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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호러 특집① 소나기

2009.08.29 00:3208.29


원작: 황순원
개작: askalai



    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보자 곧 윤도사네 증손녀 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녀는 개울에 손을 담그고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서울서는 이런 개울물을 보지 못하기나 한 듯이. 하긴, 서울에 맑은 개울물이 남아 있을 리가 없기는 했다. 어쨌든 소녀는 벌써 며칠째, 소년이 지나갈 때마다 물장난이었다. 그나마 어제까지는 개울 기슭에서 하더니 오늘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서 하고 있다.
    소년은 개울둑에 앉아 버렸다. 소녀가 비키기를 기다리자는 것이다. 요행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소녀가 길을 비켜 주었다.
    다음 날은 수련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좀 일찍 개울가에 도착했다. 이날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 세수를 하고 있었다. 검은 도포 소매를 걷어올려 드러난 목덜미가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소녀는 한참 세수를 하더니 물 속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얼굴이라도 비추어 보는 것일까. 그러더니 갑자기 물을 움켜 낸다. 고기 새끼라도 지나가는 듯.
    소녀는 소년이 개울둑에 앉아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날쌔게 물만 움켜 낸다. 번번이 허탕인데도 재미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꼭 잡고 싶은 사냥감이라도 있는지... 어제처럼 개울을 건너는 사람이라도 있어야 비킬 모양이다.
    그러다가 소녀가 물 속에서 무엇을 하나 집어낸다. 하얀 조약돌이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팔짝팔짝 징검다리를 뛰어 건너간다. 다 건너가더니만 홱 돌아서며, “이 바보.” 조약돌이 공기를 찢으며 날아왔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단발 머리를 나풀거리며 소녀가 달려간다. 뒤에는 스산한 달빛 아래 빛나는 갈꽃 뿐.
    굉음에 돌아보니 소년의 귓가를 스치고 날아간 하얀 조약돌이 박힌 나무가 쓰러지고 있었다. 소년은 소녀의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그대로 서 있다가 걸어가서 조약돌을 집어들고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 날부터는 더 일찍, 날도 저물기 전에 개울가로 나왔다. 소녀의 그림자가 뵈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소녀의 그림자가 뵈지 않는 날이 계속될수록 소년의 가슴 한 구석에 허전함이 자리잡는 것이었다. 주머니 속 조약돌을 주무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전에 소녀가 앉아 물장난을 하던 징검다리 한가운데에 앉아 보았다. 물 속에 손을 담갔다. 세수를 하였다. 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검게 타고 흉터진 얼굴이 그대로 비쳤다. 싫었다. 소년은 두 손으로 물 속의 얼굴을 움켰다. 몇 번이고 움켰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 일어나고 말았다. 소녀가 이리로 건너오고 있지 않은가.
    ‘숨어서 내가 하는 일을 엿보고 있었구나.’
    소년은 달리기 시작했다. 디딤돌을 헛디뎠다. 한 발이 물 속에 빠졌다. 더 달렸다. 미간이 아찔하더니 찝찔한 액체가 입술에 흘러들었다. 코피였다.
    소년은 한 손으로 코피를 훔쳐내면서 그냥 달렸다. 어디선가 ‘바보, 바보’ 하는 소리가 자꾸만 뒤따라 오는 것 같았다.
   
    보름이었다.
    수련을 마치고 개울가에 이르니, 며칠째 보이지 않던 소녀가 건너편 가에 앉아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모르는 체 징검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소녀 앞에서 한 번 실수를 했을 뿐, 여태 큰길 가듯이 건너던 징검다리를 오늘은 조심스럽게 건넌다.
    "얘."
    못 들은 체했다. 둑 위로 올라섰다.
    "얘, 이게 무슨 요괴지?"
    자기도 모르게 돌아섰다. 소녀의 맑고 검은 눈과 마주쳤다. 얼른 소녀의 손바닥으로 눈을 떨구었다. 자그마한 거북이가 팔다리를 휘젓고 있었다. 혹시나 돌연변이인가 싶었지만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평범한 민물 거북이인 듯 싶었다. 소년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남생이다, 그냥 남생이.”
    “그래? 재미없네.”
    소녀는 거북이를 휙 하니 물에 던져넣었다.
    곧 갈림길이었다. 여기서 소녀의 집까지는 아래편으로 삼 마장쯤, 소년은 위로 십리 가까이 걸어가야 한다. 소녀가 걸음을 멈추고 들판 저편을 가리켰다.
    “너, 저 산 너머에 가 본 일 있니?”
    “없다.”
    “우리, 가보지 않으련? 시골 오니까 혼자서 심심해 못 견디겠다.”
    소년은 주저했다.
    “저쪽은 위험하다던데. 역귀가...”
    “위험하면 얼마나 위험하게? 서울 있을 땐 일부러 그런 데 골라서 소풍도 가고 그랬는데.”
    소녀의 눈이 금새 ‘바보, 바보’ 할 것만 같았다.
    논 사잇길로 들어섰다. 가을걷이 중이라 곳곳에 짚단이 쌓였는데, 그 사이사이로 방어용 허수아비가 서 있었다. 소년이 새끼줄을 건드리자 허수아비가 자동 공격 태세에 들어간다. 어디까지나 예방책일 뿐, 역귀가 논으로 들어오는 일은 별로 없었기에 허수아비의 공격도 허술했다. 소년은 날아오는 마름쇠를 부러 화려하게 피했다.
    “야, 재밌다!”
    소녀가 허수아비 줄을 잡고 흔들어 댄다. 공중제비를 돌며 마름쇠를 피하는 소년을 보고 소녀의 왼쪽 볼에 살포시 보조개가 패었다.
    허수아비가 원래 모양으로 돌아가자 소녀는 또 저만큼 선 허수아비로 달려간다. 소년도 그 뒤를 달렸다. 오늘 같은 날은 집에 들어가서 아버지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도, 장난으로 방어선을 헤쳐놓으면 안된다는 생각도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냥 소녀의 곁을 스쳐 달린다. 밤 벌레들이 따끔따끔 얼굴에 와 부딪친다. 달빛이 부서진다. 어지럽다.
    돌아다보니 소녀가 지금 지나쳐 온 허수아비를 흔들고 있다. 이제 논도 끝이 가까워 그런지 이제까지보다 공격이 맹렬했다. 소녀는 검은 도포자락을 흔들며 화려하게 마름쇠를 피하고 더러 손으로 받아내기도 했다. 소년은 넋을 잃고 소녀의 춤사위를 보았다.
    논이 끝난 곳에 해자용 도랑이 하나 있었다. 소녀가 먼저 훌쩍 건너뛰었다. 거기서부터 산 밑까지는 밭이었다.
    철조망을 세워 놓은 밭머리를 지났다.
    “저게 뭐니?”
    “방어용 원두막.”
    “역귀들이 여기까지도 들어와?”
    “아니. 잘은 안 온다. 그 대신 멧돼지나 사슴이 밭작물을 해치니까.”
    산이 가까워졌다. 올빼미 울음소리가 들렸다. 저만치 커다란 넓적바위가 보였다. 누가 말한 것도 아닌데 바위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유달리 주위가 조용해진 것 같았다. 달빛이 환해서 그런지 마음도 느긋해졌다.
    “저건 무슨 꽃이지?”
    적잖이 비탈진 곳에 달맞이꽃이 매달려 있었다. 소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서울에는 꽃이 피었을 만한 곳은 다 역귀 아니면 덫이 있어서 손을 못댔는데... 같이 놀던 동무 하나가 꽃을 꺾으려다...”
    소녀는 말을 잇지 않고 일어나서 비탈진 곳으로 간다. 꽃을 꺾으려고 하얀 팔을 내뻗는데, 갑자기 아래 흙이 허물어지더니 꽃을 쥔 채로 몸이 미끄러진다. 소년이 놀라 달려갔다. 그러나 소녀는 손을 내밀지 않고 소리를 쳤다.
    “조심...!”
    아뿔싸, 함정이었다. 무너진 흙 아래서 역귀가 튀어나왔다. 미처 방비를 못한 소년은 그대로 역귀에게 팔을 붙들렸다. 역귀가 억세게 팔을 그러쥐고 입을 벌리는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물리면 끝장이다. 눈앞이 아득했다.
    소녀의 흰 얼굴이 눈앞에 둥실 떠올랐다. 하얀 팔이 나부끼고, 하얀 다리가 날았다. 소년의 팔을 쥐고 있던 역귀의 머리통이 사라졌다.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팔을 그러쥔 손가락 열 개만 허공에 멈춰 있다가, 조금 후에 부서지듯 떨어져 내렸다. 소녀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며, 소년은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했는데, 산 아래까지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잘못했다고 뉘우친다. 소녀의 오른쪽 무릎에 핏방울이 내맺혔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그 상처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빨기 시작했다. 입술에 닿은 희고 서늘한 피부에서 움찔하는 기색이 전해졌다.
    소년은 얼른 입술을 떼고 어딘가로 달려갔다.
    “이걸 바르면 금방 멎는다.”
    송진을 생채기에다 문질러 바르는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 예서 뭣들 하느냐?”
    밤 순찰을 돌던 마을 아저씨 하나가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밤중에 함부로 마을 밖에 나섰냐고 꾸지람을 들을 것만 같다. 그런데 나룻이 긴 마을 아저씨는 소녀를 한 번 보고 흩어진 역귀의 파편을 보더니 그저.
    “어서들 돌아가거라. 비라도 오면 역귀가 떼로 날뛴다.”
    그 새 먹장구름이 달을 가리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사면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것 같다. 바람이 우수수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삽시간에 주위가 음산한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서둘러 산을 내려오는데 빗방울 듣는 소리가 난다. 굵은 빗방울이었다. 목덜미나 선뜻 선뜻했다. 그러자, 대번에 눈앞을 가로막는 빗줄기. 매캐한 비 냄새.
    비안개 속에 방어용 원두막이 보였다. 그리로 가 비를 그을 수밖에.
    그러나 원두막은 지붕이 성치 않았다. 그런대로 비가 덜 새는 곳을 가려 소녀를 들어서게 했다. 어둠 속에서 소녀의 입술이 파랗게 보였다. 어깨도 자꾸 떨었다.
    소년은 무명 겹저고리를 벗어 소녀의 어깨를 싸 주었다. 소녀는 검은 눈을 들어 한 번 쳐다보더니, 소년이 하는 대로 잠자코 있었다. 밖을 내다보던 소년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수수밭 쪽으로 달려간다. 세워 놓은 수숫단 속을 비집어 보더니, 옆의 수숫단을 날라다 덧세운다. 다시 속을 비집어본다. 그리고는 이쪽을 향해 손짓한다.
    수숫단 속은 비는 안 새었다. 그저 어둡고 좁았다. 옆에 나앉은 소년은 그냥 비를 맞아야 했다. 그런 소년의 어깨에서 김이 올랐다. 소녀는 쉰 목소리로 이리 들어와 앉으라고 했다. 괜찮다고 했다. 소녀가 다시, 들어와 앉으라고 했다. 할 수 없이 뒷걸음질을 쳤다.
    소녀의 코에 비에 젖은 소년의 몸 내음새가 확 끼얹혀졌다. 소년은 불쾌한 냄새가 날까 저어하는 눈치였지만 소녀에게는 달콤하기만 했다. 몸이 한층 더 떨리고, 더는 참을 수 없어졌다. 소녀는 소년을 확 끌어당겨 껴안았다. 소년은 당황했지만 저항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소녀는 소년의 목 아래에 이빨을 꽂았다.
    소란하던 수숫잎 소리가 그치고, 다시 나온 달빛에 밖이 멀개졌다. 그 때 수숫단 바로 옆에 누군가가 있었다면 소년의 희미한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리라.
    그 소리가 뚝 그치고, 수숫단을 헤치고 뛰쳐나온 소녀는 집을 향해 날 듯이 달아나 버렸다.
   
    그 뒤로 소녀의 모습은 뵈지 않았다. 매일같이 개울가로 달려와 봐도 뵈지 않았다. 윤 도사네 집앞까지 가서 담 안을 기웃거렸지만, 아무 기척이 없었다.
    그날도 소년은 주머니 속 흰 조약돌만 만지작거리며 개울가로 나왔다. 그랬더니, 이쪽 개울둑에 소녀가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입 안이 마르고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그 동안 앓았다.”
    어쩐지 소녀의 얼굴이 한층 더 해쓱했다.
    “혹시 그 날... 탓 아냐?”
    소녀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만 했다.
    “인제 다 나았나?”
    “아직도......”
    “그럴 수록 제대로 먹어야지.”
    그 말에 소녀는 묘한 눈빛으로 소년을 보았다. 이상하게 쓸쓸한 눈빛이었다. 소년은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지만 눈을 피하지 않았다. 소녀는 불쑥 말했다.
    “그 때 상처는 다 나았다.”
    반사적으로 내려다본 소녀의 무릎에는 아무 상처도 남아있지 않았다. 갑자기 입 안에 피비린내가 훅 끼쳤다. 목구멍이 간질간질해졌다. 그 때 빨았던 피 맛이 기억나지 않아 조바심이 났다. 다시 맛보고 싶었다. 소녀는 그런 소년을 서글프게 바라보더니 개울가 갈꽃밭으로 이끌었다. 갈대 사이로 숨어들었다.
    소녀에게 목덜미를 다시 내어주며 소년은 황홀경을 느꼈다. 소녀는 한참 피를 마시더니 입술을 떼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소년은 소녀가 외로 꼰 하얀 목선을 한 번 쓸어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소녀 앞에 무릎을 꿇고, 우러러보는 자세로 사라진 상처 자국에 입술을 묻었다. 소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나오고, 헐떡이면서 낮게 말했다.
    “난 곧 떠난다......”
    소녀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소년은 혼잣속으로 소녀가 떠난다던 말을 수없이 되뇌어 보았다. 생각해보면 그리 안타까울 것도 서러울 것도 없으련만, 지금 입 안에 남은 달콤한 피맛도 느끼지 못할 만큼 초조했다.
   
    그날 밤 소년은 앓았다. 자리에 누워서 열에 시달리면서도 같은 생각 뿐이었다. 내일 소녀를 찾아가야 하나 어쩌나, 윤 도사네 가면 소녀를 보게 될까 어떨까. 그러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는가 하는데,
    “허, 참 세상일도......”
    마을 갔던 아버지가 언제 돌아왔는지. “윤도사 댁이 말이 아니야. 아무래도 저주를 받은 게지. 그런 악상이라니...”
    남폿불 밑에서 바느질감을 안고 있던 어머니가, “증손이라곤 계집애 그 애 하나 뿐이었지요?”
    “그렇지. 사내애 둘 있던 건 어려서 잃어버리고......”
    어머니는 혀를 세게 찼다.
    “어쩌면 그렇게 복이 없을까. 아니 제 자손도 못 지키면서 도사는 무슨 도사래요.”
    “글쎄 말이지. 이번 앤 시귀(屍鬼)한테 당한 모양이야. 꽤 여러 날 전에 물린 걸 쉬쉬하고 있었다더구만. 그 덕분에 역귀(疫鬼)는 손쉽게 해치운다지만 그렇다고 마을에 시귀가 살게 놓아둘 수야 있나. 지금 같아선 윤 도사네는 끝이 난 게고...... 서둘러 다른 술사를 불러와야 할 판이네. 그런데 참, 계집애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글쎄, 눈을 파랗게 뜨고 옷이나 갖춰입고 죽게 해달라 해서 마음이 약해졌더니만 깔깔 웃으면서 달아났다지 않아?”
    소녀에게 물렸던 자리가 따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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