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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원영 티레시아스

2010.11.27 01:0211.27


 1.


 “애도하고 계십니까, 돈 디에고.”


 침통한 얼굴로 해지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디에고의 곁으로 온통 새하얀 옷을 입은 청년이 다가왔다. 이제 스무 살이나 됐을 법한, 아들 뻘의 청년이 유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디에고는 고개만 까닥여 그를 맞이하고 자리를 권했다. 청년은 망토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고 앉았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케이스에서 허락도 없이 시가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디에고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청년을 관찰했다. 어린 나이에 특이한 패션 감각을 지닌 도련님처럼 보여도, 그 정체는 도시 뒷골목의 창녀와 고급 기녀를 아울러 지배하는 가장 상위의 포주였다. 일명 ‘수호자’라고 불렸다.


 “이렇게 지체 높으신 분께서 저 같은 하찮은 사람을 찾아뵙자고 하실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생각보다 어리군.”
 “흔히 듣는 말이죠. 어차피 이 세계에서 나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에두아르도 마르티네즈입니다. 편하게 에두아르도라고 부르십시오.”


 귀족 중에서도 가장 권세 있는 귀족 가의 수장인 디에고를 눈앞에 두고서도 전혀 기죽는 내색 한번 없다. 괘씸함에 기분이 상했지만 못 배운 것들의 생태란 늘 그렇지 않은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것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보다 더 시급한 일이 있었다. 디에고는 관용으로 에두아르도의 무례를 묻어두었다.


 “그래. 세뇨르 마르티네즈. 소문은 익히 들었네. 이 도시에 자네의 손이 닿지 않는 창녀와 기녀는 없다고?”
 “그렇다고 해 둡시다. 어디 마음에 드는 계집이라도 있으십니까?”
 “있지. 있고말고.”
 “돈 디에고나 되시는 분께서 스스로 취하지 않으시고 저를 불러들이셨다는 건, 돈 디에고도 어찌 못할 계집이라는 말씀이시겠군요.”


 디에고는 입술을 누그러트리며 웃었다. 뻔히 보이는 수작을. 디에고의 인내심이 아슬아슬한 경계에 오르자 에두아르도는 꼬리를 내리고 한 걸음 물러섰다.


 “‘흑진주’.”
 “그래.”
 “다스리기 어려운 계집입니다.”
 “어렵다는 건가?”


 그럴 리가요. 에두아르도는 씩 웃고서 거만한 자세로 다리를 꼬았다.


 “다만, 그쯤 되면 제 소관이라고 부르기도 어렵지요. 뭘 원하시느냐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흑진주가 몬테로와 어느 정도로 관계하고 있는지 알고 있나?”
 “그녀가 정치적으로 묘한 위치라는 건 돈 디에고가 더 잘 알 겁니다. 흑진주가 당신과 연관된 만큼, 돈 몬테로와도 연관되어 있을 테지요.”
 “그래. 그 앙큼한 계집이 말이지. 어려운 소리 하지 않겠네. 나는 흑진주를 내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네. 그리고 몬테로를 숙청하는데 그녀를 이용하고자 해.”


 에두아르도가 눈썹을 치켜뜨고 시가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손에 묻은 잔흔을 탁탁 털어낸다. 목을 울리며 고심하다 말했다.


 “사냥의 시작입니까?”
 “그런 셈이지. 돈 몬테로라고 하지만 어디서 굴러먹었던 놈인지 몰라. 아르마 가문 내부의 문제기에 관여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가 야욕을 드러내는 이상 위험 요소는 제거해야만 해. 이 나라는 신의 아드님이신 전하의 것이어야만 하네.”
 “아무렴, 응당한 말씀이십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 돈 디에고 같은 분이 계신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에두아르도의 진심을 담은 몸짓과 말에 디에고는 썩 좋은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 국가의 권력은 두 귀족에게 있었다. 아르마 가문의 수장 몬테로 데 아르마와 솔레즈 가문의 수장 디에고 살바토르 데 솔레즈는 한 명의 왕을 사이에 두고 보이지 않는 대립 축을 세웠다. 두 가문 모두 오랜 세월 왕가에 충성한 공신 가문이었다. 선대 왕 시대까지만 해도 두 가문이 대립해 충돌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선대 왕이 정체 모를 사건에 휘말려 실종된 이후, 지금의 무능한 왕 막시밀리안이 보위에 오르자 상황은 변했다. 기존의 아르마 가문의 쟁쟁한 일원들을 숙청하고 수장이 된 몬테로가 노골적으로 권력을 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농담으로라도 선량한 인물이 아니었다. 무능한 왕은 몬테로의 꼬드김에 넘어가 정치적 결정권을 반쯤 이양했다. 공신가문으로서 디에고가 몬테로의 행위를 가만두고 볼 수 없었다. 정치의 판도는 이 두 사람이 규합한 세력들로 명확히 구분 지어졌다.
 국가를 지지하는 다섯 가문 중 갈루 가문은 솔레즈를 지지했다. 제파드 가문은 아르마의 충직한 하수인이 되었다. 오로지 토레나스 가문만이 두 세력과 떨어진 정치적 중립을 지켰지만, 덕분에 권력에서는 멀어졌다. 왕권 약화와 교회의 제반 권력 상실은 귀족들의 대립에 큰 획을 더했다.
 더해서 이웃 제국의 혁명 이후, 전 세계적으로 퍼진 계몽사상이 성숙한 시민 의식을 자아냈다. 왕권의 압제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위 폭도라 일컬어지는 혁명 세력들이 각지에서 일어나며 나라는 종전에 없던 혼란에 처했다. 수도는 하루하루가 아비규환이었다.
 디에고는 이 상황이 길어지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 누구도 마찬가지 리라.


 “언질은 해 두겠습니다. 노파심으로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보게.”
 “제가 흑진주와 교섭하는 건 어디까지나 중개인으로서 도움을 드릴 뿐입니다. 어떤 계집이든, 계집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건 그녀를 지배할 자격이 있는 사내입니다. 물론 돈 디에고라면 마땅하시겠지요.”
 “방정맞은 입에서 나오는 말치고는 마음에 드는군.”
 “감사합니다.”


 두 번의 손짓. 나가보라는 의미를 읽고 에두아르도가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갔다.


 “계집을 지배할 자격이 있는 사내인가.”


 에두아르도의 말을 되풀이했다. 독실한 교회인인 디에고는 정념에 빠져들어 농락당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그라도 욕정이 드는 여자가 있었다. 나라에, 아니 세계의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은 그녀를 취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다.
 디에고는 뇌리 끄트머리에 자리한 흑진주를 범하는 욕망을 기대로 품었다. 정념을 죄악으로 여기는 교회라 할지라도 사해 받을 수 있는 죄일 것이다. 어쩌면 몬테로를 처단하고 권력을 정립하는 하늘로부터의 소명보다도 가치 있는 일 일지도 모른다. 디에고는 거머쥘 자신이 있었다. 왜 없을까!


 


* * * * *


 


 그는 화장대에 앉은 여자를 취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태양의 빛으로 살짝 그을린 건강한 피부,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과 흑색의 눈동자. 날씬하고 균형 잡힌 몸매, 가느다란 팔과 다리. 어떤 남자도 단번에 홀리게 하는 매력적인 눈웃음과 미모의 소유자. 피그말리온의 여신상에 비견되는 여자였다.
 수도에 사는 이들은 누구라도 알고 있다. 그녀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왕의 하나뿐인 여자. 흑진주. 타이스. 먼 동쪽 제국의 신화에 전해져 내려오는 여인의 이름을 딴 가기.


 “왕은 또 얼마나 너를 붙들고 있을까.”


 에두아르도는 조소 어린 목소리로 타이스에게 말했다. 그녀는 막 연지 통을 연 참이었다. 자개로 장식된 덮개 안에 담긴 연지를 붓으로 누르고, 진한 붉은색을 입술로 옮긴다. 백지에 덧그리듯이.


 “길어도 사흘 안엔 나올 거야.”
 “어쩐 일로? 그 왕이 사흘만으로 만족할 거로 생각해? 광대에게 참을성이라도 가르칠 참인가?”
 “내가 왕궁에 너무 오래 붙어 있으면 당신이 힘들 테니까.”


 타이스는 거울 너머로 방만한 자세로 앉아있는 에두아르도를 흘겨보았다.


 “당신은 좀 쉬어야 해.”
 “어차피 쉴 수밖에 없잖아.”


 에두아르도는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타이스는 그를 한동안 노려보다 화장을 마무리하고 보석함을 열었다. 왕이 하사한 흑진주 목걸이를 두른다. 진주와 진주 사이를 눈물 모양 다이아몬드로 이은 천문학적 가격의 물건이었다.


 “왕도 그런 걸로 네 마음을 붙잡으려고 고생하는군.”
 “재주가 없으면 재물이라도 바쳐야지 않겠어?”
 “아무렴. 그나저나, 돈 디에고가 너를 원한다던데.”


 멈칫. 목걸이를 꺼내던 손이 멈췄다. 미간이 찌푸려지며 아름답게 조형된 얼굴이 일순 일그러졌다.


 “디에고 살바토르가?”
 “그래. 네 조력을 얻어 몬테로를 칠 것이라 한다.”
 “흐응.”


 타이스는 표정을 풀었다. 목걸이를 목에 걸고 몸단장을 마무리했다.


 “왜, 늙은 왕보다는 정력 있고 부자인 돈 디에고와 붙어먹는 편이 낫지 않나? 돈 몬테로라던가.”
 “시끄러워, 에두아르도.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이런, 실례.”
 “그 남자 하기 나름이겠지. 내가 원하는 걸 줄 수 있다면 말야.”
 “내 입장도 좀 생각해 달라고.”
 “싫어.”


 타이스는 비웃음을 띄며 방을 나섰다. 에두아르도의 표정은 보지 않았다. 검은 드레스 자락을 길게 끌며 태양의 성을 밤의 어둠에 침식시켰다. 권력에 미쳤으며 동시에 출신성분으로 모든 것을 규정짓는 귀족들의 생태는 얼마나 지긋지긋한지! 타이스는 왕의 처소로 향하며 짐승 같은 귀족들을 향해 저주의 묵언을 퍼부었다.
 어떤 귀족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그녀의 천한 출신을 업신여길지언정 그녀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입을 닫았다. 몬테로도, 디에고도 그녀 앞에서는 신중했다. 왕이 끝까지 권력을 이양하지 않고 최후의 결정권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은 타이스 때문이었다. 왕의 권한의 절반이 귀족에게 넘어갔지만, 나머지 절반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왕의 정부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실질적으로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왕의 여자 위치를 지키며 은연중 영향력을 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귀족 간에 갈린 정치 판도에 끼어든다면 큰 변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왕의 침실 문 앞에 섰다. 호흡을 가다듬고 아름다운 웃음을 꾸몄다. 시종이 그녀의 입궁을 알리고, 타이스는 제지 없이 방으로 들어섰다. 넓고 호화로운 방의 침대에는 썩은 나무토막처럼 늙고 비틀어진 몸뚱이를 가진 왕이 누워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 타이스. 얼마나 기다렸다고.”
 “망극하옵니다, 전하. 소녀를 기다리셨나이까?”
 “그래, 기다렸다. 어서 이리 오너라. 나의 흑진주야. 어서, 어서.”
 “보채지 않으셔도 타이스는 전하의 것이옵니다.”


 타이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경쾌하게 웃었다. 코트를 벗어 바닥에 떨어트리고, 일부로 벗기 쉽도록 매어둔 드레스 앞섶을 천천히 풀면서 침대로 걸어갔다. 털썩. 무거운 드레스가 바닥에 떨어진다. 차례차례 속옷을 벗으며 침대 위에 다다랐을 때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뜨거운 살결과 향기의 미혹에 늙은 왕이 침몰했다. 타이스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요사스럽게.


 


 2.


 디에고는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적잖은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왕명으로 부리나케 달려왔으나 실제로 그를 찾은 것은 타이스였다. 침대 위에서 지쳐 쓰러진 왕을 나신의 몸으로 보듬고 있었다. 탐스러운 몸을 가리지도 않고 오히려 보란 듯이 드러냈다. 기르는 강아지를 대하는 양 왕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타이스는 디에고를 향해 도발적인 시선과 말을 던졌다.


 “제가 움직일 여력이 되지 않아 이리로 불러들였습니다. 왕께서도 허락하셨으니 편히 계셔도 됩니다.”


 편히 있으라고? 디에고는 노성을 눌러 참았다. 왕의 바로 앞이다. 아무리 무능하고 쓸모없고 여자 치마폭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왕이라도 왕이었다. 대신 디에고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왕은 잠들어 있었고 한낱 창녀에게 고개 숙일 일은 없었다. 디에고는 금세 의도를 알아차렸다. 타이스는 그를 시험하고 있었다. 분노가 가라앉고 슬쩍 웃음이 나왔다. 절대로 만만한 여자가 아니었다. 지금은 도량을 보여줄 때였다.


 “전하께서는 어떤가?”
 “건강하십니다. 많이 보채셔서 때때로 곤란하지요. 날이 갈수록 제 어깨에 짐이 늘어나고 있답니다.”
 “그 가녀린 어깨에 감당하기에는 무겁겠지.”


 디에고는 타이스의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그녀의 머리카락 끝에 경애를 표했다. 왕이 깨어나 본다면 불경죄를 물어 처벌받아도 할 말이 없을 상황이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담이 크신 분이시군요, 돈 디에고는.”
 “치명적이고 아름다운 꽃을 손에 넣으려면 뭘 감내하지 못하겠나.”
 “그렇습니까? 그럼 이 자리에서 저를 취하실 수 있으신지요?”


 타이스의 손가락이 디에고의 얼굴선을 닿을락 말락 훑었다. 디에고는 일말의 여지없이 타이스의 턱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타이스는 몸을 약하게 떨며 웃었다. 한쪽 팔에는 왕의 머리가 안겨 있었다. 또 다른 팔로는 디에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디에고의 손이 가슴을 거세게 쥐고 피부 위를 지분댈 때마다 가녀린 목소리가 떨렸다. 왕의 흔적이 아직 남아있는 타이스의 내부를 긁어내고 유린했다. 지독하게 더러운 행위라며, 교성을 지르는 여자의 천박함을 비웃었다. 동시에 아득히 즐거웠다. 언제 깰지 모르는 왕 옆에서의 위험한 정사를 치렀다.


 “어떠냐, 세상에서 제일 음란한 창녀야.”


 강한 절정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타이스의 머리채를 거칠게 쥐었다. 얼마나 쉬운가, 흑진주라니 별것도 아니지 않은가. 한낱 창녀일 뿐이다. 타이스는 키득거리며 미친 여자처럼 웃었다. 디에고의 손을 뿌리치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속살이 어찌 맛이 있으셨나 봅니다.”
 “전하가 먹다 남긴 것이 아니었다면 더 맛있었을지도 모르겠군.”
 “뭘 모르시는군요. 계집의 몸이란 탐하고 탐할수록 더 맛있어지는 법이랍니다. 남자 맛을 모르는 계집의 몸을 탐하는 건 만찬을 즐길 줄 모르는 사내나 하는 짓이죠.”


 열기가 가라앉자 타이스는 왕의 잠자리를 봐 주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침실 밖 응접실로 안내했다. 카우치에 몸을 뉘인 타이스는 긴 곰방대에 잎을 담고 불을 붙였다.


 “에두아르도 마르티네즈로부터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절 뵙자고 하셨다면서요?”
 “그자가 유능하긴 유능한가 보군. 이렇게 빨리 반응이 올 줄은 몰랐는데. 약점이라도 잡혔나?”
 “포주와 상품의 관계야 입 아프게 말하지 않아도…… 물론 제가 당신의 이야기를 듣겠다는 의사를 보인 건, 돈 디에고의 대담함과 기백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만.”
 “그거 영광이군.”


 미친 여자. 타이스에 대한 감상을 일축했다. 굴복시켰다 생각했지만, 한순간일 뿐이었다. 몸을 탐하고 지배하는 정도로는 꺾이지도, 무너지지도 않는다. 정복욕의 심지에 불이 붙었다. 촛불처럼 불안하게 흔들려 꺼트렸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살아나 더 강렬하게 빛을 발했다. 군침이 돌아 한차례 삼켰다. 아니, 이래선 안 되지. 우선, 해야 할 일을 해야지. 욕망에 무너지려는 이성을 질책하고 쓰게 웃었다.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할까요?”


 모든 걸 자신에게 맡기는 것이 어떠냐며 타이스는 노골적으로 디에고를 유혹했다. 그녀는 디에고의 모습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평가당하고 있었다. 정말 몹쓸 계집이다.


 “나중의 즐거움으로 남겨두지. 여기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니까.”
 “전해들은 바로는, 제 힘이 필요하시다고요.”
 “그렇네. 나는 몬테로를 끌어내리고 처단할 생각이네. 거기에 자네의 조력이 필요해.”
 “돈 몬테로를요? 어머나. 무서워라. 저는 그런 무서운 일과는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아요. 궁성에 피 바람이 몰아치겠군요.”


 타이스가 과장된 몸짓으로 생색을 냈다. 디에고가 코웃음 쳤다.


 “균형이 계속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겠지. 결국엔 누구 하나가 떨어져 나가게 되어 있어. 그리고 자네 또한, 언젠가는 어떤 흐름을 지지하게 되겠지. 죽지 않으려면.”
 “협박하시는 건가요?”
 “잘 생각하라는 이야기네. 나는 자네가 단순한 왕의 여자로 끝날 것이라곤 생각지 않아.”
 “과대평가 하시는군요, 한낱 왕의 정부에게는 큰 찬사인데요.”
 “자네는 ‘한낱’으로 격하될 인물이 아닐세. 몬테로는 어려운 상대지만 현재의 힘의 균형이 깨진다면 그도 어떻게 할 수 없게 될 테지.”


 타이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디에고를 곧게 응시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진심의 여부, 결단과 믿음의 강도를 쟀다.


 “제가 돈 몬테로와 한패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신가요?”
 “그런가?”


 여유롭게 되받아친다. 타이스는 미간을 찌푸리고 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돌려 시선을 거둬 한발 물러섰다. 암묵적으로 인정했다. 디에고는 무척 만족스러웠다.


 “시민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던데요. 거리가 늘 소란스럽더군요.”
 “폭도들 말인가? 걱정 말게. 몬테로가 처단되면 폭도들 역시 기승을 부리지 못하도록 처단할 테니까. 감히 신성한 왕정을 더럽히려는 타락한 무리가.”
 “어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요.”


 지긋지긋하다는 목소리로 말하고 타이스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곰방대 불씨를 꺼트렸다. 한참을 말을 고르고 탄식을 내뱉으며 말했다.


 “전 사실 돈 몬테로를 원망하고, 적대하고 있습니다.”


 디에고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타이스는 한기를 느끼는지 팔로 몸을 감싸 안았다.


 “당신이라면 괜찮겠지요. 저는 선대 아르마 공께서 키운 아이였습니다. 아버지 같은 분이셨죠.”
 “그랬군.”
 “어느 날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를 사내가 아르마 공을 살해해서 그 자리를 취했고, 그자가 몬테로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의 밑에서 짐승처럼 굴려지며 살아왔죠.”


 거짓말로 보이진 않았다. 디에고는 타이스의 행동거지를 유심히 살폈다. 파리해진 낯과 떨리는 몸은 연기가 아니었다. 곁에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공포에 젖은 떨림이 손바닥으로부터 전해졌다. 타이스의 언성이 높아지고 격해졌다.


 “3년 동안 감금당했다가 간신히 도망쳤어요. 그리고 그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지요. 반드시 그를 육시해 죽일 겁니다. 하지만, 쉽지 않아요.”
 “그런 일이 있었나. 정말 인간 같지 않은 놈이군.”
 “돈 디에고, 저는 줄곧 당신 같은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나주길 기다렸습니다. 권력 있고, 강하며, 몬테로와 싸워도 지지 않는 남자가. 전하로는 안돼요.”


 타이스는 젖은 눈으로 애처롭게 디에고를 올려다보았다. 디에고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쓸어주었다. 달콤하고 진한 향기가 어른거렸다. 꽃향기 같기도, 세상에서 가장 단 과일의 향기 같기도 했다. 어디에서도 맡아본 적 없는 향이었다. 타이스의 모든 것이 디에고의 품에 안겼다.


 “그러니 몬테로를 죽여주세요. 무엇이든 돕겠어요. 제가 이제껏 알았고 준비해왔던 모든 것들을 당신께 알려 드리죠. 그를 죽일 수만 있다면. 죽일 수만 있다면!”
 경련을 일으키는 타이스를 진정시켰다. 마치 운명의 여신이 웃어주는 것 같았다. 지나치게 상황이 유리하게 흘러가는 것이 한편으론 불안했지만, 불안보다 기대가 컸다. 디에고는 천운이 내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여신은 바로 흑진주이리라.


 타이스를 통해 몬테로가 실은 아르마의 혈통이 아니며, 조작된 출신성분으로 피의 숙청을 통해 지금의 자리에 올랐음을 알았다. 또한, 몬테로에게 원한을 가진 아르마 가문의 인물들이 생존해 있다는 것과 타이스가 그들과 조력해 지금의 자리에 있다는 것도 알았다. 타이스가 몬테로에게 가진 증오는 생각 이상으로 깊다는 것도.


 “원하는 것이 있나?”
 “전 몬테로가 죽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남은 아르마의 사람들은 더 원하는 것이 있을 테지요.”
 “가문의 복권이지 않겠나. 그들과 만나야겠군. 접선시켜줄 수 있나?”


 디에고가 넌지시 물었다. 타이스는 한치의 의심 없는 신뢰를 담아 답했다.


 “물론이죠. 세자르 루이스를 만나세요. 그가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 * * * *


 


 디에고가 돌아가고서 타이스는 어둠 속에서 촛불 하나 켜지 않고 앉아 있었다. 늙은 왕의 코 고는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어스름이 비쳐든 달빛이 시렸다. 죽은 인형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끼익.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저벅, 저벅.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이어 들린다. 달빛이 가렸다. 창문 앞에 누군가가 섰다.


 “돈 디에고가 널 기쁘게 하던가?”


 나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요동쳤다. 소름이 돋았다. 팔을 손으로 꾹 누르고 타이스는 날 서고 표독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당신보다는 여자를 기쁘게 할 줄 알더군요, 돈 몬테로.”
 “그래? 그자가 날 죽일 테니 조력이라도 해 달라고 하던가?”
 “그렇다면 어쩔 건가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그래. 아무것도.”


 하.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타이스는 밀려오는 현기증을 고개를 털어 떨쳐내고 창문 앞에 자리 잡은 남자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무척 자신 있으신가 보군요? 그 자신이 어디까지 가는지 두고 보죠.”


 몬테로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타이스의 감정을 밑바닥부터 긁었다. 분노와 고통에 여자가 비명을 지르려던 순간, 왕이 일어났다.


 “밖에 무슨 일이 있느냐?”
 “전하. 당신의 충성스런 신하가 왔습니다.”
 “몬테로인가, 그래. 들라.”


 몬테로는 타이스를 스쳐 지나가 침실로 들어갔다. 타이스는 카우치 손잡이를 손톱으로 긁으며 이를 갈았다.
 늦은 시간 도망치듯 궁을 빠져 나왔다. 왕이 좀 더 있어 달라 하소연했지만 매몰차게 거절하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 안에서 터트리지 못했던 울분을 터트렸다. 거처에 당도할 무렵에는 울음과 비명으로 엉망진창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하녀들을 뿌리치고 방에 틀어박혔다.


 “세자르, 세자르!!”


 날카롭게 외친다. 한참을 부르짖었다. 화장대 앞을 엉망으로 만들고 거울을 손으로 내리쳐 깨부쉈다.


 “타이스. 그만해. 괜찮다. 여기엔 널 괴롭히는 건 없어.”


 뒤를 돌아본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잘 차려입은 소년이 서 있었다. 타이스는 비틀거리며 그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소년이 타이스를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세자르, 미워. 죽이고 싶어. 그 남자를 죽여 버리고 싶어!”
 “알고 있다. 나도 그래.”
 “디에고 살바토르가, 그를 죽이겠다고 해. 당신과 만나고 싶어 해.”
 “돈 디에고가?”


 타이스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거리고 바닥에 쓰러져 실신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알았다. 내가 만날 테니 안심해. 많이 지쳤어. 쉬도록 해.”


 타이스를 잠재우고 세자르라 불린 소년이 어질러진 방을 천천히 정리했다. 타이스의 모습이 깨부숴진 거울에 비쳤다. 만화경처럼 깨지고 분리된 거울에 상들이 기이하게 어그러졌다.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나?”


 어그러진 상 너머로 에두아르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자르는 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거울 조각을 수습해 치웠다.


 “그녀를 너무 괴롭히지 말게.”
 “누가 괴롭혔다고 그래. 불쌍한 창녀를 두고 불쌍하다고 말하는 것이 괴롭히는 건가?”
 “에두아르도.”


 엄하게 꾸짖었다.


 “네, 네. 걱정 말고 다녀오시지. 몬테로의 숙청은 너와 그녀의 숙원이잖아.”


 에두아르도의 비아냥거림이 멀어져간다. 세자르는 깊게 한숨을 내 쉬었다. 어느새 베였는지 손가락 끝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3.


 부르주아들과 젠트리들의 사회에서 ‘벨레차 레온(Belleza Leon:아름다운 사자)’이라 불리는 사내가 있었다. 아직 십 대에 지나지 않는 소년이었지만, 사교계에 내로라하는 인물들을 굴복시키고 강력한 영향력을 쥐고 있었다. 그는 수도의 뒷골목 세계를 지배하는 큰 손이었다.
 화사하고 여린 생김새는 수호자 에두아르도 마르티네즈보다도 더 애송이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을 세자르 루이스 델 마르티네즈 데 아르마라 소개했다.


 “선대 돈 아르마와는?”
 “숙부님 되십니다. 제 어머니가 제국 분이셨기 때문에, 지난 세월 제국에서 지낸 것이 화를 피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수호자와는 어떤 관계지? 자네가 뒷골목을 지배한다면 그와도 큰 연관이 있을 것 같은데.”
 “바로 보셨습니다. 에두아르도와는 절친한 지우입니다. 제가 이 나라로 돌아와 정착하고 사교계에서 이름 떨칠 수 있도록 그가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또한 개인적으로 몬테로에게 유감을 가진 자입니다. 모두 돈 디에고의 편인 셈입니다.”


 에두아르도나 타이스와 달리 세자르는 깍듯한 예의를 지켰다. 귀족의 품성이 절로 느껴지는 세자르가 디에고는 마음에 들었다.


 “밖에서는 세자르 루이스로만 통합니다. 아르마의 이름이 나오면 분명 몬테로가 저를 죽이려 할 것이기에.”
 “사정은 알고 있네. 노고가 크겠군.”
 “돈 디에고에 비할 바 되겠습니까.”
 “든든한 아군을 얻게 되어 기쁘네. 어린 나이지만 그대 같은 자가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과찬이십니다.”


 럼 잔을 주고받는다. 혀끝에 감도는 맛이 달다. 술 맛이 달다는 건 기분이 좋다는 증거였다. 디에고는 연방 웃었다. 모든 것이 뜻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내 계획을 말해야겠지.”
 “청해 듣고자 합니다.”
 “폭도들을 이용할 생각이야.”
 “폭도들을요?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몬테로가 폭도들을 지원하고 왕정을 적대시했다는 증거를 만들어 폭로시킬 생각이네. 반역죄가 되겠지. 몬테로와 폭도들을 한꺼번에 소탕할 생각이야.”


 그럴싸한 계획이었다. 세자르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몬테로는 자신의 미지근했던 행동을 후회하게 될 걸세.”
 “처음부터 계획하신 겁니까? 폭도들을 이용한다는 계획을?”
 “그래. 지금이 가장 적절한 시기야.”
 “현안이시군요. 뜻대로만 된다면 아주 깔끔하게 처리되겠습니다.”
 “더해, 타이스와 왕이 나를 지지한다면 몬테로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확실한 증거를 만들어야 해. 그러기 위해서 자네들이 좀 움직여 줘야 할 거야.”


 세자르는 빙긋 웃고 무엇이든 명령만 내리라 청했다.


 “자네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폭도들 중 가장 큰 규모의 집단이 있을 걸세. 자네가 거기에 접근하게나.”
 “과연. 저 자신이 몬테로의 대변인이 되는 것이군요.”
 “머리가 잘 도는군. 최대한 깊게 연루되게.”
 “제 보신은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물론. 몬테로가 처단되면 자네는 차기 아르마 공이 될 걸세. 솔레즈 가문과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거래는 이뤄졌다. 세자르는 디에고가 원하는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 약조했다. 세자르가 물러가고 디에고는 참을 수 없는 유쾌함을 만끽했다. 어떻게 이리도 쉽게 풀린단 말인가! 디에고가 특별히 손쓰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이는 손이 있고, 그 손은 몬테로 자신의 업보였다.
 세자르는 어수룩했다. 디에고는 물론 약조한 대로 몬테로가 처단되면 그를 아르마 공으로 추대해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권력까지 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몬테로가 나가떨어지면 추풍낙엽 같은 형태가 될 것이다. 다른 가문들은 디에고에 대적하지 못한다. 명실상부 유일한 공신 가문으로 권력을 손아귀에 쥔다.


 “그래. 우선은 저 무능한 왕부터 어떻게 해야겠군.”


 여색에 취해 국정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몬테로의 손아귀에서 조종당하는 늙은 왕을 처리한다. 자리에 맞는 새로운 인물을 찾아내 올리리라. 몬테로에 가담한 귀족들을 포섭한다. 그리고……


 “내 것이 되는가, 흑진주.”


 거의 다 손아귀에 들어온 것과 다름없는 아름다운 창녀를 보란 듯이 취한다. 몬테로가 3년 동안 감금했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디에고도 비슷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도 찾지 못하는 깊은 곳에 숨겨두고, 오로지 디에고만 바라보고 디에고만 원하게 하고 싶었다. 아니. 그렇게 만들 것이다.
 다 이룰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룰 수 있다. 디에고는 확신이 들었다. 신기할 만큼 실패할 것이라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계시를 받은 예언자처럼, 그가 생각하고 꿈꾸는 모든 미래의 일들이 현실이 되는 것 같았다.
 디에고는 잔에 럼을 가득 따르고 허공을 향해 건배했다.


 “장밋빛 운명과 아름다운 나라에 바쳐.”


 짙은 호박색 액체가 보석처럼 빛났다.


 


* * * * *


 


 세자르는 폭도들의 무리에 잘 섞여 들어갔다고 알려왔다. 폭도들이 움직이는 데 필요한 자금을 대 주고, 디에고가 지시하는 폭도 제압과 체포 사실을 사전에 통보받고 피하게 해주는 등 전략적으로 큰 몫을 담당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남은 것은 왕 앞에서 몬테로의 죄와 진상을 밝히고 그를 반역죄로 몰아가는 것뿐이었다.
 거사 전날 밤, 타이스가 디에고의 저택으로 찾아왔다. 놀라운 일이었다. 왕을 제외하곤 어떤 남자의 거처에도 스스로 가지 않는다는 콧대 높은 여자가 직접 디에고를 찾은 것이다.


 “어쩐 일인가, 흑진주. 놀라운 일인데.”
 “돈 디에고는 계집을 움직일 수 있는 분 이시니까요. 면박을 주시진 않겠지요?”
 “그럴 리가. 무슨 일이지?”
 “좀 더, 우리는 깊은 이야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은밀하고 개인적인?”
 “그래요.”


 디에고는 당연한 순서로 타이스를 침실로 안내했다. 모든 사용인을 물렸다. 타이스의 볼이 상기되어 있었다. 특유의 향기가 공기를 지배했다. 천천히 타이스의 코트를 벗기고 드러난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드디어 내일이군요.”
 “많이 흥분했군. 기쁜가?”
 “기뻐요. 달아올라서 어쩔 줄 모르겠어요. 몸이 불타는 것 같아.”
 “식혀야겠군.”
 “아뇨. 더 타오르게 해 주지 않겠어요?”


 타이스가 디에고의 가슴에 몸을 기댔다.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나! 디에고는 쾌재를 부르며 난폭하게 키스했다. 성급하지만 확실한 손짓으로 타이스의 드레스를 벗기고 미끈하고 풍만한 몸을 더듬었다. 침대에 갈 틈도 주지 않고 바닥에 무릎 꿇렸다. 굴욕적으로 봉사하라 명령했고 타이스는 기꺼이 따랐다.
 음란한, 최악의, 더러운, 질척한, 광적인, 배덕의,
 화간을 빙자한 강간과 다름없이, 원초적 욕망의 발로, 폭력적인,
 디에고는 타이스를 죽기 일보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그는 이미 인간이기를 거부하고 폭발해버린 짐승이었다. 황홀한 감각이었다. 타이스의 향기에 흠뻑 도취되어 현실이 아닌 환상 속에 살게 된 것 같았다. 역시 이 여자는 지독하다. 지독하기 짝이 없다. 남자를 이 지경까지 만들 수 있는 여자가 어디 흔하던가. 디에고는 킬킬거리며 타이스의 목을 죈 손에서 힘을 풀었다. 혼절했다.


 “넌 이제 내 것이다.”


 타이스의 목에 남은 선명한 손자국을 어루만지며 흡족하게 웃었다. 아침이 밝아왔다. 육체의 피로가 몰려왔지만, 정신은 맑고 선명했다. 타이스는 금세 깨어나지 못했다. 하인들에게 잘 돌보라 명하고 디에고는 입궁 준비를 했다.


 “세자르는? 오늘 아침 찾아오겠다고 했을 텐데.”
 “급한 일이 생겨 오지 못한다고 연락하셨습니다.”
 “그래? 드문 일이군. 상관없겠지. 흑진주를 잘 모시도록.”


 집사에게 명하고 마차에 올랐다. 남아있는 타이스의 잔향을 음미했다. 승리의 아침을 위한 훌륭한 전희다. 평소보다 궁성에 배치된 병사들이 많았다. 어제 디에고가 지시한 그대로였다. 만일을 위해 퇴로를 막았다. 몬테로는 나라 안에서도 알아주는 실력가였다.
 아침 조회가 있는 회장으로 향했다. 많은 귀족이 디에고에게 인사했다. 아직 회장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 앞에서 뒷짐을 진 채로 서 있는 풍채 좋은 남자가 유독 눈에 띄었다. 몬테로 였다.


 “어서 오시오, 돈 디에고. 좋은 아침이로군.”
 “간밤에 편히 주무셨소?”
 “못 잘 이유라도 있겠소. 얼굴이 좋아 보이는데 즐거운 일이라도?”
 “아무렴, 있고말고. 돈 몬테로와 나눌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오.”


 보이지 않는 기 싸움에 주변 귀족들이 침묵했다. 정시가 되어 회장 문이 열리고 귀족들이 입장했다. 모두가 자리를 찾아 착석하자, 뒤늦게 왕이 나타나 상석에 자리했다. 왕의 심기가 좋지 않아 보였다. 이런 날은 대체로 타이스가 왕의 뜻에 따르지 않을 때임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시종장의 구령에 따라 경례했다.


 “어제도 짐의 나라는 평온했는가?”
 “물론입니다. 전하. 오늘도 평온할 것이며 전하의 치세 영원토록 평온할 것입니다.”


 형식적인 인사말이 오갔다. 각지의 영지 문제와 보고가 이어지고, 돈 아르마 몬테로의 차례가 돌아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전하, 그리고 수많은 충신들께 아룁니다.”
 “말해보라.”
 “소신은 이 자리에서 무척 유감스러운 일 하나를 말하고자 합니다. 이는 국가의 손실이며 슬픔이 될 것입니다.”


 회장 안이 술렁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디에고도 짐작되지 않았다. 몬테로는 좌중을 진정시켜 한숨 끊어내고 이어 말했다.


 “이 회장에 있는 이들 중, 누군가가 반역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린가, 몬테로!”


 왕이 거세게 반발했다. 혼란이 커졌다. 디에고는 그 순간 뭔가 크게 뒤틀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려 왕정을 끌어내리려는 폭도들에게 가담하여 전하를 욕보이고 이 나라를 뒤엎으려는 망측한 짓을 저지르려고 하고 있습니다. 소신은 공신이며 전하의 충성스러운 가신으로서 이 사태를 가만두고 볼 수 없습니다.”
 “누구냐, 누가 그런 짓을 한단 말이냐!”
 “잠깐, 돈 몬테로! 그게 무슨 헛소리란 말이오!”


 디에고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몬테로가 하는 말은 디에고가 해야 할 말이었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사태였다. 몬테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디에고를 경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공이 더 잘 알 것이오, 돈 디에고.”
 “뭐……!”
 “반역자는 당신이다!”
 “어처구니가 없군! 무슨 근거로!”
 “근거? 어디든지 있지.”


 몬테로의 말이 끝나자마자 회장의 문이 열렸다.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검은 드레스를 입고 엉망으로 다뤄진 흔적이 역력한 타이스였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왕이었다.


 “타이스! 왜 그러느냐, 그게 무슨 꼴이냐!”
 “아아, 전하!”


 타이스는 울며 왕좌로 달려갔다. 왕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디에고는 일이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디서부터? 대체 어디서부터!


 “누구냐, 누가 널 이 꼴로 만들었단 말이냐?”
 “돈 디에고입니다. 돈 디에고가 절 이 꼴로 만들었습니다! 너무합니다, 아무리 천한 출신이라지만 어떻게 제게 이런 수치와 모욕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타이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그건 네가-”
 “네 이놈 디에고 살바토르, 감히 짐의 여자에게 이런 몹쓸 짓을 했단 말이냐!”
 “전하, 그것은……!”
 “전하, 저자가 한 일의 증거들입니다. 보십시오, 돈 디에고의 인장이 찍힌 명령서들입니다! 타이스가 해내었습니다. 소녀가 목숨을 걸고서 반역자의 손에서 빼낸 것입니다!”


 타이스는 손에 든 종이 뭉치를 왕에게 건넸다. 그것은 확실히 디에고의 인장이 찍힌, 폭도들을 지원하는 명령이 담긴 명령서였다. 세자르에게 보낸 것들이었다. 세자르? 세자르가 배신했나? 아니, 원래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그래서였나?
 병사들이 몬테로의 외침에 들이닥치고 디에고를 포박했다. 저항의 움직임은 무의미했다. 디에고를 따르는 많은 귀족이 반발했지만, 객관성을 잃고 분노하는 왕을 등에 업은 몬테로에 대항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타이스, 이 더러운 창녀가, 네가 감히, 감히!”


 디에고는 이성을 잃었다. 끌려 나가는 와중에 타이스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타이스는 비명을 지르며 귀를 틀어막으며 울었고, 그럴수록 왕은 진노했다. 당장 처형하라 날뛰는 왕과 항변하는 귀족들을 몬테로가 능숙하게 진정시켰다.


 “정확한 조사가 진행될 것이오. 나 역시 돈 디에고가 그런 짓을 했으리라곤 생각지 않소. 전하, 가하시다면 이 일에 대한 진상 조사를 소신에게 맡겨주소서.”
 “당장 쳐 죽이래도!”
 “아니 됩니다. 이럴수록 평정을 찾으시옵소서. 우선은 전하의 사랑스러운 흑진주를 돌보심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래, 네 말이 맞다. 낱낱이 조사해 보고토록 하라. 자아, 울지 말아라 타이스. 잘 해주었다. 너야말로 이 나라의 충신 중의 충신이다. 가자꾸나. 얼마나 아프더냐.”
 왕이 타이스를 보듬어 자리를 떴다. 왕에게서 권한을 넘겨받은 몬테로가 지시를 시작했다. 끝났다. 자리에 남은 귀족들은 예상했다. 이것으로 돈 솔레즈, 디에고 살바토르는 끝이었다


 


 4.


 세자르는 디에고가 보내온 명령서를 쥔 채로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메스껍다. 피로했다. 머리맡에 인기척이 났다.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손가락 사이로 올려다보았다. 하얀 옷을 입은 수호자가 비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건가? 그냥 끝내버리면 되잖아.”
 “쉽게 말하지 마라.”
 “의외였지, 돈 디에고의 패는. 그런 식으로 접근할 줄은 생각도 못했지?”
 “그래. 타이스가……”
 “실망하던가? 물론 했겠지.”


 에두아르도가 테이블 위에 올려둔 세자르의 전대에서 예리하고 얇은 단검을 꺼냈다. 섬세한 세공을 손가락 끝으로 훑고 칼집에서 꺼내 날을 불빛에 비췄다. 조금만 힘을 줘서 휘두르면 부러질 것 같이 얇았지만, 그렇기에 더 기품 있고 아름다운 칼이었다. 세자르가 가지고 다니기에는 지나치게 여성스러웠다.


 “뭘 고민하나, 벨레차 레온. 몬테로를 처단해. 너와 타이스의 오욕을 씻어버릴 절호의 기회라고.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신 오지 않을지도 몰라. 하늘의 안배를 무시할 생각인가?”
 “……”
 “너도 타이스도 불쌍해. 이 칼 같지. 아름답고 예리하지만 실제로 휘두르면 금방 부러져 버려. 평생 장식용으로 사는 수밖에 없어.”
 “그쯤 해 둬.”
 “어이쿠 무서워라. 뭘 방황해?”


 칼을 다시 칼집에 넣고 내려놓는다.


 “세자르.”


 발치에서 타이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울음에 젖은 목소리였다. 하얗게 질려 어쩔 줄 모르고 주저앉았다. 에두아르도는 낮게 낄낄거렸고, 세자르는 안타까운 손길로 타이스의 볼을 쓰다듬었다.


 “얼굴이 엉망이다.”
 “세자르,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지? 몬테로를 죽이고 싶어. 하지만……”
 “알아. 알고 있어. 울지 마.”
 “신파가 따로 없잖아? 몬테로는 뭐라고 했나?”


 세자르와 타이스의 모습에 이골 내며 에두아르도가 끼어들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그래. 아무것도. 분해. 분해. 그 남자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알고서 그러는 거야. 분해!”


 가슴을 쥐어뜯으며 통곡한다. 타이스의 울음소리는 처참했다. 세자르가 어떻게 하지 못하자 에두아르도가 욕을 퍼부으며 타이스의 뺨을 후려쳤다.


 “닥쳐! 시끄러워!”
 “그만하게 에두아르도!”


 세자르가 제지하고 나섰다. 에두아르도는 잔뜩 성내며 세자르의 손을 뿌리쳤다.


 “그렇게 울며 지랄할 거면 그냥 몬테로를 죽여 버려! 폭도들 따위 알게 뭐야! 뭘 성인군자처럼, 뭘 위한답시고 이러고 있나, 너희 둘은? 나라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 않나! 그깟 혁명가 몇 죽는다고 손해 볼 건 뭐야? 왜 본심에 충실하지 못해? 몬테로를 죽여. 디에고 살바토르와 손잡고 몬테로를 끌어내리고 죽여!”
 “못…… 못해, 못해. 할 수 없어. 어떻게…… 내 이기심 때문에 그 사람들을 희생시켜?”


 타이스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에두아르도가 욕지기를 내뱉고 떠나버렸다.


 “세자르…… 당신은?”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이다. 어차피 돈 디에고가 권력을 잡든 돈 몬테로가 권력을 잡든 변하는 건 없어. 귀족들 간의 치졸한 권력 싸움이다. 하지만, 앞날을 생각한다면 돈 디에고의 손을 잡을 수는 없어.”
 “기다려야 돼? 얼마나 기다려야 하지?”
 “타이스. 몬테로에게서 도망칠 때 어떻게 하기로 했나.”
 “두 번 다시, 나 같은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어……”


 세자르가 온화하게 웃었다. 그래 타이스. 그렇다.


 “그런 세상을 만들려면 왕정은 없어져야 돼. 그리고 그걸 이뤄줄 이들을 여기서 우리들의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희생시킬 수는 없다. 조금만 참자.”
 “……알았어.”
 “몬테로와 이야기해 두도록 해. 돈 디에고를 끌어내린다. 나는 혁명가들이 혹시라도 피해 입지 않도록 대비해 두겠다.”
 “디에고 살바토르는 어쩜 그렇게 최악의 패를 뽑아버린 걸까. 좀 더 멍청한 사내였다면 좋았을 텐데.”
 “아니. 멍청하기 때문이야. 애초에 몬테로에 대적할만한 사내가 아니었다는 거다. 그뿐이야.”


 타이스가 다리에 기대왔다. 상처받은 여자를 어루만졌다. 동시에 자신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세자르는 몬테로의 손에 살해당한 전대 아르마 공을 떠올렸다. 타이스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처럼 대해 준 사람을 죽인 몬테로에 대한 복수심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왔다. 디에고의 제안은 드디어 복수의 기회를 잡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두 대립 축은 세자르와 타이스에게 각기 다른 지평을 제안했다. 디에고는 몬테로를 끌어냄과 동시에 왕정의 권위를 세우고, 반발하는 폭도들을 처단하겠다고 했다. 몬테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실지로 몬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타이스가 뻔히 디에고와 소통하며 그 자신을 끌어낼 꿍꿍이를 짜고 있다는 것을 알아도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몬테로의 손아귀에서 놀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타이스가 미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세자르는 깊은 패배감을 느끼고 울분을 참아냈다. 냉정하게 생각해야 했다. 손에 든 명령서를 내려다본다.


 “아직 때가 아니야. 그런 것뿐이야.”


 자신에게 들려주듯이 말했다. 뎅.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무겁게 울려 퍼져 가라앉았다.


 


* * * * *


 


 증거는 몬테로가 말한 대로 ‘어디든지’ 나왔다. 그가 실제로 작성해 세자르 편으로 보낸 명령서는 폭도들을 지원하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그가 작성하지 않은 명령서 또한 대거 쏟아져 나왔다. 몬테로가 잡아들인 폭도는 디에고가 자신들의 후원자였다고 주장했다. 조작된 증거가 분명했고 진실 공방이 한동안 이어졌지만, 결정적으로 왕의 지지를 업은 몬테로를 무너뜨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왕은 타이스의 일만으로도 이미 디에고를 불경죄로 처형하라 날뛰고 있었다.
 엄중한 감시를 받으며 디에고는 감금되었다. 디에고가 어떤 발언을 해도 거짓이었다. 측근들은 멀어져 갔다. 오히려 몬테로와 타이스에게 매수된 솔레즈 가문의 일부 분파가 디에고를 도마뱀 꼬리처럼 잘라내고 보신을 꾀하여 상황은 손쓸 여지도 없을 지경이 됐다. 디에고는 하늘을 저주했다. 타이스를 저주했다. 요망한 년, 더러운 년, 화냥년, 우라질 년!
 나라의 정의로운 재판소는, 그가 감금된 지 보름 만에 디에고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면회입니다.”


 처형 전날, 디에고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지난날의 영예의 부질없음에 통곡하고 절망했다. 딱딱한 침대 위에 너덜너덜해진 몸을 던진 채로 수치스러운 시간이 어서 끝나기를 바랐다. 그런 그에게 마지막 면회자가 찾아왔다.


 “흉한모습이군요, 돈 디에고.”


 철문에 달린 작은 철창 너머로 여린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타이스였다. 더는 분노할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별 볼일 없는 꼴을 조롱하러 왔나?”
 “그럴 리가요. 위로를 전하러 왔습니다.”
 “위로라고?”
 “정말이에요. 지금 상황은 제게 있어서도 심히 유감입니다.”
 “유감이라. 왜였지?”


 타이스는 잠깐 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선택한 방법이 우리에게는 치명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자르의 목소리였다. 같이 온 건가? 디에고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한패였다.


 “몬테로를 제거하기 위해 폭도들을 이용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폭도가 사라지는 걸 원치 않습니다.”
 “……폭도와 교류하고 있었던 거군.”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랬나. 그래서였나. 애초에 타이스와 세자르는 귀족의 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왜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을까. 무지에 후회가 밀려왔다. 타이스의 목소리가 이어 들렸다.


 “고심했어요. 우리가 몬테로에게 가진 증오는 거짓이 없습니다만, 왕정을 종식하기 위해선 혁명가들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권력을 잡으면 분명 그들을 없애려 하겠죠.”
 “그럴 테지. 몬테로는 뭘 약속했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걸 믿나?”
 “믿지 못할 이유는 없지요. 처음, 당신이 제게 조력을 구하러 왔을 때 제가 물었지 않습니까? 제가 몬테로와 한패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으시냐고. 되묻는 당신에게 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몬테로가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제가 이바지하고 있는 바에 대해서 당신은 아무 것도 모르시지요. 제가 권력을 가진 이유도. 그렇기에 둘 중 하나가 사라져야 한다면, 제게 있어서는 몬테로가 남는 편이 당신이 남는 것보다 더 유익합니다. 아주 근소한 차라도.”


 타이스의 목소리는 굴욕에 젖어 있었다. 어떤 모든 진실 보다 타이스의 감정만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참으로 지독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욕망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여자다. 디에고는 쉰 목소리로 폭소를 터트렸다.


 “딱하군. 자네들이나 나나 몬테로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꼴이야.”
 “애도하시겠습니까?”


 에두아르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호자도 왔나? 애도라. 처음에 자네가 그렇게 말했지. 그래. 애도하겠네. 자네들에게, 나에게, 그리고 이 나라에.”
 “살펴 가십시오.”
 “잘 가게.”


 목소리들이 떠나갔다. 디에고는 벽을 마주 보고 무릎 꿇고 앉아, 신에게 마지막으로 긴 기도를 올렸다.


 다음날, 솔레즈 공작 디에고 살바토르 데 솔레즈는 시민이 보는 앞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늙은 왕과 아르마 공작 몬테로가 직접 형을 주관했다. 디에고와 공모한 폭도들에 대해 몬테로는 형식적인 조치만 했을 뿐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신경 쓸 필요도 없는 날파리’라고 일축했다. 폭도들의 진압보다도 몬테로는 솔레즈 세력이 물러나며 공백이 된 권력을 재정립하고 지배하는 일이 더 시급했다. 반발세력을 억누르고, 왕을 조종하는데 더 신경을 썼다. 그 일들의 중간에 타이스가 있었다.
 왕의 침실에서 나오며 돌아가는 복도에서 타이스와 몬테로가 마주쳤다.


 “억울하겠군.”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물론 이렇게 끝나면 시시하지. 걱정하지 마. 네가 왕을 잘 다스리고 내게 거스르지 않는다면, 나 역시 네가 뒤에서 저지르는 사소한 일 정도는 관대하게 넘어가 줄 테니까.”
 “반드시 죽일 거야.”
 “기대하지. 날 즐겁게 해 주게, 흑진주.”


 타이스는 거처로 돌아와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거울 앞에 섰다. 곧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을 손으로 꾹 눌렀다. 울면 안 돼. 울지 마.


 “잘했어.”


 거울에 세자르가 비쳤다.
 여자는 드레스 룸의 문을 열고 하얀 남자 옷을 꺼냈다. 표정이 차갑게 식어간다. 가슴을 누르고, 하얀 옷을 입고, 가발을 쓴다. 다시 거울 앞에 선다.


 “에두아르도.”


 거울에 타이스가 비친다.
 남자는 거울속에 나란히 선 세자르와 타이스를 보고 일그러진 표정으로 웃었다.


 “너희 둘 다 당분간 나올 생각하지 마. 쓸모없는 것들.”


 거울에 비치던 세자르와 타이스가 사라졌다. 거울에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사람이 비쳤다.
 방에는 한 사람뿐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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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lissa 11.09.24 00:05 댓글 수정 삭제
    뭐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그냥 박수 세 번 짝짝짝. 오랜만에 좋은 작품을 만난 것 같아 기분이 참 좋습니다. 타이스는, 세자르는, 에두아르도는 몬테로 뿐만이 아니라 읽는 사람까지 즐겁게 해주었군요. 읽는 내내 너무 좋았고, 그래서 너무 잘 읽었습니다.
    ㅡ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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