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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지 부러진 칼

2012.03.30 23:3903.30

 


부러진 칼



 분명 내 몰골은 참혹할 것이다. 울음은커녕 운신조차 힘들다. 부서지는 고통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싶다. 그러나 육체의 아픔보다, 긍지를 잃었다는 것이 더욱 참을 수 없었다.
 그 밤은 분명 달랐다. 비릿한 피 냄새.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살점들. 주인 모를 팔과 다리들. 익숙하게 보아온 풍경이었지만 분명 무언가 다른 것이 있었다. 운명이라든가 하는 거창한 것은 아니다. 그냥 그렇게, 부지불식간의 깨달음. 차가운 바람을 느낀 순간부터 예감했었던 것 같다.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였을까? 수 많은 주인 중 하나였을 뿐인데. 그 죽음이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이유가 말이다. 점차 초점을 잃고 흐릿해져 가던 눈동자. 결국 명멸(明滅)하던 생명의 빛조차 사라지고 깊은 어둠만이 남았던 게 기억난다. 무언가 외쳤던 것 같은데. 비명이었을까? 고통에 겨워서? 아니면 원통하다거나 억울하다는? 대의(大義)를 실현하기 전에 죽을 수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였다. 그래서 눈조차 감지 못했던가? 이젠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주인은 죽었다. 그리고, 나는 부러졌다.


 “아직도 밖에 눈이 오느냐?”
 “예, 어르신. 그칠 기미가 없네요. 남쪽엔 벌써 꽃이 폈다는데 왠 눈인지 원.”
 “올 겨울 추위가 좀 대단했느냐? 큰일이구나. 이 눈에 얼어 죽는 이들이 없어야 할 텐데.”
 “참, 소식 들으셨습니까? 동란(動亂)이 끝났다고 합니다.”
 “그러냐.”
 “그 심드렁한 말투는 대체 뭐랍니까? 기쁜 소식 아닙니까?”
 “좋구나.”
 “내 속만 터지지. 어르신은 정말 쇠 밖에 모르시는군요.”
 “안다. 마을 사람들이 돌아오겠지. 막둥이 아비도, 길상이 녀석도. 다들 기뻐하겠구나.”
 “곡 소리가 날 지도요. 줄초상이나 안 치렀으면 좋겠습니다.”
 “어허, 말이 씨가 된다고 했다. 말을 가려서 하라니까.”
 “하지만 어르신. 연사평의 전투가 아주 참혹했다고 합니다. 그제 밤 주막에서 본 장돌뱅이가 그러던걸요. 수백 구나 되는 시체를 다 처리하지 못해서 썩는 냄새가 이웃 마을까지 진동했다나 뭐라나. 어휴, 끔찍해라. 사실 말이지, 나라를 바꾸겠다 뭐다 해 봤자 뭐합니까. 나라님도 외척과 환관들 치마폭에 싸여 눈 뜬 장님이 된 지도 오래라던데요. 하물며 우리 같은 목숨들이야 양반님네 손가락 하나면 끽-할 하루살이가 아닙니까? 그저 입다물고 눈치나 보면서 살아도 목숨이나 부지할까 말까 한데, 칼을 들고 관군에 맞섰으니. 그저 죽은 사람만 억울한 거죠.“
 “그런 소리 말거라.”
 “말이야 바른 말이지. 과거를 보면 뭐합니까? 우리네 같은 서북인은 사람취급도 안 하는데. 게다가 전세에 인두세에 군역이다 뭐다. 뿐만입니까? 허구한날 성곽 짓는다고 동원이나 하고. 이러니 다들 천도장군(天道將軍)의 말에 혹할 수 밖에요. 뭐라더라? 맞다! 부위정경(扶危定傾)! 세도가와 탐관오리의 전횡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일어섰다.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여 바로 세우자! 라고 했다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붉은 깃발 아래 모여든 이가 기백을 넘어 수천을 헤아린다 합니다. 그만큼 억울한 이들이 많다는 거겠죠.”
 “어허. 말 조심하라 하지 않았느냐?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이 외진 산골짜기에 오긴 누가 온다고요? 어차피 뭐 이젠 다 끝난 일이네요. 평안감영(平安監營) 앞에 목이 걸렸답니다. 엄청난 장사였다고 하더라고요. 시신 수습만해도 장정 서넛이 달려들어야 겨우 가능했다던가. 하긴 그가 쓰던 칼이 무려 십 척의 길이에 무게가 이백 근이라면서요? 대체 그걸 어떻게 휘두른 거지? 반천인이라는 소문이 정말 맞나? 게다가 순금으로 만들었고 손잡이에는 온갖 보옥이 주렁주렁 박혀 있대요. 하늘이 내려준 칼이라는 소문도 있고, 왜나라 명장이 만들었다고도 하고. 하여튼 명검 중에 명검이라나 뭐라나.”
 “허튼 소리에 귀 기울일 것 없다.”
 “그런데요, 어르신. 그 칼이 글쎄 감쪽같이 없어졌다네요? 사람들은 천도장군의 혼이 칼 속으로 들어간 거라고, 아직 죽지 않은 거라고 수근대요. 언젠가 다시 부활할거라나 뭐라나. 덕분에 관아에서도 골치인 모양입니다. 상금도 어마어마하대요. 찾기만 하면 팔자 고치는 건 시간 문제라던데, 이 참에 나도 한번 찾아봐? 혹시 압니까?”
 “석삼아!”
 “아이고 깜짝이야. 귀청 떨어지겠습니다, 어르신. 저는 뭐 농담도 못합니까? 농담입니다, 농담.”


 여섯 척(尺)의 길이. 일곱 근(斤)의 무게. 적철로 만든 날의 넓이는 세 촌(寸). 자루는 흑단목으로 만들어졌으며, 감색(紺色)의 끈을 교차로 꿰어 둘렀다. 날에 적힌 두 글자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문양도 장식도 없는 단순한 형태의 환도(環刀). 내 본 모습은 이러하다. 그러나 부러진 지금은 세 척을 넘을까 말까 하다.
 주인은 기골이 장대한 사내였다. 백정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태생 때문인지 칼 다루는 솜씨만큼은 일품이었다. 살아온 세월이 순탄하진 않았던 듯, 세상에 대한 원망과 증오로 가득한 이였다. 그의 주변에 몰려든 자들도 대부분 그러했다. 아내를, 자식을, 재산을 나라에 빼앗기고 결국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자들. 나는 그런 그들이 좋았다. 그들이 뿜어내는 살의(殺意)와 독기(毒氣)가 좋았다. 그것에서는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어르신.”
 “또 무슨 소릴 하려는 게냐.”
 “아얏- 머리 때리면 머리 나빠진다던데 허구한날 왜 꿀밤입니까? 대갈통이 남아나질 않겠습니다!”
 “나빠질 머리라도 있냐? 너스레 떨 시간이 있거든 풀무질이나 한 번 더 하거라.”
 “에이, 어르시인~ 한번만, 딱 한번만 메질을 해보면 안될까요?”
 “아직 멀었어, 이 놈아. 더벅머리도 올리지 못한 것이 어디 쇠를.”
 “장가 못 간 거랑 야장(冶匠) 기술을 배우는 것이 무슨 상관…… 아얏! 그만 좀 때리십시오!”
 “시끄럽다! 아랫마을 일거리를 마치려면 밤을 새도 모자란 판국에! 어서 불이나 지피거라.”
 “그게 다 어르신이 만든 연장이 튼튼하고 오래간다는 소문 때문이죠! 재 너머 큰 마을의 대장간에서 만든 것보다 훨씬 좋다고들 하던데요. 그러고 보니 어르신이 이 마을에 온지도 십 년이 넘었나? 처음에는 다들 이상한 사람이라고 무서워했지요. 그런데 이젠 어르신이 만든 연장 없이 농사를 어떻게 짓냐고 할 정도…… 헛! 합니다, 밟으면 될 거 아닙니까?”


 이 기운은? 불이다. 분명 눈이 내리고 있었는데. 여긴 어딜까?
 내가 태어난 곳도 불이 가득한 곳이었다. 온 몸이 녹아 내릴 것 같은 열기와 부서질 것 같은 한기를 번갈아 느꼈던 생생한 기억. 그 속에서 나를 몇 번이고 접고 접어 두들기던 손길. 또렷하지 않지만 내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첫 기억이었다.
 만든 이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첫울음을 터트렸을 때의 웃음소리만은 생생히 떠올릴 수 있다. 그것은 자부심이었다. 나를 자랑스러워하는 마음. 그 소리에 처음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살아있다는 느낌. 그 생생한 기쁨.


 “낫과 호미를 좀 더 만들어둬야겠다.”
 “왜요?”
 “동란도 끝났고, 겨울에 눈도 많았으니 올 농사는 분명 풍작일 게다. 미리 준비를 해둬야지. 그나저나 무쇠가 충분할까 모르겠다. 석삼아, 오는 장에 가거든 철점에 들르거라. 미리 연통을 넣어놨으니 생철을 줄 것이야.”
 “무쇠말고 시우쇠도 좀 구해오면 안 될까요?”
 “숙철을? 그 비싸기만 한 걸 뭐에 쓰려고?”
 “그야……”
 “무기를 만들어 보고 싶은 게냐?”
 “어르신은 왜 칼이나 창을 만들지 않으십니까? 어르신의 솜씨를 보면 농기구나 만들 분은 분명 아닙니다. 아는 것도 많으시고요. 왜, 저번에 들른 상인도 그랬지 않습니까? 어르신이 칼을 만들어주기만 한다면 비싸게 사겠다고요.”
 “왜? 네 녀석은 농기구 만드는 게 싫으냐?”
 “싫습니다. 이깐 거 만들어야 봐야 몇 푼이나 한다고. 전 칼을 만들고 싶습니다.”
 “사람 목숨이나 해하는 걸 만들어서 뭐 하려고? 돈이 벌고 싶은 게냐?”
 “돈보다도 기왕 야장 일을 배우기로 한 이상 최고가 되고 싶습니다. 이런 시골구석에서 호미나 괭이를 만드는 걸로 인생을 끝내고 싶지 않습니다.”
 “무기를 만든다고 최고가 되는 것은 아니다.”
 “농기구야 아무라도 만들 수 있지만, 칼이나 창은 아무나 만들 수 없잖습니까? 전 궁에 들어갈 겁니다. 간장(干將)처럼 이름난 명장(名匠)이 되고 싶습니다. 어르신도 제게 분명 재능이 있다 하셨잖습니까?”
 “무기 만들 생각부터 하다니. 쯧쯧, 네 녀석은 한참 멀었다.”
 “덜 되었다, 멀었다, 자꾸만 그러시는데.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습니다. 어깨너머로 쇠질을 배운지도 벌써 두 해입니다. 자신 있습니다. 한번 맡겨봐 주십시오, 어르신!”
 “시끄럽다! 농기구를 하찮게 보는 녀석이 무슨 명장이 된다고! 무릇 ‘농사는 나라의 근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했느니라. 네 녀석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먹고 입고 한 것도 모두 땅이 준 것이다. 농사를 무엇으로 짓느냐? 바로 농기구 아니냐. 우리가 있으니 농부가 있는 거고, 그들이 있으니 우리가 밥을 먹고 살 수 있는 것이야. 이러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면 네 녀석은 결국 쇠에게 잡아 먹힐 게다!”
 “하지만, 어르신!”
 “시끄럽다 하지 않았느냐! 그만 하거라.”


 내 날은 붉은색이다.
 덕분에 처음 본 이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얼마나 많은 피를 머금었기에 날이 붉으냐고. 피 빛이라니 불길하다고 말이다. 뿐 만인가. 살귀가 붙은 칼이라든가, 저주받은 요도라든가, 사람을 홀리는 물건임이 분명하니 주인마저 베어버릴 것이라고,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런 말을 하던 이들의 눈이 하나같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는 점도 우습지만, 더욱 더 재미있는 것은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붉은색이었다는 것이다.


 [게, 아무도 없느냐?]
 “어라, 이 늦은 시간에 왠 손님일까요?”
 “…….”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거기 누구……”
 “됐다! 내가 맞을 테니 너는 이만 돌아가거라.”
 “왜 그러십니까, 어르신?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혹시 아는 분입니까?”
 “신경 쓰지 말거라. 뭐하느냐 돌아가래도!”
 “아이구, 깜짝이야! …예, 어르신. 갑니다, 가요.”
 “석삼아.”
 “네, 어르신?”
 “아까 한 말 말이다. 모진 소리라 생각지 말거라. 다 널 위해서 한 말이니까.”
 “병 주고 약주십니까, 쳇.”
 “삐치지 말고. 내일은 손이 바쁠 테니 일찍 나오도록 해라. …내 봐서 담금질을 가르쳐 주마.”
 “정말입니까, 어르신? 약속하셨습니다. 두말하기 없깁니다!”


 만든 이는 나를 쓰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 동안 어둠 속에 나를 가두었다. 마치 만든 것으로 족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고통이었으며 태어난 본분을 다할 수 없다는 절망과도 같았다. 그것이 체념이 될 무렵 하나의 손길이 나를 건져냈다. 그 손은 만든 이의 것과 비슷했지만 어딘가 달랐다. 어딘지 불안해하는 손이었지만 곧 다른 이에게 건네졌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나에겐 처음으로 세상의 빛을 보았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 후로도 나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다. 어떤 이는 돈으로 나를 사기도 했고, 어떤 이는 뺏기 위해 주인을 죽이기도 했다. 때로는 내 스스로 주인을 택한 적도 있었다.
 처음 사람을 베었을 때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하다. 갇혀있는 동안 여러 번 상상했었다. 벤다는 것이 어떤 기분일 지 말이다. 희열을 느낄까? 기쁨일까? 짜릿함? 아니었다. 그 어떤 생각과도 달랐다.
 베었다 생각한 순간의 느낌. 그 것은 무거움이었다. 뼈를 베는 무거움, 날을 타고 흐르는 피의 무거움, 죽어가는 이가 느낄 고통의 무거움. 그 것은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베지 않으면 베인다. 명검이니 요도니 살검이니 하는 것은 모두 인간이 하는 말이다. 칼은 칼일 뿐. 단지 얼마나 예리하냐, 빠르냐, 베느냐 베지 못하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그 뿐이다.


 “오랜만일세, 장도장(粧刀匠). 나를 알아보겠는가?”
 “소인이 어찌 몰라 뵙겠습니까? 그 동안 별고 없으셨는지요, 내금위장 영감.”
 “한참 찾았네. 이 먼 곳 변방까지 흘러 들었을 줄 누가 알았겠나.”
 “먼 길을 오셨을 텐데, 누추하지만 앉으시지요.”


 피다. 희미하지만 분명 피 냄새다. 오래된 것 같이 묵은 듯한 냄새마저 난다. 게다가 쇠의 비릿함도 느껴졌다. 그래, 이것은 무인(武人)의 기운이다. 칼을 쓰는 자다.
 내 주인도 칼을 쓰는 자였다. 그는 야차와 같은 사내였다. 기쁠 때는 웃고, 슬플 때는 울고, 필요하다면 서슴없이 베는, 마치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과 같은 자유분방함을 지닌 영혼이었다면 이 자는 그와 다르다. 낯설었다. 절제된 기운이다. 안으로 깊숙이 갈무리된 강함이다. 드러나지 않은 강함이다. 이 자는 강하다! 내 온 몸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동시에 피가 뜨거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부러지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 부딪치고 싶다. 저 자를 베고 싶다. 다시 한번 날을 맞대고 울고 싶다.


 “목이나 축이시지요. 갈증을 달랠 수 있을 겝니다.”
 “시원하군. 이제야 살 것 같네.”
 “산채뿐인지라…… 찬이 변변치 않아 송구합니다.”
 “숨이 흐트러진다 하여 곡차도 마시지 않던 자네가 아니었나?”
 “이십 년도 더 지난 일입니다. 이젠 이 늙은이의 유일한 즐거움이지요.”
 “칼의 힘이냐 쥔 자의 강함이냐를 가지고 논쟁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리 되었나. 자네도 많이 늙었군. 백발 성성해진 걸 보면 말일세.”
 “영감은 그대로이십니다.”
 “예끼, 이 사람아. 믿을 소릴 하게. 무뚝뚝하던 자네가 이젠 농을 다하네 그려.”
 “세월 탓이겠지요.”
 “아까 나간 청년은 누군가?”
 “인근 고을의 아이입니다. 쓸만하다 싶어 기술을 가르치던 중입니다.”
 “허허, 아무래도 저 아이가 큰 복을 타고난 게로군. 자네의 기술을 전수받다니 말일세.”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과연 제 몫이나 할 지 두고 봐야지요.”
 “그건 그렇고 이런 곳이라니. 자네의 기술이라면 이리 궁핍하게 살지 않아도 될 텐데. 어인 영문인 지 모르겠구먼. 됐네. 묻지 않음세. 말해 줄 수 있었다면 이리 숨지도 않았을 테지.”
 “송구합니다, 영감.”
 “그래, 요즘은 무얼 만드나?”
 “괭이도 만들고, 낫도 만들고 이웃사람들이 필요하다고 하는 거라면 뭐든지 만들고 있습지요. 가끔은 소일거리 삼아 낡은 경첩도 고쳐주고 구멍 난 무쇠 솥을 때우기도 합니다.”
 “허허. 조선 제일의 장도장이 농기구나 만들고 무쇠 솥을 때우다니. 상상이 가질 않는군.”
 “과찬이십니다. 그나저나 이 먼 곳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내금위장께서 궁을 비우시다니요.”
 “지금은 도총관일세.”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소인이 옛 생각만 한 지라…… 승차를 경하 드립니다, 대감.”
 “자네와 나 사이에 격식은 그만둠세. 내 이리 걸음을 한 까닭은 어명 때문이라네.”
 “어명…이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군기시 제조(軍器寺 提調)를 겸하고 있네. 이리 말하면 대충 짐작 하리라 믿네만.”
 “……”
 “금상께서 자네를 불러 오라 친히 하명하셨네. 이번에는 야장의 태두(泰斗)로 삼겠다 하셨으니 자네도 이십 년 만에 승차한 셈인가? 껄껄- 선왕께서 자네를 무척 아끼셨지. 금상께서도 마찬가지 마음일세. 한양으로 돌아 가세나.“
 “비천한 소인을 아직도 잊지 않으셨다니 성은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하오나 이 몸 노쇠하여 칼을 벼리는 재주 또한 녹슨 지 오랩니다. 명을 거두어주십시오.”
 “어허, 어명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장도장 허가는 이미 죽고 없노라, 그리 말씀 올려주십시오. 부탁입니다, 대감.”
 “대체 무슨 연유인가?”
 “소인, 이제 칼을 만들지 못합니다.”
 “만들지 못 하다니?”
 “말씀 드린 그대로 입니다.”
 “어허…… 운검(雲劍)을 만든 자네가 아닌가? 이해가 가지 않네만. 연유를 설명해 보게나. 그렇지 않고서야 내 어찌 금상께 거짓을 고할 수 있단 말인가.”
 “이대로 묻히길 바랬건만…… 어쩔 수 없지요. 말씀 드리겠으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대감.”


 이 자의 기운은 내게 형을 떠올리게 했다. 솔직히 말하면 형제라고 부를 만큼 거창한 사이는 아니다. 우리 둘은 오히려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다.
 비록 날의 형태가 같았다고는 하나, 그는 검이라 불렸고 나는 칼이라 불렸다.
 그가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검이라면, 나는 베기 위해 만들어진 칼이었다.
 그는 나라의 명을 받아 만들어졌고, 나는 개인의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화려한 자였지만 나는 수수한 외관이었다.
 그만큼 기질도 성격도 달랐다.
 언제였던가? 단 하루였지만 그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태생에 자부심을 가진 그는 나에게 베기만 할 뿐인 칼은 단순한 쇠와 다를 바 없다고 했다. 칼이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들 때만이 비로서 빛을 발한다고도 했다. 그렇기에 자신이 빛이라면 나는 어둠이라고, 자신은 영원히 기억되겠지만 난 잊힐 존재라고.
 난 그를 비웃었다. 충분히 이길 자신도 있었다. 약했기에 쓸데없이 명분을 중요시하는 거라 생각했다. 내게 주인이란 손, 그 이상의 무엇도 아니다. 죽으면 어차피 다음 주인이 생길 뿐이다 벨 수 있는 것이야말로 칼의 진수다. 내가 가야 할 길은 오로지 그 하나뿐이다 라고 말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알아보시겠습니까?”
 “부러진 칼이 아닌가? 이걸 어이하여……아니, 이 붉은 검신은!”
 “그렇습니다.”
 “이 요사스런 물건이 어찌하여 이 곳에 있는 겐가? …설마, 자네?”
 “짐작하신 대로입니다.”
 “어허, 이 무슨 해괴한 일이 다 있나. 수검(守劍)을 만든 자네가 어이하여 살검(殺劍)을 만들었단 말인가?”
 "칼은 갈다(磨•硏)에서 나온 말입니다. 갈고 또 갈아 만든 것이 바로 칼입니다. 쇠를 다루는 장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최고의 칼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을 품습니다. 그 시절 소인도 그러한 자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저 쇠를 다루는 것 외엔 무엇도 중요치 않았습니다. 최고의 검을 만들고 싶다. 명장이 되고 싶다. 그 마음뿐이었습니다.”
 “자네는 운검을 만든 자가 아닌가? 이미 명장의 반열에 오른 자란 말이네. 그러니 금상께서도 친히 자네를 부르신 게 아닌가?”
 “운검으론 부족했습니다. 비록 어가를 지키는 고귀한 검이라 하나, 한낱 의장용 장식에 불과한 존재라 여겼습니다. 살아있는 검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세상 어느 것보다 날카롭고 무엇이라도 벨 수 있는 그런 검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심지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까지도 벨 수 있길 바랬습니다. 그래서 참혼(斬魂)이란 이름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을 봤나! 이 칼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는지 정녕 모르는 겐가!”
 “그리 책하지 않으셔도 압니다. 소인의 자만심이 부른 화라는 걸 왜 모르겠습니까.”
 “장인의 혼이라는 겐가. 이해할 수 없네만. 어찌 되었건 이 물건을 이대로 둘 수는 없는 일이네.”
 “용서하십시오, 대감. 어렵게 거두었습니다. 못 본 척 하여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역적의 무기일세! 이 걸 숨긴다는 게 무슨 의미인 줄 알잖은가!”
 “이 녀석을 거둔 연유를 물으신다면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디 한 번 들어 보세나.”
 “너무 노여워 마십시오. 딴 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한낱 미물에 불과할지라도 제 손으로 낳은 자식입니다. 세상 만물은 모두 제 할 바를 지니고 태어났다 들었습니다. 하물며 잡초도 그러할진대 이 아이인들 소임이 없었겠습니까. 비록 그것이 피를 부르는 일일지언정 할 일을 마쳤으니 됐다고, 이제 그만 쉬라고, 열심히 살았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말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거두었습니다.”


 그가 옳았던 걸까? 지키는 칼이었다면 달랐을까? 베기만 하는 칼이었기에 결국 베이고 만 걸까?
 부질없는 의문이다. 이제는 끝났다. 더 이상 날 수도, 울 수도 없다. 이대로 잊힌다 해도 상관없다. 내 본분에 충실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부러진 나는 더 이상 칼이 아니다.


 “이걸 상감마마께 올려주십시오.”
 “이건 호미가 아닌가?”
 “자고로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섬긴다(民以食爲天)’하였습니다. 오랜 전란으로 땅은 황폐해지고 곡식이 여물지 못해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이가 한 둘이 아닙니다. 부디 성상(聖上)께서 굶주린 백성을 굽어살피시어 더 이상 헐벗은 이들이 칼을 들지 않도록 해주십사 청하는 마음에서 올립니다. 칼의 시대는 물러갔습니다. 앞으로는 칼보다 호미가, 괭이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래서 더는 칼을 만들지 않겠다는 겐가……”
 “죽음을 만든 건 이제 그만두려 합니다. 이 아이도 더는 칼이 아닐 겝니다. 호미든 낫이든 괭이든, 무엇이 될 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만. 쇠에서 태어나 한번 죽음을 품어봤으면 이제는 생명을 품어 봐야지요. 이 녀석도 기뻐할 것입니다. 어쩌면 이 늙은이의 괜한 욕심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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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특정 시대, 특정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야장(冶匠): 대장간.
생철(生鐵): 무쇠. 아직 정련(精鍊)하지 아니한 쇠. 농기구나 가마솥 등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숙철(熟鐵): 무쇠를 불에 달구어 단단하게 만든 쇠붙이의 하나. 주로 무기를 만드는데 사용된다. 정철(正鐵) 혹은 시우쇠라고도 한다.
장도장(粧刀匠): 장검을 만들던 장인.
군기시(軍器寺): 고려•조선 시대에 병기(兵器)의 제조 등을 관장한 관청.
운검(雲劍): 임금을 호위(護衛)할 때 별운검이 차던 칼. 관직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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