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호수에는 거북이가 산다
갈원경
습도도 높고 더위도 심한 곳이니 기왕이면 겨울에 가는 게 나을 거라고들 했다. 물가가 싸니까 돈 아끼지 말고 펑펑 써도 얼마 안 된다는 사람이 있었고 부르는 가격에 절반은 깎고 들어가야 바가지를 안 쓰니까 각오를 단단히 하고 가라는 사람이 있었다. 과일주스가 맛있고 아이스커피가 예술이라는 사람이 있었고 찬 거 얼음 든 건 배탈 날 수 있으니 꼭 지붕 있는 가게, 외국인 메뉴가 있는 곳에서 찬 걸 먹으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뭐든 맛있으니 호텔 조식은 신청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음식에서 화장품 냄새가 진동을 하니까 호텔조식을 꼭 먹고 다니라는 사람이 있었다. 한국인들이 그렇게 많이 간다는 곳인데 한국에는 그렇게 많은 쌀국수집이 있는데 가서 먹어 보면 여기와는 전혀 다를 거라는 말을 칭찬으로 하는 사람과 걱정으로 하는 말이 다 있었다.
그래도 딱 한 가지 주제에서는 모두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같은 말을 했다. 혼자선 힘들 거야. 초행이라면서 어떻게 혼자 가려고. 그다음은 말이 갈렸다. 일행을 구해, 거나 차라리 패키지를 가는 건 어때. 나는 그 어느 쪽의 조언도 지키지 않았다. 여름 휴가 기간에 열심히 항공권을 검색하고 있었던 걸 갑자기 큰돈이 들어가는 일이 생겼고 일정은 겨울로 바뀌었다. 새해부터 근무지가 바뀔 예정이어서 12월까지 쓰지 못한 연차를 모두 모았다. 곧 이곳을 떠날 사람에 대한 배려였는지 10일의 휴가를 내겠다는 말에 상관들은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누구랑 같이 가는데?”
직속 부장이 물었다. 그 표정 끝에 묘한 웃음이 걸렸다.
“혼자 가는데요.”
부장은 피식, 웃으며 날 보았다.
“누가 동남아를 혼자 가.”
나는 그 말에 베트남도 동남아에 속하는구나 깨달았다. 동남아라면 태국과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같은 나라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캄보디아와 베트남은 국경이 맞닿아 있었다. 그 애와 캄보디아를 함께 갔을 때, 그 애는 앙코르와트의 개발 복원 사업에 베트남이 많이 참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수시로 스콜을 피해 천막 안으로 들어가던 여름이었다. 초록이 너무 짙으면 검정에 가까운 색이 된다는 걸 거기서 알았다. 옷이 다 젖어서 택시에 오르면 기사는 댓츠오케이, 굿 레인, 이라고 말했다. 너희는 이 나라의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온 거야. 비가 너무 많이 온다고 투덜거리는 그 애에게 기사는 그렇게 말했다. 기사는, 자신의 소개에 의하면 그 애와 동갑이었지만 그 애보다 한 뼘은 작았다. 기사의 이름을 한동안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기억나지 않았다.
“혼자 못 가라는 법도 없죠.”
“알았어, 알았어. 요새 뭐 이런 거 캐물으면 갑질한다는 소리나 듣지. 재미있게 놀다 와요.”
부장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올해 초에 분명 부장은 내가 여기서 정규직 전환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러려면 올해 업무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정규직들이 모두 기피하는 업무를 맡기면서 이걸 잘 해 내는 게 정규직으로 이어질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믿었던 것은 아니었다. 계약직의 업무 담당 희망서가 반영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올해는 이 일을 하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모양이라고 생가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일말의 희망은 갖고 있었나보다. 정규직 전환이 아니라 다른 근무지로 옮긴 재계약 제안을 받고 아주 잠시 말문이 막혔던 걸 보면.
“다낭 가요?”
계약직인, 나보다 2년 늦게 계약을 시작해서 아직은 매년 11개월씩 계약을 하는 일을 몇 년만 겪으면 정규직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는, 자신은 나와는 다를 것이라고 믿고 있는 김현이 물었다.
“아뇨, 하노이.”
나는 베트남을 간다고도 말한 적이 없지만, 연차 사용 신청서를 쓰면서 사유에 적은 베트남 여행이라는 문구가 모두에게 퍼질 거라고는 예상했으므로 놀라지 않았다.
“에이, 요새는 다낭이죠. 아, 달랏도 좋다고 하긴 하던데.”
“벌써 숙소랑 다 잡아서요.”
“하롱 베이 투어도 가세요? 그거 별로니까 가지 마세요. 남해 다도해 보는 게 백 배 나아. 밥 먹으라고 주는데 쌀은 막 날라다니고, 이 빠진 그릇에선 화장품 냄새 진동하고. 어쨌든 현지인 식당 잘 피하고요.”
김현은 슬쩍 반말을 섞으며 내게 웃어 보였다. 나는 웃지 않았다. 짐을 곧장 챙겨서 사무실 문을 나서는데 등 뒤로 김현과 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와, 겨울이네 겨울. 저러니까 5년이나 있었으면서 재개약 못 되지, 안 그래요 부장님?”
“애인이랑 간다고 하면 누가 뭐라고 하기라도 하나, 말도 안 되는 거짓말까지 하고. 저러니 정이 안 가지. 김현 씨는 저러지 마. 정 떨어진다.”
“아이고 그럼요 부장님.”
나는 사무실 문을 다시 열고 들어가지 않는다. 김현은 어쩌면 정말로 정규직으로 채용될 지도 모르지. 하지만 입원한 첫날 계약종료 통보를 받은 최영신 씨처럼, 사람은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른다. 어쩌면 나는 새 근무지에서 다시 김현 씨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나보다 먼저 계약 종료 통보를 받았던 사람들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는 그에게 필요 이상의 친절을 베풀 생각이 없다.
공항에서 롱패딩을 맡긴 뒤에 국제현금카드와 환전한 베트남 동화를 챙기고, 30리터 배낭을 수화물로 부치고 작은 보조가방을 메고 비행기에 올랐다. 공항에서 받은 유심카드로 바꿔끼고 괜히 가이드북을 뒤적대다가 아주 잠깐 잠들었던 것도 같다. 샌드위치와 주스를 먹고 또 잠깐 잠들었다가 일어나니 노이바이 국제공항에 착륙하고 있었다. 짐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말대로 다낭이 떠오르는 여행지여서인지, 겨울이 혹시 여기서는 비수기인 것인지, 여행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생각만큼 많지는 않았다. 오히려 장기간 체류를 위해서 오는 사람인지 커다란 이민가방이나 30인치 수트케이스가 몇 개나 화물 선반에서 돌았다. 카키색 30리터 배낭이 금방 눈에 띄어서 곧바로 배낭을 메고 공항 밖을 나섰다. 겨울이지만 공기는 차갑지 않아서 가을 날씨 같았는데 베트남 사람들은 황급히 겉옷을 여몄다. 오리털 패딩에 목도리를 두른 모습이 꼭 나와는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들 같았다.
왜 베트남이냐고, 거기 아는 사람이라도 있냐고, 거기 한국 사랍들이 사업하러 많이 들어가 있다고 묘하게 웃던 옆자리 동료가 떠올랐다. 자기 지인이 한국에서 가게를 몇 개를 연이어 날리고 결국은 가진 돈을 다 쓸어서 베트남으로 갔다는 묻지도 않은 말을 하며, 그래 너는 거기에서 어떤 실패자를 만날 생각이냐고 묻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살폈다. 한국에도 이제 연고가 있는 사람은 없는데, 외국에 있을 리가 있곘어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직장 사람들에게 그런 말은 하지 않아야 했다. 나는 이 일자리가 전부라는 절박함을 보이지 말 것. 나의 부당함을 함께 싸워 줄 사람이 없다는 걸 드러내지 말 것. 그 애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언제든 이 자리 같은 건 그만두어도 좋다는 느낌을 줘야 해. 그래야 너를 함부로 못 대해. 나는 되물었다. 까다롭고 성가시다고 재계약을 안 하면 어떻게 해. 그 애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정말 그만둬 버려. 너처럼? 그래 나처럼. 나는 그 애에게 웃음짓는다. 나는 너니까 그렇게 살 수 있는 거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했었다. 너는 아무 것에도 연연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너는 가끔 과보호하는 부모님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잔소리가 싫어서 구한 원룸에 결로가 생겨서 짜증난다고 말했다. 나는 힘들게 구한 오피스텔이 외풍이 심해서 침대를 창가에 둘 수 없다고 네게 말했다. 책상 대신 원형 테이블을 당근에서 오천원에 구해 놓았다고, 이케아 중형 러그가 원형 테이블이랑 제법 잘 어울린다고. 나는 대학 학자금 상환이 끝난 작년 초에 집을 보러 다니던 순간이 어쩌면 여태 지나온 시간 중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행복한 때였다고 말했다. 나는 너에게는 모든 것을 다 말했다. 언제든 돌아갈 곳이 있는 네게는 원룸의 불편한 부분이 더 눈에 들어왔겠지만 작년까지 학자금 때문에 세 끼를 먹지 못했던 내게는 오피스텔에 내가 고른 테이블을 놓을 수 있는 것만 해도 한없이 기쁜 일이었으므로 너에게는 들떠 이야기를 할 때가 더 많았을 뿐이었다. 너는 모든 것을 다 알았다. 나도 너의 모든 것을 다 알 셈이었다. 그런 줄 알았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숙소 주소가 적힌 종이를 건넸다. 기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내에 들어가는 고속도로 양쪽으로 익숙한 브랜드의 광고판이 줄지어 붙어있었다. 기사가 웃으며 말했다. 쌈송, 코리아. 엘쥐, 코리야. 나는 그냥 웃었다. 베트남의 성조는 중국어 성조보다도 복잡해서 아무리 간단한 회화라도 배워 오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고작해야 신짜오, 한 마디만 겨우 익혔다. 핸드폰의 통역 앱에 열심히 발음을 신경 써서 말해도 앱은 엉뚱한 단어를 쏟아냈다. 내가 듣기에도 샘플 발음과 내 발음은 높낮이도 발음도 다 달랐다. 그나마 신짜오 하나만은 그럴싸하게 인식했으므로 여기서 베트남 말은 그것만 할 생각이었다.
택시가 멈춘 호텔은 다른 건물처럼 폭이 좁았다. 택시비를 지불하자 별로 무겁지 않은 배낭을 굳이 자신이 들어주겠다고 하며 따라 내린 기사는 호텔 직원에게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호텔의 엘리베이터는 네 명이 타면 꽉 찰 것 같은 넓이였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방에 들어서자 습하고 더운 공기가 확 느껴졌다. 직원이 벽에 걸려있던 리모콘을 내게 건넸다.
“히터 스위치, 따뜻하게, 켜기, 끄기.”
한국어 설명에 용기를 내서 물었다.
“에어컨? 시원하게, 바람, 차게.”
“차게? 노, 윈터. 겨울. 히터 온리.”
직원의 조끼는 꽤 따뜻해 보였다. 그렇구나, 여기는 겨울이지. 나는 점퍼를 벗고 웃으며 직원에게 팁을 건넸다. 직원은 인사하고 웃으며 돌아갔다. 나쁘지 않은 방이었다. 원래 두 사람이 쓰던 곳인지 작은 침대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도마뱀 하나가 벽에 붙어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지만 놀라지 않았다. 캄보디아에 갔을 때도 겪었던 일이었다. 도마뱀은 해롭지 않다. 도마뱀은 내게 관심이 없다. 나는 창문을 열어 혹시라도 도마뱀이 지쳐 나갈지도 모르는 길을 터 주었다.
핸드폰에는 안테나 마크가 선명하게 떠 있었다. 10일간 1기가 데이터, 너는 여행을 갈 때마다 유심 카드를 미리 챙겼다. 초행 길에 공항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니까 우리 나라에서 사서 가는 게 마음 편하다고. 돈이 좀 더 들더라도 안전하고 편한 게 좋아. 내가 몇 살까지 살지도 모르는데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하긴 싫어. 너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너는 캄보디아의 시장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가방의 값을 깎는 사람이었다. 게스트하우스는 잠을 푹 잘 수가 없다고 말하는 너였지만 네가 미리 잡은 호텔은 하나같이 한국인들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중저가 호텔이었다. 너는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겠다고 했지만 나는 네가 현지인처럼 여행지에 녹아드는 것이 아주 먼 훗날에도 계속될 것처럼 보였다. 너는 아주 긴 리스트 속의 여행지들을 하나씩 지워가는 사람처럼 새로운 곳을 말하며 나에게 웹사이트 주소를 보내왔다. 갈래? 언제? 날짜와 함께 예상 여행경비가 왔다. 나는 거의 거절하지 않았다. 나는 먼저 어디에 가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언제 휴가를 낼 수 있는지 묻지 않았다. 너는 제안자였고 비기너였고 나는 동행인이었고 팔로워였다.
너의 다음 여행지는 어디였을까. 너의 리스트에 베트남이 들어 있었는지, 있었다면 하노이인지 호치민인지 다낭인지 나는 알 수 없다. 너는 대학 때 이미 유럽을 돌았기 때문에 EU에 속한 나라에는 더 이상 매력을 못 느낀다고 말했지만, 30대가 지나가기 전에 맞추픽추를 가고 싶다고도 했지만, 너의 리스트를 모두 알려주지는 않았다. 정해진 순서대로 그 안의 나라를 모두 돌고 싶다고 할 때 나는 네게 다음 나라는 어디냐고 물어보긴 했었다. 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 나라를 갈 때는 나를 동행인으로 생각하지 않는구나 생각했다. 나는 네 제안을 거절한 적이 없지만 네게 먼저 청한 적도 없기때문에.
호텔에서 도보로 갈 만한 거리에 있는 곳들을 둘러보고 해질 무렵에 돌아오니 호텔 로비에는 젊은 부부와 열 살 남짓한 아이가 함께 앉아서 뭔가를 마시고 있었다. 커피가 유명하댔지. 나는 가이드북에 적혀 있었던 말을 떠올렸다. 베트남은 세계 몇 위의 커피 산지랬더라. 로부스터 커피는 아라비아 커피보다 저렴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베트남식 연유 커피는 정말 매력적이어서 관광객들이 종종 베트남식 커피 필터를 기념품으로 사가기도 한다고. 너는 이런 나를 봤으면 웃었을 거다. 제발 여행까지 모범생처럼 하지 마. 무슨 시험 치는 사람 같아. 너는 어느 길이 유명하다고 나를 끌어 식당을 찾아가기도 하고 길에서 발견한 가게에서 물건을 고르기도 하면서도 아주 오래 여기 살았던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는데 나는 새 여행지에 올 때마다 가이드북 내용을 기억에서 더듬으며 긴장하곤 했다. 그런 나를 놀리는 걸 좋아하는 너를 보는 게 좋아서 나는 가이드북을 더 열심히 외웠다. 연유 커피를 먹으러 가자. 만 동 정도면 괜찮은 카페에서 맛있는 연유커피를 마실 수 있대. 그럼 너는 또 웃을 텐데. 또 공부해왔지. 정말.
나는 며칠간 하노이의 명소를 조금씩 찾아갔다. 문묘, 군사박물관, 민속박물관, 여성박물관, 성당 등. 식당은 검색하지 않았다. 가이드북에 있는 음식을 달달 외워서 점심 즈음에 본 적 있는 음식을 파는 게 보이면 그냥 들어가서 가이드북을 가리켰다. 사람들이 말했던 값보다 싼 곳도 있었고 가끔은 비싼 곳도 있었다. 하지만 메뉴판에 적힌 가격과 같았으므로 나는 아무 말 없이 값을 치렀다. 주인은 씨에씨에, 아리가토 둘 중의 하나로 답했다. 내가 당황하면 땡큐, 라고 했다. 그래서 이틀째부터는 그냥 뭐라고 답하든 당황하지 않고 그냥 웃으며 답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화장품 냄새가 뭘 말하는지 알게 됐지만 내게는 그렇게 거슬리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됐다. 네가 좋아하던 피순대 맛과 닮은 순대도 먹었다. 향이 강한 소시지도, 까나리젓을 닮은 액젓에 비빈 국수도, 달콤한 볶음밥도, 화전을 닮은 새하얀 전도. 매일 커피도, 과일주스도 한잔씩 마셨다. 나는 네가 함께 왔더라면 갔을 것 같은 곳을 빠짐없이 돌았다. 택시를 타고 시장에 가서 괜히 네가 좋아할 것 같은 가방이나 말린 과일을 고르고 다녔다가 아무것도 사지 않고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닷새 째, 여행의 중반이 되도록 매일 아침에 나가 저녁 무렵 돌아오는 나를 보고 호텔 로비 직원이 말을 걸었다. 그는 하롱 베이 투어라고 한글로 적힌 코팅된 전단지를 내게 내밀었다. 내가 여행 일정이 긴 것은 예약 당시에 알았을 것이다. 내가 쇼핑한 봉투를 들고 들어오지도 않고 밤이 늦게 돌아오지도 않는 것을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내민 전단지에는 용이 내려와 앉았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라는, 가이드북마다 실려 있는 내용과 함께 점심이 포함된 하루 일정의 여행코스를 안내하고 있었다. 비용은 가이드북의 안내와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나는 김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가 질색하던 음식이 내게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알았다. 남해 다도해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말은 어떨까. 나는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남해안 다도해를 생각했다. 그 바다가 어떤지 모르는 나라면 하롱 베이는 꽤 괜찮은 경험이 아닐까. 아니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여기서 정해진 일정이 없는 사람이었고 예상 경비에 비해서 소비한 돈은 훨씬 적었다. 돌아가기 전에 마음에 드는 목공예 하나쯤을 사서 돌아가더라도 혹시 해서 갖고 온 현금카드를 쓸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미 다 찼다는 다음 날 일정이 아닌 그 다음 날 일일 투어로 예약하고 값을 치렀다.
“호암끼엔, 봤어요?”
거스름돈을 세며 직원이 말했다. 또렷한 한국어 발음 앞의 베트남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서 나는 그를 빤히 보았다.
“호암끼엔 호수. 여기서 제일 유명해요. 신성한 호수.”
호수. 나는 가이드북 어딘가에 있던 하노이의 명소라는 호수를 떠올렸다. 숙소에서 걸어서 25분이라는 게 바로 떠오른 건, 호텔을 예약할 때 봤던 안내문 때문이었다. 공항에서 택시로 몇 분, 롱비엔 대교에서 몇 분, 문묘에서 몇 분, 호암끼엔 호수에서 걸어서 25분. 다른 곳은 다 택시 이동 거리가 적혀 있는데 거기만 도보 거리였던 게 기억이 났다. 강이 있는 곳인데 호수를 볼 필요가 있을까 지웠던 곳이었다.
“예뻐요?”
내 말에 직원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지도를 펼쳤다. 호수 한가운데에 작은 섬이 그려져 있었다. 그는 거기를 가리키고, 호수 옆의 길가의 한 지점을 가리키고, 팜플렛 하나를 또 펼쳤다. 수상 연극 극장. 한글로 적힌 팸플릿에는 화려한 옷과 가면 사진이 실려 있었다.
“고맙습니다.”
나는 그가 건네는 팜플렛을 받아 올라왔다. 너라면 첫날에 이미 이 공연을 봤을 것이다. 말을 알아들을 수 있건 없건 간에 어딜 가든지 너는 공연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박물관과 공연과 시장이 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하지만 공연이 끝나 상기된 얼굴로 공연의 멋진 점을 이야기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나는 극장에 갈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박물관의 전시물과 닮은 기념품을 꼭 하나는 사던 너 때문에 내 예산은 이렇게 여유가 생겼다. 나는 지하 방공호에 숨어있는 군인들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박물관 전시실에서 너처럼 탄성을 지를 줄 모른다.
엿새 째 아침에 나는 호암끼엔 호수에 간다. 호수를 둘러싼 사람들을, 호숫가에 앉아서 책을 읽는 외국인들을 본다. 이제 이숙해진 과일주스 체인점에서 젤리 비슷한 게 들어간 주스를 하나 사서 마시고 나는 생각보다도 더 시시해 보이는 호수 앞에 섰다. 섬으로 가는 다리가 있다. 신성한 호수. 사당. 사람들은 다리에 멈춰서서 사진을 찍고, 호수 근처 2층 카페에서는 호수를 내려다보는 사람이 있고,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전거로 호수 근처를 도는 사람들이,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나는 다리를 건넌다. 4계절의 옷차림이 다리를 지나간다. 나는 라운드 티셔츠에 바람막이를 걸치고 다리를 걷는다. 어깨가 넓은 키큰 남자가 반팔 차림으로 나를 스쳐지나간다. 자그마한 여자 둘이 패딩을 여미며 나를 앞서 지나간다. 하지만 이 섬에 더 익숙해 보이는 것은 내가 아니라 저 반팔 차림의 남자다. 다리 끝에는, 예상대로 작은 사당이 있다. 호수가 예상했던 딱 그대로의 그리 멋지지도 하찮지도 않은 건물은 한때 한자를 쓰기도 했던 이 나라의 흔적이 남은 간판 때문인지 어떻게 보면 우리 나라의 오래된 절 같기도 하다. 나는 사당 안에 유리 액자로 정리된 섬의 전설을 무심하게 읽는다. 신성한 거북이와 칼과 신의 이야기는 너와 함께 갔던 중국의 어떤 건물의 전설이라도 되는 것처럼 낯설지 않다. 어쩌면 우리 나라 남해안, 하롱 베이를 닮았다는 다도해 어딘가에는 저런 전설이 있는 사당이 있을 법도 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사당 앞에 있는 긴 벤치에 걸터앉는다. 겨울이지만 가을이고 여름인 날씨 한가운데에서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호수를 본다. 너는 여기에 올 생각이 있었을까. 너의 긴 여행지 리스트 중에 이 나라가, 이 도시가 있었을까.
나는 핸드폰에서 오늘 날짜를 확인한다. 백일. 오늘은 백일이 되는 날이었다.
초여름에 너는 내게 중국의 어딘가 지역을 다녀온 블로그 링크를 보냈다. 중국이냐 물으니 너는 중국이지만 중국이 아니라고 묘한 답을 했다. 여름은 덥지만, 여름에 가는 게 좋대. 캄보디아에 갈 때처럼 너는 그렇게 말했다. 남들은 더위를 피해서 선선한 가을이 되어야 간다는 지역을 한여름 40도에 육박하는 날씨에 보내고 와서도 너는 한참을 택시 기사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우리는 거기의 가장 아름다운 계절을 보고 온 거야. 멋지지 않아? 나는 강한 햇살과 비를 맞으며 색이 바래버린 네 셔츠를 가리키며 웃었다. 너무 아름다운 계절이 옷까지 이렇게 만들었지. 너는 웃었다. 그러니 나는 그 중국의, 네가 가고싶다고 말하는 곳을, 가야 했다. 하지만, 여름휴가를 가겠다니 재계약은 생각 안 하는 거냐고, 부장이 말했다. 올해가 중요하다고 했어 안 했어. 부장의 말이 무거웠다. 나는 너에게 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올해가 중요하다고, 정규직이 되고 싶다고, 11개월마다 강제로 한 달의 무급휴가를 가지는 어설픈 계약을 계속하고 싶지 않다고. 너는 주말을 끼워서 닷새, 닷새면 된다고 다시 말했다. 나는 네게 처음으로 화를 냈다. 난 너처럼 돌아갈 곳 같은 거 없으니까, 그렇게 맘 편하게 살지 못한다고. 보내버린 메시지는 취소되지 않았다. 너는 한참을 뭔가 글을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가 한 마디를 보냈다. 미안해.
소식이 끊어진 동안은 당연히 다른 사람과 여행을 간 줄 알았다. 얼마나 재미있으면 문자 한 번을 안 보내냐고 7, 8월을 기다리면서 나는 네게 먼저 연락을 보내지 않았다. 화를 낸 건 나였고 미안하다고 한 건 너였으니 다시 내가 말을 걸어도 됐을 텐데. 그리고 가을이 되어도 연락하지 않는 네게 혹시 화났냐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이 오지 않아서, 전화를 걸었다. 낯선 사람이 받았다. 너무 늦지 않게 전화를 해서 다행이었다. 네 마지막 집이 어딘지는 알 수 있게 됐으니까.
너는 내가 돌아갈 곳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네 외로움이 내게 더해지지 않길 바랐다고 했다. 그 말을 너는 내게 먼저 해 줬어야 했다. 중국에 가려는 그 여행이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마지막 여행이었다는 걸, 내게 알려줬어야 했다. 그랬다면 나는 재개약따위 신경쓰지 않고 너와 함께 비행기를 탔을 것이다. 너의 마지막 여름을, 너의 가을을, 혼자이게 두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일어나 다시 다리를 건너 호수에서 나왔다. 호수에는 신성한 거북이가 산다. 하롱 베이에는 용이 산다. 너는 어디에도 살지 않는다. 이건 내게 네가 남긴 벌이다. 네 마지막 여행에 동행하지 못한 내게, 네 거짓말을 눈치채지 못한 내게 남긴 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