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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하 스핀

2022.03.01 00:0003.01

스핀

김산하

 

 

그것은 강일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잠겨있는 내 몸은 물의 질감을 느끼지 못한다. 표면에 이는 모든 물결은 나를 투명하게 지나치므로, 그렇다면 그것은 파장일까. 수평을 향하는 흐름 가운데에 나는 있다. 완전히 잠기지도 않고, 땅에 발을 대지도 못한 채로 항상 기슭을 바라본다. 강 건너 양변에 있는 것은 풍경과 어둠. 추측건대 이승과 저승. 경계인지도 모른다. 나는 유년기에 한 번 죽은 적이 있다. 나는 오랫동안 그 꿈을 꾸었다.

엄마에게 묻는다면 이 꿈은 계시. 온전하게 살아나오지 못한 내 혼의 반쪽 덩어리가 아직 삼도의 내에 매여있다고 말할 것이다. 건너지도 흐르지도 못하는 가여운 혼이. 그러나 정수라면 달리 말할 것이다. 무의식이 꾸며내는 환영이라고 말할 것이다. 트라우마가 남았으므로 비슷한 꿈을 자주 꾸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모든 게 달리 보인다. 그곳은 삼도의 내도 아니고 나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매인 것도 아니다. 그저 다쳤을 뿐. 제대로 회복되지 못했을 뿐.

꿈속에서는 양 기슭을 동시에 바라본다. 전방을 보면서 동시에 후방을 바라본다. 앞에 있으면서 뒤에도 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러한 상태라는 것만은 안다. 튕겨 나가기 직전의 작은 구슬처럼 허공에 붙잡혀 있다. 내 오른편이자 왼편에 누군가가 있다. 그가 나와 같은 형태로 함께 얽혀있다. 정수.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정수라는 걸 안다. 정수가 아닌 누구일 수도 없으므로 그는 정수이며, 이것은 추측이나 확신이 아닌 앎과 감각으로서 있다. 얼굴을 보고 싶어, 매번 나는 고개를 돌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우리는 오래도록 그 꿈을 함께 꾸었다. 이것은 계시, 혹은 환영. 어느 쪽을 단정할 수 없어 나는 신비라고 이름 붙였다. 정수도 내가 보고 싶었을까.

지난밤, 마침내 정수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수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으므로 나도 정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6년 동안 만나 보지 못했다 6년의 세월만큼 나이 든 정수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피로하고 지친 모습이었다. 말을 걸려 하였으나, 그 순간 붕괴가 시작되었다.

 

밤사이 눈이 왔다. 바깥이 유달리 새하얬다. 어스름에 깨 방바닥을 짚었을 때는 설핏 놀랐다. 손이 차갑게 식어 있던 것이다. 내게는 잠열이 있다. 있었다. 몸속에 찍힌 인장처럼 있어서 사라지지 않고 발작하듯 열이 올랐다가 조금 사그라지기만을 반복했다. 주기는 아주 불규칙했다. 불규칙했지만 잦아서 일 년에 서너 번은 반드시 일어났고,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보름까지도 이어졌다. 그러나 꿈에서 깼을 때 그 열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가슴을 태우고 있었던 게 이제는 없었다.

이불을 걷고 방문을 열자마자 씁쓸한 여주 냄새가 훅 끼쳤다. 서늘한 거실을 지나서 부엌의 미닫이문도 열자 턱 낮은 바닥이 나타났다. 부엌엔 보일러가 없어 한겨울이면 공기가 아주 싸했다. 얇은 유리창을 뚫고 부엌으로 바람이 세었다. 엄마는 두꺼운 패딩을 입고 물을 끓이고 있었다. 너무 추워 부엌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을 살짝 연 채 문지방에 앉아 엄마를 불렀다.

“엄마.”

엄마가 나를 돌아봤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패딩 안에 회갈색의 법복을 보고 오늘이 일요일이란 걸 알았다.

“절에 가?”

“그럼 내가 집에만 있어야 하니.”

“다른 거 해.”

“다른 거 뭐해.”

추워. 방에 들어가. 추워. 엄마가 가스레인지 불을 끄고 국자를 허공에 휘두르면서 내게 들어가라고 말했다. 나는 들어가지 않고 엄마가 마저 일을 끝내는 것을 지켜보았다. 바람이 불어 인어처럼 접은 내 다리 위의 맨살을 오소소 돋게 했다. 문득 엄마의 모습에서 나이 듦을 발견했고 그것이 아주 이상하게 느껴졌다. 특히 손. 국자를 휘두를 때 본 엄마의 손이 너무 주름지고 거칠어서 마치 할머니 손 같았다.

“딸. 왜.”

집요한 시선 때문이었는지 마침 일을 마치고 나갈 참이었는지 엄마가 문 앞으로 와서 내게 물었다. 손을 뻗어 내 이마와 볼을 만졌다. 엄마.

“엄마.”

“응.”

“정수가 죽은 거 같아.”


정수와 나는 고성군 한동리의 아주 작은 마을에서 함께 어린 시절을 살았다. 집이 스무 가구, 아니면 스물두 가구. 동해안을 따라 난 7번 국도 근처에 있는 마을이었다. 우리 마을을 지나쳐 올라가면 그 위로는 주유소가 몇 개 없었다. 국도를 따라 동해안을 올라오다가 좌회전을 통해 우리 마을로 들어올 수 있었다. 마을을 휘감고 있는 대로는 아주 짧아서 키가 작은 아이들도 십 분을 걷고 뛰면 한 바퀴였다. 정수와 나는 기억나지 않을 만큼 어린 나이부터 어울렸기 때문에 첫 만남 같은 것은 떠올릴 수 없다. 아홉 살 이전의 기억은 부분부분 소실되어서 정수가 소년기에 어떤 아이였는지조차 인상이 막연했다.

비교적 확실한 기억 하나는 정수가 나와 마찬가지로 무리에서 조금 겉도는 편이었다는 사실, 일 것이다. 그 시절 마을 아이들은 시간이 남을 때마다 떼로 뭉쳐서 각자의 집을 돌고 해가 지면 집에 가버리는 식이었는데 정수는 참석률이 저조했다. 대개 시내 학원에 있거나 우리가 모르는 다른 아이들과 제 아빠의 펜션에 있었다. 놀 사람이 없을 때만 무리에 끼었다. 정수의 집은 마을에서 가장 부유했다.

나의 경우는 아이들을 집에 초대할 수 없어서 무리에 잘 끼지 못했다. 할머니가 세습무였기 때문에 어른들이 우리 집 근처로는 아이들이 오지 못하게 했다. 할머니는 고성군 동해안 칠신굿의 전승자, 예능 보유자였다. 매년 풍어제가 열리면 거기서 굿을 지냈는데 내가 열다섯 살 때 고기잡이배 두 대가 부딪히고 뒤집히는 사고가 나는 바람에 그 뒤로는 굿을 지내지 않았다. 아이들은 나나 정수가 찾아가면 별 텃새 없이 함께 놀이에 끼워줬지만 마음 착해서라기보다는 그냥 놀 사람이 하도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어른들은 정수네 집과 우리 집을 모두 은근한 멸시로 대했다. 정수네를 향한 모멸은 단순한 시기와 질투 때문만은 아니었고, 그 집의 축재가 아주 부정한 방식으로 이뤄졌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때 정수의 아버지는 지역 협동조합의 조합장이었다. 두 개의 펜션을 가지고 있었고, 시내 쪽에 건축사무실도 하나가 있었다. 그렇게 힘 많은 사람이 막상 조합에서는, 지역 사람들을 대변하지 않고 엉뚱한 데 가서 엉뚱한 일을 꾸린다고 마을의 남자들이 모여 자주 험담했다. 뽑아줄 때는 성실하게 할 것처럼 하다가, 지금은 말도 안 듣고, 자꾸 이상한 외지인들만 불러모아서 여기를 헤집고 저기를 헤집고, 그런다고. 돈이라도 쓰면 몰라. 돈도 안 쓰는 사람만 불러와서 공사판을 만들어 놨어. 난장판을. 시끄러워서 고기가 도망가잖아. 낚시하는 사람도 재미가 없으니까 여기 안 와. 가두리에서도 고기가 죽지. 아침에 가면 배 까뒤집고 열 마리씩 있어. 가서 따져도 공사 때문이 아니래. 개놈의 새끼. 아니긴 뭐가 아니냐. 다 알면서. 야. 얘기를 해보자. 걔가 돈이 어디서 나왔겠냐. 펜션도 맨날 가보면 파리만 날리는데. 그 집구석 돈이 어디서 나왔어. 내가 아주 언젠가 비리를, 싹 파헤칠 거야. 대한민국 사람들 다 알아야 돼.

 

야. 얘기를 해보자.

정수와 내가 얽힌 날에 관해서. 아홉 살의 여름이었다. 또렷하진 않지만 나는 정수를 그 날 실개천에서 만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미 해가 지는 저물녘이었다. 정수가 개울에 앉아 나뭇가지로 돌 틈을 파면서 시간을 버리고 있었다. 거기서 무얼 하고 있냐고 물어보니 대뜸 할머니 집에 갈 것이라고 말했다. 너도 갈래? 정수의 할머니를 만나 본 적도 없었고 정수의 할머니가 마을에 산다는 사실도 몰랐다. 하지만 핑곗거리가 생각나지 않아 거절 못 하고 정수를 따라갔다. 정수 할머니의 집은 우리 집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산 근처 논이 작게 몇백 평쯤 있는 들이었다. 논길 사이를 걷다가 그간 폐가라고 여겼던 기와집으로 정수가 들어갔다. 기와집은 크지 않았다. 지붕 기와가 군데군데 깨져 살이 보였고, 나무 기둥도 갈라지고 썩어가고 있었다. 초록색 대문은 칠이 다 벗겨져 반이 불그스름했다. 정수네 집 사람이 산다고 생각할 수 없는 곳이었다.

마당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나는 정수네 할머니와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 움츠러들어 있었다. 그러나 막상 안으로 들어가자 이곳이 사람 살지 않는 곳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세간 대부분이 마당으로 꺼내져 있었다. 누가 비교적 최근에 집을 정리한 흔적이었다. 정수에게 물었다. 네 할머니가 어디 계시느냐고.

“어제 돌아가셨어.”

어제. 정수의 얼굴에 슬픔이나 두려움은 비치지 않았다. 많이 슬프겠다고,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정수는 할머니를 잘 모른다고 말했다. 병원에서만 봤어. 인사만 하고 돌아왔어. 그렇다면 이 집을 정수는 어떻게 알았을까. 왜 여기에 왔을까. 정수는 신발을 신은 채로 성큼 방에 들어갔다. 혼자 남겨지는 게 싫어 정수를 따라 들어갔다. 정수가 문을 닫으라고 말했고 나는 그렇게 했다. 방안은 먼지가 좀 쌓여있었지만 그나마 사람이 살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한가운데에 누군가 펴놓고 정리하지 않은 이불이 있었다. 내가 물었다. 이제 뭘 할 거냐고. 정수가 손으로 수납장 위에 올려져 있는 육각기둥 형태의 함을 가리켰다. 형태가 범상치 않아 나는 관심을 가졌다.

걸쇠를 풀고 문을 열자 살림에 쓰는 잡다한 물건들이 나왔다. 유통기한이 오래 지난 화장품들, 연고와 소독약, 반짇고리와 쪽가위, 반 정도 쓴 초, 성냥이 빽빽하게 들어 있는 원통 성냥갑, 아직 쓰지 않은 소주잔 여섯 개가 든 상자. 돈 안 되고 자질구레한 것들이 한가득했다. 정수가 안에 든 물건들을 꺼내 바닥에 흩어놨다. 안쪽 어딘가에서 오공본드가 튀어나왔다.

“막대 있어?”

내가 물었다. 정수가 주머니에서 재빨리 막대사탕 하나를 꺼낸 뒤에 능숙하게 사탕을 깨 먹고 깔끔하게 사탕 막대를 발라냈다. 본드를 한 톨만큼 짜서 막대 끝에 붙이고 바람을 후 불었다. 노란색 알갱이가 풍선껌처럼 부풀었다가 터졌다. 정수가 그걸 코딱지처럼 말아쥔 다음에 내 옷에 묻혔다. 우리는 새된 웃음소리로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 시절 한동리에는 그런 놀이가 있었다. 나와 정수는 번갈아 가며 그 짓을 몇 번 하다가 함을 뒤져 다른 걸 찾았다. 이번엔 줄줄이 이어진 종이 뭉치가 나왔다. 아마 지로용지거나 택배 송장이었을 것이다. 정수는 그게 계약서라고 말했다. 연필을 꺼내 군데군데 사인을 하기 시작했다. 사인이라고는 하지만 필기체를 쓰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으므로 그냥 직선을 지그재그로 그어 흉내 내는 것에 불과했다. 정수는 제법 능숙하게 위와 아래에, 앞면과 뒷면에, 종이를 뒤집어가며 사인을 그렸다. 왜 그리 사인을 많이 하느냐고 묻자 계약서에는 원래 이렇게 한다고 답했다. 너도 해. 나는 연필을 받아 정수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 사인을 남겼다. 여기. 그리고 여기. 정수가 사인을 다 받아간 다음에 이거는 고모 명의로 하고, 그렇게 말했다.

“왜?”

“아다리를 맞춰야 하니까.”

“아다리가 뭔데?”

“그런 게 있어.”

정수는 새침하게 대답한 뒤에 계약서를 뺏어가 다시 저만의 놀이에 심취했다. 정수에게서 응답이 없었으므로 나도 나만의 놀이를 시작했다. 초에 불을 붙인 다음에 스킨로션 병의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뿌렸다. 사방을 향해 한 번 하고 팔방을 향해 다시 뿌렸다. 뭐 해? 그제야 정수가 내 쪽을 바라봤다. 제사를 지내. 나도 새침하게 답하고 내 놀이에 심취했다. 동방에는 청제신장이. 남방에는 적제신장이. 서방에는 백제신장이. 북방에는 흑제신방. 중앙에는 황제신장. 창조는 발령 구천응원. 뇌성보화 천존신장.

지금은 이 경을 모두 외고 있지만, 아홉 살의 내가 이것을 다 외웠을 리 없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불렀을 것이다.

정수가 썬크림을 들고 내 곁에 와서 섰다. 초가 있는 방향으로 내용물을 쭉 짜서 뿌리기 시작했다. 저렇게 하는 게 아닌데. 그러나 나도 제대로 하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우리 모두 손에 집히는 것을 물감 뿌리듯 정신없이 뿌렸다. 본드는 누가 뿌렸는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내가 정수의 계약서를 불에 태웠다. 손까지 불이 올라오기 전에 허공에 던졌으나 너무 빨리 던져 장판 위로 불이 떨어졌다. 다행히 화재는 나지 않았지만 장판을 태우면서 검은 연기가 허공에 폴폴 퍼졌다. 놀라서 창문을 열려고 했더니 한 틈만 겨우 열리고 더는 밀리지 않았다. 창틀에 못이 박혀있었다. 좁은 틈 사이로 청소기가 빨아들이듯 연기가 빨려 나갔다. 정수와 나는 멍하니 앉아 그것을 보다가 잠이 쏟아져 이불 위로 쓰러졌다. 정수가 내 배 위로 머리를 이고 누웠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내가 정수의 숨소리를 들었고 정수가 나의 숨소리를 들었다. 불규칙하게 엇갈렸던 숨이 희한하게도 차츰 발을 맞추듯 균일해졌다. 손발이 저리고 몸이 식어가는데도 몽롱하게 잠이 왔다. 두려우면서도 편안하고 몸이 납처럼 무겁다가도 아예 없는 것처럼 질량이 느껴지지 않았다. 갑자기 구토가 올라와 정수에게 머리를 치우라고 말했는데 정수가 요지부동이었다. 나중에는 사정없이 머리를 때렸는데도 정수는 깨어나지 않았다. 잠들지 않기 위해 눈을 크게 떴지만 근육에 차츰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무의식 상태에 빠지면서 소리도 없이 울음을 계속했다. 누군가를 기다렸다. 지금도 연약한 살과 뼈를 가진 아이 둘이 축 늘어져 죽어가는 광경을 상상해보면 애달프고 무서워진다. 나는 당사자였으므로 그 광경을 목도하지 않았다. 그런 광경을 목격한 사람은 정수의 어머니.

정수와 나 모두 병원으로 이송 중에 한 번씩 심정지를 겪었고, 심폐소생술로 되살아났다.


부활에 관해 가끔씩 생각한다. 인간을 되살리는 주술은 없지만, 인간을 되살리는 의술은 있다. 심폐소생술은 보편적인 믿음이 있고 내가 경험하였으므로 내 안에도 확실하게 믿음이 있다. 할머니의 주술은 할머니의 안에만 믿음이 있고 보편적으로는 있지 않다. 내 안에도 있지 않다. 언젠가 할머니의 주술이 보편적인 믿음을 갖게 되는 날이 올까. 몇 개의 신비학은 부분적으로 주술의 영역에 존재하다 과학의 영역으로 옮겨갔다. 천문학과 화학엔 그런 역사가 있다. 둘은 점성술과 연금술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할머니의 주술도 그런 방식으로 옮겨지는 게 가능할까. 사주팔자와 점괘, 굿은 어떤 형태로 과학이 될 수 있을까.

의미 없는 이야기야.

이제 겨우 오전 9시였다. 열이 사라지니 하루가 무척 길었다. 아빠에게 오늘 일을 나가겠다고 문자 보냈다. 오전엔 일이 끝났으니 점심을 먹고 오라는 답신이 왔다. 한 시까지 사무실로 와. 나는 집에서 할 일이 없으니 그냥 사무실에 가 있으면 안 되겠냐고 다시 문자를 보냈다. 오 분쯤 지나자 답장이 왔다.

짜장면 시켜줄게. 와서 먹어라.

 

아빠의 사무실은 시내 외곽에, 사 평짜리 사무 공간에 십오 평짜리 창고가 딸린 곳이었다. 창고가 훨씬 크니 창고에 사무 공간이 딸려 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려나. 창고엔 도배지가 가득했다. 내 키보다 큰 벽지 롤이 색과 무늬별로 가득 들어서 사람 하나 지나갈 만큼의 복도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물건이었다. 일이 많을 때는 사무실까지 몇 개가 삐져나와 있었다. 나는 작년 겨울부터 아빠의 사무실에서 일했고 이제 꼬박 일 년째였다. 잠열 때문에 결근이 잦아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었는데 용역 일은 개근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일을 나갈 수 있을 때 나갈 수 있어서 좋았다.

“영화야. 일 가자.”

바람 한 점 안 부는 정오인데도 여전히 바깥이 추웠다. 아빠가 창고서 장비를 꺼냈고 나는 가벼운 것부터 아빠의 포터에 실었다. 풀은 20kg가 넘어가는 것이었으므로 아빠와 내가 함께 들었다. 귀가 너무 시려서 후드집업에 달린 모자를 쓰고 일했다. 꺼낸 벽지 롤이 두 마끼인 것 보니 시공할 곳이 별로 크지 않은 모양이었다. 공부를 안 하면 추울 때 추운 곳에. 더울 때 더운 곳에. 아빠와 장비를 실을 때마다 왜 그 말이 생각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빠가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며 말했다.

“야 언제 운전할래. 빨리 배워야 나 없이도 나와서 하지.”

“나 혼자 이걸 어떻게 해.”

“안 하면 뭐하게. 무당 할 거야.”

“하라면 하지.”

아빠는 한숨을 팍 쉬고 입을 닫아버렸다. 하지만 그것에 관해 언젠가 말을 하기는 해야 한다. 할머니가 이제 일흔이 넘으셨으니까.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전승을 이어갈 사람을 정해야 했다. 없다면 없는 대로, 전승을 폐廢하겠다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아무도 이 일에 관해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가족이 한때 살았던 한동리의 할머니 집은, 그 앞의 고목 나무며 거기 걸린 오방색의 천과 할머니의 재금과 방울과 부채와 탱화와 온갖 악기들은 어떻게 될까. 할머니가 사라지면 아무도 이고 질 사람이 없어 무너질 것만 같은 그 집과 세간들은.


정수는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입학했다. 나는 그 사실을 같은 반의 친구가 준 언질로 알게 되었다. 중독 사고 이후로 나는 정수와 정수 가족을 오래도록 보지 못했다. 정수 가족은 그 사고로 어떤 불길함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정수를 더 나은 환경에서 길러야 한다는 필요를 느꼈는지 정수가 퇴원하자마자 집을 팔고 떠나버렸다. 우리 가족도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할머니만 한동리에 남겨두고 고성 시내로 거처를 옮겼다. 할머니는 중독 사고에 관해서는 따로 사과받을 일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정수 가족이 쌀쌀하게 떠나버린 것에 대해서는 이런 경우가 있냐며 한 번씩 성을 내곤 하셨다. 이런 경우, 예컨대 함께 죽었다 살아나서 다시는 마주하지 않으려는 경우. 그게 이상한가. 생각해보면 전제 자체가 몹시 이상해서 그 뒷일이 어떻게 되든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나는 서운함을 느끼지 않았다. 다만 학군이 그리 좋지 않았던 그 고등학교에서 다시 정수를 봤을 때 놀랐을 따름이었다.

정수는 젖살이 빠져 외형이 늘씬해졌고 목소리도 달라져 예전의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입학 초 복도를 걷다가 누군가 정수를 호명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거기서 정수를 알아보았다. 정수의 얼굴을 너무 오래 쳐다봐 눈이 마주치고 말았는데 나를 발견한 정수는 오히려 더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사람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현상을 목격한 사람 같았다. 누군가 정수의 이름을 다시 불렀고 정수는 다급히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정수는 자신의 감정 일부분을 내게 들킨 뒤였다.

우리는 한 달이 지나도록 마주칠 때마다 서로를 어색하게 모른 체했다. 자연스럽게 대처하려 해도 정수가 나와 눈 마주치면 열기에 데인 듯 다급히 시선을 거두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또 그러면서 시선을 돌리면 어디선가 항상 눈 마주치는 게 평소에 나를 먼발치서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 나는 언제고 정수가 수상한 배회를 마치고 내게 접근하기를 기다렸고, 5월이었다.

학교에서 행사가 있었다. 고성의 사물놀이패가 운동장을 빌려 공연을 했다. 나는 운 좋게 가장 앞줄에 서서 놀이패를 구경했다. 놀이가 절반쯤 지났을 때 열두 발 상모꾼이 등장했고, 그가 목을 돌리자 하얗고 긴 꼬리가 거대한 원의 둘레를 그리며 운동하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몸체를 지닌 뱀처럼 부드럽고 경쾌한 움직임이었다. 상모꾼은 자세가 얼추 잡힌 뒤 장난스럽게 관중 근처로 발을 옮기기도 했다. 상모 끈이 미약한 바람을 끌어오며 관중석의 코앞까지 다가오자 학생들은 겁먹는 소리를 내며 저들끼리 응집해 물러났다.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상모꾼은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조절해가며 상모를 돌렸다. 코끝으로 느껴지는 열두 발 끈의 질량이 대단해 상모꾼의 두꺼운 목에 자연스레 눈이 갔다. 유려하고 아름다웠다. 끈이 돌아가는 속도와 높이가 일정해 처음부터 원의 형태로 주조된 얇은 띠를 보는 느낌이었다. 하나의 핵과 하나의 에너지 궤도만을 지닌 원자의 형태. 그것을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렇게 내가 완전히 매혹되어 있을 때, 응집된 군중의 몸을 타고 어딘가서 밀침이 전해졌다. 학생들이 짜증 섞인 소리를 내며 머리 위로 밀지 말라고 소리쳤다. 밀림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주기적으로 계속 전달되었다. 바로 앞에 상모 끈이 돌고 있는 탓에 앞줄에 선 아이들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나도 내게 전달되는 이 인파의 정체가 궁금해 주변을 살폈고, 거기서 사람들을 비집어가며 다가오는 정수를 발견했다. 정수는 이동할 타이밍을 잘못 잡았다는 생각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미안하다는 말을 계속하면서도 발을 멈추지 않았다. 뜻 모를 두려움과 흥분을 느끼며 시선을 다시 운동장으로 돌렸다. 진원은 점점 더 가까워지다 어느 순간에 완전히 운동을 멈췄다. 누군가의 숨소리와 열기가 바로 뒤에서 느껴졌다.

“영화야.”

 

공연이 끝나고 학생들은 점점이 와해하며 교실로 돌아갔다. 나는 정수와 스탠드 밑에 나란히 남았다.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정수는 기면증 때문에 중학교를 다니지 못했다고 말했다. 눈을 감고 까무룩 잠들 때도 있지만, 보통은 눈을 뜬 상태에서 저도 모르게 무의식 속으로 가라앉아 꿈 같은 것을 꾼다고.

“처음에는 다들 멍 때리는 줄 알아. 나는 정말 잠이거든. 깨어 있으려고 노력도 해봤는데 소용이 없어. 그냥 어느 순간에, 스륵. 깨닫고 나면 꿈속이야. 정말 슥, 그렇게.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도 부모님은 이게 사고 후유증인 줄 몰랐어. 자꾸 잠을 못 참는다고 혼났는데, 병이란 걸 안 뒤로는 병원을 찾아다니느라 학교를 그만두고 홈스쿨링을 시키셨어.”

정수는 벽에 성냥을 긋듯 발끝으로 흙바닥을 한 번 긁고 내게 물었다.

“너도 있지 않아? 사고 후유증.”

정수의 물음은 질문이 아니라 확인에 가까운 것이라서 내심 놀랐다. 잠열이 있다고, 발작하듯 올라와서 자주 결석을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홈스쿨링 같은 걸 시키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일하시느라 바빠서. 정확히는 교육에 그만큼의 관심은 없어서. 나는 졸업이 가능할 만큼 출석을 채우기 위해 방학이나 주말을 이용해 보충수업을 들었고 학교 선생님 중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후유증이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엄마가 얘기하는 걸 들었어.”

나는 그 집 사람들이 내심 고향 소식을 계속 궁금해하고 있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정수네 엄마가 내 소식을 알고 있는 건 아무래도 동향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니라 정수의 병을 고칠 차도를 찾다가 습득한 정보일 것이라는 반박이 따라왔다. 정수는 부모님과 함께 오랫동안 큰 병원을 여러 군데 찾아다녔지만 기면증을 고치거나 완화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뇌는 손상에 아주 민감한 장기고, 다른 장기에 비해 손상된 부분을 회복시키기도 대단히 어렵다는 설명만 듣고 돌아왔다고. 나는 엄마가 큰 절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올렸던 일을 떠올렸다. 내 안의 무언가를 누르기 위해 발원하고 절을 올리던 모습을. 엄마는 부처님에게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하고 돌아왔다. 결과적으로는 둘 다 병을 고치지 못했으니 우리 가족이 시간과 비용을 더 절약한 셈이었다.

 

정수와 나는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여전히 겉도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둘이 쉽게 가까워졌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친했던 친구들이 있었지만 전처럼 가깝게 지내지 못했다. 할머니가 무당이란 것과 몸이 자주 아픈 게 신병을 앓는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 학교서 나를 꺼리는 아이들이 많았다. 정수는 학원에서 사귄 친구들이 있어 나만큼 외로워 보이지 않았지만 이따금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고양이처럼 있을 때가 있었다. 굳이 이유를 물어보지 않아도 동류의 질감이 느껴서 그런 모습이 보이면 곁에 달라붙게 되었다. 정수도 싫은 기색은 내비치지 않고 옆자리를 내어줬다.

“우리더러 천벌을 받은 거래.”

하루는 한동리의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너와 내가 그 집에서 겪은 일을 천벌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너는 너의 집안 때문에. 나는… 나도 나의 집안 때문에.

“미토스적인 이야기엔 신경 쓰지 마.”

나는 미토스라는 단어가 생경해 그게 뭐냐고 물었다.

“미신적인 사고. 과학적으로 인과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모두 신이 벌인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그런 말들은 다 논리가 없잖아.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확실히 논리적이라 납득도 되고 위안이 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내 할머니가 바로 그 미토스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서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정수도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난처해진 표정을 지었다. 재빨리 화제를 돌리는 편이 나았을 텐데 정수는 그런 부분에선 귀염성이 없고 이상한 고집이 있는 애라 이 문제를 정면돌파하고 싶다는 듯 난데없는 소신 발언을 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종교와 관련된 건 아무것도 안 믿어. 우리 부모님도 교회에 다니는데 성경에서 하는 말도 전부 미신이랑 똑같다고 생각해. 창조론 같은 것도 다 근거 없는 믿음이잖아. 십일조를 내면 천국에서 복 받는다. 하나님이 잘 살게 도와주신다. 다 사기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정수는 의외라는 듯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나도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정수와 같이 단호한 무신론자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있는 쪽보다는 없는 쪽이 더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정수는 다소 안도가 되었는지 긴장했던 목과 어깨를 풀고 다시 늘어져 볕을 쬐었다. 영화야. 노자가 한 말인데

“천지는 어질지 않아서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대.”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자연은 무심해서 세상일에는 관심이 없다고. 벌도 없고 상도 없어. 그냥 엉망진창이야.”

엉망진창이야. 평소 정수는 시들하고 염세적인 얼굴을 하고 다녔지만 그런 말을 할 때만은 외려 생기가 도는 표정이었다.


풍어제에서 할머니가 지냈던 칠신굿은 이러한 놀이로 시작된다. 상과 제물을 차려두고 악사들이 악기를 연주하면 할머니가 탈을 쓰고 나와 영산할멈을 연기한다. 중간중간 장구잽이와 영산할아범을 찾는 대사를 주고받기도 하다가 영산할아범 역을 맡은 사람이 탈을 쓰고 나타나면 둘이 재회를 기뻐한다. 일련의 극이 끝나고 나면 할머니는 탈을 벗고 영산할아범과 할멈에게 사고가 없고 고기가 많이 잡히기를 바라는 축원을 빌면서 끝을 냈다. 축원을 비는 동안에 엄마가 항아리를 들고 굿판을 돌면 구경꾼들이 돈을 넣어줬다. 많이 넣을수록 영산할아범·할멈에게 더 많은 복을 받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뱃사람들은 육지 사람들보다 미신에 민감한 편이라 뭉칫돈을 꺼내 넣어주는 사람들도 많았다.

굿판이 끝나면 성인가요를 부르는 초대가수들의 차례였다. 군중은 자연히 그곳으로 몰려가고 할머니의 굿판은 썰렁해진 상태로 뒷정리에 들어갔다. 돗자리를 접고 남은 음식을 버리거나 싸갔다. 지친 할머니는 야적된 가재도구 곁에서 소복 차림으로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웠다. 바닷바람은 차갑고, 소복은 너무 얇아 보이는데, 고목 껍질 같은 할머니의 살이 느낄 추위는 누구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무격은 팔천의 하나. 그 풍경이 떠오르면 나 문득.

그러나 이것도 이젠 옛날의 일로 할머니는 더는 굿을 하지 않았다. 관절이 안 좋아 오랫동안 서 계시지 못했다. 간혹 학자나 기자들이 찾아오는 경우에만 엄마와 함께 칠성굿을 간소하게 재연해준다고 했다.

 

밤이 깊었다. 인터넷 기사로 할머니가 지냈던 풍어제의 사진을 몇 개 찾아보다가 창을 닫았다. 정수의 생사가 진심으로 궁금했고, 그것을 알아볼 수 있을까 싶었다. 정수가 캘리포니아 페퍼다인에 입학하면서 나는 다시 정수와 연락이 끊겼다… 는 말은 내 입장에서 편리한 말이고, 단절의 진짜 이유는 이별 때문이었다. 짧은 연애 끝에 내가 일방적으로 그것을 통보했다. 이유를 물어보는 정수에게 더 사랑할 수 없어, 같은 답을 남기고 돌아섰다. 정수의 마음이 다쳤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고 소식이 전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서운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동창 중에 정수의 근황을 알만한 친구들을 떠올려보았다. 그중 최근에 안부 인사를 나눴던 친구를 찾아 메신저 어플을 뒤적거렸다. 그러나 곧 섬뜩한 자각을 느끼고 창을 껐다. 나는 정말 정수의 생사를 의심하고 있나. 그 꿈의 계시로 인해. 미토스적인 믿음만 가지고.


2학년 1학기가 절반쯤 지나가면서 우리에게도 무리라고 부를만한 친구가 생겼다. 정수의 학원 친구인 남기와 남기의 여자친구 윤진이가 끼면서 우리는 넷이 되었다. 두 사람 다 연애를 시작하면서 원래 친구들과 멀어진 경우였는데, 나와 정수도 당연히 커플이라고 생각해서 접근했다고 어느 정도 친해진 뒤에 털어놓았다. 나와 정수는 그렇지 않다고,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실은 이미 아무것도 아닌 사이는 아니었다. 남기는 순하고 사려 깊은 성격이었고, 윤진이는 오컬트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서 나를 꺼리지 않았다. 윤진이는 특히 내 할머니가 ‘전승자’라는 사실을 대단하게 여겼다. 그런 건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나 들었던 단어고 실제로 무언가를 ‘전승’ 중인 사람은 처음 봤다고.

카를 융의 동시성 현상을 알려준 사람도 윤진이었다.

“나는 영의 세계가 파동으로 이뤄진 우주라고 믿어.”

융에 따르면 예지몽이나 데자뷔, 텔레파시 등의 사건은 영적 세계가 무의식에 간섭하여 영향을 미치는 사례라고 윤진이는 설명했다. 아직 과학적으로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영의 세계는 물질세계와 쌍을 이루면서 뒷면에 있는 파동의 세계일 거야. 특정 감각이 예민한 몇몇 사람들만 그곳과 접촉할 수 있는 거지. 나는 네 할머니가 그런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해. 다소 황당하게 들리는 이야기였지만, 오컬트를 최대한 과학적으로 풀어낸 설명이기도 했다. 정수는 윤진이가 오컬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난감해했다.

“공부만 잘하는 것도 다 소용없는 거야.”

하루는 정수와 내가 단둘이 집으로 가는 길에 정수가 의미심장한 얘기를 꺼냈다.

“갑자기?”

“윤진이.”

윤진이는 전교 석차에서 1, 2등을 다투는 수재였다. 남기와 정수도 그만큼은 아니지만 성적이 좋았고, 무리 중 공부를 못하는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정수는 내가 그런 부분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걸 알았는지 가끔 다른 아이들에 대한 흉을 봤다. 대체로 고성 애들은 촌스럽고 몰개성하지만, 나는 아주 세련되고 재미있다는 식의 입에 발린 말이었는데 그 날의 주제는 특이하게도 ‘속머리’였다.

“너 MIT에도 창조론 과학자들이 있다는 거 알아? 평생 창조론의 증거를 찾기 위해 연구하는 사람들이래. 교회 목사도 나한테 그런 과학자가 되라더라. 웃기지? 그럴 거면 뭐하러 공부하냐. 인생 내다 버리는 짓인데.”

“너무 그러지 마. 그리고 윤진이는 취미로 하는 거잖아.”

“아냐. 그렇게 속머리 없으면 어처구니없는 사기 당하고 사는 거야. 우리 엄마 봐. 십일조로 한 달에 백만 원씩 내. 이런 게 진짜 사기지.”

정수는 너무 흥분해 말에 비브라토가 들어가 있었다. 헌금에 진심을 담아 분노하고 낙담했다. 그런 모습일 때 정수는 어딘가 철없어 보이기도 하고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너희는 있는 살림에 돈을 뜯기지, 우리는 없는 살림에 뜯긴단다. 산 중턱에 대웅전을 새로 만들 것인데, 주춧돌이 30만 원. 여기에 시주하면 가족의 뿌리가 단단히 잡히는 것이고. 기둥은 50만 원. 이러면 가정이 튼튼해져 횡액을 맞아도 무너지지 않고. 문이 또 50만 원. 운수가 들어오는 통로를 열어줘서 대소사가 다 잘 풀리고. 기와가 얼마, 현판이 얼마. 절에서 보살이란 사람에게 붙잡혀 그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는 엄마를 보면 옆에서 세게 후려치고 싶은 욕구가 올라왔다. 할머니가 하는 일들도 모두 그 비슷하게 느껴졌고, 정수만큼이나 나도 가족을 미워하게 되었다.

“그래도 윤진이의 말은 흥미로운 부분이 있지 않아?”

우리는 서로 헤어지는 방향의 골목길 근처에서, 그곳 공원의 그네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눴다. 정수는 재고할 가치가 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내가 다시 물었다.

“확실해? 확실하게 아는 거야?”

“그 정도는 확실하지.”

“자만심은 물리학자에게 가장 큰 적이야. 알고 있다고 착각한 순간, 발견의 가능성을 잃어버리니까.”

그 말은 그즈음 도서관에서 읽은 소설에서 인용한 것이었다. 정수는 날카로운 지적을 받았다는 듯 미간에 힘을 주고 나를 바라봤다.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생각에 잠겼다.

“아주 불가능하진 않을 거 같아. 양자역학에선 신비로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니까. 텔레파시나 예지라고 볼 일들이.”

나는 발을 밀어 허공에 뜬 그네를 정수 쪽으로 밀었다. 정수의 팔 안쪽으로 내 팔을 끼워 넣고 가늘고 마른 목과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자세히 말해 봐. 정수는 약간 긴장한 기색으로 뻣뻣하게 굳어있다가 이내 근육을 풀고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려둔 내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

“양자 얽힘이라는 현상인데, 하나의 원자에서 파생된 두 전자는 특이하게 얽혀서 시공에 구애받지 않고 이어질 수 있어. 두 개의 전자는 관측하기 전까지 무수히 많은 방향의 스핀이 중첩된 상태로 있거든. 비로소 한 쪽을 관측한 순간에 중첩이 붕괴하면서 스핀의 방향이 결정돼. 한쪽의 스핀이 결정되면, 얽힌 상태의 다른 전자는 짝을 이룬 전자와 정 반대 방향의 스핀을 가져. 이렇게 얽힌 상태의 전자는 우주의 끝과 끝에 떨어져 있더라도 동시에 영향을 주고받아. 빛보다 빠르게. 미래의 정보가 과거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 파동으로 엮어서. 파동의 성질은 오묘하거든. 입자와 달리 국소성과 인과성에 얽매이지 않아. 아마 윤진이는 이와 관련된 글을 읽은 것 같아.”

그래도 여전히 상상력이 과하다고, 정수는 웃으며 덧붙였다. 한쪽 귀를 정수에게 붙이고 있어서 정수가 말하거나 웃을 때마다 몸에서 울리는 떨림이 고막을 통해 전해졌다. 그 감각이 나쁘지 않아 정수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다. 정수는 처음엔 손사래를 쳤지만 내가 계속 조르자 서투른 솜씨로 느릿느릿 노래를 불렀다. 양철과 슬레이트 지붕 사이로 해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반대편은 이미 해가 완전히 진 밤하늘이었고, 옥상에 조형물을 장식해둔 아파트 단지에서 백열전등의 노란빛이 은은히 뿜어져 나왔다. 정수가 사는 곳이었다. 우리는 노래가 끝난 뒤에도 한참이나 말없이 서로에게 기대어 밤을 보냈다. 어느 순간인가 정수가 나를 불렀다.

“영화야.”

“응.”

“우리 예전에.”

“응.”

“나쁜 일이 있었잖아.”

고개를 들어 정수의 얼굴을 살폈다. 정수는 내가 아니라 허공을 보고 있었다. 눈의 초점이 멀어 어딘가를 보는가 싶다가도,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듯한 눈이었다. 간혹 정수가 기면증에 빠질 때와 증세가 비슷해서 나는 무심코 정수의 옷소매를 잡아당기고 말았다. 외력이 나름 거셌을 텐데도 정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아주 묵묵하게 자신의 말을 이어 했다.

“그 이후로 꿈을 꿔. 거기서 누가 자꾸 나와. 얼굴은 무서워서 볼 수가 없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너라는 걸 알아.”


봉포항에서 윤진이를 기다렸다. 정수에 대해서만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연락이 닿자마자 윤진이가 약속을 잡아버렸다. 지금 어디야. 만나서 이야기할까, 하고. 얼굴을 본 지 오래였다.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정오 무렵에 버스가 도착하고 윤진이가 내렸다. 원피스 위에 코트를 입고 단화를 신은 차림새였다. 바다를 보고 싶다고 했으면서 겨울 바다의 추위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후드티에 롱패딩을 입고 모자까지 뒤집어쓴 행색이었다. 집에서 나올 때까지도 신경 쓰이지 않던 게 윤진이를 보자마자 신경 쓰였다. 남루한 생활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도 한동안 마주 서서 서로의 빨간 얼굴을 쳐다봤다.

“춥다. 뭐 먹으러 가자.”

윤진이는 미리 검색해왔다며 나를 해물 칼국수 가게로 데려갔다. 수산물이 들어간 냄비가 끓는 동안 창밖에선 끝없이 파도가 해변으로 밀려왔다. 오늘은 연차를 쓰고 온 것이냐고 물었다. 윤진이가 교육행정직 공무원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은 바가 있었다. 스물세 살에 붙은 7급 공무원이었고 윤진이도, 그 집 사람들도 무척 기뻐했다는 이야기를. 그게 2년 전이었다. 윤진이는 덤덤하게 그만두었다고 대답했다.

“반년도 못 버티고 튕겨 나왔어.”

“왜. 좋은 직장을.”

“나 같은 사람 많아.”

취직을 준비 중인 것이냐고 물으니 윤진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고. 일 년이 넘도록 그냥 집에서. 엄마가 아주 슬퍼해. 윤진이는 국자로 국물을 떠서 앞접시로 가지고 간 다음 살짝 맛봤다. 남 이야기를 하듯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 우리는 설익은 면을 나눠 먹고 부지런히 껍질을 발라가며 조갯살을 빼먹었다. 뜨거운 것이 들어오니 추위를 잊게 되었다. 나는 모자도 벗어버리고 이모에게 소주 한 병 달라고 외쳤다. 혼자 반주나 할 셈이었는데 윤진이가 자연스레 소주잔을 받아서 제 앞에 하나를 두고 내게 하나를 내밀었다. 나는 잠시 얼어있다가 윤진이의 잔을 채우고 내 잔을 채웠다. 건배는 하지 않았다. 술을 쭉 들이켠 윤진이가 손바닥으로 얼굴에 부채질하다가 문득 내게 물었다.

“너는 괜찮아? 열은?”

나는 이제 아프지 않고, 요즘은 아빠를 따라 도배와 장판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대단하네. 윤진이는 순수하게 감탄하며 나를 치켜세웠다. 너는 역시 대단해. 뭐가 대단해. 노가다야. 노가다. 아니야. 대단해. 요즘은 기술 배우는 사람들이 더 잘 산다잖아. 그게 언제적 이야기인가. 할머니의 전승도 그렇고, 얘는 과하게 천진한 면이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중에 갑자기 윤진이가 턱을 들고 눈물을 쏟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목이 메는지 잠시 침묵한 다음에 내 이름을 불렀다.

“영화야.”

“응.”

“정수가, 죽었대.”

 

어떻게. 어떻게 죽었냐면, 바위에서 추락해서. 무심코 친구들 따라 하이킹을 갔다가 토팽가에서. 함께 하이킹했던 인원들은 모두 정수보다 앞서 있었으므로 추락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뒤에서 둔탁한 소음이 들려 돌아보니 정수가 사라진 상태였다고, 윤진이가 그들의 증언을 전해줬다. 한 인원이 야트막한 절벽 아래를 살폈을 때, 거기에 머리가 깨진 채로 피 흘리고 있는 정수가 있었을 것이다. 경사가 완만하고 짐승보다 인간이 더 편하게 드나드는 산이라 아무도 그런 비극적인 죽음을 예측할 수 없었다고 했다.

기이하고, 묘한 죽음이었다. 너무나도 기이하고 묘해서 정수의 죽음 뒤로 지저분한 의문들이 떠올랐다. 이것이 사고인가, 자살인가. 정수가 페퍼다인의 분위기를 어려워했대. 기면증 때문에 수업을 따라가기도 벅차했고. 졸업이 어려웠을 거래. 윤진이의 말은 은연히 자살을 추정하고 있는 듯 들렸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잠들기 전 토팽가의 사진을 검색했다. 키 낮은 산과 거대한 바위가 있는 풍경을 여러 각도에서 살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정수는 수줍음이 많은 편이니까 자살을 택했다면 외롭고 조용하게 떠났을 것이다. 아마 기면증이 오지 않았을까. 바위의 끄트머리에 서서 토팽가의 전경을 보려 한 순간, 불운하고 불운하게.

그렇다면 무엇이 먼저였을까.

정수는 꿈속에서 고개를 돌린 후에 죽었을까. 죽은 후에 꿈속에서 고개를 돌렸을까. 그때 스핀의 방향이 정해졌을까. 풍경과 어둠으로.

 


표정과 질문을 기억한다. 왜 사랑할 수 없어? 그 이유를 생각하면 머리를 꽉 채우는 호우의 소음이, 코끝에 차오르는 장마의 습기가 숨을 막을 것처럼 엄습해온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 때문에 부끄럽고 분노하게 되고, 더 이어지기 전에 의식적으로 끊어버리게 되는 생각이었다.

장마였다. 비가 너무 내리거나 내리지 않는 대신 축축한 날들이 이어졌다. 땅이 젖었다가 다 마르지 않은 상태로 얼룩덜룩했다. 우리는 도서관에 함께 있다가 잠시 밖으로 나온 길이었다. 도서관 아래에 작은 실내 체육시설이 있었고 정수는 사람이 없으면 농구 코트에서 혼자 덩크슛을 연습하곤 했다. 재빠르게 도약해 탄성 높은 골대를 붙잡고 매달렸다가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연습을 끝낸 다음이면 손과 팔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나는 그것을 사랑했다. 그러나 이날은 안개가 너무 짙어 정수가 위험해 보였다. 코트의 바닥에도 물기가 서려 있었고 골대도 이슬이 내린 듯 물기가 상당했다. 여름 기온치고는 서늘한 날이었다. 나는 잠열이 발작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아무래도, 유학을 가게 될 것이라고 정수가 말했다.

“아빠가 너무 고집이 세.”

“너를 위해 그러시는 걸 거야.”

정수는 나를 두고 가게 되어서 정말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유학이 아니더라도 정수와 같은 대학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은 내게 무언가를 상기시키기는 했다. 예컨대 지금까지 마주하지 않고 회피하려 했던 조건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우리의 관계가 계속 유지될 것인가 하는 물음을.

“자주 연락할게. 자리가 잡히면 너도 캘리포니아로 부를게. 너는 동양적인 매력이 있으니까 길거리에서 눈에 띌지도 몰라. 할리우드에 그런 배우나 모델이 많잖아. 그냥 아르바이트하다가 뽑혀서 유명해진 사람들.”

정수는 아주 진지하지는 않았지만 일종의 기대감을 가지고 그 말을 건넸다. 나는 정수의 이런 친절함에는 잔인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렇게 되면 좋겠다. 정수가 곁에 와서 내 팔을 끌어안았다. 젖어있는 정수의 손에서 물기가 느껴졌다. 땀이 아니라 자욱한 안개가 묻은 흔적이었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안개가 심해져 비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온 사방에, 물의 입자가 촘촘히 우리를 포위하며 몸에 흩날렸다. 내 어깨에 감긴 정수의 팔이 한낱 덩어리처럼 느껴졌다.

“왜 그래.”

정수가 다정히 웃으면서 내 팔을 살짝 흔들었다. 나는 열이 오는 것 같아 조금 피곤하다고, 쉬고 싶다고 말했다. 정수는 재킷을 벗어 내 몸에 둘러준 다음 내 양팔을 잡고 천천히 도서관 안으로 걸었다. 안개로부터 나를 호위하듯. 그러나 완전히 대기를 장악한 미세한 물방울을 막을 방법은 없으므로 꾸준히 패배하면서.
그 순간 무수한 회의가 내 안에서 흘러넘쳤다. 정수를 연인이라 여겼던 이유가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같은 꿈으로 엮인 운명의 상대. 그것은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저 비슷한 형태의 꿈을 꾸고 있을 뿐이라면. 함께 재난을 겪은 사람들이 유사한 PTSD 증상을 겪는 것처럼. 설령 같은 꿈이라 한들 그것이 사랑을 영속하게 해준다는 보증은 없지 않나. 같은 이미지를 목격한다는 신비와 불안정한 삶 외에 우리는 공통점이 없는데. 이 꿈이 백년해로를 증명한다는 믿음은 어마한 비약들로 이뤄진 기대에 불과한데. 애당초 운명의 상대라는 게, 논리적으로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런 헛된 말을 내가 소년처럼 믿고.

 

단 한 번. 정수의 가족과 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 오래전 한동리에서 살 때의 기억이었다. 풍어제에서 엄마의 심부름으로 음식을 날랐다. 엄마는 굿판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근처에 아는 사람이 보이면 끝없이 일회용 접시에 과일이나 편육, 떡 등을 담아 보내주었다. 그때 나는 정수네 가족이 앉은 테이블에도 심부름을 갔는데 거기는 이미 상차림이 한가득해 접시를 올려놓을 공간이 없었다. 정수의 아버지가 그릇들을 모아가며 공간을 만들고 아슬아슬하게 내가 받아온 접시를 테이블 귀퉁이에 올렸다. 나는 누군가 그것을 부주의하게 쳐서 엎어지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접시를 막 올려놓은 정수의 아버지가 내 얼굴을 보고 말했다.

“영화 왜 이리 울상이야. 일하기 싫구나.”

그것이 솔직한 마음이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수의 아버지가 인자하게 웃고 나를 빈자리에 앉혔다. 그럼 여기서 밥 먹다 가자. 내게 식사를 권했다. 상 위에 있는 음식들은 모두 잔칫상의 음식들이었다. 아직 식지 않았고 젓가락질을 한 흔적도 거의 없었다. 정수의 어머니가 나무젓가락을 예쁘게 쪼개 내 손에 쥐여주었다. 무언가를 집어 먹으려 할 때마다 정수네 부모님이 내게서 먼 그릇들을 들어 올려 가까이에 놓아 주었다. 극진한 보살핌이 어색해 좀처럼 목구멍으로 음식이 들어가지 않았다. 정수는 내 옆에 앉아 있었다. 이미 밥을 다 먹은 것인지, 먹기 싫은 것인지 삐딱하게 앉아서 땅을 보고 요요만 굴렸다.

그 자리에선 축제의 전경이 쉽게 들어왔다. 멀리 칠성굿을 벌이는 할머니와 풍물패도 한눈에 조감 되었다. 나는 그제 것, 그렇게 먼 곳에서 할머니의 굿판을 구경한 경험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야. 정수야. 저기 영화 할머니 봐라. 멋있다. 아주 대장부셔. 내 기운을 북돋아 주려 한 것인지, 순수하게 감탄을 한 것인지 정수의 아버지가 손뼉을 쳐가며 할머니를 가리켰다. 하지만 정수의 어머니가 입고 있는 검은색 투피스 정장 때문인지 내 눈에 할머니의 옷과 춤은 과하게 형형하고 요란해 보였다. 엄마는 내가 사라져 나 대신 직접 이웃들에게 음식을 돌리고 있었다. 이상한 정경이었다. 이곳은 너무나도 정지되어 있고, 저곳은 너무나 숨 가쁘다.

“영화야. 할머니 보러 가자.”

굿판이 끝나갈 무렵 정수의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일어섰다. 정수와 정수 어머니도 뒤따랐다. 네 가족의 나들이 같은 위장을 하고 우리는 굿판을 향해 걸어갔다. 천막 그늘에 있던 사람들이 알음알음 정수네를 알아보고 길을 터줬다. 영화 어머니. 정수의 아버지가 엄마를 부르자 엄마가 반가운 체를 하며 인사했다. 엄마의 손에는 항아리가 있었다. 정수의 아버지가 코트의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굿을 잘 봤다고, 할머니에게 감사 인사를 건넨 뒤에 봉투 속에서 수표 다발을 살짝 꺼내 머리 위로 장난스럽게 흔들었다.

“여기, 백만 원!”

와, 하는 탄성이 울리고 누군가 남자다! 라고 외치기도 했다. 엄마도 자연스레 항아리를 높게 치들자 정수의 아버지가 그 속으로 봉투를 넣었다. 아이고 조합장님. 복 받으세요. 예. 복 많이 빌어주세요. 맞절하듯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고 나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할머니도 맑게 웃었다. 조합장 대감님. 복 많이 받으시오. 어른들이 어린아이처럼 신나 하며 축제하는 가운데 나와 정수는 그 자리에 어울리지 못하는 존재로 낯설게 있다. 우리는 어른을 흉내 내고 학습하며 생장하여 이제 막 분화分化할 준비를 마친 나이에, 이 기이한 의식을 목도하고 아연하게 쳐다본다.

 

아깝다고 생각했을까. 정수는 그 장면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엄마의 항아리에 들어간 그 물질을. 정수의 아버지는, 정수의 말대로 합리적인 사람이기에 기복을 바라면서 항아리에 돈을 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조합장으로서의 체면, 이라는 게 나의 추측이지만 다를 수도 있다. 가난한 이웃에 대한 친절이나 동정심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복잡함 없이 그냥 기분이었을 지도. 정수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사기라고 생각했을까.

묻고 싶었으나 묻지 못했다.

네 아버지의 돈. 아다리를 맞추는 네 아버지의 합리. 너는 왜 그 거짓말엔 낙담하거나 분노하지 않느냐고.


자잘하게 깨져나온 얼음 파편들을 인부가 빗자루로 쓸어 도로변에 버렸다. 바닥 곳곳엔 아직 돌가루와 유릿가루가 바람에 흩어지지 않은 채 모래언덕처럼 쌓여있었다. 아파트 근처 상가를 도배 작업하기 위해 나는 아빠와 함께 새벽에 나왔다. 정오면 끝날 것으로 예상한 게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시간은 오후 네 시였다. 벽만 붙이고 가면 될 걸 참. 아빠도 못마땅한 기색으로 건물을 쏘아봤다. 배수가 잘못되어 밤새 눈 녹은 물이 상가 건물 바닥에 고이고 그게 빙판을 만든 모양이었다. 인부들이 삽으로 얼음을 깨고 치우느라 고생이었다. 모여서 요즘이 어느 세상인데 건물을 이따위로 만드느냐고, 시공사를 욕했다.

윤진이가 가까운 보도블록에 앉아 내가 일하는 걸 지켜봤다. 무릎과 뺨이 빨겠다. 포터에서 여분의 패딩과 담요를 꺼내 윤진이에게 둘러줬다. 모습이 가판대에서 물건을 파는 노인 같기도, 옷과 면직물로 둘둘 쌓인 눈사람 같기도 했다.

“미안해.”

윤진이는 두 시간이나 기다린 사람치고는 대단히 해맑은 표정으로 괜찮다고 말했다.

“이거 보는 거 은근히 재밌다.”

“다 끝났어. 지금 정리하고 있어.”

“빨리 와.”

“응.”

기다리는 일을 끝낸 뒤에도 윤진이는 춥다는 이유로 내가 준 작업용 패딩을 벗지 않았다. 도배용 풀이 덕지덕지 묻어서 지저분한 옷이 아주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윤진이도 나도 겨울옷을 산 지 오래였다. 오늘 일찍 만나서 사기로 했는데, 내가 일이 늦어지는 바람에 갈 수 없게 되었다. 무법자 같은 차림새 그대로 약속장소에 나가 사람을 기다렸다. 사거리 길 건너 신호등에서 누군가 오는 것을 보고 윤진이가 손을 흔들었다. 운동화에 운동복 반바지, 유행이 한참 지난 패딩을 입은 남자가 아는 체를 했다. 면도했음에도 얼굴에 수염 자국이 거뭇거뭇했다. 내가 아는 남기가 맞나 싶었는데 가까이 와서 보니 남기가 맞았다. 남기도 우리를 가까이서 보고 당황하다가, 자조적인 농담을 뱉었다.

“야. 몇 년 만에 보는 건데 다들 이게 뭐야.”

 

술 마시러 간다. 흩어졌던 무리가 다시 모여서. 정수는 없지만 정수로 인해 모였으므로 정수를 추억하고 말하면서 간다. 가는 동안에 각자가 기억하는 정수의 마지막 모습을 맞춰보니 이 아이들도 나만큼이나 정수와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다. 무정하다고 서로 타박하다가, 먹고 살기 바쁘니까 어쩔 수 없지, 다독이기도 하면서 이미 취한 사람들처럼 걸었다. 하늘에선 진눈깨비에 가까운 싸락눈이 내려 매섭도록 추웠다. 어느 시점부턴가 행인들도 보이지 않았고 한파 외엔 우리 곁에 남은 게 없었다.

“남기야.”

내가 물었다.

요즘 뭐하고 지내냐? 나? 편입 준비해. 인제 와서? 과를 잘못 선택했어. 취업이 안 돼. 힘들겠네. 힘들겠다. 야 나 입학할 때만 해도 여기가 학과 중에 취업률 1등이었거든. 과 선배들도 우리가 기술이 1등이라고, 세계 1위인데 그게 한순간에 망하겠냐고. 한순간이더라. 한순간이지. 요즘은 뭐든 순식간이야. 너는 좀 나은 거야. 내 사촌은 마에스터 고를 갔는데, 거기서 졸업하자마자 중공업 회사에 채용 합격했거든. 근데 아직도 입사를 못 했어. 아직도? 회사가 어렵다고, 합격을 시켜놓고 채용을 미뤄서. 처음엔 반년, 그다음에 일 년. 그렇게 삼 년 째야. 너무하네. 너무했네. 그런데 그 회사 웃긴 게 뭔지 알아? 뭔데. 어렵다면서 죽어도 야구단은 안 팔더라.

“진짜 말도 안 되는 세상이야.”

 윤진이가 말했다. 세계에 대한 비애감과 배신감으로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러게. 남기도 무언가를 회상하느라 음울한 얼굴이 되었다.

“좀 더 그럴듯할 줄 알았는데.”

정신이 몽롱해질 때까지 술을 마시고, 각자 주머니에 있는 돈을 털어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은 뒤에도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다. 기온은 일 도씩 낮아지면서 밤이 저물고 새벽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가게도 열 시면 문을 닫아서 이제 갈 곳이 없는데 우리는 공원에 앉아 시간을 때우다 나중엔 천변을 따라 걸으면서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눴다. 취기에 밀려서 얼마만큼 가는지도 모르는 채 갔다. 누군가 우뚝 서서 야, 이거 파도 소리 아니야? 라고 말하는 순간에야 멈춰섰다. 귀를 기울여보니 정말 파도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가까이 보이는 언덕길을 올랐다. 남진 1교와 검은 밀물로 들이치는 동해가 눈에 들어왔다. 만조였다.

“다들 취했다.”

내가 말했고 모두가 동의했다. 아무도 돌아가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라는 생각으로 넋을 빼고 바다를 바라봤다. 윤진이가 수평선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캘리포니아가 저쯤에 있냐고 물었다. 남기가 그럴 것이라고 답했다. 태평양만 건너면 바로 있으니까. 그 말은 캘리포니아를 아주 가까운 지명처럼 느껴지게 했고, 다시 나를 아연하게 만들었다. 태평양만이라니. 그건 지구에서 가장 큰 대양이잖아.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가까움에 매달리고 싶게 되었다. 우리가 같은 물에 발을 담갔을지도 몰라. 우리가 같은 파도 소리를 들었을지도. 바보 같은 상상이 떠오르는 걸 보니 그만 돌아갈 때였다. 여기서 거기까지는 수천 킬로미터가 떨어져 있는데, 들었을 리가 없잖아. 남기와 윤진이에게 그만 돌아가자고 말했다. 너무 춥고 어두워 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만조에 이르렀으므로 파도도 우리와 같이 돌아서고 있을 것이었다. 언덕을 내려가는 동안에 머리 뒤에서 파도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발걸음만 떼도 이렇게 사라지는 것을.

 

하지만,

이라고 생각하게 돼. 정수야.

 

들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단 한 번이라도.
정수가 일출과 일몰의 파도 소리에 귀 기울여본 적이 있다면. 물때마다 다른 그 소리의 차이를 한 번이라도 실감했다면. 파도에는 시작도 끝도 없고 오직 골과 마루로 이어진 얼개만 있으므로. 여기서 저기까지, 하나의 결만이 있으므로. 들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주 느리지만, 한없이 집요하게 쌓이며 변주되는 그 소리를. 천체가 운동하면서 끌고 놓는 행성 표면의 물소리를. 물리적으로,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달이 공전하는 소리를.
우리가 함께.


한동리로 들어서니 앞산이 다 헤쳐져 있었다. 작년엔 멀쩡했던 게 왜 저러냐고 엄마에게 묻자 엄마가 운전 중에 창밖을 힐끗 확인하고 답했다. 모텔을 짓는다던데. 이 구석진 곳까지 누가 오려나. 요즘은 정말 생각 없이 올라가는 건물이 많지 않냐고 엄마에게 말하니 할머니도 손님이 늘고 좋지 않겠냐고, 우리 돈도 아닌데 뭘 걱정하냐는 타박이 돌아왔다.

“참. 오징어를 안 샀다. 네 막내삼촌이 그걸 좋아했는데.”

할머니의 집에 도착하니 숙모와 이모들이 먼저 와 있었다. 두부를 부친 냄새가 마루까지 진동했다. 벌써 상을 다 차렸냐고, 엄마가 신발을 벗으면서 아쉬운 소리를 했다. 진작 끝냈지. 빨리 들어와. 김 사 왔어? 숙모가 엄마의 장바구니를 받아갔다. 김을 잘라 제기에 올렸다. 절하자. 부엌에 옹기종기 모여서 상을 차리고 나니 자리가 좁아 항렬을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할머니가 먼저 술을 따르고 나머지 세 사람씩 돌아가며 술을 올렸다. 사촌 중에 온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할 일이 없어서, 라기보다는 집이 아주 가까우므로. 아빠도 오지 않았다. 신혼 때는 몇 번 방문했지만 일 년 내내 제사가 너무 많아 번잡하다는 이유로 이제는 설과 추석에만 찾는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만하면 훌륭하다고 구태여 찾지 않았다. 처가에 잘하는 사위, 라기보다는 역시 집이 아주 가까우므로.

할머니가 제사를 지내는 사람은 내 증조모와 증조부, 그리고 할머니 자신의 남편과 세 명의 아들이었다. 본래라면 그리 번잡하지 않을 제사상이 일찍 죽은 삼촌들 때문에 번잡해져 버렸다. 어린 시절 들은 그들의 사인은 유전성 질환이었으나, 크고 난 후 알게 된 바에 의하면 진짜 사인은 음주와 교통사고였다. 세 사람은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혹은 아주 어렸을 때 죽었다. 나는 그들에 관한 기억이 없다. 하지만 많이 슬펐을 것이다.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가.

어떻게 용서했을까. 먼저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원망하고 증오하게 되는 사람들을.

엄마에게 묻는다면, 인간의 마음에 자비가 가득해서. 원념에서 고통이 발생하기에, 진노와 탐욕을 버리는 순간에야 비로소 지극한 사랑이 이뤄져 모든 이가 행복에 이를 수 있으므로. 그러나 정수에게 묻는다면, 모든 것은 물질이라서. 사랑도 증오도 머릿속에서 발생하는 물질의 작용에 불과하여 육신과 함께 썩고 잊히기 마련이므로.

나는 모른다. 정수가 어디로 갔는지. 저승의 입구를 넘어 혼의 세계로 갔는지, 파동과 입자로 분해되어 별의 순환과 합해졌는지. 나의 지혜로는 알 수 없다. 내가 죽는 순간까지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어둘 뿐이다. 다만 정수의 고통이 이제 끝났기를 바랄 뿐이다.

“이승에서 지은 죄를 씻어줘요. 나무아미타불.”

상에 앉아 음복하는 중에 술에 취한 할머니가 노래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열왕신굿의 구절이었다. 문득 정수의 아버지도 정수의 제사를 지낼지 궁금해졌다. 제사가 아니라도 다른 형태의 의식을… 이 애도, 이 미토스가 다하는 순간이 올까. 나도 할머니를 따라 노래를 읊조렸다. 손으로 지은 죄. 마음으로 지은 죄.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스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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