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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나는 인형입니다

2023.02.28 22:0102.28

나는 인형입니다

아이

 

특별히 힘든 건 없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간단히 끝냈다. 다만 숫자가 조금 많았던 탓이었을까, 전철 안에서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누가 툭툭 치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어이, 젊은이, 이거 자는데 깨워서 미안해. 내가 아직 저녁을 못 먹어서 그러는데, 혹시 돈 있으면 천 원만 주면 안 되겠나? 라면이라도 사먹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그래. 불쌍한 늙은이 좀 도와줘.”

6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할아버지. 딱히 노숙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입을 열 때마다 술 냄새가 풍겼다. 돈을 주면 라면 대신 술을 사마실 게 뻔했다. 이런 건 겪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돈을 줘야 할까 말아야 할까 망설인 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드리고 싶기는 한데요. 이런 상황은 제가 처음 겪어보는 거라서요. 당장 제가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지금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좋은지 아버지한테 여쭤봐야 하거든요. 죄송합니다. 대신 집에 가서 아버지한테 꼭 여쭤볼게요. 그리고 아버지가 줘도 된다고 하시면, 혹시 또 모르잖아요. 언젠가 우연히 또 뵙게 될지도요. 그때는 꼭 드리겠습니다.”

할아버지가 눈을 끔뻑끔뻑 거리며 청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어이, 젊은이, 자네 지금 나이가 몇인가?”

“스물다섯인데요.”

“스물다섯, 스물다섯이라. 자네 지금 혹시 이 늙은이가 돈 천 원 좀 달랬다고 무시하는 건가? 이 늙은이 가지고 장난치는 거야?”

“그런 거 아닙니다. 제가 왜 할아버지한테 그런 짓을 하겠어요. 할아버지가 모르셔서 그러는데요. 전 나이 드신 분들은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이 드신 분들은 한 번도 죽인 적이 없고요.”

170센티미터도 안 되는 키에 비쩍 마른 몸. 허여멀건 피부에 졸린 듯 퀭한 눈. 얼핏 보면 병자 같기도 하다. 길을 가다 누군가 실수로 어깨를 툭 치면, 힘없이 바닥에 쓰러져버릴 것 같은 타입이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레이더에 걸려든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자의 입에서 사람을 죽인다느니 안 죽인다느니 하는 말이 나왔다. 할아버지는 어이가 없었다. 상대가 비록 20대 청년이라지만, 그럼에도 이런 병약한 청년 하나쯤은 어떻게든 제압할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술기운도 약간 빌려서 생긴 자신감이었다.

“어이쿠, 이거 참 훌륭한 청년일세. 나같이 힘없는 늙은이는 한 번도 죽인 적이 없으시다니, 이거야 원, 요즘 세상에 참 보기 드문 청년이야. 덕분에 죽음을 면했으니 이거 그냥 넘어가면 안 되는데 말이야. 뭘로 보답을 해야 하나? 혹시 뭐 좋은 아이디어 같은 거 없으신가? 아니지, 이런 것도 아버지한테 여쭤봐야 하나? 스물다섯, 그 나이에는 뭐든 아버지한테 여쭤봐야지. 암,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자그마치 스물다섯인데, 뭐든 멋대로 결정하면 안 되지. 돈 천 원 주는 것조차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면 안 돼. 반드시 아버지한테 여쭤보고 나서 주든 말든 해야지. 거 참, 생각할수록 훌륭한 청년이네. 어이, 이봐 훌륭한 청년, 그런데 뭐 집에까지 가서 여쭤볼 필요 있나? 전화로 여쭤봐, 전화. 휴대폰 없어? 아버지가 못 사게 했나?”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병약해 보이는 25세 청년의 머리를 손으로 툭 쳤다. 그리고 또 한번 툭 쳤다. 청년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다시 한번 툭 쳤다.

“어이, 이봐, 어른이 묻잖아? 무슨 반응을 좀 보이라고? 이런 것도 그 아버지라는 작자한테 여쭤보셔야 하나? 60 넘은 술 취한 노인이 머리를 툭툭 치면서 뭘 물어보면 대답을 해야 하나 말아야 여쭤보셔야 돼? 거 참, 희한한 애비일세. 자식을 그렇게 키우면 안 되지. 뭐든 간섭하려고 들면 안 돼. 그것도 다 때가 있는 법이야. 다 큰 자식을 아직도 품안에서 키우려고 하면 안 되는 거라고. 그건 자식을 망치는 거야. 지금의 자네를 보라고. 자네 애비 때문에 지금 자네 꼴을 봐. 스물다섯이나 쳐먹었는데도 스스로 아무것도 결정을 못 내리잖아. 혹시 여자랑은 자봤나? 아마 못 자봤을 거야. 어쩌면 잘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막상 그걸 하지는 못했겠지. 섹스 말이야, 섹스. 스물다섯이나 쳐먹었는데도 아직 섹스 한 번 못 해봤어. 진짜 창피한 일이지. 난 그 나이에 이미 애를 한 사오십 명은 만들었다고. 이건 많은 게 아니야. 내 친구놈은 그보다 더 많았으니까. 그런데 자넨 한 번도 못 해봤을 거야. 당연하지. 자네 애비가 그런 걸 허락할 리 없을 테니까. 뻔하지. 그런데 왜 그런 줄 아나? 어, 아냐고? 왜 자네 애비가 그런 걸 못 하게 하는 줄 알아? 자네 애비 눈엔 자네가 아직 대여섯 살짜리 애로 보여서 그래. 그래서 자꾸 그렇게 간섭을 하는 거야. 그랬더니 자네도 그렇게 대여섯 살짜리 애처럼 돼버린 거고. 한 마디로 비극이지. 내가 돈 천 원 때문에 삐져서 이런 말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마. 진짜 걱정이 돼서 하는 얘기야. 만일 진짜로 자네가 말이지, 그러니까 자네가 한 말이 진짜라면 말이지, 그러니까 천 원 주는 걸 아버지한테 물어봐야 한다는 그 말 있잖아, 그게 진짜라면 말이지, 내가 볼 땐 둘 다 미친 거야. 완전히 미친 거지. 제정신들이 아니야. 물론 자네 잘못은 아니야. 자네 애비 잘못이지. 자네 애비가 자넬 이렇게 만든 거니까. 처음부터 미친 건 자네 애비였고, 그런 애비 밑에서 컸으니 자네도 미친 거고. 이봐, 내 말뜻 알겠어? 뭐 몰라도 상관없어. 알아도 상관없고. 어차피 둘 다 병들었는 걸 뭐. 그리고 이건 고치지도 못하는 병이니까. 그래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거야. 그나저나 자네 애비라는 작자 면상은 한번 보고 싶군.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이기에 지 자식을 이렇게 망쳐놨을까. 정말 무책임한 인간이지. 그런 인간은 제발 죽어버려야 하는데 말이야. 어이, 자네, 더 병들기 전에 정신 차려. 아버지 말을 거역해 보라고. 그런 훈련을 해 봐. 그럴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자네 애비를 죽이던가. 어때, 그럴 용기는 있어? 없지? 그럼 내가 도와줄까?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말만 해. 내가 아주 감쪽같이 해치워줄 테니까, 히히히.”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병약해 보이는 25세 청년의 머리를 또 툭툭 쳤다. 히히히히 웃으면서.

아, 이쯤에서 설명을 할 필요가 있겠는데, 이 병약해 보이는 25세 청년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 마디로 겉보기와는 딴판이다. 진짜로 완전 딴판이다. 어느 누구 하나 이 청년, 그러니까 영현의 겉모습을 보고, 영현의 실체를 알아챌 수는 없다. 알아채기는커녕 감히 짐작도 못 한다.

다시 한번 지금 전철에 타고 있는 25세 영현의 모습을 관찰해 보자. 키는 170은커녕 160도 안 돼보인다. 몸무게는 누가 봐도 40킬로그램 대로 보인다. 한 마디로 작고 깡말랐다. 입고 있는 바지는 분명 스키니진일 테지만, 그에게는 그조차도 헐렁했다. 회색 반팔 티셔츠 역시 슈퍼스몰 사이즈일 테지만, 그에게는 헐렁했다. 팔목 둘레가 5센티미터는 되려나, 하지만 팔뚝은 분명 5센티미터가 넘을 것이다. 7이나 8센티미터. 저래서야 책 한 권 제대로 들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게다가 피부는 또 얼마나 하얀지, 하얗다 못해 투명해 보일 정도다. 손들의 실핏줄이 비현실적으로 선명하게 보인다. 마치 실핏줄 문신을 한 것 같다. 세상에 태어나서 오늘 처음 햇빛을 쬔 사람 같다. 그 덕에 눈이 움푹 들어갔다. 난생처음 하는 외출은 원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피곤한 법이니까. 그래서 자리에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가가서 부축해 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만든다.

이런 모습이다. 하지만 영현은 불과 한 시간 전에 혈기왕성한 20대 청년 일곱 명을 잔인하게 죽였다. 그들을 다 죽이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1초. 한 사람당 2초도 안 걸렸다. 게다가 본인은 상처 하나 입지 않았고, 몸에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그들이 딱히 죽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그들은 젊었고 불량스러워 보였다. 술집이 즐비한 거리의 한 골목에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지나가는 여자들을 희롱했고,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징그러우니까 빨리 죽어버리라고 놀렸다. 물론 이런 청년들을 두둔할 생각은 없다. 분명 질이 안 좋은 청년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죽을죄를 저지른 건 분명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영현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을 발견한 영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지금 죽을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누군가를, 그러니까 40대 가장을, 그러니까 유흥비가 필요해서 어떤 집에 들어가 아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40대 가장을 죽일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했다. 옷을 벗고, 팬티까지 다 벗고 자신들 앞에서 무릎 꿇고 살려달라고 싹싹 빌면 살려주겠다고 협박하면서, 그래서 40대 가장은 그들이 시키는 대로 팬티까지 다 벗고 무릎 꿇고 살려달라고 싹싹 빌었지만, 그들은 낄낄대면서 40대 가장을 죽였다. 아이가 지켜보는 앞에서 여러 명이 경쟁하듯 칼로 찔러 죽였다. 그러니까 영현의 눈에 그들은 그렇게 할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 죄 없는 40대 가장을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영현은 그들을 죽였다. 일곱 명 전부를. 11초밖에 안 걸렸다. 그들이 마침 지나가는 40대 남자에게 돈과 담배를 빼앗으려 하기에, 영현이 달려가 말을 걸었다. 참고로 영현의 발은 굉장히 빠르다.

“저기요, 그 돈하고 담배, 그 아저씨한테 돌려주세요. 그리고 당신들 일곱 명 전부 옷 다 벗고, 그러니까 팬티까지 다 벗고 저 아저씨한테 살려달라고 비세요. 그럼 제가 살려드릴게요. 믿으셔도 돼요. 저는 여러분들하고 달라요. 여러분들처럼 거짓말은 하지 않아요. 그러면 진짜로 살려드릴게요. 안 죽여요.”

불량해 보이는 청년들은 갑자기 등장한 영현 때문에 잠시 어리둥절해 했다. 그리고 영현의 외모를 보고는 또 한번 어리둥절해 했다. 게다가 영현이 한 말을 곱씹어 보고는, 그리고 다시 영현의 외모를 보고는 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또다시 어리둥절해 했다. 그래서 일단 40대 남자부터 발로 걷어차 꺼지라고 했다. 물론 40대 남자는 영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줄행랑쳤다. 그렇다고 해서 영현이 서운해 하지는 않았다.

“이봐 꼬마, 너 지금 대체 뭐라고 한 거야?”

같은 20대였지만, 그들이 보기에 영현은 꼬마였다.

“야, 얘가 지금 뭐라고 한 거냐? 옷을 다 벗고 뭐를 어쩌라고? 빌라고 그랬냐?”

“응, 우리 전부. 팬티까지 다 벗고. 그러면 살려주시겠단다. 이거 참, 황송해서 어쩌냐?”

“어, 야, 그게 아니잖아! 아까 그 꼰대한테 빌라고 했잖아! 큰일났다. 꼰대 도망쳤지? 우리 그럼 이제 이 꼬마한테 죽는 거야! 싫어! 누가 얼른 가서 아까 그 꼰대 새끼 좀 찾아서 끌고 와! 안 그럼 우린 죽는다고! 이 꼬마한테 다 죽어!”

한 청년이 실로 실감나는 연기를 펼쳐보였다. 머리까지 쥐어뜯으며 울부짖는 척했다. 그 모습이 별로 웃기지는 않았지만, 친구들이 웃어주기를 바라며 한 행동이었기에, 친구들은 낄낄대며 웃어주었다.

그들이 웃는 동안 영현은 자리를 뜨려고 했다. 어쨌든 40대 남자가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갔으니, 자신도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원래대로라면 저 청년들을 당장 죽여야 하지만, 저들은 언젠가 40대 가장을 죽일 것이므로, 그 전에 미리 저들을 죽여야 하지만, 영현은 저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아저씨한테 살려달라고 빌면 죽이지 않겠다고, 팬티까지 다 벗고 빌면 안 죽이겠다고. 진짜로 안 죽이겠다고 약속해버렸다. 그런데 지금 그 아저씨가 없다. 어느새 도망쳐 버렸다. 그러니 저 청년들은 빌고 싶어도 빌 대상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이번엔 그냥 돌아가는 수밖에. 하지만 영현은 경험상 알고 있다. 언젠가 이 근처에 다시 오게 되면 저들을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그럼 그때 죽이면 된다. 그때는 아무런 약속도 하지 말고 죽이면 된다. 그래서 오늘은 그냥 가기로 했다. 하지만 역시 운명이란 이미 정해진 모양이었다. 저들은 오늘까지 살 운명이었던 모양이다. 그냥 가려던 영현을 한 청년이 막아세웠다.

“이봐, 꼬마야, 너 어디가? 그냥 가는 게 어딨어? 너 때문에 아까 그 꼰대 새끼 그냥 보냈잖아. 그럼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지. 그래야 계산이 맞는 거잖아. 어, 안 그래? 내 말이 맞지? 네 생각에도 내 말이 맞는 거 같지? 그래서 말인데, 나한테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꼬마 너, 일단 우리한테 빌어라. 살려달라고 빌어. 물론 팬티까지 다 벗고. 아주 애절하게 빌어. 일단 빌어. 그럼 그때 가서 살려줄지 말지 결정할 테니까. 아주 최선을 다해서 빌어야 돼. 자, 시작해 봐, 시이작!”

그 청년의 말이 끝나자마자 영현은 움직였다. 일단 입고 있던 반팔 티셔츠를 걷어올렸다. 영현의 배와 가슴이 드러났다. 압박 붕대로 칭칭 동여맨 배와 가슴. 그리고 그 붕대 틈 사이로는 전부 다 해서 스물두 자루의 단도가 꽂혀 있었다. 그러니까 스물두 자루의 단도를 가슴에 보관하기 위해서 압박 붕대를 활용한 것이었다. 영현은 그중 두 자루를 뽑아들었다. 훈련 받지 않은 자들한테는 두 자루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들의 수가 얼마가 됐든, 그런 건 상관없었다. 한 손에 하나씩 들고, 그들 곁을 스치듯 지나갔다. 목의 경동맥을 따버리면 한 명 죽이는 데 1초도 안 걸릴 것이다. 사람 수가 너무 많아서 시간이 좀 걸리겠다 싶을 땐 그렇게도 한다. 손은 모자라고 도살해야 할 돼지들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그래서 도살자들은 예리한 칼로 돼지의 목만 간단하게 따버린다. 돼지 한 마리 죽이는 데 0.5초도 안 걸린다. 그래서 영현도 그 수가 많을 땐 그렇게 한다. 40명 죽이는 데 6초가 걸린 적도 있다. 한 사람 당 0.15초 걸린 셈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어디까지나 사람이 많을 때 얘기다. 웬만해서는 목의 경동맥을 노리지 않는다. 그렇게 죽이는 건 어딘가 좀 아름다워 보이지가 않는다. 아름답기는커녕 B급 공포 영화에 등장하는 살인마 느낌까지 난다. 그래서 영현은 목 대신 상반신을 예닐곱 번 빠르게 찌르고 지나간다. 그렇게 하면 비록 속도는 느리지만, 그래도 보통사람의 눈으로는 영현의 움직임을 쫓지 못한다. 느리다는 건 오직 영현만이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상대는 자신의 상반신이 칼에 찔렸다는 건 알지만, 도대체 몇 번을 찔렸는지, 칼에 찔린다는 게 얼마나 아픈 건지 알지도 못한 채 죽어버린다. 말 그대로 스치듯 지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 일곱 번 칼에 찔렸다. 마지막 일곱 번째 칼은 그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그 시간은 2초가 채 안 걸렸다. 영현은 그렇게 스치듯 일곱 명 곁을 지나갔다. 너무 빨라서 칼에 피조차 묻지 않았다. 그대로 다시 칼을 압박 붕대 사이에 꽂은 뒤 비실비실 걸어갔다. 아무리 타인에게 무관심한 자라도 그 모습을 보면 다가가 부축해 주고 싶을 정도였다. 실제로 전철역까지 가는 동안 무려 다섯 명이나 다가와 부축해 주겠다고 청하기까지 했다. 아마 그 가운데 불량해 보이는 청년이 있었더라면, 그는 영현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이게 영현의 실체다. 그런데 지금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히히히히 웃으며 영현의 머리를 툭툭 치고 있다. 그럴 때마다 영현의 머리는 90도 가까이 옆으로 픽픽 꺾였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영현의 머리는 옆에 앉은 남자의 어깨를 툭툭 쳤다.

기어이 영현이 옆에 앉은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30대 후반 아니면 40대 초반. 불량해 보이지도 않았으며, 설사 불량해 보였더라도 어쨌든 그는 20대 청년이 아니었다. 죽일 이유가 없는 자였다. 그래서 영현이 시선을 거두려는 찰나, 영현의 시선을 느꼈는지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왜소한 체격에 허여멀건 피부에 움푹 들어간 눈. 딱 봐도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다. 그런 청년이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구하고 있었다. 술 취한 할아버지의 괴롭힘에서 구해달라고. 그런 눈빛이었다. 남자는 멋대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술 취한 할아버지를 제압하면 되는 것이었기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영현의 머리가 또 한 번 남자의 어깨 쪽으로 픽 꺾였다. 그러면서 남자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세게 쳤다. 할아버지가 잠깐 휘청하면서 힘 조절에 실패한 탓이었다. 그 순간 할아버지는 아차 싶었다. 영현 때문이 아니었다. 영현 옆에 앉아 있는 남자 때문이었다. 영현의 머리가 남자의 어깨를 세게 쳤기 때문이다. 남자의 심기를 건드린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나이 정도 되면 주변 분위기 감지하는 능력이 지나치게 발달한다. 자신이 위험에 처한 건지 아닌지, 빠져나갈 수 있는지 없는지 귀신같이 알아낸다. 아마 육체적인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져서 대신 발달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일종의 생존 본능인 셈이다. 그리고 지금 할아버지의 머릿속에는 적신호가 켜졌다.

“어이쿠, 이 청년 보게나, 그냥 툭 건드렸는데 뭘 그렇게 맥없이 픽 쓰러지고 그래, 참. 젊은이가 왜 그렇게 매가리가 없어! 아무튼 그러지 말라고. 내가 많이 미안해지잖아. 장난이야, 장난. 이 늙은이가 심심해서, 그리고 술도 좀 취해서 장난 좀 친 거야. 그럼 난 이제 내려야 하니까 조심해서 가. 너무 졸지 말고. 그러다 내려야 할 역 지나치는 수가 있다고.”

할아버지는 헛기침을 하면서 출입문 앞으로 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영현은 고개를 숙이고 다시 졸음과 사투를 벌였다.

이쯤 되면 상황은 여기서 종료가 되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무사히 전철을 빠져나가는 것이고, 영현은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계속 꾸벅꾸벅 졸 것이고. 물론 영현과 같은 칸에 타고 있던 사람들도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현 옆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가 이 모든 걸 깨뜨렸다.

“이봐, 영감! 지금 어딜 도망치는 거야! 사람 어깨를 쳤으면 사과를 해야 할 거 아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렇게 소리쳤다. 덕분에 전철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중년 남자에게 쏠렸다. 영현만이 여전히 졸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중년 남자가 이번에는 영현을 향해 소리쳤다.

“어이, 학생! 사람이 소리를 쳤으면 좀 고개를 들라고! 내가 지금 자네를 도와주고 있는 거잖아! 젊은 친구가 왜 이렇게 잠이 많아! 잠은 집에서 자, 집에서!”

영현은 학생이 아니었지만, 중년 남자의 눈에는 학생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영현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분명 본인은 세게 칠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저 툭 건드리기만 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중년 남자의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가버렸다. 그래서 영현은 뒤통수를 맞자마자 앉은자세 그대로 전철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건 중년 남자의 잘못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현의 머리를 툭 칠 때는 말 그대로 툭 건드릴 생각으로 치려 하지만, 막상 팔을 휘두르기 시작하면 자기도 모르게 잔뜩 힘이 들어가버린다. 그래서 번번이 영현의 머리는 픽픽 꺾이고 만다. 할아버지도 그랬다. 이건 아마 타인이 보기에 영현이 지나치게 약해 보여서일 것이다. 누구든 힘껏 후려치고 싶게 만드는 체격 조건을 갖고 있는 영현 탓이었다. 덕분에 전철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번에는 영현에게로 쏠렸다.

영현이 맥없이 전철 바닥으로 고꾸라진 탓에 일단 중년 남자는 당황했다. 하지만 고꾸라진 채 꿈쩍 않고 있는 영현을 보자 당황스러웠던 감정은 사라졌다. 대신 전철 안에 있는 사람들 누구라도 때려죽일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몸속에 가득했다.

“이봐, 영감! 왜 아직도 거기 우두커니 서 있는 거야! 당장 이쪽으로 와서 사죄를 해야 할 거 아니냐고! 그만큼이나 나이를 쳐먹었으면 그 정도 눈치는 있어야 하잖아!”

물론 할아버지도 이런 순간은 예상했다. 남자가 소리를 지르면 얼른 그의 기분을 맞춰주려고 했다. 그러고 나서 도망치듯 전철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 남자의 태도는 좀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질 않나, 반말도 모자라 명령조로 말하질 않나, 전철 안에 있는 사람들은 신경도 안 쓰고 제멋대로 행동하질 않나. 이대로 저 남자한테 가서 사과를 하면, 단지 사과만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저 남자가 이미 일을 크게 벌여놨기 때문에 적어도 주먹 몇 대는 얻어맞을 게 뻔했다. 그랬다가는 더 기고만장해져서 추가로 발로 몇 대 걷어차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니까 이럴 때는 차라리 내 쪽에서도 세게 나가는 게 낫다. 저 남자는 양복쟁이다. 그것도 중년 양복쟁이. 껄렁껄렁한 양아치 새끼가 아니라는 얘기다. 앞뒤 안 가리고 막무가내로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약간 막 나가고 있기는 하지만, 내가 세게 나가면 자신도 뜨끔 할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거, 젊은 양반이 말이 좀 지나치네. 실제로 내가 자네 어깨를 친 적도 없고, 설사 쳤다고 해도 그렇지, 자네보다 나이도 한참 많은 사람한테 사죄를 하라니! 거 원, 버르장머리가 없어도 유분수지, 참 내. 허, 그것 참,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려는 건지, 참. 말세야 말세. 거 젊은 양반이 말 함부로 하면 못 써!”

“누가 젊은 양반이라는 거야! 저 영감탱이가 미쳤나! 내일모레면 내가 오십이야! 버르장머리가 어쩌고 하는 소리 들을 나이는 아니라고! 괜히 나이로 어떻게 해볼 생각 하지 말고, 당장 이리 와서 빌기나 해!”

예상이 빗나갔다. 오히려 상대의 화만 돋운 꼴이었다. 그냥 얼른 사과를 했으면 어땠을까! 정중하게 사과를 했으면 무사히 이 위기를 모면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양복쟁이니까 일을 더 크게 만들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늦었다. 양복쟁이의 태도를 보아 하니 그냥 넘어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전철은 왜 이렇게 느리게 달리는 거지! 아무튼 이게 다 저 삐쩍 마른 젊은 새끼 때문이다. 저 새끼, 아직도 바닥에 머리를 쳐박고 있다. 일어설 기운도 없는 저 약골 새끼.

할아버지는 홧김에 영현의 왼쪽 갈비뼈를 발로 걷어차려고 했다. 홧김이기는 하지만, 이 동작을 통해 자신도 굉장히 화가 났음을 중년 양복쟁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면 중년 양복쟁이도 움찔 할지 모른다. 아무튼 그런 두 가지 의미를 담은 발길질이었다. 그래서 왼쪽 갈비뼈를 정확히 가격하려고, 시선을 영현의 왼쪽 갈비뼈에 고정한 채 오른발을 휘둘렀다. 갈비뼈가 부러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잠시 들기는 했다. 그렇더라도 오른발을 거둬들일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리고 뭔가 단단한 게 발등에 닿은 것 같기도 했지만, 이내 할아버지의 오른발은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몸이 붕 떠올랐고, 곧 등이 먼저 바닥에 닿았다. 그것도 쿵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물론 떨어진 위치는 방금 전까지 영현이 머리를 쳐박고 있던 곳이었다.

만일 할아버지가 머리를 노렸다면 영현은 그냥 맞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몸통 말고 다른 곳을 노렸다면 굳이 피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몸통, 그것도 갈비뼈를 노리다니. 거기에는 스물두 자루의 단도가 있다. 괜히 잘못 맞았다가는 단도가 갈비뼈를 파고들 수도 있다. 그래서 그냥 어쩔 수 없이 맞는 순간 피했다. 얼른 일어나서 다시 자리에 앉은 것이었다. 물론 그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옆에 앉은 중년 남자조차 영현의 모습을 보며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얘 언제 일어나서 여기 앉은 거야!

할아버지는 기절이라도 했는지 바닥에 누운 채 꿈쩍도 않고 있다. 심지어 신음소리조차 안 내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영현은 다시 고개를 주억이며 졸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어이, 이봐, 영감! 이봐, 정신 좀 차려! 햐, 이거 제대로 뻗어버렸네. 기관실에 연락이라도 해야 하나. 그런데 이 새끼는 도대체 정체가 뭐야! 자는 척 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자는 거야! 야, 일어나 인마! 너 때문에 이 영감 죽게 생겼잖아! 일어나서 이 영감 좀 어떻게 해 봐! 너 때문에 나까지 괜히 골치 아프게 됐다고!”

남자가 또 한번 영현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이번에도 여전히 강도가 셌다. 그리고 이번에는 영현이 눈을 떴다.

“글쎄요, 저는 이 할아버지한테 아무 짓도 한 게 없어서요. 그리고 이 할아버지 안 죽어요. 잠깐 호흡 곤란이 왔을 뿐이에요. 앞으로 30초 정도만 지나면 괜찮아지실 거예요. 허리나 어디 다른 데 다치신 곳도 없고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죄송하지만 제가 좀 피곤해서요. 오늘 여러 명을 죽이기는 했지만, 딱히 그것 때문은 아니에요. 이상하게 피곤해요. 저희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이런 날에는 그냥 푹 자는 게 상책이라고 하셨어요. 그런 날이 있대요. 이유 없이 피곤한 날. 아, 보세요, 저 할아버지 깨어나셨네요.”

영현의 말대로였다. 할아버지는 곧 죽을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몸을 돌돌 말았다. “아이고, 나 죽네!” 하는 소리가 전철 안에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물론 아픈 데 없는 노인들이 주로 그런 말을 한다. “아이고, 나 죽네!” 그런데 참, 나이 많은 사람이 그렇게 위험한 자세로 자빠졌는데도 몸이 성한 건 천만다행이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또 상황을 되돌아보면 그게 그렇지가 않다.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멀쩡한 건 지극히 당연한 거다. 할아버지는 멀쩡할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가 다치지 않게끔 영현이 적절한 타이밍에 일어섰으니까.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오른발이 영현의 왼쪽 갈비뼈에 아주 잠깐 닿았다. 물론 그 시간은 대단히 짧았지만, 어쨌든 닿았다. 물론 이건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영현이 닿게 해준 것이었다. 당연히 닿기 전에 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영현이 닿게 해줬다. 그러고 나서 영현은 일어선 것이었다. 그가 살인귀가 아니라면, 그러니까 보통의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빠져 있는 사람의 갈비뼈를 발로 걷어찰 때, 자기도 모르게 움찔 하기 마련이다. 걷어차려는 순간 움찔하고, 발등이 갈비뼈에 닿는 순간 움찔한다. 자신은 느끼지 못하지만 움찔한다. 그리고 움찔한다는 건 역시 자기도 모르게 힘을 뺀다는 것이다. 애초에 마음먹었던 것만큼 세게 차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비록 그 차이가 크지는 않더라도, 그러니까 본인도 느끼지 못할 만큼 아주 조금 힘을 빼는 것이지만,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힘을 빼는 것이지만, 그 차이로 인해 생기는 피해는 실로 엄청나다. 힘을 빼지 않으면 단 한 번의 가격으로 상대의 내장을 파열시킬 수도 있다. 힘을 빼지 않은 채 자칫 헛발질이라도 하면 본인이 뇌진탕을 일으켜 사경을 헤맬 수도 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힘을 빼는 것이다. 나와 남을 위해서. 그걸 알기에 영현은 할아버지의 오른발이 가슴에 닿을 때까지 기다려준 것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의 가슴에 힘을 줘, 할아버지의 오른발이 더 이상 뻗지 못하도록 했다. 오른발에 실린 힘을 최대한 빼버리게 만든 것이었다. 이러면 발이 허공을 가르며 넘어지더라도 척추를 다치거나 팔이 부러지거나 뇌진탕을 일으키거나 하지 않는다. 60 넘은 노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저 조금 놀랄 뿐이다. 조금 창피하기도 할 뿐이고. 그래서 과장되게 앓는 소리를 하는 것이다. 그걸 이해해야 하는데, 이해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창피해서 앓는 소리를 내는 것뿐이라고 이해하면 그만인데, 역시 사람들은 이해력이 부족하다. 특히나 퇴근길 전철 안에 있는 사람들은 더 더욱 이해력이 부족하다. 짜증나고 피곤한 하루를 보내다 왔으니 당연하다. 몸과 마음이 녹초가 됐는데, 60 넘은 노인이 전철 바닥에 쓰러져 당장 죽을 것처럼 앓는 소리를 내는 이유를 이해하라는 건 상당히 무책임한 짓이다. 그들은 지금 모든 것이 귀찮은 상태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상태다. 이해는커녕 자칫 불쾌지수가 치솟아 폭주할지도 모른다. 그걸 우려했어야 한다. 하지만 영현도 거기까지는 내다보지 못했다. 영현은 살인귀일 뿐 퇴근하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가 어떤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렇더라도 그들의 행동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시끄러. 시끄럽고 추해. 시끄럽고 추하고 더러워. 늙은이,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아니면, 누가 죽여줬으면 좋겠어. 그러면 조용해질 텐데. 피곤해. 피곤하고 힘든데, 저 늙고 추하고 더러운 것 때문에 더 피곤하고 힘들어. 죽어, 죽어 늙은이, 제발 죽어, 죽어줘, 제발 죽어줘, 죽여줘, 누가 제발 죽여줘.

할아버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없었다.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다들 할아버지가 죽어버리기를 혹은 누군가 나서서 죽여주기를 바랐다. 영현이나, 영현 옆에 앉은 남자를 욕하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주변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할아버지는 여전히 전철 바닥에 누워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제 그만 해도 될 텐데, 그만 일어나서 옷을 털고 내릴 준비를 하면 될 텐데, 그 타이밍을 정하기란 정말 쉽지가 않은 법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절한 타이밍이라는 걸 놓치고 만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할아버지처럼.

할아버지 근처에 있던 젊은 직장인이 뒷걸음질 치다 할아버지의 왼팔을 밟았다. 순전히 실수였다. 물론 그도 할아버지가 죽기를 바라기는 했지만, 실제로 밟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서서 책을 읽다 전철이 휘청하는 바람에 그도 뒤로 휘청했을 뿐이다. 그래서 중심을 잡으려고 뒷걸음질을 쳤을 뿐이다. 그러다 할아버지의 왼팔을 밟았다. 발에 전해지는 물컹 하는 느낌, 젊은 직장인은 그것이 뭔지 알 수 있었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밑을 내려다보지 않아도 자신이 할아버지의 팔을 밟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미안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혹시 팔이 부러지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도 들지 않았다. 그냥 빈 플라스틱 물병을 밟았을 때의 기분과 같았다. 누가 이런 걸 쓰레기통에 안 버리고 여기다 버린 거야, 그런 찝찝한 기분만 들 뿐이었다. 그래서 얼굴을 한번 찡그린 뒤 그냥 계속 책을 읽었다.

“윽, 아파. 누가 방금 내 팔을 밟았어. 아파. 아프다고. 이번에는 정말 아파. 누구야, 내 팔을 밟은 녀석이 누구야? 내 팔 밟은 년이 누구야? 정말로 아프다고. 어이, 이봐 청년, 방금 누가 내 팔을 밟았어. 혹시 내 팔 밟은 녀석 못 봤어? 아니면 내 팔 밟은 년 못 봤어? 사람 팔을 밟았으면 사과를 해야 하잖아. 그런데 밟아놓고는 싹 모르는 척 하잖아. 그것도 엄청 세게 밟아놓고는 모르는 척 하잖아. 그러면 돼, 안 돼! 안 되잖아. 자네 혹시 누가 밟았는지 못 봤어? 어이, 눈 좀 떠봐!”

그러면서 영현의 무릎을 툭툭 쳤다.

도대체 눈 감고 자고 있는 영현을 깨워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눈 감고 자고 있었으니 못 본 건 뻔할 텐데, 뻔히 알 텐데, 그걸 왜 영현한테 물어보는 건지 모르겠다. 아마 할아버지 눈에는 영현이 전철 안에서 제일 만만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목청을 높였으면서도, 마치 영현에게 묻는 듯한 제스처를 취한 모양이었다.

영현이 눈을 떴다. 그러고는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어! 못 봤냐고?”

“네, 못 봤어요. 자고 있었거든요.”

“누가 내 팔을 밟았어. 그것도 엄청 세게 밟았어. 뼈가 부러진 것 같아. 아파 죽겠어. 누가 그랬는지 알아내기만 하면 내가 가만 안 놔둘 거야. 똑같이 되갚아줘야지. 팔을 부러뜨려버릴 거야. 정말이라고.”

“뼈 안 부러졌어요. 뼈가 부러졌으면 그렇게 팔을 움직일 수도 없어요. 그러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알아. 뼈는 안 부러졌어. 하지만 금이 갔을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이렇게 아픈 거겠지. 나이 들면 모든 게 약해진다고. 뼈도 약해져. 쉽게 금이 간단 말이지.”

“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러니까 나이 드신 분들은 뼈도 약해질 수 있다는 말이에요. 하지만 뼈에 금이 가면 퉁퉁 부어올라요. 그런데 할아버지 팔은 그냥 밟힌 부분이 조금 빨가네요. 부어오를 기미도 안 보여요. 그리니 금이 간 것도 아니에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뭐야, 네 놈이 어떻게 알아! 부러졌는지 금이 갔는지 네 놈이 어떻게 아냐고! 네 놈이 의사야! 의사도 아닌 놈이 왜 의사인 척 하는 거야! 금이 갔다고 하면 금이 간 거지, 왜 잘난 척 하고 지랄이야!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네 놈이 애초에 천 원만 줬어도 이런 일이 없었을 거 아냐!”

시끄러워. 저 노인네 정말 시끄러워. 팔이든 뭐든 정말로 부러졌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속이라도 시원했을 거야. 목이 부러졌으면 더 좋았을 테고. 그럼 저렇게 시끄럽게 떠들지도 못할 텐데. 제발 누가 저 늙은이 목 좀 부러뜨리면 좋겠어. 목을 아주 분질러버리면 좋겠어. 왜 아무도 나서지 않는 거야. 왜 다들 눈치만 보고 있는 거야. 목을 부러뜨리고 싶으면서 왜 다들 그렇게 하지 않는 거야.

다시 한번 전철이 휘청거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여러 사람이 중심을 잡으려고 뒷걸음질 쳤다. 다만 뒷걸음질 치는 방향이 희한하게도 전부 할아버지가 있는 쪽이었다. 남자 구두, 학생 운동화, 여자 하이힐. 그것들이 일제히 할아버지의 몸을 짓밟았다. 뾰족한 하이힐 뒷굽은 몸을 짓밟았다기보다 살에 구멍이라도 뚫듯 찍어눌렀다. 물론 살점을 뜯어내기도 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여전히 중심을 잡으려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전철은 이미 곧게 달리고 있었고, 사람들도 이제는 충분히 중심을 잡았을 텐데, 중심을 잡고도 남았을 텐데,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계속 중심을 잡는 척하면서 할아버지의 몸을 짓밟고 찍어눌렀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숫자는 줄어들기는커녕 더 늘어났다. 할아버지 주변에 있던 사람 말고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까지 슬금슬금 다가와서 발로 짓밟았다. 심지어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까지 그 대열에 합류했다. 몸을 짓밟고 찍어눌렀다. 어떤 자는 중심을 잡는 척 뒷걸음질 치다가 할아버지의 다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뭐야, 이 영감은. 도대체 왜 여기에 자빠져 있는 거야. 이봐, 영감! 술이라도 취한 거야! 정말이지, 당신 진짜 짜증나! 그냥 보기만 해도 짜증나! 그런데 술 취해서 이렇게 자빠져 있으면 어떡해! 보기만 해도 짜증나는데, 이러면 정말 죽이고 싶을 정도로 짜증나잖아! 그리고 몰골은 그게 뭐야! 힘없는 늙은이 주제에 술 쳐먹고 누구랑 싸우기라도 한 거야! 그래서 얻어터진 건가! 피 나는 데가 많아. 전철 바닥에도 피가 묻었잖아. 그 더러운 피를 왜 바닥에 흘리고 그래! 정말이지, 왜 나이 많은 것들은 죄다 이렇게 안하무인이야! 왜 이렇게 배려심이 부족하냐고! 그러면서 젊은 사람들을 욕하잖아! 예의가 없다느니,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른다느니, 젊은 것들 하는 꼬라지 보니 말세라느니. 하나부터 열까지 불만만 늘어놓지. 젊은이들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찼어. 지들이 나이 쳐먹은 것까지도 젊은 사람들 탓으로 돌릴 기세잖아! 하지만 지금 당신 꼬라지를 봐. 한번 보라고. 여기 전철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자는 오직 당신 한 명뿐이야! 소리 지르는 것도 당신, 술 냄새 풀풀 풍기는 것도 당신, 통행에 방해를 주는 것도 당신, 피를 흘리는 통에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당신, 당신, 당신, 당신, 다 당신 때문이라고! 알아들었어!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 한 사람뿐이라고! 그러니까 제발 좀 저리 썩 꺼져!”

그러면서 그 자는 발로 할아버지의 갈비뼈를 힘껏 걷어찼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사람들은 전철이 휘청거릴 때만 몸의 중심을 잡는 척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다가 할아버지를 툭툭 쳤다면, 이번에는 전철이 휘청거리지도 않았는데, 그래서 몸의 중심을 잡을 필요도 없었고, 잡는 척도 하지 않았는데 할아버지를 쳤다. 그러니까 드러내놓고 걷어찬 것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건 실수가 아닌 고의적인 공격이었다.

할아버지는 가슴을 움켜쥐며 신음했다. 역시 뼈가 부러지거나 금이 가지는 않았다. 그 자가 마음먹고 걷어차기는 했지만, 본래 다리 힘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기에 가슴에 심각한 충격을 주지는 못했다. 나이 든 사람의 갈비뼈 하나 망가뜨리지 못하다니, 좀 더 건강하게 살려면 그는 당장 근력 운동을 할 필요가 있었다. 어쨌든 심각한 충격도 주지 못한 주제에 그 자는 자신이 대단한 일이라도 해낸 듯 어깨를 있는 힘껏 폈다. 그러고는 으스대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이, 이봐, 뭐하고 있어? 자네도 가서 한번 걷어차라고. 차고 싶을 거 아니야. 이럴 때 가서 한번 걷어차. 그러고 나서 저 남자처럼 어깨를 한번 좀 활짝 펴라고. 젊은 친구가 너무 기운 없어 보여. 자, 자, 여태 당한 거 한번 앙갚음 좀 해봐. 가서 차. 그래도 아무 문제없어. 그런 분위기거든. 다들 한번씩 저 영감 걷어찰 분위기라고. 못 느끼겠어?”

영현 옆에 앉은 남자가 영현을 부추겼다. 시선은 전철 바닥에 누워 있는 할아버지를 향하고 있었다. 가슴을 보호하려고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 할아버지를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표정이 좀 이상하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 같다. 기분이 매우 좋아 보인다. 아름다운 노래에 취한 상태이거나, 약간의 취기가 오른 상태이거나, 섹스 중 지금 막 절정에 이른 상태이거나, 향긋한 꽃향기에 취한 상태이거나, 이제 막 산 정상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는 상태이거나, 그런 사람처럼 보인다. 동시에 불안해 보이기도 한다. 기분이 매우 좋아 흥분한 상태이기는 한데, 그래서 지금이 딱 적당한데, 인간이란 늘 만족이라는 걸 모르는 법이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 보이면서도 동시에 불안해 보인다. 기분이 좋아서, 더 기분이 좋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자들은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 인간은 늘 쾌락 때문에 파멸하니까.

그리고 영현 옆에 앉은 남자뿐만 아니라 전철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표정은 똑같다. 기분이 좋아 보이면서도 동시에 불안해 보인다. 물론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할아버지만 빼고.

영현은 앞으로 할아버지가 겪게 될 일들을 잠시 떠올려 보았다. 가장 먼저 옆에 앉은 남자가 일어설 것이다. 웅크리고 있는 할아버지의 등을 발로 툭툭 찬다. 할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움찔 하고 반응이라도 보인다면, 혹은 미친 사람처럼 발광을 하면 세게 몇 번 걷어차고 말겠지만, 그러니까 겁에 질린 고양이가 느닷없이 발톱을 세워 주인의 팔을 할퀴면, 주인은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더 힘껏 고양이를 두들겨 팬다. 고양이는 목이 쉬어라 비명을 지른다. 주인은 곧 이성을 되찾는다. 그러고는 고양이를 두들겨 팬 걸 후회한다. 고양이를 놓아준다. 그러니까 이렇게 세게 몇 번 걷어차고 말겠지만, 남자는 할아버지의 등을 발로 툭툭 차다, 할아버지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점점 발에 힘을 실어서 찬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심지어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는다. 남자는 더 힘껏 걷어찬다. 걷어차면서 생각한다. 자신은 지금 사람을 때리고 있는 게 아니라고. 그저 통나무를 걷어차고 있는 거라고. 더 세게, 더 빠르게 걷어찬다. 할아버지, 제발 발톱을 세워서 남자의 발을 할퀴세요. 그래야 저 남자가 멈춰요. 물론 그렇게 해서 고양이를 팬 걸 후회하지만, 그래서 그 날은 더 이상 고양이를 패지 않겠지만, 며칠 지나면 상황은 똑같아진다. 주인은 다시 고양이를 팬다. 뭐, 결국 변하는 건 없다. 할아버지는 나이가 많아서 이런 이치를 잘 아는 걸까, 발광을 해봐야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아는 걸까, 그래서 가만히 있는 걸 수도 있지만, 어쨌든 맞아도 너무 많이 맞는다. 아니지, 때려도 너무 많이 때린다. 저러면 발목 아플 텐데. 시뻘겋게 부어오를지도 모른다. 세상 이치를 잘 아는 할아버지는 그걸 노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때리는 사람이 지치고 아파서 멈출 때까지 맞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물론 할아버지의 예상은 적중한다. 남자는 결국 때리는 걸 멈추고 자신의 발목을 감싸쥔다. 할아버지가 더 아플 텐데,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할아버지를 실컷 때려놓고도 자기 발목 아픈 것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는 상태다. 그래서 할아버지한테 한번 더 화풀이를 하려다 그만 둔다. 대신 침을 뱉고 욕을 한 뒤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어때, 사람 패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아드레날린이 분출하지 않나? 그러니 직접 때린 난 어떻겠나? 상상을 한번 해보라고. 그래, 알아. 자넨 누굴 때려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을 거야. 물론 맞아본 적은 많았을 테지만. 자네 혹시 맞는 걸 좋아하나? 그러니까 내 말은 맞으면 막 흥분되고 그러냔 말이야? 아닐 테지. 그런 게 아니라면 가서 한번 때려 봐. 자네 차례야. 사람을 때릴 때의 기분이 어떤지 한번 느껴 봐. 적어도 맞을 때보다는 좋을 거야, 하하하. 물론 저 영감이 불쌍하다는 생각도 안 들 테고. 원래 사람이란 그런 거야. 죄수였던 자도 간수가 되면 결국 죄수를 패게 되지. 그러니 솔직해져도 돼. 아무도 자네를 욕하지 않을 테니까. 어서 가서 때려. 어서 때리라고. 이런 이런, 왜 망설이지? 자네 혹시 고양이 안 길러봤나? 그렇군. 그럼 고양이를 때려본 적도 없겠어. 이거야 원, 사람도 안 때려 봤고, 고양이도 안 때려 봤고, 도대체 자넨 뭘 때려 봤나? 당장 집에서 고양이부터 키우게. 자네 같은 사람은 반드시 고양이를 키울 필요가 있어. 그러면 때려볼 기회가 많을 거야. 자네라고 예외는 아니거든. 자네도 틀림없이 때리게 되어 있어. 그러니까 고양이를 말일세. 고양이라는 게 참 희한하거든. 주인 눈치를 그렇게 봐. 그러면서 살살 도망치지. 심지어 귀엽다고 쓰다듬어 줄 때도 몸을 움츠려. 완전한 약자지. 약한 놈이야. 비열한 놈처럼 보인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때리고 싶어지는 거거든. 그리고 때리면 때릴수록 고양이는 더 눈치를 보게 되고. 무슨 말인지 알겠나? 때리는 횟수가 점점 더 늘어난단 말일세. 그러니까 고양이부터 키워. 지금 저 영감 모습이 딱 고양이야.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질 않나. 바들바들 떨면서 말일세. 하, 저 늙은 고양이 새끼, 정말 때리고 싶어 미치겠군 그래. 남자는 내게 그렇게 말한다. 물론 그 말이 나한테만 들린 건 아니다. 할아버지한테도 들리고, 할아버지 주위에 있는 사람들한테도 들린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위기를 모면할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여전히 늙은 고양이처럼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다. 맞으면 대들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있다. 고양이, 아마도 할아버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고양이를 길렀거나 혹은 기르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다가와 할아버지를 쓰다듬는다. 맞을 땐 가만히 있던 할아버지가 사람들이 다가와 쓰다듬으니 몸을 움찔 한다. 쓰다듬을 때마다 움찔 한다. 머리를 쓰다듬으면, 머리를 가슴팍에 더 깊이 파묻는다. 등을 쓰다듬으면, 등을 더 동그랗게 만다. 다리를 쓰다듬으면, 다리를 배 쪽으로 더 바짝 끌어당긴다. 으, 으, 으, 으…… 하는 소리도 아주 작게 내뱉는다. 그러지 말아요, 할아버지. 쓰다듬는 것뿐인데, 그렇게 자꾸 겁에 질린 모습을 보이지 말아요, 할아버지. 그러면 안 돼요. 고양이처럼 보이잖아요. 힘없는 늙은 고양이처럼 보이잖아요. 사람들이 때린단 말이에요. 그렇죠? 때릴 거죠? 늙은 고양이 때릴 거죠? 목덜미를 움켜쥐고 머리를 세게 내리칠 거죠? 뺨을 후려치고 또다시 머리를 내리칠 거죠? 세게 말이에요. 그렇게 할 거죠? 그러다 보면 늙은 고양이도 참지 못하고 마구 몸부림치다, 실수로 당신들 손이나 팔을 할퀼 수도 있어요. 전적으로 실수예요. 아시잖아요, 실수라는 거. 할퀼 생각 없었다는 거 아시잖아요. 그냥 몸을 이리 저리 비틀다가, 그러니까 맞는 게 아파서 몸을 비틀다가 그렇게 된 거 아시잖아요. 알면서도 더 화를 낼 거죠? 이젠 배도 걷어차고 등도 걷어차고 다리도 짓밟고, 오, 세상에나, 얼굴까지 걷어차시면 안 되는데요. 으, 늙은 고양이가 많이 아픈가 봐요. 구석으로 도망치네요. 이럴 때 보면 고양이가 참 멍청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주인은 이미 고양이가 몸을 완전히 숨길 만한 곳을 다 막아놨잖아요. 그래서 마음 놓고 편안하게 때리는 거잖아요. 도망가도 소용없다는 걸 아니까요. 그런데도 고양이는 몸을 숨기려고 도망을 쳐요. 그러고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머리만 감춰요. 몸뚱이는 뻔히 보이는데, 고양이는 그런 걸 모르는 걸까요? 머리만 숨기면, 그러니까 자기 눈에 주인이 안 보이면, 주인도 자신을 못 찾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몸뚱이가 보인다는 건 모르는 걸까요? 혹시 이럴 때 장난 좀 쳐본 적 있으세요? 정말로 어디에 숨었는지 모르는 척 집안을 헤매는 거지요. 그러면 고양이는 머리를 배꼼 내밀며 주인의 움직임을 살펴요. 그러다 갑자기 고양이 앞에 딱 나타나는 거지요. 그러면 고양이는 아주 기겁을 하잖아요. 놀라서 한 3미터는 펄쩍 뛰어올라요. 그러고는 낑낑거리며 잘못했다고 빌죠. 제발 때리지 말라고 애원해요. 정말 처절한 소리로 낑낑 울어대요. 그러면 웃음이 나오죠. 진심으로 기뻐서 말이에요. 그 처절한 울음소리를 듣고 싶어서 팬 거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기쁠 수밖에요. 웃음이 나올 수밖에요. 그래서 한바탕 웃어요. 잔인한 웃음이죠, 후훗. 그러면 고양이도 눈치를 채요. 주인이 계속 때릴 거라는 걸 알아채요. 그래서 더 이상 처절하게 울지 않죠. 대신 화를 내요. 크악! 하고 괴상한 소리를 내죠. 아마 자기 딴에는 상대에게 겁을 주려는 모양이에요. 그런데 또 그게 웃겨요. 상대에게 겁을 주려는 놈이 왜 정작 주인의 눈을 피해가면서 크악! 거릴까요? 그러면 상대가 어디 겁을 먹기나 하겠어요? 겁을 먹기는커녕 손으로 고양이 머리를 툭툭 치면서 약을 올려주고 싶어지죠. 더 화를 내보라고 계속 툭툭 치잖아요. 그러면 고양이는 크악! 거리는 것도 멈춰요. 안 통한다는 걸 아는 거죠. 그러고는 다시 처절하게 울어요. 제발 때리지 말아달라고 말이에요. 아, 정말이지, 그럴 거면 애초에 그 크악! 거리는 걸 하지 말던가요. 크악! 거리다 다시 그렇게 처절하게 울면 참 참기 힘들어요. 뭐랄까, 그냥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은 기분이랄까, 뭐 그런 충동에 빠져요. 하지만 진짜로 목을 비틀 수는 없어요. 그럼 고양이가 죽잖아요. 슬픈 일이죠. 더 이상 때릴 수 없게 되니까요. 죽어버린 고양이를 때리는 건 정말 재미없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슬프죠. 대신 죽지 않을 만큼 패주죠. 눈알이 돌아가고 네 발도 축 늘어뜨리고 더 이상 몸부림도 치지 않을 때까지 패주죠. 애가 완전히 맛이 갈 때까지 패주는 거죠. 그러고는 바닥에 휙 내팽개쳐요. 그렇죠? 당신들은 그렇게 하죠? 할아버지한테 지금 그렇게 할 거죠? 쓰다듬다가 결국 그렇게 할 거죠?

할아버지가 늙은 고양이처럼 될 거라는 건 뻔했다. 사람들은 지금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할아버지를 쓰다듬고 있다. 하지만 위로해 주는 게 아니다. 그들은 웃고 있다. 잔인하게 웃고 있다. 조만간 쓰다듬는 손에 힘이 들어갈 것이다.

안 돼요. 나이 든 사람은 때리면 안 됩니다. 젊은 사람들은 때려도 돼요.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젊은 사람들이 잘못을 하면 용서하지 말라고요. 잘못을 하지 않았어도, 잘못을 할 것처럼 보이면 용서하지 말라고요. 하지만 나이 든 사람을 때리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어요. 때려라, 때리지 마라, 그런 말씀 자체를 안 하셨어요. 나이 든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 안 하셨어요. 그러니 그 할아버지를 때리면 안 돼요. 아버지가 아무 말씀 안 하셨기 때문에 때리면 안 돼요. 사람은 함부로 때리면 안 돼요. 때려야 할 사람만 때려야 해요. 젊은 사람들만요. 그렇죠? 그럼, 이제부터 제가 여러분들을 막겠습니다.

영현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이봐, 드디어 자네도 가세할 마음이 생긴 거야? 그럴 줄 알았어. 사람은 다 똑같은 법이거든. 그럼 재미있게 즐겨봐. 저 놈은 그저 늙고 힘없는 고양이일 뿐이니까.”

영현 옆에 앉은 남자는 말을 마치고 나서 영현의 등을 툭 밀려고 했다. 격려 차원에서 그렇게 해주려고 했다. 그래서 영현의 등을 살짝 밀려고 손을 뻗었는데, 분명 영현의 등을 밀었어야 했는데, 바로 옆에 서 있었으니 손이 안 닿았을 리가 없는데, 영현의 등에 안 닿았을 리가 없는데, 남자의 손은 허공을 갈랐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남자는 방금 전까지 영현이 앉아 있던 곳에 픽 쓰러졌다. 손이 허공을 가르면서 중심을 잃은 탓이었다.

왜 중심을 잃었지. 왜 내가 중심을 잃은 거지. 방금 전까지 내 옆에 있던 왜소한 청년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지. 그리고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야! 저 사람들은 왜 쓰러져! 저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건 도대체 뭐야! 사람인가! 혹시, 그 왜소한 청년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저런 건 불가능한 건데! 저런 움직임은 말이 안 되는 거 아닌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빠를 수가 있지! 게다가 그 왜소한 청년이!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아니면 나도 아버지처럼 결국 미친 건가! 그래서 헛것이 보이나!

남자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중얼거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중 몇몇은 의식을 잃고 맥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너무 놀라서 기절한 건 아니었다. 영현이 가볍게 가격을 한 탓이었다. 하지만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가볍게 툭 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충격은 일반인이 견뎌내기에 무리였다. 아마 강속구 투수의 시속 160㎞가 넘는 공에 맞는 것보다 더 큰 충격을 입었을 것이다. 그래서 맞는 순간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물론 자신이 언제 영현한테 명치나 관자놀이 혹은 인중을 맞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말이다.

쓰러진 사람들의 숫자는 열두 명. 시간은 3초가 걸렸다. 한 사람 쓰러뜨리는 데 0.25초 걸린 셈이다. 자신이 언제 영현한테 맞았는지 모르는 게 당연하다. 물론 할아버지 주변에는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그 이상은 없었다.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은 바닥에 쓰러져 있던 할아버지였다. 60대. 그리고 영현이 가격한 사람은 전부 20대였다. 나머지 세대는 가격하지 않았다. 늘 그렇다. 영현은 20대만 쓰러뜨린다. 아버지의 말에 절대 복종하는 영현이니까.

그런 뒤 영현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할아버지를 안고 전철에서 내렸다.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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