이 아니기에 충격을 무마하려는 투정도 아니었다. 그렇게 애를 썼다고는 해도 이번 일은 첫 걸음 중에서도 첫 걸음일 뿐, 애써 쌓아놓은 것이 무너졌다고 말할 만한 계제도 못 되었다. 레첸을 이상한 호칭으로 부르는 것은 캐어물어 이유를 알아내야 할 일이지, 그리 부르지 말라고 떼쓸 일이 아니었다. 레첸은 그 모든 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냉정하게 침착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불합리하더라도 분노를 받아줄 대상이, 말이 되지도 않는 투정을 넘겨줄 사람이 필요했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었을 때, 그런 대상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레첸은 기세좋게 울부짖다가 문득 힘을 잃고 쪼그려앉았다. 그리고 잠꼬대처럼 뜻이 연결되지 않는 단어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끝도 없는 웅얼거림. 더 크게 말하면 안 된다. 누군가 들으면, 누군가 일러바치면 더한 보복을 받을 뿐이니까. 그래서 레첸은 이름을 갖고 싶었다. 레첸이라는 저주받은 이름 말고 다른 이름이 필요했다. 어떤 이름이라도, 심지어 거렁뱅이의 이름이라도 그 이름에 합당한 자리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이름이라도 상관없었다. 우투의 이름이기만 하다면.

  시간이 멈춘 가운데 그랬던 것처럼 툭툭한 손길이 레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마찬가지로 툭툭하지만 조금은 따뜻한 기운이 서린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네가 용에 대한 정보 전문가를 찾아 풋내기들 틈에 섞여들었을 때, 나도 그 안에 있었다. 그 이후로 네가 너무나 열심히 그 놈을 찾아, 그 놈을 세상으로 끌어들였기에 내 복수가 가능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 그래서 내가 무언가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

  그는 더듬거리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지만, 단어와 단어 사이에 왠지 숨소리처럼 들어가는 유예가 있었다. 그러나 레첸의 냉정한 대답이 그것을 잘라버렸다.

  "도와주고 싶다고? 내가 왜 그런 말에 넘어가야 하나?"

  "이 손을 잡지 않으면 너에게 남은 길은 없으니까. 넌 나와 같이 사라졌으니 지금쯤 살인범으로 낙인이 찍혔을 게다."

  그 목소리에 장난기가 덧입혀졌다. 싸늘하면서도, 심각하지 않다는 걸 알아들을 수 있는 풍부한 어조가 있었다. 아무 죄없는 레첸이 누명을 쓴 것은 물론이고 자신이 살인범으로 쫓겨다녀야 한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혹은 의식하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레첸은 아직도 눈물이 남아 있어 끈적거리는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좋아, 그렇다면 당신이 날 안내해주겠다는 건가?"

  "복수도 했으니 한동안은 충분히. 무엇을 찾으려고 하나? 아, 내 이름은 시헬이라고 하네."

  갑자기 친근하게 악수를 청해오는 시헬에게 응하면서 레첸은 차가이 말했다.

  "난 레첸. 용의 비늘을 찾으려고 하지."

  기세좋게 흔들던 시헬의 손이 잠시 멈췄다.

  "탈피해서 성체가 된 직후에 턱 밑에서 빛나는 비늘. 그게 필요해. 정말로 도와줄 수 있는 거겠지?"

  시헬은 처음으로 그 고요한 눈에 놀라움이라는 감정을 담고 있었다. 그것이 찬탄일지, 혹은 어이없음일지는 단번에 알 수 없었다. 시헬의 눈 또한 목소리처럼 너무나 풍부하고 복합적이어서 그 성질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없었다.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후 시헬 스스로가 그 놀라움이 어떤 것이었는지 정리해 주었다. 그는 냉소적인 말투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미쳤군?"


5


  눔 사이칼이 가져오라 한 용의 비늘은 그 자체로 용의 심장과도 같은 가치를 갖는 물건이었다. 용은 뱀과 같이 여러 번 허물을 벗으면서 성장해가는데, 마지막 허물을 벗기 전까지는 그것이 어떤 모양을 취할지 아무도 알 수 없으며, 그 이전에는 아무도 그것이 용인지 알아차릴 수 없다. 세계의 사방을 지키고 있는 주요한 네 가지 색깔- 백, 흑, 적, 청-의 용족은 특히 종족마다 그 변모의 단계가 달랐다. 그 새끼가 세간에 노출되어 어렸을 때부터 용의 면모를 가진다는 것이 밝혀진 흑룡을 제외하면, 나머지 용족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성체가 되고 용으로서의 자각을 하는지 밝혀진 바가 없었다. 다만 성체가 막 되었을 때, 그 이전의 모든 허물에서 얻은 지각과 아름다움이 턱 밑에 있는 비늘로 형상화된다는 전설만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 비늘이 서서히 몸 안으로 들어가며 완전히 사라졌을 때에야 진정으로 범접할 수 없는 성체가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막 탈피를 했을 때 아직 여린 몸에서 번쩍이는 그 비늘은 떼어낼 수도 있고, 독립적인 가치를 가진 보물로서 추앙받았다.

  다만 그 비늘을 떼어내려 할 때 걸리는 점이 있다면, 시간적으로 절묘히 들어맞아야 한다는 것 외에도 용의 생명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완전히 몸 속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그 비늘을 떼어낸다는 것은, 용의 정신적 부분을 그만큼 파괴한다는 뜻이 된다. 하물며 막 탈피를 끝냈을 때라면 더욱 위험하다. 그래서 용은 여물지도 못한 몸을 이끌고 필사적으로 막을 것이다. 용의 비늘을 찾으려 하는 자는 용의 목숨을 건 공격을 견뎌내야 한다.

  우투의 가신들은 환송회가 끝나고 나서야 레첸에게 그런 것들을 가르쳐주었다. 그것을 미리 알아 거절할까 하는 두려움에서 그랬던 것이겠지만, 그건 또한 레첸은 가서 죽어도 상관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레첸은 성대한 환송회 끝자락에서 다시 한 번 고향에 대한 환멸을 느꼈었다. 그러나 그래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이를 악물었다. 무술이고 검술이고 궁술이고 어느 하나 내세울 수 있게 잘하는 것도 없이 그저 굴러먹은 눈치밖에 없으면서 그리 모진 마음을 먹었었다.

  레첸의 눈빛과 독한 마음에 질린 시헬은 결국 레첸을 따라다니며 도와주기로 했다. 언제까지가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때문에 살인범으로 몰린 레첸이 혼자 돌아다닐 정도로 세상이 녹록치는 않다 생각한 듯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행이었다. 레첸과 시헬은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다. 공백상태인 청룡은 놔두고 우선 북쪽부터 가보고, 그 다음에는 어디를 가는 게 좋을지 의논했다. 가끔 시헬이 레첸에게 간단한 호신술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말라빠져서 독기만 남아 있는 몸에 체력을 붙여준답시고 아침마다 호된 운동을 시켰다. 시간이 남을 때에는 마법도 하나씩 가르쳤다. 여행길이 지루하고 끝도 없이 이어질 때에는 레첸이 시헬의 온통 푸른 장신구에 시비를 걸며 그의 색채감각에 대해서 장황한 논설을 펼쳤다. 그러면 시헬 또한 판에 박힌 듯한 대꾸를 했다. 다 이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며, 남 좋으라고 입는 게 아니라고. 밤에는 으레 시헬이 먼저 망을 봤다. 이상적이다 싶을 정도로 사이가 좋은 일행이었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레첸과 시헬은 서로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시헬은 그런 위험한 물건을 찾아가면서까지 얻고 싶은 게 있는가 궁금해했다. 그러나 레첸은 자신의 바람을 한 마디로 말할 자신이 없었기에, 남들이 비웃지 않게 말할 자신이 없었기에 그에 대한 대답을 거절했다. 바로 자신을 비웃었던 장본인들조차 이해하지 못한 것을, 제3자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레첸 또한 시헬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왜 레첸을 용의 아이라고 불렀는지, 그것이 진실이라면 어떻게 알아볼 수 있었는지. 한 번 물었던 적도 있었지만 시헬은 그냥 알아볼 수 있었다고 말하며 얼버무렸다. 레첸은 시헬이 자신만큼이나 말하고 싶지 않은 사연이 있는 모양이라고 추측했고, 자신이 대답을 하지 않는 입장에서 남의 대답을 촉구하진 못했다. 둘은 그렇게 다른 모든 것을 함께 했지만 특히 한 가지를 공유하고 있었다. 질문을 해도 답을 받지는 못한다는 확신. 그것이 해자처럼 그 둘을 둘러싸고 깊게 파여 있었다.

  서로에 대한 불신이 한 번 터져나온 적이 있었다. 흑룡을 찾아가서 아슬아슬하게 이즈보의 이빨을 피하면서 보고 나온 새끼들이 어리디 어려 아무래도 용의 비늘을 얻을 수는 없겠다고 체념하고 돌아올 적이었다. 거기에서 사막을 건너 적룡의 영역으로 건너가려고 했는데, 사막을 횡단할 동행자를 찾는 이가 있었다. 안내인처럼 돈을 주고, 사막을 건넌 다음에 돈을 더 주겠다고 하면서 그가 레첸과 시헬에게 접근해왔다. 그들이 건너가려 했던 사막은 그리 넓지 않았지만 왠지 직업 안내인들이나 사막의 초입에 있는 마을 사람들은 들어가길 꺼려했다. 레첸과 시헬은 여비가 떨어져가던 참이라 흔쾌히 승락했다.

  이상하게도 그는 처음 볼 때부터 레첸에게만 말을 걸어왔다. 족제비같은 인상의 남자였으므로 처음에는 그저 당연한 이성에의 추근거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레첸과만 붙어다니려 할 뿐 아니라, 시헬을 비정상적으로 두려워했다. 그 둘이 같이 있어서 의뢰를 같이 했을 뿐, 그와는 같은 자리에서 자고 싶지도, 먹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자연히 낮의 여행길에서도 레첸과 시헬은 떨어져서 걸어야 했고, 밤에도 시헬은 조금 떨어진 곳에 혼자 잠자리를 마련해야 했다. 레첸은 시헬의 눈에서 그를 죽여버릴 듯한 불만을 보았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이미 여행은 돌이킬 수 없었고, 함께 가는 이에게 맞추지 않으면 그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레첸은 기회를 봐서 시헬에게 참아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그렇게 달랠 기회조차 만들 수 없었다. 여행을 계속하면 할수록 시헬에 대한 기피와 과민반응이 심해졌다. 사막을 반도 넘게 횡단했을 때쯤에는 레첸도 시헬과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꽤 오래 전의 것이라 반추할 정도였다. 그는 지겹도록 말했다.

  "당신은 저 사람이 이상하지 않소, 응? 안 이상하냐고! 저렇게 파랗게 차려입은 것하며 저 눈매며. 내 장담하는데, 저 사람 인간이 아니요. 저 퍼런 눈으로 언젠가 밤에 숨어들어 우릴 찌를지 누가 아냔 말요!"

  사막의 광경은 계속해서 변한다지만, 레첸의 눈엔 그게 그것처럼 보였다. 모래 언덕이 계속해서 있었고, 물은 아끼기 위해 정해진 시간에만 먹을 수 있었다. 물을 마시는 시간만이 행복했으므로 이내 그 시간이 하루를 나누는 기준이 되었다. 그 나머지 시간에는 동행인의 시헬을 의심하는 말이 뜨거운 공기를 모두 메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경계 때문에 시헬과도 접촉을 못하게 되자 언젠가부터 조금씩 레첸의 마음에도 의심이 피어올랐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시헬이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계속 해왔다. 그러나 용의 아이라고 그때서야 부른 것이 이젠 마음에 걸렸다. 이미 그 이전에 풋내기 모험자들 틈에 끼어 정보를 찾을 때부터 보아왔다고 했으면서 왜 시간이 멈춘 가운데에서야 자신이 용의 아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아챘던 것일까? 평소에 묻고 싶었으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던 질문들, 지금은 질문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질문들이 마음 속에 회오리쳤고, 질문의 주인에게는 가지도 못한 채 다시 레첸의 마음 속에서 메아리쳤다. 한 번, 두 번. 그 과정이 계속되면서 시헬에 대한 의심은 점점 더 먼 곳으로 뻗어갔다.

  시헬은 어떤 존재인가. 레첸이 강하게 밀어붙였다고는 하나 어째서 그렇게 위험한 일에 선선히 도움을 주는가. 어째서 정보 전문가에 불과한 사람이 그의 원수였던 것인가. 레첸과 여행하면서부터는 그저 실력이 조금 있는 마법사처럼 행세하지만, 그를 죽일 때의 그 마법은 그 정도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시간을 멈출 수 있는 존재란 도대체......

  메아리가 되돌아오면서 시헬이란 존재가 레첸의 마음 속에서 해체되고 재조립되었다.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으나 평소에는 숨기고 다니는 자. 강대하면서도 하잘 것 없는 레첸의 말을 못 이겨 이런 위험한 여행에 따라다니는 자. 레첸의 출생의 비밀을 쥐고 있으면서도 대답해주지 않고 있는 자. 그렇다면 시헬은 레첸을 도와준다는 명목 하에 감시하고 있는 자는 아닌가? 눔 사이칼측에서 보낸 사람일 수도 있다. 어떻게 처음에 그렇게 우연히 고른 이가 시헬의 원수일 수 있겠는가,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눔 사이칼 측에서 용의 비늘을 찾는 걸 돕는 동시에 감시하라고 붙여놓은 마귀일 수도 있다. 인간의 형상을, 그것도 아름다운 형상을 띠고 있는 것을 보면 상당한 직책을 가진 마귀일 것이다. 우투에 전령으로 온 마귀조차 눈동자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시헬은 점점 더 두려운 존재처럼 변해갔다. 레첸은 이제 시헬이 자신을 돌아보는 눈길이 모두 감시의 눈길 같아 등줄기가 서늘했다. 사막을 다 횡단하고 나서 다시 둘이 될 날이 두려워졌다. 동행인은 그런 레첸의 변화를 눈치챘는지 전보다 더 기세좋게 '시헬 음모론'을 펼쳤다. 이제 하루만 가면 사막을 벗어날 수 있으므로 그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이다. 단 셋만이 있을 때에 해치우지 못한다면 얼마나 아까울까 고소하다고 했다. 레첸은 메마른 입술로 시헬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불만에 차 있으나 언제나 그렇듯이 보통 사람 이상의 침착함을 가지고 있는 시헬을.


  그날 밤은 습격하기 좋은 밤이었다. 허망한 사막 위에 둥그런 딸이 떠올랐다. 레첸은 왠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시헬에 대한 두려움과 동행인이 했던 말들이 얽히면서 달과 함께 둥글게 도는 것 같았다. 레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베개 대신으로 쓰고 있던 옷꾸러미에 얼굴을 묻었다. 지금까지 시헬은 동행인의 무례함을 계속해서 참아왔다. 그런 사람을, 그것도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을 이렇게 두려워해도 되는 것일까. 레첸은 그것이 너무나 마음에 걸려 뒤척뒤척거렸다. 그 때, 모래를 살며시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박.사박.사박.

  바람소리처럼 가벼웠지만 분명히 규칙적인 발걸음소리였다. 레첸은 놀란 토끼처럼 뛰어올라서 습격자에게 무방비로 노출될 생각은 없었다. 허리춤에 있던 단검을 살며시 한 손으로 옮겨쥐었다. 다행히 모로 누운 자세였고, 소리는 뒤에서 들렸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아무래도 습격에 통달하지 못한 자 같았다. 규칙적이던 발걸음이 점점 더 흐트러지면서 가까이쯤에서는 미끄러지는 소리까지 났다. 레첸은 습격을 하고자 하는 이가 서툴러서 그런 건지, 아니면 무언가 믿고 있는 게 있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저녁에 먹은 식량들은 모두 만들어져 있던 건조식량이라 무언가를 넣었다면 금방 표가 났을 터였다. 그렇다면 물? 물은 모두 한 물통에서 먹기 때문에 자신만 약의 효과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시헬은 가끔씩 레첸에게 자신의 물을 양보해왔고, 오늘 저녁에도 그러했다. 정말로 시헬인 것일까? 저 서투른 혹은 맘을 푹 놓은 발걸음이?

  그 때, 훅 하고 급히 들이쉬는 숨소리가 났다. 무언가 큰 동작을 하는 듯한 공기의 움직임이 있었다. 레첸은 되든 안 되든 왼쪽으로 구르고 보았다. 그리고 단검을 찌르려고 몸을 뒤집어 하늘 쪽으로 향했다. 달을 등진 꺼먼 실루엣이 보였다. 그리고 긴 머리. 동행인은 짧은 머리를 항상 단정하게 빗어넘겼었다. 레첸은 절망감에 눈을 감았다. 시헬이라면 당할 수 없다. 아니, 시헬이 맞다고 해도 어떻게 자신이 시헬을 찌를 수 있을까. 레첸은 그 절대절명의 순간에 그것을 깨달았다. 시헬이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단검을 쥔 손에 힘이 빠진다.

  "아아!"

  낮게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저 얼굴을 감싸고 말았다. 그 때, 날카로운 금속성의 파쇄음과 함께 시헬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나?"

  악몽처럼 왠지 부들부들거리며 손이 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레첸은 억지로 얼굴을 가린 손을 떼내어 위를 보았다. 자신의 위에 있는 것은 시헬이 맞았다. 그러나 왠지 조금 전과는 실루엣이 달라보였다. 레첸은 단검을 내던지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시헬..."

  "이 자가 너를 습격했다. 아무래도 급하게 막느라 죽여버린 것 같군. 어찌해야 하지?"

  레첸은 그 말에 눈이 확 뜨이는 듯했다. 레첸의 옆에 달을 등지고 시헬이 있었고, 시헬의 반대편에 동행인이 쓰러져 있었다. 긴 머리라고 착각했던 것은 그가 바람을 막기 위한 천을 머리에 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첸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언제나 불신감에 가득한 말을 하던 동행인의 눈이 어디에 머무르고 있었는지를. 시헬을 의심하는 말을 했지만, 사실 그는 계속해서 레첸과 시헬 모두를 의심의 눈으로 보고 있었다. 둘이 함께 있으면 그를 습격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한 사람을 언제나 떼어놨었다. 죽어서 쓰러져 있는 그의 얼굴은 불의의 습격을 받은 자보다 더 일그러져 있었다.

  그를 묻고 사막을 빠져나와 첫번째로 만난 마을에서 그들은 개선장군 대우를 받았다. 그 사막에서 서로 찔러죽이지 않고 나란히 살아나온 사람은 그들이 몇 십년만에 처음이라 했다. 간혹 가다 일행 모두를 찔러죽이고 혼자 살아남은 사람이 오기도 하는데, 그들 중 반은 거기까지 와서야 자신이 저지른 일을 깨닫고 미치거나 자살해버린다고 했다. 그들이 지나온 사막은 '의심의 늪'이란 뜻을 가진 트리케톤이었다.


  그 날 레첸과 시헬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서로를 보게 되었다. 레첸은 자신이 용의 비늘을 그렇게도 찾는 이유를 말해주었다. 이야기는 밤새 이어져 동이 터올 무렵에야 끝났다. 시헬은 그 이유를 다 듣고 나서 말했다.

  "난 네가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건지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돼. 조금만...조금만 기다려다오.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으니까."

  레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헬에게 기댔다. 그 새벽에 시헬은 레첸을 안았다. 레첸의 눈은 공허하고 몸은 뻣뻣했지만, 그 팔만은 시헬에게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시헬은 안쓰러운 눈으로  레첸의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었다. 그리고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자장가처럼 그 입맞춤과 함께 꿈도 없는 깊은 잠이 밀려들었다.


6


  용은 지정된 세력권을 지키는 신수이다. 바다의 수호신격으로, 세계의 사방은 용으로 보호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쪽은 흑룡의 세력권이다. 현대의 흑룡은 이즈보로, 북쪽 바다에 떠 있는 거대한 대륙 구르드의 영향을 받아 그 조상을 더럽히는 악명을 떨치고 있다. 서쪽은 적룡의 터전이었다. 마법섬 리온의 상징이기도 한 적룡은 현재 붉은 용왕 아디안과 짝을 이룬 베르질이 대를 잇고 있었다. 남쪽은 백룡이 차지하고 있었다. 현재는 노룡 헨트가 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쇠약하여 인간사에 깊이 간섭하고 있지는 않다. 사실 남쪽은 커다란 섬나라가 몇 개 있을 뿐 대륙이 아니어서 조용한 곳이었다. 그리고 동쪽은 예부터 청룡이 보호하고 있는 방위였으나 현재로서는 공백 상태였다.

  레첸과 시헬은 이미 흑룡과 적룡이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흑룡의 새끼는 너무 어려 첫번째 탈피를 했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였고, 적룡은 아직 한창 나이로 새끼가 없었다. 거기까지 알아내는 것조차 다른 사람들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용의 비늘을 찾으려 한다는 것을 들켰다면 레첸과 시헬 역시 진즉에 이즈보에게 갈기갈기 찢겼을 것이었다. 그러나 레첸과 시헬이 찾아가면 우선 용들은 다른 인간에게보다는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정말 레첸이 용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디안과 베르질을 만나고 나서 시헬은 남쪽으로 가는 배편을 알아보는 레첸을 말렸다. 백룡 헨트의 자식은 이미 성체이며 먼 곳으로 여행가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시 우투가 있는 타르나-그라드 대륙으로 돌아가는 배편을 잡았다.

  배에서 그는 해답을 자신이 쥐고 있는 질문을 던졌다.

  "왜 타르나-그라드에 청룡이 없는지 알고 있어?"

  레첸은 고개를 저었다. 험한 길을 지나며 세월이 흘러 이제 레첸도 어엿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영악했던 눈매는 여전하지만, 오히려 우투를 나올 때보다 더 편한 인상이 되어 있었다. 그 여행길이 아무리 험해도 한 사람에게 사랑받는 것이 우투에서 모두의 눈초리 안에 있던 것보다 편했던 것이다.

  "사실 청룡은 인간과 친근하게 지내는 편이었어, 예전에는. 정보 전문가라는 것들이 가장 만만하게 여기는 것 또한 청룡이었지. 청룡과 정말로 친근하게 지냈던 이들은 물론 만만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상냥함을 약함과 착각하는 어리석은 이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정말로 마음을 터놓고 지냈던 정보 전문가들 중 하나가 눔 사이칼과 손을 잡고 청룡의 심장을 갖다바쳤어. 청룡을 배신하고, 그의 믿음을 썩혀서. 청룡에겐 자신이 용인 줄도 모르는 후계자만이 있었지. 그래서 타르나-그라드에는 수호신이 없는 거야. 선대 용은 죽었고, 후계자는 성체가 되지 못했고. 그 후계자가 성체가 되는 날이 멀지 않았다."

  그리고 시헬은 레첸을 돌아보았다. 그 눈빛이 형형하여 처음 만났을 때를 연상시켰다. 레첸은 숨죽인 놀라움으로 그 눈빛을 마주했다.

  "거기로 가는 거다, 레첸."

  '용의 비늘을 찾으려 하는 자는 용의 목숨을 건 공격을 견뎌내야 한다.'

  새삼스럽게 레첸은 그것을 다시 생각해냈다. 예전에 들었을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말이었다. 그 공격의 대상이 자신일 때에는 불가사의한 자신감이 들었던 말이었다. 그러나 이제 시헬이 그 전면으로 나서자 알 수 없는 균열이 그 자신감 귀퉁이로 퍼져나갔다. 흔들리고 있는 것일까? 몇년 되지 않는 이 여행길이 환멸에 찬 15년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일까? 이젠 우투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 레첸은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시헬의 고향이라는 곳은 우투보다도 더 깊숙한 오지였다. 거대한 나무들이 빽빽히 들어찬 숲, 거기서도 더 들어가야 했다. 레첸은 시헬의 뒤를 따라 바삭바삭 소리나는 길을 걸었다. 떨어진 나뭇잎, 나뭇가지가 검고 축축한 흙 속에 반쯤 파묻혀 썩어가고 있었다. 오돌도돌한 나무 줄기 위로 복잡하게 얽힌 덩굴들이 드리워있고, 그 위에 축축한 숲의 냄새가 한 겹 덧붙어있었다. 바람이 불어 덩굴 사이를 헤쳐놓을 때마다 초록빛 가루 같은 것이 날렸다. 울창한 지붕을 뚫고 들어오는 몇 줄기 햇살에 노출되자, 그 가루들은 갑자기 금으로 변한 듯 반짝거렸다. 한 발 한 발 더 깊숙한 곳으로 발을 디딜수록 그 반짝거림의 각도가 변하더니 마침내는 온 숲이 푸른 안개에 침식된 것처럼 보이는 곳까지 오고 말았다. 레첸은 민감한 청각으로 시헬이 땅을 밟는 소리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푸른 안개가 짙어져 이제는 모든 나무가 푸르게 보이는 곳에 이르자 일부러 만든 듯한 갈림길이 나왔다. 이리저리 뿌리가 얽혀서 땅 위로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그 얽힌 모양 또한 묘하게 거미줄처럼 나름대로의 규칙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레첸은 그 울퉁불퉁한 모양을 껄끄럽게 피해갔다. 시헬이 걸음을 멈추더니 레첸을 돌아보았다.

  "난 이 이상은 들어가지 못한다. 여기부터는 용의 피를 이은 사람만이 갈 수 있다고 해."

  "그럼 여기서 내가 맞게 찾아간다면 난 정말로 용의 아이인 건가?"

  레첸은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보려고 가볍게 웃었다. 시헬도 마주 웃어 주었다.

  "여기서 어느 쪽으로 갈지는 네 느낌을 따라야 해. 네가 옳게 선택했다면 길 끝에는 폭포가 있을 거다. 청룡의 후계자는 그 폭포 뒤에서 사람들 눈을 피해 탈피를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다."

  "알았어. 내가 옳게 선택한다면, 그리고 전해내려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이 길이 여행의 마지막이 되겠군."

  "끝까지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사실 여기까지 와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너무나 감사해."

  레첸은 시헬을 가볍게 안았다. 시헬의 팔이 너무나 조여와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도와주지 못하는 불안함 때문이라 생각했다. 레첸은 어색하게, 그러나 애써 웃으며 시헬을 뒤로 하고 갈림길에 섰다.

  여전히 나무 뿌리는 얽힌 채 거미줄과 같은 규칙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레첸은 조금 전과는 무언가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오른쪽 길에 있던 무늬가 더더욱 빽빽해져 있었다. 레첸은 허리를 굽혀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그것만으로는 안되겠는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땅에 손을 짚었다. 심장고동소리처럼 규칙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레첸은 다시 일어났다. 나무 뿌리의 움직임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레첸은 갈림길의 축이 되는 커다란 나무 쪽으로 한 걸음 더 내딛었다. 그러자 공기 중에 잔물결과 같은 것이 일더니 온 숲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레첸은 침착하게 기다렸다. 빛의 파동이 숲전체로 퍼져나가더니 나무들 속으로 스며들어가기 시작했다. 푸르고 까맣게 죽어있었던 나무들이 금을 칠한 듯 빛났다. 레첸은 뒤를 돌아보고 시헬이 보이지 않음을 확인했다. 다른 차원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 차원에는 단 하나의 길만이 존재했다. 거미줄처럼 얽혀 돌출된 뿌리도, 축축하니 기분나쁘게 밟히는 나뭇잎도 없었다. 레첸은 자신을 환영하듯 활짝 열린 길을 당당히 걸어갔다. 마치 레첸이 걸어가는 길을 예비하기 위해 나무들이 뒤로 물러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간의 일이었다. 레첸은 뱀들이 우글대는 소굴을 지났다. 뱀들의 뒤에는 사자의 몸에 인간의 얼굴을 한 동물이 이를 드러내며 덤벼왔다. 레첸은 가지고 있던 긴 칼을 들었다. 그것의 이빨이 날카로이 레첸의 팔에 박혀왔다. 레첸은 물린 손에 박혀 있던 칼을 버렸다. 그리고 단검을 꺼내 자신과 마주 노려보고 있는 그 눈을 향해 박았다. 소름끼치는 비명소리가 났고, 팔이 너덜너덜해질 것 같은 큰 힘이 가해져왔다. 레첸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다시 한 손으로 눈에 꽂았던 단검을 뽑아 이마 한 가운데에 찔러넣었다. 그것이 앞다리를 허공에 내지르며 레첸을 공격하려고 하였지만, 다행히 빗나갔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아 전혀 원근감이 없는 모양이었다. 레첸은 진실의 말로 불을 불러내 손에 담았다. 그 손이 대단한 위력으로 괴물의 머리를 갈기자 레첸의 팔에 여전히 박혀 있는 아래턱을 제외한 머리 대부분이 날아가버렸다. 레첸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 아래턱까지 태워버렸다.

  그곳을 통과해가는 발걸음은 더욱 더 당당했다. 비록 한 팔에는 불, 한 팔에는 피를 내뿜으며 이질적인 붉은 색으로 무장했더라도. 조금 더 가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생각했을 때에야 레첸은 잠시 경계를 늦추며 팔을 지혈했다. 인간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빨 자국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쉴새없이 피가 흘러나왔다. 레첸은 옷을 찢어 팔을 질끈 묶었다.

  몇 차례 이상한 생물들이 더 나왔지만, 그전처럼 난폭한 것들은 없었다. 아무래도 용이 방어상 기르는 것이 아니라, 자생적으로 와서 사는 생물들인 모양이었다. 방어에는 하등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레첸에게 호의를 보이며 길을 가르쳐주는 생물까지 있었다. 어지러이 얽힌 길을 그 생물 말대로 따라가다가 간단히 갈 수 있는 길을 돌아갔다는 사실을 나중에 깨닫긴 했지만, 나름대로 상냥한 생물이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조금씩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굉장히 세찬 물살이 바위에 부딪치는 듯한 소리였다. 레첸은 길 끝에 폭포가 있다는 시헬의 말을 생각해내고 기뻐했다. 그러나 폭포는 예상보다 큰 규모였던 듯, 소리가 계속해서 가까워지는데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구부러진 모퉁이를 돌고 다시 내리막길을 종종걸음으로 내려갔다가 탑 속을 돌아 올라가는 계단처럼 생긴 덩굴로 이어졌다. 레첸은 힘을 줄 수 없는 한쪽 팔을 늘어뜨리고 나머지 한쪽 팔로만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아가며 그곳을 올랐다. 돌의 느낌이 아니었다. 갈림길에서 느꼈던 심장 고동 소리와 같은 것이 다시 발밑에서 느껴졌다. 그 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마침내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레첸은 환성을 지르고 말았다. 레첸이 밟아올라왔던 것은 한 거대한 나무의 겉에 드리워진 덩굴이었다. 그 덩굴이 끝나는 곳에 거대한 바위가 있었고, 저수지는 그 바위가 움푹 패여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세차게 쏟아져내리는 폭포가, 그 바위를 패서 그토록 넓은 저수지를 만든 장본인이었다.

  레첸은 종종걸음으로 내려갔다. 중간에 덩굴이 불규칙하게 튀어나온 부분이 있어 넘어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물 속에 처박히는 것만은 모면하면서 바위 가장자리를 내달렸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안개보다 더 차가운 물보라를 뿌리고 있는 거대한 폭포 앞에 서기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레첸은 큰 숨을 들이쉬었다. 폭포는 무언가를 완전히 감싸며 반원형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남은 것은 정면돌파 뿐. 레첸은 상처를 다시 한 번 세게 묶어놓은 후, 다시 큰 숨을 들이쉬고 폭포 속으로 들어갔다.

  세상이 한꺼번에 쏟아져내리는 것 같았다. 머리부터 어깨까지 직선으로 내꽂히는 물살이 바위보다 더 무거웠다. 레첸은 고개를 잘못 들다가는 그 힘에 밀릴까봐 고개를 푹 숙였다. 온 몸이 거대한 힘 앞에 노출되다 못해 그 물살의 중심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살이 방향을 틀어 레첸에게 공격을 가하고 레첸을 비웃으며 나선형으로 하늘을 향해 도망가는 환영이 보였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나가는 방향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 얇은 폭포를 통과하는 데에 한나절은 걸리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곳을 통과했을 때 레첸은 자신이 사선으로 폭포를 뚫고 왔음을 알았다. 폭포의 오른쪽 끝에서 들어왔는데 들어왔을 때에는 중앙에 있었다. 레첸은 물에 흠뻑 젖었다기보다는 실컷 얻어맞은 듯한 몸을 추스리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주위는 이상하게 환했다. 폭포가 빛을 모두 차단하고 있지는 않다 해도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밝았다. 레첸이 걸어가는 방향에서 빛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레첸은 다시 한 번 상처를 살피며 천천히 걸어갔다.

  빛은 용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레첸은 용이 그렇게나 거대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흑룡과 적룡을 보고 왔어도 이 정도로 위압감이 들지는 않았었다. 청룡의 길고 매끈한 몸과 그 찬란한 빛깔은 달보다 더 고요했다. 그 용은 이제 막 탈피를 끝내고 있었다. 투명한 허물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는 청룡의 턱에는 새벽의 태양보다 더 빛나는 무언가가 달려 있었다. 레첸은 그것을 알아채고 용의 몸 위로 달렸다. 무언가 굉장한 소리가 들렸다. 폭포소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고 노한 소리였다. 그러나 레첸의 발걸음을 막지는 못했다. 레첸은 바위벽을 달리듯이 용의 긴 몸 위를 내달렸다.

  [왜냐! 어떻게 하필 지금 온 것이냐!!]

  공기를 따라 전달되었으되 심장과 온 머리속으로 직접 와닿는 듯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레첸은 그 말에도 아랑곳없이 달렸다. 한 팔로 균형을 잡기가 힘들었지만, 머리 부분까지는 도착할 만했다. 용의 입부근에는 수염 같은 털이 나 있어, 매달리기가 한층 쉬웠다. 그러나 레첸이 손을 뻗어 턱 밑에 있는 비늘을 잡아떼려는 그 순간에 용은 탈피를 끝냈다.

  청룡으로서는 초라한 반기였다. 청룡은 그 형상은 비슷하되 신성은 받지 못한 그 형제 뱀처럼 온 몸을 뒤엎으며 난리를 쳤다. 다리가 네 개나 있었으나 이미 턱 밑에 매달린 레첸에게 닿지는 못하였다. 레첸은 한 팔로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자 상처를 참아가면서까지 두 팔로 용의 털에 매달려 있었다. 용은 하찮은 진드기를 털어내려는 듯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분노에 찬 노성은 계속해서 심장을 때렸다.

  [무엇을 원하는 거냐! 이 비늘 하나에 세상이 달려 있다는 것을 아는가!]

  "상관... 없지......"

  레첸은 피식 웃었다. 세상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우투에서, 다른 이름을 가지고 떳떳하게 살 수 있다면...... 시헬과 함께. 그러므로 이 비늘은 꼭 가져가야겠다고 중얼거리며 레첸은 그 흔들리는 가운데에서 방향을 잡기 시작했다. 피가 배어나오고 열이 나는 왼쪽 팔은 나중에 절게 되거나 잘라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하며 레첸은 용의 털에 결사적으로 매달렸다. 한 발. 두발. 세발. 이제 손만 뻗으면 비늘이 잡힌다.

  그 때 갑자기 용이 자신의 최후를 예감하듯 무서운 소리를 지르면서 멈췄다. 레첸은 모든 거대한 비늘 가운데 가장 작으나 가장 귀중한 그 비늘을 떼냈다.

  [결국 그래야...했는가.]

  띄엄띄엄 용의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레첸은 미안한 기분과 승리감이 범벅이 되어 그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한 손에 용의 비늘을 들고 있느라 한순간 균형을 잃자,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레첸과 함께 청룡의 머리도 아래로 떨어졌다. 레첸은 그 높이를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러나 예상했던 고통은 없었다.

  "이제 만족해?"

  시헬의 목소리였다! 레첸은 깜짝 놀라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레첸이 떨어지는 그 지점에 이미 용의 몸이 누워 있었다. 용은 이제 눈을 감고 있었고 그 다리 네 개 또한 죽은 듯이 오그라져 있었다. 그리고 시헬은 용의 정수리 위에 서 있었다. 마치 환영처럼 투명하게 보이는 그를 보며 레첸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을 더듬었다.

  "시헬, 여기,여기 어떻게...!"

  "네게 새로운 이름을 주고 싶었어. 그래서 살 수 있게."

  시헬은 웃었다. 아마도 이제까지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눈부신 미소였던 것 같다. 언제나 무뚝뚝하고 위로의 말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던 시헬. 그러나 그 툭툭한 손길에 처음부터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던가.

  레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시헬의 형상을 보았다. 시헬은 계속 웃음을 잃지 않았지만 그의 몸이 점점 투명해져갔다. 그의 밑에 있는 청룡이 색을 잃어가는 것과 같은 속도였다. 청룡이 완전히 잿빛으로 변하고 그 빛이 사라졌을 때 시헬은 유령처럼 그안으로 사라져버렸다. 레첸은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그 자리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재처럼 파삭파삭해진 용의 시체만이 밟힐 뿐이었다. 레첸은 힘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용의 비늘이 그 손에서 떨어져, 시헬이 있던 자리에 떨어졌다. 시헬의 시체를 대신하듯, 그것이 바로 그 자리에서 구르고 있었다. 레첸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무언가 깨달은 듯이, 그러나 소리를 낼 수 없는 듯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손으로는 모자랐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7


  "그 후에 레첸은 거의 모든 의욕을 잃은 사람처럼 변해서 우투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동안 많이 변해 있었기에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가운데 우투를 돌아볼 수 있었지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우투에 앉은 기분은 무엇과도 비길 수 없이 이상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그런 것이 소용없었으니까요. 이제 우투만이 자신의 세계의 전부이고 우투만이 뿌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레첸은 없어졌으니까요. 그래서 레첸은 다시 우툰을 떠났답니다. 그리고 시헬과 헤어진 갈림길로 다시 들어가 그 유품을 챙겨나왔다고 하지만, 나온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레첸은 거기에서 나오는 과정에 죽었든가, 아니면......"

  이야기 끝에서 여인은 망설였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아이라가 물었다.

  "아니면요?"

  "아니면, 자살을 했다고 생각됩니다."

  여인의 목소리는 단아하고 냉정했지만, 촉촉하게 물기가 배어 있었다. 여인은 잠시 침을 삼키는 듯 이야기를 중단했다가 이었다.

  "어쨌든 그 숲은 용이 죽은 후 급속히 죽어서 지금은 이렇듯 황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레첸과 시헬의 이야기는 먼 옛날 얘기처럼 바래버렸죠. "

  "하지만 시헬과 내가 약속한 건 불과 5년 전의 일이요."

  점잖으면서도 단호하게 엘 라흐망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여인은 짐짓 놀라는 듯했으면서도 엘 라흐망의 말을 막지는 않았다.

  "청룡의 유체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 나는 그것을 몰랐지만, 그와 우정을 나누다가 알게 되었소. 그가 청룡의 유체라는 것도. 나에 대한 답례로 그는 복수를 하고 나면 용의 비늘을 나에게 찾아다주겠다 했었소. 꼭 필요한 자리가 있었기 때문에...... "

  "그 비늘은 여기 있습니다."

  여인이 서둘러 품을 뒤적거렸다. 그러자 그 옷 깊숙한 곳에서 희미한 빛을 반짝이며, 우아한 타원형의 보석이 나왔다. 여인은 아주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 그것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엘 라흐망에게 건넸다. 엘 라흐망은 자신의 검을 들었다. 그 검에는 원래 보석이 박혀있어야 할 자리에 보석이 없는 것처럼 패인 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잿빛을 띄고 있었다. 그러나 엘 라흐망이 용의 비늘을 받아 거기에 끼워넣자, 부드러운 금빛이 흐르기 시작했다.

  "옛 왕가의 문장이요. 이것으로 요정들에게 징표를 줄 수 있겠군요."

  엘 라흐망은 수수께끼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떠나자고 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여행을 해야 할 몸이었던 듯, 쉽게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여인 또한 그들을 배웅하려는 듯 일어났다.

  "아, 이야기는 잘 들었는데. 끝까지 해주시지 않아서 섭섭했습니다."

  "네?"

  "레첸은 살아있지요? 용과 인간 사이에서 난 아이는 일반적인 탈피의 방식으로 성체가 되진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레첸은 아마 감정이 폭발한 가운데 청룡의 시체를 흡수하고 그의 이름을 받아 푸른 머리카락으로 변해버렸겠지요. 그래서 우투의 사람들도 레첸을 못 알아봤던 거겠지요. 이야기는 레첸의 결심까지 가야 끝나는 게 아닐까요? 레첸은 시헬의 이름으로 시헬의 비늘을, 약속한 이에게 건네주었지요.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니, 어떻게 할 건가요?"

  여인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듯 라흐망의 말에 대꾸를 하지 못했다. 다른 일행들 또한 그러했으나 그들은 둘의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으려는 듯 조금 거리를 두고 있었다. 엘 라흐망은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우투는 더 이상 당신의 뿌리가 되지 못합니다. 새로운 뿌리를 찾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우리와 함께 갑시다, 레첸. 아니, 이제는 시헬. 내 친구는 당신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고 싶어했고, 새로운 세계를 주고 싶어했던 것 같소. 그 친구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나 또한 그렇소. 그의 생명과도 같은 비늘을 받기로 약속을 하면서, 무엇이든 그가 정말로 바라는 소원 한 가지는 이뤄주겠노라고 약속했었소. 그러니 우리와 함께 갑시다."

  여인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엘 라흐망의 말을 들었으되 이해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잽싸게 뛰어와 손을 잡은 아이라와 안타비야에게 이끌려 자기도 모르게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뚝뚝한 얼굴의 일행, 마치 시헬과도 같은 표정을 지닌 이들이 레첸-시헬의 앞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내민 손은 따뜻했다.




  레첸이란 이름은 우투족의 문헌에만 잠깐 등장하는 이름이다. 그러나 시헬이라는 이름은 역사책의 큰 귀퉁이를 장식한다. 바로 세계의 5차 전쟁 때 큰 활약을 한 엘 라흐망과 엘 제느리안의 일행 중 한 사람인 청룡 시헬이다. 그러나 그 시헬이 처음에는 레첸이라는 이름의 인간이었으며, 최초의 시헬을 사랑했고, 몸이 죽어 자신을 살리려 한 시헬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죽인 반룡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얼마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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