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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전사는 뻐꾸기를 구하고

서계수

 

급식실 구석의 긴 테이블 끄트머리. 연아름은 거기 혼자 앉아 밥을 먹고, 나는 그런 연아름을 지켜본다. 잘생긴 얼굴, 좋은 성적, 털털한 성격, 고로 인기 많음. 완벽한 그 애가 혼자 밥을 먹는 건 신기한 일.
그래야만 했다.

연아름은 태어난 그해 2월 우리 부모님에게 입양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 내가 태어났다. 엄마가 나를 임신한 걸 몇 주만 더 빨리 알았다면 연아름을 입양하지 않았을까?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보곤 한다. 만약 잘난 언니가 없었다면, 이렇게 공부도 못 하고 성격도 나쁘고 인기도 없는 나지만 좀 더 살 맛이 나지 않았을까? 연아름을 볼 때마다 속이 비틀리지 않아도 되고 말이다.

겨우 몇 달 먼저 태어난 주제에 연아름은 언니 노릇을 톡톡히 했다. 엄마 없을 땐 네가 엄마야, 라는 엄마의 말도 안 되는 말을 철저히 지키며 나를 못살게 굴었다. 맨발로 현관 바닥을 밟으면 혼내고, 손을 안 씻고 빵을 뜯어 먹으면 화를 내는 것까진 그렇다 치자. 짜증이 난 내가 방에 틀어박혀 있으면 라면 한 냄비를 끓인 상을 들고 와 보란 듯이 먹어대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못 견디고 눈길을 주면 그제야 젓가락 두 쌍 중 하나를 내밀곤 했다. 그래놓고 엄마가 돌아왔을 때 제가 얼마나 동생인 나를 잘 돌봤는지 나불대는 걸 듣고 있으면 라면과 함께 삼켰던 짜증이 도로 올라오곤 했다.

그런 내게 비밀 일기장은 언제나 소중한 감정 배출구였다. 누굴 욕하는지 들키면 곤란하니까 ‘뻐꾸기’라고 썼다. 어릴 때 읽은 과학 앨범에 따르면, 뻐꾸기는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고 간다고 한다. 먼저 부화한 새끼 뻐꾸기를 다른 새는 제 자식이라고 여기곤 누구보다 예뻐하며 키운다. 진짜 자기가 낳은 알은 몰라보고 말이다. 나는 내가 새끼 뻐꾸기에게 밀려난 진짜 새끼 새라고 생각했다.

‘뻐꾸기는 오늘도 잘난 척을 한다.’
‘뻐꾸기가 어른들한테 칭찬을 받았다.’

지금도 그 일기장은 내 서랍 어딘가에 잘 모셔져 있을 테지만, 연아름은 이제 예전의 그 잘난 모습을 다 잃었기에 내 일기장은 업데이트가 되지 않는다. 불과 한 달만에 생긴 변화였다.
아는 애 이야기에 따르면, 새 학년이 시작되고 첫 시험 날, 연아름은 벌떡 일어나 제게 주어진 시험지와 답지를 세로로 주욱 찢고 교실을 나갔다고 한다. 감독관으로 들어온 선생님이 말릴 새도 없이 말이다. 이상한 행동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친구들이 왜 그러냐고 몰려와 묻자, 연아름은 말없이 그 애들을 노려보다 가장 친했던 친구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당연히 이번엔 선생님들이 몰려왔고, 우리 부모님도 호출되었다.

“우리 애가 그런 애가 아닌데요, 뭔가 착각하신 거예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봐요. 그치, 아름아?”

아빠가 울고 엄마가 연아름의 어깨를 흔들며 다그쳤지만 연아름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흔드는 대로 그저 흔들리며, 멍하게 엄마와 아빨 바라볼 뿐이었다. 교무실 밖에서 문틈으로 상황을 엿보던 나로선 기가 질리는 풍경이었다.

다시, 급식을 먹는 지금. 연아름의 주변엔 아무도 없다.
그리고 나는 그게 싫지 않다.

언니가 망가져서 슬퍼요, 흑흑! 하고 울기만 하기엔 나는 너무 정직한 사람이다. 이제 더는 잘나지 않았으니까, 엄마가 나보다 연아름 때문에 한숨을 쉬니까. 아빠가 나보다 연아름 때문에 우니까. 나는 그런 연아름을 불쌍히 여기는 척 코코아나 한잔 타주면 되니까. 그러면 가끔 가슴 한구석이 쿡쿡 찔리는 듯이 아프지만, 개의치 않는다. 연아름 따위 어떻게 되든, 내가 타준 코코아가 식고 그 위로 먼지가 쌓이든 알 바 아니다. 내겐 더 좋은 일들이 생겼으니까. 네 언니 왜 미쳤냐고 내게 물어보러 오는 애들이 늘어났고,
무엇보다도…봐, 지금 서은새가 내 앞에 있잖아.

다른 남자애들보다 키도 크고 눈도 큰 서은새는 사근사근하기로도 유명해서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렇지만 서은새에게 여자애는 딱 하나, 연아름 뿐이었다. 딱할 정도로 연아름을 쫓아다녔는데 결국 거절당했다. 언젠가 너무 궁금해서, 궁금하지 않은 척 연아름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왜 그렇게 밀어내냐고. 그때 걔가 뭐랬나?

“난 대학생 되기 전까진 애인 사귀고 싶지 않아. 공부에 방해되잖아.”

서은새는 눈이 삔 게 틀림없다.
아무튼, 그런 서은새도 연아름이 이상해진 후론 내게 오는 일이 잦아졌다. 지금도 서은새는 내 앞에 앉아 급식을 깨작이고 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게 분명하다. 뭐지, 설마…
서은새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달싹인다.

“있잖아, 사실 나는…”

그러다 머뭇거린다. 나는 조바심이 나서 재촉한다.

“어, 말해.”
“나 말인데,”

서은새는 중얼거린다. 아, 이거 말하기 어렵네. 한숨을 쉬고, 그리고 결연한 얼굴로 말을 이어간다.

“나 사실 서은새가 아니다.”
“…뭐라고?”
“이건 빌린 몸이고, 사실 난 시간 요원이야. 이상해진 네 언니를 원래대로 돌려놓으러 과거인 현재로 왔어.”

나는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행히 나와 서은새 근처엔 아무도 없다. 우리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없는 것이다.

미쳤어.

나는 의자를 드르륵 소리가 나게 식탁 아래로 밀어넣고, 급식판을 대충 치우고 밖으로 나간다. 미쳤어, 미쳤어. 뒤에서 따라붙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와, 나는 전속력으로 달리고 달려 여자 화장실로 도망친다. 서은새가 포기하고 돌아갈 때까지.

 

학교가 끝나면 나는 연아름의 곁에 바짝 붙는다. 연아름이 이상한 짓을 하지 않게끔 잘 지켜보라는 엄마의 명이시다. 엄마의 걱정을 덜어줄 겸, 시키는대로 하고 있다. 겸사겸사 용돈도 좀 더 벌고.

연아름은 내가 따라다니는 걸 알기 때문인지 딱히 수상한 짓을 하지 않는다. 집에 가는 길에 꼭 한 번 편의점에 들려 평소에 즐겨 찾는 음료수를 사 마실뿐이다. 카멘토 음료수라고, ‘우리는 미래로 간다!’라는 표어를 내세운 음료수다. 미래는 아마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직장 뭐 그런 얘기일 것이다. 졸음 방지 효과는 물론이고 다른 음료와 달리 심장이 마구 떨린다든가 하는 부작용이 없어서 모범생들이 자주 찾는 주홍색 음료수다. 나는 마시지 않는다. 제때 잘 자는 건 중요하니까.

그나저나 서은새의 말, 어쩌면 진짜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왜, 연아름같이 완벽한 인간이라면 하늘에서 천사가 떨어져 구하러 온다 한들 이상할 리가 있겠는가?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동안, 편의점에 들어간 연아름이 음료수 냉장고 두 번째 칸을 열더니 손을 뻗어 무언가를 꺼냈다. 초록색 유리병에 든 그것은 카멘토 음료수가 아니라…소주잖아. 미친 거 아냐? 나는 달려가 소주를 뺏고 꽥 소릴 질렀다.

“야, 너 미쳤어?”

소란을 눈치챈 아르바이트 언니가 달려온다. 언니는 내 얼굴도, 연아름의 얼굴도 안다. 어째서인지 우리가 자매라는 것도 안다. 언니의 굳은 안색이 편안해진다.

“아, 난 또. 너희구나?”

그리곤 내 손에 들린 소주와 연아름을 보곤 상황을 파악한다.

“몰랐구나? 어제 밤에 음료수랑 주류 자리를 싹 바꾸었어. 카멘토 음료수 있던 자리에 소주가 들어갔지. 아무리 그래도, 아름이 넌 음료수 포장도 안 보고 꺼내 드니?”

나는 멍청히 서서 아르바이트 언니가 내 손에서 소주를 받아가 원래 자리에 두는 것을 지켜본다. 카멘토 음료를 계산한 연아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편의점을 쓱 나섰고, 나는 저걸 따라갈지 말지 고민 중이었다. 집에 함께 도착하지 않으면 엄마한테 혼날 것이다.
그때 누군가 내 가방을 툭 쳤다. 돌아보니 잘생기고 키 큰 남자애, 서은새가 근심 어린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

“잠깐 얘기 괜찮아?”

나는 입술을 깨물며 서은새를 노려보다가 연아름을 쫓아 발걸음을 옮겼다.
서은새는 아파트 정문까지 나를 따라왔다.

“나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언니 데려다주고 올래?”

마치 우리 엄마가 내게 무슨 일을 시킨 건지 훤히 다 아는 말투에, 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애가 제안한 대로 연아름을 들여보내고 아파트 정문으로 돌아왔다. 이래야 할 필요가 없는데, 라고 내심 저항해봤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서은새의 얼굴과 목소리에 약했다.
나는 부러 불퉁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서은새가 아니라는 건 무슨 말이야?”

서은새가 편마암 정원석에 앉았다.

“말 그대로야. 나는 미래에서 온 사람이야. 아, 근데 온 방식은 네가 생각하는 그거랑은 좀 달라. 터미네이터라는 고전 영화 봤어?”

나는 고개를 애매하게 끄덕였다. 유튜브에서 구독한 영화 리뷰 채널에서 스치듯이 본 것 같은데? 분명 알몸의 사람이 하늘에서 떨어졌던가…
서은새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그렇게 안 왔거든? 이 ‘몸’은 서은새의 것이 맞아.”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계속 설명해 봐.”
서은새, 아니 서은새가 아니지. 그럼 나는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남자애를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서은새가 내 표정을 보곤 이해한다는 듯이 부드러운 낯을 했다.

“나는 시간 요원이야. 그게 내가 유일하게 남에게 밝혀도 되는 내 신상 정보이고. 예전에 말했듯이 나는 미래에서 왔어. 단, 정신만 날아온 거야.”

내가 물었다.

“그럼 넌, 서은새에게 씐 귀신같은 거야? 미래에서 온 귀신?”

시간 요원이 머리를 긁적였다.

“귀신은 아니지. 난 미래에서 죽지 않았어. 여전히 살아있다고. 단, 내 몸은 지금 어느 연구 단지에 누워 있지.”
“잠깐, 그럼 원래의 서은새는 어떻게 된 건데?”

시간 요원이 눈을 깜박이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서은새는 지금 잠들어 있어.”

습기를 머금은 여름 바람이 서은새의 모습을 한 시간 요원의 머리카락을 헤집고 달아났다. 아직 굵진 않지만 낮은 목소리가 설명을 계속했다.

“아침이 되어 서은새가 눈을 뜨는 모습을 생각해 봐. 눈을 떴지만 깨어난 것은 아니야. 낮에 서은새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나니까. 그동안 서은새는 꿈을 꾸는 거야. 한낮에 꾸는 꿈. 우리는 백일몽이라고 부르지.”

나는 시간 요원이 말하는 ‘우리’가 누구일지 신경이 쓰였지만 일단 말을 자르지는 않았다.

“서은새의 입장에서 지금 내 활동은 몽유병 증상과 비슷해. 잠들어 있지만 움직이는 거야. 주도권은 나에게 있는 거지.”
“말도 안 돼. 그럼 서은새한테 완전 민폐 아냐?”

시간 요원이 픽 웃었다.

“당연하지. 그래서 미래의 본인에게 동의를 구했어. 부담이 가지 않는 한에서 당신의 육체를 빌릴 수 있겠냐고. 본인은 흔쾌히 허락하던데?”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냥 타임머신으로 오지 그랬냐?”

귀신 빙의도 아니고. 내가 중얼거리자 시간 요원의 낯이 진지해졌다.

“타임머신이 있긴 한데…굳이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쓴 건, 미래엔 시간여행이 막혀 있기 때문이야. 나비 효과나 타임 패러독스 때문이지. 예를 들어, 네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뭘 할 것 같아?”

나는 즉시 대꾸했다.

“복권 사야지.”
“소박하네. 고작 복권이라니.”
“고작, 복권이라고? 야, 복권이 어때서? 로또 1등 당첨을 무시하냐?”

시간 요원이 손사래를 쳤다.

“비웃은 거 아니야. 그래, 복권 정도면 괜찮겠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과거로 날아가 기업이나 국가를 세운다면? 그렇게 해서 그 누군가가 원래 살고 있던 시간대인 미래, 즉 그의 현재에 영향을 미치려 한다면? 그럼 어떨 것 같아?”

나는 상상하려 애썼지만 잘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 요원의 말투로 봤을 때 그건 아마 좋지 못한 일임엔 틀림없었다.

“그래서 시간여행은 금지된 거야. 하지만 기술이 더 발전하자 법의 사각지대를 교묘히 피해 타임 테러리스트들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지. 그들이 건드린 건 ‘꿈의 영역’이었어. 미래인이 과거인의 정신을 지배해 그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만드는 거야. 꼭두각시로 부리는 거지. 이 시대의 컴퓨터 용어로 묘사하자면, ‘해킹’에 가깝겠네.”
“잠깐, 그게 어떻게 가능해?”
“누군가가 네 꿈에 주기적으로 간섭해 이미지나 이야기를 삽입한다고 생각해 봐. 심지어 꿈은 무의식 뿐 아니라 자각할 수 있는 의식에도 영향을 미치잖아? 고양이나 토끼가 죽는 슬픈 꿈을 꾼 사람들은 깨어나서도 그 꿈을 기억하며 울곤 하잖아. 만약 그 꿈이 온전히 네 머릿속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면? 누군가가 네게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관해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인상’을 주입할 수 있다면?”

시간 요원은 목이 타는지 가방에서 물을 꺼내 들이켰다.

“그게 타임 테러리스트들이 하는 짓이고, 네 언니가 당한 일이 그거야.”
“근데 왜 하필 우리 언니가 당한 거야?”
“아까 터미네이터 얘길 했잖아. 그 영화 내용 알고 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단 한 번도 처음부터 끝까진 본 적이 없었다.

“과거에 살고 있으나 훗날 저항군 리더가 될 인물을 구하러 미래에서 전사가 날아오지. 내가 그 전사고, 네 언니가…”

내가 중얼거렸다.

“저항군 리더라 이거지.”

갑자기 힘이 쭉 빠졌다. 그런 거였냐.
그래, 안 그러던 애가 왜 저러나 했더니, 세상에. 미래에서 전사가 날아올 정도로 거창한 인물이 될 예정이라 그랬구나.

“타임 테러리스트들은 교묘한 방식으로 네 언니의 성적과 평판을 망쳐놓을 셈이야. 죽일 필요도 없지. 이런 빡빡한 사회에선 한 번의 추락만으로도 재기 불능까지 몰릴 수 있으니까. 그런데…”

시간 요원이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 언니를 구할 좋은 기회인데, 표정이 왜 그래?”
“…내가 뭐? 당연히 기쁘지, 나도. 내가 어떻게 도우면 되는데?”

목소리 관리 안 되네. 서은새, 아니 그 안에 들어있는 사람이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
그러나 시간 요원은 그저 한숨을 쉬곤 말을 이어갔다.

“네 도움이 필요하거든, 그러니까…”

따뜻하고 큼지막한 손이 내 손을 감싸 쥐었다. 시간 요원이 몹시 민망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네 친구가 되어야 하는데…괜찮아?”

나는 그만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뭐, 왜?”

시간 요원이 난감하다는 듯 손을 뺐다.

“싫어? 그래도 그 방법이 제일 손쉽거든. 너희 집에 내가 들어가야 하는데, 역시 친구가 아니면 좀 힘들지 않겠어?”
“…인걸로 해.”
“어? 잘 못 들었어.”
“친구 말고, ‘남자친구’로 해.”
“…왜?”
“나 친구 없는 거 우리 엄마도 알아. 그런데 갑자기 친구라고 하면서 널 데려오면 믿겠어? 남자친구쯤 되어야 그런가보다, 할걸.”

나는 술술 대답했다. 말은 바른 말이었다. 조금 켕기긴 했지만. 시간 요원이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해. 내가 네 남자친구인 걸로.”

 

시간 요원과 함께 들어온 집은 낯설었다. 공기라던가,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나는 침착해지려 애썼다. 이건 어디까지나 연아름을 구하기 위해서 뭉친 거다. 게다가 이 인간은 진짜 서은새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자 머리가 차차 식었다. 그래…전혀 흥분할 일 없잖아.

낮이라 엄마와 아빠 모두 일 때문에 집을 비우고 있었다.
시간 요원이 조용히 신발을 벗었다. 나는 양말 신은 발로 앞서서 연아름의 방에 다가가, 시간 요원에게 손짓하고 닫힌 방문을 두드렸다. 인기척이 없었다. 그러나 연아름은 여기 있을 것이다.

나는 문을 조금 열고 문틈으로 엿봤다. 과연, 연아름은 책상에 반듯이 앉아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올 뻔했다. 문제집을 풀면 뭐 하나 싶은 상황에도 문제집을 풀고 있는 게,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모르겠으나 참 연아름다웠다.
책상에는 카멘토 음료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음료수를 갖고 이상한 일이 있었지. 나는 문틈에서 시선을 돌리고 시간 요원에게 아까 있던 일을 짧게 설명했다.
시간 요원이 설명했다.

“카멘토 음료엔 고카페인과 타우린 외에도 과거인의 렘수면, 즉 꿈을 미래인이 미래에서 잘 포착할 수 있게 해주는 성분이 담겨있어. 더 위로 올라가고 싶은 사람들, 즉 성실하고 영민한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음료수지.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카멘토 음료수와 연계된 타임 테러리스트들의 덫은 연아름같이 똑똑한 사람들이 더 잘 걸리는 함정이야.”

나는 의아해졌다.

“사람들이라고? 연아름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타임 테러리스트들의 타겟이겠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종당하고 있단 소리야?”
“그렇긴 해. 그래서 일단 첫 번째로 연아름을 구하려는 거지.”
“잠깐, 또 이상한 게 있잖아. 현재에 존재하는 카멘토 음료수가 어떻게 미래에 있는 타임 테러리스트들을 도와줄 수가 있는 거지?”

시간 요원이 침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거야, 카멘토 음료수는 처음부터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물건이니까.”

나는 입을 벌리고 한동안 멍해져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지금 당장 연아름 방에 들어가서 저 음료수부터 뺏어야 하는 거야?”
“아니. 그러면 안 돼. 음료수를 끊는 순간 연아름과 타임 테러리스트들의 연결도 끊어지고 말아. 그러면 우리 수사에도 차질이 생기는 건 물론이고, 연아름의 정신 건강에도 좋지 않아. 컴퓨터를 갑자기 끄다 보면 망가지는 것과 유사해.”

내가 불퉁스레 중얼거렸다.

“한 번 강제종료한 것 갖고 망가지는 컴퓨터가 어딨어.”

시간 요원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 정말 네 언니를 안 좋아하는구나, 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지만, 나는 따질 마음이 나지 않았다. 사실이었으니까.
나는 모른 척 물었다.

“어떻게 해야 연아름을 원래대로 돌릴 수 있는 건데?”
“연아름을 조종 중인 타임 테러리스트와 연아름의 연결을 끊어야 해.”
“그냥 미래에서 타임 테러리스트들을 해치우면 되는 거 아냐?”
“말했잖아. 연결을 강제로 끊으면 위험하다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시간 요원이 문에서 물러나며 대답했다.

“타임 테러리스트 쪽에서 연결을 중지하거나, 연아름 쪽에서 이게 꿈이라는 걸, 자신이 조종당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거나. 전자는 불가능하니 우리는 후자를 택할 수밖에 없어.”

나는 엄마가 어깨를 잡고 흔들어도 요지부동에 멍한 얼굴을 하던 연아름을 떠올렸다.

“어떻게 해야 하는데?”
“지금 연아름에겐 모든 상황이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로 인식되고 있을 거야. 현실을 꿈, 그러니까 무대 위의 연극처럼 인식하는 거지. 그래서 우리에겐 배우가 필요한 거야.”

시간 요원이 내 쪽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무대 위에서 관객석의 연아름에게 소리를 지를, 제4의 벽을 깰 배우가 말이지. 그리고 그게 너야.”
“왜 하필 나인 건데? 연아름에게는 나 말고도 걱정해주는 사람이 한 보따리쯤 될걸?”
“너여야만 했어. 넌 아까 네게 친구가 없다고 했지? 어떻게 보면 연아름도 마찬가지였거든. 우리가 조사해본 결과, 연아름이 자기와 동등한 위치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여긴 사람이 바로 너야.”

나는 멍해졌다.

“연아름한테?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시간 요원은 그날 연아름과 내 방을 철저히 조사하고 돌아갔다. 무대를 파악하는 행동이라나. 그리곤 내게 지령을 내렸다. 가능한 연아름을 귀찮게 굴라고 말이다.

“내가 과거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무한하지 않아. 지금부터 한 18시간쯤 남았다고 보면 돼. 그 안에 연아름과 타임 테러리스트의 연결 고리를 찾아내야 해. 분명 타임 테러리스트들은 연아름의 꿈결 중심부에서 찾아냈을 거야. 자기들이 이용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말이야.”

나는 라면을 끓이며 연아름의 표정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오늘 서울에서 만나 저녁을 먹고 들어오겠다고 했으니, 라면이 우리 둘의 조촐한 저녁 식사였다.
나는 냄비에서 라면을 반쯤 건져 연아름의 그릇에 담았다.

“먹어.”
“……”
“이제 말도 못 하냐? 바보야.”
“……”

나는 라면을 후루룩 삼켰다.

“너 진짜 날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해? 아니, 지금은 아니더라도 미래에 말이야.”

연아름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라면이 탱탱 불어가는 것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왠지 가슴이 답답했다. 그런 연아름과 라면 그릇을 보고 있자니, 그리고…
연아름 앞에 젓가락 한 쌍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걸 보고 있으려니.
그러고 보니, 예전의 연아름이 내 방에 곧잘 들고 오던 라면 한 상엔 젓가락이 항상 두 쌍 놓여있었다. 한 쌍은 연아름 본인의 것이고, 다른 한 쌍은…
언제나 내 거였다.
시간 요원이 내게 해준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연아름은 널 아주 좋아해.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앞으로도.”

지금, 지금이라고.
나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연아름이 눈치도 못 챌 걸 알면서도.
저녁 식사 후, 나는 편의점에 들러 카멘토 음료수를 한 병 샀다.
이걸 마시면 타임 테러리스트들의 관측기에 들어간단 말이지.
나는 시간 요원에게 낮에 받은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내가 카멘토 음료수를 마시면, 나도 조종하려 들려나?]

아니, 난 미래에 그런 거창한 인물 같은 게 될 리 없으니까. 아니겠지.

[가능성이 있어. 넌 연아름에게 중요한 사람이니까, 연아름을 더 확실히 망쳐놓기 위해 널 이용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왜? 설마 마시려고? 야, 무모한 짓은…]

나는 음료수를 마시고 침대에 누웠다. 잠은 잘 왔다, 여느 때처럼.

내가 조종당하고 있나? 아니면 그냥 꿈을 꾸는 걸까? 알 수가 없었다.
꿈의 배경은 현실과 같았다. 나는 내가 잠든 방에서 일어나 걸었다. 너무나 세밀한 배경, 벽지의 감촉까지 느껴지는 통에 꿈속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조차 힘들었다. 머리도 아주 맑은 것 같았다. 연아름은 이런 상태인 걸까? 자기가 현실이라고 믿는 꿈속을 걷고 있는 것일까?

그때, 어디선가 뻐꾸기 소리가 들렸다.
지금은 밤이고, 여기는 아파트 고층이다. 뻐꾸기 소리 따위 들릴 리가 없지 않나.

현관문을 열고 나와 계단으로 내려갔다. 자동 센서에 반응해 불이 켜져야 할 계단실은 깜깜했다. 나는 달빛에 의지해 걸음을 딛엇다.
아파트 단지는 사람 하나 없이 조용하고, 감나무 빈 가지에 새 하나가 앉아 있었다. 뻐꾸기였다.
뻐꾸기가 중얼거렸다.

“질투하는 상대를 망가뜨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잖아. 네 언니가 추락하는 것을 구경만 하라고.”

내가 물었다.

“너야? 연아름을 조종하는 게.”

뻐꾸기가 다시 중얼거렸다.

“내가 뻐꾸기야? 내가 뻐꾸기야? 왜? 나는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 몰랐어.”

그리고 뻐꾸기는 날아올랐다.
나는 뻐꾸기를 쫓아 계단을 다시 달려 올라갔다. 숨이 차지 않고, 땀도 나지 않았다. 그저 조급하고 절박할 뿐이었다. 올라가면 무언가 불길한 것, 모든 것의 근원을 알게 될 것이란 확신에.
내 방, 내 책상 위엔 꽁꽁 감춰져 있어야 할 비밀 일기장이 올려져 있었다. 자물쇠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일기장은 펼쳐져 있다. 한 페이지가 구깃구깃하다. 나는 그 페이지를 읽었다.

‘뻐꾸기가 사라졌으면 좋겠다.’

아하, 연아름. 내가 감춰둔 미움, 그걸 읽었구나.
불쑥 솟구친 건 처음엔 수치심, 그다음은 원망이었다.
그런데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감정들이 밀려들었다. 찡한 무언가로 가슴이 벅찼다. 나는 네가 내 미움을 모르길 바랐다. 알면, 알면 네가 이렇게 망가질 거란 걸 예감했기 때문이었을까?
내 미움으로 망가진 연아름이 안쓰러웠다. 그리고, 솔직하게. 다시 정직하게 말하자면,
조금은 기쁘다. 네가 망가질 정도로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서.

연아름은 자기 방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그런 연아름을 끌어안았다. 품속의 연아름은 언제 훤칠해 보였나 싶게 작았다.
뻐꾸기가 내 머리에 달려들었다. 머리카락을 채고, 부리로 찍어댔다. 거칠게 날갯짓을 해댔다. 뻐꾸기 발톱이 내 머리를 긁어댔다. 그렇지만 놓지 않았다. 다시 잃을 수는 없었다.
뻐꾸기가 악을 썼다. 연아름의 목소리와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번갈아 흘러나와 귓전을 때렸다.

“나는 뻐꾸기가 아니야, 아니라고!”
“왜 이제 와서? 넌 그 앨 싫어하잖아. 망가지는 것을 기뻐했지. 안 그래?”

나는 연아름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준다. 맞아, 나는 그랬어. 그러니까,

“미안해.”

따뜻한 손이 내 손등 위에 포개어지는 것을 끝으로,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깨어나 보니 연아름이 나를 한심하단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꼬대 한 번 기가 막히게 하네.”

그리고 몇 시간 동안, 나는 현실에서 집요하게 용서를 빌고, 애걸한 끝에 결국 연아름과 화해할 수 있었다. 연아름은 계속 나를 흘겨보고 있다. 그 애의 지나간 인간관계와 시험 성적은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아주 늦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거에서의 체류가 끝나기 5분 전, 서은새, 아니 시간 요원과 작별할 때가 되었다.
아파트 벤치에 앉은 시간 요원이 툴툴댔다.

“무모했어. 타임 테러리스트들이 역으로 너를 이용할 수도 있었다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저항군의 리더? 구하는 일인데 이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 하지 않겠냐.”

시간 요원이 서은새의 얼굴로 웃었다.

“아직도 그걸로 꽁하냐? 하여간, 비뚤어져가지고.”

내가 물었다.

“네 이름, 알려줄 수는 없는 거지?”

시간 요원이 끄덕였다.

“그럼 이건 대답해줄 수 있어?”
“질문에 따라 다르지. 뭔데?”

나는 망설이다 내뱉었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지.”

바람이 또다시 머리카락을 헤집고 달아났지만, 시간 요원은 미동 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러더니 피식, 웃었다. 그 미소가 어쩐지 익숙했다. 마치…거울이라도 보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 될 필요 있어? 미래에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져서 네가 대단한 사람이 될 거란 생각하지 말라고. 왜냐하면, 너는 이미…”

시간 요원이 나를 끌어안았다. 다정하게 안아주는 팔의 힘에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 설마 너-
그리고 서은새가 내 품에서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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