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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 단편 최고의 사냥꾼

2007.09.29 14:3309.29

readingfantasy.pe.kr요 며칠간 젖은 바람이 부는 것이 우기가 시작될 모양이었다. 헤멧 네싱워리 주니어는 드워프의 뭉툭하고 굵직한 코를 한 번 크흠 하고 훔쳤다. 탐탁찮은 요구를 앞에 두었을 때의 습관이다. 헤멧은 눈가에 약간 주름을 잡은 채 칼림도어 공용어로 물었다. 이번의 탐탁찮은 상대들은 호드의 일원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끼워 달라고?"

머리를 불그스름하게 물들인 작고 예쁜 송곳니의 트롤 여자는 고개를 한 번 끄덕하고는 좀전에 들이민 서류를 다시 한 번 제시했다. 트롤들이 늘 허리를 수그리고 다녀서 그렇게 안 보일 뿐이지 키가 워낙 훤칠하다 보니 드워프다운 신장을 한 헤멧이 보기에는 버릇없이 내던지는 것 같다. 나이 스물 남짓해 보이는 어린 트롤 년이 건방지다.

그러나 버릇없다는 이유로 서류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 서류는 무법항의 통치자, 검은바다 해적단의 총수인 남작 레빌가즈의 추천장이었다. 무법항이 붉은해적단 놈들과 최근 항쟁을 벌였다더니 그 때 몇 놈 조지고 추천을 구걸한 모양이었다. 서류는 이 트롤 여자 말고도 오크 남자놈 하나의 신원과 실력을 보증하고 그 능력을 귀히 쓸 것을 종용하고 있...

"어이쿠! 무슨 이런 사방 탁 트인 물가에 이렇게 떡하니 천막을 치고 야영들을 하시나, 그래? 뭐 나름대로 중립 세력들이라니 사람한테 공격받을 일 없다 싶어서 그러시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 해도 너무들 대범한 거 아니셔? 근처에 얼라이언스 반란군 애들도 있다고 들었는데..."

... 었다. 사람보다 짐승들과의 접촉 기회가 더 잦은 사냥꾼 헤멧이 얼라이언스의 일원도 아닌 오크를 그렇게 많이 접할 일은 없었다. 그런 헤멧이었지만 그는 별 무리 없이 저 오크가 그가 본 오크들 중에 가장 말이 많은 떠버리라고 판단했다. 준이라고 짤막하게 자신을 소개한 트롤 여자는 떠들어대는 소리에 뒤도 안 돌아보고 한숨부터 쉬었다. 아마 그닥 돈독한 관계는 아닌 모양이었다.

"바비, 이 사람들 야영 방식 흠잡는 건 좀 미뤄 두고 우리 소개부터 좀 하자."

"소개가 따로 필요할 것 같지는 않군."

부탁하러 온 주제에 하는 꼴을 보니 척하면 척이라는 소리였다. 준은 약간 째진 눈으로 전사 동료를 흘겨보았고 바비라는 오크는 준의 그런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크르렁 하는 소리를 내며 불만을 표시했다. 하지만 헤멧은 이 철부지들이 자기 야영지에서 오래 소란을 피우는 걸 방조할 생각은 없었다. 이럴 때는 간단한 수단이 있지. 사실 이런 소란도 가시덤불 골짜기에서는 가장 유명한 사냥꾼 캠프인 이 <네싱워리 원정대>에서는 그닥 드물지 않은 상황이기도 했다. 이 치들은 그나마 좀 떠벌거린다는 걸 빼면 점잖은 편이었다.

"좋아. 남작과는 얘기가 오래 전에 끝났으니... 하지만 우리 쪽에도 원칙이란 게 있어서 말이지."

"원칙? 무슨..."

준이란 여자는 말이 짧았다. 하지만 처음 느꼈던 것과는 달리 그리 불손한 어조는 아니었다. 오히려 단구의 드워프와 대화하면서 그를 훤칠한 키로 내려다보거나 하는 대신 좀전부터 바닥에 얌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 트롤의 다리 구조로는 그냥 주저앉는 것보다 무릎을 꿇는 쪽이 편해서이긴 했지만 - 눈을 맞추고 얘기를 듣는 품이, 무뢰배는 아니다 싶어 헤멧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러니까, 우리도 괜히 애송이들 시체 치우는 일 맡고 싶지는 않아. 하루에 손에 묻히는 피는 짐승 가죽 벗기느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거든. 그러니..."

"실력 증명인가요?"

"말이 통하는군. 그럼 나도 아가씨처럼 짧게 말하지. 근처 숲 돌아다니면서 호랑이 한 마리, 퓨마 한 마리, 랩터 한 마리 잡아서 가져와."

"하나씩? 기한은?"

기한? 사냥에 기한이 어디 있나. 사냥감이 지치든가, 사냥꾼이 지치든가, 둘 중 하나가 죽든가 하면 끝나는 게 사냥이었다. 이런 걸 묻다니 역시나 나이에 걸맞는 초짜다 싶었다. 실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싸움터와 사냥터는 다르니까. 아마도 한 마리씩 잡아오라는 걸 현상 붙은 해적놈들 모가지 따오는 거랑 비슷하게 여기는 모양이지.

"그런 거 없어. 잡을 수 있나, 없나만 보면 되는 거니까. 아, 그렇다고 한 몇 달 지나 얼굴 잊어먹을 때쯤 돼서 돌아오는 건 인정 안 해."

준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한 마디 했다.

"생각보다 쉽네요."

초짜다운 건방짐이었다. 준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무기 파는 아가씨와 잡담... 이라기보다는 쓸데없는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바비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갈기고는 바비가 항의하려는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천막 한쪽에 추려 둔 자신의 총 - 고블린제 BKP 42 "Ultra" 모델이었다 - 을 집어 들고 외쳤다.

"야, 바비! 사냥 시작이다, 가자!"

분위기로 보아 태도 똑 부러지고 똑똑한 준에게 시끄럽고 생각 없는 바비가 꼼짝 못 하는 듯했다. 나름대로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사실 저 무식한 오크 놈만 왔으면 시험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았을 터였다. 헤멧은 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조끼 앞섶을 더듬거리다, 그새 또 사라진 곰방대를 찾아 투덜거리며 자기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녘께, 웅성거리는 소리에 세수하러 나가던 헤멧이 고개를 돌렸을 때 거기에는 목이 날아간 랩터 한 마리와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호랑이 한 마리, 그리고 옆구리가 길게 찢어진 퓨마 한 마리가 누워 있었다. 헤멧은 웬 녀석들이 이렇게 푸짐하게 한 건 했는가 하고 외쳤다.

"어이! 어느 팀 실적이야? 최근에는 출정 없지 않았나?"

"그, 그게..."

도끼를 전문으로 만드는 인간 여자 대장장이 자킬리나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 헤멧은 잠깐 동안 이해의 부족 비슷한 것을 느꼈다. 물가에 앉아서 쉬고 있는 여자 트롤과 갑옷을 벗어던지고 "아 씨바 날밤 샜더니 졸려 죽겠다! 나 방금 씻었으니까 텐트 더럽힐 걱정은 하지 말고 깨우지 말아 줘!" 운운을 외치며 텐트로 뛰어드는 남자 오크는 어제 저녁에 찾아온 초짜들이었다. 저 녀석들 아직 사냥 안 떠났나? 순간 헤멧은 자킬리나가 왜 말을 더듬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그 역시 당황으로 더듬거릴까 봐서였다. 그 때 물가에서 고개를 돌려 헤멧 쪽을 흘낏 바라본 준이, 특별히 자랑하는 기색이 없는 말투로 물었다.

"호랑이, 퓨마, 랩터 한 마리씩 잡아왔어요. 됐나요?"

두 명이서 하룻밤에 맹수 세 마리 사냥. 헤멧은 아버지를 따라 이 바닥에 뛰어든 이래 10년 넘게 사냥을 해 오면서 지금껏 이런 경우를 두세 번밖에 겪어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또 한 번 당황했다.


* * *



그날 아침, 십여 명으로 구성된 작은 원정대는 발칵 뒤집혔다. 사후경직을 비롯한 사체의 상태로 보아 놈들은 간밤에 죽은 따끈따끈한 수확물이 분명했다. 물론 원정대 사람들이 그만한 성과를 거둘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기한과 시간대, 그리고 인원이었다.

밤은 야수들의 활동 시간이고 드워프와 인간이 보기엔 야수에 가깝기는 하지만 오크와 트롤 역시 사람이기에 낮에 활동한다. 따라서 간밤에 분명 사냥을 하러 돌아다니고 있었을 저 육식동물들을 사냥하는 데는 몇 가지의 애로사항이 존재한다. 밤은 사람의 시야를 가리고, 따라서 그에 구애받지 않는 동물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데 반해 사냥꾼들은 밤을 방어의 시간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즉, 사냥꾼이 밤중에 식인 야수를 잡았다는 것은 쥐가 고양이를 물어 죽인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랩터라면 그 문제점의 해결은 차라리 이해할 수 있다. 공룡들은 해가 없는 밤에 체온이 떨어진다. 목을 친 것도 아마 둔해지거나 잠든 놈을 잡아서일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다른 문제가 있는데, 독립생활을 하는 퓨마나 범과는 달리 랩터들은 무리를 짓는 동물이라는 점이다. 아무리 잠들거나 느리게 움직인다 해도 몇 마리, 심하면 열 몇 마리는 모여 있었을 랩터들 중 우연히 길을 잃은 한 마리를 앗싸 좋구나 하고 거저먹었다? 헤멧은 사냥꾼이고 사냥꾼은 우연의 축복과 저주를 받는 직업이지만 그런 식의 행운까지 기대하지는 않는다.

또한 단 둘이 행한 일이라는 점도 파격적이었다. 대형 사냥감을 잡으려면 최소한 사냥감을 미리 계획한 장소에 몰아넣기 위한 몰이꾼 서넛은 있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덫이나 함정, 올가미로 길목을 아주 도배해 놓고 유인해야 하는데, 맹수가 빠질 만큼 깊은 허방다리를 파고 놈들을 잡을 만큼 튼튼한 올가미를 치려면 하루 밤낮은 걸린다. 게다가 시체의 상태를 보니 함정으로 잡은 것 같지도 않다.

게다가 밤중의 야수들의 활동 범위는 굉장히 넓다. 즉 밤새 숲을 돌아다녀도 새끼 호랑이 꼬리 하나 발견하지 못할 가능성도 높은 것이다. 육식동물이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다간 피식자들이 남아나지 않을 테고, 자연의 섭리를 반영해 이 드넓은 밀림 전체에 사는 호랑이와 랩터와 퓨마를 모조리 합쳐도 그 수효는 삼백을 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 중 세 마리를 '우연히' 맞닥뜨려 잡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분명 추적해서 잡았다. 야밤에, 사냥꾼으로 태어난 짐승들을.

헤멧은 스물 먹은 호드의 일원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하나 하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그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원정대의 지도자 대리를 맡고 있는 자신의 직책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판단 하에, 헤멧은 일단 동료들을 불러 모아 머리를 맞대었다. 그리고 숙고의 결과 그들은, 그들로서는 뭔가 일탈에 가까운 결정을 내렸다.


* * *



헤멧 2세는 천막 안에서 준을 맞았다. 준은 조금 피곤한 기색이었지만 단정한 몸가짐으로 헤멧 맞은편에 앉았고, 그녀를 찬찬히 뜯어보던 헤멧은 그 동작에서 그들이 간밤에 이룬 업적에 대한 과시욕이나 겸손함 같은 것을 읽어낼 수 없었다. 혈기방장한 젊은 트롤에게는 특이한 일이었다.

"수고했네. 솔직히 나로서도 감탄했다고 해야겠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물어도 될까?"

점잔을 빼면서 '훗 애송이들 별일 아닌 거 가지고 으스대지 마라!'고 하지 않는 걸 보니 헤멧은 가시덤불 골짜기 최고의 사냥꾼이라는 권위를 잠시 접어서 천막 한구석에 개어 두기로 한 모양이었다. 준도 괜히 숨기거나 하지 않기로 했다. 헤멧의 호기심을 이해했기에.

"저는 검은창 부족 사냥꾼 집단의 비전의 계승자입니다. 자세한 내력은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그 덕에 몇 가지 마나에 닿아 있는 권능을 익혔지요."

"아하."

헤멧은 자세한 내역까지 밝히지 않는 것에 실망하지는 않았다. '검은창의 사냥꾼'이라는 말의 함의를 이해했기에. 약간 소름이 돋았다. 눈앞의 아가씨는, 트롤 부족들이 비밀리에 키워 부족간 항쟁에 동원한다는 인간사냥꾼Head Hunter이었다. 그들은 달도 별도 없는 폭풍 치는 밤중에 적진을 기습해 감시자들의 목을 따는 데 전문화된 자들이다. 수풀 속의 적을 꿰뚫어보고 비전의 기술로 만들어진 신비한 사냥도구를 이용하는. 그렇다면 저 말도 안 되는 전과도 이해가 갔다. 헤멧은 혀를 찼다. 이거 영웅치고는 너무 젊잖아. 하기야 인간사냥꾼들에 대한 막연한 풍문처럼, 허리에 쪼그라든 사람 머리를 주렁주렁 달고 전신에 문신과 울긋불긋한 색칠을 하고 머리에 랩터 깃털을 무성하게 꽂고 있지 않았으니 알아볼 재간이 없긴 했다.

"대단한 아가씨군. 그럼 저쪽에 코 고는 아가씨 동료도 그런 쪽인가?"

"바비는 오그리마 수비대 그런트Grunt 소속이었습니다. 임무 수행 도중 불미스런 일이 있어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저와 같이 수행중입니다."

호드의 수도를 지키는 그런트. 난폭하고 거칠고 강인하고 잔인하고, 한마디로 사람 같잖다는 모든 종류의 평가에 걸맞는 자들이다. 헤멧은 호드의 미래라 할 만한 젊은 영웅들이 이런 곳에 와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들은, 말하자면 실전 투입 중이다.

가시덤불 골짜기는 호드와 얼라이언스의 오랜 대립 끝에 만들어진 절충안 중 가장 뜨겁고 가혹한 대립구도 끝에 선 땅이다. 바다 건너에서 세력을 키워 이곳에 발을 디딘 호드의 첫 개척자들은 거친 환경과 기이한 괴물들에 끝없이 고통 받으며 여러 군데에 자신의 세력을 키워냈다. 그런 열악한 곳에 터 잡아야 했던 것은 바로 그 열악함이 자신들을 지키는 요새가 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부 왕국 역시 그를 그냥 좌시하지는 않았다. 반란군들의 도당 외에는 얼라이언스의 세력이 거의 미치지 않았던 이 대륙 최남단 지역의 땅에는 점차 대륙에서 내노라하는 영웅들이 파견되기 시작했고, 밀림은 그 위에 내리쬐는 태양의 열기를 무색케 하는 쇠붙이와 피의 격렬한 부딪침으로 달궈져 갔다.

그러한 격전이 조금 사그라든 것은 혼란상을 틈타 천부적인 재능으로 세력을 확립한 검은바다해적단 두목 레빌가즈의 덕이었다. 고블린과 해적이라는, 왠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조합은 그러나 레빌가즈의 탁월한 균형 감각과 협상 능력에 기인해 아제로스 전역을 통틀어 몇 안 되는 중립 지역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지금의 무법항이다. 서부와 동부의 일원이 서로의 살갗 색을 혐오하면서도 한 주점에 앉아 술을 마실 수 있는 땅. 이곳의 이름인 무법항은 거기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무법천지 난장판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중립 규칙을 어길 시에는 도시의 치안을 맡은 고블린 해적들에게 즉결처형을 당한다는 의미이다.

해적 두목에 불과한 레빌가즈의 동상이 자네이로 만의 입구에 거대하게 자리잡고 남작의 칭호로 불리게 된 것도 그러한 공헌의 결과이다. 물론 거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고, 사실 검은바다해적단의 그러한 융성은 결국 경쟁 세력인 붉은해적단을 축출하고 세력을 확고히 하기 위한 전략의 결과였으며, 게다가 레빌가즈는 스팀휘들 무역회사의 하수인일 뿐이니 그러한 세력구도 형성 역시 스팀휘들의 작품인 만큼 그를 뭔가 아제로스 평화상 수상자 후보 같은 것으로 칭송하는 것은 무리라 하겠지만, 그렇다고 그의 수완과 업적을 무시할 수는 없을 터이다.

그래서 지금의 가시덤불 골짜기는, 무법항 어귀를 막 벗어나면서부터 상대 진영의 정찰병, 암살단, 막 아웃랜드에서 돌아온 영웅, 상단 호위무사, 현상금 사냥꾼 등의 기습을 염려해야 하는, 말 그대로의 무법천지가 되어 있었다. 보름에 한 번 정도 격전이 벌어졌고 자잘한 패싸움은 하루에도 십여 건씩 벌어졌으니 정글을 걷다 누군가의 몸 일부를 발견한다든가 하는 일은 그야말로 다반사였다. 때문에 오그리마에서 이들 둘을 파견했다는 것은, 실전 경험을 쌓게 한다는 측면과 그 과정에서 얼라이언스의 최근 동향에 관한 첩보 활동 또한 수행하라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명목상이야 불명예를 씻게 한다든가 해서였겠지만.

그리고 드워프이며 따라서 얼라이언스로 분류될 수 있는 헤멧은 그 모든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닥 신경쓰지는 않았다. 그는 정치꾼도 군인도 아닌 사냥꾼이며 적 세력의 일원을 이롭게 해서는 안되느니 왕국에 충성하라느니 하는 말은 칼아이 멀록 우짖는 소리 비슷한 것으로 여기는 담백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태도 또한 사냥 캠프 지망생을 대하는 통상의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 일단은 사연이 있는 모양이군. 그리고 자격 말인데... 까다롭게 굴 생각은 없네."

헤멧은 일단 태도를 분명히 해 두기로 했다.

"하지만 기왕이면 자네들의 입지를 확고히 해 두는 것도 좋겠지. 그래서 난 어려운 일을 한 번 제안해 볼 생각이지만, 정 내키지 않는다면 응하지 않아도 좋아."

"어떤?"

오늘 같은 위업을 달성한 사냥꾼에게 어려운 일이니 안 내키면 빼도 좋다고 말하는 것은 도발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헤멧은 진심으로 말한 것이었고 그래서 준도 도발에 응하는 태도를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헤멧은 목소리를 약간 낮추고, 고개를 숙여 - 안 그래도 드워프의 신장 상 머리가 낮은 위치였지만 더 낮아졌기에 준도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조금 빼 눈높이를 맞추었다 -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던졌다.

"자네, '야수의 왕'을 사냥해 볼 생각 있는가?"

"...?"

준의 눈초리가 약간 가늘어졌다. 그녀는 번잡하고 화려한 수식어를 싫어하는 쪽이었다. 그런 견지에서, 야수의 왕이라는 칭호는 그게 뭐건간에 너무 거창한 말이었다. 하지만 일단 들어는 보기로 했다. 헤멧은 계속했다.

"야수왕이라고 불리는 백호가 이 숲 어딘가에서 어슬렁거린 지도 열 해가 넘었지. 무수한 사냥꾼들이 그 아름다운 털가죽, 준절한 위엄, 강인한 능력에 반해 그를 쫓아다녔지만 아직까지 성공한 적은 없어. 그 교활한 늙은 범은 상대가 충분히 강하다면 맞대결을 피하고 숨어 버리고, 상대의 격이 자신에게 미치지 못한다 싶으면 가차없이 숨통을 끊어 버리지. 우리 캠프도 지금껏 녀석의 자취를 추적하고 있지만 쉽지가 않아.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 있나?"

어려운 일이라더니 자신들도 해내지 못한 대위업인 모양이었다. 준은 이곳에서 자신들에 대한 평가가 생각 외로 높아졌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졌지만, 동시에 좀 귀찮게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의 임무는 - 헤멧이 이미 짐작한 것처럼 - 얼라이언스 정찰대와 조우하면 그들을 생포해 최근 동향을 캐내거나 상대 진영을 혼란에 빠뜨리는 일종의 유격전이었다. 그러기엔 자유스런 분위기로 소문난 이곳의 사냥 캠프 소속으로 활동하는 것이 편하다 싶어서 지원한 것이었는데... 하지만 준은 곧 생각을 바꾸었다.

사냥은 아마 임무보다는 즐거울 것이다.

"의논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음?"

준은 헤멧의 흉내를 내듯 고개를 약간 앞으로 빼면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 그래서 헤멧을 웃겼다 -.

"그렇게 강합니까?"

헤멧은 혀를 차면서 간단히 대답했다.

"이 끈적하고 우거진 밀림 속에서, 보호색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흰 범이 열 해를 넘겼다는 게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나?"

준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상대는 바비가, 그리고 자신이 만족할 만큼 강하고 멋진 놈이었다. 바비가 일어나면 이야기를 좀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 보아야겠다.

바비는 그날 오후에나 깨어났다. 아무래도 밤새 준에게 끌려다니다가 '쳐!' 하는 한 마디에 잘 길든 사냥개처럼 뛰어들어 사냥감을 두들겨패는 일이 꽤나 고된 노동이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일어나자마자 온종일 굶은 사냥개처럼 왈왈거리기 시작한 데서도 그런 사정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제기랄, 대체 너 펫Pet은 왜 안 데리고 다니는 거야? 트롤 사냥꾼이 펫 길들여서 다니는 거야 상식 중의 상식이자 기본 중의 기본 아니야? 니가 그러니까 내가 펫 취급 당하게 되는 거잖아! 젠장, 너 진짜 날 그렇게 취급하는 거냐?"

"응."

준은 한 마디로 바비의 억장을 뒤집어놓으며 분노한 오크 전사가 피의 격노 상태에 빠져들어 전투의 함성을 외치기 전에 대답했다.

"내 펫 '쇠채찍Ironwhip' 녀석 아파서 무법항에서 쉬고 있는 거 알잖아. 그리고 나 새 펫 길들이고 싶지 않아. 조련시킬 시간 없어. 그러니 그냥 수고해 줘."

쇠채찍은 준의 펫인 불모의 땅 천둥매Thunderhawk의 이름이다. 사실 녀석을 데리고 다니면 바비가 힘들어진다. 한참 칼질하고 있는데 그 위에 번개를 떨어뜨려 버리면 전사도 상당히 고통스러워지니까. 그러니까 그냥 적당히 늑대나 호랑이를 길들이면 될 일이잖느냐고 아무리 바비가 버럭거려도 준의 쇠채찍에 대한 사랑은 그칠 줄을 몰랐다. 붉은해적단과의 지난 전투에서 준을 보호하려다 토마호크를 대신 맞고 몸통을 심하게 다친 뒤로는 더욱 그렇다. 때문에 지금 준에게는 펫이 없었고 바비가 그 노릇을 대신해야 했다. 바비가 투덜거리는 것도 결코 엄살이 아니다.

바비의 분노를 좀 삭혀 보고자 준은 헤멧 2세의 제안을 전했다. 이 다혈질 전사가 새로운 사냥에 흥분하면 자신에 대한 원망을 어떻게 좀 희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준의 기대는 조금 어긋났다. 바비도 야수왕이라는 백호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는 했지만, 곧이어 그는 다음 사냥에서도 자신이 펫 노릇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더 주목했고 그래서 준은 다시 분통을 터뜨리기 시작한 바비를 달래느라 더 난감해해야 했다.


* * *



준과 바비는 그 이튿날 네싱워리 야영지를 나섰다. 간단한 비상식량과 야영도구, 비만 간신히 피할 정도의 거적 비슷한 천막을 지참한 채였다. 하늘은 파랗게 맑았고 뭉게구름이 큼지막하게 하늘 한켠을 메운 좋은 날씨였지만 밀림 아래를 걷는 그들에게까지는 맑은 햇살이 닿지 않았다. 그래서 바비는 습한 밀림의 오래된 토박이들, 즉 자꾸만 장화 속으로 파고드는 거머리 뭉치와 목 언저리를 괴롭히는 모기 떼에 짜증을 내었다.

준은 그런 바비에게 '야수 추적'의 권능을 발휘하느라 신경을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된다며 신경질을 내는 대신 그냥 밀림의 무수한 소음들, 새 우짖는 소리와 벌레 우는 소리로 귀가 먹을 듯한 소음 속에 오크의 으르렁거림을 묻어버리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면세계에 대한 탐구가 필요했다. 다행히 생각할 거리는 하나 있었다. 떠나는 그들에게 헤멧이 던져 준 화두였다.

"자네들, 사냥이 뭐라고 생각하나?"

"에, 거야 짐승 잡는 거... 아니냐?"

바비는 별 생각 없이 대답하려다 옆의 준, 그러니까 사냥꾼이 그 질문에 곧장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며 눈치를 살폈다. 바비의 짐작대로 준은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인간사냥꾼의 후계자는 마주선 헤멧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사람을 잡아도 사냥이죠. 그럼 헤멧께서는...?"

헤멧은 씩 웃었다.

"곧장 대답해 주려고 수수께끼를 던지지는 않지. 돌아올 때까지 대답을 생각해 놓게. 아마 야수왕이 해답을 던져줄 거야. 물론 자네들에게 그럴 만큼의 자격이 있다고 그가 판단할 때에야 그렇다는 말이지만."

헤멧의 이야기는 거기까지였고 그래서 준은 꽤나 오랜 시간 동안 그 주제를 곱씹어야 했다. 강인하고 질긴 드워프의 자신을 바라보는 작고 빛나는 까만 눈이 떠올랐다. 그냥 중늙은이의 시덥잖은 말장난질이라 생각하고 넘겨 버릴 수도 있겠지만, 헤멧의 물음은 준의 목과 가슴 사이의 어딘가에 걸린 채 얹힌 듯이 쉽게 떨어져나가지 않았다. 그녀는 비전의 전수자였지만 그건 기술적인 차원에서의 이야기였지 일족의 정신을 계승하는 자로서의 차원에서는 햇병아리 수준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물음에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나름대로의 진리를 완성하기에는 젊은 나이였으니까. 그것이 준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뭘 하는지도 모르고 하고 있었나, 병신. 준은 속으로 혀를 찼다.

준이 그런 정체성에 관련된 고뇌에 빠져 있는 한편 바비는 그야말로 자기가 뭘 하는지 모르는 자의 태도를 정확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는 준과는 달리 야생동물들의 기척이나 자취를 읽는 능력이 없었고 밀림과 같은 특수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운 바도 없었다. 바비는 차라리 천하에 위명을 떨치는 흉악한 얼라이언스의 성기사가 나타나 전투마 발굽을 울리며 그에게 돌진해 오는 상황 같은 게 지금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적은 보이지 않았고 도처에 위험은 산재해 있었다. 게다가 지난번처럼 아무 짐승이나 잡으면 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는 상대를 찾아 하염없이 헤매고 다녀야 하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런 상황에서 지난번처럼 그를 인도해 주어야 할 준이 툭하면 눈 감고 졸기나 하고 - 사실 준은 명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지만 바비 보기에는 명상이나 조는 거나 거기서 거기였다 - 백호 사냥에 대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이 전사를 가장 괴롭혔다.

덕분에 다혈질의 바비는 자기만의 시간을 즐기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준의 답답함을 성토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짐승들 다 도망간다는 준의 지적을 받고 의기소침해졌고, 부아가 치밀어 물이나 마시러 나즈페리티 호수가로 다가갔다가 뻘밭 속에 잠복해 있던 악어의 습격을 받고, 악어를 맨손으로 두들겨패고 양손검으로 머리를 꿰뚫어 해치웠더니 그새 피냄새를 맡고 몰려든 식인어류 프렌지들의 집중공격을 받아 위험해질 뻔하고, 분노한 나머지 잡은 악어의 가죽을 벗긴 다음 남은 고기를 썰어서 프렌지 낚시에 나서고, 낚시하다가 꾸벅꾸벅 조는 그의 뒤를 덮친 퓨마와 맨손으로 격투를 벌이다 목을 졸라 죽이는 등의 일련의 행위가 이어졌다. 정말 혼자서도 잘 논다며 준은 혀를 찼다. 무식한 오크 녀석, 어떻게 악어랑 퓨마를 맨손으로 때려잡냐. 대가는 양쪽 어깨가 퓨마의 앞발톱에 한움큼씩 베여 나가는 상처였고 그래서 바비는 치유 물약을 바른 채 반나절쯤 엎드려 있어야 했다.

나흘 정도가 지나고 그간 설치느라 지친 바비의 밀림 여가활동이 잠시 시들해지자 준은 그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비의 노획물들을 손질하고 요리하고 가공해 천막을 보수하거나 갑옷에 덧댈 겉감 따위를 만들거나 며칠 먹을 음식을 만들거나 장비를 보수하는 등의 일이었다. 마지막 것은 바비도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문제는 둘의 장비의 차이였다. 아교가 잘 입혀진 준의 가죽갑옷은 적당히 습기 제거만 해 주면 되었지만 바비의 철갑옷은 정글에서는 도저히 유지할 수 없는 물건이다. 바비는 죽어라고 녹 기운을 닦아내고 등잔기름을 발라대느라 적잖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둘의 이런 행동들은 그야말로 '상태 유지'에 지나지 않는 일이었고 그래서 바비는 몇 번을 물었던 질문을 다시 던졌다.

"야, 그 호랑이 안 찾아?"

"못 찾아." 몇 번만에 돌아온 준의 대답은 간결했다. 바비는 어이가 없었다.

"무슨 소리야? 잡으러 왔잖아?"

"헤멧 영감 말대로라면 놈은 자신보다 뛰어난 상대가 나타나면 몸을 감춘다고 했어. 반대로 영 아니다 싶은 녀석들은 처치해 버린다고 했지. 우리가 뭐 다른 짐승들에게 당할 만큼 어수룩한 놈들은 아니니까 결국 놈은 만만하다 싶으면 제가 알아서 나타날 거란 말이지. 결국 여긴 야수들의 땅이고 놈들의 왕은 그놈이야. 손님 맞이에 나설 때까지 기다려 주자고."

"젠장, 그럼 나도 가죽갑옷 줘! 이거 못 입겠다!"

"없어."

"네 거 여벌 있잖아!"

"도대체가... 너는 네 어깨랑 내 어깨 너비 차이를 뻔히 보면서도 내 옷이 너한테 맞을 거라는 생각이 드냐?"

"... 젠장, 그럼 돌아가! 나 저 사슬 세트 걸치고서는 도저히 여기서 버틸 수가 없다구!"

"일단 며칠만 더 참아 보자."

"무좀이랑 진물 땜에 죽겠어!"

이런 식의 실랑이가 계속되었고 가끔 소나기가 내리면 둘은 거적때기 비슷한 천막 아래서 비슷한 실랑이를 이었다. 둘이서 짊어지고 다닐 만큼의 간단한 물건이다 보니 비를 피한다기보다는 쫄딱 젖는 것을 간신히 막을 정도의 허술한 천막이었다. '오그리마 구석의 거지들 꼬락서니' 라며 바비는 투덜거렸다.

바비가 설치고 다니지 않으니 정말 별 일이 없었다. 일부러 찾아다니지 않는 한 정글에서 육식성 맹수들과 조우할 일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이다. 준의 감지능력은 대체로 원숭이, 고릴라, 사슴, 토끼, 캐피바라, 아나콘다, 다람쥐, 나무늘보 같은, 나름대로는 다들 열심히 살아가는 동물이지만 사냥꾼 입장에서는 상당히 쓸데없어 보이는 것들만을 짚어내고 있었고 바비는 준의 지시에 따라 이따금 토끼나 사슴, 다람쥐를 잡아 먹거리를 만드는 일에만 열중했다. 이 곳에 처음 와서 하룻밤에 맹수 세 마리를 잡을 때와는 분위기가 영 딴판이었다. 그 때는 스릴이 있었다며 바비는 투덜거렸다.

한 번은 투자개발회사 쪽에서 파견된 고블린 인부들과 조우하기도 했다. 그네들은 호드의 일원을 발견하고 경계했지만 바비는 사람 좋게 빈 양손바닥을 펼쳐 흔들었다. 원칙적으로는 무법항 쪽에 속한 그들이었기에 엄밀히 따지면 적대 관계지만 의뢰받은 일도 없는데 굳이 그네들과 아귀다툼을 해서 좋을 일이라고는 없을 터였기에 바비와 준은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고 별 마찰은 없었다. 경계를 조금 풀고 접근한 그들에게 대충 주워들은 얘기로는 얼라이언스의 조짐이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네들은 선원들에게서 듣기로 대해 쪽에서 조만간 폭풍이 몰려온다고 했다. 아직은 맑았다.

바비는 프렌지 낚시 및 작살잡이의 요령을 깨우쳤고 그래서 식사 내역이 점차 물고기 수프 및 물고기 구이로 대체되어 갔다. 준은 여가삼아 수집한 가죽으로 새 갑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치수를 재고 정확히 만들기에는 여건이 좋지 않았지만 눈썰미가 있는 준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완성된 물건은 꽤 좋았다. 마무리 바느질 직전에 그들에게 기습을 걸어 온 호랑이 두 마리와 격투를 벌이느라 안감이 좀 흐트러진 게 흠이었다. 바느질에 열중하느라 야수 감지를 게을리 한 준의 실수였다. 바비가 가슴께와 팔뚝을 깊숙이 다쳤고 치유 물약이 조금 더 소모되었다. 미안해진 준은 그 다음부터 자신의 불침번 시간을 조금 더 늘렸다.

보름 가까운 시간이 그렇게 별 목적 없이 흘러가는 데에 바비가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까지 야수왕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열이레째에 나타났다.


* * *



까아악! 아이언포지 제 장검과 오그리마 제 양손검이 얽혔다.

"Guavron choldarii! Uoz-Harishmaa!"

"그래, 넌 병신이야! 잘 아네, 이 새끼!"

바비는 외국어를 싫어한다. 그는 트롤어나 타우렌어도 못 한다. 하물며 동부 왕국 공용어 같은 것은, 게다가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바비는 상대 역시 오크어에 조예가 깊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마주 고함을 질렀다. 칼을 맞댄 잠시간의 힘겨룸은 그닥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바비는 인간 성기사의 오른쪽 옆에서 은신한 노움 도적이 홱 튀어나오는 것을 발견했고 성기사의 경우에는 총을 거둔 준이 올가미를 거머쥐고 달려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두 칼잡이가 떨어진 자리에서 단도를 크게 헛친 도적과 올가미를 막 던진 사냥꾼이 엉겨붙었다. 준은 올가미가 빗나간 직후 무릎을 세워 다리보호구로 단도를 얽으려 했지만 노움은 재빠르고 영민했다. 노움은 허리춤에서 독 쌈지를 꺼내 잰 손놀림으로 준의 얼굴에 던졌다. '실명 가루!' 준은 그 자리에서 뒤로 벌러덩 넘어져 독 묻은 쌈지에 직격당하는 것을 피했다.

전사 하나와 펫 없는 사냥꾼을 발견한 얼라이언스 수색대의 기습이었다. 도리없다. 싸울 밖에. 도적은 "Kiyaaaaah!" 기성을 지르며 거꾸로 쥔 단도로 땅에 쓰러진 준의 가슴을 찍으려 노렸으나 내려친 바비의 양손검이 조금 더 빨랐다. 약간 빗나가 도적의 망토를 조금 찢어먹으며 지나간 양손검은 땅에 누운 준의 바로 위에서 멈췄다. '위험하잖아, 바보야.' 준은 투덜거렸다. 긴박한 상황 치고는 여유롭다.

분노한 오크 전사를 정면상대할 생각은 없었던 도적은 곧장 뒤로 빠졌고 곧 성기사가 쇄도해 왔다. 바비들에게 불리한 싸움이었다. 펫이 있었다면 머릿수에서 앞선다는 이점이 있겠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우위를 점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성기사는 좀 흥분했던지 그만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좀전에 준이 도적에게 뿌린 올가미에 한 쪽 발이 얽힌 것이다. 꽤 볼썽사납게, 성기사는 양 팔을 하늘로 향한 채 상체를 반쯤 뒤틀며 나동그라졌다.

바비도 준도 그 안쓰러운 모습에 동정이나 비웃음을 보이느라 기회를 놓칠 만큼 어설픈 이들은 아니었기에 곧 바비는 성기사의 칼을 든 손을 짓밟고 목줄기를 두꺼운 검날로 짓눌러 제압했고 준은 어느 새 몸을 숨긴 도적의 자취를 찾기 위해 울트라에 섬광탄을 장전해 발 앞 땅에 대고 쏘았다. 펑! 눈부신 섬광탄의 잔상이 망막에 잠시 남았고 도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성기사가 사로잡히는 모습을 보고 도망친 모양이다. 바비가 이죽거렸다.

"아름다운 전우애군, 안 그래?"

"Woo... Entil Pecedar caro spurachione! Span deso...!"

퍽! 바비가 성기사의 투구 벗긴 얼굴을 걷어차 말을 끊었다. 준은 앞니가 좀 나갔을 거라 추측했다.

"우리 말로 해, 병신아."

"못 하는 거 알면서 그러지 마."

준이 핀잔을 주면서 여분의 올가미를 바비에게 건네 주었고 바비는 우악스러운 힘으로 인간의 팔을 꺾어 포승을 묶었다. 그네들이 무슨 인본주의자 비슷한 거라서 굳이 이렇게 귀찮게 적군을 사로잡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성기사라고 하면 학식 있고 사회적 지위 또한 높은 이들의 직업이었고 그래서 그네들에게서는 얼라이언스의 동태에 대한 고급 정보를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공용어도 못 하는 그들 스스로가 그럴 수야 없으니 이 인간 친구를 끌고 오그리마까지 향하는 여정은 꽤 귀찮은 일이 될 것이다. 더군다나 본래의 목적인 '야수왕' 사냥이 끝나지 않은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바비는 인상을 썼다.

"야, 이거 언제 도시까지 데려가냐? 그냥 못 잡은 걸로 하고 이 새끼 제껴 버리..."

"안 돼. 성기사 하나 사로잡기가 쉬운 일인 줄 알아? 오늘도 우리가 당할 가능성이 더 컸잖아. 귀찮아도 챙겨야 돼. 아, 자살 못 하게 입에 재갈 물려 놔."

딱 자르는 준의 말에 바비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냥 인간 것 두 배 굵기의 손가락으로 성기사의 입을 우악스럽게 헤집어 더러운 걸레 뭉치를 쑤셔넣고 - 밀림에서 보름 넘게 체류하다 보니 깨끗한 천쪼가리가 거의 없었다 - 붕대 쪼가리로 입을 동여매었다. 인간 놈의 기분이야 어떻건 바비 입장에선 개소리 비슷한 공용어 들을 일이 없어져서 좋았다. 준은 마법 붕대로 입을 막아 두면 좀전에 걷어채인 상처에 치유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속으로 이죽거렸다. 이런 비아냥거림을 당사자에게 전달할 수단이 없다는 데 좀 아쉬움을 느끼긴 했지만.

아무리 대상을 추적할 수 있는 트롤 인간사냥꾼인 준이라도 밀림 속 어디로 도망쳤는지 모를 도적을 찾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 노움 녀석은 분명 가까운 왕국군 주둔지로 향해 자신들의 패배와 그들의 존재를 보고할 터였다. 도망친 도적의 입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놈이 전할 정보와 최대한 어긋난 현실을 만드는 수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멀리 남쪽으로 돌아갔다. 성기사의 그럴싸한 무기며 갑옷을 벗겨 짐칸에 쑤셔넣고 맨몸인 녀석을 꽁꽁 묶어 질질 끌고 가느라 좀 걸음이 지체되기는 했지만 그러나저러나, 그들은 꽤나 걸었다. 체구가 작은 인간은 큼지막한 오크와 길쭉한 트롤의 보폭을 따라가기 어렵고, 속옷 차림의 인간의 피부는 밀림을 헤쳐나가기에는 여리다. 바비는 헐떡거리며 끌려오다시피 하는 인간의 꼴을 곁눈질하면서 크릉크릉 투덜거렸고 준은 왠지 유약한 가축을 마구 다루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해가 낮술이라도 한 듯 중천에서 기우뚱하며 슬슬 불콰해지고 있었다. 꽤나 멀리 걸었고, 얼라이언스가 조우한 호드 패거리들과 또다른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킬 것을 우려해 수색 범위를 더 넓히지 않을 만한 거리까지 이르렀다고 판단한 준이 그만 멈춰설 것을 제안했다. 바비는 싸우면서 노움 녀석에게 찢긴 종아리가 계속 걷기엔 좀 아팠기에 그러마고 대답했다. 인간은 끌려오느라 지쳐 만신창이에 비몽사몽, 입도 열기 힘든 실신 직전이었다. 뭐, 멀쩡한 상태였다고 해도 말도 안 통하는 포로인 그의 의사가 반영되지야 않았을 터였다.

결박한 인간을 나무에 강아지처럼 묶어 둔 채 재갈을 풀어 물고기 수프를 퍼다넣다시피 해 먹이고 도로 재갈을 물리는 가혹행위를 마친 다음 그들은 대충의 정비를 했다. 바비는 인간의 작은 갑옷을 신기한 듯 만지작거리며 뜯어보았고 준은 성기사의 혁대에서 마나 물약을 약간 챙겼다. 습기를 한껏 머금은 밀림의 느즈막한 한낮은 새, 벌레, 짐승들의 소리, 소리, 소리로 넘쳐났고 세 사람은 말이 없었다. 피곤하기도 했고, 사실 별로 하고 싶은 말도 없었다.

"야,"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 아무 말이나 꺼내려 작정한 바비가 운을 떼었다.

"응?"

"그거 생각해 봤어? 헤멧 영감이 준 수수께끼. 사냥이 뭐냐던 거."

헤멧이라는 말을 알아들었는지 묶여서 이쪽을 곁눈질하던 인간 성기사의 눈매가 거칠어졌다. 아마 네싱워리 원정대와 호드 사이의 결탁을 의심하는 것일 게다. 준은 얼라이언스에 대한 헤멧의 입장을 딱히 고려할 처지는 아니었기에 바비와의 얘기에만 신경쓰기로 했다.

"글쎄, 확실히는 모르겠어. 대충 짐작가는 건 있지만..."

"뭔데?"

준은 모아온 불쏘시개 더미에 점화장치를 가져다 대고 확 불을 붙였다. 고블린 제 점화장치는 부싯돌 따위보다 훨씬 편리하다.

"글쎄... 우리가 여기 온 첫날 밤에 호랑이 잡고 랩터 잡은 건 사냥이지. 그리고 야수왕 녀석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 또한 당연히 사냥이고. 근데 지금껏 야수왕 찾아다니면서 호랑이 잡고 퓨마 잡고 한 건 사냥인가?"

"에... 글쎄? 맞나? 짐승 잡은 거라면 맞기야 한데... 왜 아니라고 말해야 할 거 같은 기분이 드는 거지?"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건 사냥이 아니라 전투라고 보는 게 맞아. 그리고 오늘 저 녀석들이랑 한 건 전투지, 사냥이 아니라. 그런데... 이 곳의 붉은머리 부족 트롤들이 호드나 얼라이언스 습격하는 건 전투인가? 같은 인간을 공격했다는 이유로?"

붉은머리 부족의 예를 들면서 인간사냥꾼 이야기가 남 얘기인 것처럼 말하기가 영 쑥스러운 검은창 인간사냥꾼의 후예 준이었지만 바비는 그런 눈치는 채지 못했다.

"에... 거 미묘하게 다르긴 한데... 그게 무슨 차이가 있는 거지? 싸웠고 죽여서 이겼다는 건 같지만 뭔가 다르다는 건 알겠는데, 말로 표현을 못 하겠네. 너 그런 거 잘 하니까 니가 한 번 말해 봐. 난 모르겠다. 크릉."

바비는 담백하다. 그리고 준은 복잡하다. 그간 틈틈이 진행된 준의 오랜 사고가 나름대로 내놓은 결론은...

"호랑이다."

"또 놈들인가?"

"아니... 저거."

준과 준이 가리키는 방향을 본 바비와 바비가 바라보는 방향을 본 인간은 다음 순간 얼어붙었다.


* * *



'희다.' '허옇네.' 'Blanch.'

제일 처음, 같은 생각이 세 종족의 머릿속에 각자의 방식으로 스쳐지났다. 밀림에서는 이질적인 색깔이었기에 뻘밭, 진흙길, 지긋지긋한 암록색에 길들여진 그들의 눈에 그 하얀색은 신이 직접 윤허한 특제 드레스 비슷한 것으로 보였다. 흰색은 순결한 색이고 수의의 색이며 첫눈의 색, 살고 죽는 것을 분명하게 구분짓는 색이다. 살고 죽는 것이 엉켜서 뭐가 살아 꿈틀대는지 뭐가 죽어 나자빠졌는지 분간키 귀찮은 이 질퍽거리는 밀림에 어울리는 색깔은 아니다.

비정상적인 이질성은 곧잘 경외감으로 변모한다. 보름간 몇 마리의 호랑이를 가죽 처리했던 준과 바비에게 호랑이의 모습은 이제 익숙했지만, 흰 색을 전신에 두른 그 호랑이의 모습은 그 색깔 외에는 별반 특이할 것이 없었음에도, 인근을 쩌렁쩌렁 울리는 포효를 내지른다거나 입에서 번개숨결을 뿜어댄다거나 마빡에 왼나사로 꼬인 뿔을 하나 달고 있다거나 하고 있지도 않음에도 그들은 경외감을 느꼈다. 인간 성기사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는 않아 보였다. 표정을 보니 입에 물린 걸레 뭉치에 대해서도 잊은 듯했다.

야수왕, 벵갈라시였다.

낮술에 에미애비도 몰라볼 만치 시뻘개진 해는 제법 넘어가고 있었고 나즈페리티 호수를 떠나 대해로 향하는 민물은 취객의 숨소리처럼 비린내를 뿜어대고 게을러터진 악어는 온종일 입을 떠억 벌린 채 악어새의 구강 청소를 받으며 졸고 두 돌이 갓 지난 퓨마는 방금 물가에 내려앉은 도요새의 등 뒤로 살금살금 다가가고 근사한 치열을 가진 프렌지들은 늙어 헤엄도 못 치는 산돼지 배때기를 난도질하고 트롤과 오크와 인간은 그 가운데 어느 반억 살쯤 먹은 바위 이마께에 올라앉은 이 밀림의 왕을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는, 느즈막하고 자분거리는 밀림의 오후였다.

야수왕은 대충 백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그 시선에 또 한 번 당혹감을 느껴야 했다. 짐승들은 보통 곧장 공격할 때가 아니면 사람의 눈을 마주보지 않는다. 하지만 뛰어오려고 해도 족히 5초는 걸릴, 그것도 자신을 있는 대로 노출시키는 바위 위에 선 백호의 바라봄에는 공격 의사가 없어 보였다. 지나칠 정도로 당당했다. 바비는 왠지 자신들이 감식당하고 있다고 느꼈고, 준은 어느 머나먼 밀림 속 옛 왕국의 왕을 알현하러 막 당도한 모험가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성기사는 자신의 지금 감정이, 스톰윈드의 왕궁에서 막 기사 서품을 받고 주군 앞에 섰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 당혹해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쓰벌, 저놈 아름답네... 나 반해 버릴 것 같아...'

'왜 이 밀림은 아직까지 이렇게 소란스러운 걸까, 저런 존재가 나타났는데 침묵을 지킬 줄 모르고...'

'Stena nueda monarcho ta estari vepon, hiera maquiste ondo niove...'

퍼뜩 정신을 차린 것은 준이었다. 사냥꾼으로서의 스스로를 자각한 것이다. "크흠." 머쓱한 준의 헛기침에 모처럼 미의식에 눈을 뜬 오크 전사와 스스로의 기사도 정신에 회의를 느끼던 인간 성기사 또한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의 자기발견이 얼추 끝나갈 때쯤, 바비는 야수왕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갔네?"

"갔군..."

'Pasqa...'

해는 이제 시뻘겋게 만취해 거꾸러지기 직전이었다. 내일 아침엔 숙취로 창백해져 돌아올 것 같다.


* * *



온 사방에서 들려오는 낮은 휘파람 소리 비슷한 것이 밀림의 나뭇가지 새를 스치는 바람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으려면 밀림에서 며칠 밤을 지내 봐야 한다. 태평한 바비야 별 신경 안 쓰고 불침번도 서고 잠도 잤지만 좋게 말해 예민한, 사실 까칠한 편인 준은 유령들의 자장가 비슷한 그 소리에 영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해서 준은 차라리 낮에 선잠을 자고 밤에 불침번을 바비보다 더 길게 서는 쪽을 택했다.

모닥불 건너편의 인간 성기사는 나무 발치에 등을 기대고 웅크린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고 있었다. 원수에 대한 증오도 12시간 이상 지속하기엔 꽤 힘든 행위였기에 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그냥 좀 밉살스런 정도의 빛을 띠었다. 준은 그런 인간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2미터가 훌쩍 넘는 트롤의 신장은 앉는다고 딱히 줄지 않는다. 모닥불가에 새로 돋은 나무처럼 곧게 앉아 우울하고 남루한 몰골의 인간을 내려다보던 트롤이 손을 조금 뻗었다.

"나, 준."

"...?"

"아, 재갈 물고 있지."

준은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재갈을 풀어 주고 헝겊을 입에서 빼냈다. 죽 지켜보니 별로 자살할 것 같아 보이지 않아서였다. 도로 물러서 원 자리로 돌아간 준은 아까 하던 짓을 계속했다. 그녀는 자신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준."

성기사는 바보가 아니었고 주저하면서도 같은 짓을 했다. "Ludrant. Pajole Ludrant."

"페이욜 루드란트?"

"Juhn?"

이름이 오갔다. 이제 사냥꾼과 포획물은 잠시 없어진 채, 사람 둘이 모닥불 빛을 쬐고 있다.

"벵갈라시, 알아?"

"Bengalashi? Ji Monarcho dor Botharae?"

"... 뭐라는 거야."

이름만 오갔을 뿐이다. 서로에 대한 이해에는 모닥불 백 개를 태울 만한 시간은 족히 필요할 것이다. 달리 할 말도 없었고 이해를 위한 소재의 공유 같은 것도 빈곤했기에 준은 기지개를 켰다. 바비가 보면 또 뭔 쓸데없는 짓을 하냐고 투덜대겠지만...

"이 자식, 포로 재갈이나 풀어 주고... 자살하면 안 된다고 한 건 너잖아?"

"깼군. 이 밤중에 웬 일로."

바비는 어기적어기적 준에게 다가갔다. 불만 섞인 표정이었다. 다리를 죽 뻗고 앉은 준의 곁에 쭈그리고 앉은 바비는 준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조근조근 얘기를 시작했다.

"이봐, 너 정 많고 마음 여린 거 나도 알아. 그리고 정든 펫이랑 오래 떨어져 나 같이 우악스럽고 막 사는 녀석이랑 오래 있다 보니 외로움 타는 것도 이해는 가고. 하지만 우린 가시덤불 골짜기 정찰대야. 넌 사람 사냥꾼이고. 넌 너희 부족의 적을 추적해서 죽이는 게 날 때부터 정해진 임무고, 나랑 함께 하는 동안 우리는 이 곳에서 발견된 얼라이언스에 대해 자비심 같은 것 베풀 여지 없이 척살하면 그만이라고. 하얀 호랑이 예쁜 털가죽 쫓는 것도 즐거운 여흥거리는 되겠지만 목적 전도까지 일으키지는 말란 말이야!"

바비는 홱 떨치고 일어나 성난 표정과 몸짓으로 인간 포로를 가리켰다.

"저 새파랗게 어린 성기사 놈 족쳐서 뭐 그리 귀중한 정보 나올 거 없다는 거 나도 알아! 목줄 끊기 싫어서, 어떻게든 도중에 도망 한 번 쳐 보라고 호송하려는 것 누가 모르는 줄 알아? 좀 솔직해져 봐! 명예의 골짜기에선 너더러 인간 성기사랑 캠프파이어나 하면서 노닥거리라고 우릴 여기까지 생고생시키면서, 나더러는 '불명예'까지 지게 하면서 위장 파견시킨 게 아닐 거 아냐!"

시작은 조근조근이었지만 그 끝은 버럭버럭이었다. 거의 전투시의 외침 수준이었고 그 소리에 놀란 근처 풀숲의 밤새 몇 마리가 후드득거리는 기척까지 들려왔다. 열여덟이나 되었을까 싶은 성기사 페이욜 루드란트는 그 기세에 질려 바르르 떨었다. 화가 난 오크는 그냥 보기에도 무섭다. 하물며 그와 같은 상황에서야. 그러나 준은 침착을 잃지 않았다. 편히 앉은 자세 그대로 부글부글 끓는 그런트의 눈빛을 받아내면서 사냥꾼은 대답했다.

"... 부정하지 않겠어. 동정심이 개입돼 있다는 것. 하지만 그 상황에서 저 꼬마를 죽여서 얻는 게 뭐지? 벗겨낸 인간 가죽? 끌고 다니기 귀찮다고 죽일 거야?"

"죽이지 않아서 얻는 건 뭔데!"

"뭐긴, 유사시의 인질이지. 투자개발회사 애들 말대로라면 곧 반란군 소탕 겸 해서 엘윈에서 내려온 얼라이언스 놈들 대공습이 있을 거야. 우린 그 소식 들고 가능한 한 빨리 여기서 빠져나가면 그만이고. 저 녀석이 아는 건 없겠지만 그 정도 확인시켜 줄 수는 있겠지. 또 요즘 같은 날씨라면 걔들 말처럼 폭풍도 곧 닥쳐올 거 같기도 하고 말야."

바비가 잠시 허우적거렸지만 준은 그 틈을 타 자기합리화에 쐐기를 박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저 기다렸다. 곧 바비도 준의 말의 빈틈을 찾아냈다.

"그럼 그롬골 주둔지로 가든가 무법항으로 향하든가 해서 이 자리 당장 떠야지, 왜 이리로 깊숙히 들어온 거야?"

"... 미련이 남아서."

바비는 무슨 미련이냐고 묻진 않았다.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저 인간 새끼 끌고 다니면서 야수왕 사냥할 거야?"

"뭣하면 그롬골에 맡겨 두고 돌아오자. 그럴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준은 말을 맺으며 눈을 감고 야수와 인간형 생물에 대한 탐색을, 그리고 혹시 하는 마음에 은신한 존재에 대한 추적도 한 번 실시했다. 확실히 매복이나 기습 같은 것은 없었다. 마음의 눈은 고요했지만, 먼 바다에서는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이틀이 더 지났고, 손짓 발짓으로 얼추 설명한 끝에 페이욜도 그들이 야수왕 벵갈라시라 알려진 호랑이를 잡으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차피 탈출한다고 해서 이 밀림 속에서 도적의 은신술도 익히지 않은 맨손의 인간 혼자 살아남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에, 자연히 감시는 절로 소홀해졌다. 셋은 모여앉아 식사를 함께 하는 정도까지 되었다. 물론 페이욜의 몸통은 굵직한 올가미로 친친 둘러매어져 있었지만.

하지만 페이욜은 지금 당장 야수왕 사냥에 나서겠다는 것에 대해서는 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이 밀림에서 이들 둘에게 잡혀 있는 것보다는 오그리마까지 끌려가더라도 최대한 협조를 해서 살아남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뀐 듯했다. 게다가...

"Von minde ras paieres dera schutrum, piero..."

"슈트룸? 폭풍?"

"Ri. Pok-Phung."

폭풍이 머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염려되었다. 바비와 페이욜은 그만 자리를 뜰 것을 주장했다. 그롬골 주둔지까지만 가면 악천후에 노출되는 것은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준은, 그녀답지 않은 고집을 부렸다. 결국 사흘을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왠지 준에게는 영감이랄까, 어떤 확신이 있는 듯 보였다. 여자의 직감인가 운운하며 바비는 투덜거렸지만 사실 그 역시 야수왕과 결판을 한 번 내 보고 싶기는 했다. '제깟 고양이 녀석이 얼마나 잘났길래.' 정도의 생각이긴 했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바비는 사흘을 기摸?생각이 있었지만, 폭풍은 그래 주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야영이 불가능할 정도의 강풍과 폭우가 몰아쳤고 밀림의 거대한 나뭇잎들은 우쭐거리고 허우적대며 아우성쳤다. 숲의 불길한 울음이었다.

"야! 그만 접고 가자! 이런 날씨에는 모닥불도 못 피워!"

가까이에서도 소리를 질러야 들리는 날씨였다. 바비는 페이욜이 도망갈까 봐 신경을 쓰는 것조차 귀찮아했고 이를 느끼고 있던 페이욜은 언제 저 과격한 오크가 자신의 목을 콱 졸라 버릴지 몰라 불안해하고 있었다. 준도 마주 소리를 질렀다.

"이틀만 더! 비축한 식량도 있고! 근처 유적지에서! 잠도 잘 수 있어!"

"젠장, 추워! 왜 밀림이! 이렇게 추운 거야!"

폭우는 그들의 체온을 급격히 저하시켰다. 속옷 바람의 페이욜은 격렬하게 떨고 있었다. 그 때 바비는 얼굴을 때리는 빗줄기에도 눈을 치뜨고 송곳니를 앙다문 트롤 여자의 옆모습을 문득 보고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 여자,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다. 내가 떠나더라도.

순간 그런트의 자존심, 곧 죽어도 물러서지는 않는다는 앞뒤 꽉 막힌 옹고집이 고개를 홱 쳐들었다. 요런 가느다란 계집애가 오기를 부리는데 내가 물러서서야 되겠는가, 이 그런트 바비 식스킬러가!

바비는 뒤로 돌아 연약한 인간을 달랑 집어들어 어깨에 걸터메었다. 그리고 챙겨둔 짐을 다른 쪽 어깨에 지고는 준을 향하지도 않고 외쳤다.

"칼아이로 가자! 멍청한 멀록 놈들, 아마 이런 빗속에선 물에 들어갔을 거야! 거기라면 좀 낫겠지!"

"바비, 고마워!"

칼아이의 폐허까지 걸어가는 데 반나절이 더 걸렸고 그런트의 어깨에 방어구의 일종처럼 걸려 있던 페이욜은 거의 실신 상태 비슷하게 되었다. 아마 몸살이 난 듯했다. 도착한 칼아이에는 역시나 멀록의 그림자도 없었다. 썩은 생선 냄새가 진동을 했지만 달리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그들은 반쯤 무너진 지붕 아래 대강의 짐을 펼쳤다. 깊숙한 신전 - 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 - 의 한복판에 모닥불을 피웠고, 곧 매캐한 연기가 잘 빠져나가지 않아 온 사방에 자욱하게 끼다가 천장의 무너진 틈새로 서서히 빠져나갔다. 구태여 실내에 모닥불을 피운 것은 폭풍을 피해 걸어오는 동안 등잔기름 통을 잃어버린 탓도 있었고, 비를 너무 맞은 그들에게 온기가 절실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페이욜은 와들와들, 거의 온힘을 다해 떨고 있었다. 준은 머뭇거리다가 인간을 집어들어 무릎팍에 눕히고 그의 젖은 홑옷을 벗겼다. 바비가 심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심히 못마땅하다는 듯 "이건 뭐 모자상도 아니고..." 투덜거리며 딴 곳을 보고 있는 동안 준은 퓨마 가죽으로 그의 몸을 싸매고 대강의 대바늘질을 해서 옷 비슷한 것을 만들어 모닥불 가에 눕혔다. 인간의 떨림이 조금 잦아들었다. 사실 떨지만 않을 뿐이지, 준 역시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페이욜의 응급처치가 대충 끝나자 준은 주저앉아 두 무릎을 그러안고 머리를 허벅지에 붙였다. 그대로 막 잠이 들려 하는 준의 귓가에 바비의 나지막한, 약간 긴장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호랑이 냄새가 난다. 좀 뒤져 봐."

퍼뜩 정신이 든 준은 슬쩍 고개를 들면서 눈을 감고 정신을 모았다. 그리고 곧바로 눈을 번쩍 떴다.

"몇 마리야?"

"하나... 그런데..."

"그런데 뭐?"

준은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신전 건물의 사방으로 길게 뻗은 회랑의 열주 사이를 그것이, 구태여 자취를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지나오면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흰 털가죽이었다.


* * *



준은 갑자기 나타난 벵갈라시에게 고마움과 원망을 동시에 느꼈다. 그들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사람 사는 곳으로 물러나기 전에 나타나 주었다는 것이 고마운 이유였다면, 왜 하필 지금에서야 나타났느냐는 것이 원망의 까닭일 것이다. 이곳은 비록 사람이 지은 폐허일지언정 그늘과 어둠, 적막 등으로 야수에게 지나치게 유리한 곳이다. 기습하는 대신 저렇게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니 녀석은 준에게 야수를 감지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럴 리가.' 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짐승은 짐승이다. 준은 계속해서 벵갈라시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늙은 백호는 서두르지 않았다. 회랑을 가로질러 복도의 약간 트인 터까지 다다른 백호는 더 다가오지 않은 채, 딱 50미터 앞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격이 가능한 거리를 아는군.' 그 정도의 영물이라면 모르는 게 이상할 것이다. 동시에 야수에게 50미터라면 삽시간에 좁힐 수 있는 거리이기도 하다.

바비는 검을 단단히 움켜쥔 채 위로 비스듬히 치켜올려 돌격태세를 갖추었고 준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허리를 수그려 앉아 쏴 자세를 취하면서, 총을 왼손으로만 들고 겨눈 채 오른손을 잠시 내려 땅에 도형을 그리면서 간단한 주문을 외웠다. 트롤 사냥꾼들의 비전의 기술, '얼음의 덫'이었다. 그리고 페이욜은...

'페이욜?'

뭔가가 준의 마음에 걸렸다. 그 녀석은 그냥 인질일 뿐인데, 왜? 순간 준은 자신이 눈앞의 벵갈라시에 집중한 나머지 '야수 추적'의 권능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이게 왜 마음에 걸리는 거지? 녀석은 우리 눈앞에 저렇게...

순간 준은 깨달았다.
벵갈라시는 야수의 왕이다. 그리고 왕에게는 추종자가 있기 마련이다.

깨달음이 약간 늦었음을 질타하려는 듯, 뭔가가 쭈그린 준의 머리 위로 휙 하고 지나갔다. 검은 바람 같은 것이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준이 고개를 돌렸을 때 이미 뒤에서 몸을 숨긴 채 접근한 퓨마는 정신을 잃은 페이욜에게 덮쳐들고 있었다. '빌어먹을 늙은 범, 양동이었나!' 준은 다급히 총을 쥔 한 팔을 휘둘러 덮어놓고 트릭샷을 시도했다. "타앙!" 그것이 적이 바라는 것임을 알면서도. 준의 실수였다. 제아무리 비전의 기술인 '신비한 사격'이라도 라이플을 한 손으로 쏘면서 맞기를 바랄 수는 없다. 퓨마는 급히 사격하느라 자세가 흐트러진 준에게로 고개를 홱 돌렸다.

바비는 뒤가 소란스러워지자 반사적으로 앞으로 돌격했다. '사냥꾼, 알아서 잘 사냥해 봐!' 벵갈라시는 격노해 달려드는 오크 전사의 쇄도에 정면으로 응수했다. "크르릉!" "쿠워어어어!" 적의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전사의 거대한 함성이 낮고 짧지만 힘이 실린 야수의 포효와 얽혀 폐허의 실내를 저릉 하고 울렸다. 바비는 고함과 함께 양손검을 어깨 뒤로 넘겨들고 크게 앞으로 휘둘러베었다. 풍압이 생길 만치 강력한 손질이었지만 약간 짧았다. 곧이어 바비의 헛손질 위로 백호의 발톱이 짓쳐들었다. 쩔겅! 사슬 팔보호구와 어깨갑옷 위에 두 앞발톱이 엉겨붙었다. '가죽 안 입길 잘 했군...' 호랑이의 왼쪽 앞다리에 길게 난 흉터가 또렷이 보일 만큼 가깝게 들러붙어, 그 체중이 무릎을 짓누르는 와중에도 바비는 그런 생각을 했다. 동시에 팔로는 내려친 양손검을 한 팔로 앞으로 찔러넣으면서 입으로는 다시금 고함을 쩌릉쩌릉 질렀다. "우워어어어!" 사방의 벽이 울렸다.

준은 상황의 심각함을 체감했다. 인간과 맹수의 1:1의 격투라면 맹수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따라서 야수왕과 백병전을 벌이는 바비에게는 자신의 지원사격이 필요한데 자기 역시 총도 놓친 채 가죽옷 바람으로 퓨마와 육박전을 버리고 있는 상태다. 이래서야 2:2의 이점이... 문득 준은 자기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님을 깨달았다. 바비처럼 육중하지 않은 그는 퓨마에게 거의 깔리다시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친 앞발톱이 미친 듯이 경화 가죽 어깨갑옷을 긁어댔다. 재생력을 트롤이었기에 그나마 상처가 조금씩 낫고 있긴 했지만 목을 물어뜯으려고 덤비는 퓨마의 아가리를 밀치느라 버거운 상태로는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Thresha!"

푸욱.

어쩐지 퓨마의 몸뚱이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준에게 든 순간, 거대하고 빗물에 젖어 번들거리는 퓨마의 덩치가 부르르 떨었다. 다음 순간 퓨마는 준을 내버려두고 펄쩍 뛰면서 한껏 격노했음이 느껴지는 포효를 내질렀다. "캬우우웅!" 준은 일단 잽싸게 몸을 굴려 일어나면서 주변을 살폈다. 어느 새 정신을 차린 페이욜이 그녀의 앞에 서 있었고, 그 손에는 가죽 벗길 때 쓰는 준의 손칼이 피에 젖은 채 들려 있었다. 퓨마의 등을 후벼판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쇠붙이로 치명타를 입히기에 퓨마는 지나치게 큰 맹수였다. 곧 미친 듯이 분노한 놈이 덮쳐들 것이라 판단한 준은 허리에 찬 대검을 뽑아들고 퓨마의 돌진을 기다렸다...

돌진은 없었다.

'어?'

잠깐 당황한 채 주위를 살펴보던 준은 상황을 파악했다. 퓨마는 아픔에 나뒹굴다가 준이 조금 전 쳐 놓았던 얼음의 덫에 걸려 꽁꽁 얼어붙은 것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쉴 틈도 없이, 준은 좀전에 놓친 라이플을 집어들고 옴짝달싹 못 하는 퓨마의 머리통에 총구를 가져다대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전신에 얼음이 엉겨붙은 채 눈알만 굴리며 자신을 노려보는 퓨마의 시선을 맞받으며 준은 방아쇠를 당겼다. '유탄이 튈지도 모르는데.' 짧은 생각이 스쳤다. 곧이어 타앙. 짓누르는 얼음에서 빠져나오려 꿈틀대던 퓨마의 움직임이 멎었다.

퓨마의 숨이 완전히 끊어졌음을 확인하고 준은 바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바비는 잘 버티고 있었지만 그래도 몸싸움으로 늙은 대호의 힘을 이기기는 어려웠다. 서로 엉켜 엎치락뒤치락하는 호랑이와 오크가 내지르는 고함들이 다 쓰러져 가는 옛 사원의 벽에 부딪쳐 엉망진창의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다. 준은 막 지원사격을 가하려고 했다. 그런데 뭔가 허전했...

'페이욜은? 젠장, 칼을 들고 있었잖아!'

준은 아뿔싸 했다. 좀전에 퓨마에게 일격을 가하기는 했으나 지금껏 묶여 있다가 이제사 풀려난 적군의 포로가 자신을 과연 도와 줄 것인가? 손에는 잘 드는 칼을 들고? 뒤통수에 칼침이나 안 놓으면 다행...

"Pau kravajar, skudorr! Tros carii doo tyen!"

동부 왕국 공용어에 조예는 없었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아 시뻘건 얼굴로 바비 쪽을 손가락질하며 외치는 인간의 그 말이 얼추 '동료가 위험한데 어서 안 쏘고 뭐 하냐, 이 멍청아!' 정도에 해당하는 것임을 준은 어렵잖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 판단이 자신의 어처구니없는 오해가 아니길 빌며 준은 방아쇠에 손을 얹었다. 아군과 엉켜 날뛰는 까다로운 표적이었지만 오직 한 순간, 놈의 미간과 총의 가늠쇠와 자신의 시선이 일직선상에 놓이는 그 순간만 포착하면 된다. 크게 심호흡 이후 날숨의 3분의 1 지점에서 가볍게 쏜다. 조준사격의 기본. 흐으읍.

주위의 소음이, 발버둥치는 바비가, 기진맥진한 페이욜이, 폭풍 속의 사원이 사라진다.

나와,
사냥감과,
내 총뿐이었다.

타앙!


* * *



"..."

아무도 말이 없었다. 사실 누구도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긴 하다. 특히 바비의 경우 당연히 할 말이 없어야 한다. 단순하기에 그만큼 상식적인 종족인 오크이기에 바비에게 이런 몰상식한 상황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보다는 좀 더 유연한 사고를 가진 준은 그리고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을 꼭 말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종족인 인간 페이욜은...

"Diafossa?"

준은 왠지 자신의 동부 공용어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는 듯하다고 느꼈다. '저건 분명 '사라졌다'는 뜻의 단어겠지.' 거기에 이어 바비의 뭔가 굉장히 억울한 말투의 질문이 들린다. "어디 갔어?" 준은 하나마나한 대답을 한다. "글쎄?"

벵갈라시가 사라졌다. 준이 방아쇠를 당긴 직후에. 정확히 말하면 준의 정조준 사격이 그 옆머리를 정확히 관통하고 백호의 커다란 몸뚱이가 온통 피투성이가 된 바비에게서 떨어져 나와 그 옆에 쓰러졌을 때. 아니, 쓰러지긴 했던가? 정신이 없어서. 그러고 보니 지금껏 놈과 몸싸움을 하느라 바비가 흘린 피도 적잖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 미친 준은 얼른 응급처치를 해 주려 짐꾸러미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페이욜은...

"저거 왜 칼 들고 있어?"

바비의 멍청한 질문에 준 역시 멍청하게 대답한다.

"아까 다 죽어가길래 풀어 줬어. 그래도 쟤 저 칼로 나 구해 줬는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포로가 풀려났는데!"

페이욜도 그제사 자신의 상황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깨어나자마자 곧장 도망치지 않은 것은 많이 아파서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뒤로 펄쩍 뛰면서 손칼을 앞으로 겨누고 외쳤다.

"Ahhhh! Ron febredor! Spenitanda mascoral jovan ferrious musa ran...!"

"뭔 소린지 못 알아듣겠지만 얌전히 칼 놔, 이 자식아!"

물론 바비 역시 알아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기에 그는 몸을 일으키며 양손검을 들고 대치했다. 그리고 준은...

"놔 주자."

"... 뭐, 이 여자야?"

"나 구해 줬으니 그냥 쟤 놔 주자고..."

바비는 오만상을 찌푸리고 준을 노려보았다. 좀전의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이어 지금의 짜증스런 상황까지, 모조리 짜증나기 그지없는 그였지만 준의 표정은...

사냥을 마친 사냥꾼의 것이다.

그 세상에 더 바랄 것 없다는 듯한 반응에 뭐라 더 할 말이 없어진 바비는 괴성 비슷한 것을 지르며 칼을 바닥에 거의 패대기치듯 집어던졌다. 인간 검사라면 질색을 할 행동이겠지만 오크란 자들은 원래 이렇다.

"제기랄, 몰라! 너 알아서 해! 아 젠장, 그 흰둥이 새끼 어떻게 된 거야!"

준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페이욜에게 총을 겨누었다. 소년이 바싹 긴장하는 것을 보며 준은 총구를 조금 까닥였다. 가라. 페이욜도 알아듣고는 고맙다는 눈짓 비슷한 것을 하고 그대로 후다닥 달아났다. 준은 손칼을 뺏지 않았다. 이 폭풍 치는 밀림 속에서 혼자 얼라이언스의 땅까지 도망치려면 그 정도로도 오히려 부족할 것이다.

바비는 준의 그런 짓거리가 단단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은 사라진 벵갈라시가 더 그 속을 긁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단은 후자에 대해서만 성질을 부리기로 하고 마구 화를 터뜨리고 있었다. 준은 그제사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그녀가 쏘아 죽인 퓨마의 시체 역시 벵갈라시와 마찬가지로 사라지고 없었다. 얼음의 덫이 터져 사방에 얼음 파편이 튄 흔적은 남아 있었지만. 비 내리는 폐가의 귀신소동이라기엔 너무 생생하다. 정말이지 괴상한 일이다.

일단은 원인제공자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바비, 혼자선 그만 성질내고 따지러 가자."

"뭐? 누구한테?"

"누구긴 누구야, 늙다리 드워프 아저씨지."

준은 그렇게 말하곤 훌쩍 일어서 사방에 널부러진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 난리를 쳤는데도, 그들의 몸에는 상처는커녕 핏자국 하나 없었다. 아무래도 그들에게는 훗날 손자 손녀들을 앉혀 놓고 여름밤 정도에 들려 줄 귀신 이야기가 하나 생긴 것 같았다. 호랑이 귀신이라니, 소재가 좀 어색하긴 했지만.


* * *



"헛허허..."

헤멧은 그저 웃기만 했다. 드워프는 수염이 너무 많다. 모조리 밀어 버리고 정확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을 바비는 하고 있었다. 그리고 준은 그 표정보다는 그 눈빛을 읽어내는 데 더 주목하는 듯 헤멧 2세를 쏘아보았다.

"자, 설명해 주시죠. 대체 그 야수왕이란 거, 정체가 뭡니까? 당신은 알고 있지요?"

헤멧은 대답 대신 의자에서 풀쩍 뛰어내려 천막 구석으로 향했다. 거기서 먼지 덮인 길다란 보관함을 끌어낸 헤멧은 뚜껑의 걸쇠를 벗기고 안에서 뭔가 둘둘 말린 물건을 꺼냈다. 옆구리에 그것을 끼고 가져온 헤멧이 그들 앞에 그것을 펼쳐 보였을 때 둘은 어안이벙벙했다.

커다란 백호 가죽이었다. 아주 큰. 그래, 어제 본 그...

"이건...!"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바비는 백호 가죽을 살피다 왼쪽 앞다리 쪽에서, 어제 벵갈라시와 몸싸움을 하면서 언뜻 본 길게 찢어진 상처를 발견하고 헙 하고 숨막히는 소리를 냈다. 헤멧은 그들 둘에게 잔잔한 시선을 보내었다.

"그래, 이 벵갈라시는 약 15년 전에 내 아버님 헤멧 1세께서 사냥한 사냥감일세. 당시에 이 일대에서는 그 승부가 희대의 사건으로 떠들썩하게 회자되었지. 하지만 그 후에도 이 야수왕은 간간이 유령의 모습으로 사냥꾼들 앞에 나타나 그들을 시험하곤 한다더군."

바비는 석양이 지던 어느 날 언덕 위에서 이국의 제왕처럼 자신들을 내려다보던 백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준은 간밤에 자신과 정면으로 대치하던 야수왕의 시선을 생각했다. 내 눈 안에 담긴 것을 들여다보는 듯하던 그 눈. 헤멧 2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나도 놈을 만나보진 못했어. 부끄럽게도... 녀석에게 난 내 아버지만 못하다는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자네들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네. 그래서 그런 부탁을 한 거야. 그럼 이제 대답을 들을 수도 있겠군."

준은 야수왕의 털가죽을 내려다보던 눈을 들어 헤멧을 마주보았다. 헤멧이 물었다.

"사냥이란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고민이 길었지만, 대답은 자연스럽게 나왔다.

"사냥은 힘 대신 목숨을 겨루는 일입니다."

헤멧은 설명을 더 듣겠다는 듯 턱짓을 했다. 준은 무척이나 궁금해하는 눈을 한 바비를 흘깃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싸움에서 덫, 독, 함정, 기습 같은 것을 쓰면 비겁하다는 이야기를 듣겠지요. 싸움은 상대와의 대등함을 전제로 합니다. 너와 나의 조건을 놓고 겨루는 거지요. 하지만 사냥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냥은 어떤 수단을 써서든, 상대의 목숨만을 노립니다. 거기에는 명예도 도덕도 규칙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비열한 일이라고 불려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목숨이란 것이 본디 그러한 것이기에. 그래서 똑같이 사람을 상대로 싸우더라도 바비는 전사이고 저는 인간사냥꾼인 것이겠지요."

"뭐? 너 인간사냥꾼이었냐?"

"... 꼭 말로 해야 아냐, 둔한 녀석."

동료에게 잠시 핀잔을 주곤 준은 헤멧을 쳐다보았다. 헤멧은 씩 웃었다.

"내 아버지와 거의 같은 말을 하는군. 헤멧 1세의 아들로서 그 대답을 정답이라고 인정하겠네. 자네가 부러워지는걸? 네싱워리 원정대 최고의 사냥꾼이 된 것을 축하하네, 준."

실제로 벵갈라시와 싸운 것은 거의 자신이므로 준의 이름만 언급하는 언사는 부당하니 당장 시정하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바비와 그래도 바비는 전사이니 사냥 보조자 이상의 호칭을 받을 수는 없다고 버티는 헤멧 2세를 뒤로 한 채, 준은 오래 묵은 백호의 털가죽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야수왕의 유령이나 사냥의 본질 같은 것과는 조금 다른 내용이었다.

'내 목숨을 놓고 상대의 목숨과 겨루는 일이니까, 목숨을 살릴 수도 있는 거야.'

준은 그렇게 마음속으로 결론지으며, 더 이상 페이욜의 일에 대해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아직 비가 그치진 않았지만, 햇살이 빼짓이 내미는 걸로 봐서 폭풍은 거지반 지나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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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팬픽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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