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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텔링:춘향
– 기괴한 시대의 기괴한 사랑 –

윤여경

기괴한 시대였다.

시간 이민의 시기는 보통 혼란의 시대가 적절했다. 현종 치하는 소빙하기 시대였다. 경기도와 황해도에 8월에도 서리가 내리고 1650년에는 동해도 얼어붙었다. 아사한 사람들이 거리를 매우고 녹을 받지 못하는 관리는 도망가고 도적이 들끓었다. 시간이민자들이 정착하기 좋은 혼란기였다.

현종시대에 정착한 시간 이민자들은 시간폭풍에서 죽을 위험을 감수하고 건너왔다. 먼 미래. 인류는 점점 진화했지만 전쟁이 잦고 자원이 부족해서 살기가 힘들었다. 불안정한 정치 상황들 때문에 행성 이민도 어려웠다.

정착한 많은 시간 이민자들은 서로서로 사돈을 맺어서 능력을 대대로 이었는데 몇 십 년이 지나 숙종시대에 이르러서는 시간이민자들의 전성기였다. 조정의 보직들을 모두 차지했다. 바야흐로 기괴한 시대가 열렸다.

나라는 위기에 처하고 기근이 만연했다. 배고파서 이웃집의 아이를 바꿔먹는 일이 생기고 길바닥에는 아사자들이 생겼다. 하지만 시간이민자 세도가들의 힘은 더 세어졌다. 그들은 새로운 힘을 무기로 전쟁터 같은 현실을 장악해갔다. 어떤 힘이 있냐면 기본으로 염력에 도술은 옵션이었다.

보름달이 뜨면 양반가 사랑방에서 늑대울음소리가 나거나 때때로 계집종이 피를 빨려서 하얗게 질려 죽어있는 것도 새로울 일이 없게 됐다. 흡혈종, 늑대종, 여우종들은 그렇게 인간들을 해치우면서도 조금의 권력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느라 바빴다.


계집의 이름은 향. 그녀는 투명하게 태어났다. 산속 깊은 곳의 샘보다도 더 투명해서 비도 눈도 조용히 비켜갔다. 햇빛이 밝으면 그녀가 선 자리에 언뜻언뜻 작은 무지개가 비치곤 했다.

그녀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여인이었다. 잊을 만하면 한번 씩 그녀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취객들이 있긴 했다. 어떤 나무꾼은 계곡에서 목간을 하고 있는 그녀를 봤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선녀를 보았다는 것만큼 믿을 수 없어하며 웃어 넘겼다.

몸종들이 그녀를 싸고 데리고 지나갈 때 그 틈으로 좋은 향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맡을 수 있었다. 한번 그 향을 맡은 이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잊지 못했다. 가슴이 아련해오며 하루 종일 열병에 라도 걸린 것처럼 지독한 그리움을 앓았다. 그 향을 다시 한 번 맡고 싶어서 동네 총각들이 그녀의 집 앞을 서성거렸다. 날이 좋을 때면 마을 어귀마다에 희미하게 머물던 설명할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는 향은 치맛자락을 나풀거리며 길을 돌아 지상 최고의 미녀를 떠올리게 했다. 그녀의 인기를 하늘로 치솟게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본 사람이 하나라도 생긴 건 아니었다. 그녀가 옷을 입으면 옷도 투명해져서 다시는 보이지 않았고 노리개를 채우면 그것도 투명해져버렸다. 마치 원래 없었다는 듯이.

지체 높은 이와의 사이에서 태어나 버려진 퇴기의 딸이 투명하게 태어난 것은 어찌 보면 운이 좋은 일이었다. 소문만 무성한 아름다움은, 천리안과 도력을 가진 높은 양반네들만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그녀와 인연을 맺을 사람은 분명 대단한 양반네 일거야. 사람들은 기대감에 수근거렸다.

향의 어미는 월매였다. 전라도 지방 남원에 이름난 기생이었다. 기생들은 보통 반인반귀라서 보통사람들은 한 번 보고 홀려서 재산을 탕진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세도가의 사람 정도의 공력이 되면 상대가 되었다. 성참판이 그녀를 들어앉히고 나니 월매는 자식욕심이 생겼다. 시간이민자의 유전자를 아끼기 아쉬웠다. 월매는 공력을 다지고 좋은 공기를 마시며 스트레칭과 마인드트레이닝을 하면서 우주와 채널링을 해서 좋은 자식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어느날 태몽을 꿨다. 블루블루한 비행체를 타고 내려온 여인이었다. 태몽도 놀라웠지만 낳아보니 더 놀라운 아이였다. 투명하다니, 이래서야 예쁜지 아닌지 말하고 다닐 수가 없었다. 설마 그래도 세도가의 유전자인데 보이지는 않아도 뭐라도 좋을 것이 아닌가, 월매는 생각했다.

“무슨 향기가 난다고요, 마님?”

“이 아이에게선 봄의 향기가 난다.”

여종의 물음에 월매는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여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했다. 딸기향도 참기름향도 아닌 봄의 향이라니 그것 참 들어보지도 못한 향기네. 작명은 성공적이어서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봄의 향이라니 외모도 봄처럼 싱그럽겠지.


향이 열다섯 살 되던 해였다. 상류층 거주지인 삼청동의 세도가의 한림, 이한림 일가가 지방파견을 떠나게 되었다. 이는 과천, 금산 등을 거쳐 직급이 수직상승하더니 드디어 남원부사로 지역유지들을 통제하는 중앙정부의 노른자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한양출신인 그가 지방 유지들과의 도력 배틀에서 이기자 언변 있는 선비들은 입을 다물었고 백성들은 알아서 고분고분해졌다.

때는 봄. 바야흐로 짝짓기의 계절. 남원진사의 절대세력에 맞서 굳이 시위를 해봤자였고 청춘들이 한가로운 때였다. 광한루 오작교가 유명하다는 소문을 들은 한림의 아들인 풍모 좋고 능력 있는 이룡 도령은 방자를 앞세워 외출을 나섰다. 그네가 공중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고 호기심 많은 이도령이 명령했다.

“ 저 건네 오락가락 히뜩히뜩 얼른얼른 하는 게 뭔지 가서 보고 오너라.”

“ 물건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기생 월매 딸 춘향이란 계집아입니다. 제 어미는 기생이오나 춘향이는 도도하야 기생구실 마다하고 교양이 넘쳐서 여염처자와 다름이 없다는 소문입니다.”

“훌륭해.”

“춘향이 보이십니까?”

향이 탄 그네를 보며 이도령이 이렇게 말했을 때 몸종은 소스라쳤다.

“제가 보인신단 말이십니까?”

춘향의 반응도 같았다.

“참이지. 그래 난 네가 보이지. 봄이 되어 내 마음이 바람을 움직이고 그걸 보았으니.”

이도령은 시인처럼 뜬구름 같은 말을 잘 했다. 아무도 제대로 해석하기 어렵고 그래서 마음대로 해석하게 되는 그런 말들이었다. 향의 취향에 맞았다. 그녀의 존재 또한 사람들이 해석하기 나름이었으므로 왠지 그런 그의 애매한 대화방식에 그녀의 마음이 열렸다. 둘은 마음의 대화에서 몸의 대화로 이어가며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녀가 드디어 룡을 짝으로 골랐다는 소문에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만한 인물 정도여야지, 하고.

그녀의 투명함은 이룡 도령의 존재감을 수직상승시켰다. 사람들은 아무도 보지 못하는 투명한 처자와 맺어진 그를 특이하고 신성한 도력을 가진 자로 숭배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조정에까지 그의 도력이 소문이 났다.

하지만 문제가 곧 생겼다.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간 이도령은 소식 하나 없이 돌아오지 않았다. 한해가 지나고 세기의 로맨스를 기대했던 주위 사람들의 불안감이 커졌다 그리고 마침내 일이 터졌다.


변은 남촌 출신이었다. 권력의 영향권에서 떨어진 운명이었고 혼인도 하지 않았다. 뒷바라지를 해야만 하는 몰락한 양반네에게 시집갈 사람은 없었다. 나이 사십 세에 급제하여 지방수령직을 얻은 그는 밋밋한 인생을 살았다. 더 이상 오를 관직 따위는 불투명했다. 지방수령까지가 그의 한계였다. 그냥 이렇게 한 평생 살다가는 거였다. 별 뾰족한 수 따위 대단한 야심 따위 없었다. 있어도 안됐다.

밤에 보는 관아는 낮과는 달랐다. 밤이 내린 기와에 횃불이 불안하게 일렁였다. 달도 뜨지 않은 밤이었다. 혈색이 창백하고 묘하게 입술이 붉은 변은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서책을 읽던 중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간이 멈춘 듯 주위는 조용했다. 서까래도 담도 높은 미루나무도 멈춰있었다. 매서운 겨울바람마저도 숨을 죽였다. 무슨 일이 벌어지기라도 기대하듯.

굉장한 소음이 났다. 문짝이 부서지고 궤가 날아가는 굉음이었다. 하지만 노비들이나 관군들 중 아무도 살피러 오는 자가 없었다. 드디어 변의 눈앞에 그들이 나타났다.

지역 유지인 김진사와 그의 노비들이었다. 반은 죽고 반은 살아있는 것들은 빗자루라고 불리었는데 김진사들은 빗자루들을 때때로 데리고 다녔다. 빗자루들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빛들. 살아있는 무엇이든 잡아 삼킬 듯 다가왔다.

어디선가 달려온 변의 어린 종이 대신 막아섰지만 그것도 잠시 뿐 길길이 뜯겨 먹혔다.

그걸 보고도 변은 안색하나 변하지 않았다. 변은 기품 있게 김진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앉으라는 뜻이었다. 김진사는 크게 웃었다. 그러더니 눈에서 광채를 내었다. 아무데로나 향하던 빗자루들의 눈이 진사에게 집중하는 듯싶더니. 괴로워하기 시작하며 구석자리로 가서 앉았다.

– 소문 그대로 그려.

변이 말했다.

– 여기 내 소박한 정성이요.

진사는 여러 겹으로 묶인 엽전꾸러미 삼만 냥을 그 앞에 던졌다.

– 서로 돕자는 거요.

– 내 종이 내 눈앞에서 죽었소. 이런 게 정성이라면 나도 정성을 보여줘야 하겠소?

변은 쓰러져있는 종을 가리켰다.

– 손님을 이런 식으로 내쫓나.

– 아니오. 농이요. 정성은 잘 받겠소.

엽전 꾸러미를 챙기는 변의 손이 분노로 인해 살짝 떨렸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아야했다. 수많은 세월동안 변은 돈을 벌지 못했고, 병든 노모가 지키는 본가의 가산은 거의 바닥을 쳤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진사는 일어났다. 진사의 저고리 끝으로 털이 숭숭한 날카로운 손톱이 보인다 하더니 순식간에 책상을 긁어 내려서 커다란 흠을 만들었다. 변이 고개를 들어보니 진사는 이미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로 변해 쏜살같이 방을 뛰어나가고 있었다.

지역유지들은 기득권을 놓지 않고 부패를 감추기 위해 은근히 관아에 부임해오는 이들을 압박해왔다. 변은 쉽사리 농락당하지는 않았고 그 걸 높이 산 중앙정부에서 남원으로 변을 보냈던 거였다. 하지만 그건 중앙정부가 농락당한 거였다. 변은 철저히 지방유지들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일종의 쇼를 한 것뿐이었다.

– 남원은 만만치 않은 곳입니다. 호랑족 뿐 아니라 죽은 사람을 묘에서 꺼내서 쓰기도 합니다. 흡혈의 최면술로도 통하지 않는 죽은 사람들 말입니다.

이방이 말했다. 중앙정부의 힘이 닿지 않는 내륙지방으로 내려올수록 지방세도가의 힘은 너무나 셌다.

때는 조선시대, 계급은 태어나서 정해지던 때였고 꿈도 정해지던 때였다. 혼자만의 취향은 무시되었다. 상관없었다. 뭔가를 바꾸겠다는 마음은 태어나자마자 버린 그였다.

부임하고 며칠 동안 신나게 놀았지만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었다. 그의 인생에 영원히 새로운 일 따위 없을 거였다.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속에 깊은 좌절감이 쌓여가고 있었다.

– 보이지 않는 여자라고? 그게 무슨.......

변은 호기심이 생겼다. 앞으로 놀랍고 신기한 일 따위는 평생 없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변은 향이 자신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들었다.

상관없었다. 곤장 몇 대 쳐서 돌려보낼 생각으로 그녀를 맞았다. 하지만 곤장을 치려고 누운 그녀의 몸은 보이지 않았다.

“저 년에게서 묘한 향기가 난다고?”

변이 물었다.

“국화꽃향기입니다. 분명히.”

“아니에요. 대나무 숲 향입니다.”

그녀에 대한 향기를 표현하는 사람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변은 아무 냄새도 못 맡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선천적으로 냄새를 잘 맡지 못하는 병이 있었다. 향으로 사람을 홀린다고? 변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묻겠다. 내 수청을 듣겠느냐?”

변이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정말 나를 거역할 셈이냐?”

변의 목소리가 커졌다. 향은 여전히 답을 하지 않았다.

한 대, 두 대, 세대. 곤장을 쳤지만 그녀는 비명 하나 지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진짜로 곤장대에 누워있는지 만져보라고 명령할 정도였다.

가을 햇살은 밝게 비쳤다. 죽어가는 나뭇잎들이 하나둘씩 창백한 모습으로 곤장대 위에 떨어졌다. 나무로 만든 십자가 모양의 곤장대는 오래된 것이라 추레하기만 했다.

그녀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마치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그리고 죽고 나서도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마치 자신처럼 말이다. 묘비 하나 그럴듯하지 않을 자진처럼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녀.

네 대, 다섯 대, 여섯 대.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돌아오지도 않을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그녀의 생각이 우습게 느껴졌다.

‘봄의 향이라고? 이런 추운 겨울에 계속되는 계절에. 무슨 봄이 온다고.’ 변은 속으로 비웃었다.

그녀에게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변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뭐라 했느냐?”

“나는 싫다고 했소.”

조용하지만 당당한 목소리였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변은 크나큰 분노를 느꼈다. 이런 보잘것없는 기생의 딸 따위도 자신을 무시하다니. 그녀의 작고 여린 목소리는 그에게 천둥처럼 느껴졌다. 하늘이 자신에게 내뱉는 말 같았다.

곤장의 수는 늘어났다. 변은 바로 옆에 서서 그녀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 분이 풀릴 때까지 곤장을 칠 생각이었다.

“뭐라고 다시 말해보아라.”

변이 물어도 이제 그녀는 기절했는지 답을 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보라고.”

변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만할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마치 그녀의 대답이라도 한 것처럼 변의 얼굴에 따스한 물 같은 게 튄 것을 느꼈지만 만져보아도 보이지는 않았다. 비릿하고 따스한 그 어떤 것. 그녀의 피였다.

마치 그녀가 대답대신 피로서 항변한 것 같았다.

변은 그때 생애 처음으로 향을 느꼈다. 형언할 수 없는 향기였다. 피의 향이었다. 얼굴에 묻은 피를 손으로 문질러서 냄새를 맡아보았다. 향이 느껴졌다. 비릿하고 슬픈 향. 하지만 고고하고 순결하고 향그러웠다.

변은 옷소매를 킁킁거렸지만 역시 다른 것은 아무것도 냄새 맡을 수 없었다. 단지 한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 향은 자신에게서는 절대로 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향일거라는 거였다.

평생 아무 향도 느낄 수 없었던 변은 향을 맡을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흥분은 점점 더 커졌다. 낮이면 약간의 고문으로 향을 맡을 수 있었지만 감질나기만 했다. 밤이면 그녀에 대한 이상한 그리움은 점점 더 거세졌다. 몸을 섞으면 말을 섞으면 그리움이 해결될 것도 같았는데 그녀는 여지를 주지 않았다.

한 달 동안이나 이것저것 보내서 구걸하고 협박하고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대신 낮에 행해지는 고문은 점점 더 강도가 세어졌다.

– 이러다가 사람 죽이겠습니다.

하루는 월매가 소리치다가 쓰러졌다.

– 세게 쳐라.

그는 이 말을 반복했다. 그녀는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변은 깨달아야만 했다. 자신의 눈에 그녀가 안 보이는 게 아니라 그녀에게 자신의 존재가 안 보이는 거였다. 무엇을 해도 그녀는 그를 보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고통과 피의 향만이 둘을 이어주는 소통의 매개였다.

구경하려고 모여든 사람들은 그녀에게 동정을 느꼈다. 그들은 춘향이 자신들과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 또, 향을 불러내래. 약주 한잔 걸치셨나보네.

사람들은 점점 더 그의 행동에 치를 떨기 시작했다. 지역 유지들도 더 이상 그의 행동을 감싸줄 수 없었다.

– 내일 룡이 온다는 정보요. 이제 그만 계집을 놓아두시오. 자네에게 큰 벌을 줄 수밖에 없소.

김진사가 마지막으로 언질을 주었다.

이제 향은 이도령에게 갈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변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져 가고 있었다.

– 마지막으로 묻는다. 정말 나를 거역하겠느냐?

그의 물음에 그녀가 마지막으로 대답했다.

– 나는 서방님을 기다리고 있소.

그게 끝이었다.

변의 칼날의 끝에 그녀가 스러졌다.

이도령은 포박당한 채 무릎꿇고 있는 변에게 한걸음씩 다가갔다. 서두를 필요를 느끼지 않는 여유가 느껴졌다.

– 나를 죽이시오. 살인죄요.

변이 말했다.

– 왜 춘향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요?

룡의 말은 느긋했다.

– 몸을 만져보았을 거 아니요. 심장이 뛰지 않소.

– 글세. 잘만 뛰던데.

– 무슨 수작이오? 장례식도 치르지 않을 생각인거요?

변이 소리쳤다.

그러자 룡은 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 죽은 게 또 무슨 대수요. 원래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사람인 것을. 향은 내 것이요. 영원히.

그제야 변은 룡도 그녀를 보지 못하는 것을 알았다.

– 내가 죽였소. 향을 내가 죽였다고.

변이 사방에 대고 소리쳤다. 놀란 이방이 향의 몸을 만지려고 하자 룡이 막아섰다.

– 내 명 없이는 아무도 건드리지 마라.

– 하지만 죽었다고......

이방의 말에 룡이 천천히 향의 가슴에 손을 대었다.

– 다시 확인하지만 잘 뛰고 있소. 이미 의원을 불렀으니 조치하겠소.

룡은 조용히 말했다.

변의 살인죄는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다. 룡이 향과 혼인하기 위해 복수를 저버렸기 때문이었다. 룡이 주재한 한 시간도 안 되는 졸속 재판 뒤에 변은 두 손을 뒤로 묶여 끌려갔다. 죄목은 탈세였다.

향이 어디로 갔는지는 월매도 알 수 없었다. 룡은 그녀가 안정을 위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요양을 한다고 했다. 일년 뒤에 룡은 한양에 별채를 직접 지어서 향을 기거케 결정했다고 했다.

혼인식은 성대했으나 아무도 향과 대화하지 못했다. 그 후 아무도 향과 대화했다는 사람이 없었다. 향은 제사에도, 집안대소사에도 참여하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먹지도 않았다.

하지만 룡이 그녀를 볼 수 있었으므로 그녀의 존재는 인정됐다. 그녀를 꽃가마에 태울 때도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좋은 향기를 맡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룡이 사는 동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로 알려졌다.

그후 수십 년이 흘러가면서 소빙하기가 끝나자 봄은 다시 따스해졌고 기근은 줄어들었다. 사람들은 점점 살만해졌다. 왕권이 세지면서 시간이민자 세도가들이 처단되기 시작했다. 변 또한 중앙정부의 말단직에서 처단되었다.

변은 그 후 가족과도 헤어져 팔도를 헤맸다. 수십 년 후 어느 날 룡이 사는 한양의 한 마을을 지나다가 물었지만 향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룡이 죽고 나자 향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룡의 묘에서 좋은 향이 난다는 사람들의 소문이 돌았고 그녀가 룡의 묘 앞에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비석이 하나 세워졌다.

변은 룡의 묘를 알아냈다. 행색은 초라하고 얼굴에는 검댕이 묻어있는 차림이었던 그는 근처 개울가에서 얼굴을 씻고 옷을 단장한 뒤 묘를 찾아갔다.

룡의 묘 옆에는 춘향의 묘비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 대신 이몽룡의 처,라고 써있는 묘비였다. 손질이 잘되어 말끔한 묘비였다. 변은 매끄러운 묘비를 한번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 아래 정말로 그녀가 묻혀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잠시 바라보다가 그 앞에 누웠다가 잠이 들었다. 너무 피곤했다.

한나절 뒤에 변은 따스한 봄 햇살이 내려 쬐는 오후에 잠이 깼다. 주위에는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고 초목에 물이 잔뜩 올라와있었다. 그리고 그는 희미하게 어떤 향을 맡았다. 그가 기억하던 피의 향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서 역한 냄새가 나는 것을 느꼈다. 늙어 도력을 잃어가면서 그는 보통사람처럼 모든 향을 맡을 수 있게 되어갔다.

춘향의 피의 향은 초목이 푸르른 인생의 봄. 그런 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봄에 피는 꽃들의 향. 새들이 짝짓고 나무가 살아나고 따스해지는 봄의 향. 그건 수십 년 전. 그가 젊었을 때 느꼈던 비릿하고 아련하게 슬픈 피의 향이었다.

– 나는 싫소.

그녀를 고문해서만 얻을 수 있었던 그녀의 말 한마디였다. 변의 인생을 거부하고 변을 거부했던 그녀의 봄 같은 성정을 사랑했다면 사랑한 거였다. 변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녀를 죽여서라도 소유하고 싶었던 그 봄의 향. 그리고 그래도 얻지 못한 그 한. 변은 자신의 실패가 이제 세상에서 지워진다는 게 안심이 되었다. 그가 죽으면 그의 기괴한 사랑을 조롱하거나 기억할 사람도 없었다.

그는 발길을 먼 곳으로 향했다. 아주 먼 곳으로. 그녀의 아름다운 향이 자신의 초라한 마지막에 닿지 못할 곳으로.

변이 떠나고 몇 년 후, 룡의 묘에서 향이 난다는 소문은 사라졌다. 아무런 향도 나지 않는 묘에서 사람들은 한 가지 이야기만 기억했다. 향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였고 늠름한 룡과 사랑을 이루었다는 이야기였다.

기괴한 시대는 끝났다. 그때가 얼마나 추웠는지, 사람들이 얼마나 극악했는지, 길바닥에 쓰러진 아사자의 옷을 벗긴 기억이나, 지는 꽃잎같이 떨어지던 춘향의 비명소리, 이웃집 아이의 맛이 어땠는지를 기억하는 노인들은 모두 그 기억들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새롭고 따스한 봄의 세상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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