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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암담한 기분이어라;
   선뜻 응하긴 했습니다만, 지금 후회중입니다. ^^; 왜 이 요청을 받아들였을까? 저는 그다지 좋은 독자는 아니라서, 글에서 작가의 함의를 찾아낼 자신도 없을뿐더러, 독자로서 새로운 의미를 던질 능력도 안되는 자입니다. 그런 자가 글을 읽고 감상글을 쓰게 되었으니... 단지 하나 믿는 구석은 “독자는 오독할 권리가 있다”는 경구입니다. 그걸 믿고 사정없이 오독해보죠. ^^ (거기; 돌, 내려두세요; 무겁잖아요... 가만히 보니까 거의 바위 수준이네;;)


   첫 느낌

   [그의 이름은 나호라 한다](이하 [나호])를 처음 집어들면서 들었던 생각은, <고급스럽다>였습니다. 204쪽 분량에 비하면 상당히 센 가격에, 종이 질도 괜찮았고, 무엇보다 ‘시공사’라는 네임벨류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부쩍이나 시공사에서 많은 환상 소설을 출간하고 있는데―――이번에 김상현 님의 [네크로폴리스]도 그러하죠―――그 사장의 전력(前歷)이 어떠한가에 대한 논의는 정치적인 것이니 그에 대해서는 차치하고, 시공사 같은 곳에서 환상 소설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에 참, 고맙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버스에서―――차에서 책을 읽는 편입니다. 시간이 적절치 않은지라―――책을 열었을 때 문득 들었던 감정은, 갑갑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작가의 서두를 읽으면서, 그녀의 글에 대한 방향을 잡을 수 있었고, 혹여 그 방향이 ‘서두가 없다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일 수 있다는 염려를 품게 되었습니다.

   [나호]는 ‘나호’라는 종결자의 이야기였습니다. 의뢰를 받고 죽음을 선물하는 그는, 늘 ‘바이칼’이라는 술집에서 ‘블랙 엔젤’(?!) 세 병을 마시면서, 그에게 “왜 당신은 늘 이 곳에서 세 병입니까”라고 묻는 이들에게 “선대부터 내려오는 일”이라고 얼버무립니다. 그 <나호>의 단편적인 이야기가 주욱 펼쳐집니다. 그 단편적인 이야기를 다 나열하는 것은 그다지 적절하지는 않은 듯 하니, 책에 대한 ‘제’ 이야기를 그냥 펼쳐보겠습니다(물론, 서평이라는 것이, 책을 읽고 싶도록 써야한다는 것을 알지만, 저는 그럴 자신이 없습니다. 물론, 이 책은 읽을 만 합니다. 매력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이야기는 그렇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미숙한 자의 글이라 그렇다는 것 이해하시고, 제대로 소개하지 못하는 제 어설픔 속에서도 행간언을 읽으셨으면 합니다).


   글과 그림

   [나호]는 글과 그림의 만남입니다. 아, 개인적으로 저는 ‘글’에 상당히 집착을 하는 독자입니다. 만화를 봐도 그림을 본다기보다는, 말풍선 안에 든 글만을 읽는 편입니다. 그래서 만화에 대해서 그림이 어떻다 선이 어떻다 등의 말을 들어도 별 감흥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림’보다는 스토리로 승부하는 명랑만화를 좋아했나 봅니다. (삐질;)

  글과 그림의 만남, 결국 제게는 어려운 독서를 예고하는 압박이었습니다. 서두에서 작가가 던진 ‘갈애(渴愛)’라는 메시지도 벅찬데, 게다가 그림은 뭔가 제게 요구하는 듯 했습니다. 게다가, 텍스트를 더더욱 어둡고 암울하게 만드는 그 색채들이라니... 작가의 말처럼, 이 글이 결핍된 것에 대한 갈애―――이 말도 생경했지요. 갈애라는 표현을 보다니...―――라면, 작가의 간절한 애정은 어두운 것인가 봅니다.

   글에는 나호의 후견인 격으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흑표범 페오―――이도 흑색이군요―――가 등장합니다. 페오는, 흑빛 긴 옷을 펄럭이는 킬러 나호와 썩 잘 어울리는 색감을 드러내고 있지요. 그 둘 사이의 색채에서 어두운 빛 우정을 발견한다면 지나친 예단일런지요.

   색채는 쉽게 느낌을 만들어줍니다. 푸른 색과 붉은 색이 던지는 느낌이 다르며, 초록색과 검정색이 풍기는 맛은 또한 다릅니다. 글이라면 여러 줄 써야, 여러 문장과 긴 글을 써야 조금 느낄까 한 글의 뒷배경이, 그림의 강렬한 색채를 통해서 별 여운 없이 ‘꽂히는’ 그 느낌은... 별로 상쾌하지는 않았습니다.

   예단(豫斷)은, 거칠게 말하면, 다수에 의해서 공유되고 나누어지는 생각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결국 스스로 만들 수 없으니, 타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예단은 어찌보면 사회의 문화와 흐름이 부여하는 것이고, 우리는 어두운 빛 검은 색감 아래에서 암울함과 절망감을 안고 들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 검정빛 우정을 그리고자 했다면, 차라리 이미지를 지웠으면 덜 부담스러웠을 것을... 페이지마다 펼쳐지는 암흑빛은 기묘하게 부조화하여 가슴을 짓누르는 것이었습니다.


   끊어지는 느낌, 조각 맞추기의 어려움

   게다가, 204쪽의 분량밖에 안됨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읽기 어려웠던 이유는, 단편적이라는 것도 한몫 단단히 할 것입니다. 세상에... 나호와 페오 말고는 그다지 이어지는 인물이나 이어지는 사건들이 없었습니다. 공간의 틀을 주유하는 페오때문인지, 이 글은 시간과 공간의 틀을 넘나듭니다. 단지, 바이칼과 비에타의 교집합이 존재할 뿐.

   어쨌든 고전적인 읽기에 물들어있는 고루한 독자가 받아들이기에는 복잡하고 다단한 글이었습니다. 나호가 매일같이 찾는 바이칼이라는 술집, 그리고 어렸을 때의 어마어마한 상처를 안고서 살아가는 ‘자유의 날개’의 전사인 비에타. 그들마저도 글 속의 조각으로 존재하는 까닭에, 이야기는 한결같이 이어지지 않고 단편적인 흐름으로 다만 놓여있을 뿐입니다.. 흘러감 없이.

   스토리를 기대하는 독자에게는, 참... 어려운 책이며, 필이 꽂히기를 원하는 독자에게는 시각적인 강렬함이 행복할 수도 있는... 그러나 결국 제게는 암울한 글이었습니다. (흑!)


   이 책의 의의

   그럼에도, 이 책을 그냥 넘길 수 없는 이유는, 이 책이 환상 소설의 본령인 ‘인간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희망을―――거칠게나마―――담았기 때문입니다.

   언뜻 SF 소설 같은 느낌을 주지만―――사실, 저는 SF에 대하여는 거의 문외한인지라, 우주 이야기가 나오고 어두운 색채의 느낌이 나면 모조리 미래겠거니, 그리고 미래는 온통 SF겠거니 하는 못된 선입견이 있습니다―――이 책이 환상 소설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다루고 있는 소재 탓이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로운 인간 나호와 인간을 사랑하는 이계의 생물 페오, 그리고 뭔가를 결핍당하고 살아가는 인간들. 그들 사이에 맺어진 관계가, 비록 암울한 희망이지만, 그렇게나마 ‘갈애(渴愛)’의 모양을 띰으로써 이 글은 완연히 환상인 것입니다.

   환상 소설이란? 얼마 안되는, 거의 유일하게 인간의 본연을 다룰 수 있는 부류가 아닌지요. 어떤 장애물도 걸리적거리지 않고, 어떤 잣대도 통용될 수 없으며, 단지 주어지는 것은 인간과 인간 뿐인 유일한 부류, 환상 소설이기에 이 글은 인간의 본연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환상 소설의 의의에 대해서 여기저기 끄적거린 글들이 많지만, 인용하기에는 버거우니 패스하죠...).

   게다가 ‘암울한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막연한 희망, 혹은 절망이 아닌, 암울하나 확실한 희망... 사실, 막연한 희망을 찾기는 쉽습니다. 살아야하겠고, 살지 않으면 안되기에, 막연한 희망들. 마치 싸구려 결론들을 나열하고 그것뿐인 글들. 그러나, 종결자 나호를 내세운 이 글은 그다지 싸게 끝을 보고 있지는 않습니다.

   첫 편에, 인어의 이야기가 그렇더군요. 한갖 사내들의 관음증을 위하여 급속하게 자라는, 과학 기술의 산물인 인어, 그녀는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줄창 술을 부어대는 나호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를 주목합니다. 그리고 나호는 술잔만을 바라보는데, 그가 바라보는 술잔은 인어를 비추죠. 그리고 나호는 그녀가 보내준 그 시선에 빚―――맞게 읽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빚이라 언급하지는 않지만, 빚으로 받아들여지더군요―――을 느끼고 그녀를 종결시켜줍니다.

   문득 [킬러들의 수다]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종결자인 킬러들. 그들은, 관계가 사라져버린 이 세상에서 ‘살인‘이라는 매개가 되어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지어줍니다. 그들마저 없으면 사람들은 더이상 관계맺음 없이 막연하게 남남이 되어 살아갈 것입니다. 살인으로라도 관계하지 않으면 영원히 관계할 수 없는 세상인 현대, 그 가운데 종결자로서 세상을 엮고 이어주는 ‘나호’는 암울한 희망인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그런 암울함이라도 필요합니다. 이제, 관계 없이 살아가는 인간들에게는, 그런 몸짓이라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호]는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섣부르게 부연하자면, 작가의 검정빛 우정은 실패한 바 큽니다. 그 가장 큰 이유로, 이미 서두에서 작가 ‘다’ 이야기해버리고 있는 것도 이유가 될 것입니다. 작가는, 글로써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표현을 위해서 글을 쓰는 이가, 글을 표현하기 위해서 다시 표현을 하다니요... 서두가 없었다면 글을 몰랐을 것이며, 서두가 있었기에 글읽기가 내내 갑갑했습니다. 마치 정답을 알고 정답을 찾기 위해서 보기를 다 읽는 느낌...


   이 글의 의의 2

   얼마 전, 미하엘 엔데의 [모모]를 읽었습니다. [모모]는 설정이 없는, 몽환적인 환상입니다(‘몽환적 환상’이라는 말은, 개인적인 조어(造語)입니다).

   꿈 같은 이야기이기에, 어느 시대에서도 현실을 비추는... 꿈이란 것은 밤의 것이나 낮을 형상화하는 것이고, 몽환적인 환상은 이(this)세계의 것이나, 저 세계를 비추는 것이라고 정의내리겠습니다.

   [나호]는 바로 [모모] 식의 환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배경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호]는 [모모]와 같이 현재를 비추는, 그리고 시대가 지나도 그 때로서의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 될 것입니다. [나호]는 뚜렷한 시간적인 배경이 없습니다. 읽는 이에 따라서는 다가올 미래의 것으로 느낄 수도 있지만, 그 여지의 폭은 넓습니다. 그런 환상 소설이 우리나라에서는 등장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제 견문이 짧기에 그러한지도 모르겠지만, 김하인 씨의 [즈무와 12세계]를 빼고는 [나호]가 그런 ‘엔데 식(式)’의 환상 소설로써는 처음이더군요.

   틀과 형식에 맞춰져있기에 쓰기는 쉬운 글인 설정 중심의 글을 탈피해서, [나호]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틀의 구속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부유하면서 현실을 비춥니다. 비록 영화적 상상과 겹치기도 하지만―――중간에 나오는 에피소드는 [매트릭스]를 변주한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그러나 그 이야기의 흐름은 신선하고 좋습니다.


   이 글의 의의 3

   하이퍼텍스트 소설에 대한 가능성이 통신 문학의 등장과 함께 제기된 이후로, 그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만’ 존재하는 상황에서, 온라인으로 시도된 [나호]의 하이퍼텍스트 화(化)는 그 시도만으로도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비록 일일이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아직도 오프라인 출판물을 선호하는 경향, 부적응탓에). 지면의 각주로 주어진, 또다른 이야기의 ‘연결’은, 무한한 창작과 변주, 그리고 작가의 ‘뒷이야기에 대한 서술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의미에서, 독자들의 ‘팬픽’의 등장과 함께 통신 문학의 큰 의미를 부여한다고 생각했습니다(그리고 더 이상 생각하지 못하겠습니다... 역시 저는 현재의 빠른 문화에 부적응하는군요;;).


   이야기를 마치며

   제가 보고 들은 것이 적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아. 두 번 읽기는 어려운 책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러나 한 번 읽어볼 책이라는 생각도 가지게 하는 책입니다.

   변명 삼아 이야기하자면, 저는 주제 중심의 독서를 즐기는데, 이 글이 던지는 주제는 주로 이미지로 표현되는 듯해서, 텍스트에 의존한 독서에 의존하는 제게는 어려웠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이 글을 마칠까 합니다. 즐거웠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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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rror 03.09.30 11:12 댓글 수정 삭제
    하리야 헌처크님께서 다듬으신 수정본으로 글이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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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그네 03.10.15 01:03 댓글 수정 삭제
    <독자는 오독할 권리가 있다> 흠. 이영도 씨가 어딘가에 써서 유명해진 듯.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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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리야 04.05.12 18:26 댓글 수정 삭제
    유명한 격언 아닌가요? 예전부터 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