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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연 가시 위의 장미

2019.04.01 00:0004.01

가시 위의 장미

해도연

뉴욕
1901년

데이먼 맥키는 자그만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신문을 펼쳤다. 지루한 내용뿐이었지만,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이탈리아의 과학자가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통신에 성공했고 이제 군대의 함선들이 도입을 준비한다고 한다. 동쪽 끄트머리의 작은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전등이 켜졌다고 한다.

세계는 넓었고 더 빠르게 연결되고 있었다. 맥키는 마른 초원을 말을 타고 가로지르던 시대가 그리웠다. 이젠 말보다 자동차가 더 많다. 특히 뉴욕은 자동차가 내뿜는 더러운 공기로 가득했고, 남자들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을 태우고 분주히 움직였다. 그들의 바지춤에는 총과 칼 대신 포마드 병이 들어있었다.

맥키는 신문을 접어 던지고는 카페 옆의 계단을 올랐다. 맥키가 머무는 여관은 카페 바로 위에 있었고, 맥키는 별다른 일이 없다면 항상 여관과 카페 사이를 몇 번이고 오가는 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지루한 날의 끝을 알린 건 문 앞에 떨어져 있는 빨간 장미 한 송이였다. 맥키는 허리를 숙여 장미를 들어 올렸다. 줄기를 잡은 손에 무심코 힘을 주자 검지 끝이 따끔거렸다. 꽃자루 아래에 큼지막한 가시 하나가 감춰져 있었다. 맥키는 장미를 든 손을 바꾸고는 검지를 입에 넣어 피를 빨았다. 시큼한 쇠 맛이 혀를 자극했다.

데이먼 맥키는 옛 기억을 떠올렸다. 총잡이 시대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맥키는 록플라워 타운을 방문했다. 맥키가 마지막으로 중서부에서 지냈던 시간.

맥키가 입에서 손가락을 빼고 말했다.

“빌리. 기다리고 있었다.”

록플라워 타운
루이지애나
1889년

어느 맑은날 늦은 오후, 오리엔탈 살룬에는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여름의 온기가 남아있었다. 커다란 창문과 가슴 언저리만 겨우 가릴 수 있는 스윙도어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이 살룬을 비췄지만,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 밝지는 않았다. 하지만 살룬에서 책이란 그저 계단 아래의 장식일뿐이었다.

살룬 중앙에 성의 없이 놓인 둥그런 테이블 주변에는 대낮부터 맥주를 들이키는 광산 노동자들이 힘없이 앉아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석탄 검댕으로 물들어있었지만, 입 주변만큼은 깨끗했다. 손으로 닦은 건지 맥주로 씻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외설적인 그림과 이국적인 술병으로 장식된 카운터 뒤쪽에서는 얼굴이 검은 수염으로 가득한 마스터가 술에 취한 늙은 카우보이와 침을 튀기며 서쪽 마을의 유명한 창녀에 대해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젊은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낡은 수건으로 맥주컵을 닦고 있었다.

지난 며칠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이 풍경을 가장 먼저 깨트린 것은 바닥에 나타난 그림자였다. 건장한 남자 하나가 스윙도어 뒤에 서 있었다. 남자의 머리 위에 가을의 낮은 해가 자리 잡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스윙도어를 밀어 열었다. 녹슨 경첩에서 불쾌한 소리가 들리며 녹가루가 떨어졌다. 오리엔탈 살룬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천천히 내부를 살폈다. 살룬이 너무 어두워 눈이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광부들은 남자의 얼굴을 살피며 수군거렸다. 입은 옆 사람을 향했지만, 시선은 남자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커다란 가방 하나를 바닥에 내려놓고 카운터 자리에 앉았다. 남자가 말했다.

“얼음 있소?”

마스터는 남자를 잠시 노려보더니 수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얼음이야 있지. 하지만 우린 얼음 가게가 아니야.”

“위스키.”

“얼음 넣어드릴까?”

“아니, 얼음 없이. 얼음은 따로 주시오.”

마스터는 자그만 유리잔에 위스키를 따라 남자에게 줬다. 그리고 말했다.

“지브니 양, 창고에서 얼음 조금만 가져와.”

지브니는 컵과 수건을 내려두고 살룬 구석으로 사라졌다. 잠시 뒤 지브니는 얼음이 가득 담긴 가죽 주머니를 가져왔다.

“주머니 값은 따로 받지.”

마스터가 남자에게 차가운 가죽 주머니를 건네줬다. 남자는 주머니를 받자 가방에 바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위스키를 들이키고 말했다.

“사람을 찾고 있소. 이 마을에 클랜턴 가족이 있다고 들었는데.”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광부들의 수군거림이 멈췄다. 마스터의 표정도 차갑게 굳었다. 남자는 말을 이었다.

“엘리자베스 클랜턴을 만나고 싶소.”

마스터가 카운터 위로 양손을 지지대처럼 뻗고 말했다.

“무슨 일로?”

“볼 일이 있으니까. 개인적으로. 그리고… 꼬마 클랜턴. 빌리 클랜턴도 만나고 싶은데.”

남자의 말에 지브니의 눈이 매섭게 변했다. 마스터가 지브니의 눈을 확인하고 말했다.

“지브니 양, 진정해.”

하지만 지브니는 숨을 천천히 몰아쉬며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남자는 지브니를 보며 말했다.

“원한다면 사례도 드리지. 지브니 양, 클랜턴 가족을 알고 있소?”

지브니가 카운터 아래로 몸을 숙였다.

“지브니!”

마스터가 소리쳤지만, 다시 몸을 일으킨 지브니는 윈체스터 1873 라이플을 들고 있었다. 장전손잡이를 반 바퀴 돌리자 총알이 총열 앞으로 이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브니가 남자를 조준하며 말했다.

“이 마을에서 꺼져. 그리고 다신 나타나지 않는다고 약속해.”

하지만 총구 앞에서도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스터가 지브니에게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지브니 양, 총 내려놔.”

“명령하지 마요.”

“지브니! 난 내 가게에서 두 가지를 절대 허락 못 해! 사람을 향해 총을 쏘는 것, 그리고 여자가 총을 드는 것! 이 놈을 쏘고 싶으면 가게 밖으로 나가! 그리고 니 총으로 해!

마스터가 재빠른 움직임으로 지브니에게서 총을 뺏었다. 그리고 총구가 천장을 향하도록 잡고 말했다.

“보쇼, 손님. 여긴 평화로운 마을이야. 힘들게 일궈낸 평화지. 클랜턴 가족을 찾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문제를 일으킬 거면 떠나줘.”

“난 그저 약속을 지키러 왔을 뿐이오. 존 클랜턴과의 약속.”

지브니가 달려들어 남자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존 클랜턴을 만났어? 어디서? 언제? 어떻게?”

“거친 아가씨구만. 하지만 몸은 그렇지 않아.”

남자는 자기 멱살을 잡은 지브니의 손과 손목을 만지며 말했다. 곧 남자의 손에 팔을 부러뜨릴 것 같은 힘이 들어가더니 멱살 잡은 손을 떼어놓았다. 지브니는 작게 신음하며 팔을 거두고 손목을 어루만졌다.

남자가 남은 위스키를 모두 들이키고 말했다.

“존 클랜턴은 죽었소. 내가 마지막 길을 배웅해줬지.”

남자는 빈 위스키 잔을 마스터에게 내밀었다. 아직 할 말이 남았다는 뜻이었다. 마스터는 다시 위스키를 따랐다. 남자가 말을 이었다.

“이틀 전 아침이었소. 롯지웨이 타운에서 기차를 타려고 하는데 기찻길 옆에 남자 하나가 쓰러져있었소. 존 클랜턴이었지. 죽은 거면 입에 뱃삯이라도 주려고 다가갔더니 아직 살아있더군. 그리고 힘겨운 목소리로 내게 말을 했는데 알아듣기는 힘들었소. 대충 알아들은 얘기는…

10년 동안 수감자 생활을 하다가 출옥해서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습격을 당했다는 거요. 집에 두고 온 아내와 만나지도 못한 아들 얘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렸소. 내게 돈주머니를 모두 건네더니 부탁을 했소. 두 사람에게 오랫동안 기다려줘서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또 아내에게 옷을 사주며 다른 남자를 만나서 결혼해 살라고 전해달라고도 했지. 아, 그리고 장미 한 송이도.”

남자가 다시 위스키를 들이켰다.

“만나지도 못한 아들이지만, 그래도 자랑스럽다는 말도 하더군. 그리고 죽었소.”

마스터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지브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브니는 눈물을 흘렸다. 울음을 참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실패하고 있었다. 지브니는 카운터를 돌아서 나오더니 빠른 걸음으로 살룬 바깥으로 나갔다.

마스터가 말했다.

“저 애는 엘리자베스 클랜턴의 여동생이야.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이 마을에 없어. 남편이 체포되고 수감된 이후로는 미쳐버리고는 사라졌어. 아들 클랜턴은 저 애가 자기 자식처럼 키웠고.”

남자는 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더니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마스터는 지폐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

“당신이 한 말이 사실이길 바라지만”

마스터는 총의 방아쇠를 손가락 끝으로 만졌다.

“거짓이라면, 마을 남자들 모두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

남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할 일만 간단히 끝내고 바로 마을에서 사라지겠소.”

늙은 카우보이가 바닥에 가래침을 뱉었다.

* * *

지브니는 살룬 바깥의 나무 기둥에 기대에 울고 있었다. 남자가 그 옆으로 다가왔다. 남자는 지브니의 어깨에 손을 가볍게 얹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힘이 들어가지 않은 남자의 손은 뜨겁고 부드러웠다.

남자가 말했다.

“존과의 약속을 지키는 걸 도와주시오.”

“존은… 마지막에 어땠나요?”

“얼굴에 수염이 가득했지만, 차림새는 깔끔했지. 멋을 아는 사람이었던 게 분명하오. 조금 말랐지만, 근육질이었고, 피부도 깨끗했소.”

“총에 맞은 건가요?”

“아마도. 아마 강도를 만난 거겠지.”

지브니는 앞치마를 들어 올려 눈물을 닦았다.

“존은 20년 형이었어요. 탈옥한 건가요?”

“아마도.”

지브니가 몸을 돌려 남자를 향해 섰다.

“당신이 정말 존을 만난 걸 어떻게 믿죠? 탈옥수를 잡기 위해 가족을 이용하러 온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봐요.”

“의심이 많군.”

“존은 적이 많았으니까.”

“편지가 있소. 존이 아내와 아들에게 쓴 편지. 아마 보내진 못한 거 같소.”

남자는 허리에 걸려있던 주머니에서 편지 뭉치를 꺼냈다. 낡고 바랜 종이들이었고, 구석에는 마른 피가 묻어있었다.

“존이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던 거요. 내게 이것도 전해달라고 하더군. 읽어보진 않았소. 그러고 보니 존의 마지막 말도 있었군.”

“마지막 말?”

“‘그대는 가시 위에 피어난 나의 붉은 장미’. 자기 여자한테 장미를 선물해 달라고 한 걸 보니, 왠지 의미가 깊어 보이더군.”

지브니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이 남자는 존을 만난 게 분명하다. 존은 새빨간 장미를 정말 좋아했다. 매끈한 줄기에 꽃자루 아래에 가시가 하나만 난 장미는 존의 보물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엘리자베스는 실버폴 타운에 있어요. 거기서… 몸을 팔고 있어요.”

“실버폴 타운이면 오늘 출발하기엔 이미 늦었군.”

“집에 빈방이 하나 있어요. 원래 존이 쓰던 방인데… 존과 엘리자베스가 사라진 뒤엔 저와 빌리만 살아요. 하룻밤 재워드리죠.”

“고맙소.”

지브니는 다시 살룬으로 들어갔다. 남자가 가슴 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냈을 때, 지브니가 스윙도어 위로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창피하게도 아직 이름을 묻지 않았군요.”

“맥키. 데이먼 맥키.”

“데이먼 맥키 씨.”

지브니는 남자의 이름을 한 번 되뇌더니 다시 살룬으로 사라졌다.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인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기둥에 뭄을 의지하고 태양이 사라져가는 서쪽 하늘을 바라봤다. 새빨갛게 물든 구름이 꽃잎 마냥 펼쳐져 있었다.

1901년

맥키는 침대 옆에 있던 옷장 서랍을 꺼내 뒤집었다. 서랍 바닥 밑에는 피스메이커 리볼버과 탄알 주머니가 고정되어 있었다. 맥키는 리볼버 꺼내 탄알을 하나하나 집어넣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리볼버의 듬직함이었다.

탄알을 채운 맥키는 창문의 커튼을 닫았다. 그리고 의자를 꺼내 방 가운데에 놓고 거기에 앉았다. 긴장감이 맴돌았다.

바로 이 느낌이야.

맥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얼마 만에 느끼는 긴장인가. 맥키는 빌리가 건강하게 성장했기를 기도했다.

1889년

열 살 빌리는 데이먼 맥키가 마음에 들었는지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빠 소식을 가지고 왔다는 지브니의 말에 빌리는 지브니에게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맥키가 있는 방으로 달려가 두 시간이 넘도록 나오질 않았다. 그동안 해가 지고 촛불의 기름내와 오렌지 빛깔이 방을 메웠다. 지브니는 맥키에게 존이 죽었다는 말은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고, 맥키는 그 부탁을 들어줬다.

“아빠도 아저씨처럼 잘생겼으면 좋겠어요.”

“물론 잘생겼지. 나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말이야.”

“아빠가 날 자랑스러워 한다는 거, 사실이죠?”

빌리는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했고, 맥키는 항상 같은 대답을 해줬다.

“물론 사실이지. 아버지는 보지 않아도 아들을 느낄 수 있거든.”

빌리는 싱글벙글 웃었다.

노크 소리가 들린 뒤, 지브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브니가 들고 온 쟁반에는 종이로 감싼 버터와 빵, 우유 한 잔이 놓여있었다. 지브니는 쟁반을 침대 옆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빌리가 지브니에게 달려들어 치마폭을 양팔로 감쌌다. 지브니는 쟁반이 흔들리지 않도록 균형을 잡으며 빌리의 머리를 한 팔로 어루만졌다.

“지브니!”

“빌리, 이제 잘 시간이야. 길런 부인 집에서 밥은 먹고 왔다고 했지?”

“응, 먹었어! 잔뜩!”

빌리는 커다란 하품을 하며 지브니의 품에 안겼다. 포만감에 아빠 소식, 그리고 따뜻한 지브니의 체온. 빌리는 오늘이 자기 생일이었다면 더욱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방에 가서 자. 우유랑 쿠키 가져다 놨어.”

“응. 아저씨 내일 봐요.”

빌리가 손을 흔들고는 문밖으로 사라졌다.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자그맣게 문을 여닫는 소리를 끝으로 빌리의 인기척이 사라졌다.

“빌리는 엄마를 찾은 적이 없어요. 항상 아빠만 찾았죠. 하기야 엄마라는 사람이 자기를 버리고 마을을 떠났으니.”

지브니가 말하며 맥키 앞의 의자에 앉았다.

“엘리자베스는 어떤 사람이었소?”

“좋은 사람이었죠. 자매 관계는 좋지 않았지만, 언니가 좋은 사람이었다는 건 알아요. 그래서… 그래서 지금 이 모든 일이 너무…”

“당신 감정도 얽혀있는 거 같군.”

“다 같이 살았으니까요. 존이 좋지 못한 일로 돈을 벌고 있다는 걸 전 알고 있었어요. 언니는 몰랐죠. 그런데 제가 말실수를 하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이 알고 언니가 알아버렸고, 난리가 났어요. 그래서 존이 하는 일에 대한 소문이 마을 밖에 퍼졌고, 곧 존의 적과 현상금 사냥꾼들이 마을을 찾아왔죠.”

맥키는 빵에 딱딱한 버터를 바르며 말했다.

“그래서 외지인을 경계했던 거군.”

“존은 체포됐고, 20년 형을 받았어요. 실적에 눈이 먼 외지 경찰이 높은 형을 받으면 돈을 더 주겠다는 말을 해서 현상금 사냥꾼들이 거짓 증언까지 늘어놨거든요.”

맥키가 빵을 한입 물었다. 지브니가 말을 이었다. 울먹임이 녹아있었다.

“모두 제 실수에서 시작된 거죠. 제가 비밀만 잘 지켰더라면. 저 때문에 빌리까지 부모 없이 항상 위험 속에서 살게 되고…”

지브니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눈물과 콧물이 손가락 사이로 조금 흘러나왔다. 맥키는 빵을 내려놓고는 지브니 옆으로 가서 어깨를 감쌌다.

“비밀은 언젠간 드러나는 법이오. 모든 일은 당신 때문이 아니라, 비밀 그 자체가 있었기 때문이지.”

“차라리 당신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지브니가 말했다.

“차라리 존이 죽었다는 걸 몰랐다면 좋았을 건데… 이젠 아빠가 언젠가 돌아올 거란 말에 진심을 담을 수 없어요. 거짓말이 되었다고요. 빌리에게 거짓말을 해야 한다고요.”

지브니는 결국 목을 놓고 울었다. 눈물이 바닥에 연이어 떨어졌다. 맥키는 지브니를 양팔로 감싸 안았다. 지브니는 맥키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버터가 묻은 맥키의 손가락이 지브니의 목을 어루만졌다. 두 사람의 체온에 버터가 녹아내렸다.

두 몸이 포개지면서 나오는 바람이 촛불을 흔들었다. 둘의 그림자가 소리없이 일그러졌다.

1901년

노크 소리.

맥키는 리볼버의 장전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었다.

“맥키 씨! 식사 가져왔어요!”

여자의 목소리. 여관 직원인 멜리사 조지였다. 언제나처럼 점심 식사 거리를 가져온 것이었다.

이제 멜리사도 다시 못 보겠군.

맥키는 장전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떼며 생각했다. 멜리사 조지는 젊고 예쁜 여자였다. 이제 막 스무 살을 넘었을 거라 맥키는 생각했다. 가끔 멜리사의 몸에 손을 대며 추태를 부렸지만, 멜리사는 화가 난 듯 아닌 듯 맥키의 손등을 내려치며 묘한 웃음을 보일 뿐이었다.

“멜리사 양, 오늘 점심은 필요 없소.”

“저기, 맥키 씨. 오늘은 방값을 주셔야 해요. 다른 방들도 다 밀려서… 제때 주시는 분이 맥키 씨 밖에 없어요. 맥키 씨 방값이라도 받아가야 주인아주머니께 혼이 나지 않을 건데…”

문득 맥키는 오늘을 무사히 보내고 나면, 멜리사와 함께 떠나는 게 어떨까 생각했다. 멜리사는 언제나 여관을 벗어나 더 큰 세상에서 살고 싶어 했다. 맥키에겐 멜리사를 뉴욕의 중심지에서 살게 해줄 충분한 돈이 있었다. 맥키는 자신의 외모에는 자신감이 있었다. 이제 50대를 바라보고 있지만, 웬만한 30대에게도 지지 않을 신체조건도 있었다.

혼자 지낸 시간이 많기는 했지.

맥키는 리볼버를 바지 속에 감추고 문을 살짝 열었다. 문밖에 있는 건 멜리사가 분명했고, 주변에 누가 숨어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들어와요.”

멜리사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쟁반 위에는 얇게 썬 호밀빵과 사과 두 조각, 오렌지 주스, 그리고 버터가 담긴 조그만 접시가 있었다. 멜리사는 쟁반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맥키를 바라봤다.

“저기, 맥키 씨. 방값을…”

“기다려요.”

맥키는 주머니에서 묵직한 지폐 뭉치를 꺼냈다. 1년 치 방값은 되어보이는 지폐를 본 멜리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맥키가 그 지폐 뭉치를 그대로 멜리사의 손에 쥐여줬을 때, 멜리사는 다리에 힘이 빠져 서있기도 힘들었다.

“멜리사 양. 부탁이 있소.”

맥키는 지폐를 쥔 멜리사의 작고 하얀 손을 두 손으로 꼭 붙잡고 말했다.

“다음 주 월요일 아침, 모든 짐을 챙기고 역 앞으로 나와주겠소? 뉴욕의 중심으로 데려가 멜리사 양의 꿈을 이뤄주겠소. 여관 주인에게 방값을 주고 남은 돈은 멜리사 양이 가지고 있으시오.”

멜리사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맥키는 멜리사의 이미에 입을 맞춘 뒤, 방문 바깥으로 돌려보냈다.

1889년

동쪽 창문에 새가 앉았다. 지브니는 침대에 누워 새를 바라봤다.

나를 위해 노래해 줘.

새는 아무 말 없이 다시 날아올라 사라졌다. 새 뒤에 감춰져 있던 아침의 태양이 지브니의 눈을 덮쳤다. 지브니는 몸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맥키는 몸을 일으켜 앉아 어제 남은 빵을 먹고 있었다.

“부족하면 더 가져올게요.”

지브니가 몸을 일으키고 이불로 드러난 몸을 가리며 말했다. 눈으로는 바닥에 있을 옷을 찾고 있었다.

“괜찮소. 실버폴 타운까지 갔다가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려면 지금 일찍 출발해야 하니까.”

지브니가 맥키를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돌아올 건가요?”

“아마도. 실버폴 타운은 함부로 묵을 곳이 아니라고 했잖소.”

지브니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실버폴 타운은 마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커다란 매음굴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있는 곳은 그런 곳이었다. 지브니는 옷을 대충 챙겨 입고는 빈 쟁반을 챙겼다.

“저 짐들은 뭐죠?”

지브니가 물었다. 맥키가 들고 다니는 짐들. 맥키는 어제 도착한 이후로 한 번도 가방을 열지 않았다. 맥키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떠돌이라오. 저 가방들은 내 삶이지. 그 안엔 비밀도 있고 하찮은 기억들도 있다오. 굳이 열어보고 싶지는 않지만, 항상 가지고 다녀야 하는 것들.”

“그렇군요.”

지브니는 테이블 위에 놓인 편지 뭉치를 보고 말했다.

“편지는 두고 가세요. 실버폴 타운은 일하는 여자들이 글을 읽고 쓰는 걸 싫어해요. 괜히 감춰뒀다가 걸려서 괴롭힘당할 수도 있어요. 제가 빌리에게 보낸 거랑 분류해서 나중에 엘리자베스가 찾아오면 전해 줄게요.”

맥키는 잠시 생각하더니 납득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브니가 문 앞에 섰다. 지브니는 고개를 살짝만 돌려 뒤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젯밤에는… 고마웠어요.”

지브니는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문을 닫으며 말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맥키는 닫힌 문을 말없이 바라봤다.

* * *

“엘리자베스? 진짜? 이 남자가 베스를 찾는다는데?”

입에 담배를 문 여자가 맥키를 보며 말했다. 옆에 있던 뚱뚱한 남자가 거들었다.

“베스를 찾다니, 이상한 취미를 가진 분이구만. 어이! 베스 어딨어? 손님 왔다고 전해!”

뚱뚱한 남자는 맥키를 작고 허름한 방으로 안내했다.

“선불이야. 그리고 베스는 보증금도 필요해. 무사히 살려서 남겨두면 보증금은 돌려주지.”

“손님이 누구야?”

뒤에서 나타난 엘리자베스 클랜턴은 처참한 몰골이었다. 얼굴은 해골 위에 피부만 얹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입술은 갈색으로 물들었고 이는 노랬다. 머리카락 사이로 빈대가 보였고 눈화장은 번져있었다. 가슴의 절반을 드러내고 있는 파란 드레스는 여기저기 얼룩이 묻어있었다.

맥키는 뚱뚱한 남자에게 지폐뭉치를 건넸다.

“그럼 손님, 좋은 시간 보내십쇼.”

방에는 맥키와 엘리자베스만 남았고, 맥키는 문을 닫았다.

“어떤 걸 원해?”

엘리자베스가 침대에 걸터앉아 드레스의 어깨끈을 내리며 말했다. 맥키는 문 앞에 선 채로 말했다.

“당신 남편 소식을 가져왔소.”

“뭐?”

엘리자베스는 침대에서 일어서서 맥키에게 다가왔다. 맥키는 드레스의 어깨끈을 올려주며 말했다.

“존 클랜턴의 부탁을 들어주러 왔소.”

“그 망할 새끼가 무슨 짓을 했는데?! 감옥에서 또 사람을 죽였어?!”

엘리자베스가 소리쳤다.

“당신에게 사랑을 전하며 새 옷을 전해달라고 했소.”

맥키는 몸을 숙여 가방에서 빨간 레이스 장식이 들어간 옷을 꺼내 엘리자베스에게 건넸다. 엘리자베스는 옷을 받아들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존이… 나한테 이걸 주라고 했다고?”

맥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가 옷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말했다.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난 그 양반 사랑한 적 없어. 그러니까 옷도 가져가. 필요 없으니까.”

맥키는 바닥에서 옷을 집어 들고 먼지를 털었다. 그리고 문 옆에 있던 옷걸이에 걸었다. 엘리자베스는 묵묵히 지켜보다가, 일부러 낄낄거리며 말했다.

“여기 손님으로 왔었는데 돈 좀 있어 보여서 낚시질 좀 해서 결혼했거든. 근데 열차 강도였다니. 망할 새끼. 열차 강도 부인이 될 바엔 차라리 여기 와서 하던 일 하는 게 나았지.”

“당신 아들은…”

“빌리? 허이구, 신도 매정하지, 여기서 10년을 일해도 아무 일 없었는데 그 놈이랑 같이 살았더니 1년 만에 애가 태어났어. 미친. 가랑이 사이에 십자가라도 심었나.”

맥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어디선가 담배를 꺼내 물고는 불을 붙였다.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니, 내 동생도 만났겠구만. 잘 있디?”

“당신 얘기를 하니 자책하며 눈물을 흘리더군. 존이 당신에게 보낸 편지를 맡겨뒀소. 여기선 글이 허락되지 않는다는군.”

“흥, 멍청한 년. 울긴 왜 울어. 말을 해줘도 알아듣질 못해. 그리고 편지? 필요 없어. 난 글도 제대로 못 읽는데 편지는 무슨.”

엘리자베스가 연기를 잔뜩 뿜었다. 그리고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존을 사냥꾼들한테 판 건 나라고 전해. 실버폴 타운에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데 돈이 필요했거든. 도대체 무슨 자책감에 그 년이 우는 건진 모르겠지만, 동생한테 전해 줘. 우는 여잔 남자한테 안 팔린다고.”

맥키는 엘리자베스의 코에 땀방울이 가득 맺힌 걸 보고는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냥 넘어갔다.

“존이 당신한테 남긴 게 하나 더 있소.”

맥키가 가방 깊은 곳에 손을 넣었다. 가방을 나온 맥키의 손에는 차갑게 식은 장미 한 송이가 들려있었다. 꽃자루 아래의 줄기에는 큼지막한 가시가 하나 돋아나 있었다. 맥키는 장미를 엘리자베스에게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장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실없이 웃기 시작했다. 웃음소리가 너무 커서 옆방에서 벽을 두드릴 정도였다. 엘리자베스는 한참이나 그렇게 웃고는 지친 듯 숨을 몰아쉬며 장미를 받았다. 그리고 말했다.

“아, 존. 정말. 못말려. 멍청한 건지 똑똑한 건지. 더 할 말 있어? 일 끝났으면 나가. 설마 진짜 아랫도리 위로하러 온 건 아니겠지?”

“내 할 일은 끝났으니, 여기서 나가지.”

맥키는 가방을 챙기고는 문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 혼자 남은 엘리자베스는 장미를 잠시 바라보더니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신발을 벗어 맨발로 장미를 밟았다. 가시가 발바닥을 찔러 피가 흘러나왔다. 엘리자베스는 울음과 웃음 사이의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1901년

맥키는 호밀빵에 버터를 바르고 조금씩 뜯어 먹었다. 버터가 평소보다 맛이 좋았다. 맥키는 멜리사가 따로 골라준 버터가 아닐까 하고 제멋대로 상상했다. 멜리사가 자기에게 관심이 있건 없건, 꼬박꼬박 방값을 내는 사람은 자신 밖에 없으니 그 정도 상상은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장미 가시에 찔린 손가락이 다시 따끔거렸다.

1889년

맥키가 말을 세운 곳은 록플라워 타운의 보안관 사무실 앞이었다. 맥키는 능숙하게 말을 내려와서는 가방 하나를 들고 보안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은 썩은 나무 냄새가 진동했지만, 시골 보안관 사무실치고는 깨끗했다. 보안관은 창밖을 보며 담배를 태우고 있었고, 부보안관 세 명이 테이블에 둘러 앉아 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

맥키를 발견한 부보안관 한 명이 일어서서 다가왔다.

“뭐요?”

“현상금 받으러 왔소.”

현상금이라는 말에 보안관이 반응했다. 보안관은 자기 책상으로 가서 앉더니 맥키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다른 한 손으로는 현상 수배범 명단이 정리된 파일을 서랍에서 꺼냈다. 보안관 책상 모서리에는 로렌스 길런이라고 적힌 명패가 놓여있었다.

“누구를 잡은 게요?”

맥키는 보안관 책상 반대편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조나단 클랜턴.”

보안관과 부보안관 모두가 맥키에게 주목했다. 보안관이 다시 물었다.

“누구를 잡았다고?”

“조나단 클랜턴. 두 달 전에 세인트웨이에서 탈옥해서 긴급수배가 내려진 자요. 이 마을 출신이니까 당신들이 모를 리는 없을 건데.”

길런 보안관은 표정을 바꾸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말했다.

“알지. 알고말고. 이 마을 사람들 모두가 존을 알지. 당신은 그걸 알고 이 마을 보안관인 내게 온 건가?”

“그렇소. 내 룰이지.”

룰이라니. 보안관은 어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존은 어디 있지? 당신이 타고 온 말이 존은 아닐 거고.”

맥키는 가방을 들어 올려 보안관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가죽 가방은 차가운 물에 젖어있었다.

“존은 여기 있소.”

길런 보안관이 눈짓을 보내자 부보안관들이 다가와 가방을 열었다. 보안관은 의자에서 일어나 가방 속을 살폈다.

가방 속에는 얼음이 든 주머니가 가득했다. 대부분은 녹아내렸지만, 여전히 냉기를 유지했다. 얼음 주머니들 사이로 새하얀 코가 보였다. 부보안관들이 얼음 주머니를 모두 꺼내자 남자의 머리 하나가 나왔다. 이마에는 총알구멍이 하나 뚫려있었다.

길런 보안관은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비록 수염이 가득했고 얼굴에 주름도 많이 늘었지만, 가방 속 얼굴은 존 클랜턴이었다. 보안관이 당혹스러움에 말을 잃은 사이, 맥키가 입을 열었다.

“아직 여름 열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아서 말이오, 시체를 들고 오기엔 부담스럽더군. 그래서 머리만 잘라왔소.”

분노가 길런의 가슴 속에 치밀었지만, 보안관이 되기까지 그는 감정을 자제하는 연습을 반복해왔다. 어쩌면 그는 모든 게 오늘을 위해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보안관이 물었다.

“바운티 헌터 허가증은?”

“여기 있소.”

맥키가 가슴 주머니에서 곱게 접힌 서류 한 장을 꺼냈다. 보안관은 서류를 살피더니 다시 접어서 맥키에게 돌려줬다. 그리고 잠시 크게 숨을 내쉬고 말했다.

“지금은 현금이 없어.”

“수표라도 좋소. 정부가 발행한 수표만큼 확실한 것도 없지.”

“시간이 좀 걸릴 거요.”

“기다리겠소. 저녁에 다시 오지.”

맥키는 사무실 밖으로 나가 다시 말을 올라탔다. 그리고 지브니의 집으로 향했다.

1901년

맥키는 바닥에 쓰러져 신음했다. 온몸의 혈관이 터질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구역질이 났지만, 역겨운 타액만이 흘러나올 뿐, 목구멍에서 쏟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은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1889년

지브니가 보안관의 전보를 받고 오리엔탈 살룬을 뛰쳐나와 집으로 향했을 때, 맥키는 이미 지브니의 집에서 빌리와 함께 있었다. 지브니가 문을 열고 처음 목격한 것은 거실 의자에 앉아 있는 맥키와 그의 품 안에서 잠든 빌리였다.

“당신…, 당신이….”

지브니의 얼굴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맥키는 조용히 일어나 빌리를 의자에 눕혔다. 그리고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소.”

“당신이 존을… 빌리의 아빠를 죽였어!”

“애가 들으면 어쩌려고?”

지브니가 입을 닫았다. 얇은 입술 주변으로 근육이 뭉치고 주름이 졌다.

저 새끼를 쏴버리고 싶어.

하지만 마스터는 지브니가 윈체스터 라이플을 들고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맥키를 쏘기 위해서가 아니라 빌리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마스터는 믿어주지 않았다. 지브니가 가져올 수 있었던 건 자그만 주머니칼 한 자루뿐이었다.

“도대체, 왜? 뭐하러 이 마을에 온 거야? 그렇게까지 우리한테 존이 죽은 걸 알리고 싶었어? 빌리에게 아빠가 돌아오지 못할 거란 걸 알리고 싶었어?”

지브니는 목소리가 커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지브니의 목과 이마는 땀에 젖어있었다. 반면 맥키의 피부는 건조했고, 목소리는 더욱 말라붙어 있었다.

“존과의 약속을 지킨 거지. 그게 내 룰이라오. 내가 죽인 범죄자의 마지막 희망은 가능하면 들어주는 것. 그리고 그의 목은 그의 고향에 돌려주는 것.”

“헛소리 하지마. 존이 자기를 죽인 놈한테 고향에 가서 아들을 찾아달라고 할 리가 없어.”

맥키가 지브니에게 다가왔다. 맥키의 양손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지브니는 그가 얼마든지 자기를 공격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총잡이의 근육은 어젯밤 지브니 본인이 충분히 확인했으니까. 지브니는 치마 속에 감춘 주머니칼의 무게감을 다시 확인했다.

맥키는 지브니 바로 앞에 서서 말했다.

“존은 내가 쐈다는 걸 몰라. 등 뒤에서 쐈거든. 그리고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다가갔지. 지브니 양이 말한 대로, 자길 죽인 사람한테 이것저것 털어놓을 사람은 없으니까. 내 나름대로의 기술이라오.”

“기술이 아니라 속임수지.”

“그게 그거라오.”

지브니는 더 참을 수 없었다. 감춰줬던 주머니칼을 꺼내 휘둘렀다. 어차피 맥키는 막아내겠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맥키는 가볍게 피했고, 지브니의 손목을 비틀어 칼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여자 손에 피를 묻히면 안 되지. 그리고 지금 당신이 범죄자가 된다면, 빌리는 어떻게 어쩔거요? 게다가, 사실상 존은 당신과는 상관없지 않소? 언니의 남편이니. 존의 아들을 제 자식처럼 키웠다고는 하지만, 당신에게 날 해칠 권리는 없소.”

맥키는 의자 위에서 자는 빌리를 보며 말했다.

“빌리라면 가능하지.”

“그 앤 내버려 둬!”

“언젠가, 빌리가 자기 아빠에 대해 알게 되면 알려주시오. 나 데이먼 맥키가 조나단 클랜턴을 죽였다고. 어른이 된 빌리가 날 찾아온다면, 정정당당하게 맞서 주겠다고.”

맥키는 잡고 있던 지브니의 팔을 밀어버렸다. 지브니는 바닥을 구르며 쓰러졌다.

그리고 빌리가 잠에서 깼다.

“무슨 일이야…?”

“빌리! 아무것도 아니야!”

지브니는 서둘러 일어나 빌리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빌리는 지브니의 어깨너머로 애써 고개를 내밀었다.

“맥키 아저씨!”

빌리가 소리쳤다. 지브니는 맥키를 바라봤다. 세 사람의 시선이 이어졌다.

맥키는 빌리를 보며 미소지었다. 그리고 오른손 검지로 관자놀이부터 오른쪽 눈 끝을 그으며 마지막으로 손가락 끝을 빌리를 향해 뻗었다.

그리고 문밖으로 사라졌다.

지브니는 빌리의 얼굴을 다시 감싸 안았지만, 빌리도 맥키의 손가락을 본 게 분명했다. 지브니는 부디 빌리가 그 의미를 모르기를 기도했다.

그 사인은 복수를 기다린다는 의미였다.

1901년

노크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맥키는 힘겹게 고개를 돌려 발소리의 주인을 올려봤다.

한 사람은 멜리사 조지였다. 멜리사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하지만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고통스러워하는 맥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맥키 아저씨.”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1889년

지브니는 식탁에 앉아 편지 뭉치를 묶고 있던 끈을 풀었다. 낡은 종이들이 바스락거리며 식탁 위로 흘러내렸다.

맨 위에 놓인 편지가 가장 최근이었고, 아래로 갈수록 오래된 것이었다. 최근에 쓴 절반은 편지지만 있고 봉투는 없었다. 오래된 편지들은 봉투에 넣어져 밀랍으로 봉인까지 되어 있었다. 처음엔 정말 보내려고 했지만, 보내지 못한다는 걸 알고는 봉투를 포기한 것이었다.

지브니의 시선은 가장 오래된 편지의 봉투에 머물렀다. 그 편지 봉투에는 정겨운 글씨체로 수신인이 적혀있었다.

가시 위에 핀 나의 아름다운 장미에게.

지브니는 고개를 숙이고 울었다. 최대한 숨을 죽여 울었지만, 계단에 있던 빌리가 그 소리를 듣고 부엌으로 들어왔다.

빌리는 울고 있는 지브니의 어깨에 자그만 손을 얹었다. 그리고 말했다.

“지브니, 왜 울어?”

“빌리, 지브니라고 부르지 말랬잖아.”

지브니가 양손에 얼굴을 묻은채 말했다. 빌리는 잠시 입을 앙다물더니 걱정스런 표정을 하며 다시 말했다.

“로즈 이모, 왜 그래요? 왜 울어요? 맥키 아저씨가 다시 안 돌아온대요?”

로즈 지브니는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해서는 안됐다. 로즈는 입을 굳게 닫았다.

1901년

로즈 지브니는 바닥에 떨어진 리볼버를 주워들고 탄알을 모두 바닥에 떨어뜨렸다. 탄알 몇 개가 바닥을 구르더니 맥키의 발끝에서 멈췄다. 로즈는 멜리사에게 맥키가 준 것보다 더 묵직한 지폐 뭉치를 건네며 말했다.

“수고했어요, 멜리사. 이제 나가봐요. 뒤처리는 제가 할게요. 걱정하지 마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다 제가 뒤집어쓸 거니까.”

“더러운 새끼.”

멜리사의 입에서 거친 말이 나오자 맥키는 신음하는 와중에도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더러워.”

멜리사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았다. 조금 전 맥키가 입을 맞춘 곳이었다. 멜리사는 손도 빈틈없이 닦은 뒤 손수건을 맥키의 머리 앞으로 던졌다. 그리고 문밖으로 사라졌다.

로즈는 조금전까지 맥키가 앉아 있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맥키의 눈을 보며 말했다.

“걱정 마. 독약은 아니야. 그저 잠시 고통스럽게 마비시킬 뿐이지.”

로즈는 주머니에서 오래된 편지 뭉치를 꺼냈다.

“가시 위에 핀 아름다운 장미에게. 존이 내게 보낸 편지였어. 존이 구애했던 건 엘리자베스가 아니라 나였거든. 하지만 그때의 난 멍청하게도… 실버폴 타운에 있는 언니를 구하고 싶었어. 유일한 가족이었으니까.”

로즈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허리에 차고 있던 커다란 가죽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빨간 레이스가 장식된 드레스였다. 맥키는 그 옷을 기억했다. 로즈는 그 자리에서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지고 드레스를 올려 입었다.

“그때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어. 존에게 언니를 구해달라고 했거든. 근데 포주는 여자를 사서 결혼하지 않는 이상 보내줄 수 없다고 했지. 그래서 존은 포주 앞에서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하고 결혼했어. 날 위해서. 다시 이혼하면 될 거라고 생각하고.”

로즈는 드레스의 치마 주름을 가다듬었다. 눈 위에 핀 한 떨기 장미를 떠올리게 하는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하지만 포주는 존을 의심했고… 포주의 감시를 끊기 위해선 아이를 가질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나를 사랑하는, 내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내 언니를 임신시키라고는 할 수 없잖아. 언니 몸은 이미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태였고.”

맥키가 거칠게 기침했다. 얼굴 주변은 침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어. 엘리자베스는 임신한 연기를 했고, 난 부풀어 오르는 배를 감추며 오리엔탈 살룬에서 일했지. 거긴 카운터도 높고 두꺼운 앞치마로 배를 가려도 아무도 신경 안 쓰니까. 마을 사람들이야 일부러 눈을 감아줬지만.”

로즈는 맥키에게 다가갔다.

“존이 체포되고 포주는 엘리자베스를 찾아와 범죄자와의 결혼은 무효라며 사기로 고소한다고 했지. 아들인 빌리도 호객꾼으로 데려가려고 했어. 엘리자베스는, 내 언니는, 자발적으로 실버폴로 돌아가겠다며, 대신 빌리는 내버려 두라고 했고. 완벽했지. 포주가 보기엔 아들을 지키려는 어머니처럼 보였으니까. 당신이 우리 마을에 오기 전까지, 모든 사람이 빌리를 지켜주고 있었어.”

로즈는 맥키의 얼굴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빌리는 내 아들이야. 모두 날 로즈 지브니라고 불렀지만 내 이름은, 내 마음 속 진짜 이름은 로즈 클랜턴.”

맥키는 로즈의 손에서 반짝이고 있는 주머니칼을 봤다. 본 적 있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넌 내 남편을 죽였고, 내 아들의 아버지를 죽였으며, 또 내 아들을 복수귀로 만들려고 했어. 그리고 나를 기만했지.”

로즈가 주머니칼을 맥키의 허벅지에 찔러넣었다. 맥키는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가슴이 발작을 일으키는 통에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칼날은 살 깊숙이 숨겨져 있던 동맥을 갈랐다. 로즈가 칼을 뽑자 굵고 새빨간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맥키는 자기가 고통 속에 죽어가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로즈는 벗어놓은 옷가지와 가방, 편지 뭉치, 그리고 칼을 챙기고 방을 나섰다. 죽음을 앞둔 맥키에겐 조금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로즈는 방문을 닫고 열쇠로 잠갔다. 그리고 방해하지 말라는 쪽지를 문에 붙였다. 맥키는 완벽한 고독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문밖에 선 로즈의 발치에는 장미 한 송이가 놓여있었다. 로즈는 드레스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우아하게 허리를 숙이고 팔을 뻗어 장미를 집어 올렸다. 로즈는 잠시 장미를 바라보더니 가방에서 깨끗한 편지봉투 하나를 꺼냈다. 이탈리아에서 대학을 졸업한 빌리가 현지의 유명한 전신회사에 취직했다며 기뻐하는 내용의 편지였다.

편지는 빌리가 이제 로즈에게서 독립해 어엿한 어른이 되었다는 신호였다. 로즈는 한 달 전 편지를 읽자마자 그동안 미뤄왔던 일을 시작했고, 이제 그 일이 끝나기까지는 데이먼 맥키의 남은 목숨 만큼의 시간만 남았다.

로즈는 편지를 꺼내 맨 윗줄을 읽었다.

나의 영원한 장미, 로즈 이모에게.

로즈는 장미 꽃자루 아래에 있는 가시를 잡고 손가락에 힘을 줬다.

가시는 조용히 줄기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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