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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원경 수국의 꽃

2022.06.30 22:4606.30

수국의 꽃

 

 


“이건 꽃이 아니야. 사실 꽃은 이거지.”

준하는 수국의 꽃잎 안쪽을 가리켰다. 푸른 꽃을 피우려고 비료부터 신경써서 길러냈다는, 섬의 절 한쪽에 무겁도록 피어있는 수국이었다. 준하가 가리킨 것은 물이 떨어질 것 같은 새파란 이파리 안쪽에, 유심히 보지 않으면 꽃술밖에 없는 걸로 보이는 부분, 꽃술을 감싼 조그마한 푸르스름한 이파리들이었다.

“꽃이 너무 작아서 눈에 잘 안 보이니까, 이렇게 몸을 부풀린 거야. 하지만 꽃에 설사 나비가 날아와도 열매는 맺지 못해, 무성화거든.”

유학 시절 살던 동네의 새파란 수국을 보고 싶다는 말에 부산 여행을 잡은 사람이, 꿈에 그리던 새파란 수국 무리 앞에서 굳이 해야 할 말은 아니었다. 나는 커플 아이템은 아무 것도 가지려고 하지 않는 준하를 위해서, 오늘 이 날을 위해서, 니켈로 수국 모양을 만들고 새파란 에폭시 가공을 한 키링을 준비한 참이었다. 준하의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 케이스에 달면 어울리겠다고 생각하면서. 준하도 나도 그 동네의 길을 함께 걸었으니까, 그 꽃 앞에서 준하도 종종 발걸음을 멈추고 넋을 잃은 듯 꽃을 보고 있었으니까, 좋아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렇게 뾰족한 사람을, 갈망하게 되고 말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일본에서 서툰 한국식 일본어 억양과 선명한 중국식 발음이 넘쳐나는 어학원 교실에서 준하의 매끄러운 발음과 억양을 들은 순간, 준하가 다른 유학생처럼 흔한 만화 에니메이션 게임 어느 것도 관심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자판기에 UCC 카페라테가 없다는 걸 알고는 미련없이 돌아서는 걸 본 순간, 매 순간 나는 준하를 원하게 됐다.

돌아오고 나서도 다른 사람들과는 연락하지도 않으면서 준하에게만 연락을 했다. 아마도 내 마음을 숨기려는 시도도 한 적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가 부모님께 받은 이름 대신에 스스로 정한 이름으로 그를 불렀다. 그는 내 이름의 끝자를 따서 불렀다. 솔아. 내 이름은 순간 노래가 됐다.

“다리 안 아파? 조금 더 걸어도 돼?”

준하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젓다가 바로 끄덕였다.

“조금 걸어가면, 유명한 바위 절벽이 있어. 거기서 보는 바다가 멋져. 오늘처럼 바람이 불면 파도도 시원할 거야.”

“전에도 와 봤어?”

“고향이잖아.”

준하가 웃었다.

“중학교 때까지 살았어. 교복 때문에 엄청 싸우고, 고등학교는 안 다니겠다고 했더니 또 난리가 나서, 교복 안 입는 학교를 뒤져서 서울에 있는 데를 내밀었지. 한 열흘 단식했을 걸. 그래서 엄마랑 나까지 서울로 올라왔지. 원래 나 때문에 주말부부 하고 있었거든.”

조금 경사진 길을 숨을 몰아쉬며 걸었다. 나는 준하의, 삭발에 가까운 짧은 머리를, 얼마전에 탈색해서 햇빛을 받으면 햇빛보다 더 빛나는 머리에 땀이 맺힌 것을 보았다. 준하는 내가 모르는 과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들려주곤 했다. 나는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준하의 과거를 빚는다.

“서울 가서는 안 왔다가, 몇 년 전에, 결혼하기 직전에, 수국을 보러 왔었어. 비가 갑자기 몰아치는데 소나기인 줄 알았더니 멎질 않더라. 수국을 보고, 지금 여기 이 길을 걷는데, 여기가 온통, 시냇물처럼, 신발에서 물소리가 절벅절벅 날 정도로 푹 젖었지. 그렇게 다 젖어서 바위절벽에 갔는데, 날씨 때문에 내려갈 수 없다는 거야. …와, 죽는 것도 맘대로 못하네, 했어.”

나는 놀라 준하를 보았다. 준하는 태연하게 웃었다.

“그래서 그냥 돌아가서, 다음날 결혼을 했지. 그러니까 못 본지 꽤 됐어. 그 뒤로는 여기 안 내려왔으니까.”

준하는 결혼한지 육개월만에 헤어지고 집을 나왔다. 부모님의 소개로 만난 사람은, 준하의 삶의 방식이 멋있다고 늘 말하던 사람이었지만, 짧은 생활 끝에 준하는 온몸이 층층 다른 색 멍으로 뒤덮여 집을 나왔다. 다친 건 준하인데, 준하의 부모님이 준하 때문에 몸져 누웠다.

나는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내겐 가족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고, 내 존재가 죄악이라고 주장하는 곳에는 가지 않았으며, 4년제 대신 전문대를 나온 이후 시작한 아르바이트 자리는 다행히 다른 편의점들이 폐업하는 중에도 꿋꿋이 살아남았다. 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 알바를 함께 했다. 그 모든 일들이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중학교 때였나, 원장 선생님은 내게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꿈을 크게 가지라고 말했다. 독립까지 5년도 남지 않았던 때였다. 원장님도 내가 변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장학생이 되었기 때문에 전문대를 졸업할 수 있었고, 학과 추천으로 자동차 공장의 추천 취업에도 면접까지는 갔다. 하지만, 면접에서 회사 높은 분은 노골적으로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신호를 보냈다. 자격증이 몇 개든, 성적이 어떻든, 때로 사람들은 그보다 더 중요한 판단기준이 있다고 믿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나서는 괜찮았다. 회사에 취업하지 않겠다고 정하지는 않았지만 세상이 그렇게 정했다면 할 수 없었다. 어차피 살 수 있을 만큼만 살다가 떠나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했다.

“이 나라를 떠나면 우리도 살만할 지도 몰라.”

원장님을 함께 만나고 돌아온 동갑인 친구가, 편의점 앞에서 맥주 한 캔을 비우며 말했다.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나라를, 고등학교 때부터 조금 배웠을 뿐인 일본어 공부를 새로 시작하며 꿈꿨다. 결과적으로는 워킹홀리데이는 준하를 만났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다. 준하가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나는 어쩌면 일본에 남았을까. 적어도 그들은 내 앞에서 고개를 갸웃하거나, 웃음을 섞어가면서 악의에 찬 질문을 하지는 않았으므로. 그러나 도망쳐왔다는 준하가 한국으로 돌아간 후 나는 바닷냄새가 나는 옛 철길 위에서, 중국 냄새가 나는 붉은 거리 한복판에서, 서양식 건물 앞에 그림처럼 펼쳐진 장미정원에서, 울음을 참을 수 없게 됐다. 그리고 여름 수국이 가득한 골목길에서 나는 결심했다. 준하가 없는 곳에서 살지 않겠다고.

 

“오늘도 그런 기분으로 온 건 아니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멈춰 선 준하에게 물었다. 준하는 날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은, 네가 오자고 했으니까. 수국 보고 싶다고. 그런데 여기서 제일 유명한 건 이 바위절벽이니까, 온 김에 보자는 거지.”

“그래.”

힘써 웃었지만 표정이 그렇게 밝지는 않았는지 준하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솔아, 괜찮아. 이제 난 괜찮아.”

준하가 멍투성이로 그 집에서 도망쳐 나왔을 때, 핸드폰도 없이 도망친 준하가 찾아온 곳은 내가 일하던 편의점이었다. 준하 집에서 나를 모른다는 것이 그렇게 다행스러운 적이 없었다. 목에 이중으로 졸린 자국이 남은 것을 봤을 땐 뭐든 손에 잡히는 걸 들고 준하가 살던 곳으로 뛰어갈 기분이었지만, 준하가 나를 붙잡았다. 그러지 마 솔아. 그냥, 나 좀 숨겨줘, 그거면 돼. 준하와 함께 내 집으로 간 다음 날 준하는 일본에서 함께 어학원을 다녔던, 변호사가 된 친구에게 나와 함께 찾아갔다.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떼고 이혼 소송을 시작하자, 상대방은 금방 합의이혼을 제안했다. 가족과 가족이었던 사람들과 준하는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변호사 친구는 준하가 원하는 대로 합의이혼을 받아들였다. 육개월의 결혼이 끝나는 건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었다. 준하의 멍이 사라지고 준하가 밤에 깨지 않게 될 때까지가 결혼 기간보다 더 길었다.

나는 계단의 이정표를 보고, 준하를 보았다. ‘자살바위 가는 길’이라는 이정표가 깔끔하고 단정한 것이 오히려 서늘했다. 자살바위라니, 영도 태종사 수국축제를 검색하고 왔을 때는 태종대에 이런 것이 있다는 건 보지 못했다. 나는 준하가 결혼 전날 왔던 이 길을, 날씨가 청명해서 7월 초보다는 9월 햇살 같은 오늘이 아니라 비가 시냇물을 만들 정도로 퍼부었던 그 날의 길로 상상한다. 나무 계단은 충분히 단단해 보이지만, 비가 그토록 많이 왔다면 이 계단에도 물이 쏟아졌을지 모른다. 사람들이 내려가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그날 비가 온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나는 괜한 마음에 준하를 앞질러 걸었다. 모르는 길이라도 이정표대로 가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해안 산책로에서 흔히 보던 계단이었다. 사진 찍기 좋은 곳에는 조금 널찍하게 단을 만들고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가파르지 않아서 힘든 길은 아니었다. 입구 근처에 있던 가게가 보이지 않게 될 즈음, 시야가 확 트였다. 무대처럼 확 트인 커다란 바위였다. 멀리 보이던 전전망대도 함께 시야에 들어왔다. 저 전망대에서도 이 바위가 보이겠구나, 생각할 즈음에, 준하가 내 등을 살짝 쳤다.

“저쪽도, 파도치는 모습이 멋져.”

준하가 가리키는 곳, 전망대의 반대편에 다른 절벽이 눈에 보였다. 단상처럼 평평한 바위 위가 아니라 바다 위에서 해안을 보고 있는 것처럼 졀벽의 바위로 파도가 철썩철썩 부딪히는 것이 보였다. 마음이 가라앉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과, 그 하늘보다 훨씬 짙은 쪽빛의 바다와, 구름처럼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과. 이 풍경에서 어떻게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 생각하다가도, 이렇게 차분하고 서늘해지는 마음에 그 이름이 참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었다.

“준하야.”

준하가 나를 보았다.

“그날 비가 많이 와서, 다행이야.”

준하가 웃었다.

“오늘 비가 안 와서 다행이고.”

우리는 바위에 한참 앉아 있다가 일어나 바위에서 잘 보이는 전망대로 걸음을 옮겼다. 윗길로도 연결되고 아랫길로도 연결됐지만 결국 들어가는 입구는 같았다. 하얗게 등대처럼 보이던 전망대는 가까이에서 보니 그렇게 희고 아름다운 건물은 아니었고 이 바다에 오랜 세월 낡아간 흔적이 곳곳에 가득했지만 왔던 길을 돌아 다시 버스정류장 근처의 가게까지 찾아가기에는 너무 멀었다. 관광지 건물의 흔한 매점 모습을 한 전망대 안쪽, 인테리어보다는 접고 펴기 편해서 선택되었음이 분명한 테이블과 의자가 바다가 잘 보이도록 배치된 자리 한쪽에 앉았다. 준하는 내가 말하기도 전에 카운터에 가서 뭔가 주문을 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백팩에 들어있던 조그만 상자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응? 나 오늘 생일 아닌데. 네 생일도 아니잖아.”

“응, 그냥 7월 1일이야.”

나는 말하지 않는다. 7월 1일은 내가 어학원에서 처음 준하의 이름을 익힌 날이었다. 준하는 일본인들이 발음하기 좋도록 별명을 짓는 시간에 ‘주나’ 라고 카타카나를 칠판에 쓰고, 그 아래에 준하, 라고 한글을 썼다. 여권의 이름과 다른, 외국인 등록증의 이름과 다른, 그 이름이 자신의 이름이라고 했다. 대학에 있었다면 벌써 방학이 시작되었을 뜨거운 날, 유난히도 습하고 덥던 일본의, 도쿄 바로 근처의 도시 어학원에서 우리는 그 몇 달 전에 만났고, 그날 처음으로 준하의 이름을 알았다. 계속해서 내 시선을 끌던 그 사람이, 내가 사는 동네에 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어학원에 다니는 상당수의 한국인들이 그 동네에 살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놀라운 일도 아니었지만, 그때는 그게 그렇게 기뻤다.

준하가 포장을 풀고, 상자를 열고, 키링을 꺼냈다. 새파란 수국이 반짝 조명에 빛났다.

“와, 이거 수국이네요, 예쁘다. 어디서 샀어요?”

커피를 들고 온 카운터 직원이 키링을 보고 물었다.

“산 거 아니고, 만든 거에요.”

나는 준하의 낯선 억양을 처음 듣고, 그가 키링이 ‘만든 거’라는 걸 바로 알아봐 준 것과 낯선 억양 어디에 먼저 놀라야 할지 모르는 표정으로 준하를 보았다.

“아 그러시구나, 예쁘다. 솜씨 좋으시네요. 좋겠다, 이런 것도 만드시고, 애인분 행복하시겠다.”

준하가 직원을 보고, 빙긋 웃었다.

“그러네요.”

“……그게 꽃이 아닌 거 알았으면 잘 보고 다르게 만들었을텐데.”

“괜찮아. 예뻐. 고마워. 어쩌냐, 나는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네.”

“오늘은 아무 날도 아니니까.”

준하가 웃었다. 나도 웃었다. 준하야, 네게는 말 안 하겠지만, 나는 네가 날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네가 어딜 가든, 누구를 만나든, 나한테 돌아오기만 하면 돼. 나는 기다리는 건 잘 해. 하지만, 혹시 다른 사람을 만나더라도 부디, 전처럼 그렇게 널 아프게 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면 좋겠어. 네가 나를 잊어버릴만큼 행복해 해도 좋아. 그러다가 아주 조금이라도 지겹거나 피곤해져서 조금은 다른 사람이 생각나면, 그때 나한테 와도 돼. 아주 잠깐 머물러도 돼. 나는 수국의 꽃 같아서, 수국의 가짜 꽃처럼 아름답지도 누군가의 시선을 잡을 수도 없어서,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그런 사람인 걸 너무 잘 알아서, 과분한 건 원하지 않을 거니까.

 

준하는 이어폰 케이스에 키링을 달고 몇 번을 만지작거리다가 가방 안에 소중하게 챙겨넣었다. 딱 휴게소의 커피 같은 그런 커피를 비우고 우리는 태종대를 나왔다. 순환기차를 타고 더 들어가면 다른 명소가 몇 군데 더 있다고 했지만 저녁 기차를 예약해 뒀기도 했고 숙소를 잡지도 않아서 여기서 더 머물 이유는 없었다.

버스를 타고 다리를 건너 섬에서 나와 지하철을 타고 또 한참을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준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준하는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핸드폰으로 서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하룻밤 정도 자고 갈 걸 그랬나? 부산 처음 와 본 거지?

- 하지만 내일도 일 해야 하니까. 배달은 내일은 안 하는 날이긴 한데 편의점엔 오후에 가야 해.

- 미팅 내일 아니었으면 아침은 여기서 먹고 갔어도 됐을걸.

준하는 내일 출판사 사람들과 미팅이 있다. 준하가 인터넷에 올렸던 글들을 책으로 묶어내고 싶다고 하는 곳이었다. 처음에는 조용하게 시작했던, 혼자 보는 일기 같던 페이지가 어디서 소문이 났는지 댓글들로 넘쳐났다. 끔찍한 글들도 많이 달렸다. 준하의 옛 이름을 아는 사람이 그 이름으로 준하를 불렀을 땐 소름이 끼쳤다. 정작 준하는 태연했다. 나는 회사 면접 한 번 본 걸로 사회에서 번듯하게 사는 게 불가능하다고 포기해 버렸는데, 계속헤서 부모님 기준에 맞추지 못하는 자신 때문에 괴로워하던 준하는, 마음에 없는 결혼을 끝낸 뒤로 아무 것도 두려운 게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반삭을 하고 염색을 했다는 글을 올린 날에 올린 댓글도 섬뜩했다. 길을 가다가 그 머리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준하인 줄 알고 찔러버리게 칼을 가지고 다녀야겠다는 글이었다. 다른 사람 몇 명이 그 사람의 글에 또 댓글을 달았다. 준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모자를 쓰고 다니지 않겠냐고 내가 말하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때로는, 안심이 되는 댓글도 있었다. 준하가 다쳤던 이야기에, 싸웠던 이야기에 함께 화를 내 주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또 사람들을 부르고, 준하는 꼬박꼬박 글을 올렸다. 가끔 댓글에는 준하의 가족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름 그대로를 숨기지도 않고 댓글을 다는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인 것처럼 준하의 가족들은 그래도 준하가 돌아오길 바랄 거라 말했다. 나는 그때마다 댓글로 그 사람들에게 욕을 하는 상상을 했다.

 

깜깜한 길 끝의 집, 2중 보안이 된 빌라의 3층 우리 집에 도착해서 불을 켜자 비로소 안심이 됐다. 준하는 모를 것이다. 내가 준하와 나란히 걷는 게 시선을 끌까 봐 항상 준하와 거리를 두고 걷는 걸. 그래도 준하에게 뭔가 일어날까봐 한껏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변을 살피며 걷는 걸. 준하는 흐느적흐느적 예전과 다름없는 걸음으로 걸어가는데, 나는 누가 갑자기 튀어나오지나 않을까 주변을 살피며 걸어간다.

현관문을 닫고, 비로소 나는 준하의 손을 잡는다. 준하는 웃으며 나를 본다. 준하의 탈색한 짧은 머리가 현관 조명을 받아 빛난다. 이제 준하의 드러난 목덜미에는 층층이 얼룩져 있던 멍도 없고, 딱지가 앉았던 귓불은 이제 흔적 없이 동그랗다. 귀걸이를 했던 자리는 이제 완전히 메꿔져서 흔적만 남아 있다. 준하가 샤워하는 동안 나는 손을 씻고, 냉장고에서 토마토를 꺼내 씻는다. 준하가 좋아하는 설탕토마토를 소파 테이블 위에 놓자 준하가 샤워를 끝내고 나왔다.

 

엄마는 미혼모였다고 한다. 원장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다. 진짜로 딱 5년만 맡아달라고, 둘이서 살 수 있을 정도로 기반이 잡히면 데리러 오겠다고,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엄마는 4년 9개월째, 경찰이 가져온 서류로 돌아왔다. 엄마의 연인이었던 남자는 3년 후에 감옥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엄마가 모은 돈은 한참의 절차를 거쳐 내게 왔다. 처음 들었을 땐 큰 액수 같더니 집을 구하려고 하니 턱없이 작은 액수였다. 준하가 오기 전까지 내가 살던 곳은 독립지원금으로 구한, 길을 지나가는 사람의 발이 보이는 반지하 방이었다. 그방을 처분하고 준하의 돈과 엄마의 돈을 합해서 지금 집을 구했다. 아무나 현관으로 들어올 수 없고, CCTV가 있는 곳. 준하가 뾰족함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집이었다.

출판사 미팅에 준하는 내게 함께 가달라고 말했다. 출판사에서 나오는 걸 보고 혹시 준하인 걸 알고 누군가가 덤벼들기라도 할까봐 걱정되던 참이었으므로, 나는 준하와 함께 출판사로 갔다. 편집자라는 사람은 금방 준하를, 나를 알아봤다.

“와, 솔 님 맞으시죠?”

준하보다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준하가 웃었다.

“저를 어떻게 아세요?”

“그야, 준하 님이 글에서 여러 번 쓰셨으니까요. 아, 혹시 솔 님은 ‘수국’ 폴더 못 보세요?”

“네, 솔이는 회원 가입을 안 해서.”

직원이 웃음 지었다.

“준하 님 사이트에 ‘독자’ 등급 회원만 볼 수 있는 폴더가 있어요, ‘수국’이라고. 사이트에 아무 데도 회원 등급 이야기가 없어서 모르셨구나. 하긴, 그게 준하 님 사이트 매력이죠.”

“‘수국’이요.”

“네, 준하 님이 자길 상징하는 꽃이라고 하셨죠. 꽃처럼 보이는 건 진짜가 아니고, 자세히 보아야 진짜가 보인다고.”

준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게 보였다. 수국의 진짜 꽃은 나였다. 가짜 꽃처럼 아름답지도 누군가의 시선을 잡을 수도 없어서,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숨어있는, 나.

“솔 님이 못 보시는 곳이라 그런 이야기도 올리시고 했구나. 어떻게 해요, 책 나오면 수국 폴더 글도 넣을 건데. 그 전에 솔 님 읽어보시게 해야 할 것 같은데.”

준하의 얼굴을 살피던 편집자가, 갖고 있던 태블릿을 내게 건넸다. 내가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갔던 준하의 사이트, 왼쪽에 조그맣게 폴더가 보였다. ‘삶’이라는 폴더는 내가 늘 본 것이지만, 그 밑에 보이지 않았던 폴더 ‘수국’이 보였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수국 폴더를 눌렀다. 폴더에 분류된 글들이 오른쪽에 쭉 리스트로 떴다.

[ 함께 살고 있습니다. ]

[ 오토바이를 타지 않았으면 좋겠어. ]

[ 그들은 거짓말이라고 했고, 너는 울었다. ]

무슨 글인지 상상할 수 있을 것도 같고, 도무지 무슨 글일지 상상할 수 없는 글도 있었다. 준하는 내가 오토바이를 타는 걸 싫어했다. 배달 일을 하려면 방법이 없다고 했더니 배달 일을 안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조금이라도 너를 더 쉬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편의점 알바만으로 네게 빠듯한 느낌을 주고 싶지 않아서, 오토바이를 탔다. 사고가 날 뻔한 적도 있었지만 사고가 난 적은 없었으니까 그걸로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하나씩 글을 열어보았다. 나와 함께 집을 구했던 이야기에는 집 자체의 이야기보다는 집을 구하기 어려웠던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오토바이 이야기는 예상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세 번째 글은 이혼에 관한 일이었다. 네게 마귀가 들었다며 너에게 끊임없이 폭행을 가했던 사람의 이야기는 읽기 쉽지 않았다. 부모님에게 말해도 믿지 않았다는 말은 더 그랬다. 어떻게 자신의 아이보다 그 배우자의 말을 더 믿을 수 있을까. 당신들이 속한 종교집단에서 존경받는 종교인이라고 해도, 이야기 속의 부모들은 수많은 어려움에도 자신의 아이를 믿어주던데. 엄마는 나를 데리러 오지 못했지만 그건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도 날 버린 것도 아닌, 사고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네가 편의점에 뛰어오던 날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준하는 내가 울었다고 했다. 널 보고 깜짝 놀라며 울면서, 카운터 뒷자리에 가림막을 세우고 너를 숨겼다고 했다. 죽여버리겠다는 나를 네가 말렸다고 했다. 그것만은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글을 닫고 제목만으로도 가슴이 아파보이는 글은 건너뛰며 한참 아래로 내려오던 중에, 제목 하나가 눈에 띄었다.

[ 솔, 일곱 개 음계 중의 다섯 번째, 내게는 첫 번째. ]

준하를 보았다. 준하가 시선을 피했다.

“좋은 책으로 만들어요. 두 분에게도 좋은 기념이 될 거고, 다른 분들에게도 선물이 될 거예요.”

편집자가 웃으며 우리를 보았다. 나는 준하가 바닥에 내려놓은 가방을 보았다. 아주 조금 열린 지퍼 안쪽으로 반짝, 수국 키링이 눈에 들어왔다. 그 새파란 키링을 건넸던 새파란 바다를 생각했다. 죽을 결심으로 갔던 장소에 나를 데려가면서 준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다음에 그곳에 갈 때 나는 준하가 비오는 길을 흠뻑 젖어 걸어가는 모습이 아니라 햇살 아래 짧게 깎은 머리를 햇살처럼 빛내며 앞서 걷다가 나를 돌아보며 웃는 그 모습으로 기억할 거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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