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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하 상태창!

2022.07.01 00:0007.01

상태창!

김산하

 

나는 그 순간 무의식적으로 도와 호를 떠올렸다. 짐이 꽉 들어찼던 열 평 남짓의 좁은 자취방과 에어컨이 없는 여름, 열이 스며든 맨살을 드러낸 채로 만화나 소설을 읽곤 했던 우리의 몸을. 위아래 벽면에는 옷이 빼곡하게 걸린 행거가 있었다. 행거가 없는 벽엔 책꽂이도 없이 세로로 쌓은 전공책이 있어서 매트를 깔고 셋이 누우면 방안은 고수가 쌓아 올린 테트리스 블록처럼 빈틈이 조금도 남아 있질 않았다. 줄을 다 채워도 사라지지 않는 사물과 우리만이 남아 있었다.

도와 호와 나는 대체로 잘 어울렸지만, 내심 서로를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 예컨대 호는 도와 나의 차림새에 자주 불만을 토로했다. 우리가 하고 다니는 꼴 때문에 자신까지도 좀 ‘후져 보인다’는 이유였다. 호는 실제로 태가 좋았고 계절마다 새 옷을 사서 몸에 걸치고 다녔다. 우리가 함께 술을 마시러 가는 곳 중엔 호가 아니면 들어가 보지 못했을 곳이 많았으므로 도와 나는 호의 지적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 말 없이 잠자코 듣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호의 간섭이 심해질 때면, 행거에 걸린 옷을 들추면서 야 이거 누구 꺼냐. 좀 버려라. 하는 식으로 말할 때면 나는 호의 무식함과 교양 없음을 비난하곤 했다. 옷 사고 머리하는 데 쓰는 돈은 안 아깝고 책과 여가에 쓰는 돈은 아깝냐고. 호는 수업 교재든 자격증 관련 서적이든 할 수 있는 한 빌려서 썼으며 영화나 연극은 무조건 공짜 표가 생길 때만 보러 갔다. 성적은 좋지 못했고 누굴 사귀든 오래 가지 못했다. 행거 말고 네 학점이나 관리해라. 그렇게 쏘아붙이고 나면 호는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도는 가만히 있다가 호와 나의 핑퐁 매치에서 튄 유탄을 맞고 상심했다. 도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학업에 열중했지만 학점은 호와 비교해서 별로 나을 게 없었다. 호가 꺼내 들추는 촌스러운 옷들은 내 것이 아니라 도의 것인 경우가 더 많았다. 도는 상심한 사실을 티 내지 않고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하루나 이틀 뒤 뜬금없는 일로 우리의 잘못을 지적했다. 야 방금 화장실에서 스프레이 뿌린 사람 누구야. 스탠드 불 좀 끄라고 자는 사람 생각 안 해? 잔뜩 토라져서 화를 발산하면 호와 나는 별 대꾸 없이 혼나는 수밖에 없었다. 연민 때문이 아니라 도의 육체 때문이었다. 도는 야구 특기생으로 입학을 했다가 진로를 바꾼 대학 선수 출신이었다. 키도 체중도 일반 남성보다 한 단계 위였다. 나는 생존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라 때때로 도가 극심한 분노 상태에 이르면 제법 비굴한 자세로 도의 기분을 풀어주는 일이 가능했다. 벽에 등을 붙이고 서서, 황소를 진정시키듯 손바닥 두 개를 다 보여주고 미안, 미안해. 그래도 폭력은 좀 아니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헛웃음만 나오는 이야기들.

이것들은 모두 구 년 전의 일로 지금의 나는 의식적으로 이때의 기억을 회상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렇듯 내게도 부끄러운 과거나 자책하고 싶은 선택들이 있지만 두 사람과 함께 지냈던 대학 시절의 일들은 단 한 번도 그런 실수로 간주된 적이 없었다. 서로를 견주면서 조금이라도 우위를 점하려고 으스대었던 열 평짜리 방의 권력투쟁은. 그때는 어렸지, 어렸어, 그런 말로 털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하필 이 순간 나는 왜 그 시절을 떠올렸을까. 눈앞에 아른거리는 맑고 투명한 창의 신비를 목도한 지금에.

 

1

사무실엔 고 부장뿐이었다. 출근길에 텅 비어있는 주차장을 보고 예상은 했지만 35평 사무 공간에 둘이 덩그러니 놓이자 막상 어색했다. 저 끝에서 고 부장이 문을 열고 들어온 나를 반겼다. 유리 가벽과 칸막이 책상 안쪽을 모두 흘끔거렸지만 정말로 그와 나뿐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도 출근하지 않았다.

“다 도망가버렸어.”

고 부장은 쓸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창밖에서는 끝없이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경찰차와 구급차와 소방차와 사설 렉카가 가까운 도로까지 왔다가 멀어지고 다시 왔다가 멀어졌다. 도시 대기를 꽉 채우는 자동차 경적은 전날 저녁부터 시작되어 지금은 백색소음이었다. 고 부장이 이것 좀 보라며 자신의 와이드 모니터를 가리켰다. 9분할 되어 있는 그의 PC 화면은 각기 다른 아홉 개의 방송 채널을 한꺼번에 띄워 놓고 있었다. 각각 세 개의 공중파 채널과 두 개의 보도 전문 채널, 네 개의 종합편성 채널이었다. 모두 긴급방송이었다. 방송국도 분위기가 어수선한지 몇 개의 채널에선 아나운서 없이 자막으로 된 머리기사만 지루하게 반복되고 있었다.

“난리다 난리야.”

고 부장이 한숨을 쉬었다.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자네도 어제저녁 일곱 시였냐고.

“예. 십 분에.”

마침 한 채널에서 수신되는 아나운서의 음성이 여러 겹의 왁작거리는 음성을 돌파하고 선명하게 들려왔다. 고 부장은 시선을 화면으로 돌렸고 거기서 집중보도 중인 가로 팔십 센티미터 세로 오십 센티미터, 얇고 평평한 유리창 형태를 지닌 정체 불상의 홀로그램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전일 아무런 조짐 없이 모든 사람의 얼굴 앞에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엄밀히 말하자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고, 그저 은폐되어 있을 뿐 언제든 ‘상태창’이라는 명령어를 통해 다시 얼굴 앞에 띄울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상태창이었다. 그게 갑자기 생겨나 사람들의 머리 옆에 둥둥 떠다녔다.

 

 

“오 대리. 내가 딸이 하나 있어요. 이제 중2인데 정신 못 차려. 아침에 일단 학교에 가라고 하니까 나를 무슨 괴물 보듯 보는 거야. 세상이 이 지경인데 무슨 학교를 가냐고. 근데 아니다. 오 대리. 아니야. 이럴 때일수록 가던 대로 가야 해. 맨날 무슨 혁명이니 새로운 세상 온다 떠들지만, 결국 인간들 안 변해. 굴러가던 대로 굴러가. 한 달만 지나고 봐. 내 말이 틀린가.”

고 부장은 긴 훈시 끝에 꽁초를 쓰레기통에 넣고 다시 한 대를 피워 물었다. 옥상으로 올라오자 어수선한 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나는 사람들이 출근하지 않은 것은 쉽게 동요해서가 아니라 불안하기 때문이 아니겠냐고, 혹 일어날지 모를 괴수 출현이나 이세계 관문 같은 이야기를 꺼내볼까 하다가 이내 관두었다. 아침 동안 도시를 점령했던 사이렌 소리는 차차 잦아들었다. 강을 건너려는 다리의 하행선은 여전히 혼잡했다. 문득 어젯밤 엄마에게서 걸려왔던 통화가 떠올랐다. 괜찮은지 묻고 괜찮다고 답하는 게 전부였던. 어쩌면 이들도 모두 그런 통화를 했을지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는 중일지 몰랐다. 그렇다면 나는 왜 여기 있나. 남았나. 고 부장이 말한 것처럼 관성적인 인간이란 것인가.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니 어느새 고 부장은 허공에 자신의 상태창을 띄워 놓고 골똘히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창에는 그의 이름인 고 모와 양력을 이용해 표기한 출생 연월일, 그리고 흔히 ‘스탯’이라고 부르는 여섯 개의 개인 능력치가 전부였다. 다소 단출한 정보였으나 누구도 보이는 그대로 단출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힘 59.09%/재주 25.37%/지식 71.65%/지혜 56.54%/건강 41.59%/매력 45.75%. 이것이 고 부장의 능력치였다. 뒤에 붙은 퍼센티지 때문에 숫자들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온 인류의 백분위로 추정되었다. 100%에 가까울수록 높고 0%에 가까울수록 낮았다.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속성을 띠고 있어 마주하는 내내 나의 위상, 위치 그리 부를 만한 것을 가늠하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고 부장은 일종의 성적표를 받아들고 있는 셈이었다. 저 아래 피난길을 이룬 하행선엔 이 숫자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 중인 사람이 몇 명쯤 있을 것만 같았다. 사실은 말이야. 교차로의 신호가 몇 번 바뀌고 난 다음에 고 부장이 비로소 나를 바라보았다.

“가끔 이런 게 생겨났으면 할 때가 있긴 했었어. 오 대리는 그런 거 없었나?”

나는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터트리고 맞다고, 그런 황당한 생각을 자기 전에 자주 했다고 솔직히 밝혔다. 그치? 많을 거라니까. 고 부장은 상태창을 꺼버리고 몸을 돌려 난간에 등을 기댄 채 배를 하늘 쪽으로 내보였다. 팽팽히 늘어나는 셔츠의 표면과 아슬아슬한 단춧구멍 사이의 실밥들이 41.59%의 건강을 가시적으로 보여줬다.

“나는, 뭔가 성장하는 재미가 있을 거 같아서 그랬던 거 같아. 우상향이라 해야 하나.”

고 부장은 무언가를 회상하듯 잠긴 눈으로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응시했다. 가까이 여의도 한강 공원이 있었고 이제는 63스퀘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63빌딩이 스카이라인 사이에서 건재함을 뽐내고 있었다. 저 큰 건물도 텅하니 비어있을 거란 생각을 하자 수족관 속 물고기들이 걱정되었다. 예전엔 저기 주변이 다 흙밭이고 풀밭이었는데, 자네는 모를 거라고, 고 부장이 회한에 잠겨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담배를 다 태우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을 땐 사무실 전체의 전기가 나가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아직 작동 중이었다. 중앙에서 배전을 제어한 모양이었다. 고 부장과 나는 당혹스럽게 사무실을 서성이다 함께 1층으로 내려가 시설관리실을 찾았다.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경비원이 우릴 보고 흠칫 놀라더니 임원으로부터 건물을 봉쇄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2

소원을 빈 것은 아닐까.

집에 돌아와 생각했다. 누군가 황당한 소원을 빈 것은 아닐까. 계시록에 예견된 종말이라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것은 절대자의 방식이라기엔 유치했다. 차라리 소원. 베개를 베고 잠들기 전 사람들이 하는 망상. 고 부장의 말처럼 나도 있었으니까. 어느 날 세상이 뒤집히고, 우연한 기회에 초능력을 얻고, 그 능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에게 환호받는 그런……. 소재는 대개 그 날 본 만화나 영화였고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다른 사람이 알게 된다면 아주 민망할 상상이었다.

메신저 어플을 열자 내게 안부를 물어온 사람의 메시지가 몇 개 도착해 있었다. 내용에 하나하나 답장을 보내다가 왜인지 도와 호의 근황이 궁금해졌고 그들의 프로필을 찾았다. 호의 프로필에는 각지에서 찍은 여행 사진과 음식 사진, 레저 스포츠를 즐긴 사진 등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반면 도는 말끔한 증명사진 한 장과 생뚱맞게도 화훼 공판장의 번호를 올려 둔 상태였다. 채팅방의 목록을 한참이나 뒤진 끝에 셋이 모여 있는 단체채팅방을 찾아내었다. 육 년 전 OTT 계정을 공유할 사람을 찾는 호의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대화가 끊겨 있었다. 현실계라면 이런 긴 시간의 방치는 반드시 먼지와 마모를 동반하겠지만, 이 전자 상의 공간엔 먼지도 마모도 없었다. 육 년이라는 시간의 틈새만 고스란히 있을 뿐이었다. 충동적으로 용기를 내 메시지를 적어 보냈다.

다들 지금 뭐 해.

오래지 않아 호에게서 먼저 답장이 왔다.

너는 뭐 하냐.

 

 

빨간색 마세라티 한 대가 요란한 배기음을 내며 공원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설마 아니겠지 했는데 설마 아니지 않고 호가 운전석에서 내려 손을 흔들었다. 예상 못 한 모습에 아연함이 일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성공한 친구를 축하해주지 못하고 속 쓰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얼마나 한심해 보이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질투하지 말자고, 호는 호 나름대로 내가 모르는 인내와 노력이 있었을 거라고, 속으로 재바른 소리나 하며 걸어갔다.

하지만 씹을 것 없는 입안의 이가 점점 맞물려가면서 여지없이 턱에 전해지는 치악력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나는 내가 그런 종류의 사람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제가 편리한 순간에만 어른스러워지는 사람. 즐거움을 찾을 때는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하고 잔혹하다가도, 초라하고 남루해질 때만 부처를 닮으려 애쓰는 사람. 그래서 진정으로 한심해지는 사람. 호가 차체에 가려진 몸을 드러내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너무 호들갑스럽지 않게, 가능한 우호적인 목소리로 인사했다. 호는 맥락 없이 저 혼자 웃음을 터트리더니 엄지로 뒤에 있는 마세라티를 가리켰다.

“저거? 내 꺼 아냐. 회사 차야.”

우리는 공원주차장에서 짧고 열의 없이 근황을 주고받았다. 그 뒤엔 호가 연희동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을 보여줄 겸 거기서 같이 점심을 먹자고 제안했다. 호의 사무실은 궁금하지 않았고 거기서 둘이 점심을 먹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었지만, 마세라티의 승차감이 궁금해 나는 수락했다. 호는 용산 공원 근처를 한 바퀴 돌고 서울역으로 빠져나간 뒤 신촌을 거쳐 최종적으로 연희동을 향했다. 연희로에 접어들자 중학교 하나를 경계로 키 낮은 주택가가 등장했다. 거기 어디에도 사무실로 쓰일 빌딩 같은 건 보이지 않았는데 호는 목적지에 다다른 것처럼 속도를 줄여가며 더 깊숙이 들어갔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넓은 정원과 지하주차장이 딸린 이 층짜리 단독 주택이었다. 지하주차장에서 내려 중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구조는 가정집이지만 풍경은 묘하게 사무적인 공간이 나타났다. 정확히는 일종의 촬영 스튜디오 같았다. 언뜻 봐도 수상한 곳이라 발을 들이자마자 급격히 후회가 밀려왔다. 호는 아무렇지 않게 부엌으로 가 냉장고를 열고 팩에 든 샌드위치를 꺼내 식탁에 올렸다.

“여긴 뭘 하는 데야.”

이번에는 조금도 우호적이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상한 소리가 나올 경우, 특히 ‘잘 안 알려진 스타트업인데’ 같은 대사가 나오면 즉시 이곳을 빠져나갈 요량으로 허벅지와 무릎을 팽팽히 당겨두었다.

“사기꾼들이 사기 치는 데야.”

딱 보면 모르냐. 호가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고 으이구으이구 손가락질했다. 그런 대답은, 뭐랄까, 방금 타고 온 마세라티처럼 굉장한 속도감을 지닌 급발진이라 대화의 흐름을 영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나는 얼어붙은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호가 샌드위치를 씹는 모습만 지켜보았다. 호는 물끄러미 얼굴을 마주하다가 손에 대강 집히는 대로 팸플릿을 쥐고 내게 건넸다.

[Young & Rich Experience Workshop]

쓸데없이 영어가 많고 구체적으로 무슨 프로그램을 하는지에 관한 설명은 없었다. 호는 대단한 게 아니고 그저 강의와 집구경을 합친 일종의 체험회라고 말해주었다. 젊은 나이에 성공한 부자의 성공 스토리를 듣고 덤으로 인스타에 올릴 사진 몇 장 건져가는 게 목적인. 고작 그런 구성에도 가격이 무려 7만 원이었고 심지어 매번 예약이 가득 찬다고도 덧붙였다. 거기까지 듣고 너도 성공한 영 앤 리치인 척 강의하냐고 묻자 호는 무슨 소리냐는 듯 자신은 그런 걸 하지 않는다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곳에 오는 멘토들은 전부 진짜 영 앤 리치들이라고.

“그럼 사기가 아닌 거 아냐?”

호는 주위에 듣는 사람도 없는데 굳이 몸을 숙여 속삭였다.

“얘네들. 사실 자수성가한 거 아니야. 다 부모 돈으로 사업하면서 아닌 체하는 거야.”

 

 

용산으로 돌아오는 길에 호는 ‘던전앤드래곤즈’에 대해 알고 있냐고 내게 물었다. 난데없이 왜 보드게임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 못 하는 내게 호는 작금의 사태가 던전앤드래곤즈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미국의 게임사 TSR이 1970년대에 출시한 그 보드게임 시리즈는 게임 역사상 최초로 ‘스탯 시스템’을 도입한 게임이고, 거기서 고안된 최초의 능력치 여섯 개가 지금 상태창에 나타난 능력치와 완전히 동일하다는 것이었다. 휴대전화로 검색해보니 과연 그 말대로 던전앤드래곤즈와 이 사태를 연관 짓는 수천 개의 글이 쏟아졌다. 이럴 때일수록 빠르게 적응하고 변화하는 사람이 되어야 해. 호는 갑자기 성공담을 강연하는 강사처럼 비장한 음색으로 말했다.

“생각을 해봐라. 세상에 상태창이 왜 생겼겠냐. 만화나 소설 속에도 갑자기 상태창이 등장하잖아. 그 상태창의 본질이란 게 뭐야.”

나는 상태창의 본질이라는 거창한 사색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호가 굉장히 뜨거운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는 통에 일단은 떠오르는 대로 성장이라고 답했다. 호는 내 답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쓴 것을 가득 씹은 표정을 짓고, 야 그거는, 아니지. 너무 아니지. 짜증을 냈다.

“그거야말로 일종의 프로파간다지. 기득권이 만든 함정. 제도에 순응한 채 노력하란 말이랑 뭐가 달라.”

나는 이야기가 그렇게까지 가나 싶어 황망하게 기분이 상했다. 그럼 네가 생각하는 상태창의 본질은 무엇이냐고 되묻자 호는 잠시 심호흡을 하곤 ‘혁명’이라고 답했다.

“내가 상대하는 영 앤 리치들, 강의료 사실 걔들한테 푼돈이야. 근데 왜 와서 강의하는지 아냐? 내가 보면서 느끼는데. 걔들 재밌어. 재밌어서 하는 거야. 뭐라도 된 척. 남 앞에서 설교질하는 게. 나는 정당하게 잘 되었고. 니들은 아니고. 부러워하고 샘내는 거 보려고. 근데 그 새끼들 지금 어떻게 됐는지 아냐. 싹 다 잠수탔어. 전화도 안 받아. 상태창이 생겨서 숫자들이 낱낱이 보이잖아. 좋은 시절 끝난 거지.”

호는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상태창을 잣대로 인간을 재단하는 사회가 온다면 어쩐지 으스스할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호의 말처럼 새치기를 통해 올라선 사람들, 내가 다니는 회사만 해도 있는 오너의 혈족들이 떠올랐고 그들의 숫자가 몹시 궁금해졌다.

 

3

도에게서 문자가 온 것은 오후 네 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미안. 일하느라 늦게 봤네. 나는 도가 쑥스러워 오랫동안 고민을 하다 답장을 보냈으리라고 짐작했다. 아무리 고 부장처럼 관성적인 인간이라도 이런 난리 통에 몇 시간 넘게 핸드폰을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것은 믿기가 어려웠다. 구체적인 위치를 묻는 말에 도는 잠실구장에 있다고 답했다. 이미 진 빠지는 하루를 보낸 참이었고 아침에 회사 옥상에서 본 한강대교의 하행선이 떠올라 선뜻 거기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왜 거기 있냐. 거기서 뭘 하고 있냐, 몇 차례 더 문자를 보내자 도는 재깍재깍 답장을 해왔다. 일하고 있어. 그라운드를 정비해. 얘는 이런 상황에서도 정상 근무를 하는구나. 어떤 의미에서 감탄이 일었다. 예전부터 도는 우직한 성격이었으니까. 그런 도에 관해서라면 지워지지 않는 기억도 하나 있었다.

봉고차를 쫓아 달려가는 도의 뒷모습.

우리의 자취방은 학교 근처 쪽방촌에 있는 낡은 원룸이었다. 그렇게 말하고 싶진 않지만, 그런 부류의 동네에 살아서 겪게 되는 불쾌한 사건이 있었다. 길거리를 걷다가 학원 출하원용 봉고차가 옆으로 지나가면 십중팔구 뒷좌석의 창문이 열리면서 초등학생들이 야 이 병신 새끼들아아아아아, 소리치는 장난을 쳤다.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린 채로. 짓궂은 장난쯤으로 취급하기엔 영락없이 불쾌했다. 당한 날이면 기분이 내내 좋지 않았다.

도와 함께 집으로 귀가하던 어느 날에도 그 일이 한 번 있었다. 노란 봉고차가 지나가면서 또 야 이 장애 새끼들아아아, 욕을 뿌리고 지나갔다. 이 거지 동네, 못 배워먹은 애새끼들, 전부 질리지 않냐고 짜증이 솟구쳐 뒤따라오던 도에게 말했다. 돌아보니 도는 신발 끈을 고쳐 매고 있었다. 뭘 하냐고 물을 새도 없이 도가 일어서 달리기 시작했다. 봉고차를 쫓았다. 왜 달리냐고 물어도 돌아오는 답은 없고 어안이 벙벙해져 따라서 뛰었다. 차를 어떻게 따라가나 싶었는데 도는 집념 있게 달려가 결국 500m 앞 아파트 정문 신호등에서 그 봉고차를 따라잡았다. 나는 개처럼 숨을 헐떡이며 뒤늦게 합류했다. 도가 봉고차 안에 몸을 들이밀고 주동자들을 부르고 있었다. 친구야. 너. 너 아니냐. 너지. 일어나. 그 옆에 너도. 같이 했잖아. 빨리 사과해. 기사님 기다린다. 나는 숨이 차올라 설교고 뭐고 못 하고 그냥 넙죽 사과만 받았다. 도는 조금도 부치는 기색이 없었다. 맑고 개운한 얼굴로 웃고 있다가 다시 출발하는 차를 향해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알고 보면 착한 애들이야.”

그때는 어렸지, 하며 털어낼 수 없는 기억이 내게 있다면 가령 이런 것이었다. 동갑인 도에 비해 나는 왜 그렇게 어른스럽지 못했는지. 화가 솟구친 순간 왜 그 동네의 소득수준과 교육수준에 관해 말했는지. 몇 가지 변명거리를 떠올릴 수는 있었다. 그때 도의 어른스러움은 아무래도 도의 육체, 빠른 달음 솜씨와 아이들은 물론 운전기사마저 압도할 만큼의 덩치가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나도 그런 몸이 있었다면 똑같이 행동했을 거라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어른스러움이란 결국 여유에서 나오는 셈이고 물질적 여유든 육체적 여유든 그게 없는 인간이란 어른스럽지 못하게 되는 일인데, 애들 장난에 맘 상하는 어른. 그것은 돈도 없고 뭣도 없는 인간이란 뜻일까.

 

 

잠실 구장의 중앙문은 잠겨있을 뿐 아니라 PE 펜스 가로막이가 살벌하게 처져있어 가까이 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도에게 언질 받은 대로 3루 외야석 쪽으로 돌아 1-2번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이용객은 당연히 한 명도 없었다. 시간이 멈춰선 듯한 기이한 적막이었다. 소란스럽고 꽉 차던 공간 어디에도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으스스한 분위기였다. 언젠가 그런 증상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평소 인파가 붐비는 공간에 홀로 남겨지는 경우 인간이 겪는 불안과 공포감이 있다고. 나는 두려운 상상을 하게 만드는 탓일 거라 생각했다. 예컨대 아무도 없는 이차원 세계에 홀로 떨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식의. 황당한 상상이었지만 상태창이 있는데 이차원이라고 없을 게 뭐냐 싶었고 거기까지 망상하고 나니 정말 두려웠다. 발걸음을 서둘러 관중석을 향해 올라갔다. 지상으로 올라오자 볕이 쏟아졌고, 압도적인 필드의 녹색이 눈에 들어왔다. 마운드 한가운데서 누군가 혼자 그라운드를 정비하고 있었다. 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멀리서 도가 나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가까이서 본 도는 땀에 한가득 젖어있었다. 마운드의 상한 흙을 삽으로 퍼 외발 수레에 담고 포대에 담긴 새 흙으로 교체하는 작업을 반복 중이었다. 등판에 허옇게 인 소금기가 보였다. 목덜미와 볕에 노출된 팔 부근은 붉었다. 마운드 위로 올라가려 하자 도가 애써 웃으면서 오지 말라고, 흙을 밟으면 안 된다고 나를 멈춰 세웠다. 직접 내려와 내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네. 땀 냄새가 후덥지근한 공기를 타고 코를 훅 찔렀다. 웃느라 벌어진 입 가운데 앞니 끝이 살짝 깨져 있었다.

“그늘로 좀 가자.”

도가 손으로 내 등을 툭 쳤다. 축축한 습기가 도장처럼 등에 남아 감돌았다. 우리는 원정팀의 더그아웃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도의 얼굴에 부쩍 늘어난 주름과 내가 모르는 몸의 흉터들이 신경 쓰였다. 어색한 공기가 우리 사이에 감돌았으나 도는 개의치 않고 이온 음료를 마시며 멀리 1루 베이스를 쳐다봤다. 나는 한참이나 말을 고른 끝에 겨우 한 마디를 꺼냈다.

“이런 데서 일하면 연봉 꽤 받겠다.”

“나 여기 직원 아니야.”

도는 너털웃음을 짓고 아침에 급히 연락을 받아 온 거라고 덧붙였다.

“예전에 잠깐 알바로 일했었거든. 구장에서 내 번호를 알아.”

도는 대학 졸업 후 이런저런 계약직을 전전하며 안정적인 직장을 알아보다 현재는 아는 형과 함께 화훼공판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늘도 양재에 갔어야 했는데 사장 형이 갑자기 고향으로 내려가는 바람에 이곳으로 출근하게 되었다고. 급하게 부른 만큼 구장에서 돈은 많이 불렀겠거니 했는데 도는 그것도 아니라고 했다. 일당으로 십오만 원을 받고 이 일을 하고 있었다.

 

 

“걔는 좀 어디가 짠하지 않냐?”

호는 도를 두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우리 둘 다 사소한 일로 도와 다투고 거리가 조금 멀어졌던 시기였다. 걔가 뭐 어때서. 괜히 뒷말을 나누는 기분이라 호응하지 않고 나무랐다. 호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얘가 하는 짓이, 좀 그래. 맨날 공부하는데도 성적이 그게 말이 되냐. 가만 보면 머리에 든 게 좆도 없어. 아니 진지하게 문제 있다니까.

나는 정말 그런가 생각했다. 초중고 교육 과정을 이수하는 내내 운동을 병행하느라 도는 학업 기초가 다른 동년배에 비해 부실한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부분은 차치하고서도 도에게는 의심스러운 군데가 있었다. 대화의 초점을 잘 맞추지 못했고 복잡한 인과가 포함된 이야기를 접하면 앞뒤 맥락을 짜 맞추는 데에 늘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를 몹시 어려워했다. 함께 놀란의 영화를 감상하면 혼자서 자꾸 딴소리를 하는 바람에 같이 본 인원들이 도에게 줄거리를 다시 설명해줘야만 했다. 나는 가급적 악감정을 배제하고 네 말에 일리가 있다고, 그냥 관찰된 사실만을 논하자면 경계선 지능 장애가 의심된다고 답해주었다.

그뿐이었는데 그 날 이후로 과에서 ‘경계선’이란 말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바보 같은 실수를 하거나 답답한 언행을 보이면 “너도 경계선이냐?”라고 묻는 게 학과생들의 놀이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셋은 다시 화해했지만 경계선이란 유행어는 사라지지 않았고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조바심이 났다. 혹시 도가 무언가를 눈치채진 않았을까.

도는 여전히 마운드에서 넉가래를 이용해 흙을 고르게 피고 있었다. 작업을 다 끝마치고서 내려올 기세였다. 담장 너머로 노을이 침전하기 시작했다. 조명등엔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희붐하게 꺼져가는 저녁 밤 사이의 청색 빛에 기대어 도는 마무리 작업에 들어갔다. 보여달라고 말해도 괜찮을까, 상태창을. 어쩌면 도의 주위엔 도의 순박함과 어리숙함을 이용해 노동력을 갈취하려는 사람만 있을 지도 모르니까. 나는 이런 경우 말하지 않고 지나가는 편이 후회를 남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마음이 쉽게 정리되질 않았다. 진심으로 도를 아낀다면 말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온몸에 발진이 돋듯 걱정이 돋아났다. 사실을 직시해야. 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실을, 직시.

마음이 심란해 휴대전화를 꺼냈다.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아무 글이나 읽으며 시간을 때우려 했는데 때마침 눈에 띄는 기사가 있었다. ‘각성을 빌미로 한 피싱 사기에 주의.’ 제목을 눌러 기사의 전문을 확인했다. 특수한 능력을 부여해준다는 거짓말로 피해자를 꾀어 돈을 가로채는 범죄자 일당에 관한 기사였다. 중간엔 실제 피싱 사기에 쓰인 문자 내용이 첨부되어 있었다.

 

※필독※

상태창 일곱 번째 능력치 마력 각성법.

안녕하세요. 님은 지금 일생에 단 한 번뿐인 기회를 마주하셨는데요. 상태창에는 특수한 치트가 존재합니다. 매우 복잡한 명령어지만 상태창이 생겨난 이래로 어떤 사람이 이 단어를 우연히 발음했고 그 순간 첫 번째 마력 각성자가 생겨났습니다. 저희는 비밀리에 이 단어를 입수했고, 님을 오랫동안 지켜봐왔고 이번 기회에 특별히 기회를 드리려 합니다. 물론 님도 작은 성의를 보여주셔야 합니다. 아래 첨부된 가상 화폐 지갑으로 여기 있는 코인 중 하나를…….

 

믿을 수 없을 만큼 유치한 데다 비문투성이라 이런 사기를 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이나 어떤 환상에 빠져 살고 있는지 훤히 짐작되는 글이었다. 댓글창을 열자 사기에 당한 피해자들이 남긴 증언들이 속출했다. 상단에 고정된 베스트 댓글 중에는 천만 원에 가까운 피해를 봤다는 사람까지 있었다. 대부분 안타까운 마음을 표했지만 으레 그렇듯 이런 유형의 피해자를 조롱하는 사람도 와서 대댓글을 남겼고 그 때문에 댓글창은 한바탕 난리가 벌어진 뒤였다. 보통 이런 장황한 언쟁은 무시하는 편이었지만 원 댓글을 남긴 이용자가 펼친 특이한 논리 때문에 기록을 드문드문 읽어보게 되었다.

-진짜 한심하다 한심해. 인생 쉽게 살려 하니까 벌을 받지. 남들은 열심히 경쟁해서 얻는 걸 거저 먹으려고 하니까.

-나도 내가 한심한 거 잘 아는데 인생 쉽게 살려는 게 왜 나쁜 짓이냐. 그럼 천재들은 뭐고 연예인들은 또 뭐야. 어차피 다 유전자빨 아니냐 세상이. 근데 치트 찾는 게 왜 나쁘냐. 엄마 뱃속에서 타고 나오면 안 나쁜 거고 나중에 얻으면 나쁜 거냐.

어?

반박을 해봐. 입 처닫지 말고.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한번 반박을 해보라고.

 

4

 

땀을 모두 씻어낸 도의 몸에선 은은한 비누 향이 났다. 찬물로 씻었는지 어깨가 가까워질 때마다 서늘한 기운이 계속 살갗에 닿았다. 우리는 종합운동장역을 통해 대로를 건너고 아시아 공원을 가로질러 계속 걸었다. 도가 안내하는 길이었다. 다시 맞은편에 은행을 둔 건널목이 나왔고, 거길 지나자 올림픽로와 백제고분로, 석촌호수로가 모두 만나는 낡은 번화가로 들어가게 되었다. 길은 새마을전통시장까지 이어졌다. 다른 번화가와 달리 정상 영업하는 가게가 꽤 많았다.

도는 예전에 자주 들렸던 칼국수 집을 찾아 이곳에 왔고, 나는 솔직히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 전통시장이라 부르지만, 엄밀히 아케이드형 시장은 전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전통시장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들이 자주 실망하고 떠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로는 특히 더 그랬다. 내 또래의 지인 중에도 전통시장을 즐겨 찾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전통시장의 상인들은 원산지와 저울을 속이고 유통기한이나 위생상태가 의심스러운 상품을 판다고 기피 했다. 신뢰할 수 없는 곳. 잘못 먹고 탈이라도 나면 어떻게 증명할 것이며 무엇으로 배상받을 수 있나. 돈도 얼마 없는 사람들한테. 가난해. 가난하고 무지해. 거기 그런 게 있어.

“여기야.”

도가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갔다. 좁다란 방에 입식으로 된 식탁 두 개와 물병을 넣는 음료 냉장고가 전부인 식당이었다. 방 한쪽 끝에 천장 절반 높이로 쌓은 가벽을 세워 부엌을 분리해둔 구조였다. 안에서 허리를 다 펴지 못할 만큼 나이든 할머니가 나와 도를 반겼다. 달력 이면지 뒤에 반듯한 붓글씨로 쓴 간단한 차림표가 벽에 붙었고 바닥에는 풀기가 있어서 발을 뗄 때마다 밑창 떨어지는 소리가 소곤소곤 들렸다. 도는 칼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 할머니는 손을 조금 떨었지만 의외의 완력을 발휘해 솥에 한가득 물을 붓고 주방 라이터로 불을 지펴 조리를 시작했다.

칼국수는 다시마 육수에 감자와 애호박, 바지락을 넣고 미원으로 간 맞춘 것에 불과했지만 그뿐임에도 놀랍도록 감칠맛이 났다. 감자는 부드럽고 국물은 따스해서 배도 데워지는 사이에 머리 위는 점점 아늑해 이참에 경계선, 이라는 말을 꺼낼까 하다가 조금 부드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너는 아무렇지 않냐.”

지금 이 사태가. 상태창에 나타나는 잔인한 숫자들이. 도가 한 젓가락 크게 칼국수를 씹어 넘기고 금세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답했다. 자신은 이미 그게 존재하는 세상에서 한 번 살아봤다고.

“너 스탯이 통계란 뜻인 거 알아?”

도가 휴대전화를 꺼내서 스탯티즈라는 이름의 야구 통계 사이트를 보여줬다. 타자의 타율, 투수의 방어율 등을 계산해서 갱신해두는 사이트였다. 야구 선수들은 다 각자의 스탯이 있어. 나도 있었어. 도의 선수 시절 성적에 관해서라면 나도 약간은 아는 바가 있었다. 도는 1학년 1학기까진 WAR 지표가 양수였으나 그 뒤부터는 쭉 음수였고 끝내 양수로 전환하지 못했다. 그것은 야구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지표로 일종의 승리 기여도를 계산한 자료였다. 지표가 높을수록 우수한 선수라는 뜻이지만, 성적이 저조한 선수라면 숫자가 낮다 못해 마이너스까지 내려갔다. 타자가 투수의 공을 치면 타자의 WAR은 오르고 투수의 WAR은 내려간다. 반대로 치지 못하면 투수의 것이 오르고 타자는 내려간다. 모두 도가 직접 들려준 이야기였다.

“예방접종 같은 거네.”

“그렇지.”

“그래도 그거랑 이거랑 같나.”

“같아. 하나도 안 다르고 똑같아.”

도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서 더 물고 늘어지지는 못하고 얌전히 국수만 비웠다. 나올 때 밥값은 도가 냈다. 내가 먹은 몫을 내겠다고 해도 한사코 거절하는 통에 그러지 못했다. 영 마음에 걸리면 대신 커피를 사라고 제안했다. 값이 대강 비슷하겠다 싶어 받아들였다. 카페는 가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번에도 도가 안내했다. 이런 곳에도 카페가 있을까 싶으며 갔는데 정말 에스프레소 머신까지 구비 해놓은 살림 작은 카페가 있었다. 쪽창을 사이에 두고 장사해 안에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직접 원두를 볶는지 그슬린 콩 냄새가 사방에 동심원 형태로 진동을 했다. 또 그 냄새가 방앗간을 지날 때 나는 고소한 내음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결국은 다 곡물이구나, 새삼 환기하게 되고.

 

 

왔던 길을 거슬러 다시 아시아 공원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어둠이 지극해 잠시 발을 멈췄다. 불이 켜진 가로등이 하나도 없었다. 새카만 그림자로 그려놓은 나무와 나뭇가지와 나무 이파리와, 전위적인 조형물과 그 주변을 뒤덮은 풀잎과 생명인지 아닌지 모를 날아다니는 작은 점들이 눈이 인식할 수 있는 모든 범위였다. 야 살인마 나오겠다. 나오면 네가 싸워라, 나는 뒤에서 신고할게.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우리는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밤바람이 불어 사방에 수풀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너무 어두워 모든 사물은 검게 엉겨 붙은 불꽃 같았고 원근감은 조금도 느껴지질 않았다. 점선면의 공간. 이차원의 세계. 도를 만난 직후부터 자꾸 별세계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도준아.”

“응.”

이제는 도의 얼굴도 한 덩이의 검정에 불과해 주름이나 깨진 앞니는 보이지 않았다. 오직 목소리를 내는 윤곽뿐이었다.

“너는 네 스탯이 마음에 드냐?”

도는 잠시 멈칫했으나 금세 아무렇지 않게 걸었다. 그리고 나긋한 목소리로 솔직하게 자신은 그것을 본 기억을 잊었고, 두 번 다시 확인하지 않을 셈이라고 대답했다. 이걸 좋아하는 사람은 이걸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일 거야.

“나도 예전엔 이걸 좋아했던 때가 있었어. 언제였냐면 고등학생 때. 스탯이 좋았을 때. 주위에 있는 애들이 다 내 밑이라는 걸 알 수 있었거든. 다 닥치게 만들 수 있었거든. 스탯은 그러려고 만든 거야. 줄 세우려고. 근데 지표가 떨어지고 나니까 그게 너무 무섭더라. 보고 싶지 않게 되고 우연히 볼 일이 생기면 눈을 돌리게 되고. 누가 아무 생각 없이 내 스탯을 말하면 죽여버리고 싶고. 그래서 알았어. 내가 나를 알게 되었어. 나는 그냥 남들 위에 서는 걸 좋아했던 거야. 야구가 아니고. 그런 걸 좋아하는 인간이었던 거야.”

어디선가 풀벌레 우는 소리가 찌르르하게 도의 음성 사이에 끼어들었다. 물큰한 물비린내가 나 호수가 바로 옆에 있음을 알 수 있었지만 고개를 돌려보면 거기엔 우주의 단면 같은 검은 수평뿐이었다. 나는 이제 그걸 다 잊고 살 거야. 도가 말했다.

“아무도 음수로 만들지 않고.”

출구가 가까웠다. 대로변엔 상가 조명의 밝은 빛이 발하고 덩굴식물 터널이 통로처럼 바깥을 향해 나 있었다. 터널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연속적으로 반원 고리 형태의 아치를 나열해둔 것이라 그 아래를 비춘 불빛이 줄무늬였다. 한 겹의 고리를 통과할 때마다 이쪽 세계에서 멀어질 것이었다. 완전히 벗어나기 전에 사과하고 싶었다. 경계선, 이란 말에 대해. 그러나 도무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고 다만 그걸 하고 싶어 안간힘을 쓰는 와중에 도가 불쑥 사선 방향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저기 봐. 빌딩 틈새로 잠실대교의 상행선을 꽉 채운 차량의 행렬이 보였다.

도시를 떠났던 이들이 다시 돌아오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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