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박도은 겨울, 내 사랑

2022.09.04 18:1009.04

겨울, 내 사랑

박도은

 

이 이야기는 한 여자와 내가 우연히 만나 인연을 맺으며 나눈 사랑을 다룬 것이다. 황당무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이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날을 거슬러 올라가보자면 이야기하는 지금부터 손가락을 몇 번이고 꼽아야 할 것 같다.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사람이 아니다. 살을 에는 추위를 세상에 가져오는 일명 겨울의 요정이다. 사실 겨울의 요정이라는 명칭만 있을 뿐 누군가 불러주는 이름도 없다. 혹자는 나를 더러 낭만적이며 포근하다고 하지만 말도 안 된다. 나는 무자비하고 냉정하다. 그리고 내가 나를 봤을 때는 조금은 무섭게 생긴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세상에 눈을 내리고 얼음을 만들며 바람을 불게하고 대지로부터 태양의 기운을 앗아가는 일을 한다. 
이렇게 돌아다니며 일을 하다보면 불가피하게 다양한 사람들을 목격하게 된다. 내가 지배하는 겨울의 한가운데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기 때문에 추워도 더없이 행복한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해 하염없이 슬픈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내가 만났던 그녀도 그랬다. 


어느 시점에 한 도시를 황폐화시킨 전쟁이 거짓말처럼 지나갔고, 나는 도시의 국군병원이 있는 자리에 몇 번 방문했었다. 그 곳 나무들의 잔가지에 걸린 잎새들을 다 떨어뜨리고 싶었고, 땅을 꽁꽁 얼게 하고 싶었고, 병원의 유리창이 인간의 여린 체온과 맞닿아져 하얗게 김이 서리는 것을 보고 싶었다. 아무래도 전쟁이 끝나고 평화를 찾은 도시에 괜한 심술을 부리고 싶었던 것 같다. 전장에서 다친 군인들이 잔뜩 누워있는 국군병원 건물을 향해 입김을 세게 불어보려고 입술을 오므렸다. 그 순간 하늘에서는 내가 만들어낸 하얗고 시린 눈송이가 땅 아래로 하나 둘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입을 잔뜩 오므렸다가 찬바람을 불어내지 않고 입을 다시 평평하게 만든 뒤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세상이 예뻐보이지?’ 


나도 모르게 눈송이가 떨어지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았다. 그러자 추운 겨울에도 숨을 꼭 쥐고 살아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안에서 상흔과 싸우며 작은 생명의 불꽃을 태우고 있는 사람들, 무자비한 추위를 온 몸으로 이겨내고 있는 야생동물들, 들판에 핀 이름 모를 잡초들, 잎을 빼앗겨 앙상한 몸만 남았지만 기개를 꺾지 않는 나무들……. 새삼스럽게 이들이 대견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드물게 감상에 젖어 매서운 추위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도 잊은 채 눈과 세상이 어우러지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아름다움이 빛을 내는 곳마다 작품을 감상하듯 둘러보던 나의 시선은 어느 지점에서 유의미하게 길게 머물렀다. 


팔이 하나 없는 여자였다. 국군병원 건물 앞으로 나와 하나 밖에 없는 팔을 앞으로 내밀어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손에 소복소복 쌓이게 하고 있었다. 하늘을 보며 뭐라고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귀를 기울여봤는데 다가가니 이내 말을 멈추고 말았다. 아마 “가족이 보고 싶어요.”라고 했던 것 같다. 그녀는 깡마른 몸에 실크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다. 국군병원에서 입는 병원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번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치료를 받는 중인 것 같았다. 왜 그녀에게 시선이 머물렀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겨울의 상징으로 만들어 낸 눈을 하나뿐인 손으로 고이 담고 있는 모습이 예뻐보였던걸까, 아니면 그녀의 모습이 측은해보였던걸까. 그녀가 하늘을 향해 혼잣말로 하는 이야기를 왠지 또 듣고 싶었다.
그 날 이후에도 국군병원이 있는 도시에 눈을 내릴 때면 그녀는 병원복 차림을 한 채로 푸른색 숄을 걸치고 항상 국군병원 건물 앞으로 나왔다. 눈을 맞고 싶어서인 것 같았다. 머리 위로 눈을 맞기도 하고 입을 벌려 눈을 먹기도 했다. 사람의 표현을 빌리자면 참 ‘소녀’ 같았다. 나는 그런 그녀가 보고 싶어서 그녀가 생각나는 날이면 국군병원이 있는 곳에 눈을 내렸다. 그러면 아이처럼 상기된 표정으로 걸어나오는 그녀를 먼발치서 볼 수 있었다. 흩어지는 눈발을 보며 은은하게 짓는 미소가 구슬퍼보이기도 하고, 어쩌면 편안해보이기도 해서 보는 나의 마음을 묘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나 같은 요정이 인간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금기에 가까운 일이었는데 그 땐 왜 그랬을까? 그냥 그러고 싶었다. 항상 혼자 나와서 눈을 보고 좋아하는 그녀와 내가 좋아하는 겨울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라도 해보고 싶었던 걸까? 지금에 와서 생각해봐도 나는 그 때 내가 왜 그녀에게 말을 걸기로 마음먹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녀의 행동에 ‘이끌려서’ 그렇다고 해두자.


나는 여느 날과 같이 눈을 내리게 한 후 그녀를 밖으로 불러냈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눈이 오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빛나는 눈으로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내리는 눈을 바라봤다. 그 모습은 어쩐지 투명한 얼음을 바라보는 듯 아름다웠다. 그 순간 나는 마치 은은한 향기가 나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참지 못하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나는 그녀의 앞에서 나의 모습을 숨기는 마법을 어떤 준비도 없이 풀어버렸다. 그래서 심지어 바닥에 땅을 디딘 것도 아닌 허공에 떠 있는 채로 그렇게 그녀와 첫 눈맞춤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나와 처음 눈맞춤을 하는 상황에서도 놀라는 기색이 하나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의 말로는 이렇게 예쁜 눈을 만들어 내는 요정님이 분명 있을 줄 알았다고 했다. 내가 만드는 눈을 예쁘다고 해줘서 쑥스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 나는 조금 무섭게 생긴 편이다. 그녀가 봤을 때도 분명 무섭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내 모습이 무섭지 않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머뭇거리며 그렇다고 했다. 하지만 요정님과 대화를 하는 것이 영광이니 무서움은 곧 가실 것이라고 하나뿐인 손으로 손사레쳤다. 


몇 번을 만나러 오는 동안 나는 그녀와 많은 대화를 했다. 그녀는 전쟁에서 가족을 모두 잃은 가엾은 처지였다. 세상에 자기 하나 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와 같은 요정과 이야기하는 것이 반갑기도 하다고 했다. 외롭고 심심했다고 했다. 나는 그녀의 표정에서 비쳐졌던 비장함과 처연함의 빛이 왜 그녀에게 줄곧 머물러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전쟁에서 왼쪽 팔을 잃었고 신체의 내부도 많이 녹슬어 병원에서 시한부를 받은 상태라고 했다. 아마 이번 겨울이 나와 대화하는 마지막 겨울이 될 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너무나도 슬펐다. 매해 겨울마다 그녀를 보러 와 그녀와 대화하고 싶었다. 순수하고 아름답고 외로운 그녀. 내가 그녀에게 생명을 부여할 수 있다면 언제까지나 그러고 싶었다. 
그녀와 나는 그녀의 마지막 겨울을 빛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선사했고 – 겨울의 요정이라 꽃이나 푸른 잎사귀를 선물할 수 없어서 몹시 아쉬웠다. 그녀는 그런 것들을 좋아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 그녀는 내게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주거나 사람들 간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국군병원을 벗어나는 일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걷고, 웃고, 장난치고, 가끔 다투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허공을 나는 것을 부러워하며 나와 함께 하늘을 날고 싶다던 그녀였지만 그것은 해줄 수가 없어 유감이었다. 공교롭게도 가냘픈 그녀는 내게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다. 사람은 정말이지 무겁다.
나는 연민의 감정이 없는 요정인 줄 알았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는 그녀를 점차 사랑하게 되면서도 참을 수 없는 연민의 감정이 나를 휩싸는 것을 몇 번이고 경험했다. 사람의 영혼을 흩어버리는 전쟁을 경험하고, 그 속에서 팔을 잃어버리고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에도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시각과 강한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는지 놀라웠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미치도록 가여웠다. 차라리 나와 같은 요정이라면 외롭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은 세상에서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을텐데. 슬픈 눈으로 그런 생각을 할 때면 항상 그녀는 나를 안아줬다. 나는 체온이 없어서 말 그대로 얼음장처럼 차가운 몸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나에게 닿을 때마다 움찔 놀라면서도 나를 포근히 안아줬다. 오히려 팔이 하나라 더 꼭 안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면 나는 나의 체온도 잊은 채 내 두 팔로 그녀의 작고 여린 몸을 감싸 안아주었다. 그녀는 차갑지만 분명 따뜻하다며 내 품에서 떠나려 하지 않았다.


나의 우발적인 등장으로 그녀와 매일 같은 만남이 시작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다른 요정들이 내가 우연히 사람과 만나 제집 드나들 듯 드나들며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기 시작했다. 분명 요정이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은 금기에 가까운 일이다. ‘금기이다.’ 라고 딱 잘라 말하지 않는 이유는 요정이 사람의 눈에 보여도 되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 때는 바로 사람이 죽음과 가까워진 순간이다. 그녀는 시한부라고는 하지만 죽음에 가까운 상태는 아니니 사실 원칙상 나랑 마주하면 안됐다. 그저 우리의 만남은 나의 욕망으로 인해 일어난 일인 것이다. 
요정들은 내가 금기를 어겼다며 명예로운 겨울의 요정 자리를 박탈당하고 싶냐고 따지고 들었다. 당연히 나는 겨울의 요정이라는 자리가 만족스러웠고 앞으로도 계속 이 일을 수행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와 그녀의 만남을 알게 된 다른 요정들이 요정의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면 나는 어쩌면 겨울의 요정이라는 요직을 박탈당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른 요정들도 내가 겨울의 요정으로써 얼마나 열심히 일해왔고 잘 해왔는지 알기 때문에 나를 밀어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다만 나를 걱정하기에 화를 내고 다그쳤던 것이다.


사실 요정이 사람과 만남을 갖다가 요정왕에게 벌을 받은 일은 은근히 비일비재했다. 하나씩 열거하자면 지구를 몇바퀴 돌고도 남을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나의 친구 음악의 요정의 일이다. 음악의 요정은 사람들의 가창이나 연주를 듣는 것을 정말이지 좋아했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가의 공연이 있을 때면 음악이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관객으로써 함께 했다. 그런 음악의 요정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는 한 재즈 피아니스트였는데 음악의 요정은 이 음악가가 악보도 없이 즉흥적으로 곡을 연주하는 것이 신기하고 아름다워 보였다고 했다. 음악의 요정의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던지 그 피아니스트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금방 자신의 공연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음악의 요정은 그 피아니스트가 처음 음악을 시작할 때부터 봐왔기 때문에 괄목할만한 성장이 대견하고 뿌듯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점점 그 피아니스트에게 더 많은 애정을 가지고 시간을 할애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은 이례적으로 음악의 요정이 그 피아니스트의 공연 전 대기실을 보게 되었다. 너무 좋아해서 공연 전에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곳에서 음악의 요정은 뿌듯함과 대견함이 한번에 산산조각 나는 장면을 보고야 말았다. 다름 아닌 금지된 약을 하고 있는 피아니스트의 모습이었다. 


우리 요정들은 사람이 왜 금지된 약을 하는지 잘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정신과 육신이 망가지는 일을 왜 서슴없이 할까. 하지만 음악의 요정은 그 장면을 보면서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고 했다. 약에 취해 자신의 것이 아닌 힘을 빌려서라도 완벽한 무대를 하고 싶은 욕망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단다. 하지만 음악의 요정은 자신의 사랑하는 피아니스트가 약에 중독되어 생명이 단축되고 음악이 망가지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금기를 깨고 피아니스트 앞에 나타나고야 만 것이다.
음악의 요정은 피아니스트에게 맑은 정신에서 우러나는 순수한 음악을 하라고 말했다. 당신의 음악이 망가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도 말했다. 눈앞에 아른거리며 나타난 음악의 요정을 발견한 피아니스트는 꿈인지 생시인지 의심하는 일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미 약에 취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피아니스트는 음악의 요정이 당연히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음악의 요정은 무섭게 생긴 나와는 달리 보석과 같이 빛나고 아름답다. 피아니스트는 몽롱한 가운데 눈앞의 꿈처럼 아름다운 존재를 보고는 어떤 천재적인 음악적 영감을 떠올려냈다. 그렇게 약에 취한 채로 음악의 요정을 만난 피아니스트는 그 자리에서 역대 최고의 공연을 만들어냈다.


음악의 요정은 우려하는 마음에서 피아니스트 앞에 나타났건만, 피아니스트에게는 다르게 이해가 되었던 것 같다. 이후에도 피아니스트는 금지된 약을 할 때면 음악의 요정을 찾았다. 아니, 음악의 요정을 만나기 위해 금지된 약을 했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음악의 요정은 처음에는 피아니스트가 진심으로 걱정이 되어서, 사랑하는 음악이 망가질까봐 나타났다. 하지만 어쩐지 점점 균형감을 잃어가는 대신 자유분방함이 생겨 세상 어디에도 없는 흥겨운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는 피아니스트를 보며 음악의 요정도 어느새 걱정 대신 피아니스트와의 만남 자체를 즐기기 시작했다. 피아니스트의 명성은 늘어만 갔고 공연도 셀 수 없이 많았다. 그 공연 수만큼 피아니스트는 약을 했고 음악의 요정을 몇 번이고 만났다. 피아니스트는 어느 순간 약이 아닌 요정에게 취해 환상적인 음악을 만들어갔다.


하지만 지지 않는 붉은 꽃이 어디 있으랴. 피아니스트는 결국 약물 중독으로 돌연사했다. 대규모 공연을 앞둔 대기실에서였다. 음악의 요정이 비극적인 피아니스트의 끝을 함께 했다. 음악의 요정은 아무래도 환상적인 음악만큼 그 피아니스트를 사랑했었던 것 같다. 피아니스트가 죽자 세상을 돌아다니지도 않고, 그 좋아하던 음악도 놓고 집에 틀어박혀 피아니스트를 기리며 눈물바다를 만들었다.
이렇게만 끝나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렇지 못했다. 피아니스트의 명성이 너무 높았던 탓인지 요정왕이 피아니스트의 죽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에 음악의 요정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도 곧 밝혀졌다. 요정왕은 대노했다. 요정이 죽음이 가깝지 않은 사람을 만나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이 우리 요정 세상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집에서 눈물만 흘리고 있던 음악의 요정은 요정왕 앞에 잡혀왔다. 요정왕이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호통을 치자 음악의 요정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지금까지 있어왔던 이야기를 모두 읊었다. 요정왕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음악의 요정은 벌을 받았다. 음악의 요정 자리를 박탈당하고 다시는 음악을 들을 수 없도록 귀를 멀게 하는 형벌이었다. 음악을 정말이지 사랑하는 음악의 요정에게 있어서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처사였을 것이다. 하지만 벌을 받는 순간에도 피아니스트가 죽었을 때만큼의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음악의 요정에게 그 피아니스트는 어떤 존재였던 걸까. 현재 음악의 요정은 다른 요정이 되어 이제는 들을 수 없는 악보만 읽으며 살고 있다.


당시 나는 나의 친구 음악의 요정이 왜 사람을 만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국군병원 앞에서 만난 그녀에게 나를 내보이고 있고 그녀와 시간을 보내는 것을 진심으로 행복하게 생각하고 있다. 다른 요정들은 이전의 나처럼 지금의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모두들 음악의 요정과 다른 요정들의 일을 들먹이며 잔뜩 우려하고 있다.
그러던 중 어떤 요정이 나를 위한답시고 내게 슬픔을 안겨올 법한 이야기를 하고야 말았다. 내가 금기를 어기지 않는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생명을 예정보다 빨리 빼앗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죽음 앞에 선 사람은 요정을 봐도 괜찮다는 조건이 작게나마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절대 안 될 말이라고 막아섰지만 묘안을 내 놓은 요정은 주장을 철회할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다른 요정들도 이 요정의 주장에 동조를 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사람의 생명을 거두어가는 일을 하는 요정이 이 이야기를 들었을까 퍽 두려웠다. 나는 안그래도 짧은 그녀의 생명을 내 손으로 줄이는 일 만큼은 결코 하고 싶지 않았다.


말 많은 요정들을 뒤로 하고 터덜터덜 그녀에게 돌아왔다. 그녀는 건물 뒷마당에서 아직 한포기도 자라지 않은 새싹을 벌써 기다리는 듯 화단에 쪼그려 앉아 흙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재빨리 돌아봤다. 그리고 내게 해사하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보였다. 나는 그녀의 옆에 같이 쪼그려 앉아 화단을 바라봤다. 그녀에게 무엇을 생각하며 바라보냐고 했더니 그녀는 자신이 올해 봄에 이 화단의 새싹들을 과연 건강하게 볼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다. 나는 올해도, 다음해도, 그 다음해도 계속 겨울마다 나를 봐야하지 않겠느냐며, 그럼 봄도 당연히 맞이하게 될 것이니 새싹도 당연히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말없이 웃고만 말았다. 


그녀는 전쟁 중에도 새싹이 트고 꽃이 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여기저기서 생명이 꺼져감에도 어딘가에서는 새롭게 생명이 깨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어 큰 위안이 되었다고 했다. 새싹이나 꽃 같은 생명력 있는 개체들과는 거리가 먼 겨울의 요정인 나는 그녀의 말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었지만 가슴으로는 잘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오히려 전쟁이라는 것이 내게 더 잘 어울리는 단어랄까. 어쨌든 꽃을 사랑하는 그녀는 겨울 같은 전쟁을 거쳐 왔고, 지금 남은 것이라고는 곧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팔이 하나뿐인 몸뚱아리와 사람인지 사람이 아닌지 분간이 잘 안가는 요정인 나뿐이다. 그녀에게 전쟁이 없었더라면, 팔이 하나 더 있었더라면 덜 외로웠을까. 요정의 머리로 생각해봐도 분명 그랬을 것 같다. 전쟁이라는 것은 잃는 것만 많고 참 납득이 가지 않는다. 요정의 세상에는 그런 것이 없다.


그녀가 내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요정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늘진 내 표정을 읽은 것이리라. 나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을 그냥 감사하게 생각하고 싶을 뿐이다. 그녀는 말없이 무표정한 나를 보더니 얼음장 같은 내 손을 꼭 쥐고 “요정님, 웃어요.”라고 말해주었다. “차갑지도 않나.” 나는 볼멘소리를 하며 그녀의 손에 내 다른 손을 심술궂게 폭 포개어버렸다. 그녀는 차갑다고 킬킬 웃으면서도 손을 빼지 않았다. 아, 정말이지 내 손을 왜 이렇게 차가울까. 그녀처럼 따뜻하다면 그녀가 내 손을 잡고 있을 때 더 편안할텐데. 
겨울에 피는 꽃은 없냐고 그녀가 물어봤다. 있긴 있을테지만 꽃에는 워낙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른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겨울에 피는 꽃이 있으면 화단에 심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일하다가 보이는 꽃이 있으면 그녀에게 알려주겠다고 했다. 정말이지 그녀는 꽃을 좋아하는 것 같다. 내가 봄의 요정이나 여름의 요정이나 가을의 요정이었다면 꽃을 한아름 선물해줄 수 있었을텐데 나는 왜 겨울의 요정일까. 괜히 자책감이 들고 운명의 장난 같다는 시덥잖은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이 생각을 못 참고 퉁명스럽게 그녀에게 말해버렸고 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요정님은 눈꽃이 있잖아요.”


맞다. 그녀는 눈을 좋아한다. 나는 ‘눈꽃’을 만들 줄 안다. 그녀에게 세상 가득 꽃을 선물해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계절의 요정도 세상 가득 꽃을 만들지는 못한다. 갑자기 자부심이 들었다. 그녀에게 많은 것을 해줄 수 있는 요정이 된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웃음꽃이 피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가 좋아하라고 ‘눈꽃’을 한아름 안겨주고 왔다. 그녀의 말에 일희일비하게 된 내가 신기했다.


나는 그녀를 언제이고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고민을 했다. 그러던 중 생각해보니 그녀와 내가 계속 대화를 하면서도 그녀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단 하나가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바로 그녀 자신이 나와 같은 요정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도 그녀의 생명을 앗아갈 수 없도록 만들고 싶었다. 사람이 요정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생전 들어본 적도 없었지만 요정 중 가장 지혜롭다는 현자 요정에게 찾아가면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요정으로 만들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현자 요정을 찾아갔다.


인적이 드문 깊은 산에 움막을 짓고 사는 현자 요정은 문 앞마당에서 나를 보고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긴 한숨을 쉬며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문간에 들어섰다. 현자 요정의 집은 여러 가지 시약들을 만드는 기구들과 집을 빼곡이 채우는 책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현자 요정은 책더미 앞으로 가 이리저리 뒤지더니 두껍고 먼지가 쌓인 책 한권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책을 펼 것처럼 하더니 안경을 고쳐 쓰고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내가 왜 이러는지 궁금하기도 한 것 같았다. 나는 순순히 현자 요정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아야한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는 탁자 의자에 앉았다.
현자 요정도 늙고 무거운 몸을 천천히 움직여 의자에 몸을 앉혔다. 현자 요정은 나이를 정말 많이 먹었다. 요정은 나이를 안 먹는 편인데도 현자 요정은 늙었다. 도대체 나보다 얼마나 더 오래 살았을까. 어쩌면 그래서 현자인가보다 싶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이야기만 하기에는 목이 마를 것 같아 마실 것이 없냐고 물었고 현자 요정은 갑갑한 네 이야기를 들을 생각을 하니 오늘은 쓴 차가 마시고 싶다며 선반 위에 있는 유리병의 검은 차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나는 현자 요정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 사실 쓴 맛은 싫어했지만 말이다.


현자 요정은 찻잔의 음료를 마시며 나를 멀뚱멀뚱 보기만 했다. 이제 들을 준비는 끝났으니 이야기 해보라는 뜻이었다. 현자 요정다웠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그녀와의 이야기를 현자 요정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것까지 모두 이야기했다. 현자 요정은 음료를 몇 모금 홀짝이더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팔짱을 꼈다. 나는 현자 요정의 판결을 듣는 사람 마냥 긴장된 채로 마른 침만 꼴깍 삼켰다.
현자 요정의 말은 왜 굳이 그녀를 요정으로 만들고 싶냐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전쟁에 마모되어 생명의 불길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그녀가 일찍 죽으면 일찍 죽을수록 나는 형벌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었다. 나는 그 질문에 용케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해버렸다. 현자 요정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어이없다는 듯 몸을 뒤로 젖혔다. 


현자 요정은 내가 너무 어리다고 했다. 세상을 꽁꽁 얼릴 줄만 알지 사랑에서는 풋내기 애송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이 기분 나빴다.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이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현자 요정은 그녀는 어쩌면 죽었을 때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말도 안 된다고 했다. 세상에 죽어서 행복한 것이 어디있느냐는 말이다. 현자 요정은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그녀가 다시 가족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우리 요정들도 사후세계는 모른다. 그래서 그녀가 정말 죽었을 때 가족을 만날 수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만약 그녀가 정말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면 사후세계라는 것이 있어 가족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한다. 하지만 현자 요정의 말대로 죽어서 더 행복할 수 있는 것이라면 애초에 다 죽어서 만나지 왜 살아서 만나고 인연을 맺고 사랑을 나누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현자 요정의 말을 아직 잘 모르겠다.


현자 요정은 나의 표정과 태도를 보고 그녀를 요정으로 만들겠다는 내 굳은 의지를 느낀 것 같았다. 더는 묻지 않고 아까 꺼냈던 책과 함께 의자에서 일어났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요정으로 만드는 방법은 있긴 해. 하지만 대가가 있을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요정이 된다면 생명을 빼앗기는 일도 없을 것이고 나와 언제까지고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현자 요정에게 그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다. 현자 요정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면서 내게 방법을 알려줬다. 간단했다. 현자 요정이 만들어 준 시약을 먹고 좋은 땅에 두 발을 파묻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뭔가 꺼림직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현자 요정을 믿기로 했다. 나는 시약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한 채 곧장 그녀에게로 향했다.
나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그녀에게 내 계획을 설명했다. 그녀는 그 사이 몸이 약해져 웃는지 우는지 모르는 표정을 한 채로 내 이야기를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나만큼 기뻐하지 않는 것 같아 서운했다. 하지만 그녀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 내 계획대로 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녀는 갑자기 손으로 두 눈을 가리더니 훌쩍였다. 이렇게까지 생각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웃어야 하는데 눈물이 난다고 했다. 이렇게 누군가가 나를 위해 고생하며 힘써준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왜 이토록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모르기 때문이다. 처음에 왜 그녀에게 시선이 머물렀는지, 왜 마법을 풀고 그녀 앞에 나타났는지, 왜 그녀와 시간을 보냈는지, 왜 어차피 죽게 될 그녀가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는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었다. 나는 겨울의 요정답게 사람의 그 심장이라는 것이 내게도 있다면 그것조차 얼음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 얼음심장이 그녀로 인해 자꾸 뛰고 설레고 아파하면서 녹았다. 현자 요정도 그녀를 지칭하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게 사랑이라는 거라면 참 달콤하고 행복하면서도 고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녀는 내가 왜 자기를 사랑하는지 꼭 듣고 싶다고 했다. 요정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했다. 나는 뭐라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낭만적이지도 못하고 내 얼음심장을 그럴듯하게 해독하는 능력도 없다. 다만 나는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고 그 기간이 언제까지고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말을 꾸밈없이 그녀에게 했다. 그리고 그녀가 죽으면 숨을 못 쉴 만큼 아플 것 같다고도 했다. 그녀는 “항상 왜 나를 사랑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했는데 들을 수가 없네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냥 “네가 너무 측은하고 예뻐서.”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더 좋은 말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그만 말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녀는 기꺼이 나를 따라 요정이 되겠다고 했다. 위험부담이 있을 것임은 나도 그녀도 알았다. 현자 요정의 경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언제까지고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어떤 시련이 와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세상에 남은 가족이 하나도 없었기에 영혼이 되어 가족을 만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나와의 시간을 태어나 살면서 무엇보다 행복하게 여겼기에 결국 요정인 나와 이 세상에 남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나는 이로써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의무가 생겼다. 그녀가 요정이 된다면 그녀를 내 아내로 삼아 평생 함께할 것이었다.


어느 추운 날 밤, 그녀가 좋아하는 눈꽃이 내리게 하고, 그녀의 두 발을 묻을 땅을 함께 보러 나갔다. 둘이서는 처음으로 국군병원 밖을 나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가능하다면 별도 보이고 물도 보이는 곳에 발을 묻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외롭지 않은 곳이면 좋겠다고 작게 말했다. 나는 세상을 둘러보며 봤던 땅 중 그녀가 말한 조건을 충족하는 땅을 떠올려 그녀와 함께 걸어갔다. 낮이면 사람이 많이 다니는 호숫가였다. 호수에 동그란 달이 비쳐 수면을 빛내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춥지 않을 만한 곳을 찾아 땅을 파고 그녀를 세워 발을 묻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시약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그것을 망설임 없이 마셨다.
그러자 그녀의 몸은 점점 나무로 변해갔다. 현자 요정이 준 시약은 꽃나무 요정이 되는 약이었고 겨울의 요정과 항상 만나라고 겨울에 피는 꽃이 되도록 마음을 써 약을 지어줬던 것이다. 그녀는 몸이 변하는 도중에 어쩐지 그 순간이 나를 보는 마지막이라고 느낀 것인지, 아니면 요정으로 변하는 자신이 너무 황홀해 그러는 것인지 그 자리에서 처음 보는 모습으로 엉엉 울었다. 나도 여러 가지 생각에 눈물이 났다. 정말 많이 났다. 그녀의 손을 잡고 조금이라도 그녀의 온기를 느끼기 위해 내 얼굴에 갖다 댔다. 그녀의 손은 어쩜 이렇게도 따뜻한걸까. 그녀의 온기를 생각하면 지금에서도 눈물이 울컥한다. 나는 그녀의 온기를 정말 사랑한다. 그녀는 꽃나무로 천천히 변해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만약 꽃이 되어 움직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 항상 내 곁에 있어주세요.”


나는 그러겠노라 끄덕이며 얼음꽃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녀는 그렇게 사람의 모습을 벗고 작은 꽃나무 요정이 되었다. 겨울에 피는 ‘납매’라는 꽃나무라고 한다. 그녀는 앞으로 꽃이 피고 지고를 반복하며 생명을 계속 이어나가게 될 것이다. 나는 이제 이 도시에 겨울을 만들러 올 때마다 새로운 모습을 하게 된 그녀와 만난다. 그녀는 꽃나무 요정이 된 후 기쁘게도 잃어버린 팔을 되찾았다. 그리고 사람일 때 꺼져가던 생명의 불씨가 다시 타올라 지금은 달리기도, 나무 타기도 잘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꽃나무 요정이 되고 오래 지나지 않아 우리는 영원의 서약을 맺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로는 이 날 이후로 겨울의 추위가 약해진 것 같다고들 한다. 나의 그녀가 겨울에도 꽃을 피울 수 있게 배려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의 노란 꽃을 보는 것이 정말이지 행복하다. 마치 그녀가 해사하게 웃고 있는 것만 같다. 


한편, 나와 그녀는 요정왕으로부터 벌을 받았다. 요정과 사람이 만나면 어쩔 수가 없는가보다. 요정왕은 내가 그녀를 요정으로 만들어버린 것에 많이 놀랐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요정이 되어버린 그녀와 나를 갈라놓을 구실은 없었다. 게다가 살아가던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을 살렸으니 이에 맞는 판례도 마땅히 없어 요정왕은 우리를 처벌하는데 난항을 겪었다고 한다. 하지만 요정왕은 결국 판결을 내리고야 말았다. 그녀에게는 꽃나무가 있는 호숫가를 떠날 수 없는 형벌을 내렸다. 겨울을 만들기 위해 세상을 떠돌아야 하는 나를 따라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만난 도시에 겨울이 찾아올 때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일년 중 고작 3개월이었다. 나에게는 엄벌이라면 엄벌이 내려졌다. 내가 명예롭게 생각하기 마지않던 겨울의 요정이라는 직책을 언젠가는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은 대체할 요정이 없으니 적합한 인물이 나오면 자리를 물려주라고 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작은 꽃나무 요정이 되어버리라는 형벌이 내려졌다. 나는 요정왕의 판결에 대해 그럴테면 그러라지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곁에서 같이 꽃나무가 되어 함께하는 것도 행복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상을 너무 떠돌았기 때문에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 곁에 뿌리 내리고 정착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나는 요즘 겨울에밖에 만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에 봄, 여름, 가을을 그리움에 젖어 지내고 있다. 그리고 겨울이 되자마자 그녀를 만나 겨울만의 차가운 한숨을 내쉬고 그녀가 사랑하는 눈꽃을 만들어 하늘에 뿌린다. 나는 우리의 호숫가에 그녀의 꽃나무가 피면 그녀 곁에 머무르며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빗어주기도 하고 생명력이 가득한 나무가지를 쓰다듬어주기도 하며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꽃이 지고 봄의 요정이 내 자리를 차지하려고 나를 밀어내면 나는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머금고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을 떼며 그녀의 곁을 서서히 떠난다. 우리는 그렇게 매년 3개월 씩, 서로를 애틋하게 껴안는다.
그녀는 내가 없는 계절 동안에는 호숫가에 머무르며 사람들과 시간을 보낸다. 어쩐지 사람들은 그녀의 나무를 좋아한다. 그녀는 그녀의 나무 아래에서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그녀는 종종 호수 가까이에도 가는데 워낙 커다란 호수라 낚시하는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고 한다. 그녀는 사람일 때는 단 한 번도 낚시를 해본 적이 없어 낚시의 묘미를 모른다. 그래서 누군가 호수에서 낚시를 하고 있으면 호기심 어리게 지켜본다고 한다. 그리고 가끔 아무도 없을 때는 호수에 발목을 담가보기도 한다는데 그 말에 어쩐지 그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어느 새 호숫가를 지나다니는 요정들과도 친해져 나의 안부를 묻기도 한다. 물론 나는 언제나처럼 차갑고 냉정한 요정이니 얼음장 같은 멋진 이야기만 들려올 것이다. 그런데 어쩐지 나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그녀는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크게 웃기도 하고 눈물을 훔치기도 하고 심각하게 고뇌를 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내게 전하는 말은 한가지뿐이다. 나도 그 말에는 이하동문이다. 아, 차라리 빨리 꽃나무가 되고 싶다.
나는 그녀와 만난 이후 다시는 사람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녀 이외에 다른 누군가가 더는 필요없기도 하고 그녀와의 가슴앓이 이후 더 조심하게 된 것도 있다. 분명 앞으로도 사람에게 모습을 보일 일은 없을 것이다. 그저 겨울이 되어 눈이 내리고 차가운 바람이 불면 겨울의 요정인 내가 있다는 것을 알아주기만 한다면 더없이 기쁠 것 같다. 그리고 나의 그녀가 매서운 겨울에도 향기로운 꽃을 피우며 사람들을 반겨주고 있다는 것도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나의 사랑 그녀가 그 자리에서 언제까지나 외롭지 않게 말이다.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서계수 인생서점 2022.10.01
박도은 돌고래 앨리 2022.10.01
갈원경 마지막 가을에 경서랑은1 2022.09.30
곽재식 소원의 정복자2 2022.09.30
박도은 겨울, 내 사랑 2022.09.04
빗물 추석이니까요 2022.09.01
곽재식 소설 쓰다 그만두는 이야기3 2022.08.31
갈원경 여름의 섬 2022.08.01
노말시티 꿈에서 읽은 이야기 (본문 삭제) 2022.08.01
전삼혜 시간을 넘어도1 2022.08.01
곽재식 극기4 2022.07.31
곽재식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4 2022.07.01
김산하 상태창! 2022.07.01
갈원경 수국의 꽃 2022.06.30
곽재식 우제점2 2022.06.01
갈원경 신사의 밤 2022.06.01
노말시티 최악의 변신 2022.06.01
강엄고아 별의 기억 (본문 삭제) 2022.06.01
미로냥 그때 흰 뱀 한 마리가 2022.06.01
김산하 반발계수가 높은 이 공의 이름은 107, 그 외에는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2022.06.01
Prev 1 2 3 4 5 6 7 8 9 10 ... 52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