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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동부여

2023.06.01 21:4206.01

 

동부여

 


영락(永樂) 20년(서기 410년을 말함), 동부여의 서쪽 끄트머리에 있는 요새를 지키던 병사가 멀리서 이상한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은 흰 말을 타고 비단 옷을 입었으며 황금으로 장식한 비단 모자를 쓴 지체 높은 사람처럼 보였다.

“이상한 사람이 서쪽에서 우리나라 쪽으로 오고 있는데, 그 사람은 무척 고귀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 병사가 요새를 지키던 장군에게 말하자, 장군은 깜짝 놀랐다.

“서쪽에서 오는 사람이라면 고구려 사람일 것인데, 고귀한 사람이라면 고구려에서 우리 나라로 오는 사신이 아니겠는가?”

장군은 모든 병사들에게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큰 일이 났다면서 외쳤다.

“고구려의 사신이 나타났다. 온 나라에 널리 알리도록 하라!”

요새의 병사들은 저마다 높은 곳에 올라가 깃발을 흔들고, 연기를 피워 먼 곳에서도 나라에 중요한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리도록 했다. 또 빠른 말을 탄 병사들이 저마다 편지를 들고 온 나라 각지를 향해 달려 나갔다.

이때, 동부여의 도성인 여성(餘城)에는 나라에 있는 64곳 성들을 다스리는 여러 성주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이들 성주는 압로(鴨盧)라고 하는 벼슬에 올라 있었다. 64 명의 압로들이 둥근 모양의 커다란 건물에 모여서 곰과 담비 가죽으로 만든 색색의 방석으로 꾸민 자리를 저마다 자랑하며 앉아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64 압로들이 앉아 있으면 그 모습은 대단히 위엄이 있고 또한 호사스러웠다.

소식을 전하러 달려간 병사들이 다급히 압로들에게 가까이 가려다가도 그 모습에 짓눌려 한 차례 뒤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병사들은 고귀한 압로들에게 함부로 말을 걸 수도 없어서, 압로들의 일을 돕는 관리에게 편지를 전하고, 그러면 그들은 그 편지를 신모라고 하는 제사를 지내는 사람에게 전하고, 그러면 그 신모들이 다시 64 압로 중 가장 위세가 강한 사람의 부하 한 사람에게 전하는 식으로 소식을 전했다. 그 예절은 아주 엄숙하였다.

압로 중에서 비사마(卑斯麻)라는 곳을 다스리는 자가 말했다.

“고구려의 사신이 왔으니, 이는 나라가 망하고 흥하는 것이 달린 극히 중요한 일이오.”

압로 중에 다른 나라의 일을 잘 모르는 아둔한 자가 있어 다른 압로들에게 물었다.

“다른 나라의 임금이 보낸 사신이라면 높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오. 그러나 어찌 그렇다고 해서 우리 나라가 망하고 흥하는 것이 달려 있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란 말입니까?”
“지금 고구려의 임금 담덕(광개토왕을 말함)은 병사를 부리는 재주가 뛰어나고 고구려의 군사는 강하다고 하오. 그러므로 만약 고구려의 임금이 마음을 먹고 우리 나라를 공격하면 우리 나라는 큰 난리를 겪게 될 것이오.”

압로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줄은 몰랐소.”
“그런데, 고구려의 임금이 우리나라의 사정이 어떤 지 알게 되는 것은 오직 사신이 무슨 말을 전하는 가에 달린 일 아니겠소? 만약 우리나라에 다녀간 고구려 사신이 ‘동부여는 나쁜 나라이며 허약하니 지금 당장 공격해도 좋습니다’라고 돌아가서 고구려 임금에게 말한다면, 고구려는 바로 대군을 일으켜 부여성을 무너뜨리려 달려 올 것이오. 만약 그렇게 되면 그대의 목이 고구려 군사의 칼에 잘려서 길바닥에 던져지고 고구려군의 불화살에 그대가 모아 놓은 모든 재물은 잿더미가 될 것이오.”

압로들 가운데서 “어허”, “아이고”하고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만약 우리나라에 다녀간 고구려 사신이 우리가 좋은 대접을 해 주면 기분이 좋아져서 고구려에 돌아 가서 ‘동부여는 좋은 나라이며 싸워서는 안 되며, 그 나라는 모든 문물이 훌륭하니 함부로 공격할 수 없는 곳입니다’라고 말한다고 하면 어떻겠소? 그렇다면, 고구려 임금도 우리와 싸울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면 우리는 나라를 구할 수 있으며, 난리를 피할 수 있고, 그대와 나는 아름다운 집에서 태평한 세월을 누리며 오래 장수할 수 있는 것이오.”
“듣고 보니, 그 말이 지극히 옳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을 듣더니, 이번에는 타사루(椯社婁)의 압로가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나라와 64성에 사는 그 모든 사람들의 목숨을 걸고, 반드시 이번에 찾아 오는 고구려 사신을 아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이오. 이런 일을 위해서는, 모든 재물과 노비들을 모두 데려 와 그를 기분 좋게 하기 위해 힘 써도 조금도 아깝지 않소. 고구려의 사신은 따지고 보면 겨우 한 사람일 뿐이오. 우리 동부여는 역사가 길고 사람이 많으며 농사가 잘 되고 물자가 많은 부유한 나라요. 우리 64성의 모든 사람들이 온 힘을 다한다면 그 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어려울 게 있겠소?”
“옳소!”
“옳소! 힘을 다하여 고구려 사신을 떠받들도록 하오!”
“이번 한 번, 그를 기쁘게 하는 일에 천하가 걸려 있소!”

그런데 그 중에 구루생이라는 압로가 있었다. 그 한 사람만은 그 말을 옳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과 같이 따졌다.

“다른 나라의 사신이 찾아 오면 예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대해 주면 되는 것이오. 우선 그를 대접하기 전에 도대체 그가 왜 와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지 듣고 어찌할 지 정해야 하는 것 아니겠소? 무턱대고 그 사신만 기쁘게 하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오.”

그러나 구루생의 말에 다른 압로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대의 말에 옳은 점이 있소. 그러나 온 나라 모든 사람들의 목숨이 걸린지라, 고작 예의 따위만 따지고 있을 수는 없소.”

그리하여 동부여의 64 압로들은 갖가지 사치스러운 물건과 온갖 재주꾼들을 끌어 모아 고구려의 사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힘을 다하기로 하였다. 나라의 학자들과 높은 벼슬아치들이 모두 모여 다들 밤을 새우고 온낮에 힘을 빼가면서 다만 고구려 사신 한 사람을 어떻게 즐겁게 해 줄 것인가만을 의논했다.

동부여 사람들은 고구려의 사신이 지나는 길 마다, 나라의 미남미녀를 모아 항상 길가에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도록 했고, 고구려의 사신이 잠시 멈추면 앉아서 쉬고 누울 수 있도록 의자를 지고 다니는 무리들이 그 곁을 따랐다. 식사를 할 때에는 진귀한 요리만 골라 대접하면서 젓가락을 대려고 하면 손이 재빠른 노비들이 잽싸게 움직여 뼈를 바르고 가시를 골라내서 한 입 한 입을 즐겁게 했다. 또 더운 음식을 먹을 때에는 부채질을 하고 차가운 음식을 먹을 때는 곁에서 화로를  받든 노비가 엎드려 있게 하여 항상 온몸을 상쾌하게 해 주었다.

고구려의 사신이 길목을 지날 때와 성문을 통과할 때 마다, 나라의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두,

“우리의 귀한 손님이여, 세상에 모든 복을 다 받으소서!”

라고 외치며 기뻐하도록 하고, 또 사신이 누군가를 쳐다 보기만 해도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며 감사하도록 했다.

게다가 사신이 심심해 할 때에는 좋은 사람들이 찾아가 다음과 같이 말하며 배를 내밀었다.

“어르신께서는 하늘 나라에서 오신 분이나 다름 없는 고귀하신 분이니, 부디 제 배를 한 번만 쓰다듬어 주십시오. 그러면 제 가족과 벗들에게 고구려에서 오신 높디 높으신 분께서 저를 직접 만져 주었다고 자랑하고 대대손손 그 일을 잊지 않고 전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 외에도 글로 옮기기 어려울 정도로 고구려 사신을 기뻐하기 위해 벌인 일 중에는 갖가지 기이한 이야기가 참으로 많았다.

고구려의 사신이 여성에 도착할 무렵이 되자, 고구려 사신은 동부여에서 받은 대접에 너무나 기뻐서 하늘을 우러러 다음과 같이 슬퍼할 정도였다.

“동부여에서 지내는 세월이 이토록 즐거우니, 고구려로 돌아 가면 다시 그와 같은 세월이 또 오지 않을까 그리워하다가 그만 밤마다 울게 되지 않을까 두렵구나.”

사신이 궁궐에 도착했을 때에는, 동부여의 임금이 직접 그를 맞이했다. 동부여의 임금 곁에는 64성의 압로들이 저마다 붉은 구슬과 금 장식으로 꾸민 온통 하얀 예복을 입고 늘어 서 있었다. 궁궐의 모습은 매우 아름답고 신비로워서 고구려의 사신은 걸음을 걷지 못하고 한참을 멍하니 서서 쳐다 볼 정도였다.

마침내, 고구려 사신이 동부여의 임금을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천제(天帝)의 아들이 자손을 이어 내려오신 고구려의 성제(聖帝)가 전하신 뜻을 읽으려 하니, 부여왕은 들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이 고구려 사신이 뭐라고 뜻을 전하는 지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고구려의 사신은 말을 이어나갔다.

“부여왕의 죄를 묻고자 하노라. 본시 부여왕은 고구려에 예로부터 많은 선물을 바치며 예절을 다하여 왔는데, 요즘은 무례를 저질러 그와 같은 아름다운 예절을 지키지 못했다. 이는 예의를 모르는 일이므로 마치 사람이 아니라 개와 돼지와 같은 짓을 한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고구려는 천제의 아들이 자손을 이어내려오신 거룩한 뜻으로, 부여왕의 죄를 벌하려 군사를 보낼 것이다. 이제 동부여왕은 다만 죄를 비는 마음으로 그 군사들이 내리는 벌을 받도록 하라.”

고구려 사신은 그 말을 하다가 그만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구루생이 고구려 사신에게 따졌다.

“그게 무슨 말이오? 고구려가 동부여를 공격한다니, 어찌 우리 임금님 앞에서 그와 같은 말을 할 수 있소? 우리나라의 백성 중에 그대를 높이 떠받들어 주며 온갖 정성을 바친 사람이 몇 백 명, 몇 천 명인지 모를 정도인데, 어찌 배은망덕하게 활과 화살을 들고 쳐들어 온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단 말이오?”
“구루생이여, 사신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은 무례하다!”
“구루생은 닥치라!”

다른 압로들이 구루생에게 말했다. 그러나 구루생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고구려에 선물을 바치고 예를 갖추어 떠받드는 의식을 하라면 우리는 얼마든지 할 수 있오. 지난 112년 간 그와 같은 일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나라는 고구려에 선물을 바치지 않았던 것 뿐이오. 그런데 그것을 죄라고 하면서 우리나라를 공격하겠다고 한다니 이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오. 예의라는 것은 그저 갖다 붙인 말이며, 단지 우리의 땅과 성을 빼앗고 싶어서 구실을 만들었던 것 뿐 아니오?”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어지럽히지 말라!”

구루생의 말을 듣고 고구려 사신은 더욱 소리를 높여 울었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동부여에서 내가 받은 훌륭한 대접과 나를 보고 좋아해 주던 그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생각하면, 나 또한 가슴이 찢어지고 온 몸이 갈갈이 쪼개지는 것 같이 괴롭습니다. 그런데 저는 고구려의 조정에서 내리는 명령을 받고 이곳에 왔으므로, 이 말을 전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찌하겠습니까? 다만 안타까워 이렇게 주저 앉아 울 뿐입니다.”

그러자 다른 압로들도 저마다 슬퍼했다. 또한 고구려 사신에게 절을 올리기도 했다.

고구려 사신이 임금 앞을 떠나자, 구루생이 말했다.

“고구려 사신이 가슴이 찢어진다고 하고 온 몸이 쪼개진다고 하지만, 그의 가슴은 잘 붙어 있고 온 몸도 한 덩어리로 고구려의 고향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오. 그리고 나서 우리나라에서 받아 간 그 많은 금은덩어리로 한 평생 걱정 없이 살다가 가끔 비가 와서 괜히 울적한 기분이 들면 잠깐 술이나 한 잔 하며 우리나라가 불쌍하다 생각할 것이오. 그러나, 고구려 군사가 쳐들어 와 화살을 쏘면 정말 화살촉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은 우리나라 백성이고, 고구려 군사가 창칼을 휘둘렀을 때 쪼개지는 것은 우리 몸이오.”

그 말을 듣고 숙사사(肅斯舍)의 압로가 이렇게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도대체 누구의 탓으로 이 지경이 되었는 지 살펴서, 나라를 이렇게 위험하게 만든 자를 찾아 내어 엄히 벌해야 하오. 나라가 이렇게 큰 난리에 휘말린 죄를 지은 자에게는 그 죄에 맞는 벌을 주어야만, 그것이 옳고 그름을 밝히는 길이오.”
“옳소!”
“참으로 옳은 말이오!”

그리하여 압로들은 누가 죄를 지었는지 저마다 나뭇가지에 글을 써서 쓰기로 하였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저마다 구리로 만든 무서운 가면을 쓰고 모여 나뭇가지를 항아리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정갈한 의식을 취하고 나서, 그 항아리를 살펴 보고 비사마의 구루가 이렇게 외쳤다.

“지금 압로들이 가장 죄가 크다고 하는 자는 구루생이라로 하오.”

그 말을 듣고 다른 여러 압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루생이 죄를 지어 우리나라가 큰 난리를 맞게 되었으니, 이것은 벌을 받아야 마땅한 일이오.”
“그렇소.”
“옳은 일이오.”

압로들은 병사들을 보내, 구루생의 장식과 모자를 빼앗고 압로의 권한을 나타내는 증표를 모두 가져 가도록 했다. 그리고 나무에 묶어 두고 채찍으로 후려치는 벌을 주었다. 구루생은 채찍을 맞다가 노래를 지어 부르며 그 아픈 것을 잊으려고 했으니, 노래 가사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고구려 임금이 쳐들어 오고 싶어서 쳐들어 오는 것인데, 거기에 누가 지은 죄가 있는가? 그대들이 틀렸다, 틀렸다하는 말을 하는 입이 내 입이었으니 그저 그것이 듣기 싫어 나를 치는 것이지.”

이제 나라에서 전쟁을 하게 되었으므로, 64 압로들은 모두 집에서 보관하고 있던 갑옷과 보검을 꺼내 왔다. 압로들이 대대려 전해 오고 있는 보검은 모두 아주 날카로왔고 또한 번쩍이는 빛이 밝았다. 그리고 갑옷에는 장식이 많았는데 그 형상이 곰이 할퀴는 모양, 호랑이가 이빨로 뜯는 모양으로 어지럽게 꾸며져 있어서 마음이 약한 사람이면 그 갑옷의 모습만 보아도 겁을 먹을 정도로 잘 만들어져 있었다.

비사마의 압로가 말했다.

“이제 우리가 종묘사직이 달린 큰 전쟁을 앞두고 있으니,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그 뜻을 엄숙히 물어 보도록 합시다.”
“그것이 우리의 예법이오.”
“옳은 말이오.”

갑옷을 차려 입고 장검을 든 64 압로들이 나무로 만들어 놓은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을 세워 둔 건물에 모였다. 압로들은 직접 소, 말, 염소와 제물들을 바치는 의식을 취하며 간절히 하늘에 빌었다.

이윽고 제사를 지내는 신모가 나타났다. 붉은 옥구슬로 온몸을 장식한 모습이었다. 신모는 나무 조각상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 하늘의 뜻을 알아 보는 점을 쳐, 운을 보겠나이다.”

신모가 그렇게 말하고 타오르는 불구덩이 속에 소의 발을 던져 넣었다. 그러자 불 속에서 소의 발굽이 깨져 나가며 금이 갔다.

“발굽이 벌어지며 금이 생기는 것이 두 개면 길한 것이라 운이 좋은 것이오, 세 개면 흉한 것이라 운이 나쁜 것입니다.”

이윽고 신모는 소의 발을 꺼냈다. 그런데 신모는 소의 발을 보더니, 그만 악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울고 날뛰다가 쓰러지고 말았다.

“왜 그러시오?”

엎드려 있던 압로들이 놀라서 다가가 보니, 소의 발굽에는 금이 세 개가 가 있었다.

“운이 없도다! 흉하도다!”
“하늘의 뜻이 흉하구나! 고구려 군사 때문에 우리는 모두 망하고 다 죽겠구나!”
“전부 죽는구나!”

이윽고 압로들까지 소리를 지르고 울기 시작하니, 차려 놓은 제물들이 흐트러지고 연기와 불꽃이 휘날려 온통 엉망이 되고 말았다. 밤새 우는 소리로 온통 주변이 가득차서, 마치 귀신들이 잔치를 하는 것 같아 보였는데 그러다 날이 밝을 때 즈음이 되어서야 압로들은 모두 흩어졌다.

압로들로부터 부여가 망할 것이라는 소식이 퍼져 나오니, 거리를 걷다 보면 온통 우는 소리만 들렸다. 그러자 마침 그 슬픔을 견디다 못해 맨 정신이 아니게 되어 소리를 지르며 길거리를 뛰어 다니는 사람도 곳곳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다시 구루생이 압로들이 모이는 둥근 건물 앞에 나아갔다. 구루생은 노래를 지어 부르고, 직접 춤을 추었다. 노래가 좋고 춤도 나쁘지 않았으므로, 그것을 듣고 구경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므로 구루생이 노래로 전한 뜻은 곧 널리 퍼졌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비록 고구려의 군사가 강하다고는 하나, 고구려 임금 담덕은 이곳저곳에서 싸움을 많이 벌여 적이 많소. 서쪽으로는 선비족과 원수가 되었고, 남쪽으로는 백제가 원한을 갚고자 하고 있고, 또한 멀리 신라와 가야 사이에까지 고구려 병사들을 보내 놓았으니 고구려는 싸워야 할 곳이 한 두 곳이 아니란 말이오.”
“그렇지!”
“비록 우리 동부여가 예전보다는 나라의 힘이 약해졌다고는 하나, 성벽은 높고 창칼은 날카로우니 굳게 지키면 고구려 병사들과 몇 달은 맞서 싸울 수 있소. 그러다 보면 결국 고구려는 선비족, 백제, 가야를 걱정하게 되어 군사를 물리게 될 수 밖에 없소. 그러면 고구려 병사를 물리칠 수 있지 않겠소?”
“옳거니!”
“비록 점을 쳐서 발굽에 금이 세 개 생겨서 흉하다고는 하나, 소 발굽에 금이 가는 것은 어쩌다 보면 셋이 될 수도 있고, 어쩌다 보면 넷이 될 수도 있는 것이오. 나라에 전쟁을 하고 사람이 죽으면 흉한 일일 수 밖에 없어 흉하다는 점괘가 나온 것일 뿐이오. 우리가 힘을 합치면 반드시 고구려 군사와 겨루어 볼 만할 것이오.”

구루생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집 안에 있는 칼과 창을 꺼내어 이제 싸울 준비를 하겠다며 무리를 지어 길거리 곳곳에 모이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사람들 사이에 구루생의 노래가 퍼지며 기세를 높이자, 압로들은 다시 커다란 둥근 건물에 모여 이에 대해 의논하고자 했다.

타사루의 압로가 말했다.

“구루생의 말은 대단히 간교하오. 그는 지금, 재물도 잃고 벼슬도 잃고 가난해빠진 비렁뱅이가 되었소. 그러니 그는 삶이 즐겁지 않으며, 하루하루를 괴로워하는 것이오. 그러므로 그는 죽고 사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소. 구루생은 당장 죽어도 아쉬울 것이 없단 말이오. 그러니 싸우자고 하는 것이오. 사람들을 이끌고 나아가 한번 싸우고 나면, 무릇 사람들이 ‘영웅이다’ ‘호걸이다’라고 그를 추켜 세워줄테니, 오직 그것이 지금 구루생이 기뻐할 만한 일이오. 비렁뱅이가 한 번 우쭐해하며 좋아할 기회를 만들어 주기 위해,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다면 그것이 어찌 옳은 일이겠소?”
“과연 그 말이 매우 옳소.”
“죄를 받아 화를 내는 구루생이 화풀이를 하기 위해 내지르는 소리 때문에 우리가 목숨을 던져야 할 일이 무엇이란 말이오?”
“그렇소. 이를 노래로 만들고 또 춤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퍼뜨리도록 하오.”

그와 같이 의논을 마치고, 노래가 퍼져 나갔다. 그러자 여성에 싸우겠다고 나선 사람들은 모두 흩어졌다.

구루생은 가슴을 치며 원통해 했다. 이윽고 구루생은 다시 압로들이 모이는 둥근 건물 앞으로 나섰다. 구루생은 또 직접 노래를 지어 부르고 그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그 노래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고구려 임금이 병사를 움직이는 재주가 훌륭하다고는 하지만, 우리 부여도 세월이 오래 되고 문물이 번성한 나라요. 지금 삼한의 강국이라고 하면, 북쪽에는 고구려고 남쪽에는 백제인데, 고구려의 임금도 그 종족이 원래 부여에서 나왔다고 말하고 있으며, 백제의 임금도 그 종족이 원래 부여에서 나왔다고 말하고 있소. 이것은 우리 부여가 그 만큼 뜻이 깊고 모두가 우러러 보는 나라였다는 뜻이오. 그런데 어찌 적이 쳐들어 올 거라고 겁을 주었다고 해서, 싸울 준비도 하지 않고 그저 망할 궁리나 하고 있을 수 있단 말이오? 조상들이 대대로 물려 준 그 귀한 갑옷과 훌륭한 무기가 부끄럽지도 않소?”
“그렇지!”
“내가 비렁뱅이가 되었기 때문에 그저 싸우자고 할 뿐이라는 뜻도 전혀 옳지 않소. 비록 내가 압로의 자리를 잃었으며, 귀한 증표들을 빼앗겼으나, 여전히 천 명을 헤아리는 하호들을 거느리고 있고, 천 석의 곡식이 나는 드넓은 땅을 갖고 있어서, 이 나라의 귀한 사람 중 하나요. 또한 아름다운 부인이 있으니, 어찌 목숨을 아끼고 싶지 않겠소?”
“옳거니!”
“다만 참으로 가진 것을 지키고 목숨을 잘 이어가기 위해서는 지금은 싸우는 것이 옳을 때이므로 이와 같이 노래할 뿐이오.”

이러한 노래가 퍼져 나가자, 여성에는 무기를 쳐들고 소리를 치며 외치는 사람들이 또 곳곳에 모여 들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으니 싸우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고구려는 결국 우리 부여의 자손에 불과한데, 부모와 조상의 나라로서 한 번 혼을 내 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자 64 압로들 중에는 그 얼굴이 어두워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압로들은 다시 한 곳에 모였다. 그들은 저마다 구루생을 탓했다. 개중에는 구루생이 악하다고 하는 자도 있었고, 또 구루생이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화를 내는 자도 있었다.

모여 있던 압로 중에 숙사사의 압로가 말했다.

“구루생의 뜻은 너무나 사악하오. 그자가 지금 사람들을 몰아 세워 싸우자고 하는 것은 그가 부유하여 잃을 것이 많기 때문이오. 비루한 말이기는 하나, 시정의 사람들이 하는 말은 다음과 같소. 재물이 없고 먹고 살 길이 막막한 사람들과 하호들을 떠올려 보시오. 그와 같은 낮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다스리는 윗 사람들이 부여의 벼슬아치든, 고구려의 벼슬아치든 무슨 큰 다를 바가 있겠소? 그러니 굳이 목숨을 바쳐 피를 흘리며 싸울 까닭은 없는 것이오.”
“과연 그 말이 매우 옳소.”
“그런데 구루생은 동부여에서 높은 자리를 얻어 사람들이 섬기는 위치에 있으며 가진 땅이 많은 사람이오. 당연히 구루생은 고구려 병사들이 쳐들어 오면 자기 자리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 하고, 구루생은 고구려 군사들이 자신을 낮은 자리로 몰아 낼 것을 싫어하는 것이오. 즉, 구루생은 오직 자기의 높은 자리를 지키고, 자기 재물과 땅을 지키기 위해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가서 싸우다 죽으라는 말을 하는 것이오.”
“구루생은 그런 자가 맞소!”
“나라를 지켜야 하니 고구려 군사들의 화살 앞으로 뛰어 가야 한다니, 그러면 누가 죽겠소? 전쟁을 하면 결국 앞줄에서 먼저 나가야 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고, 구루생과 같이 높은 자들은 뒤에 앉아 싸움이 끝날 때까지, 이리 공격하라, 저리 공격하라, 말만 늘어 놓다가, 결국 마지막에는 목숨을 건지지 않소? 그러니 결국 나라를 위한다는 말로 낮은 사람들과 하호들을 몰아 붙여 죽게 하고 자기 땅을 지키려는 것이 구루생의 비겁한 뜻이오.”
“그렇소. 이를 노래로 만들고 또 춤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퍼뜨리도록 하오.”

그리하여 의논한 것을 노래로 만들어 퍼뜨리니, 얼마 지나지 않아 거리에서 싸워야 한다고 소리치던 사람들은 흩어져 아무도 남지 않았다.

일이 그렇게 되자, 구루생은 압로들이 모여서 말을 나누던 건물 앞에 나아가더니 한참 큰 소리로 울음을 울었다. 그리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압로의 자리를 잃었다고 하니, 그때는 가진 것이 없는 비렁뱅이라서 내 말을 따르면 안 된다고 하고, 내가 그래도 땅과 재물은 있다고 하니, 이제는 가진 것이 많은 부자라고 해서 내 말을 따르면 안 된다고 하는구나. 이미 싸우지 않겠다는 뜻은 바꾸지 않겠다고 속으로 굳혀  두고, 왜 그러한가 하는 말은 그저 지어서 무엇이든 갖다 붙이는 것 뿐 아닌가?”

구루생이 우는 모습이 슬퍼 보였으므로, 주위에 모여 바라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한 그가 부르는 노래가 처량하나 또한 듣기가 좋았으므로, 따라하는 사람이 생겨 났다. 곧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생겨 났다.

구루생이 이어서 노래했다.

“적이 우리 나라를 빼앗으러 몰려 온다고 하는데, 싸워서 막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잘못 되었는가? 온 나라를 적에게 그대로 넘긴다는 것이 어찌 이렇게 당연한 일인가? 응당 우리는 싸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자 몇몇 사람들은 구루생과 같이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 행색을 보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러자 울음 소리는 더 커졌고, 그 소리가 더 크게 퍼져 나가 더 많은 백성들이 구루생과 같이 울었다. 밤이 깊자, 여성의 모든 백성들이 구루생과 같이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마침 그날 밤, 고구려의 사신이 그 부하들 몇몇을 말갈족의 상인인 것처럼 거짓으로 꾸미게 하여 여성으로 몰래 보냈다. 그들은 압로들을 모두 찾아 다니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곧 천하의 그 어느 군대도 당할 수 없는 고구려의 수많은 군사가 동부여로 들이닥칠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큰 난리가 나겠습니까? 그러나, 얼마 전에 고구려 사신이 동부여에 왔을 때, 그때 귀하게 대접해 주신 은혜를 잊지 않았으니, 그 난리를 피할 방법을 알려 드리려고 합니다. 그때 사신으로 온 사람이 고구려 조정에 두손을 모아 싹싹 빌어서 다음과 같이 부탁해 두었습니다. 비록 동부여의 압로라고 하더라도 성에 흰 깃발을 걸어 두고 싸우지 않고 성문을 열어 놓는 곳이라면 그 곳에서는 아무도 죽이지 않을 것이고, 집을 불태우거나 노비들의 팔다리를 자르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구려 군사들이 쳐들어 와도 우리의 목숨은 그대로라고 약속해 준다는 뜻 아니오? 어찌 이러한 은혜를 베푸는 것이오?”
“압로들께서 고구려 사신에게 베풀어준 은혜를 갚으려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다, 의로운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그 후에는 고구려의 벼슬을 받아 여전히 높은 자리를 지키게 해 드릴 것입니다. 벼슬을 한다면 동부여 같이 작은 나라의 압로 벼슬을 하는 것 보다는 큰 고구려 같은 나라의 벼슬을 하는 것이 오히려 훨씬 더 귀한 몸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고마운 일이로다, 고마운 일이로다!”

압로들은 그 말을 듣고 감격했다. 그리고 저마다 긴히 말을 나누기로,

“역시 사람이 남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면, 그것이 이와 같이 좋은 복으로 돌아 오는구나.”

라고 했다.

얼마 후, 고구려 군이 동부여에 들어 왔다.

구루생은 자신의 가족들에게 “나를 따를 사람들이 얼마일 지 모르니, 나는 오늘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자신의 이름과 나라를 지키라는 뜻을 글로 써서 나누어 주었다. 또한 동부여의 임금이 있는 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하늘을 향해 네 번 절하며, “하늘이 만들어 준 나라가 부여이니, 하늘은 제발 부여를 버리지 마십시오”라고 외치며 간곡히 빌었다.

그리고 구루생이 갑옷을 갖추어 입고 장검을 들고 말을 탄 채 성벽을 향해 나아 갔다. 그러나 거리는 텅 비어 있었으며 온 여성에 한 사람도 없는 것처럼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구루생과 함께 싸우러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온 나라의 성에는 압로들이 걸어 놓은 흰 깃발이 흰 파도가 치고 눈보라가 휘날리는 것처럼 가득할 뿐이었으니, 세 겹의 굳건한 성문들이 하나도 빠짐 없이 모두 활짝 열려 있었다. 그러므로 고구려 군사들이 줄지어 발을 맞추어 걸어 가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었겠는가?

구루생은 멍하게 서 있다가 홀로 말을 달려 고구려 병사들과 싸우러 가려 하였다. 그런데, 줄지어 가는 그 많은 고구려 병사들은 구루생을 제대로 쳐다 보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만 구루생의 말이 구루생의 뜻과 다르게 움직이게 되어 구루생은 말에서 떨어졌다. 그래서 구루생은 다리가 부러져, 소리를 지르며 고구려 군사들이 모두 지나갈 때까지 그저 누워 있기만 했다.

이렇게 하여, 동부여는 망했다. 또한 고구려 임금의 은덕이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었다. 비사마의 압루와 타사루의 압로와 숙사사의 압로는 고구려 군사를 따라 고구려의 도성에 따라 가서 금은으로 장식된 저택에서 살며 고구려의 귀한 벼슬아치로 대접을 받았으며 각각 아흔아홉 명의 노비를 거느리면서 남은 평생을 아무 걱정 없이 즐겁게 지냈다. 세 사람은 종종, “역시 하늘은 사람이 정성을 기울여 착한 마음으로 은혜 베푼 것을 잊지 않고 갚아 주노라.”고 말했다.

다른 압로들은 다리가 부러져 집에 누워 있는 구루생을 붙잡아 처형하려고 했다. 무슨 죄로 처형을 당했는 지는 정확하지 않은데, 재물을 훔쳐서 처형하려고 했다는 말도 있고, 남의 집 노비를 때려서 처형하려고 했다는 말도 있다. 왜 구루생을 처형하려고 하는 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으므로 정확한 일은 남아 있지 않다.

사람들 사이에 전하는 말로는 구루생은 잡히지 않고, 깊은 산 속으로 도망 가서 신선이 되는 방법을 익히려 하며 살았다고 하기도 하고, 바다 먼 곳에 있는 섬으로 도망친 후에 용궁에 가는 방법을 알아내려 하며 살았다고도 한다.


- 2023년, 서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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