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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 밤의 끝은 아마도

2014.11.30 23:2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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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밤의 끝은 아마도
김주영 지음, 온우주, 2014년 6월


잠본이 (zambony@hanmail.net http://zambony.egloos.com)



 사람은 혼자서 살아가기 어려운 존재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집단을 형성하여 그 속에서 도움을 주고받으며 스스로 자라나고 남을 자라게 하는 과정이 없이는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타인들과의 ‘만남’은 매우 소중한 것이다. 부모형제나 친척은 물론 친구나 스승, 동료나 이웃, 그 외의 여러 존재들과의 만남은 나를 형성하고 변화시키는 자양분이자 촉매가 된다. 때로는 사람이 아닌 동물, 자연, 다른 사람이 남긴 작품과의 만남 역시 사람과의 만남 못지않게 큰 영향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만남이 항상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며 좀 더 일찍 이루어졌더라면 훨씬 좋은 결과를 낳았을지도 모르는 만남이 너무 늦게 실현되기도 한다. 만남이 있으면 반드시 헤어짐도 뒤따르는 만큼 만남의 기쁨 속에는 헤어짐의 안타까움이 미리 깃들어 있다. 만남은 기억이 되고, 기억은 추억으로 쌓여 우리 모습을 만들고, 그 추억의 바탕 위에서 우리는 또 다시 새로운 만남을 준비한다. 그리하여 삶은 순환하고, 우리는 한 뼘 더 성장한다.

 본서는 PC통신 시절부터 장르와 분량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김주영 작가가 바로 그 ‘만남’을 주제로 삼아 선정한 작품집으로, 현재까지 다양한 매체에 발표해 온 14편의 단편들을 수록하고 있다. 각 작품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물론, 동물과의 만남, 드래건이나 천사 같은 상상의 존재와의 만남, 그리고 시간대를 달리하는 자기 자신의 추억이나 미래와의 만남 등등 다양한 형태의 만남과 그 파급효과를 정성스럽게 그려내고 있다. 수록된 각 작품의 발표 시기와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노래하는 늪 / 2001년 (전자책 『노래하는 늪』 수록)
 오랜만에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골 외갓집에 돌아온 주인공은 낡은 동화책 한 구석에 적혀 있는 낙서를 통해 지나간 추억을 떠올린다. 상상력 풍부한 신비의 친구, 모든 것을 다 아는 현명한 노파, 아이들과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느끼는 광인, 밤마다 아이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살아있는 늪의 소리. 이 모든 것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어린 시절의 아련함.

문이 열린다 / 2007년 1월 26일 (거울웹진 제44호)
 어느 날 갑자기 행방을 감춘 아내를 기다리다가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점점 미쳐가는 한 남자, 어느 날 갑자기 기억을 잃은 채로 갑자기 나타나서 항상 자기가 누구이고 돌아갈 곳이 있기는 한지 궁금하게 여기는 다른 남자. 이들을 연결하는 인연은 무엇일까? 그리고 이들은 과연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불의 춤 / 2009년 (『타로카드 22제: 환상문학웹진 거울 타로카드 단편선』 수록)
 고화산(高火山)에는 불을 다스리는 화희들이 산다. 그들은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봄의 제전에서 불의 춤을 춘 뒤 거기서 생겨나는 불씨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불의 춤을 능숙하게 추기 위해서는 연습과 기량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또 하나의 조건이 있다. 진정한 불의 춤이란 무엇인가를 놓고 3세대의 화희가 각자의 시점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이야기.

사방들은 기다린다 / 2006년
 주인공은 조깅을 하다가 지나치던 고즈넉한 주택가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로부터 아르바이트를 제의받는다. 하지만 아르바이트라고 해도 마치 일곱 난쟁이처럼 느껴지는 기묘한 사람들을 그저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전부. 사방(Savant)이라 불리는 그들은 보통 사람처럼 세상과 소통하지는 못하지만 저마다 한 가지씩 빼어난 재능을 갖고 있는데…

마을로 오는 기차 / 2001년 (전자책 『노래하는 늪』 수록)
 철길 옆에 자리한 어느 외딴 마을. 그곳에는 각자 뭔가 결핍된 사람들이 언젠가 들를 기차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단조로운 일상을 보낸다. 가끔씩 찾아오는 기차에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이 실려 있지만 그 중에는 잘못 배달된 엉뚱한 물건도 끼어 있고 원하는 물건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찾는 것만이 반드시 행복한 것일까.

백 마리째의 양 /1997년 (PC통신 하이텔)
 숙모와 함께 살면서 길고 우울한 장마철을 보내던 주인공은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양을 세기로 한다. 하지만 백 마리째의 양이 울타리를 넘지 않고 갑자기 사라져버린다. 얼마 뒤 주인공은 숙모의 시체 옆에서 흉기를 든 채로 발견된다. 그는 경찰에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도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을 못하는데…

파국破局 / 2013년 10월 1일 (거울웹진 제123호 ‘김주영 특집’)
 천사와 악마가 실존하며, 사람들은 끊임없는 아귀다툼 속에서 고통 받는 세계.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도시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부탁을 받고 3년의 세월을 바쳐 어린 천사를 납치해 온 주인공은 그녀의 흔적을 쫓아 도시로 돌아온다. 하지만 천사를 노리는 자들의 집요한 추적과 여기저기에 스며들어 있는 악마의 기운 때문에 점점 불안감에 빠진다.

이 밤의 끝은 아마도 / 신작
 원래 주인에게 버림받고 거리를 헤매던 견공이 새 주인에게 구원받아 잠깐 동안의 행복을 맛보지만 어느 날 갑자기 새 주인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피해자의 친구에게 맡겨진 견공은 죄책감과 무력감에 시달리며 매일을 보내다가 그 친구를 찾아온 한 남자에게서 살해 당일에 맡았던 죽음의 냄새를 다시 느끼고 경악한다.

어떤 밸런타인데이 / 2005년 2월 26일 (거울웹진 제21호)
 1월이 끝나면 카리나는 바빠진다. 온갖 희한한 재료를 넣어 끓여낸 그녀의 초콜릿은 백발백중의 효험을 자랑하는 마법의 묘약이다. 평소에는 그녀를 마녀라고 멀리하던 사람들도 이때만은 굽실거리며 주문서를 가져온다. 그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봐 온 카리나의 남편은 아내가 어째서 자기에게는 특별한 초콜릿을 만들어주지 않는지 섭섭해 한다.

돌아오는 여름이 다시 여름인 것처럼 / 2004년 5월 28일 (거울웹진 제12호)
 남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 존재가 되어 마치 살아있는 화석처럼 우리 세계 바깥을 떠도는 사람들. 그런 존재로 변한 주인공은 학창시절 친구였던 외계인이 운영하는 특이한 배달사업에 종사하게 된다. 주인공은 신입사원으로 들어온 드래건과 함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일을 가르쳐주는 동안, 자신의 씁쓸한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꿈, 그 너머 / 2003년 12월 26일 (거울웹진 제7호)
 이종족 드리머(Dreamer)와 지구인의 혼혈인 에일라는 약관 18세의 나이에 우주함선 승무원으로 발탁된 천재 소녀. 그녀는 예지몽을 통해 친구들의 여러 가지 슬픈 미래를 보면서도 자기 비밀이 탄로날까봐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못하고 넌지시 암시만 할 뿐이다. 그녀는 어째서 인간은 결말이 뻔할 때에도 그렇게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것일까 의아해한다.

까마득히 먼 데로부터 / 2005년
 세영은 쓸쓸한 방 안에서 눈을 뜨고 지금의 자신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 궁금하게 생각한다. 친구들과 떠들며 등교하던 꿈많은 소녀? 현실에 좌절하여 휴학을 고민하던 대학생? 혹은 반복되는 일상에 권태를 느끼던 30대 직장인? 아니면… 그녀는 상념에서 벗어나 몇 가지 중요한 일을 마친 뒤 까마득히 먼 곳의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포스트잇 / 신작
 문영에게는 비밀이 있다. 사람들의 가슴팍에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있고 성격이나 특징 등 여러 가지 내용이 적혀있는 게 보이는 것이다. 그 포스트잇에 집중하다 보니 급기야는 사람들의 얼굴이 흐릿해져 보이는 부작용까지 일어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포스트잇도 붙어있지 않은 하얀 사막 같은 남자를 만나 묘한 느낌을 받는데…

별들이 빛나는 밤에 / 신작
 평범한 일상에 염증을 느끼면서도 주어진 삶을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는 팬과, 특별한 존재로 추앙받지만 실은 이미지의 감옥에 갇혀 자기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스타. 두 사람은 결코 직접 만나지 않고 인터넷 게시판의 글들을 통해 잠시 스쳐지나갈 뿐이지만 서로 교차하는 그들의 편지 사이에서는 따뜻하면서도 애수에 찬 교감이 은은하게 배어나온다.


 줄거리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판타지, SF, 스릴러, 일상물을 망라하는 다양한 장르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그려지는 만남의 양상도 매우 이상적이고 기분 좋은 만남에서부터 한 번 헤어진 뒤의 안타까운 재회,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상황에서의 만남, 자기 자신과의 만남을 통한 내면의 성찰, 만남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했으나 사실은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는 반전 등 가지각색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어떤 작품은 일반적인 장르소설로 읽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주인공의 마음속에서 펼쳐지는 심상풍경의 변화를 추적하는 심리소설로 재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있어서, 두 번 이상 읽어도 매번 새로운 느낌을 준다. 특히 『노래하는 늪』과 『까마득히 먼 데로부터』는 한 명의 여성이 유년기부터 노년기까지 인생의 여러 단계를 거쳐 가며 변화하는 모습들을 진주 목걸이같이 꿰어내는 성장소설이기도 한데, 전자가 기시감과 반복을 통해 삶의 순환을 표현하는 데 비해 후자는 징검다리로 비유되는 삶의 일방통행식 궤도를 표현하고 있어 흥미롭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하면 이 작품집은 매번 다른 방법으로 맞춰나가며 그때그때 다른 의미를 찾아내는 지그소 퍼즐과도 같다. 만남이라는 키워드 위주로 읽는 것도 좋겠지만, 각 작품이 숨기고 있는 서로 다른 키워드를 찾아내는 것도 재미있고, 발표 시기의 순서대로 작가 해설과 함께 읽어가면서 작가의 필력과 인생관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파악하는 것도 권할 만하다. 앞서 발표된 제1작품집 『보름달 징크스』와 함께 읽는다면 더더욱 풍성한 독서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엮은이의 말에 따르면 온우주 출판사에서는 브랜드 최초의 장편소설로 김주영의 『나호 이야기』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완전한 신작 장편인지 아니면 기존의 연작 단편들을 장편으로 재구성하는 것인지, 그리고 재구성일 경우는 2000년에 시공사에서 펴낸 단행본과 어느 정도로 달라질 것인지는 발표를 기다려봐야 하겠지만 PC통신 시절 이후 지나간 추억으로만 묻혀 있었던 김주영 작가의 또 다른 세계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하겠다. 이 작품집과 더불어 좋은 결과를 거두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참고링크★

□ Redfish Chronicles - 赤魚 김주영, 14년간의 궤적 (거울웹진 제123호)
http://mirror.pe.kr/index.php?mid=webzine6&page=2&document_srl=86391

□ 김주영 특집 인터뷰 (거울웹진 제123호)
http://mirror.pe.kr/index.php?mid=webzine6&listStyle=list&document_srl=86364

□ 이 달의 작가 : 김주영 인터뷰 (온우주출판사 11호 소식지)
http://onujupub.tistory.com/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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