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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탑
로버트 실버버그, 장선미 옮김, 움직이는책, 1992년 12월


pilza2 (pilza2@gmail.com http://www.pilza2.com)


 2218년, 인류는 인조인간의 노동력과 순간이동 장치인 트랜스매트 덕분에 고도의 문명을 누리며 풍요롭게 살고 있었다.
 인조인간을 최초로 만들고 제조를 독점하여 세계적 갑부가 된 시몬 크럭은 영구동토 위에 거대한 유리탑을 짓고 있다. 목표는 1500m. 이유는 우주에서 날아온 신호에 대한 회답을 보내기 위해서다. 크럭은 그 신호를 지성체가 보낸 메시지라고 확신하고 교류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한편 인조인간들은 크럭 모르게 크럭을 자신들의 창조주이자 구세주로 모시는 종교를 만들어 그를 숭배하고 있다. 지금은 자신들이 노예나 기계처럼 인간을 위해 일을 하고 있으나 언젠가는 크럭신께서 해방시켜 주실 거라고 믿고 있다. 어느 날 인조인간 평등당원이 크럭에게 접근하다 우발적으로 살해되자 인조인간들은 종교적 믿음으로 구원을 기다리자는 쪽과 현실에서 해방운동으로 자유를 쟁취하자는 두 가지 의견으로 나뉘어 충돌하게 되는데……

1. 인간과 인조인간

 이 소설은 인간의 이야기이며 인조인간의 이야기다. 물에서 올라온 물고기가 육지라는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듯이 우주라는 새로운 세상을 동경하는 인간의 이야기다. 또한 인간에게 만들어져 노예처럼 지내던 인조인간이 자아를 깨닫고 자유와 평등을 얻으려는 이야기이다. 또한 신의 구원을 바라는 맹목적인 종교에 빠져 있다가 진실에 눈을 뜬 존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시몬 크럭이며 시몬 크럭의 이야기임을 처음부터 밝히고는 있지만, 읽을수록 그에 못지않게 인조인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함을 알 수 있다. 소설의 화자는 시종일관 어느 한쪽 편을 들지도 않고 한쪽에 치우치지도 않으며 인간과 인조인간의 이야기를 거의 균등한 비중으로 들려준다.
 냉철한 사업가이면서도 우주로의 진출, 외계 지성체와의 만남을 꿈에 그리는 이상주의자 시몬 크럭, 크럭의 아들이지만 인조인간 여성과 사랑에 빠짐을 계기로 인간과 인조인간 사이의 화해 가능성을 지닌 매뉴얼 크럭, 우수한 인조인간으로 크럭의 비서이면서 비밀리에 크럭을 신으로 모시는 종교의 중심적 인물이었으나 점차 인간성에 눈을 뜨게 되는 토르 워치맨. 이들 셋이 가장 중심적 인물이며 누구를 주인공으로 삼아도 좋을 정도로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인물 소개만 보면 매뉴얼을 중심으로 양측의 인간과 인조인간이 서로를 이해하고 화합을 이루는 밝은 줄거리를 떠올리지도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는 못하다. 오해와 사고가 겹쳐지며 눈덩이가 구르듯 점점 더 큰 파국으로 이어지며 비극으로 끝난다.

 다만 창작 시기를 감안해도 그렇지만 인조인간을 무척이나 고전적인 시각과 방식으로 다루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사람보다 신체 능력이 뛰어난 인조인간을 간단히 만들어낸다는 설정도 그렇고, 인조인간의 노동력으로 인간이 부유해진다는 것 역시 경기 침체와 실업률이 중요한 화두가 되는 오늘날에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
 물론 이는 당시 7~80년대 지식의 한계이기도 하고 이제는 대표적인 SF의 클리셰가 된 부분이기도 하기에 작가의 능력을 탓할 순 없다. 로봇이나 인조인간이 사람의 노예가 되어 일한다든지, 복제인간이 원본의 기억까지 복제되어 진짜 행세를 한다든지, 사람과 꼭 닮았지만 흉악한 외계인이 침략한다든지…… 이러한 유치한 설정은 당시 시대에 대한 풍자이며 은유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는 심지어 인조인간마저 능력에 따라 세 등급으로 나뉘어 직업이나 대우가 판이하게 다른데, 이런 부분은 본서가 나온지 40년이 넘게 지났지만 빈부격차와 불평등이 해소될 줄 모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은유다.

2. 23세기의 바벨탑

 SF와 종교 사이의 관계는 이전 [리보위츠를 위한 찬송] 리뷰에서 살펴보았다. 이 작품이 현존하는 종교를 다룬 SF의 대표작이라면 이번에 소개할 [유리탑]은 종교에 대한 알레고리를 다룬 SF 중에서도 대표로 꼽을 만 하다. 사람이 로봇이나 안드로이드와 같은 지적인 유사인간을 만든다면, 그들은 사람을 신으로 숭배할까?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왜, 무슨 목적으로 인간을 받드는 종교를 만들까? 본작은 이에 대한 원인과 과정과 결말까지를 철저하게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권두 해설에서 언급했듯 ‘바벨탑을 쌓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결말이 결국 탑이 무너질 거라는 것도 어렵잖게 예상할 수 있다.
 위에서도 그러더니 여기서도 왜 결말을 밝혀버렸냐는 불만을 품지 않기를 바란다. 이미 소설 권두에 결말은 친절히(?) 다 적혀 있다. 뿐만 아니다. ‘유리탑’이라는 제목을 가진 SF가 어떻게 끝날지는 SF의 ‘프로토콜’을 지닌 독자라면 이미 짐작하고도 남을 거다. 왜 하필 유리인가. 유리는 깨지기 쉬운 존재다. 높고 거대한 탑을 유리로 짓는다는 노골적인 상징성을 생각할 때 우리는 파도가 닿는 해안에 쌓는 모래성과 같은 이미지를 떠올린다. 이 23세기판 바벨탑은 그토록 약하고 위태로운 존재임을 유리라는 소재를 통해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드러내보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 유리탑은 유대 설화의 바벨탑과는 존재 이유도 무너진 이유도 다르다. 바벨탑은 신에 대한 도전이 곧 교만이며 죄악이기에 벌을 받았고 결국 자기들간의 분열로 무너진다.
 그런데 사실 바벨탑에 대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다른 해석도 존재한다. 바벨은 바빌론 제국을 지칭하고 있고 한 언어를 쓴다는 건 제국의 지배를 상징하니 바벨탑이 무너지고 언어가 다양해지며 사람들이 흩어져 살게 된 건 신의 심판이 아니라 제국을 해체하고 문화의 다양성이 생기는 긍정적 행위라고 해석하는 것이다(상세한 내용은 아래의 참고 문서를 보라).
 본작은 오히려 이런 해석을 통해 바벨탑에 비유될 수 있다. 인조인간의 입장에서 신으로 모셨던 크럭은 사실 신이 아니었고 인조인간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그를 버려야만 했다. 즉 크럭과 유리탑이라는 억압의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인조인간이 외부로 퍼져 나가는 것, 이게 바로 그들에겐 심판이 아니라 해방이 되는 것이다.
 크럭의 이상과 막대한 재산을 쏟아부은 상징적 존재 유리탑을 무너뜨린다는 행위로 인조인간은 자신들의 신이었던 크럭, 그리고 자기들을 지배했던 인간들에게 독립선언을 한 것과도 같다. 소설은 여기에서 끝을 맺어서 앞으로 인간과 인조인간이 긴 반목과 투쟁을 벌일 것인지, 아니면 매뉴얼 크럭을 매개체로 화해를 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인조인간들이 종교에서 벗어났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를 얻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점이다. 수동적으로 구원을 바라던 태도에서 능동적인 해방을 추구하는 쪽으로의 변환, 이는 물에서 올라온 물고기가 진화하여 육지라는 새로운 세상을 얻은 인간에 비유할 수 있다.
 따라서 인조인간이 미래의 인간이 되며, 현재의 인간은 곧 우주로 뻗어나가 새로운 진화의 길로 갈 것임을 암시한다. 시몬 크럭은 바로 그런 최초이자 상징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렇게 여긴다면 결말에서 보여준 크럭의 마지막 시도는 성공이나 실패 여부에 관계없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며 희망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다.

3. SF라는 유리탑을 쌓으며

 한 장르가 책을 통해 성장하고 이어지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면 탑을 쌓는 행위에 비유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SF라는 장르는 너무나 얇고 약한 유리로 탑을 쌓는 것과도 같다. 조금만 있으면 무너져서 형체도 찾기 힘들어지고 남은 사람들은 반짝이는 유리 조각을 찾아서 헤매고 다닌다.
 본서는 작품 내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외적인 모습에서도 한국의 SF가 지녔던 위상과 과오를 그대로 드러내주는 하나의 상징물이기도 하다(그런 의미에서도 [리보위츠를 위한 찬송]과 공통점이 느껴진다).

 외적인 부분에 대해 얘기하자면 역시 표지와 번역에는 아쉬운 부분이 많다. 물론 당시 출간된 SF 거의 전부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작품 내 인조인간은 붉은 피부라는 설정이 거듭 나옴에도 인간과 인조인간의 영혼 교류를 표현하는 듯한 표지 그림의 인조인간이 새파란 피부를 하고 있는 걸 보면 그린 사람이나 심지어 발주를 한 편집자조차 작품을 제대로 읽어는 보았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또한 권두에 실린 박상준의 해설은 충실하긴 하지만 작품의 내용을 결말까지 전부 밝히고 있어 막 읽으려는 사람에게 스포일러가 된다는 단점이 있다. 아마도 해설자 자신은 권말에 실릴 거라고 예상하고 쓴 모양인데, 앞에다 실으려면 결말 부분을 지우든가 고칠 필요가 있었다. 이제부터 [유리탑]을 읽을 사람은 반드시 권두 해설은 마지막에 읽기를 바란다.
 본문에 있어서는 여럿이 나누어 번역한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어 고유명사 표기나 인물의 말투가 중간에 확연히 달라지는 등 질 낮은 번역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편집자가 없이 모은 원고를 바로 찍어서 낸 듯한 투박함이 느껴진다.
 전술했듯 당시 SF 대다수가 이랬음이 사실이며 절판되고 희귀본이 된 지금은 열악한 90년대 한국 장르소설 출판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유물이 됨으로서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
 당연히 더 좋은 번역과 표지와 편집으로 새로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이며 이 리뷰가 그 날이 빨리 오는 데에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 참고 문서
바벨탑 이야기 (창세기 11장 1-9절): 심판인가? 축복인가?
http://otstorykorean.wordpress.com/2009/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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