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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해."
  "나도 사랑해."
  다정한 포옹. 팔을 둘러 힘주어 껴안자 가슴 어딘가가 훈훈해지는 느낌. 코끝에 닿는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마음과 몸을 설레게 하는 향기. 한참 있다가 겨우 몸을 떨어뜨리고, 못내 아쉬워 연거퍼 가벼운 키스를 나눈다. J는 가야 할 시간이 아슬아슬해져서야 겨우, 연신 뒤를 돌아보면서 오피스텔 문지방을 넘어갔다. H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창가로 다가가 주차장을 내려다본다. J는 H가 내려다볼 줄 알았다는 듯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흰색 세피아는 곧 자그마한 주차장을 나서고 H는 마음이 꽉 차오르는 행복감과 들뜬 흥분감, 아직은 망설임이 섞인 설레임으로 혼곤해져서 책상 앞으로 돌아온다.
  나는 J를 사랑해.
  H는 도취감에 잠겨 되뇌인다.
  그러나 담배를 한 대 피우고, 팔을 걷어부치고 일주일치 집안일을 시작하면서 차츰 도취감은 촉수를 거둬들이고 허탈감이 자리한다. 이렇게 사랑하는 것도 지금 뿐이리라는 것을 안다. 수줍음이 섞인 고양감과 설레임은 곧 다른 종류의 열정에 자리를 내어주고, 그것도 조금 지나면 익숙한 편안함으로 변하며, 그리고 나면 그때까지 보이지 않던 결점들이 조금씩 신경에 거슬리기 시작하며 그래도 아직 사랑하는걸, 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달래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지난한 신경전, 피곤, 잠깐씩 짧게 되돌아와 타오르는 애정과 다시 툭닥거림. 피곤하기 그지없는 감정싸움의 연속. 그리고 피곤과 짜증이 애정을 넘어서는 순간, 사랑은 완전히 끝난다. 다른 감정으로 전환될 수는 있을지도 모르지만 더 이상 사랑은 아닌 것이다.
  H는 자신이 비관적이라는 사실, 혹은 비관적이라는 평가를 듣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른다. 아직 철이 덜 들었다거나, 비현실적이라는 말도 듣는다. 그것 역시 그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순간에는 어쩔 수 없이, 세상에 한결 같은 사랑이라는 게 존재하는 걸까, 혹은, 존재하지 않을까 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한때 죽고 못산다고 할 정도로 떠르르했던 연애담은 대개 지저분한, 혹은 허무한 끝만 맺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았다. 은근한 정과 애착으로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 늘 처음 같은 사랑이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들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기는 한다. 그런 사랑을 본 적이 있다고, 세상에 그런 일이 만분의 일, 아니 억분의 일로 있기는 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도 직접 본 경우를 말하지는 못했지만.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단지 원할 뿐.
  한결같이 사랑할 수 있을까. 이렇게 늘 가슴 뜨겁게.
  H는 담배를 손에 든 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며 J를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서글프다.
  그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그는 초인종을 울리지도 않았고 문을 열지도 않았다. 그저 갑자기 오피스텔 한 가운데에 서있을 뿐이었다. 너무나 황당한 일이라 H는 위협조차 느끼지 못하고 멍청히 쳐다보기만 한다. 불법침입이나 강도라는 생각은 그저 마음 언저리를 스쳐 지나가기만 할 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노인이었고, 불법침입이나 강도 같은 현실적인 것들을 떠올리기에는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이다.
  그래서 H는 그저 그를 쳐다보기만 한다. 그를 어떻게 묘사하면 좋을까? 아주 평범한 사람, 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키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고, 뚱뚱하지도 마르지도 않았으며, 그리 잘생기지도 못생기지도 않았고, 입은 옷은 지나치게 고급스럽지도 지나치게 추레하지도 않아 튀는 데가 없었으며 어느 것 하나 눈에 거슬리는 데가 없는 사람, 즉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헤어지고 나면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더라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그런 사람이었다. 평범한 정장을 단정하게 갖춰입고, 장갑을 낀 손에는 각각 반듯한 가방과 명함 케이스를 쥐고 있었다. 한 마디로 세일즈맨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차림새였다. 그것도 방문 판매원치고는 묘하게 세련되고 신뢰감 있는 느낌이, 사기꾼 되기에 딱 좋은 외양이다.
  H가 눈을 몇 번 깜박이며 관찰하는 사이,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옆에 내려놓더니 장갑을 벗으며 허리를 15도 정도 잠깐 굽혔다 폈다. H는 얼떨결에 마주 고개를 숙인다.
  "놀라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타이밍이 생명이다보니 미처 예의를 차리지 못했군요."
  그는 무색무취의 미소와 함께 명함을 내놓았다. H의 시선은 명함보다 명함을 든 손에 고정된다. 목소리나 미소조차 인상에 남지 않는, 평범을 의인화한다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은 이 인물에게도 특징이라는 게 있기는 했다. 그의 손은 '눈에 띄게' 깨끗하고 섬세했다. 몸에 비해 좀 크다 싶은 손에 특히 손가락이 길고 매끈했으며, 손톱 하나 하나가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다. 여자 손 같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자 손이라기에도 묘한 느낌이었다. H는 그렇게 그의 특징 한 가지를 머릿속에 입력하고나서 명함을 들여다본다.
  명함에는 반듯하고 깔끔한 흰 바탕에 검은 글자로 이렇게만 적혀 있었다.

  감정세공인
  수집, 보존, 관리 대행인
  계약 대리인


  H는 잠시 동안 그 문구를 내려다보다가 명함을 뒤집어 본다. 뒷면은 하얗기만 했다. H는 다시 명함을 뒤집어, 맨 윗줄을 가리킨다.
  "이게 무슨 뜻이죠?"
  그는 모호하지만 언뜻 자랑스러움이 섞인 미소로 답했다.
  "감정을 세공한다는 뜻입니다."
  H는 잠시 할 말을 잊는다.
  "저도 한글을 읽을 줄은 압니다. 그런데"
  "아, 물론 의미를 제대로 설명해 드려야지요. 앉아도 되겠습니까?"
  "아, 네. 앉으시죠."
  H는 뭔가에 홀린 느낌으로 의자를 권한다.
  "뭔가 마실 거라도?"
  그는 자리에 앉으며 손사레를 쳤다.
  "아니, 괜찮습니다. 설명이 그렇게 길지는 않을 겁니다. 어디 보자. 그러니까 제 원래 일은 아름다운 감정 원석을 찾아서 그 아름다움을 최대로 드러낼 수 있도록 세공한 다음, 제 고용주를 위해 전시하는 작업입니다. 하지만 워낙 원석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인력이 부족하다보니 이렇게 직접 재료를 구하러 다니게 되었습니다."
  "아하."
  H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할 때면 늘 그랬듯 애매하게 맞장구를 친다. 그는 다 이해한다는 듯 싱긋 웃었다.
  "어렵게 생각하실 것은 없습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보석세공인과 비슷한 직업이지요. 보석이 아니라 감정을 세공한다는 점, 이 쪽이 훨씬 다루기 힘든 재료인 데다가 감정세공이라는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는  사실상 한 세대에 단 한 사람밖에 없다는 점을 빼면 같다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H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묻는다.
  "그러니까 사람의 감정을 보석처럼 세공한다는 건가요?"
  H는 그 뒤에 그게 말이 되냐고 말하려 했지만 그는 잽싸게 말을 받았다.
  "가장 아름다운 형태와 광채를 보존할 수 있게 하는 작업이지요. 특히나 저 같은 경우에는 자연미를 중시하기 때문에 거의 손을 대지 않는 편입니다."
  "대체 왜......?"
  그는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아름다움을 보존하기 위해서지요! 그 이상 중요한 이유가 있겠습니까?"
  H는 당황한다. 이건 무슨 신종 사기꾼인가? 아니면 미친 사람인가? 그것도 아니면 혹시 악마?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아니면 누군가가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 그는 온갖 생각이 오락가락하는 H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이런. 또 이 모양이군요. 이미 말씀드렸듯 본래 일은 세공작업이다보니 늘 이렇게 두서없이 말을 해버리곤 한답니다. 자, 그럼 다시 말씀드리죠. 아시다시피 감정은 변합니다. 절대 가장 아름다운 순간, 가장 순수한 순간 그대로 머물러주질 않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 말에 H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방금 전까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아는 것처럼 말하지 않는가. 그러나 맞은편에 앉은 그는 자신의 이야기에 열중해서 그 아름다운 손을 연신 이리 젓고 저리 휘두르고 있었다.
  "보석의 아름다움은 영구불변에 가까운 것, 세공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그 아름다움에 빛을 쐬어주는 것 뿐이지요! 하지만 감정 세공은 다릅니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해서 다듬는 작업과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작업이 병행해야 하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그게 살아있는 동물을 박제로 만들거나, 아름다운 꽃을 얼음 속에 가두거나, 생생한 순간을 네모난 사진 속에 가두는 그런 멋없는 작업이어서는 곤란합니다. 최고의 세공가라면 순간을 영원 속에 가두면서도, 그 속에서 맥동치는 생명력을 살릴 수 있어야지요! 보석세공인의 작업과 사진작가의 작업을 함께 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감정세공이야말로 최고로 고귀한 작업이며 예술이라는 것을!!"
  점점 커지던 목소리는 끝내 마지막 웅변에서 탁자를 흔들고 말았다. 다음 순간,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정적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물론 맞은편에 앉아있는 인물이 진정 사람이라면 말이지만. H는 한참만에 마른침을 삼키고 묻는다.
  "좋아요. 그 말이 사실이라고 치죠."
  "무례한 말씀이시군요. 제가 거짓말이나 하는 인물로 보입니까?"
  그는 진심으로 분개한 듯 했다. H는 어째서인지 모르게 몰락한 귀족가의 마지막 후손에게 '그래, 댁이 귀족이라고 칩시다'라고 말해버린 것 같은 죄책감을 느끼며 변명한다.
  "아니, 워낙 믿기 어려운 이야기라서 말입니다. 한 번도 들은 바가 없- "
  "당연하지요. 감정세공사의 방문을 받는 사람이 개미떼처럼 많은 지상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나 될 거라 생각하는 겁니까? 저는 그만한 가치가 있을 때만 움직입니다. 질이 낮거나, 쉽게 무르고 부서지거나, 크기가 작은 원석에 달려드는 세공인은 없는 법입니다. 제 비유를 알아들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의 목소리는 냉랭했고, 얼굴에는 불쾌감이 내려앉았으며, 태도는 자신감에 가득차 있었다. 자신의 내왕을 영광으로 생각해야 마땅하다는 태도였다. H는 정신적으로 두 발자국쯤 물러서고 만다. 그는 H의 표정을 보고 조금 태도를 누그러뜨려 다시 말했다.
  "파우스트를 읽으셨을 테니(이 대목에서 그는 책장에 꽂혀있는 파우스트를 가리켰다) 다시 비유하지요. 파우스트에게 진정 그런 계약을 원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메피스토텔레스가 나타났을까요? 제 작업을 무조건 근사하게만 포장할 마음은 없습니다. 감정세공을 원하지 않는 분도 가끔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어쩔 수 없습니다. 물건을 팔지 말지는 본인의 선택입니다만, 이 거래에서는 모두가 득을 얻는다는 것을 유념해 주십시오."
  H는 한참 멍해 있다가 그가 양손을 들어올려 내밀자 그제서야 질문을 해보라는 뜻임을 알아차리고 입을 연다.
  다시 닫는다.
  다시 연다.
  "그 득이 뭐죠?"
  자신의 목소리가 멍청하기 그지없게 들린다. 그러나 그는 침착하게 되물었다.
  "누구의 입장에서 말입니까?"
  그는 H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곧이어 말했다.
  "이 계약이 성사될 경우, 제가 대리하고 있는 고귀한 분께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는 즐거움이 돌아갑니다. 물론 그 분은 그 대가로 제가 계약하고 세공하는 데 들인 노력의 보상을 지불하시지요."
  한 박자 쉬고.
  "계약이 성사될 경우, 저는 삶의 이유이자 생계수단인 일거리를 얻는 셈입니다. 물론 감정 세공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간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엄청난 정력이 들어가지요. 그러나 그렇다 해도 멋진 작품을 빚어냈을 때의 만족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탐나는 원석이란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꽤 긴 침묵이 이어졌다. H는 기다리다 못해 주저하며 물었다.
  "그럼 저는 뭘 얻는 거죠? 그 아름다움을 감상할 영광?"
  "안될 말씀."
  그의 답변은 협상의 여지가 없이 단호했다. H는 말문이 막혀 눈만 껌벅인다. 그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인간은 견뎌내지 못합니다. 제 작품을 볼 경우, 그 이후의 삶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럼 위험한 건가 하는 표정을 짓고 계시군요. 어떤 면에서는 그렇습니다. 위험하지요. 최고 수준의 아름다움이란 언제나 위험한 법입니다. 이 작품을 본다고 해서 육체적으로 어떤 타격을 입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단지 그 이후에 살아가면서 아무리 멋진 풍경을 보더라도, 아무리 훌륭한 음악을 듣더라도,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더라도, 아무리 근사한 성관계를 갖더라도 감동을 느낄 수 없게 될 뿐입니다. 감정세공품은 살아있는 인간을 위한 예술이 아닙니다."
  H는 그렇다면 당신과 당신의 고용주는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냐고 물으려다가 아슬아슬하게 그 질문을 삼킨다. 답은 뻔하다. 감정세공인도, 감정세공인의 후원자도 H와 같은 인간일 수는 없었다. 그는 H의 마음을 알 만 하다는 듯 보일락 말락 미소를 지었다.
  H는 마침내 다시 묻는다.
  "그럼 저는 뭘 얻게 되죠?"
  그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계약이 성사될 경우...... H씨는 지금 보존하고 싶어하는 감정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다시 제법 긴 침묵. H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그게 다인가요?"
  "그게 전부입니다."
  H는 천천히 의자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는데요. 뭐가 득이라는 건지."
  "H가 원하는 감정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변하지 않는 분노, 변하지 않는 비탄, 변하지 않는 - 변하지 않는 사랑."
  그는 보일락 말락 미소지으며 말을 길게 늘였다.
  "사랑. 저를 비롯하여 누대에 걸친 저희 세공인들의 작품 중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감정이지요. 그렇습니다. 사랑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정열적인 사랑, 은근한 사랑, 풋풋하고 설레는 사랑, 애증이 뒤얽힌 사랑. 뭐 이렇게 큰 덩어리로 분류하지 않아도 어느 것 하나 같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마다, 상황마다, 시대마다 큰 차이에서부터 미묘한 차이까지가 어우러져 복잡한 효과를 자아내지요. 때문에 가장 세공하기 어려운 원석이기도 합니다. 특히나, H씨처럼 이중적이면서도 부드럽고 섬세한 색조의 원석은 말입니다."
  이 부분에서 그는 진심처럼 보이는 찬사의 미소를 던졌다.
  "많이들 염려하시는 부분을 미리 말씀드리자면, 중심이 되는 하나의 감정을 제외한 나머지 가닥들에는 큰 영향이 없습니다. 계속해서 보석에 비유하자면 중심이 되는 원석을 돋보이게 하도록 전체 가닥을 재배치하기는 합니다만, 그 변화는 전적으로 H씨에게 달려있습니다. 중심만이 변하지 않을 뿐이죠. 제공인의 동의하에 중심 감정에 약간의 포인트를 넣어주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면 조금 더 강렬한 효과를 얻을 수 있지요. 자, 더 궁금한 부분이 있으면 물어보십시오.
  아, 많은 분들이 물어보시는 질문이 하나 더 있군요. 기회는 한 번 뿐입니다. 저는 같은 고객을 두 번 방문하지 않습니다. 안되겠다고 하시면 안타깝지만 다음 후보자를 찾아가야겠지요."
  한결 같은, 변하지 않는.
  영원한.
  H는 생각한다.
  생각한다.
  생각한다......
  "하겠습니다."
  H는 침을 삼키고 선언한다.
  그는 가방에서 두툼한 서류철을 꺼냈다. 무척이나 꼼꼼하고 긴 설명이 이어졌고 H는 떨리는 손으로 서명한다. 계약은 체결되었다.

  처음에는 색채에 압도되어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붉은 색, 붉은 색, 온통 붉은 색.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붉음과 지상에 존재할 수 없는 붉음을 모두 한 자리에 모아놓은 바다, 소용돌이, 혹은 불꽃, 혹은 은하. 우주다. 그 앞에 있으면서도 우리는 그 속에 빠져 있고, 그 위에 떠 있고, 그 밑에 가라앉아 있다. 그 빛을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맡고, 취하고, 그 안에 잠긴다. 달콤쌉싸름한 향기가 코와 입, 내장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문득 몸이 확 뒤로 잡아당겨지는 느낌이 들더니, 방금 전까지 빠져있던 그 '붉음'이 보인다. 다른 감각은 모두 사그러들고 시각만이 세계를 지배한다. 가능한 모든 붉음이 안에서 흔들리고, 뒤섞였다가 떨어져나오기를 반복하며, 전체로서 맥동한다. 그 맥동의 중심에는 은은한 연보라빛의 심장이 있다. 그러다가 문득 일시에 빛이 어두워지고, 중심을 제외한 주변부가 서서히 어두운 색조로 변해간다......그것은 한 순간의 그늘일 뿐이다. 곧 빛은 돌아오고, 힘찬 맥동이 계속된다.
  "언제나 그렇지만 이것도 훌륭하군."
  "흡족해 하시니 기쁠 뿐입니다."
  "아니, 역시 자네는 훌륭한 장인이야. 그래서 이 원석의 주인은 어떻게 되었지?"
  그는 어깨를 살짝 으쓱이고 말했다.
  "본인에게 달렸지요. 늘 그렇듯."

  "사랑해"
  "으응, 나도"
  J는 건성으로 중얼거리고 몸을 뒤척여 돌아눕는다. H는 다시 속삭인다.
  "사랑해"
  "안다니까"
  J는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가, 조금 미안해졌는지 다시 돌아누워 부드럽게 입을 맞춘다.
  H는 한결같이 사랑을 한다. 언제나 처음 사랑에 빠진 순간처럼 반쯤 구름에 뜬 듯한 도취감에 잠겨 있으며, 설레고 들뜬 마음으로 J를 대한다. 물론 J까지 H와 같기를 바랄 수는 없다. J는 때로 귀찮아하기도 하고, 짜증을 내기도 했다. 가끔은 우리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은 하고 있는 거냐며 H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H는 그 모든 것을 기쁜 마음으로 참아낼 수 있었고, 그러므로 아무것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J의 주위사람들도 모두 H의 한결 같은 사랑에 대해 칭찬했다.
  "사랑해"
  H는 사랑을 속삭이며 영원의 행복을 만끽한다.
  그러나 같은 순간에 J는 한숨을 삼키고 있었다. J는 생각했다. 정말 좋은 사람이지만 너무 변함이 없다고. 잘해준다고 다가 아니지 않은가. 변함없는 것도 좋지만, 관계에 뭔가 발전이 있고 단계가 있어야잖아. 자극이 없어서 그런 걸까? 아니, 자극만 문제라서 그런 건 아니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나를 정말 사랑하는데……내가 나쁜 사람인 걸까.
  한동안은 잘 되어나가는 것 같다. H는 한결같이 J를 사랑하고, 아무것도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 이상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틈을 못본 척 할 수가 없게 되고, H는 번민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이렇게 한결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데도 어째서 이전과 똑 같은 결말이 다가온단 말인가. H는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문득 깨닫는다. J는 자신과 다르다는 사실을.
  결국 J는 미안하다고 말하며 등을 돌렸다.
  H는 허탈감에 사로잡힌다. 한동안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J는 그저 미안하다, 미안하다고만 말할 뿐 다른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H는 꽤 긴 시간 동안 번민한다. 잠시 한눈을 팔 수도 있는 거라고,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고 기다려보기도 한다. J를 보고 싶은 마음에 심지어는 J를 죽이고 함께 죽을까 생각하기까지 하지만 여전히 J를 생각하면 미움이나 비탄의 한 가운데, 마음의 중심에서 한결같이 타오르는 붕붕 뜬 듯한 사랑의 느낌에 가슴이 뻐근해진다. 가끔 J를 찾아가기도 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서글프다.
  시간이 더 흘러, 도저히 J를 증오할 수 없으니 그냥 이 사랑을 평생 간직하고 살자고 생각하고 어느덧 못말리는, 그렇지만 매력적인 로맨티스트라는 평판을 얻을 무렵, H는 Y를 만난다.
  그리고 감정세공인이 말했던 ‘한결 같은’ 감정이라는 것이 감정 그 자체였을 뿐, 대상까지 한정된 것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H는 다시 한 번 감정세공인에게 감사한다. 대상이 J에서 Y로 옮겨갔어도 H의 사랑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H는 똑같은 도취감, 똑같은 행복감을 맛보며 문제가 있었던 것은 자신이 아니라 J였노라는 확신에 이르른다. J는 진정으로 자신의 변함없는 애정에 호응해줄 수 있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다.
  "사랑해"
  "으응, 나도"
  Y는 건성으로 중얼거리고 몸을 뒤척여 돌아눕는다. H는 다시 속삭인다.
  "사랑해"
  "안다니까"
  Y는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가, 조금 미안해졌는지 다시 돌아누워 부드럽게 입을 맞춘다.
  Y가 C로, C가 P로, P가 다시 B로.......
  같은 일이 되풀이된다.
  요령이 생기면서 매번 H가 대상을 옮기는 데 걸리는 시간도 점점 빨라진다. H는 더 이상 번민하지 않는다. 그저 이번에도 잘못된 사람을 골랐구나 생각하고 말 뿐이다. 관계가 좀 더 오래 지속될 때도 있고, 조금 짧을 때도 있다. 짧다고 해서 가볍다는 뜻은 아니지만. 잠깐 스쳐가는 이들이 아니다. Y도, C도, P도, B도 H를 사랑했다. 어느 순간부턴가 H를 참을 수가 없어진다는 점도 똑같았다. 다만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 혹은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상황 때문에 늦고 빠르고의 차이가 생길 뿐이다.
  그리고 H는 사랑한다.
  한결같이.
  상대가 누구든 관계없이 같은 마음으로.
  적어도 B의 자리에 다시 J가 돌아왔을 때까지는 그랬다.
  지친 얼굴로 H에게 돌아왔던 J는 오래지 않아 두번째 안녕을 고했고, 앞서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H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당신은 어딘가가 잘못되어 있어. 달콤하고 근사한 사랑은 나눌 수 있을지 몰라도 정말 진지한 사랑은 하지 못해. 하긴 당신은 그래도 상관없을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야."
  H는 벼락에 맞은 듯 굳은 채 J가 고개를 젓고, 몸을 돌려, 멀어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J가 떠난 다음이다. 자신처럼 한결 같은 사랑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시기하고 있는 것 뿐이라고, 오히려 진정한 사랑을 할 줄 모르는 건 J라고 생각하며 입끝을 억지로 당겨 웃어보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얼굴이, 몸 전체가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다. 아무리 애를 써도 J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할 수가 없다. J의 연민어린 눈동자가 눈앞에서 아른거리며 떠날 줄을 모른다. J의 말을 털어내 버릴 수도, 수긍할 수도 없다.
  그저 우두커니 서 있을 뿐.
mirror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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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란 03.06.30 13:20 댓글 수정 삭제
    좋은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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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은 09.06.18 10:53 댓글 수정 삭제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는 정말 전율했습니다. as님 새 소설을 속히 보고 싶어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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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skalai 10.06.21 11:32 댓글 수정 삭제
    풍란/7년이나 지나서 우주 통신 같아졌네요. 감사드립니다.

    사은/고맙습니다. 요새 새 글 쓰고 있어요. 힘내겠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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