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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말시티 헤매

2021.07.01 00:0007.01

헤매

노말시티

 

벌써 며칠째 같은 곳을 맴돈다. 길을 찾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지금도 그날 지나쳤던 갈림길과 불이 몇 개 나간 간판과 멀리 보이던 고층 빌딩에 점점이 박혀 있던 불 켜진 창문들이 생생히 기억난다. 왼쪽 오른쪽 왼쪽. 골목 두 개를 지나쳐서 다시 왼쪽.

설령 그때의 기억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해도 이건 이상한 일이다. 이곳의 골목길은 전부 뒤졌다. 지나갈 수 있는 갈림길의 조합을 하나도 빠짐없이 시도해 보았다. 그래도 그곳은 없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걸음. 걸음 수를 세어 지도를 그렸다. 공사 중이라고 나와 있는 지도의 빈 곳이 빈틈 하나 없이 빼곡하게 채워졌다. 그래도 그중에는 그곳이 없었다.

귀신에게 홀렸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어쩌면 꿈을 꾼 건지도 모른다. 술에 잔뜩 취했었으니. 어디 길바닥에 주저앉아 졸다가 찬바람에 퍼뜩 깨어 겨우 집에 기어들어 가 놓고는 그곳에 갔었다고 착각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안 그렇습니까. 손님?"

다시 그곳에 앉아 있기 전까지는.

"제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요?"

"방금 전까지는 그러셨나 보군요."

"여기가 어딥니까?"

바텐더는 대답 대신 컵을 닦던 손으로 왼쪽을 가리켰다. 5도쯤 기울어진 네온사인이 노란색과 분홍색 불빛을 번갈아 가며 깜박이고 있었다. 브이. 에이. 지. 유. 에스. 지난번에도 저 사인을 봤던 기억이 난다. 얼핏 봐서인지 그때는 베가스라고 생각했다. 카페 베가스. 이곳은 카페가 아니다. 지금 보니 베가스도 아니다. 바구스. 베이거스.

"바구스라고 읽으시면 됩니다. 방랑한다는 뜻의 라틴어죠. 배가본드라는 단어는 들어 보셨습니까? 방랑자 말입니다. 어원이 같습니다."

"제가 왜 여기에 있죠?"

"방랑자들이 찾아오는 곳이니까요."

"몇 번이나 이곳을 찾으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다시 온 건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곳은 헤매는 사람만이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희미한 기억만을 남긴 채 침대에서 깨어났다. 또 꿈을 꾸었다고 해야 하나. 너무 생생하다는 걸 빼면 그냥 꿈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그래도 꿈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아니. 꿈이라도 상관없었다. 다시 그곳에 갈 수만 있다면.

왜 그곳에 가고 싶을까.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다. 그곳에 있을 때의 어떤 충만한 감정. 시끄럽지도 조용하지도 않은 분위기. 가지각색의 잔에 채워지는 온갖 음료들. 그 음료의 향, 색, 질감. 그리고 일렁이는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가 전신에 스며들 때, 가장 안쪽부터 시작된 무언가가 바깥쪽으로 녹아들며 주변의 공기에 흡수되어 버리는 느낌. 동질의 무언가에게 보호받으며 전체의 일부이자 일부가 아닌 전체로 존재하는 기분.

아니. 그 이유는 설명할 수 없다.

그곳에 찾아가는 방법을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그래도 이번에는 단서를 하나 얻었다. 바텐더가 분명히 말했다. 그곳은 헤매는 사람만이 찾을 수 있는 곳이라고. 지도를 그려가며 갈림길을 돌아도 그곳에 다시 갈 수 없는 이유는 그래서였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명확한 문장으로 표현될 수 없다. 내비게이션에 입력된 길을 버튼만 클릭하여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빨간약 한 알을 삼키는 것으로는 그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곳은 찾으려 하면 찾을 수 없고 찾지 않으면 갈 수 없다. 그저 끊임없이 찾을 때 어느 순간엔가 도착해 있게 되는 그런 곳이다.

그걸 알면서도 그곳에 다시 가지 못했다. 한참을 헤맨 뒤에야 이유를 깨달았다. 나는 끊임없이 그곳을 찾으면 언젠가는 그곳에 도착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건 그곳을 찾는 방법이다. 그곳을 찾는 방법으로는 그곳에 갈 수 없다.

"진실의 본질이 모호함이라면 그 본질을 규정하거나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곳에 오는 방법을 모른 채로 영원히 헤매야 하는 겁니까? 다시는 여기에 못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끌어안은 채로? 그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이 정말 없습니까?"

"이곳을 찾지 않으시면 고통도 없겠죠."

바텐더의 무심한 대답을 되새기며 그곳에 다시 도착했다는 걸 알았다. 작은 잔에 채워준 노란 액체를 허겁지겁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액체는 끈적한 고무처럼 무미건조하게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바텐더가 다시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맛을 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럼 그 맛을 느낄 수 없으니까."

매번 그런 식이었다. 그래도 그곳에 방문할 때마다 작은 단서 하나씩을 얻었다. 찾지 않으면 고통도 없다. 진실에는 답이 없지만 거짓에는 답이 있다. 고통받지 않는 길은 확실히 있었다. 그곳을 찾아가는 게 고통스러운 일이고 그곳에 도착해서 그 고통을 끝내려는 거라면 어째서 그곳을 찾는 일을 아예 그만두려고 하지 않는 걸까. 그만두면 고통도 없을 텐데.

그곳을 찾지 않기로 했다. 그냥 그러지 않아 보려고 했다.

놀랍게도. 아니 놀라울 것도 없이 고통스럽지 않았다.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채로 조용히 소모되어 갔다. 소모되는 건 고통스럽지 않았다. 하나씩 줄어드는 숫자를 그저 지켜보았다. 엄밀히 말하면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저 형태만을 바꾸었다. 사람은 그렇게도 살 수 있었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람은 그렇지 않게도 살 수 있었다. 그렇지 않게 산다고 해도 당장 죽어 넘어지지는 않았다. 다시 그곳을 찾으려 버둥댔다.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영원히 그곳에 도착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삶은 유한하고 게다가 줄어들고 있었다. 그 시간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었다. 결국 그곳을 찾지 못하고 집으로 발길을 돌리는 순간들이 또렷하게 기억에 쌓였다.

"끊임없이 돌을 밀어 올리는 거죠. 결국에는 다시 떨어지고 말 돌을."

"시지프스라니. 아니 시시포스가 정확한 발음인가요? 어쨌든. 식상한 비유네요."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돌을 보는 건 어떤 기분일까요? 허무할까요? 억울할까요? 아니면 속이 후련할까요?"

"글쎄요. 적어도 잠깐은 마음이 편하겠죠. 언덕을 내려가는 순간에는 힘들게 돌을 밀어 올리지 않아도 되니까. 어쩌면 시원한 바람이 불지도 모르고."

"바람으로 한잔하시죠."

바텐더가 푸른색 기운이 도는 구름 같은 액체를 세모꼴의 잔에 따라 주었다. 목으로 넘어간 액체가 시원하게 세포 속으로 스며들었다.

바구스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멋없는 이름이다. 그곳이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많은 사람이 그곳을 찾아 헤매지만 찾지 못한다. 아니. 그곳은 헤매야만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우리는 방랑자다. 헤매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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