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해망재 마리 이야기

2021.04.01 00:0004.01

마리 이야기

해망재

 

정원에 유난히 생기가 돌았다. 문득 창문을 열고 밖을 내어다보니, 화단 여기저기에 초여름의 장미가 피어나고 있었다. 마리는 책상을 손으로 짚으며 일어났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제는 수험생이니 다른 일에는 신경 쓰지 말고 공부에 집중하자는 기특한 생각도 하였지만, 대수 노트만 들여다 보기에는 이 청명한 날씨는 눈이 부시게 화려하였다.

“안에서 공부하시는 게 아니었나요?”

홍차와 간식거리를 쟁반에 받쳐 들고 오던 어멈이 기가 막힌 듯 한 마디 했다. 마리는 뛰어나가다 말고, 몸을 돌려 책상에 펼쳐 놓았던 대수 노트를 다시 집어들었다.

“그거, 정원으로 가져와.”

“밖에서 무슨 공부가 됩니까요.”

“왜 못 하겠어. 옛 사람들은 감옥에서도 공부를 했다는데. 감옥보다 훨씬 좋은 우리 집 정원에서 공부를 하는 게 무에 이상하다고.”

“감옥에서야 달리 할 게 없으니 공부라도 했겠지요.”

“됐어, 어멈은 공부를 해 본 것도 아니면서. 꼭 오라버니가 하는 잔소리를 그대로 앵무새처럼 따라하기나 하고.”

마리는 토라진 듯 고개를 돌리며 종알거렸다. 그렇게 말하면 선량하고 우직한 어멈은 속이 상하는 걸 어디다 말도 못하고 시무룩해 한다는 걸 알았지만, 책상머리에 콕 붙어앉아 수험 공부에만 몰두하기에는 정말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어차피 공부에 뜻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요새는 시절이 바뀌어, 여자가 시집을 잘 가려면 집안 좋고 인물 잘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기에 하는 것일 뿐. 요즘에야 소위 엘리트다 하는 번듯한 남자들이 다들 신여성과 결혼하고 싶어하니, 명문가의 딸이라고 해도 공부를 해서 좋은 학교에 이름을 올려야 더 나은 혼처를 얻는다고들 한다. 오라버니도 대체로 그런 생각으로 마리에게 공부를 하라고 계속 권하시는 것이었다. 하다못해 이왕비 전하께서도 학습원 여자고등과를 나오시지 않았느냐며.

“...이왕비 전하가 공부를 잘해서 이왕 전하와 혼인하신 건 아닐 거잖아.”

마리는 차를 마시다 말고 중얼거렸다. 이왕 전하와 결혼하신 마사코 전하는 친왕의 따님이라고 들었다. 그 아버님인 친왕 전하는 육군 대장을 지내신 분이라고. 어렸을 때 신문에서, 마사코 전하께서 혼인하실 때 입으신 무척 아름다운 새하얀 웨딩 드레스 사진을 보고, 언젠가 혼인을 하게 되면 꼭 저런 드레스를 입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면 뭘 해.

아버님은 친왕에, 육군 대장을 지낸 굉장한 집안의 딸인데다, 고등과까지 나올 만큼 공부를 열심히 하셨다는 마사코 전하는, 내지의 황족과 결혼하지 못하고 조선의 세자 전하와 결혼하셨다. 물론 조선과 내지는 하나라고들 하지만, 다들 입을 모아 말하곤 했다. 조선은 이미 망했으니, 이왕 전하란 쭉정이가 아니냐고.

‘그렇다면 훌륭한 집안의 아가씨에 공부까지 잘 했다 한들, 마사코 전하는 쭉정이와 결혼하신 게 아닌가. 대체 여자가 공부하는 게 시집 잘 가는 것과 무슨 상관이라는 건지.’

마리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나 보고 대체, 여기서 무슨 시집을 어떻게 더 잘 가라는 건지.’

사실 보통 사람들은, 남작의 딸로 태어났다고 하면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었다고, 무척이나 부러워할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남작도 남작 나름이지. 내지도 아닌 이 조선 땅에서 귀족의 딸로 태어나는 것은, 정말 시집을 잘 가기에는 한없이 애매한 상황이 아닌지.

귀한 집 여식이 곤궁한 집 아들과 혼인하는 일이야 옛날 이야기나 연애 소설에나 나오는 이야기지, 혼인을 한다면 응당 남작가보다는 지위가 있는 집안의 아들 중에 상대를 골라야 할 텐데, 지금 마리가 알기로 어지간한 집안의 잘난 자제들, 군이나 총독부에서 일하며 착실하게 승진하는 이들은 이미 혼인을 했거나, 정혼자가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내지의 귀족에게 시집을 간다? 아무리 오라버니라도 언감생심, 그런 꿈은 꾸지 못할 것이다. 남은 것은 비슷비슷한 나이의, 고만고만한 사내애들, 고를 것도 없이 도토리 키 재기 하는 것 같은 놈팡이들 뿐이다. 어려서부터 뻔히 보았던 놈들인데, 그런 놈들에게 시집가자고 공부까지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체질에 맞지 않았다.

어차피 누군가에게는 시집가야 하는 거라면, 집안이고 뭐고 다 소용없으니 그냥 인물이나 반듯한 남자였으면 좋겠다. 마리는 한숨을 쉬며 정원 테이블에 몸을 숙여 엎드렸다. 그때였다.

“네가 그러면 그렇지. 공부를 한다더니, 정원에서 놀고 있느냐.”

마리의 오라버니인 충원이었다. 마리는 고개를 들어 한번 쳐다 볼 생각도 하지 않고 대꾸했다.

“충원 오라버니는 내가 조금 전까지 공부를 했는지 안 했는지 어찌 알고 그리 말씀하세요.”

“안 봐도 뻔한 일이 아니냐. 네가 공부를 하겠다기에, 나는 또 큰 마음 먹고 좋은 것을 마련해 왔는데.”

마리는 입을 비쭉거리며 그대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충원은 보통의 조선 사내들보다 다정하고 누이동생을 아끼는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충원이 가져다 준 것들이 전부 달가웠던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까지 충원이 마리에게 좋은 것이라고 잔뜩 생색을 내며 가져다 준 것 중에 마리의 마음에 찼던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오라버니는 취향이 고상하질 못해서 그래.’

마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때였다.

“너무하는군.”

부드러운 바리톤의 음성이 공기를 간지럽혔다. 마리는 홀린 듯이 고개를 들었다.

“마련해 오다니, 그거, 사람에게 쓰는 말이 아니지 않나.”

흰 비단에 부드러운 모필로 그려낸 것 같은 용모의 청년이 웃음지으며 충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라버니, 그 분은...”

“네 가정교사지, 누구겠느냐.”

충원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청년에게 다정하게 어깨동무를 하며 히죽 웃었다.

“이름은 류홍우. 나와는 함께 경성제국대학에 다니고 있지.”

“오라버니와 어울려 다니시는 분이라니, 어쩐지 못 미더운데요.”

마리는 짐짓 관심 없다는 듯 대답했지만, 어쩐지 귓불까지 열이 올라 화끈거렸다. 가슴이 마구 두근거려서, 그 류홍우라는 청년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무슨 소리야, 최고 학부라고.”

“오라버니가 다니시는 걸 보면 이젠 제국대학이 최고 학부가 아닌 거겠죠.”

“어허.”

남매가 싸우는 듯, 사이좋게 농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며 홍우는 웃었다. 그 웃음짓는 모습은, 이 정원에 피어난 어떤 장미화보다도 아름다운 것 같았다. 마리는 충원에게 말대꾸를 하다 말고, 잠시 넋을 잃은 듯 홍우를 바라보았다.

“대수 노트군요, 잠깐 봐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입은 교복은 다소 낡아 있었다. 초여름의 날씨라 땀을 흘렸을 법도 한데, 그에게서는 뭇 사내들에게서 흔히 맡아지는, 땀이 쉰 듯한 쾨쾨한 냄새라고는 한 점도 느껴지지 않았다. 수시로 여자들과 노느라 매일같이 씻고, 불란서 향수까지 뿌리고 다니는 한량인 충원과는 또 다른, 그저 맑고 청신한 비누 냄새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마리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으며 숨을 들이마셨다.

 

***

 

“자네와는 달라서 정말 기특한 아가씨야.”

두 번째 수업을 하고 돌아가던 길, 홍우는 충원을 보고 농을 건넸다.

“기특하다고?”

“그래, 대수라면 학을 떼는 자네와는 다르더군.”

충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홍우를 옆으로 밀어냈다.

“자네같은 수재에 비하면야 학을 떼고 치를 떤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법문학부 공부를 하는데 부족할 정도는 아니라네.”

“그래, 그렇다고 해 두지.”

“진담이라네. 조선 귀족이라도 귀족은 귀족이라, 동경에 건너가 학습원에 입학할 수도 있었건만. 아버님께서 조선 사람은 양반이고 귀족이라도 우선 공부를 잘 해야 한다고 하시는 바람에 죽자사자 수험공부를 하지 않았느냔 말이야. 덕분에 제국대학에서도 어디 빠지지는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네.”

“자네의 주 특기는 법문학이 아니라 그냥 프랑스 문학이 아니었나. 특히 여자를 유혹하는 데 그 자질을 아낌없이 쓰는 게 탈이지만.”

홍우는 웃음지었다.

“여튼 자네 매씨(妹氏)는 자네와 달라서, 아주 성실하게 노력하는 학생이야. 수학에 아주 재능이 뛰어난 것은 아닌지도 모르지만.”

“그 애가 노력이라...”

의외라는 듯, 충원이 중얼거렸다.

홍우의 말대로였다. 마리는 달라졌다. 홍우를 만난 그날부터, 눈 뜨면 일어나서 책을 붙잡았고, 학교 갔다가 돌아오면 잠들기 전 까지 대수 문제를 풀었다.

한 주에 두 번, 홍우가 과외 수업을 하러 오는 날이면 마리는 새벽같이 일어나 몸단장을 하고, 그리고 다시 홍우 앞에서 한 문제라도 틀릴까 열심히 공부했다. 가끔은 홍우에게 질문을 하기 위해 예습을 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여자 고등과가 아니라 제국대학 입시라도 치르는 사람 같았다.

‘오라버니가 왜 그렇게 공부를 하라고 채근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아.’

마리는 밤 늦게까지 공부를 하다가, 문득 코피 한 방울이 뚝 하고 떨어지는 것 까지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오라버니도 생각해 보셨겠지. 어차피 격에 맞는 신랑감을 찾기 어렵다면, 조선에서 제일 똑똑한 남자를 신랑으로 삼아서 남작 가문의 사위라고 뒤를 밀어주는 게 나을 수도 있는 거잖아.’

코피를 닦고, 세수를 하고, 내친 김에 주방에 내려가 달콤한 쿠키에 커피 한 잔을 부탁하고, 그리고 다시 책을 펼치면서도 마리는 계속 홍우를 생각했다.

‘그런데다 홍우 오라버니는 오라버니의 친우이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하다가 마리는 때때로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공부를 잘 하는 우등생인 홍우가, 대체 무엇을 보고 방탕하고 놀기 좋아하는 제 오라비와 어울려 다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마리가 생각하기에 홍우는 충원과 함께 있는 것들 중 사람과 물건을 통털어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틀림없어. 오라버니는 홍우 오라버니를 내 신랑감으로 점찍은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다 큰 처녀를 외간남자와 둘이서 공부하게 둘 리가 없잖아.’

신랑감이라면, 데릴사위를 들이려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충원은 마리를 무척 아꼈고, 남의 집에서 시집살이를 하는 꼴을 두고 볼 사람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친한 벗인 홍우를 매제로 삼아 셋이 함께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다 마리가 듣기로, 홍우는 시골 출신이라고 했다. 가난한 수재를 데릴사위로 들이는 거야,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내지에서는 데릴사위를 아예 아들 삼아서 집안을 물려주는 경우도 있다지 않은가.

물론 홍우가 찢어지게 가난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라고, 이 녀석도 제 고향에 가면 나름 수재에 도련님 소리 듣는다고 충원은 말했지만, 그래도 마리게 보기에는 홍우의 옷차림은 단정하기는 해도 풍족해 보이지는 않았다. 행동거지나 옷차림에서 가난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수업을 들을 때 마다 블루블랙의 교복 소매 끝에 닳은 흔적이 완연히 눈에 들어왔다.

“...그런 게 아니야.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 올 정도만 되어도 먹고 살 만한 거지.”

마리가 소매 끝을 조금 티가 나도록 들여다보던 날, 홍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가씨 생각에는, 내가 가련한 고학생처럼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남자 혼자 살림이라는 게 그런 거지. 어쩐지 허술하고, 제대로 입고 먹고 다녀도 어쩐지 없어 보이고.”

“제, 제가 꿰매드려도...”

“그럴 것 없어.”

홍우는 소매자락 끝에 일어난 긴 실밥을 잡아서 뜯어버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가 외간남자 옷 같은 거 꿰매 주겠다고 그러는 거 아니야. 김춘추 이야기 몰라?”

그렇지만 김춘추는, 자기 옷을 꿰매 준 문희 아가씨와 결혼했는걸요.

마리는 그 말은 차마 하지 못한 채 눈을 내리깔았다.

 

***

 

“이 댁은 정말, 언제 와도 장미가 아름답구나.”

어느 날인가, 홍우는 수업을 하다 말고 문득 중얼거렸다. 마리는 눈을 들어, 장미를 바라보는 홍우의 옆모습을 가만히 훔쳐보았다.

그를 처음 만난 이후로, 정원에는 장미가 피고 또 지고, 그와의 수업이 있는 날마다 홍차는 하얀 본차이나 찻잔 위로 꿀빛 그림자를 드리우곤 했다. 마리는 이 순간을, 장미를 바라보는 홍우를, 느긋하게 풍경을 바라보는 그의 목소리를, 창문 밖의 장미꽃과 지금 이 모든 것들을, 그대로 박제하듯이 남겨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열렬한 사모의 눈빛을 느낀 것일까. 홍우는 문득 머쓱해 하며 마리의 노트를 쳐다보았다.

“마치 서양 소설에 나오는 대저택같은 느낌이야. 아주 이국적이고, 아주 아름다워.”

“그런... 가요. 저는... 너무... 경성의 다른 저택들과는 동떨어진 것 같아서...”

“아니야. 아주 아름다워. 선친께서는 서양의 문화를 사랑하셨다고 들었는데.”

“예... 그러신 것 같아요.”

마리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너무... 서양 문화를 좋아하셔서, 제 이름을 이렇게 지어버리셨지만요.”

“그 이름이, 왜.”

“그냥... 조금 부끄럽잖아요. 교회당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외국인 학교에서 세례명으로 받은 이름도 아닌데. 꼭 서양 이름을 흉내내서 마구잡이로 지은 것 같아서.”

말을 하다 보니, 학교의 동학들이 저를 헐뜯느라 했던 말들이 떠올라서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마리는 귀까지 빨개진 채로,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제 친구들은... 제 이름을 두고 말들을 많이 했어요.”

“무슨 말을 하였는데.”

“저는 조선 사람이고, 이 시대에 귀족 작위를 가진 사람들은 친일을 하는 사람들인데... 저희 아버지가 제게 조선 이름도 내지 이름도 아닌 이름을 지어 주신 것은, 언제 또 세상이 뒤집힐지 몰라서 대비하는 게 아니냐고요.”

말을 해 놓고 나니 공연히 서러워져, 마리는 울음을 터뜨렸다.

“나이를 한두 살 먹은 어린아이들도 아니고... 다 큰 처녀들이... 사람을 그런 것으로 조롱하기나 하고... 흐윽...”

“울지 마라, 마리.”

홍우가 속삭였다. 마리는 흉하게 눈물을 줄줄 흘리는 와중에도, 그가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이 그저 달콤하여 정신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마리.”

“홍우 오라버니...”

“마리라는 이름은 말이다... 너, 모리 오가이가 누군지 알고 있니. 나츠메 소세키 선생과 나란히 일본의 문호로 불리는 분이란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홍우는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조금 구겨진 손수건을 꺼내 마리에게 건넸다.

“그 모리 오가이의 딸 이름이 마리라고 해. 딸은 마리, 아들은 프리츠.”

“정말이에요?”

“그래. 모리 오가이는 작가이기도 하지만 장군이기도 한데, 그런 사람도 딸 이름을 마리라고 지었잖니. 내 생각에 마리라는 이름은, 내지에서도 꽤나 신식이고 멋들어지게 들리는 이름인 게 아니었을까.”

홍우의 말에,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뺨에 닿은 손수건은 거친 옥양목이었지만, 마리에게는 마치 귀한 비단실을 한 올 한 올 엮어서 만든 것처럼 보드랍기만 했다. 찻잔에 드리워진 꿀빛 그림자는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갈수록 더 짙어지는 것만 같았다. 홍우에 대한 마리의 마음도 그러하였다. 밤이면 밤마다, 마리는 홍우를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고, 미친 사람처럼 방을 서성이다가 홀린 듯이 불을 켜고 대수 책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가슴이 두근거리다가, 애끊는 사모의 정으로 말미암아 아예 터져 나가고 말 것 같았다.

오라버니께서는 언제쯤, 홍우 오라버니에게 혼담을 넣어 주실까.

 

***

 

“마리 아가씨가 아주 달라졌어요. 저 젊은 선생님 오시고부터 얼마나 공부를 하시는지, 이젠 걱정이 될 정도라니까요.”

수험 생활이 막바지에 접어든 어느 날, 어멈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마리를 칭찬했다. 마리의 이야기를 할 때 마다 자랑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거리기까지 했다.

“우리 마리 아가씨를 보면, 이러다가 박사가 되시는 게 아닌가 모르겠다니까요.”

“박사까지는 필요없지, 여자아이인데.”

“아니, 도련님. 세상이 달라지고 있지 않아요. 내지에서는 여자 박사도 있다고 하던데요.”

“그거야 내지고, 여자가 박사까지 하면 시집은 가기 힘들지 않겠어?”

“그건 그렇겠네요.”

“마리도 고등과에 들어가고 나면, 일단 그때부터는 좋은 짝을 찾아 주어야 하는데.”

충원은 한숨을 쉬었다.

“이럴 때는 가장이라는 게 너무 무겁군.”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야 당연히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애통하긴 했다. 하지만 남작 작위를 물려받은 것은 나쁘지 않았다. 어디에 가도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었고, 여자들을 유혹하기도 쉬웠다. 물려받은 재산도 적지 않은 편이라, 평생 한량으로 놀고 먹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아버지가 남겨놓은 열 명의 배다른 형제들과, 마리의 일이었다. 배다른 형제들이라 해도 적어도 시집장가 갈 때 까지는 신경을 써야 한다. 특히 친동생인 마리는. 이 조선 땅에서 고를 수 있는 가장 좋은 혼처를 골라 앞으로도 내내 행복하게 살도록 해 주어야 했다.

“도련님부터 얼른 혼인을 하셔야지요.”
“남자는 혼사가 좀 늦어져도 상관없지만, 여자아이는 서둘러야지. 갖출 것 다 갖추고 혼담 주고받고 해서 스무 살 전에는 혼인을 해야 하지 않나.”

“그러니까 말씀입니다.”

어멈이 수선스럽게 말하는 것을 한 귀로 흘려 들으며, 충원은 시가에 불을 붙였다.

“오라비로서 의무를 다 하고서 혼인해도 늦지 않아.”

“아니지요, 여자의 혼사는 여자가 정하는 법입니다. 아무리 가장이니, 남작님이니 해도 말이지요. 도련님께서 혼인을 하셔서, 딱 집안에 바깥주인과 안주인이 갖춰지지 않으면 어찌 되는지 아십니까?”

“어찌 되는데?”

짜증스럽게 묻는데, 어멈이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작은 마님께서 어머니라고, 마리 아가씨의 혼사에 끼어드실 것입니다.”

작은 마님이라는 말에, 충원은 눈살을 지푸렸다. 그는 갓 불을 붙인 시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서성거렸다.

“마님은 무슨 마님. 호적에도 아니 올린 아버지의 애첩이 아닌가. 아버지랑 한 이불 덮었다고 어머니고 마님이면, 내겐 빌어먹을 어머니가 백 명은 넘겠구만.”

“그게 싫으시면 혼인을 하셔서, 새 마님이 혼사를 감독하게 하셔야지요. 아무리 도련님이 마리 아가씨를 잘 시집보내고 싶으셔도, 결국 혼사 일이라는 건 여자 손을 안 타면 준비가 안 되는 거랍니다.”

충원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런 말은 진작 했어야지. 지금부터 결혼할 여자를 찾아도, 식 다 올리려면 1년은 걸리겠구만.”

“쇤네는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혼인하시라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아, 진짜!”

충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때 열린 문 틈으로 홍우가 비죽 고개를 들이밀었다.

“뭐가 진짜란 말인가.”

“마침 잘 만났군. 나랑 혼인이라도 하세.”

“그건 또 무슨 별스러운 헛소리인지 모르겠군. 자네 누이는 수학 실력이 날로 일취월장하니, 고등과에 들어가는 건 별 일도 아닐 거라네.”

“그거 잘 되었군.”

충원은 한숨을 쉬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홍우에게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누이동생을 제대로 시집보내려면 내가 먼저 장가를 들어야 한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군.”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아무래도, 남자들은 자기가 장가를 들어도 혼사에 대해 모르지 않나.”

홍우가 웃었다. 충원은 조금 의외라는 듯 홍우를 바라보았다.

“자네, 혼인했나?”

“어렸을 때 했지.”

“그럼 안사람은.”

“고향에 있다네. 빙모께서 그때 병으로 돌아가실 지경이 되어, 막내딸이 시집가는 모습은 보아야 눈을 감겠다고 하셨기에 혼례부터 치렀지 뭔가.”

홍우는 고개를 돌리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우리 부모님께서 민며느리 기르듯이 데리고 계시지. 자네 누이보다도 어린 아이야. 호적에는 아직 올리지도 못하였네.”

“대체 몇 살 때 장가를 든 건가?”

“꽤 되었지. 그 애가 열 살도 되기 전이었으니.”

“이런 몹쓸 사람, 그런 어린애를 두고 혼인할 마음이 들던가.”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줄 아는가. 빙모님이 오늘내일 하신다기에 식만 올린 것이지.”

충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너무 이른 혼인은 몹쓸 인습이라는 이야기를 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같은 시각, 혹시라도 제 혼사 말이 나올까 싶어 이야기를 엿듣던 마리는, 홍우가 혼인했다는 말에 절망하여 목을 매고 말았다.

 

***

 

충원은 저택의 문을 닫아걸었다. 남작 가의 따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조문하려는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충원은 그 누구의 인사도 받지 않았다. 마리와 함께 공부하던 같은 반 친구들이 찾아왔지만, 충원은 그들조차 들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관이 대문 밖으로 나가지도 아니하였다. 사흘이 지나고 이레가 지나고 보름이 지나도록, 죽었다는 젊은 처녀는 그 집을 떠나지 못하였다.

“죽기 전에 그렇게 신 들린 듯이 공부를 하였다더구만.”

사람들은 남작 댁의 흉사를 입에 올리며, 대체 세상 부러울 게 없을 남작 가문의 영애가 무슨 일로 목숨을 끊었는지 수군거렸다. 누이동생을 너무나 아꼈던 그 오라비가 의사를 내쫓고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대문을 걸어잠그고, 그 안에 못질을 하더라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 아가씨가 제 힘으로 좋은 학교에 진학하겠다고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는데. 뭐애 홀리기라도 했던 것인지.”

“그런 것 보면, 자식이 공부한다고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니었던 게지. 죽어서야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런데 정말 어떻게 된 거야. 젊은 아씨가 무슨 급병을 얻어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났다는 거야?”

“급병이 아니야, 스스로 목을 매었다던데.”

“에엥? 그 댁 다녀온 의원 댁 하인 말로는 급병이라던데.”

“누가 그 말을 곧이 믿나. 젊은 처자가 스스로 목을 매었는데, 누가 그걸 그렇다고 말을 해.”

“잠깐, 내가 듣기로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있던데.”

차라리 눈물을 흘리고 애통해하며, 사람들 손을 잡고 그 아이가 어찌 죽었는지 꾸며내어서라도 말을 했다면 모르겠으나, 이렇게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니 세상 사람들은 제 멋대로들 이야기를 만들고 부풀려댔다.

“아니, 왜. 그 아씨가 누굴 짝사랑하였는데, 이루어질 가망이 없자 그만 세상을 버렸다고도 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집안 권력이면 못 이룰 혼사가 없었을 터인데.”

“사모한다고 다 혼인할 수 있다던가? 그런 집안 따님이면 응당, 집안끼리 보아서 걸맞는 데로 통혼하는 법이지 않나.”

“보통이야 그렇지. 그런데 그 젊은 남작이 그렇게 제 누이를 아꼈다는 거야. 세상 떠난 어머니 사랑을 듬뿍 받지도 못한 가여운 아이라고, 그렇게 애틋하게 여겼다는데.”

“하긴, 그런 오라비라면야. 제 누이가 목숨을 끊을 만큼 사모하는 이가 있었다면 어떻게든 나서서 손을 써 주었을 테지.”

“모르지, 또. 임자 있는 사내를 탐을 내었는지도.”

처음에는 사람들도 안 된 일이다, 죽은 아씨가 가련하다고들 말했다. 하지만 세상 떠난 남작가의 아가씨가 누군가를 사모한 끝에 목숨을 끊은 것 같다는 소문은 점점 부풀려지고, 급기야는 아내 있는 남자의 아이를 배는 바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거라는 흉흉한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리고 충원은, 그 모든 소문으로부터 담을 쌓아 올린 듯이, 그 저택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마리의 시신은 아직 제대로 입관조차 되지 못했다. 초가을이었지만 아직 한낮에는 늦여름의 열기가 남아 있었고, 어멈은 제 손으로 먹이고 입히며 지금껏 길러온 아씨를, 죽은 뒤에도 손발을 닦아내고 두어 시간마다 새 얼음을 갈아 대며 충원이 마음을 돌리고 제대로 장례를 치러주기만을 애태워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곱구만.”

충원이 중얼거렸다. 그는 면도도 하지 않아 수염이 자라고, 잠도 자지 않아 시뻘개진 눈으로 걸어들어와 잠든 듯 누워 있는 누이동생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죽은 뒤에도 살아있을 때와 똑같았다고 말하는 것은 기만이다. 목을 맨 자리에 짙은 흔적이 남고, 얼굴 여기저기는 부은 채로 창백해졌다. 아무리 얼음을 대어 보전해도 상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엊그제부터는 귀 끝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충원은 마치 산 동생을 대하듯 그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러다가 겁에 질린 듯 저를 올려다보던 어멈을 돌아보았다.

“지난 번 한성권번의 김정자와 뱃놀이를 다니던 중에, 정자가 내게 그런 말을 하더군. 저기, 한강 건너 화주당이라는 데가 그렇게... 혼례를 제대로 올려 준다고.”

“도련님, 설마 혼사굿을 말씀하시는 겁니까요.”

“그래.”

충원이 말하는 혼례란, 혼인하지 못하고 죽은 젊은 처녀총각들을 위한 혼사굿이었다. 어멈은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고운 아가씨가 이렇게 세상을 뜨셨는데, 혼사라도 치러서 위로해 주시면 얼마나 다행입니까요. 그렇게 하셔야지요.”

“무당을 불러주게.”

충원은 짧게 말하고, 제 침실로 돌아갔다. 그는 씻고 면도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평소처럼 단정한 모습으로 돌아온 그는 서랍을 뒤져, 제 동학들과 찍었던 입학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지금보다 두세 살 어렸던 시절, 그 앳된 얼굴이 남아 있는 흐릿한 사진 속에서, 충원은 한 사람을 확인하여 그 얼굴만 동그랗게 오려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무당이 왔다. 소박한 옷차림을 한 늙은 무당은 남작가의 위용에 주눅이 들었는지 어깨를 움츠렸다가, 남작가의 주인이 젊은 남자인 것을 보고 조금 마음이 놓인 듯 고개를 들었다.

“혼사굿을 하려면 신랑이 있어야지요. 죽은 뒤의 일은 가문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망자의 사주를 맞추어 궁합을 볼 일이니, 쇤네가 적당한 신랑을...”

“신랑이라면 있네.”

젊은 남작이 말했다. 그는 작게 자른 사진 조각과 함께, 사람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이대로 치르게.”

“...혼사굿은 세상 떠난 처녀 총각을 맺어주는 일입니다.”

“음.”

“산 사람과 맺어주면, 먼저 세상 떠난 이가 산 사람을 불러들이는 법입니다.”

“자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네. 함부로 캐묻고 다니는 것을 보니, 필시 함부로 입을 놀릴 터.”

“아니옵니다.”

이건 미친 사람이다. 무당은 생각했다. 그는 납작 몸을 숙이며 대답했다.

“쇤네는 그저, 이런 일은 동티가 나면 가문의 어른께도 누가 되는 일이라...”

“자네만 입을 다물면 동티가 날 일이 없지. 그대로 하게.”

 

***

 

“오늘도 결석인가.”

교수가 물었다. 홍우는 손을 들고 대신 공손히 대답했다.

“누이동생이 급병으로 세상을 떠나, 많이 상심한 것 같습니다.”

“그것도 하루이틀 일이지, 대체 언제까지 그 핑계로 아니 나오겠다는 건지. 대체 공부를 하겠다는 건지 안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군.”

교수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홍우는 마치 자신이 결석하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를 조아렸다.

“류홍우 군.”

“예, 교수님.”

“자네가 개인적으로 친한 편이었지. 남작가에 좀 가 보았나.”

홍우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틀마다 가 보았습니다만,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신문에도 자꾸 나오지 않는가. 마리 양이 세상을 떠나고서, 남작 가문은 문을 닫아걸고 장례식도 치르지 않는 것 같다고. 그런 흉흉한 소문이 돌게 두어서 되겠나.”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지.”

교수의 말대로였다. 엊그제는 신문에도 남작 저택의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였다. 젊은 남작은 이미 누이동생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닌가, 혹은 남작과 누이동생이 부적절한 관계였던 것은 아닌가 하는 실로 선정적인 기사였다.

홍우는 걱정스러웠다. 마리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것은 비극이었지만, 그렇다고 충원까지 그런 소문으로 인생을 망치도록 둘 수는 없었다.

‘오늘은 그 집 담을 넘어서라도 충원을 만나야겠어.’

그날, 오후까지만 해도 마리는 즐거워 보였다. 앞으로의 일들을 이야기하고, 고등과에 들어가고 나면 혼인하게 될 것 같다는 말도 하였다. 이왕비 전하의 하얀 드레스 이야기를 하다가, 지난번에는 그 드레스를 동경하는 마음에 양장점에서 비슷한 하얀 원피스를 맞추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지금은 아직 어린아이같지만, 그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올리면 퍽 어른스러워 보일 거라는 이야기도 했다. 어디로 보아도, 그렇게 갑작스럽게 목숨을 끊을 이유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왜, 그날 밤에 그렇게.

충원과 술을 마시고, 그 댁을 나올 때였다. 가시는 데 기별도 안 하고 가면 마리 아가씨가 서운해 하신다며, 그 댁 어멈이 어린 하녀를 서재로 보낼 때 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런데 왜, 대체 왜 그날 밤에.

“충원! 충원 있는가!”

홍우는 남작가의 대문을 붙들고 흔들었다. 어두운 붉은 색으로 칠한, 정교하게 세공된 두 기둥과 그 사이에 짜 넣은 거대한 철제 문은 열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충원!!!”

그때였다.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지더니 어디선가 방울 소리가 들렸다. 홍우는 한 손으로 대문을 붙잡은 채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날세, 충원을 보러 왔네. 좀 들어가겠네.”

누가 문을 열어 주었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홍우는 일단 밀고 들어갔다. 정원은 캄캄했고, 저택의 창문에는 드문드문 불이 켜져 있었다. 홍우는 일단 불이 켜진 곳에 충원이 있겠거니 생각하며 저택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른 곳은 어두웠지만, 긴 복도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희미하고 불그레한 등불이 켜진 가운데, 홍우는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저택은 넓었고, 이렇게 어두운 상황에서는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도 없었다. 아니, 이 집이 이렇게까지 넓었던가. 이렇게까지 꼬불꼬불 꼬여 있었던가. 혼란스러웠다. 마치 깊은 물에 빠진 것처럼 숨이 막혀왔다. 그런데다, 자꾸만 등에 식은땀이 솟았다. 등 뒤에 서늘한 느낌이 들어 참지 못하고 돌아 보았더니, 누가 따라오며 불을 끈 것처럼 그가 지나온 길은 어둠으로 덮여 있었다.

이상했다. 모든 일이 너무나 기이하기만 했다. 그때, 딸랑거리는 방울소리와 함께 희미한 장미향이 났다.

“...충원?”

그 향기는, 충원이 쓰던 불란서 향수의 향기와도 닮아 있었다. 홍우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불빛을 따라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 방 앞을 지나려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불이 꺼졌다.

“대체... 여긴...”

그리고 어둠 속에서, 새하얀 무언가가 흔들렸다.

“...”

한 걸음, 한 걸음, 그 새하얀 것이 다가왔다. 어깨에서 가슴까지 사각형으로 파이고, 소매는 팔꿈치까지 내려오고, 길이는 발목까지 끌리는 새하얀 원피스. 마리가 사진으로 보여 주었던 이왕비 전하의 드레스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홍우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흰 손이, 새하얀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이 홍우의 뺨을 향해 다가왔다.

차가운 입맞춤과 함께, 홍우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

 

법문학부의 학우들은, 홍우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다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시골에서 올라와 경성제국대학에서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이 젊은 수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연모의 정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짧은 유서만을 남기고 한강에 몸을 던졌다. 그의 시신은 어째서인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저 화주당 앞에서 발견되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두고 살아있을때의 한이 깊어서라고 말하였고, 더러는 죽음으로라도 맺어지고 싶은 이가 있어서 강물을 거슬러 그리 떠내려간 것이라 말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충원은, 누이와 친우의 연이은 죽음에서 무언가 느낀 바가 있었던 것인지, 굳게 닫혀 있던 남작가의 문을 열었다. 그는 누이를 장사지내고, 갑작스럽게 혼인을 하였다. 상대는 홍우와 정혼자였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홍우의 본가에서 민며느리처럼 지내고 있던 아가씨라 하였다.

“그 친구가 살아 있을 때, 고향에 누이같은 어린 정혼자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충원은 홍우의 본가에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인생은 덧없는 것이나, 만약 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정혼자가 걱정이라는 말을 하였지요. 저는 아직 미장가한 몸이니, 제가 홍우를 대신하여 그 정혼자를 평생 지키고 싶습니다.”

“아니, 그게 그렇게 될 일이 아니라...”

“산 사람은 살아야지요.”

충원은 힘주어 말했다. 그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죽은 홍우가 애통해하리라며, 부득불 홍우의 정혼자를, 정확히는 열 살도 되기 전에 홍우와 혼례만 올리고 이 집에 와서 살았다는 열 여섯살 난 어린 아가씨를 처로 맞았다. 열 여섯 살의 남작부인은 충원의 지원을 받아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아들과 딸을 낳고 잘 살았다. 충원은 비록 친일파의 자제라 하나 기질이 호협하고 의리가 있으며 정이 깊은 사람이라, 죽은 친우의 부모 형제까지 제 숙부모며 사촌들인 양 계절마다 신경쓰며 예의를 다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저택의 안주인이 된 어린 남작부인은, 때때로 학교를 마치고 날이 어두워져서 집에 돌아오면, 저택의 복도에서 아름다운 하얀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자가 걸어가는 모습을 보곤 했다. 그는 몇 년동안 그 곡절을 모르고 살다가, 어멈이 화주당에 모셨다는 시누이의 위패 아래에 제 정혼자의 사주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말았다. 셋째 아이를 수태 중이던 젊은 남작부인은 그 의미를 깨닫고 까무룩 혼절하였다가, 한강에 스스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해도연 콜러스 신드롬 2021.04.01
해망재 마리 이야기 2021.04.01
노말시티 보내 주신 원고가 정상적으로 접수되었습니다 2021.04.01
유이립 말과 행동과 생각으로 2021.04.01
갈원경 눈물눈물 2021.04.01
지현상 언제 심장이 두근거려요? 2021.04.01
곽재식 로봇복지법 개정안3 2021.03.31
노말시티 행복 게이지 2021.03.01
갈원경 이방인 2021.03.01
곽재식 손님이 주인을 내쫓다2 2021.02.28
노말시티 마야 2021.02.01
갈원경 상사화(相思花) 2021.02.01
갈원경 P시의 마술사 2021.02.01
곽재식 백설공주가 준 독사과4 2021.01.31
노말시티 슬픔이 없는 나라 2021.01.01
갈원경 피루엣 2021.01.01
곽재식 슈퍼 사이버 펑크 120분6 2020.12.31
이경희 능소화 2020.12.31
돌로레스 클레이븐 당신의 모든 것 2020.12.19
노말시티 지나가는 행인1의 크리스마스4 2020.12.01
Prev 1 2 3 4 5 6 7 8 9 10 ... 45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