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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애완용

2007.05.26 22:5505.26

  눈을 들어 역 안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아무래도 약속 시간에 늦겠다. 걸음을 빨리 해서 지하철 역 안을 가로지르려니 사방에서 소음이 쏟아져 들어왔다. 난청을 유발할 만큼 심한 소음이 방출되던 시절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지하철 소음 문제에 대한 보도가 해마다 한번씩은 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시끄러운 공간에서 얼른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에 인상을 쓰고 상반신을 앞으로 내민 채 걸음을 빨리하다가 멈칫했다.
  한 구석에, 소음과 마찬가지로 해마다 단속과 근절과 포기를 반복하는 지하철 역의 부속물, 즉 좌판이 펼쳐져 있었다. 특별히 물건을 팔겠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 늙수구레한 아저씨 앞에 장난감이 한 무더기 놓여 있었다. 손때묻은 흔적이 없는 대신 먼지가 앉은 옛 유행품들, 한 번도 누군가에게 안긴 적 없을 조잡한 인형들, 그나마 최근작이긴 하지만 유명 회사 제품의 어설픈 복제임이 분명한 물건들... 그 사이에 애완 몬스터가 몇 마리 묶여 있었다.
  몇 번인가 걸음을 망설이던 나는 결국 돌아서서 좌판 앞으로 다가갔다. 모델은 몇 가지 없었다. 그리핀이 하나, 와이번이 두엇, 후기작인 애완 마물 시리즈가 몇 개 놓여 있었고 아저씨는 정말로 장사할 마음이 없는지 내가 들여다보는데도 시큰둥한 얼굴로 부채질만 하고 있었다. 나는 잘 보이지 않는 뒤쪽에 묶여 있는 초기형 드래곤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손을 뻗었다.
  “캬오-”
  녀석이 나를 노려보고 어깨를 치키며 괴성을 지르는 바람에 움찔했다. 원래 애완 몬스터 시리즈는 얌전한 성격으로 유명했는데, 이놈은 불량품이었나보다.
  나는 물끄러미 녀석을 들여다보다가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닮았구나, 너.”

  **

  “너무 구웠잖아. 복잡한 요리도 아니고 그냥 굽는 건데 이렇게밖에 못해?”
  얄미운 이죽임을 참다 못해 몸을 홱 돌리고 식탁에 놓인 접시를 잡아챘다. 순간 손가락이 여섯 개 달린 동글동글한 손이 날아와서 내 손등을 때렸다.
  “아얏! 무슨 짓이야?”
  나는 빨갛게 자국이 남도록 맞은 손등을 문지르며 소리를 질렀다. 녀석은 들은 척도 않고 고기완자가 담긴 접시를 앞에 끌어다가 볼이 미어지도록 고기를 밀어넣고 있었다. 내가 도끼눈을 뜨자 녀석은 쩝쩝거리면서 불분명한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나 먹으라고 만든 거잖아. 줬다 뺐는 게 어딨어?”
  “내가 언제 너 먹으라고 만들었대? 어디까지나 넌 내 식사에 덤으로 얻어먹는 거라고. 이 염치없는 동물아. 어이구 저 먹는 속도 좀 봐. 너무 구웠다더니 아주 살살 녹나보다?”
  “뭐 먹을 만은 해.”
  나는 녀석을 노려보았다. 너무 힘을 줘서 눈이 아플 지경이건만 녀석은 정면으로 시선을 받으면서 실실거릴 뿐이다. 저 애물단지. 까탈스럽고 건방진 데다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도 하는 요괴! 이건 애완동물이 아니라 상전이다, 상전. 내가 속으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녀석은 접시를 깨끗이 비우면서 씨익 웃었다.
  “에이, 그렇게 노려봐야 귀여운걸 어쩌겠어. 다 반한 탓이려니 해.”
  나는 구역질하는 시늉을 했다.
  “어. 속 안좋아? 그럼 이것도 내가 먹어주지.”
  뻔뻔하게 내 앞에 놓인 접시로 다가오는 손을 찰싹 때렸지만, 그래봐야 녀석의 피부에는 흠집도 나지 않는다. 녀석은 태연하게 내가 먹으려고 데친 소시지까지 하나 먹어치우고 입맛을 다셨다.
  다른 식구는 다 나가고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녀석을 이렇게 당당하게 식탁 앞에 앉혀놓고 밥을 먹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맞은 편 의자 등받이 사이로 긴 꼬리가 비져나와 흔들거리고 있었다. 뭉툭하니 발톱을 감춘 손발, 주기적으로 콧김을 내뿜는 콧구멍, 유리로 만든 것 같이 투명하고 매끄러우면서 단단한 비늘, 접어놓으면 원래 크기를 짐작하기 힘든 커다란 날개...
  그렇다. 이 뻔뻔한 동물은 바로 드래곤이었다. 하이판 사의 애완 드래곤 모델 넘버 2000. 생김새는 파이널 하이판에 나오는 드래곤 그대로이며, 지능은 똑똑한 강아지를 능가합니다. 성질은 물론 온순하지요. 어린아이들에게 최고의 친구랍니다. 광고문구가 날 비웃는 것 같다.
  나는 힐끔 녀석을 보고 중얼거렸다.
  “불량품 주제에.”
  녀석은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려서 바닥에서 조금 위 허공에서 날개를 파닥이며 거실로 날아갔다.
  “말했잖냐. 난 그 애완 드래곤인지 뭔지가 아니라니까.”
  “그래, 그래. 넌 진짜란 말이지.”
  언제나 똑같은 대화였다. 나는 밥을 마저 먹으며 아버지가 어디서 얻었다고 했을 때 짐작해야 했다는 생각을 백번째로 했다.
  애완 몬스터 시리즈는 내가 열 두 살이 되던 해에 하이판이라는 회사에서 시판하기 시작했다. 반쯤은 살아있는 동물이랄 수 있으니 장난감과 애완동물의 중간쯤 되는 물건이랄까. 이 시리즈는 전세계에서 엄청난 인기를 몰며 장장 7년 여에 걸쳐 아이들이 가장 가지고 싶어하는 장난감 1위 자리에 군림했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아마 누구도 나만큼 애완 몬스터를 원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처음 출시된 애완 드래곤의 광고를 본 순간부터 사랑에 빠졌고 무슨 일만 있으면 사달라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우리 집은 가난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애완 몬스터를 사줄 만큼 넉넉하지도 않았다. 하이판 사는 유행에서 밀려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할인 판매를 하지 않았다.
  학교에는 나처럼 애완 몬스터가 한 마리도 없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여러 마리 거느린 아이들이 있었고, 닥치는대로 새로운 모델을 사다가 싫증을 내거나 실수로든 고의로든 몬스터를 죽이는 (반은 생물이었으므로 그럴 수 있었다)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나는 과장이 아닌 진짜 살의를 느꼈다. 반대로 애완 몬스터를 끔찍이 예뻐하며 자랑을 해대는 아이들에게도 살의를 느꼈다. 부러움을 감추기 위해 그런 아이들을 보면 아직도 장난감을 가지고 인형 놀이를 하냐면서 비웃고, 경멸하는 척 했다. 그렇다고 나와 같은 처지인 - 애완 몬스터가 한 마리도 없는 아이들과는 친했냐 하면 그럴 수도 없었다. 다른 아이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모습을 보면 화가 났고, 그러다가 누군가가 애완 몬스터를 손에 넣어서 뛸 듯이 기뻐하기라도 하면 또 화가 났다. 내가 그럭저럭 지낼 수 있는 건 오히려 전혀 관심이 없는 아이 뿐이었다.
  당연하게도 중학교는 악몽이었다.
  고등학교에 가자 상황은 조금 나아졌다. 애완 몬스터에 관심을 잃거나,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관심 없는 척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이가 늘어난 덕에 학교 생활을 하기는 쉬워졌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애완 드래곤을 원했고, 새로운 모델이 발표되어 커다란 광고판이 뜰 때마다 속으로 초기형에 비해 기능은 나아졌을지 몰라도 생김새는 형편없어진다는 비난을 퍼부었다. 내가 원하는 건 애완 신수도 애완 마물도 아닌 애완 드래곤이었고 그것도 반드시 비룡(飛龍)이라 불릴 만큼 나는 기능에 중점을 둔 초기 모델이어야 했다. 나는 고집을 통해 포기를 배워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날 저녁, 술에 취한 아버지가 녀석을 안고 들어왔다.
  나는 다 먹은 그릇을 설거지통에 밀어넣으며 거실 쪽을 돌아보았다. 텔레비전 소리가 들렸다.
  “야, 함부로 TV 틀지 말라니까.”
  내 말은 들은 척도 안하는군. 나는 일부러 쿵쿵거리고 걸어가서 뭉툭한 손 아래 눌린 리모콘을 빼앗았다. 녀석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꼬리를 천천히 흔들며 나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날 뭐라고 부를 지 못정한 거냐?”
  “응?”
  “엄청 고민하더니, 센스가 없군. 하긴 머리가 나쁘니 어쩔 수 없지.”
  여섯 살짜리 조카도 이렇게 밉살스럽진 않았다. 나는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심호흡을 몇 번 했다.
  “정말이지 내가 사람이 좋아서 참는다, 참아.”
  “헹.”
  녀석은 코웃음을 쳤다. 내가 왜 저걸 본 순간 내 드래곤이라고 생각했을까?
  “하긴, 나도 너한테 감사하고는 있어.”
  나는 귀를 의심했다.
  “잔소리는 해대지만 밥도 꼬박꼬박 주고 나한테 성가신 일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녀석은 팔짱을 끼(는 흉내까지 내)고 꽤나 심각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녀석을 살폈다.
  “덕분에 몸이 빨리 회복될 것 같아. 다 나으면 최대한 신세는 갚고 떠날게.”
  순간 나는 녀석의 머리를 때리려다 참았다. 전에 해봐서 알지만 그 머리를 때려봐야 내 손만 아플 뿐이다.
  “정도껏 해라! 내가 그런 동화같은 얘기가 통할 상대로 보이냐? 내 조카나 오면 얘기해주든가. 아니, 아니지. 다른 사람에게 말 걸면 곤란해. 불량품인 게 들통나면 소각로에 들어갈 지도 몰라.”
  “왜?”
  “왜긴 왜야. 불량품이라고 하면 더 중요한 회로까지 잘못되어 있을지도 모르잖아. 사람들은 네가 애들을 해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거야. 그러니 당연히 소각로 행 아니겠어? 불량품인 줄 알고도 거둬먹이는 내가 희한한 거야.”
  “허.”
  녀석은 어딘가 기묘한 소리를 냈다. 내가 빤히 바라보자 재미있다는 듯이 나를 보고 웃는다.
  “그렇구나. 일리 있는 말이네. 고맙다. 넌 역시 좋은 녀석이야.”
  “그야... 당연하지. 꼭 당연한 말도 그렇게 건방지게 해야 해?”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는 녀석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눈과 코와 입이 그렇게 많이 움직이는 것도 아닌데 웃기도 하고, 비야냥거리기도 하고, 뻔뻔하거나 묘하게 어른스럽거나 한 표정들이 보인다. 어쩌면 녀석에게 진짜 이상한 점은 말이 아니라 표정인지도 몰랐다. 너무 섬세하다 싶은 표정은 그저 내가 원하는 대로 읽는 건지도 몰랐지만... 대체 어떤 사고가 일어나면 이런 장난감이 만들어지는 걸까?
  순간 녀석이 히죽 웃으며 빨간 입을 벌렸다.
  “그나저나 후식은?”
  나는 녀석을 콱콱 밟으며 외쳤다. “내가 니 주인이지 하인이냐? 그 버릇 안 고칠래?”
  그러나 하인 기질은 타고 난 건지, 나는 녀석을 실컷 밟아주고 냉장고로 걸음을 옮겼다. 주섬주섬 간식거리를 꺼내다가 돌아보니 녀석은 제법 인형같이 앉아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 하늘이 오늘따라 새파랗다.
  녀석과 같은 푸른색이었다.

  **

  아버지가 안고 들어온 애완 드래곤은 내가 가장 원하던 초창기 모델이었지만, 제어 팔찌만 딸려있을 뿐 포장도 보증서도 목걸이도 없었다. 처음에는 내가 그렇게나 원하던 게 손에 들어왔다는 사실에 팔짝팔짝 뛰며 기뻐하기만 했다. 아버지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을 때에도 답에 별 관심은 없었다. 아버지는 대충 어디서 얻었다고만 얼버무렸고, 나는 눈을 껌벅거리는 애완 드래곤을 끌어안고 잤다.
  그러나 아침이 되어보니 나는 침대 밑에 떨어져서 자고 있었다. 녀석이 자면서 활개를 치다가 나를 밀어냈던 것이다. 처음에는 조금 의아해하고 말았지만 그 다음날 밤에는 녀석이 이불을 둘둘 말고 자는 바람에 벌벌 떨었고, 그 다음날에는 결국 이불뺏기 싸움을 벌이다가 녀석을 한 대 쥐어박고 말았다.
  그때였다. 녀석이 입을 연 것은.
  처음에는 정말 기절초풍했다. 말하는 애완 몬스터라니, TV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말만 했을까. 녀석은 제멋대로였고, 자기는 애완 드래곤 따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많이 먹었다. 도대체 그렇게 먹는 게 다 어디로 가는 걸까 신기했다. 보통 애완 몬스터는 전용 사료를 먹여야 했는데 녀석은 사료를 먹으려 하지도 않았다. 전용 사료만 먹인다면 어른 한 사람 식비를 넘어서는 지출이 나갈 테니 좋게 새각하기로 했지만... 냉장고 축나는 속도를 보면 사료보다 돈이 덜 든다고 할 수 있나 의심스러웠다.
  한밤중에 살금살금 방을 나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도 잠귀 밝은 부모님이 문을 열어놓고 주무신다면. 나는 조심조심 냉장고 문을 열었다.
  “유진이냐?”
  아니나다를까. 나는 찔끔해서 어깨를 움츠렸다.
  “네...”
  “이 시간에 뭘 또 먹어?”
  “아, 아뇨. 용이 먹이려고 그래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간식거리를 몇 개 챙겨들고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기 직전에 아버지의 낮은 목소리가 뒤통수를 때렸다.
  “적당히 해라.”
  역시 곧이 듣지 않으신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서 방문을 발로 밀어 닫으며 불평했다.
  “너 때문에 나만 돼지 취급받잖아!”
  “실제로 돼지면서 뭐가 기분나빠?”
  “뭐야?”
  나는 내 손에 들린 먹을 거리를 향해 달려드는 녀석을 발로 걷어냈다. 물론 용은 아무 타격도 입지 않았다.
  용(龍)이라는 이름으로 결정했을 때 녀석은 불평을 잔뜩 쏟아냈다. 촌스럽다, 역시 머리가 나쁘다, 내가 개나 고양이인 줄 아냐 등등... 결국 내가 한자를 써서 보여주고 뜻을 알려주고 그림까지 보여주고서야 선심쓰듯 일단은 이걸 이름으로 삼아주겠노라고 말했다.
  “후우. 너같은 걸 애완 동물이라고 데리고 있는 내가 미친 년이지. 게다가 먹기는 또 얼마나 많이 먹는지. 하는 일도 없으면서 그게 다 어디로 가냐?”
  나는 녀석이 입에 긁어넣고 있는 감자샐러드를 끌어당겨 한 숟가락 퍼먹으며 푸념했다. 용은 곁눈질을 하며 입을 삐죽거리며 내 말투를 흉내냈다.
  “어휴. 너같은 애 장난감 노릇 해주려니 보통 피곤한 게 아냐. 네 상대도 해줘야지, 몸도 회복해야지, 에너지가 얼마나 많이 드는데. 그나저나 너 이 시간에 먹으면 살찐다며?”
  “그럼 네가 먹는 것만 보고 있어?”
  “그래. 잘 생각했어. 사람이 생긴대로 살아야지. 더 먹어, 자.”
  선심이라도 쓰는 듯한 태도에 기가 막힌다. 나는 눈을 흘기며 감자 샐러드를 다시 끌어당겼다.
  “너 옛날 주인한테도 이랬어?”
  “옛날 주인? 무슨 옛날 주인?”
  용은 먹는 데 열중해서 건성으로 말했다.
  “나 만나기 전에도 사람이랑 같이 있긴 했다며? 지나가다가 그런 말 했잖아.”
  사실 이건 거짓말이었다. 내 추측이 그랬을 뿐이다. 그러나 용은 먹던 동작을 딱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을 이었다.
  “옛날 주인한테 안좋은 기억이라도 있어?”
  “그 녀석은 내 주인이 아니야.”
  놀랄 만큼 단호한, 쇳소리마저 섞인 목소리. 나는 조금 놀라서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숟가락을 주우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물었다.
  “그럼 어딜 간다는 거였어? 너 맨날 회복되면 떠난다고 노래를 불렀잖아. 옛날 주인 얘기 아니었어?”
  용은 빵을 잡고 물어뜯으며 중얼거렸다.
  “흥. 굳이 주인이 필요하다면 그 녀석밖에 없겠지만, 내 주인은 나 뿐이야. 난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아. 자유로운 몸이라고.”
  뜨끔, 아팠다. 앞의 말이 준 충격 때문에 뒤에 한 이야기는 들리지도 않았다. 입버릇처럼 떠난다고 하는 바람에 버림받았는데도 옛날 주인에게 미련이 많구나 싶어 속상해했지만, 이건 그보다 더 나빴다. 그럼 난 뭐지? 정말로 주인이 아니라 하인인가? 녀석은 나를 보지도 않고 다시 먹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억지로 목소리를 짜내어 말했다.
  “흐응. 그 애는 뭘 어떻게 해줬는데? 나보다 더 잘해줬나봐?”
  용은 빵을 덥석덥석 뜯어넣으며 우물거렸다.
  “너랑은 전혀 달라. 완전히 반대야. 날 내 신분대로 대하지 않는 건 둘 다 똑같다만 녀석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면서 내 손에 빗자루를 쥐어 주질 않나, 내가 불평을 하면 꼬리를 잡고 흔들지 않나. 여러 모로 기가 막힌 녀석이었지. 내 참. 내 손에 맞는 빗자루가 없다고 새로 만들기까지 했다니까. 믿어지냐? 게으르기로는 아무도 따라갈 수가 없는 데다가 천하 태평, 무슨 소릴 해도 들은 척도 안하는 제멋대로에...”
  “그럼 그 앨 찾아가려는 게 맞는 거구나?”
  불쑥, 내가 말했다.
  용은 고개를 돌려 나를 똑바로 보았다. 아니, 아니다. 파충류를 닮았지만 어딘가 고양이 같기도 한... 그러나 더 깊고, 어딘가 기묘하게 나이든 느낌을 주는 눈동자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내 너머 허공을 한참이나 보고 있던 녀석은 웃었다. 늘 그렇듯 얼굴은 별로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응.”
  그것 뿐. 우걱우걱 우물우물, 용은 말없이 간식을 다 먹어치우더니 닭처럼 힘겹게 날개를 치면서 창틀 위로 올라가서 몸을 말고 엎드렸다.
  나는 남은 쓰레기를 치우고 이를 한 번 더 닦은 다음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서울에서는 밤이라 해도 밖이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는다. 흐릿하게 새어들어오는 불빛이 창틀에 엎드린 용을 지나서 내 얼굴에 쏟아졌다.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물었다.
  “자?”
  용의 검은 윤곽이 꿈틀 움직였다.
  “손등에 난 상처는 왜 생긴 거야?”
  용의 손등에는 꽤 깊고 흉한 상처가 있었다. 새로 생긴 상처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녀석이 입을 열기 전부터 버려진 불량품이라고 생각한 것도 그 상처 때문이었다.
  용은 잠이라도 자는 것처럼 반응이 없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법사와 싸우다가 저주가 담긴 창에 찔렸지. 창이 여기... 살을 뚫고 내 손을 절벽에 박아넣었어. 뜨거운 피가 용암처럼 흘러내려 창을 녹였어. 그대로 놓아뒀다면 오래지 않아 회복되었겠지만, 열이 머리 끝까지 오른 내가 참지 못하고 창을 뜯어내는 바람에 피부가 길게 찢어져 버렸지.”
  나는 그 마법사와는 왜 싸웠냐고 물어보려다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그 싸움에서 진 거야?”
  용은 훅 하고 숨을 들이마시더니 으르렁거렸다. 목덜미 털이 쭈볏 설 만큼 무서운 울음소리였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외쳤다.
  “그런 소리 내지 마!”
  용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 일을 생각하니 또 화가 나서. 그래. 졌다고 인정해야겠지. 그놈 한쪽 다리를 영원히 못쓰게 만들긴 했지만 그 대신 강력한 저주를 받고 말았으니까. 마법사는 내 몸에 상처입히기보다 내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싶어했어.”
  “어떤 저주였는데?”
  “내 말을 하나도 안들었군. 처음에 말했잖아. 그 놈의 저주 때문에 이런 작은 몸이 되어버렸다고. 그리고 우리 둘이 부딪쳤을 때 일어난 태풍에 휩쓸려 버렸지. 은의 바다를 건너 멀리, 아주 멀리. 내가 날아다니는 것을 가장 사랑할 때조차도 가본 적 없는 먼 곳으로.”
  조금씩 졸음이 밀려오면서 내가 정말로 용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인지, 환상적인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어졌다. 용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한번씩 발 아래 가슴이 아플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용이 그 이야기를 어디에서 얻었는지 궁금했다.
  용은 속삭이듯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녀석을 만났어.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힘없이 늘어진 내 꼬리를 잡고 들어올리더니 집까지 끌고 가서 이게 뭐냐고 물어보던 멍청한 꼬마를.”
  목소리가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그나마 들어오는 빛도 등지고 있었으니 얼굴이 보일 리 없었건만 나는 소리없이 웃는 용의 얼굴을 본 것 같았다. 그리고 역시 이건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이가 없었어. 나를 잡고는 키워도 되겠냐고 물었다고, 그 녀석. 나를, 은의 바다에서 어둠의 바다까지 통틀어 가장 강력한 존재인 이 몸을 키우겠다고 하다니! 그러나 이상한 곳이었고, 돌아갈 길을 찾을 수가 없었어. 내 힘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어...”
  나는 잠들었다. 어쩌면 계속 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둠 속에서 한 번 눈을 떴을 때 용은 웅크리고 있던 몸을 세우고 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이불 속에서 다리를 접었다. 아버지가 처음 녀석을 집에 데려왔을 때의 황홀한 기분을 기억한다. 아버지는 초창기 모델이라고, 게다가 제어용 팔찌도 제대로 작동할 지 어떨 지 모른다고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나는 녀석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건 내 드래곤이었다. 내가 가져야만 했던, 내가 가져야 할 드래곤이었다.
  나는 혼자속으로 말했다. 괜찮아. 애완 몬스터는 어디로도 갈 수 없어. 그 날개로는 그렇게 멀리 날 수 없다고. 게다가 만약의 경우를 위한 제어 팔찌가 있잖아. 나는 서랍 안에 넣어둔 채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제어 팔찌를 떠올렸다. 제어 팔찌에 달린 정지 버튼을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잠들었거나 혹은 다른 꿈으로 옮겨갔고, 꿈 속에서 은빛으로 반짝이는 바다와 언제나 검은 빛을 띤 바다 사이에 펼쳐진 땅을 보았다. 바다 위에서 곡예비행을 하고 있는 용들을 보았다. 작고 작은 섬과 그 섬에 하나뿐인 작은 집, 그 집 한가운데에 자라난 커다란 나무와 그 나무가 키운 아이를 보았다. 그 아이가 한 번씩 꼬리를 잡아 흔들며 괴롭히고 있는 작은 푸른 용을 보았다.

  **

  용은 지나가듯 조금씩 그런 이야기들을 흘렸다. 큰 그림이 다 채워질 만큼 조리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조각조각 떠오르는 그림들은 아름다웠다. 그 녀석이 하는 이야기를 믿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믿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나는 녀석의 뻔뻔스러움, 건방진 말투, 독특한 표정, 환상적인 이야기, 손등의 흠집이 다 좋았다. 그것이 녀석을 특별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좋았다.
  그리고 어느 날 용이 없어졌다.
  특별 활동까지 마치고 저녁 때 집에 들어갔는데, 용이 아무데도 없었다. 나는 정신없이 온 집안을 뒤지고 야근 중인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용 어디갔냐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어머니는 무슨 일이 생겼나 놀랐다가 내 말을 겨우 알아듣고 되물었다.
  “창문으로 나간 거 아니야? 창문 확인해봤어?”
  처음에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불현듯, 캄캄한 방에 갑자기 불이 들어온 것처럼 번쩍 용이 예전처럼 낮게 날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근 며칠은 천장에 닿을 만큼 높이 날아올라서 자연스럽게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얘, 희원아! 듣고 있니? 희원아!”
  나는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창문을 보고 있었다. 달려가서 몸을 반이나 내밀고 아래를 훑어보았지만 떨어진 용의 시체 같은 것은 없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째서 용이 ‘제대로’ 날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못했을까?
  나는 불행해졌다. 간절히 애완 드래곤을 원했을 때보다 훨씬 더 나빴다. 그래도 학교를 다녔고, 부모님과 하루에 몇 마디씩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날이 추워져가는데도 매일 방 창문을 열어놓고 잤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저녁 식탁에서 힘없이 밥을 깨작거리다가 이제 그만 포기하지 못하겠냐는 어머니의 불호령을 듣고 도망치듯 방에 돌아와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있는데 무슨 소리가 들렸다. 나는 울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창 밖에 용이 와 있었다.
  “너... 너......”
  나는 벌떡 일어나서 창가로 달려갔다. 용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날개를 접고 창틀에 내려앉으면서 말했다.
  “배고프다. 밥 줘.”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다음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너 오늘 내 손에 죽어볼래?”
  용은 의아하다는 듯 눈을 껌벅였다.
  “왜? 무슨 문제 있어?”
  “말도 안하고 나가서 일주일이나 싸돌아다녀놓고 뭐가 어쩌고 어째? 무슨 문제 있어?”
  눈물이 찔끔 나왔다.
  인정하지 않으려고는 했지만 녀석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불량이든 아니든, 스스로 주장하는 것처럼 애완 드래곤이 아니라 진짜 용이든 상관없이 녀석은 내 것이 아니었다.
  용은 아무렇지도 않게 날아와서 내 머리에 내려앉더니 말했다.
  “너무 그러지 마. 일주일이나 지난 줄은 몰랐다고. 완전히 나았는지 시험해보려고 날아봤는데 오랜만이다보니 신이 나서 그만. 나 진짜 배고파 죽을 것 같아. 구박하려면 먹을 거나 좀 주고 해.”
  나는 손을 휘둘러 머리 위에 앉은 용을 밀어냈다. 용은 책상에 내려앉으며 짜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야, 그렇게 화낼 것까진 없잖아. 어차피 다 나으면 떠날 거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냐.”
  “그래서 인사도 없이 나가버려도 된다고? 내가 그것밖에 안돼? 너 좋을 때 밥주는 사람밖에 안되는 거였어? 내가 너 길 떠나는데 양식이나 대주는 사람으로 보여? 갈 거면 그냥 가! 가버리라고!”
  내가 빽 소리를 지르자 용은 깜짝 놀랐는지 날아올랐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나는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기 시작했다. 내가 소리없이 흐느끼는 동안 용은 조용히 앉아만 있었다.
  겨우 좀 진정이 되고 나서 나는 물었다.
  “꼭 가야 할 이유가 뭐야? 네 예전 주인이 널 찾는 것도 아니잖아.”
  용은 가만히 고개를 기울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넌 정말 잘해줬어. 애완 동물 취급하긴 했어도 나에게 일을 시키지도 않았고, 불평은 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줬지. 넌 좋은 녀석이야. 어쩌면 그 녀석보다 훨씬 좋은 사람일 거야.”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용이 얄미운 소리를 하고 놀려대고 나를 구박하는 쪽이 훨씬 나았다. 나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런데 왜 가야 해?”
  용은 잠시 말이 없다가 천천히 말했다.  
  “나는 그 아이를 만나고서 많은 일을 겪었어. 마침내는 고향으로 돌아갔고, 강력한 마법사를 만나서 저주를 풀 기회도 얻었지.”
  “그렇지만 난 생각했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랫동안 생각했어. 다시 내 몸을 되찾아 은의 바다에서 어둠의 바다까지 활강하며 내 힘을 뽐내고 싶었지. 하지만 그러면 그 아이는? 내 몸이 원래 크기로 돌아가면 난 그 아이의 작은 집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고, 빗자루를 쥘 수도 없고, 꼬리를 잡혀 흔들릴 수도 없겠지.”
  용은 잠깐 날아올라 하늘에서 꼬리를 휘젓고 다시 내려앉았다. 창틀 안의 움직임인데도 그리 작아보이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맹세했지... 그 녀석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계속 작은 용으로 있겠다고.”
  “그리고 그 녀석이 나이들어 죽었을 때, 나는 원래 힘과 크기를 되찾아 오랫동안 날아다녔어. 아주 오랫동안. 너무 지쳐서 바다에 떨어질 때까지. 그것도 무척이나 오래 전의 이야기야. 나조차도 잊었을 만큼 오래된. 알겠어?”
  무엇을?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다시 힘을 잃고, 이렇게 작아져 있었지.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어. 기억도 잘 나지 않았고. 헤매고, 다치고, 고통을 받아지. 그리고 기억해 낸 거야. 내 맹세를. 그 녀석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작은 용으로 남아 있겠다는 맹세를.”
  용은 웃었다.
  “그 아이가 어디에 어떻게 돌아왔는지 모르니까, 이렇게 작은 몸으로도 충분히 날 수 있을 만큼 힘을 축적해야 했어.”
  그 순간 마음 속에서 무엇인가가 끊어졌다. 나는 빽 소리를 질렀다.
  “이제 그런 바보같은 얘긴 그만해!”
  용은 놀란 것 같았다. 나는 팔목을 걷고 용이 없어진 뒤부터 늘 차고 있던 제어 팔찌를 드러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울지 않으려고, 차분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네가 나쁜 게 아니야. 네 전 주인이 나쁜 거야. 걱정 마. 아프게 하지 않을게. 그냥... 날아가다가 잘못되지 않게 하려는 거야. 걱정 마. 프로그램을 다시 하면 나쁜 기억만 지울 수 있을 거야. 다 좋아질 거야.”
  용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너무 조용하고 점잖아서 내가 아는 그 녀석 같지가 않았다. 나는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입술을 깨물고 제어 팔찌에 달린 빨간 버튼을 눌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단추를 누르고, 또 누르고, 다른 단추까지 눌렀다.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제어 팔찌를 팽개쳐버렸다.
  용을 보았다. 녀석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속삭였다.
  “가지 마.”
  용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 녀석을 찾아서 돌아가야 해. 그 녀석은 내가 없어도 울지 않을 것이고, 너는 울더라도. 네가 그 아이를 생각나게 해줬다 하더라도. 어쩔 수가 없어.”
  용은 다시 날개를 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창문 쪽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용은 날아올라 있었다. 나는 허공으로 몸을 내밀고 팔을 뻗었다. 용은 마치 나를 마주 끌어안듯 가까이 날아올라서 머리를 스치고 위로 솟구쳐올랐다.
  용은 마지막으로 내게 속삭였다.  
  “어쩌면 그저 처음 만난 게 그 애였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그건 아주 크고 묵직한 추가 가슴을 내리치는 것 같은 말이었다. 용은 다시 날아올랐다. 크게 한 번, 두 번 날개를 치고 단숨에 아파트 단지 한참 위로 솟구쳐올랐다. 나는 몸을 밖으로 내밀다가 떨어질 뻔하면서 빈 손을 쥐었다.

  **

  나는 며칠 동안 앓아누웠다. 눈물이 넘쳐 흘러 심장까지 차오른 것 같았다. 목이 막히고, 가슴이 메었다. 가슴이 뻐개질 것 같이 아팠다.
  나는 며칠 동안 이불 속에 누워서 내 용을 생각했다. 용이 배가 고파 얼마 날지 못하고 떨어지는 악몽도 꿨다. 몇 달이 흐르고서야 모든 것이 정상을 되찾았고, 또 몇 년이 흐르자 그런 일이 정말로 있었나 싶게 아픔이 희미해졌다.
  그리고 더는 애완 드래곤을 보아도 가슴이 아프지 않을 만큼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 애완 몬스터를 다룬 특집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화면에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애완 몬스터 사이에  호화 주문품들도 있었다. 그러나 변기를 황금으로 만드는 사람들이나 소장했다던 그 비싼 애완 몬스터도 내 용처럼 말하고 표정을 짓지는 못했다. 그 다큐멘터리를 다시 구해서 몇 번이고 돌려보면서 나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내 기억 중 어느 부분에도 자신이 없어졌다.
  그 모든 기억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기는 했을까? 용이 한 말 모두가 내가 지어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런 불량 애완용이 있었다면 바로 소각로에 들어갔을 지도 모른다. 그저 어딘가의 쓰레기통에 처박혀 썩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또 혹시 어쩌면...
  아무려면 어떤가. 나는 이미 나의 용을 잃어버렸다. 어쩌면 내 손으로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살 거요 안살 거요?”
  “예?”
  나는 퍼뜩 놀라서 아저씨를 보았다. 물건을 팔 의지가 없어보이긴 했어도 아예 장사에서 손을 놓은 건 아니었나보다. 못마땅한 눈을 마주한 나는 주춤주춤 물었다.
  “아, 음, 얘 얼마에요?”
  “2만원.”
  퇴물 장난감 치고는 비싼 가격이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다시 한 번 손을 뻗어 푸른색 애완 드래곤을 만져보았다. 나는 한참이나 그 녀석을 들여다보며 내가 그토록 손에 넣고 싶어했던, 그러나 결코 가질 수 없었던 애완 드래곤을 생각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고 이제서야 용이 그 아이를 찾아내어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제야 처음으로.
  앞에 앉은 푸른 용이 날개를 몇 번 폈다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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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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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하 07.05.27 01:45 댓글 수정 삭제
    "어쩌면 그저 처음 만난 게 그 애였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내 가슴도 추로 치는 말 -ㅅ-
  • No Profile
    배명훈 07.06.03 11:31 댓글 수정 삭제
    재미있어요.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 모두.
    창작물도 계속 써 주세요.
  • No Profile
    askalai 07.06.04 11:17 댓글 수정 삭제
    우와 감사합니다.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는데 엄청나게 힘이 되는 말씀 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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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림 07.06.12 14:20 댓글 수정 삭제
    ....뵙기 전에 읽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이미, 너무 좋군요ㅜㅜ
  • No Profile
    희얀 08.02.10 04:40 댓글 수정 삭제
    뭐라고 해야고 할까. 결국 불량 애완용은 그 아이를 찾은 것일까요? ...어쩌면 말이죠. 조금 확대 해석한 것이라 볼 수도 있겠는데 말이죠. 시간역행물이 아닐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지하철 역에서 사게 되는 사나온 푸른빛 애완용이 그 불량 애완용이고 그것이 첫만남이며, 주인공이 최초로 만난 불량 애완용이 시간을 역행해 온 두번째 만남이 아닐까.

    곧 과거의 자신과 만나게 될 것을 알기에 과거에 자신이 아이와 만나기 위해 그를 버리고 떠난 것은 아닐까 하는...뭐, 그냥 혼자만의 생각입니다. 재미있었어요.^^
  • No Profile
    두콩 09.07.18 14:29 댓글 수정 삭제
    비오는 날 읽을거리를 찾아 들어와서 읽은 두 편이 모두 슬픈 사랑의 이야기군요. (하나는 다른 분의 작품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재밌었어요.
  • No Profile
    askalai 10.06.21 11:22 댓글 수정 삭제
    나중에 읽고 댓글 다시는 분이 있을 거란 생각을 못해서-_- 초뒷북으로 감사 인사 드립니다.

    워낙 애착이 있는 글이라 '옛 글을 다시 쓰느니 새 글을 쓰는 게 좋다'는 수칙(?)을 어기고 한 번 더 썼는데... 완벽하지 않아도 이젠 진짜 놓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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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xk160 인용2 2007.07.27
jxk160 동거 2007.07.27
jxk160 무덤 2007.07.27
미로냥 화선(花仙) -본문 삭제-2 2007.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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