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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원영 백일의 회고록

2011.09.30 22:4809.30

 


 


 할머니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집안의 기둥이자 주춧돌이었다. 여든, 아흔 수명이 평균이 된 요즈음 일흔 다섯의 나이로 노환을 얻어 돌아가셨으니 천수를 누렸다곤 말하기 어렵다. 또 말년에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셔서 하루도 맘 편히 계시지 못했던 걸 떠올리면 일찍 돌아가신 게 다행이란 생각마저 든다. 할머니의 죽음이 우리 집안에 미친 영향력은 무척 컸다. 할머니 평생의 실수라면 당신의 죽음 이후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데 있을 것이다. 모를 일이지, 이미 알고 계셨을지도. 당신이 어떻게 손대지 못할 지경에 이르러서야 알았을지도. 사람들은 늘 돌이킬 수 없을 상황에서 현명해지기 마련이니까.
 여장부 같았고 마귀 같았던 할머니가 초라하게 떠난 지 벌써 백일이 됐다. 할머니 슬하에는 4남 3녀가 있었고, 그 중에 삼촌 한 분과 고모 한 분이 돌아가셔서 3남 2녀만 남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가장 막내로, 할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서 지금도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라면 껌벅 죽고 본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한 뒤 헤매던 걸 붙잡아 준 것도 할머니였고, 하루아침에 어머니를 잃어버린 나와 오빠를 거둬 기르신 것도 할머니였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아니었으면 죽었어도 진작 죽었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곤 한다. 모든 아버지 형제들 중에 우리 아버지만큼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것도 문제라면 문제다. 아들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게 왜 문제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버지의 그러한 할머니에 대한 집착과 애정이 불러온 게 어머니와의 이혼이었다면 사정이 다르다. 맞다. 우리 아버지는 대책 없고 전형적인 마마보이다.
 백 일째에 이르러 할머니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그런 이야기들이 어째서 지금껏 함구되고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할머니가 돌아가시길 기다렸단 듯이 모두가 할머니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제 그 파편들을 주워 정리해보려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언제나 엄하고, 묵묵히 자기 일만 하고, 욕을 입에 달고 살고, 어딜 가서도 지지 않는 기개 있는 분이셨다. 본관은 포항이고,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셔서 꽃다운 20대에 광복을 맞이하고, 6.25 사변 때 부산으로 일가족을 이끌고 내려와 정착했다. 해운대 바닷가에서 장사를 하며 자식들을 거둬 먹이고, 예술적 소양은 뛰어나셨지만 마땅한 직장도 없는 한량 할아버지를 대신해 아버지의 역할도 하셔야 했다. 자식들이 결혼한 뒤에도 손자들을 돌보았고 마지막 가시는 길 직전까지 나와 오빠에게 매여 계셨다. 그 시대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할머니 역시 오직 생존과 자식을 위한 삶에 헌신하셨다. 내가 알고 있는 할머니는 그런 정도의 사람이었다.


 “느이 할머니, 말도 말아. 얼마나 무서운 분이셨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머잖아 큰집에 갔을 때 큰어머니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큰어머니는 소위 말하는 교양 있는 집안사람이었는데,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큰 집과 큰어머니 욕을 얼마나 해댔는지 모른다. 대부분은 큰집에서 할머니를 홀대하고 챙기러 오지 않는다는 불만이었고, 사소하게는 음식 맛이 없다느니 게으르다느니 하는 인평 문제였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 손에서 자라며 그런 불평불만을 듣다보니 자연스레 큰집에 대해서는 좋은 인상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큰어머니의 그 말이 그저 투정인 줄만 알았다.


 “며느리들을 아주 잡으셨지. 호랑이도 느이 할머니가 무서워서 도망갔을 거야. 내가 이제 와서 성토하겠단 건 아니지만, 그렇게 며느리들에게 가차없이 대한 시어머니는 세상 천지에 또 없을 걸. 자기 자식들만 좋다고 끌어안고 계셨으니 말이야. 당신 아들은 중하고 며느리들은 그런 아들을 나쁜 구렁텅이로 끌어들이는 여우라고 생각하셨지. 정말 느이 할머니 계실 때는 고개도 제대로 못 들고 살았어. 오죽하면 느이 엄마도 학을 떼고 이혼했을 정도겠니? 너랑 네 오빤 할머니한테서 느이 엄마가 미친년이고 죽일년이란 소리만 들었지? 사실은 그게 아냐. 느이 할머니가 느이 엄마한테 얼마나 가혹하게 대했는지 알아? 너도 기억하지? 너 유치원 다닐 땐가, 그 때 느이 아빠랑 엄마 결혼식 올린 거. 그 때 너랑 네 오빠는 결혼식장 못가고 고모 집에 맡겨져 있었잖아? 왜 느이 부모가 그 때 결혼을 했겠어. 다 할머니가 반대해서야. 애를 둘이나 낳았는데도 결혼 허락을 안 해주고 동거 관계로 지냈었어. 너네가 자라고서야 간신히 결혼 허락을 받았지. 그런데도 몇 년 못 버티고 헤어졌잖아? 느이 엄마가 가정환경이 좋지 않았어. 그래서 그렇게 반대를 했었어. 네 오빠를 낳으니까 어쩔 수 없이 같이 사는 건 허락했는데, 사사건건 관여해서 못살게 굴었어. 네가 태어나고서는 이틀도 못 쉬고 일하러 나가야 했고. 그게 말이나 돼? 이제 할머니도 돌아가셨으니 잘 생각해. 느이 할머니 좋은 사람 아냐. 돌아가신 분 이렇게 말하는 거도 안될 말이지만.”


 거짓말처럼 느껴졌던 그 말이, 나중에 이혼한 어머니와 다시 만나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할머니에 대해 더 알아야겠다는 의무감이 생겼다. 죽은 사람의 행적을 찾아가는 일은 생각보다 쉽기도, 어렵기도 했다. 오래 사신 만큼 남겨진 이야기는 많았지만 그 이야기가 진실인지 아닌지는 판단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자신의 할머니를 기억하고, 할머니에 대해 말하지만, 그 할머니가 정말로 할머니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어떻게 재단할 수 있을까. 그저 들은 대로, 아는 대로 기록해볼 뿐이다.
 둘째 큰어머니는 또 다른 이야기를 했다.


 “할머니 말이지, 에그. 며느리만 홀대했으면 다행이게. 자식들도 참 차별을 많이 하셨어. 할머니가 가장 아꼈던 분이 돌아가신 삼촌인데, 참 영특한 사람이었다고 하더라. 공부도 잘했고, 학교도 잘 갔고, 집안 모든 것이 그 삼촌을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 군 복무 하다 6.25때 돌아가셨는데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슬퍼하셨대. 그 삼촌이 살아계셨으면, 글쎄다. 어떻게 됐을 진 모르겠지만. 큰아버지는 장남이어서 그럭저럭 대우받았고, 네 아버지는 막내라서 예쁨 받았지. 우리 아저씨는 둘째여서 방치됐고. 그 결과가 이래. 집이 잘 사는 것도 아니었고, 사랑마저 못 받았는데 사람이 어떻게 제대로 잘 클 수 있겠니? 할머니께서 훌륭한 분이었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좋은 어머니였는지는 난 솔직히 회의가 든다. 우리 아저씨가 젊었을 때 할머니를 얼마나 많이 도와드렸다고. 큰아버지랑 네 아버지, 다 할머니 녹 받아서 독립했을 때 마지막까지 할머니 옆에서 말없이 도와준 게 우리 아저씨였어. 그랬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니?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는 게 자식이라는데, 우리 아저씨는 안 아픈 손가락이었는지 모르겠다.”


 둘째 큰아버지는 사람과 어울리는 걸 싫어하고, 가족과의 소통도 거부한 채 방구석에 틀어박혀 혼자 지내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손재주가 좋고 할아버지를 닮아 예술적 재능도 있었지만, 소외당한 채 재능을 꽃피우지도 못하고 우울과 권태에 시달려 살았다. 술에 의존하다 결국 건강까지 망쳤다.
 할머니가 둘째 큰아버지를 미워했다면, 생각건대, 둘째 큰아버지는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쏙 빼닮아서 더 할머니의 미움을 샀을지도 모르겠다.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그래도 좋은 여지가 남아 있는 것과 달리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그런 점이 단 한군데도 없기 때문이다. 무능한 남편을 두고 살았을 할머니의 분노가 어쩌면 둘째 큰아버지에게 간 건 아닐까. 물론 사람의 인생은 그 사람의 것이므로 막연히 할머니의 탓만 할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부모가 자식을 어떻게 대하고 키우느냐에 따라 자식의 정서에 크나큰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은 무척 크다. 왜,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를 갱생하는 TV 프로그램을 봐도 아이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건 신체적 병이 아닌 이상에야 100% 부모 문제지 않은가. 큰아버지가 난폭한 사람인 것도, 둘째 큰아버지가 우울한 사람인 것도, 우리 아버지가 마마보이인 것도 훈육 문제가 아닐 가능성은 거의 없다.
 두 큰어머니, 우리 어머니가 못된 시어머니였던 할머니로 인해 받았을 상처까지 헤아리는 건 어렵다. 이쯤에서 마마보이 우리 아버지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할 것이다.


 “할아버지가 내가 고 3땐가 돌아가셨는데, 육십도 못 사시고 돌아가셨제. 간 경화였다. 할아버지가 사실 부잣집 아들이었지. 물려받은 땅도 많았고. 본인은 또 얼마나 멋쟁이였는지, 옷도 잘 차려입고 글도 잘 쓰셨고 그랬다. 니가 글 쓰고 그런 거는 할아버지 피를 탔을 기라. 기타도 얼마나 잘치셨노. 그런데 6.25 터지면서 죄 잃어버린 거라. 일을 구할라고 해도 구할 수가 없었다. 왜냐고? 할아버지가 부산 내려와서 빨갱이로 몰렸다. 당시에 빨갱이로 몰리면 어케 되는 줄 아나?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들어주질 않는다. 그냥 잡아 처넣지. 그때 구치소 수감됐을 때가 가관이었다. 할머니가 그때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누이를 등에 업고 매일같이 구치소 앞에 가서 시위했다 아이가. 길이 사십리쯤 됐을게다. 새벽같이 서둘러 가서 우리 남편 풀어달라고, 풀어달라고. 제대로 재판 받게 해달라고. 변호사 만나가면서 그리 한달 두 달 몇 날밤을 새면서 항의하고 시위했다. 그때 시위하다 등에서 누이가 떨어지는 바람에 그대로 죽었는기라. 그래서 고모 한분이 안 계신 거다. 독하게 해대니 결국 풀려나긴 했다. 간수부터 해서 다들 독하다고 혀를 찼제. 할아버지는 할머니 없었으면 그 때 죽었을 기라. 느이 할머니가 그리 대단한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그 후로 빨갱이로 몰린 전적 때문에 어디서 일도 못하게 됐제. 원래 일하는 거 모르고 산 양반이니 할 수 있었대도 안 했을 거 같구마. 성격도 얼마나 나빴는지, 자식들도 징하게 두들겨 팼고. 할머니 혼자서 우리들 살린다고 쌔가 빠지게 고생하셨다. 할머니한테 소원한 점이 있드래도 자식 된 사람들이 그러면 쓰나. 할머니 없었으면 우리는 다 죽은 목숨이었는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 니도 그래 생각하제?”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빨갱이로 몰린 할아버지, 그런 할아버지를 구하겠답시고 매일같이 먼 길로 구치소를 찾은 할머니, 젖먹이를 업은 채로 항의했을 할머니, 그 와중에 자식을 잃고서도 절망을 안고 어떻게든 할아버지를 구해낸 할머니. 아버지에게 할머니는 영웅이었다. 흠이 있더라도 아버지에게는 사소한 흠일 뿐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다른 친척들 간에 간극이 해결되지 않는다. 아버지가 사소한 흠이라고 생각하는 할머니의 문제가 다른 친척들에게는 치명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장례식 때 아버지가 터트린 통곡을 기억한다. 그리고 울지 않았던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한다. 누군가의 죽음, 그것도 한평생 부모의 죽음이 슬픔으로만 다가오지 않는 사람들이 분명 있다는 걸 아버지는 언제쯤 인정하게 될까.
 둘째 큰아버지의 딸인 사촌 언니는 일가친척 중 가와 가장 친한 사람인데, 함께 술을 마시며 들은 이야기가 있다.


 “니 그거 아나? 할매 포주였다는 거.”


 포주라고? 내가 깜짝 놀라 묻자 언니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말했다.


 “해운대에 거, 집창촌 알제. 빨간 불 켜져있는 집 많은데.”


 해운대 바닷가 건너편, 호텔과 모텔이 즐비한 골목 한쪽에 있는 집창촌은 지금은 재개발로 인해 사라졌다. 어릴 때 부모님과 함께 그 옆을 지나며 저기가 뭐하는 데냐고 물었던 기억이 있다. 부모님은 대답해 주지 않고 '가까이 가서는 안 되는 데'라고 말했다. 그 이후로 나는 그 곳을 위험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할매가 해운대서 장사할 시절에 거기 여자들 관리하는 사람이었다고 하더라. 밥 챙겨주고, 도망 안가나 지키고, 살피고. 손님들 알선해주고, 알선비 받고. 그런 거. 정확히 말하면 포주는 아니지만 하는 일은 포주랑 별로 다를 바 없었다 하데. 할매 성격상 거리낄게 어데 있겠냐만은. 나도 듣고 깜짝 놀랬다. 진짜 대단한 사람이다, 대단한 사람이야.”


 당시 상황을 나름대로 구성해 본다. 할머니는 바닷가, 지금의 파라다이스 호텔이 있는 인근에서 식당을 했다. 당시 한참 바닷가 인근 개발로 공사가 많았던 시절이라 손님들은 인부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바닷가 근처에서 접객하던 아가씨들도 밥 먹고 살기는 해야 할 테고, 그래서 할머니의 식당을 이용했다. 이건 할머니가 단순히 돈만 보고 그런 일을 했다고는 생각하기 싫은 내 가정이지만, 할머니가 아가씨들을 관리하게 된 건 밥 손님을 챙겨주는 일의 연장선이었을 것이다. 몸 팔아서 돈을 버는 아가씨들에게, 인부 손님들을 소개해 주는 일 같은 것 말이다. 거창하지 않아도 그런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들은 할머니의 이야기는 큰고모에게서였다. 큰고모는 해가 갈수록 할머니와 똑같아진다. 이제 할머니가 다 된 큰고모를 볼 때마다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문득 슬퍼지곤 한다. 큰고모는 침침한 눈을 꿈벅이며 말했다.


 “나는 사실 할아버지 딸이 아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랑 결혼한 게 두 번 결혼한 거다. 나는 첫 결혼했던 분의 딸이었고. 놀랐나? 그럴 만도 하제. 당시에 여자가 재혼한다는 게 어디 쉽나. 할머니는 처음 시집가서 나를 낳았고, 내 친부가 고마 일찍 죽어버린기라. 아직 창창한 나이인데 우찌 혼자 살끼고. 그래서 내 있다는 건 할아버지한테 속이고 재혼했제. 그 뒤에 날 데리고 갔다. 할아버지가 얼마나 화냈는지 아나? 말도 마라. 나는 그날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할머니가 참 고마운 게, 보통은 딸 찾을 생각을 안 하제. 재혼해서 아 낳고 새로 가정 차리면 이전에 낳은 아는 잊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자기 몸 다칠 걸 알면서도 날 데리고 가서 키워줬제. 그것만으로도 나는 엄마한테 참 고맙다. 할머니가 무섭고 꼬장꼬장한 사람이란 거 다 안다. 그거 때문에 미움도 많이 받았고 적도 많지만, 어째 미워할 수 있겠노. 안글나? 나이 드니까 알겠는 기라.”


 지금껏 나는 75년 할머니의 인생에 대해 '어렵고 힘든 시기를 겪고 살아왔다'라고 일축해왔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정말로 편린뿐이었고,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어도 그 모든 세월을 가늠조차 할 수가 없다. 나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는 사람의 인생을 말하기가 얼마나 쉬운지와, 또 하나는 사람의 인생을 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여전히 내게 할머니는 고마운 분이다. 과거에 당신의 행적이 어떠했든 당신이 내게 준 헌신과 사랑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의 평생의 헌신이 비록 좋은 결과만 낳은 것은 아니지만, 그 근간에 사랑이 없었다면 어떻게 해내었을까. 단순한 의무감으로만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유언을 따로 남기지 않았다. 할머니의 유산 문제로 친척 간에 사이는 풍비박산 났고, 형제간의 우애는 눈곱만큼도 남아있지 않게 됐다. 할머니가 계실 때는 형식으로나마 유지하던 관계가 할머니라는 존재가 사라지자 모두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사람 일이란 게 어떻게 될지 모르니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지도 모르지만, 이야기를 마무리해가는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아마도.
 할머니의 존재가 좋든 싫든 모두에게 소중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75년의 인생, 뒤늦게 돌이키는 이야기들, 아쉬움마저도 할머니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었던 애틋함이 만들어낸 부산물이지 않을까. 할머니가 쌓아온 역사는 곡절과 굴절로 남아 아직도, 앞으로도 쭉 영향을 주다가 내 대를 넘어 제사상에서 언급될 무렵에나 사라질 거라 예감한다.


 오늘은 할머니의 백일 제사가 있는 날이다. 좋든 싫든 다들 모이게 될 테니, 나는 이 기록을 가지고 모두 앞에서 할머니의 인생 족적을 이야기 할 생각이다. 할머니로 시작되어 할머니로 깨어진 관계라면, 그걸 다시 이어 붙이는 것도 할머니가 될 테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제대로 추억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어른들은 항상 그렇다. 핀잔만 들을 지도 모르고 화를 돋울 지도 모르지만 해 봐야겠다. 죽은 사람을 추억하는 일은 살아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 20110921 R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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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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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na 11.10.03 11:59 댓글 수정 삭제
    이게 실제 이야기인지, 어디까지 허구인지 알 수 없어서 섣불리 덧글을 달기가 좀 그랬지만... 잘 읽었습니다. 양원영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단편이란 생각도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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