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에일-르의 마지막 손님

해도연


오징어먹물 스파게티

“오늘도 수고했어.”

집 안으로 들어와 현관문을 닫기도 전에 검은색 앞치마를 입은 아내가 부엌에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달려와 말했다. 그리고는 비닐장갑을 낀 손을 바깥으로 돌리며 내 어깨를 사뿐히 안아줬다. 아내의 하얀 목에서 며칠 전 사줬던 라벤더 향수의 향기가 흘러내렸다. 비린내가 났다.

“냄새나지? 옆 칸 식당에서 다음 주부터 오징어먹물 요리를 시작했다는 거야, 그래서 오늘 시식용으로 쓰고 남은 먹물을 좀 가져왔어. 먹물이라고만 말하니까 좀 이상하네, 그치?”

아내는 작은 입웃음을 보이고는 내 눈을 보며 말했다.

“그래서 오징어먹물 스파게티 만들어봤어. 근데 비린내가 잘 지워지질 않아서 좀 걱정이야. 이것저것 많이 시도해보기는 했는데 자꾸 신경 쓰이네. 그래도 맛은 괜찮아!”

명동의 백화점 푸드코트에서 보조요리사로 일하는 아내는 그렇게 종종 남은 재료를 가져와서 요리를 만들어주고는 했다. 붙임성 있는 성격 덕분에 다른 칸 식당에서도 재료를 얻을 때가 많아 가끔 난해한 정체성의 요리를 만들기도 했는데, 두꺼운 크림치즈 아래에 코코넛 밀크를 잔뜩 넣은 그린카레와 고수풀로 감싼 튀김두부가 뒤섞여 있는 그라탕은 그 절정이었다.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아내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가자 조그만 식탁 위에 검은 면발이 가득 담긴 접시가 놓여있었다. 의자에 앉아 접시 밑을 만져보니 먹기 좋게 따뜻하면서도 적당히 식은 상태였다. 아내가 어디선가 파슬리 가루를 꺼내 내 접시 위에 뿌리며 스파게티를 장식했다. 마른 파슬리 조각들은 검은 면 위에 다닥다닥 달라붙으며 조금씩 기름기를 빨아들였다.

“당신 파스타 좋아했잖아.”

아내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이번엔 자기 접시 위로 파슬리 가루를 뿌렸다.

“그래서 당신이 저녁 당번일 때 맨날 파스타만 만들어서 내가 투덜대고는 했었는데…. 맛이 없었다는 건 아냐. 그래도 일주일에 서너 번씩 스파게티만 먹으면 질릴만도 하잖아. 그래서 내가 질렸다고 하니까, 그 다음엔 면만 스파게티에서 페투치니로 바꾸질 않나.”

아내는 잠시 키득거리다가 웃음을 멈추고는 엉덩이를 살짝 들어 올려 의자 위치를 가다듬었다.

“근데 왜 요즘엔 안 만들어? 당신도 이제 질려 버린 거야?”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잠시 말을 멈추고는 포크를 집어 들고는 검은 면을 가볍게 섞었다. 오징어먹물 스파게티가 접시 밑바닥에 감추고 있던 열기를 드러내며 하얀 김을 내뿜었다. 아내는 먹기 좋을 만큼 면을 포크에 감으면서 말했다.

“얼른 먹어봐. 스파게티가 다시 좋아질지도 몰라. 당신이 갑자기 안 먹으니까 내가 먹고 싶어지더라.”

기다란 면이 포크에서 늘어져 여전히 접시에 닿아 있었지만, 아내는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조금 숙이더니 포크에 감긴 면발 덩어리를 목구멍 깊숙이 빨아들였다. 아내의 작고 도톰한 두 입술 사이로 새카만 면발 여덟 가닥이 가슴 높이까지 내려와 출렁거렸다. 바다 깊은 곳에 사는 괴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내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검은 머리카락은 뒤로 묶고 있었지만 몇 가닥이 새햐안 이마 위로 빠져나와 아내의 고개가 움직이는 리듬에 맞춰 흔들렸다. 아기자기한 입술은 어느새 먹물 색으로 물들었다. 가냘픈 턱 너머로 보이는 예쁜 가슴 언덕 사이에는 보드라운 그림자가 살며시 내려앉아 가슴과 검은색 앞치마 사이의 깊고 어두운 계곡으로 떨어졌다. 세상에 이처럼 칠흑 같이 아름다운 괴물이 있었던가.

오징어먹물 스파게티를 내려다봤다.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지난 석 달 동안 면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먹을 수가 없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역겨웠다. 세상에 그렇게 혐오스러운 가짜 음식이 존재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내가 만든 오징어먹물 스파게티. 하얀 접시 위에서 검은 면발들이 몸을 섞고 있었다. 집단교미하는 벌레들 같다. 하지만 가짜다. 모두 살아있는 진짜 면을 본 적이 없다. 먹어 본 적도 없다.

“…먹을 생각 없어?”

아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포크를 든 손을 살며시 식탁에 내려놓고는 염려 어린 시선을 보냈다. 나를 바라보는 아내의 크고 둥그런 흑갈색 눈동자는 포크를 들지도 않은 내 모습을 애처롭게 담아내고 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오늘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식욕이 전혀 없어 보이네.”

나는 잠시 뜸을 들이고 대답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서.”

아내는 포크를 식탁에 내려놓고는 의자를 밀고 일어나 내 왼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희고 긴 팔로 내 어깨를 두르고 부드럽게 말했다.

“오늘 파스타 만드는 게 아니었어? 혹시 그동안 일부러 피하고 있었던 거야?”

아내의 팔은 길고 가늘었지만, 식당의 무거운 식기들로 단련되어 언제나 유연하면서도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내는 가냘픈 몸을 내게 붙이며 새하얀 촉수 같은 양팔로 내 목과 가슴을 감쌌다. 섬세한 짜릿함이 뒷덜미를 타고 올랐다.

“별거 아니야. 나도 그동안 파스타를 안 먹고 있던 걸 잊고 있었거든. 당신이 말해줘서 왜 그랬을까 생각하던 중이었어.”

나는 대충 둘러대면서 포크를 들어 면을 휘저었다.

“맛있어 보여.”

포크 끝에 면을 휘감고는 입속으로 가져갔다. 구역질이 났다. 내장에 담긴 모든 것이 꿈틀거리며 삼키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억지로 질겅질겅 씹어가며 입속 모든 근육을 동원해 조각난 면을 목구멍 속으로 집어넣었다. 한 번에 좀 많이 감아올린다면 대여섯 번 정도로 접시를 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내는 애매한 눈웃음을 보이고는 슬며시 자리로 돌아가서는 의자에 앉았다가 엉덩이를 들어 올리며 위치 바로잡기를 몇 번 반복했다. 내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던 걸까?

“다음엔 더 맛있게 해줄게.”

아내는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다시 포크를 집어 들었다. 나는 면을 감아올리며 아내를 바라봤다. 표정에는 얕은 실망감이 묻어나 있었지만, 포크를 움직이는 손놀림은 여전히 힘차고 건강해 보였다. 내가 포크에 감긴 면을 입으로 집어넣을 때 즈음, 아내는 작은 고민거리를 떨쳐내듯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흔들고는 다시 나를 바라봤다. 활짝 웃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녀는 아름다웠다.

케이프타운, 남아프리카공화국

3개월 전, 나는 일 때문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천문대의 서덜랜드 관측소로 향하고 있었다. 공항에서 나와 남아공 천문대 본부가 있는 케이프타운에서 하룻밤 묵은 후 다음날 서덜랜드로 가는 셔틀을 탈 예정이었다. 하지만 도착한 날 저녁부터 갑자기 쏟아진 폭우가 도로를 삼켜버려 며칠 밤을 케이프타운 변두리의 게스트하우스에 머물게 됐다. 강이 범람하고 사고가 이어지자 결국 출장은 취소되었고 바로 다음 날 비행기로 돌아가게 되었다. 아무런 실적도 성과도 없어 돌아가기엔 아쉬워서 마지막 밤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다가 게스트하우스 호스트의 저녁 식사 초대를 정중히 거절하고 혼자 길거리 모험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낯선 식당에 들어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음식을 먹어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신의 음식을 맛보았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음식, 지구의 음식이 아니었다.

재킷을 걸치고 게스트하우스 문을 나서자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테이블 마운틴이 빗물 폭포를 쏟아내며 나를 맞이했다. 주변에 고층 빌딩 하나 없었기에 새하얀 물줄기를 뿜어대는 테이블 마운틴은 대지의 거대한 생식기처럼 보였다. 케이프타운에 이런 규모의 호우가 온 건 역사에 없었다며 이상기후를 떠들어대던 방송은 요 며칠 사이 많이 줄어들었다. 대신 갑작스럽게 불어난 강물이 사람과 집을 여럿 휩쓸고 갔다는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왔다. 도로변을 걷고 있으니 세계 곳곳의 구호단체들이 보낸 물픔들이 케이프타운 공항에 도착해 트럭에 실려 도로를 달리는 모습도 자주 눈에 띄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와 옵저베이터리 가(街)를 따라 해지는 방향으로 잠시 걸어가면 케이프타운의 빈민가 사람들과 중산층 주민들이 뒤섞이는 다운타운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층마다 실외 수영장이 딸린 아파트에 사는 부유층들은 이곳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사람 키만 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누어진 빈민가와 고급주택가의 모습을 비행기에서 내려봤을 때의 느낌은 잊을 수가 없다. 아무튼, 덕분에 다운타운은 부유층을 제외한 폭넓은 계층의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어 그럭저럭 괜찮은 음식을 나쁘지 않은 가격에 먹을 수 있었다.

서쪽 하늘이 붉어지기 시작하자 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시에라리온과 비교하면 케이프타운의 치안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외국인, 특히 아시아인이 혼자 돌아다니기엔 그다지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다운타운으로 향하는 다리 위에 오르니 이번 호우가 얼마나 컸는지 실감이 되었다. 며칠 전까지 다리 아래에는 작은 개울과 철로 여러 개가 지나가는 역이 있었는데 지금은 발아래 2미터 정도까지 흙탕물이 굉음을 내며 거칠게 흐르고 있었다. 강물이 작은 역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킨 것이었다. 살 떨리는 오한이 팔뚝을 감싸자 강물 소리가 괴물의 포효처럼 들렸다.

다리가 끝나자마자 길 건너편에서 웬 작은 체구의 흑인 청년 한 명이 다가와서는 “헤이, 유”를 외치며 웃는 얼굴로 내게 주먹을 내밀었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나도 주먹을 내밀어 살짝 부딪히며 인사를 했다. 누추한 옷차림으로 봐서는 다운타운 주민인 것 같았다. 청년이 짧은 영어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 사람 아니죠? 케이프타운 처음 왔어요? 어디서 왔어요?”

“처음 온 건 아니고…. 한국에서 왔어요.”

나는 적당히 대답하고 빠져나가고 싶었다.

“한국! 여기 한국 사람 잘 안 와요. 한국 사람도 없어요.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요? 내가 여기 안내해 줄게요.”

그는 대답할 틈도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내게 어깨동무를 하고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내게는 웃는 얼굴 앞에서 정색한 얼굴로 거절할 용기가 없었다. 그는 이 주변의 작은 골목길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작은 길을 이리저리 통과하며 보이는 모든 것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길로 가면 학교가 있고 저 길로 가면 유명한 스시 가게가 있다. 스시가 한국 음식이었나? 아, 일본이구나. 한국 음식을 하는 곳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저 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벽에 그림 그리는 길거리 예술가들이 모여있는 곳이 있다. 난 그들이 정말 예술가라고 생각해. 경찰들은 싫어하지만. 오늘은 좀 늦었지만 밝은 낮에 가보면 정말 멋진 그림들이 벽을 뒤덮고 있다. 내일 한 번 가봐.

아니, 난 내일 비행기를 타고 여기를 뜰 거야. 청년은 쉬지 않고 떠들었지만 나는 대충 흘려 들으며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했다. 하지만 적당한 핑곗거리가 생각났을 때 즈음, 청년이 설명을 멈추고 낮은 목소리로 다른 얘기를 시작했다.

“사실, 나 당신 도움이 필요해요.”

오, 세상에.

“나 집이 없어요. 저기 공장 창고에서 잠을 잤었는데 비 때문에 이제 못 들어가요. 물에 잠겼거든요. 오늘은 온종일 음식도 못 먹었고…. 전 원래 이런 거 안 해요! 나쁜 사람들은 칼이나 총 들고 아시아인 돈을 뺏어요. 난 폭력 싫어요. 그런 사람들도 싫어요. 하지만 오늘은 정말 잘 곳이 필요해요. 친구가 10랜드만 주면 자기 자리에서 재워 준다고 했어요. 그리고… 배도 너무 고파요.”

10랜드면 천 원 남짓이다. 나는 바지 주머니를 뒤지며 말했다.

“미안해요. 사실 여기 혼자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가져왔어요. 물론 지갑도 두고 나왔고. 그냥 산책 나온 거라…. 그래도 주머니에 잔돈이라도 있으면 줄게요.”

바지 주머니를 뒤집으며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게 없다는 걸 보여줬지만, 그는 실망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서 꺼낸 걸 손바닥에 펼치자 동전 몇 개가 보였다. 6랜드 50센트. 내가 건네주기도 전에 그는 동전을 모두 자기 손바닥에 쓸어담았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신이 당신을 축복할 거에요.”

그는 들뜬 표정으로 몸을 들썩이며 말했다.

“좋은 저녁 보내길 바래요. 아, 그리고 저기 파란 건물 너머로는 가면 안 돼요. 거긴 진짜 갱들이 있어요. 무서운 사람들이에요. 총이랑 칼도 가지고 있어요.”

“고마워요. 조심할게요.”

나는 애매한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번에도 주먹을 내밀었고 나는 다시 한번 그와 주먹을 맞부딪혔다. 그는 고맙다는 말을 몇 번 더 반복하더니 뒤돌아서는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갔다. 잠시 걷다가 그가 뒤돌아보며 소리쳤다.

“파란 건물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근사한 식당이 잔뜩 있어요! 저녁 맛있게 먹어요!”

내가 저녁을 먹을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그저 해질녘의 인사였을 뿐일까? 그가 다시 가던 길을 걷기 시작하자 나는 뒤돌아서 재킷 왼쪽 안주머니에 있는 두툼한 지갑을 다시 확인했다. 정확히 1,500랜드가 들어있었다. 나는 어디서 저녁을 먹을지 잠시 고민하다가 그가 얼려준 파란 건물 오른쪽 길로 걸어갔다. 남아프리카까지 와서 굳이 스시를 먹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 근사한 식당 거리였다. 좁은 내리막길을 따라 자그만 가게들이 개성적이고 알록달록한 간판을 좌우로 내걸고 늘어서 있었다. 사람 가랑이 높이까지 오목한 곳은 모조리 흙탕물이 차지하고 있고 멀쩡한 유리창이 하나도 없으며 진흙 묻은 의자와 테이블이 길거리에 아무렇게 던져져 있다는 걸 무시할 수만 있다면 기념사진이라도 찍었을 것이다.

실망이 식욕을 묻어버리려는 순간, 향기로운 음식 냄새가 차가운 밤공기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홍수 속에서 살아남았거나 빠르게 복구한 식당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10분 정도 냄새를 따라 길을 내려가도, 문을 연 식당은 찾을 수 없었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와 거리를 덮기 시작하자 계속 멀쩡한 식당을 찾아다니기엔 밤길이 조금 무서워졌다. 그냥 슈퍼마켓에서 간식거리를 사서 돌아갈까 하던 참에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식당 건물 틈 사이로 빛이 새어 나왔다. 내가 발걸음을 돌리려고 할 때마다 보이지 않는 촉수가 나를 잡아채기라도 하는 걸까. 다가가서 보자 문을 닫은 두 식당 사이로 어른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골목길이 있었고 그 끝에 네모난 창문이 달린 문이 있었다. 빛과 냄새는 그 창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창문에 그려진 스푼과 포크가 그곳이 식당임을 알려주었다. 양쪽 건물의 벽은 낮에 내린 빗물이 아직도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골목길의 바닥은 바싹 말라 있었는데 내가 골목 안으로 향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흙먼지가 조금씩 일어날 정도였다.

나무로 된 문을 밀어서 열자 경첩에서 부드러운 마찰 소리가 들렸다. 문에서 조금 떨어진 의자에 앉아있던 건장하고 잘생긴 흑인 남자가 경첩 소리를 듣고는 다가왔다. 골목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깔끔한 정장차림이었다. 아프리칸스어로 뭐라고 말했지만 내가 알아듣지 못하자 곧 유창한 미국식 영어로 말했다.

“어서 오세요. 식사하러 오셨나요? 전 피슬리라고 합니다. 오늘 첫 손님을 대접하게 되어 기쁘네요. 자리로 안내해드리죠.”

“고마워요. 배고파 미칠 지경이네요.”

식당 웨이터가 자기 이름을 알려주는 건 처음 겪는 일이라 잠시 위화감이 들었지만 딱히 신경쓰이지는 않았다. 피슬리의 안내를 따라 식당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황색 조명이 비추는 넓은 홀에는 흰색 식탁보로 장식된 2인용 테이블 5개 정도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놓여있었다. 입구 반대편에는 붙박이 카운터가 있었고 그 너머에 있는 주방에서는 요리사로 보이는 작은 키의 백인 남자가 벽에 몸을 기댄 체 표정 없이 칼을 갈고 있었다. 홀 가운데에는 지름이 3미터 정도 되는 둥그런 수조가 있었는데 물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지만, 물고기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수조 가장자리 50센티미터 정도만 남기고 물살을 따라 흔들리는 흑갈색 해초만 가득했다. 수조 위의 파란 조명이 만들어내는 해초의 아른거리는 그림자가 매혹적이었다.

“앉으세요.”

피슬리가 수조 바로 옆 테이블의 의자를 꺼내주며 말했다. 내가 재킷을 벗자 그가 받아서는 카운터 근처에 있는 옷걸이에 걸어 놓았다. 요리사는 여전히 칼을 갈고 있었고 내가 있는 곳으로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메뉴 보여주시겠어요?”

내가 묻자 피슬리가 허리를 펴고 자세를 가다듬고는 소리 없이 크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희 가게는 처음이시군요. 메뉴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한 번 드셔보시면 그 이유를 알게 되실 겁니다. 그 하나 말고 다른 음식을 내놓는 건 의미가 없거든요.”

그는 카운터에서 주전자를 들고 다가와서는 내 컵에 물을 따르며 내 눈을 보고 말했다.

“굉장히 귀한 음식이에요. 여기서만 맛볼 수 있죠.”

“그거 재미있네요. 어떤 음식이죠?”

피슬리가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 내가 다시 말했다.

“아니, 괜찮아요. 일단 그걸로 주세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게 오히려 더 기대 되네요.”

진심이었다. 애초에 이곳을 발견한 것 자체가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6랜드 50센트를 잃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낯선 체험을 계속할 수 있다면 그 홈리스 청년에게도 고마워할 의향이 있었다. 피슬리는 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더욱 크게 미소 지었다.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사실 저희 가게는 항상 문을 여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단골들도 수확 없이 발을 돌릴 때가 많아요. 손님은 굉장히 운이 좋으신 겁니다. 그리고 장담하죠. 일 년치 운을 다 썼다고 해도 충분히 만족하실 겁니다.”

피슬리가 주머니에서 작은 종을 꺼내 가볍게 울리자 요리사는 드디어 칼 갈기를 멈추고 주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종은 다시 피슬리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문득 입구에 간판이 없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피슬리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기 이름이 뭐죠?”

“에일-르.”

피슬리가 벽에 걸린 낡은 나무 간판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HEYL-R’라고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오래전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방문한 식당에서 따온 이름이예요. 정말 멋진 곳이었어요. 그야말로 제 인생을 바꾼 식당이었죠. 아쉽게도 제가 갔을 때가 그 식당의 마지막 날이었는데…. 사실 저 나무 간판은 그 식당이 문을 닫고 난 뒤에 거기 가서 직접 가져온 거예요. 저 간판이 아마 저나 손님보다도 나이가 많을 겁니다.”

피슬리는 나무 간판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필요할 땐 언제든 불러달라는 듯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카운터 옆으로 가서는 종이 냅킨을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주방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요리사의 발걸음 소리만이 식당을 가득 메웠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식당 안을 다시 한번 둘러봤다. 건물 틈 사이에 만들어진 식당이라서 그런지 바깥 세상의 빛이 들어오는 곳은 입구에 달린 네모난 창문뿐이었다. 책을 겨우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조명만이 식당 안을 비추고 외부 세계의 소음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싼 벽은 격자 모양으로 배열된 나무 기둥과 흰색 페인트를 칠한 싸구려 시멘트로 만들어졌고 드문드문 설치된 벽걸이 조명 말고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수조 안의 해초와 냅킨을 접는 피슬리의 손뿐이었다. 식당 안은 마치 시간이 멈춘 다른 세계처럼 다가왔다.

어떤 요리가 나올지 궁금해하며 푸른 빛이 가득한 수조 속에 눈길을 돌렸을 때, 해초 사이로 무언가가 움직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고기라도 있는 걸까? 무언가가 숨어있기에 딱 좋은 장소이긴 했다.
향기롭고 진득한 냄새가 온몸을 스멀스멀 감쌌다. 주방에서 달그락하는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피슬리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접시와 포크와 스푼, 그리고 가득 채워진 냅킨꽂이를 가져와서는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여기 있습니다.”

새하얀 접시 위에 도톰하고 기름기가 도는 검은색 면이 가득 담겨 있었다. 오직 면뿐이었다. 면이 담긴 모습은 완벽할 만큼 질서정연해서 접시를 그 자리에서 빙글 돌려도 차이를 전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이건…, 파스타네요?”

“그렇게 부르셔도 됩니다.”

내가 보기에 파스타가 분명했지만 피슬리는 마치 파스타가 아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리고는 내가 어떤 말을 할지 기대라도 하고있는 것처럼 내 입을 바라봤다.

“검은색 스파게티. 오징어 먹물을 사용한 건가요?”

“비슷했어요. 하지만 오징어는 아니에요.”

피슬리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오징어가 아니라면….

“문어…?”

문어 먹물은 오징어 먹물보다 채집이 어렵고 양도 적어서 잘 사용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좋은 문어 먹물은 오징어 먹물에는 없는 감칠맛이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문어 먹물을 사용한 게 그렇게 대단한 걸까? 지중해 연안이나 아시아를 제외하고는 문어나 오징어가 혐오의 대상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해가 전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맞아요. 문어를 사용했어요. 그것도 아주 귀한 문어죠. 보통 문어들은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깊은 바다에서만 아주 가끔 모습을 드러내거든요. 가게를 아주 가끔만 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어요.”

“어떻게 생긴 문어인지 궁금해지네요.”

내가 진심으로 궁금한 얼굴로 바라보자 피슬리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안 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생김새는 정말 끔찍해요. 이 세상 생물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요. 마음 약한 사람이 보면 기절 할지도 몰라요. 가끔 사람을 닮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어요. 마치 피카소가 사람과 문어를 뒤섞어 놓은 것 같기도 하고…”

피슬리는 잠시 말을 줄이더니 수조의 해초를 지긋이 바라봤다. 마치 자기 눈을 정화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끔찍한 모습일까?

“식사하시는데 징그러운 이야기는 그만두죠. 식기 전에 드세요.”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 그는 뒷걸음치며 물러섰다. 딱히 뒤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카운터 옆에 서서는 이곳을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았다. 끔찍한 재료로 만든 맛있는 음식을 먹는 모습도 나쁘지 않은 구경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접시를 내려다보니 새카만 면발이 먹음직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일반적인 스파게티 면과 비교하면 제법 굵은 면이었다. 그래서인지 접시 옆에 놓인 삼지창 모양의 포크도 굵은 면이 충분히 들어갈 만큼 큼직했다. 포크를 집어 들어 면발 사이에 담그고는 몇 바퀴 빙글빙글 돌리자 검은색 소용돌이가 내 손을 덮치기라도 할 것처럼 포크를 타고 올라왔다. 자세히 보니 신기하게도 면은 한 가닥뿐이었다. 접시에 담긴 건 믿을 수 없을 만큼 기다란 면 한 가닥이었다. 하지만 절묘하게 기름진 면은 항상 먹기 좋은 만큼만 감겨 올라왔다. 말없이 칼만 걸던 그 요리사의 능력에 감탄이 나왔다. 이런 건 어디서도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을까?

면을 잔뜩 감은 포크를 입에 넣고는 적당한 부분에서 이를 물어 면을 끊었다. 그러자 마치 면이 살아있는 것처럼 입속에서 탄력 있게 미끄러지고 파닥거리며 기묘한 식감을 만들어냈다. 접시에 떨어진 면의 단면을 자세히 살펴보니 면 속에서 새하얗고 끈적한 액체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입속에서 씹히고 있는 면에서도 무언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통통한 면의 담백한 기름기와 어우러지자 그 조화로움에 혓바닥에서도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고개를 들고 눈을 감아 전율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제가 말씀드렸죠? 여기서만 만들 수 있는 음식이에요.”

피슬리가 소리도 없이 뒤로 다가와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이런 음식은 어디에서도 먹어 본 적이 없다.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겁니다. 오늘 하루가 죽을 때까지 당신을 따라 다닐지도 몰라요.”

피슬리가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나는 포크를 돌리고 입에 집어넣기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중간부터는 제대로 씹지도 않았다. 면에서 흘러나온 하얀색 액체가 이미 접시를 흥건히 적시고 새카만 면과 적당히 어우러져 굳이 씹을 필요도 없었다. 씹고 싶지도 않았다. 입속에서 느껴지는 면발의 생기 넘치는 움직임은 마치 천사의 춤사위 같았다. 혓바닥 위에서 무대를 마친 면발들은 꿈틀거리며 스스로 목구멍을 향했다. 면발들이 목을 넘어갈 때의 쾌감은 오랜 기억 속에 묻어둔 첫 성관계를 떠올릴 만큼 황홀했다. 피슬리는 그런 모습을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접시의 빈 바닥을 보는 것이 이렇게 슬프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눈을 감고 혓바닥으로 입속 곳곳을 탐미했다. 접시 바닥은 이미 깨끗이 핥고 난 다음이었다. 피슬리가 채워준 물컵은 식전의 한 모금 이후로 손도 대지 않았다. 입속에 남아있는 그 맛을 조금도 씻어내고 싶지 않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지만 내 영혼은 이미 땀과 흥분에 흠뻑 젖어 있었다. 정신을 차린 건 포크를 빈 접시에 내려놓고 한참이 지난 뒤였다. 피슬리가 정성스럽게 접은 종이냅킨을 몇 장 건네줬다. 나는 냅킨을 받아 입을 닦았다. 냅킨에 검은 기름기가 묻어나자 냅킨을 그대로 삼키고 싶어졌다. 나 스스로도 지금의 내가 이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무 말 하지 않으셔도 좋아요. 다들 반응이 비슷하거든요.”

그는 테이블 위를 정리하며 접시를 들어올렸다. 내가 미련 가득한 눈빛을 빈 접시에 보내고 있는 걸 보고는 피슬리가 말했다.

“규칙이에요. 두 접시는 안 돼요.”

첫사랑을 고백했던 이웃집 누나의 매몰찬 거절보다 더 아픈 말이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시려 왔다. 피슬리가 빈 접시를 들고 주방으로 들어가 요리사에게 건네줬다. 요리사는 접시를 잠시 이리저리 살피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렇게 잠시 눈이 맞은 뒤 그는 주방의 사각 어딘가로 사라졌다. 피슬리가 다시 내게 다가왔다.

“커피나 차를 드릴까요?”

그는 허리를 세우고 양손을 배꼽 앞에 공손히 포개고는 내게 물었다. 하지만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꾹 다문 입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입속의 남아있는 향과 기름기를 씻어내고 싶지 않았다. 피슬리는 나를 잠시 응시하더니 다시 카운터 쪽으로 향했다.

“좋은 시간 보내셨길 바랍니다.”

그는 내 재킷을 양손에 들고 돌아왔다. 나는 여전히 얼이 빠진 상태로 일어나 재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피슬리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공손히 나를 출입문까지 안내해줬다. 문 바로 앞에서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이제야 떠오르다니.

“얼마…”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입을 벌리면 방금 먹은 음식의 마지막 흔적이 입 밖으로 증발해 버릴 것만 같았다.

“얼만가요? 가격을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네요.”

그럭저럭 괜찮은 음식을 나쁘지 않은 가격에 먹으려고 다운타운까지 나온 것이었지만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이 황홀한 경험의 가격은 도대체 얼마일까.

“손님이 결정하시면 됩니다. 만족하신 만큼 주시면 돼요. 뭣하면 그냥 가셔도 좋습니다. 아, 물론 팁은 주셔야죠.”

내가 상황파악이 되지 않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자 이번엔 크게 소리 내 웃으며 말했다.

“팁은 농담이에요. 하지만 다른 건 진짜예요. 손님이 원하시는 만큼 주시면 됩니다.”

나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살폈다. 정확히 1,500랜드가 들어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오기 전에도 한 번 확인했었지. 나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지갑에 든 돈을 모두 꺼내 가지런히 정리해서는 피슬리에게 건넸다. 그는 돈을 받더니 따로 세어보지도 않고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감사합니다.”

피슬리가 여유로운 동작으로 문을 열었다. 경첩에서 부드러운 마찰 소리가 들렸다. 젖은 벽에 둘러싸인 마른 길이 나왔다. 저 길을 지나 이곳으로 걸어 들어온 게 몇 년은 더 지난 일인 것처럼 다가왔다. 한 발짝 두 발짝 걸어나가자 몸이 조금씩 가벼워졌다. 내가 뒤돌아보자 피슬리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문을 닫고 있었다. 문이 닫히기 직전, 그의 어깨 너머로 파랗게 빛나는 수조가 눈에 들어왔다. 수조 속 해초 사이에서 다시 한번 무언가가 움직였다. 아주 잠깐동안이었지만 새빨간 눈동자 비슷한 무언가가 보였다. 에일-르의 문이 닫히고 피슬리의 모습도 사라졌다. 마지막 순간에 흘러나온 경첩의 소리는 처음과는 달리 마치 비웃음처럼 들렸다.

터벅터벅 걸으며 좁은 길을 빠져나오자 별이 빛나는 밤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북동쪽 하늘에서 거꾸로 매달린 뱀자리가 떠오르고 있었다. 뱀자리의 심장에서 우누칼하이가 붉은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수조 속 해초 사이에 숨어 있던 건 무엇이었을까.


공항으로 가는 택시는 오전 10시에 게스트하우스 앞으로 오기로 되어 있었다. 앞으로 2시간 뒤였다. 나는 짐을 미리 챙겨놓고 다시 다운타운으로 향했다. 며칠 전 폭우를 완전히 잊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했다. 에일-르를 찾아 나섰다. 이곳을 떠나기 전에 피슬리를 만나야 한다. 피슬리는 가게가 항상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언제 다시 여는지를 알아야 한다.

아침 햇살이 비치는 다운타운의 모습은 밤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밤에는 보이지 않았던 낯선 길과 건물들이 미로처럼 다가왔다. 한참을 해맸더니 어제 파란 건물 근처까지 길을 안내해줬던 그 흑인 청년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내 신용카드라도 주고 싶어졌다. 포기할까 생각할 때 즈음, 도색용 스프레이 캔을 양손에 잔뜩 들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흑인 청년이 말한 거리의 예술가들이 분명했다. 나는 눈에 익은 길이 나올 때까지 그들을 뒤따라 갔다. 파란 건물은 금세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예술가들에게 무언의 감사를 보내고는 파란 건물 오른쪽 길로 향했고 알록달록한 식당가의 내리막길을 거침없이 뛰어 내려갔다.

두 식당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어제까지 말라 있던 바닥은 건물 벽과 마찬가지로 빗물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비가 내리진 않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골목길을 걸어 들어가 에일-르의 문을 열었다. 경첩에선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식당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피슬리도 없고 요리사도 없었다. 수조의 물은 모두 빠져있고 해초들은 힘없이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피슬리가 아끼던 나무 간판은 수조 옆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무엇보다, 어제는 전혀 다른 세계처럼 느껴지던 공간이 지금은 그저 별 볼 일 없는 이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택시는 10시 정각에 게스트 하우스 앞으로 왔다. 나는 짐을 싣고는 공항으로 향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아무것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두바이에서의 환승도, 인천 공항에서 기다리던 아내의 모습도 예외 없이 예상대로였다. 집에 돌아온 후에 가진 아내와의 잠자리도 뜨거웠지만, 그 열기는 매일 아침 머그잔에 떨어지는 새카만 커피의 뜨거움을 지켜보는 것 정도로 느껴졌다. 에일-르 이후로는 모든 것이 식상했다.

플라나리아

힘겹게 집어삼킨 오징어먹물 스파게티가 생각나자 정신이 번쩍 들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아내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는 침실에서 나왔다. 시곗바늘은 오전 2시를 조금 지난 곳을 향해 있었다. 케이프타운은 저녁 7시 정도일 것이다. 에일-르의 면 요리를 처음 입에 가져간 것이 바로 이 시간이었다. 저녁으로 먹은 쓰레기 같은 음식 생각이 자꾸 떠올라 주체할 수 없는 구역질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 뚜껑을 열고는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목구멍에 쑤셔 넣어 혀의 뿌리를 자극했다. 마치 뱃속의 무언가가 밀어내기라도 하는 듯이 오징어먹물 스파게티가 식도를 타고 뿜어져 나왔다. 먹은 지 여섯시간이 지났지만 제대로 소화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모두 토해내자 몸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입을 씻어내고는 거실로 향했다. 도중에 부엌을 지나쳤지만, 혹여나 접시에 남은 오징어먹물 스파게티가 보일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아내는 간혹 그렇게 먹다 남은 음식을 그렇게 식탁에 내버려 두고는 했다. 오, 나의 아름다운 괴물을 닮은 아내. 괴물을 품은 아내. 오징어먹물 스파게티를 먹는 내 모습이 고통에 가득 차 있다는 걸 알았는지 그녀는 식사 후에 하려던 고백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럼, 알고말고.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이 모든 걸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몸속에 위대한 생명이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이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지 알 수 있을까? 일생의 운을 모두 써버렸다고 해도 여한이 없을 거대한 축복이다. 내가 3개월 전에 에일-르를 우연히 방문했던 것도, 같은 날 아내의 피임약이 모두 떨어진 것도, 모두 몇 개월 뒤의 다가올 고귀한 순간을 위한 것임을 내 몸속의 또 다른 존재가 말해주고 있었다.

“피슬리, 피슬리. 당신 말이 맞았어요.”

나는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며 거실 한가운데에 놓인 와인색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켰다. 푸른 빛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다큐멘터리 재방송이었다. 짤막한 지렁이처럼 생긴 자그마한 생물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플라나리아였다. 페트리 접시에 담긴 플라나리아의 가운데를 창처럼 생긴 칼로 자르고 하루를 내버려 두자 절단면에서 머리와 꼬리가 자라더니 어느새 두 마리가 되어 살아 움직였다. 초등학교 때 플라나리아 실험을 하며 담임에게 죽도록 얻어맞은 적이 있었다. 내가 플라나리아를 커터칼로 수십 조각 내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저 플라나리아가 피라냐 같은 물고기에게 잡아먹혀 갈기갈기 찢어졌을 때 뱃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뱃속에서 다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오징어먹물 스파게티는 완전히 잊었다. 지금이라면 에일-르의 경험을 다시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소파에 최대한 편하게 앉아 목구멍을 최대한 벌리고 입으로 천천히 호흡했다. 따뜻한 소용돌이가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황홀함이 온몸을 감쌌다. 기다랗고 시커먼 면발 하나가 입속에서 살아서 춤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입 밖을 정찰하더니 내 콧등을 타고 이마 위로 올라왔다. 잠시 얼굴 위에서 맴돌고는 내 눈알과 눈꺼풀 사이를 헤집으며 그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내 눈앞에 천국이 펼쳐졌다. 머나먼 별에서 빨간 눈을 가진 천사가 내려와 나의 운명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천사는 그렇게 매일 밤 나를 찾아왔다.

미즈사와, 일본

창문 너머로 비가 쏟아졌다. 마른 나뭇가지 같은 굵은 빗줄기들이 바깥 공간을 빈틈없이 채우면서 옅은 회색 풍경만이 창틀 사이에 그려졌다. 하시쿠라는 창틀 옆에 놓인 작은 나무 의자에 앉아 테이블에 양손을 모아 얹고는 눈을 감고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수천 마리의 좀비들이 제물을 달라며 건물을 둘러싸고 벽을 두드리는 것 같은 야단스러운 소리였다. 하시쿠라의 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벽 앞에서는 둥글고 커다란 철제 난로가 입을 벌린 채 딱딱거리며 장작을 불태웠다. 난로의 온기는 구석구석으로 퍼져있었지만, 공기는 창문에 물방울 하나 맺히지 않을 만큼 건조했다. 벽난로 왼편에서 벽과 수직으로 이어진 좁고 긴 카운터는 커튼이 달린 주방과 연결되어 있었고 커튼 너머에선 여유로운 인기척이 흘러나왔다. 하시쿠라의 식당은 첫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하시쿠라는 의자에서 일어나 양손으로 바지를 몇 번 털더니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출입문의 안개 유리에 사람 그림자가 슬며시 나타났다. 그림자는 문턱 앞에서 잠시 망설이는듯 했다. 하시쿠라는 기다렸다.

출입문 모서리에 달린 종이 딸랑거리며 문이 열리고 있음을 알렸지만 금세 새어 들어온 빗소리에 묻혔다. 바깥의 회색 세계에 서 있던 남자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흠뻑 젖어 축 늘어진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어깨에는 방수천을 사용한 가방을 메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하시쿠라가 손가락으로 난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추우시죠? 난로 근처에 앉으세요. 수건 가져다 드릴게요.”

비에 젖은 남자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난로를 향해 걸어갔다. 그가 지나가며 떨어뜨린 빗물이 나무 바닥에 축축한 길을 그렸다. 하시쿠라가 하얀 수건 두 장을 들고 나타나 그에게 건네줬다. 그는 한 장으로 얼굴과 머리를 거칠게 닦고 다른 한 장으로는 옷을 대충 털고는 조금 전까지 하시쿠라가 쓰고 있던 의자에 축 늘어져 앉았다.

“고마워요.”

빗물을 잔뜩 머금은 수건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그가 말했다.

“설마 미즈사와에, 그것도 한겨울에 이런 비가 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네요. 눈이 몇 센티 쌓여도 부족할 때인데. 북위 40도도 이젠 아무것도 아니네요. 일본도 기후가 이상해 졌나 봐요.”

“미즈사와에 오래 사셨나 보네요.”

하시쿠라는 수건을 집어 들어 난로 가까운 곳에 가지런히 걸어두며 말했다.

“아니, 여기에 살지는 않아요. 여기서 좀 떨어진 곳에 천문대가 있잖아요? 가끔 그리로 관측을 오거든요. 요즘 도쿄엔 눈이 내리질 않다 보니 여기에서 눈 보는 재미가 조금은 있었는데…”

천문학자는 그제야 자기가 식당 안에 들어와 앉아있다는 걸 다시 떠올렸는지 부끄러운 듯 앉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미안해요. 사실 길 가다가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피할 곳을 찾아다녔는데 한참을 뛰어다녀도 문을 연 곳이 없는 거예요. 그러다가 포기할 때 즈음에 여기 보이는 거예요. 몸은 떨리고 해는 조금씩 낮아져서 일단 무작정 들어와 버렸네요.”

그는 하시쿠라에게 가볍게 웃음을 보낸 뒤 손목시계를 슬쩍 보고는 말을 이었다.

“아직 저녁 먹기엔 이른 시간인데 뜨거운 차 종류는 있나요? 비가 한참은 이어질 거 같으니 식사는 나중에 따로 주문할게요.”

“차 메뉴는 따로 없지만, 식사에 따라 나오는 밀크티가 있어요. 그걸로 드릴까요?”

“그거 괜찮네요. 그걸로 주세요.”

천문학자가 말을 마치자 하시쿠라는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 냄비에 물을 담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고는 냄비를 그 위에 올렸다. 불이 꺼지지 않는지 잠시 지켜본 뒤 그는 카운터 아래에서 곱게 갈린 찻잎이 가득 담긴 유리병을 꺼내고는 뚜껑을 열고 코 앞에서 흔들며 향을 살폈다. 그리고는 짧은 주둥이가 달린 주황색 찻주전자 속으로 찻잎을 조금 집어넣고는 병을 다시 카운터 아래에 감췄다. 물이 끓어 오르자 불을 끄고 냄비의 물을 찻주전자에 조금씩 따라 넣고는 주전자 뚜껑을 닫았다. 찻잎의 향은 난롯불이 만드는 뜨거운 대류를 타고 퍼져나가 금세 천문학자의 코끝에 닿았다. 가방에서 논문을 꺼내던 천문학자는 새빨간 난롯불을 지긋이 바라보며 향을 음미했다.

천문학자의 몸에서 더는 물방울이 떨어지지 않을 때 즈음, 하시쿠라가 쟁반을 들고 난로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차가 가득 담긴 찻주전자와 빈 찻잔, 우유가 담긴 조그만 유리병을 차례로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능숙한 몸놀림으로 찻잔에 차를 따랐다. 찻잔이 적당히 채워지자 하시쿠라가 찻주전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처음엔 우유를 넣지 말고 한두 모금을 잠시 입에 담가 향을 남긴 다음, 차에 우유를 넣어 마시세요.”

하시쿠라의 시선이 찻주전자에서 천문학자의 논문 위로 떨어져 잠시 머무르자 천문학자가 찻잔으로 손을 녹이며 말했다.

“별 좋아하시나요? 근처에 천문대가 있어서 그런지 관심 있어 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글쎄요. 관심 있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인연이 없는 것도 아니죠.”

사실 하시쿠라의 시선을 끈 것은 논문에 쓰인 한국어로 된 메모였지만 그는 크게 내색하지 않고 천문학자의 기분을 따라줬다. 천문학자는 논문을 손에 들고 몇 페이지를 넘기더니 페이지 하나를 보여줬다. 네모난 격자 안에 그래프가 가득 채워져 있고 유일하게 그래프가 아닌 곳에는 싸구려 카메라로 찍은 태양의 흑백사진을 반전시켜놓은 듯한 그림이 있었다. 천문학자의 손가락이 그 그림을 가리켰다.

“이번에 관측하려던 별이에요. 원래 여름밤에 볼 수 있는 별인데 여기 천문대에는 전파망원경이 있어서 낮에도 관측할 수 있어요. 우누칼하이라고, 뱀자리 알파별이에요. 그 별자리에서 가장 밝은 별인데 최근에 재미있는 게 알려졌어요. 17년에 한 번씩, 이 별의 색깔이 달라지는 거예요. 원래는 주황색인데 17년마다 3일 정도 붉게 변해요. 별 표면의 온도가 갑자기 1,000도 이상 떨어진다는 뜻이에요.”

천문학자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차를 두 모금 마셨다. 하지만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는 좋아하는 화젯거리에 흥분하면 좀처럼 입을 다물지 않는 전형적인 천문학자였다.

“원래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던 별이었는데 아마추어 천문가가 수십 년 동안 찍어온 천체사진을 정리하면서 그 현상을 발견하고는 논문을 내버린 거죠. 그것도 거물급 천문학자들을 공저로 모아서 거물급 저널에. 맨눈으로 보일 만큼 식상한 별에서 17년에 겨우 3일 동안 무언가가 일어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못 했던 거에요. 그 사람은 심지어 망원경을 사용하지도 않았었어요. 튼튼한 삼각대와 좋은 카메라뿐이었죠. 웃긴 건 제가 그 논문을 처음 읽은 날 밤, 전 하와이의 4,500미터 산꼭대기에서 구경 30미터짜리 망원경으로 어린 별 주변의 행성을 보고 있었어요. 아니, 행성인 줄 알았죠. 나중에야 그게 그냥 같은 방향에 있던 평범한 어두운 별이란 게 드러나 결국 논문 하나 쓰지 못했는데, 그때 즈음엔 그 늙은 아마추어 천문가가 어디 대학 명예교수로 채용되었다는 뉴스가 뜨더군요.”

그림을 가리키던 손가락에서 슬며시 힘이 빠졌다. 옆에서 하시쿠라가 한참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떠들던 천문학자의 입을 잠시나마 다물게 한 건 어느 운 좋은 늙은이를 향한 부러움이었다.

천문학자는 찻잔에 우유를 살며시 따랐다. 우유가 중력과 부력 사이에서 꽃 모양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차는 밝은 갈색을 띠며 불투명해졌다. 어디서 바람이 들어왔는지 난로에서 장작이 거세게 타오르며 불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가 금방 잠잠해 졌다.

“조금 전에 별이랑 인연이 없지도 않다고 했잖아요? 괜찮다면 무슨 인연인지 들을 수 있을까요?”

천문학자는 그렇게 물으며 찻잔을 살짝 흔들었다. 하시쿠라는 창 밖의 회색 풍경을 잠시 바라보고는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오래전에 엔지니어 일을 했는데 주로 대형 망원경 돔을 설계했거든요. 하지만 망원경으로 별을 본 적은 한 번도 없네요.”

하시쿠라의 말에 천문학자는 놀란 듯 둥그런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하시쿠라는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문학자는 우유를 넣은 뒤로 아직 입도 대지 않은 찻잔을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학생 시절 때 남아프리카에 관측을 간 적이 있었어요. 근데 거기 있는 망원경의 돔이 일주일에 서너 번은 고장이 나는 거예요. 그런 일이 너무 자주 있어서 누가 거기 갈 때마다 돔은 가장 먼저 무사한지 물어볼 정도였어요. 서덜랜드라고, 케이프타운에서 차로 대여섯 시간 정도 떨어진 곳이었는데…”

천문학자가 말을 잠시 멈추자 하시쿠라의 시선이 다시 그를 향했다. 천문학자는 작은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17년 전에 홍수가 케이프타운을 쓸어버린 거예요. 케이프타운의 남아프리카 천문대 근처에 옵저베이터리라는 역이 있었는데 거긴 역 자체가 물에 잠겼대요. 거기 천문대가 있어서 옵저베이터리(Observatory)라고 이름까지 붙은 곳이었는데…. 결국 천문대도 몇 년간 재정난에 시달리더니 케이프타운 관측소를 폐쇄해버렸어요. 그 지긋지긋한 돔을 다시 볼일도 사라졌죠. 그 뒤로 전파천문학으로 분야를 바꿔서 지금은 돔 자체를 볼 일이 없지만요.”

천문학자가 다시 잔을 집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홍수가 케이프타운을 덮쳤을 때가 딱 우누칼하이가 붉어졌을 때였네요. 오늘은 맨눈으로 볼 순 없겠지만 아마 지금도 붉을 거예요.”

천문학자는 별을 바라보기라도 하듯 천장을 잠시 올려다보더니 이윽고 고개를 내리고는 식어버린 밀크티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가 찻잔을 내려놓자 난롯불이 다시 한번 거세졌다. 탁탁하는 소리를 내며 새빨간 불씨 몇 개가 난로 밖으로 빠져나왔다. 몸이 충분히 따뜻해지자 허기가 몰려왔다.

“계속 세워두고 저만 떠뜰었네요. 죄송해요. 메뉴 주시겠어요? 어느새 저녁 먹을 때가 된 것 같네요.”

천문학자의 말에 하시쿠라는 입이 찢어질 듯한 미소를 보이고는 말했다.

“식사 메뉴는 검은 기름국수⁠ 하나밖에 없어요. 하지만 약속하죠.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문어 기름으로 만든 건데, 방금 드신 밀크티와도 아주 잘 어울리거든요.”

하시쿠라가 카운터 너머의 주방으로 사라지자 천문학자만이 난로 주변에 남았다. 주방에선 두 사람의 인기척이 새어 나왔다. 천문학자는 식당 바깥에 걸려있던 HEYL-R라고 양각으로 새겨진 낡은 나무 간판을 문득 떠올리고는 뜻을 궁금해하며 찻주전자를 기울여 찻잔에 차를 따랐다. 이번에는 우유를 바로 섞였다. 새하얀 액체가 다시 한번 꽃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우누칼하이

비가 그치고 에일-르의 문이 닫혔다. 천문학자는 비에 젖은 풍경 사이로 사라졌다. 하시쿠라는 난로 옆 테이블로 걸어와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접시 위로 찻잔과 함께 그 아래에 깔려있던 2만 7천 엔을 성의 없이 집어 던졌다. 접시 안에 남아있던 검은 기름이 지폐를 천천히 검게 물들였다. 남은 식기들도 대충 접시 위로 올리고는 카운터 위에 살며시 놓았다. 그리고 느긋하게 난로를 향해 걸어가서는 불길 바로 옆에 있는 레버를 손으로 잡아당겼다. 팔의 피부가 불길에 익으면서 악취가 났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레버를 끝까지 당기자 난로의 불길이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금세 완전히 꺼져버렸다. 난로의 빛이 사라지자 에일-르는 냉기를 힘껏 빨아들였다. 하시쿠라의 코에서 하얀 김이 규칙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의 눈은 여전히 난로 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로 속 검게 탄 나뭇조각들 사이로 무언가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뭇조각들이 서로 부딪히면서 가루가 되어 흩어지자 그 아래에서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의 흐물흐물한 몸은 경도비만에 걸린 10대의 몸과 비슷했다. 사지가 있어야 할 곳에는 뱀 비늘로 가득 덮인 촉수 여러 개가 말미잘처럼 한 뭉텅이씩 붙어 있었다. 하지만 다리 한쪽에 해당하는 부분은 아직 자라나지 않은 것처럼 짧은 돌기만 뭉툭하게 나와 있을 뿐이었다. 양쪽 어깻죽지에는 빨대 굵기만 한 구멍 수십 개가 잔뜩 뚫려있었는데 마치 호흡을 하는 것처럼 주기적으로 진동했다. 그렇게 구멍 가장자리가 떨릴 때마다 검고 길고 가느다란, 면발처럼 생긴 벌레들이 끊임없이 구멍과 구멍 사이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머리처럼 보이는 부분에는 일자형 동공을 가진 시뻘겋고 커다란 눈 세 개가 박혀 있었다. 세 개의 눈 사이에서는 빨판이 가득 달린 수십 개의 시커먼 촉수가 둥그런 입을 둘러싸고 있었다. 문어 다리를 닮은 촉수의 빨판에서는 하얀색 액체가 조금씩 그리고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하얀색 액체가 눈깔 주변으로 흘러내리자 어깨의 구멍을 드나들던 검은 벌레 하나가 스멀스멀 기어오더니 하얀색 액체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벌레의 기다란 몸이 조금씩 부풀어 올랐고 액체를 완전히 들이켰을 땐 스파게티 면보다도 굵어졌다.

주방의 커튼 사이로 젊은 여자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여유로운 동작으로 카운터를 돌아 하시쿠라의 뒷편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의 양어깨 위에 손을 얹고는 말했다.

“잘 됐어?”

한국어였다. 하시쿠라는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역시 유창한 한국어로 말했다.

“문제없어. 조금 남기긴 했지만. 괜찮아, 맛있어 보였는걸.”

“다음엔 더 맛있게 할게.”

젊은 여자는 하시쿠라에게 몸을 바짝 기대고는 촉수처럼 희고 긴 팔로 그의 목과 가슴을 감쌌다. 섬세한 짜릿함이 하시쿠라의 뒷덜미를 타고 올랐다. 라벤더 냄새 사이로 비린내가 스쳐 지나갔다.

다음 따위는 없어, 라고 ’그것’의 붉은 눈이 소리 없이 속삭였다.

젋은 여자는 식어버린 난로로 다가가 ‘그것’의 기다란 오른팔—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검은 벌레가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잠시 드나들더니 다시 구멍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따뜻한 눈길과 손길은 오직 ‘그것’의 오른팔만을 향했다. 다른 부분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만지려고 하지도 않았다.

“우리 아가.”

그녀는 상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렴. 곧 마지막 친구를 만날 수 있을 거야.”

이제 돌아오렴, 붉은 눈이 말했다.

하시쿠라와 젊은 여자의 몸이 잠깐 비틀거리더니 그들의 콧구멍에서 가늘고 기다란 검은색 벌레가 기어 나왔다. 두 가닥의 벌레는 재빠르게 그들의 몸을 타고 내려와 난로를 기어 오르고 ‘그것’의 어깻죽지에 있는 구멍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렴, 붉은 눈이 일을 마친 벌레들에게 말했다.

하시쿠라와 젊은 여자의 몸이 마룻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들의 몸은 그동안 억지로 시간을 막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보라색으로 물들더니 악취를 풍기며 서서히 썩기 시작했다. ‘그것’은 난로에서 천천히 기어 나와서는 두 사람의 몸에 촉수가 가득 달린 입을 들이댔다. 그리고 천천히 녹여가며 옷만 남을 때까지 그들의 몸을 꿀꺽꿀꺽 삼켰다.

‘그것’은 식사를 마친 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 다리가 하나밖에 없지만, 양팔의 촉수에 달린 빨판들이 카운터를 붙잡아 몸을 일으켜 줬다. 부족한 다리는 천문학자의 아내 몸속에서 자라나 검은 벌레의 보호 속에서 16년 간 성장한 뒤 ‘그것’의 몸을 완성하기 위해 찾아올 것이다. 천문학자에게 아내가 없다고 한들 상관없었다. 이제 검은 꼬리가 달린 그의 생식세포가 누군가의 몸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게 남자든 여자든 차이는 없었다.

한 가닥의 가늘고 긴 연약한 몸으로 시작해,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거대하게 성장한 모습을 드러낼 날을 눈앞에 두기까지 한 세기가 걸렸다. ‘그것’이 우주 공간을 떠돌던 긴 세월과 비교하면 한 세기 정도는 순식간이었다. 17년 뒤 완성된 몸으로 마지막 식사를 마친 뒤 —천문학자는 어떤 맛이 날까— 진짜 임무가 시작되고 나면 그동안의 세월은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붉은 눈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방을 향해 비틀거리며 이동했다.

약속의 날과 장소는 우누칼하이가 알려줄 것이다. 천문학자는 그 별을 그렇게 불렀지만 ‘그것’은 자신의 고향을 에일-르라고 불렀다.

끝.

댓글 4
  • No Profile
    지구여행자 19.03.01 02:02 댓글

    끝까지 정신 없이 읽었습니다. 섬뜩하면서도 짜릿한 여운이 가시지를 않네요.

  • 지구여행자님께
    글쓴이 해도연 19.03.01 12:51 댓글

    감사합니다! ٩(๑❛ᴗ❛๑)۶

  • No Profile
    쁘로프박사 19.03.01 09:26 댓글

    처음 부분에선 예상하지 못했던 러브크래프트...

  • 쁘로프박사님께
    글쓴이 해도연 19.03.01 12:53 댓글

    전 두족류하면 일단 러브크래프트가 떠오른답니다

Prev 1 2 3 4 5 6 7 8 9 10 ... 39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