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해망재 선녀와 광복군

2017.08.28 17:4608.28

선녀와 광복군

해망재

 눈을 떴을 때 처음 보인 것은 낡은 벽이었다. 일본어와 한자가 마구 뒤섞인 낡은 종이로 바른, 사극에도 안 나올 것 같은 낡은 바람벽. 리아는 자신의 몸에 입혀진 남루한 천조각을 들여다보았다. 여기가 어디인지, 어떤 시대인지 알아차리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여긴 어디야.”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몇 번이나 예습을 했지만, 막상 그 시대에 뛰어들면 한동안은 모든 것이 잘못 만들어진 가상현실처럼 어지럽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시뮬레이션을 해 왔던 가상현실이란 것은, 안전하고 깨끗하며 쾌적하게 잘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사람들이 멀미를 느끼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은 경악스러울 정도로 답답하고 텁텁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나 모르겠다. 너는, 도망을 친 거냐?”

 할미꽃처럼 나이들어버린 아주머니가 물었다.

 “내 딸은 어제 끌려갔는데, 오늘은 너를 이렇게 줍고.”

 “여긴 어딘가요…….”

 “신안이지.”

 신안.

 언제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의심을 살 수는 없었으니까. 그때 한 남자가 급히 달려와, 울타리라고 하기도 뭣한 얕은 싸리나무 담장의, 덜렁거리는 문을 밀며 들어왔다.

 “여사님!”

 “왜 이리 늦었소…….”

 아주머니는 남자를 보고 주저앉았다. 그의 메마른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리 희숙이는 어제 끌려갔소.”

 “그런…….”

 남자는 아연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집 안, 조금 전까지 리아가 누워 있던 방의 문을 덥석 열어젖히고,구석구석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창백하게 질린 남자가, 마당을 돌아보았다. 그러다 그는 리아를 돌아보고 아주머니를 쳐다보았다. 아주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희숙이가 아니야. 꼭 닮았지만 아니었어.”

 “예……?”

 “아마도 저도 공출로 끌려가려다 도망친 게지. 저기 우물가에 쓰러져 있길래, 일단 내 집에 데려다 숨겼소.”

 “…….”

 “우리 희숙이는 또 어떻게 될 지…….”

 “여사님.”

 남자는 다가와, 아주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제가 어떻게든 로사를 찾아 보겠습니다.”

 “찾는들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알면서 왜 헛된 생각을…….”

 “제 정혼자라 하겠습니다.”

 “이미 결혼한 여자면 모를까, 정혼자라고 놓아 줄 놈들이 아니라는 걸 어찌 하겠소.”

 아주머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한참 한숨을 쉬다가, 리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장 선생이 내 딸과 정말로 좋아 죽느라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아오. 결혼이라도 하면, 그 정신대 공출 끌려가는 걸 막을 수 있으니까 예까지 온 게지. 근데 이젠 틀렸어. 그러니 장 선생. 누군가를 구할 마음으로 결혼할 결심을 할 거라면, 차라리 저 아이를 데려가시오. 이렇게살아서 예서 만난 것도 인연일테니.”


이걸 어쩐다.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할 틈도 없이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버렸다. 그런데다 이름도 바뀌었다. 아예 새로이 호적을 만드는 것보다는, 있는 사람의 호적에 착오가 있다 하는 게 덜 까다로웠다. 아주머니의 딸, 정신대에 끌려갔다는, 열 여섯 살 난 김희숙이라는 여자의 이름을 얻었다.

 첫날 밤도 치렀다. 애초에 정혼한 여자가 아니어서 그런지, 그는 리아에게 손을 대는 데 몇 번이나 주저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별 수 없겠다 싶어서 그냥 눈을 감고 그에게 안겼다. 자신의 남편이 된 낯선 남자는 처녀가 아닌 것에 조금 놀란 듯 했지만, 그 뿐이었다. 재수가 없으면 맞아 죽을 각오도 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 시대 치고는 깨인 사내였는지, 그저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갑자기 생긴 남편을 따라 마을을 떠나기 전, 곳곳을 살펴보았다. 아무리 뒤져도, 타임윙스는 보이지도 않았다. 이렇게 탁하고 어두운 세상에서는 눈에 시릴 만큼 선명한 파란 색인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안 보이는 걸까.

 설마 이대로 이 시대에 머물러 살아야 하는 걸까.

 답답하고 안타까운 와중에, 그녀의 남편이 가만히 고백했다.

 “일본군에 입대할 겁니다.”

 혈압이 올랐다.

 이 새끼, 설마 친일파였어?

 역사를 바꾸려고 굳이, 고생해가며 이 시대까지 왔는데. 타임윙스를 잃어버린 것도 모자라서, 하필이면 자기 발로 일본군에 자원입대 하겠다는 멍청이에게 의탁하고 있다니. 어떻게든 돌아가야 했다. 몸에 삽입해 놓은 칩으로 아시간 통신을 시도하고, 몇 년이 걸리더라도 살아남아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남편이 말했다.

 “잘 들으오. 학도지원병제가 말로만 지원제인 건 당신도 알 터. 징집을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든 중국으로 파견되고자 하오.”

 “중국이라고요?”

 “그렇소. 조선반도 안에 남는다면 다른 일을 도모할 수 없으나. 어떻게든 중국에 파견되면…….”

 남편이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중경으로 갈 거요.”

 “중경?”

 “상해 임시정부로 가서, 조국의 아들이 되겠소. 그게 여의치 않으면 중국군에라도 편입해서, 저 일본군과 맞서 싸우겠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째서 이 남자가, 자신이 계획한 일을 하려는 거지?

 “로사, 아니…… 당신에게도 당신 이름이 있겠지만, 여튼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니까. 일본은 이미 패망의 징조를 보이고 있어요. 광복군에 들어가 싸울 겁니다. 이 나라를 되찾았을 때, 어떻게든 우리의 지분을 찾을 수 있도록. 그러니까 부디…….”

 리아는 눈을 깜빡였다. 분명 여기 오기 전에 읽었던 레퍼런스에서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조선에서 일본군을 따라 국경을 넘은 뒤, 중경으로 가서 광복군에 들어갔던 사람에 대해서.

 “내…… 내 이름은 리아예요.”

 리아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당신 이름이 그러니까…….”

 처음에는 어떻게든 과거로 돌아가겠다고만 생각했다. IMF가 일어나지 않으면 될까? 박정희가 살해당하지 않으면? 혹은 더 일찍 살해당하면? 군사 독재가 일어나지 않으면 뭔가 달라질까?

 몇 번이나 거듭해서 시뮬레이션을 해 보았지만, 유의미할 정도로 바뀌는 것은 없었다. 여자들은 여전히 두들겨 맞고 강간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마치 체체파리들처럼, 남자들의 폭력이 폭발하는 시기가 존재했다.

 성비가 문제였다. 80년대에, 성감별과 낙태, 그리고 하나 낳아 알뜰살뜰 키우라는 인구 정책이 맞물리면서, 대규모의 젠더사이드가 일어났다. 태어나지도 못하고 여자애들이 죽어나갔다. 그리고 성비가 깨진 세대의 남자들은, 겨우 살아남은 여자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그래서 돌리고 돌리고 시간을 돌리다가 여기까지 왔다. 1943년 겨울로. 그저 임시정부로 숨어들기 위해.

 “당신이 들으면, 이런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도 될까 싶을 만큼 절망할 걸요.”

 리아는 심각한 얼굴로 리아를 바라보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내년, 1945년에 해방이 되긴 할 거예요. 하지만 한국은…… 그러니까 조선은 협상 테이블에도 앉지 못하죠. 광복군이 이 땅으로 들어오기 전에,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종전이 되어버리니까.”

 “그런…….”

 “당신이 존경하는 김구 선생님은 살해당해요. 이승만은 독재를 하고, 한반도는 전쟁으로 불바다가 될 거예요. 그 뿐이 아니에요. 겨우 전쟁이 끝나고 독재자를 몰아냈더니, 이번에는 군부가 독재를 시작해요. 당신은 군부에 저항하다가 살해당하고요. 독재자도 살해당하지만, 30년 뒤에 그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어버리고요.”

 “좀 좋은 이야기는 없습니까.”

 “민주정부가 들어서죠.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었다고 말하고. 독재자의 딸은 탄핵으로 쫓겨나고. 그래요, 뭐. 법률로써 독재자를 몰아낼 수 있을 만큼, 민주주의가 발전하긴 해요. 그런데.”

 리아가 중얼거렸다.

 “당신들의 민주주의죠.”

 “예?”

 “여기, 식민지 때 일본놈들에게 뭘 잘못 배워서 그런지, 아니면 일본놈들에게 배운 걸 그대로 해 먹은 독재정권이 문제인 건지 모르지만, 여자를 존중하지도 않고, 때리고 죽이고 강간하고, 그러면서도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르는 놈들이 수두룩한걸요. 오죽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뭐라고 하지요?”

 “똑똑하고 의로운 남자는 독립운동하고 독재에 항거하다 다 죽고, 못나디 못난 쭉정이들만 남아서 그 지랄이라고.”

 “…….”

 “왜요, 여자가 욕하는 게 이상해요?”

 “아니…….”

 남자가 한숨을 쉬었다.

 “좀 그렇군요.”

 “…….”

 “난, 내 조국이 좀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고 싸우겠다고 결심했는데.”

 “뭐, 저도 미래가 좀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고 싸우러 왔는걸요.”

 리아는 낡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중얼거렸다.

 한국의 경제는, 그리고 남자들을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는 빠르게 발전한 게 사실이었다. 일본의 식민지 시절과 독재정권을 거쳐, 빠르게 민주주의가 꽃피어 나갔다. 다른 나라들이 200년 걸릴 경제적, 정치적 발전을 불과 몇십 년 만에 이루었다는 찬사도 이어졌다.

 하지만 그 남자들은, 자신들의 자유와 평등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자신들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뭔가 크게 빼앗긴 사람들처럼 화를 내고 주먹을 휘두르고 상대를 모욕하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숫자가 가장 많았던 여성들이 입는 타격은 눈에 보이지도 않은 채, 덮였다.

 성소수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인 듯 굴었다.

 그들의 부모들이 30년 전, 여자아이를 임신하면 쓸모없는 계집애 따위 낳아서 뭐하냐며 낙태해버린 결과로 결혼하지 못하게 된 남자들은, 돈을 주고 다른 나라에서 신부를 사들였다. 그리고는 자기가 사들인 노예라도 되는 듯이 험하게 학대했다. 사람들은 결혼이주여성이 낳은 아이들을 피부색이 다르다며 조롱했다.

 오직 그들만의 세계에, 순혈의 한국인 남성이 아닌 자들은 모두 부수적인 존재, 시민의 권리를 갖지 못한 이들이라도 된 것 처럼.

 리아의 어머니는 베트남에서 왔다. 아버지에게 맞아 죽었다. 아버지는 필리핀에 갔다가 여자를 임신시켰고, 양육비를 주지 않자 정부로부터 월급을 차압당했다. 그런 사정을 알고도 결혼해 줄 여자가 없었으니까, 리아의 아버지는 베트남 여자와 결혼을 했다. 말이 결혼이지, 매일매일 때리고 강간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마치 리아의 어머니가, 자신과 결혼해주지 않은 한국 여자라도 되는 것 처럼, 피임하지 않고 섹스했지만 알아서 아이를 지우지도 않은 필리핀 여자라도 되는 것 처럼. 아니, 그녀들이라고 해서 욕을 먹어도 될 리 없다는 것을, 리아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야 겨우 인정할 수 있었다.

 그나마 리아는, 그냥 보기에는 조금 눈이 크고 콧대가 높을 뿐 피부색이 밝았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정말, 마치 여기 있어선 안 되는 존재들처럼 맞았다. 이유없이, 길을 가다가 두들겨 맞았다. 학교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고 배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사귀었고, 나중에 자리가 잡히면 같이 살다고 약속했던 여자친구가, 대학로 한복판, 평범한 소극장의 화장실에서 살해당할 때 까지는.

 여자라서 죽었다고, 플래카드를 들고 나갔다. 하지만 언론은 놀랍게도 그녀가 강간을 당했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다.

 같이, 검은 옷을 입고 리아의 애인을 위해 추모해준 여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어떤 남자들은 머리에 콘돔같은, 정확히는 남자의 성기처럼 생긴 모자를 쓰고 나타나 그들을 조롱하고, 추모의 묵념을 하는 내내 에베베베 하고 혀를 흐느적거렸다.

 모두 죽여버리고 싶었다.

 모두 죽이고 죽어버리고 싶었다.

 타임윙스를 쓰기로 한 건, 그 무렵의 일이었다.


리아의 남편은 일본군에 입대했다. 마을 유지들은 성대한 환송식을 열어주었다. 남편은 그 플래카드들을 떼어 모조리 아궁이에 쑤셔넣었다. 격려금이라고 챙겨 준 돈 몇 푼을, 그는 리아에게 쥐여주었다.

 “이걸로 뭘 하라고요.”

 “당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하시오.”

 “당신은?”

 “군대인데 밥이야 주지 않겠소.”

 이 돈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바로 계산이 나오진 않았지만.

 적어도 그 마음만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리아는 한숨을 폭 쉬었다. 사실은, 처음 여기 올 때 가져왔던 금만 있었어도, 목적하던 일을 이루는 정도가 아니라 독립운동에 돈도 보낼 수 있었을 지 모르는데. 시간을 몇 번을 넘나들면서, 자금을 마련하느라 몇 번 금 시세차를 노려 사고 판 적이 있었다.

 “……원래는, 여기서 쓸 노잣돈 정도는 챙겨 왔었는데.”

 “압니다.”

 “예?”

 “알고 있어요. 로사의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으니까.”

 “……?”

 “로사의 아버님은 망명인사요. 독립운동을 하시느라 만주로 가셨지. 로사의 어머니는….. 여사님께서도 보통 분이 아니셔서, 전날 따님이 그렇게 끌려갔는데도, 쓰러진 당신을 구해 오셨죠. 입고 있는 옷이 이상해서, 그대로 뒀다간 누가 잡아갈 것 같다고 그러셨는데.”

 “아니, 그런데 왜 저는…….”

 “당신이 기억을 잃은 것 같다고, 옷에 있던 금붙이는, 독립 운동에 쓰라고 보내셨다고 하오.”

 남편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오. 내가…… 대신 사죄하겠소.”

 “아니, 잠깐만요.”

 리아는 남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럼 저기, 내가 입고 있던 옷은요?”


남편은 순순히, 리아의 타임윙스를 내주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새파란 살갗같은 그 옷을 입자 남편은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몰라 쩔쩔 매었다. 그러다가 그는 겨우 리아에게 한 마디 했다.

 “미안하오.”

 “뭐가요?”

 “그게, 혼인한 밤에…… 나와는 해로할 생각도 없는 당신에게 그리 하여서.”

 “뭐, 나도 나쁘지 않았으니 됐어요.”

 “당신은…… 여튼 보통 여자는 아니로군요.”

 “당연하죠, 지금부터 백 년 뒤에 태어날 사람인데.”

 리아는 타임윙스 위에 치마를 두르고 저고리를 입으며 중얼거렸다.

 “어떻게든, 내년 8월이 되기 전에 독립군이 한반도…… 조선 반도로 들어와야 해요. 알았죠?”

 “……알았소.”

 남편은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나 시간을 넘었다. 잠깐씩 사랑에 빠진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은 상대가 여자였다. 남자와 잠자리를 한 것은 이번이 네 번째, 남자가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글쎄, 그것도 어쩌면 그가, 역사를 바꿀 수 있을 지 모를 키 퍼슨이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다시 만날 수 있겠소?”

 “다시 만날 거예요.”

 리아는 웃었다.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런…….”

 “시간여행자가 그렇죠 뭐. 혹시 원하는 게 있어요?”

 “그럼…….”

 남자는 조용히 대답했다.

 “다시 만나더라도, 8월 전에 조선으로 진군해야 한다는 말은 해 줄 수 있겠소?”

 “그러죠 뭐. 말하는 데 돈 드는 일도 아닌데.”

 “김구 선생님께서 살해당하실 거라는 말도?”

 “예.”

 “고맙습니다.”

 그가 머리를 숙였다. 마치 기적과 같은, 천상의 존재를 만나기라도 한 듯이.

 리아는 타임윙스를 입고, 시간을 되돌리기 시작했다.

 언제나 늘, 역사를 바꾸기 위해 시간을 넘었다. 그녀가, 수많은 시간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도 마음에서 지울 수 없는 리아의 연인이, 죽지 않고 웃으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위해서.

 하지만 이번만은, 리아는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을 감기로 했다.


반 달 전, 1944년 1월 4일 아침.

 일렁이는 세계의 한복판에서, 도망치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로사!!!!!!”

 리아는 로사를, 자신에게 이름을 빌려주었던 소녀를 향해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이 쪽이에요, 어서!!!!!!”

 큼직한 치마 아래로, 몸에 달라붙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망측해 보일 타임윙스 같은 것을 입고서.

 “내일 낮이면 장 선생이 올 거예요, 그러니까!!!!!!!”

 그는 시간을 넘어, 처음으로 만난 정중한 남자를 위해 손을 내밀었다.

 손에 잡히는, 열 여섯 난 처녀의 가녀린 손목은 따뜻했다. 마음이 설레었다. 이제야 맞아들어가는 무언가가 손바닥 한 가운데에 뜨겁게 느껴졌다. 마치 예전에, 백 년 뒤의 세상에서, 여자친구의 손목을 처음으로 잡았을 때 처럼.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곽재식 종속선언서 (본문삭제)2 2017.10.31
한중SF교류프로젝트 [초청 중국SF단편 ⑤] 우주표 담배 – 텅예 (비공개:전자책 『후빙하시대 연대기 』에 수록)2 2017.10.31
해외 단편 고독한 자들 – 주디스 메릴 2017.10.31
한중SF교류프로젝트 [초청 중국SF단편 ⑥] 탈피 – 자오하이홍 (비공개:전자책 『후빙하시대 연대기 』에 수록)2 2017.10.31
윤여경 2야기 –인류를 단숨에 멸망시킬 가짜 뉴스 생성 방법–2 2017.10.31
해망재 블러디, 블러디 2017.10.31
해망재 불법 개조 가이노이드 성기 절단 사건1 2017.09.30
한중SF교류프로젝트 [초청 중국SF단편 ④] 인류의 여신 G – 천츄판 (비공개:전자책 『후빙하시대 연대기 』에 수록)3 2017.09.30
한중SF교류프로젝트 [초청 중국SF단편 ③] 지하철의 충격 – 한송 (비공개:전자책 『후빙하시대 연대기 』에 수록)3 2017.09.29
jxk160 P... 로부터의 편지2 2017.09.28
곽재식 종말 안내문 (본문삭제)11 2017.09.27
윤여경 이 멋진 셰어하우스를 구하기 위해 나는 두 번이나 죽어야했다 2017.09.23
한중SF교류프로젝트 [초청 중국SF단편 ②] 고래자리를 본 사람 – 탕 페이 (비공개:전자책 『후빙하시대 연대기 』에 수록)5 2017.08.30
곽재식 텔레파시 삼단계 2017.08.29
엄길윤 시간의 공백 2017.08.29
해망재 선녀와 광복군 2017.08.28
해망재 졸업 논문 2017.08.28
한중SF교류프로젝트 [초청 중국SF단편 ①] 기아의 탑 – 판하이톈 (비공개:전자책 『후빙하시대 연대기 』에 수록)6 2017.07.31
이나경 빨간 맛6 2017.07.27
곽재식 루프 해킹6 2017.07.25
Prev 1 ... 4 5 6 7 8 9 10 11 12 13 ... 44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