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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러노말 마스터]―――라는, 특이하지만 그다지 편하게 읽을 수 없는 제목을 가진 책이 손에 떨어졌다. [리무] 이후, 정말 오랜만에 받는 국산 환타지 소설 리뷰였지만, 일단 직접 책을 쥐어보자 제목이 그렇게 신경쓰일 수가 없었다. 패러노말 마스터, 패러노말 마스터……. 직장으로 돌아오면서 몇 번이고 되뇌어보았지만, 역시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특이하더라도 차창 밖으로 슬쩍 지나치는 가게 간판 같은 것을 곁에다 두고 보는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주인공 이름을 붙이는 편이 사람들로 하여금 덜 생뚱맞게 책을 집어들도록 하지 않았을까. 카라 아니면 이자드 후드……. 아니면 좀 임팩트 있게 난다도 괜찮을 텐데, 그래 난다였으면 일본어 좀 한다는 어린 아이들도 뭐야 하고 살펴봤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받아온 책을 사적인 사유로 좀처럼 읽지 못하다가, 결국 마감을 코앞에 두고 다 읽지도 못한채, 슬쩍 리뷰를 쓰게 되었다. 이 죗값은 6개월 무지각 출근 기록을 깨뜨리는 것으로 치루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이 글은 어디까지나 [패러노말 마스터]에 대한 리뷰일 뿐이다. 감상이나 비평을 쓰기에는 읽은 분량도 태도도 함량 미달이었다고 스스로 판단 내렸기 때문이다.

   [패러노말 마스터]의 세상도 역시나 중세풍이다. 실제 중세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그림은 여느 중세와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유행처럼 번지는 ‘내 좋을 식대로의 중세’를 그리지는 않고 있으니, 중세라는 사실에 눈을 돌리거나 할 이유는 없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사람 사는 곳을 그리고 있다. 작가의 수준차이―――라는 것은 이런 곳에서 여실하게 드러난다. 여기가 어디고,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어째서 그래야만 하는지―――정말로 이런 기본을 지키는 글을 좀처럼 보기 어려운 이 시대에 감사할 만큼 ‘사람 사는 곳’을 그리고 있다. 생각도 없이 거리에 갑옷 입은 사람과 로브 두른 사람들이 돌아다니게 놔두면 중세틱한 배경이 되리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한번쯤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을 만큼, 작가는 시시각각 새로이 등장하는 모든 곳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또한 그것이 소설인지 설정집인지 모를 만큼 엉망이 된 설정 떡칠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간결한 터치와 간결한 방법에 의해서라는 점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이렇게 기본에 기본을 지키는 소설을 만난다는 것은 또한 기쁜 일이고, 이런 소설을 만난 것이 너무나 기쁘다는 사실 또한 너무나 슬픈 일이기도 하다). ‘정말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만 같은 중세풍의 세상’―――기본을 지킨 [패러노말 마스터]의 세계는 바로 그런 곳이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인물들 또한 살아있다. 지킬과 하이드를 연상시키는 이자드 루이, 주인공답게(?) 다중복잡하고 심란하기 그지없는 카라, 삐끼로 살아가지만 꿈을 갖고있는 헬렌등등. 각각 자신만의 사정과 특색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은 생동감있게 ‘살아간다.’ 이야기 진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도 인물들이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이야기가 인물들을 진행시킨다고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욕심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집착 혹은 애착이라고 해야 할까……. 작가의 모든 것이 투영되는 부분이 바로 인물인데, 그 욕심이 숨김없이 표출되기 시작하면 필자로써는 그 글을 이미 소설이라 봐줄 수도 없다. 다만, 현실에서 불가능하고 현실에서 참아야만 했던 욕구를 글로써 발산하는 행위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잡담란에 곧잘 올라오는 ‘요즘 살기 참 힘들어요’가 소설 속의 인물들이 세상을 내키는대로 휘젓고 다니는 모습으로 바뀌었을 뿐이 아닌가. 다행히도 [패러노말 마스터]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사실 이런 이유는 ‘정말 사람이 살고 있는 듯한 세상’을 창조하는 기본을 지키는 가운데 나오는 부산물일 수도 있겠지만, 사건이 터지고 인물이 영향을 받고 거기서 나름대로 판단하고 움직인다―――는 동선이 자연스레 그려져 있다. 대마왕님이 계시지 않아도, 세계가 멸망의 위협에 시달리지 않아도, 인물들은 자신과 연관된, 혹은 자신이 저질러버린 소소한(?) 일에 죽을만치 휘둘리고, 혼란스러워한다. 그리고 나름대로 한정지어진 자신의 한계 속에서 반응하고, 노력하거나 가끔은 도망친다. 현실 독자들에게는 있을리가 없는, 마법이나 검이라거나 하는 존재들이 있긴 하지만, 남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깟 마법을 좀 쓴다고 해서, 사람들이 하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도리는 없다. 그래서 이야기에 끌려 다니며, 있는 힘껏 살 수 밖에 없다. 인물들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감이 절로 솟는다. 벌어지는 일들에 ‘왜 이게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거야?’라고 묻게 되는 일도 거의 없다. 그런 의문이나 시선을 가지고 읽을 수 있을 만큼 녹녹한 소설이 아니기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작가의 그런 치밀함 때문이지 마치 다이제스트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점이다. 최근 매년 겨울 개봉하고 있는 피터 잭슨 감독의 [반지의 제왕]과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방대한 내용을 3부분으로 쪼개 어떻게든 3시간 안에 우겨 넣고 있는 듯 하달까(영화가 나쁘다는 소리는 아니다. 필자 또한 극장에서 또 보고 또 봤으니까). 작가의 스텝은 기민하고 정확하고 빈틈이 없다. 덧붙이자면, 여유도 없어 보인다.

   이야기가 흘러가는 동안, 작가의 치밀함은 단 한 가지라도 의미 없이 놓아두는 것이 없다. 작게는 소품부터, 의미심장하게는 인물들의 대사 한 마디까지 말이다. 카라의 집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마쳐야 할 일을 마치고, 바로 아버지에게 인사하고 다음 곳으로 여정을 옮긴다. 어느 정도 설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다음 곳에서 또 다음 곳으로 점점 이야기가 옮겨가는 속도에는 짧은 브레이크마저 걸리지 않는다. 거기다 인물들을 하나하나 잡아주려다 보니, 조금 조연이라도 되겠구나 싶으면 그 인생을 짧게 나마 돌아보는 면도 없잖아 있다. 그러다보니 글 진행에 여유가 없다. 언제나 안절부절하는 카라처럼, 이야기 진행은 기민하고 정확하고 빈틈이 없긴 하지만, 가만히 머물러 서있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빠르고 빠르다. 일일히 조연들에게도 합당한 신경과 무게를 덜어주면서도, 이야기를 빠르면서도 빈틈없이 복선까지 깔아가며 진행시키는 작가의 실력에는 찬탄을 바쳐야 마땅하겠지만 말이다. 읽는 중간에 잠깐 물을 한 잔 가지러 간다거나, 담배를 한 대 태우고 올 타이밍을 잡지 못할만큼, 전력으로 질주하는 오래 달리기 같은 글은 어쩐지 그 매력을 더한다기 보다는 조금 깎아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주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란 여왕이 어느 날, 외국 사람들도 참여하는 파티에 나가게 되었다. 여왕은 그 자리에서 춤을 한 곡 추었는데, 그 모습을 본 외국 장교가 옆 사람에게 속삭였다.

   “여왕님은 꼭 전투하듯이 춤을 추시는군요.”

  [패러노말 마스터]를 읽으면서, 어디선가 읽은 저 일화를 떠올린 것은 필자만의 느낌이었을까. 무척이나 익숙한 손으로, 치밀하고 정교하게, 거기다 정성을 다해 쓴 멋진 소설이었지만, 어쩐지 허전했던 것은 너무나도 완성형을 고집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춤에는 절도가 있지만, 그보다 사람이 즐거워야 하는 법이다. 소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흠 잡을데 없이 멋지게 완성된 이 장편 소설에 감히 “헛점을 만들어야 한다” 같은 헛소리를 할 심산은 아니다. 다만 절도 있게 춤을 추는 가운데, 마음에 드는 부분에는 조금 애드립을 넣고, 환호하는 군중들을 향해 윙크를 던져주는 것도, 한 편의 춤을 좀 더 화려하고 돋보이게 해주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패러노말 마스터]에게도 가져본다.

P.S 허접한 리뷰를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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