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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고객님, 축하드립니다!

심너울

 


서대문의 농협 본점은 여러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보안요원 민손영은 계속 떨리는 양손의 주먹을 쥐었다 놨다 하면서 한 번 수많은 사람들을 슥 돌아보았다. 전화기에다 바쁘게 말을 쏟아붓고 있는 직장인처럼 뵈는 사람도 있었고, 지독하게 피곤한 표정으로 아기를 안고 있는 주부일 법한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기표를 붙잡고 창구에서 순번이 불릴 때까지 애타게 시간을 보냈다.

손영은 입구에서 사람들의 용건을 묻고 필요한 곳으로 보내는 일을 맡고 있었다. 하루종일 서있어야 해서 피곤하긴 했지만 어렵지는 않은 일이었다. 가끔은 술 냄새를 진하게 풍기는 진상이 은행에 들이닥쳐 드러눕는 황당한 일도 있었지만, 그런 괴이쩍은 사람들이 일상에 독특한 변수를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 하도 오래 생각 없이 서있어야 하니 시간을 죽일 만한 쓸데없는 짓을 찾아 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손영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만든 여러 놀이 중에서도 그가 스스로 가장 열중하는 것은 입구로 들어온 사람들이 과연 행운고객일지 아닐지 맞추는 것이었다.

100만원 이상의 돈을 받는 로또 3등부터는 농협 본점에 찾아와서 당첨금을 직접 수령해야 한다. 그 중에서도 814만 5천 분의 1의 확률을 통과한, 수십억의 돈을 받는 사람들을 은행에서는 행운고객이라고 불렀다. 행운고객들은 농협에 들어와서 항상 손영의 안내에 따라 3층에 있는 복권사업팀의 응접실로 향했다. 그는 4년 동안 일하면서 그 동안 로또 1등에 당첨됐던 모든 행운아들을 한 번씩 만나 보았다.

처음에 손영은 대부분의 행운아들이 썬글라스에 스카프를 훌훌 두르고 몸이 드러나지 않는 두꺼운 옷을 입은 채로 나타나지 않을까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당첨자들마다 다 꾸미는 방법도 생각도 달랐다. 어떤 사람들은 정장을 입고 당당히 어깨를 편 채, 침착한 표정을 띠며 그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복권 당첨 수령금은 어디서 받아야 하나요?”

얼굴에서 화색을 전혀 감추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긴장과 기대로 발발 떨렸다. 이 곳에서 일한지 몇 달이 지난 뒤로 손영은 그 행운고객들을 나름대로 안정시키는 노하우도 생겼다.

“너무 그렇게 티내시면 나가셔서 큰일납니다, 고객님.”

손영이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면 행운고객들은 억지로 침을 꿀꺽 삼키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손영은 그 모습을 보고 나서 다시 웃으면서 서대문경찰서가 코 앞에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곤 했다. 다른 고객들에게 했으면 당장에 클레임을 먹을 일이었지만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들은 그 정도 농담에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 다음에 손영은 항상 덧붙였다.

“행운고객님, 축하드립니다.”

당첨자들은 매주 월요일에 제일 많이 찾아왔다. 그래봐야 일주일에 세 명만 돼도 꽤 많은 수였지만. 손영은 당첨자들이 다 제각기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자세를 취하고, 다른 표정을 띠고 있어도 당첨자들에게서 놓칠 수 없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람들에게서는 어떤 아우라가 풍겼다. 항상 삶을 무겁게 짓누르는 금전 문제의 압박에서 해방되는, 거대한 불안에서 풀려나는 그 아우라가.

그는 손님들에게서 그 아우라를 콕 집어내는 것을 나름의 취미로 삼았다. 그마저도 하지 않으면 은행 보안요원은 너무 지루한 일이었다. 행운고객들을 3층으로 보내고 그 가벼운 발걸음을 바라보면서 손영은 산뜻한 해방감을 잠시라도 느꼈다. 그 어마어마한 행운과 행복에는 약간의 전염성이 있었다.

짧은 해방감이 가신 뒤에는 어김없이 질투가 찾아왔다. 행운고객이 은행을 찾은 날에 손영은 집에 가면서 매일 마시는 빨갛고 도수 높은 소주 네 병에 더해 로또를 꼭 두 장씩 샀다. 4년 동안 그가 행운고객이 되어 농협을 찾는 일은 당연히 없었다. 로또를 발표하는 날에는 소주를 한 병 더 해서 다섯 병을 마셨다.

이번 주는 금요일까지 농협에 아무런 행운고객도 찾아오지 않았다. 로또 1등 당첨자가 없는 주였다. 손영은 출퇴근 카드를 찍고는 직원들 전용의 건물 후문으로 스리슬쩍 빠져나갔다. 집으로 가는 길에는 편의점에 들러 로또 다섯 장을 자동으로 긁었다.

“오늘은 웬일로 로또를 다섯 장이나 사요?”

매일 마주쳐서 이제 손영과 대화를 튼 점장이 물었다.

“이번 주에 당첨자가 없어서요. 당첨금 이월되면 두 배는 더 받아요.”

“당첨되면 뭐하려고요?”

“소주 대신 위스키 마실 거예요.”

민손영은 소주 다섯 병을 카운터에 내밀면서 말했다. 계산을 끝낸 점장은 손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젊은 사람이 술을 이렇게 마셔서 나중에 어쩌려고 하는지 원.

손영이 매일 술을 이렇게 마신 것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다. 중학교 때 처음으로 야구부 선배들이 권하는 술을 들이킨 후부터, 손영은 한 번 소주를 마시기만 하면 몇 병을 금새 끝장냈다. 체육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리 센 주량도 아닌 편이었다. 매일 네 병씩 마시는 버릇은 손영이 한때 야구를 했었다는 말로도 핑계를 댈 수 없기는 했다. 하지만 알코올이 날뛰는 신경을 눌러주지 않으면 생활이 불가능했다.

원래라면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야구 선수가 되었어야 했다. 그는 고향에서 가장 훌륭한 타자 취급을 받았다. 공을 정확히 받아 치는 능력은 조금 부족했지만, 걸렸다 하면 공을 담장 밖으로 넘기는 무시무시한 힘이 있었다. 고등학교 삼 학년 시절에 그는 프로구단으로 뽑혀 나가 성인 야구 선수로 자라는 당연한 미래를 품에 안고 살았다.

손영은 운이 나빴다. 그가 고3일 때 프로 야구 판에는 투수가 극도로 부족했다. 그 해 따라 부상당한 투수도 많았고, 여러 추문으로 프로 판에서 사라져버린 사람도 많았다. 손영은 뛰어난 타자였지만 구단들은 일단 팀에 젊은 투수들을 꽉꽉 채워넣으려고 했다. 그의 이름은 고등학생 선수 지명이 끝나기 직전에 간신히 불렸다. 손영은 계약을 거부했다. 후순위로 불려가서 눈칫밥 먹느니, 대학을 가서 대학 야구에서 열심히 훈련한 다음 높은 순위로 지명 받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아무래도 손영의 아버지는 자식의 말에 공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니 미칬나, 지명을 거부했다고? 대학에 간다꼬?”

“아버지, 제가 최후순위 선수로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대학만 가면…”

손영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아버지가 그의 뺨을 후려쳤다. 그에게는 익숙한 감각이었다.

“내가 대학까지 니 공놀이 하는 기나 지원해야 한다꼬? 그게 말이 되나?”

“아버지, 제발…”

“니 먹고 사는 거는 알아서 해라. 오냐오냐 했더니 헛물이 들어서…”

손영은 아버지가 언제 오냐오냐해준 적이 있냐고 대꾸하려다가 말을 삼켰다. 어머니가 어린 시절 죽고 난 후 손영의 아버지는 그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손영은 단지 밥을 꾸준히 많이 챙겨 준다는 이유로 야구부에 들었다가 자기 재능을 알아차렸다. 손영은 아비의 모습을 보고 절망하기보다는 역겨웠다.

그 날 후로 손영은 매일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몇 주 만에 몸은 쏟아져 들어오는 술에 기가 막히게 적응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았다. 손이 떨렸다. 참을 수 없이 화가 나기도 했다. 야구방망이를 잡은 손이 벌벌 떨리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력감에 화가 날 때마다 손영은 소주를 마시면서 그 불쾌한 기분을 억눌렀다.

4년 뒤에 손영에게 남은 것은 알코올에 찌든 뇌와 푸짐한 풍채 뿐이었다. 알코올 중독으로 신검에서 4급을 받은 그는 공익을 끝내자마자 전문대의 경호과에 입학했다. 다행히 덩치 덕에 그는 농협 보안요원 자리를 잡았다. 청소년기를 투자한 야구가 준 마지막 보상이었다.

손영은 허름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옷을 벗어던지고 짜장 라면 세 개를 끓였다. 로또 용지는 책상 위에다 대충 쑤셔박아 놓았다. 어차피 안될 것을 그는 알았다. 하지만 내일, 토요일 밤에 또 번호를 하나하나 맞춰보겠지. 손영의 마음 속에 스스로에 대한 경멸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라면이 다 익기도 전에 소주 한 병을 따서 병 째로 들이켰다. 그의 혀에 불쾌한 단 맛이 휘감겼고, 식도와 가슴은 화끈했다. 익숙한 기분이었다.

라면이 다 익었을 때 그는 두 병째 소주를 땄다. 그는 냄비를 집어들어 바닥에 앉아 술과 라면을 들이켰다. 조금씩 머리가 어지럽고 기분이 달땄다. 소주 네 병과 라면을 순식간에 해치운 손영은 대 자로 드러누웠다.

이월된 로또, 이번 주의 당첨금은 30억 원. 달콤하고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손영은 이월된 로또에 당첨된 행운고객을 몇 명 만난 적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다른 행운고객보다 더한 아우라가 느껴졌다. 손영은 그들의 표정에서 세상 모든 고뇌에서 해방된 순수한 기쁨과 기대를 엿보았다.

손영은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야구공 하나를 주워들었다. 얼마 전에 그는 한국의 한 뛰어난 야구 선수가 120억 원의 계약을 맺고 다른 팀으로 이적하는 것을 보았다. 손영과 또래였다. 아버지가 그의 재능을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아니 그가 지명되던 때에 프로 야구판에 투수가 좀만 덜 부족했더라면, 아니, 그냥 후순위 지명을 감내하고 받아들였더라면 민손영도 지금쯤 그와 같은 계약을 맺을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30억 원이 무슨 대수였으랴. 평생 농협에 서서 다리 아프고 관절 망가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럴 때 술을 마시면 집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부숴버리고 싶었다. 손영은 대신 야구공을 벽에 집어던지고 비닐봉지를 뒤져 소주 한 병을 더 꺼냈다. 그것이 행운고객을 만날 때마다, 로또가 이월될 때마다 그가 소주를 한 병 더 사는 이유였다. 질투로 집안 가구를 박살내지 않고 얌전히 잠들기 위한 미봉책이었다.

그는 뺨 한 쪽에 난 커다란 흉터를 매만졌다. 열 다섯 번째 행운 고객을 만났던 날에 소주를 딱 네 병만 마시고 발악을 하다가 책상에 찍혀 피를 어마어마하게 흘렸다. 적어도 자기 몸에 상처가 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마지막 소주까지 끝장낸 그는 집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매트리스에 몸을 던졌다. 그는 부디 좋은 꿈을 꾸기를 빌었다.

다음 날 밤까지 손영은 억지로 잠을 이었다. 시계가 오후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는 걸 확인하고서야 그는 몸을 일으켰다. 슬슬 로또 번호가 발표나 있을 시간이었다. 쓰린 속을 부여잡고 방 안에 불을 켠 그는 책상이랑 행거가 형편없이 망가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제 다섯 번째 소주가 그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 씨발.”

손영은 얼른 어제 처박아 둔 로또 용지를 찾았다. 휴대폰을 보면서 번호들을 하나씩 대조했다. 신기하게도 다섯 장 모두 하나도 맞는 번호가 없었다. 손영은 천장을 바라보고 한 번 더 욕을 했다. 손영은 냉장고를 열었다. 한 캔에 천 오백원쯤 하는 싸구려 술들이 차 있었다. 그는 캔 두 개를 꺼내서 해장술로 삼았다. 나른하고 평범한 주말이었다.

일요일에 항상 마시는 정량대로 소주 네 병을 마신 민손영은 월요일에 문제없이 출근했다. 그는 뻣뻣한 자세를 유지한 채로 입구 근처에 섰다. 농협 본점은 항상 바글바글했다. 안정적인 수입원이 생긴 김에 적금 통장을 팔 각오를 하고 들어서는 아직 앳된 얼굴의 사회 초년생, 대출이 허가될까 전전긍긍하며 찾아온 자영업자, 생의 황혼기까지 쌓아온 노후자금을 어찌 한번 융통해 보려는 생각으로 지팡이를 짚고 온 노인까지 이런저런 사람들이 은행을 찾았다.

이번 복권의 1등 당첨자는 여덟 명이라고 했다. 실수령금만 45억 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45억원을 복권 한 방에 받으면 무슨 느낌일까. 손영은 그 특급 행운고객의 아우라를 기다렸다. 불운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갈 그 사람의 얼굴을 언제나처럼 한 번 보고 싶었다.

점심시간 직전이었다. 썬글라스와 마스크를 끼고 긴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묶은, 키가 큰 여자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주머니에 양손을 쑤셔넣고 약간 엉거주춤한 자세로 느리게 걸었다. 그가 손영에게 조금씩 다가올 때 손영은 직감했다. 행운아들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 여자가 바로 그 행운고객이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여자는 우물쭈물했다. 손영은 약한 미소를 띠었다. 마음 속으로는 그가 너무나 부러웠다. 지금 당장 그 여자가 꼭 쥐고 있을 그 복권을 빼앗고 싶었다. 그는 입을 세게 다물었다.

“아… 그… 저, 복권 당첨금…”

손영은 행운고객의 앳된 목소리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키가 굉장히 큰 여자였는데 목소리는 중학생 같았다. 그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어, 음, 저기 엘리베이터 타시고 3층에 복권사업팀… 아, 행운고객님, 축하드립니다.”

여자는 고개를 살짝 까딱하고 조심스럽게 엘리베이터 쪽으로 한 걸음 걸었다. 손영은 잠시 소리를 지르려다가, 손을 내뻗고 조용히 말했다.

“저기, 저기요. 야.”

“네?”

여자가 고개를 손영 쪽으로 살짝 돌렸다. 썬글라스와 마스크 사이로 경계심이 비어져나왔다. 손영은 작은 한숨을 쉬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미짜지?”

“그런데요?”

“미짜면 복권 당첨돼도 무효야.”

“네?”

“애초에 미성년자는 로또 못 사는게 법이야. 올라갔다가 돈 다 날리고 싶지 않으면 어른한테 대신 받아달라고 해. 1년 안에 안 받으면 무효 되니까 조심하고.”

손영이 말하자 그는 오른쪽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왼손은 주머니에 꼭 들어가 있는 채였다. 손영은 그가 왼쪽 손으로 꽉 쥐고 있을 로또 용지를 생각하니 가슴 속이 또 답답했다. 저 안에 내가 평생, 아니 200년을 보안요원 일을 해도 못 모을 돈이 들어있겠지. 내 나이 반절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아이의 손에.

여자아이가 꺼낸 휴대폰에는 모서리마다 기스가 나 있는 낡은 케이스가 씌여 있었다. 그는 휴대폰에 뭔가 빠르게 타이프했다. 아마도 ‘청소년 로또’ 같은 키워드로 검색해 보는 것이리라고 손영은 짐작했다.

“가… 감사합니다!”

소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달음질 쳐서 은행 밖으로 빠져나갔다. 긴장한 티가 역력해서, 굳이 손영 같은 숙달된 사람이 아니라도 농협 본점을 찾는 사람이라면 다들 그가 행운고객이라고 생각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젠장.”

손영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욕했다.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그는 식당 쪽으로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손영은 구내식당에서 매주 월요일이면 어김없이 나오는 제육볶음을 먹고, 점심시간이 번개처럼 지나간 후에 줄줄 새어나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은행 입구에 섰다. 온갖 고객들을 여기저기로 안내하면서 손영은 가슴이 답답했다. 왜 그 여자애 40억을 지켜준 거지? 너무 착한 척 한 것 아닌가. 이번에 당첨이 무효화되면 또 이월돼서 다음 주에 육십 억이 넘는 당첨금을 받을 수도 있었을텐데. 어쩌면 그 주인공은 손영이 될 수도 있었다. 손이 벌벌 떨렸다.

그는 이전에 길거리에서 지갑을 주운 일을 기억했다. 언제나처럼 소주 네 병을 사 들고 돌아가는 도로 위에 웬 가죽 지갑이 놓여 있었다. 다른 사람이 볼세라 빠르게 뛰어가 주워든 지갑 안에는 5만원짜리 지폐가 수도 없이 들어 있었다. 그냥 몇 만원만 들어 있었으면 거리낌 없이 돈만 빼냈을 텐데, 몇 백 만원에 가까운 돈을 보자 손영은 덜컥 겁부터 났다. 손영은 가까운 경찰서에 지갑을 냈다. 경찰은 손영에게 받은 지갑에서 돈을 세면서 말했다.

“잘 하셨어요. 유실물 반납하시면 보상도 받을 수 있어요.”

­ “보상이요?”

“예. 5%에서 20%까지 받을 수 있어요. 주인 찾으면 연락 갈 거예요”

이틀 뒤에 주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톤이 높은 목소리를 가진 남자였다. 그는 연신 고맙다고 하면서 지갑에 들어있던 현금 중 10%를 손영에게 그대로 건넸다. 그것만 해도 50만원이었다. 손영은 그 날 오랜만에 괜찮은 위스키를 한 병 사 와서 밤 내내 마셨다. 아주 가끔 감질나게 마시던 양주를 맥주잔에 콸콸 쏟아 마시니 행복했다. 그는 그 날 필름이 끊겼다.

하루의 업무를 끝마친 손영은 소주를 여섯 병 사오면서 생각했다. 그가 구해준 소녀의 40억은 유실물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아이는 다음날이고 언제고 부모와 함께 와서 어마어마한 돈을 손에 쥘 것이었다. 40억을 가지면 무엇을 할까 손영은 망상을 시작했다. 우선 강북에 적당히 괜찮은 주상복합 아파트 한 채를 살 것이다. 그래도 25억 이상의 돈이 남는다. 15억은 생활비로 두고 매년 해외여행을 떠난다. 남은 10억으로는 사업을 벌려도 좋고, 전부 주식에 넣어도 좋다. 손영이 일찌감치 포기했던 집, 차 모두 사고, 어쩌면 결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어릴 시적에 집안에 그 40억의 10분의 1만, 4억만 있었어도 그는 무리 없이 대학에 진학해서 야구 인생의 두 번째 기회를 노렸을 테다. 그가 좋아하고 재능 있는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고등학교 전국 야구 리그에서 시원하게 홈런을 쏘아 올리던 과거의 모습을 떠올렸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때였다. 화장실의 거울 앞에 서면 그런 시절이 있었나 가물가물했다. 한때 탄탄하고 유연했던 몸은 퉁퉁 불어났고, 그동안 마셨던 알코올은 빠짐없이 지방으로 화해 배에 튜브처럼 감겼다. 그나마 떡 벌어진 넓은 어깨만이 남아 한때 손영이 야구 선수였음을 알리는 징표로 남았다.

가난은 그 어떤 가혹한 사채보다 무거운 이자로 손영을 짓눌렀다. 그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의 삶에 풍족하게 공급될 것은 오로지 위기와 불안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설령 4억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도 그가 다시 야구선수가 될 수는 없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나이 든 몸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까.

“28살 치고는 꽤 나이 들어 보이는데.”

손영이 보안요원으로 취업할 때 면접에서 들은 말이었다.

“그렇습니까? 제가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인상이 험상궂은 게 강도도 문 앞에서 발 돌리겠는데?”

“네, 그렇습니다.”

면접관들은 뭐가 좋은지 껄껄 웃었다. 손영은 얼굴에 뭔가 바를 돈으로 술을 마셨고, 그의 얼굴은 상하고 주름져 있었다.

방바닥에 퍼질러 누워 소주를 벌컥벌컥 마시던 손영이 부주의하게 흔든 팔에 열린 소주병 하나가 엎어졌다. 술이 질질 흘러나왔다. 그는 급히 일어나서 병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손이 덜덜 떨려서 쉽지가 않았다. 갈수록 손떨림이 심해졌다. 분명히 술 때문에 심해지는 손떨림일 터인데 술을 마시지 않으면 떨림이 도통 진정되지 않았다.

손영은 진심으로 소녀를 질투했다. 손영의 삶이 오갈길 없이 푹푹 썩어가고 몸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지는 동안 그 여자아이는 인생의 온갖 단 맛을 다 누릴 테다. 어린 나이에 다른 사람이 꿈도 못 꿀 목돈을 만졌으니 그 돈으로 색다른 꿈을 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림을 그린다든지, 음악을 한다든지, 글을 쓴다든지… 아니면 스포츠를 한다든지.

도와줬는데 10%만, 아니 5%만 떼줄 수 있냐고 말이라도 해볼 걸. 낮 시간에 손영은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왠지 꺼림칙했다. 하지만 술을 마시니 생각을 가로막는 어떤 장벽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씁쓸한 회한을 불쾌하게 곱씹으며 손영은 정신을 잃었다.

손영이 소녀를 다시 만난 것은 사흘 뒤였다. 그는 전에 썼던 썬글라스와 마스크를 그대로 끼고 긴 머리카락도 이전처럼 뒤로 전부 넘겨 묶은 채로 들어왔다. 오후 세 시 반쯤, 은행이 문을 닫을 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손영은 소녀를 바로 알아보았다. 소녀는 손영이 있는 쪽으로 긴 다리를 쭉쭉 뻗으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손영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영 옆까지 걸어와 한창 변성기 중에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저씨, 사람이 없어요.”

손영은 고개를 살짝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나 대신 당첨금을 받아 줄 사람이 없어요.”

아이는 굳게 주먹쥔 왼손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는 주먹을 펼쳐 보았다. 손영은 주먹 안에 있는 종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로또 용지였다. 일곱 개 찍힌 번호에는 전부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각 숫자마다 볼펜을 얼마나 힘줘 눌렀는지 종이가 거의 다 헤져 있었다. 손영은 40억짜리 딱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손영의 시선을 눈치 챈 소녀는 왼손을 급히 주머니로 집어넣었다.

“언제 퇴근해요?”

“어… 네 시 넘어서.”

“끝나고 은행 옆에 있는 카페로 와요, 아저씨.”

손영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은행 밖으로 총총 걸어 사라졌다. 그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퇴근하자마자 손영은 카페로 달려갔다. 농협 직영의 유기농 재료로 만든 음식들을 파는 카페였다. 소녀는 구석자리에서 빈 그릇을 앞에 둔 채로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손영이 그 쪽으로 다가가자 그는 고개를 들었다. 손영은 의자를 꺼내 앞에 앉았다.

“왜, 왜 날 불렀어?”

“아저씨, 나 좀 도와줘요. 로또 대신 받아 줄 어른이 필요해요.”

소녀는 목소리를 낮추라고 손짓하면서 말했다.

“나… 나를 뭘 믿고…?”

손영은 갑작스레 닥친 상황을 똑바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불확실한 순간에 하나 확실한 것은 터질 듯한 그의 심장 뿐이었다. 손떨림이 소녀의 눈에도 바로 보일 정도로 심하게 드러났다.

“저번에 내 로또 종이조각 안 되게 말려 줬잖아요.”

“그…그래. 왜 부모한테 말 안하…”

손영은 자기가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입을 닥쳤다. 캐물어서 이 여자애가 다른 사람을 찾으면 또 후회할 것이다. 손영은 떨리는 손을 탁자 밑으로 감추고는 물었다.

“…대신 받아 주는 건 다른 일이야. 로또 당첨금에서 세금도 나가고, 너한테 그 큰 돈을 바로 주면 증여세도 내야되고…”

손영은 이 애가 증여세가 뭔지 알기나 할지 의문스러웠다. 소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 법정 후견인 해 주면 안 돼요?”

그러니까 이것은 지금껏 세상이 본 적 없는 규모의 담배 뚫어주는 심부름이었다. 지금까지 담배 맛을 일찍 깨달은 수많은 중삐리와 고삐리들이 만만해 보이는 성인 하나를 잡아다 산 담배의 매출을 모두 합쳐도 과연 40억이 되었을까.

손영은 계속 말을 더듬었다.

“나, 나는 네 이름도 모르는데… 조…좋아. 그럼 어… 언제?”

“가능한 빨리요.”

그리고 나서 소녀는 손영에게 주민등록증과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다. 손영은 둘 모두를 순순히 건넸다. 소녀는 손영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고 나서, 손영을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민, 손, 영 아저씨. 밥이나 사 주세요.”

손영은 근처의 소고기 집으로 소녀를 데려갔다. 가끔 은행원들이 그 곳에서 회식을 하는 것을 본 적은 있었지만 그로서는 언감생심 들어갈 꿈도 꾸지 못한 곳이었다. 아이는 들어가자마자 가장 비싼 부위로 6인분을 주문했다.

“다 먹을 수는 있겠냐?”

“네.”

두툼한 소고기가 나오자 손영은 집게로 고기를 하나하나 집어 올렸다. 달궈진 철판에 붉은 고기가 올라가자 차르르 하는 소리를 내면서 고기가 타닥타닥 튀어올랐다. 소고기에 갈색 빛이 언뜻 돌기 시작하면 소녀는 바로 고기를 가져가 전투적으로 먹었다. 손영도 고기를 조금 집어먹자 긴장이 풀렸다. 이 소고기는 더 이상 그에게 사치가 아니었다.

“너는 이름이 뭐야?”

“이민경이요.”

“로또는 어쩌다 된 거야?”

“매주에 세 개씩 했어요. 1년 만에 처음 된 거예요.”

“너 몇 살인데, 하게 해 주디?”

“열 다섯 살이예요. 키가 커서 그런지 편의점에서 민증 검사를 잘 안 해요.”

“그럼 나 술 한 잔만 해도 되냐?”

“맘대로 해요.”

손영은 40도짜리 독한 술을 한 병 주문했다. 곧 종업원이 술을 날랐다. 그는 독주를 한 잔 마셨다. 25도짜리 소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짜릿하고 화끈한 기분이 들었다. 미세한 손떨림이 멎었다.

“나도 한 잔 줘요.”

“안 돼. 독한…”

민경은 손영의 말을 무시하고 술을 뺏아 자기 잔에 따랐다. 민경은 익숙한 자세로 술을 고개를 뒤로 젖히고 술을 털어 넣었다. 손영은 민경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지만 표정의 변화를 찾을 수 없었다.

“너 술 잘 마신다.”

“가끔 해요. 아저씨는 어디 살아요?”

“어? 나는 도봉 쪽에 있는 고시원서 살지.”

“그럼 관악 쪽으로 이사 오면 되겠네. 거기 중학교 다녀요. 거기서 꾸준히 지원만 해주면 돼요.”

“같이 살자고?”

민경은 눈을 살짝 치켜뜨며 손영을 바라다보았다.

“내가 왜 처음 보는 아저씨랑 같이 살아요?”

“그래, 그럼 넌 왜 처음 보는 아저씨한테 그, 그걸 맡기려고 하는데? 부모는?”

민경은 한숨을 푹 쉬더니 종업원을 불렀다. “맥주 하나 주세요.” 그는 독주 조금에다가 맥주를 섞어서 숟가락으로 거품을 내더니 곧장 반을 들이켰다. 그러는 중에도 민경의 얼굴에는 약간의 붉은 기도 돌지 않았다.

“싫으면 말아요. 개짜증나게 하네 진짜.”

술잔을 반쯤 남겨두고 민경은 일어섰다. 손영은 두 손을 앞으로 내뻗으면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아니, 아니, 아니, 싫으면 그만 물어볼게… 걱정 마, 걱정 말고…”

“다시는 그런 거 묻지 마요.”

“아, 알았어.”

민경은 다시 주저앉았다. 손영은 잠시동안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고기나 계속 뒤집었다.

“근데 후견인이란 게 정확히 뭐냐?”

“뭐 근처에 사람도 없고, 1년 지나가면 로또도 휴지조각 되고. 불법이라니까 어디 광고하지도 못하겠고 이상한 사람들 뿐일 거 아녜요. 그래서 찾아 보니까 가정법원에서 신청할 수 있더라고요.”

“그럼 그거 하면 내가 너를 꾸준히 지원해줘야 한다는 거냐?”

“네. 어차피 종잇조각 될 거, 그렇게라도... 꾸준히 용돈만 주면 나도 아저씨한테 암말 않아요. 한 달에 300 정도만. ”

손영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고기를 4인분 더 주문했다. 민경의 먹성에는 끝이 없었다. 그래서 애가 저렇게 길쭉길쭉한건지.

둘은 본격적으로 돈을 받는 얘기를 시작했다. 손영이 휴가를 낸 다음에, 농협 1층에서 그 용지를 민경에게 전달 받고 3층의 복권사업팀에서 40억을 받기로 했다. 그리고는 함께 서초의 가정법원으로 향하는 것이다. 계획을 짜는 동안 손영은 드디어 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는 하늘을 걷는 기분이라는 진부한 표현이 왜 계속 쓰이는지 알게 되었다.

“먹고 튈 생각 말아요. 진짜 찾아서 죽여버릴 거니까.”

“야, 내가 얼굴에 이렇게 알아보기 쉬운 흉이 있는데 어떻게 도망치냐.”

손영은 자기 뺨을 가리키면서 실실 웃었다. 둘은 두 시간 동안 소고기 13인분과 40도짜리 증류식 소주 세 병, 맥주 여섯 병을 먹고 마셨다. 고기집 사장한테도 나름의 행운이 터진 날인 셈이었다.

다음 날 손영은 문자로 휴가를 통보했다. 예상한 대로 미친 것 아니냐는 답변이 주임에게서 날아왔다. 주임에게서 쿡쿡 쑤시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손영은 그 불쾌함을 술로 풀곤 했는데, 이번에는 40억짜리 마음의 갑옷이 있었다. 그는 그냥 주임의 문자 메시지를 무시했다. 행어 구석에 박혀 있던 정장을 꺼내 입었다. 점심은 농협 본점 근처에서 가끔 지나치던 일식집에서 해결했다.

오후 한 시쯤 되자 민경에게서 준비됐다는 메시지가 왔다. 민경은 정문 바로 앞에 있었다. 둘은 당당히 농협 본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손영의 자리를 급히 대신 채운 주임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손영은 주임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저, 복권 1등 당첨된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하나요?”

민경은 주임의 눈이 동그래지는 것을 보고 그의 옆에서 푸흡 하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저…저기 엘리베이터 타고 삼층 복권사업실로…”

“아, 감사합니다.”

손영은 주임의 허망한 시선을 즐기면서 자기가 항상 안내만 하던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민경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에게 잔뜩 구겨진 용지를 건넸다.

“아저씨,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래, 걱정 마.”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손영은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전혀 감추지 못한 채로 그 안에 탔다. 복권사업실로 향하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그의 머릿속에 새겨졌다. 복권사업실에는 물을 뿜는 황금 조각상도 찬란한 보석 왕관도 없었으나 손영은 그 방 안이 지금까지 그가 살면서 거닐었던 그 어떤 건물 내부보다 찬란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손영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 직원이 그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정문 경비하시는 분이네. 당첨자 분이랑 같이 오셨어요?”

손영은 말없이 로또 용지를 내밀었다. 직원은 잠시 얼어붙었다가, “추, 축하합니다! 저 쪽으로…”라는 말을 하고 한 방향으로 손을 가리킨 다음, 어딘가로 바쁘게 사라졌다. 손영은 천천히 안내받은 쪽으로 걸어갔다.

“축하드립니다. 고객님.”

팀장도 손영을 알아보는 눈치였지만 그는 곧 무덤덤하게 말했다. 수 년 간 온갖 당첨자들을 봐온 프로페셔널다운 자세였다. 팀장은 옅은 미소를 띤 얼굴로 40억을 넣을 통장 서류를 정리하고는 말했다.

“이렇게 들어온 돈은 저희들이 여러 관리를 해 드리거든요. 저희가 투자 상품 포트폴리오가 이렇게 있는데, 한 번…”

팀장은 이런저런 알록달록한 글자들이 인쇄돼 있는 종이를 어디에선가 꺼냈다. 손영은 손사래를 쳤다.

“됐으니까 빨리 돈이나 넣어 주세요.”

“아, 네. 이리로…”

팀장이 안내하는 곳으로 따라간 손영은 입출금 예금통장 하나를 받았다. 그는 통장을 다급히 열어 보았다. 41억 6천 2백 만 3천 5백 2십 원. 손영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통장의 앞표지를 보았다. 민손영이라는 이름이 찍혀 있었다. 팀장은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축하한다고 말했다.

손영은 어깨를 폈다. 넓은 보폭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방을 나섰다. 그는 문득 세상의 색깔이 다채로워졌다고 느꼈다. 지금까지 손영의 삶의 모양은 회색 술에 찌들어 있었는데, 모든 것이 좋아 보였다. 손영은 대리석 타일로 꼼꼼히 마감된 건물을 슥 살펴보았다. 보안요원 일을 하면서 그는 은행의 깔끔한 건물 외관과 화려한 내장을 역겨운 가식이라고 여겼다. 결국 사채업자랑 별다를 바 없는 돈놀이하는 인간들이 돈으로 사람의 목줄을 부여잡고 고급스러운 척을 한다고.

천천히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면서 손영은 그 대리석의 세상이 자신에게 그 문을 내어주었다는 걸 느꼈다. 결코 손영이 다가갈 수 없을 것 같던, 높디 높은 마블 성벽으로 둘러친 세상 속의 삶. 방금 전 손영은 그 시민권을 받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 40억이 어마어마한 돈은 또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1층에서 만났던 주임은 손영이 로또에 당첨됐다는 소리를 듣고 얼어붙었다. 하지만 복권사업팀 팀장은 영업용의 미소로 손영을 대했다. 둘 다 손영의 얼굴을 알아보았는데 그렇게 반응이 달랐다. 손영은 불쾌했다. 팀장이 자신이 수많은 당첨자들처럼 순식간에 도박 따위에 돈을 탕진하고 더 비참한 인생을 살 거라고 속으로 자위하고 있으리라고 손영은 확신했다. 그 부러워할 줄 모르는 뻔뻔한 중산층의 자존심을 짓이겨놓고 싶었다. 그는 멋있는 상류층이 되고 싶었다.

이민경, 이민경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1층에서 그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근처에 돈을 대신 받아 줄 사람이, 심지어 부모도 해줄 수 없다는 여자애. 손영은 소고기를 이민경이 학교에서 양아치 놀이나 하는 아이일 거라고 확신했다. 길쭉길쭉하고 커다란 몸으로 애들이나 괴롭히고 다니는 질나쁜 중학생.

손영은 인생에 쓸데없는 혹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 로또 당첨된 사람들은 가족, 친지와 연을 끊는다는 이야기를 잘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기댈 친지가 아무도 없었으니 다행이었다. 다른 당첨자들보다 훨씬 새 인생을 시작하기 좋은 상황에 서 있는데 뭣하러 이미 나쁜 길에 빠진 여자애한테 돈을 쓸까. 그 행운은 억울한 삶을 살아온 손영을 위해 하늘이 내려준 배상이었다. 그의 재능은 꽃피지 못하고 시궁창에서 으깨졌고 이후로도 다채로운 불행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때 야구선수가 되었다면 40억도 푼돈인걸, 제 주인을 찾아온 거야. 애초에 애가 로또를 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잖아? 손영은 얼굴에 난 커다란 흉터를 매만졌다. 지울 수 있을 것이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손영은 몸을 돌렸다. 내일 당장 때려칠 것이지만, 아직 그는 농협 본점 직원이자 보안요원이었다. 그는 쫓기는 것처럼 빠르게 직원 전용 후문 방향으로 달렸다.


강연이 끝바지에 다다랐다. 민현은 학생들을 한 번 쭉 둘러보았다. 모두들 또렷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민현은 손에 쥔 리모콘의 버튼을 눌렀다. 프레젠테이션이 마지막 장으로 넘어갔다. 민현의 비서의 연락처가 적혀 있는 장이었다.

“여러분 삶에서 힘든 장애물은 앞으로도 계속 있을 거야. 내가 여러분을 꾸준히 돕고 싶어, 다 내 동문들이잖아요? 언제든지 연락 줘. 내가 고기 꼭 사줄 테니까.”

민현이 말을 끝마치자 학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다. 민현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랜만에 가슴이 뭉클했다. 처음으로 산더미 같은 돈을 벌었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돈은 충분했다. 멋모르고 시작한 야구용품 사업이었지만 그는 한때 야구선수로서 얻은 감이 있었다. 10억의 자본금을 뚝 떼서 시작한 장사는 금방 궤도에 올랐고, 쑥쑥 성장하더니 이제 몇몇 상품은 자체적으로 생산하기도 했다. 전문경영인을 하나 고용해 경영전략을 맡기고 나니 넘쳐나는 돈을 쓰면서 돌아다니는 거 빼고는 할 일이 없었다.

민현은 버는 돈이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그 효용이 급격하게 감소한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하루에 사람이 먹는 밥은 세 끼였고, 아무리 좋은 차를 타도 교통 경색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가지고 있는 모든 물건들을 최고급품으로 바꿔도 차이는 미묘한 수준이었다. 사실 그는 한때 사치로 여겼던 1만 8천원짜리 스시 뷔페의 초밥 맛과 고급 오마카세의 40만원짜리 초밥의 맛 차이를 구별하지 못했다.

민현은 이제 명예를 얻고 싶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사는 방식을 추앙하길 바랐다. 방송에도 나오고 싶었고, 거래처 사람들이 아닌 명사들과 함께 식사하고 싶었다. 교양인으로 인정받아 졸부라는 딱지를 떼기를 원했다. 민현은 모든 면에서 풍족하기를 갈망했다.

가장 먼저 시작한 건 자서전을 쓰는 일이었다. 대필 작가를 300만원을 주고 고용했다. 작가는 몇 시간 동안 인터뷰를 한 뒤에 아무도 산 적이 없는 인생이 담긴 자서전을 휘딱 뽑아냈다. 자비출판으로 천 부를 찍은 민현은 밑의 직원들에게 수십 권을 돌렸지만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민현은 여러 사람 앞에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먼저 방송에 나와보려고 했지만 그런 정보 방송에 한 번 드러나는 것도 꽤 큰 돈이 들었다. 어디서든 젊은이들에게 노출되고 싶었다. 처음에는 어디 명문대학교 최고경영자 과정을 밟아볼까 했는데, 뭔가 기분 나쁜 가식 같았다. 그는 비서에게 자기가 다니던 대학에 연락을 하라고 시켰다.

“저, 사장님, 장학금 기부는 학교 쪽에서 아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사장님 이름이 데이터베이스에 등록이 안돼 있다고 합니다.”

“민현이 아니라 민손영으로 찾아보라고 그래.”

“손영이요?”

“어, 개명했거든.”

일은 쭉쭉 진행됐다. 학교에서는 전산망의 깊은 구석에 박혀 있던 민손영이라는 이름을 금방 찾아냈다. 그 이후로 학교가 따로 민현의 옛 이름을 언급하는 일은 없었다. 5억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적힌 플라스틱 판을 총장에게 넘겨주는 식을 치렀다. 디스크의 한 구석에서 몇십 년 간 아무도 찾는 이 없이 썩어갈 사진들을 수십 수백 장을 찍었다. 그 뒤로는, 학교에서 주기적으로 그를 강연에 초청해 줄 것으로 약속이 되었다.

민현은 사람의 가슴에 동기를 불어넣는 데 재능이 있었다. 그의 삶의 경로를 줄줄 읊는 것만으로도 젊은이들을 자극할 수 있었다. 어릴 적 재능 있는 야구선수였지만 가정 형편 문제로 접고, 이 학교에서 경비 일을 배운 남자. 은행 보안 요원의 지리한 일과 박봉을 견뎌내고 돈을 차곡차곡 모아 마침내 다시 야구쪽 일을 시작하게 된 그의 삶. 진솔한 민현의 자수성가 이야기에 혹하지 않는 청년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하루에 빨간 소주를 다섯 병씩 마셨거든.”

알코올 중독을 극복한 이야기까지 덧대면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었다. 민현은 술 이야기를 시작하면 뺨 한 쪽에 있는 커다란 흉터를 보여주었다. 현의 잡티 하나 찾기 힘든 얼굴에서 그 흉은 특히 도드라졌다.

“경호 일을 하면서 맨날 술을 그렇게 마셨는데, 술을 하루라도 거르면 손이 떨릴 정도가 됐지. 어느 날은 하루 거르고 출근하다가 몸이 떨려서 그냥 넘어지는 거야. 그때 아니다 싶어서 바로 병가 내고 병원 찾아갔지.”

그 뒤로는 정신병원에서 알코올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독한 향정신성약물을 먹는 이야기가 항상 따라붙었다. 의지의 힘만으로 그 후부터 당장 술을 끊어, 지금까지 맥주 단 한 방울을 마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덧붙여서.

민현이 생각하기에는, 다른 사람한테 하는 이야기에 적당히 거짓을 섞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양념이 밋밋한 음식을 맛깔나게 만들어 주듯이 적당한 거짓은 강연을 더 효과적이고 다채롭게 만들어줄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어쨌든 진실의 비중이 훨씬 높았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프로야구선수가 되는 것에 실패하고 전문대에 입학한 후 경호원 생활을 하면서 알코올 중독도 극복하고 이리저리 쌓인 돈으로 야구용품 사업을 시작해 그게 잘 뻗어나갔다는 이야기에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돈을 쌓은 경로가 박봉을 차곡차곡 저금한 것과는 좀 다른 방식이긴 했다. 그래도 민현은 자신에게 40억을 안겨다 준 행운이 필연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세상은 공평해서 부조리하게 고생을 안겨주는 일은 없다고 말이다. 재능있는 그가 야구선수가 되지 못한 대가로 목돈을 얻은 것은 세상이 굴러가야 할 대로 굴러간 일일 뿐이었다. 그리고 또 그가 이렇게 강연에서 월급을 차곡차곡 모았다는 식으로 양념을 치면, 그걸 들은 청년들이 희망을 얻고 올바른 삶의 자세를 함양하지 않겠나. 아무도 다칠 일 없는 최소한의 거짓말이었다.

어쨌든 현이 몇 년 동안 알코올을 단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은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었다. 한 달 동안 조용히 숨어 살면서 개명을 끝낸 다음, 얼굴 전체를 갈아엎는 성형수술 상담을 하러 갔을 때였다.

“하루에 술을 이렇게나 많이 드신다고요?”

성형외과의는 그가 기록한 설문지를 걱정스럽게 보며 물었다. 무식하게 소주 다섯 병을 마시던 시기는 옛적에 졸업했고, 민현은 약속한 대로 하루에 위스키를 딱 한 병 정도만 마셨다.

“아, 예. 그래도 괜찮아요. 필름도 안 끊기고, 술을 안 마시면 손이 떨려서 영…”

“지금 이런 상태시면 수술 못 합니다. 맥주 한 잔만 마셔도 상처가 덧날 수 있는데… 먼저 알코올 중독 치료부터 받으셔야 돼요.”

“예? 저는 수술을 지금 받아야 하는데요?”

“아니, 너무 위험합니다.”

“내가 돈 준다는데…”

의사는 계속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라이, 여기 아니면 나 수술해줄 성형외과가 없는 줄 아나…”

민현은 며칠간 그를 완전히 뜯어고쳐줄 성형외과를 찾아나섰으나 그런 병원은 없었다. 서너 번 퇴짜를 맞은 다음에는 술을 한 방울도 하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해 보았다. 하지만 수술 전에 신체 검사를 할 때부터 그의 중독은 금방 들통났다. 가만히 있어도 겨울날 나체로 내놓은 것처럼 덜덜 떨리는 현의 몸을 보고 의사들은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은 거울을 볼 때마다 전율했다. 오랜 세월동안 피폐한 생활을 지속한 그의 얼굴은 세월의 직격을 맞은 상태였다. 시커멓게 탄 채로 축축 쳐지기 시작하는 피부에 자글자글한 주름, 도저히 숨길 수 없는 커다란 흉터까지. 고생이 뚝뚝 묻어나는 이 얼굴에 돈만 많아봐야 사람들이 다 무시할 거야. 이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도 안 된다…

현은 정신과로 찾아가서 알코올 중독 치료를 가장 먼저 받았다. 의사는 그가 매일 마시는 주량을 듣고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약으로 어떻게 해볼 수준을 넘은 중독이었고, 의사는 현에게 입원 치료를 권유했다. 몇 개월 동안 병동에 들어가 중독을 개선해 나가자는 이야기였다.

며칠 전의 현이었다면 대번에 무시했을 이야기였지만 현은 그 제안이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그는 사회에서 잠시 사라지고 싶었다. 아무도 그를 쫓아오지 못 하도록. 현은 일주일 동안 이런저런 호텔을 돌아다니며 살다가 지방의 알코올중독치료병동에 입원했다. 해독 치료와 알코올 중독 인식에 1개월, 회복에 3개월이 걸린다고 했다.

병동의 사람들은 다들 똑같은 약을 먹고 똑같은 인지 행동 치료를 받았지만, 그중 회복세가 완연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병동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세상이 온난했다는 점이었다.

향정신성약품은 갈망을 잠시나마 멈춰 주었고, 상담 치료를 받을 때에는 따뜻한 호의를 순간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평생을 의존해온 술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란 힘든 일이었다. 오직 바깥 환경이 호의적이고, 이제 술 없이도 당당히 세상을 마주할 수 있을 만한 사람들만이 안정적으로 회복했다. 민현도 그 중 하나였다. 해물탕에 소주 한 잔을 걸치는 순간이 그리울 때도 있었지만, 40억의 세상에 편입될 생각만 하면 상념이 싹 날아갔다.

민현은 3개월 집중 치료를 받는 동안 숱한 사람들이 욕망에 무릎 꿇는 모습을 보았다. 병동 내에서도 어떻게든 알코올을 긁어 모으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알코올이 들어간 손 세정제를 마시는 사람도 있었고, 병원밥에서 탄수화물이 든 것들을 모아 술을 빚으려는 환자도 있었다. 병동 내에서는 잘 버티다가 나가자마자 폭음을 하고 다시 끌려오는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민현은 그들의 핍진한 의지를 경멸했다.

3개월 뒤에 민현은 병동을 나서면서 자신은 그런 사람들과 뿌리부터 다르다고 확신했다. 그동안의 방황은 잘난 사람들이 자주 겪고 하는 잠시간의 시련일 뿐이라고. 민현은 그 후 몇 년 간 술을 단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 입에 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술 이야기를 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마시는 꼴을 보는 것 자체를 혐오했다. 시들시들 말라들어가던 현의 몸은 많이 회복되었고 그는 바라던 대로 전신 성형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뺨의 흉터는 얕게 남았지만 민현의 몸에서 세월의 흔적이 어느정도 씻겨나갔다. 새로 태어난 느낌이었다.

강연을 끝내고 돌아온 민현은 최근 뽑은 테슬라의 전기차 뒷자리에 앉았다. 차는 최소한의 소음만 내면서 서울 거리를 미끄러졌다. 그의 비서가 차를 한창 몰다가 말을 꺼냈다.

“강연에서 학생들에게 밥을 사주겠다고 하셨다면서요?”

“응, 왜?”

“강연 끝나자마자 제 휴대폰으로 문자가 쏟아져서요. 진담이세요?”

“아 물론이지, 성공한 동문이 원래 밥을 사는 거 아니겠어. 최대한 빠르게 일정 잡아놔.”

비서는 “아, 예.”라고 말한 다음 조용히 차를 몰았다. 현은 학생들에게 술 없이 좋은 음식을 즐기는 방법을 알려줄 생각에 들떴다. 비서는 내심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한테 자기 성취를 과시하려는 중소기업 대표들 치고 2년 안에 안 망하는 사람들 없던데, 다른 직장도 슬슬 알아보는 게 좋으려나. 비서 노릇 누가 경력으로 쳐줬으면 좋겠다.

일주일도 안돼서 자리가 마련되었다. 민현이 자주 찾는 소고기 집이었다. 열 명 정도의 건장한 경호학과 학생들이 우글우글하게 들어섰다. 고기집 사장 입장으로서는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아주 풍요로운 광경이었다. 앞장서서 민현 앞에 선 과대표가 그 분위기

“와, 정말 괜찮으세요?”

“어, 물론이지. 후배들한테 사는 건데.”

사장은 몸을 굽신거리며 그들을 커다란 방으로 안내했다. 민현은 상석에 앉았고 과대표가 그 옆에 앉았다. 민현은 예전에 교양을 쌓는다고 들여다보았던 최후의 만찬을 떠올렸다. 중간에 예수가 앉아있고 제자들이 여러 다종다양한 자세로 시중을 드는 느낌의... 그는 자신이 이 학생들에게 예수 노릇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귀한 삶의 경험을 나눠줘서 사회의 윗자리로 향하는 길을 터 주는 거지. 그는 우선 소고기를 25인분 주문했다. 학생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때 그의 옆에 앉아있던 학생 한 명이 속삭였다.

“저, 그런데 선배님, 술은...”

민현은 그를 쏘아보면서, 동시에 이게 연설을 할 기회라는 걸 알았다.

“야, 내가 그렇게 길게 한 강연 듣고도 또 술 마시자고 하네? 술이 만악의 근원이야. 한국 주세가 100%인 건 알고 있어? 내가 술을 안 끊었으면 어떻게 경호원 생활 청산하고 사업 시작할 돈 모았겠냐? 술만 끊어봐. 진짜 세상이 달라진다. 술 먹으면 고기 맛도 못 느껴. 꽃등심이 다 무슨 소용이냐, 취하면 돈까스용 등심이랑 구분도 못해. 일단 먹어봐. 얼른...”

곧 종업원이 카트로 수많은 고기와 여러 반찬들을 날랐다. 접시 위에 놓인 소고기는 전부 고급품이었는데, 그 빨간 고기 위에 눈처럼 수놓인 지방들이 척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 가장 어린 학생들이 고기를 집어 잘 달궈 놓은 철판에 올렸다. 치이익 하는 소리가 흘렀다. 철판에서 기름이 뚝뚝 흘러내리면서 화력을 돋궜다. 다들 입맛을 다셨다.

“소고기는 빨리 먹는 거야. 먹어 먹어. 일단 배부터 채우고 자기 소개 한 번씩 해 달라고들.”

민현이 앞장서서 고기를 자르기 시작하자 다들 젓가락을 빠르게 놀렸다. 다들 한 덩치 하는 사람들이라 빠른 속도로 고기가 바닥났다. 민현은 그 탐식의 현장을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혼자서 컵라면 하나 사 먹는 것도 난감하던 시절이 생각나 뭉클했다. 이런 것이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는 것일까. 전투적인 식사 속도가 조금 둔해졌을 때 즈음에 민현은 20인분을 추가로 주문하고 말했다.

“그럼 이제 슬슬 한 명씩 자기가 누군지 말해보지들 그래.”

말하자마자 과대표가 칼같이 일어나 자기 이름 세 글자에 기합을 넣어 크게 외쳤다. 민현은 갑작스레 군대 시절 생각이 났다. 아이들 중에는 미필도 있고 군필도 있고 군대에 갈 일이 없는 아이들도 있었으나,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 문화를 여기서 재현했다. 민현에게는 만족스러운 느낌이었다. 자신이 이 많은 어린 학생들에게 경의를 받는다는 건 질리지 않는 경험이었다.

과대표가 자리에 앉자 다들 순서대로 일어났다. 자기 이름과 나이를 외치고 나서, 자신이 얼마나 민현 같은 모습이 되고 싶은지 말했다. 많은 학생들은 마음 속으로 이걸 소고기 값으로 치자고 생각했다. 민현에게는 들리지 않으니까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여자가 조용히 일어났다. 민현은 고개를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민현은 얼어붙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길쭉길쭉한 몸은 그대로였으나 한때 앳되었던 얼굴에는 젖살이 싹 빠져 있었다. 여자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어려 있지 않았으나 깊은 보조개가 움푹 패여 있어 기아 직전의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는 크지 않은 목소리로 하나하나, 민현이 기억하고 있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이, 민, 경입니다.”

이민경은 그 뒤로 뭐라뭐라 이야기를 했다. 민현은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는 척을 하며 뺨의 흉터를 가렸다. 민현은 자신이 지금까지 애써 지어왔던 작고 견고한 세상이 뒤흔들리는 것을 알았다. 이민경은 민현을 바라보았다. 민현은 애써 눈길을 조금씩 피했다. 왁자지껄한 식당의 소리가 잦아들고, 현의 시야가 민경으로 끝없이 좁혀졌다.

민현은 도망치고 싶었다. 7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당장 밖으로 튀어나가고 싶었다. 후문, 후문이 어디 있어요. 종업원 하나를 붙잡고 묻고 싶었다. 나를 알아볼까? 그의 등에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는 애써 눈의 초점을 민경 너머로 맞추었다. 밝은 서울의 거리로 난 창이 보였다. 밤이라 창으로 그의 얼굴이 창문에 언뜻 비쳤다.

민현은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7년 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수 년 간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고, 생각하지 않았던 얼굴이었으나 그 순간에는 그 생각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지금 창에 비친 얼굴은 달라진, 못 알아보게 달라진 얼굴이었다. 그 동안 민경은 뭐라뭐라 조용히 말했다.

“...입니다.”

민경은 말을 끝내고 제자리에 앉았다. 뭐라뭐라 쓸데없는 말이 오고갔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 텐데, 방금 전까지 커다랗게 부풀어 올라 있던 민현의 자아는 바늘로 톡 찌른 것처럼 펑 터져나가 찌그러져 있었다. 민현은 입을 열고 지리멸렬한 말을 내뱉었다. 아무 정보값이 없는 말이었지만 다들 박수를 쳤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끝내자마자 민현은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의 검은 액정에 잠시 자신의 얼굴 또 한 번 비쳤다. 민현은 그것을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그는 휴대폰을 자신의 귀에 가져다 댔다. 전화가 오는 척을 했다.

“어, 그래. 지금, 응? 거래처서? 김 부장이? 응...”

민현은 자신의 발음이 전부 형편없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도 연기를 해야 했다. 도망쳐야 했다. 그는 휴대폰을 품 속으로 집어넣고 또다시 두서없는 말을 했다. 미안하다. 급한 일이 생겼다. 다음에 또 보도록 하자. 얼마든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내 이름으로 달아두겠다.

학생들로 말하자면 그들은 굳이 민현을 보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더 보고 싶은 것은 고기의 좋은 마블링이었다. 쓸데없이 예의를 차려야 할 사람이 빨리 사라져 준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쁜 일이었다. 민현은 황급히 고깃집 밖으로 나왔다. 고기 익는 소리와 냄새가 갑자기 잦아들었고 길거리를 떠도는 시원한 바람이 그를 맞았다.

민현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차가 어디로 간 거지? 아 맞아. 비서에게 연락하면 돌아오라고 했지. 그는 다시 휴대폰을 꺼냈다. 비서를 불러야 했다. 그는 다급히 휴대폰을 이리저리 만지면서도 바쁘게 발을 움직여 식당에서 멀어졌다.

“야! 민손영!”

민현은 신발에 본드칠이라도 한 것처럼 우뚝 멈춰서 몸을 천천히 돌렸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모습, 길쭉길쭉한 여자가 빠르게 저벅저벅 다가왔다. 손영의 악몽에서 가장 자주 나타나는 형체였다.

“자, 자네는 왜 식사를 벌써...”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요. 흉터는 같네요. 목소리도 성형으로는 못 바꾸나 봐, 아직? 자본금을 모아서 회사를 차렸다고요? 웃기네요.”

손영은 입을 닫았다. 민경과 손영은 마주섰다. 몇 년 만의 재회였다. 손영은 온 몸이 가렵고 찝찔했다. 손영이 자세히 보니 민경의 키는 그 동안 더 커 있어, 선수 출신으로 덩치가 꽤 큰 민손영과 이민경의 키가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오... 오랜만이네.”

“친한 척 하네?”

민경의 말투는 차가웠다. 손영은 그 속에 담긴 적의를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는 생각했다. 자기가 몇 년 만에 이룬 성취들을. 로또로 갑자기 큰 돈을 번 사람들은 돈의 무게를 주체하지 못하고 으깨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성공했다. 사업을 안정적으로 궤도에 올렸다. 새로 태어났다. 그는 자기가 자수성가했다고 확신했다. 그는 민경을 보았다. 이 커다란 여자애는 결국 은행 경호원이 될 운명이었다. 그에게 40억은 어울리지 않았다. 무가치한 사람이 자신에게 또다시 골칫덩이가 되고자 했다.

“미... 미안해. 내가 지금이라도... 그래, 후견인, 후견인을 해 달라고 했었지?”

“거짓말은 못 하겠다는 거예요?”

민경은 입꼬리를 한 쪽만 올리면서 웃었다. 뒤틀린 웃음이었다. 어떻게 말하지, 뭐라고 말하지. 손영은 답답한 생각을 토해냈다.

“조... 좋은 주식 샀다고 생각해. 7년 동안 묻어놓은 거지. 보통 로또 사면 다 망한다고. 이자까지 쳐서 내가 넉넉하게 후원해 줄테니까...”

“그러면 다 된다고 생각해요? 7년 동안 내가 좆된 건 어떻게 할 건데요?”

“그건... 그건 내가...”

“어떻게 할 거냐고.”

손영은 마음 속의 난감함과 곤란함 모두가 일시에 분노로 화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소리쳤다.

“씨발! 그게 다 내 탓이야!? 어차피 근처에 받을 어른 한 명 없었다면서? 내가 대신 받아서 차곡차곡 불려 줬잖아? 지금 다시 도와준다는데 뭐가 문제야?”

손영이 큰 소리를 내지르자 민경은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얼굴에는 뒤틀린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자수성가라고 자랑하고 다니면 안 부끄러워요?”

“어차피 없어질 돈이었어, 씨발... 내가 은행 경호원으로 일하면서 로또 당첨되고 인생 조진 애들 얼마나 봤는데. 날 봐, 술도 끊었고 새로 태어났어. 나 같은 사람 진짜 드물어. 씨발, 뭐가 문젠데. 어차피 운 없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 못해. 최소한의 운이 필요하다고. 내가 얼마나 재수가 없었는데. 봐, 이제 너도 다시 그 행운을 되돌려 받는 거야.”

“행운을 되돌려 준다고요?”

“그래, 봐... 사람들이 어떻게든 돈 모아서 겨우 치킨 집 같은 거 세우는데 꼬라박고 망하는 거 못 봤어? 나니까 이 정도로 불려 준 거야. 중학생이 40억을 어떻게 다루냐고!”

“진짜 뻔뻔하다.”

“너도 나이 들면 나한테 고마워하게 될 거야.”

손영은 비릿하게 웃었다. 민경의 표정에 서린 혐오가 조금이라도 흩어지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손영의 머릿속에서 부산히 계산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 달에 얼마씩 줘야 이 고까운 여자애가 불만을 가지지 않으면서도 아깝지 않을까?

“그럼 내 어린 시절도 돌려줄 수 있어요?”

“뭐?”

“당신 때문에 내 고등학교 시절 좆됐는데 그건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내 시간이 돌아와요? 안 돌아오잖아.”

“야, 돈만 있으면 다 돌아오는 거야. 내 얼굴을 봐. 피부도 옛날보다 훨씬 좋아질 수 있고, 몸도 원하면...”

“나, 기계체조 선수였어.”

민경이 고개를 잠시 숙이며 말을 토했다. 손영은 민경이 앞으로 무너지는 것 같아서 잠시 주춤했다. 민경은 잠시 그 자체로 서 있다가, 손영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손영은 섬뜩했다. 어느 순간 민경이 품에서 날붙이를 꺼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영은 자신과 민경의 체격 차이를 생각하면서 조금씩 발을 뒤로 옮겼다.

“내가 왜 너한테 돈을 대신 받아달라고 했겠어? 나는 애미애비 없는 사람이니까. 나 같은 애들 키워주는 데서 살았어. 운동 했다고. 운동... 기계 체조. 그래도 나름대로 잘해서 장학금도 받았는데. 기사도 자주 나왔었는데... 그때 로또만 안 됐어도...”

민경은 말을 이었다.

“네가 돈 다 털어가서 내 인생을 망쳤어. 넌 내 돈만 가져간 게 아니야, 넌 내 재능까지 박살냈어. 내가 생전 경비원 준비하게 될 거라고 생각도 못했는데... 체대 가서 체육 교사하려고 어릴 때부터 항상 생각했었는데. 네가 경비원이었다는 거 생각하면 내 자신이 너무 혐오스러워서 토할 것 같았어. 네가 이제 얼마를 줘도 난 다시 운동하던 시절로 못 돌아가. 대회 나갈 기회도 없어. 네가 다 망친 거야. 네가.”

“그... 그럴 줄은 몰랐지. 나도...”

“강연하면서 한때 야구했다는 거 되게 자랑스럽게 말하더라.”

손영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야구공과 야구 방망이를 수십 년 잡으며 생겼던 굳은살이 여전히 그의 손에 배겨 있었다. 손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돈 많이 벌어서, 어린 시절의 네가 그렇게 해 놓고 프로 안 된 거가 위로가 됐어? 됐냐구.”

“나, 나는...”

“쇠고기 처먹는 거 보니까 예전이랑 다를 게 없더라. 너 같은 애들, 돈 생겨도 그냥 과거의 욕망에 집착하는 거 다 똑같아. 돈 많아 봐야 뭐해? 마음은 그냥 돈 없을 때랑 같잖아.”

“아, 아니...”

손영은 더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등을 돌리고 뛰었다. 빠르게 달렸다. 은행 경비하던 시절에 많이 상했던 무릎 관절이 지끈지끈했다. 머릿속에 너무 많은 생각들이 오가서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손영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한창 뛰다가 그는 뒤를 바라보았다. 그 악몽에서 나온 길쭉한 여자가 아직도 그를 쫓아오고 있을까?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손영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도로에 주저앉았다. 수백만 원 짜리 정장에 먼지가 묻어 금방 더러워졌다. 손영은 생각했다. 아니야, 그래도 돈이 있으면 길거리에서 주저앉아 우는 것보다는 테슬라에 주저앉아 울 수라도 있다고. 돈으로 과거의 불행을 지울 수는 없어도 반짝거리는 현실로 덮을 수는 있다고.

하지만 자신과 같은 길을 걸을 사람을 또다시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그 다음으로 손영을 덮쳤다. 가슴이 아프고 불편한 느낌, 죄책감은 신체적으로 과거에 손영이 그토록 느끼던 불안과 똑같이 다가왔다. 손영은 자신이 항상 기억하던 불안을 물리치는 방법을 떠올렸다.

손영은 고개를 들었다. 편의점이 보였다. 그 앞에서 주저앉아 맥주를 마시는 취객들이 몇 명 보였다. 그는 편의점 문을 덜컹 열었다. 손영은 이리저리 눈을 돌렸다. 아르바이트 뒤쪽의 진열장에 이런저런 싸구려 위스키들이 올라와 있었다.

“저기, 거... 스카치 블루 한 병 주쇼.”

아르바이트는 그의 더러워진 정장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 욕을 하며 그에게 위스키를 건넸다. 손영은 품을 뒤져 5만원짜리 지폐 한장을 던졌다. 아르바이트가 잔돈을 세는 동안 손영은 이미 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딱 한 모금만, 한 모금만 마시자. 가슴 속에 있는 이 불안함과 죄책감이 다 없어지고 내일부터는 다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거야. 여느 상류층들과 같이 살 수 있을 거야.

편의점 앞에 주저앉은 손영은 위스키 뚜껑을 비틀어서 땄다. 병을 입에 대고 기울이자 강렬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수 년 만에 목구멍에서 그 타오르는 느낌과 나무의 향이 확 번졌다. 손영은 위스키를 스포츠 음료 마시듯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그는 얼굴에 혈기가 차오르고 가슴이 뜨겁게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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