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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일 월드

 

누군가를 증오하는 데는 거창한 이유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내쉬는 한 톨의 숨소리와 음침한 그림자만으로도 그들을 증오하기 충분했다. 그렇게 사소한 이유가 쌓이다보면 이 우주 어디엔가 그들이 살아 있음에도 몸서리가 쳐졌다. 그런 측면에서 ‘갈란드로’와 ‘샤울팽’의 전쟁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누가 먼저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기록은 너무 길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어려서부터 옆 동네 사람들이 나쁜 놈들이 확실하다고 믿었다. 모두가 그렇게 말했고, 학교가 그렇게 말했으며, 정치인들까지 저들이 나쁘다 말했다. 심지어 저들이 전부 뒈진다면, 온 우주가 조금 더 나은 세상이 될 거라 믿는 이들도 있었다. 주식도 오를 것이고, 은행 예금도 증가할 것이며, 일자리도 늘 거라고 말이다.

그렇게 그들은 영원한 전쟁을 벌였다. 전방 행성들이 불탔고, 까마귀 떼처럼 몰려든 함선들이 우주 공항으로 모여들었다. 항성의 불빛들마저 차단막에 가려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두 제국의 모습은 우주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그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전파와 우주선의 워프광 뿐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곧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사라졌다. 그렇게 그들은 본진 안에 꽁꽁 숨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목덜미를 드러내는 순간 워프 미사일이 날아갈 터였다. 그렇게 된다면 은하의 끝자락이 전쟁의 화마에 사라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전쟁의 화마가 번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언젠가 한번은 끝장을 봐야 했다. 애국심 아래 수천 조에 달하는 생명들이 산화할 테지만 뭔 대수랴? 그 중에 아군도 조금 있겠지만, 뭐, 대부분은 멍청하고 열등한 적의 시체일 게 분명했다. 그리고 놈들이 전부 뒈진다면 곪은 상처에서 고름을 짜내듯 가슴이 시원해질 것이 분명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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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마말은 연신 기침을 뱉었다. 벌써 일주일째 그는 감기를 달고 살았다. 옆구리에 달린 호흡기관 점막이 따가웠고, 등 뒤에 달린 대롱 형태의 입안도 말라비틀어졌다. 아무래도 휴가를 써야 할 듯싶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국에 휴가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당장 옆 동에서 일하던 사마말이하란 녀석은 휴가 한 번 잘못 썼다가 매국노로 찍혔더랬다. 결국에는 미사일 기지에서 잘리고 놈의 집은 불타버렸다. 가족들까지 전부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과마말은 옆구리가 뱉어내는 점액질 액체를 촉수로 닦아냈다. 그에게는 가족들이 있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알집이 남아 있었다. 그는 그 알집을 무사히 부화시킬 생각이었다. 그래야 1년 전 첫날밤에 잡아먹은 아내를 볼 면목이 생길 것이다.

그랬기에 과마말은 조금 더 힘을 내기로 했다. 그는 출렁거리는 점액질 몸을 끌고서 미사일을 살폈다. 그가 살피는 미사일들은 외우주 감시용 미사일들이었다. 며칠 뒤에 외우주로 발사될 예정이었다. 자세한 임무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아마 아공간 속에 숨어 워프 항법으로 날아오는 적 함대를 감시하는 역할일 것이다. 감시하다가 놈들이 적대적인 함선임이 확실시 되면 곧장 놈들에게 날아들 것이다. 그러면 놈들은 영문도 모르고 워프 항법에 벗어나기도 전에 폭파하여 산화되고 말리라.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 지 알 수 없었다. 그랬기에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손수 미사일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이미 기계적으로 완벽한 상태였다. 수많은 드론들과 관리용 프로그램들이 증명해주는 바였다. 하지만 기계의 애국심을 판단하는 건 애국자의 몫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적어도 윗분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과마말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광기 앞에서 그 어떤 이성도 무의미한 것이었으니까.

그는 리프트를 타고서 격납고 상공을 가로질렀다.

거대한 고목처럼 우뚝 솟은 미사일들 사이에서 그는 탄두와 엔진들을 살폈다. 물론, 며칠 내에 발사되어야 하는 미사일들을 모두 살펴볼 수는 없었다. 위쪽에서 노발대발할 지도 모르지만, 불행히도 이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무작위로 뽑은 미사일들의 품질을 살펴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따라서 과마말은 10발 중 한 발의 미사일을 검사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래도 350발의 미사일이 검사 대상이었다. 그리고 반나절이 지난 오늘, 그는 21발의 미사일 밖에 살펴보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발사 예정일에 맞춰 검사를 마치기는 힘들었다. 확 검사했다고 허위 기재를 할까도 싶었지만, 그랬다가 감사라도 들어오면 큰일이었다.

빌어먹을 윗대가리들 같으니. 맨날 아무런 쓰잘데기 없는 일만 시켜대는 망할 놈들 같으니. 과마말은 4개의 이빨다리를 꿈틀거리면서 윗대가리들의 머리를 자르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그의 피로 물든 상상은 점액질이 흐르는 옆구리에서 끝이 났다.

왼쪽 옆구리가 경련을 일으키듯 부르르 떨면서 세차게 기침을 했다. 리프트 바닥으로 누런색 점액이 튀었다. 그는 대롱 형태의 입을 뻐끔거렸다. 점액을 닦을 만한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진이 빠지는 바람에 그는 몸을 축 늘어뜨렸다. 삭신이 쑤셨다. 당장이라도 약을 먹고 잠을 잤으면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검사도 하지 않고서 어딜 갈 순 없었다. 때문에 그는 잡생각을 옆으로 치워버리고서 22발 째 미사일 앞에서 리프트를 멈추었다. 그는 계기판을 조작했다.

리프트의 정보용 팔에 페이즈 건을 작동시켰다. 페이즈 건의 위상차 레이저가 미사일의 외장을 조심스럽게 해체했다. 그러는 사이 그는 리프트를 외장 가까이 주차하고서 미사일 내부를 향해 몸을 밀어 넣었다.

리프트 외장에 달린 조명이 미사일 내부를 비추었지만, 여전히 미사일 내부는 어두웠다. 과마말은 가슴에 달린 주머니 속에서 도구를 꺼냈다. 그것은 넓적한 벽돌 같은 스캐너였다. 갈란드로 인의 홑눈에 맞게 배치된 접안렌즈 8개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여러 개의 광학렌즈와 분석기가 달려 있었다. 그는 홑눈에 스캐너를 가져갔다.

워프 엔진과 연료통을 바라보자, 스캐너는 온갖 수치들을 과마말에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감기 기운에 짓눌린 과마말은 스캐너가 보여주는 빨간색 불빛만 바라보았다. 빨간색이면 괜찮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굳이 더 살펴볼 필요도 없었고, 살펴보고 싶지도 않았다.

아직도 할 일이 산더미였지만 그는 이대로 끝이 나기를 간절하게 기도했다. 응력집중이니, 하중 분배니 하는 단어들이 짜증났다. 그냥 빌어먹을 그물에 거꾸로 매달려 잠을 청하고 싶었다. 그리고 점액젤리를 한아름 사다가 바닥에 놓고 하나씩 집어먹으면 바랄 게 없었다.

하지만 일은 그렇게 쉽사리 끝날 리 없었다.

탄두 쪽을 올려다 보던 과마말은 스캐너에 떠오른 노란 불빛을 바라보았다. 뭔가 문제가 있었다. 그는 개탄스러운 걸걸한 한숨을 내뱉었다. 8개의 홑눈에 점안액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그는 기계적으로 몸을 돌렸다. 짜리몽땅한 십여 개의 다리를 꼼지락거리면서 그는 리프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리프트를 후진시킨 뒤 페이즈 광선을 껐다. 그러자 미사일의 외장은 다시 원래의 매끈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과마말은 미사일 외장에 비친 웬 창백한 시체를 바라보았다. 삼각형 머리에 찍힌 8개의 홑눈에는 피로감이 서려있었다. 과마말은 비명을 지르듯 한숨을 내쉬며 탄두를 향해 날아올랐다.

스캐너와 연동 된 리프트가 문제 지점에서 정확히 멈춰섰다. 리프트가 페이즈 광선을 쏘자, 탄두의 외장이 사라졌다. 과마말은 가느다란 팔을 뻗어 조종간을 잡았다. 그는 페이즈 건을 쏜 탄두 옆에다 리프트를 가져댔다. 그리고는 페이즈 허공 속으로 흩어진 미사일 외장 안으로 몸을 끌고 들어갔다. 그는 다시 스캐너를 작동시켰다. 그러자 문제점이 명확하게 들어났다. 탄두의 연산 컴퓨터 주위에서 노란불이 들어왔다. 그는 곧장 리프트에서 내려 탄두의 외장에 매달렸다. 그리고는 탄두 안쪽 표면을 기어올라 컴퓨터를 향해 기어올랐다.

뭐가 문제일까? 케이블 연결 문제일까? 설마 부품이 망가진 건 아니겠지? 만약에 부품의 문제라면 골치가 아팠다. 가뜩이나 전시 상황이라 예비 부품 수급이 어려웠다. 거기다 이 미사일 하나만 불량일 리 없었다. 다른 미사일들도 전수 조사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건 그냥 과마말에게 죽으라고 하는 거나 다를 게 없었다.

일단은 뭐가 문제인지 확인을 해야 했다. 걱정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으리라. 과마말은 무거운 마음으로 컴퓨터를 살폈다. 일단 회로 진단용 다이오드는 정상적인 빨간색을 띠고 있었다. 그는 스캐너와 탄두 컴퓨터를 연결했다. 그리고 스캐너 옆에 수납된 모니터를 꺼냈다. 스캐너를 작동시키자, 모니터 화면 위로 불이 들어왔다.

과마말은 화면에 떠오른 글자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웃음과 기침을 터뜨렸다. 무슨 문제인지 명확해졌다. 빌어먹을 스캐너의 진단프로그램의 설정의 문제였다. 탄두 컴퓨터 버전과 진단프로그램이 설정한 컴퓨터 버전이 달랐다. 이런 한심한 실수나 하다니. 감기가 머리를 곤죽으로 만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과마말은 다시 스캐너를 목에 걸었다. 그러자 갑자기 왼쪽 옆구리가 따끔거리면서 동시에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몸을 양옆으로 부르르 떨면서 기침을 했다. 역시나 옆구리에 달린 호흡관에서 점액질이 터져 나왔다. 과마말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몸을 돌렸다.

오늘 하루만 이런 거친 기침을 수십 번쯤 내뱉었더랬다. 그러니 그는 별 대수롭지 않게 옆구리를 손으로 문질러 점액을 닦아낸 뒤 리프트로 돌아왔다. 탄두 외피 내부와 컴퓨터 위에 점액질 유기물이 튀었지만, 딱히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자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빨리 다른 미사일을 검사를 해야 했다.

때문에 그는 리프트 조종석 위에 앉아 리프트를 후진시켰다. 페이즈 광선이 꺼지자, 탄두 안은 다시 어둠 속에 갇히고 말았다. 그리고 약 2000년이 흐를 때까지도 아무도 이 탄두 안을 살펴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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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일들은 굉음을 내며 대지를 박차 올랐다. 지축이 뒤흔들리는 것 같은 진동이 행성 전역을 감쌌다. 굉음이 세상을 쪼갤 것처럼 사악하게 울부짖었다. 거대한 불길이 미사일 기지에 난 화로를 따라 뻗어나가 주변 화로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셀 수도 없이 많은 미사일들은 빠르게 상공을 가로질렀다.

하늘을 느긋하게 떠다니던 구름은 미사일의 위용 앞에 산산이 부서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엔진에서 뻗어 나온 햐얀 수증기 띠가 대기 전역을 덮었다. 그것들은 몇 시간 정도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것이 보라색 대기를 빠져나가자, 곧이어 미사일 안에 내장된 기계장치들이 작동을 시작했다. 그것들은 미사일의 궤도를 제어하면서 초보적인 궤도를 그렸다. 그리고 미사일 기지가 있는 행성 주위를 5번 가량 돈 뒤에 엔진을 가동시켰다.

미사일들은 그렇게 샤울팽 제국 영토 쪽을 향해 탄두를 돌렸다. 이제 그들은 적성국에서 넘어오는 모든 함선과 물체들을 감시할 터였다. 때가 되면 미사일들은 제 몸을 산화시켜 국경을 무단으로 넘어오는 모든 것을 폭파시킬 것이다.

과마말의 침과 가래가 묻은 미사일 역시 우주를 가로질렀다. 수많은 세균과 바이러스를 실은 미사일은 기존에 설정된 좌표에서 워프 항법을 작동시켰다. 곧이어 미사일 주위로 아공간으로 향하는 포켓 우주가 형성 되었다. 탄두 앞쪽 공간이 압축되었고, 반대로 미사일 후면 공간은 팽창 되었다. 공간은 찰흙처럼 늘어나고 줄어든 끝에 우주선은 포켓 우주 속으로 진입하여 모습을 감추었다.

이제 영겁의 시간동안 미사일은 제국의 감시자로서 충실히 임무를 수행할 터였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모든 것을 쪼개고 부수는 것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 충실한 갈란드로의 감시자 역시 시간의 마수를 피할 수는 없었다.

시간은 이 충실한 감시자를 무너뜨리기 위해 아공간이 뿜어대는 방사선과 맞물려 돌아갔다. 그리고 묘하게도 시간과 방사선은 미사일 속에 들러붙은 점액을 바라보았다. 점액 속에 떠다니던 수많은 세균과 바이러스들은 그들의 시선에서 숨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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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자신을 가로 막은 경비병에게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저더러 이곳에서 다음 깜빡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겁니까?”

“여권이 없으시잖아요. 계속 이러시면 입국을 금지 시킬 수 있습니다. 아시겠어요?”

날이 선 경비병이 소리쳤다. 하지만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물러 설 수 없었다. 그 같은 유목민들에게 시간은 소중한 자원이었다. 단, 1깜빡임만으로도 거래처를 잃을 수도 있었다. 그랬다가는 굶어 죽어야 할지도 몰랐다.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다 시 한 번 경비병에게 사정을 했다.

“선생님. 저는 정말로 여권이란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지난 깜빡이 전에는 그런 걸 요구하지도 않았지 않습니까?”

“어쨌든 여권을 내놓으십쇼. 긴말하지 말고.”

“제발 부탁입니다. 이대로라면 기둥에 사는 사람들이 캐낸 광물과 유청을 방치해야 합니다. 광물은 몰라도 유청은 다음 반깜빡임 전에 상할 거라고요.”

“내 알 바 아니죠. 전 기둥에 사는 자들 영토에서 건너온 사람들은 죄다 막으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적어도 여권이나, 신분증이 있어야 들여보내 줄 수 있다고요. 그런데 아무런 서류도 없이 와서 들여보내 달라하면 어쩌라는 겁니까?”

어처구니가 없었다.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섬모를 사방에 뻗었다. 그는 생각에 잠겼다. 벌써 그의 인생은 기둥에 붙은 빨간 불빛이 50여 번 반작이는 것을 보았다. 즉, 인생의 절반 가까이 유목민으로서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기둥에 사는 자들의 영토와 바깥에 사는 자들 영토 사이를 골백 번이고 오갔지만, 단 한 번도 국경에서 가로 막힌 적이 없었다. 여권이란 건 대체 뭐란 말인가? 갑자기 왜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하는 건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경비병에게 항의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유목 생활을 하는 이들이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바깥땅의 단단한 돌조각으로 무장한 이가 나왔다.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그가 누구인지 한 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바깥 영지 경비대장인 구린내 나는 성난 자였다.

“이게 다 무슨 소란이야?”

구린내 나는 성난 자가 말하자, 경비병과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사정을 이야기했다. 다행히도 경비대장은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번에는 그냥 통과 시켜주겠노라 말했다. 어차피 여권이란 것이 도입된 건 당장 1깜빡임이 일기도 전의 일이었다. 그러니 아직 소식이 퍼지기엔 충분한 시간이 아니란 점을 그 역시 인지하고 있었다.

“다음에 출국할 때는 반드시 여권을 발급받고 나가십쇼. 알겠죠?”

“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뭘, 은혜까지야. 우리가 하루 이틀 보고 살았나요? 이 정도 융통성은 있어야죠. 가보십쇼. 아, 다른 형제분들께도 안부도 전해주십쇼.”

경비대장은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 뒤쪽으로 섬모를 흔들고는 초소 안으로 사라졌다.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몸을 덮은 섬모를 가볍게 흔들면서 알겠노라 말했다. 그는 곧장 거대한 짐꾼에게 다가갔다. 그것은 방갈로였다. 온순하고 거대한 생물이었는데, 대부분의 유목민들이 이들을 길들였다. 하지만 이들은 추운 곳에서 살았기에 기둥과 바깥 땅의 접점까지 올라가야 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방갈로는 유목민에게 있어 형제와 다를 게 없었다.

방갈로는 비대한 몸뚱이를 비틀고서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를 기다란 섬모로 건드렸다. 그가 신내를 풍기자, 방갈로는 천천히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를 감아 고정시켰다. 방갈로 위에 올라탄 떨떠름한 신내 나는 자는 방갈로의 섬모를 건드렸다. 거대하고 우아한 원형 생물은 울룩불룩한 몸을 뒤틀면서 대기 속을 헤엄쳤다.

그들은 곧장 국경대기를 뚫고 올랐다. 점액질 국경을 빠져나가자, 차갑고 건조한 죽음이 잠시 몸을 스쳐갔다. 섬모가 오그라들었고, 온 몸에서 수분이 날아가는 감각이 서늘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이런 고통을 견디는 법을 알고 있었다. 수분낭을 최대한 키우는 것이었다. 그러면 수분이 날아갈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길어야 반깜빡임 밖에 버티지 못했다. 반깜빡이 전까지 이런 죽음 속에서 방갈로가 길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도 그가 탄 방갈로는 상당히 영리했다.

방갈로는 빠르게 점액질 대기 속으로 몸을 던졌다. 다시 수분감이 돌아오자,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잉여 수분을 수분낭에서 빼냈다. 비대하게 부푼 하복부가 원래대로 돌아왔고, 쪼그라들었던 머리와 상복부가 부풀었다.

그는 잠시 출렁이는 머리를 흔들어 대고서 생각을 정리했다. 빌어먹을 여권 나부랭이 때문에 대체 얼마나 시간을 낭비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적어도 다음 깜빡임 전까지는 배송을 마쳐야 했다. 때문에 그는 몸을 뒤틀면서 배송지의 냄새를 따라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는 섬모를 뻗어 방갈로의 섬모를 때렸다. 방갈로는 그의 명령을 따라 몸을 뒤틀어 점성이 높은 희박한 대기 속을 꿈틀거리며 배송지를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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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송을 모두 마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권 문제는 달랐다. 복잡한 절차와 서류, 그리고 공무원과의 면접이 뒤를 이었다. 문제는 대부분의 서류들이 난 생 처음 보는 것들이란 점이었다. 토지 관리니, 세금내역서니, 인두세 내역 따위 대체 누가 신경 쓰며 산단 말인가? 거기다 빌어먹을 관료주의자들은 몸에 왁스칠을 한 듯 빳빳하게 경직된 몸으로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를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저들이 어떤 평가를 내렸는지 확신할 수 있었다. 저런 경직된 영혼의 눈에 유목민은 관리되지 않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자유를 누려본 적도 없는 이들은 자유로운 자들을 시기하는 법이었다. 그리고 공무원들은 연금 빼면 시체인 작자들이었다.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 눈앞에 떠다니는 공무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신, 언제까지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살 겁니까? 집은 왜 얻으려고 들지 않는 거죠? 하긴 일자리라도 변변해야 뭘 하든 할 텐데. 그렇게 유목민 노릇해서 얼마나 법니까?”

“먹고 살만 하니까 하는 거죠.”

“먹고 살만하다고요? 먹고 살 만한 사람 몰골이 그따위입니까?”

“내 몰골 따위 신경 끄고 여권이나 만들어주면 안 됩니까? 매번 국경을 오갈 때마다 이렇게 추궁당하고 싶지는 않다고요.”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가 말했다. 그러자 비웃음의 향취가 날아들었다.

“미안하지만 당신같은 유목민들은 국경을 넘을 때마다 까다로운 심사를 받아야 할 겁니다.”

“왜죠? 예전에는 안 그랬잖아요.”

“그래요. 예전에는 안 그랬죠.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럴 겁니다.”

공무원은 향취가 섞인 점토를 섬모에 바르고서 작은 섬유질에다 향취를 발랐다. 무슨 향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별로 좋은 냄새는 아니었다.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섬유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당장 1깜빡임 전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잖아요. 이런 서류들, 절차 따위가 언제부터 중요했다고 이러는 거예요?”

“이제부터는 중요하죠.”

공무원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몸을 오그렸다. 그리고는 배 속에 저장해둔 것을 꺼냈다. 소화되지 않은 당분 덩어리였다. 방갈로들의 고향에서 나는 풍미가 진한 당분이었다. 당분을 본 공무원은 섬모를 멈추었다. 그는 잠시 경직된 모습으로 몸을 길게 뻗었다. 그는 거의 3배~4배까지 몸을 뻗은 뒤에 몸을 줄였다. 아무래도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유심히 살피는 모양이었다. 그는 다시 몸을 오그린 뒤에 당분덩어리를 몸 속에 집어넣고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 비밀은 아닌데. 그래도 조심스럽게 말을 해야 할 것 같군요. 아무래도 조금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거 같아요.”

“어떤 식으로 이상하게 말입니까?”

“싸움. 엄청 커다란 싸움이 일어날 겁니다.”

공무원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때는 반 깜빡임도 전의 일이었다. 새로운 내각이 바깥 땅에 들어섰다. 이번 내각은 사람들의 대대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서 들어선 내각이었다. 전정권의 무능을 꼬집으면서 권력을 잡은 덕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권력을 잡기 무섭게 기둥에 사는 이들을 헐뜯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사람들이 모여서 기둥에 사는 자들을 내쫓아야 하노라고 말했더랬다. 모든 물자와 기술, 심지어 역사적으로도 기둥에서 사는 놈들 때문에 일이 벌어졌다고 말이다.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혀를 내둘렀다.

이게 무슨 방갈로가 얼어 죽는 소리란 말인가? 언제부터 그렇게 적대적인 관계였다고 이 짓거리란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여권 서류를 받아 챙기고서 천천히 관공서를 빠져나왔다. 이리저리 엉키고 설긴 섬유질의 통로를 헤치고 나오자 서늘한 대기가 섬모를 스쳐갔다. 그리고 섬모들 사이에서 악이 오른 냄새가 스쳐갔다.

그는 목을 빼고서 냄새의 진원지를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수많은 냄새들이 강렬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뭔가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무리 속으로 부드러움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겹겹이 쌓인 섬모의 바다를 헤치고 들어가는 순간, 머리 위로 붉은 빛이 번쩍거렸다.

드디어 반깜빡임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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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광체 아래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자신과 자신의 동포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하나같이 투명했고, 듬성듬성 난 부드러운 털로 덮여 있었다. 몸에는 3개의 마디가 있었다. 가운데 마디에는 흡수용 입이 달려 있었다. 그들은 가운데 달린 수 개의 입으로 끊임없이 주위 점액질을 빨아마셨다가 뱉어냈다.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그들이 에워싸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군중 한가운데에서 몸을 뒤틀면서 냄새를 흩뿌리고 있었다. 자극적이고 악의에 찬 냄새였다.

“우리가 이렇게 비참하게 사는 것은 우리 민족의 탓이 아닙니다! 오로지 저 기둥에 붙어서 시간마저 손에 쥔 저 거만한 무리의 잘못이죠! 언제까지 우리는 이렇게 비참하게 살아야 합니까? 언제까지 저들의 거만한 모습을 보고 살아야 하는 거죠? 더 이상은 봐 줄 수 없습니다! 적어도 우리 자손들은 그런 대접을 받아선 안된다 생각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사람들은 섬모를 흐느적거리면서 냄새를 흘렸다. 대부분 긍정적인 냄새들이었다. 감미로운 향취 속에서도 부정적인 악취가 풍겼지만, 향취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들은 모두 싸움을 원하고 있었다. 섬모를 잡아 뜯고 피부를 찔러 부푼 몸을 터뜨리고 싶어 했다. 그렇게 수천, 수만에 달하는 이들을 죽이고 나면 문제는 해결될 터였다. 적어도 찬성하는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에게 둘러 싸인 정치가가 말했다. 그 구린내 나는 사람은 섬모를 사방에 흐느적거리면서 말했다. 그는 대체로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역사에 무관심하다고 주장했다. 그 바람에 기둥에 붙어사는, 역사적으로 추잡한 놈들을 그냥 내버려두고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십쇼. 난방용 광물 가격이 오른 건 누구의 탓입니까? 난방용 광산을 독점하고 있는 기둥에 붙어사는 자들의 횡포 아닙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들의 문화에 홀려 이 땅을 떠났습니까? 거기다 과거를 생각해보십쇼. 우리 바깥 땅 사람들이 어쩌다 이런 척박한 땅에서 살게 되었습니까? 전부 다 저 기둥에 붙어 사는 자들의 횡포 때문 아니겠습니까? 저, 단내 나는 활발한 자를 뽑아 주신다면, 우리 자녀들에게 이런 불행한 과거를 물려주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여권 제도를 강화하고, 유목민들을 전부 내쫓겠습니다!”

수많은 섬모들이 단내를 흘리면서 단내 나는 활발한 자를 흠모했다. 유목민인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항변했다. 유목민을 대체 왜 내 쫓아야 한다는 거냐고 묻자, 단내 나는 활발한 자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유목민들이 기둥에 사는 자들의 하수인이라는 건 만 천하가 다 알고 있소! 거기다 전에 가뭄이 들어서 바깥 땅 사람들이 난방비를 지불하지 못했을 때, 유목민들은 전부 어디에 가 있었소? 전부 기둥 쪽에 붙어 있었잖소!”

“하지만 그건 벌써 37,000깜빡임 전의 이야기잖습니까? 그런 고대의 이야기를 왜 꺼내는 겁니까?”

“고대의 이야기는 꺼내면 안 되는 겁니까? 고대인들이 저지른 잘못은 누구도 문제 삼지 말아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날선 질문이 되돌아오자,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잠시 말문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평정심을 되찾고서 그는 논리적으로 반박을 했다. 하지만 그의 반박은 모조리 그의 출신성분에 의해 가로 막히고 말았다.

외부에서 노는 유목민의 말 따위가 감히 바깥 땅 사람들의 인생을 좌우해선 안 됐다. 적어도 바깥 땅 사람들은 동의했다. 그러든 말든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소리쳤다.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과거에 얽매일 순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린 아무것도 물어서는 안 되겠군요. 저들 손에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고 대대손손 저들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살아야 하는 거로군요!”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정치가의 달변은 어떤 이들의 말보다도 달콤했다. 거기다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분명 사실은 존재했다. 피해를 본 이들도 있었다. 그렇기에 보상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달랐다. 그는 자연 속에서 사는 유목민이었다. 나쁜 일들도 많이 겪었고, 좋은 일도 있었다. 하지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 일은 그저 지나갈 뿐이었다. 그런 생각에 얽매이기보다 다음 목초지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편이 더 나았다.

과거는 이미 죽은 방갈로와도 같았다. 그의 시체를 놓고서 슬퍼하기보다 그를 어떻게 기리고 이용할지가 더 중요했다. 외피와 섬모, 안에든 용질을 효율적으로 쓴다면, 수많은 옷과 먹을거리가 생기는 거니까. 하지만 바깥 땅 사람들은 그의 생각을 고리타분하다 여겼다. 그들은 오히려 단단한 바깥 땅을 파서 무장하기를 원했다. 단내 나는 활발한 자 역시 이에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저희 굳건당은 바깥 땅을 개발하여 위대한 바깥 제국을 건설할 것을 여러분께 약속 드리는 바입니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날아올랐다. 광기에 찬 함성이었다.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그들에게 일갈을 했다.

“바깥 땅을 파서는 안 됩니다! 이건 우리 모두의 파멸을 불러올 겁니다! 여러분 전승에도 바깥 땅을 파는 자에게 재앙이 내린다는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가 소리쳤다. 그러자 의원은 비아냥 거리면서 말했다.

“오, 방금까지는 과거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더니 이제는 과거의 충고를 들으란 말인가요? 앞뒤가 다르군요. 이런 자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과거의 사사로운 역사에 얽매이지 말자는 겁니다! 조상님들의 지혜를 무시하자는 말이 아니라고요! 분명 조상님들은 바깥 땅을 파선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금기 중에 금기였습니다! 왜 다들 금기를 깨려고 하는 겁니까?”

“금기는 무슨. 그건 옛날 노친내들 미신이지.”

단내 나는 활발한 자가 비웃기 시작하자, 주위에 다른 이들 역시 몸을 뒤틀며 비웃었다. 그럼에도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섬모를 흔들어대면서 소리쳤다.

“이대로 가다가 우리 모두 파멸할 수도 있습니다! 분명 우리 조상님들은 저 바깥 땅 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을 한 겁니다!”

“확인은 무슨. 여러분, 지금 이 순간에도 원통에 사는 자들은 광산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지닌 광산이 어떤 건지 아시잖습니까? 지난달에 하부 도시가 놈들이 뿌린 광물에 오염되었습니다. 저들의 광기를 언제까지 참아주어야 하는 건가요? 선하고 무고한 사람들이 얼마나 더 죽어야 저들의 악행을 막을 대책을 세울 겁니까?”

“옳소! 저 나쁜 놈들은 전부 죽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광적으로 섬모를 까딱거렸다. 수많은 화학물질들이 대기를 가득 채웠다.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더 이상 이 회의장에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대기를 헤엄쳐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누군가 그의 섬모를 붙잡았다.

“어디 가는 거죠?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여.”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이름 모를 누군가가 그의 섬모를 붙잡고 있었다.

“난,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 없을 것 같군요. 씁쓸한 이끼 맛이 나는 자여. 아무래도 광기가 저들의 눈을 멀게 한 것 같소. 난 여행을 떠날 생각이요. 분명 선조들께서 우리에게 이런 말을 남기신 이유가 있을 거요. 적어도 증거가 있다면 사람들도 조금 진정을 할 테죠.”

“어디로 여행을 갈 생각이죠?”

“내 생각에는 그 답은 고대의 도시에서 찾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혹시 얼어붙은 도시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화학물질을 내뿜으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고대의 사람들은 대기를 헤엄치면서 유목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유목 생활 와중에 많은 기록을 남겼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영원한 검은 심연에 관한 전승이었다. 그는 질문을 던진 이에게 말했다.

“전승에 따르면 그것은 너무나도 깊어 불빛조차 감히 그것의 깊이를 밝힐 수 없었다고 해요. 심연 속으로 몸을 던진 이들도 있었지만, 다시 돌아온 이는 아무도 없었죠.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 생각보다 끔찍한 것에 둘러 싸여 있는 지도 모르겠어요.”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갔다. 그가 군중 속을 빠져 나가자 질문을 던진 사람은 그의 뒤를 따랐다.

“혹시, 길동무가 필요하지는 않나요?”

그가 묻자,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섬모에 들러붙은 점액을 털어내면서 말했다.

“길동무라. 어차피 따라 와봐야 좋을 게 없을 거요.”

“그래도 같이 갔으면 싶어요. 어디라도 이 미친 곳보다는 나을 테죠. 전 씁쓸한 이끼 맛 나는 자라고 해요.”

“난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요.”

두 생물은 서로의 섬모 수백 가닥을 만지작거리면서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는 떠날 채비를 위해 잠시 헤어졌다. 그들은 도시 외곽에서 다음 깜빡임 전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한숨을 쉬었다. 과연 저 자는 약속을 지킬 것인가? 두고 보면 알게 될 일이었다.

 

.

 

“방갈로에 타는 건 처음이요?”

“네. 전 바깥 땅에서 태어나서 거기서 쭉 자랐어요. 그리고 지난 두 번 깜빡임 전만해도 굳건당에서 서류 정리나 했다고요.”

“굳건당이면, 그 싸우자고 하던 그 놈이 있는 당 아닌가요?”

“맞아요. 다들 갑자기 대규모 전투 이야기를 하니까 무서워서 그만뒀어요. 그랬더니 저더러 배신자라더군요. 그나저나 도시 위치는 알고 있는 거죠?”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알고 있노라고 말했다. 하지만 다음 깜빡임이 있은 뒤에나 확신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유청 조각을 꺼내 씁쓸한 이끼 맛 나는 자에게 건넸다. 반쯤 소화된 유청을 집어든 씁쓸한 이끼 맛 나는 자는 몸속에 유청을 밀어 넣었다. 시큼하게 발효된 유청이 입맛에 맞지 않았던 걸까?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방갈로 몸 안에 몸을 말라 넣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펴고서 방갈로 밖으로 섬모를 내보였다.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가 괜찮냐고 묻자, 그는 방갈로 밖으로 기어 나왔다.

“이렇게 시큼할 줄은 몰랐어요. 당신 이름이 왜 신맛 나는 자인지 알겠네요.”

“그런가요? 그러는 당신은 씁쓸한 이끼 맛 나는 자라는 이름을 얻게 된 거죠?”

“제일 처음 먹은 게 이끼라서요. 제 친구들이 붙여준 이름이죠. 그런데 당신은 유목민이면서 혼자 다니네요. 다른 분들은 어디 계시죠?”

“다들 흩어졌죠. 방갈로를 타고 나면 저마다 갈 길을 가는 게 유목민이라서요.”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가 말하던 그때였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희미한 빨간 불빛이 사방을 밝혔다. 수많은 사물들이 두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 복잡하게 얽힌 수많은 선들과 평평한 검은 대지들이 곧게 뻗어 있었다. 그것들은 기둥 위에 매달려 서로 얼기설기 이어져 간헐적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차디찬 공허 속에서 바깥 땅과 기둥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저 멀리 땅의 끝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바깥 땅과 기둥 사이의 어느 지점이었다. 정확히 특정할 수 없었다. 일단은 빛이 있을 때 가볼 수밖에.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방갈로의 섬모를 만졌다. 그러자 방갈로는 몸을 뒤틀면서 액낭에 저장된 액질을 빠르게 뿜어냈다. 방갈로는 쏜살같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차츰차츰 희미한 반짝거림이 선명해지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거리를 좁혀야 했다. 붉은 빛이 사라지고 나면 저 반짝임을 찾을 길은 없었다. 그냥 어둠 속에서 방갈로를 멈춰 세우고서 다음 깜빡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까?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방갈로의 섬모를 더욱 세게 잡아당겼다. 방갈로는 한 번 더 점액질을 뿜어내고서 속도를 올렸다. 하지만 너무 속도를 올린 탓일까? 방갈로는 어둠을 틈타 몰래 움직이던 행렬을 확인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비명을 질렀다. 방갈로가 방향을 틀려고 했지만, 관성은 두 사람과 방갈로를 행렬 한가운데 내던졌다.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그대로 튕겨져 나가 차디찬 바깥 땅 위에 처박히고 말았다. 잠시 정신을 잃은 그는 몸을 떨었다. 한기가 올라왔다. 차갑고 건조한 한기였다.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이대로라면 죽고 말 것이다. 그는 방갈로처럼 체액이 많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럼에도 섬모 몇 개가 어는 바람에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저기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섬모를 흐느적거리면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감각 섬모를 돌리자,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몸이 터져 죽은 방갈로 속에서 씁쓸한 이끼맛 나는 자를 꺼내고 있었다.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그들의 섬모를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나가떨어진 충격 때문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들은 그를 죽은 방갈로 위에 내던졌다. 그러자 한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왔다.

“대체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건가?”

낯익은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단내 나는 활발한 자가 서 있었다. 그는 다른 이들을 불렀다. 그러자 한껏 무장한 경비병들이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바깥 땅 광물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거기다 날카로운 돌조각 같은 것도 섬모로 움켜쥐고 있었다. 개중에는 낯이 익은 얼굴도 있었다. 바깥 땅 도시의 경비 대장이었던 구린내 나는 성난 자였다. 완전 무장을 한 그는 돌조각을 추켜올리고서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에게 겨눴다.

“유목민이잖아. 여긴 무슨 일이지?”

“아는 자인가?”

“네.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란 유목민입니다. 몇 깜빡임 전에 도시로 들여보내주었죠.”

구린내 나는 성난 자가 말하자, 단내 나는 활발한 자는 매력적인 단내를 뿜었다.

“그러고 보니 이 자는 전에 거리 연설에 끼어들어서 나랑 말다툼을 했던 놈이군. 그리고 이끼 뭐시기랑 바깥 땅을 떠난 놈이고.”

“아시나요?”

“그냥 말싸움 좀 한 게 다지. 어이, 살아 있나?”

단내 나는 활발한 자는 섬모로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를 후려쳤다. 그가 신내를 토해내자, 그는 몸을 뒤틀면서 말했다.

“이쪽은 살아 있군. 거 배신자 쪽은 어때?”

“이쪽도 살아 있습니다.”

“그래? 둘 다 데려가 봐야 별 소용은 없겠지? 경비 대장, 자네 의견은 어떤가?”

“예비용 방갈로 하나가 죽었으니, 솔직히 데려갈 여력도 없습니다.”

“그럼 둘 다 죽이고 가는 게 낫겠군.”

“잠깐 기다려!”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섬모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는 몸을 질질 끌고서 단내 나는 활발한 자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경비대장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경비대장 뒤에 숨은 정치가에게 소리쳤다.

“대체 여기서 뭘 하려는 거지? 당신들 목적이 뭐야?”

“시체면 시체답게 조용히 있어라.”

경비대장은 큼지막한 돌을 들어올렸다. 금방이라도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를 찌를 심산인 듯 보였지만, 정치가가 그를 막았다. 그는 이끼 쪽을 가리키면서 확실히 처리하라 말했다. 그러자 경비대장은 섬모를 꿈틀거리면서 다른 경비병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곧이어 찢어지는 비명이 희미하게 공기 중에 퍼져나갔다.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가 새파랗게 질리자, 단내 나는 활발한 자는 그에게 말했다.

“뭐, 자네 덕을 보긴 했으니 자네가 죽기 전에 조금 알려주도록 하지.”

“내 덕을 봤다고?”

“그래. 우린 극지방으로 이주를 하고 있네. 거기서 새로운 도시를 만들 생각이야. 알다시피 대규모 전투가 사방에서 벌어질 예정이거든. 아마, 다음 깜빡임 때에는 이곳에서도 전투를 볼 수 있을 거라네.”

“미쳤군.”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가 말하자, 의원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다고도 볼 수 있긴 하겠군. 하지만 어쩔 수 없네. 사실, 우린 어떤 문제를 해결한 능력이 없으니까 말이야. 안타깝게도 그게 사실이네. 이건 바깥 땅 의원들과 기둥 쪽 의원들 모두가 동의하는 바네. 대부분의 문제는 우리 시야를 벗어나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곳에서부터 시작을 하거든. 하지만 어쩌겠나? 그런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전부 방갈로가 될 걸세. 멍청한 가축 따위로 보는 사람들이 늘겠지. 위신도 서지 않을 테고 말이야. 그러면 법을 누가 지키려 들 텐가? 국가란 단체도 결국에는 무너지고 말거네. 그럴 바에야 적절한 숫자의 사람들만 남겨두고서 나머지는 제거하는 편이 나을 테지. 그렇게 사람들이 줄면 문제들도 얼추 사라질 거네. 장기적으로는 지지율도 회복하겠지.”

정치가는 기쁜 냄새를 풍기면서 말했다.

“그리고 자네가 이 모든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를 주었어. 원래는 반대파에게 책임을 전가해서 놈들을 청산하려고 했는데, 자네 덕에 일이 더 쉬워졌어.”

“내가 뭘 했다는 거지?”

“뭘 하기는. 저 이끼 놈이랑 같이 이곳까지 오지 않았나? 이끼가 사라진 걸 안 친구들이 저 이끼를 찾으려고 경비병에 신고를 했더군. 우린 그걸 조금 이용했을 뿐이네. 마지막으로 목격한 게 유목민과 함께 도시를 나서는 이끼를 봤다는 증언도 있어서 일이 한결 쉬웠지. 거기다 유목민들에게는 한 표를 행사할 권리가 없거든.”

그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경비 대장이 다가왔다. 그는 몸에 붙은 섬모를 털어냈다.

“슬슬 이동을 해야 할 시간입니다.”

“그런가? 처리하게.”

단내 나는 활발한 자가 말하자, 경비대장은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에게 달려들었다.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가 반항을 했지만, 경비대장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다. 경비대장은 능숙하게 돌로 떨더름한 신맛 나는 자의 표피를 찢어 발겼다. 곳곳에 체액과 섬모들이 떨어져 나왔다. 다 죽어가는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를 내려다보면서 단내 나는 활발한 자가 말했다.

“자네 같은 납치범 덕에 우리는 새 시대를 열거라네. 곧 사람들은 도시를 나와 기둥에 붙어사는 이들을 공격할 테지. 그간 쌓인 것들이 많을 테니 말이지. 운이 좋다면 자네도 기둥에 사는 놈들이 캐는 광신이 불타 없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네.”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몸을 웅크렸다. 몸속이 얼고 있었다. 좋지 않았다. 벌써 몸이 굳어가고 있었다. 그가 몸을 떨든 말든 의원들과 경비병들 무리는 유유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내 나는 활발한 자 역시 다른 방갈로 위에 올라탔다. 떨떠름한 신맛 나는 자는 의원이 탄 방갈로를 향해 움직이던 그때였다. 저 멀리, 무언가 밝은 것이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눈을 돌렸다. 하지만 광채는 투명한 그들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정치가는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보다 일찍 시작되었군. 우린 빨리 가지.”

그는 방갈로 무리와 함께 빠르게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가 걸음을 돌리기 무섭게 어디선가 불빛이 번적거렸다. 어렴풋이 그 빛이 기둥 쪽에서 흘러나왔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불빛은 이 조그만 사람들의 지혜를 아득히 뛰어넘은 것이었다. 퍽하는 굉음과 함께 수많은 지적 미생물들이 살던 땅들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충격의 여파로 바깥 땅은 떨어져 나와 우주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수많은 악의가 차가운 포켓 우주의 한 귀퉁이에서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

 

“우린 여기서 죽는 가봐.”

다과말이 옆구리에 달린 호흡기관을 뻐끔거리면서 말했다. 빨대 같은 입은 허공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가느다란 손가락들은 함교 계기판을 두드리는 중이었다. 8개의 눈으로 모니터를 훑어보았다. 하지만 별로 좋은 소식은 없었다. 함교 뒤편에 앉아 있던 샤시,팽이 말했다.

“그래도 뭔가 좋은 소식은 없어?”

“없어. 아직까지는. 우린 다 여기서 죽을 거야.”

“죽는다는 게 뭐야? 엄마 아빠를 만난다는 거야?”

풍성한 깃털로 덮인 샤시,팽의 가슴 아래 폭 안겨 있던 하롸말이 말했다. 그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샤시,팽의 등을 감쌌다. 그러자 로만,팽은 바닥을 발로 내리 찍었다. 큰소리가 나자, 샤시,팽의 품에 폭 안겨 있던 하롸말이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가 8개의 홑눈으로 눈물을 쏟아내자, 우주선 함교의 뒷문이 열렸다.

함교 뒷문에서는 네발 달린 로봇이 몸을 비틀면서 나타났다. 그것은 대체로 하롸말과 다과말과 비슷하게 생긴 로봇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바퀴가 달린 네 다리와 머리 한가운데 달린 커다란 렌즈가 하나뿐이었다는 점이었다.

로봇은 아이들 사이로 다가와 그들을 타일렀다.

“로만,팽. 그만 두렴. 하롸말이 울잖니. 계속 그러면 원장님께 혼날 거야.”

“원장 좋아하네! 우리를 버리고 간 게 그 개자식이잖아! 어쩐지 갑자기 우리더러 소풍 가자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빌어먹을 제국 전쟁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소풍을 가겠어? 속은 사람이 바보인거야! 우리가 바보인거라고!”

로만,팽은 길게 늘어진 깃털을 날개처럼 퍼덕거렸다. 상당히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화가 났다고 해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별것 없었다. 그는 평소처럼 부리로 바닥을 쪼다가 물건을 던지려 했다. 문제는 고아들이 탄 이 우주선에 던질 물건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먹다 남은 애꿎은 설탕 핵폭탄 상자를 집어던졌다. 설탕 핵폭탄 상자가 벽을 때리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에 설탕가루가 흩어지든 말든 다과말은 함교 컴퓨터를 살피면서 로봇에게 말했다.

“엔진 상태는 어때? 비상엔진 작동 가능해?”

“고장이 났어. 부품 누락이야. 보니까 엔진에 달린 보조적인 시동 배터리가 빠졌어. 아마, 너희 중 한 명이 숨겼거나 원장님이 뺐을 거란 생각이 들어.”

“우린 아니야. 애초에 우린 죄다 함교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갔었잖아.”

“맞아. 하루 종일 설탕 핵폭탄이나 먹었는데.”

하롸말은 훌쩍거리면서 말했다. 그러자 샤시,팽이 말했다.

“그럼 혹시 다른 부품을 이용하는 건 어때? 우주선에 배터리 하나쯤은 남는 게 있지 않아?”

“예비부품은 전부 구명정에 있어. 그리고 구명정은 알다시피.”

원장. 아이들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원장이 문제였다. 그는 현재 이 우주선에 없었다. 아이들에게 설탕 핵폭탄을 던져 주고 함교에서 놀라고 지시를 한 뒤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구명정이 사라진 걸로 볼 때, 그는 혼자 구명정을 타고 우주선을 탈출한 모양이었다. 그것도 엔진의 부품 하나를 빼서 말이다.

이제 이 조그만 우주선에 탄 아이들에게는 남은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선택지가 같은 결과로 이어졌으니, 선택 역시 큰 의미가 없었다.

“혹시 누구 핸드폰 가진 사람?”

“원장님이 가지고 있지.”

“그럼 구조 요청은…….”

“통신기 부품도 알뜰살뜰하게 챙겨 가셨더라.”

샤시,팽은 한숨을 쉬고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더 이상 뭔가를 생각할 수 없었다. 품에 안고 있는 하과말과 자신을 달래는 것도 그녀로서는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로만,팽은 그런 그녀를 더 궁지로 내몰았다.

“이제 뒈지는 것 밖에 안 남았네. 개씨발새끼 때문에!”

“조금 조용히 할 수 없어? 애도 있는데 계속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어쩌자는 거야?”

“애가 있는 게 뭐? 이젠 우리 다 같이 사이좋게 저 세상 가게 생겼는데!”

샤시,팽과 로만,팽이 싸우는 사이 함교 컴퓨터를 만지고 있던 다과말이 소리쳤다.

“잠깐잠깐, 좀 조용히 해봐 깃털복숭이들아. 지금 뭔가가 보인다고!”

“닥쳐 맨질이 녀석아. 보이긴 뭐가 보인다는 거야? 여긴 포켓 우주야. 고철 우주선들이나 가끔 들어왔다 나가는 그런 곳이라고. 이런 곳에 드나드는 우주선 따위는 이제 없어.”

“그래. 우주선은 없지. 하지만 다른 건 있어. 봐봐.”

다과말은 아이들과 로봇에게 손짓을 하면서 화면을 손으로 가리켰다. 흐릿한 화면 너머로 기다란 물체같은 것이 보였다. 로만,팽은 부리로 모니터를 쪼면서 말했다.

“저게 뭔데? 우주선도 아닌 거 같은데.”

“부리 치우고 잘 봐. 우주선은 아니지만 생긴 게 꼭…….”

“미사일이다! 엎드려!”

어린 하과말은 가느다란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샤시,팽은 몸을 웅크리고 경직된 하과말을 비막처럼 늘어진 깃털로 쓰다듬어주었다. 하과말이 몸을 둥글게 말고서 앓는 소리를 냈다. 샤시,팽이 어르고 달랬지만, 하과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과말을 안고 있던 샤시,팽이 불안한 듯 말했다.

“아니, 왜 미사일 따위를 보여주는 거야? 미사일이면 빨리 피하든가 해야 하는 거 아냐?”

“사실, 우리가 타고 있는 이 싸구려 렌탈 우주선으로는 미사일 감지 자체가 불가능해. 미사일이 먼저 우리에게 날아와서 폭발한 다음에나 알 수 있을 걸.”

“그럼, 뭐야 저거 고장 났다 이거야? 하지만 고장 난 미사일가지고 뭘 하려고?”

샤시,팽이 말하자 다과말은 한 가지 계획을 이야기 했다. 그 계획은 터무니없었고, 현실성도 없었다. 아이들도 이 점을 지적했다.

“멍청하기는. 그게 가능할리 없잖아.”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지. 지금 우리 엔진에 부품이 없는 거잖아. 그렇지, 로봇?”

로봇은 머리를 까딱거렸다.

“그렇습니다. 여분의 핵융합 배터리가 필요합니다.”

“그럼 저 미사일의 부품을 사용 할 수 있을까?”

다과말이 말하자, 로봇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아이들도 침묵을 지켰다.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이곳에서 죽고 싶지 않았다. 살아남을 수 있는 1%의 확률도 그들에겐 소중했다. 로봇은 그들에게 말했다.

“가능할 지도 몰라. 확률적으로 10% 정도지만, 이 정도의 확률도 상당히 높은 거지. 외형으로 볼 때 저 미사일은 고대의 갈란드로 제국의 미사일로 보이는데 마침 현재 우리가 타고 있는 우주선도 갈란드로 제국에서 제작한 우주선이거든. 그것도 1200년 전에 만든 우주선이야.”

“용케 이런 골동품이 날아다녔네.”

로만,팽이 중얼거리자, 로봇은 몸을 으쓱거렸다.

“골동품이라니. 너희가 먹고 있는 설탕 핵폭탄도 1000년 전에 만들어진 거라고.”

아이들은 모두 역겹다는 듯 부리를 쩍하니 벌렸다. 하롸말만 빼고 말이다. 녀석은 맛만 있으면 괜찮은 거 아니냐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점은 다과말도 동의하면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해? 저 미사일을 분해해서 부품을 갈무리하는 거야. 그러면 우주선을 고칠 수 있을 지도 몰라.”

“하지만 공구가 없잖아. 거기다 터질 수도 있고.”

샤시,팽이 머뭇거리자, 로만,팽은 으스거리며 말했다.

“어차피 이판사판 아냐? 이대로 표류하다 죽으나 미사일 좀 만지다 죽으나.”

“난 죽기 싫어.”

하과말이 칭얼거렸다. 샤시,팽은 하과말을 깃털로 쓸어내렸다. 어쩔 수 없었다. 로만,팽의 말이 맞았다. 이판사판이었다. 그녀까지 찬성하자, 아이들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안전을 위해 로봇을 우주로 내보냈다. 만일 뇌관이 살아 있다면, 뇌관을 해체하는 작업부터 진행할 생각이었다. 문제는 아무리 로봇이라 하더라도 저런 거대한 미사일을 다룰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잘못 건드려서 부품이 손상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샤시,팽이 말했다.

“그럼, 이건 어때? 안전을 확인한 다음에 우주복을 입고 미사일에 다가가서 부품을 뽑아서 돌아오는 거야.”

“우리가 로봇보다 부품을 잘 다룰 수 있을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 아무리 내가 군사 로봇에서 보육 로봇으로 재프로그래밍 되었다고는 해도 아직 팔들은 멀쩡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물건을 들어줄 조수가 필요한데.”

로봇은 로만,팽과 다과말을 앞발로 가리켰다.

“그래. 마침 우주복은 두 벌 있으니까, 너희 둘이 나와서 날 보조해줘. 뇌관을 확인 한 뒤에 신호 줄 테니까 함교 뒤편 에어록에서 우주복을 입고 있어.”

“왜 우리 둘이야?”

다과말이 묻자, 로봇이 말했다.

“한 놈은 똑똑하고 한 놈은 힘이 남아도니까.”

아이들은 얼추 납득을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로봇이 나간 지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함교에 하과말과 함께 남은 샤시,팽은 모니터로 로봇을 살폈다. 그는 로켓 내부를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아직도 확인할 것이 남은 건가? 그는 아직도 신호를 주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지루한 기다림을 계속 이어가고 있을 때 로만,팽이 말했다.

“어이, 샤시! 아직이야? 어이!”

샤시,팽은 아직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에어록과 음성 연결을 끊고서 한숨을 쉬었다. 진저리가 났다. 어쩌다 이런 고아원에 들어와서 저런 추접한 놈이랑 같이 표류 중인 우주선에 갇히게 된 걸까? 차라리 다과말이 샤울팽에서 태어난 동족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부리로 머리털을 쪼아 줄 수도 있었다.

아, 물론 지금도 그의 머리를 쪼아 주고 싶었다. 똑똑하고 귀여운 점액질 덩어리와 함께 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괜히 다과말을 쪼았다가 그의 매끈한 물주머니 같은 몸이 펑하고 터질지도 몰랐다. 거기다 사회적인 시선도 문제였다. 샤울팽에 사는 동족들은 샤시,팽을 이해하지 못할 터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문명이 퇴보할 만큼 거대한 전쟁을 벌인 두 종족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사회는 샤시,팽의 결정에 뭐라 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들은 거의 2000년 동안 전쟁을 당연시했다. 사람이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이 죽고 죽일 것을 장려했다. 그렇게 사람들의 수가 한 줌의 모래만큼 줄어들 때까지도 그들은 전쟁을 부르짖었다.

그렇게 갈란드로와 샤울팽이란 두 제국이 무너졌다. 전쟁의 광기 앞에 샤시,팽과 로만,팽의 부모님은 돌아가셨다. 행성째로 분쇄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두 아이는 불행하게 살아남은 아이들이었다. 다른 행운아들처럼 그 자리에서 죽었다면 차라리 편했을 것이었다. 하과말과 다과말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불운하게 살아남았다. 그리고 원장에게 버림받은 뒤에 미사일을 해체하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원장님도 샤시,팽과 같은 동족이었다. 어떤 면에서 그녀는 동족에게 버려진 셈이었다. 그러니 동족의 비난을 산다 해도 딱히…….

“샤시,팽 내 말 안 들려? 애들더러 이제 나와도 된다고 그래!”

샤시,팽은 퍼뜩 고개를 돌리고 화면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에어록에다 음성을 연결했다. 그녀가 로봇의 신호가 왔노라 말하자, 로만,팽과 다과말은 우주 밖으로 나갔다. 에어록이 닫히자, 하과말은 샤시,팽에게 말했다.

“언니야 무슨 생각해?”

샤시,팽은 자조 섞인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한심한 생각.”

맞는 말이었다. 지금 죽을지 아닌지도 모를 이 시점에 둥지나 짓는 생각이라니.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는 없었다. 그녀의 뇌는 목석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었다. 단백질과 지질, 그리고 호르몬으로 구성된 뇌는 본능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오늘 죽든 내일 죽든 아니면 당장 죽든 일단은 자손부터 남기라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하과말을 쓰다듬으면서 마음의 위안을 삼았다.

하지만 마음의 위안은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로봇이 말한 것이다.

“샤시,팽. 우린 지금부터 미사일 내부로 들어갈 거야.”

뭐? 샤시팽은 눈을 부라리면서 소리쳤다. 그러면 뚱뚱한 로만,팽 대신 자신이 들어가겠노라고 말이다. 하지만 빌어먹을 남자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도 않고 통신을 끊어버렸다. 그녀는 허탈한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모니터 속에는 두 미치광이와 짜리몽땅한 바보같은 덩어리가 보였다.

샤시,팽은 개탄스러운 욕설을 중얼거렸다.

 

.

 

미사일 내부는 개판이었다.

일단 사람이 다니라 만든 통로는 하나도 없었기에 그들은 간신히 몸을 우겨넣는 것 외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이들 몸집이 작았다는 점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 여정은 오래전에 끝을 맺었으리라.

부품 속에 끼인 다과말은 우주복에 달린 전등불빛으로 미사일 내부를 바라보았다. 곳곳에 기능을 알 수 없는 부품들이 가득했고, 쇳조각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거기다 충격으로 인해 외장은 살짝 뒤틀려 있었다.

살다살다 이런 미사일 내부까지 기어들어오게 될 줄이야. 다과말은 지적 흥분과 생존의 두려움 속에서 몸을 떨었다. 하다 못해 페이즈건이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전에 책에서 본적이 있었다. 한때 과학자들은 페이즈 건 같은 비파괴 도구를 사용해서 물건의 구조를 파악했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런 고대의 기술은 소실된 지 오래였다. 끔찍하게도 그것은 사실이었다. 전쟁이 죽인 것은 부모님뿐 아니라 지식도 함께 죽였다.

로봇이 앞장서면서 로켓 내부에 길을 뚫었다. 그 뒤를 다과말이, 그리고 로만,팽이 따랐다. 그들이 향한 곳은 미사일 후방에 달린 워프 엔진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거대한 연료통에 가로막혔다. 연료통과 미사일 외장 사이에 어떤 공간도 없었다. 그렇다고 연료통을 뚫고 더 아래로 내려갈 수는 없었다.

뚫을 도구도 없었고, 잘못 건드렸다가 연료가 누출되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어떤 연료는 부식성이 강했다. 로봇은 아이들에게 말했다.

“됐어. 이 이상 들어갈 수는 없어.”

“그럼 여기서 나가야 하는 거야?”

로만,팽이 말하자, 로봇은 잠시 분석을 했다. 그는 워프 엔진 후면으로 접근할 수 있노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곳의 공간 정보가 충분치 않았기에 그 안에서 뭘 할 수 있을 지는 확언할 수 없었다. 로만,팽은 화를 냈다.

“그럼 처음부터 그곳으로 들어가지 왜 이런 곳으로 들어온 거야?”

그는 미사일 내부 부품을 발로 걷어찼다. 그가 점점 과격하게 부품들을 발로 밟았다. 로봇은 로만,팽을 진정시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곳이 무중력이었다는 점이었다. 로만,팽의 몸은 그대로 허공에 떠올라 천장에 처박혔다. 그가 진저리를 치면서 괴성을 지르는 사이. 다과말이 말했다.

“잠깐만, 이 미사일 용도가 뭐지?”

“이 미사일은 아마 포켓 우주에서 대기하다가 근처에 우주선이 오면 작동되는 대공미사일 같은데.”

“그럼, 어딘가에 컴퓨터를 따로 작동시킬 전력원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봐. 언제 지나갈지도 모를 함선을 기다리기 위해서 모든 시스템을 다 켜놨을 리는 없잖아.”

로봇은 일리가 있노라고 말했다. 그는 앞발로 로만,팽을 잡고서 머리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는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아직까지 작동 중인 배터리를 찾았다. 하지만 오만 가지 부품들 속에서 배터리만 콕 집어내기는 힘든 일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들은 지쳐갔다. 이제는 산소도 바닥을 보였고, 로봇의 전력도 바닥을 쳤다. 이대로라면 별 다른 수확 없이 함선으로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그렇게 되면 다음을 언제 기약할 수 있을까? 로봇을 충전하느라 함선의 전기를 모두 다 쓴다면 그때는 생명유지장치를 꺼야 할지도 몰랐다. 그 전에 찾아야 했다.

다과말이 말했다.

“이대로라면 못 찾아. 어디보자. 뭔 수가 있을 거야. 분명 수가…….”

“수는 무슨 수를 말하는 거야? 우린 여기서 죽을 거야! 이런 씨부럴 놈들! 지옥불에 타서 죽을 거라고!”

“지옥불에 타긴. 잠깐만 진정을……. 잠깐. 불?”

다과말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불이라. 불은 뜨거웠다. 그리고 전기를 쓰는 물건은 죄다 뜨거웠다. 열기를 내보내기 위해 사람들은 온갖 짓을 다했다. 그러니 전력원이 아직도 살아 있다면, 분명 이 미사일 어디선가 열기를 토하고 있을 터였다.

다과말은 로봇에게 이 점을 말했다. 그러자 로봇은 고개를 돌리면서 열원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미사일 탄두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로봇이 로만,팽을 끌고 앞장을 서자, 다과말은 로봇에게 말했다.

“아니, 이런 건 네가 먼저 제안해야 하는 거 아냐?”

“에휴. 보육 로봇으로 재프로그래밍 됐는데 나한테 대체 뭘 기대하니? 보육 로봇은 아이들 발달을 위해서 조금 수동적일 필요가 있어.”

그러시겠지. 할 말이 많았지만 다과말은 말을 아꼈다. 아무리 로봇이라고 해도 말은 가려 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말이다. 그는 잠자코 로봇을 따라갔다. 그러자 로봇은 탄두 위쪽으로 다가갔다.

점점 외장과 미사일 부품 사이의 공간이 좁아졌다. 그리고 마침내 입구를 지나친 그들은 좁다란 탄두 안쪽 깊은 곳까지 몸을 우겨넣어야 했다. 작은 몸집의 다과말도 조금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좁은 통로였다. 그러니 로만,팽을 잡고 있는 로봇은 좁아지는 미사일 내부를 통과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다과말. 네가 일단 혼자 들어가서 안을 살펴봐. 분명 멀지 않은 곳에 배터리가 있을 거야. 열이 발생하는 지점을 알려줄게.”

다과말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탄두 안쪽으로 계속 들어갔다. 탄두에는 수많은 기판들이 전선에 연결되어 한 대 뒤엉켜 있었다. 그것들이 정확히 무슨 역할을 하는 지 그는 짐착도 못했다. 아마, 자세를 제어하거나, 유도시스템의 일부일 거라 생각할 뿐이었다. 기판을 치우자 멀지 않은 곳에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보였다.

다과말은 천천히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탄두에 달린 원반 형태의 부품에서 번뜩이는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설마 방사선이 흘러나오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핵융합 배터리가 방사선을 흘릴 리 만무했다. 요즘 만드는 핵융합 배터리면 몰라도 전쟁 전 배터리는 방사성 물질을 배출하지 않았다. 적어도 책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면서 부품을 살폈다. 부품에는 간략한 글귀가 보였다. 무슨 약자인 듯싶었다. 다과말은 로봇에게 글귀를 불러주었다. 로봇은 잠시 침묵을 지킨 다음 입을 열었다.

“음, 그게 핵융합 배터리 같아. 그걸 뽑아!”

로봇이 소리쳤다. 다과말은 천천히 한숨을 쉬면서 배터리를 살폈다. 그것은 방열케이스 안에 고정되어 있었다. 다과말은 케이스에 달린 둥근 곡면을 잡아당겨 방열케이스를 열었다. 게이스가 헐거워지면서 배터리는 케이스에서 떨어져 나왔다.

배터리가 케이스에서 떨어져나와 두둥실 떠오르자, 다과말은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케이스와 배터리 사이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배터리를 케이스에서 끄집어냈다. 그러자 점액질은 꿈틀거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과말은 입을 쩍하고 벌리고서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점액질 안을 들여다보았다.

 

.

 

그날도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날이었다.

방갈로들은 여전히 점액질 대기를 날아다녔고, 사람들은 저마다 일을 하며 지내기 바빴다. 그 중에서 가장 대단한 일을 한 자는 단내 나는 선명한 자였다. 그는 조상들처럼 단내를 풍겼고, 활발했으며, 정치가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머나먼 방계에는 단내 나는 활발한 자가 있었다.

그는 오늘도 연설을 하고 있었다. 주제는 간단했다. 우리는 왜 이리 불행하게 살아야 하는 가? 어쩌면 이 불행은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이었다. 그는 사전에 작성된 스크립트를 확인했다. 이번에도 스크립트 안에는 해답이 있었다. 모든 것은 유목민들 때문이었다. 방갈로를 타고 다니는 빌어먹을 폭주족들이 사회 질서를 더럽히고, 문화적 순수성을 떨어뜨렸다. 거기다 몸에 물감을 칠해 섬유질에 뒹굴어대는 추잡한 바디페인팅을 팔았다. 그런 음란물로 아이들의 정신을 더럽힌 것이다. 그랬기에 아이들이 삐뚤어졌으며, 더 나아가 사회의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다.

그러니 모두가 나서서 유목민들을 제거해야 했다.

캬. 완벽했다. 적어도 단내 나는 선명한 자는 감탄을 터뜨렸다. 이 정도의 연설문이라면 분명 사회를 유목민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으리라. 그는 연단 위에 오를 때까지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의 연설이 시작되기 무섭게 사회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간단했다. 점액질 대기 위로 거대한 불빛이 나타난 것이다.

처음에 사람들은 수근거렸다. 곧이어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고, 연설장은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겹겹이 쌓인 사람들의 몸뚱이가 무너졌다. 아래 깔린 사람이 터지든 말든 사람들은 섬모를 휘저으면서 점액질 속 안전한 곳으로 숨으려 애를 썼다.

연단에 서서 불빛을 올려다보던 단내 나는 선명한 자가 소리쳤다.

“여러분 진정하십시오. 이건 유, 유목민들이 벌이는, 공작입니다! 가짜 뉴스란 말입니다!”

연단에 오른 사람은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에게 소리를 쳤다. 그는 있는 힘껏 섬모를 흔들어댔다. 하지만 그를 기다려주는 이는 없었다. 모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하늘을 섬모로 가리켰다. 그들은 점액질 위에 나타난 밝은 광채를 피해 몸을 숨겼다.

점액질 대기 아래 지어놓은 마천루와 배터리 위에 착 달라붙어 재난이 지나가길 바랐다. 그들은 수많은 조상신들에게 자신의 목숨을 구걸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들 조상이 기둥 땅을 파헤치는 바람에 일어난 폭발과는 차원이 다른 위기였다. 이 점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신은 누구도 구하지 않았다.

 

.

 

다과말은 점액질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8개의 눈은 점액질 속을 떠다니는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정체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것들은 하나같이 점액질 안을 헤엄치는 것 같았다. 그가 미시적인 생명체일지 모르는 것을 관찰하는 사이. 로만,팽이 다가와 다과말이 관찰 중이던 점액을 손으로 쓸어냈다.

그는 점액덩어리를 차디찬 로켓 외벽에다 던졌다. 순식간에 얼어붙은 점액은 로켓 외벽을 때리고서 산산이 부서졌다. 수억에 달하는 지적생명체를 죽인 로만,팽은 더럽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는 손짓을 하면서 빨리오라 다과말을 다그쳤다.

다과말은 눈을 껌벅거리면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기분은 나빴지만, 로만,팽 말도 일리가 있었다. 지금 이곳에서 관찰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함선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배터리를 옆구리에 끼고서 로만,팽 뒤를 따랐다. 그렇게 두 아이와 로봇 하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사일 밖으로 나갔다. 함선으로 돌아왔을 때 아이들의 우주복에는 산소가 바닥나기 직전이었다.

로봇은 아이들을 함교에서 쉬라고 안내를 한 뒤 엔진실로 사라졌다. 로만,팽과 다과말은 천천히 함교 안으로 들어갔다. 샤시,팽과 하과말이 두 사람을 반겼다.

“뭐 이렇게 오래 걸렸어?”

“이 바보가 배터리에 붙은 무슨 가래 같은 걸 쳐다보고 있었어.”

“그게, 안에서 뭔가 생명체 같은 게 움직이고 있었다고.”

다과말이 항변했다. 그러자 샤시,팽은 부리를 벌리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러다 산소라도 떨어졌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뭐, 그래서 그냥 왔잖아.”

다과말이 어깨를 으슥이면서 말하자, 세 아이들 혀를 찼다.

“잠깐, 이 미사일을 가져가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로만,팽이 말했다. 다과말은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 보니까 전에 본 건데, 이런 미사일은 귀하다고 들었어. 워프 엔진이 탑재된 미사일은 전쟁 전 기술이라 비싸게 팔린다고 들었거든.”

“전쟁 전 기술? 그러면 얼마나 받을 수 있는 건데?”

“나야 모르지. 하지만 많이 받는다고는 들었어. 아주 많이.”

“그럼 우리 보물을 찾은 거야?”

하롸말이 말하자, 샤시,팽은 하롸말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하롸말. 잠시 저기 가서 설탕 핵폭탄이나 먹고 있을래?”

샤시,팽임 말하기 무섭게 하롸말은 물풍선같은 몸을 뒤뚱거리면서 함교 구석으로 향했다. 녀석은 곧장 바닥에 떨어진 설탕 핵폭탄 상자를 집어 들고 과자를 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샤시,팽은 두 아이들을 노려보았다.

“왜? 갑자기 우릴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거야?”

“왜냐고? 왜기는 너희들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지금 애도 있는데 미사일이라고? 그걸 싣고 워프를 하자고? 그러다가 경찰이나 군대에게 붙잡히면 어쩌려고 그래?”

“지금 제일 필요한 게 경찰 아냐? 우리 워프용 포켓 우주에 버려졌다고.”

“그것도 빌어먹을 원장 손에. 분명 우리 모가지에 걸린 보험금을 타려고 했을 거야.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잖아.”

다과말과 로만,팽은 가느다란 손과 굳은살이 박힌 발로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들은 서서히 샤시,팽을 설득했다. 이대로 그냥 포켓 우주에 나가면 어떻게 될지 그들은 샤시,팽에게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원장은 자신의 실수라고 문제를 덮을 것이며,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과말같은 연약한 어린 아이들은 울다 지쳐 죽을 지도 몰랐다. 정말로 울다가 죽는 애가 있는지는 몰라도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거기다 우리가 흩어지면 원장이 몰래 우리를 죽일 수도 있었다. 한 번 이런 짓을 한 놈이 두 번은 또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두 아이는 자그만 뇌를 쥐어짜서 가장 끔찍한 시나리오들을 써내려갔다. 그리고 그들의 시나리오는 샤시,팽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분위기가 이상한 걸 느낀 하과말까지 울음을 터뜨리자, 순식간에 함교는 울음바다로 변했다. 그러자 로봇이 함교문을 열고 들어왔다.

“로만,팽이랑 다과말! 또 여자애들을 괴롭혔구나!”

“아냐아냐. 우린 안 그랬어.”

“따지고 보면 원장이 울린 거지 우리가 울린 게 아냐. 우린 그냥 사실을 이야기한 거야.”

아이들은 능청을 떨면서 오히려 로봇에게 되물었다.

“어때? 엔진은 다 고친거야?”

“다 고쳤어.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어.”

로봇이 말하자, 아이들은 울다 웃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하롸말은 방방 뛰었고, 다과말은 훌쩍이는 샤시,팽을 손으로 토닥거렸다. 샤시,팽이 눈물을 닦으면서 다과말의 정수리에 부리를 올리자 로만,팽과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로봇은 함교 한가운데 있는 조종석으로 가서 출발 준비를 했다.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이 사방에 흘러내리던 와중에 하과말이 말했다.

“근데 우리 이대로 가도 돼? 오빠들이 그랬잖아. 미사일 안 가져가면 우리 다 못 살게 된다며. 미사일을 들고 가야 하지 않아?”

“뭐, 당장 가져갈 수는 없어도. 좌표를 알고 있는 건 우리니까. 나중에 가지러 오자.”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봇은 엔진 시동 버튼을 눌렀다. 워프 엔진이 가동을 시작했다. 오래된 부품들이 모두 제자리를 찾은 듯이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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